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181123a 마가복음13장 3-8절(사설예수)-이 근호 목사
마가복음 13장 3-8절
3절, 예수께서 감람산에서 성전을 마주대하여 앉으셨을 때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종용히 묻자오되
4절,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5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6절,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7절,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8절,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
4절에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런 일’에 대해서는 13장 2절에서 이야기를 했죠.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감람산에서 한 500미터정도 되는지 몰라요. 물론 감람산 뒤쪽에서는 좀 멀겠지만, 그 성전까지 500미터는 좀 넘겠어요. 바라보면 보여요. 돌 하나도 돌 이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린다고 할 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실 때에, 그 다음 8절에 보게 되면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 이래 되어 있어요.
지금 제자들이 질문하는 것이 뭐냐 하면, 성전이 완전히 무너지는 일이 언제 일어납니까? 라고 물었거든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한 달 뒤에, 한 2년 뒤에 무너진다고 이렇게 제자들이 요구한대로 날짜, 시간을 제시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그 제시를 안 했다는 말은, 너희들의 질문 자체가 성전 무너짐의 내용과 지금 무관하게 질문하고 있다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성전은 이때 무너진다고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너희들에게 유익이 되고, 너희들이 상황이 나아질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겁니다. 언제 무너진다는 그 시기를 안다고 해서 제자들의 사정이 달라질 게 전혀 없는 거예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은 성전 무너짐, 이 성전 무너짐에 준해서 세상 전체가 무너져요.
그러면 어디에다가 주목을 해야 되느냐 하면, 성전이 무너지는데 어떻게 해서 세상 전체가 무너지는가, 성전과 세상은 어떤 고리로 연관되어 있는가를 사실은 그들의 관심사여야 한다 이 말입니다. 성전이 무너지면 세상도 무너진다는 것이 주님의 생각입니다. 그러면 그동안 세상을 지탱해왔다는 것은 세상이 이뻐서 지탱해 온 것이 아니고, 성전을 주시하면서 그동안 세상이 하나님에 의해서 지탱해온 바가 되죠.
성전에 주목하면서 그동안 덤으로 세상이 지탱해온 겁니다. 세상이 성전에 비해서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덤이죠. 우수리죠. 시장에서 콩나물 사고 뭐 사면 기본적으로 뭐 하나 더 붙이는 것이 있잖아요. 전혀 주主가 되지 못하고 변두리에 해당이 되는 거예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에 해당되는 것이 이 세상이라는 것이죠. 주님 보기에. 성전이 무너진다는 그것은 성전과 아울러서, 성전이 무너진다는 것은 세상이 무너진다는 것의 기정사실이죠.
그러면 주님은 성전 무너진다는 것에 대해서 언급을 했잖아요. 그러면 제자들이 예수님 마음을 안다면 그들은 어디에 주목을 해야 됩니까? 그들도 성전 무너지는 이유에 대해서 알아야 돼요. 왜냐하면 성전이 무너지면 세상은 저절로 무너지게 되어 있으니까. 근데 제자들은 뭘 모르느냐 하면 성전과 세상이 그런 식으로 엮여있다는 연결고리에 대해서 납득을 못하고 있는 거예요. 이해를 못하고 있는 거예요.
자, 그러면 여러분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세상이 무너진다고 할 때, 세상 안에 누가 들어있습니까? 세상 안에 중3도 들어있고, 어른도 들어있고, 교회도 들어있고, 아파트도 들어있고, 다 있죠. 북한 전략무기도 들어있고, 싱가포르도 들어있고, 올림픽 경기도 들어있고, 다 들어있죠.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세상이 무너지는 것은 우리가 잘못돼서 무너진다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우리가 행동을 똑바로 안 해서 세상이 무너진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런 발상자체는, 그 사람은 성전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아니면 어쨌든 간에 세상을 붙들라고 세상을 바라보는 거예요? 세상을 바라보는 거죠. “세상은 우리하기 나름이다. 우리가 잘 관리하면 세상은 유지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탄소배출량이 많아가지고 그래서 세상이 무너진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온난화 때문에 엘리뇨 현상이 벌어지고, 그렇게 해가지고 세상이 뭐 지진이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7절에 보게 되면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8절,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여기 기근이나 지진은 사람들이 요청한 것이 아니에요. 요청한 것은 아닌데, 뭔가 외부에서 이 세상을 건드리고 있다는 생각을 안 해봤습니까?
우리 자신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데, 이 한국 땅에서 살아가는데, 자꾸 누가 건드리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어요? 없어요? 없죠. 누가 나를 가만두지 않는다는 생각을 해봤습니까? 그 생각을 사람들은 잘 안 합니다. 왜냐하면 그 다음에 질문이 막 들어오기 때문에. “누가 니를 건드리더냐?”라고, 막 질문이 들어와요. 그러면 우리가 아는 상식에서 “하나님이 나를 건드렸다.” 그러면 그 다음에 나오는 질문이 뭐냐, “어떤 원칙 때문에 너를 건드리던데?” 이렇게 하게 되면 거기에 대한 답변을 모으는데 좀 궁색한 것이 있기는 있어요. 궁색한 게.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건드릴 때는 일관된 법칙이 있거든요. 그 법칙에 대해서 우리가 평소에 신경을 잘 안 쓰고 있다가, 훅 하고 그런 질문이 들어오면 이 원칙에 의해서 한다고 답변을 못합니다. 그 답변을 오늘 강의를 통해서 제가 제시를 해드리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건드리는 원칙은 “내 성전 어떻게 했어?”라는 그 문제에요. 하나님의 관심사는 성전에 있어요.
