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강-YouTube강의(행함과 노동)20181120-이 근호 목사
제 259강, 제목은 ‘행함과 노동’입니다. 세상에서는 행함과 노동을 같이 봅니다. 노동하는 주체나 행함 하는 주체나 동일하다고 이렇게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점에서 그러냐 하면 세상적인 관점에서 그렇습니다.
그럼 세상적인 관점이 아닌 관점이 또 있느냐, 세상적인 관점이 아닌 다른 관점이 있죠. 예수님께서 갖고 계신 관점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1장 28절에서 32절까지 약간 길죠. 예수님께서 하나의 예를 듭니다. 물론 그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행했던 것을 예를 들었죠.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대대로 율법을 줬기 때문에, 그거는 모세가 직접 보고 받아온 율법이기 때문에 무시할 수 없는 거죠. 그렇다면 그 율법을 준 이유가 뭐냐 자기들이 행함을 유도하기 때문에 율법을 줬다고 생각을 한 거예요.
율법은 외부에서 왔고 행함은 어디서 끄집어내고? 자기들의 내부에서 끄집어내면 되는 거죠. 행함의 주체는 바로 본인들이라고 생각을 한 겁니다. 예수님께서도 바리새인들을 그렇게 평했어요. 누구든지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고 했으니까.
평소에 바리새인들이 어떤 사고방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려고 했는가를, 예수님이 간단한 문장을 가지고 금방 보여준 거예요. 다시 한 번 정리하면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 쪽에서 말씀을 줬고, 그것을 행사할 수 있는 주체, 행함의 주체는 우리 인간이다. 이게 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과 서기관들이 했던 겁니다.
오늘날 교회 다니는 사람하고 한번 비교를 해보세요. 차이 납니까? 전혀 안 나죠. 교회에 들어갈 때 두 발을 디뎌서 들어가잖아요. 이 두 발을 가지고 자기의 행함으로 보는 겁니다. 그렇죠. 두 손을 모았다. 힘줄이 작용해서 두 손을 모았을 때에 자기의 행함으로 보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내 행함에 의해 교회 와서 예배드린 것이 돼요. 예배에 정신을 집중시켰다. 정신을 집중시키고 목사님 말씀에 집중했다. 그러면 집중을 누가 했느냐 하면 내가 했죠. 옆 사람이 한 게 아니고, 집에 강아지가 한 게 아니고 내가 했잖아요.
그래서 행함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내가 하는 행함, 그 행함이 나에게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겁니다. 더 나아가서 인간의 자기의미라고 하는 것은 행했을 때에, 행함 그것을 추적하고 그것을 평가함으로써 자기라는 의미를 평가받는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평소에 그렇게 살아가니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것을 뒤엎어버립니다. 여기 마태복음 21장 28절에 보면,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자,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했습니다. 이거는 노동입니다.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는 것. 자,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라고 했으니까, 아버지가 두 아들에게 노동을 명한 거죠. 노동을 명했으니까 두 사람은 자기의 행함으로 노동하면 되거든요. 간단한 문제죠. 포도원에 일을 하라고 했으니까, 자기가 일을 하는 행함을 하면 되죠. 노동이니까.
인간의 주체가 된 이상은, 인간의 노동과 행함은 동일해요. 왜? 주체가 동일하기 때문에. 내가 노동하는 것하고 내가 행하는 것하고 같은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배드리는 것은 노동이에요. 유대인들도 그렇게 생각했고.
헌금하는 것도 노동이에요. 그 무거운 오만 원짜리를 들고 매미채 속에 넣으니까 이게 얼마나 큰 노동이에요. 여기 노동에 힘줄만 동원된 것이 아니고 정신도, ‘낼까? 말까? 오만 원 너무 심하니까 만원만 낼까?’ 이렇게 얼마나 갈등이 생기겠어요. 이게 전부 다 내가 주체가 된 내 노동이 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아버지 입장에서, 예수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딱 끄집어낼 때 이 이야기를 듣는 바리새인들은 뭐라고 생각합니까? “그래서 어쩌란 말이야? 그래 포도원에서 농사일 했다 이 말이지?”라고, 사람들은 인간의 노동, 인간의 행함이라는 결과에 주목할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은 결과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습니다. 29절,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30절,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31절, “이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아버지의 뜻은, 처음에 이야기한 아버지의 뜻은 처음에 자기 포도원에 누가 오든 일만 잘 되면 돼요. 이게 아버지의 뜻이라고 바리새인들은 생각하고 오늘날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한 거예요. 교회 목사가 설교하는데 교인들이 온 사람이 있고 교인들이 안 온 사람이 있다 이 말이죠.
