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180727a 마가복음12장 26-27절(예수님의 과제)-이 근호 목사
마가복음 12장 26-27절.
26절,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을 의논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다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27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 하였도다 하시니라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이 아주 열심히 성경말씀 거기에 자기의 모든 것을 겁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으려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아야 하기 때문에 거기에 사활을 겁니다. 그게 전부죠. 그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세상적으로 돈도 별로 없고 권세가 없다고 할지라도 굴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관여하는 그러한 일을 하기 때문에 자부심을 갖는 겁니다.
이들이 어떤 자부심을 갖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자기들은 모르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르는 것이 왜 없어야 되느냐, 만약에 모르는 것이 남아있으면 남들에게 하나님의 뜻이 이렇다고 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되잖아요. 전문가라는 것이 뭡니까? 모르는 것이 없어야 되죠. 전문가. 전문가는 돈 문제 또 권세문제도 있지만, 자기 전문분야에서 무식하다고 하는 순간, 자기존재의 의미자체가 날아가 버려요. 그래서 하나의 전문가로서 행세를 하려면 거의 모르는 것이 없어야 됩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어떤 라이벌처럼 등장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거든요. 예수님께서 성경말씀을 놓고 언급을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언급을 하실 때에,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이 성경말씀을 어느 정도 안다는 것은 익히 아시죠. 그러면 이 성경말씀 자체가 어떤 한 부분에 대한 것을 가지고 전체를 점령하듯이, 꿰뚫는다고 이야기를 하죠. 하나의 내용을 가지고 전체를 설명을 했을 때, 다른 대목을 가지고 그 설명체제의 모순점을 지적해버리면 처음에 시작한 것이, 이렇게 중심점으로 삼았던 것이 결론적으로 문제 있음으로 드러나죠. 설명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 말이죠.
예를 들면, 오늘 본문 말고도 사도바울 편지에서 십자가도 있고, 부활도 있고, 승천도 있고, 성령의 열매도 있고, 사도바울 편지에 이런 것이 많이 나오잖아요. 근데 사도바울이 이런 것을 많이 언급을 하면서도 의도적으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것 외에는 알지 않기로 원했다고 언급해버립니다.
그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하나의 인간이 여러 가지를 다 가지게 되면, 이런 게 좀 어려운데, 여러 주제를 다 가져오게 되면 왜 이 주제와 이 주제는 통합을 왜 안 시켜줬느냐에 대해서 해명을 해줘야 해요. 주제가 하나, 둘, 셋, 넷, 다섯 개쯤 된다면, 이 다섯 개를 나눌 때 왜 일과 이는 구태여 나눠야 하고, 왜 이와 삼은 왜 구태여 나눠져야 하고, 왜 삼과 사는 나눠져야 하느냐 이 말입니다.
보통 시험 칠 때 제일 중요한 문제가 국영수죠. 국어, 영어, 수학이 아닙니까? 그 다음에 사회, 과학도 있지만. 왜 국어하고 영어는 나눠야 하느냐 이 말입니다. 같은 언어인데. 그리고 영어하고 수학은 여러분 상식에는 떨어진다고 생각하잖아요. 근데 떨어진 게 아니에요. 프레게라든지 러셀 학자에 의하면, 언어는 논리학 이름으로 수학과 통합이 됩니다. 진리를 어떻게 언어라고 표현하느냐는 겁니다. 수학은 언어거든요. 물리학 같은 것도 조금 수학식으로 나오죠. 수학식으로 나온다는 것은 물리학자들에게는 자기 언어에요.
그러면 자기 언어라면 그 수학은 뭐로 승부를 보느냐 하면, 논리로 승부를 봅니다. 자기 논리로 승부를 걸거든요. 그러면 국어, 영어가 논리가 있어요? 없어요? 논리 없는 언어가 왜 있어요? 논리 없는. 문법이라는 것이 왜 있는데요? 문법을 뒤죽박죽으로 바꿔버리면 이거는 말이 안 되잖아요. 그런데 구태여 사람들이 국영수를 나누죠. 이걸 통합하게 되면 깊은 학문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나 통합을 하죠.
주님께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하나로 통합했다고 생각을 해보세요. 이게 상상이 되는가? 상상이 안 되죠. 지금 우리가 보는 본문이 죽은 자의 살아남이죠. 그럼 죽은 자가 살아났다는 것은 우리가 상식으로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 어떤 분이 죽었는데 살아났구나.’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뭐냐 하면 그것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설명할 수 있는 핵심적인 개념이라고 보는 겁니다. “죽은 자에서 살아남의 그 의미가 포함이 안 된 채로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해석하지 말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죽은 자에서 살아남의 그 의미의 내용이 포함이 되지 않는, 그것에 기초하지 않는 식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그것은 무조건 틀려먹었다는 겁니다. 그것은 틀려먹은 겁니다. 그것은 어떤 경우라도 다 해당이 되는 겁니다.
