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여름수련회 사도행전강해 제 7강(일체성) - 이 근호 목사
자, 시작해보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한테 직접 설교를 듣는 사람을 생각해볼 때 참 부럽죠. 예수님이 창조주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여기 강단에 서서 설교한다면 하나도 안 빠트리고 야무지게 듣겠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직접 설교하는 것을 듣는다는 것을 굉장히 부러워할 거예요. 하나님이시고 창조자이시니까. “그때 그 사람들 참 좋겠다.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설교를 들었으니까.” 이것은 백퍼센트 출제위원한테 과외수업을 받는 기분이잖아요. 천국을 만드신 분한테 직접 설교를 듣게 되면 굉장히 안심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그 주님을 내쫓았죠. 죽여 버렸습니다.
근데 우리가 사도행전을 보면서 똑같이 생각해요. 사도바울에게, 성령을 받았던 사도바울에게 직접 설교를 들으면 얼마나 좋을까? 저 같은 사람은 빼버리고, 나가라하고, 여기에 사도바울을 세워서 설교를 들을 때, 하나도 놓치지 않고 하나하나가 우리의 장래를 확정시키는 중요한 것이라고 여기고 설교를 들을 것입니다. 주님도 그것을 감안해서 사도행전 17장을 펴게 하십니다. 사도바울이 설교를 한 그대로 여기에 적혀있어요. 아테네에서 스토아학파와 그리고 에피쿠로스학파와 논쟁하면서, 지난 시간 끝부분에서도 했지만, 그들이 사도를 보면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8절에 보면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전함을 인함이러라” 이렇게 되어 있죠.
그들의 요구사항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고, 너희들과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이 이렇게 다르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뭐가 다르냐 하면, 이제부터 사도바울의 설교를 그대로 따라가 봅시다. 사도바울이 이 자리에 섰을 때 뭐라고 했는지, 그걸 제가 대행한다고 생각을 하고 그대로 따라가 보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없는 것이 있어요. 세상 사람들에게 없는 것. 그리고 사도바울에게 있는 것. 세상 사람들에게 없는 것, 그리고 사도바울에게 있는 이것을 매개라고 합시다. 매개. 매개라고 하는 것은 둘 사이를 연결하는 것을 매개라고 하죠.
사도바울은 너희들에게 예수님이라는 매개를 소개하면서, 지금 사도바울의 설교입니다. 설교하면서 매개가 들어오는 그러한 방식으로 세상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재정리, 재정돈을 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도행전 17장 22절부터 나옵니다.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종교성이 많다는 것은 너희들 나름대로의 어떤 매개물이 있는데, 매개체가 있는데, 그것 없애면 안 되겠니? 이런 뜻이에요. 사람들이 종교성으로 ‘아데미’라는 그 신상을 섬긴 것은 사람들이 그 신상과 주고받는 가운데서 얻을 것을 얻어 챙겼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런 매개물을 없애면 안 되겠니? 없다고 여기는 그것이 옳지 않겠니? 라고 하는 거예요. 그럼 이게 뭐냐 하면 거저 누리고 있고 거저 받고 있다고 생각하자. 이 아테네 사람들아! 이 이방사람들아!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설교시간에 설교를 하면서. 거저 누리고 있고 거저 받고 있는데, 만약에 신접이나 이런 것을 하게 되면 우리가 신에게 드림으로써 받아 누린 게 돼버려요. 그러면 신에게 받아 낸 게 거저 누리고 거저 준 게 아니고, 그만큼 신에게 갖다 바친 것이 있기 때문에 얻어 챙겼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런 신을 아예 없애버리면 안 되겠니? 라고 하는 거예요.
그럼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내가 착해서 복 받고 악해서 벌 받는다는 생각을 아예 안 해버리면 어떻겠니? 라고 하는 겁니다. 선악적인 사고방식을 빼고서 이야기를 하자는 거예요. 선악적 사고방식을 빼고. 한 것 없이 그냥 받았다고 여기면 그게 옳지 않겠니? 라고 설명하는 겁니다. 이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25절에 나옵니다.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우리를 뭐로 보느냐 하면, 우리를 결과물로 보자 이 말이죠. 그러면 신은 어디에 있느냐? 그 신을 일단은 알 수 없는 신이라고 봅시다. 알 수 없는 신의 호혜, 또는 호의, 호의라는 뜻은 아시겠죠? 좋은 뜻으로 주는 것. 이걸 성경 마태복음 5장에서는 선인과 악인에게 베푸시는 은혜라고 하는데, 알 수 없는 신의 호의의 결과물이 오늘날 우리가 누리가 있는 이것이라고 생각하면 어떻겠니? 그게 옳지 않겠니? 라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걸 왜 그렇게 생각을 해야 하느냐 하면, 그렇게 생각을 해야 거저누리고 있다는 의식, 그리고 거저 받고 있다는 이 생각이 내가 알고 있는 참된 신이라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지금 이 자리에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설교를 하면서 뭐라고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열심히 바치고 헌금하고 충성하고 이렇게 하나님께서 시키는 대로 말씀 지켜서, 그래서 이만큼 받았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해보자 하는 겁니다. 아무것도 한 것도 없고 별로 착한 일을 한 것도 없는데, 하나님의 호의에 의해서 그냥 누리고 또 받고 풍성하게 얻었다고 그렇게 생각해야 된다는 것이 사도바울의 설교입니다.
