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강-엡 1장 13-14(구원상태)18123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1장 13-14절입니다. 신약성경 308페이지입니다.
에베소서 1:13-14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사도가 이런 내용을 편지를 오늘날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전달했다 합시다. 전달자 주소도 찍히지 않고 받는 우리와 이런 내용만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사도가 전한 그 내용을 보면서 이게 무슨 뜻인지를 알아야 될 것 같지요. 하나님의 편지니까, 또는 이것이 하나님과 관련된 일이기 때문에 우리가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절박감이 있어서 이 내용을 보고자 할 겁니다.
그런데 한 가지 요소 때문에 우리가 이 말씀을 이해하는데 상당히 곤혹스럽게 되어버려요. 13절에 보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는 내용이 나오거든요. 약속의 성령이라는 것은 다른 내용 같으면 우리가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총동원해서 내가 그것을 인정합니다, 수용합니다, 인정합니다, 내가 그대로인 것을 받아들일게요, 이렇게 항상 하나님이 주신 것을 내가 받고 받아서 내 것으로 만들면 모든 것은 아주 깨끗하게 마무리가 된다, 이렇게 장담을 할 수 있는데 아까 말씀드린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 이 대목에서 깨끗하게 한 그 정리가 뭔가 주님의 일에 터무니없이 말려들었다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계시고 내가 있다면 “하나님계신 것을 네가 수용해라.” “예, 수용합니다.” “믿나?” “예, 믿습니다.” 이러면 아무 하자가 없어서 제대로 정리가 된 것 같은데 약속의 성령이라는 언급이 등장하면서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추궁하고, 우리의 하는 그 본색을 주의 말씀을 받아서 완전히 뒤집어엎는 작업을 하고 계신다는 감을 우리가 느껴야 돼요.
“내가 준 것 잘 받았냐?” “잘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너는 지옥 가야돼.” 그런 작업을 하시는 거예요. “내가 준 것 잘 이해했나?” “잘 이해했습니다.” “그러니 이쯤해서 헤어지자. 가거라 지옥으로” 그렇게 되는 거예요. 에베소서 1장 9절에 보면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라고 되어 있어요.
이 말 자체가 어려워요. 알려줬으면 더 이상 비밀이라는 것을 개봉해야 돼요. 비밀이라는 말을 하지 말아야 되지요. 그런데 비밀이 계속 우리 안에서 비밀로 살게 하겠다는 말은, 비밀이 우리 안에서 계속 비밀로 남게 하겠다는 말은 우리가 얼마나 잘못된 상황인가를 강조하기 위해서 주신 말씀이에요.
우리가 우리 자신도 몰라요. 우리가 어느 정도로 개판인지를 몰라요. 그러면 이 비밀을 우리에게 줬다는 말은 우리 육신에게 준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육신은 생각 안하고 우리 육신이 비밀을 이해해서 그 뜻을 알아서 죽고 난 뒤에 하나님 곧 뵙시다, 하는 식으로 나갈 때에 그것이 주님께서, 네가 얼마나 엉터리라는 것을 노골화시키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하신 거예요.
왜냐하면 주님은 비밀은 뭐냐? ‘그의 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얻게 한다, 거기에 해당되거든요. 그러면 피를 누가 흘렸는가? 우리가 흘리지 않았어요. 피는 주님이 흘렸습니다. 주님이 흘리시고 죄사함을 얻게 했다는 그 내용이 우리 육신 속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 육신은 하나님의 비밀 자체를 보여주는 도구가 되는 겁니다. 하나의 자료가 돼요.
그러면 육신은 죽게 되는데 육신이 죽는 것과 예수님이 일관되게 하시는 일과 관련성이 있고,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부활하셨잖아요. 그러면 우리의 육신은 죽고 우리의 육신을 통해서 뭘 이야기하느냐? 다시 산다는 것, 부활을 언급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 속의 비밀은 뭐냐 하면, 죽어도 괜찮다는 겁니다.
비밀을 운반하는 운반체라면, 네가 십자가 죽으심과 다시 삶을 보여주는 운반체라면 너는 이제 어떤 절차에 들어가느냐 하면, 너는 죽는 절차에 이미 가담되었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것이 비밀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된 것이 비밀이거든요. 그 비밀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 육신에게 찾아왔고 육신은 평생을 살면서 무엇을 만끽해서 발산되느냐 하면,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 하기 위해서 발산된다 이 말이지요.
그러면 우리의 역할은 뭐냐? 이제는 우리가 죽음으로서 부활을 증명해야 될, 부활을 표현해야 될 임무가 우리한테 있습니다. 죽어야 살지요. 죽어야 살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죽는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몰라요. 왜? 죽어야 사니까.
