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비밀(엡1;9-10) 181216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12. 17. 20:51
2018-12-16 12:39:58조회 : 111         
   비밀 181216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비밀(에베소서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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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18-12-16 13:19 
비밀 

2018년 12월 16일                 본문 말씀: 에베소서 1:9-10 

(1: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일은 애초에 ‘비밀’부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과실을 따먹지 말라’라고 하신 것조차 그 이유에 대해서 일절 언급이 없었습니다. 비밀입니다. 즉 ‘선과 악을 아는 것’조차 인간이라는 피조물에게는 비밀이며 금지된 겁니다. 그 지식은 ‘통일’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악마의 사주를 받은 아담은 그 비밀을 통째로 강탈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비로소 강제 금지조치가 취해집니다. 낙원에 다시 못오게 하신 겁니다. 토지로 내려간 인간들은 그 선과 악의 지식으로 나름대로 ‘통일’을 시도하게 됩니다. 그 세계가 바로 ‘첫 번째 아담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에게는 이 ‘아담의 세계’ 곧 ‘인간들만의 국가’외에는 다른 통일성을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지금에 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에게 관심 끄는 것은 ‘인간들끼리의 통일성’에 관한 겁니다. ‘모든 인류는 하나’라는 구호에 자신들의 이상(理想)을 둡니다. 이 나름대로 통일성 속에서 여전히 ‘신이 내린 금지’원칙이 작렬합니다. 

구약 때에 있었던 노아의 홍수가 소돔과 고모라의 불심판도 모두 ‘금지 작용’ 때문에 일어나신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선과 악의 지식’으로 무장된 그 통일성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끊임없이 자체적인 통일성을 추구하는데 여기에 투입되는 것이 바로 시간과 공간의 결합입니다. 

즉 시간만 계속 주어진다면 언젠가는 인류는 하나로 통일될 것이다 는 희망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이 희망은 어디까지 ‘첫 번째 아담의 몸’에서 시도한 겁니다. 이미 금지로 인해 공격의 대상이 되는 비(非)-통일적 세계입니다. 인간들은 각자 자기 몸 중심의 통일성을 추구합니다. 

나름대로 이미 ‘선과 악의 지식’이 구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강탈해 온 지식은 그리스도 몸 중심의 통일성을 위함이지 결코 인간의 몸 중심의 통일성을 위함이 아니기에 계속 실패로 끝납니다. 아무리 자체적으로 통일성과 일관성을 구축하려 하지만 늘 미흡함이 자체적으로 쏟아져 나옵니다. 

그러면 인간들은 걱정, 염려와 불안감을 몸서리치면서 나름대로 다른 변신이 무한히 시도하게 됩니다. 소위 ‘자아 돌려막기’를 시도하는 겁니다. 계속 해서 진정한 자아 찾기를 위하여 자신의 욕망이 만족할 때까지 ‘자아 바꿔보기’를 시도합니다. 이 와중에서 소위 ‘선과 악의 지식’이 총투입됩니다. 

쉽게 말해서 ‘착하다는 조건 하에 나는 살 권리가 있을 것이다’고 일방적으로 자신을 붙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디까지 이미 ‘죽을 몸’인 아담의 몸에 한통속으로 담겨 있을 뿐입니다. 착하던지 아니 착하던지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런 몸을 가지고 ‘성도되기’를 시도해도 소용없습니다. 

‘성도’란 그 원형이 예수님 뿐입니다. 예수님만이 성도의 실체입니다. 그리고 그 몸 안에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님의 흔적’으로 등장해서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게 됩니다. 즉 성도가 이 세상에 어떻게 살게 되는가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먼저 그 모습을 보였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에베소서 1:7에 나오는 ‘피로 말미암아’입니다. 

‘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얻는 것이 곧 하늘의 비밀이며 이 ‘비밀로서의 통일’이 곧 ‘그리스도의 통일’입니다. 즉 비밀에서 통일케 하는 힘이 발산된다는 말입니다. 그 예가 누가복음 7:37-38에 나옵니다.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그 여인은 예수님 앞에서 처참하고 참담하게 망가집니다. 자아의 통일성이 와해되는 겁니다. 귀한 향수병도 자기를 위해서는 소용없습니다. 반면에 인간 세상에서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나라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옛 아담의 몸으로 사는 사람들은 오늘 본인을 외치는 사도 바울에 관심사에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을 겁니다. 사도 바울은, 비밀이 있고 그 비밀에 의해 세상은 하나로 통일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하지만 이런 소식들은 사람들이 평소에 궁금해 있던 내용이 아닙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있어 성도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인간들은 나름대로 통일성을 추구한다고 여기기 때문에 예수님 중심의 통일에 관심없습니다. 과학이라는 인식이 그러합니다. 과학이 발달하기 전 사람들은, 태양이 밤에는 이 땅에 숨어있다가 아침이 되면 태양이 기지개 펴고 창공을 돌아가니가 저녁이 되면 햇빛도 인간들과 같이 이 지상 처소에 잠을 잔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과학이 밝혀내기를 이 천체는 ‘지구중심주의’가 아니라 천체 중심주의가 맞다고 합니다. 그래서 기존의 인식은 미신이라고 공박합니다. 하지만 그런 과학은 왜 자기 중심주의인 것을 모르고 있습니까? 바로 ‘과학’이라는 미신 때문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처참하게 망가지신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몸’과 ‘그리스도 몸’이라는  두 몸을 준비하시고 그리스도 몸을 그동안 비밀로 숨겨두신 겁니다. 즉 세상의 통일은 오직 예수님의 몸에 나오는 ‘피로 말미암아’ 성립한다는 사실을 비밀에 두신 겁니다. 그 비밀에서는 이 세상에 흔적을 남기기 마련인데 예수님에게는 그 흔적이 곧 ‘십자가의 피’였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란 인간들의 실체에서는 시작되지 않고 예수님의 몸이라는 실체에서 시작되기에 성도란 주님을 증거하는 흔적이 됩니다. 흔적의 특징은 ‘나는 실체가 아니라 누구누구의 증거’라고 말하는 겁니다. 흔적은 언젠가는 소실되게 마련입니다. 그게 운명입니다. 따라서 흔적이 스스로 설려고 해서는 아니되는 겁니다. 

