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강-엡 1장 19-20(덮쳐진 능력)19011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1장 19-20절입니다. 신약성경 310페이지입니다.
에베소서 1:19-20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지난번에 사도가 기도했지요. 기도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그 기도내용은 뭐냐? 하나님의 강력한 힘으로 일하심을 따라서 베푸신 능력이 얼마나 큰 것을 너희들이 알게 하는 그것이 기도의 내용입니다. 우리보고 네가 알아서 구원하라는 그것이 기도가 아니에요. 이미 구원이 완료되었는데 그 완료된 그것이 얼마나 귀하고 놀랍고, 중하고, 크다는 사실을 깨닫기를 원하는 내용의 기도를 하고 있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너 바보야?” 하는 거예요. “너희들은 이렇게 엄청난 것을 받고도 정신 못 차리고 있지?” 이게 기도의 내용입니다. 현재 우리가 필요한 것을 주는 것이 아니에요. 그런 것은 이방인들의 기도입니다. 지옥 가는 사람들의 기도는 뭐냐 하면,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요구하는 기도에요. 갓바위에 그런 기도가 많잖아요.
애 잘되고, 올 한해 우리 가정 잘되고, 돼지해에 뭐가 잘되었으면 좋겠다는 이런 것은 이방인들이 하는 기도에요. 그 사람의 기도자체가, 나는 어디로 가고 있습니다, 하는 것을 티내고 있다는 뜻이에요. 그러나 천국 가는 기도의 내용은 말씀대로 되어야 되고 그 말씀대로 우리에게 적용될 겁니다.
그 말씀이 오늘 읽었던 본문이에요. 지극히 큰 능력이다. 그 능력이 우리에게 이미 완료되었습니다. 더 이상 보탤 것도 없고 뺄 것도 없고 그냥 가는대로 가면 되는데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알지를 못하게 그것에 눈을 뜨지를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능력에 눈을 뜨게 되면, 성령을 받게 되어야 그 능력에 눈을 뜨는데, 그 능력을 알게 되는데 그 능력을 알게 되면 그 다음에 알게 되는 것이 뭐냐? 도대체 그 능력이 어디서 온 능력이냐를 알아야 되지요. 그 능력에 대해서 오늘 본문 20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이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은 우리가 우리를 구원하도록 허용을 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성령이 오게 되면 두 번 다시 내가 나를 구원하는 일은 없어요. 두 번 다시는! 성령이 오게 되면! 또다시 내가 알아서, 또 다시 내가 나에게 어떤 행함을 가해서, 추가해서, 보태서 내가 천국가려고 노력하는 일은 일체 없습니다.
왜? 자기가 자기를 구원하려고 하는 이것은 성령을 안 받았기 때문에 그래요. 죽어서 좋은 데는 가고 싶고, 주께서 능력을 안줬기 때문에 제자리 뛰기 하는 거예요. 제자리 뛰기 하는 것도 적절한 예입니다만 더 적절한 예가 있어요.
저 어릴 때 집에서 개를 키웠는데 개도 오뉴월에 별 할 일이 없고, 개가 할 일 없이 있는 것을 쳐다보는 나도 할 일이 없고, 둘 다 할 일이 없는데 개가 심심하면 뭘 하느냐? 자기 꼬리를 물려고 계속 뺑뺑이를 돌아요. 오늘날 교인들이 하는 짓이 그 짓이에요. 자기가 자기꼬리를 물고 자기가 알파와 오메가가 되는 거예요.
자기가 알아서 천당 가려고 애쓰는 겁니다. 계속해서 자진해서 사기 당하려고 작심을 하고 있어요. 스스로 그렇고 있어요. 어떻게 하면 천국 갑니까? 교회 왔으니까 천국 가는 것을 보장하라는 거예요. 그러나 복음은 이야기합니다. “너부터 수정하라.” 그러면 말하지요. “뭘 수정하라는 말입니까?” “현재 네가 구원받고자 하는 데서부터 수정해야 된다.”
수정이 되면 구원받는 데서부터 내가 구원받고자 기대하고 애쓰고 노력한다고 나를 받아주지 않는 곳이 천국이라는 것을 아는 쪽으로 수정이 되어야 되겠지요. 이게 미완료와 완료의 싸움입니다. 이게 영적싸움이에요. 영적싸움은 딴 게 아닙니다. 미완료와 완료의 싸움이에요. 내가 어느 정도 착해지고 경건해지면 천국에 턱걸이 하겠습니까, 라고 하는 것은 미완료에요.
