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

이중계약 180928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10. 2. 08:26
2018-09-29 00:05:12조회 : 232         
이중계약 180928이름 : 이근호 (IP:119.18.83.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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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 (IP:122.♡.170.138)18-10-01 00:10 

광주강의20180928a 마가복음12장 35-37절(이중계약)-이 근호 목사 

마가복음 12장 35-37절 

35절,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쌔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뇨 
36절,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37절,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더라 백성이 즐겁게 듣더라 

이 내용이죠. 그 당시 유대인들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만,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 사람한테는 여기 나오는 단어나 개념 같은 것이 굉장히 낯섭니다. ‘주’라는 것도 그렇고, ‘하나님 우편’이라는 것도 그렇고, ‘그리스도’도 그렇고, ‘성령의 감동하여’도 그렇고, 서기관들의 직업이 무슨 직업인지, 특히 어려운 것은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이 무슨 뜻을 포함하고 있는지,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낯설게 다가오죠. 

그러나 그 당시에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다는 겁니다. 이렇게 공식을 세우면 쉽습니다. 주의 말씀에는 선언만 있는 것이 아니고 실천도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주의 말씀에 선언과 실천, 둘 다가 있다는 말은 이 둘 다를 선언하신 분이 실천에 옮기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죠. 왜냐하면 선언하신 분이 선언만 하시고 멈추는 것이 아니고, 내가 선언했으니까 그 다음부터는 내 말대로 순종하라가 아니라 실천까지라도 이 선언에 다 포함이 되어 있어요. 

그래서 우리 인간이 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인간이 할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면 여기 인간이 있다, 인간은 무엇의 대상이 되느냐 하면은 실천이 대상이 되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께 뭘 할 것이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이 선언한대로 적용시킬 것인가, 그리고 그 적용의 결과물이 우리 성도가 되는 겁니다. 결과물을 다른 말로 하면 생산물이 되겠죠. 

그러면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이 사실을 지금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했잖아요. 그럼 우리 자신의 입장에서는 “나는 할 게 없으니까 그럼 그냥 지내면 되겠지.”라고 이야기를 해요.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의 실천에 의해서 우리는 천국가고 그 다음에 구원받는다.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천국가고 구원받았으니까, 내가 할 것이 없으니까 그대로 있으면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죠. 주로 이런 이야기를 하면 이런 대꾸가 많이 나와요. 

그런데 이것을 A1(a₁)이라고 본다면, 하나님께서는 A1을 결과물로 보시는 것이 아니고 A2를 결과물로 봐요. 그러면 A1입장에서 A2(a₂)는, 이게 뭐냐 하면 없는 존재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만들어낼 때 비로소 만들어내는 생산물이기 때문에 인간의 입장에서 이것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여기에는 없어요. 내가 천국 간다, 내가 구원받는다 하는 것은 일반적인 자기의 망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뭐냐, A1이었는데 A2로 변하면서 여기에 뭐가 들어간다? 주님의 실천 그리고 주님의 선언이 여기에 포함이 되게 되면, 나 구원받겠다고 하는 나에서 주님에 의해서 나는 구원받는 자가 되었다는 이걸로 변하면서 여기 A1은 포기해야 되는 겁니다. A1안에 뭐가 포함이 되었다고 했습니까? 나는 ~해서 구원받는다, 천국 간다가 여기 A1안에 포함이 되어 있죠. 이거 지워야 됩니다. 이거 망가져야 해요. 

그래서 구원론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구원론은 없고 예수님이 하신 결과만 있을 뿐이에요. 그래서 모든 것은 구원론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세계가 됩니다. 그리스도의 세계를 다른 말로 하면 천국이라고 합니다. 또는 아들의 나라라고 합니다. 그렇게 이해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A1을 포기하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자기를 부인하라, 또는 자기를 부정하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니가 고대하는 것, 니가 기대하는 것, 니가 희망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니 자신의 이득이나 소유를 챙기는 그러한 바탕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나오는 것이라는 겁니다. 

내가 천국가면 나한테 이득일까요? 손해일까요? 이득이죠. 이득 또는 이익이 발생될 때 그 천국이 누구의 소유가 되느냐 하면 나의 소유가 되거든요. 나의 소유가 되게 되면 원래 천국은 누구의 세계입니까? 그리스도의 세계인데, 계속해서 이것을 나의 세계로 고집한 게 되기 때문에 이 천국(나의 세계)과 이 천국(그리스도의 세계)은 안 맞죠. 맞지를 않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선언하시고 왜 실천을 우리에게 안 맡겼느냐 하면, 선언하시고 실천을 인간에게 맡겨버리면 인간은 아무리 실천해도 이것은 천국에 가는 사람이 아니고, 자기 세계를 빛내고 자기 영광, 자기 이익, 자기가 절대자가 되는 세계를, 계속해서 그런 망상을 유지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되게 되면 나중에 천국 갔을 때, 그 천국에 자기 딸내미가 오지 않았을 경우에는 이건 천국이 아니고 천국에 가서 우울증이 걸리죠. “나는 이렇게 행복한데, 저 딸이 지옥 불에서 고생하는 것을 보니까...” 천국에 가서도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이런 경우가 생긴다 이 말이죠. 그래서 아무리 교회에서 천국 간다고 해도 안 기뻐요. 내 딸은 내 소유잖아요. 내 소유. 남의 소유가 아니고 내 소유잖아요. 내 딸이기 때문에 특별조치로 해서 하나님께서 무조건 천국에 넣어준다고 우기기 마련이다 이 말이죠. 왜냐하면 나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나 그런 식으로 천국에 가면 누구 일가친척만 모이겠습니까? 자기가 아는 사람, 동창생들, 자기 고향사람들, 쫙 모이고, 심지어 삼성라이온즈 팬들 저리가고 환화이글스 팬들만 다 오고, 거기서 뭐 야구할 일이 있어요? 김태균 4번 타자부터 해서 다 있다 이 말이죠. 그래서 이건 천국이 아니고 여기서 놀던 가락을 거기서도 그대로 놀게 돼요. 그게 바로 오늘날 교회에서 말하는 이 개념이 아닙니까? “여러분 잘 될 겁니다. 여러분, 이익 얻을 겁니다.”라는 식으로. “여러분, 실천하기 나름입니다.”라는 식으로 이렇게 하는데. 

다시 이야기합니다. 주님께서 선언하신 당사자가 실천하시는 이유는 이러한 모든 기대와 헛된 희망을 이거는 버려도 괜찮다는 겁니다. 이게 믿음이거든요. 내 희망과 기대, 모든 것을 버려도 괜찮은 것은 실제로 주님께서 오실 때에 그 안에 뭐도 포함이 됐습니까? 실천성도 함께 포함이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다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정말 개같이 되어도 괜찮아요. 세리와 창기가 되어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주께서 실천하시는 그것에 의해서 구원받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부자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부자가 천국가기가 얼마나 힘든지, 바늘구멍으로 낙타가 통과하는 것보다 더 힘들다고 했어요.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막10:25). 막혔다. 단절되었죠. 그래서 제자들이 걱정이 되어서, “그러면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습니까?”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 거예요. “사람으로는 할 수 없다.” 

그러면 사람은 할 수 없다는 말을, 한번 적어볼게요. 사람은 할 수 없다, 그 뒤에 무슨 문장을 가져오느냐 하면 반드시 이 다음 문장을 염두에 둡니다. 그냥 단독적인 문장으로 사람은 할 수 없다가 없어요. 사람은 할 수 없다 그 다음 문장은 하나님은 하신다. 그럼 우리는 뭘 믿어야 하느냐 하면 사람은 할 수 없다를 믿지 말고, 출발점을 하나님은 하시기 때문에 구태여 내가 나설 필요가 없다. 이게 바로 믿음이죠. 하나님은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하실 수 없다는 것을 자동적으로 같이 세트로 받는 거예요. 하나님이 하시는데 왜 내가 나서느냐 이 말이죠. 

추석 때 전을 부친다 이 말이죠. 추석 때 TV프로그램을 한번 봤는데, 역시 광산김씨 또 나옵니다. 광산김씨 했는데, 백씨아줌마가 가고 남자 여섯 명인가 일곱 명이 했는데 엉망진창이 됐어요. 백씨아줌마보고 너는 걱정하지 말고 영화나 한 프로 보고 오라하고 제사음식 다 하겠다고 큰소리를 쳤는데 엉망이에요. 그래서 할 수 없이 남자들이 몰래 마트에 가서 이미 만들어놓은 것을 다 가져와요. 그거 안 들키게 하려다가 들켜서 사단이 났죠. 

하나님이 전을 다 부친 거예요. 하나님이 모든 전을 다 부친 겁니다. 사람이 할 수 없다, 저는 이걸 촐랑댄다고 하는데, 우리가 촐랑대면 누구의 명예가 훼손이 되겠어요? 내가 까불면 누가 한 공로가 가려지겠습니까? 하나님이 다 하신다가 가리어지겠죠. 그래서 로마서 3장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셔서 다 이루심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받는다. 이래 되어 있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찬양하고 헌금한다고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고, 뭐냐 하면 하나님이 다 하셨다는 이것을 인정해주면 그게 바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백퍼센트, 더 남아있는 것이 없어요. 완전하게 하나님께서 지금 내 모습조차도 하나님의 일의 재료로서 참여시킨 그것조차 하나님의 실천력입니다. 이렇게 생각한 게 영광이에요. 가슴에다가 붙이세요. ‘하나님의 실천(력)’이라고. 마음속에 붙이고 다니면 괜찮아요. 하나님의 실천으로 포함되는 겁니다. 

