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자료

2.욕망과 충동 190113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1. 19. 10:45
2019-01-19 08:02:13조회 : 10         
2019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2강-아가 강해:욕망과 충동이름 : 한윤범 (IP:221.147.126.19)

2019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2강-아가 강해:욕망과 충동
(강의:이근호 목사)


첫 번째 시간에서 사람과 사람이 모여 있다고 해서 하늘나라와 지상이 연결되는 건 아닙니다. 하늘나라는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랑이 먼저 등장하고 사랑의 나라가 바로 천국이죠. 하나님 계시의 완성으로 봅니다. 사랑은. 요한일서 4장 8절에 보면,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모른다는 거예요. 순결이란 사랑하지 않는 것이 순결이 아니고, 사랑하는 게 순결이에요. 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릴 수 있는 환경 속에 놓여있게 되기 때문에.

사랑 속에서 우리는 욕망으로서의 사랑에서 충동으로서의 사랑으로 전환되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욕망으로서의 사랑은 내 만족으로 사랑하는 거예요. 그런데 충동이라 하는 것은 미흡함 그리고 차이 남을 통해서 그것을 무엇으로 이해하느냐 하면, 낯선 새로움으로 신선함으로 이해하는 거예요. 

내 남자한테 이빨에 고춧가루가 있어? 이거 새로운 매력이네. 그걸 양치질하기 싫은 게으름으로 보는 게 아니고 새로운 매력이 되는 거예요. 어떻게 자기 치아관리도 못하는 것이 새로운 매력이 되느냐 하면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사랑을 하게 되면 과거가 재편됩니다. 

그래서 사랑은 충동이고 다른 말로 하면 주관적이라 하는데 내 주관적으로 봤을 때 이빨에 고춧가루 끼는 것, 방귀뀌는 것조차도 이것은 내가 미처 몰랐던 새로운 매력으로 다가오는 거예요. 방귀가 향기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 완전히 미친 거죠. 남들 보기에는. 왜 그래? 너 미쳤구나. 왜? 내 주관이다. 이러면 끝나는 거예요.

네가 어떻게 나이 20살이나 많은 남자를 좋아하느냐? 하니까 아빠, 그건 내 주관이야. 내 마음대로야. 이렇게 이야기하죠.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내가 만든 결혼의 조건, 사랑의 조건이 내가 무너지면서 같이 무너진 거예요. 상대방의 매력 때문에 내가 만든 조건이 무용지물이 되는 순간이에요. 상대방이 만든 조건에 내가 따로 나는 이런 사람과 결혼해야지, 하는 조건이 와르르 다 무너지는 거예요. 무너지고 내 조건을 버리고 상대방 조건에 자기 자신을 던져버리는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십자가, 예수님의 죽으심이, 여러분 물어봅시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사랑의 조건이 될까요, 아니면 부활이 조건이 될까요? 어느 쪽입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사랑을 완성했습니까, 죽었다 부활함으로 완성한 거예요? 어느 쪽입니까? 십자가 쪽이에요. 왜냐? 부활이 돼버리면 무엇을 예측할 수 있느냐 하면, 나는 저 사람의 희생양, 죄 용서를 이용하게 되면 나는 죽어도 다시 살 수 있겠네, 라는 자기 자신의 욕망을 포기 안 하고도 구원될 수 있는 여지를 탐이 나서 나는 믿을래, 예수님의 부활을. 이렇게 된다 이 말이죠.

주님께서는 그럴 줄 알고 중간에 뭘 집어넣습니까? 십자가를 집어넣은 거예요. 세상 종교와 복음의 차이점은, 세상 종교는 내가 지금의 A라는 상태를 계속 신께서 보장할 수 있습니다. 이게 세상 종교에요. 그러나 복음은 뭐냐 하면, 하나님은 너를 때려잡습니다. 두 번 다시 네가 생기지 않도록. 이게 복음이에요. 구원받겠다는 의지를 아예 박살내버려요.

구원받겠다는 게 욕심이라는 겁니다. 이게 하나의 선악과 따먹을 때 유혹을 받듯이 예수님의 구원, 부활, 영생이 인간에게 유혹거리로 작용하는 거예요. 저거 가져야지. 저렇게 기쁜 소식이 있었네. 저거 복음이구나. 복음은 네가 처리 못한 너를 죽여준다는 거예요. 복음은 실적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과정 속에 내가 사라지는 게 복음이에요. 

내가 쥐고 내 앞에 더덕더덕 훈장처럼 새로운 걸 붙이는 게 기쁜 소식이 아니라 내가 붙일 필요도 없이 내가 그냥 사라져주면 된다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는 것, 따라서 하나님에 맞는 조건이 있다면, 나 같은 것이 없어져도 괜찮다는 게 복음이에요. 하나님 이용하고 교회 이용할 생각하지 마세요.

