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

자기포기 180824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8. 27. 09:12
2018-08-25 00:14:13조회 : 140         
자기포기 180824이름 : 이근호 (IP:119.18.83.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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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 (IP:122.♡.170.138)18-08-26 22:26 
광주강의20180824a 마가복음12장 28-34절(자기포기)-이 근호 목사 

  

마가복음 12장 28-34절 

  

28절,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저희의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대답 잘하신 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까 

29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절,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절,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32절, 서기관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33절,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34절, 예수께서 그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이렇게 되어 있죠.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것은 지금 서기관이 예수님과 대화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화하는 것. 그렇게 대화하니까, 34절에 “예수께서 그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칭찬받는 자가 등장했을 때에 우리의 관심사는 여기에 쏠리는 것입니다. 무슨 소리를 했기에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다 받는가? 그러면 우리도 똑같은 대답을 하면 칭찬을 받을 수 있겠네, 라는 그런 핵심부분을 뽑아내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이 서기관이 뭐냐 하면 이 서기관이 예수님과 함께 대화한 거예요. 대화. 대화를 했는데, 대화가 되는 사람이에요. 대화가 되는 사람을 보고 예수님은 뭐라고 했느냐 하면, 이것을 하나님 나라라고 본 것입니다. 하나님하고 대화가 된다는 것은 생각이 같다는 뜻이거든요. 하나님나라에 대화가 되는 사람이다. 근데 서기관입장에서는 지금 누구하고 대화를 하느냐 하면 예수님하고 대화를 하죠. 예수님하고 대화를 했는데, 이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거의 다 왔다, 가깝다, 하늘나라가 너 같은 사람을 통해서 보여 진다, 이렇게 되거든요. 

  

여기서 이 사람이 예수님과 대화를 하면서 지금 세상을 바라봅니까? 안 봅니까? 안 보죠. 가족도 생각 안 하죠. 이 사람은 어디에 꽂혀 있느냐 하면 예수님한테만 꽂혀있는 거예요. 그러면 하늘나라라는 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에게 꽂혀있는 사람. 마치 모든 해답은 예수님에게로부터 나온다. 여기에 그냥 뿅 간 거예요. 이분한테는 전부를 걸어도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전부를 건다는 말은 내가 따로 예수님한테 요구하는 게 있겠어요? 없겠어요? 따로 요구하는 게? 요구하는 게 없죠. 

  

하늘나라 백성, 또는 성도의 특징이라면 예수님이 주신 것 외에 달리 하나님 앞에 나아와 요구할 필요가 없는 사람, 존재, 그게 바로 성도죠. 건강하게 해달라, 자식문제 해결해 달라, 교회문제 해결해 달라, 이게 아니고 우선 요구를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요구를. 왜 그러냐 하면은 예수님께 율법에 대해서 언급했다는 것은, 모든 법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예수님이 정답을 갖고 있다는 것은, 예수님께로부터 그 모든 율법의 진의가 시작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에요. 내가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시작점이 내가 여기에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시작점으로 안 보겠다고 하는 말은 이건 일종의 자기 소멸이죠. 자기 소멸.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첫 번째 계명이 뭐냐 하면 30절에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이래 되어 있죠. 이 말은 내 뜻 다 걷어내고, 내 힘 다 걷어내고, 내 마음 다 걷어내고, 내 목숨 다 걷어내고, 다 걷어내는 거예요. 내 마음이 독자적으로 있을 필요가 없고, 내 목숨 따로 챙길 필요가 없고, 내 뜻 따로 챙길 필요가 없고, 내 힘 따로 챙길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나는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존재가 아니라 이 말입니다. 제가 강남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주님의 입장에서는 내가 죽는다는 것도 시시한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분명히 그렇게 이야기를 했죠. 내가 죽는 것도 시시한 일이 돼요. 내가 죽는 것이 나한테 굉장히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이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일의 진행이 우리가 이렇게 요란을 떨어도 주님의 일은 차분하게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내가 몸이 아프고 가정에 우환이 있더라도 주님보시기에는 아무 하자가 없어요. 일의 진행이 잘 되고 있어요. 

  

어떤 산골마을에 집들이 있는데, 저녁 되면 밥 짓는다고 굴뚝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가죠. 개도 몇 마리 있고. 박목월은 그 대목을 보면서 <나그네>라는 시에 이렇게 했어요. 그것을 무슨 마을로 봤느냐 하면 술 익는 마을로 봤어요. 나그네라는 시에요. 근데 그 술 익는 마을이라는 것은 아주 정감 있고, 오랜 정이 묵어있다는 것, 그리고 그 마을길이 굉장히 사랑이 넘치는, 묵은 사랑이 꾸준하게 이어지는 그 모습을 한꺼번에 술 익는 마을로 그렇게 표현을 했거든요. 

  

근데 그 술 익는 마을에 KTX철도 공사한다고 되어 있거든요. 그것도 한 가운데에. 대뜸 보상금을 주고 나가라고 합니다. 아마 공사하게 되면 그 마을 한 가운데는 완전히 집들이 뜯겨나가겠죠. 남아 있는 집들에 개가 있을 것이 아닙니까? 근데 토목공사 한다고 오면 개들이 짖겠죠. 개가 왕왕 짖든지, 멍멍 짖든지 간에 KTX철도 회사에서는 공사를 밀어붙입니다. 

  

우리는 술 익는 마을에 속았어요. 우리는 과거 옛날의 소박한 그 꿈이 있어요. 그 꿈의 한 가운데를 주님의 율법이 확지나간다면, 주님의 법이 지나간다면,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이럴 수가 있습니까? 라고 할 때, 주님은 무슨 개소리야! 라고 하시겠죠. 무슨 소리야? 지금 주께서 이렇게 밀어붙이면 밀어붙이는 것이지, 댁들의 사정을 고려할 바가 못 되죠. 하나님 나라가 그런 거예요. 

  

제가 오늘 강의하면서 결론을 뭐라고 내려고 하느냐 하면, 이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가까운 것이 아니고, 이 서기관 속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하나님 나라가 나오는 겁니다. 시작되는 거예요. 결국 논리적으로는 그렇게 돼요. 하나님 나라가 어디서부터 시작되느냐 하면 예수님부터 시작이 돼요. 예수님부터 시작이 되는데, 우리가 보통 하늘나라에 들어간다고 하잖아요. 그리고 오늘 본문도 니가 하늘나라에 멀지 않다고 했다 이 말이죠. 

  

그러나 예수님과 단짝이 되는 이 사람을, 실제로 이 사람을 다루게 되면, 이 서기관이라는 별 볼일 없는 사람도, 거기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하나님 나라의 정수, 본질이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한 인간을 통해서 하늘나라가 나와요. 이 소자한테 한 것이 누구한테 한 것이다? 곧 나한테 한 것이다. 이게 나온다 이 말이죠. 그게 바로 사도행전에 있지 않습니까?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이야기 나오죠. 우리는 헌금을 반만 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그 부부를 다 죽인다고 하는 것이 너무 과도한 처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누구나 갖고 있어요. 

  

그래서 그 본문에 보게 되면 죽고 난 뒤에 그 교인들이 굉장히 두려워한다고 했어요. 이러려고 우리가 교회가 나왔나? 하루아침에 둘 다 하나님 앞에 벌 받았다고. 그때 들었던 것을 여러분들이 기억해보세요. 왜 그렇게 죽었느냐 하면, 사탄하고 의논했기 때문에 그랬다는 거예요. 악마하고 의논해서 교회헌금을 집어넣은 거예요. 그러면 악마하고 의논한 그 내용이 나와요. 뭐냐 하면 “반은 감추고 반만 내자.” 이게 악마하고 의논한, 사실은 부부하고 의논한 것이지만. 베드로는 그렇게 보지 않고 니가 악마의 사주를 받아서 그렇게 했다고 보거든요. 

  

그러면 베드로의 말이 맞는 거죠. 헌금 반만 내자고 한 겁니다. 거기서 우리가 뭘 봐야 하느냐 하면, 무엇을 내자는 것, 또는 하나님 앞에 무엇을 드리자, 보통 헌금이나 헌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게 인간에게 성립이 되느냐 하는 겁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 앞에 향유를 드렸습니까? 깨트려 버렸습니까? 향유를 버려버렸죠. 예수님 발에다가 깨트렸죠. “예수님 향유 이거 팔아서 가난한 사람을 주세요.”라고 안 했죠. 향유병이라는 그것을 예수님 발 앞에 깨트려버렸잖아요. 그거 향수 모으는데 자신의 청춘을 다 바쳤잖아요. 

  

그럼 향수병을 예수님 발 앞에 깨트린다는 것은 뭘 깬다는 말입니까? 자기 자신을 깨는 거예요. 왜 깨는가 하면 내가 건방지게 주님 앞에 드린다는 것조차도 나한테는 그런 권리도 없고 그런 입장도 아니고 그런 자격도 안 되고 그런 존재도 아니라는 거예요. 주님 계신다면, 방해물밖에는 안 되는, 나는 주님 앞에서 주님의 돋보임을 어떤 식으로 하느냐 하면, 주님 앞에서 작살나고 박살나는 그것이 주님 앞에 나의 합당한 모습이라는 겁니다. 이게.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뭘 했습니까? 주님을, 하나님을 뭐로 보느냐 하면 같이 맞먹을 대상으로 본 거예요. 평소에 인간이 인간에게 정을 베풀 때 뭡니까? “아이고, 이사 왔는데 떡 드셔볼래요.” “이거는 우리의 성의니까 포도 드세요.”라고, 이렇게 주잖아요. 준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동등이라는 것, 주고받음의 관계가 성사가 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그렇게 하거든요. 그게 베드로가 보기에 사탄과 평소에 인간 대 인간이 의논하는 행세, 인간을 사귀고 노닥거리는 그 행세를 그대로 하나님 앞에 한 겁니다. 하나님 앞에. 

  

그게 말이 되느냐는 겁니다. 인간 대 인간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 좋은 사회를 만드는데, 교회가 인간 대 인간이 사귀는 그 정도로 밖에 안 보이도록 마귀가 그렇게 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 끝 절에는 바나바는 다 바쳤잖아요. 그럼 우리도 바나바처럼 다 바쳐야 됩니까? 아니에요. 우리는 주님 앞에 바칠 자격도 없고, 바칠 입장도 못 됩니다. 죄인이 뭘 바쳐요? 죄인이. 죄인이 뭘 바칩니까? 인간은 뭔가 바치고 난 뒤에는 반드시 내가 바쳤다, 라고 하거든요.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알아버린다 이 말이죠. 