‘사람들의 성도되기’란 필히 실패해야 합니다. 성도됨이 ‘성도되기’를 공격합니다. 성도 내부에서는 ‘거듭난 자아’가 ‘거듭나지 않는 자아’를 공격합니다. ‘죽고도 상관없음’이 ‘꼭 살아야 돼’를 공격합니다. 거짓 실체를 주님의 몸의 흔적으로 전환시키는 작업을 피의 힘으로 계속되게 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성도 안에서 나타나는 일관성 있는 움직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평토장 속의 뼈들처럼 마땅히 우리가 무시당해도 싸다는 감각을 가지고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8-12-17 13:16 
5강-엡 1장 9-10(비밀)18121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1장 9-10절입니다. 신약성경 310페이지입니다. 

에베소서 1:9-10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 나오는 ‘비밀’이라든지 ‘통일’ 같은 것은 평소에 우리가 관심가지는 것이 아니에요. 이것 궁금해 하지 않습니다. 세상 살기 바쁘고 살림살이하기 바쁜데 언제 하늘의 비밀, 통일, 이런 것 파자고 인생사는 것은 아니거든요. 

이런 사실을 사도바울이 편지를 통해서, 세상의 모든 비밀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알려졌고 모든 것은 그리스도중심으로 통일된다는 이야기를 언급하는 것은, 우리들이 평소에 잘못 살아가고 있다는 거예요. 사도바울의 관심사는 여기에 꽂혀 있는데 너희들의 관심은 어디에 꽂혀 사시는가, 라고 우리에게 추궁하듯이 묻고 있습니다. 

우리 일상을 보면 항상 근심과 걱정이 뒤따라와요. 이것을 오늘 본문 용어대로 하게 되면 통일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정신적으로 통일되지 못하고, 정서적으로 통일되지 못하고, 안정성이 하나도 없어요. 모든 것이 비밀을 알아야 되는데 사람은 눈에 보이는 그것이 전부기 때문에 비밀을 수집하고 그것을 모아서 자기중심의 통일에 나서려고 하는 겁니다. 

저는 그것을 ‘자아의 돌려막기’라 하는데 내 자신이 누구냐를 모르기 때문에 다른 것을 가져와서 ‘이게 나일까? 이정도 되어야 나 다운거야?’ 계속해서 자꾸 뭔가를 요청하는 겁니다. 교인들이, 우리 교회는 관계없습니다만, 교인들이 자꾸 교회를 짓고자하고, 목사를 보고 교회를 짓자고 하는데 교회가 일종의 돌려막기에요. 

이정도 교회 될 때 내가 이정도 믿음이 있는 것인가, 끊임없이 카드 돌려막기 하듯이 진짜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서 계속해서 돌려막기를 하는데 그만큼 불안하다는 겁니다. 사채 쓸 때 이미 불안하잖아요. 1년 이자율이 20퍼센트가 넘는다는 것은 안정되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안정되지 못하면 고민이 되고 걱정이 있지요. 

사도바울은 지금 안타까운 거예요. 이 세상 모든 것이 통일되었다. 끝! 이 한마디로 이 세상은 걱정할 것도 없고 염려할 것도 다 없어졌는데 그리스도 안에서의 통일을 모르기에 사람들은 속고 있고 마귀한테 놀아나고 있다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이게 창세전부터의 비밀이거든요. 

이 비밀을 해결하려면 선악과 따먹은 것부터 이야기해야 돼요. 선악과 안에 비밀이 있었습니다. 그 비밀은 금지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그 비밀을 통째로 아담이 훔쳤습니다. 강탈한 겁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 비밀을 통째로 움쳤을 때 독단적으로, 나 자체적으로 어떤 통일을 시도하게끔 뒤에서 마귀가 조종을 했지요. 

나는 하나님을 배제한 상태에서 나 자체로 뭔가 완벽한 절대존재가 되겠다는 것, 모자람이 없이 그 자체로 모든 것을 구현한 존재로 살겠다는 겁니다. 마귀의 본성이지요. 그 이야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따먹지 말라” 하는 말만 했을 뿐이지 선악과 근처에 전기철조망을 설치한다든지 해서 강제로 막지를 않았어요. 

강제로 막는 것은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에덴동산에서 쫓아낸 뒤에 강제로 막았지요. 선악과 자체가 그렇게 귀한 것이고 그렇게 소중한 것이라면, 하나님이 그만큼 인간을 사랑한다면 그것을 강제로 말려야 되는데 마구 허용했어요. 그냥 허용했고 선악과의 모습도 아주 꼴 보기 싫은 것이 아니고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했다는 말이지요. 