솔로몬은 왕이지만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사랑 만들기에 나선 겁니다. 그 대상이 뭐냐? 거무튀튀한 여자였어요. 6절을 봅시다. “내가 일광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미의 아들들이 나를 노하여 포도원지기를 삼았음이라” 이렇게 돼있지요. 이 여자한테 오빠가 있었던 모양이에요. 오빠가 여인에게 뭘 줬느냐 하면, 시간과 조건을 부여했습니다. 너는 이 시간과 조건 하에서 네가 존재할 때 내 누이동생이 된다.

“나의 누이”라 할 때 오빠가 먼저 설정해줬지요. 혈육공동체, 가족이니까. 오빠들이 뭐라 하냐 하면, 너의 일은 포도원에서 농사짓는 일이다. 이게 내 누이가 되는 조건이야, 라고 조건이 되기 때문에 너는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일 해. 안 그러면 밥도 없어. 이런 조건에서 나온 게 나의 누이가 돼요.

그런데 여러분 아가를 읽어보셨어요? 보게 되면 거기에 뭐라고 돼있냐 하면, 고이비또요(戀人よ) 일본말인데 우리말로 연인이여. 이 노래 우리나라 가수들 많이 불렀어요. 나훈아도 불렀고. 戀人よ そばにいて(코이비또요 소바니이테)~

나의 여인이여, 그 다음에 나의 누이라고 돼있어요. 혈육공동체에서 사랑으로 공동체연대를 끊어버리고 없는 새로운 연대를 만든 거예요. 그렇기 위해서는 왕과 거무튀튀한 여자가 형제지간이 되는 겁니다. 그들이 사랑하는 조건이 뭐냐 하면, 아가에 보면 어머니 집이에요. 첫날밤을 어디서 치르느냐? 어머니가 젖먹이는 집에서 첫날밤을 치르게 돼있어요.

그럼 여기서 어머니 나오지요, 형제 나오지요, 아버지 어디 있습니까? 아가가 이야기하는 것은 이 땅에 아버지가 없다는 겁니다. 아가의 주제입니다. 너희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모른다는 뜻이에요. 아버지를 알려면 기존의 육적인 연대성이 끊어져야 돼요. 그러나 인간의 태생 자체가 육적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기존의 혈육공동체를 자기 힘으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없고 혈육들만 있으니 형제간에 앙숙이고 부모자식 간에 앙숙이에요. 그러면서도 그 울타리를 벗어날 길은 전혀 없습니다. 혈육의 공동체에 갇혀있는 꼴입니다. 누가 나서서 해결해줄 사람도 없어요. 아버지, 어머니가 있지 않느냐? 아버지, 어머니는 자식을 사랑할 줄 몰라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최종적으로 자기 사랑으로 살기 때문에 누굴 사랑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됩니다.

가족이라 하는 것은 아까 욕망으로서의 사랑이죠. 나의 욕망을 충족해줄 때 비로소 너는 나의 가족이라고 취급해줘요. 대학 졸업시켜줬으면 돈 좀 벌어오고. 집에서 빈둥빈둥 놀지 말고. 애 낳으면 잘 키우고. 남편들은 밖에 나가 돈 좀 잘 벌어오고. 모든 것이 자기 역할, 자기 힘을 모으는데 각자 할당된 일을 제대로 했을 때 비로소 우리는 가족이라고 해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랑의 연대가 아니고 힘과 힘의 연대에요.

부모가 자식한테 요구하는 효도란 자식이 자기처럼 되는 거예요. 그것은 자기처럼 출세하란 말이 아니고 내게 남아있는 미흡한 욕망을 비어있는 욕망을 너라도 채워야 되지 않겠느냐 하는 거예요. 그런데 욕망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욕망은 현실에서 만들어지는데 그 현실이 어떤 현실이냐 하면, 욕망의 집결체로서의 현실이에요. 욕망의 집결체니까 현실에 욕망+욕망+욕망이 넘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들은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는 건 골라잡아라. 직업이 2만 가지다. 그중에 하나 골라잡아서 그 직업에 충실해서 돈 벌어오게 되면 너는 현실에서 인간으로 대우받는다. 이 구조, 이 네트워크 안에 우리가 놓여있는 거예요. 그럼 오빠가 동생한테 일을 시켰다는 말은 요즘 말로 하면 산업역군이 되라는 말이에요. 산업역군이 된다는 말은 노동으로 네 가치를 표해라. 만들어내라. 집에 놀지 말고. 포도원에서 일해서. 얼굴 시커먼 해도 괜찮다. 우리 집안 식구는 다 그래. 이게 교재에 나올 건데요.

