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강-YouTube강의(인생)20181106-이 근호 목사
제 257강, 제목은 ‘인생’입니다. 얼마 전에 죽었던 나이 많은 가수 최희준씨가 이런 노래를 불렀죠. 하숙생이라는 노래에서 인생은 나그네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이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말씀과 유사해보이죠. 객이고 나그네라는 것, 우리의 본향은 하늘에 있다. 그러나 그 말을 그냥 대충 들어버리면, 가볍게 들어버리면, 그냥 고요히 시간 때우다가 그냥 천국에 가는 것처럼 그렇게 느껴질 수가 있어요.
이건 엄청난 오해입니다. 그 오해의 대표적인 시인이 있었으니 천상병이라는 시인입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라는 시거든요. 그거는 하나님을 너무 얕잡아보고 함부로 평했던 내용입니다. 소풍 왔다가 죽은 사람, 저는 분명히 장담합니다. 지옥 갑니다.
성경이 꽤 두꺼워요. 천상병 시인처럼 소풍 와서 놀다가 천당 가자는 그런 식이 아닙니다. 성경이 꽤 두꺼운데, 특히 구약이 더 두껍죠. 구약에 보면 선지자들이 나옵니다. 선지자들이 나오면 그 선지자들에게 인생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인생이 있겠죠. 그 대목을 제가 한번 읽어드리겠습니다. 과연 그냥 슬근슬근 놀다가, 시간이나 때우다가 죽어서 천당 가는지.
이사야 20장 2절에 보면,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에게 일러 가라사대 갈지어다 네 허리에서 베를 끄르고 네 발에서 신을 벗을지니라 하시매 그가 그대로 하여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하니라” 3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종 이사야가 삼년 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하여 애굽과 구스에 대하여 예표와 기적이 되게 되었느니라” 이래 되어 있어요.
이사야 선지자의 행적이 그냥 설렁설렁하고 심심해서 몸부림치는 그런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죠. 그럼 이사야의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무슨 이런 고생이 다 있습니까? 그럼 이렇게 벗은 몸으로 벗은 발로 살면 본인의 인생이 뭐 행복해요? 본인의 신체가 평안합니까? 벗은 몸과 벗은 발인데, 얼마나 남들이 비웃고 모멸감을 주겠어요?
고린도후서 11장에 보면 거기에 사도바울이 나옵니다. 사도바울의 행적을 보게 되면, 방금 읽었던 이사야의 행적 못지않아요. 24절에 보면,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절,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26절, “여러 번 여행의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중의 위험을 당하고” 27절,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사도바울이 무슨 나쁜 짓 했어요? 이러한 처참한 힘든 인생을 사는데, 큰 범죄를 저질렀습니까? 예수 믿기 전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너무 핍박해가지고 그 징벌을 이렇게 당하는 겁니까? 사도바울은 더 이상 저주는 없다고 했습니다. 그럼 이건 저주차원이 아니죠. 징벌차원도 아니에요. 징계차원도 아닙니다.
그럼 뭐냐, 그래도 이런 일을 당해도 마땅한 존재라는 것을 충분하게 알기에, 주님께서는 이런 힘든 일을 주저 없이 그에게 화살 쏘듯이 날려버린 겁니다. 사도바울은 본인을 알기에, 본인, 주님 주신 그 생명의 고귀함이 내가 이 땅에서 어떤 수모와 모멸을 당한다 할지라도 그건 나한테는 내가 받을 상급이라고 했어요. 로렉스 시계차고 해외여행가고 비행기타는 그런 상이 아니고, 고난 받으며 상을 받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는 그 자체가 세상이 알지 못하는 상을 받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자, 인생이 무엇이냐, 인생이란 사도바울이나 이사야 같은 경우에는 이렇게 매듭을 지을 수가 있습니다. 간단하게. 인생이란 낯선 죽음에 대한 내레이션Narration. 낯선 죽음, 우리 인간의 죽음이 아닌 특이한 죽음에 대한 해설, 또는 모든 인간이 잊어버렸던 그 죽음에 대한 해설. 그것이 사도바울이나 이사야가 보여주었던 인생입니다.
자기 인생을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 이렇게 고생했다고 그거 자랑질 하는 것이 아니에요. 나는 이렇게 수고했으니까 날 알아 도! 그걸 지금 기대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4장에도 그런 말씀이 나오는데요. 11절에 보면,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이게 바로 자기인생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에게 들이닥친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증거 하라는 주님의 지시를, 사도바울은 자기인생을 통해서 여과 없이, 주저 없이 그대로 다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에, 이거는 뭐냐 하면 타인과의 인생과 비교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네 인생이 힘들고 어려운 것은 남의 인생과 자기인생을 레이싱racing하기 때문에 그래요. 경주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덜덜거리는 고물차 몰고 스포츠카 못 따라가서 울고불고 하잖아요. 저기는 현찰 1억 갖고 있다가 다 빼앗기고. 나는 이런 경운기로 덜덜덜 거리면서 언제 저 앞서간 차를 따라잡느냐, 하고 엉엉~~ 울고 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 복음을 안다는 것은 1억과 바꿔서 1억과 함께 다 날아가 버렸어요. 전혀 복음을 아는 것이 아니고, 뭐냐 하면 남 못지않은 인생, 내 인생을 내레이션 하려고, 내 인생 이렇게 근사하고 남 못지않게 잘난 인생이라는 것을, 우리 집안이 이런 집안이라는 것을 자랑질 하려고, 자기인생을 살려고 그동안 애를 쓴 거예요.
그게 미흡하니까 주님 앞에 기도하는 겁니다. “주님 좀 도와 주이소!” 이러고 있는 거예요. 대구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실컷 하나님을 믿는 것은 뭐냐 내 것 지키려고 하나님을 믿는 거예요. 내 것 지키려고. 교회 오는 것이 자기 것 지키려고 오는 거예요. 그거 왜 지키느냐, 레이싱을 하는데 내 인생이 남 못지않은 인생이라고 자랑질 하려고요. 좀 뒤처지면 음매 기죽어~ 하고 기 팍 죽어있고. 좀 잘 되서 일본순회공연하면 음매 기살아~ 하고 으스대고.
도대체 뭘 보여주겠다는 거예요? 인생을 살면서? 성경이 왜 이렇게 두꺼운데요? 그저 내이야기만 거론하면 되는데, 내 이야기 없어요. 선지자이야기고, 사도이야기고, 중간에 예수님이야기 나옵니다. 모세가 느보 산에 올라가서 봤는데, 주님은 모세를 아주 약을 올려요. 느보 산 밑에가 약속의 땅입니다. 세상에! 안 보고 안 들어가면 속이나 편하죠. 뻔히 보고서도 “봤지? 못 들어가!” 모세보고 못 들어간다고 했어요.
그러면 모세의 걸음을 스톱시키는 이유가 뭡니까? 우리는 주님께서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는 거예요. 주님께서 지옥가라하면 지옥가야 되고, 약속의 땅, 천국에 들어가라 하면 들어가야 됩니다. 내 인생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주님의 지시가, 내가 붙잡으려고 하는 내 인생보다 더 소중하고 더 가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 이게 성도의 인생입니다.
주님을 증거하고, 주님을 설명하는 인생, 그럴 때 우리의 신분은 천사도 부러워하는 고귀한 인생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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