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180928a 마가복음12장 35-37절(이중계약)-이 근호 목사
마가복음 12장 35-37절
35절,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쌔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뇨 36절,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37절,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더라 백성이 즐겁게 듣더라
이 내용이죠. 그 당시 유대인들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만,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 사람한테는 여기 나오는 단어나 개념 같은 것이 굉장히 낯섭니다. ‘주’라는 것도 그렇고, ‘하나님 우편’이라는 것도 그렇고, ‘그리스도’도 그렇고, ‘성령의 감동하여’도 그렇고, 서기관들의 직업이 무슨 직업인지, 특히 어려운 것은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이 무슨 뜻을 포함하고 있는지,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낯설게 다가오죠.
그러나 그 당시에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다는 겁니다. 이렇게 공식을 세우면 쉽습니다. 주의 말씀에는 선언만 있는 것이 아니고 실천도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주의 말씀에 선언과 실천, 둘 다가 있다는 말은 이 둘 다를 선언하신 분이 실천에 옮기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죠. 왜냐하면 선언하신 분이 선언만 하시고 멈추는 것이 아니고, 내가 선언했으니까 그 다음부터는 내 말대로 순종하라가 아니라 실천까지라도 이 선언에 다 포함이 되어 있어요.
그래서 우리 인간이 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인간이 할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면 여기 인간이 있다, 인간은 무엇의 대상이 되느냐 하면은 실천이 대상이 되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께 뭘 할 것이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이 선언한대로 적용시킬 것인가, 그리고 그 적용의 결과물이 우리 성도가 되는 겁니다. 결과물을 다른 말로 하면 생산물이 되겠죠.
그러면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이 사실을 지금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했잖아요. 그럼 우리 자신의 입장에서는 “나는 할 게 없으니까 그럼 그냥 지내면 되겠지.”라고 이야기를 해요.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의 실천에 의해서 우리는 천국가고 그 다음에 구원받는다.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천국가고 구원받았으니까, 내가 할 것이 없으니까 그대로 있으면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죠. 주로 이런 이야기를 하면 이런 대꾸가 많이 나와요.
그런데 이것을 A1(a₁)이라고 본다면, 하나님께서는 A1을 결과물로 보시는 것이 아니고 A2를 결과물로 봐요. 그러면 A1입장에서 A2(a₂)는, 이게 뭐냐 하면 없는 존재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만들어낼 때 비로소 만들어내는 생산물이기 때문에 인간의 입장에서 이것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여기에는 없어요. 내가 천국 간다, 내가 구원받는다 하는 것은 일반적인 자기의 망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뭐냐, A1이었는데 A2로 변하면서 여기에 뭐가 들어간다? 주님의 실천 그리고 주님의 선언이 여기에 포함이 되게 되면, 나 구원받겠다고 하는 나에서 주님에 의해서 나는 구원받는 자가 되었다는 이걸로 변하면서 여기 A1은 포기해야 되는 겁니다. A1안에 뭐가 포함이 되었다고 했습니까? 나는 ~해서 구원받는다, 천국 간다가 여기 A1안에 포함이 되어 있죠. 이거 지워야 됩니다. 이거 망가져야 해요.
그래서 구원론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구원론은 없고 예수님이 하신 결과만 있을 뿐이에요. 그래서 모든 것은 구원론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세계가 됩니다. 그리스도의 세계를 다른 말로 하면 천국이라고 합니다. 또는 아들의 나라라고 합니다. 그렇게 이해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A1을 포기하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자기를 부인하라, 또는 자기를 부정하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니가 고대하는 것, 니가 기대하는 것, 니가 희망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니 자신의 이득이나 소유를 챙기는 그러한 바탕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나오는 것이라는 겁니다.
