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강의

웃음.전쟁 181002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10. 4. 08:12
2018-10-02 23:49:53조회 : 36         
유튜브 강의 (252강, 253강) . 웃음, 전쟁 181002이름 : 이근호 (IP:119.18.83.168)
 

252강        음성               동영상


253강        음성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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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 (IP:122.♡.170.138)18-10-03 23:09 
252강-YouTube강의(웃음)20181003-이 근호 목사 

제 252강, 제목은 ‘웃음’입니다. 웃을 때는 여유 있을 때 웃죠. 근데 그 여유가 늘 간다는 보장은 없잖아요. 전도서에 보면 웃을 때도 있는 반면에 울 때도 있다고 했습니다. 울 때가 되면 웃는 이게 소용이 없습니다. 다 지난 간 거예요. 신나게 웃었던 거, 울 때가 되면 그 전에 신나게 웃었다고 해서 우는 것이 완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줄어드는 것이 아니에요. 

사람이 웃을 때는 실컷 그 웃음이 계속 간다고 자부하고 실컷 웃죠. 그리고 울 때는 이제는 이 울음이 계속 간다고 생각하고 절망적으로 우는 겁니다. 이처럼 인간의 웃는 것과 우는 것은, 인간이 놀아난다고 보면 됩니다. 어디에 놀아나느냐 하면 자신이 생각했던 환경에 또는 현실에 완전히 놀아나고 있는 거죠. 

그래서 웃으려면 계속 웃어야 되고, 울려면 계속 울어야 되는 것은, 그것은 확정되고 고정된 환경이 주어지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울고 싶거든 지옥 가서 영원토록 원 없이 우시고, 천국가게 되면 울고 싶어도 울 일이 없어요. 계속 웃어야 해요. 따라서 우리 성도에게 주신 복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이 세상에서 살 때는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는데, 이제는 그러한 변화에 그만 놀아나라고 하는 영원한 웃음을 주께서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웃는 환경은, 우리가 어떤 환경을 기대하면 영원히 웃을 수가 있느냐? 그 환경은 우리가 만드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히 웃으시는 환경을 만드셨어요. 하나님이 영원히 웃으시는 그 세계에, 성도가 거기에 참여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영원히 하나님이 웃으시는 환경은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시편 2편 4절에 나옵니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셨다는 것은 세상 돌아가는 그 상황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만족스럽다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하나님이 웃으시는데, 지상에서 어떤 경우에 웃으시냐하면,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하나님 보시기에 비웃음이 될 상황이 연속될 때에, 그때 하늘에 계신 분이 웃으십니다. 

시편 2편 4절을 계속 읽어보면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비웃을만한 대상이 생겨났을 때 하나님께서는 웃으십니다. “내 그럴 줄 알았다.”라는 겁니다. “너희들이 헛짓할 줄 알았다”라는 겁니다. 사람으로서의 소원이 있다면 한 번도 슬퍼하지 않고 슬플 일도 없고 계속 웃을 수 있는 일만 계속되기를 원하죠. 

그런 경우가 인간세계에도 있어요. 어떤 경우냐 하면 결혼식 날 신랑신부가 잠시 그런 모습을 보입니다. 뭐 결혼식 날에 식장에 들어오면서 눈물 흘리는 사람도 있는데, 그거는 슬퍼서 우는 것이 아니고 너무 감격스러워서 우는 거죠. “세상에! 이런 날이 다 오다니! 이럴 때가 오다니!”라고 해서, 너무 좋아서 우는 거죠. 좋아서. ‘그냥 이대로 행복감을 가지고 줄곧 갔으면 좋겠다. 아마 계속 행복할 거야.’ 지가 지 맘대로 그렇게 생각하고 식장에 들어오면서 눈물 흘리는데 그건 웃는 겁니다. 극단의 웃는 거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웃어야 될 천국의 조건은, 이 땅에서 비웃을 수밖에 없는, 하나님께서 심판하고 저주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을 보면서 하늘의 하나님께서 웃으시고 그 웃음으로 지상에 대해서는 비웃으시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이 사는 이 세상이 문제가 있다는 뜻이죠. 문제 있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어디까지 문제가 있는지는 모르죠. 