상당히 점잖게 시작하죠. 점잖게. 그렇게 생각한 것이 25절입니다.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그럼 신이라는 그것이, 기존에 있는 신은 주고받고 하는 신이라고 이렇게 생각을 하는데, 그것이 아니고 신에게 별명을 붙입시다. ‘주시는 분’ 실감나지 않죠. 그러면 글자를 하나 더 붙입시다. ‘퍼주시는 분’ 아까 우리 강의하기 전에 이상규 집사님이 과자 왔다고 하니까 우르르 쫓아가서 가져왔어요. 그 모습이 어떤 모습이냐 하면 마치 쉬고 있다가 우르르 불가마에 불 쬐러 들어가는 것 하고 똑같아요. 거저주시는 겁니다. 아무 대가없이. 안 착해도 그냥 주는 거예요. 시작을 그렇게 생각하자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창세기 3장 이전에,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이 처음 만들 때의 취지가 이 세상에 아직도 흐르고 있고 반영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의 설교에요. 뭐, 더도 덜도 없어요. 딱 이겁니다. 그럼 제가 이렇게 하면 구원 받습니까? 그것은 택도 없는 소리죠. 이걸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죠. 그럼 그 전에 종교 없이 살자는 겁니다. 종교 없이. 종교라고 하는 것은 주고받는 것이거든요. 종교 없이 살자는 겁니다. 그냥 살자는 거예요. 그럼 그냥 사는 것이 편하겠네? 라고 하는데, 그냥 사는 것이 인간에게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교재를 한번 봅시다. 수련회 시작하고 교재를 처음 봅니다. 2페이지 중간에 ‘대규모 연대성’이라는 큰 제목이 있죠. 국가와 민족이라는 집단적 가치가 개인의 고통과 아픔과 희망에 밀려서 별다른 의미가 없을 때, 그리고 취직하려고 그렇게 스펙 쌓아서 대기업에 취직을 해놓고, 상사가 나를 무시한다, 상사가 나한테 화분을 던진다, 이래서 삐져가지고 취직을 한지 인턴도 안 끝났는데, 보너스도 못 받는 6개월 만에 때려치우고 다른데 취직한다고 이력서 내미는 것. “내가 더러워서 이 회사에 다니나 한번 봐라!” 이런 식으로 하는. 어떤 자기보다 우열적인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 이런 시대에 있어서 회사에 충성하라, 국가에 충성하라, 나라에 충성하라고 하는 그것은 다 빈말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21세기 후반에 있어서 사람들의 모든 경제활동의 취지는 어디에 있느냐 하면 연대성이에요. 쉽게 말해서 협동조합, 연대성, 상부상조, 이런 식으로. 누가 감히 나에게 건방떨며 명령하는가? 내가 못 먹고 사는 것도 아닌데, 명령 따라가면서 회사 더러워서 못 다니겠다는 그런 식으로. 그렇다면 마음 맞는 사람끼리 그냥 연대로 회사를 차리고 하면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해요. 연대성이 도리어 강요되어 있습니다. 학교도 선생님이 간섭해서 못 다니겠다. 그러면 대안학교에 다니면 돼요. 노는 게 수업이다. 뭐 이런 것. 생각만 해도 참 좋죠.
시험 없고, 수업 없고, 니가 알아서 살고, 검정고시 쳐서 그냥 통과하면 되고. 생각만 해도 굉장히 신나죠. 대안학교 안 할 거면 홈스쿨링해서, 미국에서나 세계적으로 하는 그런 것 해가지고 학교에 가지 말라고 하죠. 진화론 배워서 알아들을 것 못돼서 전부 다 왕따 시킨다. “귀여운 내 새끼! 아이고 내 새끼! 학교 가서 힘들지? 내가 키울게. 내가 알아서 가르칠게.” 그렇게 해서 홈스쿨링 하면 되죠. 엄마는 갑자기 할 일이 생기고 애들 항상 감시하게 되는 그런 좋은 점이 있죠. 애들은 또 거기에 길들여지면 그게 또 편하죠. 이불 속 밖으로 나가면 위험하니까.
그런데 이 대규모 연대성이 실속이 없어요. 반드시 누구를 사기 처먹게 되어 있어요. 먼저 시작한 쪽이 나중에 시작한 쪽을 사기 처먹게 되어 있어요.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교재 3페이지 위에서 세 번째 줄에 나옵니다. “근무 환경 조건 속에서 건강한 몸도 마찬가지로 다루어진다. 매일같이 근무시간 기록표에 사인하고, 비개성적 지시와 일련의 지령을 부여받고 살면서도 그 생활로 행복하다고 말하기가 주저된다.” 그래서 말은 연대성이라고 외치지만 실제로는 내 주관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그러한 환경을 세상이 호락호락하게 허락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너무 빨리 달린다. 안정된 생활환경을 붙잡고 있을 수 없다. 눈치껏 같이 바뀌지 아니하면 지금의 소박한 삶의 터전마저 강제 철거당한다. 즉 역사 변화에 합류하지 못하면 쓰레기가 된다는 말이다.” 빨리 변화되지 않으면 앞을 따라잡을 수가 없고, 안정된 생활환경을 붙잡고 있으면 벌써 뒤처지기 마련이죠. 쓰레기가 되고 사표내야 되죠. 말이 팀장이지 전혀 컴퓨터도 못하면 나가야 되죠.
