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자료

7.아름다움 190114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1. 19. 17:02
2019-01-19 15:29:45조회 : 5         
2019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7강-아가 강해 : 아름다움이름 : 이미아 (IP:122.43.170.138)

2019 겨울수련회 아가서 제 7강(아름다움-이 근호목사)

 

자, 시작하겠습니다. 아가서를 보면서 좀 냉철한 이성으로 보게 되면 짜증나고 화가 나는 대목들이 많이 나와요. 그거는 뭐냐 하면 아름답다고 자꾸 우기는데 있다는 겁니다. 도대체 얼마나 아름다운지 좀 궁금해요. 사진으로 좀 찍어서 각자 스마트 폰으로 보내줬으면 좋겠어요. 솔로몬이 “우리 애인이 이렇게 아름답다! 이쁘지? 그지?”라고 하게 되면, 좋아요! 한 70퍼센트 싫어요! 한 30퍼센트 나올 겁니다. 성경이니까 아름다우면 아름다운 줄로 알겠는데, 우리의 인생의 체험상 남이 아름답다고 한 것에 선듯 동의하기가 힘듭니다.

 

그런데 아가서를 쭉 읽어보면 일방적으로 윽박지르고 가요. “내 애인은 무지무지하게 아름답다!” 그걸 상당히 무례하게 강요하는 그런 느낌이 있습니다. 강요하는 그런 느낌을 받아요. 아가서 1장 8절을 봅시다. “여인 중에 어여쁜 자여 네가 알지 못하거늘”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또 비교급을 써요. “여인 중에서 최고 아름다운 여인이여!”라고 하는 거예요. 그럼 우리가 아가서의 대목을 따라가면서 솔로몬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서 애를 써 봐도 벌써 이 대목에 있어서 우리의 상상력을 강제로 동원해야 될 그러한 부담을 느낍니다. 여인 중에서 어여쁜 자? 누구지? 송혜교인가?

 

뭔가 상상을 한다는 것은 대비되는 대상과 연결시켜서 보기 마련인데, 여인 중에서 어여쁜 여자? 그러니까 여인 중에서 어여쁜 여자라고 하는 것은 서울시내 강남에서 최고 예쁜 여자와 저 소록도에서나 안 그러면 외딴섬에서 제일 예쁜 여자와 이거는 비교자체가 안 되겠죠. 우리 동네에서 제일 맛있는 중국집이 있다, 근데 그게 서울의 맛 집과 비교가 되겠습니까? 우리 동네에서 니가 제일 공부 잘한다, 공부 제일 잘하겠죠. 근데 전국에서는 어떻게 되는지, 그거는 비교할 수가 없죠.

 

성경에서 에스더가 이쁘다고 했습니다. 그거는 어디까지나 바사나라에서 이쁘겠죠. 바사나라에서. 페르사나라에서는 이쁘겠지만 바벨론이나 다른 나라에서는 다시 한 번 이것이 후질 수가 있어요. 영 못할 수가 있다고요. 한때 예뻤던 사람, 우리 시대에 예뻤던 사람과 60년 시대에 예뻤던 사람과 다 달라요. 60년대에 이뻤던 사람은 김지미입니다. 그리고 젊은 사람들이 누구 예쁘다고 하면 막 화를 내요. 김지미를 놔두고 어디서 그런 소리를 하느냐?

 

그럼 젊은 사람들이 김지미가 얼마나 예쁜지 보자. 보니까 할머니네. 70년대 예뻤던 사람은 정윤희입니다. 70년대는 정윤희거든요. 지금 막 동의하거든요. 근데 젊은 사람들은 동의 안 합니다. 정윤희 앞에서 누굴 예쁘다고 감히! 근데 이건 정윤희, 김지미는 아무 상관이 없는데 자기들 팬끼리 싸우고 있어요. 그리고 정윤희 하고 누구를 붙여가지고 트로이카 여배우라고 하면 그 트로이카에 막 화내요. 베스트 중에 베스트인데 무슨 트로이카 3인방으로 왜 묶어요? 안 되죠. 어디 장미희, 유지인을 정윤희에다가 비교해요?

 

그러니 아가서를 좀 순종하는 마음으로 마음을 낮춰서 솔로몬이 계시를 잇고 있으니까 좀 따라가려고 해도 여인 중에 여인을 자꾸 부추기니까, 같이 부추기려면 부추길만한 소스를 줘야죠. 소스를. 어디 실제로 사진을 찍어서 준다든지. 이래야 되는데, 그냥 이쁘니까 따라오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가서 따라가기에 약간의 화남 또는 울분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가서를 보는 입장에서는 도대체 아름답다는 것이 어느 정도의 아름다움인지, 그것을 정리한다는 것이 굉장히 힘들죠.

 

그런데 이렇게 아름답다는 것, 우리가 육적으로 정말 이거는 반할 정도로 아름답다고 하는 그 자체가 아가서에서 우리가 뭔가 현혹된 거예요. 뭔가 낚인 거예요. 그 아름다움이 그 아름다움이 아닌 겁니다. 그것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잠시 잠언서를 보겠습니다. 잠언서 제일 마지막장 31장 30절에 보면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라고 되어 있죠.

 

이미 여기 잠언서에서는 깔끔하게 결론지어졌습니다. 아름답다는 외모적인 평판을 가지고 최고의 아름다운 것이 아니고, 그 여인을 통해서 나오는 모습들이 여호와와 관련되어 있고 여호와에게 칭찬받을만하기 때문에 그것을 하늘나라에서는 아름답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일단 우리는 안심이 되죠. 이 잠언서만큼은 우리가 아름답지 않아도 하늘나라에서는 언제든지 아름답다는 가능성이 열린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안심 푹 놓고 아가서를 따라갈 수가 있는 거예요.