그런 짓거리, 바리새인짓거리를 하지 않더라도 너는 합격이야, 라고 하는 것이 완료입니다. 이 두 개가 계속해서 우리 안에서 싸우고 있지요. 이 싸움을 설명하려면 두 개의 자아가 필요해요. 두 개의 자아가 필요하다는 것은 이 세상에 두 개의 현실로 되어 있고, 두 개의 현실로 되어 있다는 것은 요한계시록 20장에 보게 되면 두 개의 죽음과 두 개의 부활이 나와 있어요.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 첫째 사망과 둘 째 사망. 성경에 분명히 그렇게 되어 있어요. 강력한 힘의 능력이 뭐냐? 어떤 힘이냐? 이것은 단절의 힘입니다. 끊어낼 자를 기어이 끊어내는, 안 받아 줄자를 기어이 안 받아주는 능력. 이것은 능력을 받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능력이 아니고 지옥 갈사람, 구원되지 못할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능력이에요.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된 능력입니다. 정말 그 능력을 알게 되면 진짜 신바람 나요. 우째 이런 일이! 입꼬리가 절로 올라가면서, 우째 이런 일이! 너무 좋아요. 로마서 8장 1절에 보면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는 말이 나와요. 그리스도 안에서는 정죄함이 없다는 말은 두 번째 세계의 현실에 속한 사람은 첫 번째 현실 속에서 지었던 모든 죄에 대해서 묻지 않겠다는 뜻이거든요.
첫 번째 현실, 첫째 자아가 있는 첫 번째 현실에서 우리가 죄짓는 이유는 밥 먹고 살려고 하다가 죄 짓거든요. 그래서 로마서 8장에 그리스도 안에서는 정죄함이 없다는 말은, 이제는 그만 살아도 괜찮다는 뜻이에요. 구태여 살 이유는 없다.
왜냐? 살고자 하는 것은 첫째 자아를 놓쳐버리면 대책이 없다고 여기기에 어쨌든 간에 태어났을 때의 그 몸을 계속 붙들려고 하는 거예요. 육을 붙들려고 하는 거예요. 제발 그만 좀 놔주라는 말입니다. 관절염이 있어도 그만 좀 놔주고. 이제는 나 자신을 그만 괴롭히라는 겁니다. 너무 우리 자신에게 독촉을 많이 해요. 세무서에서 나온 것 같아요.
우리 자신을 왜 그리 채찍질 하는지 모르겠어요. 바르게 살아야 된다, 착하게 살아야 된다, 네가 돈이라도 있어야 인간대우 받는다, 그렇게 하는데 언제까지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괴롭힐 거예요, 정말! 그리고 여러분 자신은 여러분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주님 드러내 기 위해서 활용하기 위한 주님의 도구인데 자아가 있다 보니 내가 내 자아를 뽐내기 위한 자아라고 손을 놓지를 않아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놓을 줄을 몰라요.
그래서 교회 와서 맨 날 이 자아를 살려달라고, 이거 살려달라고 “주여, 능력이 임해야 삽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주님의 능력은 나 살리기 위해서 주신 능력이 아니에요. 네가 살겠다는 여망과 기대, 네가 살겠다는 구원에 대한 욕구, 거기에 부응하라고 주신 능력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모든 것을 통일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리스도가 너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신 능력이에요.
그 능력은 예수님이 가는 절차를 통해서 뿜어져 나오는 겁니다. 그 능력이 어디서 나오는가? 예수님이 하는 일을 다 이루심의 자국을 통해서 나오는 거예요. 그 자국의 절정이 바로 십자가의 다 이루심이고 그리고 빈 무덤이에요. 빈 무덤에 베드로가 찾아갔을 때 발견한 것은 예수님이 입었던 수의였습니다. 수의가 개켜져 있다고 했어요. 예수님의 수의가 놓여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에게 준 능력이 뭐냐? 너의 옷을 벗어서 그걸 수의라고 글로 쓰라는 말이거든요. 네가 이 세상에서 뭔가 달성하려고, 이만큼 얻으려고 한 그것은 결국은 벗어 놓고 가야 될 수의에 해당되는 거예요. 그 딴 것 없어도, 벌거벗고 가도 되는 존재가 새로운 존재에요.
