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자료

6.상처 190114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1. 19. 10:52
2019-01-19 08:23:30조회 : 13         
2019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6강-아가 강해:상처이름 : 오용익 (IP:61.84.208.92)
2019 겨울수련회 제 6강(상처: 이 근호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천국의 특징이 완전히 노래로 가득 차 있어요. 사랑이 없으면 노래도 없어요. 노래를 한다는 것은 여유만만하다는 겁니다. 더 이상 다시 옛 시절로 돌아갈 리가 없다는 완성에 대한 찬미로 가득 차 있습니다.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더 이상 얻을 필요 없이 모든 것을 다 얻었을 때의 여유만만함, 안정감을 표현한 것이 노래입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께서 식사 후에 꼭 노래를 부르셨어요. 그래서 내가 노래를 많이 아는 것인지. 그냥 일어서는 법이 없고 배부르다, 만족스럽다 그 말이거든요. 흥~, 흘러간 노래, 남인수의 노래를 하셨는데, 아가가 노래입니다. 노래를 부른다면 노래를 부를만한 수준에 이르렀을 때 아주 기쁨의 노래가 나오지요.

억지로 뭘 얻어내려고 시도할 때는 노래가 노래답지가 못합니다. 그것은 노래가 아니라 노동이 되어버리지요. 그리고 솔로몬의 노래는 당연한 노래가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계시라는 말은 주께서 필히 이 노래의 내용 그대로 이 현실을 꾸려가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 내용 그대로.

따라서 이 내용은 비현실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현실 속에 놓여 있기 때문에 곧 아가서의 내용 속에 놓여 있다는 말과 같은 말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사랑의 형성 속에 우리가 놓여 있다는 말인데 그 과정 속에서 우리가 필히 거쳐야 될 과정이 있어요. 그것은 뭐냐? 상처입니다. 

오늘 제목은 상처에요. 상처는 어디서 오는가? 상처는 빼앗김을 통해서 상처가 주어지는 거지요. 피부적인 상처, 몸의 상처는 당연한 것이고 정신적인 상처도 같이 포함이 된다고 보면 돼요. 그 상처가 아가 5장 7절에 나옵니다. 사랑하는 남자가 떠나고 난 뒤에 찾아도 찾아도……, 아가서 5장 6절에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내가 그를 찾아도” 그러니까 뒤늦게 후회하는 거예요.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구나.”

그 다음에 7절에 보면 “성중에서 행순하는 자들이 나를 만나매 나를 쳐서 상하게 하였고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이 나의 웃옷을 벗겨 취하였구나.” 들판에서 사랑을 할 때는 이러한 위험성이 없었어요. 도시에서 사랑을 할 때 이런 위험성이 온 겁니다. 들판이라 하는 것은 자연과 더불어, 함께 뒹굴고, 내가 누워있는 자연자체가 나의 침실이고, 나의 석가래고. 푸르름 자체가 자기 석가래가 되는 거지요.

그 말은 뭐냐? 공간이라 하는 것은 어떤 자연속의 한 부분을 뚝 떼어서 공간이라 하는 것이 아니고 이 공간을 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때 비로소 공간은 의미가 발생되는 겁니다. 그냥 비어있는 것을 공간이라 하지 않고 필요에 의해서 비어있는 그 공간이 누구를 위해서, 어떤 의미가 부여될 수 있는 새로운 인물이 그 앞에 있을 때 비로소 공간은 자체적인 의미가 수립되는 거예요.

자,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 공간을 창조할 때는 누구중심으로 공간을 창조하게 되어 있느냐 하면, 예수님 중심으로 공간을 창조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골로새서 1장에 보면 세상의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만들어졌거든요. 그런데 그 공간이 엉망이 되고 말았어요. 하나님의 사랑을 빼앗고 하나님의 공간의 의미를 아주 무시하는 그런 세력이 침투한 거예요.

어디에서? 도시에서. 여자가 오직 자기 사랑하는 남자 찾는다는 일념에서, 다른 것 아무것도 보지 않고, 이게 도시인지 들판인지 상관없이, 이 공간에 의미를 제공할 수 있는 짝을 만나기 위해서 헤매지만 사랑의 의미를 모르는 자들이 여자가 밤에 혼자 있으니까, 약한 자가 있으니까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쉽게 자기를 때렸고, 그 다음에 자기 웃옷을 벗겨서 가져가버렸어요. 옛날 옷은 비쌌던 모양인지.

그렇게 했는데도 불구하고 8절에 보면 “예루살렘 여자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 병이 난 것은 아가 2장 5절에도 나와 있어요. “너희는 건포도로 내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케 하라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음이니라.” 거기도 병이 났다는 이야기가 나오지요.

자, 상처의 원인을 봐야 하거든요. 왜 이 여자가 밤중에 돌아다니면서 그렇게 상처를 받았는가? 거기에 이유가 있어요. 엉뚱한 공간을 자기공간이라고 점유한 거예요. 내 것으로 차지했다는 겁니다. 왕이, 자기 남자친구인 사랑하는 애인이 원하는 것은 남자와 여자가 함께 있어서 만들어지는 사랑의 공간인데 이 여자는 남자가 왔음에도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면서 만나기를 주저했어요.

