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강-YouTube강의(목사의 실수)20181204-이 근호 목사
제 261강, 제목은 ‘목사의 실수’입니다. 목사의 실수는 교인들을 신자라고 여기는 것이죠. 왜 그러냐 하면은 목사는 인간과 신자를 구분할 때, 자기가 그 사람들에게 집어넣고 부여한 것, 애쓴 것, 투자한 것, 모든 기도와 간절함, 주 앞에 그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했다는 그런 공적을 그 사람의 변화를 통해서 뽑아내려고 해요.
마취 뭐와 같은가 하면, 이 앞에 올라오다보면 광고 하나 붙었거든요. 열 번 시술에 30만원이라고 해놓고, 뭘 시술하느냐 하면 종아리 살 빼는 것. 그리고 영화관 광고에 보면 이런 것이 있어요. 살색 곰을 팔에 붙여놓고 빼~ 라는 광고가 있어요. 이게 안 떨어지거든요. 테이핑해도 안 떨어지고. “그때는 이렇게 시술하시면 빠집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자, 시술은 뭐냐 하면 누구하나 고객이 왔는데, 또는 살 빼기 위해서 권투를 배우려고 왔는데, 권투하는 트레이너 입장에서는 뭘 봐야 되겠어요? 그 사람이 내가 가르친 대로, 내가 시킨 대로 잘 해가지고 올 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어떤 변화 같은 조짐을 보고 싶어 하겠죠. 왜냐하면 자기가 그만큼 그 사람한테 애쓰고, 기대하고, 투자한 어떤 결과물을 본인이 얻고 싶어 하는 겁니다.
10회에 30만원해가지고 종아리 살 뺀다고 했는데, 처음에 오고 두 번째 왔는데 종아리에 살이 그대로 있으면, 이건 돈을 물어줘야 하는 건지, 아무 효과가 없게 된다 이 말이죠. 그럴 때 효과 없음이라고 하는 그런 트레이너는 잘 없어요. 요가 강사들 잘 없습니다. 없는데도 불구하고 효과가 있다고 우기고 싶죠. 왜냐하면 자기가 투자한 것이 무의미로 끝나는 것을, 굉장히 자기 자존심과 관련해서 싫기 때문에 그래요.
이거는 꼭 헬스클럽의 트레이너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고, 심지어 농사짓는 사람들이 밭에다가 씨를 뿌려놓고 계속 그 수확을 기다리는 것과 똑같은 심정입니다. 모든 인간이, 가게에 인테리어 해놓고 인테리어 해놓은 것만큼 손님들이 만족해서 입소문내가지고 전에 보다 더 많은 손님들이 오기를 기대하는 것과 똑같은 거거든요.
그래서 이 목회라고 하는 것이, 이거는 교회운영뿐만이 아니고 모든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전부 다 이런 목회정신 같은 것이 다 적용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대통령이 새롭게 대통령이 되고 난 뒤에 계속해서 경제정책을 바꾸면서 통계를 주목하는 이유는, 내가 대통령이 되고 난 뒤에 얼마나 소득이 올랐는가를 신경 쓰는 거죠. 그래야 그 다음에 또 대통령이 될 수가 있잖아요. 서울시장이 되는 것도 마찬가지고. 여론조사에서 얼마나 만족도의 퍼센트가 높은가를 늘 주시하는 겁니다.
그래서 목사가 목회한다고 할 때에 하나님의 특별할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기존의 장사하는 사람이나 농사짓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가정주부도 마찬가지잖아요. 직장 그만두고 애들한테 올인 해가지고 걔들을 좋은 대학에 보내겠다고 할 때에 그 성적표에 점수 오르는 것에 늘 신경을 쓰겠죠.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이 자기가 애쓰고 투자한 그 결실을 자기가 눈으로 목격하고 싶은 거예요. 목회라고 해서 인간들의 일반적인 행함과 움직임과 달리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제가 말씀드리는 겁니다. 특별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에요. 주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목회가.