우리가 입은 수의를 벗지 못하면 그동안 안 믿는 친구들, 안 믿는 가족들, 안 믿는 식구들, 안 믿는 사람들, 그 이해관계가 얽힌 사람들, 그 놈의 정, 인정, 사정, 애정, 모든 것들이 나의 발목을 잡아요. 네가 그 옷 입는데 내가 보태줬는데 나를 이렇게 섭섭하게 할 수 있느냐, 뭔가 얽히고설킨 정들이 많아서 주님의 그 엄청난 능력을 찬미하고 감사하기 보다는 ‘저 사람에게 내 할 도리를 다해야지’라는 사사로운 인간의 정에 너무 얽혀 있어요.
세상에 발목 잡힌 거예요. 교인들이 교회 와서 하나님에게 은근히 기대하고 바라는 것은 뭐냐 하면, “교회 밖에 나가도 내가 예수 믿고 잘되었다는 소리 좀 들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내 인생 괜찮게 진행되고 있다는 그 티를 내게 해 달라는 그것 때문에 교회 오잖아요. 기도하는 것도 그거고요.
그러니까 성경의 뜻도 모르고 후딱 보니 ‘지극히 큰 능력’이 있다고 하니까 ‘옳다구나. 내가 능력이 없는 것을 주님에게 구해서 내 능력을 이루리라. 과부의 간절한 기도처럼 악착같이 매달리면 주시겠지.’ 교회 고객들이 그걸 원하니까 교회 경영자 되는 사장 입장에서는 그들의 소원대로 들어주는 수밖에 없지요. 금요철야기도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에는 금요철야기도회를 자정에 하더니 요새는 편리하게 한다고 여덟시에 한답니다. 커피 한잔씩 돌리고. 여덟시에 나와서 열시에 끝나면 그게 무슨 철야에요? 기도하는 그것이 얼마나 헛수고냐 하면, 그들은 예수님이 능력을 준다고 “믿쑵니다” 하고 쌍시옷 들어가게 하는데 그게 어떤 예냐?
황금알을 낳는 닭이 있다 칩시다. 그 황금 알을 쪼개보세요. 거기에 금덩어리가 들어 있는지. 서양동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아침마다 황금계란이 떨어지거든요. 과학적 합리성으로 따져보는 거예요. 황금알을 낳는다는 것은 뱃속에 더 많은 황금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배를 갈랐습니다. 안에 황금이 하나도 없었어요. 백숙이나 해 먹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능력이 온다는 거예요. 예수님을 쪼개보자는 말이지요. 예수를 쪼개보면 그들이 원하는 능력은 없어요. 예수님은 죄로 인하여 피 흘리고 죽고 희생한 그 희생만 들어 있어요. 주님이 산타 할아버지인지 압니까? 선물보따리 들고 굴뚝타고 오는지 압니까? 예수님을 알려면 예수의 본질을 쪼개보라는 말이지요.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그 안에는 우리의 죄만 소복이 들어 있어요. 죄에서 죄용서의 능력이 나오는 거예요. 십자가를 통해서 “내가 살고자 하는 것도 죄입니다.” 그걸 기도해야지요. 그게 능력이잖아요. 아무것도 없는데서 능력이 나와요. 아무것도 없는데서 능력이 나온다는 말은 뭐냐? 너는 아무것도 없어도 괜찮다, 라는 것에 눈 좀 뜨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왜 그리 바쁩니까? 아무것도 없는 자가 아니라 뭔가 챙기고 또 챙겨야 될 것이 너무 많기에 그렇게 바빠요. “왜 챙기십니까?” “챙겨야 살지요.” “왜 살려고 하십니까?” “글쎄요.” 왜 살려고 하십니까? 왜 안 죽으려고 해요? 글쎄요? 왜 안 죽으려고 하고 왜 살려고 하느냐에 대해서는 성경에서 이미 우리에게 해답을 줬습니다.
성경이 해답을 이미 줬는데 능력이 없으니까 볼 줄을 몰라요. 골로새서 1장 13절에 보면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라고 되어 있어요. 흑암의 권세에 우리가 완전히 지금 포위되어 있습니다. 흑암의 권세에 둘러싸여 있어요.
우리 동서형님이 지난 목요일에 돌아가셔서 토요일에 제가 동산병원 영안실에 참석을 했는데요. 교인들이 얼마나 왔는지 백 명이나 왔어요. 큰 교회니까요. 어느 교회라고 제가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 서현교회라고 내가 말은 안하겠는데요. 그동안 수십 년을 그 교회 다녔으니 얼마나 손님이 많겠어요.
