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자료

4.안일함 190114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1. 19. 10:49
2019-01-19 08:19:40조회 : 7         
2019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4강-아가 강해:이름 : 오용익 (IP:61.84.208.92)
2019 겨울수련회 제 4강(이 근호목사)

지난 시간에 아가의 전체적인 풍경 그 정경을 이야기하자면, 광야에서 살던, 광야의 거친 들에서 그냥 막 살던 거무튀튀한 여인, 평범한 신분 출신의 여인을 왕실의 침소, 가장 은밀하고 깊숙한 장소까지 이동시키면서 그 말도 안 되는 결속, 사람 대 사람이라면 도저히 결합이 될 수 없는데 거기서 일체감, 일체성을 생산해내는 과정을, 주변의 변화를 통해서 계속 묘사하고 있는 거예요.

그 주변의 변화라는 것은 뭐냐? 환경의 변화인데 그 환경의 변화가 그 여인이 따라오고 왕이 그 여인을 마중 나오면서 대자연도 같이 반응을 나타내는 겁니다. 그 대자연의 특징은 뭐냐 하면, 더 이상 지옥이 아니에요. 슬픔과 울음과 탄식, 이런 것이 아니고 완전히 향기로 가득 찬, 향기로 넘쳐나는, 어디가도 다 향기로운 세상으로, 사랑으로 인하여 재편되는 겁니다.

세상은 참 향기로웠다. 그런 식으로. 그런 식으로 볼 수 있는 관점의 구심점에는 사랑하는 여인이 사람에서 새로운 여인으로 창조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고 여인을 창조했을 때의 그 느낌, 우리는 창세기 3장 이후기 때문에 그 느낌을 도대체 알 수가 없어요. 알 수 없는 것을 왕이 여인을 사랑하는 가운데서 그 잃어버린 기억을 회상시켜 주는 겁니다. 재현시켜 주는 거예요.

이렇게 좋았었었다. 죽음? 그거 뭐지? 사랑은 죽음보다 강한데. 죽음이 있지. 하지만 죽음은 사랑을 위한 하나의 밑천이었고 그것은 필수 요소였다는 겁니다. 죽음의 협박공갈에 끄떡도 안해야 그걸 사랑이라고 할 수 있지 않느냐. 그 정도 사랑을 남자가 여자 쪽에 줘야 내가 당신의 여자라고 할 수 있지 않느냐 하는 겁니다. 그냥 일시적으로 이용하고 차버리는 그런 사랑 말고. 

그 사랑을 통해서 여인은 왕의 사랑을 받았다는 그 증표를 누구에게 남기느냐? 예레미야 31장 22절의 말씀처럼 여자가 남자를 안을 것이요. 여자에게 아들이 생겼다는 겁니다. 사실은 예수님이 먼저고 그 다음에 인간이 있는데 하늘나라 바깥, 시간이 흐르는 이 세상에서 보게 되면 여자가 먼저 있고 여자를 통해서 예수님이 나셨지요.

마리아가 먼저 있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아기예수가 나오는 거지요. 그렇게 하는 이유는 이 세상 자체가 하늘나라와는 완전히 정반대되는 쪽으로 파멸되고 있음을 알려주는 겁니다. 시간을, 시작과 끝을 미리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지라는 거지요. 시간의 흐름에 맡기지 말고 목적지에 미리 도착하라. 그 목적지가 시작점을 닮았다는 겁니다.

따라서 천국에서는 알파와 오메가, 시작이 곧 끝이 되는 반면에 여기서는 그냥 혼돈이고 혼란이지요. 그냥 변화만 계속 들끓는 겁니다. 그 변화중 하나가 아까 이야기한, 천지를 담는 여성이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이미 세상 끝에 등장할 여인을 이 세상에 미리 보여줍니다. 그러면 이 여자는 예수님이 이 땅에 초라하게 온 것처럼……, 이 여자는 교회를 말합니다. 새로운 이스라엘, 성도를 말하지요.

이 성도가 이 땅에서는 화려할까요, 초라할까요? 예수님이 초라한 것처럼 이들도 굉장히 초라하게 보이지요. 하지만 그 본질은 뭐냐 하면, 주님이 만든 대자연을 함께 공유할 자격을 가진 사람이에요. 왕비 같은 엄청난 존재입니다. 왕비 같은 존재지만 이 땅에서는 아주 별 볼일 없이 무시당하는 대상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여기서 본질과 존재를 나눠볼 필요가 있어요. 나는 당신이 존재함을 믿습니다. 그것은 얼마든지 가능하지요. 얼마든지 눈에 보이니까. 그러나 당신의 존재를 믿지만 당신이 이야기하는 것은 동의할 수 없습니다, 할 때는 이미 존재와 본질을 나누는 겁니다. 당신이 거기에 있다는 것은 알지만 당신의 모든 의견에 대해서 나는 수용하지 않겠습니다, 할 때 존재와 본질이 나눠지는 거예요.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 것을 믿습니다. 이것은 믿음 아니지요. 하나님이 어떻게 일을 풀어나가시고 어떻게 일을 진행해나가는지 하나님의 본질을 알아야 되는데 본질은 우리가 받아들이기에 우리가 이상으로 여기고 목표로 여기는 것과는 정반대방향으로 가고 있다. 

우리는 높아지기를 원했지만 주님은 빌립보서 2장에 보면, 오히려 하나님과 동등 됨을 포기하시고, 높아짐의 영광을 스스로 포기하시고 자진해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했다 했잖아요. 그게 우리가 놓치고 있는 본질이에요. 본질 믿을 거예요, 존재 믿을 거예요? 