제가 이야기가하고 싶은 것은 그 다음에 나옵니다. ‘대규모 일체성’에 현대인들은 쫓기고 있다. 도구, 기계, 재료 등, 인간들은 도구의 하나로, 기계의 하나로, 재료의 부분으로 똑같이 처우 받고 있고 대우받고 있습니다. 이게 뭐냐, 오늘 제목은 일체성입니다. 일체성. 전체를 하나로 쳐줘요. 개인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걸 가지고 ‘빅데이터’라고 해요. 현대의 모든 것은 통계 안에 쏙 들어가 버립니다. 숫자의 하나에 지나지 않아요. 모든 게 통계거든요. 뭘 해도 빅데이터로 알아보고, 지금 여기에 뭐가 돼있나 알아봐야 합니다. 우리나라 치킨 집 숫자가 36,000개에요. 이런 것은 전 세계에 있는 맥도날드 햄버거 집 숫자하고 똑같아요.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서로가 서로를 눈치 보거든요. 통계자료에 포함이 되어서 여기는 너무 많고, 여기는 너무 적고, 이런 것이 나옵니다. “전체 사망률과 출산율을 측정하는 통계자료로 활용될 뿐이다. 익명적 존재로 다루어져 소리 없이 세상 속에서 사라진다.” 나 여기 있다고 외치고 싶은데. 너 소속이 어디야? 이러한 질문부터 들어오니까. “집단경험에 같이 휘둘린다는 것은 개인적 자존감은 실패했다는 뜻이요, 수요 공급 법칙에 의해서 언제나 이사를 각오해야 하는 상품으로 전락한 존재라는 말이다. 조작 가능한 인간이 환영받고 기계로 다루어지는 것을 주저하지 말아야 팔려나간다. 세상은 도박판이요 거기서 인간은 판돈이다. 평생 인간이 경험하는 것은 살벌한 우연일 뿐이다.”
세상은 모든 게 도박이에요. 기업도 도박이고, 중소기업도 도박이고, 전부 다 도박입니다. 펀드만 도박이 아니고 주식투자도 도박이고. 도박을 즐거워하는 사람은 성공하고 도박에 힘들어하는 사람은 그거는 안 돼요. 그러면 도박에서 인간은 뭐냐, 인간은 판돈입니다. 판돈. 여기에 인간은 고정된 것은 없어요. 전부 다 날아갑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거저 주고 있다는 이 말을 모르게 되게 되면 인간 사회에서는 거저 주는 것이 없고, 내 것 놓고, 내 것 이거 판돈으로 걸고 니 것 판돈 걸어서 이긴 사람이 다 먹기. 여기에 길들여져 있는 거예요.
이 길들여진 것을 어디까지 적용을 시키느냐, 하나님을 믿는 것에다가도 적용시켜요. “이만큼 판돈 걸었으니까 주께서 30배 60배 100배 주시옵소서.” 이래 되는 겁니다. 마태복음 13장을 어디서 보기는 봐가지고. “이런 것 주고 열 달란트 주시옵소서.” 뭐 이런 것.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세상에서 쫓겼던 그 사고방식 그대로 하나님께 하는 겁니다. 뭔가 하나님께 내놓아야 이쁘다고 더 채워주고 채워줄 게 아니냐, 이런 거예요. 그런 사고방식은 인간과 인간들끼리나, 도박판이나 통할 사고방식이지,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고, 하나님의 별명이 뭐라고 했습니까?
아까 별명이 뭐라고 했어요? 그냥 주시는 분이 아니에요. 제가 사도바울한테는 미안하지만 제가 하나 더 붙였습니다. 그냥 퍼주시는 분이에요. 북한의 김정은이가 뭐 했다고요? 맨날 우후죽순으로 사람들 죽이는 것만 하는데, 예수 믿는 사람들 죽이는 것만 했죠? 근데 얼마나 잘 먹었는지, 배를 쭉 내밀고 다녀요. 나이 30대 중반 같으면 펄펄 날아다닐 텐데, 뒷짐 지고 배 팍 내밀면서 이러고 다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퍼주는 거예요. 누구한테? 김정은이한테. 지금도 퍼주는 거예요.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그렇다면 퍼주시는 것을 믿었으니까 구원받겠네요? 아니요. 그거는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시작을 그렇게 하시죠. 시작을. 그냥 퍼주셔서 퍼 받는데, 그 다음에 문제는 도대체 우리가 뭐가 잘났다고 퍼주시는가? 우리가 보기에도 한심스러운데 뭐가 잘났다고 퍼주시는가? 여기에 교차점이 있습니다. 줄 수 없는데 퍼줄 때, 줄 수 없는 자에게 이렇게 은혜가 오도록 교차되는 교차지점이 있어요. 그 교차지점에다가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거기다가 싹 집어넣으시는 겁니다. 그냥 거저 퍼주시는 분인데, 그런데 너희에게 그냥 퍼주시는 분의 넘치는 근거가 어디에 근거해서 퍼주시는지 니가 알아? 라고 이 강단에서 설교하고 있는 거예요. 이 강단에서.
