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180824b 마가복음12장 28-34절(자기포기)-이 근호 목사
유일하신 분이라는 것을 언급을 했는데, 하나님이 한분이라는 말은 그 법안에 하나님의 진면목, 하나님의 본 모습이 다 담겨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법안에.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소개를 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유일하신 하나님이다. 그러면 유일하신 하나님이라는 말은 뜻이 여러 개로 퍼진다는 말이에요? 아니면 한 곳으로 모인다는 말입니까? 한곳으로 모이죠.
그러니까 모이는 여기에 최종적인 묻는 것이 뭐냐 하면,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입니까? 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모든 계명이 어디에 다 쏠립니까? 라는 뜻이거든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유일하심에 다 쏠리는 거예요. 그 유일하심은 숫자가 1이죠. 2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물론 3을 용납하지 않죠.
그렇다면 유일하신 하나님께서 법을 줬다는 말은, 이 법이 퍼져있는 이 땅, 그 당시 이스라엘 땅이죠. 택한 백성. 그 땅에 곳곳에서 뭐가 나와야 하느냐 하면 오직 하나님의 유일하심이 파릇파릇하게 돋아져 나와야 되고, 생겨져 나와야 되고, 삯의 열매를 맺어야 되겠죠. 하나님의 유일하심이.
그것을 저는 뭐라고 보느냐 하면 바로 통합이라고 보는 겁니다. 통합. 모든 일들이 통합이 돼요. 어디에 통합이 됩니까? 유일하신 하나님에게 통합이 되는 겁니다. 통합이 되려면, 통합이 1이잖아요. 결국 하나잖아요. 하나가 되면, 그러면 1은 뭘 배척하느냐 하면 2와 3을, 이것을 전부다 배척해야 되겠죠.
그렇다면 서기관이 이해한 것이나 예수님이 이해한 것은 결국 뭐냐 하면 유일하신 하나님에게 최종적으로 귀결이 된다면, 그 다음에 이웃사랑이든지 하나님 사랑이든지에서 무엇이 삭제되느냐 하면은, 그 법을 행사했다는 것, 이걸 지켰다는 내가 계속해서 생생하게 살아있으면 안 되겠죠. 주님이 하신 일로 인하여, 그래야 통합이 되니까, 주님이 주신 그 마음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고, 주시는 마음가지고 이웃사랑이 되어야 된다 이 말이죠.
그러한 논리를 누가 수용하느냐 하면은, 예수님께서 그걸 하시고 서기관과의 대화가운데서 그런 취지로 이야기를 하신 거예요. 그래서 33절에 보면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제 하나님만 보입니다. 쉽게 가겠습니다. 그냥 하나님만 보이는 거예요.
그럼 뭐가 안 보이느냐 하면은,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내 몸을 바치는 것과, 내 몸이 꼼지락해서 어떤 제물을 바치는 것 사이에서 어느 것이 더 낫다는 말입니까? 아예 내 몸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 더 낫다는 거예요. 그럼 제물을 바치는 것은 뭘 의미하느냐 하며 나를 제거하는 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제물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살아있는 채로는 못 바치거든요.
그럼 여기서 뭐가 끼어들겠어요? 번제물과 제물의 특징이 뭐냐 하면, 다 태우는 것이잖아요. 죽음이잖아요. 누구의 죽음이 무엇의 죽음보다 더 낫다는 말입니까? 율법을 지키겠다는 이 몸의 죽음이, 살아있는 내가 제물을 죽여서 죽은 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훨씬 더 낫다는 이야기를 서기관이 하는 거예요. 근데 이 서기관의 이야기를 왜 이렇게 칭찬하느냐 하면, 33절의 이 내용이 곧 누구의 운명이 되느냐 하면, 예수님이 가셔야 될 그 운명을, 스케줄을, 청사진을 미리 서기관을 통해서 비친 것이 돼요. 비춰준 것이 된다고요.
예수님이 자기 몸을 드리는 것과 예수님 말고 그 당시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전체물을 드리는 것과 지금 라이벌 관계가 성립이 된 거예요. 경쟁관계가. 정말 하나님이 원하는 쪽은 어느 쪽인가를 대조하는 관계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결과적이지만. 일단 주님께서는 이 대조하는 자체에 대해서는 굉장히 좋게 보시고 거기에 대해서 점수를 줘요.
잘했다고 칭찬을 주면서, 이게 칭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니 참 훌륭하다. 하늘나라가 가깝다고 칭찬을 하지만,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건 칭찬이 아니고 주님의 남아있는 인생 코스를, 스케줄을 지금 서기관의 입을 통해서, 서기관을 칭찬하면서, 기인하는 그 길이 바로 내가 가고자 하는 그 길이라고 이걸 중첩을 시키는 겁니다. 칭찬을 했다는 말은 중첩을 시키는 거예요. 자기 것으로 인수인계한다는 그 말입니다.
그쪽에 있는 스케줄을 주님의 스케줄로 받아준다 이 말입니다. 그게 마태복음 8장에 나오죠. 백부장이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라고 할 때 이런 믿음이라고 했죠. 이런 믿음. 세상에 이런 믿음은 아브라함의 본 자손보다 낫다고 이야기했잖아요. 본 자손은 천국에서 다 쫓겨나고 이런 사람이 천국가야 된다고, 이래 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결국 믿음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가셨던 그 길과 그리고 예수 믿는 사람이 해야 될 것을 백부장이 미리 예시한 거예요. 시료가 아닙니까? 시료. 부분을 취해서 전체를 보여준다고 했죠. 이번 수련회 때.