 

아가서에서 아름답다고 할 때에 그 아름다움을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면은, 여기에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아가서 7장 6절에 보면 “사랑아 네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라고 했어요. 5절에서는 머리는 갈멜산 같고, 그만큼 숱이 많고 시커멓다 이 말이죠. 머리털은 자주 빛이 있고, 광택이 난다 이 말입니다. 4절에, 눈은 헤스본 바드랍빔 문 곁의 못 같고, 맑디맑다는 뜻이죠. 코는 다메섹을 향한 레바논 망대, 이거는 콧대가 높다는 것입니다. 수술했는가? 그리고 그 키는 종려나무 같고, 멀대 같이 쭉 솟았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을 보고 우리가 조합을 하는 겁니다. 우리가 경험했던 것과 여기에 있는 것을 머릿속으로 이런 요소 저런 요소를 조합해서 하나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거예요. 이미지를 형성해보면 그다지 그렇게 이미지를 형성해도 반할만한 정도의 아름다움은 아니죠. 8절, 네 유방은 포도송이 같고, 유방이 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이것까지 따로 비교하게 되면 이게 무슨 컵(사이즈)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이게 말이 안 되거든요. 얼마나 그 포도송이가 탐이 났던지, 종려나무에 올라가서 그 가지를 잡으리라, 그걸 갖고 싶다.

 

제가 이걸 할 때에 남자들은 어디에 반했다고 했습니까? 차이에 반했다. 누구하고 차이냐 하면 자기 자신에게 없는 것을 갖고 있는 거. 그러니까 여기서 솔로몬이 여인보고 반했다고 하는 것은 자기하고 대비해볼 때 자기에게 미흡하고 누락된 것을 상대방 여성이 갖고 있을 때 그 차이를 아름답다고 보는 거예요. 그건 어디까지나 솔로몬이 보기에 제일 아름다운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그건 솔로몬, 당신 보기에 아름다운 것을 다른 사람에게 자꾸 거기다가 동조하라고 자꾸 윽박지르지 마세요.” 그렇게 하면 솔로몬이 하는 말이 “내가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주님의 안목 앞에서 아름다움이니까, 내가 아름답다고 할 때 그걸 탓하지 말라.” 이래 나올 거예요.

 

내가 보기에 아름다움은 그냥 아름다움이 아니고 주님의 안목이 듬뿍 담긴 아름다움이에요. 근데 너는 그 아름다움을 이해 못해가지고, 네가 아는 자연스러운 외형적인 아름다움을 가지고 같이 끼어들라고 하니까, 그거는 주님의 계시가 없는 너의 입장에서는 내 아름다움에 동조를 못하고 있다고 이렇게 정리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아가서에서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외모적인 아름다움, 그것 가지고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에요. 아름다움에 솔로몬이 반했기 때문에 외모적인 아름다움이 최고다, 이건 하나님의 계시다, 이렇게 돼버리면 이 세상에서 아름다움이 천당 가요.

 

이쁜 사람만 천당 가고. 이쁜 사람이 천당 가는 것은 괜찮은데 지옥은 못 생긴 사람만 지옥 간다면 이 중에서 못 생긴 사람은 희망이 없어요. 어린이 찬송가 바뀌어야 합니다. 어여뻐도 못가요. 맘 착해도 못 가요. 천국은 믿음으로 간다고 하는데 그 가사를 바꿔야 해요. 못생기면 꼭 지옥가요. 바뀌어야 돼요. 못생긴 것과 아름다운 것으로 그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질 건데, 휴전선처럼, 그 커트라인이 어느 정도 되느냐, 전국 순위 몇 위까지 잘리느냐, 이래 되거든요.

 

그런데 아가에서 이 아름다움이 여자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아름다움이 남자에게도 해당이 됩니다. 아가 5장 10절을 보면 “나의 사랑하는 자는 희고도 붉어 만 사람이 뛰어난다” 11절, 머리는 정금 같고, 뭐 염색했는가요? 그만큼 순수한 달빛이다 이 말이죠. 머리털은 고불고불하고 까마귀같이 검구나, 이 취향은 고불고불한 것을 좋아하는 취향이네요. DNA가 또 고불고불한 DNA를 좋아하는 모양이죠. 그러면 이 아름다움에서 한국 사람은 제외됩니다. 아프리카에 고불고불한 사람이 많거든요.

 

그리고 눈은 시냇가에 비둘기 같은데 젖으로 씻은 듯하고, 아, 이런 것 상상하기 힘들어요. 시냇가에 비둘기, 나는 시냇가에 비둘기 냄새만 나고, 저리 안 비켜! 하고 발로 차면서 귀찮기만 한데, 근데 시냇가에 비둘기 젖으로 씻은 듯하고, 씻음 받은 비둘기하고 안 씻은 비둘기하고 전혀 차이를 못 느끼겠는데요. 뺨은 향기로운 꽃밭 같고, 꽃밭이라고 하는 것은 화사하다는 그런 뜻이겠죠. 그러면 뺨이 화사하다는 것은 일단 60대는 아니라고 보면 되죠.