사는 목적이, 2019년도, 2020년도가 어떤 소원이어야 되느냐 하면, ‘주여, 내년에는 저를 죽이시겠지요.’라는 것이 소원이어야 돼요. 올해는 아직 안 죽고 있는데, 아직 이틀 남았는데 내년에는 죽이시겠지요. 왜? 우리가 주님의 일관된 비밀에 참여된 상태거든요. 그 죽은 젊은이, 김용균법입니까, 화력발전소 벨트에 말려죽었잖아요.
우리는 주님의 비밀의 벨트에 지금 말려죽는 거예요. 비밀을 비밀 되게 하기 위해서, 사람은 죽어도 산다는 그 비밀을 설명하기 위해서 주께서 우리 육신을 사용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이 사도바울은 이미 죽었다가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와 동일한 생각을 갖고 있는지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이 편지를 보낸 거예요.
일종의 행운의 편지에요. 관계없으면 답장 안 해도 괜찮아요. 아무도 몰라요. 왜 모르냐? 에베소서 이 편지, 이 복음을 이야기해도 못 알아듣는 이유가 뭐냐 하면, 라고 시작되는 거예요. 아예 기본등식이, “못 알아듣는 이야기야. 너는 백날 공부해도, 박사학위를 따도 못 알아들어.” 신학박사도 못 알아들어요. 특히 신학박사기 때문에 못 알아들어요.
못 알아듣는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어디 있느냐? 너는 알아듣고 살면 안 되기 때문에, 너는 알아듣고 죽어야 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죽는데 그냥 죽지 말고 이유를 알고 죽으라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이 기뻐 좋아서 어쩔 줄 모른다면 이 세상에서 완전히 미친 사람 취급받잖아요.
2019년도에는 미쳐보자는 말이지요. “나 죽는대. 주께서 날 죽인대. 세상에, 이런 소식도 모르고 그동안 인생 헛살았어.” 이런 기쁨에 취해보고 이런 기쁨에 도취되어 보는 그런 여생이어야 되지 않습니까? 한푼 두푼 벌어서 우에 살꼬, 우에 살꼬,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일에, 그 벨트에 말려들어간 것처럼 우리가 주의 일에 말려들어간 거예요.
그렇게 말려들어갈 때 어떤 느낌이냐? 이제는 더 이상 내 인생, 내가 고민할 일은 나에게는 없다는 겁니다. 이 편지를 준 것은 천 독 만 독을 해도 그 내용이 모르는 내용이에요. 모르는 내용인데 인간들은 모르면서도 아는 척을 해야 천국 보낸다고 착각을 해서 안다고 우기게 된 겁니다.
그렇게 되면 뭐만 남느냐 하면, 하나님이라는 너와 나만 달랑 남아요. 성령의 인치심이라 하는 것은 있을 자리가 하나도 없습니다. 성령의 인치심. 이 개념파악해서 받아들이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우리가 이 정도로 잘 알 것 같으면 구태여 성령께서 우리에게 찾아올 이유가 없다, 라고 생각이 들 거예요.
그러면 성령의 인치심이 하는 일은 뭐냐? 소위 이 본문을 해석했다, 안다, 하는 이 모든 것을 삭제하고 지워버리는 일을 해요. 모든 것을 지워버려요. 지우고 지우고 뭘 지우느냐? 나라는 자아도 같이 지워버리는 일을 하십니다. 성령이 그렇게 해요. 내 자아가 지워지면 뭐도 지워지느냐 하면, 내 믿음도 지워져요. 내 소망도. 연말이니 소망이라 하지 말고 소원이라 합시다. 내 소원도 지워져요.
내 사랑도 지워져버립니다. 왜냐하면 내가 벨트 돌아가는데 지장을 주는 녹이기 때문에 그래요. 녹슨 채로 관여되기에 그렇습니다. 기도해놓고, ‘기도 참 잘했지요 주님?’ ‘녹이 또 끼었구먼’ 페이퍼로 그걸 지워버립니다. 없애버려요. 누가 믿음이 좋으냐 나쁘냐는 그 이야기를 하려거든 둘이 지옥 가서 하세요.
네 믿음이 좋으냐, 내 믿음이 좋으냐는 아직도 나가 안 지워졌다는 말이고 안 지워졌다는 말은 자기가 거기서 대장질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누구야? 대장질 하는 게 누구야? 남의 인생에 대장질 하는 것이 누구야? 누가 그렇게 마귀 짓을 했어?” 하고 추궁하듯이 찾아오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의 매사가 곤혹스러워요. 좀 내 인생 그냥 그대로 살게 놔두지, 매사를 뒤엎어버리고 없애버리고 삭제해버리고. 성령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컴퓨터 두 시간이나 세 시간 작업하는 것은 약과에요. 일주일 내내 컴퓨터작업을 해서 마쳤습니다. 그런데 마침 택배 왔다고 해서 스톱을 한다는 것을 자판키를 잘못 눌러서 삭제키를 눌렀어요.