그럼 통합되기 위해서는, 2를 용납하지 않고, 1로 되기 위해서는 번제가 되어야 하는데, 지금까지는 우리가 번제 드리는 것이었는데, 이제는 그 시대가 아니고 바로 우리 자신을 번제로 드리는 이것이 우리가 번제물을 드리는 것보다 더 나은, 더 올바른, 더 합당한 하나님이 원하시는 율법의 완성에 부합되는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 서기관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서기관의 이런 방식이 바로 내 방식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제자들과 오늘날 우리들에게 말씀해주시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그 다음 과제의 진도를 나가보면 번제라는 것은 여기서 뭘 내포하고 있느냐 하면 죽음을 내포하는 겁니다. 그러면 번제 드리는 내가 죽는 방법은? 번제 드리고 옆에서 불로 태워서 자살을 할까요? 어떻게 할까요? 그 점은 서기관이 모르는 거예요. 서기관이 모르는 겁니다. 왜냐하면 서기관은 예수님이라는 몸은 인간의 아담의 몸이기 때문에, 마지막 아담, 예수님만이 할 수 있는 것을 서기관이 해내지를 못해요.
서기관이 여기까지는 알았지만, 예수님의 몸 앞에서 자신의 몸을 부정해야 될 그런 차례가 된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죽음을 위해서 동원되어야 될, 그러한 역할을 해야 될 자들이 뭘 하겠어요? 그들은 어떤 식으로 예수님을 죽여야 됩니까? 어떤 관점에서, 어떤 사상을 가지고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넣어야 하겠어요? 역시 율법입니다.
율법을 나름대로의 자기들 몸 가지고 지키겠다고 나서는 집단, 그 집단이 예수님의 몸을 죽이는 겁니다. 번제물을 만들죠. 우리는 그걸 알고 있잖아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하나님은 한분뿐이라는 것을 알고 그 말씀을 직접 지키게 되면 그들이 뭘 누락시킨 거예요? 뭘 빠트린 거예요? 그 율법을, 첫째 되는 계명, 둘째 되는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따로 하늘에서 오신 분이 필요하다는 것, 그걸 누락시키죠.
제가 그걸 설명하기 위해서 아까 아브라함이야기를 했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법을 받았고 번제를 드렸지만, 그 아브라함의 머릿속에는 뭐가 없었어요? 하나님이 계시고 나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지, 이삭이라는 제 3의 요소가 필요치 않다고 했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온전히 믿음이라고 증거물이라고 들이대는 그 번제물 안에는, 그 번제물이 아브라함이 평소에 할 수 있는 소나 양을 받는 것이 아니고, 뭘 받아요?
하나님이 주신, 진짜 이상하게 태어난 아이, 태어날 수 없는, 없는데서 새로 생긴 것을 나한테 뭐로 바쳐라? 죽여서 바치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는 없는 것을 나한테 바치라 이 말이거든요. 없는데서. 없는 것을 바쳤는데 그 모습이 무슨 모습이다? 죽음이죠. 그러면 아브라함을 통해서, 아브라함이 생각할 것은 뭐냐, 내 죽음은 받는다? 안 받는다? 안 받고 현재 없는 분의 죽음만 하나님께서 받는다는 논리가 성립이 되는 겁니다. 그런 논리가.
누가 구원받을 거예요? 지금 보통 문제가 아니에요. 없는 건데 뭘 바쳐요? 없는데. 없는데서 있게 하셨어요. 있게 한 것을 죽게 하신, 죽음 속에 니가 참여한다고 한다면 먼저 없는 것이 생겨나야 되잖아요. 없는 것이 생겨나야 되잖아요. 없는 것이 생겨난다면 그걸 우리 힘으로 못하죠.
못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그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요구하는 없는 것 앞에서, 우리는 철저하게 무가치한 것으로 자인해야 돼요. 인정을 해야 돼요. 나는 백날해도 쓸데없다는 것을 인정을 해줘야 한다고요. 그게 복음입니다. 그게 기쁨이 되어야 돼요. 아, 내가 필요 없구나! 이 기쁨 외에 다른 기쁨은 없어야 돼요. 내 것을 원한다든지, 내 것을 주신다든지 하는 이 기쁨은요, 악마가 준 기쁨이에요.
내가 세운 교회가 잘 되고 우리 가정이 잘 되는 것은, 내가 있음에 예상할 수 있는 기쁨은, 이거는 하나님께서 받지도 않아요.
없는 것이 있어야 되고,
어? 새로 생겼네! 하는 것을 기쁨으로 하면 안 돼요. 그 없는 것이 누굴 차내고 누굴 부정하고 누굴 제거한다? 미리 있던, 먼저부터 있던 나를 철저하게 짓밟을 때, 그때 없는 것으로만 감사하고 있는 내가 감사하는 그 시절은 빠이빠이 해야 됩니다. 완전히 빠이빠이 해야 돼요.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고 했습니까? 누가? 이게 주님의 사랑이면, 그렇다면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고 했습니까? 제가 지금 아가서를 준비하고 있는데, 정말 이거는 불가능한 작업이라고 볼 수밖에 없어요. 제가 내린 결론은 ‘사랑은 없다’에요. 없는 사랑이에요. 없는 사랑. 제목은 실패한 사랑이지만, 내용은 사랑은 없어요. 사랑이 없는 이유를 여기서만 특별하게 할까요? 아가서에 여자가 없어요. 아가서에는 여자가 없습니다.
