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강-엡 1장 11-12(기업)18122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1장 11-12절입니다. 신약성경 310페이지입니다.
에베소서 1:11-12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오늘 본문에 ‘기업’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그 기업이라는 단어는 성경 갈라디아서 3장에서는 ‘유업’이라고 나와 있어요. 유산이라 보면 됩니다. 혹은 상속이라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10절에 보면,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라고 해서 하나님께서 원하는 대로 세상을 꾸려나가고 있는데 그 일이 구약 때부터 벌써 시작되었습니다. 창세기부터 시작되었거든요.
구약 때 나오는 용어가 ‘기업’이라는 겁니다. 구약 때 나오는 기업이라는 단어, 상속, 유업이라는 단어를 사도바울이 에베소서 1장 11절에 집어넣은 것은, 성경을 볼 때에 이미 구약 전부 다를 하나님의 일하신 것이라고 봤고 그 안에 풍덩 뛰어들어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골라서 뽑아내는 것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내 맘에 맞는 구절 뽑아서, 이것은 내가 가져야지, 가 아니라 말씀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우리가 그 말씀에 의해서 여기에 출몰된 거예요. 그리고 10절에 보면, 지난시간에 했지만, 이 세상 태어난 그 모든 것이 목적이 있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되어 있어요.
통일이라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더 이상 진전이라는 것이 필요 없고 그리고 인간 나름대로 더 이상 기대하는 것이 필요치 않다는 뜻입니다. 만약에 인간위주 같으면 우리에게 나름대로의 포부 같은 것이 있거든요. 뭔가 기대하고 노리는 것이 있어요.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저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2018년도가 다 지나갔고 2019년도에는 이런 교회, 이런 가정, 이런 사업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기대하는 것이 있는데 그러나 성경은, 누구 맘대로 그렇게 하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네 맘 대로지요.
본문 11절에서 “모든 일”입니다. 그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예수님의 원대로, 하나님의 원대로만 되지 너는 빠져, 그런 뜻이에요. 그리고 진전이라는 것이 필요 없어요. 우리가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서 그리스도 안에 합류되고 거기에 빨려 들어가면 그것으로 땡, 입니다. 그것으로 종친 거예요.
나만의 어떤 포부라든지 기대를 가지면 안 되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통일과 그 통일에 의해서 된 생산물, 그 생산물을 가지고 오늘 본문에서 ‘기업’이라고 하는 겁니다. 기업이라 하는 것은 주님의 통일성이 담겨 있는 것, 주님의 완료된 통일됨이 받아들여지는 공간, 그게 바로 기업이라는 거예요.
아주 쉽게 해서 기업이란 백화점입점, 넓은 백화점의 한 공간에 입점한 거예요. 그리고 자기 가게 이름이 아니고 그 백화점 이름으로 말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의 주님은 아니에요. 우리의 주님이지요. 우리의 주님이라고 할 수 있으려면, 제가 설교 처음에 한 것처럼,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모든 것이 주님의 뜻대로 되었다 그 말이지요.
그러면 우리가 중간에 수정하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데 오늘도 그런 소리 하는 사람 있을까 싶어서 본문 11절에 사도바울이 뭐라고 하느냐? “우리가 예정을 입어”라고 했어요. 이미 창세전에 확정되고 예정을 입었다고 되어 있어요.
이 말씀을 사도바울이 할 때에, 너희가 이미 하나님의 상속자입장, 그걸 기업이라 했지요, “하나님의 상속자입장에서 내가 추가적으로, 내 포부대로 하려고 설치지 말고 대체 주어진 풍성함이 무엇이냐를 만끽하는 식으로 인생을 살아가야 됩니다. 그것이 지속적인 하나님의 일이십니다.”라는 뜻이에요.
그것을 본문 12절에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나는 그분의 노래요, 나는 그분의 곡이요, 라는 가사가 있어요. 아바가 불렀던 <안단테 안단테> 라는 노래에 그렇게 되어 있어요. 나는 당신의 음악이요, 나는 당신의 곡조라는 겁니다. “당신이 나를 연주해주세요.” 집에 가서 들어보는 분도 있을 거예요.
천천히, 천천히 다가와요 저를 요리해주세요. 내가 나의 포부와 나의 즐거움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당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나를 만들었으니 마음껏 나를 악기로, 바이올린이나 비올라나 첼로로 사용해서 매일같이 나를 켜주세요. 거기서 주님의 찬송의 곡조가 흘러나오게.