그러니까 우리가 받았던 결과물인데, 이 결과물이 오기까지, 하나님께서 이 결과물을 대가없이 주기 위해서 교차로가 되는, 교차지점에 대해서 지금부터 시작하겠다고 나선 것이 사도바울의 설교전략입니다. 그 당시의 유대인이 아니고 이방인들에게. 그러면 그걸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면, 사도바울이 이렇게 머리를 씁니다. A라는 사람, B라는 사람이 이렇게 있다면, “A라는 사람도 거저 받았죠?” “예.” “B라는 사람도 거저 받았죠?” “예.” “그럼 지난번에 꿈을 잘 꾼 것은 뭐 착한 일을 해서 준 겁니까?” “아니요.” “착한 꿈 꾼 것도 거저주시는 거죠?” “예.” “지난번에 애기 낳았는데 딸을 낳았다면서요? 딸을 낳았으니까 뭐 착한 일을 했습니까?” “아니요.” “그냥 딸을 주셨죠?” “예.” 전에는 기도 많이 해서 딸을 낳았다든지, 기도 많이 해서 아들을 낳았다든지 뭐 이랬는데, 그거 없이 이렇게 돼요. 그거 없이.
여기에다가 사도바울이 결정적인 중요한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하나입니다.” 일체성을 이야기해요. 일체성을. 설교가 일체성을 이야기해요. 설교가. 제가 지어낸 것이 아닙니다. 나옵니다. 사도행전 17장 26절,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시고” 일체성, 하나로 묶어버려요. 어떤 점에서 모든 사람이 자기가 한 것 없이 거저 누렸다는 그 점에서 하나로, 일체성을 만들어버립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각자각자 따로 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 자리에 섰던 사도바울의 설명이라 말이죠. 예수그리스도의 영이에요. 영을 받은 사도바울이 설교하기를, 진짜 정답을 이야기하기를, 인류의 모든 것이 하나 되지 아니하면, 거기에 예수님의 십자가 의미가 하나 됨을 겨냥해서만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따로 떨어져 나가가지고, “저를 특별대우해 주세요.”라는 그런 것은 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전부 다 하나다. 왜요? 다 거저 받았고, 거저 누렸으니까.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거저 받았으니까, 거저 주는 거예요.
자, 그렇다면 머리 좋은 사람은 이야기를 할 거예요. 만약에 그냥 누려서 사는 것 말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도 하나님께서 너 나의 차별이 없이, 남녀, 계급 이런 것 없이, 직업, 성격 관계없이 거저 주시는 겁니까? 라는 것을 아주 머리가 명석한 사람은 생각할 거예요. 다들 그렇게 했죠. 다들. 그게 정답입니다. 사도바울이 그런 식으로 지금 유도하고 있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혈통에, 어느 민족은 구원받고 어느 민족은 구원 안 받고, 유대인들은 구원받고 이방인들은 지옥 간다는 이 말을 안 하고 싶은 거예요. 왜냐하면 모든 혈통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관계없이 전부 다 거저주시는 혜택을 입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자, 지금 여기까지 하고, 옆에 있는 서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제 옆에 있는 서로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세요. 다른 집회 같으면, “서로에 대해서 인사하세요. 할렐루야! 사랑하는 형제자매~” 이럴 텐데. 아이고, 제발 그런 것은 하지 마세요. 그러다가 정분이라도 나면 우에 할라고요. 그 찬송하다가 서로가 마음 주고 이렇게 하다가 성추행고발하고, 미투 나오고 곤란합니다. 그러니까 한번 생각해보세요. 옆에 있는 사람 누구든 간에, 너도 거저 받고 나도 거저 받은 입장에서 내가 저 사람한테 왜 화를 냈을까? 내가 마치 너보다 내가 우열한 것처럼, 왜 시건방을 떨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겠죠. 이 사도바울이 그런 쪽으로 유도를 하는 거예요.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은, 이렇게 해서 하나가 되었다. 매개체로서 예수님이 들어간다. 근데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 하고, 예수님의 죽음이 들어간다는 것하고 이거는 말이 다르거든요. “이렇게 은혜 받은 것은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셨습니다.” “아이고, 기분 좋은 말이네.” 이래되는데, “이렇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었거든요.” 그러면 사람들은 띵한 거예요. 아니, 예수님이 살아서 이 은혜를 나눠주면 되잖아요? 여러분들이 예수님 믿기 때문에 화투는 손에 만지지도 못했잖아요? 만졌다 치고, 화투 오야가 패를 나눠줄 때에, 화투 48장이 있습니다. 저도 잘 모르는데, 대충 잡아서 48장이라고 했습니다. 48장을 쥐고 탁탁 치대서 막 나눠준다고요. 그렇게 나눠주면서 죽을 필요가 있습니까? 헉! 헉! 헉! 거리면서, 지금 숨 막혀 죽어가면서 “나는 매개체야! 내가 죽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거저 주는 것은 없어!”
이러면 화투 패를 받은 사람은 “아니, 그냥 곱게 해요. 오버하지 말고 그냥 주세요.”라고 하는데. “왜 화투 패 주는데, 은혜 주는데 당신이 왜 죽어야 합니까?” 죽음과 은혜의 상관관계는? 그 다음부터 이게 어려운 문제에 들어가는 겁니다. 살아서 줄 수 있는데 죽어야 이게 왜 오는지를? 그리고 천국 가는 복도 예수님이 죽어야만 갈 수 있는지를? 이런 상관관계가 특히 이방인들에게는 와 닿지를 않는 겁니다. 이방인들은 자기 존재기 때문에. 살아있는 자기는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에. 거저 준다고 하면 감사하지만, 죽음과 자기의 존재를 이렇게 매치시키는 그런 아이디어는 없는 겁니다.