  

그래서 이번에 책을 쓰면서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했어요. 그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하나의 생포된 실험실의 시료에요. 시료. 교회가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들을 잠시 발을 담갔다가 빼게 한 거예요. 악마는 교회에 들어오면 안 된다. 이거는 누구나 아는 문제죠. 거룩한 교회에 악마가 있을 수 없잖아요. 그러나 실제로 악마가 들어왔다는 경우는 어떤 경우냐 하면 우리가 뭔가 내서, 하나님 앞에 드려서, 그걸 뭉쳐서 교회를 만들자. 이게 바로 뭐냐 하면 교회를 훼방하는 짓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사도행전 5장에서 베드로가 한 이야기는 딱 하나밖에 없어요. 교회는 누가 만든다? 인간이 바쳐서 만드는 것이 아니고, 그냥 성령이 만드는 거예요. 어떤 식으로? 악마적인 것을 내쫓음으로서. 악마적인 요소를 노출시킴으로서. “이게 악마적인 것이야.”라는 것을 노출시키면서 교회를 만들어나가요. 그래서 강의에서 했잖아요. 베드로가 전도할 때 삼천 명, 오천 명 믿었죠. 도를 전하니까. 그 삼천 명, 오천 명 숫자로 부르는 게 아니에요. “아! 우리는 죽어도 괜찮네.”라는 그게 삼천 명, 오천 명이에요. 그래서 그들은 핍박을 겁내지 않았던 겁니다. 성령이 함께하니까. 

  

사람이 걱정하고 근심하고 두려워한다는 것은 이 자리에 누가 있다는 말입니까? 내가 여기에 있다는 거예요. 내가 여기에 있죠. 그래서? 그래서 그게 뭔데? 내가 여기에 있다고 한다는 것은 지금 내 대화상대를 누구로 잡았다는 겁니까? 나 외에 아무도 대화상대를 안 잡는 거예요. 지금. 나는 여기에 있다. 나는 누구보고 이야기를 할 거야. 나는 여기 있는 나보고 이야기를 할 거야. 그러니까 그런 사람에게 이 법이라는 자체는 아주 무시가 되는 거예요. 

  

근데 법이 뭐냐 하면 법이 곧 현실이거든요. 성경에서 이야기하면 법은 곧 현실입니다. 따라서 법을 무시했다는 것은 뭐냐 하면 현실은 놔두고 엉터리 현실에 완전히 푹 젖어 있다는 것입니다. 엉터리 현실은 망상이죠. 망상에 빠져있다는 거예요. 근데 이 망상을 누가 자꾸 조작을 하는 겁니까? 너한테 몰두하라고 누가 그렇게 이야기를 해요? 그건 바로 마귀가 그런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마귀가. 

  

다시 한 번 정리해봅시다. 예수님과 대화한다는 것은, 예수님과 서기관이 대화하는데, 서기관이 누구한테 물었습니까? 질문 자체를 누구한테 한 겁니까? 예수님한테 최후의 법이 뭡니까? 라고 물었다는 자체가 이 법과 누구하고 관련이 되어 있다? 예수님과 관련되어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만이 정답을 안다고 이 서기관이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정답을 아는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이 현실을 만들었기에 관여하고 있다는 것도 같이 아울러서 그 사람이 인정을 하고 있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34절에, 니가 하나님 나라에 멀지 않도다, 라고 했을 때에 이 서기관이 ‘아이고, 뭐 주님이 괜한 소리를 하네.’라고 이렇게 생각을 했겠어요? 아니면 이걸 사실로 받아들였겠습니까? 사실로 받아들였겠죠. “아이고, 뭐 그렇게 과도한 칭찬을 안 해주셔도 되는데, 그냥 한소리 했는데 그냥 넘어가시죠.” 이게 아니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그게 실제로 현실이 되는 거예요. 여기서 하나님 나라는 이미 예수님과 대화가 되는 사람만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과 대화가 된다는 말은 예수님에게 꽂혀있다는 말이에요. 예수님에게 꽂혀있다는 말은 누구한테 꽂혀있지 않다? 나한테는 별로 안 꽂혀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실제로 현실은 법이 시행되고 완성되는 것이 현실이지, 나 여기 있음이 그게 현실의 조건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서기관은 지금 율법이 있고 계명이 있다는 것을 아주 진지하게 생각을 하는 겁니다. 진지하게. “우리가 법 지키면 되지.” 이게 아니고, 법 자체에 법 지키시는 분이 따로 있음을 이 서기관이 이걸 알게 된 거예요. 법 자체에 법을 지키시는 분이 따로 있음을. 

  

어떻게 해서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느냐 하면은,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이거죠. 그런데 이 말에 서기관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32절, “서기관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이 말은 다른 이가 있더라도, 그 다른 이들은 누구만 쳐다봐야 한다? 하나님 한 분만 쳐다봐야 한다는 겁니다. 왜 쳐다봐야 하느냐 하면 하나님 입에서 나오는 그 모든 말씀의 실현은, 완성되는 것은, 완료되는 것은, 그것은 한 분이신 하나님의 개입이 없이는 이게 성사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점을 이렇게 설명하면, 보통 율법의 시작은 모세부터 시작이 되죠. 모세율법. 그럼 그전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었는가, 없었는가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는 그냥 나타나지 않아요. 반드시 하나님의 법을 들고 나타납니다. 그걸 언약이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언약, 선악과 따먹지 말라고 하는 이런 것도 언약이 아닙니까?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그 말씀을 딱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걸 누가 이야기했느냐 하면 하나님이 이야기를 했죠. 

  

그러면 하나님이 이야기를 했다는 말은, 그 법을 실없이 그냥 던져놓고 책임도 안 지고 나는 모른다고 그렇게 돌아서버립니까? 아니면 그 법과 모든 피조세계가 그 법안에서 만나겠다는 겁니까? 하나님께서 만나겠다는 이야기잖아요. 피조물을 대할 때 그냥 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그 말을 드리는 거예요. 인간을 대할 때나 세상을 대할 때나 그냥 대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먼저 던져준 것이 있다는 거예요. 던져준 것 안에서 만나는 겁니다. 

  

그러면 던져 준 것 안에서 할 때, 인간이 있고 하나님께서 뭘 주신다? 하나님께서 그냥 맨손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법을 들고 나타나죠. 모세가 애굽에 갈 때 그냥 간 게 아니에요. 여호와의 뜻을 가지고 애굽에 등장해가지고, 애굽 바로왕과 애굽 백성들을 작살내놓았습니다. 모세 개인적인 어떤 감정으로 된 게 아니잖아요.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법을 줄 때, 사람들은 하나님이 법을 인간에게 줬다 이래 하잖아요. 

  

그런데 아브라함 같은 경우를 보세요. 모든 인간이라면 아브라함 같은 경우에는 하나님의 법을 아브라함에게 주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법을 줬다는 말은 하나님의 그 법이 누구의 몸을 통해서 계시가 된다는 말이죠? 아브라함의 몸을 통해서 계시가 되는 거예요. 아브라함의 몸을 통해서 나온 계시가 뭐냐 하면 바로 번제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할 때 그냥 맨입으로 약속을 한 게 아니죠. 3년 된 암소, 수양을 했죠. 번제를 드리고 그 제물들을 두 도막을 내서 그 속을 보이고 횃불이 지나가도록 지키고 그렇게 다 했잖아요(창15장). 

  

그러니까 이거는 법이, 아브라함의 몸을 통해서 법이 계시가 되는 겁니다. 하늘나라는 어디에서 시작이 되느냐 하면, 하늘나라를 이야기 할 때 예수님께서 첫째 계명, 둘째 계명을 이야기했죠. 그러면 하늘나라의 구체화는 어느 몸을 통해서 구체화가 되는 겁니까? 예수님의 몸, 본인의 몸을 통해서 구체화가 되는 거예요. 법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했잖아요.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잖아요. 우리에게, 그냥 인간에게 준 것이 아니에요. 그렇게 이야기하는, 그렇게 언급하는 예수님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표준이 되는 겁니다. 

  

십자가 죽으심

그게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이고,
그것이 아버지는 오직 한 분인 것을 증거 하는 유일한 증거가 되고,
이웃 사랑의 유일한 증거는 예수님이 십자가 죽으심이에요.

그러면 그 법 안에서 무엇이 무엇으로 이동을 해야 하느냐 하면, 법을 받은 인간이 지킨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킨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키는 그 방식은 누구와 대조가 되고 대비가 되겠어요? 그렇게 이야기를 하신 예수님의 살아가심과 본인이 살아가는 것과 대비를 시키는 가운데서 법의 완성이 어떻게 구현되는가를 대비가 되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아주 극단적인 예를 든 적이 있잖아요. 어느 강의에서. 3더하기 5는 뭐다? 라고 선생님이 하니까, 어떤 학생이 손을 들고 3더하기 5는 8이라고 했어요. 근데 선생님이 틀렸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학생이 당황하면서 틀렸다고? 그럼 선생님 3더하기 5는 에이트(eight)입니다. 틀렸어! 이상하다? 이상하다? 8이 아니라니? 7은 아니고. 그럼 선생님 정답은 뭡니까? 선생님이 3더하기 5는 8이야. 이렇게 하거든요. 그럼 맞잖아요. 아니야. 그건 니가 말한 거잖아. 니가 8이라고 날렸잖아. 지금 이상하게 억지 같은 느낌이 들죠. 선생님이 8이라고 해야 이게 정답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제사를 드리라고 해서 제사를 드렸고, 할례를 행하라고 해서 할례를 행했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했더니만 추가적으로 주어진 것이 있어요. 뭐냐 하면 이삭을 줬어요. 이삭을. 이삭이 나타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시키는 대로 아브라함은 움직였어요. 시키는 대로. 시키는 대로 움직였으면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 되어야 해요. 그러면 하나님 1, 아브라함 1, 그래서 2만 있으면 되죠. 법에 둘만 있으면 되죠. 근데 이삭은 생뚱맞게 등장한 겁니다. 그건 제 3의 요소가 돼버리죠. 