사도바울이 지금 이런 고백을 내놓고 있습니다. 성탄절 단골성경구절로 누가복음 2장에 이런 것이 있어요. 14절에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수동입니다. 기뻐하심을 덤터기로 받은 사람에게는 평화로다. 평화라는 말은, 종결되었다, 완료되었다, 더 이상 염려걱정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에베소서 1장 11절 12절을 대충 설명했는데 이 대목을 보면서 여러분이 ‘아, 기쁩니다. 감사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진다면 저는 좀 시비를 걸고 싶어요. ‘기쁘고 감사합니다. 나는 정말 믿음 크군요.’ 이렇게 나온다면, 제가 설교 처음 대목에서 기업이라는 것이 구약에 있는 용어라고 했지요. 그래서 성급하게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살펴봐야 돼요.
“주님이 나를 다룬다는 것이 고맙습니다. 내 쪽에서 할 것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군요.” 그런 식으로 정리가 될 텐데 과연 이것이 언제까지 갈지, 과연 이것이 나의 진심이라고 해당되는 것인지, 아니면 좋아들 하는 그 밑바닥에 또 다른 흑심이 있는지를 살펴봐야 됩니다. 그것은 구약이 적절한데 좀 관계없다 싶지만 구약 한 대목을 인용하고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신명기 22장 13, 14절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와요. “누구든지 아내를 취하여 그와 동침한 후에 그를 미워하여 비방거리를 만들어 그에게 누명을 씌워 가로되 내가 이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와 동침할 때에 그의 처녀인 표적을 보지 못하였노라 하면.” 신명기 22장에 나오는 율법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아내를 미워해서 누명을 씌운 거예요. 이 여자가 처녀인 표적을 보지 못했노라고 했을 때 율법에 그렇다는 거예요. 그 성읍의 장로들에게 가서 처녀의 아비가, 친정아버지죠, 친정아버지가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내 딸을 이 사람에게 아내로 주었더니 그가 미워하여 비방거리를 만들어 말하기를 내가 네 딸의 처녀인 표적을 보지 못하였노라.”라고 누명을 씌웠지만 “보라 내 딸의 처녀인 표적이 이것이라 하고 그 부모가 그 자리옷을 그 성읍 장로들 앞에 펼 것이요.”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그 성읍의 장로들은 비방했던 그 사람을 잡아서 세 개의 체벌을 합니다. 첫째는, “그 사람을 잡아 때리고” 두 번째 처벌은, “이스라엘 처녀에게 누명 씌움을 인하여 그에게서 은 일백 세겔을 벌금으로 받아 여자의 아비에게 주고.” 즉 그 당시에 양 한 마리가 은 2세겔이니까 양 50마리에 해당되는 벌금을 내게 한다.
세 번째 처벌은, “그 여자로 그 남자의 평생에 버리지 못할 아내가 되게 하려니와.” 이런 세 가지의 처벌이 주어졌어요. 그러면 이 대목을 보면서 우리가 생각하기를, 나도 그런 일이 있다면 이 말씀대로 바르게 해서 돌려받을 것은 돌려받고 처벌받을 것이 있으면 처벌받으면 되겠네, 라고 생각할 거예요.
율법은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닙니다. 뭘 생각해야 되느냐?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 인간이 뭔데 율법이라는 것이 있다고 해서 거기에 신경을 써야 되느냐를,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돼요. 율법, 그 법이 뭔데? 신명기의 이런 법, 처벌이니 뭐니 그런 것은 나중 문제고 나는 나잖아요. 그런데 말씀이 뭐고 율법이 뭔데 우리들이 거기에 신경을 쓰냐 그 말이지요.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이 율법에 신경 쓰자, 라는 것이 인생들,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타고난 본성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말씀드리는 거예요. 인간이 악마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나는 나위주지 말씀위주, 복음위주, 율법위주가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신명기를 펼쳐서 이야기하게 되면, 그걸 개무시하고 ‘그냥 안 들으면 그만이지. 교회 안 나오면 되잖아.’라고 복음 버리고, 말씀 버리고 간 사람이 한 둘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중요하다는 것은 아무리 자기 맘을 이리 펼쳐보고, 저리 펼쳐보고, 어떻게 헤쳐 봐도, 아무리 의심하고, 의심하고, 또 의심해도 나는 내가 더 중요하다는 것, 율법보다, 하나님보다 내가 더 중요하다는 이 사실에 대해서는 부정 못할 일이거든요.
이걸 어떻게 이깁니까? 그래서 ‘교회 안 나오면 되지 뭐.’ 그래서 교회 버리고, 복음 버리고, 말씀에 관심도 없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라 그 말이지요. 그런데 제가 의심스러운 것은, 여러분은 왜 안 버리냐는 말이지요. 그게 의심스러워요.
오늘 본문 보고, ‘하나님이 예정해서 구원되었구나. 상속이구나. 감사하다.’ 이렇게 기뻐할 것이 아니라 그 기뻐하는 것조차도 뭔가 말씀보다 내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나 위주로 아무 연관도 없이 일방적으로 나한테 처바르는 것이 아니냐는 그 말이지요. 페인트칠하듯이. 이것부터 한 번 생각해 봐야 돼요.