항상 유혹거리로 작용하는 겁니다. 언젠가는 따먹게 될 수밖에 없을 거야, 라는 식으로 그 자체를 가지고 선악과가 거기에 있었던 거예요. 선악과의 비밀자체가 그렇게 되는 것은 그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7절에 보면 나오지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그의 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얻는다. 이 내용을 오늘 본문 9절에서 비밀이라고 한 겁니다. 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얻는다는 것이 비밀이라는 거예요. 이게 비밀이 되려면 우리는 뭘 추적해야 되느냐 하면, 어떻게 예수님의 피가 우리 죄를 용서할 수 있느냐는 그 자체의 연결고리를 우리가 파악을 해야 돼요. 

주님께서 비밀이라고 했다는 것은 그 절차에 대해서 네가 알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계속해서 말하기를, 알 필요가 없다는 그 논리가 뭐냐 하면,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는 그걸 구태여 알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뭐냐 하면,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두 개의 몸을 준비하기로 예정하신 거예요. 

하나는, 예수님의 몸, 그리고 선악과를 강탈해서 장착한 아담의 몸, 두 개의 몸만 달랑 있게 하는 겁니다. 이 몸은 특징이 뭐냐 하면, 어떤 시간이 흐르고 역사가 흐르고 어떤 공간, 어떤 위치에 있다 하더라도 거기에 있는 원리는 달라질 것이 없는 거예요. 몸을 하나의 거대한 단지로 봅시다. 몸 하나를 커다란 단지로 보자는 말입니다. 

우리의 몸을 하나의 단지로 본다면 이 세상 몸이 두 개의 단지가 된 거예요. 하나는 예수님이라는 몸의 단지, 거대한 단지, 그리고 인간의 몸이라는 거대한 단지, 단지 두 개가 달랑 성립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몸이라는 단지의 특징이 뭐냐 하면, 아무리 시간과 공간이 흘러도 커다란 단지 안에 있기 때문에 달라질 것이 없어요. 

달라질 것이 없다는 말은, 거기서 걱정, 근심, 염려 같은 것이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고, 한다고 해도 달라질 것이 없다는 겁니다. 소용없는 거예요. 지금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여러 사람이 있잖아요. 지금 세계의 인구가 75억인데요, 곧 80억이 될 거예요. 특히 인도에서 자식들을 많이 낳게 때문에. 

그런데 주님의 눈으로 보면 아무리 세계의 인구가 75억이 된다 할지라도 결국은 한 아담이 갖고 있는 속성이 펼쳐지는 것뿐입니다. 똑같은 아담이에요. 동일한 아담에게 적용되었던 그 원리가 동일하게 적용돼요. 네가 선악의 지식을 아는 이상 너는 죽어야 된다는 것, 네가 똑똑하고 착하게 산다고 해서 안 죽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 동일한 원리가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2018년에 태어나나 서기 218년에 태어나나 둘 다 아담이에요. 둘 다 달라질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을 통일이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통일체를 두 개를 만들고 하나의 통일체를 나타내기 위해서 한쪽을 제거하는 방법을 쓰시는 겁니다. 

지금 통일체는 인간들의 통일체, 아담밖에 없어요. 처음부터 좀 어렵기 때문에, 또 동영상도 끊기고, 늦게 오신 분도 있고 하니 다시 한 번 해드리겠습니다. 선악과자체가 금지거든요. 금지라는 것은 하나님 쪽에서 인간 쪽으로도 금지가 되지만 인간 쪽에서도 금지가 돼요. 인간은 하나님을 몰라요. 왜? 하나님을 아는 것이 금지되어 있어요. 

금지의 요소가 아담 속에, 인간 속에 들어오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은 아무리 새끼를 치고 자식을 낳아도 하나님을 모른다는 점에서는 똑같아요. 2018년이 되나 2019년이 되나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은 똑같습니다. 그렇게 똑같으니까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인간들만 있어요. 그 인간들끼리 뭘 하느냐? 단합을 하고 통일을 이루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통일체를 두 개 만들었어요. 하나는, 인간이 아담의 집합에서 모인 통일체를 만들어요. 그리고 인간세계는 그것뿐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몸은 어디 있느냐? 이것은 비밀이에요. 숨어있는 거예요. 분명히 두 개인데 나타난 것은 하나밖에 없어요. 인간은 하나가 전부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tv 잘 안 보는데 골목식당이라는 프로에 나오거든요. 홍탁 아들 그 국민 불효자, 그렇게 말 안 듣던 그 애가 닭곰탕 만들어서 개과천선했거든요. 백종원이라는 셰프가 인간 하나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애쓰는 그 이유가 뭐냐는 말이지요. 그리스도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에요. “너도 엄마 모시고 살아야 되지 않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예능프로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설득력이 있어요. 납득이 돼요. 이게 납득이 된다고요. 박 항서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축구팀이 스즈끼컵대회에서 우승했습니다. 베트남 사람들이 좋아서 난리에요. 베트남에 있는 우리나라 기업에 한 천억 원 효과가 났을 거예요. 한국제품 무조건 사고 중국제품은 안사고 그럴 거예요. 

그런데 그러한 환호성과 기쁨이 우리한테 설득이 된다니까요. 왜? 같은 아담이기 때문에. 네가 승리하면 그걸 나도 갖고 싶은 거예요. 네가 웃으면 나도 같이 웃고 싶은 거예요. 네가 슬프면 나도 같이 슬픈 감정을 느끼는 겁니다. 왜? 우리 몸은 우리 몸이 전부기 때문에 그래요. 이 세상에 성도 없습니다. 성도가 어디 있어요? 성도 없어요. 아담의 몸 밖에 없어요. 무슨 성도가 있어요? 무슨 그리스도의 통일에 관심이 있고 무슨 비밀에 관심에 있습니까? 