그럼 없으면 사도바울의 설교가 거의 다 왔는데 실패로 끝나네요. 특히 31절에 봅시다.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아니, 심판할 것 같으면 뭣 때문에 줬어요? 그냥 심판하시지. 기껏 줘놓고 심판한다? 이게 앞뒤가 안 맞는 논리가 되잖아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뭔가 좋게, 좋게 가가지고, 사람들 신경 안 거슬리고 좋게, 좋게 갔는데, 뒤에다가 뭐를 붙이느냐 하면 천하를 공의로 심판한다고 이렇게 되니까, 심판한다는 그 분노와 줬다는 그 호의가 이게 매치가 잘 안 된다는 말이죠. 이럴 때 어떻게 하면 좋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사도행전 19장을 봅시다. 2절에,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3절,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로라” 4절, “바울이 가로되 요한의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5절,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6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7절, “모두 열 두 사람쯤 되더라” 이래 되어 있어요.
여기서 이 대목을 보는 사람들은 뭐가 또 복잡한가 하면, 세례요한의 세례는 뭐고 예수님의 세례, 성령의 세례는 또 뭐고, 그 차이점은 뭐냐, 하여튼 뭐냐는 겁니다. 그러면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으면 천국에 못 간다 이 말이지? 그러면 성령세례 받아야 천국 간다면, 바로 성령세례만 주면 되는데, 왜 세례요한의 세례는 왜 거추장스럽게 미리 와서 세례요한의 세례를 왜 줬느냐 하는 그러한 복잡한 의문점이 생기는 겁니다. 이런 세례요한의 세례에 대한 의문점과 방금 이야기한 호의를 베풀어놓고 심판을 한다는 것과 결부시키면, 그 연결성이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를 이제부터 그걸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지금 사도바울의 설교에요. 제가 지어낸 것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어떻게 설교했느냐 이 말입니다. 힌트는 여기에 있어요. 일체성입니다. 일체성. 전부 다 하나로 만든 거예요. 이것은 바로 어느 박스에다가, 모든 사람을 하나의 박스에다가 집어넣은 겁니다. 집어넣으면 이 박스가 가지고 있는 범주나 윤곽이 있을 거예요. 범위 안에, 그릇 안에 인간은 모두 담겨져 있는 겁니다. 그러면 인류를 하나로, 1로 취급을 해버리죠. 지금 인류가 몇 억 명이 있느냐 하면 대략 75억 명쯤 돼요. 빠르게 증가하죠. 작년에는 65억 명쯤 됐는데 올해는 75억 명쯤 돼요. 인도하고 인도네시아 이런 데서 엄청나게 낳고 있거든요. 그러면 여기는 75억인데, 없어요. 이거는 단 한명입니다. 그러면 이거는 한 아담이에요. 로마서 5장에서 나오는 한 아담. 한 아담이라는, 한명에서 새끼 쳤던 모든 75억의 아담들을 도로 한명으로 여기다가 응집시킵니다. 진공청소기로 거기다가 집어넣어버려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담을 대할 때 내가 은혜로 너를 만들었다. 이래 돼버려요. 내가 은혜로 만들었다와 내가 지금 너에게 거저 베풀어 주신다와 같은 취지의 내용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해버리면 기존의 종교성은 같은 아담 안에서 괜찮은 사람을 뽑아가지고 우리를 대신해 빌어서 하나님께 혜택을 입자! 이런 아이디어가 나오는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종교성이라고 하는 겁니다. 인간 중에서 괜찮은 사람을 뽑아가지고 우리를 대신해서 희생하든지, 아니면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께 기도를 아주 멋지게 하든지 해서, 우리는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그 덕을 보자. 그 대신 당신을 지도자로 하겠다. 이래 되거든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뭐냐 하면 이겁니다. 반대에요. 한 사람을 내세우려면 이 한 사람을 죽여야 돼요? 살려야 돼요? 대표자니까. 살아있는 사람의 대표자니까 산 사람이 되어야 되겠죠. 그런데 사도바울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한 사람을 죽여서 우리 앞에 보냈다는 거예요. 죽여서. 사도바울의 설교 내용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은혜를 주셨는데, 그 은혜의 내용 중 가장 절정인 최고의 은혜는 뭐냐 하면은 죽여서 주신 것이라는 겁니다. 다시 복습해봅시다. 복음이 뭐라고요?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났죠. 예수님을 죽여서 살려냈다는 겁니다.
그러면 죽여서 살려내는 것과 그동안 태어난 채로 사는 것과 이 두 개의 가치를 비교해보자는 겁니다. 여기 사도행전 17장 30절에 보면,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그다음에 31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이에요. 우리의 잘잘못을 묻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얼마나 감사해요. 우리의 잘잘못, “니가 왜 똑바로 못했어? 니가 왜 거짓말 했어? 니가 왜 살인했어?” 그걸 안 묻겠다는 겁니다.
누가요? 사도바울의 설교가 그래요. 사람에게 묻지를 않아요. 그런 식으로 심판을 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왜? 악인이든 선인이든 그냥 베풀어주시는, 퍼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퍼주시는 하나님이 준비한 마지막 최후의 멋진 프레젠트present, 선물은 뭐냐,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림으로서, 여기여기 붙어라가 됩니다. 여기에 붙느냐, 주님께서 마지막 주신 선물에 붙을 것이냐, 아니면 그 선물을 발길로 차버릴 것이냐, 이것으로 하나님께서는 결정적 심판의 한방을 날리겠다는 겁니다.