마태복음 6장에 보면, 주기도문하시고 주기도문 끝에 이런 대목이 나와요. 14절에 보면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15절,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라고 되어 있어요. 

이 세상에는 뭐가 있다는 뜻이냐 하면, 용서의 필요한 일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걸 과실이라, 잘못한 일이라. 사람이 잘못한 일은 자기가 알아서 잘못한 경우가 있지만 그것은 거의 일부고요. 대부분은 자기 딴에 잘한다고 하는 짓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과실이 되는 겁니다. 

같은 인간들끼리 견줄 때에 서로 고만고만하고, 너도 그런 일 하고 나도 그런 일 하고, 둘 사이에는 과실이 전혀 나타나 보이지 않아 보입니다. 왜냐하면 둘 다 똑같은 일을 하기 때문에.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어떻습니까? 둘 다 잘못됐다면 둘 다 과실이 있는 거예요. 따라서 이 과실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사람한테 하는 과실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잘못된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이 자기 과실을 알려면 뭘 봐야 하느냐 하면 성경을 봐야 해요. 성경은 잔소리거든요. 인간들이 잔소리를 얼마나 싫어하는지를 잘 알지만, 주님께서는 인간들이 싫어하는 잔소리를 앞장세워서 말씀을 가지고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나타나는 것을 보면 도저히 이건 인간의 힘으로서는 그 과실을 저지르지 않는다는 것이 불가능하거든요. 

마태복음 6장 31절에 보면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런 것 가지고 염려하지 말라는 겁니다. 아, 이건 정말 모험일수도 있고 터무니없는 일일수도 있어요. 그거는 이방인들이 구하는 겁니다. 이방인이나 우리나 다 이방인이니까. 이방인들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이게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염려의 총체에요. 

기본적으로 인간은 염려할 수밖에 없는 몸을 지니고 태어났습니다. 이게 과실이에요. 이게 잘못된 겁니다. 잘못된 것을 안다고 할지라도 어떻게 이 잘못된 것을 앞으로 하지 않겠다고 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비웃는 일이라 할지라도,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이 비웃는 일만 할 줄 모를 때에 어떡하란 말이죠? 

다시 말씀드려서 인간이 영원히 웃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웃음에 동참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인간들은 좀 마실 것, 입을 것 생기고 비행기 타고 일본공연하고 오면 막 기분이 좋아가지고 계속 이렇게 가는 것이 아닌지, 그래가지고 기분이 업(up)되어서 난리도 아니죠. 사람들이 자기를 인정해주니까. ‘나도 존재감이 있고 존재의 가치가 있구나.’ 그러나 그런 것이 바로 과실이에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요한계시록 21장 4절에 보면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오늘 울었던 나도 지나가고 웃었던 나도 지나가고. 울던 일도 지나가고 애통했던 것도 지나가고. 주께서 싹쓸이 청소를 해주시는 거예요. 

청소를 하고 난 뒤에 남는 것이 뭐냐 하면은 요한계시록 21장 8절에 보게 되면,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 하리니” 그런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고, 9절에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결혼식 하는 겁니다.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결혼식 때 입이 째진다고요. 좋아가지고. 이거는 신랑 잘 만나서 그런 거예요. 신랑이 우리의 과실을 용서하게 되면 용서받은 우리가 영원한 신부가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웃음에 참여한 자들입니다.

 이미아 (IP:122.♡.170.138)18-10-03 23:44 
253강-YouTube강의(전쟁)20181003-이 근호 목사 

  

제 253강, 제목은 ‘전쟁’입니다. 전쟁하면 젊은 사람들이 하는 거고. 전쟁이라 하는 것은, 전쟁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전쟁은 어쩔 수 없이 하는 겁니다. 대표적인 것이 시리아 전쟁이죠. 시리아전쟁. 일반주부들, 보통사람들은 나라에 내전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일어나는 이유가 하나의 방아쇠처럼 특이점이 발생되죠. 그것은 뭐냐 하면 억울한 피해자가 발생될 때에 전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전쟁을 할 필요가 없어요. 만약에 누가 억울하잖아요. 억울하면 그냥 억울한 대로 감수하면 돼요. 전쟁이 일어날 필요가 없어요. 잘 된 사람은 잘 먹고 잘 살라고 하면 그만이에요. 