그게 마가복음 13장 2절입니다. “성전이 무너진다.”라고 하고, 그 다음 나머지기에 대해서는 우르르, 우수수, 저절로, 이거 무너지면 세상은 다 무너지는 거예요. 그러면 세상은 마치 뭐와 같은가 하면은 해변가에서 모래장난하면서 모래를 쌓아놓고 그 모래 위에다가 계란이나 보석을 딱 세워놓는다면, 여기 흙이나 모래는 별로 안 중요하죠. 돋보이려는 계란이나 보석이나 그게 중요하겠죠. 그렇죠. 이거는 받쳐주는 입장이에요. 받쳐주는. 모래는 받쳐주는 입장이라고요. 모래는.
그렇다면 보석이 별 볼일 없으면 밑에는 있을 이유가 없죠. 세상이라는 것은 독자적으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고, 세상이 하나님이 주신 귀한 것을 모실 때에 세상의 가치는 유효하다고 그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계란도 없는데 두꺼운 종이로 된 계란 판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열개고 스무 개고 놓여있어야 되잖아요.
성전이라는 것을 모시기 위해서 세상이 있다는 생각이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어느 때에 성전이 무너집니까? 라고 하는 것은, 제자들의 질문 속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은, 성전을 이렇게 모시고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들 세계의 일부가 성전이라고 하는 겁니다. 자기들 세계 일부, 마을이 있다면 여기는 은행도 있고 공장도 있고 뭐도 있고 뭐도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성전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예수님을 목수의 아들이라고 보는 것하고 똑같은 사고방식이에요. 우리 모든 인간은 예수님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그저 나도 한 인간 예수님도 한 인간, 이렇게 보는 거예요. 사고방식의 차이가 질문의 차이로 나타나는 거죠. 사고방식의 차이가 질문의 차이로.
근데 예수님께서 13장 2절에서 뭐를 거론하십니까? “성전은 무너진다. 그리고 줄줄이 연이어서 세상도 같이 무너진다.”라고 할 때에는 예수님께서 뭐를 염두 해두느냐 하면은, 성전과 세상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무슨 원칙으로 그렇게 결부되어 있는가, 결부되어 있는 원칙에 너희들이 주목하라고 그렇게 하신 거예요. 그 원칙에 대해서.
그러면 그 원칙에 주목하려면 질문하는 제자들이나 세상에 사는 이 사람들에 대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본인이 본인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나서서는 안 되죠. 왜냐하면 그들은 성전 무너뜨린 것이 본인들의 삶의 목적은 아니잖아요. 성전도 있고 우리 집도 있고 같이 평화롭게 나란히 살면 그걸로 오케이로 보는 거예요.
“우리 집은 불타도 좋으니까 성전만 계속 유지하세요.”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죠. 없다 이 말이죠. 평화롭게 공존하면 된다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걸 뒤집어라 이 말입니다. “성전이 없으면 너희들이 고귀하게 여기고 귀하게 여기는 모든 것도, 너희 존재도 같이 없어진다.”라는 것을 지금 예수님께서는 넌지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시는 겁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조치에 대해서 제자들은 수습을 하려고 하다가 자기들이 수습을 할 입장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죠. 수습할 입장이 아니다. 마치 집이 부도가 났는데 중학생 1학년 아들이 친구들 몰고 와서는 “아버지 이 부도문제를 저희가 해결하겠습니다. 도대체 빚이 얼마입니까? 10억 정도는 우리가 해결할 수 있습니다.”라고 이렇게 하면서 이렇게 주제넘게 나설 문제가 아니잖아요. 나설 문제 아니죠. 집안이 부도나서 집에서 쫓겨나면 아들도 딸도 같이 쫓겨날 입장이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때 “야야! 우리는 니가 감당할 수 있는 빚을 넘어서서 우리는 내일부터 집 빼줘야 돼.” 이렇게 하면 철없는 애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렇게 하죠. 드라마에 보면 나와요. “엄마! 이제부터 엄마 말씀 잘 듣고 숙제 잘 할게요.” 이래 나오거든요. 지금 숙제 잘못해서 집 넘어간 게 아니거든요. “내가 학원에 안 가고 게임했는데 이제부터 학원에 잘 다닐게요.” 지금 학원비 낼 돈도 없는 건데, 지금 부도나서 다 말아먹었는데 학원에 다닐 수 있겠어요?