우리가, 나는 나를 못 버려도요, 나한테 들러붙어 있는 스티커 같은 것은 언제든지 떼어버릴 수 있는 용의가 되어 있어요. 율법이 먼저가 아니고 내가 먼저에요. 이것은 타고난 거예요. 아담으로부터 그렇게 받은 거예요. 율법이 먼저가 아니라 내가 먼저라니까요. 하나님의 자존심이 먼저가 아니고 내 자존심이 먼저고 우선이에요.
내 자존심이 살 때에만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한 것이지 내 자존심이 지금 깨지는데 말씀이 왜 필요합니까? 숨길 수 없는 사실입니다. 팩트입니다. 교회 올 때 짧은 순간에 그것은 아니라고 우기지만 교회 유리문 밀고 나가서 다음 주일에 다시 올 때까지 내내 우리는 “말씀, 안녕!” 벌써 바이바이 했어요.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 거기에 대해 해답을 제시하겠습니다. 합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말은, 예정된 자라도 그 본색을 그런 식으로, 자기 잘났다는 식으로 갈 수밖에 없는 그것조차도 예정된 자가 보여줄 모습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구약 이스라엘은 실패했어요. 그 나라 망했습니다.
에스라 느헤미야 한 번 보세요. 율법 어긴 자들 다 쫓아냈습니다. 다 쫓아냈으니 어찌 생각하면 나머지 사람들은 이제 율법 지킨다고 여기지요. 그 사람들 다 망했어요. 이 말은 뭐냐? 율법에 보면 안 망하는 사람이 없어요. 그런데 율법은 기능이 그 자체가 그래요. “너는 네가 우선이야. 율법이 아니야. 그게 네 모습이야.”
그걸 도드라지게 노출시키는 것이 율법의 기능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예정하사 주의 뜻대로, 라는 말은 뭐냐? 인간은 버렸더라도, 놀라운 사실은 주님은 안 버렸다는 그것이 놀라운 거예요. 이 현실에서 나는 나뿐이에요.
그런데 주님의 현실에서는 율법중심이고, 복음중심이고, 말씀중심이고, 예수님 통일 중심입니다. 각자 한 고집씩 해요. 한 고집 한다고요. 그래서 성도라는 것이 뭐냐? 개과천선하는 인간이 성도가 아닙니다. 뭐가 성도냐? 난 분명히 내가 우선이에요. 말씀은 뒷전이고 내가 우선인데 내가 우선인 이것은 못 고치는 고질병입니다.
감기 걸리면 몸 아프고, 기침 나고, 눈꺼풀 내려가고, 마스크 써야 되고, 그렇잖아요. 이걸 가지고 증상이라 합니다. 감기 걸린 증상이에요. 주님의 예정하심의 증상이 뭐냐? “나는 말씀이고 복음이고 이스라엘이고 다 귀찮다. 제발 나는 내가 중요해.” 이게 하나님의 예정하심의 증상이에요. 기침이 난다는 말은 이게 별로 안 좋지만 좋든 안 좋든 간에 그냥 증상이라니까요.
12절 마지막에 보면,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 그의 찬송이 되게 하는 그 작업에 있어서 이제는 안 되는 인간을 되게 하시는 그 과정을 주입을 시킴으로서 그야말로 찬송되게 하는 겁니다. 내가 나에게 손질한 것이 없는데 그야 말로 오직 찬송 외에는 나올 것이 없을 정도의 작품이 되도록 주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안 되는 인간을 되게 하셔요. 그러면 그 되게 하는 과정이 뭐냐? 그 과정을 위해서 구약과 신약이 이렇게 길게 두꺼운 책이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책의 내용이 뭔데? 뭐기에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느냐, 라고 묻는다면? 정답은 여자입니다.
왜냐하면 유업이라는 것은 출산을 해야 되거든요. 임신이 되어야 돼요. 특이한 자식이 나와야 돼요. 여자로부터 등장시켜서 주께서 일을 하시는데 그 일하시면서 전체적인 취지부터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첫째는, 죽은 자를 주님께서 마련해요. 두 번째는 그 죽은 자 위에 예수님의 자기 죽음으로 덮어버립니다. 세 번째, 그 덮인 예수님의 죽음에서 생명이 나와요. 이 순서로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예수님이 누구냐 하면, 여자의 후손에서 태어난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면 그거하고 유업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 라고 하겠지요. 구약에서 제가 아까 말씀드린 대로 이스라엘은 실패했어요. 실패를 했기 때문에 비로소 실패했다는 현장에 어떤 무엇이, 싹이 올라오는 것이 있어요.
룻기 4장 5절에 보면 “보아스가 가로되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 이름으로 잇게 하여야 할찌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기업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불연속적일 수밖에 없는 영생의 나라, 하나님의 천국 만들기에서 불연속가운데서 불연속을 뛰어넘는 가느다란 연속이 나오게 하는 거예요.