하나님은 삼위일체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에요. 거기 세분 계시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지금도 커피숍에 세 사람 앉아 있다. 뭐 어쩌라고? 세 사람 있는 것이 그게 뭐라고요. 존재가 아니고, 뭘 하고 있으며, 어떤 일을 꾸려왔으며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그 본질이 이 땅에서 어떤 식이냐? 인간의 눈에 거슬리는 식이지요 뭐. 

왜냐하면 인간이라는 것은 그냥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악마가 이미 본질을 집어넣었어요. 악마의 눈으로 보기에는 예수님은 우리가 관계하거나 가까이 하지 말아야 될, 밀쳐야 될 대상이지요 뭐. 그래서 벌어진 것이 뭐다? 십자가사건이에요. 

사도바울은, 십자가사건은 너무나 어리석기 때문에 믿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 했습니다. 오늘 본문 아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나 하나에 충족되어 있어요. 나 말고 또 내 안에 같이 하나 되자고 끼어드는 것, 우리는 용납 못합니다. 집안에 나 혼자 살아야 편하지 집안에 누가 끼어드는 거요, 그거 못 견딜 지경이에요.

드라마에 가끔 그런 것이 나오잖아요. 시골에서 예고도 없이 며느리가 아들 집에 와서 “얘야! 네 시동생 병원에 입원했다니 내가 돌봐야 되니 한 사흘만 있을게.” 사흘이 3년되어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그것은 <사랑과 전쟁>에 나오는 테마에요. 시어머니가 거짓말을 해서 3년이나 같이 지내게 되었는데 이 일로 이혼할까요, 말까요? 2주의 냉각기간을 거친다.

나 있는 곳에 본질이 있는 것도 귀찮지만 존재가 끼는 것도 귀찮아요. 사람은 결국은 혼자 있는 것이 제일 편해요. 외로운 것은 있지만, 외로움은 가끔 해소하면 되지만 이것은 나와 똑같이 자기가 잘났다는 인간과 같이 집안에 있다는 것은 존재하는 순간 전쟁은 멈추지 않습니다. 

애들 어릴 때 참 예뻐요. 그렇게 예뻐서 내 팔의 인장처럼 안아주지요. 문제는 세월이 용납을 하지 않고 그 애가 큰다는 거예요. 처음에 안을 때는 팔이 안 아프지만 그 다음부터는 머리무게 때문에 팔이 아파요. 그러면 들키지 않는 식으로 슥 밀어내지요. “너는 엄마 방에 가 자거라.” 

눈치 빠른 애는 벌써 엄마에게 고자질 다 했습니다. “할머니가 나 싫대.”라고 과장되게 언어를 표현합니다. 언어는 의미와 절대로 일치되지 않습니다. 자기의 악마성을 포함시켜서 이야기하거든요. 나 잘났고 저쪽은 잘못되었다. 나의 존재를 위협했다는 식으로 모든 언어에 다 담겨있어요. ‘나는 정당하다’가 담겨 있는 것이 언어입니다. 모든 내뱉는 대화 속에서.

하늘에서 비가 오네. 이거 무슨 뜻입니까? 하늘에게 비가 오는 것이 관심 두는 나에게 관심 다오, 라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옆에서 그런 눈치도 모르고 “비 오는데 어쩌라고? 공부나 해라.” 이렇게 되면 이것은 본질이 두 개입니다. 한 집에 살아도 존재도 둘이고 본질도 둘이에요. 하나님은 자기 본질에다가 우리 존재를 집어넣었다는 것이 기적이에요.

이 기적이 일어나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내 본질과 내 존재는 내가 하찮게 여겨야 돼요. I am nothing. 나는 주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객관적으로 증명하느냐 하면, 전에는 나 혼자 있어도 오히려 살 맛 났는데, 이제 내가 그 이가 없으면 죽을 맛이에요. 

아가서에서는 그걸 병이 들었다고 되어 있어요. 5장 8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아” 친구들아, 그 말이지요. 여기 예루살렘 여인들은 왕궁에서 왕 중심으로 왕 맞춤의 여인들로 전환된 친구들로 보이지요. “예루살렘 여자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사랑하므로 뭐가 났다고 했습니까?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 병이 난 거예요.

이거 사랑하는 사이입니다. 이것은 타이밍이에요. 충동입니다. 내가 노리고 들어간 것이 아니에요. 내가 병이 났다 하면 저쪽에서 무슨 조치를 하겠지, 그런 노림수 같은 것이 없어요. 그냥 병이 나 버린 거예요. 나 때문에 생긴 병이 아니고 나보다 더 대단하고, 나보다 더 소중한 분이 내 곁에 없기 때문에 나는 내 존재로서는 못 견디겠다는 거예요. 

내 본질로서 그동안 살아왔는데 그분 만나고 난 뒤에는 내 본질로서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에서 죽음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을 두고 죽음이라 한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처음부터 인간은 혼자가 아니었고 하나님과 함께 있어야 정당하다는 것. 하나님과 함께 있어야 된다는 말은 하나님이 만든 창조의 솜씨가 네 본질로 장착되지 않으면 너를 사람취급하지 않겠다는 뜻이에요.

이것은 뭐냐 하면, 사랑하는 사람이 없으면 너는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마귀의 특징은 “홀로 살아라.” 하고 주님의 특징은 “누구로 인하여 네가 삶을 당하는 수동적인 생애가 성도”라는 겁니다. 네가 아낌없이 종속되는 어떤 분이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분을 하늘에서, 죽어서 찾을 수가 없어요. 이 지상에서 찾아야 돼요. 이 세상에서. 