지금까지는 이해가 되셨죠. 그러면 우리 성도가 할 게 뭐냐, 아까 한 것을 다시 해보겠습니다. 선언+실천이라고 했습니다. 이 선언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돼요. 성도가 되었으면 이런 실천이 우리 인간의 실천하고는 이게 안 맞거든요. 우리가 하는 실천을 거부했다 이 말이죠. 거부했는데, 우리는 실천하기 전에 먼저 큰소리, 또 장담하는 것, 허세, 계획, 희망사항, 이런 것을 플러스해서 인간이 실천에 옮겼는데, 인간의 실천을 좌절시켰다는 말은, 이런 것조차도 다 좌절시켰거든요. 

그러면 주님의 실천이 우리 자신이라면, A2라면, 어떤 선언에 의해서 실천하게 되면 우리는 어떤 존재냐, 또는 어떤 양상으로 살아가느냐,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선언 안에 내용이 들어있어요. 이거 이해되시겠죠? 선언에 의해서 실천했다면, 그 결과물이 우리라면, 전에는 우리 자신을 드리는 큰소리 치고 자기 자랑했는데, 이거는 포기하고 나라는 인간에 대해서 새로운 의미를 선언 속에서 뽑아서 나라는 인간에게 적용시키는데, 나라는 인간의 새로운 의미가 뭐냐 하는 겁니다. 

그게 오늘 본문의 말씀에 나옵니다. 그 말씀이 뭐냐 하면 36절 봅시다.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우리가 예상했던, 기대했던 것하고 너무 다르죠. 너는 뭐 어떻게 살고 어느 집에 산다. 이런 것이 나올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고, 전혀 우리를 도외시하고 배제하고 하나님은 누구하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하나님은 지금 아들하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하고 아들하고. 여기도 주님이고 여기도 주님이고. 주께서 내 주에게.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모든 실천사항을 일임했다. 이래되는 겁니다. 일임했다는 그게 뭐냐 대리입니다. 대리인. 대리해주는 거예요. 우리 대신 다 일임해주시는 겁니다. 그러면 이 대리를 해줬을 때에, 그러면 하늘에 하나님 계시고 예수님이 계시는데, 하늘에 있을 때 알아서 다 처리해주시면 될 텐데 왜 예수님을 지상에 보내셨는가? 

이게 바로 지상과 하늘의 서로 다른 계약이 있기 때문에 그러는데, 이걸 오늘 제목으로 정했습니다. ‘이중계약’입니다. 이중계약. 하나에서는 영원한 언약이 하나에요. 하나인데, 그 하나가 내용이 되게 되면 이중계약이 되는 겁니다. 그 이중계약의 특징은 항상 연쇄반응을 불러일으키게 되어 있어요. 이거에 대해서 지금부터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오늘 제목은 이중계약입니다. 

이 이중계약을 좀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이 세상이 돌아가는 정치경제, 경제 환경을 이렇게 보게 되면, 이건 상식이니까 알아놓으세요. 중앙은행이 있고 중앙은행에서 금리를 인하하게 되면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연쇄반응이 일어나요. 연쇄반응에서 경로가 네 가지가 있습니다. 금리경로, 자산(가격)경로, 환율경로, 경로입니다. 경로를 영어로 패쓰path라고 합니까? 그 다음에 신용경로, 이 네 가지의 경로를 연쇄 반응적으로 막 일어나요. 

중앙은행에서 금리를 인하시키면 통화량이 늘어나요. 통화량이 늘어나면서, 기준금리 인하로 인한 통화량이 늘어나면 보통 가계, 가정이나 기업에서 생산 투자활동이 활성화되면서 수요가 늘어나고 물가가 상승해요. 보세요. 한국은행에서 금리만 인하했을 뿐인데 연쇄반응이 죽 일어나는 겁니다. 그 경로가 일어나요. 경로가. 

그 다음에 자산가격경로라는 것은 기준금리를 내려버리면 채권의 수용률이 떨어지고, 채권의 수용률이 떨어지게 되면 채권의 그 유동자산이 어디로 가게 되느냐 하면 주식이나 부동산 투기로 가게 되죠. 가격이 오르면서, 그리고 기업에서는 주식 값이 올라가니까 그걸 더 많은 자금으로 해서 설비투자를 하는 겁니다. 투자가 확대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자산가격경로에요. 

환율경로라고 하는 것은 우리나라 환율이 떨어지게 되면 우리나라 돈을 팔고 달러를 구입하게 될 겁니다. 달러를 구입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금융자산 수입이 떨어지고, 달러뿐만 아니고 외국에 나가 자산을 구입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환율이 또 상승이 되고, 이 경로가 있습니다. 신용경로는 기준금리가 인하되면 통화량이 늘어나고 금융기관의 대출의 여건이 커지고 기업의 문턱이 낮고 그것가지고 소비가 촉진되고 물가상승이 이어진다. 뭐 이런 경로가 있어요. 

자,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했는데, 결국 경로라는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은 갇혀있다는 겁니다. 갇혀있는 거예요. 갇혀있고, 본인이 경제를 주도할 수 있어요? 없어요? 방아쇠를 당기는 쪽이 누구 쪽입니까? 국가가 주도하는 중앙은행이잖아요. 한국중앙은행. 그렇죠. 그러면 인간이 소년소녀 때의 소박한 꿈, 나는 공주가 될 거야! 나는 대통령이 될 거야! 라는 그 소박한 꿈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죽 가면서 이게 어디에 휘둘리게 되어 있습니까? 갇혀있으니까 어디에 휘둘려요? 지금 도가니 안에 갇혀있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유학을 갔는데 갑자기 환율이 상승했다. 원화가치가 땅에 떨어지는 거죠. 환율이 상승했으면 유학 간 애 다 들어오라고 하죠. “엄마, 나 지금 공부 잘하고 있어. MIT 곧 들어갈 거야.” “MIT고 뭐고 빨리 들어와! 아빠 돈 없어.” 그럼 딸이 “도대체 나의 꿈을 좌절시키고 짓밟은 사람이 누구야?”라고 할 거예요. 누가 나의 꿈을 깨게 했느냐? 누구야? 할 때 그 누구야가 갇혀있는 창고 같은데서 할 때는 자기에게 메아리치는, 누구야야야~~해서 다시 되돌아오는 겁니다. 

인생이라는 것은 독자적으로 자기 인생이라는 것이 없어요. 이쪽에서 확 밀면 밀리게 되고 저쪽에서 확 부추기면 부추김 당해야 돼요. 이게 성경 전도서에 나오잖아요. 사람이 울 때가 있으면 웃을 때가 있고, 태어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고, 사랑할 때가 있으면 미워할 때가 있고, 모든 것이 타이밍이잖아요. 타이밍이에요. 이게 마치 뭐와 같은가 하면 바다물결 같아서 파도가 칠 때면 높아지고 안 치면 낮아지듯이, 바다위에 떠다니는 나뭇잎이 수위를 조절할 수 없는 피동적인 입장에 있어요. 인생이라는 게 수동적인 입장에 있어요. 

갇혀있는데, 그 갇혀있는 것을 누굽니까? 라고 하겠죠. 누가 내 인생을 이렇게 망쳐놨습니까? 그러면 정답은 이중계약이죠. 이중계약. 바로 하나님의 약속, 아버지와 아들의 언약이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 휘둘리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이중계약을 어떻게 실시했는지를 그걸 하나의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쉬운 예를 들면 이해가 돼요. 제목이 ‘노예와 대령’이라고 했어요. 노예와 대령. 

노예시절 때, 미국의 남북전쟁 할 그 시절에 대령이라고 하는 것은 군인이니까, 높은 사람이죠. 큰 저택을 갖고 있고. 그 집에 노예가 있었는데, 노예하고 대령하고 심심풀이로 내기를 했어요. 노예가 뭐라고 내기를 제시했느냐 하면 자기가 계란을 얼마나 잘 던지는지를 주인 되는 대령한테 자랑질을 하는 거예요.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바구니를 여기에 놓고 저기에 서서 계란을 던져서 안 깨지고 그 바구니에 열두 개의 계란을 다 놓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만약에 하게 되면 50달러를 대령님이 저한테 주시고, 제가 못하게 되면 50달러를 제가 대령님한테 드리겠다고 내기를 했어요. 

근데 대령이 보니까 거리가 멀어요. 말도 안 돼요. 그냥 넣어도 계란이 깨질 텐데, 던져서 바구니에 넣는데 그 열두 개의 계란이 안 깨진다는 것은 이건 있을 수 없거든요. 그래서 “해봐!” 했어요. 해봐라 해서 하니까 던지는 족족이 다 깨졌어요. 그런데 이 노예가 50달러를 벌었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노예가 대령이 오기 전에 다른 농장주한테 가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내가 계란 열두 개를 깨도 우리 주인 대령이 아무 잔소리도 하지 않고 기쁘게 그걸 볼 수 있다면 저한테 백 달러를 주시겠습니까?”라고 했던 거예요. “만약에 내가 계란 열두 개를 깨서 주인이 화를 낸다면 제가 백 달러를 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좋다!”라고 했어요. “그럼 창문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창문으로 보니까 노예가 계란을 던지는 족족 깨지니까 대령의 입이 벌어졌어요. 이 바보 같은 인간! 이게 바로 이중계약입니다. 

십자가는 이중계약이에요. 낮은 자가 승리하는 계약이에요. 다른 말로 하면 패배자가 승자가 되는 계약이에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에 어떤 원칙으로 왔는가는 빌립보서 2장에 나와요. 그분은 하나님과 동등하죠. 계약했습니다. 하나님과 동등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 와서는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했죠. 이중계약이죠. 이 땅에서 인간들이 보기에는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이에요. 그냥 설쳐서 해보려고 했다가 안 됐던 실패한 자에요. 

그래서 이 세상을 지배하는 인간들 입장에서는 예수님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겁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 하는 것하고 똑같아요.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왜 그렇게 나대냐 이 말이죠. 그냥 병 고칠 때는 팬들이 있었죠. “이야! 저 사람 대단하다.” 근데 나중에 가서는 그런 기적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렸어요. 요새 말로 할 것 같으면 교회를 건드린 거예요. 