집에 고양이가 있는데, 어제 고양이가 집을 나갔다. 그게 무슨 의미냐? “무슨 의미라고 할 것도 없이 집에 같이 있다가 고양이가 지금 안 보인다. 뭐 그 의미지.” 그러면 주님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렇게 이야기해요. “그런데 왜 슬퍼하느냐?”라는 겁니다. 인간은 이성적으로 고양이가 있었는데 집을 나갔다면, 이게 남의 고양이 같으면요, 아무 감정 없이 이야기를 해요. 근데 우리 고양이가 오년동안 살았는데 집을 나갔다고 할 때에, 그걸 다른 사람에게, 다른 형제에게 이야기를 할 때에,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이 정도로 슬프다는 것을 니가 좀 동참해 달라, 알아달라는 그런 뜻이거든요.
이게 오스틴의 ‘언어행위론’이라고 하는 거예요. 언어행위론. 언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행위를 유발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돌이 무겁다. 돌이 무겁지 가벼울 리가 있나? 이 말을, 그냥 돌이 무겁다고 하는 것과 앉아서 돌이 무겁다고 하는 것과 공사장에서 돌이 무겁다고 하는 것은 돌에 깔렸다는 뜻이에요. 빨리 치워달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말을 할 때 의도 없이 말을 할리가 없다는 겁니다. 이게 언어행위론 입니다.
그런 해석이 굉장히 중요한데, 하나님의 말씀도 그렇게 인간의 말도 그렇게 모든 인간들이 말을 할 때에는 무심코 말을 하지 않아요. 무심코. 심지어 꿈속에서도 무심코 무슨 행동을 하지 않거든요. 행동한 것은 말로 옮기고 말한 것은 어떤 행동을 지칭하고. 그리고 어떤 액션을 벌인 것은, 그거는 언제든지 말로 표현이 가능한 액션이기를 원하고 있고.
만약에 이게 매직인데, 매직을 이렇게 툭 던졌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만약에 모르는 사람 같으면 가만히 있을 거예요. 근데 만약에 지하철 탔을 때 앉아서 매직을 툭 던졌다. 옆에 친구가 있는데 내가 이렇게 한다면, “니 심심해? 뭐 손이 근질근질해?”라고 말을 한다니까요. 말을. 나는 그냥 아무 말 하지 않고 행동을 했을 뿐인데, 저쪽에서 말을 한다 이 말이죠.
아침에 아내가 설거지를 하는데, 평소하고는 달리 설거지하는데 툭탁툭탁 막 소리가 나는 거예요. 그러면 남편의 분위기가 싸늘해지죠. “뭐? 나한테 뭐 불만 있어?” 그럼 아내가 대번에 하는 말이 “내가 뭐 했는데?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막 던지면서 설거지를 하고. 이렇게 싸늘하게 나온다고요. “아니, 말을 해!” “뭐? 아무렇지도 않다는데 뭐?”라고 하면서 던지고.
행동이 언어에요. 행동이 언어. 세상은 뭐로 만들어졌어요. 말씀으로 만들어졌죠. 그 말씀이 행위로 나타나는 겁니다. 빛이 있어라 해서 빛이 있었잖아요. 하나님 말씀 자체가 행위를 나타낸다 이 말이죠. 그걸 누가 닮았냐 하면 인간이 닮았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제일 먼저 가르쳐주는 것이 뭐냐 하면, 지나가는 동물들을 보고 이름을 지으라는 이야기를 맨 먼저 한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을 닮았으니까. 하나님 형상대로 만드셨기 때문에.
두 사람이 통합이 되는 것은 언어를 통해서만 통합이 돼요. 두 사람이 통합되는 것은. 그래서 입 다문 것도 언어에요. 행동의 통합이니까. 그래서 행위가 언어고 언어가 행위라는 것이 오스틴의 언어행위론 입니다. 그러면 그 많은 행위를 하면서, 인간들은 행위를 하잖아요. 인간이 행동하는데 인간의 문제점이 뭐냐 하면,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말을 해도 중심점이 없어요. 중심점이. 하나에서부터 열이 있다면 거기서 하나의 일관성이, 뭔가 나와야 하는데 그 하나를 못 찾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가 하는 어떤 말이나 행위에서 중심점이 없는데, 근데 여기에다가 모세율법을 주니까, 자기의 중심점이 없는 그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도 똑같이 해석을 한다고 해석을 해대니, 이 해석이 하나로 통합이 안 되는 거예요. 왜? 본인 자체가 우왕좌왕이니까. 본인 자체도 우왕좌왕이니까 이쪽에서 성경해석도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는 거예요.
제가 아까 이야기를 했잖아요. 사도바울이 그 많은 말을 해도 사도바울의 핵심은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은 것 외에는 다른 것은 일체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고전2:2), 그리고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내가 자랑할 것은 오직 십자가만 자랑한다. 십자가만. 자기가 뭐 부활한 것도 있고, 죽음도 있고, 시민권도 있고, 나그네를 섬겨라, 뭐 어떻게 온갖 서로 사랑하라, 그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그 많은 이야기가 내가 그 중심이 안 된 채로는 그거는 해석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사도바울의 이야기입니다.
성경말씀에 보면 편지를 아무리 줘도 그 편지는 같은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니 구심점 있나? 니 중심 있어? 니 중심 있어? 없어? 중심도 모르는 게 하나님의 말씀이 무슨 소용이 있어” 이런 뜻이라 이 말이죠. 참 이게 어렵죠. 사도바울의 편지가 신약성경의 뒷부분의 대부분을 차지하죠. 그럼 사도바울의 편지 이전에 앞에 두고 있는 것이 뭐냐 하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마가복음도 있고 마태누가요한복음도 있잖아요.
