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강의

약점,인생 181106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11. 8. 07:45
2018-11-06 23:41:21조회 : 34         
유튜브(256강, 257강) 약점, 인생 181106이름 : 이근호 (IP:119.18.83.168)
 

256강            음성              동영상


257강             음성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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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 (IP:122.♡.170.138)18-11-07 22:26 
256강-YouTube강의(약점)20181106-이 근호 목사 

제 256강, 제목은 ‘약점’입니다. 사람은 자기에게 약점이 있다고 생각하죠. 그러면 당신이 갖고 있는 약점을 한번 설명해보라고 이렇게 한다면 자기 나름대로의, “이게 내 약점입니다.”라고 내놓을 거예요. 그러나 그것은 지금껏 자기가 자기를 정신 차리게 만들고, 자기가 생각했던 반듯한 자아를 유지하기 위해서 핑계거리로 내비치는 그런 약점이에요. 이런 약점을 내가 알고 있다는 것으로 인하여 내가 얼마나 반듯하게 살고 있느냐를 자랑질 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사사기에 나오는 삼손 같은 경우를 한번 보세요. 삼손은 머리카락으로 인하여 힘이 생겼다는 그것을 삼손은 절대로 약점으로 여기지 않았어요. 그것을 강점으로 여겼죠. 특히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여, 구분하여 세운 사람이다. 천사가 와서 탄생을 예고할 정도면 보통 사람이 아니잖아요. 다른 사람하고 다르다는 그것을 자신의 장점으로 여겼던 겁니다. 

근데 자신의 장점으로 여겼던 그것이 곧 자신의 약점이라는 사실을 삼손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삼손이 힘센 힘을 발휘에서 길가에 있는 사자를 때려죽였습니다. 아주 강한 사자를 때렸습니다. 그 때려죽이고 나중에 가보니까 모든 인간들이 두려워한 강한 사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습니다. 먹을 수 있는 포도당, 꿀이 나온 거예요.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블레셋 사람들에게 다가듭니다. 자신의 강점이 써먹을 데가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왜냐하면 그 강점은 자기에게만 해당이 되거든요. 아무도 모르잖아요. 그건 자기만의 비밀이 되는 거예요. 자기만의 비밀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과 나 사이에만 아는 특별한 하나님의 은총으로 간주하는 겁니다. 그걸 자기의 강점으로 생각했죠. 

블레셋 사람에게 수수께끼를 냅니다. 강한 것에서 단 것이 나왔다. 이런 결과를 낳게 되는, 거기에 숨겨있는 비밀을 나에게 제공하지 아니하면 너희들은 나에게 여러 가지 선물을 바쳐야 된다는 식으로 내기를 건 겁니다. 근데 그 삼손이 만약에 힘이 센 사람이 아니고 힘이 없다고 한다면 건방지게 그런 수수께끼를 내겠습니까? 안 내죠. 

자, 그러면 더 나아가서 삼손이 스스로 “나는 변변치 않는 인간이다. 나는 살아도 그만이고 지금 당장 죽어도 그만이다.”라고 생각한다면 삼손은 그런 수수께끼를 보란 듯이 제시를 안 했겠죠. 자기 머리카락이 힘이 있을 때, 사자를 이겼을 때, 삼손은 타인에 대해서 자기가 강하다고, 강점이라고 생각을 한 거예요. 

그런데 삼손은 뭘 놓쳤는가 하면은 남보다 더 뛰어난 점이 있다고 의식한 그것이, 남보다 더 못한 존재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방식이라는 것을 상상도 못한 거예요. 자, 신약에 와서 열두 제자가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 온갖 희한한 기적들을 경험했고, 본인들도 귀신을 쫓아내며 기적들을 행했을 때, 삼손과 똑같이 그들은 예수님 덕분에 남들보다 추가적으로 강점이 더 보태졌다고 생각을 한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그 강점을 남하고 비교하지 말고, 방향을 남에게 돌리지 말고, 본인에게 돌리면 참 좋았겠다, 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앞에 누굴 내세웠느냐 하면 어린아이 하나를 내세웠어요. 자, 어린아이가 세냐? 기적을 많이 행했던 제자들이 세냐? 이거는 누가 봐도 제자들이 월등하죠.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이야기를 합니다. “너희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이 앞에 뭔가 하나를 붙인다면 “너희가 어린아이와 같이 대수롭지 않은 존재가 되지 아니하면 너희들은 하늘나라에 못 간다.” 

