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강-엡 1장 15-18(사도의 기도)19010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1장 15-18절입니다. 신약성경 310페이지입니다.
에베소서 1:15-18
“이를 인하여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아니하고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지난 시간까지 하나님의 예정에 대해서 사도가 편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사도가 성도를 위해서 기도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정하신 것과 그리고 그 예정하신 내용이 10절에 나와 있듯이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었다면 우리가 구태여 기도할 이유가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 우리네 논리의 결론이지요.
기도해봤자 이미 결정 난 일인데 기도를 추가할 건더기가 없지 아니하냐, 라는 생각을 갖게 될 것입니다. 기도라는 것은 어떤 변화를 추구하는 것인데 변화를 추구한다는 것은 어떤 것이 미완료일 때 그 미완료된 부분을 우리가 기도함으로서 보충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이미 모든 것이 창세전부터 예정되어 있고, 확정되어 있고, 결정되어 있고, 그 결정된 내용은 이미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어 있다고 이미 나와 있는 입장이거든요.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었다는 말은 고린도후서에 보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그리스도에게 다 적절했다는 뜻입니다. ‘노’가 아니고 ‘예스’가 된다는 것, 합력해서 선을 이루도록 했기 때문에 하자 없이 일을 진행시키는 것이 예수님의 솜씨라는 것이 벌써 드러났습니다. 인간이 낄 자리가 전혀 없지요.
낄 자리가 전혀 없는데 오늘 본문 16절에 보면 “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아니하고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사도가 기도를 한다는 겁니다. 모든 것이 마무리가 되었으니 더 이상 기도할 것이 없지 아니합니까, 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지요.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복음을 믿지는 않았지요, 복음을 들었지요.
복음을 믿는 것과 듣는 것은 차이가 나니까. 복음을 듣고 저에게 하는 이야기가 “그러면 목사님, 기도할 것이 없네요.”라고 한 거예요. 복음을 믿은 것이 아니고 듣고 “그러면 기도할 것이 없네요.” 그리고 “실제로 생활을 하는 중에 점점 기도가 줄어듭니다.”라는 이야기를 해요. 기도가 줄어드는 것이 그렇게 불안하십니까?
기도의 시간 게이지가 내려가는 것이 그렇게 안타깝습니까? 기도의 시간게이지가 내려간 것에 주시하지 마시고 그 내려간 만큼 이쪽이 올라간 것을 생각해야 되거든요. 이쪽에 압력을 주면 저쪽이 올라가게 되어 있는데 올라간 것은 이야기 안하고 내려간 것이 불안불안하다는 거예요. 기도를 점점 안하게 되니까 이래도 되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런데 사도는 하나님의 예정을 이야기하면서도 오늘 15절에서 기도한다고 되어 있거든요. 모순이 없어요. 하나님이 예정한 것과 기도를 하는 것과 모순이 없는데 왜 일반인들은 모든 것이 예정되었으면 내가 기도할 건더기도 없다고 생각해야 그것이 맞다고 여겨지느냐? 그것은 복음의 이해에 대해서 착오가 일어난 겁니다.
복음을 듣기는 들었지만 내 속까지 복음이 안 들어오니까, 나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니까 하나님의 예정을 그냥 주워 먹으려고 하는 거예요. 사도는 복음을 주워 먹는 사람이 아닙니다. 소유한 사람이 아니에요. 자기가 복음과 함께 움직이고 있는 사람입니다.
흔히 세상 교회에서 말하기를 “기도라 하는 것은 호흡이다”라고 하고 또 기도는 ○○이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들 하는데 호흡하지 않으면 사람이 죽는 것처럼 기도하지 않으면 사람이 죽는다는 거예요. 죽어야지요. 기도가 호흡이 아니고 기도는 호흡을 멈추고 난 뒤에 등장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자기 살 의지가 박탈되었음을 감지하고 비로소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 기도에요. 죽은 자의 자격으로 할 수 있는 것이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죽지 아니하면 내 욕심이 살아 움직이기 때문에, 기도라는 이름으로 내 욕심이 가동되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의 예정하심, 그리스도의 통일을 모독하게 되는 겁니다.