내가 천국가면 나한테 이득일까요? 손해일까요? 이득이죠. 이득 또는 이익이 발생될 때 그 천국이 누구의 소유가 되느냐 하면 나의 소유가 되거든요. 나의 소유가 되게 되면 원래 천국은 누구의 세계입니까? 그리스도의 세계인데, 계속해서 이것을 나의 세계로 고집한 게 되기 때문에 이 천국(나의 세계)과 이 천국(그리스도의 세계)은 안 맞죠. 맞지를 않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선언하시고 왜 실천을 우리에게 안 맡겼느냐 하면, 선언하시고 실천을 인간에게 맡겨버리면 인간은 아무리 실천해도 이것은 천국에 가는 사람이 아니고, 자기 세계를 빛내고 자기 영광, 자기 이익, 자기가 절대자가 되는 세계를, 계속해서 그런 망상을 유지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되게 되면 나중에 천국 갔을 때, 그 천국에 자기 딸내미가 오지 않았을 경우에는 이건 천국이 아니고 천국에 가서 우울증이 걸리죠. “나는 이렇게 행복한데, 저 딸이 지옥 불에서 고생하는 것을 보니까...” 천국에 가서도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이런 경우가 생긴다 이 말이죠. 그래서 아무리 교회에서 천국 간다고 해도 안 기뻐요. 내 딸은 내 소유잖아요. 내 소유. 남의 소유가 아니고 내 소유잖아요. 내 딸이기 때문에 특별조치로 해서 하나님께서 무조건 천국에 넣어준다고 우기기 마련이다 이 말이죠. 왜냐하면 나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나 그런 식으로 천국에 가면 누구 일가친척만 모이겠습니까? 자기가 아는 사람, 동창생들, 자기 고향사람들, 쫙 모이고, 심지어 삼성라이온즈 팬들 저리가고 환화이글스 팬들만 다 오고, 거기서 뭐 야구할 일이 있어요? 김태균 4번 타자부터 해서 다 있다 이 말이죠. 그래서 이건 천국이 아니고 여기서 놀던 가락을 거기서도 그대로 놀게 돼요. 그게 바로 오늘날 교회에서 말하는 이 개념이 아닙니까? “여러분 잘 될 겁니다. 여러분, 이익 얻을 겁니다.”라는 식으로. “여러분, 실천하기 나름입니다.”라는 식으로 이렇게 하는데.
다시 이야기합니다. 주님께서 선언하신 당사자가 실천하시는 이유는 이러한 모든 기대와 헛된 희망을 이거는 버려도 괜찮다는 겁니다. 이게 믿음이거든요. 내 희망과 기대, 모든 것을 버려도 괜찮은 것은 실제로 주님께서 오실 때에 그 안에 뭐도 포함이 됐습니까? 실천성도 함께 포함이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다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정말 개같이 되어도 괜찮아요. 세리와 창기가 되어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주께서 실천하시는 그것에 의해서 구원받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부자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부자가 천국가기가 얼마나 힘든지, 바늘구멍으로 낙타가 통과하는 것보다 더 힘들다고 했어요.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막10:25). 막혔다. 단절되었죠. 그래서 제자들이 걱정이 되어서, “그러면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습니까?”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 거예요. “사람으로는 할 수 없다.”
그러면 사람은 할 수 없다는 말을, 한번 적어볼게요. 사람은 할 수 없다, 그 뒤에 무슨 문장을 가져오느냐 하면 반드시 이 다음 문장을 염두에 둡니다. 그냥 단독적인 문장으로 사람은 할 수 없다가 없어요. 사람은 할 수 없다 그 다음 문장은 하나님은 하신다. 그럼 우리는 뭘 믿어야 하느냐 하면 사람은 할 수 없다를 믿지 말고, 출발점을 하나님은 하시기 때문에 구태여 내가 나설 필요가 없다. 이게 바로 믿음이죠. 하나님은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하실 수 없다는 것을 자동적으로 같이 세트로 받는 거예요. 하나님이 하시는데 왜 내가 나서느냐 이 말이죠.
추석 때 전을 부친다 이 말이죠. 추석 때 TV프로그램을 한번 봤는데, 역시 광산김씨 또 나옵니다. 광산김씨 했는데, 백씨아줌마가 가고 남자 여섯 명인가 일곱 명이 했는데 엉망진창이 됐어요. 백씨아줌마보고 너는 걱정하지 말고 영화나 한 프로 보고 오라하고 제사음식 다 하겠다고 큰소리를 쳤는데 엉망이에요. 그래서 할 수 없이 남자들이 몰래 마트에 가서 이미 만들어놓은 것을 다 가져와요. 그거 안 들키게 하려다가 들켜서 사단이 났죠.
하나님이 전을 다 부친 거예요. 하나님이 모든 전을 다 부친 겁니다. 사람이 할 수 없다, 저는 이걸 촐랑댄다고 하는데, 우리가 촐랑대면 누구의 명예가 훼손이 되겠어요? 내가 까불면 누가 한 공로가 가려지겠습니까? 하나님이 다 하신다가 가리어지겠죠. 그래서 로마서 3장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셔서 다 이루심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받는다. 이래 되어 있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찬양하고 헌금한다고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고, 뭐냐 하면 하나님이 다 하셨다는 이것을 인정해주면 그게 바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백퍼센트, 더 남아있는 것이 없어요. 완전하게 하나님께서 지금 내 모습조차도 하나님의 일의 재료로서 참여시킨 그것조차 하나님의 실천력입니다. 이렇게 생각한 게 영광이에요. 가슴에다가 붙이세요. ‘하나님의 실천(력)’이라고. 마음속에 붙이고 다니면 괜찮아요. 하나님의 실천으로 포함되는 겁니다.
