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겨울수련회 제 5강(이 근호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아까 했던 아가서 5장을 다시 보겠습니다. 5장 2절에 보면, 남자 쪽에서 갑자기 여자를 찾아왔어요. 찾아왔는데 사전에 예고도 통고도 없이 갑자기 들이닥쳤습니다. 여자 집에 난입한 거예요. 문이 닫혔습니다. 남자가 여자의 이름을 불렀겠지요. 그런데 여자는 이러쿵저러쿵 핑계를 대면서 마중을 나가지를 못했어요.
그러니까 남자가 문틈으로, 5절에 보면, “일어나서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 때 몰약이 내 손에서, 몰약의 즙이 내 손가락에서 문빗장에 듣는구나.” 액체가 나오지요. 액체라 하는 것은 남자 쪽에서 만날 수 없는 사랑의 그 갭을 간절함이 담기는 식으로 어떻게든 간에 내 사랑을 저쪽에 전달해보려 시도하는 것이 몰약이라는 액체형식으로 떨어지는 겁니다.
보통 인간의 만남은 개체와 개체의 만남이기 때문에 고체와 고체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러나 그 사랑이 지극하고 깊어지게 되면 고체 속에서 액체를 끄집어내게 돼요. 그게 아가서 4장 11절에 나옵니다. “내 신부야 네 입술에서는 꿀방울이 떨어지고 네 혀 밑에는 꿀과 젖이 있고 네 의복의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구나.”
몸을 접촉하고 그리고 입술을 접촉하면서 뭘 세밀하게 끝까지 끄집어낼 것을 다 끄집어내느냐 하면, 입술에서의 침, 액체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는 거예요. 그 간절함.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밀도 있는 접촉이 되지요. 우리 사랑 말고 어떤 다른 것도 거기에 끼어들지 않게 일체성을 갖고자 하는 것, 이것은 주님과 우리 사이에 주님이 주신 사랑, 우리에게 주님이 주신 사랑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 거예요.
이성? 필요 없어요. 욕망 필요 없어요. 충동적이에요. 충동은 나의 관리대상이 안된다고 했지요. 오히려 충동에 우리가 휘말려간다고 하지요. 충동에 자기 한 몸을 제물로 바치는 겁니다. 사랑에 자기를 제물로 바치는 거예요. 그저 사랑만 구현된다면 더는 소원이 없다는 거예요. 사랑이라 하는 것은 재현되는 것이 아닙니다.
재현되는 것이 아니고 구현되는 거예요. 구현과 재현의 차이는 재현은 반복이지만 구현은 없는 것을 새로, 잉여의 것을 생산하는 것이 구현이에요. 이렇게 나올 줄 몰랐다는 거예요. 나도 한 이성적이고, 나도 한 행동 반듯하게 산다고, 누구에게 밑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데 그러나 사랑이라 하는 것은 반듯한 행동에서 예측한대로 나오는 것이 사랑이 아니에요.
내가 이 짓까지? 이런 것. 여분의 것, 예상 못한 잉여의 것이 나오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존재는 재현의 순환 고리에 그냥 반복될 뿐입니다. 강아지가 자기꼬리를 물고 뺑뺑이 돌듯이 자기의 꼬리를 물고 계속 늘어질 뿐이에요. 거기서는 어떤 것도 여분의 것이 나오지 않습니다. 구원은 자기희생이 없이는 구원이 있을 수 없어요. 자기 손해 없이는 구원이 있을 수 없습니다.
구현이라는 것은 예상 못했는데 새롭게 플러스알파로 등장한 것이 구현이거든요. 그래서 재현 같으면 예상이 되기에 ‘저 사랑을 내가 도로 가져야지’가 되지만 구현된 사랑, 이것은 도로 가질 대상이 아니고 그 구현된 사랑에 있는 것도 갖다 바칠 처지에 있습니다. 여자가 옷 벗고 있어서 못나간다고 할 때에 남자 쪽에서 억지로라도 문틈에 손을 집어넣어서 아마 문틈에 손이 끼었을 거예요.
손은 끼었지만, 그래서 아프겠지만 자기가 가지고 온 약, 이것 먹고 감기 나으라고 하는 그 판콜, 판콜 하나 주르르, 그 몰약이, 그 판콜의 즙이 내 손가락까지 적시지요. 이쪽 육체에서 저쪽 육체로 전달되는 겁니다. 그럴 때 여자는 비로소 자기가 사랑을 망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게 뭐냐? 갑작스럽게 왜 왔느냐고 하는 겁니다.
갑작스럽다 하는 것은, 평소에 자의식의 캐슬, 본인이 성벽을 구축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것은 사랑의 현실에 전혀 맞지 않는 비실제적인 장벽의 구축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평소에는 못 느끼다가 저 남자가 사전에 어떤 통보 없이, 예고 없이 갑자기 들이닥쳤을 때 자신의 본색, 본질이 그 사랑으로 여지없이 노출된 거예요. ‘아, 나는 나 지키는 데 급급했구나. 이게 사랑을 실패로 만드는 요소였구나.’