그러나 학원에 안 가고 게임에 몰두했기 때문에 집이 넘어간 게 아니에요. 이 말은 우리네 인생이라는 것은 내가 얼마나 착실 하냐, 얼마나 순결하고 순수하냐하고 전혀 상관이 있어요? 없어요? 아무 상관이 없어요. 우리의 운명이라는 게. 우리의 운명, 이 세상의 운명, 성전의 운명도 우리하고 상관이 없다 이 말입니다. 괜히 주눅이 들었잖아요. 괜히. 평소에 괜히 양심운운하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거예요. 가장이 되어서 뭔가 나쁜 짓 하게 되면 나의 나쁜 짓 때문에 우리 집안 꼴이 엉망이구나, 라고 괜히 곡해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까요? 인간으로서의 설명할 수 없는 요소가, 세상이 움직이는 원칙 안에 들어있어요. 인간으로서는 설명할 수 없는 요소. 인간이 손 댈 수 없는 요소. 전문가도 아닌 게 드라이버나 펜치 들고, 원자력 발전소가 고장 났는데, 그럼 동네 열쇠고치는 아저씨 부르면 됩니까? 3천원 주고. “아저씨 고장 났으니까 좀 고치세요. 터빈(증기, 가스, 물, 공기 등의 유체가 가지는 에너지를 회전 운동으로 바꾸는 장치)돌아가게 해주세요.”라고 하면, 이게 고쳐집니까? 안 되죠.
그리고 내 인생이라고 하는 게 성전과 무관하다면,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한다면 내가 수리하면 되죠. 그런데 오늘 본문에 의해서 내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누구 손에 달렸습니까? 이거는 성전의 운명과 직결되어 있죠. 그럼 내가 나서서 내 몸을 가지고 뜯어고치고, “이거 잘못됐다. 담배 끊어야지. 술 끊어야지.” 이러면 내 인생이 갑자기 천국에 가는 거예요? 아니죠. 근원적으로 우리가 누구의 속임수에 놀아나고 있는 거예요. 근원적으로. 근본적으로.
철저하게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유린당하고 있다고나 할까? 어떤 나쁜 영물에 유린당하고 있다고 이래 보시면 되는 겁니다. 과거에 내가 젊을 때에 행동을 똑바로 안 해서 지금 집안 꼴이 나이 70넘어서 이렇게 되어 있다. 누구보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지만.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런 생각 자체가 유린당하는 것 아니겠어요. 그런 생각 자체가. 심지어 연세가 70이 넘을 때까지, 끝까지 그런 곡해와 오해를 품고 있다는 자체가 잘못된 거잖아요.
주님께서 성전을 거론한다는 것은 이제는 정신 좀 차리라 이 말이죠. 누구한테 지금 철저하게 속고 있다는 겁니다. 내 미래는, 내 운명은, 내 인생은. 내 미래, 내 운명, 내 인생은 어떻게 될까? 이런 질문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거예요. 이런 질문 자체가. 이런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앞에 뭐가 붙기 때문에? 나라는 것이 붙잖아요. 나는 누구한테 종속된 겁니다. 내가 나를 딱 떼어가지고 단독적으로 내가 나를 가꾸고 할, 가꿀 수 없는 원칙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 원칙이 뭐냐, 뭐 그렇게 뜸들이지 말고 말씀해달고 하신다면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어요. 새 언약의 완성에서 세상의 모든 것은 구舊 언약에 머물게 된다. 모든 세상은 구 언약의 조건에 충실하게 돼요. 머물게 됩니다. 구 언약은 구약이죠. 구 언약의 충실함이 노골화됩니다.
흔히 교회 좀 다녔다는, 복음 좀 들었다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제가 먼저 제시하고 그게 왜 문제점인지 말씀드리겠습니다. 흔히 말하는 복음이란, 십자가는 뭐냐, 예수님께서 인간 세상에 십자가지려고 오셨다는 겁니다. 오시고, 십자가에서 새 언약을 다 이루었다는 거예요. 이거 잘못입니다. 이 생각. 왜 그러냐 하면 새 언약이 예수님으로 등장하는 순간, 이 세상은 그냥 세상이 아니고, 새 언약과 대조가 되고 결부가 된 옛 언약, 구약상태로 드디어 노출되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오해였죠. 우리가 보는 세상이라고 하는 자체가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겁니다. 오해의 소지가. 우리의 실생활에도 이러한 예가 굉장히 허다합니다. 본인이 미리 짜놓은 어떤 현실의 세팅이 있어요. 본인이 짜놓은 어떤 게 있다 이 말이죠. 예를 들면 아들이 어떤 게임을 하는데, 지금까지 이기지 못한 어떤 적을 이겼다. 그래서 걔가 기분이 좋아서 이 기쁨을 함께 나누기 위해서 퇴근하실 엄마를 기다리는 거예요.