그러면 그것은 어떤 공간이냐 하면, 나 혼자 있어도 수립되는 의미로의 공간이라고 여겼던 겁니다. 공간에 대해서 엉뚱한 의미를 부여하고 공간을 자기중심으로 차지하고 있었던 거예요. 자신의 본래의 내 자리를 엉뚱한 곳에다 정립한 거예요. 자, 여러분 자리는 어디입니까? 

상처라는 것, 그 사랑하는 자와 함께 있을 때는, 이미 거기는 상처가 있지 않아요. 거기는 공간의 의미를 최종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상처가 없는데 제대로 공간의 의미가 미완료된다든지 모자랐을 때는 그 원인이 있어요. 이 말은 쉽게 말해서,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정신적으로 상처를 입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엉뚱한 곳을 내 곳이라고 자꾸 우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교회라는 거예요. 이 교회가 주님의 교회라는 거예요. 그것은 터무니없는 생각이에요. 주님의 교회라고 인간이 단정 지을 어떤 특정한 공간도 없습니다. 그것은 부동산이지 교회가 아니에요. 교회가 되려면 교회는 ‘우리가 있다. 우리가 몇 명 모였다.’를 가지고 교회를 정의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는, 성경 그대로 말씀드릴게요, 교회는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는 공간입니다.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는 공간인데 문제점은 그리스도가 안 보인다는 거예요.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아요. 그러면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은 그리스도가 어디 있는가? 만난 사람은, 성도 안의 그리스도의 모습은, 제가 주일 낮에 설교를 그렇게 했지만, 여기에 구멍이 나 있어요. 내 구심점이 되는 자리에 구멍이 나 있어요.

구멍이 나 있다는 말은, 이것은 제 자리 아닙니다, 라는 뜻이에요.
주가 들어설 자리를 제가 건방지게 차지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그 구멍의 변두리에 있어서 그걸 쳐다보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데서 뭐가 나오는가, 새 창조가 나오거든요.
하나님은 없는데서 창조했기 때문에 내 안에 창조되는 장소가 마련된 거예요.


그리고 창조되는 장소를 마련하는 그 힘으로 나는 매일같이 살고 있는 겁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자취를 하고 있는데, 아들이 자취를 하고 있는데 엄마가 와서, “야, 네가 혼자 살면서 왜 밥그릇이 두 개냐?” “이건 주님이 것입니다.”라고 할 때 “야, 주님이 너에게 밥 먹여주나?” “예, 밥 먹여줘요.” “서울에 와서 살더니 예가 미쳤구나.”

주님이 우리를 밥 먹여 주는 것이 맞습니다. 주님이 밥 먹여줘요. 그러나 만약에 주님과 함께 공동점유를 하지 않고 나 혼자 점유한다면 밥은 누가 먹여줍니까? 내가 노력해야 내가 밥을 먹고 살아요. 여기서 어느 것이 옳은 것이냐 할 때는 두 가지 타입의 현실이 등장하는 거예요. 여기서 이야기가 더 깊어집니다.

자의식이라는 것이, 그냥 내가 여기 이곳을 점유하고 이곳은 나를 위한 공간이라고 의미를 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여기서 반드시 뭐가 나오느냐 하면, 판단이 나와요. 이 판단은 뭐냐? 배척해야 될 대상과 수용의 대상을 내가 판단해버린다니까요. 너는 내 공간에 허용이 되는 사람, 혹은 허용이 안 되는 사람,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판단을 할 때 뭐라고 하느냐? 배척할 때는 뭐라고 하느냐? 내 스타일이 아닌 거예요. 그러면 수용할 스타일은 뭐냐? 수용할 스타일을 만났으면 이미 이 공간은 공동공간이 되겠지요. 같이 사니까. 그런데 아직 내 스타일을 못 만났어요. 80까지 살아봐라. 내 스타일을 만나는가. 계속해서 내 공간은 내 허락 없이는 아무도 들어오지 못한다, 가 확고한 겁니다. 내 공간에는 아무도 들어오지 못한다.

이것이 뭐가 되느냐? 오늘 강의 제목이지요. 마음의 상처가 돼요. 내가 나를 지키지 않으면 아무도 내 자리를 지킬 사람이 없어요. 이게 굉장히 맞는 말 같지만 어디서 잘못되었습니까? 처음부터 잘못되었지요. 뭐냐 하면, 내 자리가 있을 때만 나는 존재의 의미가 있다는 그것을 기반으로 한 거예요. 내 것이 있을 경우에만 나는 살 맛 난다는 것을 기반으로 깐 겁니다. 

한 번도 내가 없어지는 그것이 하나님께 유리하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한 번도 해 본적이 없는 거예요. 왜? 태어나기가 육적 혈육의 공동체에서 아담으로부터 계속 비정상적인 것을 이전받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아가를 공부하고, 수련회 끝나고, 복음 알아도 전부 다 말짱 소용없는 이유가 뭐냐 하면, 그 기조자체가 내 공간 윤택하기 위해서, 내 공간 더 풍성하기 위해서 그냥 성경을 이용한 것 밖에 안돼요.

교회에서 성경공부 한다. 또는 교회에서 부흥회나 집회를 한다. 왜 합니까? 내 교회 부수기 위해서. 그러면 되지요. 그러면 괜찮은 거예요. “내가 내 공간을 점유한 자체가 우리에게, 모두에게 마음의 상처를 줬기 때문에 이 상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리 다 부셔버립니다. 그래서 이번 부흥회 합시다.” 그러면 돼요. 그러면 되는 겁니다. 