그 당시 사람들은 이중계약이 아니고 단일계약이었습니다. 이중계약과 단일계약의 대치죠. 단일계약이 뭐냐 하면 모세언약, 두자로 하면 율법이죠. 율법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그 다음에 대상자가 있어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한 민족 대상자로 해서 여기에 단일체계로 나갔어요. 이 단일체계 중심에 있는 것이 뭐냐 성전입니다. 그리고 이 성전 계약을 할 때 이스라엘을 뭐라고 했느냐 하면 다윗의 자손으로 봤어요. 오늘 본문에 나오죠. 다윗의 자손. 

다윗의 자손이 하나님의 계약에 의해서 성전을 지키게 되면 메시야를 보내서 너희들을 옛날 왕 같은 제사장나라, 천국으로 만들어주겠다고 그렇게 율법에 계약을 했다는 겁니다. 누구 쪽에서? 이스라엘 쪽에서 그렇게 한 거예요. 근데 그 조건이 뭐냐, 이 율법을 지키면 복을 받고 안 지키면 저주를 받는 거예요. 이게 단일계약이에요. 단일계약에 복과 저주가 이질적인, 서로 상충될 수 없는 결과물이 주어진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혼신의 노력을 다합니다. 십계명부터 포함해서 율법을 철저에 철저를 완벽에 완벽을 기한 겁니다. 오늘날 꼭 교회 같아요. 십일조에다가 안식일 지킨다고 주일을 지키고 그런 것 가지고는 모자라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아야 되고 성화해야 되고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대로 거룩에 또 매진하고 경건에 경건을 더하고, 사도바울의 온갖 지시와 명령 있잖아요. 그걸 전부다 자기들이 실천하려고 하는 거예요. 

제가 오늘 강의 처음에 뭐라고 했던가요? 선언 다음에 뭐가 나옵니까? 선언과 실천이 이게 한조가 되어서 떨어지면 안 돼요. 선언하신 분이 실천을 해요. 선언하신 분이 실천하신다고요. 왜냐하면 이중계약자가 전부다 예수님에게 국한이 되어 있어요. 다른 사람의 실천을 주께서 안 받습니다. 안 받는 이유가 하나님 아버지에게 영광이 안 돼요. 그런 이야기를 할 때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이야기를 설명하게 되면 여러분이 한방에 이해가 됩니다. 

마태복음 5장 29절에 보면 니 오른 눈이 너를 실족하게 하거든 빼버리라고 하죠. 그 다음에 오른손이 범죄 하거든 찍어버리고. 이걸 한번 보자 이 말입니다. 여기에 오른손이 있고 오른 눈도 있다 이 말이죠. 주님의 취지를 한번 보세요. 오른 귀가 있다. 귀도 빼고, 그럼 나머지가 천국에 가죠. 오른 눈이 있다. 그럼 오른 눈을 빼버리자. 이쪽에는 반창고 하나 붙이고요. 입도 빼고 혀도 빼고 이거 반병신이죠. 이게 인간입니까? 애들이 옷 입히기 인형놀이 할 때 전부다 째고 난리도 아니잖아요. 이렇게 되더라도 어디만 안 가면 니는 남는 장사다? 지옥에 안 가면 이게 남는 장사라는 거예요. 이익이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게 A1이거든요. A1을 난도질을 해버려요.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그대로 실천에 옮길까요? 안 옮길까요? 이걸 그대로 실천에 옮깁니다. 왜냐하면 나이 87세가 되게 되면 이게 어디에 가느냐 하면 화장터에 갑니다. 완전히 가루로 만들어버려요. 그게 A1에서 A2로 가는 과정입니다. 그걸 누가 죽이십니까? 주님이 죽이시는 거예요. 88세 안 됩니다. 87세로 떨어버려요. 누구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더 살고 싶어도 안 돼요. 그냥 돌아가셔야 돼요. 참새도 주님의 타이밍에 떨어지게 되어 있어요. 

죽음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죽음이란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내놓지 아니하면 그게 죽음입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내놓지 아니하면 그게 죽음이에요. 내가 움직인다고 죽음이 아닌 게 아닙니다. 내가 백날 움직여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못 내놓는다면 그건 죽음입니다. 주께서 원하는 것은 니 손으로 끊으라는 겁니다. 니 손으로. 니 손으로 끊으라고 하는데 우리는 아무리 실천, 실천하지만 내 손으로 끊을 수가 없어요. 내 손으로. 내 손으로 끊었다가는 나머지기 왼눈도 끊어야 돼요. 나중에 자기가 끊고 싶어도 두 팔 다 날아갔는데 입을 칼로 물고 끊을까요? 

주께서는 아주 간편하게 합니다. “그냥 있어. 내가 나중에 화장터에서 사그리 아주 가루로 만들어줄 테니까.” 이게 주님의 실천입니다. 연세 든 사람은 점점 더 주님의 실천력이 많이 보이고 아직 20대 같은 경우에는 내가 보기에는 실천력이 별로 안 보여요. 자기 실천력이 더 강해. 나중에 연세 좀 들게 되면 화장발도 안 먹어요. 화장하고 피부하고 똑똑 떨어진다니까요. 간격이 생겨가지고 가다보면 툭툭 떨어져가지고 아침에 다시 또 발라야 돼요. 기초화장 다시해서.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주께서 친히 우리 인생을 원하든 원치 않던 지금 다루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이미 죽은 자라는 것을 A1, 우리 자신이 동의를 안 하거든요. 그러나 주님의 과제는 A2로 기어이 동의하든 안 하던 관계없이 주님께서 가는데, 갈 때 여기서 뭐냐 하면 주님의 선언과 실천을 이해하는 사람을 만들어서, A2로 만들어서 천국백성을 삼으시는 것이 주님의 계획입니다. 

그러면 이 계획에 있어서 아까 이야기한 것을 다시해보겠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계획을 이중계약으로 보지 않고 단일계획으로 본 겁니다. 실천을 본인이 한 겁니다. 여기에 자기가 있고, 자기는 이스라엘이고, 이스라엘은 집단이고, 그리고 위에 하나님이 계시고, 약속대로 성전, 성전은 다윗언약이거든요. 성전대로 하면서 율법대로 지킨다. 이건 모세언약입니다. 모세언약과 다윗언약은 전부다 한 계통이니까 단일 언약이거든요. 모세언약 다음에 다윗언약이 나왔으니까. 주께서 이렇게 하신 것을 우리가 실천에 옮기게 되면 우리가 구원받아 천국에 간다고 할 때 이 성전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들은 이 성전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통한다고 해서, 이 성전을 기도하는 집으로 본 겁니다.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는 것은 여기에 뭐가 있느냐 하면 주님의 이름이 계시는 곳이에요. 여기에 주님의 이름이 계시기에 주의 이름을 부르면 여기에서 응답이 주어지는 것은 바로 성전에서 주어진다는 겁니다. 성전에 들어가면 제일 좋고 못 들어갈 것 같으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게 되면 주께서는 응답한다. 왕상 8장에 보면 나옵니다. 이 사람들은 이걸 그대로 인정한 거거든요. 

그래서 어떤 경우라도 성전이 있으면 우리 민족은 희망이 있다. 이래 되는 겁니다. 지금도 예루살렘에 가면 성전을 회복하기 위해서, 메시야가 온다고 유대인들은 철썩 같이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호시탐탐 그 성전을 접수하려고 하고, 그 성전이 모리아산에 있거든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던. 그 모리아산 현장에 뭐가 있느냐 하면 황금 돔이 있어요. 제가 올려놓은 이스라엘 답사기 76번에 보면 황금 돔이 이렇게 있어요. 

여기가 바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한 모리아산입니다. 여기에 누가 오느냐 하면 감람산에서, 이 옆에 기드론 골짜기가 있고, 기드론 골짜기도 76번에 나와요. 감람산, 겟세마네 동산, 예수님의 승천하신 곳, 승천교회도 있고 눈물교회도 있어요. 이게 얼마 안 높아요. 200미터 되는가, 여기에 메시야가 와서 동쪽 문으로 들어가요. 지금 동쪽문은 제가 가보니까 닫혀있어요. 동쪽 문으로 들어가서 황금 돔을 접수하면 이게 스가랴의 말씀대로 이 세상은 전부다 끝장이 나는 겁니다. 모든 것이 완료가 돼요. 그걸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그때 지은 성전이, 솔로몬성전이 제1성전, 헤롯성전이 제2성전, 메시야가 오는 성전이 제3성전, 제3성전을 유지하기 위해서 금 촛대를 그들은 모형으로 만들어놨어요. 그건 사진으로 안 찍었어요. 쓸데없다 싶어서 안 찍었는데, 안 찍은 것을 지금 후회가 됩니다만, 일곱 가지 촛대를 만들어놨어요. 이들은 준비 다 되어 있어요. 근데 예수님은 어디에 들어갑니까? 성전에 들어가서 이걸 확 엎어버린 거예요. 왜냐하면 웬 부동산이냐 말이죠. 부동산? 부동산이라는 것은 건물이잖아요. 

부동산이 우리한테 뭘 해줄 수가 있어요? 우리가 찾아가야 되지. 건물이 우리한테 뭘 할 수 있느냔 말이죠. 건물이. 우리가 할 수 없는데 찾아오는 성전이 돼야죠. 주님께서는 이걸 헐어버리라. 내가 사흘 만에 짓겠다고 할 때, 그 몸을 가지고 바로 무슨 몸이라고 합니까? 예수님의 그냥 몸이 아니고 예수님의 부활의 몸이에요. 부활의 몸이라고 하는 것은 죽었었던 적이 있다. 이 땅에서 죽었었던 적이 있다. 죽었었던 적이 있는 몸이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부활의 진로를 밟게 되면 우리도 비록 죽었다고 평 받은 적이 있지만, 부활이기 때문에 뭐가 됩니까? 우리는 죽었어야 될 몸이지만 지금은 어떤 몸이다? 산몸이 되었다. 이렇게 이해가 되는 겁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몸 안에, 부활의 몸이 오게 되면 성령이거든요. 성령이 오게 되면 죽었었던 적이 있다 이 말이죠. 우리는 죽어있는 몸이기 때문에, 육이거든요. 죽어있는 몸이기 때문에 우리에 대해서 죄책을 묻는다? 안 묻는다? 안 묻죠. 왜? 죄 값으로 이미 죽었기 때문에. 