그래서 사랑은 반드시 실패를 경유해야 돼요. 실패에서 가짜 사랑에서 진짜 사랑이 연역되는 겁니다. 뽑혀 나오는 거예요. 점잖게 한다고 사랑이 성사되는 것이 아닙니다. 뭔가 한쪽이 깨어져야 돼요. 깨어진다는 말은, 자신의 순수한 사랑에 전혀 부합되지 않는 존재로 살아갔다는 것이 티가 나와야 돼요. 사랑에 부합되지 않는 것이 뭐냐? 자의식입니다.
제가 첫째 시간에 제일 먼저 한 이야기에요. 사랑이라 하는 것은 자기의식에서 그 다음에 뭐로 옮깁니까? 나 의식을 철회하고 누구에게로? 타인의식으로 옮겨갈 때 그 과정 속에서 여분으로 나온 것이 사랑이라고 했지요. 사랑을 남에게 가져가게 되면 우리는 또 빼앗아오려고 설치기 때문에 그러면 안돼요. 그 과정 속에서 여분의 것으로 나오는 거예요.
이 자의식이라 하는 것은, 평소에 그냥 있을 때는 자의식이라는 것을 못 느낍니다. 자기는 점잖은 사람인 줄 알고, 배려 깊은 사람인 줄 알고 어지간하면 양보로 일관했던 그런 인생이기 때문에 누구한테 나는 양보주의지 내주장은 아니라고 했지만, 자기의 벌거벗은 모습을 누구에게 노출하기에는 자의식이 자기의 발목을 너무 굳게 잡고 있는 거예요.
나중에 남자와 여자가 합궁할 때 남자가 여자의 신체를 스캔하면서 뭐라고 하느냐? 여자의 하체를 ‘잠근 동산’이라고 했어요. 잠궈진, 족쇄 채워진 동산이었습니다. 낙원이거든요. 낙원 안에 구심점이 되는 새로운 낙원이 있었다. 그것은 당신의, 여성의 하체다. 그걸 여기서는 계곡이라고도 이야기해요. 위에서부터 내려오면서 표현하거든요.
액체고 고체고 세세하게 살피는 거예요. 도대체 이 사랑이 어디를 봐서 사랑스럽고, 어디를 봐서 향기롭고, 어디를 봐서 아름다운지, 그 아름다움이 나오는 출처, 원천, 근원을 살피겠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사랑이 너무 좋으니까. 어디를 봐서 사랑스럽지? 그러나 찾으면 찾을수록 ‘어디를 봐서’라는 말이 성립 안돼요. 자의식이 사라진 모든 현장이 다 아름다워요.
내 것을 내 것으로 지키기 위해서 버텨온 그 모든 것은 사랑의 방해자였습니다. 신약적으로 말해서는 악마가 설치해놓은 족쇄였지요. 함부로 문열어줘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함부로 문열어준다는 것은 뭐냐 하면, 손해 볼 것 같으면 절대로 문열어주지 말라는 이야기에요. 그러나 이익과 손해를 따진다는 것은 선악을 따지고 선악과 따먹은 그 후유증을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아가서의 유명한 구절이 있거든요. 아가서 8절에 보면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라는 말씀이 있어요. 이것은 뭐냐? 사랑의 성질과 죽음의 성질이 같다는 겁니다. 둘 다 같은 성질을 보여주는데 사랑은 잘 모르고 죽음은 알거든요. 죽음의 성질은 뭐냐? 일부를 받는 것이 아니에요. 모든 것을 다 받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 사람이 죽게 되면 그 사람이 살았을 적에 가졌던 부동산, 동산, 금융기관에 돈 넣어놓은 것은 다 필요 없어요. 돈 뿐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명예, 그런 것도 그 사람을 없애면 같이 다 날라 갑니다. 증명사진이라든지 주민등록증이라든지 다 날라 가지요. 금융기록 다 날라 가버려요. 죽음은 몽땅 다 없애버립니다.
Delete라 하지요. 모든 것을 삭제해버리는 거지요. 성령의 특징이 뭐냐? 자의식을 삭제하는 것이 성령의 특징이에요. 왜냐하면 성령은 십자가에서 나오거든요. 십자가가 유일하게 사도바울이 제시하는 유일한, 진짜 주님이 너를 사랑했다는 객관적인 사실은 십자가뿐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보면,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고 했어요.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
죽음은 전부를 요구합니다. 그런데 그 죽음과 같은 성질을 갖고 있는 사랑도 죽음을 닮았어요. “일부가 아니라 너의 전부를 내놓아라. 특히 너의 자의식을 내놓아라.” 평소에 여자가 남자를 위해서 모든 것을 내놓았다고 생각했지요. 서로 사랑하니까 서로 사랑했다. 그러니까 둘 다 하자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밤에 혼자 있을 때, 집에 있을 때 갑자기 남자가 의논 없이 쳐들어왔을 때 ‘아, 나에게 이런 면이 있었어?’
결국 남자가 가고 난 뒤에는 여자가 뒤늦게 쫓아갔는데 그 남자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지금, 지금 만날 타이밍이 아니에요. 자의식을 갖고 만날 타이밍에서는 사랑은 과정에서 생산되지 않습니다. 자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사랑은 생산되는 거예요.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온 거예요. 점잖지 못하게.