“어머니, 친구 모셔왔어요.” “어떤 친구인데?” “우리 집 박살내는 친구” 그러면 돼요. 그게 십자가 사건이거든요. 네가 나를 핍박했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공격한다고 하지 마라. 너희들이 먼저 내 공간을 잘못 점유했고, 너희들이 나에게 침노를 했기에 하늘나라는, 천국은 이제 내가 너희를 침노하는 수순이다. 

모든 부부싸움은 공간점유싸움이었습니다. 이 가정 날 위해서, 이걸 가지고 싸운 거예요. 그런데 이 판단이 소용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이 아가에서 여자가 갖고 있는 젖가슴과 관련되어 있는데요. 모든 판단이 소용없는 경우는 뭐냐? 나에게 사전에 의논하지 않고 나를 잉태해서 태어나게 했다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내 태어남에 대해서 나하고 사전에 의논한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러면 우리는 내 주장을 근원적으로 정당성을 보장 못 받아요. 나는 이렇기에 내 판단은 옳습니다, 이렇게 하기에 내 주장을 내가 지키는 것은 옳습니다, 그래서 내 인생은 내가 지켜야 됩니다, 라고 좀 나쁜 말로 씨부렸싸면, 그렇게 중얼거리면 옆에서 엄마가, “그러면 너는 누가 낳았지?” 이 한마디에 훅 갑니다.

네가 없을 때 그 없는 너를 누가 생기게 했느냐 그 말이지요. “그것은 어머니이십니다.” “그러면 내 말 들어야지. 이게 좀 컸다고 어디서 내말을 안 듣고.” “나도 이제 나이가 스무 살이나 되었습니다. 이제는 내 의견도 펼쳐야지요.” 이래요. “어디서 씨부렸쌋노!” 이런 거요. “너는 백날 해도 내가 준 은혜에서 못 벗어나.” 이거거든요.

네 것을 만들면 좋은데 네 것을 만든다는 것은 네 것을 만들기 전에 먼저 뭘 취해야 돼요? 어머니 집에서 내가 태어났다는 것을 인정을 하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혈육공동체에서 확고하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에요. 왜 자꾸 머리가 빠지는지 몰라. 왜 그렇게 머리가 빠졌을까요? dna가 달라서 그래요. 

dna가 다르면 똑같이 애들이 일산화탄소에 중독이 되어도 누구는 살고 누구는 죽어요. 세 명은 죽고 네 명은 사는 것은, 한 방에 함께 있었어도 그렇게 서로 다른 이유는 dna가 달라서 그래요. 이것은 저의 이론입니다. 믿지 마세요. 일산화탄소에 대한 저항력이 사람마다 다 달라요. 그러면 왜 다르냐? 엄마가 달라서 그래요. 엄마 아빠가 달라서 그래요.

그러면 죽기 직전까지 갔다가 원주병원에서 살아나서 “엄마, 난 왜 이렇게 일산화탄소에 대한 취약성을 준 거야?”라고 그걸 따지면 엄마에게 맞습니다. “너 가스에 취해서 죽을래, 나한테 맞아서 죽을래?” 그것은 묻는 것이 아니에요. 다시 말해서 모든 인간의 판단에서 예외규정이 있다는 것, 예외규정이 있고 예외규정이 우리의 기초를 장식한다는 것을 우리가 놓치면 안 된다는 말이지요.

다시 말해서 나의 판단은 어거지라 그 말입니다. 모든 판단은 어거지예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날 때부터 이미 상처를 품고 상처를 키우면서 살아왔습니다. 왜냐하면 내 자리는 주님이 없는 자리로서 그 자리에서 잉태했기 때문에. 아가서에서 사랑으로서 완성을 한다는 것은 어느 자리부터 바꿔야 되겠어요? 

이것은 인간이 손댈 수 없는 근원의 자리를 바꿔야 되겠지요. 그 근원으로 찾아오신 분, 그게 바로 솔로몬이 갖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언약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어머니에요. 갈라디아서 4장을 보겠습니다. 너무 유명해서 여러분이 잘 아시는 말씀이지요. 안상홍집단하고는 별관계 없어요. 

갈라디아서 4장 26절에 보면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자유 나왔지요. 노루, 사슴, 비둘기. 자유자니 곧 뭐다? 그 자유자가 이름이 뭐냐 하면, 곧 뭐다? “우리 어머니라.” 다시 말해서 ‘자유’한데서 출생한 자라야만 제대로 공간을 점유할 자격이 있다는 말이지요. 뿌리는 못 건드리고 곁가지만 건드린다고 네가 구원받는 것 아니라 그 말입니다. 

우리의 존재의 근원을 만나야 돼요. 원천을 만나야 돼요. 쉽게 말해서 우리의 창조주를 만나야 되는 겁니다. 창조주를 만나려면 어떻게 만나는가? 원래 나라는 자체가 이미 상처를 안고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것을 자인해야 되고 인정해줘야 돼요. 우리는 마음속에 상처 있다. 상처 있는 주제에 판단을 왜 해요. 맹세를 왜 합니까? 