여러분 아가도 읽어봤겠지만 교재도 읽어봤지요. 2페이지에 당장 나오네요. 위에서 열 번째 줄에 [놀이는 노동이 아니다. 생존의 의지를 놔버리는 것이다. 이익과 유용성을 계산하지 않는다. 노동이 인간을 해방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 수단으로 전락하게 만든다.] 노동은 해방하는 것이 아니고 생존 수단으로 자기가 전락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욕망의 세계가 만든 게 뭐냐 하면, 우리가 흔히 주고받는 현실의 전부기 때문에.

현실이란 욕망의 바다에요. 그 바다에서 나는 지금 어느 욕망을 채우고 있는지 보는 겁니다. 이래서 잘 모르겠지요. 충동. 충동은 뭐냐 하면, 미흡함을 새로움이 나오는 구멍으로 보는 거예요. 당신은 참 남자다워. 이빨에 고춧가루 꼈는데도 지하철 탔다 이 말이지? 이렇게 대범한 남자라면 당신을 사랑할 만하다. 이상하게 돌아가는 거예요. 남들 보기에는 흠이지만 자기 자신은 내게 없는 새로운 면이라고 그 미흡함에 매료되는 거예요. 그게 충동으로서의 사랑입니다. 

여러분 충동하면 딱 떠오르는 게 어떤 개념이에요? 비이성적 비합리적. 사실은 대부분 인간이 욕망으로 사랑하지 않습니다. 욕망으로서의 사랑은 결혼식장 들어가도 안심 못해요. 결혼식장에서 신랑친구와 웨딩드레스 입고 뛰쳐나올 수 있어요. <졸업>이란 옛날 영화에 보면 면사포 쓰고 옛날 애인과 도망쳐 나옵니다. 그때 신나는 음악이 배경으로 깔리지요.

그러니 결혼하기도 힘들고 억지니까. 조건 봤으니까. 결혼 유지하기도 힘들어요. 타이밍 찾습니다. 신혼여행 갔다 와서 헤어질까, 시가집에 절하고 난 뒤에 헤어질까. 호시탐탐 헤어질 것만 노리고 있어요. 헤어질 핑계거리 그것 수색하고 있어요. 수색영장도 없이. 뭘 노리고 뭘 핑계 삼아 헤어질까. 그러다 애 낳으면 3살까지 키우고 헤어질까. 그러다 남자나이 88, 여자나이 84 되는 거예요. 84 돼서 졸혼할까?

욕망으로서의 사랑은 뭔가 현실 속에 충실했다고 자부하면서도 이상하게 그 현실 말고 다른 현실 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내가 이 현실에 충실했는데 주부로서 내 역할 다하고 남편으로서 내 역할 다 했는데 이상하게 왜 행복하지 않지? 내가 자식 둘 잘 키웠고 공부 다 시키고 유학까지 보냈는데 왜 만족을 못하지? 도대체 뭐 때문에 만족하지 못하는 원인을 찾을 수 없는 그게 미치는 거예요. 

내 딴에 다 했는데 돈 벌어줘, 생일 때마다 고깔모자 쓰고 온갖 재롱을 다 부리고 사진 찍어주고 생일선물 듬뿍했고 처갓집에 몰래 봉투주고 잘했어. 다 한 걸 모아보세요. 내가 너한테 이렇게 다 했잖아. 여자가 하는 말이, 그게 사랑이가? 이 한 마디로 끝나버렸어요. 선물 듬뿍했고 시키는 대로 다 했는데 너는 그걸 사랑으로 보나? 그러니까 너는 내 마음을 몰라줘. 니 맘이 뭔데? 꼭 말해야 알아줘? 말도 안 하는데 어떻게 알아? 그래서 싸움 벌어지는 거예요. 가만있는 것 보니까 그렇게 사는지 몰라. 뭔가 말로 표현할 수 없어. 

그것은 언어가 현실을 조작하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은 계속 조작당하고 있습니다. 조종당하고 있어요. 언어에 조작당하고 있습니다. 말을 하면 할수록 진실에 점점 더 멀어져요. 가까이 가는 게 아닙니다. 남자들은 잘 모르지만 여자들은 나이 많으면 화장이 피부에 딱 달라붙는 게 아니고 붕 뜬다고 하거든요. 얼마나 발랐으면 붕 뜨겠어요.

언어가 그런 거예요. 사랑은 뭐다, 사랑은 뭐다, 이런 식으로 형용사, 부사를 붙이지만 항상 붕 떠있어요. 기존교회 기도할 때 보세요. 전능하시고 자비하시고 당회로부터 주일학교까지 남북통일 기도하는데 듣는 사람은 뭔가 붕 떠있어요. 장로가 그렇게 기도하면 집사들 장로 따라 고대로 기도해요. 매뉴얼이에요, 매뉴얼. 기도가 매뉴얼 됐어요.