여자는 누가 만드는가, 솔로몬을 다윗언약을 위해서 쓰실 때, 그때만 여자가 나와요. 왜냐하면 이게 창세기 2장에 보면 남자가 먼저 있어요. 남자가 있을 때 여자는 없어요. 없어져야 돼요. 거기까지만. 한 마디로 이 세상은 망상입니다. 망상의 세계에요. 제가 강남강의에서 했잖아요. 시뮬라크르Similacre라고. 이 세상은 가상현실이라고. 가상현실에서 진짜 현실과 유일하게 연결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죽음이, 이 세상에서 가상현실의 죽음이 실제 세계에서도 죽음이 되는 겁니다. 그 연결고리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십자가 외에는 주님의 뜻을 알 길이 없어요. 근데 그 십자가는 뭐냐, 이 땅에서 없었던 분의 죽음이에요. 내가 자살하는 것, 내가 죽은 것도 소용이 없어요. 따라서 우리는 어디를 가야 하느냐 하면은, 우리는 예수님을 없는 분이 죽었다고 이래 하잖아요. 방금 했잖아요. 없는 분이 죽었다고요. 근데 우리가 실제로 알려면 죽었던 분인데 알고 보니까 이 땅에서 우리 같은 목수의 아들이 아니었다, 없었던 분이었다, 이래 되는 거예요.
그래서 순서가 죽었다가 살아나신 것이 복음이에요. 죽었다가 살아나심으로서 그 분의 죽음이 일반적인 죽음과 다른 죽음이라는 것을 성령을 받은 사람은 알죠. 따라서 예수님의 죽음부터 출발해서 그분이 없던 분으로 이렇게 결론이 나려면 그 죽음을 야기 시킨 원인 또는 거기에 동기를 주는 것에 참여했던 자들은 어떤 자들이냐 하면 바로 인간들입니다. 사람들이에요. 사람이 떠밀어서 바로 예수님이 돌아가셨잖아요.
그러면 그 사람들은 자기가 살아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같이 산 사람으로 간주 안 해주고 죽이려고 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이 죽게 된 이유가 뭐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무엇을 인간들이 노렸느냐 하면은, 그렇게 해서 뭐가 되느냐 하면 이게 되는 거예요. 살자! 그렇게 해서 살자! 어떤 식으로 살게 되느냐 하면 법으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하라가 법이잖아요. 법으로 이걸 만들어내면 이게 바로 사회가 돼요. 사회가. 사회가 된다고요. 어떤 공동체, 또는 집단, 조직사회, 살기 위해서 힘을 모아야 되니까요.
그리고 그 사회는 이미 인간들이 법을 통한 사회기 때문에, 또 사회는 뭐가 들어있다? 법이 들어있고, 그 법은 목적이 뭡니까? 죽기 위해서 법을 만들었습니까?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법을 만들었잖아요. 그래서 사회에서는 법이 있고 그 법은 어디로 통합이 됩니까? 우리는 살아남아야 된다는 것으로 통합이 되죠. 우리는 살아남아야 돼!
그렇다면 여러분 한번 물어봅시다. 그러면 사회는 변합니까? 안 변합니까? 1번 변한다. 2번 안 변한다. 사회는 지금까지 변한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목적이 뭡니까? 이 시대에 존재하는 우리의 목적이 뭐예요? 그냥 살아남자가 목적이기 때문에, 그 사회는, 그 성격이라는 것은 절대로 변하지 않아요.
마르크스는 계급을 만들었어요. 무산자(재산이 없는 자)와 가진 자. 프롤레타리아(노동자)와 부르주아(자본가). 계급투쟁을 통해서 갈등이 생기고, 처음의 갈등은 노예와 노예를 가진 자, 그 다음 봉건사회에서는 토지 있는 자와 토지 없는 자, 자본주의에 가면 생산수단(기계)을 가진 자, 생산수단이 없이 노동력만 제공하는 자, 이게 변증법적 유물론이라고 하는데, 그러한 계급의 갈등이 양적으로 누적이 되면, 양의 누적이 질의 변화를 일으켜서 혁명을 일으키고 사회주의를 거쳐서 공산주의가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공산주의의 취지가 뭡니까? 죽자는 거예요? 살자는 거예요? 살자는 거예요. 마르크스는 바보 같아요. 세상은 달라진 적이 없어요. 사는 방식이 다양해졌을 뿐이죠. 사는 방식이. 조선시대는 뭐냐, 왕정시대거든요. 왕정시대에 산다는 것은 결국은 뭐냐 하면 쌍놈은 양반 말 들으면 살고, 양반은 쌍놈의 노동력을 빼내면 살아요. 착취하면 산다고요. 어쨌든 둘 사이가 산다는 것에서 마음이 합했으니까. 그 사회가 행복한 사회에요. 행복한 사회잖아요. 누가 안 건드리면 행복해요.