온전치 못한 인간이 무슨 소리를 해도 그것은 온전치 못한 거예요. 우리는 아무리 행하고 거룩하고 경건하고 해도 그것은 상처가 있는 경건이고 상처가 있는 거룩이에요. 우리가 내세우는 아름다움은 오류 있는 아름다움이에요. 불행한 아름다움입니다. 잠시 아름다워 보이지만 끝은 비극이에요. 

그러면 이 상처가 있는 것은 분명한데 이 상처가 있는 이유가 뭐냐, 라고 했을 때 처음에 하나님이 창조할 때, 사람을 만들 때 남자 만들고 그 다음에 뭐 만들었습니까? 여자 만들고 난 뒤에 둘을 만들고 그 둘을 하나로 했잖아요. 둘로 쓰고 읽기는 하나로 읽었다는 말입니다. 남자와 여자 둘을 만들고 그것을 하나로 본 거예요.

하나가 되려면 뭐로 되어야 돼요? 우리가 다시 둘로 가야 이게 하나가 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스스로 하나지만 이 일을 위해서 스스로 둘이 되신 거예요. 주님 자신이 둘 되신 거예요. 남자 역할과 여자 역할 두 다를 하신 거예요.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통합되는 겁니다. 

남편은 아내 사랑하기를 예수님께서 교회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바친 것같이 하고 여자는 남편을 존경하기를 주님 존경하듯이 하라. 그래서 누가 이득이냐? 남자가 이득이냐, 여자가 이득이냐, 가 아니라 거기서 뭘 구현한다는 말이에요? 우리 가운데 누가 계시다? 우리의 원천이, 우리의 창조의 원천자가 우리와 함께 살고 있을 때 그 공간은 나의 공간, 너의 공간이 아니고 주님의 공간이 되는 겁니다.

아가가 표방하는 그 원리가 신약에서는 그렇게 완성되는 거예요. 자, 이 시간에 내린 결론은 뭐로 잡느냐? 사랑을 얻게 되면 어떤 모습이 있습니까? 사랑을 얻게 되면 우리는 이 땅에서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공간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요. 이 도시 자체가 들판이 아니고 자연이 아니잖아요. 인공적이잖아요. 

인공적인 것에 의해서 우리는 상처를 입고 있는 거예요. 상처를 입고 있을 때는 어떻게 대처해야 됩니까? 아가 5장 8절에 나오지요. 그렇게 옷 벗기고 얻어맞으면 경찰서에 고소해야 되고 고발해야 됩니까? 어떻게 해야 됩니까? 5장 8절에 보면, “예루살렘 여자들아” 뭘 부탁하지요. 대신 고소해달라고? 진단서 끊었어요? 아니지요.

뭘 만나거든?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아~! 이것은 뭐냐 하면, 내가 상처를 받을 만해서 상처를 받았다는 거예요. 나는 상처를 받으면 안 돼, 라는 그런 고집을 피울 수 있는 자격이 못 된다는 겁니다. 우리는 얻어맞게 되면 얻어맞아야 돼요. 그게 최적화되어 있으니까. 내가 살아온 인생이 엉망진창이니까 그것은 적절한 거예요. 

사람마다 보세요. 302동, 105동, 어느 동네, 어느 곳이라도 사연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 사연이 있어요. 어떤 사람은 골프를 치는데 골프채가 부러져서 그런 사연이 있고요. 어떤 사람은 비행기 타고 해외 놀러 가는데 비행기시간이 30분 연착하는 사연이 있고요. 남들 보기에는 그런 것은 사연 값도 안 되는 것을 가지고 까부는 것이지만 어쨌든 간에 그것도 사연이에요.

모든 사람들은 나름대로 불만족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는 왜 저 가정처럼 행복하지 않느냐? 모든 인간이 모든 인간에 대해서 성냥팔이 소녀에요. “성냥 하나 사주세요~!” 눈이 펑펑 오는데, 한 3미터나 온 것 같아요. 눈이 펑펑 내리는데 춥기는 얼마나 추운지. 

그런데 창문 안쪽으로 보니까 크리스마스라고 케이크 자르면서 행복하게 크리스마스노래를 부르고 있으니까 성냥팔이 소녀가 그게 부러워서 ‘아, 나도 엄마가 있었으면’ 여기 엄마가 나오지요. “엄마가 보고플 때……” 엄마가 있으면 얼마나 좋겠나, 하고 성냥 하나 그어서 “아, 추워라.” 꺼지면 또 하나 켜고. 성냥개비는 딱 세 개 있었거든요.

아침에 보니까 그 소녀가 죽어 있었어요. 죽어 있는데 그 시체를 하늘나라에서 어린아이가 보고 있다는 그 장면. 끝. <성냥팔이 소녀> 골로새서 3장 3절입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땅에서 너희 생명은 죽었고 너희 생명은 하늘나라 금고에 적절하게, 제대로 안정되어 있느니라. 

아가는 노래입니다. 천국의 노래에요. 천사들의 노래와 같이 섞일 수 있는 노래입니다. 아가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은 “가만 있거라. 내가 아가로서 다가갈게. 아가의 완성으로서 다가갈게.” 하지만 네가 할 일은 뭐냐? 이 도시 같은 이 세상에서 원 없이 상처받아라. 너는 상처받을 만하니까. 