그런데 이 점에서 중요한 것을 또 놓치면 안돼요. 여자가 남자에게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못 만나 준다고 할 때 남자가 여자의 그러한 자의식을 보면서 실망스러워서 “나는 네가 그렇게 나올 줄 몰랐다. 나는 네가 모든 것을 공개한 줄 알았는데 네가 아직도 그것으로 버티는구나. 실망했다. 우리 헤어져.”
그런데 남자 쪽은 자의식이 없습니까? 자기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자기도 마찬가지거든요. 충동의 사랑이 아니고 욕망의 사랑이지요. 저 여자를 기어이 차지하겠다는 욕망의 사랑의 화신일 뿐이었어요. 그래서 사랑은 둘 다 실패하는 가운데서, 둘 다 자의식이 무너지고 뭉개지는 가운데 비로소 그 현장에 예상 못한 사랑은 새로 시작되는 겁니다.
앞에 있는 이러한 이야기들, 나의 비둘기, 이런 것이 나오는데 아가서에서 남자가 여자를 표현할 때 비둘기, 사슴, 노루, 그런 것들로 표현하거든요. 그런 것들로 표현하는 이유는 짐승들이 파라다이스, 낙원에서는 누구의 간섭도 없이 마음도 없이 뛰어노는 해방감을 묘사해주는 거예요. 해치는 사람 없이 마음 놓고 뛰노는.
그러니까 남자입장에서 여자를 비둘기나 노루나 마음 놓고 뛰노는 사슴으로, 산비탈에서 한가로이 편히 쉬고 있는 짐승들로 보면서, 남자는 여자의 해방감을 통해서 기쁨을 누리는 겁니다. 남자를 사랑한다는 것, 또는 남자가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통제하지 않는, 내 통제의 바깥, 다시 말해서 아까 이야기한 내 자의식의 바깥에 마음 놓고 해방할 때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미처 몰랐던 잉여, 여분의 것으로 보는 겁니다.
여분의 것은 항상 예상 못한 새로운 것이지요. 창조를 의미하는 겁니다. 창조는 창세기 1장에 보면 항상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 가 돼요. 그 ‘심히 좋았더라.’를 외칠 수 있는 것은 사람의 개입이 전혀 들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주님이 하십니다. 내 구원에 내가 개입하면 안돼요. 주님은 우리를 하나의 사슴처럼 보고 비둘기처럼 보기를 원합니다.
내가 마음대로 살라고 허락한 그 공간에서 참으로 마음대로 사는 그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은 자기창조자체에서 즐거움을 취득하게 돼요. 그것이 사랑 속에 구현되는 겁니다. 그 해방감이 그대로 몸에 입혀질 때 그 자유로운 동작이 응축이 되어서 여자의 눈동자 속에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남자는 여자를 보고 “당신의 눈은 비둘기 눈 같아요.”
아가서 4장에서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 너울 속에 있는 네 눈이 비둘기 같고 네 머리털은 길르앗산 기슭에 누운 무리 염소 같구나.” 제 식대로 달리 이야기하면 당신의 신체 자체가 해방구다, 그 말이에요. “모든 것이 허용되고 모든 것을 간섭받지 않고 충동 넘치는 대로 마음껏 할 수 있는 그림책, 그것을 축소하고 압축해놓은 신체로 만들어놓았을 때 당신의 신체 자체가 자유로운 신체입니다. 내가 그것을 보고 어찌 사랑스럽지 않을 수 있으리오.”
남자가 여자를 속박하고 여자가 남자를 속박한다는 것은 스스로 자신을 속박하는 자의식이 강렬하기에 그래요. 모든 범죄자의 특징은 자의식이 강렬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자의식이 강렬한 사람이 있거든 잠재적 범죄자로 보시면 됩니다.
“우리 십자가 마을이나 우리교회 교인들은 그런 사람이 없고 십자가마을에 나오는 교인들은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 복음만 아는데 어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아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하는데 한 번 쑤셔 봐요.
쑤셔보면 삐지기 대장이에요. 삐직! 이론과 실제가 달라도 너무 다르지요. 그것은 자의식을 확장해놓고 그것을 자기주변 환경이라고 착각하기에 그렇습니다. 자기의식을 용납하지 않고 늘 부수고, 내가 내민 모든 사랑을 실패로 만들어주고, 내 자의식이 사랑을 실패하게 했다는 그 원인자로서 우리를 규정할 때 비로소 실패를 경유해서 나온, 나는 사랑의 훼방자요 방해자라는 것을 자인할 때 진정한, 우리가 예상 못한 자유로운 사랑을 만끽하게 됩니다.
‘나 같은 인간도 이 낙원에, 에덴동산에, 이 파라다이스에 넣어줬구나. 볼 것도 없는 나를 여기에서 뛰어놀게 했구나. 죄인 주제지만 마음 놓고 뛰어놀자.’ 이런 식이지요. 죄인이지만 마음 놓고 뛰어놀자. 완벽 하라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비둘기세포 조사해보고 바이러스 조사해보면 더럽고 똥 묻었지요.