그러면 그 마태마가누가요한복음이 내용이 뭡니까? 내용이 뭐냐 하면 예수님과 누구의 만남, 그 당시의 말씀을 다루는 사람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주요내용이 예수님과 그 당시 사람들과의 만남입니다. 만남일 때, 이 만남은 뭐냐 예수님이 말씀하는 율법해석과, 그들이 해석과의 만남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진공상태가 아니에요. 나름 율법해석을 하고 있었거든요.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말이죠. 율법을 통해서. 구약을 통해서.
그들의 해석이 있을 거 아닙니까? 이 해석과 예수님의 해석이 같았어요? 달랐어요? 틀렸죠. 이 말은 뭐냐 하면 그들의 일관성과 예수님의 일관성이 다르다는 이야기에요. 그럼 일관성이 합치되지 못하고 일치되지 못한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이용은 할 수 있어요.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그런 사람들이죠. 예수님을 이용해서 천국가려고 할 수는 있지만, 하지만 가장 바뀌어야 할 부분, 핵심적인 중심부분, 가장 가운데 들어있는 것이 바뀌지 않는 한, 결국은 제자들도 예수님을 내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날 교인들에게도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50년, 60년, 교회 열심히 다녔는데, 정작 사도바울이 말한 핵심이야기를 하니까, 화내잖아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하는 거예요. 이용했다고 하는 말은 그들의 일관성 속에, 중심 속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그들은 믿음소망사랑 다 이야기하죠. 하지만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나가 들어있죠. 자기 자신이. 나가 들어 있어요.
왜 그걸 장담할 수가 있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자기를 부인하라고 했습니다. 부인을 하려면 부인할 내용이 있어야 하잖아요. 그게 뭐냐 하면, 누구를 부인한다? 나를 부인하는 거예요. 나를 부인하는 게 있어야 한다는 말은, 중앙에 뭐가 들어있다는 말이에요? 나가 들어있다는 말입니다. 나를 위해서 성경해석을 뽑아온 거예요. 성경해석 그렇게 해서 나를 위해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했던 사람들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입니다.
그런데 이 해석에 모든 인간들이 다 동조를 한 거죠. 다 합세를 한 겁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을 지도자로 여기죠. 예수님은 인간들 속에 나가 들어있으니까 자기를 부인하라고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4장에 광야에서, 이야기를 할 때는 인간 속에 나가 들어있어서, 인간은 나가 들어있다는 것으로부터 시작을 하지만, 사실은 그 나로부터 시작을 하도록 부추긴 보이지 않는 어떤 세력이 있었던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마태복음 4장에 보면 광야에서 예수님은 사람하고 만나지를 않았습니다. 사람하고 만나서 일을 해야 될 분이 사람하고 만나지를 않았어요. 이것은 사도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 어디로 갑니까? 아라비아로 가죠. 사람을 안 만나요. 아라비아에서 누굴 만났겠어요? 아라비아에 혼잔데 누굴 만났겠어요? 주님 만난 거예요. 아무도 없으니까. 아무도.
사도바울이 알게 된 것은 뭐냐 하면, 이 사람들(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은 이미 믿음이라는 내용이 있어요. 믿을만해서 믿은 게 있어요. 믿을만한 게 뭐냐, 내가 잘 된다는 것이 유일하게 믿을만한 거예요. 그런데 성령 받은 사도바울은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뭐냐 하면 믿을만한 게 없어요. 믿음이란 근거가 없는 거예요. 근거가 없는 것을 믿어야 돼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믿음의 근거가 돼버리면 그거는 믿음이 아니죠.
왜냐하면 발화의 주체하고 발화행위의 주체가 달라요. 이런 이야기는 아마도 어렵다고 하니까, 다시 쉬운 예를 들게요. 아주 쉬운 예입니다. 어떤 사람이 저한테 당신은 목사로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선서해놓고, 목사 돼서 지금은 부정합니까? 라고 재판정에서 나한테 이야기를 할 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안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성경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다고 이야기를 했죠.
그러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우선입니까? 성경이 우선입니까? 성경이 우선이죠. 그러면 나는 웨스터민스터보다 성경이 우선이라고 이야기를 한 것에 대해서, 성경이 우선이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당신들은 지금 웨스트민스터를 안 지켰다고 나를 면직을 시키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성경을 믿는다 하는 것하고 웨스트민스터에서 성경이 제일 우선된다고 하는 것하고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이건데요. 발화의 주체는, 예수님의 주체는 주님이시다. 이게 발화의 주체다. 발화라는 것은 말하는 것의 주체에요. 발화가 어려우니까 말하기로 쉽게 합시다.
말하기(발화)의 주된 내용이 예수님이 주시다 하는 것이고, 말하기(발화)행위의 주체는, 예수님이 주님이시다를 내가 말하고 내가 믿는다는 거예요. 이게 발화행위의 주체에요. 다르죠. 성경이 최고다 하고, 성경이 최고다 하는 그 웨스트민스터를 내가 믿는다 하고는 다릅니다. 발화의 주체는 예수님이지만, 한쪽의 관심사는 어디에 있느냐 하면, 바로 예수님에게 대들었던 바리새인들은 발화행위의 주체로서 자기 자신을 내세우는 겁니다.