사람이 제대로 안 죽었기 때문에 점점 기도가 줄어드는 것을 가지고 불안불안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일을 다 하면 안돼요. 왜냐하면 내 기도가 사라지기 때문에 걱정되는 거예요. 약간은 내가 할 몫은 남겨둬야 내 기도로 말미암아 내 소원이 이뤄지는 그 재미도 있어야 되지 않겠느냐,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지금 여러분 듣는 표정 보니 ‘별 기도할 마음도 없습니다.’라고 하는 것 같아요. 이 이야기가 상당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왜 중요한가 하면, 성경을 말하지 않고 교회에서 교인들이 남을 모방을 하는데 기도하는 것부터 모방하는 거예요. 기도 열심히 하면 신자라고 쳐주더라, 하는 그것이 유행이 되어버렸어요.
성경에서 사도가 하는 기도는 어떤 근거에서 나오는 기도라는 것은 생각도 못하고 그저 예배시간에 들은 장로들의 기도, 그 장로의 기도가 교인들의 기도의 모델이 되고 말았어요. 교과서처럼 해서 누구에게 기도를 시켜도 똑같은 기도가 나와요. 당회로부터 어린아이, 남북통일까지 다 나와요.
왜 그렇게 모방하느냐? 모방을 해야 신자로 쳐주니까. 그런데 오늘 에베소서에 나오는 너희라는 것은 그냥 교회 놀러 다니는 사람보고 사도바울이 ‘너희’라고 하지를 않습니다. 에베소서 시작하고서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에베소서에 나오는 ‘너희’라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너희에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죽었는데, 분명히 죽었는데 주께서 살려준 사람의 등장, 구약으로 하면 ‘하나님의 아들들’ 그 사람을 말하는 거예요. 뭘 근거로 해서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느냐 하면, 사람이 복음의 능력밖에 있을 때는 독자적으로 살아가요. 자기절대자로 살아간다고요. 그런데 에베소서의 성도는 그냥 성도라 하지 않고 ‘예수 안에서의 성도’라고 되어 있어요.
횟집에 가서 회 뭘 로 떠 드릴까요, 해서 광어로 해달라고 하면 광어를 뜰채로 뜨잖아요. 뜰 채 안에 있는 성도, 그리스도라는 뜰 채 안에서 뜨인 그 안에서의 성도. 따라서 성도는 홀로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런 말이 있잖아요. 파도치는 것이 바다의 일이라고. 안 웃는 것을 보니 아무도 안 본 모양입니다. <남자친구> 그 드라마 아무도 안 보는 모양이에요.
파도가 바다의 일이에요. 그리고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나의 일이고. 이걸 어느 시집에서 따온 모양입니다. 기도라 하는 것은 네트워크를 말합니다. 주님 안에서 움직이는 네트워크에요. 네트워크의 특징은 뭐냐? 이게 빈 공간으로 되어 있어요. 얼기설기 뚫린 빈 공간으로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구멍과 구멍들의 연결이에요.
우리는 구멍과 구멍을 형성하기 위해서 구성된 네모지게 생긴 그 선 위에 있거든요. 그러면 거기서 해야 하는 것은 뭐냐? 그 구멍을 증거 하는 겁니다. 성도라 하는 것은 성도 본인의 존재를 위해서 성도가 존재하지 않고 성도는 어떤 구조의 일부가 된다는 거예요. 그 구조가 해야 될 것은 뭐냐 하면, “모든 것을 다 이루었습니다. 예정되었습니다. 통일되었습니다.”를 증거 하는 용도가 성도의 용도에요.
성도되기 전에는, 내가 어떻게 시작하느냐, 내가 뭐냐, 내가 어떻게 구원받느냐, 그게 교회 나오는 목적이었는데 이제는 나라는 것이 내가 하지도 않은 일에 말려들었다는 것을 내가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도로서 교회 나오고 기도하는 겁니다. 사도가 예정된 자라도 늘 기도하잖아요. 기도라 하는 것은 늘 해야 될 이유가, 날마다 끌어 오르는 자기 자신을 철거하기 위함입니다.
그 하나님의 성령이 나오는 구멍을 본인이 육신이 있으니까 막아버리거든요. 주님이 하신 일을 가로막지 않도록 막혀 있는 그것을 철거하는 일, 철거하기 위해서 항상 예수님께 복귀하는 그 정신적운동이 기도라는 겁니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기도는 성도의 일이에요. 왜? 한 덩치로서 같이 주님이 현존해서 살아 움직인다는 것을 기도로소 보여주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모든 삶 자체가 기도하는 삶이라고 볼 수가 있어요. 여러분도 알다시피 모든 기도의 원형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 안하고 일을 시작한 적이 없어요. 그리고 일 자체도 기도의 연장이었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유대인과 대화하는 장면이 나와요. 그 대화하는 장면에서 예수님이 충격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나를 믿지 말라고 합니다. 나를 믿지 말라.