상처가 오면 안 돼, 하는 그 따위 건방진 교만을 떨지 말라. 상처 받아라. 상처 받을 때 너의 태도가 뭐냐? 내 사랑하는 사람은 어디 있나이까. 이겁니다. 내 사랑하는 사람은. 나를 개선해 달라든지, 이 상처를 치료해 달라, 힐링해달라, 그런 소리 안합니다. 나는 죽어도 좋으니까 내 사랑하는 사람 곁에 묻어다오. 뭐 이런 거지요.

내 사랑하는 사람 곁으로 가게 해달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 뭐냐? 상처받아도 상관없다는 거예요. 또 상처 없는 사람도 없고. 중요한 것은 상처를 받는다 할지라도 그것조차도 아름다우니까. 그것조차도 주님께서 우리를 굉장히 예쁘다 하시는 거예요. 

누가복음 2장에 보면, 목자가 있는데 목자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거든요. 시급 7천8백5십 원을 받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데 그 때 갑자기 천사가 나타났어요. 천사가 나타났는데 천사하고 딜(거래)한 것 없어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어요. 천사가 일방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너도 그 평화에 해당되니까 빨리 가서 그 구심점이 어딘지, 어디서 평화가 왔는지, 무엇 때문에 나한테 평화가 주어졌는지, 시급 알바한테 왜 구원이 있는지, 빨리 쫓아가서 봐라. 객관적 증거를 봐라. 가보니 가까운데 거기 있거든요. 제가 달려가 보니까 거의 한 1킬로미터쯤, 많이 봐줘서 한 1.5킬로미터. 오다가 공방 들러서 온다고 좀 걸렸지만.

그 목자들이 들판에서 달려가서 베들레헴 탄생교회까지 오는데 약 1.5킬로미터쯤 되는 것 같았어요. 달려가서 보니까 거기에 아기 예수가 누워 있었습니다. 목자라는 직업이 중요하지 않고 아기예수와 결부되었다는 이 상황이 하늘에서 뭐라고 평가하느냐 하면, 그게 바로 평화, 모든 것이 완료. 그 천사가 노래를 불렀거든요. 그 노래의 가사내용이에요.

그 노래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 이미 구원에 입성했다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그 노래를 보고 있잖아요. 상처받았지만 이 여자는 사랑하는 자를 찾으러 다녔다. 그리고 그 여자는 5장 12절에 보면 “눈은 시냇가의 비둘기 같은데 젖으로 씻은듯하고 아름답게도 박혔구나.”

아까도 했지만 아름답다는 것은 무엇과 교환될 수 있는 의미냐? 바로 자유함. 자유함이란 뭐냐 하면, 네가 어떤 짓을 해도 너한테 책망하거나 나무라지 않을게, 라는 그거거든요. 이게 로마서 8장에 나오는, 너희에게는 정죄함이 없나니, 와 같은 이야기에요. 예수님이 너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음으로 누가 너를 정죄하리오. 

정죄함이 없다는 말씀도 로마서 8장 1절에 나오지만 로마서 8장에서 더 나가면 더 심하게 해요. “누구야! 누가 내 사람을 나무래?” 이거거든요. “누가 너를 정죄하리오. 그를 위해 죽으신 분이 계신데. 사탄이야? 걱정하지 마. 환란, 곤고, 핍박이야? 걱정하지 마.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네가 절대로 끊어지지 않을 거야.”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 하니까 “목사님, 그 말이 참 좋은 말이기는 좋은 말인데 제가 어떻게 하면 그 말을 믿을 수 있습니까?”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갑자기 상처 입은 자의식이 또 동원되고 있는 거예요. 그게 문제성 있는 자의식이라니까요. 그거 믿어서 누구 덕 보려고? 자의식을 못 놓겠다는 거예요. 이 귀한 것을, 평생 동안 지켜온 이것을 왜, 이 캐슬을, 스카이캐슬을 왜 깨요? 

아무리 좋은 것이 있다 해도 전부 다 그것은 내 자의식을 내가 지키는 그 개 버릇을 못줘서 잔뜩 끌어 모으는 것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상처가 낫지를 않아요. 상처는 주님의 공간을 내 공간이라고 잘못된 점유를 하는데 비롯된 거예요. 내 판단, 내 스타일, 이것은 의미 없어요. 

3장 봅시다. 왔다 갔다 해야 될 이유가, 어느 것이 하이라이트인지 분간도 못하게 나옵니다. 그 하이라이트중 하나가 바로 3장 6절부터 나와요. 이게 혼인행렬이에요. 보통 소설 같으면 3장 6절부터 11절이 아가서 제일 마지막에 나와야 돼요. 둘이 사랑해서, 빰빠빠밤~,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살았단다. 이렇게 나와야 되지요. 유백이하고 승천이하고 둘이 결혼해서 잘 먹고 잘 살았단다. 유백이가 누군지 몰라도 괜찮아요. 케이블tv 드라마에요.

그렇게 나와야 된다고요. 그렇게 나와야 되는데 이것은 3장 중간에 끼어들었어요. 끼어들었든지 어쨌든 간에 3장 6절부터 뭐가 나오는가? 혼인퍼레이드를 합니다. 우리 임금님이 결혼식 합니다, 라고 퍼레이드를 하는 거예요. 제일먼저 등장하는 것은 남자가 먼저가 아니고 여자가 먼저 등장하지요. 