요새는 회복이 되지만 이전 버전컴퓨터는 작업하던 내용이 다 날라 갑니다. 제가 그런 경험을 여러 번 했거든요. 실컷 해놓은 것 다 날려버렸어요. 2018년도 실컷 살아왔는데 다 날라 간 거예요. 잘못 누른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택배 받는 동안에 성령께서 삭제키를 눌러버린 거예요. 그래서 다 지워진 거예요.
과거에 아쉬웠던 것, 과거에 원망스러웠던 것, 올 한해 속상한 것, 기분 좋았던 것, 남에게 피해 입힌 것, 내가 남에게 피해 준 것, delete, 삭제되어서 없어요. 추억, 기억, 그딴 것 왜 갖고 있느냐는 겁니다. 주의 일에 녹인데. 인간은 처음부터 죽으라고 태어난 거예요.
그러나 인간이 기억하고 있는 것은 뭐냐? 내가 죽을 뻔 했다, 만 기억해요. 죽을 뻔 했는데 아직도 살아 있다. 이것만 기억한다고요. 간이 아픈데 수술해서 나았다는 그런 것만 기억하지요. 삭제시켜버려야 되는데. 자꾸 그게 기억에 남아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다고. 그것은 정답이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 이유가 뭐냐? 은혜란 끝까지 우리를 추궁하기 위해서 은혜를 줬습니다. 은혜를 준 것은 줘놓고 따지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네가 이렇게 못된 인간이라는 것을 까발리기 위해서 은혜를 주시는 거예요. 햇빛 주시고, 단비 주시고, 우리의 생명주시고, 힘을 주신 것, 이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도 주께서 주신 힘이거든요.
주의 힘으로 살아가는데 줘놓고는 ‘이것은 내 노력을 산 것이다.’라고 우기게 만들어요. 제가 어제 동산병원에 갔거든요. 키 크고 힘세고, 70평생 건강하게 사신 분이 위함으로 오늘 내일 하면서 누워계셔요. 키가 얼마나 크신지 병원침상이 짧아서 몸을 오므리고 있어요. 그렇게 좋던 힘 지금 맥도 못 추고 있어요. 애처럼 물만 마시는데 그 물병 겨우 쥘 힘만 있어요.
병원에서 물마시지 말라고 하는데 그 가족이 이왕 가는 것 맛있는 것이나 다 먹고 가라는 거예요. 그래서 주스 병 겨우 들고 마실 힘밖에 없어요. 그러면 그동안 살아온 힘은 뭐냐? 주께서 주신 은혜입니다. 왜 은혜를 주셨는가? 네가 이렇게 살 은혜를 줬더라도 너는 그 공로를 누구에게 돌렸는가? 나는 내가 잘나서 살아왔다고 자기에게 돌린 그 면면을 이제는 다 끄집어내서 따지기 위해서 은혜를 주신 거예요.
주님 뒤 끝 있습니다. 줘놓고 추궁하는 거예요. 전에 제가 산 너머 교회에 있었거든요. 그 교인들이 주로 자두농사를 지었어요. 5월이 되면 목사님 자두 대접한다고 자두를 주는데 이 집사님도 자두 이만큼, 앞에 사는 권사님도 자두 이만큼, 집에 밥은 없고 자두만 한 가득 있어요. 나눠져도 또 나눠져도 또 자두가 있어요. 자두만 계속 들어와요. 삼시 세끼 자두만 먹게 되었다는 말이지요.
주께서 주신 은혜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네가 복음에 합당한 사람만 남긴다는 그 요소만 계속 줘요. 우리가 원하는 것은 주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면, 내가 밥 먹고 살기 위해서 주께서 은혜를 주셨다는 거예요. 그게 아닙니다. 그 은혜 뒤에 주님의 희생이 들어 있는 거예요. 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얻는다, 그 피로 말미암아, 그것 증거 하라고 계속 살게 하신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피로 말미암아’가 아니고 자기의 땀으로 말미암아, 노력으로 말미암아, 나의 요령으로 말미암아, 내가 열심히 공부해서 말미암아, 전부 다 내 식대로 살아왔다고 하는 겁니다. 옛날 서양동화에 마이다스의 손이 있잖아요. 만지면 다 황금이 되는 것. 그렇게 황금을 구했던 그 사람들이 이제는 빵을 먹지를 못해요. 빵을 먹고 싶어서 집었는데 빵이 황금이 되어서 먹을 수 없어요.