그래서 목사도 몇 명 따라올 줄 알았지요. 그런데 기도할 사람이 없다고 갑자기 나보고 기도하라고 했어요. 나는 잠바 입고 갔는데. 그래서 기도를 했지요. 기도내용에 이런 것이 있었어요. 우리 주위에 왜 그리 실종된 사람이 많으냐고 했어요. 죽는다는 말을 안 하고 실종이라는 표현을 했어요.
실종이라는 것은 이쪽세계에서 저쪽세계로 갔기 때문에 이쪽세계에서는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는 것이 실종이에요. 이것이 열왕기하에 나와요. 엘리야가 주님께 들리고 난 뒤에는 기존의 현실 속에 있는 엘리야의 제자들이 무려 사흘 동안이나 엘리야의 시체를 찾았는데 못 찾았습니다. 찾을 수가 없어요.
왜? 그쪽 세계에서는 엘리야는 실종자입니다. 인간은 죽지 않아요. 다만 실종될 뿐이에요. 사라질 뿐입니다. 흑암의 권세에서 옮겨가는 거예요. 그동안 흑암의 권세에서 빠져나오고 싶어도 못 빠져나왔어요. 왜? 흑암의 권세는 이길 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에. 지극한 능력이 없으면 흑암의 권세에서 아무도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오늘 본문 1장 20절이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누구냐? 예수님은 어떤 능력을 우리보다 먼저 받았는데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그리스도에게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죽었다가 부활했고 그 동일한 능력이 성령을 통해서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거예요.
그 능력은 능력 준 사람에게만 눈이 뜨이는 능력이기 때문에 그 능력 안에는 절대적인 절단이, 끊어냄이 있어요. 에베소서 이 편지를 주면서 이 편지자체가 끊어내는 능력이 팍팍 뿜어져 나오는 책이 이 성경이에요. 아, 내가 구원된다는 것, 교회 가서 내가 예수 믿고 천당 간다는 이것이 다 헛방질이에요. 아무 소용없는 짓을 한 거예요.
사람들이 얼마나 싸가지가 없는지요.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죄 많은 나를 위해서 예수님 당신이 대신 희생하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의 요청에 의해서 희생된 그 희생이 아니에요. 주님의 희생은 우리를 물고 늘어지는 희생이에요. 우리가 원한다고 희생하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라고요? 아니에요.
주님의 희생은 자발적 희생이에요. 우리는 요청할 자격도 없고 우리가 요청해서 죽는 희생이 아닙니다. 우리는 얼마나 못돼먹었는지 몰라요. 그 인간성이. 주님의 죽으심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죽으신 거예요.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라는 것은 주께서 새로 만들어놓은 두 번째 자아에서는 우리가 해당돼요. 주님의 자기 솜씨고 자기능력입니다. 주님의 능력이 전파되는 그 현장에서는 어떤 경우라도 인간의 공로로 돌아가는 것을 용납한 적이 없어요. 주님의 이 모든 능력은 부활의 세계이고 부활의 능력이고요, 이 부활의 능력은 마치 우리에게 먹구름이 덮여오듯이 그 구름 내부에 한정적으로만 적용되는 능력이에요.
부활의 능력에 해당될 사람에게만 이해가 되는 식으로 그 결과를 낳는 능력이 우리에게 덮이게 되는 겁니다. 주님의 희생은 우리가 원하는 구원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고 너는 그 따위 식의 사고방식이 바로 죄였다는 것, 우리의 죄 됨을 물고 끌고 가는 거예요. 예수님의 자기 십자가사건 속으로 끌고 가는 겁니다.
“네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무턱대고 구원해달라고?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니까 날 건져야 마땅하다고?” 그런 사고방식이 나왔다는 그 자체가 바로 죄의 능력이라는 것을 끌고 그것 때문에 내가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거예요. 잘해주려고 희생한 것이 아니라 너 때문에 내가 죽었다는 그것을 더욱더 크게 확대시키기 위해서, 그것을 명백하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우리를 물고 늘어지는 능력을 발휘하시는 거예요.
우리가 아무리 교회 오래 다녀도 그런 발상자체가 계속 흑암의 권세, 어둠의 권세에 진짜 숨이 막힌 거예요. 두 개의 세계로 형성되면서 이 세계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일찍 받은 사람들은 어떤 자세와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는지를 이 두꺼운 성경이 다 이야기를 해주고 있어요.
히브리서 11장 9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장막에 거했다는 겁니다. 장막이라는 것은 임시거처를 이야기합니다. 장막에 거했다.