내 역량이 어느 정도며, 내 솜씨가 어느 정도며, 그 내 솜씨와 내 역량을 통해서 내가 과연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목사냐, 아니냐를 자꾸 측정하고 싶어 하고 점검하고 싶어 하는 겁니다. 그걸 확인하고 싶어 해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목자잖아요. 그 목자라는 단어를 쓴다는 것은 그 맞은편에 누가 있느냐 하면 양이라는 것이 있어요. 비유니까. 목자와 양 사이라는 비유가 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을 목자장이라고 하고 자기의 양떼를 돌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목자를 세울 때에, 성경에서는 가르치는 은사라고 하는데, 그걸 특별한 소양이나 자질이나 능력이 있기 때문이라는 이유 때문에 맡겼겠어요? 아니면 그거하고 상관없이 맡겼겠습니까?
예수님이 그 목사라는 사람에게 양을 위해서 맡길 때에, 그 목사가 만약에 자질이 출중하다고 한다면, 주님께서는 그 목사의 자질에 자기 양을 일임한 게 돼버려요. “니가 그렇게 대단한, 니가 양들을 양답게 만들어서 천국에 데려갈 정도로 그런 능력을 지녔기에, 내가 니한테 모든 것을 일임할게.”라고 해서 그 양들을 목자에게 맡기느냐 이 말입니다. 그렇지 않죠.
그러면 성경에 보면 그 양을 누구한테 맡기느냐 하면 성령이 있는 사람에게 맡겨요. 그걸 더 자세히 이야기하면 성령의 은사를 맡은 사람에게 맡기는 겁니다. 그럼 사실은 이게 맡긴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성령의 은사라고 하는 것이, 그 목사가 개인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성령의 은사가 목사보다 더 위에 있거든요. 성령의 은사라고 하는 것이 어떤 힘이라면, 그 힘 앞에 목사는 “꼼짝 마라!”가 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8장 9절에서 백부장이 고백한 그 고백 그대로,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이러거든요.
요한복음 21장에서 베드로에게 내 양을 치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 후에 나온 말씀이 뭐냐 하면 베드로에게 당부한 게 있어요. 18절에, 니가 원치 않는 길을 가게 하겠다는 겁니다. 그럼 여기서 예수님의 뜻은 베드로가 원치 않는 길이고, 그럼 거기에 연관되어 있는 것은 베드로가 자기고유의 원하는 것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베드로가 원하는 것, ‘아, 저 양은 주께서 맡기신 양이기 때문에 내 식대로 해봐야지.’라는 것이 베드로의 원하는 것이라 이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현장에 개입해가지고 베드로의 원치 않는 방법으로 양들을 대하게 될 때, 그럼 그 양은 결코 베드로의 양이 될 수가 없죠. 여전하게 꾸준히 누구의 양이 되느냐 하면은 예수님의 양이 되는 겁니다.
그럼 이렇게 복잡한 이야기를 간추려보게 되면, 말로만 저 양은 주님의 양이다, 저 양은 주님의 양이다, 저 양은 주님의 양이다, 라고 목사가 이렇게 말로만 그들에게 다가서고 자기가 마음먹는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그 양이 주님의 양이 되는 것이 아니고, 목사는 자기의 성깔이라든지, 성격, 경향성, 지가 나름대로 해보겠다는 스케줄, 계획, 이런 게 있는 거예요.
그걸 하나님께서 목사에게 허용하는 겁니다. 해봐라 이 말이죠. 다시 말해서 니 식대로 막 목회해라. 막 목회하는 가운데 뭐가 실패로 끝나느냐 하면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목사뿐만 아니고 인간은 뭔가 투자할 때에 기대치가 있지 않습니까? 기대하는 것이 있죠. 그 기대하는 것이 좌절되게 만들고 뜻대로 안 되게 될 때, 비로소 목사는 알죠.
내 자질과 능력을 내가 원하는 대로 사용할 수 없게 하셔서 저 양을 내 양이 아니고 주님의 양으로 만든다는 것. 이걸 목사가 알게 됩니다. 그래서 목사는 늘 실수하죠. 늘 실수하는 목회, 늘 실수하는 목사임을 아는 그 목사가 성령의 은사를 받은 목사입니다.
목사로 하여금 양을 치게 함으로 말미암아 양을 통해서 목사 자기 자신이 또 하나의 주님의 양으로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방식으로 주께서는 자기 양들을 맡기시는 거예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