오늘날 인간들은 뭐든지 만지면 다 돈이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24시간 하는 것이 뭐냐? 돈 되는 거예요. 신년 예배할 때 교회가 좀 솔직했으면 좋겠어요. “주여, 내년에는 돈 벌게 하옵소서.” 그것을 기도를 해야지요. “믿음 주옵소서. 내년에는 온 가족에 교회에 등록하게 하옵소서.” 교회 등록해봐야 그것도 자기 아닙니까? 자기 집이잖아요.
그러니까 인간들은 평소에 살아온 그 버릇이 어떤 버릇이냐 하면, 내 것 될 때만 의미가 있다는 식으로 평생을 살아왔기 때문에 2018년도가 되든, 2019년도가 되든 간에 또 우리 가정, 내 가정 잘되기를 기도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성령 없으니까 에베소서 이 편지를 보내도 무슨 뜻인지를 하나도 모르는 거예요.
본문 13절 보겠습니다. “그 안에서” 그 안에서. 13절 초반에 나오는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다음에 “그 안에서”가 또 나오지요.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그 안에서’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주님의 사랑을 네가 성령을 통해서 받은 적이 있느냐고 묻는 거예요. ‘그 안에서’
이거 ‘그 안에서’ 이거 설명하려면 여러분이 참고로 금요일에 했던 광주강의를 들으시면 돼요. 거기서 두 가지 종류의 공간을 이야기했습니다. 양적으로 측정이 되는 공간과 양적으로 측정이 안 되는 공간, 중첩된 공간으로 표현을 했는데 상당히 난해해요. 쉽게 말씀드리면, ‘안’이라는 것은 특수한 공간을 이야기하는데 그 안은 사랑의 공간이거든요.
사랑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서로 떨어져 있기 싫다는 것이 사랑이에요. 그러면 사랑이 되려면 1이 되면 안돼요. 나 혼자 살면 안돼요. 반드시 2가 되어야 돼요. 2가 되면 1이 되는 나는 그 2로부터 내가 날마다 삭제당해야 돼요. 내가 나를 생각하게 되면 사랑이 성립이 안 됩니다. 요새 혼밥이나 혼술이니 해서 혼자 사는 것을 말하잖아요.
어제도 누가 결혼식에 다녀왔다는데 주례 없는 결혼식이 그렇게 재미있었다는 거예요. 평생에 본 결혼식 중에서 제일 재미있었다는 겁니다. 주례 없는 결혼식, 저희끼리 하는 결혼식인데. 주례가 없다는 말은 뭐냐? 어떤 사람이 이야기했어요. 이 시대가 어떤 시대냐? 꼰대 없는 시대다.
주례가 없다는 말은 꼰대를 없애버리는 거예요. 내가 유-튜브 보면서 모든 일을 내가 알아서 하는데 나에게 잔소리질 하는 꼰대는 필요 없다는 젊은 기류, 분위기가 그대로 결혼식까지 반영되고 있는 거예요. 내 앞에서 건방떨면서 주례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나도 결혼에 대해서 얼추 안다는 겁니다. 나에게 잔소리나 훈계할 생각하지 말고, 꼰대질 하지 말고, 내 인생 앞으로 내가 살 것이라고 선언식을 하는 거예요.
이제는 시아버지고, 시어머니고 이제 내 인생은 내가 산다. 그저 어려울 때나 좀 도와주고. 이게 결혼식에 반영된 겁니다. 2가 없어요. 1밖에 없어요. 자기 자신밖에 없어요. 교회도 분위기가 그렇게 넘어갑니다. “여러분은 훌륭합니다. 여러분은 대단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은혜 주셔서 여러분이 큰일을 할 겁니다.”
뭐가 빠진 거예요? 혼자 영웅 되잖아요. 혼자 잘났다는 것 아닙니까? 뭐가 빠진 거예요? 그대 있으면 나 죽어도 좋아, 하는 그 상대가 없는 거예요. 이 시대가. 다시 말해서 ‘안’이 없어요. 좀 어렵게 해 볼까요? 내가 나를 볼 때는 악마에게 물려받은 성품으로 봅니다. 그 자기 자신을 보는 것이 뭐냐? 선과 악, 선악의 의식을 가지고 인간은 자기를 보게 되어 있어요.
