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자료

3.왕의 구심점 190114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1. 19. 10:47
2019-01-19 08:02:58조회 : 14         
2019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3강-아가 강해:왕의 구심점이름 : 한윤범 (IP:221.147.126.19)
2019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3강-아가 강해:왕의 구심점
(강의:이근호 목사)


세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첫째, 둘째 시간을 일단 요약하고 나가겠습니다. 아가의 솔로몬의 내용은 이스라엘을 사랑의 공동체로 만드는 겁니다. 그러면 혈육의 공동체에서 벗어나야 돼요. 모든 인간은 혈육의 공동체에서 태어나거든요. 임신하면 태몽이란 게 있어서 한복 입은 할머니가 나타나서 복숭아를 던져주고 가면 태몽이다. 복숭아 던져주면 딸이고 국수 던져주면 아들이고 그런 겁니까?

그렇게 시작했던 가족이 계속해서 공동체의 한계를 보여줘요. 혈육공동체의 마지막은 결국 홀로 죽는다는 거예요. 사랑받고 살았고 예쁨 받고 살았는데 죽을 때는 아무도 같이 죽을 수 없는 쓸쓸한 비극적 운명이 인간입니다. 그것은 사람으로 시작해서 그래요. 인간으로 시작해서 그런데.

성경은 솔로몬을 통한 다윗언약의 계시에 의하면 사람은 사람으로 마감되면 결국 비극이란 말이죠. 왜 죽는지도 모르고 왜 지옥 가는지도 모르고 왜 인생이 고생스런 것도 모르고. 그 이유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거든요. 그리고 아가 하는데 사정이 허락하지 않아서 못 왔지만 말씀이 하는데 참석도 못하고. 물론 참석 못함을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사람으로 시작한 것은 결국 비극이에요. 홀로 죽는다는 겁니다. 그럼 사람으로 시작된 것이 왜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가? 이건 창세기 3장에 있었던 하나님의 금지 한계를 넘어설 수 없어요. 그러면 금지 이전으로 돌아가려면 사람에서 남녀로 구분돼야 돼요. 남자와 여자로 구분돼야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남자든 여자든 자꾸 남자가 여자로 살지 않고 사람으로 살려고 합니다. 사람으로 살려면 생존에 필요한 힘이 필요하겠지요. 내가 돈만 있으면 너한테 안 매인다는 식으로 하는 겁니다. 남녀로 살게 되면 하나가 깨집니다. 둘이 됩니다. 둘은 남녀가 일체성, 일체감을 가질 때 필요한 재료가 돼요.

두 사람이 하나가 된 거거든요. 창세기 2장에. 범죄 하기 이전에. 그때 그 시절에 대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양보한 적이 없어요. 그래야 된다는 겁니다. 두 사람이 살기 이전에 두 명이 있었지만 그게 한 몸이었던 그 시절은 나는 기어이 포기 못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단호함이에요.

그리고 그때 두 사람이 있었던 환경을 보세요. 그 환경이 바로 낙원이었습니다. 그래서 아가에서는 거친 들(광야)에서 올라온 자가 누구냐고 해요. 광야와 낙원을 대비하고 있습니다. 왕이 자기 아내와 함께 있는 것은 완전히 제가 보기에는 식물원으로 만들어놨어요. 아가 읽어보면. 열대식물원이면 파라다이스 같잖아요. 온실 같이 따뜻하게 만들어놓고. 식물원 온도가 30도 가까이 올라가요. 아열대지역이에요.

광야에서 낙원을 왕에 의해서 설치할 때 거기에 반드시 구심점이 있는데 사랑하는 여인 하나 가 꽂혀있으면 그게 광야가 낙원으로 변하는 거예요. 이 역할, 기능을 바로 솔로몬이 하는 거예요. 메시아가 하는 거예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잃어버렸던 낙원을 사람을 여자로 만들어서 사랑이 듬뿍 담긴 여인 하나가 등장하게 되면 회전문처럼 광야도 낙원으로 바뀌는 거예요.

바뀌게 되면 인간은 왜 죽는지 왜 지옥 가는지 왜 사는지 왜 하나님은 천국을 낙원을 처음부터 허락했는지 그 이유가 다 드러나게 돼있어요. 사람에서 여인으로 또는 사람에서 남자로 나오기 위해서는 여기서 두 사람이지만 하나가 되는 일체성을 왕이 실현해 보이는 실제로 보여줘야 돼요. 하나에 계시로서. 하나님은 이렇게 일하고 계시다. 사랑하는 이스라엘 공동체 내에서, 라고 보여줘야 돼요.

