안양20181012b야4장6절(마귀대적)-이 근호
두 번째 시간합시다. 아까 첫째시간에 택배회사 직원이라고 했는데, 그 전달하는 것이 마태복음13장에 보면 그게 말씀이었습니다. 마귀가 인간과 말씀이 연결되는 것을 마귀가 차단시켜요. 죽으라고 그걸 끊는 거예요. “원하는 건 다 줄게. 세상 영광도 주고 건강이고, 자식 잘되는 거 다 줄 테니까 제발 예수님이 이 땅에서 쫓겨났다는 이야기는 하지 말라.” 왜냐하면 하나님이 쫓겨날 리가 있겠냐고 이야기해요.
다시 합니다. “예수님이 인간들에게 밀려서 나갔다는 이야기는 하지 마라. 예수님과 인간은 친하게 지내면 지낼 수 있다고 이야기하라.” 이리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은 기존의 이방의 종교에서 말하는 신하고 똑같이 되어버려요. 인간을 위한 하나님이 되겠지요. 인간을 위한 하나님. 자비하고 어진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인간이 부족한 것을 채워줄 수 있는 분으로서의 좋으신 하나님이 되어버릴 겁니다. 옛날에 순복음 교회도 그렇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이 착하고 착한 나로부터 쫓겨났다는 이야기는 제발 좀 하지 마라 이리 되는 겁니다.” 이건 개인 개인이 살던 데로 살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계속 살아남겠다는 것을 우기는 겁니다. 히브리서2장15절에 보면,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이리 되어있어요.
마귀가 뭐냐 하면, 혈육을 근거로 잡고 인간들을 협박해왔다는 겁니다. “그러면 니 육이 죽어!” 이런 식으로 협박해 온 거에요. 그런데 그 협박에 누가 끼어들었느냐 하면 예수님이 끼어들었거든요. 예수님이 끼어 들어서 맞아 죽었어요. 맞아 죽었지만 사흘 만에 부활했잖아요. 지금 살아계시잖아요. 우리와 함께 있다 말이죠. 그걸 악마는 싫어하는 거예요.
“꼭 죽어서 살 필요 없다. 니가 안 죽고 유지되는 게 낫지 아니 하냐”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고집을 부리는 겁니다. 그런 소리를 어디서 듣느냐 하면 바로 안 믿는 사람들에게 말을 들어보면 전부 다 그 이야기에요. 될 수 있는 대로 오래 살자. 안 다치고. 불행 없이. 그걸 저는 사자성어로 광산김씨라고 이야기하는데. 광산김씨 왜 좋아하느냐 하면 말 한마디 행동 하나 하나가 다 마귀적이에요. 마귀적인데 다른 사람이 들으면 너무나 평범해요. 우리 살아가는 거와 똑같아요.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세상의 마귀를 우이 저렇게 적나라하게 잘 묘사했는지 행동 하나, 사고방식 하나, 전부다 마귀적입니다.
요번에 수요일날 프로그램은 지 아들 요가 선생님 좋아해가지고 예쁜 선생님 찾아가서 또 잘 뵈려고 할 때 아버지가 광산김씨가 끼어 들어가지고 우리 며느리 되게 되면 제사도 포기하겠다. 이런 식으로 나오지요. 그러니까 우리 집사람이 된다면 내 자식 행복하다면 내가 아버지로서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 얼마나 일상에서 많이 만날 수 있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히브리서2장에서는 혈육이에요. 혈육, 내 집안, 내 족보, 우리 가문, 내 가정, 내 육신의 출처, 육의 출처, 여기에 대한 집착 그게 나에 대한 집착, 나 자신, 그게 바로 악마에요. 그런 식으로 악마를 못 이겨요. 악마를 못 이긴다고요.
그러면 악마를 이기는 방법을 첫째시간에 했는데 그걸 요번에는 칠판 색깔을 바꿔서 해보겠습니다. 백성개념이라 했지요. 백성개념은 거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개인 개인개념이 아니고 뭐냐 하면 장소개념이 나와요. 장소 개념. 장소개념이 뭐냐 하면 바로 예수 안이에요. 이게 예수 안입니다. 예수 안.
사도바울의 편지에서 신학박사 아니라 누구라도 어려운 대목이 뭐냐 하면 예수 안이 어디냐 하는 거예요. 왜 예수 안을 무시를 못하느냐 하면 의로워도 예수 안, 구원도 예수 안, 그 예수 안을 다른 말로 하면 갈라디아서6장에서는 십자가 안이라고 되어있고요, 또 다른데 가면 이걸 가지고 요한복음14장 같으면 성령 안이라 되어있어요. 성령 안, 십자가 안, 예수 안, 다 같은 이야기입니다.
특히 ‘십자가 안’ 하는 것은 이것은 더더구나 어려운 이야기지요. 제가 설교시간에 그런 이야기했지만, 사도바울의 개념은 성령 안에 있는 사람만 알아듣는 개념인데, 그 개념을 세상 적으로 확장시켰다는 이야기를 했거든요. 십자가 안이라는 하는 것은 십자가는 사건이다 말이죠. 그러니 이 말이 얼마나 어려울까요. 사건 안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입니까. 왜냐하면 사건은 바람 같아요. 한 번 일으켰다 하면 보면 지나간 거예요. 차가 사람을 치었다. 결과만 남지만, 사람 친 그 순간은 그 순간뿐입니다. 다시없어져요. 그걸 억지로 하는 게 현장검증이라 하는 거잖아요. 현장검증은 인형가지고 하고 어설프지요. 그 실감 안 나지요.
