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강-YouTube강의(현실)20180918-이 근호 목사
제 250강, 제목은 ‘현실’입니다. 현실이라는 것은 오늘날 사람들의 사회에서는 그게 당연한 단어죠. 근데 성경에서는 이 현실이라는 당연한 단어가 나오지 않습니다. 현실이라는 단어 말고 다른 단어가 사용되는데, 그게 바로 세상이라는 단어, 또 달리해서 세대라는 그러한 단어가 나와요.
그것은 하나님이 보시는 이 현실에 대한 안목과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는, 자기가 속해있는 현실이라는 안목과 다르죠. 그러니까 현실이라고 할 때는 현실 자체에 대해서 상당히 좋게 생각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현실 안에 누가 살고 있기 때문에, 본인이 살고 있기 때문에 그렇거든요. 현실을 믿지 않으면 뭘 믿겠어요? 현실 앞에 눈에 보인다는 말을 하나 더 집어넣을게요.
우리가 세상에서는 뭔가 믿고 살아야 하는데, 의지하고 살고 싶고, 기대고 살고 싶은데, 눈에 보이는 현실 말고 달리 기댈 것이 없잖아요. 그래서 현실은 좋든 싫든 간에, 이 현실이라는 것은 죽을 때까지 같이 가는 동네라고 그렇게 생각해서, 그 동네를 상당히 낭만적으로 좋게 봅니다.
나의 살던 고향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나의 살던 고향을 자기가 부정할 수가 없어요.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본인이 살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고향에 대해서 자기가 정을 붙이는 이유는 인간은 자기 자신이 안정감을 얻으려고 해요. 살면서 이리 휩쓸리고 저리 휩쓸리면 힘들잖아요. 정착하고 싶은 겁니다.
한번 정착해서 죽을 때까지 계속 편안하게 갈 수 있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최고의 행복중의 하나라고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너무 이리저리 변동사항이 일어나게 되면 사람이 불안해서 못삽니다. 괜찮은 동네를 발견해서 그 동네에서 이웃과 더불어서 편안히 사는 거예요. 마치 바구니에 과일을 담는다면, 열 개를 담는다면, 바구니에 담긴 그 과일 열 개를 보면서, 사과라든지 감을 보면서 우리는 뭘 느끼는가 하면 저 바구니에 담긴 과일은 참 안정되었다는 느낌이 들 거예요.
왜? 그 자리 안에 있으면 편안하잖아요. 우리는 자기가 사는 마을을 하나의 바구니로 생각하는 겁니다. 그 평온한 바구니에 자기가 거기에 하나의 일원으로서 들어가 있다면 그것처럼 안정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인간은 자기가 귀하기 때문에, 자기를 둘러싸서 보호해주는, 안정되게 지켜주는 그 마을을 굉장히 귀하게 생각합니다.
‘웰컴 투 동막골’이라는 영화가 있죠. 그 동막골이 6.25가 되기 전까지는 얼마나 평온하고 행복한 마을입니까? 6.25전쟁이 일어나서 사상적인 대결상태가 되어 엉망이 돼버린 그런 영화잖아요. 동막골처럼 우리도 6.25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전쟁 없이 그냥 편안하게 우리가 살 수 있는 그런 세계, 그런 세상을 꿈꾸기 때문에 우리 주위에 있는 현실이라는 것은 인생의 동반자 같은 것이고 나를 지켜주는 거예요.
그럼 이왕 지켜주는 것, 내가 그 주위환경을 잘 꾸미게 되게 되면 나에게 크나큰 이득을 가져다가 주겠죠. 교인들이 교회를 찾을 때 싸움하는 교회를 찾겠어요? 안정된 교회를 찾겠습니까? 복음 전하는 교회를 찾는 것이 아니고, 우선순위가 안정되고 편안해보이고 거기에 나오는 교인들이 다 밝아 보이고 그리고 거기에 나오는 교인들이 다 유복해보일 때, 여유가 만만해보일 때, 외지에서 떠돌이처럼 살다가 마음에 정들 곳은 교회밖에 없잖아요. 소위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 교회에 정붙이고 일원으로서 사랑받고 사랑주고, 이런 식이 교회가 주는 재미가 될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겠죠.