그러면 그들은 어디서부터 여인이 된다는 것은 사람으로 비극적 결말을 가질 수밖에 없는 그 단체를 분명히 규정해야 되는데 그게 뭐냐 하면, 혈육적 오빠에요. 혈육적 누이동생이었습니다. 그 혈육적 누이동생에서 강제로 납치하듯이 사랑이란 이름으로 빼돌려야 되는 거예요. 빼돌려서 왕의 궁전, 왕의 침실까지 들어와야 되는 겁니다. 

들어올 때 가만있는 게 아니에요. 왕은 자기를 목동으로 자기 자신을 낮추는 겁니다. 아가 1장에 보면 사랑하는 사람은 양을 치는 목동이 돼요. 그리고 그 여자는 양을 치는 목자를 찾듯이 사랑하는 남자를 양 따라서 찾아가게 되는 겁니다. 양 치는 내 남자는 얼마나 헤매고 있을까? 열두 시쯤 돼서 양 치는 곳에 내 남자가 쉴 테니까 그곳을 알려달라고 묻지요. 1장 7절에 보면. 

그럴 때 여자 혼자 오는 게 아니에요. 여자 친구와 같이 옵니다. 여자가 사랑하는 남자에게 올 때는 남자가 있는 거주지에 맞추는 마음가짐으로 거기에 참여돼야 돼요. 그것이 9절부터 나옵니다. “내 사랑아 내가 너를 바로의 병거의 준마에 비하였구나 네 두 뺨은 땋은 머리털로” 이렇게 해서 왕궁에 적합한 여인으로 남자가 왕실에 살았기 때문에 모든 모습이나 스타일이 왕실체제거든요. 

왕실체제에서 모든 움직임은 왕 위주로 돼있어요. 거기에 맞추어서 왕의 친구들이 11절에 보면, “네 목은 구슬꿰미로 아름답구나 우리가 너를 위하여 금 사슬을 은을 박아 만들리라” 남자 친구의 격에 맞도록 합창단이라 할 수 있는데 친구들이 옆에서 도와줘요. 친구들이나 여자는 왕의 허락을 받아서 왕의 새로운 공동체에 적합한 인간으로 들어오는 겁니다. 일반 육적인 곳에서 특별한 왕의 장소로 합체가 돼요.

그럴 경우에 여인과 남자에서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아니에요.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힘과 힘의 만남이에요. 내가 더 많은 힘, 돈을 가졌느냐, 그런 쪽으로 만났는데 여기 남녀가 만날 때는, 힘이란 범죄 하고 난 뒤에 내가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가에 해당하는 힘이에요. 왜냐하면 선악과 따먹은 후에는 자기가 절대자가 되기 때문에 말로만 절대자 되면 안 되거든요. 절대자 되기 위해서 필요한 여러 가지 에너지나 힘, 이런 것을 갖출 때 실효성이 있잖아요.

그래서 제가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에겐 타인이란 게 없어요. 내게 의미를 줄 때 비로소 한시적으로 나에게 필요한 남이 되는 겁니다. 아내, 남편도 마찬가지에요. 나에게 필요한 배우자일 경우에만 배우자라고 간주하지 내 인생을 훼손하고 내 인생의 절대성에 도전이 된다면 그거는 갈라서야 되지요. 왜냐하면 나는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고 사람이기 때문에 그래요. 

범죄 한 이후에 사람의 특징은 스스로 서겠다는 거예요. 스스로 생존하겠다는 거예요. 둘이 필요 없다는 겁니다. 나만 있으면 된다는 거예요. 창세기 2장의 경우 아니죠. 그렇게 해놓고 뭘 겨냥하느냐? 창세기 2장의 낙원을 지향하고 있어요. 그렇게 되기를. 나 홀로 누릴 수 있는 향유할 수 있는 파라다이스를 겨냥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교회에서 그걸 천국이라고 해요. 천국의 주인공이 누구냐 하면, 본인이 천국의 주인공이에요. 좀 배려한다면 자기 올케 사위 딸은 같이 모아주고. 중보기도해서 빨리 교회 오라 해서 그들만의 세계, 평소에 내가 육적으로 살았던 그 공동체를 그대로 중간에 막힘없이 천국까지 거주지를 옮기는 거예요. 서울에서 강남으로 경기도로 식구 그대로 옮기는 것처럼 요 식구 고대로 가겠다는 겁니다. 

장례식에서 흔히 하는 잘못된 해석이 뭐냐 하면, 그래 네 아버지 만난다. 누구 맘대로 만나요? 아버지를 만나면 뭐가 문제가 되느냐 하면, 아들과 자식 관계가 그대로 이어지면서 만나게 돼요. 그러면 천국 가서 패싸움하게 됩니다. 광산 김 씨 나와, 백 씨 나와, 안동 권 씨 나와, 이런 것처럼. 어디 천국이 세도 부릴 일 있습니까? 거기서 족보 펴놓고 따질 일 있습니까? 천국이 끼리끼리 놀 상황이에요?