십자가 안이라 하는 것은 사건 안임에도 불구하고 십자가 안에 있을 수가 있다는 이것이 우리한테는 정말 터무니없이 들리고 희한한 일이지요. 이 전체가 결국 뭐냐 하면 ‘불가능성’이에요.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와서 목사가 시킨 대로 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이건 전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교회 가서 시킨 대로 해봐야 백성이 되는 게 아니고 개인이 더욱 더 개인에게 응축이 되고 개인에게 집착을 할 뿐이지요. 나중에 골치 아파요. 그동안 구원받는다고 공들이고 투자한 것이 한 방에 다 날아갈 수가 있을 때, 그 때 나 어떡하지? 내가 나한테 신주단지 모시듯이 나한테 충성을 다했는데 나한테 투자와 헌신을 다했는데 그 내가 지금에 와서 망신살 당해버리면 그 마음, 그 투자한 거 어디서 찾지? 라고 또 염려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7년전, 7년후 그런 이상한 해석하는 거 있지요. 그 모든 해석이 뭐냐 하면 백성을 살리는 장소가 아니고 그 모든 것은 나를 살리기 위한 장소를 찾으려고 하는 겁니다. 마지막 때 핵폭탄 일어나면 벙크 만든 장소가 나를 살리기 위한 장소에요. 나 또는 내 가족, 또는 내 교회 하여튼 나와 관련된 장소로 가는 겁니다. 백성이 아니고.
백성의 장소개념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나부터 출발하고 나에서 백성으로 갈 때는 여기서 죽어줘야 돼요. 죽어줘야 되는데 그 죽는 방법이 뭐냐, 자살이나 넥타이 번개탄 그 방법이 아니고 뭐냐 하면 어린양입니다. 어린양의 피를 구약에서 모세는 뿌리게 되어있어요. 백성들 머리위에 양푼에 담아 머리위에 확 뿌린다고요. 피를 뿌리는 것은 유월절 사건의 반복입니다. 유월절 사건에서 문지방과 문설주에다가 피를 발랐잖아요. 그 피가 한 때의 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계속 가는 겁니다. 그 피가 뭘 만드느냐 하면 공간을 마련해요. 장소를 마련합니다. 피 있고 백성이 있으면 그 다음에 장소가 만들어져요. 그 장소가 무슨 장소냐 하면 이게 만남의 장소입니다.
악마가 노리는 것은 하늘과 땅이 만나는 그 장소를 없애버리는 거예요. 구원이 아닙니다. 우리는 장소에요. 우리는 움직이는 장소지 내 구원이 아니에요. 주께서 만들어내신 주님이 백성을 만나는 장소, 이걸 성전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움직이는 성전이에요.
성전이기 때문에 무슨 사건이 일어나야 하면 십자가 사건이 그 안에서 반복해서 일어나야 됩니다. 십자가 사건이라 하는 것은 쉬운 말로 하면 머리를 끄적 끄적 긁는 거예요. 참, 나 죽었잖아. 남편이 잔소리한다. 왕 왕 개 짖어댄다. 내 개는 뭐 괜찮은 실없는 개인 줄 아나. 같이 짖어대고, 애는 울고 엄마, 아빠 싸우지 마. 싸우고 있다. 가만히 두고 보니까 이상하다. 마귀가 짖는데 내가 왜 같이 짖었지. 머리를 긁적, 긁적 긁는 게 내 위신과 체면을 살리기 위한 장소가 아니다. 나를 위한 장소가 아니다 말이죠. 나를 위한 장소는 하나님이 만나주지를 않아요. 이걸 전부 다 한꺼번에 다 통합해서 이야기한다면 하나님은 언약을 통해서 만난다. 이리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통해서 만난다.
그 언약을 통해서 만나는 그 실례가 있습니까?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제가 부상강의 때 한 것을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부산강의에서 이런 이야기했거든요. 아브라함이 있었다. 아브람은 아버지 데라에서 나왔어요. 아브라함은 아버지가 없어요.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아버지가 아니고 이삭에서 나왔어요. 이삭에서.
아브람 같으면 혈육이기 때문에 과거를 거쳐서 현재에서 미래로 나아갑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삭은 뭐가 없느냐 하면 이게 없음을 보여주기 위한 있음이 돼요. 참, 말을 어렵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 없는 존재. “없었어” 말하기 위해서. “있네!” 라고 하는 그게 이삭이에요.
바로 이삭의 본질을 아브람이 알고 있는지를 시험하기 위해서 있는 이삭을 없음으로 니 손으로 없음으로 없앨 수 있는가를 시험한 것이 바로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죽이는 겁니다. 없다는 말은 제가 아까 했던 뭐냐 하면 불가능성이지요. 있음에서 없음으로 못가요. 죽어도 못가요. 자살해도 안돼요. 있음은 계속 있음이에요.
나중에 예수님이 심판하시면요, 악한 자도 지옥 가는 사람도 부활돼요. 있음은 계속 있음이에요. 존재는 계속 있음이라고요. 있음은 그냥 있음이 끝이에요. 거기서 어떤 사건이라는 것. 하나님이 원하는 사건은 유발할 수 없습니다. 사건은 없음에서 오신 분이 있음을 다룰 때 그 때 비로소 십자가사건이 일어나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아들 바치는 것은 아버지 이름으로 십자가 사건을 지금 유발하는 거예요. 죽었는데 옆에 수풀에 있는 준비된 여호와이레입니다. 준비된 그 분 때문에 죽은 아들이 죽었는데 다시 살아났잖아요. 이 땅에서의 구원은 뭐냐, 일단 죽어야 돼요. 죽고 난 뒤에 살아나야 그게 성도입니다. 그게 바로 성령이 오게 되면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그 말이다 말이죠.