그러나 그걸 보면서도 아름답고 향기로운 이유는 환경에 걸 맞는 새로운 존재들을 거기에다가 규정했기에 그렇습니다. 왕궁에서의 모든 신부의 친구나 신부되는 술람미여인은 왕궁에서 어떤 혜택을 받았느냐? 왕이 벌이는 놀이에서 새로운 자리와 새로운 시간을 왕으로부터 제공받습니다. 그러면 그 마당은 왕의 놀이마당이에요.
왕의 자기즐거움에 참여하는 겁니다. 이게 천국이거든요. 예수님즐거움에 우리가 동참하게 된 겁니다. 이게 마태복음의 혼인잔치에요. 혼인잔치는 그냥 통보하는 거예요. “내 아들이 몇 월 며칠에 어느 예식장에서 결혼식 한다. 오라.” 올 수 있으면 오세요, 가 아니라 그냥 오라. 오는 조건하에서만 내 백성이라는 거예요. 일방적으로.
그러니까 그 중에 어떤 사람이 정말 거절할 수밖에 없는 그런 이유를 댑니다. “결혼식이요? 그날 그 시간에 내 결혼식인데요.” 이렇게 된 거예요. 그날 그 시간이 자기결혼식이에요. 주님은 그걸 보고 그게 네 자의식이라는 거예요. 네 결혼식이 중요 하냐, 임금님결혼식이 중요하냐고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고 있습니다.
참석 안한 사람이 하는 말이 “내 결혼식인데 내가 중요하지 남의 결혼식에 장단 맞출 일이 뭐가 있습니까?” “에이, 지옥가거라.” 이런 식이거든요. 이게 말도 안 되는 횡포 아닙니까? 여러분, 이것은 말도 안 되는 횡포지요. 이 말도 안 되는 횡포, ‘최소한의 자기 것은 지켜줘야지, 최소한의 자존심은 지켜줘야지.’ 하는 이런 의식이 있는 것은, 이미 우리는 창세기 1장의 하나님만이 ‘심히 좋았더라’는 그 환경에서 우리가 벗어나 있기에, 추방되었기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추방된 것 나라도 지켜야지 누가 지킬 거야?” 이런 조로, 자의식을 강화하는 쪽으로 살아온 거예요. 3장 4절을 봅시다. 왜 이렇게 차례로 안하고 왔다 갔다 하느냐 하면, 이게 줄거리가 없어요. 줄거리를 억지로 찾으면 곤란해요. 이것은 시에요. 어떤 절차라는 것이 없습니다. 3장 4절에 보면, “그들을 떠나자마자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나서 그를 붙잡고 내 어미 집으로, 나를 잉태한 자의 방으로 가기까지 놓지 아니하였노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여자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 남자의 집으로 가는데 어디로 가느냐? 나를 잉태한 우리 어머니 집으로 데려가서 같이 동침을 하겠다는 거예요. 아가서에 보면 동침하는 장소들이 여러 군데 있습니다만 1장 16절에 보면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어여쁘고 화창하다 우리의 침상은 푸르고 우리 집은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석가래로구나.”
이것은 들판에서 동침하는 거예요. 대자연을 침실로 삼는 겁니다. 대자연에서 하다가, 궁전에서 하다가, 도시에서 하다가, 새로운 공간, 새로운 지역으로 이어가면서 거기서 사랑의 과정이라는 것을 겪게 됩니다. 여기에서 ‘어머니의 집으로 간다.’는 이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냐를 좀 살펴볼 필요가 있어요.
예레미야 31장 22절을 말씀 드렸지요. 여자가 남자를 안는다. 여자가 먼저고 여자 없이는 남자도 없어요. 여자가 임신해서 아기를 낳을 때 비로소 최초의 남자다운 남자가 등장하는 겁니다. 사람에서 남녀로 바뀌어야 되는데 사람에서 남녀로 바뀌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다윗언약,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솔로몬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여인을 사랑하는 여자, 그 여자로 새롭게 생산시킵니다.
그 여자가 남자와 동침해서, 그 때는 어떤 사람이지요, 사람과 동침해서 아기를 낳을 때 이 아기가 이 남자와 여자의 과정 속에서 나온 사랑의 구체화지요. 그 사랑스러운 분이 십자가에 죽을 때 그게 사랑의 절정이지요. 왜? 사랑이라는 것은 모든 굴레에서 벗어나서 자유케 하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에.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천국에서는 네가 신경 쓰지 말고, 의식하지 말고 마음대로 뛰어놀아라.
그 자유성이, 그 해방감이 네 육체의 아름다움을, 육체의 향기를 더욱 뿜어내게 하는 거예요. 여러분이 자식보기에, 부모보기에 자식이 부모의식 안하고 마음대로 천사처럼 깔깔대며 자기 마음대로 할 때 그게 아름답습니까, 아니면 천재랍시고 애를 유리방에 집어넣어서 유리벽에 방정식 막 쓰고 그렇게 하게 되면 여자는 그걸 꼿꼿하게 서서 지켜보는, 그게 그렇게 아름다운가요?
딸애가 천재는 천재인데 뭘 암기만 해대고 밥은 잔뜩 먹어서 뚱뚱해져가지고 원피스 입혀서 돌아다니는 그 모습이 <스카이캐슬>에 나오는 장면이거든요. 3대째 의사 만든다고 사람을 죽여요. 그런다가 베란다에서 떨어져서 난리치고, 엉뚱한 애 하나 범인 만들어버리고요. 여성이 아름답다 할 때 육적인 조건하에서는 얼굴이 시커매요.