  

하나님께서 번제 드리라고 하면 번제드릴 수 있어요. 그럼 제물은? 양 잡아라! 그럼 양잡죠. 평소에 아브라함이 했던 거니까. 근데 이번에는 뭘 집어넣어요? 평소에 내가 할 수 있는 것, 내가 가능한 것 같으면 할 수가 있는데, 거기에 뭘 집어넣느냐 하면 주께서 미리 제공하신 제 3의 요소를, 1과 1, 너와 나 사이에 제 3의 요소를 집어넣으라는 겁니다. 이거는 뭘 차버리느냐 하면 이삭이 없이, 하나님과 나하고 우리끼리 해서 법 지키겠다는 그것을 주께서는 거부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법을 주신 그분의 법안에서 보게 되면, 내가 너희에게 법을 줘도 법을 받은 너는 그 법의 속성과 본질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법을 준 거예요. 이제 남은 것은 뭐냐 하면 어떻게 해서 모르느냐의 문제와 인간이 몰랐지만 그 모른다는 것을 어떻게 하나님께서 천국에 집어넣는가 하는 그 문제가 남았거든요. 어떻게 집어넣느냐 하면 하나님 쪽에서 제시한 제 3의 요소가 등장해요. 이삭이죠. 

  

그걸 이삭으로 보지 말고 하나님 자신으로 봅시다.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이 주신 그 법을 이루기 위해서 스스로 몸소 이 땅에 오셔서 누구 손에 의해서? 스스로 몸소 법을 지킬 수 없는 인간의 손에 의해서, 없는데서 생긴 제 3의 요소를 드러냄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하나님의, 여기 오늘 본문에 나오듯이 하나님의 유일하심의 그 진수를 보여주는 겁니다. 유일하심. 하나님이 한분이심의 진수를 보여주는 거예요. 

  

하나님은 한분이시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한분이에요. 하지만 그것을 중간에 인터셉트, 가로채기 하죠. 누가요? 지금 서기관이 누구한테 물었어요? 예수님한테 물었죠. 예수님한테 물었을 때에 니가 참 똑똑하구나!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니가 하나님 나라에 멀지 않도다, 라고 이렇게 판정을 내렸잖아요. 예수님이 그렇게 판정을 내릴 자격이 있느냐 하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법주고, 그러면 이거는 내가 지키면 된다. 첫째 하나님 사랑하고 둘째 이웃사랑하고 지키면 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가 멀지 않다고 한다면 그 말은 그냥 덕담일까요? 격려차 말하는 겁니까? 아니면 내가 넣어주면 너는 그냥 들어간다는 겁니까? 어느 쪽입니까? 실제로 이 말씀을 이루신 분이 누구냐, 예수님이 이 땅에 왜 왔느냐, 이 두 말씀(첫째 계명, 둘째 계명)을 예수님이 자신이 십자가로 다 이루셨다는 것을 하시기 위해서 오신 거예요. 

  

그렇다면 이 서기관이야기가 왜 들어 있느냐 하면, 제자들이나 오늘날 우리를 보고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 하면은, 예수 그리스도가 존재할 때 우리는 그 앞에서 나라는 존재는, 이거는 없어져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그러면 뭐만 주목하느냐 하면 예수님과 그 율법의 관계만 우리가 주목해야 해요. 그 오시는 제 3의 요소의 예수님이, 하나님이 던져준 그 법을 어떻게 일괄해서 혼자 독자적으로 그걸 다 이루어내시는가, 그것에 주목해야 해요.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처럼 자기의 향수를 과감하게 주님 발 앞에, 자기의 인생 자체를 깨트려도 오히려 속이 시원하죠. 쓸데없이 가져가봤자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는 내 인생, 그 인생 어디에 써먹을 겁니까? 장로님 인생 어디에 써먹을 겁니까? 별다르게 써먹을 데가 있습니까? 율법도 못 지키면서 어디에 써먹을 겁니까? 있어봐야 술 익는 마을에 개밖에 안 돼요. 주께서 하시는 일에 방해하는, 멍멍 짖어가면서 이 좋은 우리 마을에 평화를 지키겠다고, 우리 가정이 어떤 가정인데 주님이 들어와 가지고 개판이 다 됐다고, 제사도 못 드리고 집안끼리 사단 났다고, 왕왕 그거밖에 안 되거든요. 하여튼 십자가마을 중간에 KTX철도길이 나야 돼요. 이러시면 안 된다고 누가 개처럼 짖는지를 한번 봐야 돼요. 

  

오늘 본문이 난해한 점이 있어요. 여기 하나님이 한분이라는 것이 첫째거든요. 그러면 둘째 계명에 있어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은 뭐냐 하면 이게 우산법칙입니다. 작은 우산을 큰 우산이 덮는 거예요. 이것 지키고 이것 지키는 것이 아니고, 첫 번째 큰 계명에서 파생된 계명이 이웃사랑 계명이에요. 우리 하나님이 유일한 주죠. 그러면 내 마음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사랑한다는 말은 지금 초점이, 시선이 어디에 가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에게 가있죠. 하나님에게. 

  

그러면 그 두 번째 계명의 이웃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어디서 파생되어야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이웃이라고 하는 그 이웃의 경우에만 그게 이웃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 쳐다보다가 이웃 쳐다보면 시선이, 초점이 틀어지잖아요. 인간이 두 곳을 동시에 볼 수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쳐다보다가 다른데 쳐다보면 하나님을 안 쳐다보게 된다 이 말이죠. 따라서 하나님을 쳐다본다는 것은 하나님 쪽에서 유일하신 한분이죠. 그러면 유일하신 한분이라는 것은 뭐 다른 것을 볼 필요도 없고, 다른 것을 신경 쓸 필요도 없고 주님이 하신 일만 쳐다보면 된다는 그런 뜻이라 이 말이죠. 

  

그런 뜻이면, 그 주님만 쳐다본다면 우리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어디를 안 쳐다봐야 해요? 내 자신이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에 관심 둘 필요도 없어요. 주님 쳐다보고 나 쳐다볼 수 없다 이 말이죠. 거기에 꽂혀버리면. 한분이신 주께서 법을 줬다는 말은 그 법만 줬다는 게 아니에요. 뭔가 자꾸 계시하잖아요. 계시가 되는 거예요. 아브라함의 예를 들었지만, 아브라함이 순종을 다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의 일에 전부다 커트를 했잖아요. “안 돼. 거기로 가지 말고 이리로 가야 돼. 그거 보지 말고 이거 봐야 해.” 자기 부인을 누이동생으로 거짓말해가지고 이렇게 자기 목숨 살리려고 할 때에 거기에 누가 개입을 합니까? 유일하신 하나님이 개입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아브라함 몸 자체가 법의 완성으로 보여 지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거예요. 아브라함 몸 자체가. 

  

아브라함이 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몸 자체를 하나님이 지상에 남기고 싶은 제 3의 요소로 만들고 싶은 거예요. 실제로 아브라함의 몸을 통해서 누가 나왔습니까? 이삭이 나왔죠. 아브라함의 몸이 있는데 여기서 이삭이라는 자식이 나왔습니다. 이거는 아브라함이 예상을 했습니까? 예상 못했습니까? 예상 못했죠. 얼마나 예상을 못했으면 아이 이름을 웃음이라고 짓겠습니까? 웃음으로. 예상 못한 거예요. 예상 못했는데 나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기분이 좋아서 웃는 것도 되지만, 이거는 정말 황당한 일이라는 의미에서 웃음이 될 수도 있어요. 

  

이삭이 나왔을 때에 이거는 일종의 아브라함을 감시하는 감시자 역할 하는 것밖에는 안 돼요.왜냐하면 아브라함이 율법을 지켜서 이삭이 나올 수가 없기 때문에. 법을 줬다면 법에 맞는 결실이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결실. 이 결실에 대해서 아브라함은 그냥 하나님께 당하기만 한 거예요. 아브라함을 통해서 결실이 나온 겁니다. 이삭이 나온 거예요. 이삭이 나왔을 때 아브라함의 언약이, 아.언이 뭐로 바뀌겠습니까? 이삭언약으로 바뀌겠죠. 이.언으로. 

  

그러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일하시고, 모든 법을 홀로 일하신다는 그 증거를 아브라함은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뭐가 대신하느냐 하면 이삭의 인생이 아브라함의 인생을 대신하는 겁니다. 호랑이는 가죽에 줄무늬가 있지만 인간은 내부에 줄무늬가 있다고 이야기했어요.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라는 여류작가가 쓴 이야기를 보면 나와요. 그 사람이 쓴 책 제목이 <오래된 미래>라는 겁니다. 티베트 히말라야 산맥에 있는 아주 한적한 마을에 들어가서 문명과 뒤떨어져 사는 그들이 얼마나 행복하냐? 그걸 관찰해서 다큐멘터리로 쓴 소설이거든요. 소설이 아니고 보고서라고 할 수도 있지만. 

  

오래된 미래라는 뜻이 뭐냐 하면 미래의 삶이 사실은 이런 식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아니냐는 뜻에서 벌써 온 미래, 우리가 지향될 그 목표를 이 마을은 벌써 시작하고 있다는 것에서 오래된 미래입니다. 근데 그 오래된 미래가 얼마 안 가서 청바지 입고, 세상에! 우리끼리 있으니까 이렇게 가난한 줄 몰랐다, 젊은 애들이 반항하고, 완전히 문명화되어 버렸어요.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어요. 

  

호랑이는 이렇게 외형적으로 가치를 보지만 인간의 내부에는 호랑이의 연륜을 보여주는 그 줄무늬가 인간 속에 있다고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법을 지키게 하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을 택할 때부터 아브라함 속에, 진정 율법을 완성한 분이 아브라함 속에 있도록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공작하는 거예요. 공작. 공작하니까 영화제목 같은데. 흑금성. 아브라함 속에 뭘 만들어내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 나라에요. 예수그리스도의 나라에요.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입니다. 우리 안에 마리아처럼 잉태시키는 겁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어떤 인간도 하나님에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말씀을 지킬 수가 없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어떤 인간도 내 몸같이 이웃을 사랑할 수가 없게 되어 있어요. 우리 안에 예수님이 오셔서 첫째 계명, 둘째 계명을 다 이룬 겁니다. 그 이룬 보상으로 주어진 것이 의가 되는 거예요. 