마태복음 11장 25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기를, 예수님께서 복음 전하실 때 자기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보고 하는 말이,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6절,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모든 인간들은 강점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신경을 쓰면서 살아가는 것이 이 사회에 보편적인 사는 방식이 되었어요. 강자가 이긴다. 강자가 더 오래 살아남는다. 이것을 너나 할 것 없이 모두다 그걸 인식하고 있는 거예요. 

주님은 거꾸로 가는 겁니다. 반대로 가는 겁니다. 어린아이같이 되지 아니함을 감사한다고 하는 이 말은 아무나 어린아이가 되는 것이 아니고, 이 하나님의 품어있는 진정한 뜻을, 예수님이 이야기한 참된 뜻을 아는 것은 오직 아버지와 아들의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고 되어 있어요. 27절,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돈 1억을 가진 것과 돈 100원 가진 것과, 이 세상에서는 누가 강자에요? 1억을 가진 자가 강자죠. 어떤 사람은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나는 1억을 가져도, 나는 그것을 강자라고 교만을 떨지 않았습니다.”라고 우길 수가 있을 거예요. “나는 1억을 가져도 주님이 주신 은혜기 때문에 나는 주님이 중요하지 돈 1억이 중요하지 않다.”라고 평소에 그렇게 자부했을 거예요. 

그 사람은 본인이 본인의 약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약점이 뭔지 몰라요. 근데 보이스피싱 머시마(‘사내아이’의 방언. 경남, 전남)한테 걸려가지고 다 날려보세요. “뭐, 1억 휴지인데”하고서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합니까? 아니면 찔찔 웁니까? 찔찔 울죠. 집안 난리가 났습니다. 그 말의 필름을 반대로 돌려보세요. 뭐 돈 1억 뭐 주님이 주셨으니까 나는 대수롭게 여기지 않겠다고 하는데, 그게 뭐냐, 본인이 주제파악이 안 되는 거예요. 

아버지와 아들의 계시가 돈 1억보다 더 중요한 거예요. 근데 1억을 빼앗기기 전에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자신만만하게 “나 그거 믿습니다.” 이래 나온 거예요. 심지어 그걸 믿는 것을 자기의 강점으로 여겼던 겁니다. 제가 분명히 합니다. 인간은 약점 외에는 어떤 강점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약점 외에는. 모든 게 약점이에요. 

자기 마음 낮추는 것도 약점이고, 나는 어린아이같이 살고 있다고 해도 약점이고, 나는 믿음이 좋다고 하는 그것도 약점이고, 나는 주님만 바라봐, 나는 하늘나라만 소망한다고 하는 그것도 약점이에요. 인간은 약점 외에는 내놓을 것이 없습니다. 바로 그것을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작용하셔서 너한테는 약점만 있다는 사실을 들추어내는, 그렇게 될 때, 그 사람은 주님만이 강점이고 나는 주님 앞에서 모든 게 약점이라는 것을 비로소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 땅에서 얼마나 내 인생이 좌절되고 엉망진창이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천국에 간다는 것, 내가 천국이 어떤 세계인데 감히 거기에 갈 수 있느냐, 천국에 들어간다는 이 혜택! 이거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제가 설교시간에 그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다른 말로 하면 1억을 얻고도 지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라고 했거든요. 마태복음 16장 26절에서. 