그 여자가 어떻게 등장하느냐? “연기 기둥과도 같고 몰약과 유향과 장사의 여러 가지 향품으로 향기롭게도 하고 거친 들에서 오는 자가 누구인고” 거친들, 광야에서 나오면서 맘껏 향기를 뿜어내는 거예요. 여자들이, 특히 단발머리 한 여자들이 향기 뿜어내는 방법은 이겁니다. (머리를 손으로 찰랑 뒤로)심심하면 이렇게 제켜요. 

머리에다 뭘 뿌려놓으면 향기가 풀풀 날리지요. 그것은 인위적인 거고요. 여기서는 거친 광야에서 오지만 향기가 뿜어져 나온다는 겁니다. 자, 향기라는 것은 썩어짐이 중지된 것을 말하지요. 악취는 썩어질 때만 나오는 것이 악취거든요. 향기가 나온다는 것은 아무리 세월이 가도 여성이 아니고 새로운 여성성이 계속 뿜어져 나오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여자에게 주님의 사랑의 잉여, 사랑의 여분의 것이 계속 작용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세리와 창기와 강도가 있잖아요. 막달라마리아, 이런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그 사회에서 거부당한 사람들이에요.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그 사회 기준으로 볼 때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이에요. 

비윤리 비도덕적이라는 것은 그 사회계급에서 저주의 구체화, 저주의 노골화, 이 땅에 저주가 있고 복이 있다는 것을 객관화시킨 것이 바로 세리와 창기와 강도입니다. 그래서 그 사회 자체가 이 사람들을 저주의 산물로 보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쪽 편에 선 거예요. 세리와 창기가 너희들보다 먼저 천국 간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이미 그 사회에서 이 여자를 제일 밑바닥의 지옥에 가도 영순위로 가야될 사람들로 보는 거예요.

특히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계실 때 이 세리와 일 대 일로 배틀 붙은 사람이 있지요. 누굽니까? 바리새인이 붙었잖아요. 누가복음 18장이지요. 맞네요. 맞추면 기분이 좋아요. 의존교회에서 강의를 하는데 계시록 5장에서 ‘유대지파의 사자 다윗이 뿌리’ 할 때 그 ‘사자’가 라이언인지 메신저인지 하다가 분명히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사자(라이언)가 맞는데 자신이 없어서 ‘메신저’라고 했다가 나중에 다시 전화를 해서 ‘라이언’으로 바꾸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맞추는 것이 이상할 정도에요.

세리와 바리새인, 저주의 대표자와 축복의 대표자가 일대 일로 배틀을 붙었어요. 이렇게 붙는 것은 장차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을 때의 의미를 사전에 담아놓습니다. 내가 죽는 것이 과연 죄 많아서, 귀신들려서 죽는 것인지, 아니면 오히려 귀신들렸다 하는 너희가 귀신이 들린 것인지를 분명히 보여주기 위해서 이 사건을 일으켰거든요.

세리가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나는 죄인이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사람들 보기에 저주 받은 자가 맞아요. 저주받은 자에서 ‘나는 저주받아 마땅함’이 나올 때는 이것이 곧 축복에 속했기 때문에 나오는 거예요. 잘못되게 공간을 내가 점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상처받을 만합니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 공간은 내가 주인공으로 점유할 공간이 아니고 나의 원천자, 나의 창조자 그분에 의해서나 점유될 공간입니다, 라는 것을 고백하는 거지요.

그런데 바리새인은 뭐냐 하면, 자기가 죄인이라고 할 어떤 대상자가 없어요. 하나님 앞에 자기자랑을 떠벌이고 있습니다. 나는 십일조도 했고요, 금식도 했고요, 때맞춰서 구제도 했고요, 요새말로 교회에서 시키는 대로 다 했습니다, 하는 그런 사람 쪽입니다. 

예수님께서 순회재판을 해버렸어요. 법원이 없는 산골짜기라면 판사가 순회하면서 재판하잖아요. 옛날 중세 때 보면 그렇게 하는데 주께서 순회재판을 하는 거예요. 최종판결을 내렸습니다. 세리는 천국, 바리새인은 지옥. 이게 뭐냐 하면, 본인만 있을 때는 내리지 않다가 상대를 만났을 때 판결을 내리는 이유는, 둘 다 천국 갈 자격, 지옥 갈 자격은 없음을 분명히 하는 가운데서 진행돼요.

만약에 내가 단독적으로 있으면 단독적으로 나는 천국 갈만 하다고, 예수 믿으니까 천국 갈만 하다고 이야기하겠지요. 그러나 정작 비교되는 사람이 같이 있으면 그 사람보다 낫기 때문에 천국 가는 것이 아니에요. 세리가 바리새인보다 낫기 때문에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일방적으로 조치를 했기 때문에 천국 간다는 겁니다.

세리는 자기의 마지막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요. 나는 지옥가야 마땅함을 아는 반면에 저쪽은 뭡니까? ‘나는 천국 갈 가능성이 농후할 걸. 난 1등급이니까.’ 1등급 서울우유거든요. 1등급우유니까. 그렇게 본 거예요. 그래서 구원받는 자의 태도가 뭐냐 하면, 저 사람보다 나으니까 나는 구원받는다, 가 아니라 주님의 의외의 조치에 의해서 구원받았습니다.