  

우리 성도가 하늘나라에 가면 죄인이 아니고 의인이 되죠.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우리 안에 그렇게 죄인을 의인되게 하는 작업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이미 하늘나라가 있는 거예요. 우리 안에. 주님 안에는 물론이고 성령 받은 우리 안에도 역시 하늘나라가 있습니다. 하늘나라 꼬라지하고는 뭐 그렇습니다만. 성령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 안에서 어떤 작업이 일어나느냐 하면, 엉뚱한 것을 봤던 우리가 성령에 의해서 제대로 정방향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미리 알려주기 위해서 마가복음 12장에 우리의 표준 모델처럼 서기관이 등장한 거예요. 

  

강의 처음으로 돌아가 보면, 서기관은 지금 누구하고 대화한다? 오직 주님하고 대화하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지금 서기관은 요구하지를 않아요. 우리는 매일같이 요구하고 있는 것이 왜 그렇게 많은지. 지금 관심사가 엉뚱한데 가있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자꾸 달라고 하는 거예요. 얼마를 바치면 이거 주시겠습니까? 하는 거예요. 얼마나 헌신하고 얼마나 기도하고 얼마나 성경 보면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겠습니까? 이래 되는 거예요. 관심사가 뭐냐 하면 자기가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서기관은 뭡니까? 지금 똑바로 예수님을 보고 대화하고 있는 거예요. 서기관은 누구한테 꽂혔어요? 주님한테 꽂힌 거예요. 자기 자신은 그야말로 막달라 마리아처럼 모든 것을 다 주님한테 깨버리는 겁니다. 나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거예요. 나는 내 인생이 어떻게 되어도. 주님 쳐다보기를 이렇게 보는데 나는 어떻게 되든 관계없죠. 이게 바로 이웃 사랑이고 이게 바로 주님 사랑 아닙니까?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그 사람과 그 사람의 존재만 느껴지는 게 사랑이잖아요. 둘이 부부십니까? 둘이 부부죠. 처음에 결혼할 때 누구만 봤어요? 상대만 봤잖아요. 상대만. 자기 옆의 상대만 봤죠. 그런데 결혼식 하면서 주례사 바라보고, 미국 같은데 보면, “자 반지 교환하세요.” 하면 “싫어요.” 결혼식 꼴이 좋겠다. “서로 사랑하십니까?” “아니요.” 아마 그런 결혼식은 없을 겁니다. 그런 결혼이라면 할 필요가 없죠. 

  

결혼식 때 남자도 울고 여자도 울고, 이렇게 우는 이유는 어떻게 나 같은 자에게 하나님께서 저런, 물론 하나님을 거론하지 않지만, 이렇게 귀한 분이 나 같은 자에게 같이 살자고 한 것만도 감격스러워 우는 거예요. 너무 철이 없어서 그렇겠지만. 하여튼 감격스럽죠. 아직까지는 상대를 모르고 일방적으로 본인이 해석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남자 같으면 저런 여자를 준 존재, 그게 아까 제 3의 요소 존재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감사합니다, 라고 하는 거죠. 3초는 더 갈 거예요. 아마 3일 갈 거예요. 신혼여행 갔다가 오면 생각이 바뀔 수가 있으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은 철저하게 나라는 존재가 의식되지 않는 거예요. 그러면 나라는 것이 의식되지 않으면 내 안에 호랑이, 호랑이도 아니에요. 호랭이 같은 줄무늬가 내 안에 있어야 돼요. 제 3의 요소가 내 안에서 잉태되어가지고 꿈틀거리고 있어야 된다 이 말이죠. 제 3의 요소가. 그리고 제 3의 요소를 내가 다루거나 관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에요. 반대가 되었어요. 제 3의 요소가 나를 인도하고 다루고 관리하고 조절해야 돼요. 

  

잘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고 아예 우리를 없애버린다니까요. 나라는 존재를. 심지어 내가 죽는 것도 나한테는 시시한 일이 돼버리는 거예요. 시시한 일. 내가 죽는 것도. 내가 죽는 것도 시시하고 중요하지 않은데 남이 죽는 것은 뭐가 중요하겠어요. 가까운 사람이 죽었다고 애걸복걸하고 통곡하는 것은 지금 누굴 사랑했다는 겁니까? 

  

그 사람에게 정 주었던 그 정이 다 날아가는 거예요. 잃어버린 거예요. 투자하고 공들였던 것이 날아갈 때, 내 것이 빼앗겨서 그래서 통곡하는 겁니다. 내 것이 빼앗겨서. 정 주고 마음 주고 사랑도 줬지만 지금은 뭐가 되고? 남이 되어 떠나갔느냐? 요새 같으면 데이트 폭력이죠. 정주고 마음 주고 사랑도 주고 다 줬어요. 다 줬는데 누가 등신이 됐어요? 혼자 등신된 거예요. 혼자. 

  

주의 뜻은 뭡니까? “사람 잘 만났네. 왜? 그 사람이 안 떠나면 니가 애초부터 등신이라는 것을 모를 뻔 했잖아.” 처음부터 우리는 점수 줄 이유가 없어요. 점수주거나 채점의 대상도 안 돼요. 그런데 우리는 평생에 나한테 매일같이 점검합니다. 측정합니다. 제가 어느 설교해서 그런 이야기를 했죠. 오랜 만에 아멘소리 들었던 대목이에요. 여자는 날마다 남자를 테스트한다고. 

  

여자는 뭐냐 하면요, 여자란 먼저 이야기를 안 해요. 남자가 하는 것이 내 마음 속에 둔 것하고 일치가 되는 것인지 늘 점검해요. 여자가 뭐하라고 하면 남자가 해주면 되는데, “니가 알아서 해봐라. 니 아직도 내 마음 모르나?” 딱 전제한다고요. 뭐 하나 해주면 “내가 언제 그거 해달라고 했나?”라고 이런 식으로 나와요. 남자는 환장합니다. 해주고 싶어도 확 들이밀고 싶어요. 

  

왜냐하면 여자는 저 남자가 진짜 하나님이 보낸 남자라면,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진짜 내 남자라면, 운명적으로 내 남자라면 내가 무슨 생각을 갖고 있고 뭘 원하는지를 다 알아서 맞출 것이다. 그럴 때 나는 저 남자에게 모든 것을 다 바칠 가치 있는 남자라고 여자 쪽에서 자꾸 측정을 해요. 그렇지 않으면 안심을 못하니까. 먼저 들이대다가는 남자가 이용해먹을 생각을 하니까 끔찍하거든요. 

  

그래서 하나님이 개입하면 맞출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남자는 그걸 맞춘다고 삐질삐질 땀을 다 흘리고 있어요. “이거야?” “아니야.” “그럼 이거야?” “아니야.” 중국집에 가면, “뭘 시킬까?” “니 나 모르나?” “여기 짬뽕 둘요!” “내가 언제 짬뽕 먹겠다고 했냐? 당신이 그렇게 평소에 나를 모른다는 거야. 내가 언제 짬뽕 좋아한 것 봤어?” “그럼 짜장면 둘요!” “그래, 생각하는 꼬라지 좀 봐라. 니한테는 짬뽕하고 짜장면밖엔 없지?” 

  

먹기 전에 벌써 밥맛이 다 떨어져버려요. 먹기 전에. 외식하러 나가면서 싸우고 외식하면서도 싸우고 외식하고 들어오면서도 싸울 참이에요. “그럼 뭐? 뭐?” “지금 묻는 것 좀 봐라. 우리끼리 산 세월이 얼만데 묻는 것 좀 봐.” “그럼 여기 탕수육요!” “돈이 얼만데, 자기 돈 아니라고!” 남자는 또 생각합니다. 사천원 내외에서 탕수육은 빠지고, “아, 군만두요!” “또 지가 먹고 싶은 것만 시키지.” “그럼 어쩌라고?!” “몰라! 하여튼 간에 평소에 생각하는 꼬라지하고는..” 이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그래, 니가 내 생각했나? 그래 좋겠다. 옛날 첫사랑 동창생 생각하고..” 갑자기 다 튀어나온다고요. 

  

지금 시작이 뭐였습니까? 메뉴 고르다가 옛날 남자의 첫사랑까지 다 나오고, 지나간 이야기를 다 끄집어낸다고요. 시비를 걸러 왔는지, 외식을 하러 왔는지 분간이 안 돼요. 여자의 마음은 뭐냐 하면 당신 안에 내가 들어있는가를 묻는 거예요. 테스트가. 근데 여자는 남자들한테 그 테스트를 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천국가면 시집도 아니 가고 장가도 아니 가요. 이 땅에서는 사실상 부부라는 것이 망상이고 거짓이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부부되게 한 겁니다. 

  

사랑의 대상이 아니에요. 망상인데 무슨 사랑의 대상이 되겠습니까? 오직 뭐만 봅니까? 주님만 바라보게 되면, 주께서 남자역할, 여자역할 하라고 같이 붙게 한 거예요. 둘이 싸우든 찢든 말든 간에. 그게 바로 두 번째 강의해서 해야 될 사회라는 겁니다. 사회가 어디서 나왔는가? 이 법에서 망상을 도용해서 사회가 나온 겁니다. 이 망상의 주체는 뭐냐, 인간의 몸입니다. 이 몸과 예수님의 몸, 하나는 지옥이고 하나는 천국입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이미아 (IP:122.♡.170.138)18-08-26 22:27 
광주강의20180824b 마가복음12장 28-34절(자기포기)-이 근호 목사 

  

유일하신 분이라는 것을 언급을 했는데, 하나님이 한분이라는 말은 그 법안에 하나님의 진면목, 하나님의 본 모습이 다 담겨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법안에.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소개를 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유일하신 하나님이다. 그러면 유일하신 하나님이라는 말은 뜻이 여러 개로 퍼진다는 말이에요? 아니면 한 곳으로 모인다는 말입니까? 한곳으로 모이죠. 

  

그러니까 모이는 여기에 최종적인 묻는 것이 뭐냐 하면,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입니까? 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모든 계명이 어디에 다 쏠립니까? 라는 뜻이거든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유일하심에 다 쏠리는 거예요. 그 유일하심은 숫자가 1이죠. 2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물론 3을 용납하지 않죠. 

  

그렇다면 유일하신 하나님께서 법을 줬다는 말은, 이 법이 퍼져있는 이 땅, 그 당시 이스라엘 땅이죠. 택한 백성. 그 땅에 곳곳에서 뭐가 나와야 하느냐 하면 오직 하나님의 유일하심이 파릇파릇하게 돋아져 나와야 되고, 생겨져 나와야 되고, 삯의 열매를 맺어야 되겠죠. 하나님의 유일하심이. 