그걸 괴리현상이라 하거든요. 뭔가 괴리현상이 일어나 표현을 못하게 되면 정신병 돼요. 정신병은 자기 속에 있는 한을 적당한 단어를 못 찾아서 미쳐버린 게 정신병이에요. 그 정신병이 교재 13페이지에 나옵니다. 교재 잘 만들었다는 느낌이 드는데. <남자라는 이유로> 역시 조항조가 불렀던 노래에요. 가사 다섯 번째 줄에,

언제한번 가슴을 열고 소리 내어 
소리 내어 울어 볼 날이
남자라는 이유로 묻어두고 지낸 
그 세월이 너~무 길었어

사회현실, 이걸 상징적 세계라 하는데 이 사회에서 너는 남자라면 남자다워야지, 하는 남자다움에 주눅 들었어요. 아까 강의 다시 하면, 남자란 것은 어디가 먼저 생겨야 돼요? 사랑에 의해서 여자가 먼저 생길 때 그 다음에 생기는 게 남자에요. 우리는 남자도 아니에요. 그냥 사람이라니까요. 

이 세상에 사람밖에 없어요. 남자, 여자가 의미가 없어요. 하나님 있으면 되고 사람 있으면 되지 그걸로 끝이라고 본 거예요. 아가는 그게 아니랍니다. 사람이 되면 안 돼요. 사람에서 여자가 돼야 돼요. 주님에 의해서 여자가 돼야 천국 가지 그냥 사람으로 있으면 되지 않아요. 그런데 이 세상의 남자는 그냥 남자가 아니고 사람다운 남자입니다. 사람다운 남자는 이 세상의 욕망이 그걸 요구했고 그 위치를 우리에게 강요했어요. 

그래서 남자는 여자와 달라야 된다는 거예요. 여자는 걸핏하면 울지요. 그러면 남자는 그것과는 달아야 되거든요. 개념을 알려면 반대되는 걸 통해서 안다고 했잖아요. 여자가 울면 남자는 그 앞에서 주먹으로 입을 막고 남자는 울고 싶어도 울지 않아야 하고 웃고 싶어도 웃지 않아야 그게 남자의 듬직함이고 그게 남자다움이라 하는 거예요.

사랑한다고 생전 이야기 안 해요. 왜 안 하느냐? 내가 경상도 남자 아이가. 그게 경상도라는 욕망의 지역에서 요구했던 남자상이에요. 언제한번 가슴을 열고 소리 내어 울고 싶은데 남자라는 이유로 그걸 계속 억누른 거예요. 그게 한두 해 같으면 몰라요. 그런데 그 세월이 너~무 길어요. 이젠 한이 맺혔어.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조항조가 이 노래 부르고 대박 났습니다. 조항조가 무명에서 유명가수로 된 것이 이 노래 때문에 그래요. <남자라는 이유로> 노래방에 가면 남자들이 다 불러요. 자기 집에서 못 푸는 걸 노래방에서 남자끼리 다 풀어요. 실컷 풀고 한번 울고. 여기 가사를 보면 얼마나 울고 싶었는지 ‘울어’를 두 번 넣습니다. 앞에서는 한 번이거든요.

언제한번 그런 날 올까요
가슴을 열고 소리 내어 울어 (한 템포 쉬고) 울어 볼 날이
남자라는 이유로 묻어두고 지낸 
그 세월이 너무 길어요

그 세월이 그 다음에 너~~~~~무 계속 가요. 한이 맺혀서 너무 길어요. 우리나라 남자의 애창곡입니다. 속상하면 이거 한번 부르고 집에 들어가고 자제하지요.

그래서 이 세상에 남자 없습니다. 여자도 없어요. 지 사랑하라고 거짓말 해놓고 돌아서서 은근히 기대하고. 이게 여자고, 남자고. 그러니까 자기 사랑, 간음이죠. 음행입니다. 자기가 자길 사랑하는 것. 존재를 사랑하는 것은 음행이에요. 그 과정, 그것도 예상 못하는 과정 속에서 사랑이 새롭게 나올 때 그 사람은 천국에서 사람 사는 법을 배운 겁니다. 이 세상에서.

나를 버리고 너를 버리고 우리가 둘 사이에서 둘 다 예상 못하고 없었다고 여겼던 새로움을 끄집어내는 겁니다. 그 끄집어냄 앞에 모든 것을 잃어버립니다. 잃어버리는 것은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

아가 1장 2절에 보면, “솔로몬의 아가라” 솔로몬의 노래 가운데 최고의 노래라고 해놓고 단박에 덧쓰는 것이, “내게 입 맞추기” 클림트라는 유명한 화가가 그린 <키스>라는 그림이 있지요. 그 화가의 화풍의 특징은 모든 게 금색이에요. 가장 아름다운 고귀하고 귀한 것을 나는 사랑에 바치리라. 그래서 이 그림뿐만 아니라 다른 그림도 금색으로 포장을 해놨는데 입맞춤이란 그림을 연상해보면 입 맞추기를 원한다고 돼있어요.