너희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으로서는 너희들이 나를 안 믿는 것이 자기의 실상에 부합한다는 거예요. 나 자신이 이것밖에 안 돼, 라고 하는 가장 정확한 태도는 뭐냐? 나는 당신을 못 믿겠습니다, 하는 거예요. 믿을 수가 없어요, 하는 그 이야기. 믿지 말라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유대인에게 믿지 말라는 것은 유대인에게만 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인간을 대표로 해서 유대인에게 한 거예요.
그런데 오늘 본문 15절에 보면 “이를 인하여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믿음이 여기에 나와요. 그러니 이것은 ‘믿지 말라’에 충실해야 됩니다. 믿지 말라, 에 충실해야 그 다음에 예수 안에서 새롭게 제공된 그 믿음이 너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님에 충실하기에 그렇습니다.
더 쉽게 이야기하면, 예수를 믿지 않음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그 이유를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절대적인 진리와 절대적인 신을, 하늘나라를 찾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노력하기 위해서는 관찰해야 되고 그 사람을 분석을 해야 되겠지요. 예수님이 메시아라는데 과연 그럴까? 분석해 가는 겁니다.
그런데 분석을 당하는 그분이 분석하는 인간에 의해서 자진해서 죽어버렸어요. 실험실에서 연구원이 시료를 가져다놓고 현미경으로 분석을 하려고 하는데 시료가 된 자기 자신을 연구원이 본다는 이유 때문에 시료가 알아서 죽어버린 거예요. 분석하지 말라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가 뭐냐 하면, 인간 쪽에서는 절대 진리를 찾으려고 하고 절대구원, 어떻게 하며 하늘나라 가고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믿으면 잘 믿는 겁니까, 어떻게 행동해야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습니까, 모든 인간의 열의, 살고자 하는 그 열의, 그 열의를 품고 예수님께 접근할 때 그 접근 자체가 예수님께 와 닿으면서 그것이 예수님의 죽음을 야기한 거예요.
본디오 빌라도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하는데 그 진리가 무엇이냐의 대상이 되는 예수님이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어요. 죽임을 당했다는 말은 네가 진리를 알기 위해서 어떤 시도를 해도 나는 네 한계 밖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게 십자가의 의미에요. 믿지 말라는 그 말이에요. 너는 믿을 입장이 못돼는 거예요.
아무리 진리를 알려고, 복음을 알려고, 천국을 알려고 애를 쓰는데, 이미 멱살 잡고 흔드는데 멱살을 너무 세게 잡았는지 멱살 잡힌 분이 죽어버렸어요. 이야기를 해야 될 그 당사자가 멱살 잡힌 채로 죽었다는 말이지요. 이야기를 해야 될 분이 죽어버렸으니까 인간은 산채로 죽음을 능가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압니다. 산채로는 진리를 모른다. 산채로는 천국을 모른다. 산채로는 구원을 모른다는 거예요. 그 원인과 이유가 바로 너에게 있다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가 혼자 있는 것 같지만 혼자 있는 것이 아니에요. 악마와 함께 있는 거예요. 악마와 함께 있다는 것을 인간은 일체 인정하지 않아요.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가 뭐냐? 그것은 창세기 3장에 선악과 따먹은 이야기가 나오지만 인간은 근원적으로 신에 대해서 기분 되게 나쁜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나의 태어남과 나의 인생에 대해서 나의 선택권을 일체 허용하지 않았다는 것이 인간으로서 두고두고 영원한 인간의 수치가 되는 겁니다.
“신이시여, 왜 내 의견도 안 물어보고 나를 태어나게 했습니까? 왜 나를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게 했습니까? 재벌 집에서 태어나게 하지. 그게 영원히 앙금처럼 우리 속에 남아 있는 거예요. “나는 남자로 태어나고 싶은데 여자로 태어났습니까?” 혹은 “나는 여자이고 싶은데 왜 남자로 태어났습니까?” 또 “왜 일곱 살에 아버지는 돌아가시게 했습니까?” 이런 것들. “왜 나를 대학시험에서 떨어져서 재수하게 했습니까?” 이런 것. “군대 갔는데 왜 후방으로 안 빠지고 전방에, 화천, 인제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 하는 그 동네, 103보라는 그 동네로 가게 했습니까?”