근데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믿고 난 뒤에 뭐냐 하면 내가 사는 게 아니에요. 그럼 내가 사는 게 아니라면 사도바울은 뭐냐 하면 내가 살지 않는다가 되는 겁니다. 그럼 내가 살지 않는 것이 모든 해석의 중심이에요. 내가 살지 않는다. 그럼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죽었다가 성경의 핵심이 되는 겁니다. 혼자 죽으면 안 되겠죠. 예수님과 같이 죽어야 되죠. 그래서 모든 죽음은, 예수님이 나하고 함께 죽음이, 모든 하나님의 말씀의 중심점, 구심점이어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사실을 다른 사람이 들으면 이 사도바울이 그렇고 그런 믿음 하나 가진 것처럼 그렇게 보이는 거예요. 아까 포도 드셨잖아요? 포도 드셨는데, 포도재배를 한 농부가 하는 말이, “나는 포도 외에는 의미가 없어. 포도가 나의 전부야. 나는 포도 없이는 못살아.”라고 했다면, 이럴 때는 지금 자기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지금 포도에 미쳤고, 포도 때문에 귀촌했고, 포도농사에 30년을 보냈고, 뭐든지 지금 뭘 증거 하느냐 하면 포도를 자랑한다고 증거하고 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옆에 있다가 너는 지금 포도농사 해서 니가 살라고 하지? 이렇게 이야기를 해버리면 지금 포도에 빠져있는 그 사람의 본심과 안 맞죠. 서로 안 맞는 거예요. 이쪽은 포도를 자랑하고 있는데, 니는 포도농사해서 그저 밥이나 먹고 살자고 한다 해서, 그냥 남들처럼 자기 사는데 급급한 것처럼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근데 이 사람은 분명히 이야기하는 거예요. “나는 포도 없이는 못 살아.”라고 하는 거예요. “나는 포도 없이는 차라리 죽는 게 더 좋아.” 이렇게 할 정도로.
흔히 드라마에도 그런 게 있지 않습니까? “나 당신 없으면 죽을 거야.” 뭐 이런 이야기. “나 당신 때문에 내가 존재해.” 이런 거. 남자가 한 여자한테 푹 빠져서 모든 일이 그 여자한테 다 쏠리죠. 그리고 여자한테 일이 벌어지면 김비서가 왜 이럴까? 이러고. 김비서가 왜 이러지? 왜 그럴까? 또 친구한테 가서 김비서가 왜 그럴까? 하고 물어요. tvn에 이런 드라마가 있어요. 재벌 2세가 그 비서한테 빠져가지고 하는 내용입니다. 어제로 끝났어요.
발화행위의 주체하고 발화주체가 이게 다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이런 말이 있죠. 달을 가리키니까 달은 안 보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본다고 하는 그런 취지의 내용이에요. 다시 말해서 인간이 발화행위의 주체에서 발화주체로 인간이 스스로 바뀔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바뀔 수가 없어요.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자기위주에요. 인간은 자기위주다 이 말입니다.
그럼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인간 자체가 악마에 의해서 인간은 자기위주로 살게 되어 있어요. 이런 마음을 준 것은 악마에 의해서 이미 우리가, 너가 뭐처럼 되리라? 신처럼 되리라 했잖아요. 이미 나가 나오잖아요. 나는 뭐다? 나의 서술은 신이다. 왜? 선악과 따먹었으니까. 이 문장, 서술자체가 시작점, 구심점입니다. 나는 뭘 해도 갇혀있다. 나는 뭘 해도 의롭다. 나는 정당하다. 조폭이 되도 정당해요. 나쁜 짓해도 사회가 그렇게 만들었다. 어쩔 수 없어요.
남들이 아무리 아까워도 소용이 없어요. 나는 내가 하겠다고 하는 것은 할 수 없어요. 오천만원 먹었다. 그래서 나는 우사스러워서 자살했다. 뭐 어쩌라고? 아이고 아까워라 당신이 죽은 것은 노동자의 죽음이고, 뭐 난리도 아니에요. 삼만 오천 명의 조문객들이. 나라 혼자서 다 한 것처럼. 그 사람 없으면 나라 안 된다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죠.
처음부터 다시 해봅시다. 도대체 무엇이 진정 슬픈 겁니까? 이야기하고 나니까 참 재밌네. 지금 사람들의 모든 발화행위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무엇이 진정 슬픕니까?” 이것과 같은 말이, “무엇이 진정 두렵습니까?” 이게 인간의 행위를 낳는 거예요. 인간이 행동을 하는 겁니다. 인간이 행동을.
휴가 돼서 놀러간다. 놀러 갈 때 그냥 놀러 가는 것이 아니에요. 아시아나 탔는데 아시아나 기내식이 없다고 해서 이게 문제가 되고. 라오스에 놀러갔는데, 댐이 터졌는데 댐 밑에서 도시락을 먹고 있을 수도 있는 문제고. 또 식구 세 명이 갔는데 그 중 한명이 배 아프다고 해서 다시 집에 갈란다고 할 수도 있는 문제고.
모든 행동을 할 때는 그 바닥이 곱게 행동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항상 슬퍼할 준비가 되어 있고 두려워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그것은 이미 뭘 설정을 했느냐 하면, 나는 완벽해! 나는 완전해! 아니 완전해야 돼! 왜? 나니까! 나는 무조건 흠 없어야 되고, 나는 무조건 행복해야 되고, 나는 무조건 성공해야 돼! 이유는? 나니까! 나는 무조건 천국에 가야돼! 나는 천국 가고 싶어 하니까!