이 세상에서 찾아야 되는데 그 분을 어떤 식으로 객관화시켜야 되느냐 하면, 내 살과 내 피가 아니면 너희에게 생명이 없느니라, 하는 식으로 이 세상에서 십자가라는 것으로 객관화시켰어요. 누구나 무시할만한 그 십자가가 새롭게 등장한 나의 본질이 되고 나의 존재의 전부가 된다면 우리는 이 인생살이가 주님 그리워서 사는 병든 상사병에 걸린 신부가 되는 겁니다.

그럴 때 신부라고 할만 해요. I missing you! 나는 당신을 그리워합니다. 그리워하는 사람이 없다면 비극적 결말을 맞이할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운 사람이 없다면. 하늘에 있든 땅에 있든 그리운 사람이 있어야 돼요. 그분이 영원하고 그분이 항상 살아서 계신다면 나 같은 것은 없어도 괜찮아요. 죽어도 괜찮아요. 

그런 유사성이 있는 노래들, 그것은 대중가요에 굉장히 많이 나와 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나에게 찾아와서 이제 떠나버린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요?” 병이라 하는 것, 내가 사랑할 때는 사랑을 몰라요.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이 현존하지 않을 때, 뭔가 내 눈에 보이지 않을 때 비로소 사랑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그 때 느끼는 겁니다.

아가 1장을 다시 한 번 봅시다. 아가 1장 3절에 보면, “내 기름은 향기로와” 이것은 후각이지요. 향기롭다 하니까. “네 기름이 향기로와 아름답고” 아름답다. 시각이지요. 부어놓은 향기니까 후각 또는 미각, 그리고 4절에 보면,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진하다. 이것은 미각이지요. 달콤하니까. 

아가서 전체 분위기를 한꺼번에 알려면 대자연에 구성된 이것이 바로 죽음이 없고 아픔이 없는 모든 것이 아름다운 세계, 모든 세계에 향기가 넘치는 세계, 낙원입니다. 어떤 남자가 나를 사랑해서 찾아온다는데 빈손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창조 때 만들었던 그 환경, 잃어버린 낙원도 더불어서 우리에게 주신 분,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내가 믿을 수는 없어요. 내가 생각한 기적은 기적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마귀가 가르쳐준 기적은 기적이 아닙니다. 나 잘되기 위한 기적은 엉터리 기적이에요. 더욱 더 마귀에 종속되는 겁니다. 네가 기도해서 받은 응답이 유지되려면 “계속 기도해야 돼”라고 계속해서 행함을 독촉하는 그런 식의 기적이지요. 그래야 행복이 유지된다는 거예요.

마치 채권자가 와서 돈 안 갚아도 된다고 하면서 사실은 돌려막기 식으로, 이돈 쓰고 이돈 갚아라, 하는 식으로 계속 돌려막기 하는 식으로, 우리로 하여금 행함으로 우리를 얽매이게 만들었어요. 은혜 받으려면 기도해야 되고, 은혜 받으려면 십일조 해야 되고, 복 받으려면 봉사해야 되고, 계속 악마의 돌려막기에 우리는 보이스피싱 사기처럼 당하기만 하는 거예요.

평생을 당하는 거예요. 목사의 입에서 나오는 협박공갈은 그것 밖에 없어요. 그 협박공갈을 막으려면 키스를 해서 입을 틀어막는 방법밖에 없는데 그들이 키스의 대상도 아니고요. 키스를 하든지 안 그러면 죽이든지 둘 중 하나에요. 그들의 객관화는 사랑이 아닙니다. 돈으로 구성된 교회라는 권력체에요. 

이게 그들이 하나님 살아 있음을 증거 하는 객관화입니다. 교단이거든요. 프랜차이즈 같은 것들. 이런 것들이 그들이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는 겁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큰소리칠 필요 없어요. 여러분은 이미 거기서 자유로운 사람들이니까. 제가 오히려 어색하지요. 

요한계시록 12장 봅시다. 아까 하던 이야기 계속하겠습니다. 천국의 대자연을 통해서 확보된 이 세상……,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약간 답답해서 하는 이야기는 뭐냐? 기존교회 버리고 신천지가고, 신천지에서 탈퇴해서 기존교회 가고, 둘 다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모든 단체가, 여호와의 증인이고 뭐고 간에, 군에 가고 안가고간에, 안식교든 뭐든 모든 단체가 그래요.

십자가마을이 그렇게 될 가능성이 많지요. 그래서 주께서 조치해서 또 못나오게 만들었잖아요.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제 다 폐지해버립시다. 수련회도 없애버려요. 편하게. 혼자 집에서 스트리밍 해서 개인방송 할게요. 귀찮게 더운데 땀 흘리면서 하는 것도 그렇고. 꼴 보기 싫은 만남이 부각되고 그런 것도 할 필요가 없어요. 

믿음이 있니 없니 그런 잔소리 들을 필요도 없고. 계시록 12장에 보면, 여자가 아파서 해산합니다. 이 자체가 여러분이 기억하다시피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는 것을 두고 천주교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을 때 예수님이 너무 고상하기 하기에, 죄가 없기 때문에 마리아가 순풍 낳았다는 거예요.

아이고, 참! 마리아가 인공지능입니까? 기계에요? 붕어빵 찍듯이 그냥 찍어낸 겁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마리아에게 임신한 자체가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압박감이 대단했어요. 무슨 순풍 낳아요? 순풍산부인과입니까? 여기 분명히 고통이라고 되어 있어요. 성경 보지도 않는 모양이라. 해산할 때 어떻게 했다? 아팠다고 했어요.

주님이 소풍하듯이 살았던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아팠어요. 배고팠고, 허기졌고, 얼마나 성질이 났으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제 때에 없는 거예요. 무화가 나무 누가 심었습니까? 주님이 심었잖아요. 무화가 나무 카페에 가서 무화과나무주스 한잔 달라고 하는데 주인이 하는 말이 “없습니다.” 하니까 “에라! 이제 폐업해라.” 그래서 망한 것이 무화과나무에요.