 

아니, 따져보세요. 이쁜 50대하고 못생긴 20대하고 누가 이뻐요? 못생긴 20대가 이뻐요. 왜냐하면 아직까지 건강미가 유효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20대는, 특히 10대는 못생겨도 탱탱해요. 젊음 자체가 아름다움을 발산하고 있습니다. 한때 뭐, 이영애가 산소 같은 여자라고 했는데, 글쎄요 몇 년 만 지나면 일산화탄소로 바뀔 수가 있어요. 그거 관리한다고 돈을 얼마나 들였겠어요? 세월을 누가 이깁니까? 시간을 누가 이깁니까? 그래서 노인네들은 사진을 안 찍으려고 하는 거예요. 사진을 찍어놓으면 본인이 본인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뭐 이런 귀신이 다 있나? 해가지고 안 찍으려고 합니다.

 

향기로운 풀 언덕과도 같고, 연두색이다 이 말이죠. 꽃밭 같고 연두색 같고 생기가 돈다 이 말입니다. 입술은 백합화 같고, 남자 입술이 백합화 같아서 이거 어디에 써먹을 건데요? 몰약의 즙이 뚝뚝 떨어진다, 아하! 몸에 탄력이 있어가지고 쭈글쭈글하지 않고 탱탱하다는 뜻이거든요. 근데 이렇게 탱탱하다고 아무리 좋은 장점을 끄집어내도, 이렇게 한 모든 것을 조합한다고, 우와! 미남이라고 절대로 이런 생각이 안 듭니다.

 

그러니까 아가서에 집중하고 싶어도 아가서 자체가 집중을 막아요. 그러면 아가서에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평소에 사람을 볼 때, 묘사할 때 모든 외모적인 것의 의미를 거기서 찾으려고 하는 우리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거예요. 그 배후에 깔려 있는 하나님의 계시를 모르고. 손은 황옥을 물린 황금 노리개 같고, 이거 뭐 조폭인가요? 황금 목걸이 하고 황금 팔찌 하는 거. 다른 색이 섞이지 않은 순수하다, 단색이다 이 말이거든요.

 

그 다음에 몸은 아로새긴 상아에 청옥을 입힌듯하구나, 상아에, 하얗다 이 말이죠. 그럼 창백한 건데, 남자가 창백해가지고 그거 믿을 만하겠어요? 근데 청옥을 입혔다, 파란 옥을 입혔다. 다리는 정금 받침에 화반석 기둥 같고, 이거는 딱 오네요. 하체가 늠름하다 이 말이죠. 어지간히 건드려서는 넘어지지 않는. 하체가 든든하다. 끄덕도 없는 거예요. 쌀가마 한 세 가마 정도는 끄덕도 없이 들 수 있는. 결국 남자는 힘! 남자는 전립선! 하는 것처럼. 남자는 힘! 케이블 보면 그런 선전을 해요. 남자는 힘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기둥이 확 와 닿네요. 기둥. 튼튼하니까 어지간히 건드려도 끄덕도 없는 것. 가장이 흔들려야 되겠습니까? 백향목처럼 보기 좋고, 백향목이라는 것은 단단해가지고 똑바로 서있는 거예요. 부실한 게 아니죠. 누구 치면, 숭그리당당처럼 뭐 이렇게 허물어지고 이런 게 없다 이 말이죠. 반듯하게 서는 거예요. 우리 십자가마을에서 그런 남자는 별로 없는 것 같아요. 반대가 좀 있는 것 같아요. 쉽게 무너지는, 바람 불면 흔들릴 사람이 있는 것 같아요.

 

전체가 사랑스럽구나, 도대체 이 아름다움의 기준이 어디서 나와서 어떤 기준으로 아름답다는 말을 하는지. 아가서 전체를 아무리 훑어도 도대체 이렇게 와 닿지를 않고 자꾸 거리감이 생기는 거예요. 이 아름답다는 거기에 동조가 얼른 안 되니까, 마음 같아서는 동조하고 푹 잠기고 싶었지만, 여기에 대해서 이 말씀 자체가 너무 옛날 고대적인지, 옛날 중동 지역적인지, 우리 시대하고 문화가 안 맞는지 모르지만 와 닿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이런 문제는 어떻게 풀어야 되는가, 이렇게 풀립니다. 이 공식을 제가 몇 시간 전에 이야기를 했어요. 자연+문화=왕의 의미, 왕의 의미는 뭐냐, 여기서 뭐가 형성되느냐 하면 아름다움이 형성되었어요. 그러면 아름다움을 거꾸로 문화와 자연을 이렇게 진척해봅시다. 그러면 이 문화라는 것이 뭐냐 하면 인간이 여기에 있어요. 인간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인간에게 뒤집어씌웠을 때, 여기에 담겼을 때 그 인간은 자연을 보시는 하나님의 취지와 부합될 때 그 인간은 아름답다고 하는 겁니다.

 

범죄하고 난 뒤에 자연과 인간은 결합이 안 되게 되어 있어요. 범죄하고 난 뒤에. 왜냐하면 다시 저주스러운 환경을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유발하잖아요. 로마서 8장에 나옵니다. 사람이 범죄 함으로 피조물이 함께 탄식한다고 했어요.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자연도 함께 썩어가고 있고 후패하고 있고 인간도 함께 후패해가고 있어요. 따라서 인간 때문에 자연과 인간 사이가 원활하지 않은데, 다시 말해서 아가는 노래라고 했잖아요. 노래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게 마감이 된 상태에요.

 

완료가 된 상태에서의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이거는 하나님이 천지창조를 하실 때 자연의 아름다움의 완성상태가 인간에게 이렇게 씌워져있게 되었다 이 말이죠. 제가 무슨 취지로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죠. 그래서 성경 한 구절을 소개해드립니다. 이사야 52장 7절,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 아름답다고 나오죠.