천국은 끼리끼리 노는 걸 근원적으로 파괴된 사람만 오는 거예요. 나는 어느 집안에 소속돼있지 않을뿐더러 나는 나에게도 소속돼있지 않아요. 왜냐하면 십자가는 나를 소멸시켰기 때문에. 내가 있을 때 내 편이 성립되는 것이죠. 내가 없어지면 내 편도 없는 거예요. 내 편도 없고 내 자식도 없고 내 남편도 없고 나는 없어요. 나라는 자체가 소멸되기 때문에 그래요.

사람을 잃어버리고 남녀로 되찾는 겁니다. 사람으로서의 나를 잃어버리고 하나님에 의해서 새롭게 창조된 남자, 여자, 여자지요. 신부니까 여자로서 다시 만들어져야 되는 겁니다. 자기가 갖고 있는 자존심 그대로 유지한 채 교회 와서 성경 다 읽고 세례 다 받고 성찬식 다 하면서 천당 간데. 그리고 장례식하면서 걱정하지 마라. 다시 만난다. 그 낯짝 다시 만나서 어쩔 건데? 지긋지긋하지도 않아요? 징글징글해.

사람이 배우자 남편이나 아내가 죽을 우는 것은 울 때 타인은 모르지만 본인 입으로 다 자백을 해요. 아이고, 나 놔두고 왜 죽노. 결국 죽는 날까지 자기 심심하다고. 왜 심심하게 놔뒀나. 이 몹쓸 사람아. 죽은 사람 원망하고. 끝까지 남 탓이라. 끝까지. 대성통곡하면서 나, 어떻게 살라고? 당신 먼저 떠나느냐. 있을 땐 그렇게 싸우더니만 죽으니까 대성통곡하고. 이제부터 누굴 등쳐먹지?

사람으로 사는 게 화근입니다. 사람으로 산다는 말은 독자, 독립적으로 나를 남자나 여자로 부르지 말고 존엄성 인격성 있는 인간으로 불러다오. 그래서 사람이 혼자 되게 되면 자기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게 됩니다. 여자가 결혼하게 되면 이름을 잊어버리잖아요. 그러나 이혼하게 되면 이름을 되찾게 되지요. 내 이름이 있다는 것은 이름을 위하여 나는 존재할 가치가 있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나 내 이름으로 구원되는 게 아닙니다. 주의 이름 앞에 우리가 와해돼야 돼요. 흔히 주여, 주여 하는 것처럼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으리라는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그 말도 교회 다녀도 무슨 뜻인지 전혀 모르고 있어요. 막혀있어요. 막혀있는 이유가 마귀가 교회를 쥐고 있으니 막힐 수밖에 없지요. 

교회는 부흥되기 위해서 교회 유지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게 교회입니다. 숨이 막히네, 정말. 사람을 이용해서 교회 자체 덩치 키우는 게 목적이에요. 신천지, 구천지 따지지 마세요. 전부 다 마찬가지에요. 모든 단체가 다 그래요. 결국 돈 문제라니까. 그래서 교회 심심풀이로 가는 것은 내가 이해하는데 제가 당부하잖아요. 

교회 다니세요. 권사 되고 집사 되시되 제발 돈만은 내지 말라고. 물론 점심 먹었으면 오천 원 내는 그건 되는데 교회에 돈을 내게 되면 착각을 한다니까요. 마치 하나님의 전당인양, 하나님의 구원의 단체인양 자꾸 착각을 유발한다니까요. 교인들 많은데 헌금 잘 안 나오지? 교회 아니란 뜻이에요. 그게. 네가 한 소리에 돈 낼 만큼 가치 없다는 이야기거든요. 

인간의 진심은 돈에만 실리게 돼있어요. 당신을 사랑한다. 말로만 하지 말고 뭘 사주고 이야기해. 돈이란 것은 돈을 벌기 위해서 희생했기 때문에 돈을 낸다는 것은 자기희생을 바치는 거예요. 희생을 바칠 때는 얻을 것이 희생보다 크다는 조건 하에서만 희생하게 돼있어요. 인간은. 인간은 바보 아니에요. 얍삽합니다. 손해 보는 장사는 없어요. 무슨 손해를 봐요.