이처럼 교회의 현실이든, 또 어떤 사람은 아빠엄마가 싸우는 가정의 현실은 별로 안 좋아하겠죠. 그러면 친구가운데서 아빠엄마의 정이 너무 넘치는 가정이 있다면 부러워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아빠엄마에다가 동생 하나 내지 둘이 있고. 그 동생들은 왜 그렇게 예쁜지. 그리고 아빠는 내가 원하는 것을 다 사줄 수 있을 정도로 월급이 많은 가정. 집도 1층이 아니고 2층 정도 해가지고 동화책에 나오는 그러한 멋있는 저택에 살면, 아이들로서는 그냥 왕자처럼 살게 되겠죠. 그런 것이 바로 가정의 현실이에요.
제가 방금 교회의 현실을 이야기하고 가정의 현실이야기 하고, 그 다음에 직장을 다니는데 그 직장이 너무나 안정된 직장이고 사원들을 그냥 상사처럼 모시는 그런 훌륭한 사장님이 계시는 직장이라면 그거는 평생 그 직장에 충성해도 자기생계, 노후까지 다 책임질 수 있고, 자기 자식들에게 장학금까지 줄 수 있다면, 최고의 직장이죠. 오늘날 우리나라의 공기업처럼. 대학교 가면 대학교 공납금까지 다 나오고 유학금까지 보조되는 그러한 멋진 공무원이라는 공기업. 그게 바로 직장현실이죠.
그러니까 가정현실, 교회현실, 직장현실, 이 현실을 사람들이 마다하지 않습니다. 내가 어떻게 열심히 하게 되면 그것이 나에게 어떤 좋은 쪽으로 변경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희망을 품고 기대를 가지고 열심히 노력 봉사하겠죠. 그래, 그 현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악한 것이 없다는 것, 혹시 있을지라도 선한 쪽이 많을 거라고 여기는 것, 그 현실을 우리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자아의 대체물이라고 합니다. 두자로 이야기해서 우상이 되는 겁니다. 가정이되든, 교회가 되던, 직장이 되던, 그건 나의 우상이 되는 겁니다.
그 현실이 있음으로 해서 뭐가 빠지고 누락이 되느냐 하면, 나한테 문제가 있다는 것을 그 현실이 가르쳐주지를 않습니다. 나는 이만한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그것을 자꾸 긍정해줬을 뿐이죠. 그래서 세상에서는 자기에게 둘러싸여 있는 그 현실을 내놓고 자랑질을 하거든요. 니가 괜찮은 현실에 속했느냐, 내가 괜찮은 현실에 속했느냐, 니가 훌륭한 집안에 태어났느냐, 내 집안은 어떠냐, 이런 식으로. 니 직장은, 내 직장은, 이런 식으로 비교하고.
그런데 성경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로마서 12장에 보면 이 현실을,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했어요. 누가 잘나고 못나고 없다는 거예요. 우리 인간들이 기대고 싶고 의지하고 싶고 정붙이고 싶고 평생을 충성하고 싶은 이 세대, 이 세상이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아예 처음부터 어둡고 악한 세상이라는 겁니다.
그걸 못 본다는 것은, 그걸 못 보고 있다는 그 자체가 우리 자신에게 악을 유포하는 하나의 공모자가 되는 겁니다. 세상을 더욱더 악하게 만드는 공모자가 어떤 성질을 갖고 있느냐 하면 이 세상을 더욱더 집착하게 됩니다. 이 현실에 대해서. 내가 꿈꾸는 현실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 그것이 주님이 악하다고 하는 것에 해당되는 그 자리에서 더욱더 악한 쪽으로 머리가 돌아가는 거예요. 삶의 목적을 거기에다가 두는 겁니다.
아까 이야기한 교회현실도 그렇고. 이 교회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몰라요. 자기 편안하면 되고 안 싸우면 되고 편하게 지내면 그만이라는 거예요. 복음이 있느냐 없느냐는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이 교회가 처음 나온 나를 얼마나 사랑해주고 이뻐해주고, 뭐 도와줄 것 없습니까? 라고 하면서, 나를 적극적으로 섬기려고 하는 교회라면 자기는 훌륭한 교회라고 봅니다.
왜? 본인이 본인 생각에 훌륭하다고 생각하고, 이 땅에서 남은 죽어도 자기는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일방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 이 현실이 얼마나 위험한 현실이에요. 예수님께서 누누이 이야기했습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이 세대는 악한 것이고.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정말 구하지 않아야 될 기적들을 구하고 있다고요.
오히려 그들이 구하고 있는 기적들로 인하여 점점 더 그들은 자신을 모르고 있으니까, 멸망의 길로 나락의 길로 빠지는 겁니다. 현실을 세상에서 주고받는, 인간들의 집단에서 찾지 마시고 성경에서 찾아서, 아, 이 현실을 구성하는 현실에 나도 한 몫 한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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