나오려면 일단 죽은 자가 마련되어 있어야 됩니다. 아까 제가 방금 이야기했지요. 죽은 자가 마련되어 있어야 되고, 그 다음에 특이한 자가 그 죽음위에 자기죽음을 덮어야 돼요. 덮고 그 뒤에 이제는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이 아니고 그 덮인 자의 생명 안에 죽은 자가 같이 포함이 되는 식으로 천국을 이루는 겁니다.
그래서 나의 천국이 아니고 우리의 천국이 되지요. 그래야 그것이 나의 나라가 아니라 예수의 나라, 아들의 나라가 되는 겁니다. 따지고 보면 이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맨 먼저 산자가 있으면 안돼요. 죽은 자가 있어야 돼요. 모든 인간이 율법에 의해서 죽은 자가 되어야 되는 겁니다.
기업이 뭐냐? 아주 쉽게 말해서 아브람에게는 기업이 없어요. 그런데 아브라함에게는 기업이 있어요. 그러면 이 아브람과 아브라함이 동일인물인데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 동일인물을 죽 늘여요. 죽 늘여서 둘로 나눕니다. 네가 아브람이었던 시절이 있고 아브라함 되었던 시절이 있는데 이러한 바꿔치기가 일어나지 않으면 너는 결단코 천국에 못 간다는 겁니다.
천국 가기 힘들어요. 불가능하지요. 천국가기 힘들다니까요. 우선 우리는 우리 죽음에 좀 철저할 필요가 있어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나를 태어나게 한 것은 제일 우선적으로 죽은 자 마련하는데 필요한 용도로 태어난 거예요. 그걸 율법과 연관시켜 보면 율법이 우리보다 먼저 엄중하게 있음을 증명하기 위한 용도로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는 겁니다.
엄중한 율법과 그리고 거기에 뭔가 아담의 수상한 증상을 남기는 우리와의 만남 속에서 우리는 율법에 의하면 저주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의 꿈이고 기대고 그런 것은 다 소용없어요. 우리는 저주받아야 마땅한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가지고 우리를 계속해서 저주로 몰아넣고 죽여 버립니다.
다른 이방민족은 그 연유도 모르고 죽어가고 있고 이스라엘만큼은 그 이유를 알지요. 아까 말한대로 에스라와 느헤미야 때 율법 모르는 자는 죽으라고 내쫓았다고 했지요. 구약에서 율법이 있는 유일한 나라는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율법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고, 그 다음에 유업이라는 것이 있어요. 아까 말한 기업이라는 것.
기업이라는 것은 뭐냐? 죽어 마땅한 현장에서 계속해서 천국까지, 최종 그리스도의 통일까지, 완성까지 있게 하는 원칙이 작동하고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을 그 틈에서 보여주는 그 용어가 기업이라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하면, “목사님, 성경이 왜 그렇게 어렵습니까?” 원래 성경은 이렇게 어려워요.
“다른 교회는 쉽게 하던데요?” 다른 교회는 빌면 복 받는 거거든요. 다른 교회는 자기를 깨트리는 것이 아니에요. 자기를 키우는 거예요. 나 잘되는 곳이지 나를 죽이는 데가 아니라니까요. 그러니까 쉽게 알아먹지요. 토요일에, 이름도 어려운데, 노비아갈라 동촌점, 결혼식장이에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요.
결국 20분 동안 줄 서서 떡 몇 조각인가 먹고 왔어요. 하도 새치기들을 해서 식사하는데 한 시간 있었는데 떡을 제일 많이 먹었어요. 사람들이 떡은 별로 찾지를 않아서 그랬는데 다른 음식들 근처도 못 갔어요. 거기에 교인들이 얼마나 많이 왔는지.
슬쩍 들리는 대로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권사님(장로님)! 권사님 때문에 우리교회 잘됐어요.” 그런 이야기들을 마구 하는데 정말 저 사람들이 가짜라는 생각이 점점 들어요. 인간이 왜 가짜냐 하면, 주님은 율법을 가지고 인간을 죽이고자 하잖아요. 그런데 인간은 살고자 하잖아요. 이것은 사기입니다. 인간은 산다는 자체가 사기에요.
장 영자 이번에 또 들어갔거든요. 29년 동안 교도소에서 살고 나온 장 영자. 희대의 사기꾼이거든요. 남편이 이 철희인가 그렇고요. 이번에 또 잡혔어요. 지금 네 번째 잡혀요. 우리는 그 장 영자라는 사람을 사기꾼이라 하잖아요. 그 사람만 사기꾼 아닙니다. 그 사람이 왜 사기를 쳤겠어요. 살고자 해서 사기 친 거예요.