이 세상은 하나의 몸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몸, 아담의 몸밖에 없어요. 고만고만해요. 인간들이 통일한다는 것은 뭐냐? 인간들의 몸을 하나의 부분으로 보고 그 부분들을 집결해서 인간만의 세계, 인간의, 인간을 위한 나라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다. 아브라함 링컨이 게티스버그 연설에서 했던 이야기 아닙니까? for the people, by the people, of the people, 나오는 것, 성문종합영어라는 책에 그 문장이 나왔었어요. 

그게 납득이 된다니까요, 납득이. 설득이 돼요 우리한테. 저절로 동의가 돼요. 그런데 말입니다. 부분이 모여서 통일되는 법은 없어요. 이게 불가능합니다. 부분을 모은다고 통일이 되는 것이 아니고 이것은 부분이 돌려막기를 하는 거예요. 완전체는 계속 지연이 돼요. 내년에 봅시다, 2019년도에 봅시다, 2020년에 봅시다. 

계속 무한대로, 무한대로 지연이 되고 그 기대가 자꾸 미뤄지는 거예요. 그러다가 자기는 늙어죽지요. 앞으로 나 죽고 난 뒤에 좋은 세계가 있을 것이다. 아니요. 그것은 이순신 장군도 이야기했던 거예요. 그것은 세종대왕도 이야기한 겁니다. 인간은 금지된 겁니다. 갇혀 있어요. 사도바울은 싱긋이 웃고 있습니다. 

통일을 시도하려 할 때는 그만큼 어떤 역사라든지 인내가 필요해요. 통일이 안 될 때는 어떤 노고가 필요하고 수고가 필요합니다. 참 이 성경이 어려워서 성경을 인용하는 것도 주저하게 돼요. 성경이 너무 어려워서. 누가 성경이 쉽다고 이야기합니까? 정말 어려워요. 성경이 이런 뜻입니다, 라고 예를 들어도 주춤주춤하게 돼요. 

그 어려운 대목을 이야기해 봅시다.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취지가 뭐냐? 인간이 부분이 모여서 절대로 합일을 볼 수 없고 통일을 이룰 수 없다는 설명을 하는 그 대목입니다. 에베소서 5장 32절에 보면, 일단 우리가 결혼식장에 왔다고 치고요. 

28절에 보면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 같이 할찌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고 30절에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찌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입니까? 부부이야기 하다가 갑자기 “부부이야기가 아니라 교회 이야기야”라고 사도바울이 슬쩍 말을 바꿔버립니다. 22절부터 줄곧 “아내 된 자는 ……, 남편 된 자는 ……” ‘부부행복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의 몸이에요. 부부 그것으로 그쳐버리면 결혼해서 둘 다 지옥 갑니다. 

결혼 자체에서 뭐가 뽑혀 나오느냐 하면, 천국이 뽑혀 나와야 돼요. 비밀이 뽑혀 나와야 된다고요. 우리는 결혼을 신기하게 보지를 않잖아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결혼조차도, “딴 따따 단!”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일의 일관성으로 보는 겁니다. “아, 주님 살아계시는구나. 살아계시니까 두 남녀를 결혼시켰잖아.” 

사도바울이 그런 이야기 하면 다른 사람들이, “저 결혼은 한 사람의 부분이 가정이라는 통일을 이룬 거야.”라고 이야기해요. 부분을 통해서 통일을 이룬 부부라는 한 몸이 된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인간부부의 그런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의 통일이 되는 것은 인간에게 금지된 겁니다. 우리 인간이 할 수 없는 거예요. 

통일 되지 못하면 비통일이에요. 통일이 되지 못하고 비통일이 되면 제가 처음에 설교한 것처럼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요. 계속 아내는 남편에게, 남편은 아내에게 사랑해달라고 요구할 뿐인데 그 요구가 자꾸 지연된다니까요. “연말에 보자 선물 사줄게.” 그랬다가 연말이 되면 “내년 1월에 사 줄게.” 

모든 그 사랑이 자꾸 지연돼요. “보너스 타거든 사줄게.” 자꾸 지연돼요. “다음 추석 보너스 타면 사줄게.” 모든 것이 자꾸 지연이 된다니까요. 지연시키지 않고 해줘도 받는 사람이 받는 순간에는 좋다 해도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더, 더, 더, 더는 없냐고 나온다니까요. 그러니 인간들이 결혼한다는 이것은, 나의 결혼은 결혼 값도 안 된다는 것을 깨달으라고 결혼하게 하신 겁니다. 

아멘이 나와야……, 타이밍을 놓치고 있어요. 절대로 인간은 하나가 될 수 없음을 결혼을 통해서 체득해야 되고 실감나야 된다니까요. 미흡함을 느껴요. 왜? 인간은 원래 하나님의 통일을 이룰 수 없는 몸을 허락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신비가 나와야 되는데 신비를 내뿜을 수 있는 능력이 부부에게는 없어요. 