혼자 산다는 자체가 사기에요. 혼자 살겠다는 자체가 타인에게 사기를 치고 있는 겁니다. 사기 치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기 때문에 그러고 있는 거예요. 미쳤다고 남 좋은 일 해요? 결국 좋은 일은 나만 위해 좋은 일하는데 그 방식 외에는 다른 방식이 도무지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 거예요. 교회 가도 그렇고 안 가도 마찬가지에요.

여기서 이스라엘의 특이성은 주님께서 찾아와서 둘 다 없애버립니다. 그리고 1이라는 것은 둘 중에 하나가 1이 아니고 남자, 여자 둘 중에 누가 1 될래? 그런 것 없어요. 그냥 다 죽여 버리고 그 둘 사이에 과정으로 나타난 사랑으로 말미암아 다시 새로운 일이 창조될 때 그건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너와 나와 일체성을 갖춘 새로운 몸이 탄생되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은 내가 예수 믿는 것이 아니고 내가 예수 안에 들어있는 게 구원이에요.
예수 안에 들어있고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신 것이 바로 그게 구원입니다.
믿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요. 가면 같이 따라가는 거예요. 캥거루 새끼와 똑같아요.
믿을 것도 없어요. 주님이 갑이고 우린 을이에요.
시키는 대로 살 수밖에 없고 주님이 주신 타이밍대로 맞춰서 우린 춤출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 일체감이 아가라는 제목 빼놓고 본 내용에 바로 들어가는 게 뭐냐? 내게 입 맞추기를, 입맞춤/키스가 나와요. 키스란 입을 닫아버리는 거예요. 입으로 입을 닫아버리는 잡소리하지 마라. 네가 입을 열면 나오는 것는 전부 다 음모와 술수와 거짓과 독자적인 노력과 나만 최고라는 그런 것들만 쏟아져 나오니까 입으로 입을 막아버리는 거예요. 입 다물라고. 

사랑하는 데는 말이 필요 없습니다. 언어라 하는 것은 간격이 벌어졌을 때 떨어졌을 때 가까이 하기 위한 마지못한 수단이에요. 글이나 말을 한다는 것은 우리 그동안 너무 멀어졌잖아. 좀 달래볼까. 그때 동원되는 수단이 뭐냐? 말이란 언어입니다. 

그런데 키스를 하고 있다는 말은 그 자체로 일체성이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한테 말하는 것은 정신이상자지요. 그러니까 하나가 될 때는 말이 필요 없는 거예요. 키스로 끝나는 게 아니에요. 진도를 더 나가볼까요? 2장 6절 누가 읽어보세요. 제가 읽어보라는 것은 중요한 구절. “그가 왼손으로 내 머리에 베개하고 오른손으로 나를 안는구나” 참 목소리 큰 것이 얼마나 귀한지 새삼스럽게.

진도 많이 나갔지요. 키스에서 끝나지 않고 더 나간 겁니다. 둘 사이에 밀도 있게 아무것도 끼지 않도록 밀착하는 거예요. 두 남녀가. 그러니까 하나가 될 때는 제발 딴 생각하지 말란 말이죠. 딴 생각하게 되면 독자적으로 행동했던 버릇이 그대로 나오는 거예요. 키스하면서 축구 다 보고, 홈런. 그럴 줄 알았어. 한 골 들어갔고. 

집중해요, 집중. 일체감에 집중. 너와 나 사이에 밀도 있게 어떤 것도 끼지 못하도록 그리고 이 일이 끝나고 난 뒤에 우린 어떻게 되는지도 생각하지 마세요. 지금 이 순간 이것뿐이에요. 그리고 사랑은 죽음보다 강한 거예요. 죽어도 좋은 거예요. 아니 말 잘못했다. 죽어서 좋아요. 왜냐하면 혼자 있을 때는 스스로 못 죽였으니까. 네가 와서 날 죽여 달라는 그게 사랑의 힘으로, 사랑의 뽀뽀로 나를 아예 죽여 버려. 이런 거죠.

아가 자체가 처음부터 일체감을 표준화하고 목표로 잡고 있습니다. 이것은 내 쪽에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요. 일체감을 위해서 내가 놀림이라든지 재롱을 부린다든지 상대방에서 뭔가 제스처를 취해서 내 사람 만들어볼까 수작을 부리고 작업에 나서는 그런 어떤 것도 아무 소용없어요.

제가 첫째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작업에 나서서 내가 그 사람을 갖고 싶다고 하는 것은 충동으로서의 사랑이 아니고 뭐라고 했습니까? 욕망으로서의 사랑이죠. 욕망은 반드시 나로부터 출발한 것이고 충동은 나는 그 사람 좋아할 마음 없었는데 사랑의 마음이 왜 생겼지? 이게 충동이에요. 내가 충동을 관리할 입장이 아니고 오히려 충동이 나를 다루고 있는 입장이에요.

