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우지 말라 2007년 9월 23일 본문 말씀: 아가 8:1-4
(아 8:1) 『네가 내 어미의 젖을 먹은 오라비 같았었더면 내가 밖에서 너를 만날 때에 입을 맞추어도 나를 업신여길 자가 없었을 것이라』
(아 8:2) 『내가 너를 이끌어 내 어미 집에 들이고 네게서 교훈을 받았으리라 나는 향기로운 술 곧 석류즙으로 네게 마시웠겠고』
(아 8:3) 『너는 왼손으론 내 머리에 베개하고 오른손으론 나를 안았었으리라』
(아 8:4)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너희에게 부탁한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며 깨우지 말지니라』
신앙의 차원을 인간식으로 낮추면 안됩니다. 예수님은 이 아가의 내용을 위하여 자기 목숨까지 걸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다 이루셔서 우리의 것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이 아가의 내용을 우리의 평소 버릇처럼 법으로 지켜서 해결하려는 의도를 버려야 합니다.
아가의 내용은 사랑입니다. 사랑의 관계란 법으로 형성되지 않는 관계라는 겁니다. 법적으로 책임을 물으면서 동시에 사랑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내 돈 1주일 내에 안 갚으면 나는 너를 감옥에 넣겠다. 그런데 나는 나를 사랑한다”라는 말이 성립될 수 없습니다.
사랑이란 상대의 능력을 테스트 한다든지, 상대방의 우수함을 강요하든지 하는 게 없습니다. 바로 그러한 영적 상태를 주님을 우리 성도에게 주려시고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관계를 오늘 본문에서는 오빠와 누이동생의 사이로 소개합니다. 오빠와 누이동생은 같은 어버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의 관계에 대해서 본인들이 거절할 수 없이 확정지어진 관계에 놓여있습니다. 즉 자신의 부모를 부정하지 않는 한 오빠의 관계를 부정할 수 없고 저 여자는 누이동생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 그 정도로 격이 없고, 억지가 없는 자연스러운 사이라는 뜻입니다.
누구와의 어떤 사이를 자연스러운 사이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나는 나만 믿는다’라든지, ‘나는 내 힘으로 살테니 그 누구도 내 삶에 이의를 달라말라’라는 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 현대인들이 너무나도 개인주의적 성향을 띠게 때문에 심지어 하나님이나 예수님에 대해서도 원래부터 형성된 관계로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부터 우리를 이미 익히 아는 사이로 보시는데 반해, 오늘날 우리 인간들은 주님을 기계적이나 사무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입맞춤’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입맞춤이라는 용어는 결코 금속이나 기계 공업이나 경제학 서적에 나오는 말이 아닙니다.
즉 흔히들 현실이라고 간주되는 서적에는 ‘입맞춤’이 안나오니 이 ‘입맞춤’이라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시해도 되는 실정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사랑을 표현하는 ‘입맞춤’이란 결코 비현실로 돌릴 수가 없습니다. 즉 사랑을 마치 중요하지 않는 것처럼, 돈보다 덜 중요한 비현실적인 사실인 것처럼 뺄 수 없다는 겁니다. 달리 말해서 사랑을 말하지 않고서는 세상을 모르는 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의 버릇은 신앙을 사무적으로 법제화 하는 올바르게 한다고 여기는 오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는 신앙이란 것은 사무적인 것이 아니라 오로지 ‘사랑에서 나온’ 신앙만이 진짜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새삼스럽게 우리가 정립해 나갈 것이 아니라 이미 준비된 사랑 체제를 들고 우리에게 등장하신 분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사람이 신랑이요 오빠입니다. 한가족으로서 다가오기 때문에 우리 쪽에서 문제가 있다고 해서 그 관계가 깨어지거나 없어질 상황이 아닙니다. 새삼스럽게 돈독한 관계를 맺어야 사이가 아니라 전부터 유지된 관계가 지속적으로 이어질 뿐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억지가 개입될 여지가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도 이러해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오빠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건네시는데 우리는 다시 옛날처럼 법적인 죄 의식의 덤불 속에서 헤매고 있으면 안됩니다. 원래 오빠라는 것은 누이동생의 입장에서는 든든한 존재, 누이동생을 지켜주기 위해 목숨까지 던질 수 있는 유일한 가족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오빠 앞에서 자신의 부족이나 자신의 한계 때문에 낙담하고 있으면 그것은 든든한 오빠는 자신의 존재성을 모독하고 무시하는 처사일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 법적인 수준으로 주저앉을 수는 없습니다. 스스로 자기를 재판하고 판결내리고 잘 잘못을 문제삼고 나서는 것은 오빠 같은 가족 없이 홀로 살아나갈려고 애쓰는 자 일 불과합니다.
오빠 앞에서 허물이 없어야 합니다. 뽀뽀해도 남들이 이상하게 보지 않는 것처럼 우리는 스스로 자기 잘난 맛에 자립하여 신앙하지 않아야 합니다. 혼자 완벽해서 그것으로 버텨내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루신 사랑을 못 받은 증거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안다면 든든한 오빠가 항상 나를 지켜준다는 생각이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여자는 남자의 사랑을 압니다. 남자의 사랑은 자신을 포근히 감싸주기 보호하는 사랑임을 압니다. 오늘날의 성도에게 있어 죄의식이란 바로 이런 사랑을 매번 이해 못함에서 오는 죄의식이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감싸주시는 그 깊은 주님의 사랑을 희미하게 여기고 그 대신 자신의 완벽성 검토에만 신경쓰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이런 사랑은 받은 여자는 남자에게 향기로운 석류즙을 제공합니다. 평소에 여자로서 자기를 기쁘게 한 음료라는 경험이 있기에 이 좋고 맛있는 것을 자기 혼자 먹을 수 없어 남자에게 권하는 겁니다. 이처럼 사랑이란, 자기에게 가지고 있는 것보다 그 사람에게 가 있는 것이 더 기쁨이 되는 사이입니다.
남자는 여자의 베개용으로 자신의 왼손을 서슴없이 제공합니다. 여자쪽에서 요구해서가 아니라 자진해서 여자의 머리의 베개가 되어주십니다. 잠 잘 동안 여자의 취침에 불편하지 않도록 알아서 배려하는 것이 남자의 깊은 사랑이듯이 우리 예수님도 우리가 사랑의 얇음에도 오는 마음의 불편이 없도록 배려하십니다.
그리고 오른손으로는 여자의 몸체를 안습니다. 그 어떤 밤의 두려움으로 보호해 주려고 합니다. 세상 온갖 시름에서 자기 사람을 끝까지 지켜주려고 오른손으로 감싸게 됩니다. 끝나지 내 사람이다는 겁니다. 아무리 그 사랑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해도 빠져 나갈 수 없도록 지켜주신다는 겁니다. 어디까지나 나의 사람임을 부인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품고 잡니다.
바로 이런 사랑의 품속에서 편히 쉬는 여인을 보고 남자는 주의 사람에게 그 단 잠을 깨우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만족하고 사는 것, 바로 이것을 주님도 같이 즐거워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수준으로 주님의 사랑을 끌어당기지 말고 주님의 수준을 우리 안에서도 유지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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