세상에, 결혼하면서 교회라고 여기고 결혼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교회라고 여겨서 부부할 것 같으면요, 에베소서 5장 말씀대로 남편은 아내를 위해서 죽어야 됩니다. 왜? 그리스도가 교회를 위해서 몸을 바친 것처럼. 미쳤어요? 왜 남편이 아내를 위해서 죽어야 됩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 남편은 하늘이고 아내는 땅인데. 

하늘이 땅 된 것은 예수님으로 족해요. 너무 강요하지 마세요. 우리 그런 믿음 없습니다. 제가 어느 강의에서 그런 소리 했지만,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믿음 없음으로 구원받아요. 자기가 믿음 나올 수 없음을 알 때 그 사람은 자기가 주체가 아니고 하나의 흔적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성령을 보내시고 또는 예수님께서 직접 오신 것은, 비밀은 이 땅에 있어서 하나의 흔적으로만 작용하는 겁니다. 

흔적, 또는 잔설. 청도 있다가 여기 오니까 “어? 눈이 쌓였네.” 하거든요. 대구에 눈이 왔거든요. 눈이 온 흔적이에요. 인간은 그냥 흔적입니다. 인간이 흔적이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은 실체가 없고 주체가 없다는 거예요. “실체가 여기 있잖아요. 꼬집으면 아프잖아요.” 하지만 이것은 곧 나이 90되면 없어질 거예요. 

인간은 그냥 안개가 아닙니다. 없어져가는 안개에요. 흔적은 뭐냐 하면, 마감이 있어요. 소멸하는 성질이 있습니다. 흔적은 어떤 임무가 있느냐 하면, “나 아니야”라는 것을 외쳐야 될 임무를 맡았어요. “나 붙들지 마. 나 영원한 것 아니야. 당신 나에게 기대하지 마. 나는 당신의 영원한 남편이 아니야.” 아내도 마찬가지에요. “나에게 너무 요구하지 마. 나는 실체가 아니야. 나에게 모든 목숨을 걸지 마. 당신이 목숨 걸만한 대상이 아니야.” 

박 흔적, 최 흔적, 김 흔적, 나는 그냥 흔적일 뿐이에요. 전에 그런 이야기 했는데 티끌 모아 티끌이라고요. 티끌모아 봐야 태산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티끌이에요. 흔적 모아서 흔적이에요. 흔적끼리 모았는데 사도바울은 요구합니다. “비밀을 내놔. 내놔! 네가 흔적이라면, 네가 아무것도 아니라면, 네 몸이 없어질 몸이라면,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하는 그 죽음의 흔적이라면 영원한 것을 네 속에서 끄집어내 봐.” 이걸 사도바울이 요구하는 겁니다. 

무슨 믿는 자가 있어요. 언제 믿었다고? 우리는 우리 자신만 믿었지요. 나 자신이 실체고 나 자신이 영원토록 살 것이라는 그것은 착각이지요. 인간이 계속 돌려막기 하는 이유가 자기가 자기한테 성이 안차는 거예요. 내가 나에 대해서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어떻게 하느냐? 

이 땅에 성도는 없어요. 성도가 왜 없느냐 하면, 성도는 비밀에 부쳐져 있기에 그래요. 비밀 안에만 성도 있어요. 그리스도 안에만 성도 있거든요. 그리스도의 몸 안에만 성도가 있어요. 하나의 단지니까. 아까 단지 이야기해 드렸지요. 다시 말하면, 주께서는 두 개의 단지를 준비했는데 하나는 숨기시고 하나는 나타냈지요. 

하나가 나타난 것은 나타나도록 그렇게 허용한 겁니다. 인간들이 악마의 그 유혹을 받아서 선악과를 따먹을 때 선악과가 품어 있으면서 하나의 단지를 만든 거예요. 뭐냐 하면, 이미 죄를 지은 아담, 전에는 죄 없는 아담이었는데 이제는 죄 지은 아담이라고 단지를 만든 겁니다. 

오늘 설교 어려워서 제가 반복하는 겁니다. 그 단지의 특징은 뭐냐? 역사나 시간의 흐름이나 공간이나 거기에 아무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조건이 있어요. 하나의 단지니까. 너나 나나 똑같아요. 똑같은 원칙을 적용하니까 똑같다고요. 개선 같은 것이 필요 없어요. 성질도 필요 없어요. 모든 인간은 한 아담 안에서 공히 같은 아담에게 적용되는 그 죽음과 처벌을 공이 받게 되어 있어요. 

로마서 5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따라서 걱정이나 염려를 한다는 것은 자기가 마치 자체적으로 자기를 통일된 것으로 착각하기에 그런 거예요. 나만 통일체인줄 알고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따로 있다는 겁니다. 진짜 하나님이 생각하는 몸은 따로 있어요. 그리스도 몸은 한 단지가 따로 있어요. 

따로 있으면 이 땅에 있는 성도는 뭐냐? 아담에서 새로운 아담, 예수님 아담에서 번져진 흔적을 이 땅에 던진 겁니다. 흔적을 던질 때 우리가 흔적이 되고 싶어서 던진 것이 아니고 그 흔적이 뭐냐? 하늘에서 예정된 비밀이 이 땅에서는 어떤 흔적을 남기느냐 하면, 피로 말미암아 라는 흔적을 남긴 거예요. 

피로 말미암아, 가 비밀이고 그 비밀의 실체가 예수 안에서 통일되었다는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핵입니다. 아무도 관심두지 않아요. 각자 살기 바빠서. 각자 자기 인생 걱정 염려하기 바빠서 아무도 관심두지 않아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안타까운 거예요. 