그래도 물고기는 말 잘 들었지요. 성전세 내라고 하니까 물고기 한 마리가 올라왔는데 딱 도도 덜도 아닌 성전세 낼 액수만큼 물고 등장했잖아요. 여러분, 그게 신기하다고 생각합니까? 대자연은 메시아의 의미에 맞춰서 변동, 연동하고 있었어요. 움직임을 같이 했습니다. 때가 되매 탈 나귀가 등장했고요, 때가 무화과나무 사건이 있었고, 모든 것이 말씀대로, 성경대로 때가 되매 그 코스대로, 보조적으로 대자연은 움직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질 때에 갑자기 해가 어두워졌고, 무덤은 열렸고, 드라마는 계속되는 거예요. 제자들은 제자들 역할하고, 주님은 주님 역할하고, 악마는 악마역할 하고, 그 역할, 그 네트워크에서 누구도 못 빠져 나옵니다.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이 완료가 되기 때문에. 그 완료된 것을 볼 수 있는 것은 성령이 임해야 볼 수 있는 거예요.

악마를 가지고 고린도후서 4장 4절에서는 ‘이 세상 신’이라고 했거든요. 얼마나 잘 표현했지요. 이 세상 신이 있는데 그것은 뭐다? 악마였다. 신은 최고자리에 있어요. 신의 통제를 못 벗어납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왕은 악마가 되는 겁니다. 세상의 모든 영광과 권력은 악마가 쥐고 있어요. 주님께서 그렇게 허락하신 거예요.

악마가 쥐고 있으면서 펼치는 것은 뭐냐? 필연성입니다. 이 필연성을 뚫고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 이것이 우연성, 두 글자로 해서 ‘사건’이에요. 사람이 성도된 이것은 어디에 속합니까? 내가 의도한 것이 아니고 예상 못한 주님이 우연성이고 사건이었습니다. 사건이 되었으면 사건답게 놀아야 돼요. 사건답게 살아야 된다고요.

원인을 자꾸 자기에 결부시켜서, 이렇게 해서 뭐가 되었다, 소나무뿌리 뽑아서 은혜 받았다는 그런 소리를 하지 마세요. 기도원에 가서 구원받았다 하지 마세요. 난로 옆에서 기도해놓고는 열 받았다고 하지 마세요. 사건은 두 번 다시 되풀이되지 않아요. 그리고 그것을 예측 못합니다. 예상할 수 없어요. 발걸음을 주께서 세시는 거예요.

수련회 참석하고 싶어도 주께서 참석하지 말라면 참석 못하는 것이고 참석 안하고 싶어도 참석 했으면 그것이 하나의 사건입니다. 그 사건을 자꾸 기념하려고 하지 마시고 사건을 그리워하지 마세요. 그리워할 것은 지금도 우리 손에 잡히지 않는, 그러면서도 그 분 손에 우리가 놀아나는 이 관계를 그리워해야 됩니다. “주여, 계속 저를 다루어주옵소서.” 

계시록 12장에 보면 난리가 났어요. 아들을 낳았는데 아들을 공격하기 위해서 악마가 귀신들을 총동원했지요. 거기에 광야가 나오는데요. 아가에 나왔던 그 광야가 또 나오는 겁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마태복음 2장에서 예수님 태어났을 때 유다나라가 발칵 뒤집어졌지요. 헤롯이 무리수를 둡니다. 두 살 밑의 애들을 다 죽이게 되면 그 중 하나는 아기 예수겠지, 그렇게 넉넉하게 잡아서 두 살 밑의 애들이 다 죽었어요.

예수님 때문에 덩달아 죽었던 애들이 베들레헴에 한 둘 아닙니다. 엄청나게 죽었잖아요. 이것이 인간의 이성이고 합리성이에요. 인간의 욕망의 바다에서 나온 거예요. 충동이 아니고 욕망이에요. 그러나 우연적으로 천사가 와서 동방박사 빼돌리고, 그 다음에 누구 빼돌리고? 예수님의 가족을 빼돌렸습니다.

그리고 억울하게 죽은 그 베들레헴의 아이들은 빼돌리지 않았어요. 빼돌리지 않았지만 그들은 주님의 고통에 참여했다는 것으로 그들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붙여줍니다. 우는 아기들의 엄마 이름을 일괄적으로 ‘라헬’이라고 해요.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라헬이라고 하는 겁니다(렘 31:15). 

주일 낮 설교에 이런 이야기를 했지요. 보편성에 뭐가 투입된다고 했습니까? 보편성에 특수성이 투입되지요. 특수성이 투입되면 여기서 뭐가 나온다고 했습니까? 보편성에 특수성이 개입해서 여기서 뭐가 나오지요? 또 보편성이 나오지요. 

이 보편성은 뭐냐 하면, 앞에 있는 보편성은 아담의 몸에 속한 보편성이라면 여기 이 보편성은 특수성에서 확장된 보편성이기 때문에 특수성 안의 보편성이에요. 여기 있는 사람은 직업이나 성별, 나이, 신분, 개성, 일체 인정하지 않고 주님의 본질에 의해서 그 사람의 지난 행함 그리고 미래에 뭘 어떻게 하는 것을 보지 않고 오직 주님의 행하심을 여기에 덮쳐서 그들로 하여금 일괄적으로 성도되게 하십니다. 보편성이에요.

모두 다 공통적인 것을 자랑합니다. 오직 십자가외에는 자랑하지 않아요. 모두 다 그리스도만 자랑하는 사람의 보편성. 이것이 바로 교회라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교회를 규정할 때 이렇게 규정해요. 