공동번역에 보면 이렇게 돼있어요. “그리워라, 뜨거운 임의 입술, 포도주보다 달콤한 임의 사랑” 그만큼 취한단 말이죠. 취한다는 말은 누굴 잃어버린 거예요? 자아를 입맞춤 하나에 뿅 갔다는 거예요. 내가 여기 미국인지 한국인지 중국인지도 모르겠다는 거예요. 오늘 몇 월 며칠인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입맞춤 하나에 시간이 스톱되는 거예요. 

그게 전도서에서 말하는 때, 타이밍이에요. 그 타이밍 앞에 나는 타이밍의 종이 되는 겁니다. 내가 입맞춤하는 게 아니고 입맞춤에 내가 놀아나는 거예요. 그 사랑에 놀아나는 겁니다. 그러면 두 번 다시 입맞춤할 수 있을까요? 못하지요. 왜? 타이밍은 내 수하에 있지 않기 때문에 내 권한에 있지 않기 때문에.

예를 들어서 좋아하는 사람과 식당에 가서 식사를 했다. 너무 맛있는 거예요. 그래서 오해를 한 거예요. 이 식당이 맛 집이라서 맛있다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그 사람을 떠나보내고 그 집에 갔어요. 혼자서 먹습니다. 처량하지 짝이 없어요. 반도 못 먹고 남깁니다. 그것이 음식 맛이 아니고 사랑의 과정의 맛, 사랑을 뿜어내는 과정이에요. 그래서 부른 노래가 <뿜뿜> 모르면 넘어가고.

사랑은 뿜어져 나와야 돼요. 옛날 구닥다리 좋았던 것 자꾸 우려먹는 건 안 돼요. 백숙이나 사골이나 우려먹는 거지 사랑은 그런 게 아닙니다. 사랑은 타이밍이에요. 타이밍이 사랑을 만들어내고 두 남녀를 끌고 다니죠.

그래서 아가에 보면 장소와 거리감, 밀당, 멀어지고 가까워지는 거리감과 장소가 사랑을 이해하는데 상당히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습니다. 어떤 장소에서 장소로 계속 이동하고 있는데 마지막은 뭐냐 하면, 여기 4절에 나오죠. “왕이 나를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나를 왕의 침소로 이끌어간다고 돼있어요.

그러니까 아까 <명동콜링>이란 노래에 보면, 보고 싶다 예쁜 그대 돌아오라 나의 궁전으로. 그 궁전이 옥탑방일 수 있겠지요. 옥탑방이라도 괜찮아요. 원룸이라도 괜찮아요. 아니면 친구와 같이 사는데도 괜찮아요. 타이밍을 그러한 요건을 낮추고 잊어버립니다. 사랑이라고 새롭게 뜬 요건은 기존의 요건을 재편성합니다. 사랑하게 되면 네가 한 모든 것이 ‘좋아’가 돼요.

그게 고린도후서 1장 20절에 나오지요.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앞에 19절에 보면,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합력하여 선을 이룬단 말이죠. 내 인생에 일어난 모든 것은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순간 모든 것은 그러 했어야 했던 적절함이었다 이 말입니다. 마땅함. 당연히 그랬어야 했던 일을 그런 타이밍으로 우리를 주님의 처소로 주님의 궁전으로 님의 궁전으로 저를 이끄시는군요, 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조건은 우리가 그분이 여자가 되는 거예요. 그분의 신부가 되는 거예요. 

이 땅에 여자는 없습니다. 이 땅에 남자도 없습니다. 그러나 메시아, 왕이 되신 분이 스스로 자기의 힘을 처벌하고 심판하는 그 힘을 사랑으로 집어넣는 거예요. 자기를 낮추는 곳으로 집어넣는 겁니다. 하나님의 자기 처벌이죠.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치는 거예요. 그 치는 결과 생산물로 죄 용서가 일어나게 되고 그 죄 용서라는 강보, 마구간이죠. 마구간은 먼저 있고 태어날 아기는 없지만 죄 용서란 마구간 준비하고 예수님의 피로 적셔있고 거기에 혜택을 입을 새로운 효과를 입을 새로운 아기가 여자의 이름으로 태어나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새로운 혈육공동체로 이뤄지는 거예요. 기존의 공동체는 내가 부모로부터 태어나는 거죠. 이걸 요한복음 3장 8절에서는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 했어요. 니고데모와 대화에서 예수님께선 다시 태어날 것을 권합니다.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기존의 육적인 조건이 아니고 영적 조건이다. 