인간에게는 근원적인 분노 같은 것이 있어요. 그 분노가 신에 대한 분노인데 왜 내 인생을 스스로 돌아보기에 수치스러운 존재로 만들어놓았느냐 하는 거예요. “나는 그러고 싶지 않는데, 나는 독자적으로 영광스럽고 싶은데, 내가 내 인생에 만족스럽고 싶은데 왜 허락도 없이 나를 만들어놓았습니까?”
그게 바로 대대로 내려오는 악마의 심보에요. 인간의 그 수치를 감추기 위해서 신을 도입합니다. 그게 교회에요. 영원한 수치를 감추기 위해서, 덮기 위해서. 신을 믿고 거기에 수반되는 여러 가지 것들, 기도나 헌금을 동원시켜서 교회 다니기를 하고, “나는 주님을 좋아하고 싶어용~. 사랑하고 싶어용~.” 속은 부글부글 끓으면서. 구라를 떨어요, 구라를.
기도는 뭐냐 하면, 하나님의 침묵에 대해서 수다로 메우는 것이 기도에요. 우리교회 교인들 다른 교회 다닐 때는 기도 얼마나 잘했는지 몰라요. 우리교회만 오면 다 침묵이 되고 말아요. 기도하면 10분 이상씩 달달 나오는데 여기만 오면 스톱이 되어버려요. 가짜를 진짜로 위장하기 위해서 신이 필요했던 겁니다. 속에 있는 자기의 우상성을 감추면서.
그래서 악마의 대처능력, 악마가 준 아이디어가 뭐냐 하면, 네가 선하면 된다는 거예요. 선하면 어떤 종교라도, 어떤 신이라도 선한 자를 지옥에 내치지는 않을 것이다, 하는 가능성을 근거로 해서 선악사고방식을 심어놓았습니다.
그렇다면 그 선악을 심어놓고 이미 악마가 동행하고 있으니까 심겨진 선악을 갖고 있는 입장에서 주어지는 나의 구원, 나의 천국, 그리고 나의 의로움, 나의 예정, 태초에 창세전에 예정되었음, 구원받기로 확정되었음, 그 예정론이라는 이 모든 것도 어디부터 시작이 되었느냐? 나한테 선악이 있다는 그것이 시발점이 되어버렸어요.
나는 착하니까, 나는 선하니까. 그것부터 시작합니다. 선하니까 예정했겠지. 선하니까 구원했겠지. 선하니까 천국 넣어주겠지. 그러니까 그 사람들의 기도 속에 나의 착함을 증명하고 정당화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어요. 남들은 기도 안하는데 나는 기도하고, 남들은 우리나라의 발전을 위해서 기도 안하는데 나는 기도하고, 모든 기도 내용을 뜯어보면, 착한 나부터 시작이 되고 있어요.
그렇게 시작된 이것은 우리 선배가 있습니다. 그 선배가 바로 유대인들입니다. 주님은 그 유대인들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날 믿지 말라고 했어요. 어디서 가짜 여호와를 거론해서 날 믿으려고 하느냐고. 너희들이 전혀 모르는 아버지를 나만 알고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만이 알고 있다. 유대인들은 신의 현존을 인정합니다. 신의 현존, 신이 실제로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 예수님은 거기에다 한 마디 더 얹습니다. “악마가 현존하겠지. 너의 아비는 악마다.”
예수님께서 그런 멘트를 계속 내지르고 내뱉는 이유는, 제발 나 있는 곳에 따라올 생각을 말라는 거예요. 열 두 제자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네 주제도 모르면서 어떻게 나 있는 곳에 너도 같이 있으려고 하느냐? 내가 가서 처소를 마련하면 그 때 성령을 통해서 나 있는 곳에, 데려가도 내가 데려간다는 거예요. 그게 17부터 나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여기서 ‘정신’이라는 말은 ‘영’이에요.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라고 되어 있지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너희들은 육으로, 너희들의 노력으로 결코 예수님에 대해서, 영광의 아버지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고,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라고 했으니까 하나님께서 성령을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면 너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계시도 알지 못하고, 그 다음 18절에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라고 되어 있으니까 너희 눈은 지금 어두워져 있고,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라고 되어 있으니까 너는 부르심을 받아본 적도 없고, 라는 뜻이에요.
