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서

아가서17강-보고싶은 얼굴(아6;13-14) 070902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11. 24. 20:37

보고 싶은 얼굴 

2007년 9월 2일                               본문 말씀: 아가 6:13-14 

 (아 6:13)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로 너를 보게 하라』 

(아 6:14) 『너희가 어찌하여 마하나임의 춤추는 것을 보는 것처럼 술람미 여자를 보려느냐』 

성경에 보면 우리 인간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가 나옵니다. 성경 모든 말씀은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은 사람을 어떻게 만들었기에 말씀을 걸어오는지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누구냐’에 대해서 인간들은 성경을 펼치기 보다는 스스로에게 묻고 싶어합니다. 

즉 ‘내가 누구냐’를 모르면서 그런 내가 나를 탐색하는 출발점이 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인간은 본디 흙입니다. 딱딱한 흙입니다. 흙에 하나님께서 입김을 코에다 불어 넣게되면 그것이 산 영, 즉 ‘영혼’이 되는 겁니다. 영혼 따로 육체 따로가 아니라 영혼이라는 것이 인간의 대변합니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의 입김이 인간에게 있어 주도권을 갖게 됩니다. 이것은 딱딱한 육체가 인간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고정되지 않는 하나님의 입김이 인간을 이끌고 있습니다. 즉 인간은 ‘나’라고 따로 규정지을 만한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는대로 움직일 뿐이며 거기서 늘 새로운 면을 드러내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 이후, 인간이 범죄한 후에는, 인간에게는 원래 인간 규정이 아니라 범죄한 인간이 스스로 내려버린 인간상이 따로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으로부터 전혀 인정받지 못할 인간상입니다. 그 인간상에 의하면, 인간이란 자신이 만들어가기 나름이라는 것입니다. 선과 악의 기준을 가지고서 말입니다. 

독립적이고 독자적인 자아상을 구축하고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고정되어 버린 자아상은, 타인을 보거나 하나님을 대할 때도 자신의 입장을 관철하는 태도로 나서게 됩니다. 즉 자기 뜻대로 안되고 무조건 화내고, 자기 뜻대로 되면 무조건 선이요 진리로 간주하는 식으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가 벌리는 모든 행위들은 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귀환조치 됩니다. 자아를 더욱 힘주게 만드는 자아상을 가지고 이 인간 사회를 다져나가다 보니, 원래 하나님의 창조원칙은 사람들 속에서 무시당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고정된 자아상은 자신에게 큰 짐이 되고 맙니다. 

스스로 자기를 지키려고 하기 때문에 온갖 법칙과 규칙은 다 끌어당겨서 자아 속에서 마구 집어넣게 됩니다. 즉 ‘나’라고 내세울만한 근사한 자아상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쉬지 않고 자기 관리에 충실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늘 변하는 것이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고, 더 발전적인 자아가 되기 위해서 스스로 분투노력하는 인간으로 자처하고 나서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자들아 다 내게로 와서 내게 배워라. 내가 너를 편히 쉬게 하리라”라는 취지와 정면 배치됩니다. 우리가 무엇을 쉬게 할 것인가를 예수님에게 배워야 합니다. 주도권을 따로 쥐고 있는 한 우리는 편히 쉴 수 없습니다. 우리가 타인에게 모범되는 생활을 해 보인다고 나서보지만, 그 순간부터 우리는 스스로 우리가 제정한 법칙의 노예가 되어버립니다. 

그 법칙을 지킬 수도 없고, 항상 범할 수밖에 없는 환경의 압박을 받고 있기에 결국 정리되는 것은 자신을 위선자로 전락시켜 남들 눈에서 숨겨주는 일 뿐입니다. 남들 앞에서는 원칙을 벗어나지 않았다고 우기지만 실은 변명입니다. 이런 인간들의 변명은 예수님의 산상설교 앞에서 보기 좋게 허물어지고 맙니다. 

예수님의 말씀 완성이 우리에게 주어질 때는 사랑으로 주어집니다. 사랑은 곧 말씀 완성입니다. 사랑 안에서 모든 말씀은 다 이루어진 상황입니다. 이 사랑이 오게 되면 주도권이 사랑에게 있습니다. 이 사랑이 흙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인 우리를 참된 인간으로 변모시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랑의 절정은 춤입니다. 댄스입니다. 춤이란 일상의 모든 생각과 일을 접고 추는 겁니다. 춤을 출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는 더 이상 자아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윗이 언약궤를 예루살렘 성에 메고 올 때는 그는 왕이라는 체통과 위신을 잊고서 춤을 추게 됩니다. 

이것을 본 왕후인 미갈은 자기 남편의 체통없음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미갈을 저주하고 맙니다. 다윗의 춤은 개인적인 춤 솜씨 자랑을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이 약속대로 시행됨을 어쩔 줄을 몰아서 자아를 잃어버린 상태에 접어든 것입니다. 

마치 노래를 스스로 잘 한다고 자처하다가 너무나도 노래를 잘 부르는 자가 등장했을 때, 그는 그 앞에서 노래를 접고 노래 잘하는 사람의 노래에만 흠뼉 취하여 춤을 추는 것과 같습니다. 더 이상 자기 자랑을 할 필요없게 된 경우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희열이요 사랑의 절정입니다. 이 사랑의 절정에서 춤이 나오게 됩니다. 

술람미 여인에게 같은 여자 친구들이 춤판에 들어오라고 요청합니다. 같이 더덩실 춤을 추자는 겁니다. 좋은 신랑을 만났는데 더 이상 무슨 고민이 있겠느냐는 겁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이 악한 세대가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신랑은 신비를 사랑의 대상으로만 봅니다. 

자신이 내민 사랑 안에서 신부는 비로소 눈부신 신부가 됩니다. 신부가 독자적으로 아무리 훌륭한 여인상을 다듬고 있어도 간택당하지 아니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참된 신부는 신랑이 어떤 식으로 자신의 손을 잡아끄는지를 압니다. 사랑 안에서 ‘율법 완성’이 다 담겨 있습니다. 

신랑이 사랑으로 신부를 끌어당긴다는 말은 더 이상 신부에게서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오로지 사랑 안에서만 대화하고 교제하게 되는 사이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런 신랑의 사랑에 우리는 춤추지 않을 수 밖에 없습니다. 신랑이 길이라는 점에 춤춰야 하고, 신랑이 진리라는 점에 춤 춰야 하고, 신랑이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점에 우리는 춤춰야 합니다. 

사랑이라는 영역 안에 이미 구원완성이 이루어졌음에 우리는 춤춰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미 구원받은 영역으로 넘어서 왔음에 더 이상 우리 자아의 의를 자랑하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