  

그래서 성경에 믿음을 정의할 때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당했기 때문에 내가 심판하겠다고 하면 그건 백퍼센트 믿음이 아닙니다. 제가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반 믿고 반 안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고. 다 믿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믿음이라고 할 때는 무엇과 결부시키느냐 하면 니가 나서서 보복하지 마라. 복수하지 마라. 심판은 심판자에게 맡기라. 심판은 심판주에게 맡기고 니는 나서서 복수하지 마라. 

  

왜냐하면 니가 과연 남을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것은, 니 속에 어떤 억울함 때문에 그런 것인데, 니가 정말 억울하냐? 라는 거예요. 만약에 어떤 사람이 40대까지 살았는데, 40대에 억울한 일을 당했다. 도저히 참는 것은 못 견디겠다. 내가 복수해야겠다. 이런 사람이 있다면, 그러면 한 살부터 사십 살까지 누가 키워줬습니까? 누가 사십 살까지 살게 하셨어요? 하나님이잖아요. 하나님께서 살게 해서 살았다고요. 

  

뭐, 살만한 잘난 것이 있어서 키워준 게 아닙니다. 봐주면서, 서른다섯 살 때 죽을 수 있었고, 스물두 살 때 죽을 수도 있었고, 열두 살 때 까불다가 교통사고 날 수도 있었고, 아홉 살 때 병으로 죽을 수도 있었어요. 계속 사십까지 끌고 온 거예요. 그것도 억지로 질질 끌고 온 겁니다. 근데 사십 살이 되었다고, 지가 지 힘으로 살았다고 우기면서 복수하겠다고 하는 것은 주제 넘는 거예요. 

  

그럼 복수하지 말라는 이 말은 뭐냐 하면, 그전에 항상 우리 마음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내 인생은 내가 이만큼 살게 했다는 그 불신앙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누가 그걸 툭 건드리니까 와락 하고 달려들면서, 니가 뭔데 내 가치를 훼손시키느냐, 너도 당할 만큼 당해보라고 본인이 복수에 나서는 겁니다. 

  

그럼 이 세상은 복수나 이런 것이 없다면 전쟁도 없는 거죠. 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뭔가 당했을 때에,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하잖아요. 그러면 누구도 전쟁이 없어야 되느냐, 근데 보세요. 세상에 전쟁들이 많잖아요. 우리가 주목할 것은 세상의 전쟁에 주목할 게 아니고, 이스라엘이 했던 전쟁에 주목해야 해요. 이거 특이합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그냥 사람이 세운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 가운데 계시고, 하나님이 자기 자신의 뜻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서 택한 백성으로 만든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나라의 전쟁은 그냥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이 벌이시는 전쟁을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모습으로 이스라엘은 전쟁을 하게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 전쟁을 하면서 아주 특이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그 중의 하나를 예로 든다면 소년 다윗과 골리앗과의 전쟁입니다. 소년 다윗은, 원래 골리앗이 이스라엘 장정들에게 우리 일대일로 붙어가지고 이긴 사람이 다 갖자고 시비를 걸 때 소년 다윗은 없는 존재입니다. 없었어요. 블레셋 진영과 이스라엘 진영, 양쪽 사이에 그 어디에도 소년 다윗은 없어요. 

  

그럼 소년 다윗이 없는 상태에서, 소년 다윗이 개입했는데 빠진 상태에서, 그 이스라엘과 블레셋 전쟁에서는 누가 이겼느냐 하면, 누가 큰소리쳤느냐 하면 블레셋이 큰소리 친 겁니다. 골리앗이 비겁하게 나오라 이 말이죠. 남자답게. 그러면 소년 다윗이 개입하지 않는 전쟁은 아무리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대치해도 둘 다 똑같은 족속들이에요. 힘에 의해서 이미 결판난 전쟁입니다. 