 

이것이 또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은 로마서 10장 15절에 보면 말씀이 뭐로 바뀌느냐 하면은 십자가 복음이죠. 복음으로 바뀌어서 “복음을 전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럼 복음 전하는 사람들이 다 미남입니까? 복음 전하는 사람들이 미녀입니까? 그런데 천지창조를 만드시고 자연을 보고 심히 이쁘다, 만족하다, 참 좋구나, 라고 했던 그 아름다움이 무엇과 만나는가? 복음과 만나서 복음을 전파하는 그 사람의 모든 동작과 삶과 태도와 사고방식이 하나님 보시기에 지극히 아름답게 보고 있고 그 보는 관점을 아가서가 미리 솔로몬을 통해서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는 겁니다.

 

로마서 10장 15절에 보면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이래 되어 있어요. 우리가 아는 상식으로 보면 인간은 죄인입니다. 썩어갑니다. 아름답지 않아요.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은 죄를 지어서 아름답지 않습니다. 그런데 자연에 대해서 왕의 의미가 추가가 되어서, 자연에 왕의 의미가 만나서 어떤 특정 인간에게 주어지게 되면, 그것은 죄인이 아니고 자연에 완성된, 완료된 아름다움이 이 죄인에게 뒤집어 덮어씌우게 되면, 이 죄인은 복음을 운반하는 운반체로서 하나님 보시기에 그렇게 아름답게 보이는 겁니다.

 

그러면 이 인간 자체가 아름답지는 않아요. 덮어씌운 것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인간의 주체가 하나님 보시는 객체가 될 때, 이 객체는 주체에서 객체가 돼가면서 아름다움이 시작돼가는 겁니다. 그 대목이 아가에 나옵니다. 아가 8장을 보게 되면, 상당히 숨어있어서 중요한 줄 모르는데 중요한 대목이 나와요. 아마 아가서에서 제일 중요한 대목이 여기에 나와요. 5절에 “그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인고” 아까 이야기했죠. 혼인행렬에서,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죠.

 

“너를 인하여 네 어미가 신고한, 너를 낳은 자가 애쓴 그 곳 사과나무 아래서 내가 너를 깨웠노라” 여자가 남자의 안목의 눈을 팍 뜨게 만듭니다. 여자가 남자의 눈을 뜨게 만들어요. 하나님의 자연의 아름다움을 듬뿍 안고 있는 새롭게 등장한 여인이, 그것이 세상 안목이었던 남자들의 또는 남자의 의식을 깨우치게 하는 거예요. 그런 점에서 이 술람미 여인은 자연을 만드신 하나님의 취지에 부합되는 요소를 듬뿍 지닌 여인이기에, 그 여인은 자연과 비교가 되면서 이처럼 아름답다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외모적으로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사람을 미스코리아 뽑듯이 그렇게 뽑아가지고는 전혀 아가의 아름다움에 접근하기가 곤란한 거죠. 이런 이야기를 제가 여러분들에게 이야기해도 아가에 접근하기가 힘들겠죠. 왜냐하면 우리가 아는 아름다움은 내가 주체가 되어, 객체가 아니고, 내가 아름답게 보면 아름다운 것이라고 주관적인, 주체적인 그것이 너무 강렬하기 때문에, 누가 나를 어떻게 보느냐에 대해서는 내 주체가 너무 강렬해서 그게 자꾸 훼손돼요. 나에게 도달하지 않아요.

 

그래서 이 자연을 통해서 무엇이 나오느냐 하면 아름다움이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이게 생산이 됩니다. 그래서 순서가 이렇게 됩니다. 생산 그 다음에 등록 그 다음에 작용. 생산→등록→작용 생산은 아름다움을 인간에게 등록돼요. 생산이 주체가 된다면 등록된 이 사람은 이 주체에 의해서 주체를 알려야 될 객체가 되고 그 객체는 객체로서 그냥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고 이 주체에 대한 취지를 마음껏 활동하고 적용하는 것이죠. 작용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까 로마서 10장 15절에 의하면 ‘보내심을 받은 자’거든요. 객체죠. 복음을 위해서 누가 보냈겠어요? 하나님이 보냈겠죠. 하나님이 생산해서 그것을 어디에 등록한다? 어떤 죄인에게 복음 전하라고 등록을 하게 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이 생산된 것을 짊어지게 되기 때문에, 이거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부합이 되고 그 사람은 가만히 있지 않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죠.

 

복음을 전하면 그 당시에 지하철도 없고 버스도 없어가지고 발로 다녀야 되죠. 그러면 발에 동작이 모이겠죠. 그 발에, 복음을 전하는 자의 그 발이 어떻게 됐다고 했습니까? 아름답도다. 아름다움이 하는 거예요. 새로운 아름다움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가서 전체가 복음적인 아가로 보면 비로소 이해가 되는 거예요.

 

솔로몬 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하늘나라에 준비된 계시를 보냈고 솔로몬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전체가 하나님의 사랑의 나라로 완성이 되기 위해서 그는 사랑에 나설 수밖에 없게 되는데, 이거는 본인의 사랑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이 따로 있고, 주님의 지혜가 따로 있고, 그 사랑을, 잉여적인 사랑을 생산하기 위해서 왕으로서 힘을 쓰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확 낮추어서, 군사적이고 정치적인 그 힘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사랑과 자기희생의 낮아짐으로 바꾸어서 그로 인하여 비록 검으나, 거무튀튀하나, 오빠들의 혈통적인 유대성에 꼼짝 못하고 갇혀있고 포도원에 농사만 짓는 그 술람미 여인을 일방적으로 추종하고 따라가잖아요. 일방적으로.

