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강-YouTube강의(전쟁)20181003-이 근호 목사
제 253강, 제목은 ‘전쟁’입니다. 전쟁하면 젊은 사람들이 하는 거고. 전쟁이라 하는 것은, 전쟁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전쟁은 어쩔 수 없이 하는 겁니다. 대표적인 것이 시리아 전쟁이죠. 시리아전쟁. 일반주부들, 보통사람들은 나라에 내전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일어나는 이유가 하나의 방아쇠처럼 특이점이 발생되죠. 그것은 뭐냐 하면 억울한 피해자가 발생될 때에 전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전쟁을 할 필요가 없어요. 만약에 누가 억울하잖아요. 억울하면 그냥 억울한 대로 감수하면 돼요. 전쟁이 일어날 필요가 없어요. 잘 된 사람은 잘 먹고 잘 살라고 하면 그만이에요.
그래서 성경에 믿음을 정의할 때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당했기 때문에 내가 심판하겠다고 하면 그건 백퍼센트 믿음이 아닙니다. 제가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반 믿고 반 안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고. 다 믿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믿음이라고 할 때는 무엇과 결부시키느냐 하면 니가 나서서 보복하지 마라. 복수하지 마라. 심판은 심판자에게 맡기라. 심판은 심판주에게 맡기고 니는 나서서 복수하지 마라.
왜냐하면 니가 과연 남을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것은, 니 속에 어떤 억울함 때문에 그런 것인데, 니가 정말 억울하냐? 라는 거예요. 만약에 어떤 사람이 40대까지 살았는데, 40대에 억울한 일을 당했다. 도저히 참는 것은 못 견디겠다. 내가 복수해야겠다. 이런 사람이 있다면, 그러면 한 살부터 사십 살까지 누가 키워줬습니까? 누가 사십 살까지 살게 하셨어요? 하나님이잖아요. 하나님께서 살게 해서 살았다고요.
뭐, 살만한 잘난 것이 있어서 키워준 게 아닙니다. 봐주면서, 서른다섯 살 때 죽을 수 있었고, 스물두 살 때 죽을 수도 있었고, 열두 살 때 까불다가 교통사고 날 수도 있었고, 아홉 살 때 병으로 죽을 수도 있었어요. 계속 사십까지 끌고 온 거예요. 그것도 억지로 질질 끌고 온 겁니다. 근데 사십 살이 되었다고, 지가 지 힘으로 살았다고 우기면서 복수하겠다고 하는 것은 주제 넘는 거예요.
그럼 복수하지 말라는 이 말은 뭐냐 하면, 그전에 항상 우리 마음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내 인생은 내가 이만큼 살게 했다는 그 불신앙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누가 그걸 툭 건드리니까 와락 하고 달려들면서, 니가 뭔데 내 가치를 훼손시키느냐, 너도 당할 만큼 당해보라고 본인이 복수에 나서는 겁니다.
그럼 이 세상은 복수나 이런 것이 없다면 전쟁도 없는 거죠. 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뭔가 당했을 때에,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하잖아요. 그러면 누구도 전쟁이 없어야 되느냐, 근데 보세요. 세상에 전쟁들이 많잖아요. 우리가 주목할 것은 세상의 전쟁에 주목할 게 아니고, 이스라엘이 했던 전쟁에 주목해야 해요. 이거 특이합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그냥 사람이 세운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 가운데 계시고, 하나님이 자기 자신의 뜻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서 택한 백성으로 만든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나라의 전쟁은 그냥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이 벌이시는 전쟁을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모습으로 이스라엘은 전쟁을 하게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 전쟁을 하면서 아주 특이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그 중의 하나를 예로 든다면 소년 다윗과 골리앗과의 전쟁입니다. 소년 다윗은, 원래 골리앗이 이스라엘 장정들에게 우리 일대일로 붙어가지고 이긴 사람이 다 갖자고 시비를 걸 때 소년 다윗은 없는 존재입니다. 없었어요. 블레셋 진영과 이스라엘 진영, 양쪽 사이에 그 어디에도 소년 다윗은 없어요.
그럼 소년 다윗이 없는 상태에서, 소년 다윗이 개입했는데 빠진 상태에서, 그 이스라엘과 블레셋 전쟁에서는 누가 이겼느냐 하면, 누가 큰소리쳤느냐 하면 블레셋이 큰소리 친 겁니다. 골리앗이 비겁하게 나오라 이 말이죠. 남자답게. 그러면 소년 다윗이 개입하지 않는 전쟁은 아무리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대치해도 둘 다 똑같은 족속들이에요. 힘에 의해서 이미 결판난 전쟁입니다.