교재에 보면 나오지만 충동이란 기존에 이성적인 행동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앞뒤 따지는 그런 행동은 충동이 아니에요. 여러분들이 유치원 아이들이, 엄마 우리 일하러 가자. 이런 소리하는 것 봤습니까? 엄마 시장에 가지 마. 나하고 일해. 애들이 일한다는 말을 하던가요? 일하는 대신 뭐라고 합니까? 엄마 나와 놀자고 하지요. 

원래 인간은 낙원에 있을 때 그들은 일이 필요 없던 거예요. 필요한 것은 낙원에서 다 제공됐습니다. 일하면 안 돼요. 일한다는 자체가 비정상이에요. 우린 지금 비정상 모임이에요. 해서는 안 되는 짓을 하는 게 일이에요. 그러나 일을 해야 떡이 나오고 사람은 떡으로 살기 때문에 그래요. 사람이 떡으로 산다는 것이 보편적 상식이고 이게 진리입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 광야에서 예수님께서 마귀를 만날 때 마귀를 괄호 쳐서 없애버립시다. 그냥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예수님이 측은해서 금식 너무 오래 했는데 떡 잡수시고 하세요, 라고 지나가는 과객이 그렇게 이야기하면 그 과객을 인정 많은 사람으로 보지 악마로 보겠습니까? 안 보지요. 그 인정 많은 사람이 악마라니까. 우리는 악마를 좋은 사람으로 보고 예수님을 나쁜 사람으로 봐요. 왜? 세상이 미쳤으니까. 세상이 미쳤으니까 구원받으려면 미친 데서 더 미쳐야지요.

우리가 복음을 알면 현실을 분석할 수 있어야 돼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에 의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면 내가 전에 일했던 세상이 어떤 구조로 돌아가는지 누가 주도권을 쥐고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지 그걸 봐야 되거든요. 그저 교회 오면 목사님 훌륭하고 그런 생각하지 말고 교회고 뭐고 마귀가 다 장악하고 있으니까 이제는 믿을 데가 못돼요. 

그러면 누구만 믿어요? 자기만 믿는 거예요. 자기만 믿으니까 남 욕할 것도 없이 자기 자신이 우상화 됐으니까 유일한 신도 누굽니까? 본인이잖아요. 유일한 교주는 누구고? 본인이에요. 모든 인간은 종교의 교주고 모든 인간은 하나하나 종교 창설자에요. 지가 믿는 예수, 내가 믿는 예수 다 달라요. 지가 믿는 하나님, 내가 믿는 하나님 다 다르고. 

언어로 맞춰본다고요? 언어는 붕 떴다니까요. 언어 자체가 거짓말이에요. 접근은 하지만 일치되지는 않아요. 미분해서 아무리 접근해도 그 본래 의미를 언어는 되지 않아요. 그래서 키스로 막아버린 거예요. 말 하지 말라고. 입 떼지 말라. 입 떼는 자체가 거짓말이에요. 말과 실제는 비할 바가 못 됩니다. 

지금 아가는 광야에서 낙원으로 옮겨지는 과정이에요. 광야에서 시작해야 돼요. 광야에서 예수님께서 마귀를 만났다 하는데 그냥 보통 선한 사람 만났다고 보면 돼요. 예수님을 동정해서 사람은 떡으로 산다. 떡을 얻으려면 뭐로 얻어야 됩니까? 돈으로 사는 거죠. 돈을 사회적으로 파악하면 이게 사유재산이에요. 

사유재산을 갖고 있는 사람들끼리 결집을 하고 결속을 하는 것이 바로 부르주아에요. 부르주아가 만들어낸 국가가 근대국가입니다. 옛날에는 왕이 있었고 신분제도인데 지금은 신분제도 없고 민주주의 제도라 해서 부르주아가 자유민이죠. 자유민의 특징은 내 생명과 내 인권과 내 재산은 오직 내가 관리할 자격을 하늘로부터 부여받았다는 미국 독립선언서, 프랑스 혁명선언에 입각해서 만들어진 근대국가에요.
근대국가 뜻부터 시작해서 근대국가까지 간 거예요. 근대국가에서 법이 만들어지고 법을 수호하자가 누굽니까? 경찰 아닙니까. 내 재산과 내 목숨을 지켜주는 경찰이잖아요. 대외적으론 군인들이고. 얼마나 자연스럽게 살아갑니까. 우리가 군인과 경찰, 외교권 이런 국가 속에 있으면서 우리는 이것이 정상적이고 이것 외에는 다른 세계관은 생각지도 말자고 자부했어요.