이순신 장군이 조선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습니까? 왕을 위해서 목숨 바쳤어요? 이순신 장군이. 왕을 위해서 목숨 바친 거예요. 이 바보 등신 같아. 왕이 뭐라고? 하지만 이순신 장군이라는 그 인간의 내부, 호랭이 줄, 호랑이도 아니고 호랭이 줄. 그 줄이 뭐냐 하면 나를 살리는 체계가, 이 사회가 나를 그렇게 만든 겁니다. 사회가 이순신 장군을 그렇게 만든 겁니다. 사회가. 살자는 사회에서 나는 살아있으니까 그걸로 족하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누가 건드렸습니까? 이 왕정시대를 누가 건드렸어요? 미스터 선샤인의 이병헌이가 건드렸어요? 군복입고 총 들고? 이 왕정시대를 누가 건드렸습니까? 일본이 건드렸잖아요. 뭐하라고? 근대화하라고. 그래서 왕정으로 살다가 이제는 근대화로 살겠다는 거예요. 사는데, 옛날 왕정시대보다 더 떼돈 벌면서 살수 있다고 한 사람이 이완용이잖아요. 신났어. 신났어요. 채굴권, 도로권, 철도권, 커미션이 막 들어오는 거예요. 가만히 있어도 돈이 들어오니까 기분 좋은 거예요. 어차피 나라는 기울어질 것이고 돈만 벌면 되잖아요.
여러분 자녀들한테 물어보세요. “이완용 자리인데 엄마 어떡해?” “챙길 것 챙겨놔!” 그리고 귀금속 미국으로 빼돌려서 페이퍼 컴퍼니(서류상회사)해놓고. “그래도 돼?” “이게 다 살자고 하는 짓이야! 후손이 얼마나 너를 존경하겠어. 니도 살아야지!” 똑같아요. 누굴 욕해요. 둘 다 살겠다는데. 욕한 사람 그 자리에 한번 들어가 보세요. 자기도 마찬가지죠.
사는데, 다 같이 사는데 불편할 수가 있어요. 왜냐하면 사는데 뭐가 있다? 법이 있죠. 법이 없어서 무질서하게 되면 다 같이 죽는 수가 있어요. 깡패가 총 들고 칼 들고 오면 죽잖아요. 결국 사는데 보탬이 되기 위해서 법을 만들 때, 이 법이 무슨 법이 되느냐 하면 정의의 법이 되는 겁니다. 롤스의 정의론이 나와요. 정의론. 국가정의론.
롤스의 국가정의론을 한마디로 말하면 이런 거예요. 피자 한판을 세 사람이 나눌 때 순서를 정하는 거예요. 가위바위보해서 순서를 정해놓고 피자를 세 등분으로 나누어야 되잖아요. 나눌 때 제일 마지막에 먹을 사람보고 삼등분으로 나누어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제일 마지막에 먹는 사람이 제일 큰 거 먹으려고 큰 거 하나 나누고 나머지는 작게 나누게 되면, 근데 순서는 제일 먼저 사람이 먹게 되니까, 큰 걸 먹겠죠. 그러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가장 소수자, 가장 권력이 없는 자로 하여금 불편함이 없도록 하는 것, 어떤 조건을 모르는 것, 무지의 베일이라고 해요. 어떤 조건을 따지지 말고 제일 나중 사람에게 불편함이 없도록 하는 것이 사회적 법이라는 거예요. 근데 그 목적은 뭐냐, 살자! 에요. 그 목적은 살자는 겁니다.
그게 정의에요? 최저임금 오르겠다, 없는 사람 쪽을 살려줘야 소비가 늘어나고, 그 소비가 늘어나면 소비 추동력에 의해서 경제가 살아난다. 이게 문재인 정부의 원칙이 아닙니까? 어려운 사람은 물건을 구입할 돈이 없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돈을 주게 되면 경제가 살아난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취직을 못하는데요? 법이 정의의 법이에요. 정의의 법. 그런데 그 정의의 법이 결국 목적은 살자는 것입니다.
근데 그냥 살 것 같으면 나라에서 사유재산을 다 빼앗아 없애버리는 것을 무슨 주의라고 하느냐 하면 사회주의라고 해요. 북한. 생산수단을 국가화 시키는 것을 사회주의라고 합니다. 사회주의 시켜서 배급주의로 하게 되면 살기는 살죠. 그러면 그건 왜 안 됩니까? 그러면 사람들이 배급을 믿고 일을 안 하잖아요. 그래서 생산력이 오르지 않아서 다 같이 거지가 되는 거예요. 공평하게 거지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공평하게 사는데 지장이 돼요.
그래서 여기서 뭐가 등장하느냐 하면 정치라는 것이 등장합니다. 정치. 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율법대로 살아야 된다고 이야기를 해요. 그거 왜 그렇게 합니까? 율법대로 살아야 된다고 왜 그렇게 해요? 그거 자기 죽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살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살기 위해서 하죠. 살기 위해서 하는 그 법 쪽에서 이웃사랑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이웃사랑이 있죠. 그들이 말하는 이웃사랑은 뭡니까? 죽자는 것이 이웃사랑입니까? 살자는 것이 이웃사랑입니까? 살고자 하는 것이 이웃사랑이에요.
근데 이웃사랑을 살기 위해서 도와주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까? 그게 하나님의 뜻이 아닌 거예요. 사람이 살고자 하면 관심사가 어디에 가있습니까? 하나님한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한테 관심이 있어요? 나는 지금 얼마나 잘살고 있는가, 여기에다 초점이 맞춰진다고요. 자기 사는 게 급선무에요. 그러면 하나님이 유일한 게 아니에요. “형님, 같이 삽시다.” 이런다고요.