죽은 놈이기 때문에, 죽은 존재기 때문에 죽은 놈에게 잔소리했을 때 죽은 티를 내야지 안 죽은 티를 내게 되면 부부싸움 일어납니다. 참, 말은 쉽다마는 참 이건 어렵다. 누가 욕하게 되면 우리는 갑작스럽게 반발을 일으키지요. 내가 주일에 했잖아요. 개한테 돌 던지면 확 달려든다고. 우리가 아무리 복음 안다 죽었다 하지만 개 같아. 조금만 치면 확 달려들어요. 5를 주면 10으로 되갚아줄 정도로 우리는 복수심으로 강렬한 사람입니다. 한 성질들 다하고 있어요. 한 성질 하거든요.
그런데 한 성질을 우리가 그냥 한 성질을 죽이라 하면 니 성질을 죽이라 하면 우리는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죽어도 나이 60, 80돼도 곧 돌아가도 성질 안 죽어요. 봤잖아요. 제가. 요양병원에 가보세요. 성질 안 죽습니다. 그런데 이걸 역으로 생각해 보세요. 그 성질 난 것도 주께서 사건을 일으키기 위한 재료라고 생각해 보세요.
너무 사람이 점잖고 참아야 하느니라. 여자의 이름으로 참아야 하느니라. 은장도해서 허벅지를 이리 사는 게 아니고, 욱! 왁! 있는 대로 나오지만 돌이켜보면 이게 주께서 뭐 때문에 돌아가셨느냐를 새록 새록 알리기 위한 사건 형성에 있어 필요한 조치를 안 믿는 사람을 통해서 약 올리게 만드는 거예요. 불신자를 통해서 바짝 독이 오르게 만들어요.
독이 오니까 아~ 은혜 받았고 이제는 복음 알고 성경공부 했으니까 참아야 한다. 내가 언제 참아야 한다고 한 적도 없는데 본인이 알아서 ‘아니야, 성도는 참아야 하는데. 점잖아야 하는데.’ 이렇게 하다가 아이구 점잖고 뭐고 도저히 못 참겠다. 나올 때 내가 점잖아서 십자가 사건 되는 게 아니에요. 불가능성이에요. 내가 십자가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없어요.
택배기사가 택배 할 물건을 지가 집에서 가내공업처럼 만들면 안돼요. 주께서 주실 거예요. 니는 아무것도 아니다. 니 요것만 운반하면 되지 니 나름대로의 가치와 의미는 챙기지 마라. 나 니 직원으로 뽑을 때 니 잘남을 챙기라고 뽑은 게 아니다. 요 물건 제대로 배달사고 나지 않고 고대로 그냥 전하라고 너를 뽑았다. 하는 그것을 알아요. 알지만, 내일되면 또 모른다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매일같이 사마리아 여인의 우물처럼 늘 사건이 터져야 돼요. 아침에 눈뜨고 기다리세요. 욱하는 사건, 성질나는 사건이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주께서 살아계시니까.
아브라함, 이삭, 야곱 이제 아시겠지요. 없음에서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럼 다시 이야기해봅시다. 자, 개인에서 백성이 될 때 나중에 백성에 들어가 보니까 백성이 있는데, 개인의 입장에서는 이 백성은 뭐가 되느냐 하면 백성이 안 되고 타인이 돼요. 남. 어렵게 말씀드려서 나에게 남이 있다는 말은 내가 나를 적극적으로 그야말로 목숨 걸고 지켜야 된다는 야심을 더욱 돈독하게 만들어요. 혼자 집에 있을 때는 옷을 아무거나 입어도 되지만, 딩동~하고 누가 오게 되면 옷을 하나 뭐 걸쳐야 되지 않습니까. 남이 있다는 것은 나에 대한 의식을 더욱 고취시키는 겁니다.
“뭐~ 사람 사는 게 이렇지요. 뭐 있어요.” 다 그렇다 말이죠. 예를 들어서 남편하고, 제가 지금 아주 나름대로의 심도 있게 공부하고 있어요. 아가에 대해서. 진짜 아가에 대해서 할 말이 많아요. 제가 지금 공부한 바에 의하면 엄청 많은데. 남편하고 아내 있을 때, 미리 조금만 이야기합니다. 남편과 아내는 절대로 하나가 아닙니다. 어떤 경우라도 인간은 남하고 하나가 될 수 없어요. 이걸 하나라고 함으로서 하나 될 수 없음을 더욱 절실하게 느끼게 만드는 기회를 여러분 부여받은 거예요.
‘야~~ 하나가 아니구나!’ 하나라고 믿었던 내가 바보다. 믿었기 때문에 기대할 게 많아지잖아요. 기대할 게 많고 의지하고 싶고, 의지한다는 말은 쉽게 말해서 이용하고 싶은 거거든요. 시집이 잘살아보세요. 결혼 잘했다는 생각이 들지요. 그런데 시집이 시누이 일 생기고, 시동생 놀음하다 잃고, 시누이 밑에 동생 음주운전하다 걸리고 보상금 있고, 이건 내가 잘못했구나. 사람을 잘못 봤구나. 거기다가 잔소리했더니 잔소리한다고 폭행 또는 폭언, 폭행의 자세 취하고. 이 모든 것이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느냐 하면 결혼했으니까 둘이 하나라고 일방적으로 지가 철딱서니 없이 생각한 거예요.
하나라고 생각하니까 기대가 너무 큰 거예요. 그런데 그 하나가 각자 딴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남편은 남편대로 하나라고 생각하고, 이쪽은 이쪽대로 하나라고 생각해가지고 그 하나에 걸맞게 했는가를 늘 감시를 하게 되고 측정하게 되고 검색에 나서게 되고 이걸 수치를 맞춰보는 거예요. 하나 된 꼬라지 보고. 실망감이 드니까 괜히 자기가 잘못 생각해 놓고 그 탓을 하나 될 수 없는 남 탓으로 돌리는 거예요. 니 때문에 내 인생 조저 났다. 서로가 그러는 거예요. 이건 지금 몰라도 한참 모르는 거예요. 양쪽 다.