영이라 하는 것은 모든 육의 완성이고 다시 말해서 모든 약속과 언약의 완성을 영이라 하거든요. 귀신 이런 것 아니에요. 하나님의 약속이 모든 것이 예가 되는 그 상황, 벽지를 보나 인테리어나 모든 것이 예수님이 있어야 할 자리에 제대로 있었다는 것을 사랑으로 받아줄 때 우리는 사랑의 아들의 나라에서 생산된 하나님의 자식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자식일 때 솔로몬과 우리는 형제지간이 되지요. 그리고 엄마, 아빠는 이 지상에 없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예루살렘이고 아버지는 우리가 몰랐던 하나님인데 우릴 생산함으로 비로소 알게 되는 아버지, 예수님의 아버지가 아버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버지의 부재에요. 이건 기존의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기존의 오빠, 누이동생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는 거예요. 거기서 사랑으로 빼내는 거예요. 

이것이 신비고 비밀이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5장에 그렇게 돼있지요. 남녀가 결혼하는 것은 기존의 부모의 집을 떠나는 것인데 이것은 내가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건 신비라고 했어요. 이거는 내가 하나님의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 말이죠. 복음을 위해서 이 땅에서 남자, 여자 달리 한 거예요. 남자, 여자란 성을 준 거예요. 그 남자가 가짜고 그 여자가 가짜 여자란 사실을 일깨워준 겁니다. 

처음에 남자, 여자는 가짜가 아니었지요. 완전한 진짜도 아니었지만 가짜가 아니었지요. 그래서 서로 부끄러워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에서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는 남자가 사람으로 변하고 여자가 사람으로 변했어요. 이제는 하나가 된 게 아니고 두 사람이 둘이 됐어요. 둘이 됐으니까 두 사람이 같이 있는 셈이 되지요. 상대는 나에게 타인이 되고 그 사람은 나를 타인으로 보는 거예요.

타인으로 보니까 거기서 남 탓이 나오는 거예요. 여자 때문에 내가 조졌습니다. 나는 마귀 때문에 그랬습니다. 전부 다 남 탓이 되는 거예요. 개인성을 부과하는 거예요. 자기에게 개인성을 부과하면 자기가 절대화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정신머리로 어딜 가요? 지옥이 가장 좋은 겁니다. 

그리고 그냥 지옥 가는 게 아니고 지옥에 가도록 충실하게 이 땅에서부터 지옥생활에 아주 젖어들도록 지옥생활에 몸이 자연스럽게 친숙하도록 주께서 그렇게 이끄시는 겁니다. 지옥 갈 때 그냥 가는 줄 압니까? 지옥생활에 지장 없도록 해서 지옥 보내는 거예요. 얼마나 친절하신 주님인 줄 모릅니다. 

지옥생활이란 사랑이 아니고 내 힘을 비축하기 위해서 힘을 끌어 모으기 위해서 나만 행복하고 나만 잘되면 되는 거죠. 내 가정 잘되고 내 교회 부흥되면 그만이고 내 나라 잘되면 그만이고. 앞에 내가 붙어요. 배고프면 내가 배고프다고 우겨요. 사랑하면 내가 사랑한다고 우깁니다. 반드시 자기가 갑이 되고 자기가 주인공 돼야 그게 성에 차요.

이게 지옥에 부합되는 인간으로 적절하게 마귀가 잘 훈련시켜놓은 겁니다. 인간은 마귀의 똥개지요. 마귀의 밥입니다. 마귀는 인간에게 사료만 주죠. 사료를 교환할 수 있는 돈. 매일같이 돈 얻고 오늘 하루치 죽어가고. 또 돈 벌고 죽어가고. 촛불을 태우리라 하는 것처럼 매일같이 그만큼 촛불은 꺼져가고 있습니다. 요새 현대말로 스마트폰 배터리가 4개에서 3개 되고 2개 됐다가 1개 되면 껌뻑거리는.

힘 빠지면 죽는다 하지 마세요. 왜 힘이 빠졌는지 그 원인을 알아야 돼요. 그건 처음부터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기 때문에 그래요. 놀라운 기적은 합당치 않는 사람을 솔로몬이 사랑한다는 거예요. 사랑을 위해서 자기 사람으로 데려온다는 겁니다. 자기 궁전으로 오지요.

아가 1장 6절 다시 봅시다. “내가 일광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미의 아들들이 나를 노하여 포도원지기를 삼았음이라” 여기 ‘노하여’란 말이 나오지요. 그러니까 솔로몬이 사랑한 여인은 이미 마음이 기존의 혈육공동체에서 떠났어요. 떠났다는 말은 불행하다는 말이 아니고 빨리 이런 환경을 벗어버리고 싶다는 거예요.

6절을 공동번역으로 보면, “가뭇하다고 깔보지 말아라. 오빠들 성화에 못 이겨 내 포도원은 버려 둔 채, 오빠들의 포도원을 돌보느라고 햇볕에 그을은 탓이란다.” 제가 아까 이야기한 산업역군으로 만든 거예요. 산업역군은 노동하는 조건 하에 사람 대우받는 거예요.