이런 것들이 뭐냐 악마로부터 두려움과 슬픔의 표적이 되는 겁니다. 이건 아무리 해도 스타트가 나에요. 그러니까 예수의 십자가를 믿고 복음을 믿어도 누가 믿어요? 발화행위 주체가 누구냐 하면 나라니까요. 나. 그런데 사도바울이 말한 것은 믿음의 주체가 누구냐 하면 내가 아니고, 예수님이 믿음의 주체죠. 예수님이 성령을 선물로 줘서 믿게 됐잖아요. 그럼 누가 빠져야 돼요? 나는 믿어야 돼요? 안 믿어야 돼요? 장로님! 답변해보세요. 답변이 간단한데요. 믿어야 돼요? 안 믿어야 돼요? 빨리 진도 좀 나갑시다.
주님이 믿음의 주체라면 나는 믿음의 주체가 아니죠. 그럼 내가 믿어야 돼요? 안 믿어야 돼요? 안 믿어야 되잖아요. 그게 믿음이 아닙니까? 장로님이 맨날 저는 안 믿긴다고 하잖아요. 안 믿기는 게 믿음이에요. 왜 자꾸 발화행위의 주체가 되려고 합니까? 빵꾸나야지. 여기 혹시 양말 빵꾸난 사람 없습니까? 빵꾸나야 돼요. 내가 안 믿어야 돼요. 내가 믿어버리면 사단 나는 거예요. 더운데 지옥이나 가라. 믿어서 지옥 가는 거예요. 믿어서. 얼마나 안 믿었으면 믿으려고 할까요?
그걸 어렵게 이야기하면, 이왕 어렵게 한 거 어렵게 합시다. 외재적인 것이 내재적인 것으로 삽입이 될 때만, 그것이 바로 우리의 기초, 기반이 되는 겁니다. 나 말고 외부에서 날아온 것이 내 내부에 있을 때, 비로소 그 내부가 신실하고, 튼실하고, 탄탄한 내부가 되는 겁니다. 그 외부가 없으면 또 내가 내 내부를 더 내부적인 나로 내가 관리해야 해요. 이거는 슬픔과 공포, 항상 공포스럽고 슬퍼해야 할 대기상태로 있는 겁니다. 5분대기조처럼. 깜짝깜짝 놀랄 준비를 해야 돼요. 집에 청심환, 물로 된 것이라든지 준비해놓고 먹을 생각을 해야 돼요.
김비서가 왜 그럴까, 라는 마지막에 보면 결혼식을 하는데, 그 남자가 평소에 남자는 대단하다, 완벽하다, 나는 수천 명 앞에서도 연설할 수 있다고 이렇게 큰소리를 쳐놓고는, 막상 자기 결혼식에서는 자기 부인 김비서한테 떨지 말라고 해놓고는 자기는 막 떨고 있어요. 그러니까 김비서가 청심환 하나 드릴까요? 지금 청심환이 어디에 있어요? 비서기 때문에 항상 가방에 준비를 해놓고 있으니까. 청심환 먹고 겨우 안정이 된 거예요. 진정이 된 거예요. 항상 벌벌 떨어요. 꼭 우리교회 기도순서 돌아오면 벌벌 떠는 것처럼. 이야기 들어보면 다른 교회에서 30분 동안 기도했던 사람들이랍니다. 다른 교회에서는 기도하면 찬스가 왔다고 해서 10분, 20분은 그냥 넘어갔던 사람들이에요. 근데 우리교회에 와가지고는 떨고 있어요.
그게 정말 다행스러운 거예요. 왜냐하면 나는 믿을 수 없다는 것을, 나는 기도할 수 없다는 것을 이제야 아는 겁니다. 이제야. 우리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상태가 될 때, 그래도 그렇게 되는 그것이 주께서 원했던 목표점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백성, 성도를 만들 때 개뿔도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다고 할 때 최고의 작품입니다. 최고의 작품이에요.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어린애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고 했습니다.
우리 외손녀이야기가 안 나올 수가 없죠. 외손녀가 유치원을 다니게 되었어요. 집에 있을 때는 엄마가 다 해주니까, 음~! 음~! 이러면 다 해줬어요. 그런데 유치원을 딱 가니까, 유일하게 한국애에요. 독일 애들 중에서. 거기서 밥을 주고 할 때는 줄을 서거든요. 자기보다 나이가 다 많아요. 가만히 눈치 보니까 이거는 자기가 알아서 하거든요. 그때부터 방언이 터져요. 한국말 열 개를 해가지고, 자기가 독일 애들한테 가자! 가자! 인솔해서 줄서고 했대요. 이제는 가만히 있어서 채워주는 것이 아니고 요구를 해야 되고, 발화행위를 해야 되는 거예요. 발화행위를 하지 아니하면, 행위라는 이름의 언어를 발하지 아니하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사회성을 배우기 시작한 겁니다.