주님께서 사랑해가지고 만나게 하신 것은 이렇게 이런 오해를 통해서 십자가사건을 유발하기 위해서 그런 겁니다. 불가능이거든요. 불가능을 주님께서 가정에 개입해가지고 성도될 수 없는 사람을 성도되게 하기 위해서 그러한 일상의 결혼과 이런 것들을 사항을 주께서는 아주 협력하여 선을 이루어서 만드신 거예요.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은 부족함이 없어요. 그런데 우리가 그걸 몰라요. 매일 하나님께 요게 다입니까? 에그 쪼게. 매일 불평 불만 한다는 그것은 이미 기대가 너무 많아서 그래요. 자기 본자리를 찾지 못하고 너무 기대가 많아서 그렇습니다. 지금 어려운 대목하고 있습니다. 뭐냐 하면 백성에서 뭘 뽑아내느냐 하면 장소 뽑아내는 거예요. 이건 어려워요. 이 장소는 있는 장소가 아니고 없는 장소입니다. 없는 장소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실은 속은 거예요. 뭐라고 했느냐 하면 약속의 땅이라 한 거예요. 약속의 땅. 분명히 했지요.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의 땅에 간다는 거예요. 그들은 약속의 땅이 요기서 바로 옆에 있는 줄 알았어요. 속은 거예요. 약속의 땅인데 땅은 맞아요. 그게 광야입니다. 이게 뭐예요? 그게 광야인데 그냥 있음이 아니에요. 광야는 노림수가 있어요. 뭐냐 하면 사람을 죽여요. 사람을 죽이는 곳이에요. 물론 노골적으로 광야에서 불 뱀 나와서 죽은 적 있지만, 그게 아니고 집단적으로 죽여요. 어떤 보통 사람이 100명이 있다면, 살 사람 따로 있고 죽을 사람 따로 있거든요. 김 병만처럼 장거리에서 살아남을 사람 같으면 몇 명 살 것이고, 능력 없는 사람은, 몸이 약한 사람은 일찍 죽고 그러는데 이게 아니고 광야에 들어선 모든 이스라엘은 어느 누구 하나 예외 없이 다 죽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애굽에서 살던 그 방식이 모세는 빼고, 인간이 나는 살았다, 에 그동안 결속되어 있던 사는 방식이었거든요.
애굽에서는 농사 지었잖아요. 그것도 애굽에서 제일 좋은 땅을 분양받았어요. 요셉덕분이죠. 요셉덕분에 제일 좋은 땅을 분양 받았다고요. 다음 수요일날 땅과 풍년에 대해서 제가 언급할 거예요. 지난 수요일은 요셉의 꿈에 대해서 제가 해석했잖아요. 다음에는 대책안을 이야기할 건데. 땅이 있다. 그 자체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땅은 있다=나는 살았다’입니다. 이게 창세기3장에서 아담이 살던 방식이에요. 토지가 있으면 살 수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땅이 나를 죽일 수 있다는 땅으로 절대로 이해 못해요. 여러분 실력이 있으니까 어렵게 나가보겠습니다.
정리해 보면, 땅은 우리를 살 수 있다 지요. 그런데 한 가지 더 이야기했지요. 죽을 수 있다 했습니다. 땅은 죽은 자를 묻는 기능도 있다. 죽었다는 뭐냐 하면 땅에서 하나님께로 호소가 되어버려요. 땅에서 흘린 죄 값이 땅에 묻히면 이 땅은 하늘에 호소를 해가지고 하늘에서 이 살고자 하는 인간을 죽여 버립니다. 이게 창세기4장에 나오는 가인과 아벨이야기에요.
땅이 죽은 게 아니에요. 땅이 살아있어요. 땅이 살아있어서 땅은 CCTV입니다. 그걸 예레미야에서는 뭐냐 땅에 언약이 살아있다. 이리 이야기하지요. 언약이 살아있다. 하나님의 언약이 땅에 살아있기 때문에 파도가 쳐도 뭍에 까지 올라오지 않는다. 이리 되어있어요. 시편도 그렇고. 해운대나 가까운 인천 송도에 가면 보면 알잖아요. 땅은 땅이고, 여기까지는 바다고 땅인데, 만약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면 인도네시아 이천명 죽는 겁니다. 갑자기 밀려왔으니까.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지진을 가지고 뭐냐 하면 땅은 이제는 살 곳이 못 됨을 확실하게 확정되었다는 표시로 일곱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으로 이 땅에 지진이 일어나고 땅이 갈라져버려요.
땅에서 불이 나고, 땅에서 사람이 아프고 멸망하는 거예요. 땅이 살 곳이 못돼요. 전에는 땅에서는 건강하고 이리했는데 땅이 살 곳이 못됩니다. 옛날에는 땅이 없는 사람이 힘들었어요. 이제는 땅에 있는 사람을 이제는 저주하는 도구로서 수단으로서 사용하는 겁니다. 땅이 곧 지옥이에요. 여기서 가을야구할 거예요. 앞으로. 여자들 가을 야구 잘 모르지요. 가을 야구합니다. 미국부터 한국에. 롯데, 기아 마지막 가려고 애를 쓰잖아요. 남자들 보면 매일 야구이야기에요. 가을 야구하고 세일합니다. 불판위에서 지금 세일하고 있고 야구하고 있어요. 남북회담하고 있고.
사도바울 같으면요, 그리 봤을 거예요. 그리 보는 겁니다. 너희는 이미 죽었고 우리의 이 생명은 어디 있다? 하늘에 있다고. 그러니 보세요. 마귀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는 말이 사도바울이 내뱉는 그 말 하나 하나에 전부 다 십자가 사건을 유발시키는 엑기스가 들어있기 때문에 마귀는 복음의 광채를 못 들리도록 그렇게 온 노력을 다하고 있는 겁니다.