엄마가 들어오는 문소리를 듣고 “엄마! 엄마! 내가 이 게임을 이겼어!”라고 지가 세팅한, 지가 생각하고 있는 자기방의 현실이 있죠. 그걸 딱 세팅해가지고 엄마가 일방적으로 호응해줄 것이라고 생각을 한 거예요. 근데 엄마가 문 열면서 빗자루 들고 와서는 “너 엄마 없을 때 청소하라고 했지?”하고 줘 패는 거예요. 그러면 걔가 세팅한 그 현실은 뭐냐, 게임에서 이기느냐, 지느냐가 굉장히 중차대한 문제인 반면에, 엄마는 뭐냐 하면 엄마아빠가 직장에 갈 동안에, 애 하나 있는 게 집안을 깨끗이 어지럽히지 않고 청소해놓는 것이 엄마가 세팅해놓은 현실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뭐냐 하면 새 언약을 이루러 오셨잖아요. 새 언약을 이루러 왔다면, 새 언약의 완성된 입장에서 세상을 보게 되면, 세상은 뭐냐 전혀 새 언약을 이룰 수 없는 요소들로 가득 차 있었음이 드디어 들통 내는 구약적 상황에 그냥 거기에 모든 것이 사로잡혀 있는 겁니다. 갇혀있는 거예요. 구약적 상황에 갇혀있는 겁니다. 예수 믿으면 되잖아요? 라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에요. 예수 믿는 것조차도 구약적 사고방식이거든요. 어렵죠.
십자가지려고 오셨다. 이제 예수 믿으면 되겠네, 라고 할 때에 그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그들의 세팅된 세계에서는 믿음이라는 것이 성립이 돼요.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는 이성적 세계기 때문에, 자기가 믿고자 하면 믿고 안 믿고자 하면 안 믿고, 결정을 누가 합니까? 본인이 내리는 거예요. 내가 누굴 사랑하면 사랑하고 미워하면 미워한다. 누가 결정했어요? 본인이 결정한 거예요. 내가 어떤 것을 기대하면 기대하고, 내가 싫다고 하면 싫다고 할 수 있는 그런 자율이나 자유가 있다고, 이건 누가 세팅한 거예요? 본인이 본인의 현실을 세팅한 거예요.
인간의 내면과 인간의 외부세계를 바라보는데 있어서 BC5세기, 또는 BC5세기경에서부터 6세기에 나타나는 그리스, 헬라죠. 지중해 고대그리스시대에 내면과 외부를 연결시키는 유일한 연결고리를, 고대그리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시대에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성’이라고 합니다. 이성. 인간은 이성이에요. 이성이라고 하는 것은 따지고 판단하고 합리적인 조치를 하는 것을 이성이라고 해요.
인간의 내면에 이성이 있고, 그걸 외부세계로 관찰해서 분석해가지고 그걸 진리로 만든다는 겁니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하는 거예요. 이 시대의 철학자들은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하는 겁니다. 인간은 만물의 그 다음에 뭐라고 했어요? 척도. 줄자에요. 줄자. 인간이 이 세상을 보는 것이 정답이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인간 속에 누가 포함이 되어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포함이 되어 있죠.
그럼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프로타고라스가 이야기 한 건데, 그럴 때 자기 앞에 예수님이 십자가 졌다. 십자가지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나를 믿는 자는 내 피로 용서를 받는다고 왔을 때에, 믿을까 말까를 누가 해요? 바로 이성이 동원되겠죠. 이성이. 이성이 동원되겠죠. 내가 저걸 믿으면 뭐가 된다? 손해가 아니고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왜? 자기가 죽어서 천당 가야 되니까. 천국가면 이익이잖아요. 지옥 가는 것보다 천당 가는 것이 이익이죠.
그 이성을 종교화 시킨 데가 뭐냐 하면 중세교회에요. 중세교회. 중세교리가 삼위일체교리부터 해서 모든 교리가 뭐냐 하면 인간 속에는 아무리 타락해도, 하나님께서 다 타락해도 타락하지 않고 남겨둔 게 있다는 거예요. 인간 속에 있는 모든 것이 망가져도 안 망가져야 되는 요소가 있어야 되는 이유가 뭐냐 하면, 그들 신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십자가 지셨으니까, 십자가진 자기의 명예, 공로를 누가 알아주는 존재가 있어줘야 자기가 자존심이 산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명예가 산다는 거예요.
근데 인간을 죽은 자로 만들어버리면 못 믿잖아요. 못 믿으니까 자존심을 살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들로 다 망가져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만은 남겨뒀다는 거예요. 이게 천주교의 교리입니다. 그렇게 하게 되면, 그들 신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지옥이라고 만든 취지가 산다는 거예요. 지옥. 지옥은 어떤 사람이 가느냐 하면은 무작정 가면 지옥의 취지가 살지 않고, 책임을 질 사람에게 책임을 묻는 곳이 지옥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도대체 인간들이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데? 예수님을 보내줬건만 그들의 이성에 미스mistake,실수가 나서 예수님을 영접을 안 했잖아요. 그 책임을 물어서 지옥 보낸다는 거예요. 지금 제가 하는 이야기가요, 침례교이야기에요. 천주교이야기고. 요새는 침례교고 뭐고 할 것 없이 구원파이야기고 다 그런 거예요. 원래 구원파가 침례교에서 만든 거니까.
