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서

아가서18강-영적 쾌락(아7;1-6) 070909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11. 24. 20:39

영적 쾌락 
2007년 9월 9일                         본문 말씀: 아가 7:1-6 

(아 7:1) 『귀한 자의 딸아 신을 신은 네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네 넓적다리는 둥글어서 공교한 장색의 만든 구슬 꿰미 같구나』 

(아 7:2) 『배꼽은 섞은 포도주를 가득히 부은 둥근 잔 같고 허리는 백합화로 두른 밀단 같구나』 

(아 7:3) 『두 유방은 암사슴의 쌍태 새끼 같고』 

(아 7:4) 『목은 상아 망대 같구나 눈은 헤스본 바드랍빔 문 곁의 못 같고 코는 다메섹을 향한 레바논 망대 같구나』 

(아 7:5) 『머리는 갈멜산 같고 드리운 머리털은 자주 빛이 있으니 왕이 그 머리카락에 매이었구나』 

(아 7:6) 『사랑아 네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어찌 그리 화창한지 쾌락하게 하는구나』 

성경을 보게 되면 사람들을 부담을 갖게 마련입니다. 그 많은 성경 구절을 하나하나 잊지 않고 챙겨가면서 어느 세월에 그 말씀들을 다 준수할 수 있을까 해서입니다. 마치 많은 수학 문제들을 앞두고 있는 수험생처럼, 하나하나씩 풀어나간 숫자만큼 자신이 실력이 보다 향상된 것처럼 간주하기 싶습니다. 

밑바닥에서 출발해서 날이 갈수록 대단한 경지까지 이르겠다는 것은 이 세상에 그 어느 분야에서도 적용되는 일반적인 원칙입니다. 새로운 분야에 접어들게 되면, 그 새영역에 호응하기 위해 그 동네에서 통하는 법칙 익히기에 분주합니다. 그래야 그 동네의 일원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대할 때도 이 말씀을 지키려고 시도하는 경향을 우선적으로 나타내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 누구로부터 사랑받고 있는 광경이지 결코 사랑받기 위해서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내용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 본문 뿐만아니라 전 성경 전체를 다 이런 식으로 봐야 합니다. 

인간 쪽에서 준비를 갖추는 조건 하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는 것이 아닙니다. 즉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을 만할 때 비로소,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사랑이란, 인간 쪽에서 따로 준비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하나님의 마음에서 폭발된 사랑의 여파가 그대로 자기 백성에게 이어집니다

아가가 주어진 이전부터 이스라엘 역사 전체가 이런 사랑의 혜택을 입고 지내온 터입니다. 지난 사랑이나 혹은 앞으로 신약 성경을 통해 주어질 사랑이나 이 모두가 아가에 나오는 하신랑의 일방적 사랑의 형식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사랑받는 입장에서 “나 사랑받을 자격있다”고 나올 수 있는 사랑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도리어 사랑받는 입장에서, “나에게는 과분한 사랑이야. 나 같은 것을 사랑해주신다면 그저 감사할 뿐이야”라는 고백만이 나올 사랑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 보면서 신랑이 신부에게 얼마나 과분한 사랑을 멈추지 않고 퍼붓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단순히 여자의 신체의 고정된 묘사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춤추면서 고운 자태를 유지했다가, 다시 헝켤었다가 다시 다른 자태로 변화하는 그 움직임을 두고서 극찬의 표현을 아낌없이 날립니다. 신랑은 신부를 향하여 도무지 아껴두는 것이 없이 있는대로 다 퍼부고 싶은 심정을 숨기지 않습니다. 

사랑은 노출입니다. 방어자세를 취하지 않는 것이 사랑입니다. 상대방에게 극찬의 묘사를 아까지 않는다는 것은 사랑받는 상대방이 그런 사랑을 근거로 무슨 짓을 획책에도 상관없음이라는 자유함이 있을 때나 나올 것이 사랑입니다. 즉 상대에게 이용당하지 않겠다는 경계심이 도리어 일방적인 사랑의 가치를 훼손시켜 버립니다. 

10절에 보면,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라고 여자가 솔직한 속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자진해서 자신의 전부를 상대방의 소유로 간주한다는 것은 함부로 나올 고백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신랑의 마음 속에 담긴 진심을 진심으로 알아봤을 때나 나올 고백입니다. 

그야말로 자기를 부인하는 고백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자기를 판단하는 평가서를 마음 속에 지니고 다닙니다. “누가 뭐래도 나는 이런 인간이라고 자부한다”라는 자의식은 분명히 수립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자부심마저 주저없이 상대에게 반납한다는 것은 보통 큰 사랑을 받지 아니하면 나올 수 없는 고백입니다. 

신랑으로부터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완벽한 사랑의 폭격을 맞았을 때, 그래서 자아가 왕창 깨어져 없을 때나 나올 고백입니다. 자아의 고집과 평가와 자아의 희망까지 상대방에 내어놓는 사랑에 비해서 별 의미가 없다고 간주되면 그 때부터 “나는 당신의 것 맞습니다”라는 아름다운 항복이 나오는 법입니다. 

주님과 성도 사이에는 이러한 관계 뿐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최후의 계명, 즉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진 형편입니다. 신랑의 사랑은 신부에게 아무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저 여자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신랑으로 하여금 자기 여자의 있음에서 오는 쾌락을 만족시켜 줍니다. 

그렇다면 그 여자를 보고 남자가 즐거워한다는 것은 남자의 자기 즐거움일 수도 있습니다. 남자가 날린 멘트에 대해 남자 자신이 만족하고 있는 겁니다. 남자는 여자를 어떻게하든지 그 신체가 아름다움으로 뭉쳐져 있음을 말해주고 싶어합니다. 즉 '여자 있음‘ 그 자체로서 남자에게 행복입니다. 

오늘 본문의 묘사는 신체 밑에서 시작됩니다. 춤을 추기 위해 실었던 신발 부위부터 허벅지와 허리와 가슴을 거쳐 머리까지 이어집니다. 그 어느 것 하나 사랑 아닌 것이 없습니다. 다 사랑의 절정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남자 본인의 사랑이 그 여자를 그렇게 보이도록 만든 겁니다. 

이것은 남자 아닌 다른 남자가 그 여인을 평가하면 그런 식으로 아름다움으로 똘똘 뭉쳐진 것으로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오로지 사랑을 듬뿍 담은 자의 마음만이 이 여자를 궁극적인 아름다움의 화신으로 정착시킬 수 있습니다. 

남자는 여자를 부를 때. ‘사랑아’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이런 식으로 호명되었다는 말은 본래 그 여자의 이름보다 남자가 선언하는 사랑이 그 여자의 남은 일생을 책임지게 되었다는 선언 같은 것입니다. 그 여자의 이름은 필요없고, 그 여자를 계속 사랑의 대상으로 남게 하는 것은 남자의 ‘사랑의 능력’ 뿐입니다. 따라서 “사랑아”라고 이름대신 여인을 불러주는 것은, 이미 그 어떤 경우라도 여인을 향한 사랑이 취소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즉 여자의 본래의 ‘이름의 힘’ 대신 ‘사랑의 위력’의 힘으로 살아가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절대 사랑의 증거나 여인의 전 신체에 다 완벽하게 꽉 차여져 있습니다. 신체의 어느 부위도 사랑 아닌 것이 전혀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상대자라는 생각을 배놓고서 앞으로 그 여자를 대하지 않겠다는 선언 같은 의지도 품어내고 있습니다. 

버릴게 없는 사랑을 품은 성도는 스스로 자기를 함부로 심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만든 사랑으로 자신을 커버하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