사람이 걱정 염려하는 것은 죄 지었을 때, 나쁜 짓 했을 때, 이런 경우거든요. 뭔가 ‘죄지으면 벌을 받게 되고, 나쁜 짓을 했으면 저주받게 되면 나는 어떻게 살지?’라고 걱정한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흔적한테는 그것을 다그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잘 사나 못 사나 없어지는 기능만 발휘하면 되니까. 

흔적은 책임추궁의 대상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소멸하는 존재에게 무슨 책임을 묻습니까? 잘하나 못하나 소멸되게 되어 있는데요. 우리가 지금 누구한테 속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속고 있기에 속는 본성에 휘둘리다 보니까 내가 나를 지켜야 되는 것이 필생의 의무인줄 알고 착각한 거예요. 

그런데 그 지키는 나라고 하는 것은 본인이 뭘 지켜야 되는지를 몰라요. 돌려막기 한다고 바빠 가지고. 계속 돌려막기 하는 거예요. “우리 부부는 행복해야 돼.” 왜? 무조건 행복하고 싶어요. 어떤 것이 행복한 것이냐 하면, 아파트 한 50평이 되는 것. 그러면 50평짜리 아파트 줬다 칩시다. 그러면 행복합니까? ‘아, 이것은 아니구나.’ 

막상 50평짜리 아파트를 가지니까 ‘이게 다가 아니네.’ 그러면 또 뭘 로 돌려막기 해. ‘차를 벤츠로 바꾸고.’ 그러면 한 번 바꿔 봐. 그래서 벤츠를 줬다. 그게 다야? 그것도 아니고. 벤츠 탔는데 문 닫을 때 너무 세게 쾅 닫는다고 나무라요. 제가 당했거든요. 벤츠 타는데 무심코 문을 닫았는데 “와, 성질 있네요.” 나는 그냥 평소대로 했을 뿐인데. 

그래서 내가 잘못했나 싶어 좀 싼 차 탈 때 그대로 해봤거든요. “내가 문을 너무 세게 닫았지요?” “아니요.” ‘아, 벤츠가 문제구나.’ “피로 말미암아”에 대해서 고린도전서 1장에서 사도바울은, 이것이 미련한 것이고 어리석은 것이라고 했어요. 왜? 너무나 이쪽 단지, 아담의 단지에서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둘 다 금지된 거예요. 

여러분 아시다시피 노아홍수가 왜 일어났는가? 금지의 효과입니다. “너희들은 천국 못 와. 천국에 와서는 안 돼. 단지가 달라. 이런 큰 된장단지, 간장단지가 달라.” 해서 그걸 분명히 하기 위해서 물로서 다 죽여 버렸지요. 소돔과 고모라에 있는 사람들, 그게 바로 비밀이라는 것 때문에 다 죽였어요. 그들은 몰랐습니다. 유황불이 올 줄 그들은 몰랐던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소돔과 고모라나 노아당시 그 사람들은 미신을 믿고 있었던 거예요. 미개한 사람들, 미신이에요. 인간들의 과학이라는 것이 얼마나 미개한지 제가 예를 들어드리겠습니다. 옛날 과학이 발달하기 전의 사람들은, ‘태양이 어디서 왔느냐?’ 할 때 태양은 밤에 잠을 자다가 아침 되면 태양이 우리하고 같이 기상해서 하늘을 돌아다니다 저녁이 되면 우리하고 같이 땅의 자기 침대에 들어간다는 거예요. 

이게 옛날 고대인의 사고방식이고 유치원 애들도 그렇게 여기잖아요. “햇님이 잠을 자네.” 보통 이렇게 하잖아요. 요새는 유-튜브가 있어서 “선생님, 그거 아닌데요. 뉴튼이……” 이렇게 나와요. 하도 똑똑해서. 햇님이 잠을 잔다고 할 때 그걸 가지고 지구 중심적 사고방식이라고 합니다. 지구중심으로 천체를 보는 거예요. 

뉴튼이라는 사람, 그리고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지구중심이 아니다. 이 바보들아. 과학적으로 따져보면 지구가 태양을 돈다. 지구가 가만히 있고 천체가 지구를 도는 것이 아니다. 이 바보들아!” 하고 과학자들이 얼마나 종교를 비웃었습니까? 

그런데 그 과학이 왜 미개한가 하면, 지구중심이 아닌 것은 알면서도 왜 세상이 내 중심이 아니라는 것은 왜 몰라요? 왜 내 중심이 아닌 것을 모릅니까? 세상은 그리스도로 통일된 것을 왜 몰라요? 금지되었기 때문에. 과학이 발달하면 할수록 자기중심이 더 응집이 돼요. 그래서 가장 악마적인 것, 과학적인 것이 가장 악마적입니다. 

과학은 계속해서 돌려막기 해요. 인공지능이 나오면 더 행복할까? 자율주행차가 나오면 더 행복할까? dna를 가위질해서 더 똑똑한 애가 나오면 행복할까요? 계속 자기가 하나의 소멸하는, 없어지는 흔적인 것을 모르고 그것 연구한다고 걱정하지요, 투자비 받아야 된다고 염려하지요, 불안불안하지요. ‘지금 죽으면 억울하다. 왜? 자율주행차 못타보고 죽는 것이 억울하다.’ 그런 식으로. 