교재 5페이지 마지막에 얼마나 역설적인지 보세요. 여기에 잉여라는 이름이 사랑이 나오는데 제일 마지막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답다. 이게 어떻게 매치가 돼요? 시커먼데 어떻게 아름답습니까?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남자가 자기여자를 찾아오는데 여자는 생각하기를 ‘몸단장을 해서 남자를 만나게 되면 사랑을 꽃피울 것이다’라고 사랑을 예상하잖아요.
그러나 종말이라는 것은 먼저 들이닥쳐요. 종말은 마지막 결정적 사랑이거든요. 결정적 사랑은 항상 우리의 예측보다 먼저 와버려요. 먼저 와버리면서 뭘 요구하느냐 하면, 네가 만든, 종말 이후에 네가 근사하게 되는 모든 조건과 요건을 네가 철회해버리라는 말이지요. 그 딴 것이 필요 없다는 거예요.
내가 왔으면 되었지, 내가 남자를 만날 때는 뭘 어떻게 하고, 화장을 어떻게 하고, 그런 것은 내 앞에서는 다 부질없는 것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이게 구원 아닙니까? 이게 진정한 사랑이잖아요. 내 쪽에서 준비한 모든 것이 소용없을 때 여러분 기쁠까요, 짜증날까요? 자의식이 안 깨지면 짜증나지요.
네가 뭔데 내 허락도 없이 우리 집에 들어왔느냐는 짜증이 나지만 만약에 자의식이 깨어진다면, “내가 더 이상 수고 안 해도 이 종을 편히 쉬게 해주시는군요. 이제 종말에 내가 도달하는 그 목표에 내가 미처 안가도 그 목표가 뚜벅뚜벅 걸어서 내가 잠자고 있는 밤중에 불쑥 들이닥쳤으니까 나는 그 순간 이미 도달한 거예요.
나의 목표는 내 식대로가 아니라 주님식대로 이미 완성해버린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주님 앞에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아요. 내가 예상 못하게 쳐들어왔기 때문에. 그걸로 우리는 그것보다 더한 만족은 없습니다. ‘이토록 저를 사랑했군요.’ “네가 준비하는 그 준비물 보고 내가 쳐들어갈게” 이런 것은 없습니다.
제대로 성실하게 인생 사는가, 이런 것 보는 것은 없어요. 그냥 쑥 들어와 버린 거예요.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그 순간 핍박이라는 말을 하든 말든 이미 예수님이 들어온 순간 아, 내가 그렇게 가고 싶은 천국이 미리 마중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거든요. 아, 하나님의 구원방식은 이렇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겁니다.
십일조 내고, 헌금하고, 교회 봉사해서 하늘나라 확장시키고……. 어디서 보이스피싱 수작들을 합니까? 도대체 언제까지 그 속임수에 속아야 됩니까? 복음 안다고 해놓고 또 자의식으로 해서 스카이캐슬 만드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것은 뭐예요? 그것은 또 자기사랑이잖아요. 주님한테는 고맙기는 고맙고, 그렇게 해놓고 또 자기세계를 만들어요.
자의식가지고 거기서 또 강화시킵니다. 거기서 하늘의 별을 따겠다는 거예요, 그것가지고 뭘 하겠다는 거예요? 자기 가치와 자기자존심 가지고 어디에 써먹을 데 있다고요? 그것은 해방감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해방감을 삭제시켜요. 사랑이라 하는 것은 한순간이에요. 그 한순간에 모든 것이 확정되는 겁니다.
그 한순간을 사건이라 하고 그게 우발적으로 확 쳐들어오고 그게 성령의 임함입니다. 어떤 노래에 이런 노래가 있지요. 이 노래가 그 해에 우리나라 가요의 가사상을 받았는데 가사 얼마나 잘되었는지 한 번 들어보세요. “그리워하면 언젠가 만나게 되는 어느 영화와 같은 일들이 이루어져가기를. 힘겨운 날들에 너를 지킬 수 없었던 아름다운 시절 속에 머문 그대이기에.”
이것이 ‘부활’이 부른 <네버앤딩스토리>라는 노래인데요. 김 태원이는 기타만 치고 노래 부른 사람은 따로 있고요. 이 가사 어디가 괜찮은가 하면, 아름다운 시절 속에 머문 그대. 당신은 지금부터 늙어도 좋다는 거예요. 간암 걸려도 좋고, 위암 걸려도 좋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기에 그 시절에 머문 그대는 나한테 영원하기 때문에.
그래서 여성은 늙어도 여성성은 영원한 거예요. 그 여성성이 뭐냐? 아까 제가 말한 영원한 ‘어머니’입니다. 어머니는 자기자의식이 깨어져버리고 자의식 깨진 대가로 자식을 낳는 사람이에요. 남자는 그 때 뭐했습니까? 산부인과 침대에 그저 앉아 있었지요. 침대에 앉아 있었든지 아니면 볼일 보러 갔든지.