다시 말해서 침례교나 천주교나 신학교리가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 정신 똑바로 차려라! 하나님이 네 앞에 왔다. 정신 똑바로 차려! 그리고 그 예수님을 뭐하라? 영접해라 이 말이죠. 요한계시록 3장 20절,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딴 짓하지 말고 게임하지 말고 문을 한번 들여다봐라. 똑똑 계세요? 문을 두드리면 문을 열고 나를 영접하면 내가 더불어 먹고 마시리라. 성경에 있는 그 말씀 그대로라는 거예요.
이게 바로 자기 자신이 구약에 빠져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자, 구약의 특징이 뭡니까? 구약에서 나오는 주인공들이 있죠. 주인공들이 어떤 민족입니까? 이스라엘 민족이죠. 이스라엘 민족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히 해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뭐로 끝났어요? 멸망으로 끝났는데, 끝날 때 그냥 좋게 끝난 것이 아니고, 뭐 부족해서 멸망했다, 뭐 우리가 모자라서 멸망했다, 이게 아니에요.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죽였잖아요.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했잖아요. 요한복음 8장 44절에서. 유대인의 존재의 연쇄에서 최정점에 누가 있어요? 악마가 있다니까요. 악마의 관심사는 이 세상이 십자가 앞에서 어떤 모습인가를 감추는데 전력을 다하는 것이 악마의 할 일이에요. 악마가 딴 일을 안 해요. 주님이 다 이루셨다는 그 새 언약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는 그런 안목이 안 생기도록, 그걸 훼방하도록 악마는 모든 역량을 다 동원해서 그걸 저지합니다.
뭐 악마가 얼굴 무섭게 생기고 얼굴색이 녹색이고 그런 거 아니에요. 십자가 거꾸로 돌아가고 목이 비틀어지고 침대에서 애가 목 비틀어지는, 그런 거는 악마가 아닙니다. 축축한 비 올 때 허연 옷 입고 와서 머리도 안 감고 “좀 태워 주이소~” 개인택시 붙들고 타고서는 택시비도 안 내고 그냥 내리고. 그게 악마가 아니라니까요. 나를 괴롭히는 것이 악마인지 주님인지 잘 분간해야 돼요.
아까 강의했잖아요. 누가 나를 건드린다고요. 가만두지 않는 거예요. 내 다리 내놔라~ 뭐 이런 식인가? 누가 나를 가만두질 않아요. 계속 관여하고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고 뭐라고 변명의 방어에 나서느냐 하면은, 이걸 저는 파이어 월Fire wall,방화벽. 인간은 자기의 자존심 지킬 것을 지키기 위해서 강력한 방화벽을 항상 구축해요. 그 방화벽 안쪽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자아라고 합니다. 동그라미 안쪽을 자아라고 해요. 자아.
그러면 주님께서 침투하게 되면, 뭘 깨라고 침투하느냐 하면 방화벽, 이걸 깨라고 침투하는데, 사람들은 방화벽을 깨는 것이 아니고 아주 겹겹으로 방화벽을 더 쳐요. 마치 뭐와 같은가 하면은, 애들이 좋은 대학에 가려고 수능공부를 하는 거예요. 수능치룬지가 수십 년 되었잖아요. 그래서 수능 가르치는 강사들, 설민석도 도사되어버렸고, 나머지기도 도사들이 되어버려서 문제를 어지간하게 내게 되면 변별점이 없어요. 워낙 아이들이 도사라서.
그래서 수능 출제위원이 누가 이기는지 해보자 해서 스피드게임을 하듯이 지문 열 몇 장을 가지고 50분에 다 풀 수 있는가 해놓고, 국어 31번 문제는 만유인력의 중심문제를 가지고 내버렸다 이 말이죠. 따라오라면 따라오라 뭐 이런 식이죠. 수능을 어지간히 쉽게 내버리면 애들이 전부 다 나는 일등급 학생이라고 전부 다 방화벽을 쳐버려요. 그러니까 출제위원들이 이래야 1등급이라 해서 문제를 어렵게 내고 문제의 분량을 많이 줘버린 거예요.
마라톤 전문 선수 10명하고, 그리고 전 세계에서 100미터 선수 100명하고, 우리나라 체대학생들 한 10명하고 시합을 붙는 거예요. 몇 미터 달리기를 하는가 하면 2미터 달리기를 해보는 거예요. 2미터 달리기. 티 나요? 안 나요? 티 안 나죠. 2미터는 키 큰 사람이 엎어지면 1등하겠죠. 제자들이 뭘 모르는가 하면은 성전이 무너진다고 하니까, 성전이 언제 무너지느냐고 묻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2미터 달리기에 자신 있다 이 말이죠.