지금까지는 이해가 되셨죠. 그러면 우리 성도가 할 게 뭐냐, 아까 한 것을 다시 해보겠습니다. 선언+실천이라고 했습니다. 이 선언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돼요. 성도가 되었으면 이런 실천이 우리 인간의 실천하고는 이게 안 맞거든요. 우리가 하는 실천을 거부했다 이 말이죠. 거부했는데, 우리는 실천하기 전에 먼저 큰소리, 또 장담하는 것, 허세, 계획, 희망사항, 이런 것을 플러스해서 인간이 실천에 옮겼는데, 인간의 실천을 좌절시켰다는 말은, 이런 것조차도 다 좌절시켰거든요.
그러면 주님의 실천이 우리 자신이라면, A2라면, 어떤 선언에 의해서 실천하게 되면 우리는 어떤 존재냐, 또는 어떤 양상으로 살아가느냐,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선언 안에 내용이 들어있어요. 이거 이해되시겠죠? 선언에 의해서 실천했다면, 그 결과물이 우리라면, 전에는 우리 자신을 드리는 큰소리 치고 자기 자랑했는데, 이거는 포기하고 나라는 인간에 대해서 새로운 의미를 선언 속에서 뽑아서 나라는 인간에게 적용시키는데, 나라는 인간의 새로운 의미가 뭐냐 하는 겁니다.
그게 오늘 본문의 말씀에 나옵니다. 그 말씀이 뭐냐 하면 36절 봅시다.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우리가 예상했던, 기대했던 것하고 너무 다르죠. 너는 뭐 어떻게 살고 어느 집에 산다. 이런 것이 나올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고, 전혀 우리를 도외시하고 배제하고 하나님은 누구하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하나님은 지금 아들하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하고 아들하고. 여기도 주님이고 여기도 주님이고. 주께서 내 주에게.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모든 실천사항을 일임했다. 이래되는 겁니다. 일임했다는 그게 뭐냐 대리입니다. 대리인. 대리해주는 거예요. 우리 대신 다 일임해주시는 겁니다. 그러면 이 대리를 해줬을 때에, 그러면 하늘에 하나님 계시고 예수님이 계시는데, 하늘에 있을 때 알아서 다 처리해주시면 될 텐데 왜 예수님을 지상에 보내셨는가?
이게 바로 지상과 하늘의 서로 다른 계약이 있기 때문에 그러는데, 이걸 오늘 제목으로 정했습니다. ‘이중계약’입니다. 이중계약. 하나에서는 영원한 언약이 하나에요. 하나인데, 그 하나가 내용이 되게 되면 이중계약이 되는 겁니다. 그 이중계약의 특징은 항상 연쇄반응을 불러일으키게 되어 있어요. 이거에 대해서 지금부터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오늘 제목은 이중계약입니다.
이 이중계약을 좀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이 세상이 돌아가는 정치경제, 경제 환경을 이렇게 보게 되면, 이건 상식이니까 알아놓으세요. 중앙은행이 있고 중앙은행에서 금리를 인하하게 되면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연쇄반응이 일어나요. 연쇄반응에서 경로가 네 가지가 있습니다. 금리경로, 자산(가격)경로, 환율경로, 경로입니다. 경로를 영어로 패쓰path라고 합니까? 그 다음에 신용경로, 이 네 가지의 경로를 연쇄 반응적으로 막 일어나요.
중앙은행에서 금리를 인하시키면 통화량이 늘어나요. 통화량이 늘어나면서, 기준금리 인하로 인한 통화량이 늘어나면 보통 가계, 가정이나 기업에서 생산 투자활동이 활성화되면서 수요가 늘어나고 물가가 상승해요. 보세요. 한국은행에서 금리만 인하했을 뿐인데 연쇄반응이 죽 일어나는 겁니다. 그 경로가 일어나요. 경로가.
그 다음에 자산가격경로라는 것은 기준금리를 내려버리면 채권의 수용률이 떨어지고, 채권의 수용률이 떨어지게 되면 채권의 그 유동자산이 어디로 가게 되느냐 하면 주식이나 부동산 투기로 가게 되죠. 가격이 오르면서, 그리고 기업에서는 주식 값이 올라가니까 그걸 더 많은 자금으로 해서 설비투자를 하는 겁니다. 투자가 확대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자산가격경로에요.
환율경로라고 하는 것은 우리나라 환율이 떨어지게 되면 우리나라 돈을 팔고 달러를 구입하게 될 겁니다. 달러를 구입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금융자산 수입이 떨어지고, 달러뿐만 아니고 외국에 나가 자산을 구입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환율이 또 상승이 되고, 이 경로가 있습니다. 신용경로는 기준금리가 인하되면 통화량이 늘어나고 금융기관의 대출의 여건이 커지고 기업의 문턱이 낮고 그것가지고 소비가 촉진되고 물가상승이 이어진다. 뭐 이런 경로가 있어요.