여러분이 믿지 않아야 돼요. 우리 자신이 믿는 예수님이나 하나님을 믿지 않아야 된다고요. 믿지 않으려면, 신앙이 없으려면 그냥 가만있으면 안 되고요. 노력을 해야 돼요. 노력을 해야 예수를 안 믿을 수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냥 있어버리면 가짜 예수든 가짜 하나님이든 교회 다니는 티를 낸다고 자꾸 자기긍정에 나섭니다.
나는 믿는다, 믿는다, 믿는다. 치매 걸리면 안 믿겠지요. 자꾸 예수를 믿는다고 되어버리면 어디에 그게 부착이 되느냐? 참 이런 것이 어려운데요. 악마가 시작했기 때문에 내가 있기 전에 선악체계가 먼저 있어요. 선악체계가 들어온 순간 비로소 나는 새로 시작되는 겁니다. 나는 선악체계 오기 전까지는 나는 없는데 선악체계가 들어서면서 나라는 것이 발생되는 거예요.
이것은 오늘 정신분석학자들이 밝혀낸 사실입니다. 어린애들이 자아의식이 언제 생기느냐 하면, 아버지 어머니가 잔소리를 하는 그 순간 ‘이것은 나쁜 것, 이것은 옳은 것, 이것은 해도 되고, 이것은 안해야 되고……’ 하는 순간 비로소 거기에 대상으로서 자아가 맞추기 위해서, 그 지시와 명령을 명령답게 현실화시키기 위해서 자아가 만들어져서 거기에 결부가 되면서 자아가 생기는 거예요.
‘나는 엄마 아빠가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의미로서 드디어 자아는 시작되는 겁니다. 내가 아빠 엄마의 말을 들어줬기에 엄마 아빠는 내 생존에 대해서 충분히 책임지겠지, 라는 의식이 시작되는 거예요. 그래서 젖 안주고, 밥 안주고, 그러면 땡깡 부리지요. 자기가 맡긴 적이 있는가? 있어요. 아빠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하는 조건하에 자아가 발생되었으니까 이것은 아빠 엄마가 책임질 자아가 되는 거예요.
이게 선악이에요. 책임진다는 말은, 나는 나쁜 아이가 아니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좋은 사람 되기는 굉장히 쉬워요. 그러나 나쁜 사람 되려면 노력해야 돼요. 노력하지 않으면 나쁜 사람이 될 수가 없습니다. 부모 효도하는 것은 굉장히 쉬워요. 돈만 있으면 효도 하지 말래도 합니다. 그러나 불효한다는 것은 정말 보통 노력 아니면 불효를 못하게 되어 있어요. 아는 사이니까.
터키에 가면 관광이벤트 중 하나가 새벽 5시에 열기구 타고 올라가는 것이 있지요. 수백 개가 올라갑니다. 그것 타려고 터기에 많이 가거든요. 거기서 빈번하게 사고가 나요. 헬륨가스가 잘못되어서 추락하기도 하고요. 거기 왔던 외국 관광객들이 다치기도 하고 죽기도 하고 그래요. 착륙할 때 실패도 하는데 바람의 난류가 어쩌고저쩌고 핑계를 대거든요.
지금 사도가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예정된 모든 기업, 상속분을 주고 구원을 주려면 성령의 뜻에 의해서 진행이 된다고 해요. 그러려면 예수님이 가신 그 코스를 비켜갈 수는 없는 겁니다. 산채로 그대로 복음을 믿어버리면 이것은 뭐가 되느냐 하면, 구원받은 내 모습이 지금 살아 있는 내 모습의 연장선이 되어버려요. 이것은 완전한 사기입니다. 가짜에요.
살아 있는 내가 예수 안다는 지식 하나 확보해버리면 교회는 학원이 됩니다. 한수 배운 것이 돼요. 그렇지 않아도 교회라는 이름의 학원이 많기는 합니다만.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가신 코스를 그대로 밟게 하는 업무가 성령이 하시는 일이에요. 제가 지난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성령이 하는 일은 삭제하는 일이라고. 지워버리는 일을 해요.
지워버린다는 말은, 우리 존재의 의미, 존재의 가치가 없음을 왜 네가 모르느냐고 다그치는 일을 말합니다. 사람은 자기가 살아 있게 되면 어떤 열의가 있느냐 하면, 성공열의가 있어요. 한꺼번에 모든 것을 만회하려고 합니다. 왜 자꾸 뭔가 자기가치를 만회하려고 하느냐? 현대인들의 특징은 자기 자신을, 자기 몸을 바칠 곳이 없어요.