우리 아직 안 죽었다 이 말이거든요. 우리의 이성적인 지식과 3년 동안 따라다니면서 배웠던 성경의 그 귀한 진리, 우리는 절대로 잊지 않고 쓸모짝 있게 다 쓸 수 있는 그러한 여력이 있다고 지금 자랑질 하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우리만 알려달라는 거죠. 언제 무너지는지 알아서 뭐 할라고요? 알아서 또 수능 1등급 되려고요? 주님이 갈수록 문제를 어렵게 내요. 갈수록.
이것은 무슨 법칙이냐 하면은 구약 때,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율법을 줬잖아요. 율법을 주니까, 처음에 언약궤를 주니까, 그들은 신기했던 거예요. 왜? 언약궤만 있으면 전쟁에서 적들이 물러가고, 또 있는 적들은 언약궤 앞에 굴복한다고 되어 있거든요. 민수기 10장 끝에. 세상에! 이런 요술지팡이가 어디에 있습니까? 아주 신났어요.
그래서 홉니와 비느하스가 블레셋 전쟁할 때 뭘 동원시킵니까? 핵폭탄보다 더 무서운 언약궤를 앞에 동원시키는데, 그 핵폭탄 뺏겼잖아요. 블레셋에게. 장하기는 누가 장한가 하면 블레셋 사람이 장해요. 왜? 블레셋 사람들이 언약의 가치를 미리 알아가지고, “와! 저들이 완전히 결정판 핵무기를 들고 왔다. 그러니까 우리는 더욱더 용기를 내세!” 이래가지고 용기 낸 쪽이 그만 빼앗아갔어요. 블레셋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궤만 믿고 있다가, 다시 말해서 요새 말로 하면 십자가만 믿고 있다가 십자가마저 빼앗긴 셈이 된 거예요. 세상에! 무슨 십자가가 나를 구원하는 십자가가 어디에 있습니까? 나를 죽이는 십자가인데. 내가 살기 위해서, 나의 내면의 이성을 동원해서 십자가를 옴팍 손에 쥐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하나의 결정적인 무기를 확보했다고 이리 생각하는 겁니다. 전략무기를 확보한 거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속 율법을 주니까, 그들은 그걸 이용할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전쟁할 때는 앞에 제사부터 먼저 드리죠. 그걸 누가 써먹는가 하면 사울이 써먹어요. 제사하기로 약속된 시간에 사무엘이 오지를 않습니다. 의도적으로 안 와요. 의도적으로 안 온다고요. ⯄보다 ⯄가 낫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죠. 근데 순종은 항상 즉흥적이에요. 우발적, 우발성이에요. 순종한다는 것은 과거에 순종한 것을 무효로 돌립니다. 과거의 내력을 일체 인정하지 않아요. “한 50년 순종했으니까 순종한 걸로 봐주세요.” 이런 것 없어요.
거기에 비해서 인간의 방화벽에 안에 있는 자아는 이성이 가동됐죠. 이성에서 나온 것이 뭐냐 하면 윤리와 도덕이라는 겁니다. 도덕은 자기 자신에 대한 잘남과 윤리는 타인에 대한 잘남. 이렇게 자기 자신에 대한 잘남의 꺼리가 자아를 이렇게 채우고 있어요. 자아를 채우고 있으니까, 이 잘남을 늘 확인하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한가 하면 과거의 이력, 자기가 이렇게 살아왔다는 그 잘난 것을 창고에 넣어둬야 해요. 넣어둬 놓고 뭔가 일이 안 됐다 싶으면 창고에 후딱 들어가서 옛날의 여분의 착함 있잖아요. 안 해도 됐는데 착한 짓 한 거.
안 해도 됐는데 착한 일 한 거 있죠? 이거 다 아는 이야기를 괜히 강조하는데요. 설거지를 한다. 설거지 하면 아침에 밥 먹을 자격이 됩니다. 보통 설거지 하겠다고 하면. 설거지는 어느 용도에 다 소모가 되는가 하면 밥 먹고 난 뒤에 다 소모가 돼요. 어제 설거지 했다고 오늘 밥 먹을 때까지 거기다가 자꾸 주장하면 안 돼요. 근데 설거지가 아니고 갑자기 남편이 아내의 어머니 장모가 아픈데 밤새도록 간호를 해가지고 낫게 했다. 이러면 설거지 안 해도 일주일용으로서는 충분한 대가를 치른 거예요.
왜? 여분의 착함이, 장모 아픈데 사위가 아들보다 더 낫게 돌봤다. 그러면 그 아내의 마음속에 뭐가 새겨지겠습니까? ‘저 남자가 진짜 나를 사랑하기는 사랑하는구나.’라는 그 마음이 확 들어오겠죠. 이거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일주일 갑니다. 어지간한 것은 용서가 돼요. 일주일 간다고요. 왜? 안 해도 되는 여분의 선행이 많아졌거든요.
부부하고 토닥토닥하다가 좀 불리하다 싶으면 “일전에 니한테 이런 거 해줬잖아.”라고 막 끄집어내는 이유가 지금 수세에 몰리고 있다는 뜻이거든요. 그럼 아내 쪽에서 “그거는 5년 전에 한 거고. 니 그거 다 까먹었잖아.” 둘 다 지금 무슨 게임을 하고 있는 거예요? 가지고 있는 의로움이 누가 많이 잉여로, 여분으로 남아있는가, 착한 쪽이 덜 착한 쪽을 통치할 주도권을 쥘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지금 권한 싸움하고 있는 거예요.