다시 말해서 말을 하지 아니하면 얻을 게 없다는 거예요. 말을 한다는 것은 바로 해석을 의미하고 그 해석은 나를 위한 해석일 뿐입니다. 모든 해석은. 행동 자체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했느냐 하면, 성경의 모든 해석을 모순 없이 완벽하게 율법을 해석했다고 자부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어디를 대번에 건드리느냐 하면, 본문 26절을 한번 봅시다. “너희가 모세의 책 중에서” 어느 대목을 이야기했습니까? “가시떨기에 관한 글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라고 되어 있죠.
자, 주님께서 정말 어려운 숙제를 그들에게 준 거예요. 가시덤불의 이야기를 하면서 부활을 논하라는 문제를 출제하신 거예요. 출애굽기 3장에 있는 가시덤불에서 하나님과 모세의 대화에서 부활을 끄집어내라는 질문을 한 겁니다.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니죠. 이거 맞춘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서울대학생들도 못 풉니다. 왜 못 푸느냐 하면 인간은 주어진 재료가지고 재료를 도출하는 거예요. 이미 있음 가지고 있음에서 있음을 통합시킨 내용을 끄집어내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은 반대로 이야기를 해요. 있음을 가지고 없음을 논리적으로 도출해내라는 질문을 던진 겁니다. 있음에서 없음을 끄집어내려면, 이 문제를 풀려면 이 있음을 뭐로 전환시켜야 하느냐 하면, 이 있음을 없음의 일종이라고 여길 사람만 여기서 통합된 없음이 나와요. 이 통합된 없음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있는 것도 하나의 없음에서 전부 다 파생된 것이라는 논리를 끄집어낼 수 있는 근거를 미리 제시해야 된다는 겁니다.
사실은 사람들의 일상 가운데서 그런 것들이 많이 있어요. 아주 독재자적인 그런 성품을 갖고 있는 회사 사장이 직원들 앞에 놓고, “왜 꿀을 내 앞에 안 갖다가 놔!”라고 하면서 갑자기 꿀 이야기를 한다 이 말이죠. 꿀을 가져오라고 사전에 지시했다면, 있음이죠. 그러면 그 비서가 꿀을 왜 안 갖다가 놓겠습니까? 그런데 아무 일 없다가 갑자기 꿀을 내 앞에 가져다 놓으라고 했거든요. 그러면 비서가 “그런 지시가 없었는데요?”라고 하죠. 그럼 사장이 “내가 지금 무릎이 아픈 게 안 보여?” 이런다고요. 무릎 아프면 약 발라야지 꿀을 왜 발라요.
그러나 지금 이 사장은 일방적이에요. 나이가 칠십이 넘어가지고. 옛날 민간요법을 젊은 사람들은 아무도 몰라요. 아무도 모르는 것을 가지고 알도록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그냥 억지를 부리는 거죠. 여러분들이 아시죠? 느부갓네살이 다니엘서에서 억지를 부린 거 아시죠. 꿈을 이야기하고 해석을 하라고 하면 구라라도, 어떤 구라라도 해석을 할 수가 있는데, 꿈을 지가 꿨잖아요. 내 꿈 찾아내라는 거예요. 꿈이 물건입니까? 지 꿈인데. 그걸 어디서 찾는데요? 아니 자기가 꾼 꿈을 쟤들이 왜 찾아요?
그래서 밑에 있는 신하들이 하도 너무해서 반발을 하죠. “임금님!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그건 하나님 말고는 임금님이 꾼 꿈을 알아낼 재간은 없습니다.”라고 하니까, 그 임금이, 요새 말로 하면 사장이 하는 말이 “니가 그러면 월급을 왜 받아먹느냐?”라고 하는 겁니다. 월급을 왜 받아먹느냐? 니들이 하는 짓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뜻을 알아서 나한테 전달하는 짓을 했잖아. 그런데 같은 하나님이 한 일에 너희들이 난색을 표하면 그동안 나한테 사기를 치고 월급 받아먹은 것밖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장이 화가 나서 다 죽여 버렸잖아요. 그 말은 뭐냐, 우리는 그동안 하나님 이름 빙자해서 돈 빼먹었습니다, 라는 말은 대신 한 거예요. 그렇다면 너희들 같은 존재들은 필요가 없으니까, 내 꾼 꿈 해석을 하지 않으면 다 죽여 버린다고 했어요.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그걸 아무렇게나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꿈 당사자가 무슨 꿈인지 모르지만 이야기를 하면 새롭게 기억이 난다 이 말이죠. “그래, 맞아 그 꿈이야!” 이렇게 할 공산이 많거든요. 그게 뭐냐, 내재성이 될 경우에만 이 세상에 어떤 변화에도 구애받지 않는 연관성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변화에서도 구애받지 않는다는 말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어떤 경우에도 슬퍼해야 할 필요성이 없고, 어떤 경우가 와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외재성이니까.
내가 나 잘되기 위해서 계획을 잡은 것이 아니고, 나를 없는 요량하고 쳐들어온 그 무엇이거든요. 외재성은 나를 무시하고 들어왔어요. 외재성이 와서 내 속에 들어왔다는 말은 이제는 내가 바깥에 나가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그 분이 먼저 와서 나를 만들어버린 거예요. 뭐로? 없는데서 새로 만들어버린 거예요.