  

그것을 저는 뭐라고 보느냐 하면 바로 통합이라고 보는 겁니다. 통합. 모든 일들이 통합이 돼요. 어디에 통합이 됩니까? 유일하신 하나님에게 통합이 되는 겁니다. 통합이 되려면, 통합이 1이잖아요. 결국 하나잖아요. 하나가 되면, 그러면 1은 뭘 배척하느냐 하면 2와 3을, 이것을 전부다 배척해야 되겠죠. 

  

그렇다면 서기관이 이해한 것이나 예수님이 이해한 것은 결국 뭐냐 하면 유일하신 하나님에게 최종적으로 귀결이 된다면, 그 다음에 이웃사랑이든지 하나님 사랑이든지에서 무엇이 삭제되느냐 하면은, 그 법을 행사했다는 것, 이걸 지켰다는 내가 계속해서 생생하게 살아있으면 안 되겠죠. 주님이 하신 일로 인하여, 그래야 통합이 되니까, 주님이 주신 그 마음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고, 주시는 마음가지고 이웃사랑이 되어야 된다 이 말이죠. 

  

그러한 논리를 누가 수용하느냐 하면은, 예수님께서 그걸 하시고 서기관과의 대화가운데서 그런 취지로 이야기를 하신 거예요. 그래서 33절에 보면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제 하나님만 보입니다. 쉽게 가겠습니다. 그냥 하나님만 보이는 거예요. 

  

그럼 뭐가 안 보이느냐 하면은,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내 몸을 바치는 것과, 내 몸이 꼼지락해서 어떤 제물을 바치는 것 사이에서 어느 것이 더 낫다는 말입니까? 아예 내 몸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 더 낫다는 거예요. 그럼 제물을 바치는 것은 뭘 의미하느냐 하며 나를 제거하는 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제물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살아있는 채로는 못 바치거든요. 

  

그럼 여기서 뭐가 끼어들겠어요? 번제물과 제물의 특징이 뭐냐 하면, 다 태우는 것이잖아요. 죽음이잖아요. 누구의 죽음이 무엇의 죽음보다 더 낫다는 말입니까? 율법을 지키겠다는 이 몸의 죽음이, 살아있는 내가 제물을 죽여서 죽은 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훨씬 더 낫다는 이야기를 서기관이 하는 거예요. 근데 이 서기관의 이야기를 왜 이렇게 칭찬하느냐 하면, 33절의 이 내용이 곧 누구의 운명이 되느냐 하면, 예수님이 가셔야 될 그 운명을, 스케줄을, 청사진을 미리 서기관을 통해서 비친 것이 돼요. 비춰준 것이 된다고요. 

  

예수님이 자기 몸을 드리는 것과 예수님 말고 그 당시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전체물을 드리는 것과 지금 라이벌 관계가 성립이 된 거예요. 경쟁관계가. 정말 하나님이 원하는 쪽은 어느 쪽인가를 대조하는 관계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결과적이지만. 일단 주님께서는 이 대조하는 자체에 대해서는 굉장히 좋게 보시고 거기에 대해서 점수를 줘요. 

  

잘했다고 칭찬을 주면서, 이게 칭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니 참 훌륭하다. 하늘나라가 가깝다고 칭찬을 하지만,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건 칭찬이 아니고 주님의 남아있는 인생 코스를, 스케줄을 지금 서기관의 입을 통해서, 서기관을 칭찬하면서, 기인하는 그 길이 바로 내가 가고자 하는 그 길이라고 이걸 중첩을 시키는 겁니다. 칭찬을 했다는 말은 중첩을 시키는 거예요. 자기 것으로 인수인계한다는 그 말입니다. 

  

그쪽에 있는 스케줄을 주님의 스케줄로 받아준다 이 말입니다. 그게 마태복음 8장에 나오죠. 백부장이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라고 할 때 이런 믿음이라고 했죠. 이런 믿음. 세상에 이런 믿음은 아브라함의 본 자손보다 낫다고 이야기했잖아요. 본 자손은 천국에서 다 쫓겨나고 이런 사람이 천국가야 된다고, 이래 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결국 믿음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가셨던 그 길과 그리고 예수 믿는 사람이 해야 될 것을 백부장이 미리 예시한 거예요. 시료가 아닙니까? 시료. 부분을 취해서 전체를 보여준다고 했죠. 이번 수련회 때. 

  

그럼 통합되기 위해서는, 2를 용납하지 않고, 1로 되기 위해서는 번제가 되어야 하는데, 지금까지는 우리가 번제 드리는 것이었는데, 이제는 그 시대가 아니고 바로 우리 자신을 번제로 드리는 이것이 우리가 번제물을 드리는 것보다 더 나은, 더 올바른, 더 합당한 하나님이 원하시는 율법의 완성에 부합되는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그 점에 대해서 서기관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서기관의 이런 방식이 바로 내 방식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제자들과 오늘날 우리들에게 말씀해주시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그 다음 과제의 진도를 나가보면 번제라는 것은 여기서 뭘 내포하고 있느냐 하면 죽음을 내포하는 겁니다. 그러면 번제 드리는 내가 죽는 방법은? 번제 드리고 옆에서 불로 태워서 자살을 할까요? 어떻게 할까요? 그 점은 서기관이 모르는 거예요. 서기관이 모르는 겁니다. 왜냐하면 서기관은 예수님이라는 몸은 인간의 아담의 몸이기 때문에, 마지막 아담, 예수님만이 할 수 있는 것을 서기관이 해내지를 못해요. 

  

서기관이 여기까지는 알았지만, 예수님의 몸 앞에서 자신의 몸을 부정해야 될 그런 차례가 된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죽음을 위해서 동원되어야 될, 그러한 역할을 해야 될 자들이 뭘 하겠어요? 그들은 어떤 식으로 예수님을 죽여야 됩니까? 어떤 관점에서, 어떤 사상을 가지고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넣어야 하겠어요? 역시 율법입니다. 

  

율법을 나름대로의 자기들 몸 가지고 지키겠다고 나서는 집단, 그 집단이 예수님의 몸을 죽이는 겁니다. 번제물을 만들죠. 우리는 그걸 알고 있잖아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하나님은 한분뿐이라는 것을 알고 그 말씀을 직접 지키게 되면 그들이 뭘 누락시킨 거예요? 뭘 빠트린 거예요? 그 율법을, 첫째 되는 계명, 둘째 되는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따로 하늘에서 오신 분이 필요하다는 것, 그걸 누락시키죠. 

  

제가 그걸 설명하기 위해서 아까 아브라함이야기를 했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법을 받았고 번제를 드렸지만, 그 아브라함의 머릿속에는 뭐가 없었어요? 하나님이 계시고 나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지, 이삭이라는 제 3의 요소가 필요치 않다고 했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온전히 믿음이라고 증거물이라고 들이대는 그 번제물 안에는, 그 번제물이 아브라함이 평소에 할 수 있는 소나 양을 받는 것이 아니고, 뭘 받아요? 

  

하나님이 주신, 진짜 이상하게 태어난 아이, 태어날 수 없는, 없는데서 새로 생긴 것을 나한테 뭐로 바쳐라? 죽여서 바치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는 없는 것을 나한테 바치라 이 말이거든요. 없는데서. 없는 것을 바쳤는데 그 모습이 무슨 모습이다? 죽음이죠. 그러면 아브라함을 통해서, 아브라함이 생각할 것은 뭐냐, 내 죽음은 받는다? 안 받는다? 안 받고 현재 없는 분의 죽음만 하나님께서 받는다는 논리가 성립이 되는 겁니다. 그런 논리가. 

  

누가 구원받을 거예요? 지금 보통 문제가 아니에요. 없는 건데 뭘 바쳐요? 없는데. 없는데서 있게 하셨어요. 있게 한 것을 죽게 하신, 죽음 속에 니가 참여한다고 한다면 먼저 없는 것이 생겨나야 되잖아요. 없는 것이 생겨나야 되잖아요. 없는 것이 생겨난다면 그걸 우리 힘으로 못하죠. 

  

못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그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요구하는 없는 것 앞에서, 우리는 철저하게 무가치한 것으로 자인해야 돼요. 인정을 해야 돼요. 나는 백날해도 쓸데없다는 것을 인정을 해줘야 한다고요. 그게 복음입니다. 그게 기쁨이 되어야 돼요. 아, 내가 필요 없구나! 이 기쁨 외에 다른 기쁨은 없어야 돼요. 내 것을 원한다든지, 내 것을 주신다든지 하는 이 기쁨은요, 악마가 준 기쁨이에요. 

  

내가 세운 교회가 잘 되고 우리 가정이 잘 되는 것은,
내가 있음에 예상할 수 있는 기쁨은, 이거는 하나님께서 받지도 않아요.

없는 것이 있어야 되고,

어? 새로 생겼네! 하는 것을 기쁨으로 하면 안 돼요.
그 없는 것이 누굴 차내고 누굴 부정하고 누굴 제거한다?
미리 있던, 먼저부터 있던 나를 철저하게 짓밟을 때,

그때 없는 것으로만 감사하고
있는 내가 감사하는 그 시절은 빠이빠이 해야 됩니다.
완전히 빠이빠이 해야 돼요.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고 했습니까? 누가? 이게 주님의 사랑이면, 그렇다면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고 했습니까? 제가 지금 아가서를 준비하고 있는데, 정말 이거는 불가능한 작업이라고 볼 수밖에 없어요. 제가 내린 결론은 ‘사랑은 없다’에요. 없는 사랑이에요. 없는 사랑. 제목은 실패한 사랑이지만, 내용은 사랑은 없어요. 사랑이 없는 이유를 여기서만 특별하게 할까요? 아가서에 여자가 없어요. 아가서에는 여자가 없습니다. 