남편이 하는 말이 “내가 지금 직장생활 20년 하면서 7시 이후에 집에 들어온 적이 있나? 꼬박꼬박 왔잖아.” 그러면 아내 쪽에서는 안 집니다. 딱 듣고 “이거 좀 세게 나오네. 내가 결혼한 지 20년 동안에 날 위해서 백화점에 가서 옷 산 거 있나?” 이래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저쪽에서 “어라? 세게 나오네. 나는 양말도 하나 안 샀다.” 이래 나오는 거예요. 아주 쪼잔하게 나오는 거예요. “그리고 니가 키우는 개 내가 싫어하는데도 눈감고 있잖아. 똥 다 치워주잖아.” 이런 식으로 나온다 이 말이죠.
이러한 관계를 가지고 바로 누구한테 적용시킵니까? 이러한 대인관계를 그대로 누구한테? 하나님한테 그대로 연결시키는 거예요. 사람에게 하듯이 주님한테도 이러한 의로움을 가지고 연결하면 된다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내가 나를 가꾸고 내가 나를 관리하는 관리방식으로 하나님 앞에서도, 하나님께서 어떤 정보를 주시고 힌트를 주시면 나는 내 착함을 늘여서 내가 천국에 가겠다고 이렇게 하는 거예요. 뭘 포기 못한 거예요? 자아를 포기 못했죠.
자아는 뭐로 둘러싸여 있다고 했습니까? Fire wall, 방화벽으로 둘러싸여있죠. 방화벽이 뭐냐 하면 외부에서 내가 허락하지 않는 요소가 들어오는 것을 차단시키는 겁니다. 일종의 면역이죠. 침투했을 때 백혈구가 나가서 막 싸우는 거예요. 구약성경에서 주님께서 끊임없이 계속해서 율법을 줘요. 그러면 끊임없이 율법을 감수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감수하려고 할 때마다, 틀렸어! 그거 정답 아니야! 라고 가위표를 칠 때, 구약 전체를 보세요.
에스겔에 보면 성전이 무너지는 이유가 뭐냐 하면, 너희가 무엇을 섬겼다고 합니까? 우상을 숭배한 거예요. 그들이 우상을 왜 숭배합니까? 우상을 숭배했다. 우상을 선택했다. 이 말 아닙니까? 주님보시기에. 우상을 왜 선택해요? 자기한테 실익이 없으면, 이익이 없으면 우상숭배 하겠어요? 안 하죠. 나한테, 그저 코앞에 즉각적으로 나한테 이득을 주는 신이라는 것 때문에 우상을 숭배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상을 숭배할 때, 우상이 문제입니까? 우상이 선호하는 자아가 문제에요? 자아가 문제죠. 자아가 안 죽었죠. 방화벽이 안 깨졌죠.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뭡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너희들이 모르는 나의 아버지,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인간은 어떠한 모습이냐 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홀로 죄인의 모습으로 아버지 앞에 섰습니다. 모든 말씀 앞에 섰죠.
거기서 나온 결과는 뭐였습니까? 버림받음이죠. 버림받음. 그러면 이 버림받음을 우리 자아가 선뜻 수용할 수 있겠어요? 없겠어요? 아무 이익도 없는데. 다시 말해서 이 예수님의 버림받음을 내가 주워버리면, 길바닥에서 동전 줍듯이 주워버리면, 나는 천당 간다고 이래버리면 뭐가 버림받지 않았어요? 여전히 나는 버림받은 것을 얍삽하게 이용해가지고, 나는 끝까지 버림 안 받을래, 라는 주장을 펼치는 거죠.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은 이게 바로 자기 자신의 우상화가 되는 겁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고난 받고 금식했죠. 금식 왜 합니까? 내가 금식해서 남 살리기 위해서 금식합니까? 아니면 금식하는 당사자가 구원되기 위해서 금식합니까? 어느 쪽이에요? 당사자를 위해서 금식하는 거예요. “난 십일조도 하고 구제도 하고 금식도 하나이다.” 바리새인이 성전에서 그런 소리를 하잖아요.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내 인생 내가 알아서 관리하겠습니다.”라는 이 방화벽을 철거를 안 하는 거예요. 계속 날 위해서 하나님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다? 사랑의 하나님인데, 그 하나님은 나를 위한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나를 사랑해야 된다고 우기는 겁니다. 그게 바로 우상인 거예요. 그게 바로 구약적 환경이에요. 구약적 환경.
그런데 모든 사람이 놓쳐버리고, 아니 모든 사람이 후쳐(‘내쫓다’의 방언)버리고, 배척한 그분이 부활했잖아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남, 아버지께서 그분만 살렸죠. 부처 안 살렸죠. 소크라테스 안 살렸죠. 그분만 부활시켰죠. 그분만 부활시켰다는 말은 결국 모든 인간과 예수님은 이렇게 이어졌습니까? 끊어졌습니까? 끊어졌죠. 끊어진 거예요. 끊어졌다 이 말이죠.