현대인들은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데 자본주의사회는 모든 인간을 도박꾼으로 다 만들어놨습니다. 뭘 해도 도박이에요. 조그만 자영업을 하든, 농사를 짓든, 심지어 개척교회 목회를 해도 전부 다 이것은 도박입니다. 한 방으로 만회가 가능한 구석을 찾아다닙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그만큼 맘 둘 고스, 몸 둘 곳을 찾지를 못했다는 말입니다.
내 목숨을 바쳐도 나는 괜찮아요, 할 곳을 찾지를 못한 거예요. 마치 북극해 돌아다니는 유빙 같아요. 정착지로 올라오지를 못했어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원래 인간은 선악에 꽂히지 말아야 될 인간이에요.
인간은 있을 곳이 아닌 곳을 점유하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왜 자꾸 이렇게 성공해야 되고 꼭 살아야 되느냐? 자꾸 승부를 만들어서 거기서 자기를 성공자로 변신시키는 노력을 굉장히 많이 하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의 특징이 그래요. 아침에 눈 떠서 저녁에 눈 감기까지, 꿈 속에서까지 생각하는 것이 뭐냐 하면, 게임에서 승리해야 된다는 겁니다.
집에 있으면 전화 하루에 두통, 세통도 와요. 부동산 좋은데 있으니 투자하라고. 모든 것이 투자처에요. 저에게까지 전화가 오는 이유가 벌써 ‘세상 사람들이 그런 것을 원하고 있잖아요.’ 하는 식으로 그런 전화가 오는 거예요. 인생은 한 방이라는 것, 한 방 잘만 만나면 그것이 당신 인생에 영원한 중심부가 되고 중심핵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한 방 잘 터지면.
만약 어떤 사람이 허름한 우리 집을 한 백억에 산다고 해보세요. 허름한 우리 빌라를 백억 주고 산다고 해보세요. 내 손에는 백억이 있다. 그리고 세월이 한 십년, 이십년이 지났다 해봅시다. 그러면 나의 인생에서의 획기적인 중심부, 획기적인 사태를 뭘 로 보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나의 허름한 집을 백억 주고 샀다는 것. 현빈이가 백억 주고 내 집을 샀다는 그런 식이지요. 그게 나의 중심부가 될 거에요. 내 팔자가 폈던 돌발적인 일이니까요. 나한테 어떤 중심부가 있다는 그것이 나로 하여금 영원히 악마의 노예로 살게 만드는 속임수에 넘어갔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나에게 결정적인 사건, 나를 좋게 했던 사건이 있었다는 것, 그것이 도리어 나에게 올무가 된다는 거예요.
그런 것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왜냐하면 나라는 것은 애초부터 없어야 되는데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나는 졸지에 백억의 가치가 있는 존재로 탈바꿈했기에 그래요. 지금 여러분이 가치 있다 생각할 때 여러분을 가치 있게 한 그 사건이 있을 거예요. 여자 같으면 결혼 같은 것. 남자 잘 만나서 팔자 폈다는 그런 것.
우리교인은 해당사항 없습니다만. 남자 하나 잘 만나서 사업성공해서 지금까지 해변 놀러 다닌다는 그런 것들. 그게 여러분으로 하여금 행운을 맞은 것이 아니고 영원히 저주의 벼락을 맞은 거예요. 그런 정신이 깔려 있는 채로서 오늘 본문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이 땅에 살다가 지옥가거나 천국에 가거나 둘 중 하나 간다고요. 그게 자기 자신을 너무나 모르고서 하는 소리에요. 이 땅에 살다가 지옥에 가거나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고 이 땅에 지옥살이 하다가 지옥 가는 거예요. 지옥살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가치 있다고 여기고 나는 살만한 이유가 있다고 여길 때 그게 본인에게 점점 더 지옥의 힘으로 압박하는 것, 살아야 되기에 죽는 것이 겁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저는 자아에 대한 봉쇄라 하는데 인간은 스스로 자기를 선하게 봐서 자기선악으로 만든 펜스로 자기가 자기를 점점 더 압박해요. 선해야 되는데. 그건 다른 말로 솔직하게 하면 ‘살아야 되는데’ 그 말이거든요. 살아야 되는데. 같은 말이 ‘나는 선한데. 나는 착한데.’ 그런 뜻입니다.