약속의 계열에 속한 사람, 우리 선배지요. 믿음의 계열의 우리 선배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이 땅에 사는 삶을 임시거처로 본 거예요. 장막으로 봤습니다. 장막이라 하는 것은 탈탈 털고 미련 없이 거기서 뛰쳐나와야 될, 뒤도 돌아보지 말아야 될 거주지에요. 그게 장막입니다. 얼기설기 만든 그것은 미련 없이 떨쳐버려야 될 그게 장막이에요.
장막을 아까워하고 장막에 집착하면 안돼요. 그런데 그 약속의 선배들이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을 장막으로 볼 수 있는 그것은 믿음에서 나오고 그 믿음은 예수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히브리서가 증명해주는 대목이에요. 히브리서 11장 자체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이 말은 뭐냐 하면, 오늘날 너 자신을 볼 때 하나의 이미지로 보라는 거예요.
서울의존교회 강의에서 그렇게 했거든요. 이미지라는 것은 벽지에 있는 하나의 무늬 같은 거예요. 그리고 해병대복장의 얼룩무늬 같은 거예요. 자체적으로는 어떤 두께가 없어요. 습자지 같아요. 제가 이렇게 하면, 그래도 내 인생 70, 80, 90까지 살고, 고생 되게 했고, ‘여자의 일생’이 어떠니, 울음을 참는 남자의 길이 너무 길었어요, 이렇게 자기 인생의 두께를 자구 내세우는데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죽음 앞에 10년의 간격이 있는 것이나 한 시간 뒤에 죽는 것이 차이가 있습니까? 10년 뒤에 죽는 것과 한 시간 뒤에 죽는 것과 차이가 없어요. 왜? 둘 다 죽음이 호출하고 있기에. 우리는 비겁하게 죽음이 안 보이는 쪽으로 등 돌리고 삽니다. 등 돌리고 살 때 요한 1서에서 그러지 말라고 우리에게 당부하고 있습니다.
요한1서 2장 15절에서 17절을 보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등 돌리지 말라는 거예요.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계획 앞에서 등을 돌려서 네가 살아온 세상 쪽으로 시선을 두지 말라는 뜻이에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가 넘쳐나는 그곳에 눈 돌리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논산훈련소출신이 아니고 대구의 훈련소 출신입니다만 젊은 애들이 입영통지서 받고 논산훈련소나 그 밖의 훈련소에 가게 되면 안 들어가려고 애를 씁니다. 헌병이 헬멧 쓰는데 자기 눈이 안보이게 써버려요. 기계처럼 보이려고. 인간으로 안보이려고. 하나의 병정처럼 보이기 위함이지요.
장병들이훈련소 정문 앞에 죽 모여들지요. 7시까지 소집하는데 6시 58분이 되어도 안 들어가려고 주춤거리고 있어요. 그러면 헌병이 손가락 두 개 들어서 손짓 하면서 빨리 들어오라고 하지요. ‘빨리 들어와. 너는 어차피 들어와야 돼.’ 이게 죽음의 호출입니다. 죽음의 손가락이에요. 20년 남았다고요? 50년 남았다고요? “그것은 일방적인 네 생각이야.”
언제 화력발전소에 벨트에 말려들어갈지 모르거든요. 언제 음주 벤츠 차에 치일지 모른다는 말이지요. “들어와! 빨리 들어와!” “병원에 갔다가 오려고……” “병원에도 가지 말고 그냥 빨리 들어와!” 이 상황을 기뻐하는 것이 지극히 큰 능력을 받은 사람에게만 국한 되는 이야기입니다. 지극히 큰 능력을 받은 사람에게만.
가뿐하게 죽을 수 있는 사람, “차라리 지금 데려가 주시옵소서.”라고 하고, 주님의 완료된 조치에 대해서 감사하는 사람, 그게 바로 이 편지의 수신자입니다. 편지는 누구에게 전달되느냐? 주소는 본인이 쓰는 거예요. 받고 난 뒤에 쓰는 거예요. 이게 두 번째 자아에요. 이미 첫 번째 부활에 들어간 사람만이 이 편지의 수신자로, 이 편지가 나에게 왔다고 쓸 수가 있어요.