“교회에 부흥하면 되지 뭘 더 원해! 복 받고 건강하고 잘 먹고 잘살고 돈 벌고 그러면 됐어. 그만 딴 소리 하지 마! 하나님께 은혜 받은 거야.” 맨날 이런 쪽으로 몰아간다니까요. 그 자체가 점점 길이 멀어지는 걸 모르고. 땅을 포기 안하게 되는 것이 문제에요. 후딱 떠날 생각하면 되거든요. 그저 민기적 민기적 안 떠나려고 미련 갖고 복수하고 갈 랍니다. 복수할 거 없어요. 그냥 떠나면 돼요. 복수는 주께서 알아서 할 거예요.
내가 손 좀 보고 갈 랍니다. 뭘 손볼게 있다고. 니나 잘하세요. 남 손 보지 말고. 광야는 죽는 곳이에요. 애굽에서 살 때는 씨 뿌리고 거두어서 살았습니다. 그걸 전체 허용하지 않는 동네가 광야입니다. 죽으라는 이야기에요. 물 없어요. 물이 왜 있어요. 물이 있을 때 있을 거 아니냐. 물이 없을 때를 골라서 갔어요. 구름기둥과 유황불이. 불 없는 곳으로 골라가요. 물 없는 곳으로. 아~ 죽으라는 이야기에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 게 뭐냐, 같이 죽자는 이야기에요. 일가친척 다 버리고. 자식들 다 생각하지 말고. 다음 주에 설교할 거예요. 누가 내 모친이며, 누가 내 자식들이냐!
다음 주 제목이 ‘신앙의 가족’이에요. 신앙의 가족은 없어요. 없는데서 만들어낼 때 있는 거예요. 같이 가족 전도해가지고 손자, 조카 다 왔다고 그게 신앙가족 아닙니다. 찬송가에 그런 게 있데요. 고마워라 임마누엘 예수만 섬기는 우리 집. 복되고 즐거운 하루 하루. 세상에 불가능을 한꺼번에 다 줄 수가 있겠어요. 혜택을 줘도 너무 많이 줬다. 어떻게 한 번 일어나기 어려운 불가능을 4식구 다 일어나고. 정말 복된 가정이네요.
부부라도 마찬가지고 이 세상에 있는 것은 어떤 자식 부모라도 하나가 안 됩니다. 혼자밖에 없어요. 그래서 자식도 키우면 대화가 안 되는 겁니다. 대화가 안 되고요, 대화 안 되는데 또 부모는 옛날에 자식들 말 잘들을 때 해가지고 억지를 부리게 되어있어요. 나이 들면. 내가 니 키웠는데 이럴 수 있느냐. 내가 대준 니 공낙금 다 기어내라. 아파트 사 준거 다 내라. 안 내놓으면 재판 걸어가지고. 부모가 자식에게 재판 걸었어요.
어릴 때 아버지가 이혼하면서 자식보고 부양비 준다고 하고 안 주고 어릴 때 애들 아내에게 맡기고 자기는 지 재미 차렸어요. 부양비 한 푼도 안 주고 나중에 나이 들어 늙어가지고 사기 당해가지고 돈 다 날아간 뒤에는 재판 걸어가지고 자기 자식보고 월 100만원씩 내라고 재판 걸었어요. 인간이 자기밖에 몰라요. 아버지도 엄마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그 정도는 알아야 돼요. 아~ 인간은 내가 좋아서 해주는 건 좋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떤 기대나 보상은 일체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내가 해주면 해줄수록 그 자식은 나 때문에 더 망쳐요. 아버지는 의례히 해주고 엄마는 아 키워도 안 아픈 줄 알고. 지 아 키우면 아프지만, 엄마는 안 아픈 줄 알고. 인간은 자기밖에 몰라요. 백날 해줘야 자기밖에 모릅니다.
그런데 자기밖에 몰라도 나는 해주고 싶은데 어떻게 하느냐, 그 때는 그냥 해주세요. 그냥 오리를 가달라 하면 10리를 가주고 속옷은 주되 기대는 하지 마세요. 내가 미쳤지 하고 가주세요.
광야라는 곳이 그냥 죽일 것 같으면 진작 죽었지요. 죽는데 이 죽음이 삶의 기초로서 죽어요. 죽이는데 하나님이 함께해서 죽인다는 점에서 이 죽음이 무슨 절차에 포함되느냐 하면 영원한 삶의 절차에 개시점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광야에 있는 것이 복인 줄 몰라요. 광야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원망이 나와요. 원망. 안 나올 수 있습니까? 뭐 점잖다고요? 그럼 주님께서 더 어려운데 가 봐요. “이래도 아직까지 점잖 빨래.” “그래도 저는 점잖습니다.” “그럼 이래도?” 점잖이 어디 있어요.
나오는 건 악 밖에 안 나와요. 진작 나와야지. “그래, 그게 악이야. 원래 너 그래. 니가 악마에 속했기 때문에 그건 니 본 모습이야. 원래 그게 니 자리야. 니는 죄인이야.” 라는 것을 광야를 통해서 이걸 유발시킵니다. 광야를 통해서. 유발시키는데. 여러분이 광야를 쉬우니까 잘 아시겠지요. 물 없는 곳으로 갔지요.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요새 말하면 성령이 인도하는 대로 물이 없어요. 당연히 원망 나올 수밖에 없지요. 당연한 거예요. 원망에서 그 다음에 물이 나왔다 말이죠. 물이 나왔거든요. 이 물이 인간이 찾는 그 물이 아닙니다.