이 말은 묻지 않겠다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희미한 등불 밑에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옥경이한테 묻는 것 있잖아요. 옥경이한테 묻는 것을 일체 묻지 않겠다는 겁니다.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물을 때 고개만 떨구고 눈물 뚝뚝 흘리는데, 눈물 흘려도 괜찮아요. 일체 안 묻겠다는 거예요. 일체 묻지 않겠다는 것과 여러분들이 평소에 우상을 만들고 내가 잘해주면 신도 잘해준다는 그 공식을 철폐하자는 겁니다. 이제 그만 말려들어라 이 말입니다. 그런 데에 스스로 속지 말자는 거예요. 하나님이 뭘 해줬는가가 중요하지, 내가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께 뭘 바쳤느냐 하는 그런 것은 아예 지워버려라 이 말이죠.
바쳐서 복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착해서 복 받는 것이 아니에요. 그거는 인간들이 어떤 대안이 없어서 그렇게 한 겁니다. 이게 기쁜 소식이 아닙니까? 참 기쁜 소식이죠. 좀 있다 이야기를 할 거예요. 분명히 주님께서 정하신 사람으로 죽음 가운데서 살려내서 그걸 복음이라고 내세운 거예요. 죽은 자를 살려낸 이것이 복음이라면 인간 쪽에서는, 아담 쪽에서는 복음이 있다? 없다? 없는 거예요. 아무리 잘해도 더 잘해야 되고, 아무리 착해도 더 착해야 된다는 것을 요구받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사도바울이 이렇게 이야기를 할 때에 사도바울이 하는 것이 하나의 개인적인 의견이나 또는 아무 증거도 없이 주장한다든지, 그냥 위로의 말이든지, 우리를 꼬시기 위해서 그렇게 이야기를 했다면, 이것은 뭐 사도바울이 그렇게 좋게 해도 안 먹혀들어갈 겁니다. 먹혀들어가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여기 사도행전 19장 13절부터 보겠습니다.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적으로 악귀 들린 자들에게 대하여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너희를 명하노라 하더라” 14절,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사도바울이 마귀를 쫓아내니까, 그게 굉장히 신기했던 모양이죠. 그래서 자기가 보니까 마귀를 쫓아낼 때 어떤 주문을 외우는데, 예수 이름으로! 이렇게 하거든요. 그래서 그걸 딱 모방해서 자기도 악귀 들린 자에게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나가라! 하니까, 거기에서 유명한 고백이 15절에 나옵니다. “악귀(마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여기에서 보면 일단 바울은 어느 쪽에서도 유명 하느냐 하면 악마의 나라에서도 사도바울은 진짜 하나님의 정통, 백퍼센트 참참참 참기름, 이건 진짜 완벽하게 하나님의 천국에서 인정한, 유일한 주의 종이라는 사실을 어느 쪽에서도 안다? 저 반대편에서도 전부 다 인정을 했죠.
그러면 우리는 사도바울의 설교를 받아들이면 되네요? 그렇죠? 진짜배기 주의 종이, 악마도 인정한 주의 종이,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고 악마 쪽에서 이미 알아 모신 거예요. 바울이 보통 사람이 아니에요. 바울을 이렇게 악마도 알아줘버리면, 우리 생각에는 바울이 좀 편하게 살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고생하거든요. 그걸 제가 풍랑이야기를 할 때 했습니다. 바울이 누구도 이길 수 없는 죽음 가운데서 바울의 자리가 바로 주님의 죽음의 자리라고 제가 이야기를 했죠. 모아이 이야기. 머리는 밖으로 나와 있고 몸은 땅 속에 들어가 있죠. 아래쪽은 바울 담당이고 위쪽은 예수님 담당이고. 악마가 이야기하기를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 니는 누구냐?
그러니까 지금 사도바울의 싸움은 영적싸움이에요. 인간의 싸움이 아닙니다. 인간의 차별, 직업이라든지, 수입이라든지, 금전, 부동산, 재산, 행실, 행동, 지금 그것 가지고 사람을 평가 안 하기로 이미 하나님은 정했어요. 괜히 우리가 이 악마의 주도권을 가지고, “이래 살면 우째? 이래 살면 내가 저주받는데. 내 대(代)에 저주 안 받으면 자식 대(代)에 저주받는데. 나 같은 것은 저주 받아도 내 자식이 내 죄 때문에 저주 받는 것은 나는 못 견뎌. 나는 바쳐야 돼.” 그 자체가, 사도바울의 설교에 의하면 그 자체가 바로 복음을 방해하는 악마의 카드에요. 악마의 주특기라니까요. 악마의 주특기.
여러분들이 뭐 볼모로 잡힌 것이 있어요? 여러분 한 번 생각해보세요. 사도바울이 누구한테 협박받은 것이 있습니까? 자, 사도바울이 어떤 사람이냐 하면 사람을 죽인 사람이에요. 그렇죠? 체포하고 죽이고, 스데반 죽일 때 자기가 거기에 책임자로 있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사도바울이 악마한테 협박당했던가요? 협박 안 당했던가요? 악마한테. 안 당했죠. 다윗은 살인하고 간음했죠. 그것 때문에 다윗이 악마로부터 협박당했던가요? 안 당했던가요? 안 당했죠. 왜요? 나 원래 그런 놈이니까. 배짱도 희한해요. “나 원래 그런 놈이야. 나는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났어.” 그게 성도의 표준모델입니다.