내가 주님과 거래할 여지가 아예 없는 상태에서 구원되었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왜 그런가? 그래야 천국가면 오직 주님께만 영광을 돌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3장으로 다시 오게 되면 혼인행렬에서 향을 아예 몰고 다니지요. “이는 솔로몬의 연이라” ‘연’이란 솔로몬의 가마라는 뜻이에요. 

“이스라엘 용사 중 육십인이 옹위하였는데” 이제는 솔로몬 이야기입니다. 여자가 등장하고 그 다음에 솔로몬이 등장해요. 연기기둥으로 오는 이것은 여자를 말하고, 거친 들에서 오는 것은 솔로몬이 가마를 타고 올라옵니다. 이스라엘남자 60명이 호위하는데 행렬이 왕의 행차답게 아주 웅대하지요. 장엄합니다. 위용이 넘치는 겁니다.

“다 칼을 잡고 싸움에 익숙한 사람들이라” 여기에 칼이 나옵니다. 싸움에 익숙한 보디가드들, 태권도 유단자들이라는 말이지요. “밤의 두려움을 인하여 각기 허리에 칼을 찼느니라.” 갑자기 사랑의 분위기가 넘치고, 향기니 아름다우니, 이런 대자연의 낭만적인 분위기가 확 깨지지요. 분위기가 갑자기 살벌해지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바로 왕의 위용이지요. 3장 9절에 “솔로몬 왕이 레바논나무로 자기의 연을 만들었는데 그 기둥은 은이요 바닥은 금이요 자리는 자색 담이라 그 안에는 예루살렘 여자들의 사랑이 입혔구나 시온의 여자들아 나와서 솔로몬 왕을 보라 혼인날 마음이 기쁠 때에 그 모친의 씌운 면류관이 그 머리에 있구나.” 

아가의 마지막 대목에 나올법한 이 장엄하고 거대한 혼인잔치 이야기를 여기서 나열했을 때에 뭐가 부각되느냐 하면, 왕의 위엄이 부각이 되는 겁니다. 결국 이것을 최종적으로 본다면 그동안 이 정도까지 살벌한 분위기를 의도적으로 일으키면서 위용 있게 나서도 될 만한 자격자가 그동안 시커먼 여자하나 그렇게 보고 싶어서, 자기 쪽에서 서슴없이 그 여자 집까지 찾아가면서 그렇게 애쓰고 노력한 겁니다.

이 이야기가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데 이보다 더 살벌하지요. 더 영광스럽고요. 요한계시록 1장에 나옵니다. 한 대목을 읽어보게 되면 13절에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여러분, 눈에서 불꽃 튀어나온다고 생각해 보세요.

가히 접근금지입니다. 무서워서 못갑니다. 요한계시록 1장 15절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단단하다 그 말이지요. 안정되어 있다.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많은 물소리 같다는 말은 모든 잡소리는 가라, 그 말입니다. 내 소리만 우월하다는 뜻이에요. 웅웅, 거리면 쉿! 가만있어! 내 소리만 우르르르, 퍼지는 거예요.

마이크 데시벨 많이 올려놨다 그 말입니다. 세상 많은 정치꾼들의 이야기, 양승태가 어떠니 그런 것들 다 주님의 음성에 묻힌다 그 말입니다. 그 정도로 우리 남편은, 우리 신랑은 대단하다는 이야기에요. 우리 남편이 이 정도 같으면 우리가 좀 상처받아도 괜찮지 않습니까? 왜? 남편 안 계셔요? 

아가서에 어울리지 않는 표현들, 칼을 찼다는 것, 밤의 두려움으로 인하여 각기 칼을 차고 솔로몬 왕을 호위하고 있다는 것, 갑자기 낭만적인 사랑의 분위기가 확 깨지고 정치적 쿠데타음모를 발견한 것처럼 군사적 모드로 가잖아요.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왕은 하는 일이 뭐라고요? 왕은 하는 일이 뭐라고 했습니까? 처벌하는 거지요. 법대로 처벌하고 통치하는 거예요.

그 통치는 인정사정없습니다. 법대로 해야 되지요. 그래야 질서가 잡히니까요. 단호함이고 냉혹함이고 냉정함이에요. 그러려면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어야 되고, 봐주는 것 없고, 냉철한 정신을 갖고 있어야 되지요. 그 위용이 아가 3장에 그대로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놓고 4장 넘어갑시다. 

그래놓고 갑자기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 너울 속에 있는 네 눈이 비둘기 같고 네 머리털은 길르앗산 기슭에 누운 무리 염소 같구나 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온 털 깎인 암양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구나.” 이렇게 넘어가니까 이것은 마치 어떤 광경이 연상되느냐 하면, tv에 나와서 청와대대변인이 “이번에 남북정상회담 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기자들 질문은 받지 않겠습니다.”

이걸 보고 있던 청와대 대변인 부인이 “여보, 오늘 김치 치게 해놨어.” ‘네가 백날 밖에 나가서 공적으로 냉혹하게 해도 너는 나의 예쁜 베이비야. 내 남자야.’ 그렇게 보는 거예요. 세상이 보는 내남자하고 내가 보는 내남자하고 벌써 분위기자체가 다른 거예요. “술 먹지 말고 빨리 집에 들어와. 술 먹었다가는 넌 죽었어. 네가 대변인이든 정치를 하든 관계없어. 그랬다가는 너는 죽었어.” 이런 것 하고 똑같은 거예요.