죽어있는 몸을 건드려서 “니 왜 책임 안 져?” 이렇게 이야기합니까? 이미 죽었는데. 죽은 이유가 뭡니까? 율법을 못 지켜서 죽었잖아요. 못 지키는 것을 뻔히 알잖아요. 우리가. 성경말씀 어느 것 하나 못 지키거든요. 우리는 그런 실천력이 없어요. 못 지키는 인간에게 “일어나! 일어나! 너 이거 왜 안 했어?” 아버지가 술 먹고 밤늦게 와가지고 자는 자식들 깨워놓고 술 냄새 팍팍 피우면서, 자식은 “아이, 냄새!”하고, “아빠가 돈 벌려고 마셨다.”라고 하고. 돈 번다고 술 마시고 비틀거리면서 “니 공부 왜 안 했어?” 이렇게 하는 것 하고 똑같은 거예요. 하나님이 술 취했어요? 하나님이 술 취하신 거예요? 

아까 적용할 때, 실천에 옮길 때 어떻게 하신다고 했습니까? 우리를 어떻게 한다? 죽이고서 하죠. 죽일 때 칼 들고 설치는 것이 아닙니다. 뭐로 하느냐 하면 율법으로 죽여요. 탐내지 말라고 했잖아! 탐내지 말라고 했는데 탐냈으니까 이미 우리는 죽은 몸이 되는 거예요. 이게 안목이, 주님이 주신 안목과 내가 나를 살리고자 싶어서 하는 안목이 완전히 대립이 되는 겁니다. 

자, 아직까지 이중계약에 대해서 이야기를 안 했습니다. 그럼 여기서 이중계약을 이야기를 할 시간이 됐는데, 아까 한 이중계약의 한 가지를 복습해보면 갇혀있다는 겁니다. 제가 갇혀있다는 이야기를 했죠. 근데 어디에? 누구에게? 이건 이야기를 안 했죠. 바로 이중계약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과의 계약, 그리고 아들과 미지의 어떤 자기의 백성과의 이 계약이 이중계약이에요. 이중계약인데 이게 하나의 언약입니다. 

하나의 언약이 지상에 왔을 때는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아들과 미지의 사람하고 하는데, 이 미지의 사람이 현재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는데 어디서 구하느냐 하면 갇혀있는 여기서 구하는 겁니다. 갇혀있을 때 이 사람들은 뭐가 되느냐 하면 죄인이 되죠. 죄에 갇혀있으니까. 또는 악마에 갇혀있으니까. 죄에 갇혀있다, 악마에 갇혀있다, 또는 율법에 갇혀있다는 말은 못 벗어난다는 말입니다. 

제가 죄인이라는 말을 하면 사람들은 상당히 기분 나빠해요.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느냐고 그렇게 반발하는데, 제가 말하는 죄인이라는 말은 본인이 본인 뜻대로 안 될 정도로 갇혀있는 신세라는 뜻이에요. 죄인이라는 뜻은. 갇혀있는 신세라는 말이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어요. 먹는 것 입는 걸로 족하고 싶은데, 우리 동네에도 롯데몰 이시아폴리스점이라고 있어요. 손님이 언제 많은가 하면 추석 끝나고 많아요. 추석 끝나고 음식 장만한 자기에게 스스로 위로를 해야 돼요. 

위로하는 방법이 뭐냐 하면 옷사러가는 겁니다. 옷 사고 쇼핑하는 거예요. 바글바글. 백화점이 명절 끝나고 난 뒤에 바글바글해요. 그 얼마나 스트레스 받았으면 명절 끝나고 난 뒤에 한방으로 싸질러버리는 거예요. 신상 옷을 사는 거예요. 탐내지 말라고 했거든요. 도대체 어느 정도 낮아야 탐을 안 낼 수가 있어요? 어느 정도로 낮아야? 70된 우리 고모가 아버지 없이 아들을 키웠는데, 아들이 그 어머니의 공로로 차를 하나 사줬어요. 차 이름이 퓨마에요. 퓨마라는 차를 압니까? 잘 못 들어본 차라 인터넷을 한번 찾아보니까, 최소 6500에서 정확히 1억 6000짜리에요. 이걸 하나 떡하니 샀어요. 

그러면 자기 죄에서 벗어났습니까? 퓨마를 타다가 하찮은 그랜저로 바꿨다 칩시다. 그러면 탐을 안 내는 거예요? 소울 타는 사람은 생각 안 합니까? 도대체 어느 정도 낮아야, 어느 정도 낮은 폭을 해야 탐을 안 낸 겁니까? 한국의 거지라도 아프리카에 가면 중산층이라고 했죠. 젊은 사람들이 중소기업에 안 옵니다. 왜냐하면 중소기업이 어떤 짓을 하는지를 한번 가보게 되면 기겁을 해요. 진짜 기겁을 합니다. 

중소기업은 노동자들의 인권이라든지 노동자들의 건강 같은 것은 아예 생각을 안 해요. 하청에, 하청에 하청으로 떨어지는데 건강 생각하다가는 남는 돈이 없어요. 노끈을 해도 그냥 혼자서 하는 거예요. 광산김씨가 하듯이 혼자서 하는 거예요. 거기에 외국노동자들이 아니면 일할 사람이 없습니다. 도대체 어느 정도로 낮아져야 돼요? 어느 정도로. 

어떤 사람이 행복의 기준에 대해서 다섯 가지로 물었어요. 당신은 행복합니까? 테스트를 해보세요. 첫 번째가 뭐냐 하면 누가 당신을 존경하고 있습니까?(0,☓) 두 번째, 누가 당신을 전적으로 믿고 모든 소리를 할 수 있는 신뢰할 만한 사람이 주변에 있습니까?(0,☓) 세 번째, 당신의 개성이 있습니까?(0,☓) 네 번째, 새로운 취미든지 배우는 일을 했습니까?(0,☓) 다섯 번째, 자기가 선택할 수 있는 시간이 있습니까?(0,☓) 

그래서 여기에 몇 개에 해당이 되는지, 이걸 행복이라고 주장해요. 심리학자가. 근데 특징이 있어요. 전부다 나에요. 나. 나를 존중해주는 사람, 나만을 믿을 사람, 나만의 개성, 나만의 새롭게 배우는 것, 또 내가 임으로 할 수 있는 시간을 얼마나 가졌느냐. 이게 행복이라고 하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오늘 배운 것에 의하면 뭐가 빠졌어요? 갇혀있죠. 

이게 바로 우리가 주님 앞에 난도질을 당하고 완전히 죽어야 마땅한 죄가 되는 거예요.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노력하고 실천하라고 악마가 우리에게 계속해서 부추기는 겁니다. 계속해서 부추기는 거예요. “니 저 사람보다 행복해?” 결국 이거는 뭐냐 하면 끊임없이 타인과 나를 비교해야 되고 또 싸워야 되는데, 경쟁이 곧 죄라, 경쟁이 곧 죄입니다. 돌아보세요. 평생 동안 한 것이 뭐밖에 없어요? 경쟁밖에 없어요. 평생에 이거밖에 없어요. 

TV를 안 본다. 딱 두 가지 경험입니다. 하나는 TV가 고장이 났다. 또 하나는 TV프로그램이 재미가 없다. 둘 중의 하나에요. 고장 난 이것은 하드웨어고 재미가 없는 것은 소프트웨어거든요. 인간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고장 안 난 것처럼 보이죠. 하지만 이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소프트웨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광이 안 나와요. 악마가 인간에게 신이 되라고 했거든요. 악마가 인간에게 신이 되라고 한 겁니다. 신이 되라고 했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가 절대자가 되는 것만 생각해요. 그 외에는 마음속에 들어있는 것이 없어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계약을 이중계약을 한 겁니다. 하나는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과 한 계약, 그 다음에 그 계약을 실천에 옮기면서 뭐냐 하면 계약자가 없는데 계약을 해버려요. 그 계약자는 누가 만들어요. 예수님이 자기의 계약상대자를 자기가 자기 피로, 자기 공로로 없는 인간을 만들어요. 아브라함에게 아들이 있어요? 없어요? 없죠.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은 아들로 인정 안 해줍니다. 계약상대자가 아니에요. 그러면 아브라함에게 맺어질 아들은 누굽니까? 하나님에 의해서 이삭이라는 없는 자식이 새로 생기잖아요. 그처럼 하나님의 계약은 이 땅에서 없는 우리 자신을 만들기에 나서는 겁니다. 이게 바로 이중계약입니다. 어떻게 구체화되는가는 10분 쉬고 합시다.

 이미아 (IP:122.♡.170.138)18-10-01 00:14 
광주강의20180928b 마가복음12장 35-37절(이중계약)-이 근호 목사 

쉬는 시간에 우리 김을수 집사님이 말씀하신 것을 다시 정리하게 되면, 보통 세상에 속해 있는 눈에 보이는 것을 현실로 보고 그 현실 속에 예수님이 오셨다. 이렇게 봐요. 그게 상식이고 당연하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렇게 보시지 않고, 이 세상이 눈에 보이는 그 전에 먼저 계약이 있었고, 계약에 따라서 철저하게 현실이 구성되었다고 보는 거예요. 그렇다면 눈에 보이는 이 현실은 뭐냐, 이중계약이니까,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은 쇠해야 됩니다. 쇠하고, 파괴되고, 불바다 되어야 하고, 계약이 완료되었으니까 그렇게 하고. 