목사님, 나는 아직까지 살인까지 안 했는데요? 좀 있어보세요. 얼마 살았다고요? 아직 80까지 안 살았잖아요. 살다보면 속으로 누굴 미워하게 될 거예요. ‘저 놈 안 죽나. 저 놈 안 죽나.’ 여러분 숙종 때에 인현왕후를 죽이려고, 장씨 집안의 영광인 유명한 장희빈이가 짚으로 인현왕후처럼 만들어놓고 바늘로 콕콕 쑤시니까, 양자의 중첩원리에 의해서 저쪽 인현왕후가 허억! 이렇게 아프게 되잖아요. 흑마술을 하니까. 그 전체의 이 구조가 악마의 구조에요. 악마의 구조에요. 죄가 있다는 겁니다. 주님의 구조는 뭐냐, 죄가 없다는 거예요. 매개를 거쳤을 때.
죄를 그대로 두지 않고, 죄가 의가 될 수 있도록 바꿔주는, 영어로 하면 트랜스, 순수 우리말로 하면 도란스, 병렬을 직렬로 바꾸는 도란스, 트랜스. 하나의 죄인으로 오라. 바꿔줄게. 내가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거예요. 병원에서 의사가 제일 기분 나쁜 것이 뭐냐 하면, “저 아픈데 없습니다. 건강합니다.”라고 하는 사람이에요. 그럼 오긴 왜 왔는데요? 오기는 왜 왔어요? 보험수가 올려주려고 왔습니까? 그런 이야기하려고. 아니죠.
사도바울이 이 점을 설명하는 것이 뭐냐 하면, 니들이 악마를 알아? 이 말입니다. 니가 하나님의 진짜 뜻을 알아? 퍼주는 것인데, 그냥 퍼주면 밥 먹고 살면 돼요. 하지만 마지막 심판은 끝난 거예요. 따라서 그 퍼주는 그 호의의 결정판, 그게 결정판이에요. 그 결정판이 뭐냐 하면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자기 아들을 죽여서 살려내고, 죽여서 살려내는 이 과정에 개입된 성령이 우리에게 뭘 주느냐 하면, 자기 택한 백성들에게 집어넣어 줘버리면 이 사람은 거저 죽었다가 거저 살려내신 주님의 은혜를 거저 아는 사람으로서, 이 세상에서 모아이의 일부로서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이게 사도바울의 설교입니다.
그러면 세례는 뭐냐, 요한의 세례는 뭐냐 하면 여기 요한의 세례에 대해서 사도행전에는 안 나와요. 그러나 사도행전의 시대에 썼던 글이 있어요. 골로새서에 나옵니다. 골로새서 2장, 세례에 대해서 골로새서에도 나오고 고린도전서에도 나오고 에베소서에도 나오고 로마서에도 나오고 여러 군데에 나와요. 세례에 대해서 로마서 6장부터 먼저 설명을 할게요. 세례는 한 몸이다. 이것을 연합이라고 해요. 세례는 한 몸인데, 이 사람하고 이 사람하고 끈으로 묶어놨다고 합시다. 끈으로 묶어놓았는데, 앞에 있었던 이 사람이 물에 빠진다면 끈이 풀리지 않는 이상에는 어어어~~! 하면서 딸려가야 되겠죠.
예수님께서 택한 백성을 위하여 죽어버리면 우리도 같이 죽어가야 돼요. 그런데 죽었다가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게 되면, “나 안 살래”가 안 돼요. 주님이 살아났다는, 주님의 살아나심을, 그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서 좋든 싫든 우리도 죽지 않고, 죄인 되지 않고 의인으로 살아나야 돼요. 누구 덕분에? 내가 원해서? 예상해서? 내가 보험 들어서? 아니에요. 누구 덕분에? 나보다 앞서서 액션을 취했던 주님 덕분에 같이 한통속이 되어서 살아나야 되는 거예요. 뻔뻔스럽게도. 하는 짓거리를 보면 이건 인간 같지도 않은 짓을 하면서도 그 뻔뻔스러움이 주님을 증거 하는 뻔뻔스러움이 된다 이 말이죠. 그것을 여러분들이 장착을 해야 돼요. 뻔뻔스러움을.
오늘 제목을 뻔뻔함이라고 바꿔야 되겠어요. 알아들으셨어요? 뻔뻔함. 나중에 돌아서면 제가 잊어버리니까 분명히 해둡시다. 이 뻔뻔함을 강력하게 반대하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이에요. 인간은 착한 만큼 주께 영광 돌리게 되어 있는 도덕적인 존재인데 그걸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이렇게 문장화시킵니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의 차이점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다는 겁니다. 형상의 내용이 뭐냐, 거룩과 착함 이런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성령을 안 받았을 때는 모르지만 받고 나서는 이것을 장려해서 키우면 하나님께 영광이 더욱더 증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사고방식에서 뭐가 빠졌는가 하면은, 이게 빠졌어요. 끈이 빠졌어요. 끈이. 세례가 빠진 거예요. 그래서 세례요한의 세계가 왜 안 되느냐 하면 세례요한의 세례는 어떤 준비 단계는 되지만 결론까지는 도달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세례 받으려면 본인이 알아서 물에 뛰어들어야 해요. 성령세례는 우리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주께서 먼저 죽음에 뛰어들어서 물어보지도 않고 먼저 되살아났다면, 물세례는 알아서 기어들어가야 돼요. 알아서.