주님의 복음은 뭐냐, 통합해서 죽이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혼자 자살하지 말고 죽되, 나하고 같이 죽어야 니가 산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로 하여금 뭐만 쳐다보고 죽게 합니까? 그리스도만 보고 죽게 하는 것, 그게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신앙생활입니다. 주님만 계시기에 나는 지금 당장 죽어도 그게 나한테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고전16:22).
“사랑하는 자 있잖아? 없어?” “있어요.” “그럼 너는 먹든지 마시든지 죽든지 살든지 예수님께만 영광 돌리면 되겠네.” “예.” “말하는 폼이 자신감이 없다? 뭐 기분 나쁜 게 있어?” “아니요.” “근데 말하는 것이 뭐 별로 현실감이 뚝 떨어지는 것처럼 하네?” 이런 식으로 우리 안에 성령께서 작용을 해주시는 겁니다. 날마다 지적을 해주시는 거예요.
플라톤이 인간이 다 같이 잘살기 위해서 대안을 제시했어요. 옛날부터 사는데 관심이 없었겠어요. 그래서 귀족의 명예정치⟶문벌의 과도정치⟶자유민주주의정치⟶국가가 말아먹는 종말의 참주정치까지 발전한다고 B.C5세기에 플라톤이 이야기를 했어요. 귀족들이 다른 말로 하면 족장들이, 다른 말로 하면 역사와 전통의 그 토박이들이, 그 씨족들이 각자 흩어져 있다가 외부의 더 강한 국가가 있으니까 단합해서 이겨내야 되겠죠.
씨족사회에서 나아가게 되면 부족연맹이 돼요. 부족연맹이 되면 이게 연방통일론이에요. 연방제에요. 미국처럼. 미국 50개주United States(연방제) U.S.A(United States of America, 미합중국)가 그렇죠. 연방제로 들어가는 겁니다. 씨족사회라는 것은 산과 강 사이에서 니는 니고 나는 따로 논다는 겁니다. 이거는 그 당시에는 국가의 경계도 없어요. 민족주의라는 것은 원래 없고. 민족이라는 의미가 생긴 것은 통일신라이후에 외침에 의해서, 적이 새롭게 만들어준 개념이에요. 민족이라는 게.
그래서 고조선이 민족이냐, 발해가 민족이냐 하는 그것은 의미가 없어요. 적들이 우리를 어떻게 한통속으로 보느냐, 그 한통속으로 볼 때 그게 우리의 아이덴티티identity, 정체성이라니까요. 학교 가서 가족이 언제 가족이냐 하면 다른 애가 내 동생을 패는데 형이 나설 때, 우리는 형제고 가족이 되는 겁니다. 집에 가서 또 싸우겠지만. 반대되는 적들이 없으면 이쪽에서 아이덴티티, 정체성이 성립이 되지를 않아요. 나라는 것은 니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나라는 것이 있는 거예요. 너가 있는데, 그 너를 적으로 보느냐, 같은 적으로 본다면 이건 이미 동질화가 된 겁니다. 한통속이 되죠.
같이 따로 오랜 세월동안에 씨족, 부족, 강 건너 산 넘어 누가 있는지 관심도 없어요. 물론 교류는 있겠지만. 부족연맹을 해요. 이게 우리나라 대표적으로 가야국이에요. 그러다가 신라가 통일하게 되면 드디어 부족국가가 되는 겁니다. 국가. 국가가 되려면 조건이 뭐냐, 경제적인 바탕이 잉여생산물이 많아야 돼요. 그저 하루 빌어먹고 살면 국가가 안 돼요. 왜냐하면 국가는 돈 주고 상비군을 유지해야 되고, 궁궐도 지어야 되고, 거기에 대한 월급 주는 관료들이 있어야 되고, 농사꾼이 농사짓고 남아도는 그것을 가지고 국가를 유지 관리하는, 그것만 전문적으로 하는 일에 봉급이 나오는 그 체제가 되어야 국가가 되거든요.
남아도는 잉여가 되려면 매년 돌아오는 그 곡식이 많아져야 해요. 곡식이 많아지려면 농업혁명이 일어나야 줘야 돼요. 농업혁명이 일어나려면, 그냥 씨 뿌리고 놔두면 농업혁명이 안 일어나요. 밭을 길게 갈아야 돼요. 길게 갈려면 에너지기 더 많은, 다시 말해서 동이나 구리로 만든 것은 안 파진다고요. 다시 말해서 철기로 만든 쟁기가 있어야 되고 그 쟁기를 끄는 소가 동원이 되어야 해요. 깊이 갈아서 오래도록 묵혀서 생산량이 나올 수 있는 토지. 그래서 블레셋은 철기문화고, 만날 양만 쳤던 이스라엘은 유목이에요. 이동하는 민족이고, 그 당시 가나안 토박이들은 농사를 짓기 때문에 철기문화가 발달이 된 거예요.