그런데 성경에선 사도 바울의 편지에서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하면, 무슨 희한한 소릴 다하고 있냐. 그냥 복 주면 그만이지 이 이야기가 왜 있느냐. 너희는 땅에서 죽었고 생명은 하늘에 있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는 거예요. 국가에서 모든 시위와 모든 투쟁은 바로 뭘 지킨다? 내 사유재산 지키고 내 목숨 지키고 내 가정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란 말이죠.

그래서 홉스는 말하기를 이 세상은 뭐냐?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다. 일 대 백, 일 대 십칠이 아닙니다. 만인 대 만인으로 싸우는 거예요. 하나의 이슈에선 동지였다가 이슈가 바뀌면 어제의 동지가 오늘은 원수가 되는 거예요. 한국당, 민주당 왔다 갔다 하는 겁니다. 우리는 당 같은 것 없어요. 왜 당이 없습니까? 광산 김 씨가 당인데. 안동 권 씨가 당이잖아요.

족보하라고 돈 내라 하잖아요. 선산 모시겠다고 회비 내라 하지 않습니까. 어버이 날인데 형제들 모여야지, 이 이야기하거든요. 동서들끼리 부모님 아플 때 대비해서 곗돈 모으자고 하지요. 그게 편당이에요. 당 짓는 거예요. 거기서 동서 혼자 빠지면 미운 털 박힙니다. 왕따 시켜버립니다. 왕따가 학교에만 있는 것 아니에요. 동서, 형제들 간에 왕따 많습니다. 

자식 낳아 보세요. 며느리가 시어머니 왕따 시켜버립니다. 형님 애들은 봐주고 왜 내 애는 안 봐줍니까. 딸자식은 봐주고 아들자식은 홀대합니까. 또 나와요. 당이 계속 가지를 칩니다. 어른 되면 조용할 줄 알았더니 어른 되도 어느 당에 소속해야 될지 처신하기가 힘들어요. 왜 인간이 그렇게 고생합니까? 그거는 남녀가 아니고 사람으로 살겠다는 배운 게 그것밖에 없고 아는 게 그것밖에 없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사회를 보려면 유시민처럼 해선 백날 가도 몰라요. 주님의 여자가 돼야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사회를 봐야 되고 내 안의 그리스도로 사회를 보는 그 방법 외에는 없습니다. 그래야 죽음의 비극이 아니고 이게 당연한 수순이고 절차라 하는 것을 감사히 받아들이게 됩니다. 아, 주께서 저를 잘도 활용해주시는군요.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여자로 죽어야 돼요. 그리스도 신랑과 만나서 여자로 죽어야 된다고.

그리고 사람으로 죽어야 될 이유를 알아야지요. 그것은 뭐냐 하면, 내가 산다는 것은 내가 적합한 내 환경을 우리가 못 벗어나는 거예요. 만인 대 만인이 투쟁하는 환경을 우리는 거기에 적응할 뿐이지 벗어나진 않아. 자꾸 적응하려고 해요. 좋은 게 좋다. 은혜로운 게 좋다. 자꾸 적응하려고 하지 빠져나온다는 건 상상도 못해요.

그러나 성령이 임하게 되면 우리가 새사람이 되게 되면 적응할 필요도 없어요. 이미 그리스도가 신랑이 다 마련해둔 거예요. 모든 새 하늘과 새 땅부터 다 마련한 것에 우리를 보석같이 거기다 집어넣는 겁니다. 어느 정도냐 하면, 2장 6절 봅시다. 이 포즈를 생각해보세요. “그가 왼손으로 내 머리에 베개하고 오른손으로 나를 안는구나” 그러면 나는 어디에 의지하게 되느냐 하면, 팔이 나를 품어줍니다. 그러면 팔에 무엇이 새겨지느냐 하면, 다른 분이 읽어보세요.

8장 6절. “너는 나를 인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면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다르잖아요. 남자가 있어야 돼. 여기 보면 팔 나오지요. 팔에 도장처럼 문신처럼 주님이 움직이는 팔 안에 이미 내가 이미지 정도가 아니고 아예 도장처럼 박혀있는 거예요. 나라는 것이.

박히게 된 원인이 뭐냐 하면, 박히도록 여자가 어떤 조치를 한 게 아니고 나선 게 아니고 나를 밀도 있게 어떤 잡스러운 것이 끼지 않도록 온전히 압박을 가해서 너는 내 꺼야 내 사람이라고 안아주니까 그것이 일회성이 아니라 계속해서 시간이 멈추고 흐르지 않는 그리스도 안에서는 영원히 주님 안에 새로운 피조물의 자리가 여자란 이름으로 거기에 박혀있는 겁니다. 이게 바로 아가가 보여주는 그리스도와 관련된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이 세상에 탈출할 해답이 없다고요? 해답이 있어요. 아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남자, 여자는 해체돼야 되고 하나님의 계시, 메시아죠. 왕적 역할하시는 분이 새롭게 누굴 사랑해줘야 돼요. 그래서 여자 하나가 새롭게 만나게 되는 겁니다. 만나면 그 여자 앞에서 그 남자는 남자로서 등장해요. 사람이 아니라 남자로서 오는 거예요.