  

왜냐하면 골리앗은 키가 컸잖아요. 그 키에, 그 힘에 이스라엘은 완전히 오금을 못 폈습니다. 주눅 들었습니다. 이미 패배한 거예요. 누가 봐도 그것은 골리앗하고 일대일로 붙을 장사는 없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이미 블레셋에 점령당한 거예요. 하나님께서 형 도시락 챙겨주려 간 막내아들 소년 다윗을 그 전쟁터에 끼어 넣었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전쟁의 방식입니다. 일단 인간들이 벌이는 전쟁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주시는 거예요. 고린도전서 6장에 그런 것이 있죠. 성도끼리는 재판하지 말라고. 세상 판사 앞에 나가서 누가 옳습니까? 하지 말라고. 그냥 지면 돼요. 속임을 당하면 되는 겁니다. 사기당하면 돼요. 왜? 그 사람이 사기를 친 게 아니고 주님께서 당하게 하셨기 때문에. 

  

그리고 성도는 그런 식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런 식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살림을 받았어요. 성도로 키우시는 것은 성도가 아닙니다. 주님이 친히 키우시는데, 때로는 사기 당하게 하고 때로는 실패하게 만들고. 뭐, 성도의 뜻은 하나님에 의해서 매일같이 좌절당하죠. 이스라엘만큼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고백해야 됩니다. 성도만큼은 주님 앞에서,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돼요. 

  

어느 정도로 아무것도 아니냐 하면은, “지금 죽어도 상관없습니다.”라고 할 정도로 아무것도 아니어야 돼요. 사람이 살고자 하니까 자꾸 남에게 복수하고, 남 탓하고, 남에게 씩씩거리고, 남을 원망하고 그런 겁니다. 더 살고 싶어서. 이만큼 살려줬으면 됐잖아요. 어떤 애가 고등학교 2학년 때 배타고 수학여행 가다가 물에 빠져죽었다. 세월호가 빠져서 세월호와 함께 날아갔다. 

  

뭐? 뭐 어쩌라고? 열여섯 살까지 살았으면 됐잖아요. 뭐, 꼭 열일곱 살까지 살아야 될 법적인 근거가 있습니까? 인간은 반드시 열일곱 살까지 살아야 되고 하는 뭐 법적인 규칙이 있어요? 없지요. 왜 그들이 같은 국민을 향하여 복수해야 돼요? 망대가 넘어져서 열여덟 명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하나님이 죽인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망대 무너지게 하신 겁니다. 

  

싸움을 할 때는 하나님의 싸움이지 우리의 싸움은 의미 없어요. 우리가 이 세상을 이겼다고 칩시다. 천국 갑니까? 이김에서 오는 교만 때문에 지옥 가죠. 부자와 거지 나사로 사이에서 누가 이겼어요? 세상 적으로. 당연히 부자가 이겼죠. 거지 나사로는 졌습니다. 진 사람이 천국가요. 뭐 하나님의 힘 빌려서 이 땅에서 이긴다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이긴 사람이 어디에 갔습니까? 지옥 갔습니다. 잠깐 팔십 인생 살면서 실컷 이겨놓고 영원토록 지옥가고. 헛장사한 거예요. 그야말로 바보죠. 우리도 그 바보의 길로 가야됩니까? 사람들이 우르르 넓은 길로 갔는데 우르르 지옥 갔더라. 어떤 사람은 찾는 이도 없는데 좁은 길로 갔더라. 근데 가보니까 영생이더라. 장사 남는 장사 했잖아요. 

  

하여튼 세상 갈수록 말씀 안 들어요. 하여튼 주의 말씀은 어떻게 그렇게 안 듣는지. 소위 성도라고 하면서도, 교인이라고 하면서도 어떤 자기 성공, 완벽한 승리를 내다보고 있어요. 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소년 다윗의 전쟁은 먼저 소년 다윗부터 이거는 내 전쟁이 아니고, 주님이 나 같은 인간을 들어서 쓴다는 것에, 이미 소년 다윗은 골리앗하고 붙기 전부터 소년 다윗은 골리앗을 이긴 것입니다. 

  

그냥 전쟁만 하지 말고 이미 이긴 자로, 이긴 채로 이 세상에서 전쟁에 나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