우리 교회 뒤에 성경들이 많이 있는데 누구 것인지 보려고 하면 이름이 안 쓰여 있어요. 이름 좀 쓰세요. 이름 좀 쓰시라고요. 그만큼 복음 들었으면 이제 이름 쓰실 만하잖아요. 이 편지는 저에게 한 편지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에 이루고자 하는 모든 일들이여. 저를 하나의 장소로, 거처로 제공해드리겠습니다.” 하는 뜻이에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그러면 불신자는 어떻게 되는가? 불신자도 주의 은혜를 받았어요. 은혜를 받아놓고 입 싹 다신 사람들이거든요. 그래놓고 큰 소리 칩니다. 저는 유시민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늘 들어요. 주께 받은 은혜는 몰라요. 그래도 세상에 대해서 한 소리 한다고 큰 소리치고 있습니다. 네가 받은 그 은혜는 어떡할래요? 그 받은 은혜 어떡합니까?
그 은혜는 공격용이에요. 심판용이에요. 받아놓고 주신 분 모르면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어디서 받은 것인지도 모르고 받아놓고는 내 것이라고 우기고 있는 거예요. 이게 모든 세상 불신자들의 특징입니다. 그거 하등 부러워하지 마세요. 그것은 악마가 그렇게 시킨 거예요.
오늘 본문을 어렵게 설명하면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으니 어렵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뭐냐? 예수님께 이런 능력이 같이 결합된 것이다. 그 결합된 능력이 우리에게 주어졌을 때는 이런 절차가 있다. 그 절차가 뭐냐? 보편자 속에 특수자 집어넣어서, 그 특수자속에서 새로운 특수자 되는 사람들을 보편화시켜서 끄집어내는 거예요.
끄집어내면 그 보편화는 두 개의 속성을 보여주게 되어 있습니다. 자, 보편화라는 것은 일반 인간들입니다. 아담에 속한 모든 인간들이에요. 모든 인간들 속에 특수자를 집어넣습니다. 그걸 가지고 성육신이라 합니다. 특수한 인간이 보편자 속에 들어갔어요. 들어간 뒤에 들어감으로서 보편자의 속성이 악마의 어두움의 권세의 티를 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여 버렸어요. 이 말은, 어떤 인간도 특수자 되시는 예수님을 따라나설 위인은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심지어 열 두 제자 전부 다. 예수님은 대표해서 자신을 배신자라고 하지요. 나는 저주받을 자라고 해서. 스스로 자신을 두고 배신자가 되어도 괜찮다는 거예요. 사람들 앞에 자인했어요. 나는 저 사람을 모른다, 나는 저 사람을 저주한다고 해도 나는 오케이!
그것부터 출발하는 겁니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대다수가 가는 흐름에 같이 공조될 수밖에 없고 오히려 그것을 떠나는 것을 극한의 공포와 두려움으로 여기는 사람들이에요. 뭔가 행동할 때 늘 주저하는 이유가 뭡니까? ‘아니오’라는 말을 내뱉는 이유가 뭐예요? 뭔가 주저할 만큼 발목 잡는 것이 있는 거예요.
그것이 세상에서 배운 나만의 고유의 가치가되는 겁니다. 특수자 주님은 홀로 떠났습니다. 이제는 그 특수자를 바탕으로 해서, 그걸 근원으로 해서 새로운 보편자를 만들어냅니다. 요한계시록 7장 1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여기서 장로는 순교자를 말합니다. 순교자가 되어서 이미 천국에 도착했는데 그 앞에 흰 옷 입고 우르르 후배들이 왔다는 말이지요. 오니까 “너 누구야? 너 어디서 왔어?” 하고 묻는 대목입니다. “여기는 사람의 능력으로는 올 수 없는 곳인데? 너 왜 왔지?” 장로가 물으면서 그 물은 사람이 답변을 해줘요. “너희는 어린양의 피로 하얗게 된 사람들이지?”라고 묻는 대목이 나옵니다. 어린양의 피로.
그러니까 너희들은 스스로 구원될 수 없는 흑암에 속한 자고, 죄인이며, 너는 끊어진 바깥에 있는, 천국 바깥에 있는 자였는데 너희들을 마중 나와서 너희들이 올 수 없는 세계에서 먼저 튀어나가신 분이 계셔요. 주님이 특수자로 보편자속에 들어가서 그들을 끄집어내 준 거예요. 그러니까 그들은 살아가면서 뭐만 자랑하느냐? 오직 예수의 피만 자랑하는 사람이 결국 천국까지 계속 이어져 들어갈 수 있는 거예요.