해산하는 고통, 악마에게, 여자에게, 남자에게 벌칙이 주어졌던 창세기 3장, 주님께서는 저주받아야 될 그 정당성을 뚜렷하게 노출하기 위해서 그 순서를 역순으로 바꿔버립니다. 남자는 이마에 땀을 흘리면서 흙이 되고 그것을 해소할 수 있는 원인을 여자에게 두고, 그 여자는 무엇을 해결하느냐? 악마를 해결해야 돼요.
따라서 여자는 사람이고 악마는 영이기 때문에 이길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새롭게 등장한 여자에서 악마를 이길 자로, 악마의 대가리를 칠자로 새롭게 하나님의 아들이, 여자의 후손이라는 이름으로 아들이 등장하지요.
따라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사람에게 당하는 여자라는 연약한 여성을 통해서 악마를 이길 수 있는, 여자의 희생을 담아서 악마에게 보복할 수 있는 사람을 출생시킴으로서 하나님의 일이 허황된 것이 아니고 객관성을 갖고 있다는 것, 단순히 예수 믿는 것이 주관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객관성과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외칩니다. 절대로 예수 믿는 것이 하나의 신념에 불과한 것이 아니고 하나의 소설이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죽었고 실제로 부활했다. 그리고 죽으심과 부활을 합쳐서 그것을 복음이라고 하고 이 복음이 있는 한 이 현실은 구심점을 확보한 거예요. 이 세상에 중심점을 확보한 거예요.
그리고 그 구심점은 이 세상 지혜로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는 거예요. 그걸 도식으로 이야기하면, 인간의 모든 보편성에, 성육신이지요, 찾아오신 특수성, 특수성이 보편성에 개입하는 것을 성육신이라 해요. 하나님이 이 세상에 육신으로 오신 거예요, 침투한 거예요.
그런데 이게 보편성이니까 너 나 할 것 없이 동일한 성질을 드러낸다면 공통적 성질이 뭐냐? 예수 죽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바라바를 살릴래, 예수 살릴래?” “바라바를 살리겠습니다!” “그러면 예수는?” (다 같이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향하여 죽이라는 신호로) “……!” 죽이라 이 말이지요. 로마식으로 죽여 버려라.
왜 예수를 죽여야 했습니까? 그들의 정치적 현실을 안정화시키기 위해서 그런 거예요. 왜 정치적 현실이 안정화되기를 그들은 원했던 거예요? 거기에 자기들의 부동산, 사유재산이 있기 때문에. 사유재산이 있고 그동안 그들이 가꾸어온 혈육적인 공동체가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은 부모와 자식사이에, 시어머니와 며느리사이에 내가 불화를 일으키러 온 거예요.
여러분이 예상외로 혈육적인 공동체 밖으로 못나갑니다. 이 결속이 아마 정말 대단해요. 가족이라는 결속이. 우리가 그 출신이기도 하지만 우선권을 거기에 둡니다. 주님에 우선권을 두는 것이 아니고 내 가족에 우선권을 둬요.
모든 일의 시행이나 그 우선권은 내 가족입니다. 그러니까 이 아가에서 오빠 이야기가 나오고 왕이 자기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내 누이여, 내 신부여, 하면서 ‘누이’라는 말을 한 것은 새로운 구심점, 왕 중심, 하나님의 약속중심의 새로운 왕 체제로 내가 우리의 한 가족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그게 아가서의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아가서를 보면서 아름답다, 아름답다, 하니까 이 여자가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자꾸 찾을 생각을 하지 마세요. 내가 장담합니다. 이 여자가 사람의 취향에 따라서 결코 아름답지 않을 거예요. 그런데 여자도 마찬가지인데 남자를 보기에, 아가서 1장에 보면 자기친구에게 자랑을 합니다. “이만한 남자 못 봤지, 그지?”라고 자기 남자를 칭찬해요.
자연 속에 있는 모든 아름다움을 가지고 자기남자를 묘사해놓고 결론은 뭐냐 하면, “친구들아! 이 정도 되는 남자 없지? 예루살렘의 모든 여자들이 내 남자를 사랑하는구나. 하지만 그 남자는 내꺼야.” 비교급이지요. 자, 비교급에서 언급을 좀 하겠습니다.
남녀는 동등하다는 이런 이야기들을 하거든요. 인권 같은 것이 계속해서 이야기되는 것은 그만큼 나라가 살만하다는 뜻이거든요. 나라가 살만해요. 조선시대에 무슨 인권이 있습니까? 조선시대에는 인권이라는 단어도 없어요. 조선시대에는 상놈이냐 양반이냐는 그것으로 보는 거예요. 인간 대 인간으로 보지를 않습니다.
그래도 조선시대, 19세기에 우리나라 근대민주주의가 도입되면서 일제강점기 이전에도 대종교나 동학혁명을 통해서 인내천정신을 통해서 모든 민중은 하늘 아래서 다 같다는 이야기를 했잖아요, 라고 어떤 이는 이야기하지요. 그런데 여러분, 말은 뭔들 못합니까? 실제로 사회상에 그게 반영이 안 되는데.