자,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했는데, 결국 경로라는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은 갇혀있다는 겁니다. 갇혀있는 거예요. 갇혀있고, 본인이 경제를 주도할 수 있어요? 없어요? 방아쇠를 당기는 쪽이 누구 쪽입니까? 국가가 주도하는 중앙은행이잖아요. 한국중앙은행. 그렇죠. 그러면 인간이 소년소녀 때의 소박한 꿈, 나는 공주가 될 거야! 나는 대통령이 될 거야! 라는 그 소박한 꿈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죽 가면서 이게 어디에 휘둘리게 되어 있습니까? 갇혀있으니까 어디에 휘둘려요? 지금 도가니 안에 갇혀있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유학을 갔는데 갑자기 환율이 상승했다. 원화가치가 땅에 떨어지는 거죠. 환율이 상승했으면 유학 간 애 다 들어오라고 하죠. “엄마, 나 지금 공부 잘하고 있어. MIT 곧 들어갈 거야.” “MIT고 뭐고 빨리 들어와! 아빠 돈 없어.” 그럼 딸이 “도대체 나의 꿈을 좌절시키고 짓밟은 사람이 누구야?”라고 할 거예요. 누가 나의 꿈을 깨게 했느냐? 누구야? 할 때 그 누구야가 갇혀있는 창고 같은데서 할 때는 자기에게 메아리치는, 누구야야야~~해서 다시 되돌아오는 겁니다.
인생이라는 것은 독자적으로 자기 인생이라는 것이 없어요. 이쪽에서 확 밀면 밀리게 되고 저쪽에서 확 부추기면 부추김 당해야 돼요. 이게 성경 전도서에 나오잖아요. 사람이 울 때가 있으면 웃을 때가 있고, 태어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고, 사랑할 때가 있으면 미워할 때가 있고, 모든 것이 타이밍이잖아요. 타이밍이에요. 이게 마치 뭐와 같은가 하면 바다물결 같아서 파도가 칠 때면 높아지고 안 치면 낮아지듯이, 바다위에 떠다니는 나뭇잎이 수위를 조절할 수 없는 피동적인 입장에 있어요. 인생이라는 게 수동적인 입장에 있어요.
갇혀있는데, 그 갇혀있는 것을 누굽니까? 라고 하겠죠. 누가 내 인생을 이렇게 망쳐놨습니까? 그러면 정답은 이중계약이죠. 이중계약. 바로 하나님의 약속, 아버지와 아들의 언약이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 휘둘리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이중계약을 어떻게 실시했는지를 그걸 하나의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쉬운 예를 들면 이해가 돼요. 제목이 ‘노예와 대령’이라고 했어요. 노예와 대령.
노예시절 때, 미국의 남북전쟁 할 그 시절에 대령이라고 하는 것은 군인이니까, 높은 사람이죠. 큰 저택을 갖고 있고. 그 집에 노예가 있었는데, 노예하고 대령하고 심심풀이로 내기를 했어요. 노예가 뭐라고 내기를 제시했느냐 하면 자기가 계란을 얼마나 잘 던지는지를 주인 되는 대령한테 자랑질을 하는 거예요.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바구니를 여기에 놓고 저기에 서서 계란을 던져서 안 깨지고 그 바구니에 열두 개의 계란을 다 놓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만약에 하게 되면 50달러를 대령님이 저한테 주시고, 제가 못하게 되면 50달러를 제가 대령님한테 드리겠다고 내기를 했어요.
근데 대령이 보니까 거리가 멀어요. 말도 안 돼요. 그냥 넣어도 계란이 깨질 텐데, 던져서 바구니에 넣는데 그 열두 개의 계란이 안 깨진다는 것은 이건 있을 수 없거든요. 그래서 “해봐!” 했어요. 해봐라 해서 하니까 던지는 족족이 다 깨졌어요. 그런데 이 노예가 50달러를 벌었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노예가 대령이 오기 전에 다른 농장주한테 가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내가 계란 열두 개를 깨도 우리 주인 대령이 아무 잔소리도 하지 않고 기쁘게 그걸 볼 수 있다면 저한테 백 달러를 주시겠습니까?”라고 했던 거예요. “만약에 내가 계란 열두 개를 깨서 주인이 화를 낸다면 제가 백 달러를 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좋다!”라고 했어요. “그럼 창문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창문으로 보니까 노예가 계란을 던지는 족족 깨지니까 대령의 입이 벌어졌어요. 이 바보 같은 인간! 이게 바로 이중계약입니다.
십자가는 이중계약이에요. 낮은 자가 승리하는 계약이에요. 다른 말로 하면 패배자가 승자가 되는 계약이에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에 어떤 원칙으로 왔는가는 빌립보서 2장에 나와요. 그분은 하나님과 동등하죠. 계약했습니다. 하나님과 동등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 와서는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했죠. 이중계약이죠. 이 땅에서 인간들이 보기에는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이에요. 그냥 설쳐서 해보려고 했다가 안 됐던 실패한 자에요.