굉장히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이게 능력이에요. 피로 구원한다는 말을 약간 더 깊이 있게 늘여서 하게 되면, 단절의 원리가 계속 살아 있도록 하면서 나를 구원했다는 거예요. 나는 내 힘으로 갈 수 없고, 가야 될 인간도 아니야, 라는 그것을 계속해서 살려내면서 주께서 우리를 이미 구원이 완료된 자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사람이 뭔가 겁을 내고 두렵다는 것은 내 뜻이 안 이뤄질까봐 벌벌 떨기 때문에 그래요. 안 이뤄질까봐서, 그 미흡함과 모자람, 그것이 마저 채워지지 않을까봐서 벌벌 떨면서 두려워하고 그렇게 살아가거든요. 그런데 더 이상 정죄함이 없는 사람에게는 벌벌 떨 일도 두려워할 일도 없어요. 왜? 원래 나는 개판이니까요.
그러면 죄는 뭐냐? 죄는 나쁜 짓이 죄가 아니고 오늘 본문에 의하면 죄라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에게 일어났던 일을 방해하는 것이 죄고 거기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죄가 되는 거예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단절과 건짐이라는 그 두 가지 일을 한다는 것에 대해서 내가 등 돌리고 외면하고 그걸 모른 체하고, 모르는 척이 아니라 아예 모르고 있는 그게 바로 죄가 되는 거예요.
주님께서 나에게 뭘 하느냐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바가 없을 때 죄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을 모르고 있을 때 인간에게 뭐가 있느냐 하면, 종교가 동원돼요. 종교는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에 있는 그 일을 가리기 위해서 종교라는 것을 만들었어요.
오늘 뉴스에 일본의 ‘잠복그리스도인’이라 하는 것이 나왔거든요. 17세기에 일본에서 하도 천주교신자를 박해하니까 천주교신자들이 자기종교를 지키기 위해서 어떤 수를 쓴 것이 있어요. 나는 절에 간다, 부처 섬긴다고 하면서 부처를 만들고 그 뒤에 마리아상을 만들어놔요. 부처섬기는 척 하면서 치우고 마리아한테 절하는 겁니다.
그렇게 잠복했던 그 사람들이 1873년도에 종교법이 바뀌면서 맘 놓고 천주교에 오게 되었다는 거예요. 일본에 현재 기독교신자가 1퍼센트에요. 그걸 두고 잠복된, 나타나지 않지만 잠복된 그리스도인이라고 표현한 겁니다. 유네스코의 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되었는데 오늘날 성도라 하는 것은요, 기독교 때문에 박해받는 것이 아니고 복음 때문에 박해받아요.
복음에 의해서 잠복된 제2의 사람들이에요. 왜냐하면, 이 세상 자체가, 예수님당시나 지금도 마찬가지고 철저하게 이 세상이 존재하는 한 핍박을 안 할 수가 없는 힘이, 흑암의 권세가 작용하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그러니까 능력을 못 받았을 경우에는 교회라도 다녀서 위로를 받아야지요.
우리교회 커지고 부흥되면 그게 스스로 위로가 되는 거예요. 내가 사람 많이 모이는 교회 다녔으니 나중에 천국 갈 거야, 라는 위로를 스스로 가지고자 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에게 두께가 생겨요. 실체가 되어버린다고요. 성도가 뭐냐? 성도라는 것은 주님의 특수성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보편성으로 나오는데 두 가지 모습으로 나와요.
하나는, 주님 안에 있는 성도의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주님 안에 있는 성도의 모습은 죽어가는 거예요. 그냥 죽어가는 거예요. 예수님하고 똑같아요.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 그리고 일반 민중들 앞에서 예수님은 결국 힘없는 존재에요.
나라가 강대해지고, 로마에서 벗어나는 일에 주님은 아무 일도 보태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유대사회에 소망이 있었습니다. 어서 로마에서 벗어나서 다윗에게 약속된 그 나라, 우리나라가 독립국가가 되는 그것이 소망이었습니다. 그 소망 일체 안 들어줬어요. 열 두 제자도 그걸 은근히 기대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진짜 맥없이 아무 조치도 못하고 그냥 돌아가셨어요. 그리고 이야기합니다. 내 나라는 이 나라가 아니다.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아니했다. 소위 기독교신자라고 하면서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자고 할 때 그 나라는 어느 나라인지 정리 좀 해주시기 바랍니다. 어느 나라 십니까?
단절의 나라여야 돼요. 우리 손에 잡히고 눈에 보이도록 제공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이 땅에서 우리는 소멸하지요. 소멸될 나라, 이 세상에서 붙잡을 수 없는 나라에 속한 사람입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우리의 주민등록은 그 나라에 속해 있어요.