물이 있어버리면 소유대상이 되어버리잖아요. 전에 물을 소유하듯이. 이 중간 사건에서 십자가사건이 나옵니다. 이게 고린도전서에 나와요. 고린도전서10장3절,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다 신령한 식물을 먹으면 다 신령한 음료를 마셨지요. 신령한 음료지요. 신령한 음식물이지요. 그리고 이 음식물은 요한복음6장에서는 내가 산 떡이라 했어요. 내 살과 내 피가, 너희들은 만나를 원하는데 내가 하나님의 생명의 떡이다. 내가 만나다 했어요. 그것도 하늘에서 온 내가 만나다. 했거든요.
뭐냐 하면 십자가사건이 내포된 물, 그냥 물이 아니고 성분조사해보면 둘 다 H2O지만, 이 물이 십자가 사건이 포함된 물이에요. 주님의 아픔이 포함된 물, 주님의 희생이 포함된 물, 그런데 그 희생은 대상이 뭐냐 하면 원망하는 자에 대해서 원망해서 하나님께 대드는 원수를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자기희생이 포함된 물, 양식 이걸 광야를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아침에 하루세끼 주신 것도 하나님 맞아요. 맞습니다만, 세끼 먹는다고 천당 가는 건 아니에요. 세끼오기까지 우리는 십자가 사건 안에 있음을 확인하라고 우리에게 세끼를 준겁니다. 성도가 먹는 이 하루 세끼는 불신자가 먹는 하루 세끼하고 다르다는 말이죠. 성도가 보는 TV하고 불신자가 보는 TV가 달라요. 성도가 보는 광산김씨 이야기하고 불신자가 보는 광산김씨는 달라요. 성도가 보면 마귀에요. 마귀인데 재미있어요. 왜? 내가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에. 내 위주로 살고 있기 때문에.
내가 불편하면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편하면 불평하고, “에게게 이게 은혜입니까? 이게 저주지.”하면서 입에서 불평이 쏟아지는 그것을 대신 지금 광산김씨에서 다 보여주는 거예요. 광산김씨 안보는 사람은 불만이 많아요. 나 안 보고 지나가려고 하는데 그만 합시다. 다른 프로 놔두고 왜 광산김씨 강조합니까? 이리 하는데 광산김씨는 거의 연출을 한 게 아니고 인간 본성이 그대로 나와요. 70넘은 아저씨가.
세상에 우리가 사는 모습을 그대로 다 보여준다고요. 대사를 적어주는 게 아니에요. 자기 아내 백씨부인이 대게를 사왔는데 자식 둘이 있는데 40, 38살 노총각 아들이 있는데, 딱 보더니만 광산김씨가 대게! 그래? 아무 소리 안하고 부인하고 물어보지도 않고 광산김씨 형제들 다 불러가지고 대게 다 먹어버렸어요. 이게 왜 그러느냐 하면 남자의 허풍입니다. 남자의 허풍이에요.
자기 집안이라는 타인에게 나라는 이 가정이 우리 집안에게 얼마나 다복하고 아버지를 아버지답게 요즘 세대에 이렇게 높여주는 우리 가정이 얼마나 대단한 가정이냐를 과시하기 위해서 영덕대게를 사용한 거예요. 그걸 다 먹은 거예요. 그건 남자의 허풍이거든요. 그걸 보통은 요새는 감추잖아요. 그런데 그걸 노골화시켰다는 것이 얼마나 고맙다! 광산김씨야.
이게 남자들이요, 자기 딴에는 이렇게 허풍을 하는데, 꼭 집안 대소사 있을 때는 꼭 남자들이 앉아가지고 허풍 떨고 있습니다. 제사상 앞에서. 제사 지내는 것이 대단한 벼슬을 한 것처럼. 그걸 그대로 다 보여주잖아요. 그러면 여자들은 같잖지요. 끝나고 한 번 보자. 끝나고 롯데백화점에서 옷 하나 사버린다. 세일하니까 사버린다. 이게 보복이에요.
그럼 그 보복하는 여자는 또 뭐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원망의 사건을 유발시키는 거예요. 남자가 내 뜻대로 안 된다는 원망. 니가 뭔데 니 뜻대로 되어야 돼? 그럼 우리는 할 말 없지요. 백성이 가는 곳에 장소가 있는데, 장소는 없는 장소가 우리를 살립니다. 없는 장소로 없이 가기 위해서 과정을 거쳐야 돼요. 뭐냐 하면 있는 장소 모든 백성이 “오! 저기 좋은 거 있네요. 저기 목초지가 있네요.” 있는 장소는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서 이게 뭐로 바뀌는가 하면 원망의 장소, 있을 수 없는 장소로 바뀌어야 돼요.
내가 너희들을 영원히 사는 장소는 저 장소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돼요. 백성들은 자기 개인적으로만 편하게 사는 그것만 하면 되는 거예요. “아휴, 삼성골프장 근처로 이사와 가지고 이런 좋은 세상에.” 멋지지요. 백날 멋지면 뭐합니까? 오늘 저녁에 부부싸움하면 엉망인데. 집이 좋으면 뭐합니까? 집안이 화목해야지. 가정 화목하면 뭐합니까? 더욱 가정 화목하고, 이사 가자. 뭐하노 돈 좀 더 벌어가지고 터 옮기자. 또 그럴 건데. 인간의 욕심이 멈출 리가 없잖아요.
이 장소는 주께서 말하는 장소는 우리의 행복을 위한 장소가 아닙니다. 따라서 나에게 행복을 좌절시키는 장소가 필요해요. 나의 꿈과 희망과 나의 포부와 나의 기대가 다 부질없는 것! 다 부질없는 거예요. 전에는 저 장소에 아파트에 살면 행복하지만, 그 가면서 목적지에 도착했는데 몸은 허리 아파. 인대가 끊겼어. 몸이 아프면요, 아무리 좋은집 줘도 조그만 아파트에 살아도 내 몸만 건강하면 소원이 없겠다. 또 이리 나오거든요. 몸이 또 나으면 딴 소리 하고.