  

여자는 누가 만드는가, 솔로몬을 다윗언약을 위해서 쓰실 때, 그때만 여자가 나와요. 왜냐하면 이게 창세기 2장에 보면 남자가 먼저 있어요. 남자가 있을 때 여자는 없어요. 없어져야 돼요. 거기까지만. 한 마디로 이 세상은 망상입니다. 망상의 세계에요. 제가 강남강의에서 했잖아요. 시뮬라크르Similacre라고. 이 세상은 가상현실이라고. 가상현실에서 진짜 현실과 유일하게 연결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죽음이, 이 세상에서 가상현실의 죽음이 실제 세계에서도 죽음이 되는 겁니다. 그 연결고리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십자가 외에는 주님의 뜻을 알 길이 없어요. 근데 그 십자가는 뭐냐, 이 땅에서 없었던 분의 죽음이에요. 내가 자살하는 것, 내가 죽은 것도 소용이 없어요. 따라서 우리는 어디를 가야 하느냐 하면은, 우리는 예수님을 없는 분이 죽었다고 이래 하잖아요. 방금 했잖아요. 없는 분이 죽었다고요. 근데 우리가 실제로 알려면 죽었던 분인데 알고 보니까 이 땅에서 우리 같은 목수의 아들이 아니었다, 없었던 분이었다, 이래 되는 거예요. 

  

그래서 순서가 죽었다가 살아나신 것이 복음이에요. 죽었다가 살아나심으로서 그 분의 죽음이 일반적인 죽음과 다른 죽음이라는 것을 성령을 받은 사람은 알죠. 따라서 예수님의 죽음부터 출발해서 그분이 없던 분으로 이렇게 결론이 나려면 그 죽음을 야기 시킨 원인 또는 거기에 동기를 주는 것에 참여했던 자들은 어떤 자들이냐 하면 바로 인간들입니다. 사람들이에요. 사람이 떠밀어서 바로 예수님이 돌아가셨잖아요. 

  

그러면 그 사람들은 자기가 살아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같이 산 사람으로 간주 안 해주고 죽이려고 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이 죽게 된 이유가 뭐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무엇을 인간들이 노렸느냐 하면은, 그렇게 해서 뭐가 되느냐 하면 이게 되는 거예요. 살자! 그렇게 해서 살자! 어떤 식으로 살게 되느냐 하면 법으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하라가 법이잖아요. 법으로 이걸 만들어내면 이게 바로 사회가 돼요. 사회가. 사회가 된다고요. 어떤 공동체, 또는 집단, 조직사회, 살기 위해서 힘을 모아야 되니까요. 

  

그리고 그 사회는 이미 인간들이 법을 통한 사회기 때문에, 또 사회는 뭐가 들어있다? 법이 들어있고, 그 법은 목적이 뭡니까? 죽기 위해서 법을 만들었습니까?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법을 만들었잖아요. 그래서 사회에서는 법이 있고 그 법은 어디로 통합이 됩니까? 우리는 살아남아야 된다는 것으로 통합이 되죠. 우리는 살아남아야 돼! 

  

그렇다면 여러분 한번 물어봅시다. 그러면 사회는 변합니까? 안 변합니까? 1번 변한다. 2번 안 변한다. 사회는 지금까지 변한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목적이 뭡니까? 이 시대에 존재하는 우리의 목적이 뭐예요? 그냥 살아남자가 목적이기 때문에, 그 사회는, 그 성격이라는 것은 절대로 변하지 않아요. 

  

마르크스는 계급을 만들었어요. 무산자(재산이 없는 자)와 가진 자. 프롤레타리아(노동자)와 부르주아(자본가). 계급투쟁을 통해서 갈등이 생기고, 처음의 갈등은 노예와 노예를 가진 자, 그 다음 봉건사회에서는 토지 있는 자와 토지 없는 자, 자본주의에 가면 생산수단(기계)을 가진 자, 생산수단이 없이 노동력만 제공하는 자, 이게 변증법적 유물론이라고 하는데, 그러한 계급의 갈등이 양적으로 누적이 되면, 양의 누적이 질의 변화를 일으켜서 혁명을 일으키고 사회주의를 거쳐서 공산주의가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공산주의의 취지가 뭡니까? 죽자는 거예요? 살자는 거예요? 살자는 거예요. 마르크스는 바보 같아요. 세상은 달라진 적이 없어요. 사는 방식이 다양해졌을 뿐이죠. 사는 방식이. 조선시대는 뭐냐, 왕정시대거든요. 왕정시대에 산다는 것은 결국은 뭐냐 하면 쌍놈은 양반 말 들으면 살고, 양반은 쌍놈의 노동력을 빼내면 살아요. 착취하면 산다고요. 어쨌든 둘 사이가 산다는 것에서 마음이 합했으니까. 그 사회가 행복한 사회에요. 행복한 사회잖아요. 누가 안 건드리면 행복해요. 

  

이순신 장군이 조선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습니까? 왕을 위해서 목숨 바쳤어요? 이순신 장군이. 왕을 위해서 목숨 바친 거예요. 이 바보 등신 같아. 왕이 뭐라고? 하지만 이순신 장군이라는 그 인간의 내부, 호랭이 줄, 호랑이도 아니고 호랭이 줄. 그 줄이 뭐냐 하면 나를 살리는 체계가, 이 사회가 나를 그렇게 만든 겁니다. 사회가 이순신 장군을 그렇게 만든 겁니다. 사회가. 살자는 사회에서 나는 살아있으니까 그걸로 족하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누가 건드렸습니까? 이 왕정시대를 누가 건드렸어요? 미스터 선샤인의 이병헌이가 건드렸어요? 군복입고 총 들고? 이 왕정시대를 누가 건드렸습니까? 일본이 건드렸잖아요. 뭐하라고? 근대화하라고. 그래서 왕정으로 살다가 이제는 근대화로 살겠다는 거예요. 사는데, 옛날 왕정시대보다 더 떼돈 벌면서 살수 있다고 한 사람이 이완용이잖아요. 신났어. 신났어요. 채굴권, 도로권, 철도권, 커미션이 막 들어오는 거예요. 가만히 있어도 돈이 들어오니까 기분 좋은 거예요. 어차피 나라는 기울어질 것이고 돈만 벌면 되잖아요. 

  

여러분 자녀들한테 물어보세요. “이완용 자리인데 엄마 어떡해?” “챙길 것 챙겨놔!” 그리고 귀금속 미국으로 빼돌려서 페이퍼 컴퍼니(서류상회사)해놓고. “그래도 돼?” “이게 다 살자고 하는 짓이야! 후손이 얼마나 너를 존경하겠어. 니도 살아야지!” 똑같아요. 누굴 욕해요. 둘 다 살겠다는데. 욕한 사람 그 자리에 한번 들어가 보세요. 자기도 마찬가지죠. 

  

사는데, 다 같이 사는데 불편할 수가 있어요. 왜냐하면 사는데 뭐가 있다? 법이 있죠. 법이 없어서 무질서하게 되면 다 같이 죽는 수가 있어요. 깡패가 총 들고 칼 들고 오면 죽잖아요. 결국 사는데 보탬이 되기 위해서 법을 만들 때, 이 법이 무슨 법이 되느냐 하면 정의의 법이 되는 겁니다. 롤스의 정의론이 나와요. 정의론. 국가정의론. 

  

롤스의 국가정의론을 한마디로 말하면 이런 거예요. 피자 한판을 세 사람이 나눌 때 순서를 정하는 거예요. 가위바위보해서 순서를 정해놓고 피자를 세 등분으로 나누어야 되잖아요. 나눌 때 제일 마지막에 먹을 사람보고 삼등분으로 나누어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제일 마지막에 먹는 사람이 제일 큰 거 먹으려고 큰 거 하나 나누고 나머지는 작게 나누게 되면, 근데 순서는 제일 먼저 사람이 먹게 되니까, 큰 걸 먹겠죠. 그러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가장 소수자, 가장 권력이 없는 자로 하여금 불편함이 없도록 하는 것, 어떤 조건을 모르는 것, 무지의 베일이라고 해요. 어떤 조건을 따지지 말고 제일 나중 사람에게 불편함이 없도록 하는 것이 사회적 법이라는 거예요. 근데 그 목적은 뭐냐, 살자! 에요. 그 목적은 살자는 겁니다. 

  

그게 정의에요? 최저임금 오르겠다, 없는 사람 쪽을 살려줘야 소비가 늘어나고, 그 소비가 늘어나면 소비 추동력에 의해서 경제가 살아난다. 이게 문재인 정부의 원칙이 아닙니까? 어려운 사람은 물건을 구입할 돈이 없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돈을 주게 되면 경제가 살아난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취직을 못하는데요? 법이 정의의 법이에요. 정의의 법. 그런데 그 정의의 법이 결국 목적은 살자는 것입니다. 

  

근데 그냥 살 것 같으면 나라에서 사유재산을 다 빼앗아 없애버리는 것을 무슨 주의라고 하느냐 하면 사회주의라고 해요. 북한. 생산수단을 국가화 시키는 것을 사회주의라고 합니다. 사회주의 시켜서 배급주의로 하게 되면 살기는 살죠. 그러면 그건 왜 안 됩니까? 그러면 사람들이 배급을 믿고 일을 안 하잖아요. 그래서 생산력이 오르지 않아서 다 같이 거지가 되는 거예요. 공평하게 거지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공평하게 사는데 지장이 돼요. 

  

그래서 여기서 뭐가 등장하느냐 하면 정치라는 것이 등장합니다. 정치. 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율법대로 살아야 된다고 이야기를 해요. 그거 왜 그렇게 합니까? 율법대로 살아야 된다고 왜 그렇게 해요? 그거 자기 죽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살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살기 위해서 하죠. 살기 위해서 하는 그 법 쪽에서 이웃사랑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이웃사랑이 있죠. 그들이 말하는 이웃사랑은 뭡니까? 죽자는 것이 이웃사랑입니까? 살자는 것이 이웃사랑입니까? 살고자 하는 것이 이웃사랑이에요. 

  

근데 이웃사랑을 살기 위해서 도와주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까? 그게 하나님의 뜻이 아닌 거예요. 사람이 살고자 하면 관심사가 어디에 가있습니까? 하나님한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한테 관심이 있어요? 나는 지금 얼마나 잘살고 있는가, 여기에다 초점이 맞춰진다고요. 자기 사는 게 급선무에요. 그러면 하나님이 유일한 게 아니에요. “형님, 같이 삽시다.” 이런다고요. 

  

주님의 복음은 뭐냐, 통합해서 죽이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혼자 자살하지 말고 죽되, 나하고 같이 죽어야 니가 산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로 하여금 뭐만 쳐다보고 죽게 합니까? 그리스도만 보고 죽게 하는 것, 그게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신앙생활입니다. 주님만 계시기에 나는 지금 당장 죽어도 그게 나한테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고전16:22). 