또 하나의 경우가 뭐냐? 주님 안에 성도는 맥없이 죽어가고 있지만, 아무 유명세도 떨지 않지만, 그 다음에 성도 안의 주님을 보여줘요. 성도 안의 주님이라 하는 것은 뭐냐? 성도에게 네 예수를 보이라고 하면 여기에 없어요. 무(없음)가 돼요. 황금을 낳는 닭 쪼개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그냥 백숙용인 것처럼.
성도가 보여줄 수 있는 예수는 없습니다. 모든 것을 강탈해 갔기 때문에. 예수님, 없는 존재를 우리가 모시고 가는 가마 같은 존재에요. 내 속에 텅 비어있는 것을 모시는 거예요. 텅 비어있는 그 운반체입니다. 네가 예수 믿는다면 능력을 행하라. 능력 못 행합니다. 있어야 능력을 행하지요. 능력을 행하지 못하는 자라는 조건하에 구원되었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의 나라는 이 세상 너머에 있는 나라가 아니고 이 세상과 차이나는 그 차이 속에 있는 세계에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계속 차이 남 속에서, 없는데서 새롭게 발생되는 세상이에요. 새롭게 나타나는 세상. 천국 꿈에 봤거든 개꿈이라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거 믿으면 또 우상 돼요. 계속 차이나요. 어제 예수 믿은 것 오늘 되면 오늘 예수가 또 차이나요. 이미지는 그 때 그 때 사건화 되어서 오늘 나의 이미지, 내일 나의 이미지가 또 달라요. 사람이 상황이 바뀌면 고정된 나를 쥘 수가 없습니다. 고정된 나라는 것은 없어요. 결정이라는 것은 우리속의 없음 속에 계시는 주님이 결정할 문제지 내가 성도답게 되려고 내가 결정하고 내가 판단내릴 문제가 아닙니다.
어느 교회 가면 내가 구원받을 거야, 그런 결정하지 마세요. 어제 예수 믿었던 나를 나는 믿는다. 그것은 우상이에요. 그것은 잘못된 것을 믿는 겁니다. 진짜 살아계신 분을 안 믿고 왜 자꾸 믿었다고 여기는 사람을 믿어요? 요한계시록 7장을 다시 말씀드리면 장로들이, 너희가 어디서 왔느냐고 묻지요. 네가 누구냐고 묻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나는 이렇게 살아왔습니다, 를 묻는 것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내 인생을 이만큼 끌고 오기 위해서 이렇게 고생했습니다, 는 마귀에게나 하라는 겁니다. 내가 묻는 것은, 올수 없는데 누구 때문에 왔는가를 묻는 거예요. 우리가 이 땅에서 자랑할 것은 한 평생 고생했다는 것을 자랑하면 안 되고 올 수 없는 천국을 누구 덕분에 왔느냐, 누구 희생덕분에 왔느냐를 묻는 거예요.
그 말은,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하면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하면 어떻게 대한다는 그런 것에 대해서 내가 더 이상 신경 쓸 것이 없다는 겁니다. 아무것도.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여러분, 하늘의 별 따서 어디에 써먹을 겁니까? 아무 쓸모없지요. 여러분, 하나님 믿어서 어디에 써먹을 거예요?
하나님은 이 세상에 없어요. 안 계신 분입니다. 써먹을 데가 없어요. 그 써먹을 데 없는 분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세상에서 써먹을 데가 없다고, 쓸모없다고 내다 버린 쓰레기 같은 존재가 우리를 구원하신 거예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우리의 모퉁이 돌, 새로운 천국의 모퉁이가 된 겁니다.
새로운 나, 그리고 내가 붙드는 나의 차이 속에서 비로소 우리는 건널 수 없는 능력을 이미 받았음을 직감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별 볼일 없는 예수님, 그러나 아버지의 능력이 임하니까 우리에게 빈 수의만 남기고 죽음의 권세에서 벗어났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동일하게 그 코스를 가도록 능력을 줬을 때 우리는 이 세상의 아무것도 부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도가 준 편지, 우리가 수신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눈이 뜨여서, 이해 못하고 오인했던 것, 잘못해석 했던 것, 이제 다 청산하고 아무 쓸모없는 인간을 귀하게 여기시고 구원하신 주님의 귀한 능력을 예수님 길, 십자가의 길을 가면서 마음껏 전파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