그래서 이 세상을 지배하는 인간들 입장에서는 예수님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겁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 하는 것하고 똑같아요.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왜 그렇게 나대냐 이 말이죠. 그냥 병 고칠 때는 팬들이 있었죠. “이야! 저 사람 대단하다.” 근데 나중에 가서는 그런 기적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렸어요. 요새 말로 할 것 같으면 교회를 건드린 거예요.
그 당시 사람들은 이중계약이 아니고 단일계약이었습니다. 이중계약과 단일계약의 대치죠. 단일계약이 뭐냐 하면 모세언약, 두자로 하면 율법이죠. 율법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그 다음에 대상자가 있어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한 민족 대상자로 해서 여기에 단일체계로 나갔어요. 이 단일체계 중심에 있는 것이 뭐냐 성전입니다. 그리고 이 성전 계약을 할 때 이스라엘을 뭐라고 했느냐 하면 다윗의 자손으로 봤어요. 오늘 본문에 나오죠. 다윗의 자손.
다윗의 자손이 하나님의 계약에 의해서 성전을 지키게 되면 메시야를 보내서 너희들을 옛날 왕 같은 제사장나라, 천국으로 만들어주겠다고 그렇게 율법에 계약을 했다는 겁니다. 누구 쪽에서? 이스라엘 쪽에서 그렇게 한 거예요. 근데 그 조건이 뭐냐, 이 율법을 지키면 복을 받고 안 지키면 저주를 받는 거예요. 이게 단일계약이에요. 단일계약에 복과 저주가 이질적인, 서로 상충될 수 없는 결과물이 주어진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혼신의 노력을 다합니다. 십계명부터 포함해서 율법을 철저에 철저를 완벽에 완벽을 기한 겁니다. 오늘날 꼭 교회 같아요. 십일조에다가 안식일 지킨다고 주일을 지키고 그런 것 가지고는 모자라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아야 되고 성화해야 되고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대로 거룩에 또 매진하고 경건에 경건을 더하고, 사도바울의 온갖 지시와 명령 있잖아요. 그걸 전부다 자기들이 실천하려고 하는 거예요.
제가 오늘 강의 처음에 뭐라고 했던가요? 선언 다음에 뭐가 나옵니까? 선언과 실천이 이게 한조가 되어서 떨어지면 안 돼요. 선언하신 분이 실천을 해요. 선언하신 분이 실천하신다고요. 왜냐하면 이중계약자가 전부다 예수님에게 국한이 되어 있어요. 다른 사람의 실천을 주께서 안 받습니다. 안 받는 이유가 하나님 아버지에게 영광이 안 돼요. 그런 이야기를 할 때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이야기를 설명하게 되면 여러분이 한방에 이해가 됩니다.
마태복음 5장 29절에 보면 니 오른 눈이 너를 실족하게 하거든 빼버리라고 하죠. 그 다음에 오른손이 범죄 하거든 찍어버리고. 이걸 한번 보자 이 말입니다. 여기에 오른손이 있고 오른 눈도 있다 이 말이죠. 주님의 취지를 한번 보세요. 오른 귀가 있다. 귀도 빼고, 그럼 나머지가 천국에 가죠. 오른 눈이 있다. 그럼 오른 눈을 빼버리자. 이쪽에는 반창고 하나 붙이고요. 입도 빼고 혀도 빼고 이거 반병신이죠. 이게 인간입니까? 애들이 옷 입히기 인형놀이 할 때 전부다 째고 난리도 아니잖아요. 이렇게 되더라도 어디만 안 가면 니는 남는 장사다? 지옥에 안 가면 이게 남는 장사라는 거예요. 이익이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게 A1이거든요. A1을 난도질을 해버려요.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그대로 실천에 옮길까요? 안 옮길까요? 이걸 그대로 실천에 옮깁니다. 왜냐하면 나이 87세가 되게 되면 이게 어디에 가느냐 하면 화장터에 갑니다. 완전히 가루로 만들어버려요. 그게 A1에서 A2로 가는 과정입니다. 그걸 누가 죽이십니까? 주님이 죽이시는 거예요. 88세 안 됩니다. 87세로 떨어버려요. 누구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더 살고 싶어도 안 돼요. 그냥 돌아가셔야 돼요. 참새도 주님의 타이밍에 떨어지게 되어 있어요.
죽음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죽음이란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내놓지 아니하면 그게 죽음입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내놓지 아니하면 그게 죽음이에요. 내가 움직인다고 죽음이 아닌 게 아닙니다. 내가 백날 움직여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못 내놓는다면 그건 죽음입니다. 주께서 원하는 것은 니 손으로 끊으라는 겁니다. 니 손으로. 니 손으로 끊으라고 하는데 우리는 아무리 실천, 실천하지만 내 손으로 끊을 수가 없어요. 내 손으로. 내 손으로 끊었다가는 나머지기 왼눈도 끊어야 돼요. 나중에 자기가 끊고 싶어도 두 팔 다 날아갔는데 입을 칼로 물고 끊을까요?