없는데서 만들게 되면 내가 여기 있다고 여기고 주님을 찾아가는 그런 모든 방식은 그 앞에서 사정없이 작살이 나야 됩니다. 부정되어야 해요. 그게 자기부인이에요. “나는 부정하다.” 이게 아니고, 그동안 내가 시도한 발화의 행위의 주체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주신 것과 이게 같이 동석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됩니다.
믿음이 있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해요? 없애야 돼요. 소망이 있는 것은 없애야 돼요. 사랑한 것도 그건 사랑이 아니고 미움이었어요. 그건 사랑이 아니었어요. 모든 것은 추방되어야 합니다. 뭐로? 배설물로. 다 빠져나가야 하죠. 빠져나가게 되면 처음에는 “아이고, 오! 아까워라. 내 게 빠져나갔네.” 이러는데, 그게 내 게 아니고 주님께서 들어오기 위한 자연적인, 결과적인 현상이죠. 들어왔기에 빠져나간 거예요. 들어왔기에. 주님 것이 들어왔기에 내 것이 배설물로, 쓸데없는 것으로 빠져나간 겁니다. 자식이 내 자식이었는데 내 자식이 아니고, 주님의 자식이었습니다. 내 아내, 남편, 모든 것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신 문제의 물음을 그 당시 사람들이 풀 수가 없죠.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인정하고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인정하지 않고. 뭐 인정하나 인정 안 하나 관계없이 예수님의 이 문제를 풀 수가 없습니다. 26절을 다시 봅시다. 풀 수 없다고 하니까, 풀 수 없는 것에 서서히 도전의식이 생기죠.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을 의논할진대” 이래 되어 있어요. 죽은 자가 살아 난 것을 의논할진대, 죽은 자가 살아났다는 것을 의논할 때에 두 가지의 견해가 있었습니다.
첫째 견해가 뭐냐 하면은, 1. 죽은 자가 살아난다. 둘째는 2. 죽은 자는 살아나지 않는다. 1번은 바리새인 견해고, 2번은 사두개인 생각이죠. 얼른 보면 서로 반대가 되어야 될 입장이죠. 반대가 되겠죠. 그러면 주님은 어느 쪽입니까? 주님은 1번도 아니고 2번도 아니에요. 둘 다가 아니에요. 주님은 지금 사람들이 아무리 해도 모르는 이야기를 해요. 주님의 이야기에 결론은 나와 있어요. 너는 모른다. 이게 결론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너는 믿지 않는다. 너는 사랑할 수 없다. 너는 소망을 가질 수 없다. 너는 모른다. 이게 결론입니다.
너는 모른다는 그런 결론을 이미 가지고 주님은 우리한테 추궁을 해요. 니가 너를 모르는데 니가 만약에 너를 안다면 너가 모른다는 결론을 내봐라 이 말이죠. 이게 말이 안 되는 겁니다. 미리 정답을 이야기할게요. 뭐냐 하면 거기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라고 할 때에 그 하나님이 누구냐 하는 겁니다. 예수님 본인이에요. 인간들이 예수님한테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죽은 자가 어떻게 삽니까? 라고 이야기를 했다 이 말이죠.
누구한테? 바리새인은 사두개인한테 이야기한 것도 아니고 사두개인은 바리새인한테 이야기한 것도 아니고 예수님한테 이야기를 한 거예요. 예수님한테. “어떻게 죽은 자가 삽니까?”(사두개인 입장) 또는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그 정도는 내가 인정합니다.”(바리새인 입장)라고, 예수님보고 둘 다가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근데 결론은 뭡니까? 니가 1번을 하든, 2번을 하든 니는 부활에 대해서 모른다는 뜻이에요.
부활에 대해서 모른다는 뜻은 뭐냐 하면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을 봤다고 해서 부활한 것이 아닙니다. 뭘 알아야 하느냐 하면, 모든 죽음이나 부활이나 뭐든지 항상 출발점은 외재성, 예수님부터 출발을 해야 해요. 예수님을 알게 되면 이건 한꺼번에 다 알게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되면. 나 부활을 믿는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을 앎으로서 영생을 얻는 겁니다. 요한복음 20장에 나를 알고 아버지를 알면 구원받아요. 부활을 믿는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알아야 돼요.
그럼 예수님을 안다고 제대로 알게 되면 무엇에 대해서 모르는 게 됩니까? 제가 아까 질문을 했잖아요. 예수님을 알게 되면 무엇에 대해서 모른다? 나에 대해서, 내가 누군지는 모르는 거예요. 몰라야 돼요. 내가 나에 대해서. 그동안 우리 인생이 너무 힘들고 빡빡한 것은 내가 나에 대해서 안다고 우기기 때문에 힘든 거예요. 자식에 대해서 힘든 것은 내가 자식에 대해서 알기 때문에 내가 미리 힘든 겁니다.
노회찬 죽었다고 왜 슬퍼합니까? 노회찬한테 어떤 기대를 갖고 미련을 갖고 희망을 가졌기 때문에 슬퍼한 거예요. 슬퍼하는 데는 이유가 있어요. 기대를 했어요. 뭔가 기대를 했기 때문에 슬퍼한 거예요. 무서워하는 것도 뭔가 은근히 기대를 했기 때문에 무서워하는 겁니다. 내 집, 내 가정, 내가 가진 재산, 이 모든 게 다 없어지면 어떡해? 뭔가 유지해야 된다는 기대가 있다 이 말이죠. 기대가 있으니까 그게 계속 누수가 되고, 깨지고 없어 질까봐 겁나는 겁니다.