이걸 자기의라고 합니다. ‘나는 오늘 잘했을까, 못했을까? 올해는 잘했을까, 못했을까? 내년에는 잘할까, 못할까?’ ‘잘할까, 못할까’라는 의식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봐요. 그게 1번입니다. 첫 번째고 두 번째는, 내가 나를 보는 것처럼 상대를 볼 때도 내가 나를 보는 관점을 가지고 상대에게 덮어버려요. 나는 이것은 잘하는 짓이고 이것은 못하는 짓이라고 보는데 내 관점에서 볼 때 당신도 잘했다느니 못했다느니 그렇게 보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인간은 상대를 볼 때 순수하게 상대입장에서 볼 수 있는 능력이나 자질이 없어요. 평소에 내가 나를 봤던 그 기준을 가지고 그대로 상대에게 입히는 겁니다. 부부싸움은 왜 하는 겁니까? 평소에 내가 옳다는 기준을 가지고 상대에게 들이대니까 대화가 안 되잖아요. 사랑하는 사이라 하는 것은 복음을 주고받는 사이가 사랑하는 사이입니다.
복음 앞에 나는 쪼다고, 성령이 오지 아니하면 나는 복음 다 알고 지옥가요. 왜냐하면 복음을 다 안다는 것이 내가 알기 때문에. 복음을 믿게 되면 내가 믿기 때문에 그것은 주께서, 천국에서 안받아줘요.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삭제되지 않는 내가 있기에 그것은 안받아줘요.
성경에 있는 천국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소원한다면 그 소망 안고 지옥 갑니다. 그 소망의 주체가 나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이 주신 선물이 아니고 내가 만들어냈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에베소서를 볼 때에, 내가 나를 볼 때 ‘잘했다, 못했다’ 하는 관점을 가지고 에베소서, 사도바울의 편지를 보고 있는 겁니다.
보고 있으니까, ‘나는 비밀도 알아야지. 피로 말미암은 죄사함도 알아야지. 나는 이제 주님의 찬미가 되어야지. 나는 약속의 성령도 받아야지.’ 거기에 전부 나를 다 집어넣어요. 그러니까 실컷 에베소서 이해했다 치고, 바르게 믿는다 치고, 그런 믿음을 가지고 천국 가야지, 하면서 어디로 가고 있느냐? 지금 지옥가고 있는 중입니다.
자기가 운영하는 자기공장이에요. 안이 없어요. 자기뿐이에요. 내가 소속된 어떤 공간이 없어요. 내가 있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겁니다. 인간이 끝까지 포기안하는 것 그것 하나는 있어요. 끝까지 포기 안하는 것이 있어요. 그게 자기사랑입니다. 자기사랑에서 자기소원이 나오고 자기 믿음도 나오고 믿음, 소망, 사랑이 거기서 다 나오거든요. 나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라고 보는 거예요.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제발 너를 좀 잃어 달라. 잊어주고 제발 좀 잃어 달라. 그것이 성령의 삭제기능이에요. “제가 올해 참 죄를 많이 지었습니다.” 악령께서 하는 일은 “그러니까 네가 내년에는 개과천선해서 바른 믿음으로 해야지.” 이게 악마가 하는 이야기에요. 악마가 연말연시에 하는 설교에요. 악마가 꼰대거든요.
성령이 하시는 일은 뭐냐 하면, 벌써 잊었다. 벌써 잊은 거예요. 옛날에 언급했던 노래 생각이 납니다. 우연히 만났는데 벌써 용서 했다고. 비록 대중가요 가사지만 저는 너무 은혜가 되는 데요. 벌써 용서했다고. 무슨 뜻이냐 하면, 죄 짓는 일이 네 일이 아니었고 주님의 일이라는 것을 너는 왜 모르느냐는 말이지요.
내가 살아 있으니까 내가 죄를 지었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나온 거예요. 사람이 열심 낸다고 죄를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뭔가 상황이 되어야 되고 그 상황은 주께서 그렇게 만들어 내는 겁니다.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해 봅시다. 우리의 몸이 주의 비밀과 관련성이 있어요. 그 몸에 뭐가 담기느냐? 하나님의 비밀이 담겨 있고요.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그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면 죽을 때는 죽는 이유가 있어야 되고, 죽는 이유를 죄라고 이야기하고, 죄가 있어줘야 에베소서 1장에 나온 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피로 말미암아 죄사함이라는 주님의 그다음 이야기가 진척이 돼요.
우리로 죄를 짓게 하시는 거예요. 내가 죄 짓게 되면, 우리는 반성을 해서 내가 지은 죄를 회개나 나의 반성으로 내 쪽에서 없애버리게 돼요. 없애버리게 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일과 관계없는 사람이 되기에 천국에 가지를 못합니다. 회개하세요, 반성하세요, 라는 말이 마귀 말이 된다 그 말입니다.