보편성 + 특수성, 해놓고 그 특수성이 보편성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고 사라지죠. 그 사라졌다고 여겼던, 잃어버렸다고 여겼던 거기서 새로운, 인간이 예측 못하고, 마귀가 쫓아오지 못하고, 하나님의 진노와 율법이 더 이상 가담하지 못하는, 율법에서 벗어나고, 진노에서 벗어나고, 지옥에서 벗어나고, 죄에서 벗어난 새로운 보편성이 예수님의 본질로부터 확장되어서 등장한다. 이게 교회다, 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니 교회는 법이 있으면 안 되지요. 율법을 말하되 율법으로 정죄하면 안 되지요.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는 정죄함이 없기 때문에. 제가 두 번째 시간에 그런 이야기했어요. 인간은 자기양심껏 산다고요. 성령을 받은 사도바울은 자기양심을 분석해 보니까 내가 착하게 살고 싶어도 악이 앞질러가요. 추월해가는 거예요. 악이 아마도 음주운전하는 것 같아요.

항상 내가 착하다고 여기는 거기서 더 앞서 있다고요. 고아원방문해서 어려운 사람 돌봤다 싶으면 악은 이미 그 앞에 와 있어요. “그렇게 해서 너 잘난 체 하잖아.” 이미 그 앞에 와 있다고요. 자기 부인이 안돼요. 자기부정이 안 된다는 말이지요. 우리교회는 꽃꽂이 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편하게 말하는데, 꽃꽂이를 했는데 꽃꽂이를 한 그 순간부터 복음에는 관심이 없고 내 꽃꽂이에 어떤 애들이 손대고 장난치지 않는지 그것만 신경 쓰고 있어요.

평소에 헌금 안하다가 갑자기 목돈 생겨서, 또는 ‘정말 귀한 다이아몬드를 받았으니 목돈헌금 해야겠다.’ 하고 목돈헌금을 해놓으면 그 다음부터 신경 쓰이는 것이, ‘내 목돈이 들어간 돈이 어떻게 쓰이는지’ 회계에 갑자기 관심이 가 있어요. 돈을 냈으니까 관심이 있는 거예요. 돈을 안냈으면 관심도 없을 것인데. 우리 교인들 관심 하나도 없어요. 돈이 어디에 쓰이든지. 아~, 비비꼬는 것도 아니고 참. 

사람은 자기 자신과 관련성 있게 살거든요. 왕이 있을 때 모든 것은 왕에 맞췄다 하잖아요. 인간은 어떻게 사는가? 모든 세상 돌아가는 것을 내게 맞춰서 가요. 부동산 값이 지금 강남에서 얼마나 떨어졌는가, 주식이 어떻게 되고, 삼성반도체가 어떻고, 중국과 미국의 무역 전쟁이 나에게 미치는 여파, 이런 것은 전부 다 내게 맞춰서 살아가는 거예요. 입시제도가 바뀌면 내 아들은 어떻게 되는가? 내게 맞춘 거예요. 그러니 홀로 사는 겁니다. 혼자 사는 것. 이게 습관화 되어서 그래요.

그런데 여기에 혼자 살지 않고 주님에 의해서 달라진 여자가 등장하니까 온 악마가 총동원해서 전쟁을 벌이는 겁니다. 그 전쟁이 12장에 나옵니다. 12장 3절에 보면,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어 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는지라.” 남자, 아들은 놓쳤어요. 아들은 놓치고 남아 있는 여자를 핍박하는 거예요.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여자가 아기를 낳았지만 아들이 먼저 천국에 갔다는 사실, 이것은 무엇을 시사하느냐 하면, 주님이 먼저 시범적으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했다는 그 코스를 먼저 제시했고, 그 다음에 따라오는 여자의 운명은 아들의 운명에 맞춰서 그대로 가게 되어있기 때문에 “여자여, 너희들은 세상에서 악마한테 많이 시달려라. 그것이 너의 인생의 수순이다.”라고 이야기해 주는 겁니다.

“그 악마가 어디 있습니까?” 착한 사람. 착한 사람이에요. 이 땅에 더 묵혀 살도록 격려해주는 사람, 일곱 번 넘어져도 용기를 내고 희망을 가지고 여덟 번째 일어나라고 독려해주고, 꿈과 희망을 제공해주는 사람, 악마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내편이라고 여겼지요. 어떤 인간도 내편은 나밖에 없지 누구도 내편이 아닙니다.

그러면 부부가 갈라설까요, 어떻게 할까요? 제 3의 매개체를 주는 거예요. 성경에서 부부라 하는 것은 그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를 집어넣어버리면 이 가정은 부부의 가정이 아니고 주님의 하나가 된 가정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성도가 이야기할 것은 항상 복음을 매개로 해서 이야기해야 되고, 주님과 연결을 해줘야 되지요.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사람이 사는 것이 대화가 되는 사람과 밥을 먹어야 밥이 맛있어요. 밥이 맛있는 것이 아니고 사실은 밥이 맛있어요. 그런데 혼자 먹는 밥맛은 너무 맛이 없지만 그것보다 더 맛이 없는 것은 사돈끼리 먹는 밥, 정말……, 비싼 것은 시켜놓았는데 맛은 왜 그리 없는지. 체면 차리는데 정신이 다 팔려서 잡채가 어디 있는지, 회가 어디 있는지 분간도 못해요.

마음 편이 먹을 수가 없게 되었어요. 사돈이라는 것이. 둘 다 양반이거든요. 둘 다 양반자랑하기 바빠서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 교회에서는 장로와 집사가 먹는 밥, 정말 이것도 그렇게 특히 그것보다 심한 것은 목사하고 먹는 밥이죠. 목사가 밥 먹으면서도 잔소리를 한다니까요. 