그러면서 7절에 보면,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야 너의 양떼 먹이는 곳과” 여기 지금 누구한테 이야기하는지 잘 모르겠지요. 둘 다 반말하기 때문에. 너, 나 하는 사이기 때문에. 옛날풍습으로는 어떻게 여자가 남자한테 말을 놓느냐고 하지만 지금 솔로몬이 자기를 낮추는 겁니다. 점점 더 낮아지지요. 여자를 위해서 있는 게 아니고 사랑을 위해서라면 내가 뭔들 양보 못하랴.

자, 그러면 사랑은 어떻게 시작하느냐? 그것은 우리가 물을 수 없어요. 왜냐하면 사랑은 하나님에 의해서 타이밍 맞춰 제공되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에 놀아날 뿐이지 주님이 맺어준 사랑을 내 힘으로 강제로 뗀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 육적인 힘으로 앙탈부리는 것밖에 안 돼요.

그래서 아가 전체를 읽어보시면 사랑에 대해서 어떠한 방해도 사랑하는 사이를 떼어놓을 수 없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는 거예요. 이것은 마치 로마서 8장에 나오는 이야기와 같습니다.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어떤 것이라도 일방적으로 주어진 사랑이거든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없다고 돼있어요. 

하나님의 사랑을 그냥 사랑이라 하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으로 언급하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너무나 현실적이고 실제적 증거를 갖고 있기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 날 위해 누가 죽었다는 자체가 이것은 동화도 아니고 소설도 아니고 지상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이 되는 겁니다. 

마치 배고플 때 내가 배고프다는 것이 가상이 아니거든요. 나는 지금 배가 안 고프다고 백날 해도 소용없어요. 용변이 마려울 때 나는 지금 용변이 전혀 마렵지 않다, 나는 화장실에 가기 싫다. 이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터지려고 하는데. 그게 소용이 없잖아요. 지금 예수님은 과거의 인물 아무것도 아니야. 예수가 죽었다는 것은 정치범으로 죽은 거야. 

백날 부인하고 부정하고 싶어도 그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안에 우릴 사랑함이 완료형으로 그냥 담겨있는 것이 아니고 사랑해줄까, 너도 사랑할래? 이게 조건부가 아니라 조건이 떠나버린 완료형으로 있는 거예요. 다 이루었다. 그 피 안에 다 이룬 거예요. 그 피 안에서 우리에게 새삼스럽게 조건을 걸지 않는 이유는 피를 피답게 하는 조건이 내가 행함에서 내는 조건을 완전히 배제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구상하고 있는 나의 구원 조건은 따로 있거든요. 이 정도는 착해야 되고 이 정도는 말씀 지켜야 되고 십일조 해야 되고 선교해야 되고. 내가 만든 구원의 조건, 남을 사랑해야 되고 희생해야 되고 이런 조건이 있는 반면에 충동의 사랑은 내가 예상 못한 거잖아요. 내가 만든 조건 때문에 도저히 생각이 안 날 다른 조건을 이미 주님께서 만들어놓고 그 주님의 조건이 충족되었음을 십자가로 드러내서 우리에게 통보한 거예요.

의논 없이 널 구원한 걸 미안하다. 의논 없이 천국 보낸 건 미안한테 어쨌든 간에 다 이뤄졌다. 그러니까 이제 와서 네가 생각한 네가 구상한 경건한 조건, 구원받을 조건, 거룩한 조건, 착한 조건은 다 뻥이야. 버려라. 그래서 성도는 남은 게 찢고 버리고 물어뜯고 그것만 남았어요. 내가 근사한 나를 만드는 개선하려는 모든 조건, 나를 더 발달된 인간으로 만드는 모든 조건을 매일같이 내가 거부하는 일만 남아있어요.

지금 제가 이런 말하면 여러분이 쉽게 거부할 것 같지요. 그리고 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내가 만든 조건을 왜 못하느냐 하면, 그동안 우리 발목을 잡고 있는 원리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인과응보습성 때문에. 인과응보는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인간에게 마귀가 뒤집어씌운 거예요. 착하게 살면 복 받고 천당 가고, 나쁘게 살면 매 맞고 죽어서 지옥 가고. 이게 바로 인과응보, 악마가 우리한테 박아놓은 임플란트에요. 우리 정신에 이걸 박아놨다고요.