  

“사랑하는 자 있잖아? 없어?” “있어요.” “그럼 너는 먹든지 마시든지 죽든지 살든지 예수님께만 영광 돌리면 되겠네.” “예.” “말하는 폼이 자신감이 없다? 뭐 기분 나쁜 게 있어?” “아니요.” “근데 말하는 것이 뭐 별로 현실감이 뚝 떨어지는 것처럼 하네?” 이런 식으로 우리 안에 성령께서 작용을 해주시는 겁니다. 날마다 지적을 해주시는 거예요. 

  

플라톤이 인간이 다 같이 잘살기 위해서 대안을 제시했어요. 옛날부터 사는데 관심이 없었겠어요. 그래서 귀족의 명예정치⟶문벌의 과도정치⟶자유민주주의정치⟶국가가 말아먹는 종말의 참주정치까지 발전한다고 B.C5세기에 플라톤이 이야기를 했어요. 귀족들이 다른 말로 하면 족장들이, 다른 말로 하면 역사와 전통의 그 토박이들이, 그 씨족들이 각자 흩어져 있다가 외부의 더 강한 국가가 있으니까 단합해서 이겨내야 되겠죠. 

  

씨족사회에서 나아가게 되면 부족연맹이 돼요. 부족연맹이 되면 이게 연방통일론이에요. 연방제에요. 미국처럼. 미국 50개주United States(연방제) U.S.A(United States of America, 미합중국)가 그렇죠. 연방제로 들어가는 겁니다. 씨족사회라는 것은 산과 강 사이에서 니는 니고 나는 따로 논다는 겁니다. 이거는 그 당시에는 국가의 경계도 없어요. 민족주의라는 것은 원래 없고. 민족이라는 의미가 생긴 것은 통일신라이후에 외침에 의해서, 적이 새롭게 만들어준 개념이에요. 민족이라는 게. 

  

그래서 고조선이 민족이냐, 발해가 민족이냐 하는 그것은 의미가 없어요. 적들이 우리를 어떻게 한통속으로 보느냐, 그 한통속으로 볼 때 그게 우리의 아이덴티티identity, 정체성이라니까요. 학교 가서 가족이 언제 가족이냐 하면 다른 애가 내 동생을 패는데 형이 나설 때, 우리는 형제고 가족이 되는 겁니다. 집에 가서 또 싸우겠지만. 반대되는 적들이 없으면 이쪽에서 아이덴티티, 정체성이 성립이 되지를 않아요. 나라는 것은 니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나라는 것이 있는 거예요. 너가 있는데, 그 너를 적으로 보느냐, 같은 적으로 본다면 이건 이미 동질화가 된 겁니다. 한통속이 되죠. 

  

같이 따로 오랜 세월동안에 씨족, 부족, 강 건너 산 넘어 누가 있는지 관심도 없어요. 물론 교류는 있겠지만. 부족연맹을 해요. 이게 우리나라 대표적으로 가야국이에요. 그러다가 신라가 통일하게 되면 드디어 부족국가가 되는 겁니다. 국가. 국가가 되려면 조건이 뭐냐, 경제적인 바탕이 잉여생산물이 많아야 돼요. 그저 하루 빌어먹고 살면 국가가 안 돼요. 왜냐하면 국가는 돈 주고 상비군을 유지해야 되고, 궁궐도 지어야 되고, 거기에 대한 월급 주는 관료들이 있어야 되고, 농사꾼이 농사짓고 남아도는 그것을 가지고 국가를 유지 관리하는, 그것만 전문적으로 하는 일에 봉급이 나오는 그 체제가 되어야 국가가 되거든요. 

  

남아도는 잉여가 되려면 매년 돌아오는 그 곡식이 많아져야 해요. 곡식이 많아지려면 농업혁명이 일어나야 줘야 돼요. 농업혁명이 일어나려면, 그냥 씨 뿌리고 놔두면 농업혁명이 안 일어나요. 밭을 길게 갈아야 돼요. 길게 갈려면 에너지기 더 많은, 다시 말해서 동이나 구리로 만든 것은 안 파진다고요. 다시 말해서 철기로 만든 쟁기가 있어야 되고 그 쟁기를 끄는 소가 동원이 되어야 해요. 깊이 갈아서 오래도록 묵혀서 생산량이 나올 수 있는 토지. 그래서 블레셋은 철기문화고, 만날 양만 쳤던 이스라엘은 유목이에요. 이동하는 민족이고, 그 당시 가나안 토박이들은 농사를 짓기 때문에 철기문화가 발달이 된 거예요. 

  

따라서 지금도 이스라엘 유적지에 가면 여신하고 여호와하고 나란히 해놨어요. 세겜이라는 곳에 가면. 아데미 신하고 바알 부인(아세라)신과 같이 해놨어요. 농경시대니까. 모든 농경기술을 누구한테 배워야 돼요? 양치는 사람들한테는 안 나온다고요. 토박이한테 배워야 되잖아요. 토박이한테 배울 때 씨를 그냥 뿌리지 말고 신한테 빌고서 뿌려라 해서, 그 문화가 그대로 다 유입이 되는 거예요. 뭣 때문에? 살기 위해서. 

  

여호와의 법은 사는 것이 아니에요. 존재하지 않는 죽음에 동참하는 겁니다. 그게 출애굽 때는 뭡니까? 어린양의 피를 바르면 그것이 그들이 사는 거예요. 어린양의 피를 바르게 되면 누가 끼어들어요? 여호와가 함께 동행 하는 조건이 만족이 돼요. 하나님의 약속, 제사에 참여한 사람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조건에 충족이 되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하늘나라에서는 영생이라고 합니다. 영생. 

  

그런데 인간들의 이 땅의 세계는 뭡니까? 내가 사는 방식대로 사는 것을 산다고 하죠. 자연적으로 이 율법을 가지고 뭘 만든다? 나라 만들기를 한 겁니다. 그러다보니까 명예정치라는 것은 뭐냐 하면 그 오랜 전통에 의해서 원로들이 정치하는 것. 이래하다가 여기서 문벌의 과도정치라는 것은 쿠데타를 일으켰던 군인들이나 이런 사람들, 안 그러면 역사 중에 더 역사 위에 있는 사람들. 과도라고 하는 것은 한 사람이 통치하는 것이 아니고 유력한 인사들 여럿이 통치를 하는 것을 과도정치라고 해요. 

  

그렇게 하다가 자유민주주의정치라고 하는 것은 엉망이라는 거예요. 인간들이 뭘 안다고 저희들끼리 표 한 표씩 던져가지고 정치를 하느냐 이 말이죠. 무식하면 무식한 대로 유식하면 유식한대로 전부다 표가 한 표라. 이게 개판되는 거예요. 정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여러분, 이주일이 국회의원이 된 거 아시죠? 이주일이가. 지가 법에 대해서 뭘 압니까? 

  

근데 국회의원이 됐어요. 두 번 다시 안 한다고 했지만. 물론 담배피우다가 죽긴 죽었지만. 이거는 뭐 배운 것도 없이 나라 책임도 못질 인간이 전부 다 한 표를 던져요. 이게 나라를 말아먹는다는 거예요. 플라톤이 말하기를. 그리고 참여정치라는 것은 이거는 진짜 쿠데타에요. 소위 똑똑한 사람들 놔두고 무식한 사람들을 선동해서 똑똑한 사람들을 뒤엎고 지가 대장질을 하는 것을 참주정치, 참여정치라고 합니다. 전부다 다 나라 말아먹는 겁니다. 

  

그러면 나라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철인정치. 진짜 깨끗하고 훌륭한 사람, 박근혜 전 대통령 같은 분. 진짜 훌륭하고 철학을 하고 비전이 있는 사람. 이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일체 사유재산이 없고 장가도 안 가야 돼요. 결혼도 안 해야 돼요. 오직 어디에 몸을 바친다? 국가에만 몸 바치는. 미쳤습니까? 그런 사람만이 아무 생각 없이 나라발전만 헌신적으로 생각하는 철인, 철학가가 최고니까, 철인이 하는 국가가 오늘날 국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죽인 유대인들의 정치는 어떤 정치입니까? 그들은 뭘 모방합니까? 제사장을 모방하죠. 그래서 다윗계통이나 사독계통에서 나온 제사장. 그것을 사두개인이라고 하죠. 사두개인이 뭘 하느냐 하면 성전을 관리합니다. 성전이 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곧 우리와 함께 있다는 뜻이고, 성전이 있음으로 우리가, 나라가 산다는 거예요. 결국 계속해서 산다는 쪽에다가 무게를 두고, 관심을 거기다가 두는 겁니다. 

  

그런데 산다는 게, 인간에게 산다는 것은 목숨만 연명하는 것을 산다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뭘 추구하느냐 하면 안락을 추구해요. 안락을. 안락하면 편안한 거죠. 안락을 위해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안락의 합리성. 모든 법적인 것이 합리적이 되어야 하는데, 뭐냐 하면 모든 사람이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합리적으로 하는 겁니다. 

  

근데 여기는 기본적으로 되어 있는 게 무슨 정치냐 하면 보호에요. 보호. 보호해놓고 보호된 그들이 편안하게 잘 살 수 있는 합리성을 법으로 집어넣는 것이 그 정치의 원칙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보는 겁니다. 자, 이렇게 할 때 제가 첫 번째 시간에 제일 끝에 이야기를 했죠. 이것이 어느 몸에서 나온 거예요? 자, 법이 있죠. 그러면 법만 있으면 돼요? 안 돼요? 

  

어떤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자, 이번 계획은 내가 다 했으니까, 계획대로 글을 누가 쓸래? 요새 그 말이 약간 유행이 된답니다. “계획은 내가 할게. 글은 누가 쓸래?” 개그우먼 박미선이 그런 이야기를 했던 모양이에요. 순풍산부인과에서. 무슨 일은 다 떠벌려놓고 실제로는 다른 사람을 다 시키는 거예요. 거기에 대한 새로운 버전들이 막 나왔어요. “경청은 내가 할게, 말은 누가 할래?”이라든가. 이걸 교회버전으로 하면 “천국은 내가 갈게. 지옥은 누가 갈래?” 이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법이 있다면 그 법 자체가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법이 세워졌으면 법은 누가 지켜야 돼요? 법은 누구 몸이 들어가야 돼요? 자기 몸이 들어가야 되겠죠. 그러니까 이 법이라고 하는 것은 이래 따지고 보면, 결국 법은 누가 세우고?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이 세우고. 그 법을 실효성 있게 받들어서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재화나 물건을 제공하는 그 노동은 누가 하고? 법 말고 다른 사람이 다 하는 거예요. 다른 사람이. 