주님이 하시는 일을 반대로 하는 것은 전부 다 사기입니다. 우리가 산다는 것이 사기라는 것을 율법이 아니면 누가 이야기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율법을 버리잖아요. 들어봐야 버리고 자시고 하지 아예 듣지도 않지만. 다시 이야기합니다. 아브람에게는 없는 것이 아브라함에게는 있어요. 산자에게는 없고 죽은 자에게만 있는 것.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율법으로 죽게 만들고 이스라엘로 하여금 살고자 하는 자기 인생에서 손을 떼게 만들어요. “끝났지? 이제 네 힘으로 산다는 것은 없다. 분명히 하자. 너는 이제는 네가 살 권리나 가치는 없는 거야.”라고 하시면서 그 다음에 그 사람을 하나님의 천국의 상속자로 만들어버립니다. 기업으로 만들어버려요.
에베소서 1장을 봅시다. 11절에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라고 했는데 그 뜻이 1장 7절에 보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그 두 개를 연결시켜 봅시다.
인간은 죽었으니까 인간은 없는 겁니다. 살아있는 분, 생존하시는 분은 누구밖에 없는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피를 내요. 마치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모리아산에서 죽어야 되듯이 뭔가 누구의 죽음의 증거가 피거든요. 예수님이 죽었다는 그 사실을 통하여 비로소 이 세상이 갈 수 없는 나라 천국에 비로소 ‘위치바뀜’을 통해서 천국백화점에 입점하는 거예요. 들어가는 겁니다.
그걸 요한복음 14장에서 뭐라고 하느냐? 제자들을 위한 처소는 현재 없는데 내가 가서 십자가 지고 난 뒤에 처소가 마련되게 되면, 백화점입점 되면 그 때 내가 성령을 보내서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한마디 한마디를 놓치면 안 됩니다. 놓칠 것이 없어요. 천국은 나 혼자 사는 곳이 아니에요. 예수님 있는 곳에 가는 거예요.
그런데 이 땅에서부터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을 싫어하는데 어떡합니까? 예수라면 질겁을 해요. 예수 이야기 그만하라고. 예수가 싫은데 어떻게 합니까? 우리가 가는 곳은 예수님이 곁에 있는 곳인데. 곁에 있다는 것은 사랑해야 가능하거든요.
사랑은 빈공간을 넓히는 거예요. 1회용 침낭에는 한 사람만 들어가지요. 그런데 두 사람이 들어가서 잘 자고 아침에 나왔다면 이상한 것 아닙니까? 1인용 침낭이 2인용, 3인용, 계속 증강되고 부풀어지는 거예요. 그리스도는 한 사람이지만 그리스도 안에는 천군천사와 같이 수많은 사람들, 14만 4천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거기서 종려나무 흔들고 같이 살고 있습니다.
“그게 말이 돼?” 말이 돼요. 이게 말이 되거든요. 그러면 룻기 4장 5절을 다시 읽어봅시다. “보아스가 가로되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 이름으로 잇게 하여야 할찌니라 그 기업 무를 자가 가로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라고 되어 있어요.
여기면 봐서는 얼른 무슨 이야기인지 안 떠오르는데 이야기가 계속 진전이 되면 그 내막이 밝혀집니다. 보아스가 모압여인 룻과 결혼을 하게 되거든요.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게 되는데 그 자식은 보아스 자식이 아닙니다. 룻의 시아버지 자식이 돼요. 나오미 가정의 자식이 된다고요. 자기자식을 남에게 주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그런데 기업을 무른다는 말이 나오는데 무른다는 말이 뭐냐? 신약적으로 쉽게 하면, “너 돈 없어? 내가 대신 다 물어낼게.” 이것이 무른다는 이야기에요. 내가 다 물어낸다는 것. 그래서 구원이란 말은 뭐냐 하면, 나는 할 능력도 없고 구원받을 아무런 것도 없는데 대신 다 물어냈다는 소식이 들려오는 것, 그게 복음의 소식이에요. 대신 다 물어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들려오려면, 독자적인 내가 살고자 하는 이 짓거리가 죽고자 하는 짓거리, 지옥 간다는 것을 본인이 인정이 되어 있어야 돼요. 내가 죽을 짓에 환장하고 있구나, 라는 그것을 인정을 해야 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겁니다. 이것이 참 어려운 것인데요. 보아스가 룻과 혼인을 하려고 할 때 영순위가 아니고 왜 두 번째 순위냐 하는 겁니다. 첫 번째 순위자는 뭐라고 하느냐? “나는 손해되기 때문에 안하련다.” 옛날에 기업을 무른다고 할 때는 그냥 결혼만 하는 것이 아니에요. 자기 부동산을 저쪽 부동산으로 등기이전해서 다 줘버려야 돼요.