과학이 마치 인간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이라도 된 것처럼 계속해서 유토피아를 만들어내서 광고로서 그 효과를 던지고. 드론으로 하는 주행수단도 나온답니다. 인간을 번쩍 들어서 옮기면 추석명절에 차 막힐 때 드론가지고 수송한다고 하고 드론으로 피자도 배달한다고 하고. 그러면 그만큼 행복할까요? 편리한 것은 인정합니다만 행복하냐고 묻는 겁니다. 그거 하면 불안도 없고, 걱정도 없고, 염려도 없고, 무서움도 없고, 그런 겁니까? 

지금 속고 있는 겁니다, 인간은! 진짜 중요한 비밀은 나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고 하찮은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데 있어요. 누가복음 7장 37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그 여자를 비웃게 돼요. 

그 여자는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처음으로, 나라는 것은 있을 가치도 없고 주님의 소유된 처지인 것을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비밀이 아까 뭐라고 했던가요? “피로 말미암아”죠. 그러면 여자에게 흔적은 뭐냐? 주님 앞에서 처참함과 참담함이에요. 시집가려고 모아놓았는지 모르겠는데 그 모아놓았던 향유를 아낌없이 주님 발 앞에 던지면서, 향유병이 이렇게 깨지는 것처럼 나라는 존재는 주님 앞에 깨져야 마땅하다는 거예요. 

왜 진즉 이걸 몰랐느냐는 말이지요. 창세기 2장에서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하는 것을 그렇게도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농담인줄 알았지요. 주께서 그냥 허허, 하고 바보처럼 넘어갈 줄 알았지요. 절대로 주님은 넘어가지 않습니다. 정녕 죽입니다. 

부분이 모여서 “We are the world” 노래 불러 봐야 부분이 모여서 하나가 될 수 없어요. 내가 성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흔적이고 나는 실체기 때문에 실체가 흔적 되는 법은 없어요. 그러면 되는 법은 뭐냐? 성도라는 조건 앞에서 ‘나’라는 자체가 사라져야 되지요. 나라는 단지가 없어지게 되면, ‘내가 잘했다, 못했다.’도 없어지고 걱정 불안 근심도 같이 없어져요. 

사람이 걱정 불안한 이유가 뭐냐 하면, 계속해서 나는 정당해야 살 권리를 유지할 수 있다는 그 사고방식에 물들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착한 조건에서 나는 살고 있다는 그 말도 안 되는 선악적인 요건은 우리를 계속해서 저주 아래 두기 위한 악마의 술책이고 그런 유혹을 지금도 받고 있어요. 

바보 아니에요? 이제는 그런 것에서 좀 벗어날 때 안 되었습니까? 제발 목사한테 좀 속아 넘어가지 마세요. “당신은 죄가 있기에 집안 꼴이 그 꼴 났다.” 하는 그 협박 공갈, 그 악마의 협박 공갈에 이제는 그만~! 제발 이제 그만! 뚝! 울어도 산타가 선물 줍니다. 안 울어야 주는 것이 아니에요. 울고 불고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왜? 흔적이니까. 누가복음 11장 44절에 바로 이런 형편을 잘 아시는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화 있을찐저 너희여” 예수님 앞에 바리새인들이 있는데 십일조를 하니 뭐니 그런 것을 주장하는 그 바리새인들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평토장한 무덤. 이게 무덤인데 그 무덤위에 집을 짓기도 하고 그래요. 저도 이스라엘을 가봤지만 이스라엘 집들 밑에 다 무덤들이 있어요. 기초공사가 잘 되어 있어서. 이게 평평한 무덤이거든요. 칠곡에 가면 현대묘원이 있는데 누구 장례식에 갔다가 아주 낯선 것을 봤어요. 

보통 묘지에는 잔디가 입혀져 있잖아요. 그런데 그 묘지는 잔디는 하나도 없고요. 대머리 같아요. 시멘트로 해놓았어요. 이유가 뭐냐 하면, 벌초하는 것이 귀찮아서. 좋은 아이디어인지……? 평토장한 무덤이란 아예 시멘트를 발라놓은 거예요. 거기에는 죽은 뼈가 들어 있고. 평토장한 무덤. 인간이 하루하루 산다는 것이 뭐냐 하면, 자기 자신의 내 가치만큼은 기어이 소지하겠다는 거예요. 이걸 놓기 싫다는 거예요. 

그런데 누가복음 11장 44절에서 하는 말씀은 뭐냐? 사람들이 밟아버린다는 거예요. 너도 그렇고 그런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자기는 죽어 있으면서도 내 위로 지나가지 마시라고 할 수가 없어요. 그냥 밟고 지나가요. 처음부터 우리가 밟힐 존재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래도 흔적이고 저래도 흔적이에요. 그러면 실체는 내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지요. 

자, 두 사람이 결혼을 해서 부부가 되었습니다. 둘 다 실체가 아니에요. 결혼식에서 잘살라고 주례사를 하는 것은 주례가 괜히 기분 좋으라고 한 소리고 실제로는 평토장한 무덤 같은 두 사람이 만난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는 무의미하고 허무하지 않습니까?”라고 할 때 에베소서 5장의 말씀처럼, 그러니까 죽을 인간 속에서 뭘 뽑아내라? 

교회,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그 새로운 신비를, 그 비밀을 뽑아내라는 말입니다. 그 비밀이 뭐냐? “피로 말미암아” 하는 거예요. 피로 말미암아, 그 내용이 실제로 아까 본 그 죄 있는 여인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은 뭐냐? 그리스도 앞에서 자기가 참담하고 처참한 것을 깨달은 겁니다. 그게 흔적이에요. 