내년에는 잘해봅시다, 가 마귀 말이에요. 인간이 무슨 소원이 있고 소망이 있습니까? 소원, 소망이라 하는 것은 지난 2018년도의 기억이라는 바탕에서 2019년도가 새롭게 이어지거든요. 그런데 2018년도가 지워졌다는 말은 2019년도는 다시 원래부터 새로 시작이거든요. 성령이 하는 일은 하나님과 우리 유사성을 이어주는 것이 성령이 하는 일이 아니고 반대로 차이성을 극대화시키는 것이 성령의 일입니다.
네가 아는 복음과 성령이 아는 복음이 다르다는 것, 그 차이성, 이걸 계속 극대화 하는 거예요. 극대화 시켜서 매일같이 그 차이를 대조시켜 버리면 나는 개뿔도 아니라는 것이 성령에 의해서 날마다 느껴지는 거예요. “2018년도 5월에 죄를 지었습니다.” 주께서 “그거 신경 쓰지 마.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주님께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데 우리는 내가 나 자신을 볼 때에 선악이라는 의식, 선악체계를 가지고 보다 보니 ‘그 때 행동 좀 잘했으면 ……’ 하고 여전히 자기 자신에게 점점 올무가 되는 거예요.
올무가 되어버리면 주님이 거저주시는 은혜를 모독하게 되는 겁니다. ‘안에서’라는 말은 ‘사랑 안에서’라는 뜻이고 사랑이라는 말은 숫자가 1이 아니고 2입니다. 사랑을 해 봐야 알지요. 그 사람 앞에서 내가 의식되지 않을 정도가 되어야 그게 사랑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대 있음에 나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이 없으니까 그대만 있어도 더는 소원이 없다. 이게 사랑입니다.
제발 안 떨어지고 있어만 주면 나는 더 이상 바람이 없다는 이것이 사랑이잖아요. 나로 인해서 살아가는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주례 없애고, 꼰대 없애는 그것이 사랑이 아니에요. 주례 안 세우는 그것도 이해는 돼요. 주례가 주례 같아야 세우든지 하지요. 차라리 우리끼리 노는 것이 즐겁지요. 주례해봐야 상투적인 그것, 클리셰, 상투적이라 하는데 젊은 애들은 그런 것은 듣기 싫은 거예요. 나보다 더 모르는데 뭐.
그래서 제가 하는 말은, 신앙은 있으면 안돼요. 내년에 신앙 없애버립시다. 내년에는 소망이고 신앙이고 사랑이고 다 없애버리세요. 뭐든지 선악을 아는 것, 이 선악부터 출발하잖아요. 내가 있으면 나는 악마한테 물려받은 속성, 성향이 있고 그 성향은 ‘선악’이에요. 나는 잘했을까, 못했을까? 못했을까, 잘했을까?
그것부터 출발하니까 누굴 좋아한다, 누굴 사랑한다고 하면 내가 나한테는 옳다고 봤는데 너도 나처럼 이렇게 옳아야 돼, 를 무언적으로 강요하게 돼요. 부부싸움이라는 것이 그것 때문에 그렇잖아요. 그러면 나와 너의 세계는 선악세계가 되어버려요. 교회도 마찬가지고 세월이 2018년도, 2019년도 마찬가지고, 전부 나 잘났다는 것을 뽐내는 지옥이지요. 지옥이 지옥답지요.
그런 세계가 현재 이 세계입니다. 그러면 이 선악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제 3의 요소가 찾아와야지요. 그게 뭐냐? 성령의 인치심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22절에 보면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조금 전에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광주에서 김집사님과 이야기하는 가운데 김집사님이 불쑥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이목사님이 전에 이런 이야기를 했다는 거예요. 목사는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토하는 자라고 이야기했답니다. 나는 생전 처음 듣는 것 같은 이야기인데 집사님이 그걸 기억하고 있어요.