거기에 남편이 맞춰준다는 것, 그 냉혹한 정치적 카리스마를 아낌없이 다 포기하고 가질 수 있는 모든 아양과 재롱을 아내에게 다 쏟아 붓는다는 거예요. 자기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게 자유 아닙니까? 그게 아내의 자유에 걸 맞는 자유거든요. 사람이 자기 직능과 역할을 가지고 자칫하면 자기 자신이라고 착각할 수가 있어요. 

4장을 보는데 이 번역 말고 다른 번역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정녕 그대는 아름답구려 나의 여인이여 정녕 그대는 아름답기로 너울 뒤에 보이는 비둘기”라고 해놓고 “진홍색 줄과 같은 당신의 입술 당신의 말은 감미롭구려 당신의 볼은 석류의 틈 같다오 너울 뒤에서 다윗의 탑과 같이 그대의 목은 보루요 방패가 되었군요.”

이 말은 남편왕의 위상에 걸 맞는 당신은 마치 여전사와 같이 당당하군요, 라는 뜻입니다. 당당하다는 거예요. 현재 술람미여인이 어떤 모습인가를 연상할 수 있는 것은 이 부분밖에 없어요. 여자가 대가 세다는 거예요. 할 소리 다 하고 있다는 겁니다. 쫄리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거예요. 자유가 주는 이미지지요. 스타일. 자유가 주는 스타일이에요.

목사가 되어서 가장 존경스러운 성도가 있다면 절대로 목사 눈치 보지 않고 주의 뜻대로 살아가는 분입니다. 정말 존경합니다. ‘너만 예수 믿나? 나도 예수 믿는다.’는 이 배짱, 그 배짱이에요. 네 말을 참고는 하되 절대로 네 지시에 따르지 않는다는 그 당당함. 그게 다윗의 망대에요. 

다윗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거든요. 언약에 의해서 성립된 성전입니다. 다윗의 망대를 가본 적이 있어요. 욥바에 다윗이 망대가 있어요. 거기서 석류즙을 천오백 원 주고 마신 적이 있습니다. 그 대목을 동영상으로 올려놨어요. 어떤 사람이 기타를 치면서 노래한 대목이, “욥바 성 문에서……” 하는 것을 찍어놨습니다. 그 장면에 이상현 목사님 나옵니다.

그다지 높지는 않는데 주변에 높은 것이 없으니까 거기서 우뚝 솟아서 유독 높아요. 당신의 목덜미는 남자라 하더라도 감히 건드릴 수 없을 정도로 당당함이 있습니다, 하는 것이 남자가 여자의 아름다움의 이유로서 거론한 거예요. 여러분이 이제 이 말을 들었으니까 전부 다 목을 척, 세워서 돌아다니시면 됩니다. 

“거기는 천개의 방패가 달렸으며” 그러니까 걸 맞는 거지요. 남편의 용감함 이상으로 부인도 꿀릴 것이 없는 거예요. 주님의 사랑인데, 당신 사랑이 아니고 주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당신 앞에서도 꿀리지 않는다는 그 당당함. “용사들의 화살 통이 거기에 있구려 당신의 두 젖가슴은 연꽃 있는 풀을 뜯는 한 쌍의 젊은 사슴 쌍둥이 노루 같다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자기에게 없으니까 아름다운 겁니다. “하루 숨을 쉬면서 그림자가 드리울 때 나는 몰약의 산 유황의 언덕으로 가리라 내 애인이여” 그 언덕으로 오라 그 말이지요. “그대에게는 흠이라고는 하나도 없구려.” 그대에게는 흠이라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 하는데 또 그런 여자 찾으려고 하지 마세요. 인공적인 조건보고 사랑하는 것은 욕망의 사랑이기 때문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 조건 바뀌면 사랑도 철회해야 되지요. 내가 임의로 설정한 조건에 맞춰서 사랑을 해버리면, 그 조건에 변동이 일어나게 되면 조건 안 맞다는 그 이유로 그 사람과 헤어지게 되어 있어요.

따라서 제가 제시하는 그 방법은 뭐냐? 그 사람의 그 자유함이 주님의 일방적 사랑에서 나오는 그 자유함이 있을 때는 세월 따라 변하는 그 사람의 여성이 문제가 아니고 ‘여성성’은 영원하다 그 말입니다. 4장 9절 “나의 누이, 나의 신부여, 그대가 내 마음을 빼앗아갔소이다.”라고 되어있지요. 마음을 빼앗았지요. 

이것 하고 마치겠습니다. 빼앗는다는 말은, 사랑이, 그 아름다움이 빼앗는거지요. 이렇게 보시면 돼요. 여자가 있고 남자가 있는데 중간에 뭐가 생겼다? 사랑이 개입하지요. 사랑이 나의 자의식을 빼앗아서 그냥 억지로 주는 것이 아니고 “당신, 그대는 너무 아름답구려.” 하면서 빼앗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빼앗기면서도 즐겁고, 빼앗기게 해준 것을 고맙게 여기는 겁니다.

그대 있음에, 그대가 아니었으면 어떻게 내 자의식이 해체될 수 있었을까? 그대 있음에 나는 없어도 좋아요. 이은미의 노래에도 나온다 했지요. 그대 있음에 나는 없어도 좋아요. 그 고백이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되었다 이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기적입니다. 

저녁식사 할 때 되었네요.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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