  

하나님 사랑하고 이걸 어떻게 한다? 실제로 실효성 있게 하는 것은 성전세를 내라는 겁니다. 이웃사랑 하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십일조 내라. 목사는 설교만 하고 돈은 교인이 내고. 그럴 때 관리하는 에너지를 계속해서 유입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선교는 목사인 내가 할게. 선교비는 니가 내라. 

  

그래서 이 사회는 법에서 퍼져나가는 세상입니다. 법으로부터 퍼져나가는데, 그 퍼져나갈 때 법을 제한하는 사람이 있고 법을 지키는 사람이 있겠죠. 법을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를 감시하는 사람이 있겠죠. 그러면 지키는 사람, 안 지키는 사람, 감시하는 사람, 전부다 누구의 몸입니까? 아담의 몸이죠. 인간의 몸이죠. 이미 인간의 몸이잖아요. 없는 몸이 아니라 이 말이죠. 

  

그러니까 예수님이 딱 등장하니까 내 있는 몸이나 예수님의 있는 몸이나 같은 류(類)의 있는 몸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너희들은 악마의 자녀라고, 악마의 아이디어를 갖고 있다고 욕하고 성전을 완전히 엎어버렸죠. 예수님은 자기 몸을 뭐로 봤습니까? 자기 몸을 성전으로 봤잖아요. 

  

자기 몸이 성전이라는 말은, 그 모든 이야기가 그 당시에는 이 법이 성전이 있음에서 나왔거든요. 성전의 있음에서. 성전이 있고, 법이 있고, 그 성전 때문에 하나님과 동행하니까 하나님이 살려준다. 이런 논리입니다. 그러면 성전을 없애버린다는 것은, 모든 법은 성전으로 통합, 응축이 되는 것이 아니고 그걸 부정해버리면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죠. 

  

근데 기도하는 집이 어디에 있느냐 이 말이죠. 그 기도하는 집을 누구로 봤습니까? 예수님 자신의 집으로 본 거예요. 제자들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죠. 요한복음 2장 19절부터 보니까 제자들이 예수님이 죽고 사흘 만에 부활하고 난 뒤에, 예수님이 그때 하신 말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일으키리라는 이 말씀. 사흘 만에 짓겠다고 한 것은 벽돌로 지은 성전이 아니고 예수님 자신의 몸이라는 것을 그때 알았다는 거예요. 

  

자, 이게 굉장히 어려운 말이에요. 왜 어려운 말이냐 하면 어떻게 인간의 몸이 성전 개념과 이퀄(=)시킬 수 있는 아이디어가, 도대체 어디에 근거해서 나오느냐 이 말입니다. 어느 근거에서만 나오느냐 하면 내 몸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다는 아이디어에서만 그게 나와요. 이 몸을. 

  

내가 헌금한 것, 내가 예배당 벽돌 쌓는 것, 내가 기도한 것, 내가 찬송한 것, 이 모든 것을 주께서 일체 안 받는다고 인정할 때만, 어디에 꽂히겠어요? 내 몸을 가지고도 구원을 못 받고 천국 못 간다면, 그래도 갈 수 있다면 일단 이 몸은 아니에요. 자식 잘 키우고 멀리서 와서 성경공부 하고, 하여튼 이 몸은 아니에요. 무조건 이 몸은 아니에요. 

  

그러면 이 몸이 아닌데 이 몸에 대해서 미련을 가져야 돼요? 말아야 돼요? 그리고 자기 실수에 대해서 너무 심하게 자책을 해야 돼요? 말아야 돼요? 그런 것 한다는 자체가 너무 수상해요. 깨져야 될 몸입니다. 우리가 깨져야 될 몸인데, 이 깨는 방법은 주께서 알아서 깨겠죠. 뭐 골프치고 깨지고 놀러가서 깨지고 수시로 엎어져서 깨지고 뭐 이렇게 하겠지만, 하여튼 이 몸은 아니에요. 

  

그럼 거울 앞에 이 몸 말고 없죠. 그러니까 없는 몸이라니까요. 그래서 성도는 미친 사람이에요. 있는 몸을 놔두고 없는 몸을 믿으니까. 이 바보! 이거 뭐 계룡산에서 계시 받은 것인지, 왜 멀쩡한 몸을 가지고 좀 굴리지, 멀쩡한 몸을 가지고 활용해서 헌금하고 이웃돌보고 겨울에 주사도 놓고. 멀쩡한 몸을 가지고 봉사하고 얼마나 좋아요. 

  

그러나 내 몸은 무조건 아니에요. 내 몸은. 그러면 “내 몸을 안 믿으면 누구 몸을 믿느냐?” “니는 말해줘도 몰라.” “니가 예수님 이야기를 하는구나?” “으응~ 아니. 니가 생각하는 그 예수는 내가 생각하는 그 예수하고 달라.” 이렇게 약을 올릴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내 몸은 일단 아니라는 것은, 이거는 내가 노력해서 생긴 현상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노력해서는.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윤리도덕깡패가 있다고요. 윤리도덕깡패가 악마인데, 그 악마가 왜 설칩니까? 우리가 뭘 붙들고 있기 때문에 달려드는 거예요? 내 몸을 내가 지켜야 내가 구원받는다고, 자꾸 살아보려고, 여기서 살고 천국에 가서 또 살고, 이 몸이 살아보려고 애쓰다보니까 누구의 밥이 된 거예요? 악마의 노리개-감이 된 거예요. 

  

남자들이 축구하고 야구할 때 여자관객들이 가서 앉아있다면, 남자선수들이 있고 여자관객들이 있는데, 여자들이 이야기하는 가운데에 이해 안 되고 약간 살짝 기분 나쁜 것이 있어요. 뭐냐 하면 그 야구선수들 나이들이 전부다 많잖아요. 근데 20대 여자 관객들이 “저 이대호 선수 참 귀엽지? 그지?”라고 합니다. 귀엽다는 것은 노리개-감이라는 뉘앙스가 살짝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금 악마가 우리를 볼 때 노리개-감으로 보는 거예요. 근데 노리개-감으로 포함이 안 된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냐 하면 나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어디서 내 노리개-감이 날 쫓아낸다고 까부느냐(행19:15), 이렇게 된 거잖아요. 악마가 알아요. 조금만 건드려도 화내고 울부짖고 아프고, 이런 사람을 알아요. 악마가 갖고 놀 수 있는 사람인지를 알아요. 그러나 주님에 꽂힌 사람은 내가 나를 갖고 노는 장난감이 아니거든요. 굴려도 주님이 알아서 지금껏 살게 하신 거예요. 주님이 지금껏. 

  

법이라고 하는 것은 법을 내린 예수님 당사자가 그 법을 지키는 방식까지 다 완료를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몸은 이 땅에 없는 몸인데 나타나셔서 십자가에 다 이룬 몸이에요. 따라서 하늘나라에 속한다는 말은 어디를 주시한다는 말입니까? 내가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것을, 할 수 없는 그것을 다 이루셔서 의인되게 하신 그 몸만 자랑하고 적용하고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의 완성입니다. 이게 하늘나라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 속에서 뭐가 흘러나오겠어요? 아까 이야기했죠. 법이 퍼져서 뭐가 파생된다고 했습니까? 사회가 나오죠. 바로 그게 교회가 아닙니까? 이게 성도의 세계잖아요. 예수님의 법의 완성이 끼리끼리, 통하는 사람끼리 모이는 것이 교회잖아요. 주님의 법의 완성. 십자가에 담긴 그 내용이 오늘날 우리를 새롭게 인식시키는 겁니다. 

  

여기에 무슨 철인정치가 있고, 참주정치, 자유민주주의 정치가 있습니까? 없어요. 그러면 우리는 무슨 정치를 합니까? 마지막으로 이 말씀을 하고 마치겠습니다. 사람이 갇혀있으면 답답해요. 병 같은 게 있으면 마개로 막아놓으면 답답하잖아요. 사람의 정신병, 우울병, 모든 병이 뭔가, 병목(병 윗부분의 잘록한 부분)을 쳐버려야 돼요. 병목 치면 끊어지겠죠. 날아가 버리면 시원한 바람이 통하겠죠. 갇혀있던 거품은 폭발해버리고. 

  

이게 뭐냐, 머리되시는 분이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시죠. 머리되시는 분과 연관이 끊어져서 하게 되면 이건 완전히 쓰레기가 되는 겁니다. 이건 죽은 자에요. 예수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면 그건 갇혀있는 사람이고 속에서 부글부글 하는 사람이에요. 그냥 속에서 부글부글하는 거예요. 이 몸을 어떻게 하면 천당을 보내겠다고 갖은 노력, 교회 가서 굿을 다 해요. 교회 가서. 찬양집회 했다가 흔들다가 자기가 할 수 있는 굿이란 굿은 다해요. 포기하면 되잖아요. ‘다 포기하지 마!’라는 그런 노래가 있죠. 닭고기아줌마가 하는 노래(닭 포기하지 마!). 

  

인생 포기하면 되잖아요. 왜 그걸 쥐고 있습니까? 아무 쓸모 짝에도 소용없는 그것을 왜 쥐고 있습니까? 장로님 보고 이야기한 거 아닙니다. 이거 어디에 써먹을 데가 있다고, 쓸모없이 늙어서 죽으면 죽는 건데. 지금 죽으라고 있는 건데 왜 이걸 살리려고 해요? 내 죽는 것도 주께서는 시시하게 봅니다. 아무 의미 없어요. 안락한 삶? 기대하지 마세요. 안락한 삶. 보호받는 것? 이미 죽었는데 뭘 또 보호받아요. 

  

우리 자신을 보호하려고 하지 말고, 내가 사랑하는 주님이 일을 벌이시는 결과물이 바로 오늘날 우리 자신입니다. 오늘 모습이 어떻든 간에 귀한 모습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이 악으로 완전히 관영되어 있습니다. 해결책도 없고, 부글부글 거리고, 틈만 나면 화내고 분노 터트리고 누구 탓으로 돌리고, 살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갇혀있는 병처럼, 악의 거품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세상, 주여! 우리 자신을 그 안에서 포기하고 끄집어내주신 주님과 통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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