왜냐하면 처참하고 참담한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처참하게 죽으신 것과 공유성을 나타내는 것, 같은 동네의 사람이라는 것, 같은 집안의 사람이라는 것, 같은 한 몸의 속성을 보여주고 있는 그 증거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부부는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상대방 앞에서 처참하고 비참하게 깨지면서 살면 되지요 뭐. 

상대방에게 밟히면서 사는 것이 당연하지요. 그런 마음으로 살면 감사가 안 나올 수가 없어요. “점심 안 해주나.” 이렇게 큰소리 칠 것이 아니고 “웬 점심?” “빨래 안 해주나?”가 아니고 “추운데 손빨래 내가 해야 되는데 왜 빨래를 해주지?” 오히려 고마워해야 되고 감사해야 돼요. 

그리고 성도가 없다고 이야기했는데 제 말이 맞습니다.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맞아요. 25절부터 보면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금지지요. 끝까지 금지로 가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성도가 성도되려는 사람을 보고 그만두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미 성도인데 단지가 그리스도 안에 속했는데 왜 성도되려고 그렇게 목사한테 속아 넘어가서 쓸데없는 짓을 하느냐는 말입니다. 이미 성도되었는데. 나라는 실체가 성도에게 필요 없어요. 주님만이 실체고 우리는 주님 안의 흔적으로 살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앞으로 성도된 사람은 어떻게 사느냐? 성도된 사람 내부에 투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의 통일이 나만의 통일을 계속 공격해대요. 거듭난 나가 거듭나지 못한 나를 계속 공격하는 겁니다. 죽어도 괜찮다는 나와, 기어이 살라고 부추기는 나가 투쟁 상태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 어려움은 겪어야 돼요. 

우리 집에 7년째 동거하는 것이 있어요. 쥐입니다. 안 나갑니다. 동거할 수밖에 없어요. 나가지를 않아요. 어떤 좋다는 쥐약, 시골장터 돌아다니면서 갖다 써도 아무 소용이 없어요. 이제는 포기했습니다. 언제 그 소리를 안 듣게 될까? 내가 죽을 때는 그 소리 안 듣겠지요. 

우리 안에 쥐가 있습니다. 부탁하기는 안 믿는 내가 쥐가 되기를 바랍니다. 믿는 내가 쥐 되면 안 되지요. 안 믿는 것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생산된 것이 뭐냐? “피로 말미암아”를 날마다 확인시켜 주는 겁니다. “나 성도되었다. 나 성도다.” 이게 아니라. 그것은 또 성도가 실체노릇 하고 있으면서 거들먹거리고 있어요. 까불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게 아니고 우리는 흔적, 피로 말미암아 죄사함, 이게 비밀이고, 이게 예정된 비밀이고, 그 비밀은 그리스도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로 통일되는 거예요. 죄 없는 자끼리의 모임이 통일이거든요. 그렇다면 “그 피로 말미암아”가 “나의 노력으로 말미암아”와 계속해서 갈등과 투쟁을 일으키는 겁니다. 

나의 착함으로 말미암아 내가 산다, 내가 조심조심해서 인생 산다, 이것과 갈등을 일으키는 거예요. 그럴 때 결국은 누가 승리하겠어요? 내가 살고자 할 때는 걱정, 근심, 염려가 안 되는 것이 없어요. 

거듭나지 못한 내가 교회 와서도 거듭나려고 “복음 알아야 됩니까? 기도는 얼마나 해야 되고 헌금은 얼마나 해야 됩니까?” 하고 맨 날 거듭나려고 노력하는 이 모든 쓰잘떼기 없는 짓거리를, 소용없는 짓거리를, 거듭난 나가, 하나의 흔적이, 가짜 실체를 계속해서 공격하고 구박할 때 그 때 뿜어져 나오는 것은 사도바울처럼 하나님의 비밀만 증거 하게 될 거예요. 

막달라 마리아(요 12:3)가 울면서 모든 것을 버릴 때 슬프기도 하지만 얼마나 그 여인이 불가능한 일을 하겠어요. 이처럼 성도 안에는 내가 어떻게 할 필요도 없는 불가능한 일이 계속해서 투쟁이란 이름으로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을 때 그러한 것을 통해서 주님께서 그 안에서 자기의 피의 죄사함이 실제사항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이제 한 마디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갑시다. 오늘 동영상이 두 번 끊겼습니다. 신경이 많이 쓰였는데 주께서 알아서 하시겠지요. 에베소서 1장 7절에 보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 이해가 되지요. 하나의 단지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능력이 더 세지요? 이해되시지요?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 우리는 우리 안에 뭐가 있다? 쥐새끼가 있다는 거예요. 죄가 있다는 거예요. 죄가 있어도 괜찮아요. 왜? “그의 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는 날마다 죄지을 수밖에 없는, 다시 말해서 고집스럽게 내 실체를 주장할 수밖에 없는 현상이 덩달아서 일어나는 이것조차도 그리스도 안에서 필히 일어나야 될 통일인 것을, 통일의 흔적이고 현상인 것을 우리가 감사히 받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속았습니다. 역사에게 속았고 어떤 환경에 속았습니다. 소멸하는 흔적한테는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것인데 왜 거기에 집착했는지. 주여, 금지된 입장에서 집착이 소용없음을 저희들 깨닫고 그렇게 하신 것조차 예수님의 피만을 증거 하는 하나님의 통일적인 노력인 것을 이제는 수긍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