그 다음에 새로운 계약, 새 언약에 의해서 천국이 만들어집니다. 이 작업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신 거예요. 이 작업을 위해서. 오시면 그냥 오시면 되지, 인간을 왜 건드리느냐? 라고 하실 거예요. 그 건드리는 이유가 뭐냐, 아까 했지만, 중요한 것이니까 다시 설명을 드리면 계약상대자를 이스라엘 사람들은 본인으로 봤어요. 본인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자기들하고 계약을 맺었다. 출애굽기 19장에서 피를 뿌리면서 또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했는데.  

그런데 이 이스라엘이 아니에요. 이 이스라엘이 아니고 뭐냐 하면 ‘없는 이스라엘’이에요. 없는 이스라엘. 이 없는 이스라엘을 로마서 9장에서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렘넌트remnant, 남은 자인데, 없는 이스라엘에서 남은 자가 여기서 나오는 겁니다. 몇 명이 나오느냐? 몇 명이 아니고 단 한 명이 나와요. 그 단 한명이 바로 예수님 본인이십니다. 그 한명이 나올 때 예수님 안에 누가 들어 있느냐 하면, 오늘 본문에 다윗의 자손이라는 계약 내용이 예수님 안에 합류가 되어 있어요. 여기에 담기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다윗의 자손이 된다는 것은 존재로 되는 것이 아니고 어떤 기능이 있는데, 그 기능이 몇 절이냐면 36절입니다.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일을 시킵니다.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라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기능에 누가 등장합니까? 원수가 등장하죠. 원수라고 하는 것은 뱀이라고 해도 되고 악마라고 해도 되고 뭐라고 해도 좋아요. 뭐라고 해도 다 같은 거니까. 악마라는 이야기가 어디서 비로소 나타나느냐 하면은 없던 현실에서 등장할 때 악마도 같이 등장하는 거예요. 

그러면 기존의 인간들 현실 속에 악마는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는 거예요. 인간들 현실 속에는 악마가 없습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악마, 이거는 나쁜 놈이에요. 나쁜 자. 인간들의 선악구조 속에서 생각하는 악마는 나쁜 놈이에요. 사람의 목을 휙휙 돌아가게 만들고, 뭐 수녀인데 악마가 되어 있고. ‘더 넌’이라는 최근의 영화에 보면 수녀원에 악마가 나옵니다. 시계바늘이 막 돌아가고 있고, 십자가는 삑삑 돌고, 흉측하고 괴물 같은 이런 악마는 주로 습기 찬 데, 음침한 데 있고, 낮에는 안 나타나요. 꼭 밤에 나타나요. 

결국 이런 악마는 뭐냐, 인간 내부에 있는 무엇의 반영이냐 하면 알 수 없는 공포심의 반영이죠. 공포심의 반영을 말합니다. 공포심이라고 하는 것은 쉽게 말해서 쫓기는 거예요. 쫓기는 것의 대표적인 증세가 뭡니까? 우울증이 아닙니까? 우울증 걸린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정서가 불안정해요. 눈을 보면 알 수가 있어요. 눈 같은 것을 보면 정서가 불안정해요. 눈을 못 봐요. 숨고 싶은 겁니다. 드러내고 싶지 않은 것. 지키고 싶다. 무엇을? 나를! 나를 지키고 싶은 거예요. 그러면 더 쫓기잖아요. 쫓기면 몇 개 양보하고 또 숨어들어가요. 나와! 하면 안 나와요. 지금까지 자기가 양보한 자아의 전부기 때문에. 또 다가가면 또 도망칩니다. 또 도망쳐요. 

한국 떠나서 자꾸 아프리카로 숨어 들어가는데, 못 찾아오도록 자꾸 기어들어가요. 지리산에 기어들어가고 태백산에 기어들어가고. 계속 기어들어가요. 저는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렇게 표현합니다. 신경조직을 건드리는 겁니다. 아픈 데를 건드리는 겁니다. 아픈 데를 감싸고 내빼기 바빠요. 끊임없이. 부부가 사이가 안 좋다. 추석날에 안 옵니다. 백퍼센트 안 옵니다. 곧 이혼직전이다. 절대로 안 오죠. 잡채하고 찜하고 애들 편으로 보내고 자기는 안 와요. 누구 꼴 보기 싫은 사람이 있다고. 십자가마을보고 이야기 하는 거 아니에요. 제가 이 말을 왜 끄집어냈는지. 

기독교교리하고 복음하고의 차이가 뭐냐 하면 기독교교리는 이게 지식이거든요. 나 여기 있고, 나는 터치 안하고 나는 그대로 있고 플러스알파(+α)하는 것처럼 지식 하나 추가해서 지식으로 확보하게 되면 구원 얻는다. 이게 기독교교리입니다. 왜냐하면 이 기독교교리를 몰랐을 때는 내가 80점짜리인데, 이 기독교교리를 알게 되면 20점 보태서 100점 만점이 되기 때문에 나에게 이익이 돼요. 몰랐을 때보다 알 때가 나에게 이득이 되고. 나는 그대로 있고 80점을 유지하면서 플러스(+) 새로운 20점을 추가해서 완벽을 기할 수 있는 이것이 기독교리입니다. 

근데 복음은 뭐냐 하면 이 80점을 건드려요. 이걸 건드린다고요. 기독교교리는 자기 자신을 하나의 쟁반으로 삼고 기독교를 담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 복음은 쟁반을, 접시를 깨트립니다. 우리 자신이 구원받을 자격도 없고, 천국 갈 자격도 없다는 것이 복음이에요. 복음은 뭘 건드리느냐 자아를 건드립니다. 그래서 복음은 걸림돌, 십자가에요.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너희들이 나를 내쳤다는 사실을 니가 수용할 수 있느냐, 니가 나를 미워해서 밀쳤다는 사실을 니가 그대로 수용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그걸 수용한다면 구원이 되고, 수용을 못하면 구원이 안 되는 거예요. 나 때문에 피해를 본 그 피해자를 내 안의 중심으로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래서 복음은 뭘 통해서 알 수가 있느냐 하면 오직 성령을 통해서 알 수가 있는데, 성령은 뭐냐 하면 이미 죽었다가 부활하신 그분의 영이잖아요. 성령이 오게 되면 십자가사건을 우리에게 되돌려주죠. 그렇게 되면 우리는 뭐가 돼요? 죄인+십자가 되어서 이게 A2가 되는 겁니다. 이게 천국 가는 겁니다. 우리의 면류관도 반납해버리고.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뭘 부르러 왔다고 했습니까?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했죠. 선언+( )뭡니까? 선언+(실천)이잖아요. 실천할 때에 죄인이라고 나선 자를 불러주는 것이 아니에요. 모든 인간은 의인입니다. 자기가 죄인이라고 이야기를 한 것도, 죄인이라고 이야기를 한 것 자체가 나의 의로운 요소가 돼버려요. 반성할 줄 아는 인간인 만큼 내가 반성하는 것을 모르는 인간보다 더 월등하게 괜찮은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는 겁니다. 

사람들이 교회 갈 때 죄인이 되려고 교회 가는 것이 아니에요. 지금보다 더 나은 의인이 되려고 가는 겁니다. 의인의 경쟁 장이에요. 의인의 배틀 장입니다. 회개하고 반성하고 난리도 아니에요. 왜 이런 짓을 합니까? 회개하고 반성함으로 말미암아 자꾸 곁눈질을 한다고요. 나는 저들과 같지 아니하고. 나는 저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만큼 된 것을 감사합니다. 마치 바리새인의 양성소에요. 바리새인의 양성소. 

나는 저들과 같이 중이 되지 않고 목사고 되었다. 나는 저들과 같이 교회 안 다니는 것이 아니고 교회 다녔습니다. 자꾸 이렇게 자기 자신의 품위와 가치와 모든 역량을 다해서, 목사가 시키는 대로 다해서 역량을 높이는 수련장이 바로 교회입니다. 완전히 주짓수 하는 수련장 같아요. 주짓수 알아요? 브라질에서 시작이 됐는데 이번에 금메달을 땄죠. 사람 붙들고 안 놔주는 것. 요새 남자들에게서 그게 유행입니다. 왜냐하면 살 빼는데 그게 최고에요. 

기독교 교리는 자기의 품위를 격상시키고 자기가 상상하기에 죄인이 아니라 지금보다 더 나은 의인을 만드는데 아주 적절하다고 생각해서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천주교 교리를 실천에 옮긴 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청교도라고 해요. 청교도. 나는 청교도라고 해서 얼굴이 퍼런색인줄 알았어요. 이게 청교도인줄 알았어요. 퓨리탄Puritan 순수한 자, 순수한 자 평가를 누가 내립니까? 본인이 내리는 거예요. 보다 더 순수하게, 보다 더 철저하게 남한테 해 입히지 않고. 

조금만 잘못하면, 일본말로 스미마셍すみません, 스미마셍! 스미마셍! 일본여자들이 깎듯이 하잖아요. 요새 제가 일본노래 하나 생각하고 있어요. ‘연인이여(고이비또요)’라는 노래인데, 아가서 준비하면서 그거 분석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히트해서 우리나라 나훈아가 부르고 했어요. 전에도 이야기했는데 아가서가 여자가 아니고 여인이 되고, 여인에서 여성성으로 바뀌어요. 그래서 아가서에는 여자가 없어요. 왜냐하면 아가서에 나오는 이 여자는 젊은 여자입니다. 젊은 여자로 이게 고정될 수가 없어요. 어떤 젊은 여자도 나이가 들게 되어 있잖아요. 