따라서 지금도 이스라엘 유적지에 가면 여신하고 여호와하고 나란히 해놨어요. 세겜이라는 곳에 가면. 아데미 신하고 바알 부인(아세라)신과 같이 해놨어요. 농경시대니까. 모든 농경기술을 누구한테 배워야 돼요? 양치는 사람들한테는 안 나온다고요. 토박이한테 배워야 되잖아요. 토박이한테 배울 때 씨를 그냥 뿌리지 말고 신한테 빌고서 뿌려라 해서, 그 문화가 그대로 다 유입이 되는 거예요. 뭣 때문에? 살기 위해서.
여호와의 법은 사는 것이 아니에요. 존재하지 않는 죽음에 동참하는 겁니다. 그게 출애굽 때는 뭡니까? 어린양의 피를 바르면 그것이 그들이 사는 거예요. 어린양의 피를 바르게 되면 누가 끼어들어요? 여호와가 함께 동행 하는 조건이 만족이 돼요. 하나님의 약속, 제사에 참여한 사람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조건에 충족이 되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하늘나라에서는 영생이라고 합니다. 영생.
그런데 인간들의 이 땅의 세계는 뭡니까? 내가 사는 방식대로 사는 것을 산다고 하죠. 자연적으로 이 율법을 가지고 뭘 만든다? 나라 만들기를 한 겁니다. 그러다보니까 명예정치라는 것은 뭐냐 하면 그 오랜 전통에 의해서 원로들이 정치하는 것. 이래하다가 여기서 문벌의 과도정치라는 것은 쿠데타를 일으켰던 군인들이나 이런 사람들, 안 그러면 역사 중에 더 역사 위에 있는 사람들. 과도라고 하는 것은 한 사람이 통치하는 것이 아니고 유력한 인사들 여럿이 통치를 하는 것을 과도정치라고 해요.
그렇게 하다가 자유민주주의정치라고 하는 것은 엉망이라는 거예요. 인간들이 뭘 안다고 저희들끼리 표 한 표씩 던져가지고 정치를 하느냐 이 말이죠. 무식하면 무식한 대로 유식하면 유식한대로 전부다 표가 한 표라. 이게 개판되는 거예요. 정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여러분, 이주일이 국회의원이 된 거 아시죠? 이주일이가. 지가 법에 대해서 뭘 압니까?
근데 국회의원이 됐어요. 두 번 다시 안 한다고 했지만. 물론 담배피우다가 죽긴 죽었지만. 이거는 뭐 배운 것도 없이 나라 책임도 못질 인간이 전부 다 한 표를 던져요. 이게 나라를 말아먹는다는 거예요. 플라톤이 말하기를. 그리고 참여정치라는 것은 이거는 진짜 쿠데타에요. 소위 똑똑한 사람들 놔두고 무식한 사람들을 선동해서 똑똑한 사람들을 뒤엎고 지가 대장질을 하는 것을 참주정치, 참여정치라고 합니다. 전부다 다 나라 말아먹는 겁니다.
그러면 나라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철인정치. 진짜 깨끗하고 훌륭한 사람, 박근혜 전 대통령 같은 분. 진짜 훌륭하고 철학을 하고 비전이 있는 사람. 이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일체 사유재산이 없고 장가도 안 가야 돼요. 결혼도 안 해야 돼요. 오직 어디에 몸을 바친다? 국가에만 몸 바치는. 미쳤습니까? 그런 사람만이 아무 생각 없이 나라발전만 헌신적으로 생각하는 철인, 철학가가 최고니까, 철인이 하는 국가가 오늘날 국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죽인 유대인들의 정치는 어떤 정치입니까? 그들은 뭘 모방합니까? 제사장을 모방하죠. 그래서 다윗계통이나 사독계통에서 나온 제사장. 그것을 사두개인이라고 하죠. 사두개인이 뭘 하느냐 하면 성전을 관리합니다. 성전이 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곧 우리와 함께 있다는 뜻이고, 성전이 있음으로 우리가, 나라가 산다는 거예요. 결국 계속해서 산다는 쪽에다가 무게를 두고, 관심을 거기다가 두는 겁니다.
그런데 산다는 게, 인간에게 산다는 것은 목숨만 연명하는 것을 산다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뭘 추구하느냐 하면 안락을 추구해요. 안락을. 안락하면 편안한 거죠. 안락을 위해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안락의 합리성. 모든 법적인 것이 합리적이 되어야 하는데, 뭐냐 하면 모든 사람이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합리적으로 하는 겁니다.
근데 여기는 기본적으로 되어 있는 게 무슨 정치냐 하면 보호에요. 보호. 보호해놓고 보호된 그들이 편안하게 잘 살 수 있는 합리성을 법으로 집어넣는 것이 그 정치의 원칙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보는 겁니다. 자, 이렇게 할 때 제가 첫 번째 시간에 제일 끝에 이야기를 했죠. 이것이 어느 몸에서 나온 거예요? 자, 법이 있죠. 그러면 법만 있으면 돼요? 안 돼요?
어떤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자, 이번 계획은 내가 다 했으니까, 계획대로 글을 누가 쓸래? 요새 그 말이 약간 유행이 된답니다. “계획은 내가 할게. 글은 누가 쓸래?” 개그우먼 박미선이 그런 이야기를 했던 모양이에요. 순풍산부인과에서. 무슨 일은 다 떠벌려놓고 실제로는 다른 사람을 다 시키는 거예요. 거기에 대한 새로운 버전들이 막 나왔어요. “경청은 내가 할게, 말은 누가 할래?”이라든가. 이걸 교회버전으로 하면 “천국은 내가 갈게. 지옥은 누가 갈래?” 이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법이 있다면 그 법 자체가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법이 세워졌으면 법은 누가 지켜야 돼요? 법은 누구 몸이 들어가야 돼요? 자기 몸이 들어가야 되겠죠. 그러니까 이 법이라고 하는 것은 이래 따지고 보면, 결국 법은 누가 세우고?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이 세우고. 그 법을 실효성 있게 받들어서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재화나 물건을 제공하는 그 노동은 누가 하고? 법 말고 다른 사람이 다 하는 거예요. 다른 사람이.