교인들을 목사가 그렇게 신경 쓰고, 예배당 뒷자리에 왔다 갔다 하면서 머릿수 세는 사람 있잖아요. 계수하는 사람. 전도사. 전도사가 숫자 세잖아요. 숫자 셀 때 중요한 것은 지난주에 250명이 왔는데 이번 주에는 250명에서 약간 더 오면 기분이 좋아요. 한 270명이 왔다고 하면 기분이 좋은 거예요. 나중에 목사한테 보고할 때, “목사님, 이번에는 20명이 더 왔습니다.”라고 보고하면 기분이 좋은 거예요.
그러나 주님이 강단에 섰을 때는 뭐로 봅니까? 250명이고 3,000명이고 30,000명이와도 소용이 없어요. 뉘우치고 왔느냐를 보는 거예요. 뉘우치고 왔는가를. 뉘우치려면 앞에 뭐가 필요 하느냐 하면, 예수님 말씀에 의하면 “싫소이다.”, “아버지의 말에 순종 못하겠어요. 순종 안 할 거예요.”라는 그 마음을 발견하고, 그게 내 본심이고 본질이라는 것을 끄집어내는 것. 그게 아버지께서 얻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싫소이다. 안 가겠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미쳤나! 내가 천당에만 신경 쓰게. 죽어서 돈 벌기도 바쁜데.”라는 본심이 어디에 들어있다? 바로 내 안에 본심으로 장착되어 있고 들어있음을 본인이 그걸 아는 거예요. 어떤 경우에? 주의 말씀이 왔을 때에.
자, 처음부터 이야기를 다시 해봅시다. 유대인들은 말씀이 오게 되면 그냥 지키기만 하면 된다고 하죠.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주의 율법이든지 뭐가 오게 되면 거기에 대해서 반드시 뭐로 마중 나가게 되어 있느냐 하면, “싫습니다. 안 하겠습니다. 나는 못합니다.”라는 것이 인간 속에 이미 들어있음을 본인이 자각을 하는 거예요. 그걸 발견해 내는 겁니다. 그게 율법의 기능입니다.
그 율법의 기능의 완성이 뭐냐 하면 예수님의 존재고 사역이거든요. 예수님의 십자가고. 그러면 예수님의 모든 말씀, 사도바울의 모든 말씀, 사도요한, 사도베드로의 모든 말씀, 신약성경 편지들의 모든 말씀은 결국 우리에게 뭘 들추어내는 겁니까? 그 말씀에 대해서 강력하게 거부하고 싫다고 저지하는 그것이 내 안에 그동안 꾸준히 주인공으로서, 본 주인으로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주의 말씀을 통해서 비로소 발각당하는 것입니다. 들킨 거예요.
이야기를 계속해봅시다. 31절, “이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세리와 창기는 그 당시의 바리새인에 의하면 천국 갈 때에 뒷줄에 있는 사람이에요. 제일 앞줄에는 누가 있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 있고. 저 뒷줄에는 세리와 창기들이 있는 거예요. 이게 새치기가 용납이 될까요? 안 될까요? 새치기가 용납이 되지 않죠. 줄서서 가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이야기를 합니까? 뒤에 있는 사람이 앞에 있는 사람을 제치고 먼저 가버린 거예요. 누가? 세리와 창기가. 물론 조건이 있어요. 회개하는 세리, 회개하는 창기를 말하겠죠.
다시 말해서 “나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킬 수 없는 존재입니다.”라는 것을 인정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말씀에 그 기본이 있어요.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거예요. 그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것은 그냥 죄인이라고만 하면 안 되고, “기다려봐라. 내가 말씀 줄 테니까.”
예수님께서 쏟아내시는 그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세리와 창기와 진배없다는 것, 다를 바가 없다는 것, 누가 누구를 탓할 수 없는 입장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말씀으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따라서 천국은 누가 가느냐? 죄인들만 가죠.
이것이 바로 주님의 행함이 나의 어설픈 행함과 이렇게 중복이 되어야 해요. “나는 이 정도밖엔 안 돼.” 주님의 의로운 행함이 못난 나를 끄집어내는 그걸 통해서, 그 의가 이제는 그냥 주님의 고유의 의가 아니라 죄인까지 건져내는 의의 능력이 주님의 행함 안에, 주님의 노동 안에 들어있음을 인정하는 것, 그게 믿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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