 

따라가서, 그 여인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연과 더불어서 아름답다고, 솔로몬이 그렇게 일방적으로 평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인이 아름답다고 해야 되고, 주님의 일관된 하나님의 뜻이 왜 저렇게 저 여인을 통해서 그렇게 아름답게 보이느냐 하는 거예요. 그 당시의 복음이에요. 그 당시의 복음. 솔로몬 당시의 복음이에요. 생산과 등록과 그리고 작용입니다. 제가 첫 번째 강의할 때 사랑은 어떻게 한다? 미쳐야한다. 사랑은 미쳐야. 어디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그 노선에서 벗어나야 돼요. 이걸 탈선이라고 하면 안 돼요. 그냥 비켜가는 거예요.

 

뭐로 비켜 가는가, 욕망으로 비켜가는 것도 있겠지만, 욕망은 그냥 탈선이고, 충동이라고 했죠. 충동은 원인을 내 쪽에서 찾을 수 없는 것. 내가 다스릴 수 없는 게 충동이라고 했죠. 그 충동이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에 잃어버렸던 옛날 기억이죠. 인간이 상실했던 것. 낙원에서 살던 인간이 그 해야 될 일을 범죄하고 난 뒤에, 낙원에서 쫓겨나고 난 뒤에, 그때 낙원의 기억을 상실했잖아요. 그 상실한 것, 그 상실한 것을 아가서에 대해서는 그게 노래라는 양식으로 그대로 펼쳐지고 있는 거예요. 노루도 마음대로 뛰놀고 비둘기도 누가 헤치는 사람이 없고.

 

그리고 그 여인인데, 그 여인은 마치 해방구 같아요. 해방된 사람 같아요. 아무것도 거리낌이 없이, 아까 시간에도 했지만 그 당당하고, 목도 다윗의 망대, 레바논의 망대라고 되어 있는데, 다윗이 레바논에 망대를 세운 거예요. 다윗의 망대처럼, 쳐들어오기만 해봐라! 당당하다고 하죠. 목사가 십자가 안 졌잖아요. 그러면 목사 말을 구태여 다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 받은 사람은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성령께서 직접 너희를 가르칠 때 그거는 무슨 뜻이냐 하면은 고개 숙이지 말라는 거예요. 그리고 제발 후회하지 말고.

 

지금 내가 하는 이것이 주님 보시기에 부합된다면, 주님의 취지에 부합된다면, 어차피 세상은 불로 꺼져야 되고 소돔과 고모라처럼 불 심판받아야 될 세상에서, 무슨 거기서 참고해야 될 것을 얻겠어요?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하고 재산 있는 사람은 다 쓰지 못하는 사람 같이 하라(고전7:29) 왜? 세상은 곧 소멸되니까. 마치 세상이 영원토록 지속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세상을 살지 말라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은 자본주의를 옹호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라고 하는 것은 계속 신용이 10년, 20년 앞으로 신용이 계속된다는 보장 하에, 지금 돈을 빌려서 미래를 내다보면서 투자하는 것이 자본주의가 돌아가는 경제구조거든요. 신용의 사회에요. 주식에 선물거래 있잖아요. 미리 땡겨서 쓰는 것. 그게 자본주의의 핵심입니다. 자본주의의 핵심. 있는 돈 쓰는 것이 아니고 빚내서 쓰는 거예요. 그게 자본주의에요. 있는 돈 그냥 써버리면 그거는 그냥 사회주의 되죠. 사회주의. 우리끼리 다 갈라먹고 치우자. 갈라먹고 치우면 자전거가 넘어지잖아요. 달려야 되거든요. 어디로? 몰라. 어떻게? 무조건 달려. 앞으로 어떻게 될 건데? 앞으로 잘 된다고 믿고. 이게 자본주의 아닙니까? 투자하고 또 투자하고 또 투자하고..., 어디까지? 자기도 몰라요. 죽을 때까지 하겠죠.

 

근데 아가서에 나오는 하나님의 지혜는 뭐냐 하면은 생산은 돈의 생산이 아니고 복음이 주는 이미 완료된 아름다움과 하나님의 축복의 여분의 생산이 계속 반복해서 주어져야 된다는 거예요. 아름다움의 반복, 생산이에요. 아름다움의 생산. 그러면 여기서 생산할 때 뭐가 나와요? 힘이 나오겠죠. 그래서 사랑의 반대말은 힘이지만, 사랑에 의해서 나오는 힘이 또 따로 있어요.

 

그게 아까 두 번째 시간에 한 공식인데, 그 공식을 한번 볼까요? 보편성은 누굴 만났어요? 특수성을 만나서, 보편성이 특수성을 배척하죠. 근데 배척당한, 미움 받은, 버림받은, 건축자들의 버림받은 돌 같은 것이 여기에서 새로운 보편성이 나온다고 했죠. 보편성이 특수성을 할 때 이 보편성은 힘을 좋아했고 특수성은 사랑을 이야기했습니다. 힘이 사랑을 밀었습니다. 밀쳤는데 사랑에서 저쪽 힘을 이기는 새로운 힘이 쭉 나오는 거예요.