보통 창세기 2장에서 여자의 역할은 뭐냐? 돕는 자, 돕는 배필이라 하지요. 창세기 2장에는 남자가 먼저 있고 돕는 배필이 순서상 나중에 나타나지만 이미 범죄 한 인간, 한 사람 되지 못하고 두 사람으로 머문 입장에서는 돕는 자가 먼저 등장해요. 그 여자를 통해서 새로운 남자가 나타나는 방식을 취합니다.

그게 예레미야 31장 22절에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 포옹이죠. 그냥 커피숍에서 에스프레소 앞에 두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같이 있는 일체성을 갖고 있어요.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 이 세상의 사람이라고 여긴 모든 인간들은 나타나지 않아요. 오직 여자와 남자만 있을 뿐이에요. 이게 새로운 창조의 시발점이고 개시점입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괴테가 지었던 [파우스트] 마지막 대목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모든 지나간 것은 한낱 비유이니 다가갈 수 없는 것 여기서 실현되었고 형언할 수 없는 것 여기서 이루어졌다.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끌어 올리노라” 이게 파우스트의 마지막 대목이에요. 여자가 아니고 여성성이 천국으로 이끌어 올릴 것이다. 

그리고 세상은 여성성을 만들기 위한 한낱 비유고. 비유는 미래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여기서 이곳에서 실현되었고, 말로 예상하지 못한 것도 언어로 할 수 없는 것도 여기서 이미 이루어졌다. 영원한 여성성이 우리를 천국으로 이끈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이 대목을 여러분들이 생각한다면 아가에 대한 전체 내용이 굉장히 쉽게 될 겁니다. 

아가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저한테 물으면, 바로 왕이란 입장에서 사랑을 시작했기 때문에 그 왕의 궁전에 들어온 사람들은 그때부터 기존에 있던 지상생활의 모든 환경을 여지없이 박탈당하고 강탈당하고 그게 없어져도 괜찮아요. 사랑하는 사람을 영접하기 위해서 마련된 왕을 위한 왕에 맞추어서 만들어진 새로운 환경에 여자가 같이 가담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왕의 궁전은 여자가 없을 때는 그냥 왕궁이었지만 여자가 들어오고 난 뒤에는 식물원 된다 했지요. 하나님께서 인간과 벌어진 갭을 메우기 위해서 사랑을 투입합니다. 사랑은 반드시 하나님의 자기희생으로 이어지거든요. 희생으로 이어지면 갭을 묘사하기 위해서 대자연이 여기 동원돼요. 

그럼 공식은 뭐냐? 대자연+왕의 문화가 바로 아가 되는 겁니다. 대자연에 문화를 준다는 말은 의미를 주는 거예요. 의미란 것은 왕의 의미입니다. 왕이 왕답다는 것, 사랑함으로 왕의 면면을 보여줄 때 비로소 확정된 의미가 영원히 이 세계에서 왕의 나라에서 아들의 나라에서 천국에서 고정되는 겁니다. 오직 주님만 영원히 찬양받아야 될 합당한 분입니다, 라고 신부들이 그분 앞에 엎드리지요. 당신 덕분에 우리가 잃어버린 천국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라는 고백을 요한계시록에서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늘에서 이러한 최종 결론은 지상에 증상과 무늬와 그림자를 남기겠지요. 이것이 실체라면 지상에선 뭐가 되겠어요? 그림자가 되겠지요. 온전하고 완벽한 나라의 그림자는 지상에서는 혼란입니다. 혼란 그 자체고 전쟁입니다. 하나님의 의해서 생산된 사랑하는 여인이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세상은 대혼란에 빠지게 돼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sun)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해는 대자연에 속하지요. 대자연에 속했는데 그 여인은 메시아에 의해서 새로운 의미를 장착하고 있습니다. 그 발아래는 달이 있지요. 여자가 해를 짊어지고 발아래 달이 있는 것은 여자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여자를 여자로 만들어주는 환경 자체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거주하는 환경이기 때문에 거기에 걸맞도록 그렇게 된 겁니다.