가르치는 것과 토하는 것의 차이가 뭐냐? 학원 강사하고 집의 부모와의 차이가 뭘 까를 생각해봤어요. 광주강의에서 아들과 아들의 친구가 다르다는 이야기를 했거든요. 아무리 아들의 친구라고 해서 좋아해도, 그래서 집에서 라면을 끓여줘도 아들친구가 먹는 것과 아들이 먹는 것이 부모입장에서는 내 아들이 맛있게 먹는 것만 보이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 ‘네가 있으면 나는 없어져도 괜찮아. 너만 잘되면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 이것이 부모마음이라는 말이지요. 그게 사랑이거든요. 성령이 왔다는 말은, 성령께서 우리를 어디에 소개하느냐 하면, 우리가 사랑해야 될 분을 소개하는 분이 성령입니다. 그러면 어떤 공간이 마련되어야 돼요. 그 공간이 마련되면 내 사랑, 내 소망, 내 희생이 다 날라 가버립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은 다시 나의 구원으로 절대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에베소서 1장에서 하고 있는 거예요. 나의 구원으로 돌아오지 않아요. 예수 믿고 내가 구원받았다는 소리가 나타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성령이 오기 전까지는, 예수 믿고, 피 믿고, 언약 믿고, 좋은 것은 다 동원해서 믿고 내가 구원받아야지, 하는 내가 생생하게 살아있고 ‘역시 내가 하는 일 중에 예수 믿는 것이 제일 잘했어.’ 이런 식으로 나오다가 제 삼의 요소 성령이 오니까 ‘이 동네서는 내 소리 나오면 나는 골로 가는 거야.’라고 완전히 우리를 곤혹스럽게 만들어버려요.
내가 헌금했고, 내가 전도했고, 내가 성경 공부했고, 나 좋으라고 하는 모든 일, 나에게 돌아오는 일을 했는데도 성령께서는 ‘그렇게 되면 그것은 선악체계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거야.’라고 우리에게 꾸중을 하시는 겁니다. 성령은 꼰대에요. 우리에게 꾸중을 해요. 성경공부를 해도 너 좋으라고 하는 것은 네가 선악체계에서, ‘나 잘했어? 나 잘했지?’ 이렇게 모든 일을 잘했어, 못했어, 이런 식으로 몰아가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는 경향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망각이 가장 좋은 복입니다. 그런데 망각을 한다고 할 때 이것이 문제가 돼요. 망각, 잊어버리는 것, 망각을 해버리면 내가 나의 기억을 잊어버리고 삭제하는 것이 되기에 이것은 망각이 아니고 더 골칫거리 되어버립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하느냐? 내가 죽어도 좋을 사랑하는 분이 등장하면 돼요. 사랑을 할 거야, 하잖아요.
사랑을 해버리면 그 앞에서 나는 빛을 잃어버립니다. 사랑을 해버리면. 어떤 사랑을 주시는가? 선악에 대해서 구애받을 필요가 없는 것을 우리에게 새로운 원칙과 원리로 제공하지요. 그게 에베소서 1장에서 복음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에베소서의 주제는 뭐냐? 복음으로 합당한 사람만 남긴다는 것. 누가? 성령이 와서. 어떻게? 삭제함으로서. 없앰으로서.
누가 잘났니, 못났니, 그런 시답지 않은 경쟁에 네가 휘둘리지 말고 말려들지 말라. 너는 뭐냐?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영광의 찬미가 될 신분이기 때문에 너는 거기에 말려들면 안 된다는 거예요. 다시 고린도후서 1장 22절을 봅시다.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이 말씀은 뭐냐? 임플란트가 좋은 예가 돼요. 임플란트 할 때 그냥 이빨을 덮어씌우는 것이 아니에요. 뭔가 나사못을 밑에 심어놓아야 돼요. 제 어금니 두 개를 심었습니다. 박을 때는 안 아픈데 이 뽑을 때 아팠어요. 임플란트 할 때는 밑에 나사못을 심는데 그것은 안보여요. 심어놓고 거기에 금속을 덧붙이면 덧붙인 금속은 보여요. 그런데 그 금속이 고정되는 것은 그 밑의 나사와 단단히 연결되었기 때문에 안 떨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보증으로 우리 안에다 성령을 심어놔요. 성령을 심어 넣고 그 다음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뭘 주느냐 하면, 삼시세끼 자두만 줘요. 계속해서 주시고자 하는 것만 줍니다. 천국에 우리는 안 가봤잖아요. 그러나 천국에 꼭 필요한 것, 천국이 만약 자두나라라면 천국에 필요한 자두만 삼시세끼 계속 주시는 거예요.
우리는 곤혹스러워요. 내가 원하는 소원을 절대 들어주지 않아요. 내가 필요한 것을 안 들어줍니다. 몸이 좀 건강했으면 좋겠고, 수입은 좀 늘어났으면 좋겠고, 애는 좀 안 아프면 좋겠고, 그런 것들이 있는데 그런 것은 안 들어주고 계속해서 주시는 것이 성령만 주십니다. 성령과 주님 사이에 있었던 그 계약된 것만 계속해서 주시는 겁니다.