 

이 힘은 어떤 힘이냐, 기존의 힘, 타락한 세상에서 나오는 그러한 썩어져나가는 그러한 힘이 아니고, 여기는 이미 부활의 힘이죠. 죽음을 이긴 새로운 힘이 여기서 등장하는 거예요. 제가 또 이렇게 이야기하면 갑자기 여기서 관찰자가 되어서 “주님이여, 나 기도합니다. 이 힘 말고 이 힘을 주세요.”라고 하죠. 이 힘은 주체가 받을 수 있는 힘이 아니고 누구로부터 지시함을 받을 경우에만 제공되는 힘이에요.

 

여기서 특수성이라는 예수님이 주인공이 되고 우리는 그분의 종이 되는 즐거움을 누립니다. 내가 주인이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주인이 아니라는 말은 어떤 의무감도 사랑 앞에서는 절대로 가져서는 안 된다. 내가 할 게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 자체도 용납이 안 돼요. 내가 뭘 할까요? 라고 요구해서 새삼스럽게 주어진 것이라면 그거는 주체와 객체의, 주인과 종의 관계가 아니고 동등 된 관계에요. 동업자의 관계가 돼버려요.

 

그러면 보내심을 입었다는 그 의미가 축소돼요. 만약에 동등 된 관계라면, 한쪽은 지시와 명령을 해야 되고 한쪽은 그것을 받아야 돼요. 그러면 지시와 명령에 늘 감사를 해야 돼요. 유치원 회계장부 엉망이잖아요. 그래서 공단에게 정부가 카운슬링을 이렇게 하게 해서 제대로 하고 있는지 조언도 하고 카운슬링도 하고 나중에 심사도 하고 이렇게 해가지고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이 나라의 보조금을 잘 쓰고 있는지 보겠죠. 그럴 경우에는, 이거는 뭐냐 하면 상대방에게 심사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잘하면 이 유치원은 잘했네, 하고 못하면 벌금매기고, 뭐 이렇게 폐업조치를 하겠죠.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는 그런 관계가 아니에요. 그냥 이미 뭘 우리보고 어떤 잘잘못을 따질 수 있는 그런 관계는 이미 청산됐다는 거예요. 그런 관계로 조인join된, 참여 된 관계가 아니라는 거예요. 네가 어떤 형편에 있든지 간에 그 형편조차도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가 되는 거예요. 우리가 어떤 형편에 있든지 간에. 그럼 우리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도 우리가 게을러서 안 하면 어떻게 되느냐? 여러분, 게을러서 안 하는 관계 같으면 이미 성도가 아닙니다. 주님의 지시가 게으르라고 하면 우리는 게을러야 해요. 여러분, 게으른 게 얼마나 힘든지 아십니까? 게으른 게 고난의 길이에요. 게으른 게.

 

그러면 성도에게 일어나는 일은 모든 고생은 아니지만 모든 고난이에요. 골프 치는 데 얼마나 허리가 아플까요? 모든 게 고생은 아니더라도 모든 게 고난이에요. 왜냐하면 생산된 것이 일방적으로 등록이 되고 나는 그걸 부여받는 객체에 불과하기 때문에. 마태복음 8장 9절에 나옵니다. 칭찬받는 믿음이 뭘까요? 주께서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12년 동안 혈루증 걸린(마9:20) 그러한 여인도 자신의 신세타령을 주님께 따지는 식으로 따지지 않고, 이 병조차도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한 일인 것을 제가 믿나이다, 라고 할 때에 그 병이 나았잖아요. 그 병이 안 나아도 괜찮아요. 왜? 그것조차 생산된 것의 등록이기 때문에. 다만 예수님과 객체가 되는 이 사이에서 믿음이라는 것을, 소망, 사랑이라는 잉여분을 생산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가신 그 길에서, 아버지께서 가라고 하신 그 길은 고난의 길이라고 할지라도, 그 길을 통해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쓴잔을 마심으로서 아버지의 뜻이 그냥 구현될 때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은 지극히 아름다운 길입니다. 여러분들이 로마서 10장 15절에서 사도바울이 복음 전하는 그 발이 아름답다고 할 때 사도바울의 인생이 그렇게 아름다운 길이라고 느껴지십니까? “야! 저 길은 정말 아름답네! 한번 따라가 볼까?”라는 이런 생각이 들까요? 어떤 사람은 내빼기 바빠져요.

 

나도 성도지만 제발 그 길을 안가는 방법이 없습니까? 라고, 저한테 정말 묻는 사람도 있었어요. 복음만 챙기고, 사도바울이 가는 그 길을 내가 가면 정말 곤란한데, 이거는 뭐냐 하면 대등된, 같은 주체와 주체의 관계라고 오해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 앞에서는 우리는 그냥 하라면 하고 까라면 까는 거예요. 시키는 대로 할 뿐이에요. 그냥 시키는 대로 하는데, 그런 지시를 저는 받은 적이 없다고 하지 마세요. 지금 이 순간! 지금 있는 사실 그대로 그것이 주님이 주신 듬뿍 받은 은혜에요. 이렇게 하는 것이 큰 은혜입니다.

 

남들 보기에는 변변치 않지만 이것가지고 아름답다, 감사가 나온다는 것은 이게 보통 기적과 능력이 아닙니다. 보통 사랑의 힘이 아니에요. 사랑의 힘을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잉여 물을 자꾸 만들어내는 거예요. 여분의 것을 자꾸 만들어내는 거예요. 래서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그냥 하게 해요. 하게 하면 그것은, 자기 뜻은 반드시 실패로 끝나게 되어 있어요. 근데 그 실패가 과연 실패일까요? 아닙니다.