주께서는 아주 간편하게 합니다. “그냥 있어. 내가 나중에 화장터에서 사그리 아주 가루로 만들어줄 테니까.” 이게 주님의 실천입니다. 연세 든 사람은 점점 더 주님의 실천력이 많이 보이고 아직 20대 같은 경우에는 내가 보기에는 실천력이 별로 안 보여요. 자기 실천력이 더 강해. 나중에 연세 좀 들게 되면 화장발도 안 먹어요. 화장하고 피부하고 똑똑 떨어진다니까요. 간격이 생겨가지고 가다보면 툭툭 떨어져가지고 아침에 다시 또 발라야 돼요. 기초화장 다시해서.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주께서 친히 우리 인생을 원하든 원치 않던 지금 다루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이미 죽은 자라는 것을 A1, 우리 자신이 동의를 안 하거든요. 그러나 주님의 과제는 A2로 기어이 동의하든 안 하던 관계없이 주님께서 가는데, 갈 때 여기서 뭐냐 하면 주님의 선언과 실천을 이해하는 사람을 만들어서, A2로 만들어서 천국백성을 삼으시는 것이 주님의 계획입니다.
그러면 이 계획에 있어서 아까 이야기한 것을 다시해보겠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계획을 이중계약으로 보지 않고 단일계획으로 본 겁니다. 실천을 본인이 한 겁니다. 여기에 자기가 있고, 자기는 이스라엘이고, 이스라엘은 집단이고, 그리고 위에 하나님이 계시고, 약속대로 성전, 성전은 다윗언약이거든요. 성전대로 하면서 율법대로 지킨다. 이건 모세언약입니다. 모세언약과 다윗언약은 전부다 한 계통이니까 단일 언약이거든요. 모세언약 다음에 다윗언약이 나왔으니까. 주께서 이렇게 하신 것을 우리가 실천에 옮기게 되면 우리가 구원받아 천국에 간다고 할 때 이 성전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들은 이 성전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통한다고 해서, 이 성전을 기도하는 집으로 본 겁니다.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는 것은 여기에 뭐가 있느냐 하면 주님의 이름이 계시는 곳이에요. 여기에 주님의 이름이 계시기에 주의 이름을 부르면 여기에서 응답이 주어지는 것은 바로 성전에서 주어진다는 겁니다. 성전에 들어가면 제일 좋고 못 들어갈 것 같으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게 되면 주께서는 응답한다. 왕상 8장에 보면 나옵니다. 이 사람들은 이걸 그대로 인정한 거거든요.
그래서 어떤 경우라도 성전이 있으면 우리 민족은 희망이 있다. 이래 되는 겁니다. 지금도 예루살렘에 가면 성전을 회복하기 위해서, 메시야가 온다고 유대인들은 철썩 같이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호시탐탐 그 성전을 접수하려고 하고, 그 성전이 모리아산에 있거든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던. 그 모리아산 현장에 뭐가 있느냐 하면 황금 돔이 있어요. 제가 올려놓은 이스라엘 답사기 76번에 보면 황금 돔이 이렇게 있어요.
여기가 바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한 모리아산입니다. 여기에 누가 오느냐 하면 감람산에서, 이 옆에 기드론 골짜기가 있고, 기드론 골짜기도 76번에 나와요. 감람산, 겟세마네 동산, 예수님의 승천하신 곳, 승천교회도 있고 눈물교회도 있어요. 이게 얼마 안 높아요. 200미터 되는가, 여기에 메시야가 와서 동쪽 문으로 들어가요. 지금 동쪽문은 제가 가보니까 닫혀있어요. 동쪽 문으로 들어가서 황금 돔을 접수하면 이게 스가랴의 말씀대로 이 세상은 전부다 끝장이 나는 겁니다. 모든 것이 완료가 돼요. 그걸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그때 지은 성전이, 솔로몬성전이 제1성전, 헤롯성전이 제2성전, 메시야가 오는 성전이 제3성전, 제3성전을 유지하기 위해서 금 촛대를 그들은 모형으로 만들어놨어요. 그건 사진으로 안 찍었어요. 쓸데없다 싶어서 안 찍었는데, 안 찍은 것을 지금 후회가 됩니다만, 일곱 가지 촛대를 만들어놨어요. 이들은 준비 다 되어 있어요. 근데 예수님은 어디에 들어갑니까? 성전에 들어가서 이걸 확 엎어버린 거예요. 왜냐하면 웬 부동산이냐 말이죠. 부동산? 부동산이라는 것은 건물이잖아요.
