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서

아가서19강-신랑 안내(아7;10-13) 070916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11. 24. 20:40

신랑 안내 
2007년 9월 16일                          본문 말씀: 아가 7:10-13 

(아 7:10)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 

(아 7:11) 『나의 사랑하는 자야 우리가 함께 들로 가서 동네에서 유숙하자』 

(아 7:12) 『우리가 일찍이 일어나서 포도원으로 가서 포도 움이 돋았는지 꽃술이 퍼졌는지 석류꽃이 피었는지 보자 거기서 내가 나의 사랑을 네게 주리라』 

(아 7:13) 『합환채가 향기를 토하고 우리의 문 앞에는 각양 귀한 실과가 새 것, 묵은 것이 구비하였구나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너를 위하여 쌓아둔 것이로구나』 

신앙은 현실성이 있어야 합니다. 현실성이 결여된 신앙은 그야말로 혼자 노는 게임에 불과합니다. 자기 스스로 열광내고, 발바둥치는 것은 그만큼 자기 외에 달리 사랑하는 자가 없기 때문에 나오는 발악입니다. 참된 신앙은 사랑하는 대상이 있습니다. 내 쪽에서 사랑했기에 그쪽에서 반응을 나타내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 도리어 먼저 사랑받았기에 모든 것을 주어도 황송한 그런 관계입니다. 

이처럼 참된 신앙이란 ‘신앙 있음’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있음’으로 말합니다. 사랑이 성립되려면 죽도록 사랑하고 있는 상대자가 있어야 하고, 이 신앙이 현실적으로 확실하려면 그 상대자로 현실적으로 실제로 살아계신 분이어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말입니다. 

하지만 언어나 말이라는 것은 실제 인물이 아니라 의사소통 도구에 불구합니다. 우리는 지금 성경에 담긴 문자를 봅니다. 따라서 이 문자를 이해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구나… 동네에 가서 유숙하자”하자는 말은 오늘날 우리에게 현실성 있는 사랑으로 이어지려면 이 말씀 자체가 한 인격으로 변화되어야 됩니다. 

즉 직접 사랑하지 않고서는 이 말씀은 우리에게 소용없는 말이 됩니다. 소설 책에나 나오는 남의 이야기가 될 뿐입니다. 그래서 성경 해석에 있어 관권은 이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글자가 산 사람으로 변모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어떤 남녀가 이렇게 사랑하더라 가 아니라 내가 내 사랑하고 있는 사람을 이렇게 지금 사랑하고 있어요 라고 되어야 된다 이 말입니다. 

사랑이 능력으로 채워진 믿음이 아니라면 믿음이 아닙니다. 달리 말해서 사랑하는 대상과 교제하지 않는 믿음을 혼자만의 발광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전해 왔습니다. 

사랑이 나타나야 진정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곧 사랑의 대상이 나타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하면 글이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다니엘 5장에 보면 벨사살 왕이 나옵니다. 이 왕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그냥 문자로 간주한 자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런저런 식으로 믿더라 하는 남의 이야기로만 간주하며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들 유대인들의 글은 실제도 아니고 현실도 아님은 그 왕은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밤, 왠 난데없이 손가락이 쏟아나와서 벽을 후벼파면서 글씨는 쓰는게 아니겠어요! 글씨와 어떤 인물과 하나가 되어 나타나는 순간입니다. 글이 인격체로 등장했습니다. 그동안 글씨를 글씨로 봤던 벨사살왕은 혼이 나가서 무릎을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남여의 열애 이야기로서 아가를 대하면 안됩니다. 이 사랑의 현장에 지금 우리 성도들이 놓여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글이 글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되려면 이 글의 완성이 현실적 인물로 등장되어야 합니다. 그 과정이 누가복음 24장에 잘 나와있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길에 전에 예수님의 제자였던 두 사람이 걷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아저씨가 달라붙습니다. 그리고 대화를 주고 받습니다. 이 때 두 제자의 눈을 어두워졌다고 했습니다. 시력이 약해지고 초점이 흐려진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현실관을 가지고 현실을 보고 있습니다. 

동행하던 세 사람의 대화 내용은, 얼마 전에 예루살렘에서 벌어졌던 일입니다. 예수라는 분이 당국에 체포되어 모진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었다가 어떤 이들의 입소문에 의하면 그 되살았다는 겁니다. 그 때 동행하던 그 아저씨는 두 제자들에게 성경의 전 내용에 바로 그 예수라는 인물에게 일어난 사건과 연관을 시켜버립니다. 

즉 문자가 인격이 되는데 있어 인간들의 열성이 경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만이 필요합니다. 다른 것을 필요치 않습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의 관계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어느 식당에 가서 음식을 먹다가 예수님께서 눈을 밝게해주니 그제사 그 두 제자는 그 말씀의 완성자가 단지 말씀 강의자 정도가 아니라 실제 지금도 살아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가 이미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그 이후입니다. 지금도 예외가 아닙니다. 모든 성경 말씀이 살아있는 어떤 사람이 되려면 완성자 되시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십자가와 부활을 근거로 우리의 눈을 뜨게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어떤 사람은 성경 말씀을 억지로 풀다가 멸망한 사람도 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모든 성경 말씀이 우리 자신이 살아있다는 우리의 현실을 겨냥한 완성이 아니라 우리 곁에 예수님도 실제로 살아있음을 알려주고 있다면 그 말씀을 통해 우리는 십자가라는 과분의 사랑의 혜택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과분한 사랑, 과도한 사랑, 우리가 예상했던 그 이상의 사랑을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장 세워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이 십자가에서 얻어낸 것은 우리가 기대하는 그 모든 것마저 능가합니다. 예를 들면,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한 자를 영광스럽게 하신다’라는 이 말씀마저 그 분께서 일방적으로 우리를 위하여 다 완수해 버렸습니다. 

우리가 그 어떤 행위를 하든지 상관없이 말입니다. 사랑의 강도에 대해서 쉬운 예를 들면, 여름철에는 덮다고 가벼운 홑이불만 덮습니다. 하지만 겨울철이 되면 두꺼운 솜이불을 덮습니다. 질식할 지경입니다. 우리의 발 힘으로 차버릴 수 없을 정도의 무게도 우리가 덮어버렸습니다. 그 이불 안에 담겨서 제공되는 것이 과분한 사랑입니다. 

따라서 이런 사랑을 입은 자가 우리 자신의 모든 것, 심지어 목숨까지 바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여자가 남자에게 몸을 바치는 것을 모든 것을 남김 없이 바친다는 의미합니다. 이 후에 이 여인이 주변에 있던 모든 것은 사랑하는 자가 새롭게 생겼다는 사실 때문에 새록새록 의미가 나타납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 과도한 사랑을 입고 난 뒤에는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하고 가졌던 모든 것이 사랑으로 되살아나 사랑의 빛을 발하게 됩니다. 그 어떤 것도 우리가 주님 앞에 아까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것을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