그리고 박아논 인과응보의 자식과 그 결실이 오늘날 자아라는 겁니다. 이런 자아상을 우리한테 대대로 양육시킨 거예요. 착해야 우린 생존할 가치가 있다. 그러니까 착한 게 목적입니까, 생존이 목적입니까? 생존이 목적인 거예요. 어쨌든 간에 살아남아야 된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 착하면 된다. 양심에 반하지 않고 바르게 살면 된다. 바르게살기운동이에요. 바르게 사는데 완전한 바르게살기가 안 될 때는 차선책으로 최선을 다하여 바르게살기. 그러면 어디 간다? 천국에 자기가 한 성과대로 자기 자리를 확보할 수 있다. 너무 게으르게 바르게 살면 천국 가도 낮은 자리 가고 악바리처럼 열심히 해서 바르게 살면 천국 가면 높은 자리에 가서 천국 가도 출세한다. 천국 가서 출세하세. 이게 바로 악마가 만든 구원의 조건입니다. 

그러면 착한 일 중에 무엇이 포함되겠어요? 예수 믿어주기, 기도 열심히 하기, 선교헌금내기, 교회 부흥시키기, 교회 봉사하기, 어려운 사람 돌보기, 바자회 열어서 이웃사람한테 헌신하기, 크리스마스 때 냄비에 돈 넣기. 자선냄비 하는 사람들 이백, 이백오십 만원 많이 받아요. 그 사람들 기독교 몰라요. 그냥 아르바이트에요. 구◯◯에 남자들이 별로 없어서.

왜 종교가 살아남느냐 하면, 인과응보를 집어넣으면 살아남고 인과응보 빼버리면 종교가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 땅에 사람 눈에 안 띄기 때문에. 예수님 중심, 복음 중심은 이 땅에 눈에 띌 수가 없지요. 그러니 눈에 띈다는 것이 많이 수상해.

인과응보, 우리 양심이 이걸 호소합니다. 우리에게. 양심상 그런 짓해서 되겠느냐, 그렇게 나와요. 악마가 만들어준 양심이에요. 그러면 이런 양심을 어떻게 처리할까요? 우리 주님은 아주 속 시원하게 처리합니다. 인간 죽여 버려. 죽여 버리면 양심도 죽지요. 우리가 죽으면 그것도 같이 죽지요. 

그걸 로마서 7장에서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 나는 내 양심을 살펴봤는데 내가 착하고 싶지만 앞에 추월하는 사람이 있더란 말이죠. 앞서서 착하게 살아야 된다고 뛰는데 뭐가 획하고 지나가요. 마귀가 와서 따라와, 따라와. 이러는 거예요. 내 마음의 악의 주도권 처리가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성령도 안 받았고 주님의 계시도 없는 상태에서는 이러한 우리의 본성을 그 다음에 어떻게 합니까? 감추는데 급급하겠지요. 나쁜 짓했지만 회개했다고. 회개가 인과응보의 착한 일했다 하지요. 나쁜 짓하지만 십일조 했다고. 이런 것이 인과응보에 들어가는 거예요. 나쁜 짓하지만 열심히 성경 많이 보고 구원받으려고 애쓰고 노력한다고. 이런 것. 남편한테 전도 못하지만 자기 혼자라도 교회 봉사한다고. 이런 게 전부 다 자기 조건이에요. 

내 구원은 내가 만든 조건을 계속 붙들고 있는 거예요. 이 조건 협상해서 충족시켜달라고. 주님의 조건은 그 딴 것 안 받습니다. 인과응보 자체를 부정해버려요. 주님의 구원의 조건은 주님의 일방적 사랑, 그걸로 끝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했노라. 그걸로 끝이에요. 너부터 출발하지 말고 너에게 네가 손을 떼면 된다는 거예요. 내가 어떻게 할까요, 에 손을 떼세요. 

왜냐하면 타이밍이 먼저고 우리는 그 다음에 거기에 같이 춤을 춰야 될 복속된 을이기 때문에 그래요. 내게 세상 변화의 주도권이 있는 게 아니고 변화는 주님이 때를 쥐고 있고 때에 맞춰서 놀아날 뿐이지요. 그게 우리입니다. 우리 자신을 알아야 돼요. 사랑한다는 그 말도 거짓말. 하고 싶어 하겠어요? 아무리 애를 써도 내 운명을 내가 변화 못 시킵니다. 

제가 의존교회에서 교인들에게 큰소리로 물었습니다. 인간이 구원합니까, 주님이 구원합니까? 인간이 구원 안 하지요. 그러면 인간 속에 내가 포함됐잖아요. 그럼 내가 날 구원할 수 있습니까? 못하지요. 그러면 게임 끝났네요. 구원도, 천국도, 지옥도 다 누구 소관이다? 주님 소관이잖아요. 

그런데 이것이 이스라엘 왕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사랑이 주어지니까 그 사랑이야기를 여기서 한 겁니다. 최고의 사랑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인데 하나님이 자기 여자를 만들기 위해서 스스로 왕 됨을 포기하고 시커먼 여자 술람미 여자와 같이 사랑을 나눈 이야기가 아가 이야기입니다. 

안녕히 주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