끊어져 있고, 그리고 이 13장 말씀을 제자들에게 했다는 말은,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은 이미 해결이 난 상황이라는 것을 우리가 인정해야 돼요. 해결이 난 상황이라는 것을. “예수 안 믿으면 저의 운명은 어떻게 돼요?” 그렇게 벌벌 떨고 염려하지 말라 이 말입니다. 주님의 하시는 일이 그렇게 염려하고 있다는 자체에 문제 있음을 알려주는 일을 하시는 거예요.
“나 예수도 안 믿는데,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갈 건데.”라고 염려하고 벌벌 떠는 것 자체가, 그 시작점이 뭔가 잘못된 거예요. 주님의 새 언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는 생각 안 하고, 성전이 왜 없어져야 하는가를 이야기 안 하고, “나 어떻게 돼요? 앞으로 지구는 어떻게 됩니까?” 이거 걱정하고 있는 거예요. 지구걱정하고 있는 거예요? 자기걱정하고 있는 거예요? 자기걱정하고 있는 거예요.
성전이 왜 없어져야 됩니까? 성전은 왜 없어져야 하는가 하면은, 성전조차도 구약적 요소에 포함이 되기 때문에.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거든요. 성전 벽돌 누가 세웠습니까? 벽돌. 인간이 세웠잖아요. 인간의 손때가 묻어 있잖아요. 하나님께서 인간이 손때가 묻는 제단은 안 받습니다.
여기 시편 127편에 보면 유명한 말씀이 나옵니다. 1절,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머리 좋은 사람은 아실 거예요. 주께서 일에 나섰다는 것은 헛되지 않는 것들을 헛되게 노출시키는 작업과 병행되어서 일이 진행되는 겁니다. 주님이 안 나서면 인간들은 자기 노력이 헛되다고 느끼겠어요? 헛되지 않다고 느끼겠어요? 헛되지 않다고 느끼겠죠.
서울대 수시합격하고, 수능 다 끝나고 환영하고 합격됐는데, 합격되고 난 뒤에 계속해서 머리 싸매고 교육방송 보면서 수능준비하고 있다면 이거 이상한 사람이 아닙니까? 이상하죠. 합격했거든요. 목표한 학교에 다 들어갔어요. 통지서 받고 난 뒤에 왜 보나? 심심해서 본다고 한다면 괜찮아요. 심심해서 보면 괜찮은데, 뭐 고민해서 본다. 고민한다. 그럼 그 학생은 뭘 못 믿는 거예요? 자기 자신이 어떤 위상에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죠. 못 믿죠. 모르고 있으니까 못 믿는 거잖아요.
엄마가 있다가 “니 합격했는데 왜 공부 하냐?” “어머니. 제가 이거 해가지고 나중에 과외 하겠습니다.” 이런 식으로는 안 할 거라 이 말이죠. “엄마! 공부를 해야 합격을 할 거 아닙니까?” 엄마가 베개가지고 때려버립니다. “정신 차려 인간아! 이게 공부만 하다가 돌았나? 합격이야. 끝났어! 니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은 아무짝도 소용없는 짓을 하고 있는 거야.” “어머니. 저 합격 날이 언제입니까? 언제쯤이 합격 날입니까?” “묻지 마! 끝났어. 다 끝난 상황이야!” “이 성전이 언제 무너집니까?” “묻지 마! 합격이야. 정신 차려!”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그거 왜 물어야 돼요? 그러면서도 그들은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는 이 자체가, 대조적으로 예수님이 하신 일과 현재 인간이 하는 일과 이렇게 격차가 나고 끊어져있음을 통해서, 예수님 홀로 모든 일을 다 이루었다는 것을 또 다시 이 말씀을 통해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성령을 통해서. 오늘 강의할 게 많이 있어요. 뭐냐 하면 이 성전과 이 세상은 어떤 식으로 연결되어 있는가 하는 그것과 지금 우리가 이러한 예수님을 이렇게 쫓아버리고 우리끼리 뭘 해보겠다는 이러한 의식 자체가 어떤 현상인가 하는 그런 것을 봐야 되겠죠.
이거 한 마디하고 10분 쉽시다. ‘공분의 오류’ 공분이라고 하는 것은 사적인 분노가 아니고 여러 명이 같이 합세해서 오류 하는 것. 대표적인 게 최순실. 공분의 오류죠. 공분이죠. 근데 촛불집회 할 때 그들은 옳다고 생각하죠. 공분이죠. 근데 그 뒤에 무슨 말입니까? 그게 오류라는 생각을 못해 본 거예요. 다수가 진리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죽일 때 다수가 반대했잖아요. 도대체 우리가 왜 개인적인 소신이 아니고, 여럿의 여론에 우리가 왜 휘말리는지, 식사하시고 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