아가에서는 간단하게 돼있지만 요한계시록에는 구체적으로 돼있지요. 그런데 그 여자에 대해서 아주 요란을 떨고 있어요, 세상이. 그 여자 때문에 전쟁이 벌어집니다.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 역시 대자연이죠. 그 여자가 아기를 배어 해산을 한 거예요. 그래서 아가에서 주님의 여자가 된 증거가 뭐냐 하면, 바로 젖가슴을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참 어렵습니다. 

아가 8장 1절을 제가 읽겠습니다. “네가 내 어미의 젖을 먹은 오라비 같았었다면 내가 밖에서 너를 만날 때에 입을 맞ㅌ추어도 나를 업신여길 자가 없었을 것이라 내가 너를 이끌어 내 어미 집에 들이고 네게서 교훈을 받았으리라” 이렇게 새로운 환경에 이미 돌입했다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젖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그 다음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8장 8절, “우리에게 있는 작은 누이는 아직도 유방이 없구나 그가 청혼함을 받는 날에는 우리가 그를 위하여 무엇을 할꼬”라는 대목이 나오지요. 기존의 공동체에 적용되는 어떤 자연스러운 현상을 말합니다. 기존의 공동체에서 여자의 역할은 어떤 남자가 채가서 그 남자의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을 위해서 젖을 먹일만한 풍부한 젖가슴이 있을 때 비로소 너는 이 공동체에서 그 정도면 여자답다고 규정하던 그 시절이에요.

그런데 그쪽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아직도 유방이 작으니까 누가 너를 미성숙함으로 봐서 너를 청혼할 남자가 없으면 너는 어디 가서 여자구실을 하겠느냐고 걱정하는 대목이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여자 주변의 기존 공동체에서 이런 걱정을 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아가 내용에서 솔로몬이 사랑하는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에게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저 젖가슴은 균형 맞게 안정되게 탐스럽게 돼 있느냐. 두 가지 표현해요. 하나는 쌍태한 노루새끼로 보고 또 하나는 풍부한 야자수열매로 묘사하고 있어요. 그리고 내가 잡고 싶다고 했어요.

이건 뭐냐 하면, 철저하게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존중하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원래 남자, 여자 없이 그냥 사람이에요. 남자, 여자는 뒷전이라니까요. 회사 가서 회사 일 안 하고 맨날 연애소설만 보면 회사에서 쫓겨나잖아요. 정치하는 사람이 여자 밝히고 하면 안 되잖아요. 왜냐하면 남녀이야기는 여유 있는 사람이나 할 이야기고 급한 것은 남자, 여자가 아니라 내가 밥 먹고 사는 거예요.

지나가는 좋은 사람, 아까 누구라 했습니까? 악마. 악마가 우리한테 계속 독촉하는 거예요. 돈 벌어야 산다고. 우리는 악마의 밥이에요. 우리는 그 말을 어찌 그리 잘 순종하는지요. 순종 자체가 종속됐다는 뜻이고 예속됐다는 뜻입니다. 당신 없이는 난 죽습니다, 라는 절박함으로 엮여진 관계가 이 세상에 악마와 우리 사이에요.

악마가 싫어하는 것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건 뭐냐 하면, 요한계시록 12장에서 대자연을 누비고 있는 새로운 피조물의 등장. 이건 악마가 용서가 안 돼. 어딜 내 허락도 없이 내 영역을 벗어나느냐. 내 네 과거 알고 네가 어떤 존재인지 뻔히 아는데 그래도 네가 선악체계, 선악과 따먹으라고 악마가 시켰잖아요. 내가 쳐놓은 울타리, 선악체계 아까 이야기한 인과응보 관계, 그러한 윤리적 도덕적 테두리를 네가 감히 겁 없이 벗어나? 이렇게 되는 거예요.

거기에 대한 악마의 처벌은 위협은 두 가지입니다. 네 목숨을 빼앗는다. 다른 말로 네 사유재산을 빼앗는다. 네 건강을 빼앗는다. 이것으로 협박과 공갈을 해대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 있는 성도의 관점에서 보게 되면 우리는 사람이란 나는 진즉에 치워버려야 될 거예요. 그동안 이 구닥다리 못 치워서 평생을 비극적 인생을 살아갑니다. 선악에 눌려서 짜부라졌다 하지요. 선악에 꽉 눌려버린 거예요. 조심해야 돼. 난 지금 시간에 눌려있습니다. 

선악에 눌려서 그것 벗어나면 인간 아닌 것처럼 생각하는데 맞습니다. 그게 정답이에요. 제발 인간 아니어야 되는 겁니다. 인간이 최후의 딜레마고 최후의 경계라면 이제는 그 경계 밖으로 나가는 그 사랑의 손길을 잡아야 돼요.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