아까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인간은 어떤 경우라도 자기 가족의 유대, 혈육적인 공동체를 못 벗어나요. 아무리 바깥에서 민주주의를 외쳐도 우리가족, 우리가문은 무조건 양반집이라 하면 양반집이에요. 거기서 배신하는 것은 호적 파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자꾸 민주주의이론에 현혹되지 마세요.
기본은 뭐냐 하면, 혈육적 전통입니다. 공동체의 전통, 혈육적 전통이 기본이에요. 부모 없이 무슨 자식이 있습니까? 부모가 가르친 대로 자식은 그 부모의 자식이 되는 거예요. 그 아담의 그 아담이고 그 아담의 자식들이지요 뭐. 그래서 동등이라 하는 것은 사실은 허황된 거예요.
그래서 고대아테네에서 민중이라 하는 것은 소위 가진 자들, 소수의 엘리트에게 민주주의에요. 노예들의 희생 위에서 민주주의라니까요. 민주주의라는 것은 너무 허황된, 이상적인 사고방식이에요. 이 세상에 민주주의는 한 번도 있은 적도 없고, 한 번도 실현된 적도 없고, 앞으로도 마찬가지로 민주주의는 없어요.
그저 협상과 타협과 양보, 그 정도지 민주주의라는 것은 없습니다. 돈도 없는 주제에 어디에 낍니까? 나는 가난하지만 한 표 달라. 미쳤어요? 기여도가 없는데 왜 표에 넣어줍니까? 안 넣어주지요.
어쨌든 간에 현대사회는 인권을 이야기하고 인권을 이야기할 때 남녀가 동등하다고 하는 거예요. 동등하게 하기 위해서 원서 낼 때 남자냐 여자냐는 일체 묻지도 말라고 하는데 여러분, 안 묻는다고 해서 사진보면 모르겠습니까? 참 내!
지금 일본에서는 초등학교의 모든 화장실에 남녀구분을 없앤다는 거예요. 유럽은 이미 그렇고. 공동화장실에 공동샤워실까지 만든다는 거예요. 남자들 좋~겠다. 인권빙자해가지고 눈요기도 하고 참 좋은 세상이네. 왜 그렇게 하는가? 성소수자를 보호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손가락 보호하기 위해서 몸체를 죽이자는 그 말이에요.
인권에 음주운전자 보호하자는 법은 왜 안 생기는지 몰라요. 술 먹고 운전해도 보호해줍시다. 등 두드려 주면서 “한 번 불어보세요. 만취하셨군요. 집에까지 안녕히 가십시오. 많이 불편하시면 모셔다 드릴까요?” 왜 이건 보호 못해요? “음주운전하다 아 부서졌어요? 나라에서 새 차 뽑아드리겠습니다.” 왜 보호 못합니까?
강간범 보호는 왜 못해요? 민주주의 원칙 자체가 다수결의 원칙이에요. 앞뒤가 모순되고 있어요. 그런데 동등이라는 말을 하면서 부부라는 것은 동등 되기 때문에,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뭐냐? 서로 보완해야 된다는 거예요. 동등에서는 보완의 관계가 나와요. 이게 실제적이고 현실적일까요? 서로 보완의 관계라는 겁니다.
이것은 잘못된 거예요. 남녀는 동등할 리가 있어요? 아까 이야기한 것 다시 해 봅시다. 아가서에서 말하는 것은 동등해서 보완하는 관계가 아니에요. 그런 사이를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특히 아가서에서 여성의 신체를 스캔하면서 지켜본 것은 뭐냐? 젖가슴에 유념합니다.
젖가슴에 왜 유념해야 되느냐 하면, 남자 입장에서 자기에게 없는 것이 여자에게 돌출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에게 없는 것이 여자에게 돌출되어 있어요. 없음에 대해서 남자가 끌리는 겁니다. 자기에게 없는 것이 끌리는 거예요. 이것은 보완이 아니고 차이에요. 차이를 존중하는 겁니다.
내게 없는 것이 저쪽에 있을 때 나머지 내게 있는 모든 것도 그쪽에만 있는 것에 내가 아낌없이 헌신할 수가 있다는 말이에요. 이것은 보완이 아니지요. 보완은 서로 승리하기 위해서 서로에게 필요한 것들을 빼내고 주고 그런 거예요. 보완에서 아주 적절한 예가 뭐냐 하면, 초등학교 때 애들이 미술시간에 오래된 크레파스를 각자 가져왔어요.
빨간색을 쓰려고 하니 빨간색이 다 떨어졌어요. 저쪽에 보니 빨간색이 많이 남았어요. “빨간색 좀 빌려줘.” 저쪽 애가 “너는 노란색이 많이 남았네.” 그래서 빨간색 빌려주면서 노란색을 가져가는 이것이 보완관계입니다. 그러면 이 보완관계의 결말, 주고받고 거래하는 그 보완관계의 목적은 남을 위해서입니까, 본인을 위함입니까? 본인을 위해서예요.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이것은 자의식강화에요. 가짜사랑이에요, 이것은.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차이는 뭐냐? 나한테는 빨간색이 없는데 저쪽에는 빨간색이 있어요. “빨간색을 다오, 노란색을 주마” 이것은 보완이 되고 사랑은 뭐냐? “오늘 나 그림 안 그린다. 빨간색과 함께 크레파스 네가 다 가져가. 네가 그림 그려라.” 이것이 바로 아가서에 나오는 사랑이에요.