하나님 사랑하고 이걸 어떻게 한다? 실제로 실효성 있게 하는 것은 성전세를 내라는 겁니다. 이웃사랑 하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십일조 내라. 목사는 설교만 하고 돈은 교인이 내고. 그럴 때 관리하는 에너지를 계속해서 유입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선교는 목사인 내가 할게. 선교비는 니가 내라.
그래서 이 사회는 법에서 퍼져나가는 세상입니다. 법으로부터 퍼져나가는데, 그 퍼져나갈 때 법을 제한하는 사람이 있고 법을 지키는 사람이 있겠죠. 법을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를 감시하는 사람이 있겠죠. 그러면 지키는 사람, 안 지키는 사람, 감시하는 사람, 전부다 누구의 몸입니까? 아담의 몸이죠. 인간의 몸이죠. 이미 인간의 몸이잖아요. 없는 몸이 아니라 이 말이죠.
그러니까 예수님이 딱 등장하니까 내 있는 몸이나 예수님의 있는 몸이나 같은 류(類)의 있는 몸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너희들은 악마의 자녀라고, 악마의 아이디어를 갖고 있다고 욕하고 성전을 완전히 엎어버렸죠. 예수님은 자기 몸을 뭐로 봤습니까? 자기 몸을 성전으로 봤잖아요.
자기 몸이 성전이라는 말은, 그 모든 이야기가 그 당시에는 이 법이 성전이 있음에서 나왔거든요. 성전의 있음에서. 성전이 있고, 법이 있고, 그 성전 때문에 하나님과 동행하니까 하나님이 살려준다. 이런 논리입니다. 그러면 성전을 없애버린다는 것은, 모든 법은 성전으로 통합, 응축이 되는 것이 아니고 그걸 부정해버리면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죠.
근데 기도하는 집이 어디에 있느냐 이 말이죠. 그 기도하는 집을 누구로 봤습니까? 예수님 자신의 집으로 본 거예요. 제자들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죠. 요한복음 2장 19절부터 보니까 제자들이 예수님이 죽고 사흘 만에 부활하고 난 뒤에, 예수님이 그때 하신 말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일으키리라는 이 말씀. 사흘 만에 짓겠다고 한 것은 벽돌로 지은 성전이 아니고 예수님 자신의 몸이라는 것을 그때 알았다는 거예요.
자, 이게 굉장히 어려운 말이에요. 왜 어려운 말이냐 하면 어떻게 인간의 몸이 성전 개념과 이퀄(=)시킬 수 있는 아이디어가, 도대체 어디에 근거해서 나오느냐 이 말입니다. 어느 근거에서만 나오느냐 하면 내 몸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다는 아이디어에서만 그게 나와요. 이 몸을.
내가 헌금한 것, 내가 예배당 벽돌 쌓는 것, 내가 기도한 것, 내가 찬송한 것, 이 모든 것을 주께서 일체 안 받는다고 인정할 때만, 어디에 꽂히겠어요? 내 몸을 가지고도 구원을 못 받고 천국 못 간다면, 그래도 갈 수 있다면 일단 이 몸은 아니에요. 자식 잘 키우고 멀리서 와서 성경공부 하고, 하여튼 이 몸은 아니에요. 무조건 이 몸은 아니에요.
그러면 이 몸이 아닌데 이 몸에 대해서 미련을 가져야 돼요? 말아야 돼요? 그리고 자기 실수에 대해서 너무 심하게 자책을 해야 돼요? 말아야 돼요? 그런 것 한다는 자체가 너무 수상해요. 깨져야 될 몸입니다. 우리가 깨져야 될 몸인데, 이 깨는 방법은 주께서 알아서 깨겠죠. 뭐 골프치고 깨지고 놀러가서 깨지고 수시로 엎어져서 깨지고 뭐 이렇게 하겠지만, 하여튼 이 몸은 아니에요.
그럼 거울 앞에 이 몸 말고 없죠. 그러니까 없는 몸이라니까요. 그래서 성도는 미친 사람이에요. 있는 몸을 놔두고 없는 몸을 믿으니까. 이 바보! 이거 뭐 계룡산에서 계시 받은 것인지, 왜 멀쩡한 몸을 가지고 좀 굴리지, 멀쩡한 몸을 가지고 활용해서 헌금하고 이웃돌보고 겨울에 주사도 놓고. 멀쩡한 몸을 가지고 봉사하고 얼마나 좋아요.