선하고, 착하고, 선하고, 착하고, 그럴 때 나는 더 살고 살아야 된다는 그것이 선악구조에 의해서 만들어낸 자아고 그 자아에 의해서 우리는 평생을 악마에게 농락당하고 있는 거예요. 성령이 왔다는 말은, 이미 너는 감지하지 못하지만 네 곁에 너는 악마와 함께 살고 있다는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요, 17절 이야기가 필요치 않아요. 계시의 정신, 계시의 영, 성령을 너희에게 주사. 성령을 주실 이유가 없다니까요. 하나님께서! 문자 알겠다, 성경 천 독도 만 독도 할 수 있는데 학교에서 글자 배웠겠다, 한글로 되어 있겠다, 이것 참고로 해서 살아있는 나를 더 산채로 천국 보내면 되지 않겠느냐, 그게 종교라는 것인데 그런 생각을 왜 우리는 마다하겠어요?
우리가 하는 일이 뭐냐 하면, 그 근본을 따지고 보면 예수님과 결별된 상태에서 우리가 지금 종교생활 하고 있는 거예요. 이미 나는 선악체제로 무장되어 있기 때문에 거기서 믿음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면, 믿는 것은 착한 일이고 안 믿는 것은 나쁜 일이야, 이렇게 정리해요. 하나님 사랑하라고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착한 일이고 하나님을 안 사랑하는 것은 나쁜 짓이다. 나쁜 짓은 지옥가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천국 간다.
그게 바로 저주라니까요. 그게 지옥이 주는 저주에요. 기도하라고 나오면, ‘사도도 기도해서 천국 갔기 때문에 나도 중보기도해서 우리 집안 몽땅 천국 보내서 천국 가서 예수님에게 상급 많이 받아야지.’ 이것은 정박아도 아니고 정신지체인지 뭔지. 살아 있을 때 기도해서 복 받고 죽어서는 천국가고.
이것은 정박아들 모독하는 것도 아니고. 꼭 정박아처럼 그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치매 걸린 사람들이 그런 생각하는 거예요. 그것이 동물적인 본성 아닙니까? 살아있는 것을 더 살게 하겠다. 그것을 충동이라 하는데. 이번수련회에서 충동 이야기할 거예요. 마귀는 떼놓고 보면서, 나는 선악으로 무장되어 있어요. 그것을 충분하지 아니한가, 하고 사람들은 외치고 있습니다.
“나 양심 있어. 나 양심 있다고! 나름대로 나는 신념이 있어.” 그걸로 충분하지 아니한가, 하는 거예요. 이번에 양심적병역거부자들 군에 안가고 교도소에 근무하게 한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누구는 양심 없나, 해서 이름을 바꿨답니다. 양심대신 종교라는 이름을 넣어서 고쳤답니다. 누구는 양심이 없나, 하는데 양심이 있어서 그게 저주가 되는 거예요.
그 양심은 의미 없는 거예요. 이 세상은 무의미한 겁니다. 우리는 구멍이라니까요. 아무것도 없어요. 구멍에서 성령의 바람만 불어야지 딴 게 나오면 안 됩니다. 그런데 선악 이것이 가로막고 있는 거예요. 악마가 가로막고 있어요, 주의 성령을. 영적전쟁을 벌이고 있는 겁니다. 성령이 바람 좀 불자고 하면 우리는 말하기를 “나도 알 만큼 압니다. 나도 뭐가 착한지 그 정도는 압니다. 양심이 있으니까.” 이러고 있다는 말이지요. “저에게도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있습니다.”
그게 화근인데요? 나에게 뭐가 있기 때문에, 자아가 내 중심, 핵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나의 구원을 방해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나를 지옥으로 몰아넣고 있는 겁니다. 이미 지옥생활 하고 있으면서. 도대체 여러분이 괴롭다고 할 때 뭘 가지고 괴롭다고 하던가요? 여러분은 어떤 때 괴롭던가요?
내가 점쟁이는 아니지만 이야기해 볼게요. 여러분이 괴로울 때는 어떤 경우냐? 양심의 가책이 될 때 괴로워요. 영원히 여러분은 마귀의 종입니다. 열기구는 떨어져야 돼요. 추락이 뭐냐? 타락이 뭐냐? 선악이 가까이 보일 때, 선과 악의 논리가 뚜렷하게 보일 때 그게 바로 타락이고 추락이에요. 창세기 3장에 의해서.