 

실패를 통해서 실패하기 전에는 미처 몰랐던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 새로운 감각에 눈을 뜨게 되는 겁니다. 사과나무에서 여자가 남자의 눈을 뜨게 한 것처럼. 그 눈을 뜰 때, 여인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아름답구나! 모든 아름다운 것은 여기에 비할 바가 없구나! 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것을 생산해서 인간의 신체에 등록했기 때문에, 인간의 신체에 등록된 그것을 가지고 3세트에 비교를 하는데, 그 비교하는 종류가 뭐냐 하면 어떤 때는 자연적인 꽃에 비교하는 경우가 있고, 어떤 때는 인간이 만든 문화, 문화상품이라든지 컵이라든지 이런 것에 비교하는 경우가 있어요. 비교가 자연과 문화, 문화와 자연 두 종류에서 적당한 것을 필요로 해서 이렇게 비교하게 됩니다.

 

아가서 6장 4절에 보게 되면, “내 사랑아 너의 어여쁨이 디르사 같고” 디르사라는 것은 저 북쪽 지역의 이름이에요. 그 지명이 굉장히 말쑥하다. 예루살렘처럼 아주 멋있는 그런 마을이랍니다. “너의 고움이 예루살렘 같고 엄위함이 기치를 벌인 군대 같구나” 당당하다 이 말이죠. 5절, “네 눈이 나를 놀래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라 네 머리털은 길르앗 산기슭에 누운 염소 떼 같고” 머리숱이 많다는 뜻이에요. 풍성하다는 뜻이에요. 6절, “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온 암양 떼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고”

 

거의 묘사하는 것이요, 그냥 우리 같으면 이빨이 가지런하고 이러면 되잖아요. 얼마나 간단해요. 가지런하고. 이러면 되는데, 왜 여기 구태여 암양 새끼 없는 것이 그것도 풍성한 쌍태를 낳은 양 같고 했는지. 7절, “너울 속에 너의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 8절, “왕후가 육십이요 비빈이 팔십이요 시녀가 무수하되” 9절,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고. 10절, “아침빛같이 뚜렷하고 달같이 아름답고 해같이 맑고 기치를 벌인 군대 같이 엄위한 여자가 누구인가”하고 과분한 표현을 하죠.

 

글쎄, 이 과분한 표현을 한 이유는 이거는 이 여자를 사랑한 것이 나의 의무도 아니고, 이거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하나님이 주신, 그냥 하나님이 벌여놓으신 충동에 나는 그 여자의 아름다움에 말려들어서 빠졌었을 뿐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솔로몬이 주도권을 그 여인에게 다 넘기는 거예요. 과연 이 일을 누가 했는가? 이 일은 8장 6절에 나옵니다. “너는 나를 인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갑자기 아가서에서, 사실은 여호와라고 안 되어 있고 야훼라고 되어 있어요. 그냥 하나님이라고 보면 되는데. 여기 여호와가 하나님이 등장하는 대목이 바로 여기 아가8장6절입니다. 그래서 옛날 한때 중세 때는 아가를 성경에서 빼자. 너무 개인적인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왜 거룩한, 고상한 성경에다가 이러한 천박한 사랑이야기를 왜 집어넣었느냐 빼자고 하다가 이거 여호와가 있다고 집어넣은 거예요. 큰일 날 뻔했어요. 천국의 완성된 노래를 뺄 뻔했어요. 천국의 노래를. 그만큼 사람들이 몰랐던 거예요. 그 신학자들이. 신학자들이 뭘 알겠어요. 믿음도 없는데.

 

자, 그러면 여호와의 불이라는 것은 왜 여기 등장하느냐 하면은, 생산과 등록과 작용할 때, 여기 등록하면서 우리 인간들은 객체가 되죠. 객체는 홀로 작용할 권한도 없고, 먼저 나설 이유도 없어요. 그러면 이 작용에 누가 함께 작용하겠어요? 바로 이 하나님과 더불어, 함께 일합니다. 그래서 복음 전하는 발이 아름다운 거예요. 네가 알아서 복음 전하라고 하면, 지하철에 예수 믿으라고 하면 그거 아름답지 않아요. 밥을 먹든지 마시든지 주께서 나에게 밥을 먹였다고 그걸 인정할 때 그게 아름다운 거예요.

 

몇 시간 전에 한 거 다시 해볼까요? 내가 배고프다가 성립이 안 된다고 했잖아요. 내가 배고프다. 배고프다는 것이 발생됐기 때문에 내가 밥을 먹게 되는 거예요. 잠이 오기 때문에 내가 잠을 자는 거예요. 나를 항상 객체에다가 돌려놓으세요. 잠 좀 자볼까? 해서 곧 자는 사람들은 거의 없어요. 잠이 오니까 내가 눈이 감기는 거예요. 내가 눈을 부릅뜨고 잠 좀 자볼까.. 잠 좀 자볼까.. 잠 좀 자려고 하는데 옆에서 코를 고는데요. 그러니까 잠 좀 자볼까 한다고 해서 내 의지대로 움직이는 게 없습니다.

 

근데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국민교육이 뭐냐 하면 모든 일은 내가 시작해야 일이 된다는 것을 국민교육이 그렇게 가르쳐요. 그것은 교육심리학이든 교육학의 기본이 뭐냐 하면은 바로 자의식고취거든요. 빨리 자의식이 정립이 되어야 정신병자 안 된다는 취지입니다. 빨리 자의식이 되어야 시민으로서 제 구실을 다하고 국가에 기여할 수 있는 자기 분업적인, 자기가 담당할 역할에 충실할 수 있다는 그 취지로서 교육이 있는 거예요. 스스로 설 수 있는 능력을 함양할 수 있는 게 이게 국가교육의, 국민교육의 모토입니다. 누구 시키지 말고 자발적으로 창조적인 지혜로 개발을 하라는 거예요.