“요새 왜 안 나오십니까? 애는 공부 잘 합니까?” 공부 못한다고 하면, 기도가 부족하다느니, 내가 보니 봉사를 안 할 때 알아봤다느니, 자꾸 인과응보적으로 잔소리를 해대니까 목사는 저쪽으로 보내고 자기들끼리 “서울의대 보내려면 뭘 해야 될까요? 코디를 어떻게 해야 될까요?” 그런 이야기만 하고 있는 거예요.

이렇게 보면 우리의 가장 큰 적은 악마가 아니고, 남이 적이 아니고 나의 안일함, 여유만만함, 무탈, 이것이 가장 원수가 되는 겁니다. 전쟁은 영적전쟁을 벌이라 했는데 너무 우리가 수월하게 살고 있어요. 너무 순탄해요. 북한이 아니고 남한이거든요. 긴박감, 긴장감을 다 빼고 살아도 살만하다고 느껴지는 세상이 됩니다. 

온 정력과 힘을 돈 버는데 매진해도 그다지 잘못 살았다는 평을 안 받을 정도로 너도 나도 전부다 말씀 앞에서는 얼굴을 돌리고 등을 돌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되면 남는 것이 뭐냐? 내 힘으로 스스로 천국을 끌어내겠다는 악바리, 오기성, 그것만 남아 있어요. 그러나 내가 천국가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어디에 점점 더 집착하느냐 하면, 나 자신의 성과를 계속 분석하게 되어 있고, 파악하게 되어 있고, 세상 돌아가는 것은 내 맞춤의미로 억지를 부리면서 계속 주게 되는 겁니다.

나 기도응답 받았다. 세상에 성도의 기도응답은 없습니다. 성도가 받을 응답은 주께서 응답 내린 것을 할당받을 뿐이지 내 기도의 응답은 없어요. ‘아, 내가 미쳤구나. 이걸 몰랐다니.’ 그게 응답이에요. ‘내가 주신 은혜도 모르고 감사하지 못하고 더 달라고 했구나. 더 달라고 하는 이 주변머리가 너무 교만하다.’ 이게 응답이에요.

주신 것도 고마운 줄 알아야 돼요. “우리 같은 주제에 살게 한 것도 얼마나 큰 기적입니까?” 그게 은혜지 뭘 이방인처럼 다고, 다고, 합니까? 가장 적절한 환경을 주신 거예요. 지금 내게 일어난 모든 상황은 아주 적절한 거예요.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거예요. 더 이상 좋을 것이 없다. 지난 시간에 했잖아요. 모든 것이 ‘예스’가 된다고요.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이 ‘아니오’가 안 되고 ‘예스’가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우리가 사랑 안에 살고 있는 모습입니다. 아가서 계속 봅시다. 3장 넘어가기 전에 다시 한 번 정리합시다. 세상은 모든 것이 아름답고, 그 다음에 모든 것이 향기롭다. 사랑하게 되면 사랑하는 사람 몸에서 향기가 난다는 거예요. 모든 것이 아름다워요. 방귀뀌어도 향기롭다는 말입니다.

‘이 정도로 남자다움이?’ 하잖아요. 여자가 방귀를 뀌면 ‘이런 색다름이?’ 새로운 매력으로 다가옵니다. “당신이 이렇게 방귀를 뀌는 정도로 자유로운 여자인지 나는 새삼 알았다. 난 또 감동했어.” 남들 보기에는 객관화가 전혀 상실된, 너무나 주관적인, 그래서 일방적주관만 자꾸 주는데 그것은 타이밍이 그런 거예요. 그것도 한 때 신혼 초나 그렇지 그런 것도 애 낳고 나면 없습니다. 

3장을 보기 전에 2장 15절에 보면 여우가 나와요.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포도원은 사랑을 나눴던 장소에요. 그러니까 여우라 하는 것, 하나님의 적은 하나님이 제시한 사랑에 대해서 방해하는 것이 사랑할 경우에만 비로소 그 적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마귀는 언제 등장하는가? 우리가 복음으로 생각할 때만 마귀가 정체를 드러내지 복음으로 살아가지 아니하면 우리는 전부 다 친한 친구가 돼요. 

지옥 가는 사람도 친구가 되고, 오히려 천국 가는 사람은 더 귀찮은 존재가 되고 그래요. 사람들은 본성상, 관성상 편한 대로 살게 되어 있거든요. 그걸 뉴턴이 관성의 법칙이라 했는데 관성의 법칙이라 하는 것은 뉴턴의 법칙에서, 멈추지 않으면 가던 대로 그대로 간다는 게 관성의 법칙입니다. 이 관성의 법칙을 그냥 사회학법칙에서 인용했어요.

그래서 사회라는 것은 혁명이 없으면 바뀌지 않는다. 촛불집회를 해야 바뀌는 거예요. 글쎄요. 문재인은 또 무슨 집회를 해야 바뀌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15절에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그러니 이 대자연속에 어떤 요소가 있다? 모든 대자연은 사랑을 엮어주기 위해서 하나님과 연동해서 움직이는데 거기에 반대로 방해 놓는 요소가 여우라고 표시를 한 거예요.

대자연속에 불길한 요소, 위험한 요소가 분명히 있다는 거예요. 그러나 사랑하는 자에 한해서만 그 여우가 여우로 보이는 겁니다. 사랑을 방해하는 여우가 뭐냐 하면, 행함이에요. 사랑은 무엇과 반대된다? 행함과 대척관계에 있습니다. 사랑으로 감사하면 되는데 행함은 감사가 아니고 미움이 돼요. 왜냐하면 행함은 반드시 인간의 충동이 아니고 욕망을 좆아서 행함이 되기에. 갖고 싶어서 하지만 그 결과는 미흡함으로 되돌아가요. 불만족으로 되돌아옵니다.