그럼 이걸 반대로 해봅시다. 사람이 1억을 날려도 주님의 영생을 얻었으면 눈물 흘릴 일이 아니고, 아, 사태가 이렇게 돌아가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의 현실이 이게 실제상황이라는 것을, 또 다시 충격적인 요법으로 깨닫게 해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면 되는 겁니다. 

“나는 약점만 지니고 평생을 살아간다.”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미아 (IP:122.♡.170.138)18-11-07 22:27 
257강-YouTube강의(인생)20181106-이 근호 목사 

제 257강, 제목은 ‘인생’입니다. 얼마 전에 죽었던 나이 많은 가수 최희준씨가 이런 노래를 불렀죠. 하숙생이라는 노래에서 인생은 나그네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이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말씀과 유사해보이죠. 객이고 나그네라는 것, 우리의 본향은 하늘에 있다. 그러나 그 말을 그냥 대충 들어버리면, 가볍게 들어버리면, 그냥 고요히 시간 때우다가 그냥 천국에 가는 것처럼 그렇게 느껴질 수가 있어요. 

이건 엄청난 오해입니다. 그 오해의 대표적인 시인이 있었으니 천상병이라는 시인입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라는 시거든요. 그거는 하나님을 너무 얕잡아보고 함부로 평했던 내용입니다. 소풍 왔다가 죽은 사람, 저는 분명히 장담합니다. 지옥 갑니다. 

성경이 꽤 두꺼워요. 천상병 시인처럼 소풍 와서 놀다가 천당 가자는 그런 식이 아닙니다. 성경이 꽤 두꺼운데, 특히 구약이 더 두껍죠. 구약에 보면 선지자들이 나옵니다. 선지자들이 나오면 그 선지자들에게 인생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인생이 있겠죠. 그 대목을 제가 한번 읽어드리겠습니다. 과연 그냥 슬근슬근 놀다가, 시간이나 때우다가 죽어서 천당 가는지. 

이사야 20장 2절에 보면,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에게 일러 가라사대 갈지어다 네 허리에서 베를 끄르고 네 발에서 신을 벗을지니라 하시매 그가 그대로 하여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하니라” 3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종 이사야가 삼년 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하여 애굽과 구스에 대하여 예표와 기적이 되게 되었느니라” 이래 되어 있어요. 

이사야 선지자의 행적이 그냥 설렁설렁하고 심심해서 몸부림치는 그런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죠. 그럼 이사야의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무슨 이런 고생이 다 있습니까? 그럼 이렇게 벗은 몸으로 벗은 발로 살면 본인의 인생이 뭐 행복해요? 본인의 신체가 평안합니까? 벗은 몸과 벗은 발인데, 얼마나 남들이 비웃고 모멸감을 주겠어요? 

고린도후서 11장에 보면 거기에 사도바울이 나옵니다. 사도바울의 행적을 보게 되면, 방금 읽었던 이사야의 행적 못지않아요. 24절에 보면,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절,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26절, “여러 번 여행의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중의 위험을 당하고” 27절,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사도바울이 무슨 나쁜 짓 했어요? 이러한 처참한 힘든 인생을 사는데, 큰 범죄를 저질렀습니까? 예수 믿기 전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너무 핍박해가지고 그 징벌을 이렇게 당하는 겁니까? 사도바울은 더 이상 저주는 없다고 했습니다. 그럼 이건 저주차원이 아니죠. 징벌차원도 아니에요. 징계차원도 아닙니다. 