주께서 인도하시는 것은 뭐냐 하면 나를 좌절시키는 곳으로 데려갈 때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백성입니다. 하나님께 절로 원망이 나오고 불평 나오고 차라리 죽여주옵소서! 아까 했잖아요. 마귀 만남의 반대말이 뭡니까? 감탄했지요. 고마움에 의한 감탄. 이게 안 되면요, 우리는 억지로 참을게. 참는 것은 이것은 성령의 일이 아니에요. 기쁨이 있어야 돼요. 고맙고 감탄 되어야 돼요. 언제 적 상황인지 모르겠습니다마는. 매일같이 감탄하고 매일같이 고마워하면 참 좋겠어요. 제 희망사항입니다마는.
주께서 할 때, 내 뜻이 좌절되지 않으면 감탄과 고백이라는 것은 이건 버스길이 달라요. 이건 다른 동네입니다. 내 자리, 내 포부가 기대가 있어버리면 절대로 고마움과 감사가 안 나옵니다. 고마워하고 감사하는 것은 자기가 엉망진창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그 때 그 순간에만 나오게 되어있어요. 내가 안 깨지고 내가 무너지지 않는데 감사 감탄하는 것은 이건 거짓말입니다. 그런 것은 다 잘못된 거예요.
아까 했잖아요. 은혜가 모자람이 없다고요. 은혜가 모자람이 없는 데서 오는 감탄 같으면요, 현재에 있는 어떤 형편에 있던지 그건 고맙습니다! 되어야 돼요. 그런데 지금 요거 시비 걸고 저거 시비 걸고 저거 짜증내고 요거 짜증내버리면 억지로 감사해봐야 표정이 이상해져버려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이제 마지막 이거 해야 되겠지요. 어떻게 방법을 해야 되겠지요. 아까 나왔습니다만, 개인에서 집단 행위를 하게 되어있어요. 자, 개인으로 할 때는 힘들고 어려울 때는 사람이 짜증납니다. 그런데 다 같이 힘들고 어려우면 어떻게 됩니까? 견딜 만하지요. 다같이. 군대 가면 다 같이 견디기 때문에 힘들어도 해요. 어려울 때.
애 넷을 낳고 힘들게 살 때는 그래도 크는 동안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그런데 다 성공해가지고 각자 있을 때는 만나지도 못하고 이상하게 옛날보다 덜 행복한 거 같아. 그런 느낌 저만 느끼는 겁니까. 분명히 객관적으로 다 잘 사는데 전에 그냥 허물없이 지내던 사이가 더 좋은 거 같아. 왜냐, 나를 잊어버리고 나를 잊어야 돼요. 나를 잃어버려야 돼요. 나 어디 있지? 이리 되어야 돼요. 내가 없을 정도로 동일한 체험과 동일한 현상을 겪는 그 집단 행위를 겨냥한 하나님의 일이 준비돼있습니다.
그건 뭐냐 하면 제일 마지막 중요한 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은혜는 이게 아니에요. 개인용이 아닙니다. 이건 주께서 분배한 거예요. 믿음도 그렇고, 소망도 그렇고, 사랑도 그렇고, 나만 믿은 게 아니고 나만 소망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택한 백성한테는 똑같은 걸 주시는 거예요. 예수님이 똑같은 걸 줬다 말이에요. 똑같은 거 줬다는 말은 결국 내 실력이라든지 내 행함이나 내 성실함이나 내 노력으로 얻었다? 안 얻었다? 얻을 수 없는 공짜로 얻은 거예요.
주님께서 그냥 은혜로 분양한 거니까. 배양한 거니까. 우리는 그냥 그릇이고 주께서 꽃을 심기 위해서 꽃씨를 이렇게 심은 거니까. 주님의 꽃이 자라나니까. 이게 내 인생이 아니고 누구 인생이냐, 주님의 인생이 되는 겁니다.
주님의 인생인데, 개인적으로 해도 주님의 인생으로 감사한데, 감탄이 언제 나오느냐 하면 나 같은 일이 나한테만 일어나는 특이한 현상인 줄 알았는데 이건 비슷하구나! 똑같이 그런 현상이 일어나게 되면 그 사이에서 집단적인 모습을 통해서 감탄이 강하게 나와요.
‘야~~ 이게 정말 나만 착각해서 주님 살아있다는 걸 혼자 살아있다! 살아있다! 내 최면 걸어서 된 게 아니고 아무 행함도 없이 그냥 공짜로 천당갔다는 이야기가 이게 나만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보니까 같이 알고 있는 특이한 사람이 등장할 때에 세상에~ 이게 맞을 수도 있겠구나! 이게 진짜일 수 있겠구나!’ 그래서 상대방을 시험해본다고요.
“에이, 착각이지요. 잠시 어디 머리 다쳤습니까?” 이런 식으로. “어떻게 죄만 지었는데 천당 갑니까?” 라고 해봤을 때 그 사람이 막 화를 내면서 뭐 무시합니까? 이리 나올 때는 “아하, 그렇지요. 네. 네. 기적이야 뭐 늘 오겠어요?” 했는데 정말 그 사람이 진지하게 그걸 이야기할 때 뭐냐 하면 그 사람 앞에서 타인 앞에서 나만 했다는 이것이 쑥 들어가지요. 나를 잊어버리지요. 전체 그 순간 개인이 아니고 전체가 한꺼번에 확~ 다가오는 겁니다. 이게 지난 수요일날 설교한 거예요.
개인이 아니고 집단적으로 전체적으로 생각해야 된다고요. 꿈의 해석은. 전체적으로 해석해야 돼요. 전체적으로 해석하면 기쁨이 오고 감탄이 오지만, 이게 개인으로 돌아가게 되면 우울과 짜증과 원망이 다시 고질병이 다시 도집니다. 내 생각하는 고질병이 있고요. 나를 잊어버리면 행복하고 그래요. 오늘 행복이란 말 처음 했는데 긍정적으로.