자기 재산이 날라 간다고요. 내 재산 날라 가도 가문만 선다면 나는 여한이 없겠다는 그런 마음이 아니면 무를 수가 없습니다. 손해 봐가면서 하는 겁니다. 분명히 자기 거잖아요. 자기 것인데 저쪽 사람에게 넘겨주는 거예요. 물론 친족 관계가 있을 때는 그것이 성사된다는 겁니다. 아는 사람 관계에 있을 때는.
그냥 교회 와서 십일조 하고 복이나 받는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이방종교고. 참, 교회들 생각할 때마다 답답해요. 그것은 이방종교라고요. 이방종교의 특징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나 잘되는 겁니다. 나 잘 되는 것. 복음 믿고, 예수 믿고, 십자가 믿고, 나 잘되는 것.
그것은 십자가, 복음, 다 엉터리에요. 나 잘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주님의 찬송이 되게 하는 거예요. 나라는 것을 양도하는 겁니다. “이제는 나는 죽은 나니까 알아서 처분대로 해주옵소서.” 이렇게 주님께 모든 것을 양도해야 됩니다. 양도할 때 억지로 양도하면 안 되고 기꺼이 양도해야 되고, 고마워서, 주님이 너무 보고 싶어서 양도되어야 돼요. 넘겨줘야 된다고요.
아까 본 요한복음 14장을 다시 보게 되면, 내가 가서 처소를 마련하게 되면 다시 데리러 오겠다고 할 때에 제자들이 가기 싫어했습니까? 성령이 왔을 때 “이제는 끝났어. 이제는 완료야! 이제 더 이상 내 인생은 걱정 없어.”라고 기쁨으로 성령의 일을 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도 우리도 예외가 아니에요. 우리가 천국의 증상이고 천국의 상속자니까 그런 기쁨 같은 것이 있어야 된다고요. 룻기에서 기업 무르는 그 1순위의 사람은 이름도 안 나와 있어요. 그 사람은, 나는 손해가 되니 안하겠다고 했는데 보아스는 2순위지만 자기가 1순위를 물리치고 권리를 받았습니다.
받은 이유가 뭐냐 하면, 보아스가 그걸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나중에 태어난 4대자손이 다윗입니다. 다윗은 개인이 아니에요. 개인가정을 위함이 아니고 이스라엘이라는 거대한 국가를 이룹니다. 국가는 빈공간인데 여러 사람이 들어갈 수가 있는 공간이 국가에요. 나의 주님이 아니고 이스라엘, 우리 하나님이 되는 거예요. 나의 하나님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는 겁니다.
그 매듭부분에 누구 하나 보아스처럼 아낌없이 자기 귀한 재산을, 물론 룻을 사랑해서 모든 것을 바치는 희생이 있어줘야 돼요. 마태복음 1장을 보게 되면 예수님 족보가 나와 있습니다. 교회 나오는 사람들이 제일 먼저 대하는 성경이 마태복음 1장인데 거기 보면 네 명의 여자가 등장합니다. 그 네 명의 여자가 전부 다 치욕스럽고 황당하기 짝이 없는 임신을 한 사람들이에요.
그리고 임신이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없습니다. 아주 치욕스러워요. 네 번째 여인 마리아의 경우에는 사랑하는 남자가 종용히 우리 관계 끊자고 내칠 정도였습니다. 성경에서 여성이라 하는 것은, 특히 예수님의 일에서 어떤 경우에 나오느냐? 마태복음 9장 20절에 보면,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12년 동안 하혈하는 여자가 있었는데 오직 그리스도 외에는 다른 희망이 없어서 그리스도 옷깃을 만졌어요. 만졌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12년 동안 피 흘리는 병을 앓았으니까 자기는 망가진 인간이에요. 그런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그 여자보고, 네 믿음이 크도다, 했어요.
자기가 망가졌다고 생각하는 그 여자에게 네가 믿음이 크도다, 라고 되어 있어요. 그 여자 자체적으로 볼 때는 12년 동안 하혈하는 병을 앓고 있었어요. 누가 상종하겠습니까? 옛날에 여자가 하혈한다고 하면 부정 타는 여자고 저주받은 여자에요. 누구도 안 닮고 싶은 그런 인생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여자와 자기를 연결시켜 버립니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게 믿음이야, 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고 누가복음 13장 1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십 팔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이 여자도 예수님께 고침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렸습니다.
그리고 유명한 대목인데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오병이어를 행할 때 여자와 아이를 빼고 5천명이에요. 그 나머지 남자만 5천명이 하는 짓이 뭐냐 하면, 예수님을 따라왔는데 뭘 보고 따라왔느냐?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으로 온 거예요. 그리고 이 사회의 대표자는 여자가 아니고 남자에요. 가정에서도 남자가 대표입니다.