그러면 솔로몬이 젊은 여자를 사랑했다는 말은, 만약에 그 여자가 늙으면 어떻게 돼요? 사랑 안 할 수가 있어요. 그러면 사랑이 유지되려면 그 여자는 젊은 여자로 계속 확정이 되어야 하잖아요. 그렇다면 젊은 여자는 실존하는 것이 아니고 솔로몬 마음속에 하나의 연인, 또는 여인으로 남아있어야 돼요. 여인으로 남아있는 이것에 대해서 솔로몬 자기는 안 늙습니까? 그러니까 남자, 여자가 없어지고 남성성, 여성성으로 바뀌면서 이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과 관련되어 있는, 이렇게 한번 풀어보려고 제가 지금 반을 썼어요. 거기다가 더 구체적인 것을 해서 넣을 텐데. 

결국 사랑이라는 것은 없는 거예요.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자기사랑밖에 없는데, 자기이미지의 확대, 자기가 되고 싶은 여성성을 남성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여성은 자기가 되고 싶은 남성성을 사랑이라고 하면서 일방적으로 그렇게 굳히는 겁니다. 자기를 위한 사랑이죠. 아가서에서는 그것은 관계가 없는 겁니다. 이것도 오늘 본문하고 무슨 관계가 있느냐 하면, 그걸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할게요. 

여러분이 알기 쉽게 정리하게 되면 이미 악마를 통해서, 죄를 통해서 인간은 갇혀있는 거예요. 갇혀있다면 예수님께서 언약을 맺을 때 이스라엘은 없어요. 없는 이스라엘을 갇혀있는 여기에서 구합니다. 이 죄인을 가져와가지고 의인 만든 결과물이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이 작업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자기는 오지 않고 낚싯줄 던져가지고, “야! 너 천국 와!” 이렇게 되면 안 돼요. 

예수님께서 어디 속에 들어와야 하느냐 하면 갇힌 이 속에 들어와야 돼요. 이 속에 들어오면서 생긴 계약이 뭐냐 하면 바로 두 번째 계약이에요. 이중계약에서 두 번째 계약이에요. 두 번째 계약. 첫 번째 계약이 뭐였습니까? 창세전의 계약이죠. 창세전의 계약 말고 지상에서 일어나는 두 번째 계약, 두 번째 계약을 실시합니다. 두 번째 계약이 뭐냐 하면 바로 피와 살로 맺어진 언약이죠. 내 살을 먹어라. 내 피를 마셔라. 이게 하나님이 세운 새 언약입니다. 

그런데 그 대상자가 누구냐? 없어요. 열두 제자 다 도망가 버립니다. 열두 제자의 특징은 예수님께서 선택을 했잖아요. 근데 선택에 담긴 취지가, 가장 잘 나타나있는 취지가 뭐냐 하면 그중의 하나는 가룟 유다를 주께서 선택한 거예요. 가룟 유다를 선택함으로 말미암아 가룟 유다(1명) 말고 나머지기 제자들(11명)은 어디에 다 종속되느냐 하면은 가룟 유다의 배신으로 말미암아 열두 제자 자체가 완전히 다 우르르 무너지게 되는 구조를 주님께서 만드시는 거예요. 가룟 유다하고 언약을 맺을, 가룟 유다는 사탄인데, 사탄하고 언약을 맺을 일이 없지 않습니까?   

다시 한 번 정리해봅시다. 자, 악마는 뭐냐, 인간들이 만나는 악마는 주로 언제 나타나고? 주로 밤에 나타나고. 장소는 어디에 나타난다? 물가, 음침한데, 그러니까 집 지을 때 방수시설 잘 해야 된다니까요. 뒤에 수맥 흐르는지 살피잖아요. 인간이 만든 악마의 특징이 뭐냐 하면 나에게 손해를 입히는 거예요. 나에게 손해를 입히는 것은 악마가 돼요. 이게 인간이 악마에게 갇혀있는 꼴입니다. “악마란 나에게 손해를 입히는 것.” 이렇게 보는 겁니다. 갇혀있기 때문에. 누구한테? 악마한테. 

악마는 인간이 만들어낸 악마인데, 악마는 인간에게 보이지도 않고 없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악마는 언제 나타나는가, 예수님께서 갇힌 이 속에 들어올 때 드디어 악마는 자기의 본색을 못 이기고 마중을 나오죠. 마중 나오는 것은 적대하려고 나오지를 않아요. 광야에서 시험하잖아요. 예수님을 시험했죠. 그리고 마태복음 8장에서 귀신들린 청년한테 갔을 때에 악마가 먼저 예수님한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29절에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인데 우리를 멸망시키려고 일찍 왔습니까?” 

악마는 예수님이 등장하는 현장에서만 등장해요. 이걸 사도바울이 이야기를 해요. 복음이 전파되는 현장에 악마가 감지가 된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악마가 감지가 돼요. 그럼 아까 사탄은 빼고 가룟 유다가 예수님한테 뭘 했습니까? 배신했죠. 예수님을 팔아먹었잖아요. 그러면 처음에 가룟 유다는 뭐였습니까? 예수님의 제자였죠. 회계를 맡았으니까 임원들 중의 하나로  고위간부에요. 

예수님에게 선택을 받았는데 배신했다? 그러면 악마가 여기서 등장한다면, 악마가 하는 일은 뭐냐 하면 결국은 배신하는 거예요. 달리 이야기해서 나에게 손해를 입히는 자가 악마가 아니라 예수님을 배신하는 그 경향이 바로 악마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을 배신하는 그 경향이 악마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강원도 골짜기에 살아서 복음들은 적도 없고 한 번도 예수를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뭐도 없습니까? 배신하는 것도 못 느끼고 그냥 살다 죽는 거죠. 뭐. 마귀에 속했다는 것도 자기가 모르고 살죠. 

다시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 현장에 오게 되면 이 세상에 있는 유대인들이 마중을 나갈 것이고, 유대인들보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너희 아비=악마라고 했죠. 요한복음 8장 44절에서. 이 악마가 유대인에게서 만들어낸 것이 뭐냐 하면 종교라는 것을 만들었어요. 종교의 특징은 인간의 행함으로써 실천을 하게 되면 어디에 이릅니까? 거룩과 경건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치는 곳이 바로 종교가 되는 겁니다. 

처음에 강의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모든 실천은 누구의 것이다? 주님의 것이고. 우리는 해서는 왜 안 되느냐 하면, 우리는 그냥 마땅히 죽어야 될 운명이에요. 다만 성도나 성도 아닌 자나 다 죽지만, 성도의 특징은 뭐냐 죽어가면서 하나님이 선언하신 것, 하나님이 언약하신 것, 하나님이 계약하신 것, 하나님이 실천하신 것을 알면서 죽는다는 사실. 그 점이 성도와 성도 아닌 자와의 차이입니다. 그걸 알면서 죽는 거예요. 성도됐다고 수입이 늘어나고 출세하고 뭐 그런 것 없어요. 

자, 갇혀있는 이 악마의 세계에 예수님께서 들어왔습니다. 그럼 여기에 군데군데 파열음이 생깁니다. 파열음이라는 것은 음이 깨지는 겁니다. 질서가 혼돈되고, 이걸 수요설교에서는 소동이라고 했죠. 소동하면 마태복음 2장에 동방박사가 왔을 때에 예루살렘에 있던 헤롯의 소동을 생각하면 돼요. 가만히 있는 도시였어요. 괜찮게 돌아가요. 누가 봐도, 제 3자가 봐도 예루살렘은 안정되어 있습니다. 

안정되어 있는데, 난데없이 별을 따라온 동방박사가, 그냥 베들레헴으로 갈 수도 있는 문제에요. 베들레헴으로 갈 수도 있는데, 별이 사라졌어요. 그러니까 별이 어디에 갔는가를 묻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왔고, 예루살렘에서 소동이 일어났고, 소동의 해결책으로 제시한 것이 뭐였어요? 헤롯이 동방박사와 그리고 누굴 죽입니까? 아기예수님과 그 가족을 전부다 살해하려고 했죠. 

이게 바로 예수님이 존재로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야기된, 새롭게 벌어진 소동이라는 말이죠. 일종의 파장이 일어난 거예요. 잔잔한 호수가, 대부분 잔잔해요. 그런데 어린애가 돌을 탁 던지는 순간, 딴 데는 조용해요. 근데 돌을 던진 그 부분만 파동이 일어나죠. 여기에 이 세상의 영적인 본색이 다 드러난다 이 말입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복음을 아는 우리는 그냥 복음 알았다고 입 다물고 있어요. 있는데, 주님께서 실천력으로 우리로 하여금, 그냥 입 다물고 있는데, 조용히 살고 싶었는데, 주께서 어떤 정황이나 사태를 일으키니까, 이게 우리 눈앞에 악마가 나타나가지고 막 공격을 해대고 핍박을 해대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내가 일부러 야기하려고 한 것이 아니고, 이 상황을 주께서 실천력으로 조작해내는 겁니다. 근데 그들이 우리 성도한테 하는 말이 이거예요. “니 뭐 잘났느냐?” 이거에요. 악마: “너 잘났어?”  천국백성: “누가 뭐래?”  악마: “서로 존중해야지. 우리 인간은 평등하니까. 지금 민주주의 사회잖아.” 인권용어 사용하겠죠. 그러면 천국백성 쪽에서 하는 말은 뭡니까? “누가 뭐래?” 

주께서 잘라내는데, 주께서 처리하거든요. 이제 구분한다고요. 그런데 이 세상 사람들은 일부러 성도가 나서서 케이크 자르듯이 한다고 오해를 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가만히 있는데 자기들이 알아서 자기들의 본색을 드러낸 거예요. 어떤 발작을 일으킨다고나 할까? 그냥 설교를 했는데 허리끈 쥐고 탁 잡아당기면서 갑자기 그쪽에서 어떤 분노가 격발이 되어서 화를 내는 거예요. 