그런데 시작부터 감사로 이어지면 뭐든지 감사와 고마움으로 이어지는 거예요. 성령의 일이냐, 악마의 일이냐를 분간하는 방법을 여러 번 이야기했는데 다시 한 번 알려드립니다. 성령의 일은 시작도 감사고 끝도 감사고, 시작도 고마움이고 끝도 고마움이에요. 

여러분, 우리나라 충남의 전래동화에 이런 것이 있어요. 늙은 노부부가 살고 있는데 남자가 좀 철딱서니 없어요. 소를 팔러 갔다가 썩은 사과와 소를 바꿨다는 거예요. 다른 사람이 그 소리 듣고 “당신 이제 마누라한테 죽었다.” 하는데 “당신은 내 마누라를 몰라요.” 집에 도착해서 “여보! 내가 소 팔러가서 썩은 사과와 소를 바꿨다.” 했어요.

“썩은 사과는 소 먹일 때 사료로 쓰면 되지요. 잘했군, 잘했어!” 그래서 하 춘화가 그 노래 부른 거예요. “영감~! 왜 불러~.” 아가의 특징은 뭐냐? 둘이 만나서 뭘 하느냐? 둘이 만나서 합궁도 하지만 늘 대화한다는 거예요. 대화한다는 것, 주고받을 레벨이 된다는 겁니다. 왜냐? 본질이 같기에 대화가 성립되지요. 

그런데 부부사이에 이야기가 안 된다는 말은 본질이 다르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나는 여자분들 보게 되면, 여자 분들은 태생적으로 본질이 같은 것 같아요. 전화 걸면 한 시간 반, 카페에 가면 세 시간 그냥 넘어가요. 백화점에 가면 네 시간. 남자는 백화점에 가자마자 의자에 앉아서 ‘휴~’ 하고 휴대폰 들여다보다가 그것도 눈치 보이니까 밖에 나가서 ‘나 밖에 나가 있으니 쇼핑 다 보면 연락주세요.’하고 메시지 남기지요. 

그 넓은 백화점, 백화점이 넓은 이유를 알겠어요. 죽 가면서 모든 스트레스 다 풀고, 나온 계산이 4백 60만원, 다음에 살게요, 하고 똑같은 것 봐놓았다가 홈쇼핑에서 다시 사들이고요. 그러니까 여자들이 사는 것은 뭐냐? 내가 감탄할 정도로 얼마나 알뜰살뜰하게 산다는 자기공로의 보람으로 사는 것 같아요. 자기가 이정도로 착실하다는. 아니라는 눈치인데 아니면 그 이야기는 철수합니다.

내가 얼마나 살림을 알뜰하게 사는 그 정의로운 정당한 사람인가를……, 아니라고요? 그냥 넘어가지요. 남편에게 나는 이정도로 정당한 주부로 살고 있다는 것을 뽐내기 위해서 사전에 노력한다는 그 말입니다. 16절에 보면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는구나” 

보세요, 백합화가 나오고, 식물원 아닙니까. 아름답잖아요. 향기롭잖아요. 자, 아름답다, 향기롭다, 이것은 주관적입니다. 세상은 결코 아름답지 않고 주관적이지 않아요. 그러나 감사로부터 시작해서 감사로 끝나면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이 다 사랑의 하나님, 남편 되시는 주님에 의해서 주어진 사랑이기 때문에 고맙지 않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골라잡아 감사하라, 가 아니고 범사에 감사하라. 모든 일에 감사하라. 그렇다고 또 억지를 부려서 애가 아픈데도 감사한다고 감사헌금 내는 그런 것은 너무 눈에 띄는, 뻔한 그 감사의 연출은 하지 마세요. 

3장을 봅시다. 1, 2절을 보면,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찾았구나 찾아도 발견치 못하였구나이에 내가 일어나서 성중으로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거리에서나 큰 길에서나 찾으리라 하고 찾으나 만나지 못하였구나.” 이 여자가 혼자 헤매는 거예요. 여기는 농촌이 아니고 도시입니다. 

즉 도시에서, “성중의 행순하는 자들을 만나서 묻기를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너희가 보았느냐 하고 그들을 떠나자마자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나서 그를 붙잡고 내 어미 집으로, 나를 잉태한 자의 방으로 가기까지 놓지 아니하였노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모든 것이 주관적이지만, 일방적이지만 이미 파라다이스가 된 입장에서 밤의 역할은 뭐냐 하는 거예요. 밤의 역할은 부정적 역할을 하고 있어요. 밤은 함께 있는 기회가 아니라 헤어지는 기회에요. 5장 2절을 봅시다. “내가 잘찌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 다고” 

밤이니까 분리되어 있지요. 사랑이라는 것은 뭐냐? 함께 있고 싶습니다, 하는 것이 사랑이잖아요. 그것도 영원히 함께 있습니다. 그런데 남자와 여자가 사랑하는 그 절차, 과정에서 이 세상에서 사랑했을 때 그들이 관심 두고 가슴앓이하고 괴로워하는 것은, 돈이나 권력이나 힘, 나름대로의 평가와 시선, 그런 것이 아니고 오직 ‘그이와 내가 함께 있느냐, 헤어졌느냐.’로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와서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 다고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남자 쪽에서 여자를 찾아오기 위해서 우산도 안 쓰고 밤이슬 맞아가면서 여기까지 왔다는 거예요. 그런데 3절에 보면 뭐라고 하느냐? 여기에 후회하는 장면이 나와요.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 나의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매 내 마음이 동하여서 일어나서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 때 몰약이 내 손에서” 여기에 몰약이 등장합니다. 갑자기 액체가 등장해요. 액체는 유동성을 갖고 있습니다. 액체는 고체가 떨어졌을 때 연결시키는 용도가 액체라는 거예요.