그러나 내 몸은 무조건 아니에요. 내 몸은. 그러면 “내 몸을 안 믿으면 누구 몸을 믿느냐?” “니는 말해줘도 몰라.” “니가 예수님 이야기를 하는구나?” “으응~ 아니. 니가 생각하는 그 예수는 내가 생각하는 그 예수하고 달라.” 이렇게 약을 올릴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내 몸은 일단 아니라는 것은, 이거는 내가 노력해서 생긴 현상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노력해서는.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윤리도덕깡패가 있다고요. 윤리도덕깡패가 악마인데, 그 악마가 왜 설칩니까? 우리가 뭘 붙들고 있기 때문에 달려드는 거예요? 내 몸을 내가 지켜야 내가 구원받는다고, 자꾸 살아보려고, 여기서 살고 천국에 가서 또 살고, 이 몸이 살아보려고 애쓰다보니까 누구의 밥이 된 거예요? 악마의 노리개-감이 된 거예요.
남자들이 축구하고 야구할 때 여자관객들이 가서 앉아있다면, 남자선수들이 있고 여자관객들이 있는데, 여자들이 이야기하는 가운데에 이해 안 되고 약간 살짝 기분 나쁜 것이 있어요. 뭐냐 하면 그 야구선수들 나이들이 전부다 많잖아요. 근데 20대 여자 관객들이 “저 이대호 선수 참 귀엽지? 그지?”라고 합니다. 귀엽다는 것은 노리개-감이라는 뉘앙스가 살짝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금 악마가 우리를 볼 때 노리개-감으로 보는 거예요. 근데 노리개-감으로 포함이 안 된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냐 하면 나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어디서 내 노리개-감이 날 쫓아낸다고 까부느냐(행19:15), 이렇게 된 거잖아요. 악마가 알아요. 조금만 건드려도 화내고 울부짖고 아프고, 이런 사람을 알아요. 악마가 갖고 놀 수 있는 사람인지를 알아요. 그러나 주님에 꽂힌 사람은 내가 나를 갖고 노는 장난감이 아니거든요. 굴려도 주님이 알아서 지금껏 살게 하신 거예요. 주님이 지금껏.
법이라고 하는 것은 법을 내린 예수님 당사자가 그 법을 지키는 방식까지 다 완료를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몸은 이 땅에 없는 몸인데 나타나셔서 십자가에 다 이룬 몸이에요. 따라서 하늘나라에 속한다는 말은 어디를 주시한다는 말입니까? 내가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것을, 할 수 없는 그것을 다 이루셔서 의인되게 하신 그 몸만 자랑하고 적용하고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의 완성입니다. 이게 하늘나라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 속에서 뭐가 흘러나오겠어요? 아까 이야기했죠. 법이 퍼져서 뭐가 파생된다고 했습니까? 사회가 나오죠. 바로 그게 교회가 아닙니까? 이게 성도의 세계잖아요. 예수님의 법의 완성이 끼리끼리, 통하는 사람끼리 모이는 것이 교회잖아요. 주님의 법의 완성. 십자가에 담긴 그 내용이 오늘날 우리를 새롭게 인식시키는 겁니다.
여기에 무슨 철인정치가 있고, 참주정치, 자유민주주의 정치가 있습니까? 없어요. 그러면 우리는 무슨 정치를 합니까? 마지막으로 이 말씀을 하고 마치겠습니다. 사람이 갇혀있으면 답답해요. 병 같은 게 있으면 마개로 막아놓으면 답답하잖아요. 사람의 정신병, 우울병, 모든 병이 뭔가, 병목(병 윗부분의 잘록한 부분)을 쳐버려야 돼요. 병목 치면 끊어지겠죠. 날아가 버리면 시원한 바람이 통하겠죠. 갇혀있던 거품은 폭발해버리고.
이게 뭐냐, 머리되시는 분이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시죠. 머리되시는 분과 연관이 끊어져서 하게 되면 이건 완전히 쓰레기가 되는 겁니다. 이건 죽은 자에요. 예수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면 그건 갇혀있는 사람이고 속에서 부글부글 하는 사람이에요. 그냥 속에서 부글부글하는 거예요. 이 몸을 어떻게 하면 천당을 보내겠다고 갖은 노력, 교회 가서 굿을 다 해요. 교회 가서. 찬양집회 했다가 흔들다가 자기가 할 수 있는 굿이란 굿은 다해요. 포기하면 되잖아요. ‘다 포기하지 마!’라는 그런 노래가 있죠. 닭고기아줌마가 하는 노래(닭 포기하지 마!).
인생 포기하면 되잖아요. 왜 그걸 쥐고 있습니까? 아무 쓸모 짝에도 소용없는 그것을 왜 쥐고 있습니까? 장로님 보고 이야기한 거 아닙니다. 이거 어디에 써먹을 데가 있다고, 쓸모없이 늙어서 죽으면 죽는 건데. 지금 죽으라고 있는 건데 왜 이걸 살리려고 해요? 내 죽는 것도 주께서는 시시하게 봅니다. 아무 의미 없어요. 안락한 삶? 기대하지 마세요. 안락한 삶. 보호받는 것? 이미 죽었는데 뭘 또 보호받아요.
우리 자신을 보호하려고 하지 말고, 내가 사랑하는 주님이 일을 벌이시는 결과물이 바로 오늘날 우리 자신입니다. 오늘 모습이 어떻든 간에 귀한 모습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이 악으로 완전히 관영되어 있습니다. 해결책도 없고, 부글부글 거리고, 틈만 나면 화내고 분노 터트리고 누구 탓으로 돌리고, 살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갇혀있는 병처럼, 악의 거품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세상, 주여! 우리 자신을 그 안에서 포기하고 끄집어내주신 주님과 통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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