왜냐하면 골리앗은 키가 컸잖아요. 그 키에, 그 힘에 이스라엘은 완전히 오금을 못 폈습니다. 주눅 들었습니다. 이미 패배한 거예요. 누가 봐도 그것은 골리앗하고 일대일로 붙을 장사는 없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이미 블레셋에 점령당한 거예요. 하나님께서 형 도시락 챙겨주려 간 막내아들 소년 다윗을 그 전쟁터에 끼어 넣었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전쟁의 방식입니다. 일단 인간들이 벌이는 전쟁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주시는 거예요. 고린도전서 6장에 그런 것이 있죠. 성도끼리는 재판하지 말라고. 세상 판사 앞에 나가서 누가 옳습니까? 하지 말라고. 그냥 지면 돼요. 속임을 당하면 되는 겁니다. 사기당하면 돼요. 왜? 그 사람이 사기를 친 게 아니고 주님께서 당하게 하셨기 때문에.
그리고 성도는 그런 식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런 식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살림을 받았어요. 성도로 키우시는 것은 성도가 아닙니다. 주님이 친히 키우시는데, 때로는 사기 당하게 하고 때로는 실패하게 만들고. 뭐, 성도의 뜻은 하나님에 의해서 매일같이 좌절당하죠. 이스라엘만큼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고백해야 됩니다. 성도만큼은 주님 앞에서,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돼요.
어느 정도로 아무것도 아니냐 하면은, “지금 죽어도 상관없습니다.”라고 할 정도로 아무것도 아니어야 돼요. 사람이 살고자 하니까 자꾸 남에게 복수하고, 남 탓하고, 남에게 씩씩거리고, 남을 원망하고 그런 겁니다. 더 살고 싶어서. 이만큼 살려줬으면 됐잖아요. 어떤 애가 고등학교 2학년 때 배타고 수학여행 가다가 물에 빠져죽었다. 세월호가 빠져서 세월호와 함께 날아갔다.
뭐? 뭐 어쩌라고? 열여섯 살까지 살았으면 됐잖아요. 뭐, 꼭 열일곱 살까지 살아야 될 법적인 근거가 있습니까? 인간은 반드시 열일곱 살까지 살아야 되고 하는 뭐 법적인 규칙이 있어요? 없지요. 왜 그들이 같은 국민을 향하여 복수해야 돼요? 망대가 넘어져서 열여덟 명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하나님이 죽인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망대 무너지게 하신 겁니다.
싸움을 할 때는 하나님의 싸움이지 우리의 싸움은 의미 없어요. 우리가 이 세상을 이겼다고 칩시다. 천국 갑니까? 이김에서 오는 교만 때문에 지옥 가죠. 부자와 거지 나사로 사이에서 누가 이겼어요? 세상 적으로. 당연히 부자가 이겼죠. 거지 나사로는 졌습니다. 진 사람이 천국가요. 뭐 하나님의 힘 빌려서 이 땅에서 이긴다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이긴 사람이 어디에 갔습니까? 지옥 갔습니다. 잠깐 팔십 인생 살면서 실컷 이겨놓고 영원토록 지옥가고. 헛장사한 거예요. 그야말로 바보죠. 우리도 그 바보의 길로 가야됩니까? 사람들이 우르르 넓은 길로 갔는데 우르르 지옥 갔더라. 어떤 사람은 찾는 이도 없는데 좁은 길로 갔더라. 근데 가보니까 영생이더라. 장사 남는 장사 했잖아요.
하여튼 세상 갈수록 말씀 안 들어요. 하여튼 주의 말씀은 어떻게 그렇게 안 듣는지. 소위 성도라고 하면서도, 교인이라고 하면서도 어떤 자기 성공, 완벽한 승리를 내다보고 있어요. 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소년 다윗의 전쟁은 먼저 소년 다윗부터 이거는 내 전쟁이 아니고, 주님이 나 같은 인간을 들어서 쓴다는 것에, 이미 소년 다윗은 골리앗하고 붙기 전부터 소년 다윗은 골리앗을 이긴 것입니다.
그냥 전쟁만 하지 말고 이미 이긴 자로, 이긴 채로 이 세상에서 전쟁에 나섭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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