우리는 주님의 실천이야기밖엔 안 했는데. 그렇게 하면 방종이 된다니, 악을 조장한다느니... 우리는 누가 뭐래? 하죠. 무슨 방종을 하고 악을 조장한다고 그러는지. 막살면 안 된다고 하는데, 도대체 뭘 걱정하는지. 주께서 상황과 사태를 만들어줘요. 왜 그러냐 하면은요,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성도는 있어도 없는 자고 죽어도 산자가 되기 때문에, 산자가 된다는 것은 어려우니까 지워버리고, 이미 성도는 있어도 없는 자에요. 투명인간입니다. 욕을 해도 내 내부를 통과해버려요. “뭐래?” 이런 식으로. 특히 이 말은 충청도 말이 좋아요. “왜 그래유?” 

성도는 배알도 없고 자존감도 없고 자존심도 없고. 이거 키워서 뭐할 건데요? 시장에 내다팔까요? 아무것도 없어요. 이걸 두자로 하면 “뭐래?” “뭐 어쨌다고?” 그래서 제가 이걸 지난 낮 설교에서 두자로 했죠. 등신. 제발 등신같이 살아라. 등신같이 사는 것이 그냥 최고에요. 예민하고, 민감하면 우울증 걸린다니까요. 우울증은 신경전달을 건드리는 거예요. 자꾸 아야! 하니까, 아프지 않으려고 도망치는 거예요. 그럼 그 사람은 또 다른 상황이 오면 또 아야! 하고 도망치고. 계속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그렇게 예민하고 민감해요. 

누가 나를 욕을 안 하는가? 누가 나를 험담하지 않는가? 뒷담화하지 않는가? 자꾸 이렇게 하니까, 마귀는 계속해서 니가 좀 철저하게 하지! 니가 반성하면 될 거 아니냐, 니가 회개하면 될 게 아니냐, 맨날 반성해라, 회개하라, 순수해야 돼, 뭐 어떻고, 어떻고, 니가 그동안 행동을 개차반처럼 해서 그렇다고 하는데, 우리는 이미 없는 자에요. 우리는 이 세상에 이미 없는 자고, 다중현실이라니까요. 우리는 이 현실에 없는 자고 주안에서 있는 자에요. 

그러니까 책임을 져도 주님이 책임지지 주제넘게 내가 책임질 문제가 아니다 이 말이죠. “너 등신이야?” “잘 봤네!” 이러면 끝나는 문제죠. 제가 참 은혜를 받았어요. 지금까지 평생을 등신으로 살았다는 그 말을 듣고 얼마나 은혜를 받았는지. 맞아요. 평생을 등신같이 산거예요. 등신같이 산 그것이 바로 모델Model, 이게 성도의 모델이 아닙니까? 세상에! 이렇게 되고 싶어도 못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이렇게 되고 싶어도. 

등신의 특징은 없는 거예요. 소유가 없는 겁니다. 복음으로 교회를 한번 해 보겠다? 그거는 안 됩니다. 복음으로 교회하겠다는 그거는 용인될 수 없는 거예요. 왜? 등신이었다가 갑자기 괜찮은 사람 되고자 하는 시도밖엔 안 돼요. 교회가 구원하는 게 아니에요. 교회는 하나의 결과물이고 복음이 우리를 구원하는 거예요. 주님의 실천력이 구원하는 겁니다. 

자, 성도는 없는 겁니다. 이 없다는 말은 뭐냐 하면 이것이 오늘 본문에는 다윗의 자손이에요. 이 다윗의 자손의 특징은 현재는 없으나 미래에는 있다가 됩니다. 35절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쌔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뇨” 36절,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친히 말하되” 그렇게 해놓고 37절 봅시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더라”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한번 써볼게요. 다윗이 먼저입니까? 자손이 먼저입니까? 다윗이 과거라면 자손은 미래죠. 다윗이 있을 때에 자손이 있었다? 없었다? 없었어요. 다윗이 있다면, 이게 있음이 되면 자손은 없음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걸 바꿔버립니다.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 있음이 주인이잖아요. 주인. 주인이 있어야 그 후손, 후손, 자손들이 있으니까. 자손 이전에, 원래 본성을 가진 조상이 먼저 있고 자손이 있기 마련이잖아요. 

다윗이 조상이고 주님이 그 자손이라면, 어떻게 다윗이 자기 뒤에 자손, 새끼 낳고, 새끼 낳고... 하는 그 자손을 보고 주라고 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냥 주가 되면 다윗은 뭐가 돼요? 자손이 돼버리고. 누구는? 보이지 않는 분은 뭐가 돼요? 주가 되잖아요. 어떻게 먼저 계신 분이 나중에 올 수 있느냐를 답변해보라고 예수님께서 질문을 던진 거예요. 예수님께서 질문하신 것이 처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질문하신 것이 최초에요. 제가 알기에는. 틀리면 할 수 없지만. 제가 알기에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보고 먼저 질문하신 것이 마가복음에서는 이게 처음이 아닌가, 그렇게 봐요. 먼저 도전하신 거예요. 이야기해봐라. 지금 우리한테 질문을 던진 것이 아니고 그 당시 유대인들한테 질문을 던진 거라고 보게 되면 그 사람들은 답변을 못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거든요. 누가? 본인들이. 

아브라함에게 준 언약, 약속이 그 결과물이 후대에 이스라엘, 현재 유대나라 자손이 되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살아계신 것이 확실하다. 확실하게 주님은 살아있다. 왜? 우리가 살아있으니까. 주님의 약속이 살아있고 약속이 살아있으니까 메시야가 오는 게 맞다. 그들은 이렇게 이야기를 한 겁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니까. 아브라함과 자손사이는 무슨 관계에 있습니까? 혈통관계에 있죠. 

혈통관계라는 말은 선조가 먼저 있고 자식은 나중입니다. 혈통적으로는. 할아버지가 먼저 있고 아버지가 있고 아버지가 먼저 있어야 자식이 있지. 어떻게 아버지가 자식보고 “할아버지요!” 이렇게 하는 것은 진짜 등신 되는 거예요. 그런 바보가 어디에 있겠어요? 너희들의 말이 맞다면, 이게 하나님의 언약이고 계획이라면, 그렇다면 어떻게 다윗이 자기 후손보고 먼저 계신 선조라고, 주라고 이야기를 했느냐? 그 내력을, 메커니즘을 납득 있게 설명해보라고 하니까 그들이 뭐라고 합니까? 그들이 나중에 답변을 할 수가 없습니다. 37절에 보면 “백성들이 즐겁게 듣더라” 이래 되어 있지만, 답변은 할 수가 없었어요. 

그러면 우리는 답변을 해야죠. 답변을 해야 됩니다. 이게 뭐냐 하면 처음에 이중현실, 이중계약 또는 다중현실. 계약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뭐가 나온다고 했습니까? 현실이죠.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이 계획한대로, 그대로 첫날부터 칠일 때까지 이 현실이라는 것이 창조되었습니다. 만들어졌어요. 계약이 먼저 있고 현실이 있죠. 그러면 현실에 속한 사람은 현실을 통해서 어디를 찾아가야 합니까? 계약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인가를 찾아가야 하잖아요. 

찾아가야 하는데, 악마가 개입해서 이것을 끊어놨어요. 끊어놓으니까 누가 찾아와야 합니까? 이 현실이라는 것이 어떤 계약에 의해서 현실이 되었는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이 현실 속에 삽입이 된 겁니다. 그러면 현실이 몇 개가 되느냐 하면 기존의 현실이 있고, 이거는 망해야 될 현실이 있고, 예수님하고 아버지하고 모든 것을 완료했을 때 새롭게 생기는 현실, 천국이죠. 천국과 지옥이죠. 그것이 이 세상 현실 속에 같이 겹쳐져 있는 거예요. 중복되어 있는 겁니다. 같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미 우리는 죽었고 하나님 안에 살아있다고 이렇게 골로새서 3장 3절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고,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죽은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있기 때문에 내가 살아있다고 이야기를 해요. 나라고 하는 것은 이미 죽었어요. 죽었는데 그리스도가 살아있는 나는 A2에 해당이 되는 겁니다. 

내가 생각한 A1이 아니고, A1은 뭐냐 하면 내 인생을 내가 책임지고 내가 관리해야 될 나에요. 그러면서 우리는 점점 더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A2는 이미 우리가 죽었을 때, 미래잖아요. 그 미래로부터 출발한 거예요. 그 미래로부터 출발하니까, 그 미래가 그냥 시간상 미래가 아니고 갇힌 현실이 두 겹으로, 현실1을 현실2가 포위하고 있는 형국이에요. 

현실1에는 뭐가 있느냐 시간이 흐르고 있는데, 인간의 시간인데 과거에서부터 현재를 거쳐서 미래로 가는 이 현실에 있다면, 현실2는 뭐냐 하면 영원한 현실입니다. 묵시. 현실1은 역사가 되지만 현실2는 역사의 반대말 묵시에요. 이런 예가 마태복음 17장에 보면 나오죠. 변화산에 올라갔는데 거기에 엘리야 나오고 모세도 나오죠. 모세는 B.C1440년, 엘리야는 B,C800년, 무려 600년의 선후배의 관계인데, 그리고 예수님, 여기에 세 제자, 이 모든 것이 같은 공간이 되는 겁니다. 같은 공간, 같은 현실이 돼요. 

거기에서 아브라함도 만나고 이삭도 만나고 야곱도 만나고. 그럼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도 만나는가? 그거는 없어요. 왜냐하면 성경에 나올 때는 그리스도와 관련된 기능, 성경에 나오는 이름들은 그들의 이름이 아니고 예수님의 기능을 보여주는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아브라함은 없어요. 아브람이었죠. 아브람이 죽고 난 뒤에 아브라함이 된 겁니다. 이삭은 원래 없는 인간이고요. 야곱은 없고 야곱이 뭐가 됩니까? 이스라엘이 되죠. 