부동산이 우리한테 뭘 해줄 수가 있어요? 우리가 찾아가야 되지. 건물이 우리한테 뭘 할 수 있느냔 말이죠. 건물이. 우리가 할 수 없는데 찾아오는 성전이 돼야죠. 주님께서는 이걸 헐어버리라. 내가 사흘 만에 짓겠다고 할 때, 그 몸을 가지고 바로 무슨 몸이라고 합니까? 예수님의 그냥 몸이 아니고 예수님의 부활의 몸이에요. 부활의 몸이라고 하는 것은 죽었었던 적이 있다. 이 땅에서 죽었었던 적이 있다. 죽었었던 적이 있는 몸이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부활의 진로를 밟게 되면 우리도 비록 죽었다고 평 받은 적이 있지만, 부활이기 때문에 뭐가 됩니까? 우리는 죽었어야 될 몸이지만 지금은 어떤 몸이다? 산몸이 되었다. 이렇게 이해가 되는 겁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몸 안에, 부활의 몸이 오게 되면 성령이거든요. 성령이 오게 되면 죽었었던 적이 있다 이 말이죠. 우리는 죽어있는 몸이기 때문에, 육이거든요. 죽어있는 몸이기 때문에 우리에 대해서 죄책을 묻는다? 안 묻는다? 안 묻죠. 왜? 죄 값으로 이미 죽었기 때문에.
죽어있는 몸을 건드려서 “니 왜 책임 안 져?” 이렇게 이야기합니까? 이미 죽었는데. 죽은 이유가 뭡니까? 율법을 못 지켜서 죽었잖아요. 못 지키는 것을 뻔히 알잖아요. 우리가. 성경말씀 어느 것 하나 못 지키거든요. 우리는 그런 실천력이 없어요. 못 지키는 인간에게 “일어나! 일어나! 너 이거 왜 안 했어?” 아버지가 술 먹고 밤늦게 와가지고 자는 자식들 깨워놓고 술 냄새 팍팍 피우면서, 자식은 “아이, 냄새!”하고, “아빠가 돈 벌려고 마셨다.”라고 하고. 돈 번다고 술 마시고 비틀거리면서 “니 공부 왜 안 했어?” 이렇게 하는 것 하고 똑같은 거예요. 하나님이 술 취했어요? 하나님이 술 취하신 거예요?
아까 적용할 때, 실천에 옮길 때 어떻게 하신다고 했습니까? 우리를 어떻게 한다? 죽이고서 하죠. 죽일 때 칼 들고 설치는 것이 아닙니다. 뭐로 하느냐 하면 율법으로 죽여요. 탐내지 말라고 했잖아! 탐내지 말라고 했는데 탐냈으니까 이미 우리는 죽은 몸이 되는 거예요. 이게 안목이, 주님이 주신 안목과 내가 나를 살리고자 싶어서 하는 안목이 완전히 대립이 되는 겁니다.
자, 아직까지 이중계약에 대해서 이야기를 안 했습니다. 그럼 여기서 이중계약을 이야기를 할 시간이 됐는데, 아까 한 이중계약의 한 가지를 복습해보면 갇혀있다는 겁니다. 제가 갇혀있다는 이야기를 했죠. 근데 어디에? 누구에게? 이건 이야기를 안 했죠. 바로 이중계약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과의 계약, 그리고 아들과 미지의 어떤 자기의 백성과의 이 계약이 이중계약이에요. 이중계약인데 이게 하나의 언약입니다.
하나의 언약이 지상에 왔을 때는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아들과 미지의 사람하고 하는데, 이 미지의 사람이 현재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는데 어디서 구하느냐 하면 갇혀있는 여기서 구하는 겁니다. 갇혀있을 때 이 사람들은 뭐가 되느냐 하면 죄인이 되죠. 죄에 갇혀있으니까. 또는 악마에 갇혀있으니까. 죄에 갇혀있다, 악마에 갇혀있다, 또는 율법에 갇혀있다는 말은 못 벗어난다는 말입니다.
제가 죄인이라는 말을 하면 사람들은 상당히 기분 나빠해요.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느냐고 그렇게 반발하는데, 제가 말하는 죄인이라는 말은 본인이 본인 뜻대로 안 될 정도로 갇혀있는 신세라는 뜻이에요. 죄인이라는 뜻은. 갇혀있는 신세라는 말이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어요. 먹는 것 입는 걸로 족하고 싶은데, 우리 동네에도 롯데몰 이시아폴리스점이라고 있어요. 손님이 언제 많은가 하면 추석 끝나고 많아요. 추석 끝나고 음식 장만한 자기에게 스스로 위로를 해야 돼요.
위로하는 방법이 뭐냐 하면 옷사러가는 겁니다. 옷 사고 쇼핑하는 거예요. 바글바글. 백화점이 명절 끝나고 난 뒤에 바글바글해요. 그 얼마나 스트레스 받았으면 명절 끝나고 난 뒤에 한방으로 싸질러버리는 거예요. 신상 옷을 사는 거예요. 탐내지 말라고 했거든요. 도대체 어느 정도 낮아야 탐을 안 낼 수가 있어요? 어느 정도로 낮아야? 70된 우리 고모가 아버지 없이 아들을 키웠는데, 아들이 그 어머니의 공로로 차를 하나 사줬어요. 차 이름이 퓨마에요. 퓨마라는 차를 압니까? 잘 못 들어본 차라 인터넷을 한번 찾아보니까, 최소 6500에서 정확히 1억 6000짜리에요. 이걸 하나 떡하니 샀어요.