그런데 남자가 하는 짓거리들이 뭐예요, 결국? 그 당시 여자들은 개무시했으니까. 주님께서는 이 여자를 통해서 믿음을 전달하는 이유는 완전히 세상을 공중분해 시키는 겁니다. 완전히 파괴시키는 거예요. 공중분해 되고난 뒤에 뭔가 남아 있는 것, 모든 것을 뭉치지 말고, 지난 시간에 한 이야기로 한다면, 나름대로의 통일을 시키지 말고, ‘여기서 여기까지는 내꺼야’라고 통일하지 말고, 아예 매일같이 해체해 버리는 거예요.
해체해 버리는데 눈에 들어오는 것들, tv라든지 냉장고, 그것은 뭡니까? 주님의 은혜지요. 그게 주님의 은혜인 거예요. 만약에 우리가 12년 동안 하혈한 여인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아침에 눈떠보니 여기 tv가 있다. 그 tv가 누구 겁니까? 주의 것인 거예요. 주의 것인데 그러면 피 흘리는 내 몸은 누구 것입니까? 이것도 주의 것이에요.
주님께서 연약하고 개무시당하는 여자를 통해서 예수님 자신의 증상으로, 예수님의 상속자, 기업자로 드러내는 이유는, 그들만큼은 온전하게 자기공로와 자기 의를 안 섞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섞어 넣지를 않아요. 내가 기도해서 했다든지, 내가 믿음이 좋아서 했다든지, 자기 것을 섞지를 않아요. 왜냐하면 자기는 이미 죽은 자에 방불하기 때문에.
죽은 자가 죽어야지 무슨 욕심을 더 냅니까? 저 문경 가는 쪽으로 못이 하나 있어요. 그 못의 이름을 보고 제가 속으로 얼마나 웃었는지 몰라요. 혹시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요. 그 못의 이름이 ‘공갈 못’이에요. 공갈빵, 공갈 못의 특징이 뭐냐? 안에 앙꼬가 들었나 싶어서 깨보면 안에 아무것도 안 들었어요. ‘공갈 아니야?’ 해서 공갈빵.
못은 못인데 못인지 맨 땅인지 분간도 잘 안될 때 공갈 못이지요. 비가 올 때만 못이 되는 것. 지금 인간들, 아담의 본색이 뭐냐? 우리가 악마를 인정해야 돼요. 악마가 하는 일이 뭐냐 하면, 복음의 씨를 말려버리는 거예요. 화염방사기로 내 몸 안의 복음의 씨를. 왜냐하면 그게 자존하는 방법이에요. 내가 스스로 신이 되는 방법은 내 속에 나의 신을 스크래치 내는, 깎아내리는 어떤 요소도 나에게 남기면 안돼요.
그런데 주님의 방법은 반대에요. 성도 안에서 화염방사기로 모든 것을 없애버립니다. 내 것이라는 것을 일체 다 없애버려요. 내 것이라고 있으면 그것 가지고 밥 먹고 살려고 애를 쓰기 때문에 없애버려요. 없애버리니까 우리는 공갈 못입니다. 공갈빵이고. 왜 우리는 껍데기를 껍데기라고 말을 못합니까?
너는, 저 사람이 내 사람이라고 왜 말을 못하느냐고 하듯이. 그 유명한 대사처럼 “나는 껍데기야. 나보고 뭘 하라고 하지 마. 나는 껍데기에 불과해.”라는 고백이 나와야 됩니다. 자, 그러면 이제 남은 시간에, 이 기업의 상속자라 하는 것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보겠습니다.
상속자에 대해서는 갈라디아서 3장 29절에 나와 있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우리를 공갈 빵으로 만들어서 우리 안이 텅텅 빕니다. 비어봤자 우리는 또 나오거든요. 또 나오면 주께서 율법의 말씀으로 싸그리 내 것을 지워버립니다.
지우고 거기에 뭘 집어넣느냐 하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 아브람약속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약속을 거기에 집어넣습니다. 그것이 대대로 순차적으로 이루어지는데 아브라함 다음에 이삭, 이삭 다음에 야곱, 야곱 다음에 요셉, 이렇게 순차적으로 계속 돼요.
그 중 대표적인 경우가 야곱인데 야곱은 하나님과 싸웠습니다. 야곱이 하나님과 싸워서 이겼습니다. 그런데 이기고 난 뒤에 울면서 잘못되었다고 빌었거든요. 이기고 난 뒤에 잘못했다고 빌었습니다. 그래서 살려달라고, 내가 당신이 누군지도 모르고 함부로 대들어서 이겨버렸으니까 이 무례를 어떻게 용서를 받으리오, 하고 울었거든요.
그 야곱대목을 보면서 우리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대조해 봐야 돼요. 여러분은 언제 웁니까? 내 것 빼앗겼다고 울지요. 야곱은 반대입니다. 가졌다고 울어요. 가질 자격도 없는데, 내 것도 아닌데 내 것이라고 방방 뛰었던 이 잘못을, 그 다음이 중요해요, “이 잘못을 주여, 용서하지 마시옵소서.”