자, 장소는 어디 있느냐, 없습니다. 장소는 없는데 사건이 일어나요. 사건이 일어나면 이미 우리는 특정한 장소에 놓여있음을 후차적으로 일이 터지고 난 뒤에 후차적으로 우리가 깨닫게 돼요. ‘아~ 내가 희한한 공간에 와있구나!’ 내가 희한한 공간에 와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난 뒤에 갈라디아서나 로마서나 죽 읽어보세요. 히브리서 읽어보세요. 이해 안 될 수가 없어요. 죽은 귀신인데 뭘.
죽은 귀신이 되어가지고 현재 귀신들만 모인 집단공간이 따로 있어요. 그게 예수 안이고 십자가 안이고 성령 안입니다. 그 안에서 단독적으로 의로운 게 아니고 더불어 의로워요. 더불어. 머리가 하나고 지체가 있으니까 문어발이니까 머리가 의롭잖아요. 의로움을 분배했으니까 분배하는 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렇게 이야기해요. 은사라고 이야기해요. 은사.
은사가 오게 되면 나는 잊어버려요. 내 사랑 없어져요. 우리 사랑밖에 없어요.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은 서로 미워하지 않는 게 내 사랑이 없어요. 내 소망이 없어요. 우리의 소망이고 내 믿음이 없고 우리의 믿음이 되어버려요. 사실은 하나밖에 없는 믿음을 주께서 이렇게 문어발식으로 분배해서 준겁니다. 본사는 주님이고 우리는 지점이에요. 파리바게트 비슷하게 해서. 우리는 대리점입니다. 택배회사 대리점을 운영하고 있어요. 다음에는 여기서 하다 어디로 옮길지 몰라요. 대리점이 또 어디로 옮길지 모릅니다.
그렇게 하면서 이미 우리는 주님의 사건을 이동시키는 겁니다. 사건을 이동시키면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뭘 알 수 있느냐, 전에는 어떻게 살았느냐 하면 너와 나를 구분했습니다. 전에는 나와 너를 구분했지요. 니 이만큼 살았지? 나 이만큼 살았다. 니 불행하지 나 행복하다. 나와 너를 구분했지요. 니 이만큼 살았나? 나 이렇다. 니 불행하지? 나 행복하다. 너와 난데 이제는 너가 없어지고 나를 잊어버리니까. 우리라는 개념이 새롭게 등장합니다. 이게 백성개념이에요. 집단개념이고. 그리스도의 몸의 개념입니다.
물론 우리라는 것을 잘 못 만나보지만, 어쨌든 성경에 보니까 내가 온 것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왔다. 우리라는 이스라엘 집단을 이야기하는 거죠. 집단이고 저쪽의 남들은 뭐냐, 개인을 위해서 살아요. 그들은. 그들의 자신의 개인을 위해서 살아요. 기껏 그들이 말하는 우리라는 것은 지 혈육과 관련된 것. 지 자식이고 부모, 혈육 간 제사지내고 이런 것. 이건 혈육에서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새로운 우리가 나와요. 이건 기적이 없이는 안돼요. 이건 성령 받은 기적이 없으면 도저히 이런 일이 벌어지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성도끼리 돈 관계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거기에 있어요. 고린도전서6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돈 빌려줘 놓고 받을 생각하지 말고 사기 당하고 고소할 생각하지 말고 성도한테 피해 입었다 하는 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왜 그러느냐 하면 주님이 이 지체를 나를 나의 원망을 바꾸기 위해서 다른 지체를 가지고 나를 원망케 하는 일이 벌어지게 한 거예요.
주님보시기에 나를 못 잊어서 그러니까 내 돈을 못 잊은 거예요. 돈을 못 잊으니까 사기꾼성도, 사기꾼성도 말이 안 되지만, 성도를 통해서 내 돈을 어쩔 수 없이 사기 치게 만들어서 나로 하여금 다시 십자가 안에 있다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해서 그 사람을 그렇게 사용한 거예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사기 칠 인간이 성도일리 없습니다. 사기를 친다는 것은 돈을 사랑한다는 뜻이잖아요. 그런데 어쩔 수 없었어요. 애가 5명인데 굶어죽게 되어가지고 거짓말해서 돈을 가져갔다면 그건 돈을 받을 생각하지마세요. 그건 산상설교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요즘에도 그런 사람 있는데 정말 굶기 직전에 가가지고 그러니까 수술비가 십만원 모자랐는데 수술비하면 복잡하니까 일주일후에 십만원 갚는다고 해놓고는 다음날 이사 갔다. 뭐 이유가 있겠지.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수천만원 같으면 이건 사기꾼이죠. 왜냐하면 그건 장사하겠다는 목돈을 챙기겠다는 이야기고. 십만원, 오만원 이런 거 있잖아요. 이천원. 저도 이천원 가까이 사기 친 적이 있습니다. MP3 약이 다됐어요. 한윤범 목사님이 바데리 가져온 걸 아직 안 갚았어요. 복음이란 핑계대고.
이제 여러분이 사람을 잘 알아야 돼요. 성도 없습니다. 그걸 기정사실로 하세요. 있거든 감탄하세요. 저 사람 미친 거 아닌가. 나도 어지간히 미쳤는데 저 사람은 나보다 더 미친 거 같아. 인간으로서는 나올 수 없는 고백이 나와 버리니까. 저 사람 혹시 복음이란 택배회사 같은 직원 아닌가.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다 예정된 자를 건진다 할 때에 우리는 그것을 교회에서 찾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하지 말게 하옵소서. 우리 자신부터 해서 우리 주변에서 주께서 형제라고 붙여준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는, 주께서 살아있을 수 있다는 그 가능성, 그걸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안에서 나를 잊어버리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