천국에서 소개하는 이름은, 명단은 뭐냐 하면 전부다 복음과 관련된 기능을 했던 사람들의 이름이었어요. 복음과 관련이 된.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복음을 사랑해서 우리를 사랑해요. 죄인을 사랑하지 않습니까? 복음을 위해서 내가 여기에, 복음을 참여하는 명분하에 우리를 사랑하는 겁니다. 창세전부터.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한 것도 복음을 사랑해서입니다. 복음을 사랑해서. 

현실에 감겨져있는 겁니다. 실례지만 신이가 나이가 몇 살이죠? 26살이죠. 스물여섯인데 반대로 육십 둘이라고 해봅시다. 아니면 팔십 둘이라고 해봅시다. 이미 아버지 엄마가 다 돌아가셨다고 쳐봅시다. 그러면 82살이면 살아온 81년이 남아있을까요? 안 남아있을까요? 단 하루만 남아있어요. 81년이 다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러면 87살이라면, 86년은 다 날아가 버렸습니다. 

살아온 것이 아무리 길다 할지라도 현재 남아있는 것은 주님의 포위된 현실2에서 허락한 것이에요. 복음을 위해서 허락한 단 하루만 남아있습니다. 일용할 양식만 남아있어요. 일용할 양식에 머물지 않는 것이 바로 시험든 거예요. 그래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에게 시험 들지 않게 해달라는 말은, 하나님이 바깥에서 우리를 보는 안목에서 빗나가지 않게 하옵소서. 거기서 얼굴 돌리지 않게 하옵소서. 이거에요. 

그래서 우리가 할 일은 오늘 하루에 충실했느냐 이거만 하면 돼요. 내일 일의 염려는 내일 주께서 과제와 숙제가 있을 것이니까, 오늘 미리 땡겨서 내일 것까지 염려한다는 것은 마치 내가 내일까지 산다는 그러한 보장이어야 하는데, 그러한 보장은 주님의 영역이기 때문에 우리가 보장할 수 없어요. 지금 이 환경, 이모 따라온 이 환경이 주께서 허락한 환경이에요. 복음을 위해서 살라는 말이죠.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제발 뭐가 되어라? 죄인으로 살아라. 두자로 하면 등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명심하라는 말이죠. 내가 해서 이 정도가 된 것이 아니고 주께서 허락하셔서 된 거예요. 주께서 허락하셔서. 아까 경제활동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모든 것이 타이밍이라고 했죠. 환율이 높고 낮고, 미국의 경상수지와 관련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그것을 인간은 알 수가 없어요. 베네수엘라를 보세요. 석유 값이 내려가서 저렇게 됐잖아요. 

그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이 아니에요. 베네수엘라 사람들이. 얼마나 물가가 높았으면 비빔밥 먹으러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값이 인플레이션이 됐잖아요. 그러니까 이거는 그들이 나쁜 것이 아니고 주님이 주신 타이밍에 말려든 거예요. 타이밍. 이거는 누가 나빠서 가난한 게 아니에요. 죄지어서 가난한 게 아니고, 부자가 되는 것도 전부다 타이밍입니다. 그때 그 시대에 타이밍에 맞춰서 된 거예요. 

그러니까 이 사실을 모르는 부자가 천국에 가기가 힘들죠. 교만하니까. 마치 자기가 잘나서 이만큼 부자가 되었다고 착각을 하니까. 죄인으로 살라는 이 말은 주께서는 뭘 구해요. 주님께서 구인광고를 냈는데, 주님의 계약에서 나와 계약할 사람을 구하는 구인광고를 냈는데 조건이 뭐냐 하면 죄인인 사람이에요. 근데 아무도 없어요. 모든 인간은 자기를 변명하고 자기를 정당화하기 때문에, 전부다 나름 의인이에요. 지금 나는 잘났는데 하나님이 안받쳐줘서 그렇다고 전부다 남 탓, 하나님 탓, 조상 탓, 다 세상 탓하고 자기는 여전히 의인이고 양심이 살아있다고 우기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이래도 니가 의인이야?”라고 사태를 일으키죠. 내 뜻대로 안 되게 하시는 겁니다. 그 뜻이 뭐냐 하면 미래에서 오신 우리의 모델,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 지신 모습에 니가 동의하느냐를 묻는 거예요. 우리는 기겁하죠. 지금 출세하려고 애쓰는데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라고 하면 누가 하겠습니까? 밀어내죠. 

그게 바로 배신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악마의 정신에 완전히 젖어있다는 사실을, 내 것 손해나게 하고 내 자존심과 명예를 훼손시킬 때는 강력하게 밀어버립니다. 밀고 우리는 복음이 없는 곳으로 도망치죠. 숨어버립니다. 지리산에 가든지 어디로 가든지 숨어버리고 도망칩니다. 도망치면 거기에서 뭐가 조금이라도 남아있겠어요? 도망치면 내 것이 남아있겠죠. 

보통 젊은 사람들이 이혼하기 직전에 자식들보고 뭐라고 합니까? “야야, 우리 아빠 안 보는  곳으로 도망쳐서 우리끼리 살자.”라고 하잖아요. 우리끼리. 자식이 무슨 죄가 있다고 자식은 왜 데려갑니까? 내 거다 이 말이죠. 내 거다. 내가 낳은 자식이니까. “아빠 잊어버리고 우리끼리 살자.” 내 것이다. 반드시 내 것이 있어요. 내 것이 다치게 되면 우리는 와락 격분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십자가는 내 것이라는 신경조직을 기어이 건드려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니가 바로 악마에 속했다는 사실을 예수님의 복음으로서 들추어주는 겁니다. 이게 바로 계약이에요. 들추어주는데, 어떻게 들추어주는가, 피를 앞장세워서 가는 거예요. 니는 피 없이는 안 돼! 너의 행함과 철저함과 완벽함으로 안 돼! 이 피가 필요한 이유는 너는 내가 다 봐주고 있기 때문에. 봐준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니 행함과 더러움을 내가 다 눈감고 아닌 척 해준다는 이 말이 아닙니까? 

그냥 계속 봐주는데 피를 보고, 피 때문에, 피를 증거 하기 위해서 너를 봐주고 있고, 너는 하잘 것 없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계속 성령을 통해서 밀어붙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 사람은 나의 기억이 쓰레기의 기억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 사람 속에 피가 안착되었다는 시그널, 신호가 되는 겁니다. 나는 뭘 해도 쓰레기다. 뭘 해도. 그동안 쓰레기가 안 되려고 얼마나 내뺐습니까? “아니 되옵니다.” 계속 밀어내는 거예요. “이것까지는 안 됩니다.” 얼마나 밀어냈습니까? 

격분이죠. 아직도 자신의 가치와 자신의 명예, 내가 평생 지켜온 그것, 자기도 뭔지 몰라요. 그런데 그것이 나의 기억 속에 있으면서 내가 나다움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절대적인 그것밖에 없다는 그것에 주께서는 피를 대면서, 주님이 바로 계약의 모델이 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의 첫 번째 계약에 두 번째 계약이 합류가 되면서 완성이 되는 겁니다. 

자, 이제  마지막 결론을 하고 마치겠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라고 할 때에, 이거는 말씀 안 드렸습니다마는, 다윗의 자손은 주가 되는데, 주가 될 때에 기능이 있어요. 기능이 뭐냐, 하나님의 원수, 36절,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라고 하셨는데, 하나님의 원수를 원수답게 드러내고 원수를 이길 때 비로소 주가 주답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다윗의 자손의 기능입니다. 

이 기능으로 인하여 결과물이 있는데, 그 결과물은 예수님께서 이런 기능을 하기 전까지는 원수 바깥으로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누구도 예수님의 구원의 대상자는 없습니다. 근데 주님께서 원수를 체포하고 거기에 갇혀있는 죄인을 끄집어낼 때, “오직 주님의 주 되심의 기능 때문에 우리는 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때에 없었던 백성이 주님의 언약에 의해서 새롭게 발생되는 겁니다. 그 일을 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오신 겁니다. 

끝으로, 그러면 이 작업에 우리가 할 게 뭐가 있느냐? 그걸 마지막으로 묻고 싶어요. 주님께서 이런, 이런 일을 하실 때 우리가 할 게 뭐가 있습니까? 할 게 있어요. “처리해주옵소서!” 내 안에 쓰레기가 계속 쌓이는 겁니다. 우울증도 걸리고, 특히 남자들은 가을이 되면 바바리 깃 세우고 잔잔한 음악이 깔리면서 걷잖아요. 호르몬 작용이랍니다. 기도죠. 

흔히 말하는 기도를 성도는 하게 되는데, 기도할 때 무조건 달라고 하면 안 되고, “내가 할 수 있는 힘은 없습니다. 제가 힘은 없습니다. 주의 힘으로 처리해주옵소서!” 천국백성과 지옥백성을 나누는 그 작업을 처리해달라고 하는 거예요. 처리해달라고 할 때 처리해줍니까? 아니면 벌써 처리하고 있는 중입니까? 처리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처리해달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여기에 가담이 되고 고백을 하고 증거 하게 되는 거예요. 

평소에 내 인생 내 힘으로 했다고 하지 말고, 주께서 천국과 지옥을, 복음 아는 자와 복음 모르는 자를 지금 이렇게 처리를 하는데, 그 처리를 내가 알도록 해주시옵소서! 라는 기도를 매일같이 하면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살기 때문에, 우리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살아있다는 것을 증거 하게 해달라고 하는 겁니다. 같은 이야기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괜히 오신 것이 아니고, 인간이 초대한 것도 아니고, 초청한 것도 아니고, 알아서 오셔서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사도바울 같은 성령 받은 사람을 만들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등신 같이 살면서도 기뻐하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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