 

회사에 가서도 자꾸 시키는 대로 하지 말고 네가 스스로 창의성을 개발해보라고 회사에서 요구하는 거예요. 주는 월급만 받지 말고, 맨날 컴퓨터 켜놓고 게임만하지 말고. 낮에는 컴퓨터 게임하고 업무는 밤에 해서 잔업수당 받으려고 하고. 아이고, 얍삽해라. 회사의 직원들은 생각하는 것이 딱 하나밖에 없어요. 놀면서 돈 벌자 밖에 없어요. 회사의 오너들은 할 일이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직원 감시하는 것 밖에 없어요. 화장실은 둘이서 큰 것은 10분, 작은 것은 5분 만에 갔다 오라고 하는 거예요. 콜센터 직원한테 그렇게 하잖아요.

 

왜 그렇게 합니까? 워낙 그동안 놀았거든. 수다 떨고. 30분마다 화장실에 왔다 갔다 했거든요. 직원들이 일을 안 해요. 직원들이 일을 안 합니다. 왜냐하면 노동환경은 날마다 변천하기 때문에, 생산하는데 노동시설이 바뀌게 되면 어쩔 수 없이 그 기술이 없는 사람은 내보낼 수밖에 없어요. 어디 뭐 돈을 벌어야 월급을 주죠. 노동환경이 바뀌는 거예요. 계속 신기술과 인공지능 때문에. 사람을 그냥 밥 먹여주는 데가 아니에요. 뭔가 있어야 갈라먹기 할 게 아닙니까? 그래서 직원으로 일할 때는 하루 8시간 근무해요. 근데 자기가 조그마한 자영업을 하면 하루 14시간 근무해요. 곱빼기로 하는데 수입은 직원보다 더 적게 나와요. 아르바이트 학생보다 돈을 더 적게 받는다고요.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것은 이미 구원된 사람은 네가 네 스스로 뭔가 열심히 할 각오를 할 필요가 없고, 주께서 그때그때마다 하나님의 열심, 하나님의 자격이 너와 동반해서 너의 업무를 거기다가 계속 할당해서 시킬 거예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이게 너의 일이 아니고 바로 여호와의 불같은, 불같다는 말은 그냥 놀지 않고 열심히 하는 거예요. 부지런해요. 불의 특징이 뭐냐 하면 계속해서 잠시도 가만히 있는 법이 없죠. 활활활활활! 이러잖아요. 열정이 그만큼 넘치잖아요. 여호와의 열정이. 그 여호와의 열정을 뭐로 비유하고 있습니까? 질투에 비유하죠. 질투 그리고 음부의 세계. 질투 그리고 지옥의 세계.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감추고 쉬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세상에서 사랑이라는 것은 뒷전입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중요한 것은 돈이고, 돈 있는 자가 여유 있게 사랑을 할 수도 있고, 놀러갈 수도 있고 하는 문제지. 가장이 되어서 아내 사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의 근본은 뭐냐 하면 그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서 바깥에서 돈을 벌어오는 것이 제일 우선이지, 돈은 조금 벌어오면서 미안하니까, 일찍 퇴근해서 “여보 발 닦아줄까? 설거지 할까?” 여자는 신혼 때는 철딱서니가 없어서 그게 좋아 보이죠. 애 하나 낳아 있고 또 하나 있고 하나는 임신해서 있고 하면 짜증나요. 여자가 “우리 남자, 여자 바꿀까?” 그럼 남자가 “바꾸자. 바꾸자.” 이렇게 한다고요. 철딱서니가 없는 것. 바꾸자고 바꾸는 것이 아니에요. 집에서는 아내 한 사람의 말만 들으면 되지만, 바깥에 나가서 돈 벌려면 도대체 몇 사람의 말을 들어야 돼요?

 

제가 전에 그런 설교를 했죠. 세상에 나가서 인간성 멀쩡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요. 인간성 멀쩡하려면 뭐 하면 되는가? 주부생활하면서 드라마만 보면 돼요. 안 그래도 미세먼지 있는데 나가면 안 돼요. 바깥에 나가지도 않고 하루 종일 드라마만 보면 돼요. 그러면 인간성 좋아요. 그런데 부추겨가지고 돈 벌러 추방되는 순간부터, 그다음부터는 거짓말해야 되고 사기 쳐야 되고 속여야 되고 남보다 경쟁에서 이겨야 되고. 건전한 인간성, 양심 그거는 오히려 장애요소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가 그렇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예. 그렇게 살아도 괜찮아요. 이게 자기가 객체가 된다면. 조건은 뭐냐 하면 주체는 따로 있다는 것이죠. 주님의 아름다움을 아까 이야기했죠. 하늘나라에서는 아름답지만, 하지만 아름다움이 이 지상에 왔을 때는, 악마가, 귀신이 들끓는 이 세상에 왔을 때는 인간은 예수님처럼 험하고 험한 맛을 이 세상에서 봐야 됩니다. 그 보는 것을 가지고 실패 했니, 구원 안 됐니, 너무 초라했니, 하나님의 복을 안 받았니, 절대로 그런 소리를 하면 안 돼요.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발은 누가 뭐래도, 이 세상에서 누가 뭐래도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습니다. 조건이 있어요. 보내심을 받은 자에 국한해서.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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