그럼 뭐냐, 그래도 이런 일을 당해도 마땅한 존재라는 것을 충분하게 알기에, 주님께서는 이런 힘든 일을 주저 없이 그에게 화살 쏘듯이 날려버린 겁니다. 사도바울은 본인을 알기에, 본인, 주님 주신 그 생명의 고귀함이 내가 이 땅에서 어떤 수모와 모멸을 당한다 할지라도 그건 나한테는 내가 받을 상급이라고 했어요. 로렉스 시계차고 해외여행가고 비행기타는 그런 상이 아니고, 고난 받으며 상을 받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는 그 자체가 세상이 알지 못하는 상을 받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자, 인생이 무엇이냐, 인생이란 사도바울이나 이사야 같은 경우에는 이렇게 매듭을 지을 수가 있습니다. 간단하게. 인생이란 낯선 죽음에 대한 내레이션Narration. 낯선 죽음, 우리 인간의 죽음이 아닌 특이한 죽음에 대한 해설, 또는 모든 인간이 잊어버렸던 그 죽음에 대한 해설. 그것이 사도바울이나 이사야가 보여주었던 인생입니다. 

자기 인생을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 이렇게 고생했다고 그거 자랑질 하는 것이 아니에요. 나는 이렇게 수고했으니까 날 알아 도! 그걸 지금 기대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4장에도 그런 말씀이 나오는데요. 11절에 보면,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이게 바로 자기인생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에게 들이닥친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증거 하라는 주님의 지시를, 사도바울은 자기인생을 통해서 여과 없이, 주저 없이 그대로 다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에, 이거는 뭐냐 하면 타인과의 인생과 비교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네 인생이 힘들고 어려운 것은 남의 인생과 자기인생을 레이싱racing하기 때문에 그래요. 경주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덜덜거리는 고물차 몰고 스포츠카 못 따라가서 울고불고 하잖아요. 저기는 현찰 1억 갖고 있다가 다 빼앗기고. 나는 이런 경운기로 덜덜덜 거리면서 언제 저 앞서간 차를 따라잡느냐, 하고 엉엉~~ 울고 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 복음을 안다는 것은 1억과 바꿔서 1억과 함께 다 날아가 버렸어요. 전혀 복음을 아는 것이 아니고, 뭐냐 하면 남 못지않은 인생, 내 인생을 내레이션 하려고, 내 인생 이렇게 근사하고 남 못지않게 잘난 인생이라는 것을, 우리 집안이 이런 집안이라는 것을 자랑질 하려고, 자기인생을 살려고 그동안 애를 쓴 거예요. 

그게 미흡하니까 주님 앞에 기도하는 겁니다. “주님 좀 도와 주이소!” 이러고 있는 거예요. 대구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실컷 하나님을 믿는 것은 뭐냐 내 것 지키려고 하나님을 믿는 거예요. 내 것 지키려고. 교회 오는 것이 자기 것 지키려고 오는 거예요. 그거 왜 지키느냐, 레이싱을 하는데 내 인생이 남 못지않은 인생이라고 자랑질 하려고요. 좀 뒤처지면 음매 기죽어~ 하고 기 팍 죽어있고. 좀 잘 되서 일본순회공연하면 음매 기살아~ 하고 으스대고. 

도대체 뭘 보여주겠다는 거예요? 인생을 살면서? 성경이 왜 이렇게 두꺼운데요? 그저 내이야기만 거론하면 되는데, 내 이야기 없어요. 선지자이야기고, 사도이야기고, 중간에 예수님이야기 나옵니다. 모세가 느보 산에 올라가서 봤는데, 주님은 모세를 아주 약을 올려요. 느보 산 밑에가 약속의 땅입니다. 세상에! 안 보고 안 들어가면 속이나 편하죠. 뻔히 보고서도 “봤지? 못 들어가!” 모세보고 못 들어간다고 했어요. 

그러면 모세의 걸음을 스톱시키는 이유가 뭡니까? 우리는 주님께서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는 거예요. 주님께서 지옥가라하면 지옥가야 되고, 약속의 땅, 천국에 들어가라 하면 들어가야 됩니다. 내 인생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주님의 지시가, 내가 붙잡으려고 하는 내 인생보다 더 소중하고 더 가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 이게 성도의 인생입니다. 

주님을 증거하고, 주님을 설명하는 인생, 그럴 때 우리의 신분은 천사도 부러워하는 고귀한 인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