근데 주님의 방식은 뭐냐, “니가 없어도 돼! 이 바보야! 원래, 니 것도 아니고 남의 건데 니 것이라고 우겼던 니 자체가 실수한 거야.” 니는 있다가도 없어지는 안개라고 했거든요. 두 자로 이야기하면 후딱 이거든요. 후딱. 살긴 살았는데 후딱 지나간 거예요. 장로님, 지금껏 사시면서 후딱 갔죠? 이야기하게 되면 산 생활보다 오래 지났다고 하지만, 따지고 보면 후딱 간 거예요. 왜? 뒤돌아보면 내가 살아온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지금 현재 내 몸밖에 없어요. 내 몸밖에 없어요.
그래서 유명한 철학자 들뢰즈가 시간을 언급하는데, 시간에 세 가지 종류가 있어요. 1. 현재의 경험과 시간이 맞지를 않는다. 내가 경험한 것과 흘러간 시간과 안 맞는 것. 2. 과거라고 하는 것은 기억 속에 남아있는 지속된 순수기억. 인간은 현재는 모르고 항상 과거 것을 가지고 현재라고 우겨요. 과거의 표상이 현재에요. 현재는 몰라요. 모르는데 자꾸 현재라고 우겨요. 내가 현재라고 우기는 시간관념과 경험은 과거경험이거든요. 이 둘 사이가 삐거덕거리는 거예요.
슬프다, 즐겁다, 기쁘다, 좋다, 아프다, 행복하다, 전부 다 어디서 나왔습니까? 경험한 것 때문에 생긴 거예요. 경험한 것과 지금의 내가 안 맞아서 내가 슬프고 더 오버되면 기쁘고 그런 겁니다. 그래서 현재가 되게 부산스러워요. 되게 바빠요. 과거는 아무리해도 뚝뚝 떨어져있는데, 그 단편적인 경험의 과거를 돌아보면 전부 다 한데로 이어져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돼버렸어요. 아무 상관도 없이 일어난 일도 돌아보게 되면 전부 다 하나로 편집되어 있어요. 하나의 스토리, 이야기로. 아무 상관도 없는데.
내가 5일 전에 오랜만에 초등학교 동창생을 만났거든, 왜 만났는데? 왜 만난 것은 모르겠고. 어떻게 만났는지는 모르겠고 하여튼 만나서 이야기를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마치 내가 원해서 필히 동창생을 만난 것처럼 그렇게 해석이 돼버려요. 나로 인하여 흩어져 있는 과거가 하나로 이어진다니까요. 자기 자신의 자아가 한 덩어리잖아요. 한 덩어리 된 자아를 자기 잘남과 정당성을 이야기할 때는 과거가 하나로 이어져야 됩니다.
예를 들면 광산김씨, 광산김씨 모르죠? 인터넷 치면 나와요. 노끈 장사 광산김씨, 한국의 표준적인 허세와 허풍을 갖고 있는 광산김씨. 부인은 자체적으로 이뻐. 아들 둘은 하나는 성인이니까 안 들어오는 백수, 하나는 가게 준비하는 백수, 하여튼 둘 다 백수에요. 이 광산김씨가 꼭 과거이야기를 하는 것 보면 세상 돌아가는 것이 전부 다 자기가 이만큼 되기 위해서 필요했던 이야기만 해요. 하나의 이야기가 자기 존재를 위해서 하는 거예요. 자기 아내를 꼬실 때, 라면 먹으러 갈까? 해서 꼬셨다고 하고. 그럼 부인한테 왜 그런 남자하고 결혼 했는가? 라고 물으면, 나 아니면 죽는다고 해서 남자 하나 살리는 셈 치고 내가 결혼해줬다고 하는 겁니다. 남자 하나 살리는 셈 치고. 진짜 그런 게 어디에 있어요? 근데 과거는 이렇게 하나로 이어집니다.
세 번째, 3. 미래인데, 미래는 뭐냐 하면 순수과거와 그리고 순수 과정을 표상하는 그 표상과의 차이가 벌어질 때에 이게 미래다. 다시 말해서 순수과거는 항상 뭘 유발하느냐, 망상을 유발합니다. 헛된 망상. 이게 미래에요. 이게 바로 들뢰즈의 세 가지 시간의 종류입니다. 핵심은 뭐냐 하면 인간은 시간을 다룰 수가 없다. 그냥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할 뿐이다. 그래서 들뢰즈는 말하기를 인간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계속 반복되고 반복된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일리가 있죠. 그렇잖아요.
일상을 보세요. 같은 일을 또 하죠. 왜냐하면 안심되는 그 일을 하는 수밖에 없어요. 내가 이미 안심된다고 하니까 그 일을 계속 반복하는 거예요. 장사는 단골장사가 아닙니까? 단골이 끊어지면 그 가게는 문 닫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는 반복이 안 돼요. 그래서 계속 꾸준히 오니까, 가게 문을 닫고 싶어도 못 닫아요. “장사 안 합니까?” 이럴까봐 겁나가지고. 인간은 하던 일을 계속 해요. 그걸 참아내야 한다는 겁니다. 인생의 지루한 반복을 참아내야 한다.
10분 쉽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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