용서해 주옵소서, 가 아니라 용서하지 마옵소서. “나 같은 인간을 용서하지 마옵소서.” 이것이 하나님을 직접 만난 인간의 솔직한 고백입니다. “나 같은 것은 용서할 가치도 없습니다, 주여.” 그게 용서의 장이에요. 주님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네가 나에게 달려들었지. 앞으로는 내가 너를 위해서 싸워주겠다.” 그래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줬는데 그 이름은 개인이름이 아니고 집단이름이 되는 겁니다.
자, 상속자가 어떻게 되느냐? 상속자는 없어요. 왜냐 하면, 모든 것은 죽고, 죽고, 죽음이기 때문에 상속자는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오셔서 십자가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함으로서 부활로 승리했다, 이겼다고 했어요. 이겼다. 승리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나실 때에 애매하게 죽은 사람들이 있어요. 베들레헴의 두 살 밑의 애들을 다 죽였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의 가족은 살았어요. 빈털터리 되어서 도망치듯이 갔지요. 예수님이 이기는 방법, 예수님이 승리하는 방법은 뭐냐 하면, 우리가 죽음을 겁내지 않는 거예요. 예수님과 함께라면 이것은 하나의 부활에 이르는, 천국에 이르는 하나의 코스죠.
뭐가 승리냐 하면, 그동안 소원했던, 멀어졌던, 그다지 관심도 없던 그 십자가가 다시 나에게 정말 새로운 나를 만들어내는 그 환경이라는 사실, 그것을 새삼스럽게 느낄 때 그것은 나의 승리가 아니고 우리와 함께 있는 주님의 승리입니다. 왜냐? 그게 부활이기 때문에.
부활은 승리거든요. 죽음에서의 승리, 율법에서의 승리고 마귀로부터의 승리입니다. 그 승리 값을 우리가 뭔데 그걸 소유하고 있습니까? 얼마나 이게 놀라운 기적이에요. 망가져도 되는데. 지옥가도 되거든요. 용서 안 받아도 돼요. 하지만 주님이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받겠다, 안 받겠다, 그런 것 묻지도 않고 아예 용서를 줘버렸습니다.
그게 뭐냐? 에베소서 1장 7절,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았다는 말이지요. 우리는 죄사함의 창고에요. 죄사함이 이루어진 창고라는 말이지요. 그 죄사함의 증상이 뭐냐? 죄용서 받은 우리가 하나님의 기업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겁니다. 아들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주님께서는 달랑 우리만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통해서 빈공간을 넓혀요. 공갈빵을 넓힙니다. “너만 거저 용서받은 것이 아니고 저 사람도 거저 용서받았다. 이제는 한 식구다.” 그렇게 하지요. 야곱이 뭔가 자기 속성대로 하다가 이겼다고 생각한 순간, 그것이 바로 죽어야 마땅함의 본색인 것이 드러나듯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버리면 내가 산다는 것이 사기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에 보냅니다. 제가 인생 몇 년 살지는 않았지만 제가 아는 한 이것은 진리다 싶어요. 사람이 직장생활, 사회생활 하면 인간성 다 버립니다. 학교 다닐 때 그렇게 참하고, 정직하고, 순수하고, 아름답고, 남 속일 줄 모르는 인간, 세상에서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고 하면 인간성 다 버려요.
그렇지 않으려면 가정주부로 지낼 수밖에 없어요. 가정주부는 홈쇼핑 하고 드라마 보면 돼요. 그러나 여자가 돈 보고 바깥에 나가면요. 이것은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도 안돼요. 호르몬과 관계없이 이미 다 남자가 됐어요. 인간성 더러운 것만 다 들어오고 그걸 헤쳐 나가려하면 그것보다 더 악해야 되고, 독해야 되고, 네가 죽나 내가 사나 해보자는 그 성깔만 남아요. 그것이 자꾸 생겨요.
그게 주님의 예정하심입니다. “너 그것밖에 안 돼. 너는 너밖에 몰라. 복음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언제 거기에 관심이나 뒀어? 말씀? 율법?” 돈도 안 되는 그것 필요 없어요. 여러분, 사람 나고 돈 난 것이 아니고 돈 나고 사람 났어요. 돈 나고 사람 났는데 뭐가 돈이 됩니까? 그게 뭐가 중요해요? 내 것이 중요하지.
그렇게 될 때 망가진, 그 자체가 환자거든요. 그 환자가 종용히 예수님의 피 묻은 옷 가를 만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망가졌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아닌 척 하고 믿음 있는 척 하지만 사실은 우리의 관심사가 나밖에 없음을 솔직히 고백하면서, 주여, 이런 인간을 용서 안 해도 된다는 사실을 저희가 직감하게 해 주옵소서. 그리고 주님의 찬송이 되기 위해서 용서 받지 못할 자를 용서해주신 주의 은혜를 영광 돌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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