사랑이란 그대 앞에서 내가 소멸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대 앞에서 내가 소멸되면 남는 것은 여분의 사랑만 남아요. 여분의 사랑만. 상대방 앞에서 자기의 모든 것을 소멸하는 희생적인 노래의 가사가 있어요. 그 가사는 ‘내가 아는데’ 혹은 ‘모르겠는데’ 할 수 있을 거예요. 한 번 들어보세요.
내 몸 가득 베인 너의 향기와 입술 가득 고인 미소 여기 이 모든 행복이 정말 내 것인지 사라질까 잃어버릴까 두려운 마음에 살며시 너를 안고서 저 하늘에 기도해 baby never say goodbye 단 한 사람 너만 있어주면 돼 이 세상 무엇도 널 대신 할 순 없어 baby don't you never cry 아름다워 네가 있는 이 세상 사랑하기에 나는 행복하니까
이게 김종국이 불렀던 <별 바람 햇살 그리고 사랑>이라는 노래의 가사입니다. 너만 있으면 돼. 이 세상 무엇도 널 대신할 수 없어. 나도 너를 대신할 수 없다. 이것은 보완이 아닙니다. 차이를 존중하는 거예요. 차이를 극대화하는 거예요. 그 젖가슴이 없으면 자식이 생산될 수 없어요.
왜냐? 남자는 자식을 못 낳으니까. 젖가슴이 없으니까. 당신의 젖가슴 앞에서 내가 끌리는 것은 나에게 영광스럽다는 거예요. 그 젖가슴과 나의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게 아까 이야기한 창세기 3장, 여자의 후손을 통해서 뱀의 후손과 싸우는 창세기 3장 15절의 원 약속 안에 담긴 내용이 지금 아가라는 내용을 통해서 전개되고 있는 거예요.
다윗언약을 통해서, 솔로몬을 통해서 전개되는 겁니다. 솔로몬이 시간 남아서 연애한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이렇게 적힌 겁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왕이 벌이는 놀이에서 그 시간과 장소는 왕이 제공합니다. 그래서 이미 주님의 놀이마당이에요.
그렇다고 해서 솔로몬 자기위주가 아니라 솔로몬은 한껏 낮아졌어요. 네가 비록 검지만 아름답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솔로몬은 모든 자기 것을 줄 용의가 되어 있습니다. 아름답다는 것은 자신의 평가가 아니고 너와 나 사이에 있던 충동이 게재된 그 충동의 결말이 아름답게 보이는 거예요.
여기서 여러분이 주의할 것은, 내가 아름답다고, 사랑스럽다고 이야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쪽에서 입 다문다고 해서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거나, 원망을 하게 되면 그것은 가짜사랑이지요.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사랑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전에 펠로우십 교회에서 로마서 9장을 강의한 적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고백하기를,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너희가 구원받는다면 더 소원이 없겠다, 하니까 어떤 분이 강의 끝나고서 저에게 이렇게 했어요. “그러다가 진짜 내가 지옥가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다가 진짜 끊어져서 지옥가면 나만 손해 아니냐, 하는 거예요.
그 말 자체가 이미 종말 이후로 들려져야 될 말인데, 이미 모든 것이 마무리 되고 난 이후에 함께 있는 입장에서 마음 놓고 지난 세월을 회상하듯이 그렇게 들리면 되는데 막 천국을 못가서 ‘어쨌든 들어가야지, 들어가야지’ 하는 식으로 들려버리면 이것은 “너 같은 인간은 오지 말라.”는 식으로 강하게 밀치는 이야기밖에 안돼요.
그것을 실행에 옮기라든지, 그런 뜻이 아니고 주께서 일을 그렇게 할 정도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주님의 영광만 돌리는데, 네가 자의식을 깨고 그걸 동의할 용의가 있느냐는 그것을 묻는 거예요. 주님 홀로 좋다면 거기에 동의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왜냐하면 천국 자체가 주님 홀로 영광 받는 그러한 새로운 공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도 성경자체가 내 성공을 위한 책처럼 그렇게 호도되고 있으니까 구원에 대해서 기필코 성공하겠다는 그 야심과 야무짐, 그것은 어디서 나오는가? 그것은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존재에서 나오는 거예요. 이런 사람은 아무리 성경을 봐도 자유의 낙원에서 마음 놓고 뛰어놀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의 눈은 사슴 아니에요. 세월 따라 악취가 납니다. 악취가 난다는 말은 썩고 있다는 말이에요. 향기가 난다는 말은 썩든 말든 거기서 하나님의 여성성, 하나님의 사랑의 여분의 열매가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는 겁니다.
아까 김 태원이 썼던 가사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아름다운 시절 속에 머문 그대여. 지금 뚱뚱하든지, 똥배가 나왔든지, 지금 몸이 아프든지, 내가 사랑한 아름다운 시절 속에 당신은 영원히 여성성을 가지고 머물고 있어요. 그런 고백. 이것은 남자도 마찬가지에요. 내가 멋졌던 그 시절, 그대로 머물기를. 그게 ‘never ending story’입니다.
십분 쉽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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