이것은 뭐냐 하면, 액체든 고체든, 내가 고체가 안 되면 액체로까지라도 들이붓는 거예요. 이 말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집념은 어떤 장애, 어떤 방해도 하나님께서는 다 극복해내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찾아오시는 그분은. 내 쪽에서 염려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그 어떤 장애도.

밤은 부정적 요소거든요. 밤은 사랑을 성사시키지 못하고 다시 옛날처럼 독자적으로 혼자서 있어야 될 그 시간, 그 밤을 보내게 됩니다. 이별하고 사랑이 깨지는 순간이지요. 하지만 그 밤마저 주님과 우리의 사랑을 갈라놓지 못한다는 겁니다. 아가를 보면서 그 집념, 사랑하는 그 집념은 밤을 능가하고 나중에는 죽음까지 능가하지요.

밤을 뛰어넘고 죽음까지 능가해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거예요. 그렇게 되려면 왕의 요소에 어떤 것이 있어야 됩니까? 밤을 이기고 죽음을 이긴 그런 영역이 우리를 찾아오시는 그 분에게 이미 장착되어 있고 들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했을 때 성사되는 거거든요. 아까 본 요한계시록 12장처럼 성도의 모습은 정말 위태위태한 지경에 있습니다. 성도의 삶이라는 것은.

초라하기 짝이 없고, 관심사도 세상이 아니고, 살아가는 것도 생존을 위해서 살지 않고 놀듯이 살거든요. 감사하면서. 그러니까 악마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네가 노력하지 않으면 너는 살 수 없다.”는 그 원칙과는 너무나 대조가 되니까 가만두지 않지요. 

괴롭히면서 “내가 다시 옛날처럼 내 사람으로 전환해라. 네가 미쳤구나. 예수가 뭐라고 거기에 빠져 있느냐? 돌아서라. 복음 그건 다 헛된 것이다. 신학적으로, 과학적으로, 철학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인간의 하나의 의견에 불과한데 너는 네 인생 살아야지 저쪽 인생 따라간다면 네가 바보냐?” 이런 식으로.

세상이 그렇게 가르쳤고 내 양심이 나를 그렇게 매일같이 설득해요. 우리가 말씀을 안 듣게 되면 우리는 매일같이 나 자신에게 설득 당한다니까요. 제가 서울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가요. 본인이 스스로 생각해 보세요. 나는 과도한 신념가가 아닌가? 현재 내가 믿는다는 것은 내가 나에게 억지를 부리고 현실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마치 실제로 그런 양 스스로 나를 최면 걸고 위장하고 있지 않은가, 그게 신앙이고 신념이거든요.

이것은 내가 조작하고 연출하고 만들어낸 신념에 불과하지 않은가, 날마다 자기 자신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어요. 그야말로 전혀 객관화가 없고 일방적인 내 주장을 품고, 그거라도 있어야 내가 이 숨 막히는 세상에서,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숨이 트이겠다 싶어서 내가 스스로 나에게 조작해서 만들어낸 하나의 결과물로 내가 쥐고 있지 않은가를 한 번 돌아보라 이 말입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내가 쌍시옷 해봐야 그것은 신념이거든요. 차라리 내가 내 스스로 이 신앙이라는 것, 예수라는 족쇄를 풀어버리고 지금도 기다리고 있는 안 믿는 친구들 “야, 술 한잔 하자.” 그 친구들 틈으로 달려 돌아가서 옛날의 즐거웠던 고교시절, 밴드 하던 그 시절로 돌아가서 같이 밴드하면서 <차달래부인>처럼 노는 그 시절이 가장 나에게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해보라는 말이지요.

남편 따라, 아내 따라 억지로 교회 갔지만 이것은 내 몸에 안 맞는 것 같고 내 옷이 아닌 것 같아요. 옛날의 그 내 옷이 자연스럽지 않은가, 한번 스스로 시도해 보세요. 뭐가 무섭습니까? 시도해서 그쪽으로 자연스럽게 가게 되면 처음부터 가짜였고. 어차피 ‘도’ 아니면 ‘개’인데요. 윷놀이를 해봐야 될 것이 아닙니까? 윷을 던져봐야지요. 매일같이 던지세요. 착각이 아닌가. 이것은 일방적인 내 착각이다.

외로워서, 너무 심심해서, 하나님이 없는데 그런 존재가 있다고 치고 믿는 것이 아닌가? 내가 스스로 속이는 모습이 아닌가? 악마가 어디 있어? 귀신이 어디 있어? 이 세상은 과학뿐이고 우주는 백뱅에서 만들어졌는데. 과학적으로 이성적으로 그 점을 생각해보세요. 

다른 것은 다 속아 넘어가도 여러분의 충동은 속아 넘길 수가 없습니다. 욕망은 낮추면 되지만 충동은 관리가 안돼요. 원초적이에요. 나 있기 전부터 있던 주님의 충동은 내가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한 번 돌아온 탕자가 되지요. 그 때 바로 불렀던 찬송가를 보세요. 찬송가는 망하고 돌아온 자들의 노래가 찬송가에요. 어머니기도 못 잊어 이제 돌아옵니다.

울면서 나 같은 죄인 구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찬송가의 모든 내용이 한때 그랬었었었다는 내용들이에요. 아이고, 시간이……, 끝으로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아름답다고 이야기해주는 상대가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나 혼자 사는 것을 벗어날 수가 있어요. 나보고 사랑한다고 이야기하고, 나보고 아름답다고 이야기하고.

아름답지 않아요. 분명히 저도 알아요. 아름답지 않은데 십자가를 통해서 이미 너를 용서했다고 하는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내가 예상 못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겁니다. 

식사하러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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