그러면 자기 죄에서 벗어났습니까? 퓨마를 타다가 하찮은 그랜저로 바꿨다 칩시다. 그러면 탐을 안 내는 거예요? 소울 타는 사람은 생각 안 합니까? 도대체 어느 정도 낮아야, 어느 정도 낮은 폭을 해야 탐을 안 낸 겁니까? 한국의 거지라도 아프리카에 가면 중산층이라고 했죠. 젊은 사람들이 중소기업에 안 옵니다. 왜냐하면 중소기업이 어떤 짓을 하는지를 한번 가보게 되면 기겁을 해요. 진짜 기겁을 합니다.
중소기업은 노동자들의 인권이라든지 노동자들의 건강 같은 것은 아예 생각을 안 해요. 하청에, 하청에 하청으로 떨어지는데 건강 생각하다가는 남는 돈이 없어요. 노끈을 해도 그냥 혼자서 하는 거예요. 광산김씨가 하듯이 혼자서 하는 거예요. 거기에 외국노동자들이 아니면 일할 사람이 없습니다. 도대체 어느 정도로 낮아져야 돼요? 어느 정도로.
어떤 사람이 행복의 기준에 대해서 다섯 가지로 물었어요. 당신은 행복합니까? 테스트를 해보세요. 첫 번째가 뭐냐 하면 누가 당신을 존경하고 있습니까?(0,☓) 두 번째, 누가 당신을 전적으로 믿고 모든 소리를 할 수 있는 신뢰할 만한 사람이 주변에 있습니까?(0,☓) 세 번째, 당신의 개성이 있습니까?(0,☓) 네 번째, 새로운 취미든지 배우는 일을 했습니까?(0,☓) 다섯 번째, 자기가 선택할 수 있는 시간이 있습니까?(0,☓)
그래서 여기에 몇 개에 해당이 되는지, 이걸 행복이라고 주장해요. 심리학자가. 근데 특징이 있어요. 전부다 나에요. 나. 나를 존중해주는 사람, 나만을 믿을 사람, 나만의 개성, 나만의 새롭게 배우는 것, 또 내가 임으로 할 수 있는 시간을 얼마나 가졌느냐. 이게 행복이라고 하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오늘 배운 것에 의하면 뭐가 빠졌어요? 갇혀있죠.
이게 바로 우리가 주님 앞에 난도질을 당하고 완전히 죽어야 마땅한 죄가 되는 거예요.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노력하고 실천하라고 악마가 우리에게 계속해서 부추기는 겁니다. 계속해서 부추기는 거예요. “니 저 사람보다 행복해?” 결국 이거는 뭐냐 하면 끊임없이 타인과 나를 비교해야 되고 또 싸워야 되는데, 경쟁이 곧 죄라, 경쟁이 곧 죄입니다. 돌아보세요. 평생 동안 한 것이 뭐밖에 없어요? 경쟁밖에 없어요. 평생에 이거밖에 없어요.
TV를 안 본다. 딱 두 가지 경험입니다. 하나는 TV가 고장이 났다. 또 하나는 TV프로그램이 재미가 없다. 둘 중의 하나에요. 고장 난 이것은 하드웨어고 재미가 없는 것은 소프트웨어거든요. 인간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고장 안 난 것처럼 보이죠. 하지만 이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소프트웨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광이 안 나와요. 악마가 인간에게 신이 되라고 했거든요. 악마가 인간에게 신이 되라고 한 겁니다. 신이 되라고 했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가 절대자가 되는 것만 생각해요. 그 외에는 마음속에 들어있는 것이 없어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계약을 이중계약을 한 겁니다. 하나는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과 한 계약, 그 다음에 그 계약을 실천에 옮기면서 뭐냐 하면 계약자가 없는데 계약을 해버려요. 그 계약자는 누가 만들어요. 예수님이 자기의 계약상대자를 자기가 자기 피로, 자기 공로로 없는 인간을 만들어요. 아브라함에게 아들이 있어요? 없어요? 없죠.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은 아들로 인정 안 해줍니다. 계약상대자가 아니에요. 그러면 아브라함에게 맺어질 아들은 누굽니까? 하나님에 의해서 이삭이라는 없는 자식이 새로 생기잖아요. 그처럼 하나님의 계약은 이 땅에서 없는 우리 자신을 만들기에 나서는 겁니다. 이게 바로 이중계약입니다. 어떻게 구체화되는가는 10분 쉬고 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