성경 보면서 그게 안보이던가요? 나는 바르게 살아야 되는데, 나쁘게 살면 지옥 가는데. 그게 지금 추락된 상태임을 말합니다. 기도라 하는 것은 사도의 기도가 아니고 주님의 기도입니다. 주님의 네트워크가 우리에게 덮치는 거예요. 덮치게 될 때 믿음 없는 자가 예수 안에서 주님의 믿음에 네트워크를 공유하게 된 거예요.
바다 없이 파도치는 법이 없습니다. 바다가 있기에 파도가 치는 거예요. 어린애들 거울 놀이 있지요. 거울 가지고 그늘에 햇빛을 반사시켜서 빛을 비추잖아요. 성도의 기도라 하는 것은 거울에 불과한 거예요. 거울 아무리 들여다봐도 거기에 태양이 없어요. 태양은 하늘에 따로 있어요.
주님은 태양처럼 있고 우리는 그것을 반사하는 거울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게 바로 기도라는 거예요. 반사하는 것. 주님 때문에 살고 있습니다, 하는 것. 이번기도도 주님 때문에 된 것이라고 반사하는 것. 그게 성도의 기도니까 주님이 살아 있는 한, 성령이 살아있는 한 우리는 매일의 삶, 모든 것에 기도 안할 수가 없어요.
그 기도의 내용이 뭡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하셨습니다. 내가 알 수 없는 일을 알게 하셨습니다. 내가 들어갈 수 없는 나를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나를 죽은 자로 다루시되 주님의 살아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죽은 나를 계속 살려내고 있습니다.”라는 그 고백, 그게 기도의 내용으로서 전파되고 그렇게 주님의 현존을 증거 하는 거예요.
그러면 옛날에는 어떻게 했는가? 옛날에는 “내가 선과 악을 압니다. 나도 양심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날 무시하지 마세요. 15년 전에 내가 사업 크게 했습니다. 그 때부터 새인간 되었습니다.”라고 중심핵을 내가 잘된 일, 성공한 일을 가지고 잡다 보니까 옛날에 성공했기 때문에 지금도 성공해야 된다는 거예요. 성공열의가 대단해요.
왜? 모든 것이 하나의 게임이니까. 게임에서 승자가 되어야 되니까. 그래야 나에게 존재의미가 있으니까 그런 거거든요. 승리하려면 착해야 되고, 착하려면 성경보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면 된다는 거예요. 지옥이 따로 없습니다. 선악이 있는 이상은 지옥이 있습니다.
지난 낮 설교에서 이야기했듯이 성령께서 펜치 들고 선악의 뿌리까지 이빨 뽑듯이 다 뽑아낸다 했지요. 날 무시하지 마라, 라고 하지만 주님께서는, 너를 무시하는 일이 바로 네가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는 일이 되는 거예요. 매일같이 무시당하는 즐거움. 어느 정도로 무시당해야 되느냐? 죽어도 좋아요.
왜?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내가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아무리 깊고 깊이 파헤치고 생각해봐야 나오는 것은 그동안 나잘남에 속아 넘어간 서글픈 과거만 자꾸 튀어나옵니다. 죽어도 여한이 없는 삶, 그게 성도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는 죽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목사님이 아무리 그래도 저는 죽는 것이 무섭습니다.” 하는데 제가 분명히 장담합니다. 인간은 죽지 않습니다. 죽는 것은 문턱 넘는 거고요. 요한복음에 나오지요. 죽은 자를 주님의 힘으로 무덤에서 다시 살려냅니다. 죽지 않기에 인간은 저주스러운 거예요.
살다가 범죄 저지르고 자살하면 그만인 것 같지요. 안 죽으니까 문제가 되는 겁니다. 우리 인간은 주께서 만들었습니다. 안 죽는 존재로 만들어놓았습니다. 따라서 해야 할 것은 뭐냐?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안 죽는 존재인지, 아니면 악마와 더불어 지옥에서 영원히 안 죽는 존재인지? 그것은 창세전에 이미 주님께서 했던 바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그 일을 살아가는 우리를 통해서 파도로 사용하십니다. 올해는 주님의 바다에서 늘 철석거리는 파도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힘으로 살아 있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뭔가 인생 한 방에 보상받고 만회하기 위해서, 잘난 나를 계속 살리기 위해서 헛된 노력으로 저주스러운 일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동안 우리를 괴롭혔던 것들이 실상은 악마의 후광을 받고 악마에 의해서 주님이 봉쇄당한 처지에 있었다는 것을, 이제는 빠져나와서 그 바깥에서 마음껏 볼 수 있도록 저희들의 눈을 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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