이미 우리는 내 소원대로 내 인생 꾸려가는 것이 난감해졌지요. 우리능력으로서는 이미 내 인생에 대해서 손을 못 댈 지경입니다. 내가 사는 선악적인 방식을 주님께서는 “신경 쓰지 마. 그 딴 것 신경 쓰지 마.”
<보헤미안 렙소디>라는 영화에 나오잖아요. 번역하면 집시들의 광시곡, 그렇게 되거든요. “엄마, 방금 내가 어떤 남자를 죽였어.” 그런 가사가 나와요. 프레디 머큐리라는 동성애자, 혹은 양성애자 가수가 자기 인생이 저주스러워서 그런 노래를 불렀다는데. “mama just killed a man……”
그런데 성령께서는 어떻게 했습니까? “신경 쓰지 마. 네가 그런 무거운 짐을 평생 박아놓고 살지 마. 선악이라는 것을 다 빼버려라.” 펜치가지고 다 뽑아버려야 돼. 선악, 나는 잘했다느니 못했다느니 그걸 2018년도 이틀 남았는데 성령께서 펜치 준비해서 다 뽑아버립니다. 다 뽑아버리고, 다 쪼개버리고, 다 없애버리고, 너 자체로 ‘잘했다 못했다’ 그 따위 것에 신경 쓰는 자체가 너로 하여금 지옥 삶을 살게 하는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복음을 훼방하는 겁니다. 주님의 사랑을 모독하는 거예요.
주님은 그냥 사랑하는데, 피로서 사랑하는데 그 피가 있는 공간에서 왜 아직도 나를 외치고, 나에 대해 그렇게 신경을 쓰고 고민고민 하는 겁니까?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는 것은 임플란트 한 거예요. 성령을 집어넣고 집어넣은 대로 우리에게 복음만 줘요. 복음은 뭐냐? 선악적으로 네가 신경 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네 몸은 더 이상 너의 것이 아니고 복음에 필요한 하나의 도구가 되고 자료가 되기에 그런 거예요. 복음이 필요해서, 주님의 사랑의 필요에 의해서 그런 겁니다.
끝으로 오늘 교독문에 나오는 요한 1서 4장 이야기를 하고 마치겠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벌써 삭제했지요. 그따위사랑 안 받는다는 겁니다. “내가 언제 너희들보고 나를 사랑하라고 했나? 나는 아예 너희들 사랑 안 받아. 네가 정상이 아니기 때문에.” 환자의 것을 받아서 뭐 하겠어요? 네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그래서 우리도, 여기서 우리라 하는 것은 나가 없어진 상태지요. 그래서 우리지요. 새로운 공간에서는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 사랑만 남기면 돼요. “나 거저 용서받았어. 아무 한 것도 없는데 거저 용서받았어.” 그것만 하면 돼요. 그러면 주변에 지옥 가는 사람들, 특히 교회에서 보면 그런 사람 안 많습니까? 집단으로 지옥 가는 사람들이 왜 그리 괴롭히느냐?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인간 만들기 위해서 주께서 악령 들린 사람, 성령 없는 사람을 계속 만나서 그 사람들 이야기를 듣게 하는 거예요. 우리 자신이 아직도 무엇 때문에 고민하고 무엇 때문에 안절부절 하는지 그 이유를 그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서, 아무것도 아닌데 쓸데없는 것에 신경 쓰고, 자존심 걸고, 싸우고, 다투고, 그걸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뻐개버리도록, “아직도 쓸데없는 것이 남아있구나.” 하고 선과악의 기준을 뽑아내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계속 만나게 하고, 낙심하게 하고 절망하게 하지요.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 쪽에서 하나님께 말씀 가지고 나아가는 것, 좌절되어야 됩니다. 나의 구원으로 시작되면 그것이 나의 구원으로 되돌아오게 되어서 이것은 천국에 못갑니다. 나의 구원자체가 없어야 돼요.
주님의 구원, 우리의 구원, 이스라엘구원, 개개인의 성과를 보고 주는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예수님 한분 때문에 골고루 할당받은 그 피용서, 그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못난 존재인지, 얼마나 어리석게 속아온 것인지를, 올해 다 보내면서 가슴을 치며, 또 노래 생각이 나는데, 가슴을 치며 남자라는 이유로 가슴을 치며 원 없이 실컷 울어보는 것처럼, 나는 이렇게 속았다는 것을 울면서 한 해보내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속고 또 속고, 속는 것 외에는 한 일이 없는 저희들. 세상 탓하고 누구 탓하지만 내가 나 자신을 속여온 것은 왜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지. 그 정도로 어리석었습니다. 이제 성령을 심으셔서 저희들로 하여금 삭제해주시는 용서, 삭제해주시는 그 사랑을 찬미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