예루살렘에서 좀 떨어진 베다니에 가면 요단강이 흐르고 있는데, 그 요단강에 가보려고 했는데 못 가봤어요. 어떤 분이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앞으로 그런 데를 가거든, 사진만 찍지 말고 서가지고 “여기는 이런 곳입니다.”라고 10분씩 설교하고, 그걸 동영상으로 찍으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하는데, 그렇게 할 수 있어요. 일단은 이스라엘 모든 관광객들과 본토인들을 다 쫓아내버려야 해요. 단 한 명도 없이 우리 세 명만 가가지고 아무도 없는데서 이렇게 하면은 됩니다. 그런데 뒤에서 밉니다. 카메라 든 힘은 빠지고요. 지금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고 찾아가야 돼요. 이상현 목사님이 동냥해서 알려주면 아내가 그걸 듣고 있다가 저한테 전달해줘야 해요. 잘 안 될 때는 영어로 물어가지고 이야기해줍니다. 그러면 그걸 또 카메라로 찍었어요. 그렇게 한 것도 죽을 뻔 했습니다.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을 때, 제가 동영상을 보니까 저쪽 요르단에서 이스라엘 쪽에서 세례를 많이 받아요. 그러면 물세례를 받는 것은 뭐만 있으면 되느냐, 액션을 취하는 본인만 있으면 되는 건데, 걸어가서 얼마 주고 옷 빌려 입고 물이 있으면 거기에 전문가가 팍 집어넣습니다. “갑니다! 코를 막으시고요.” “헉헉!” 허우적대죠. 이게 세례입니다. 그거 말고 옷 입고 풍덩 잠수하면 이건 침례고. 그건 행함이죠. 행함.
사도행전 19장에서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아볼로가 이집트(알렉산드리아 행18:24)사람이었죠. 아볼로가 왔을 때에 바울이 물었어요. “니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해답 없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인간이 행할 수 있는 마지막은 했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행할 수 없는 것을 해야 되겠다.” 그래서 거기에서 주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성령이 임한 거예요. 사람이 할 수 없는 것, 받고 난 뒤에 얼마나 좋았던지 자기가 이것을 전하고 싶다는 겁니다.
이것이 뭐냐 하면 바로 모아이에요. 주님께서 성령을 주심으로서 그 다음에는 본인이 본인의 원대로 하지 않고, 끈을 묶어놓으면 예수님의 성령께서 앞장세워서 필요한 대로 가게 하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존재가 아니고 사명입니다. 존재가 아니고 사명. 존재의 특징은 홀로 있어요. 홀로 있을 때 존재지만, 사명은 지시하는 다른 외부인이 따로 있는 겁니다. 이게 둘이 되고, 둘은 뭐라고 했습니까? 둘이 있을 때 뭐가 된다고 했습니까? 이게 사랑입니다. 사랑은 너 빼놓고 나머지기를 다 제거하는 겁니다. 이게 사랑이죠. 그걸 질투라고 하고 사랑이라고 하는 겁니다. “당신만을 사랑해.”
제가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잖아요. 이승철이 불렀던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라는 노래 가사를 보게 되면 심장을 다 주겠다는 겁니다. 지는 우에 살고? 다 주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놓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슬퍼서 행복하다는 겁니다. 당신과 떨어져서 나는 슬픈데, 그게 당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실컷 슬퍼하겠습니다. 가사 내용이 그래요. 한번 유튜브를 찾아보세요. 와! 아주 사랑의 끝판왕이에요. 사랑의 끝판왕. “그런 그댈 위해서 나의 심장쯤이야... 사랑 할 수 있어서 난 슬퍼도 행복 합니다”
성령께서 이렇게 해줄 때에 그 다음에는 뭐냐 하면 예수님 쪽에 있는 사명이라는 것은 딴 게 아니고요. 차이와 비교하는 겁니다. 이쪽 세계에 니가 줄 것 주고 받아 챙기는 겁니다. 판돈이죠. 도박판이죠. 이 세상은 도박판이니까. 신에게 뭔가 바치고, 십일조 바치고 얻어내는 것, 그게 니 취향에 맞느냐, 아니면 주께서 일을 하신대로 이미 의로운 관계로서 주께서 하신대로 뭐든지 그냥 아무 뻔뻔스럽게 따라다니는 이게 좋으냐를 지금 사도바울은 이 설교 단상에서 묻고 있습니다. 어느 쪽 하렵니까? 뭐 골라잡을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
다만 이러한 현상이 일어났다는 것, 놀랍지 않습니까? 모든 인간에게는 자존심이 있기 때문에 그냥 받는 것을 거지근성이라 해서 싫어해요. 그냥 주는 것을 싫어해요. 얼마라도 뭔가 해주고 받아야 자기가 떳떳하거든요. 그 떳떳함조차도 잘라내라 이 말이죠. 그 떳떳함, 그것도 사치에요. 아직 자기 의잖아요. 그것조차도 아주 뭉개버리고 철판을 깔자 이 말이죠. “주여! 오늘도 어디로 인도하렵니까?” “오늘은 크루즈여행으로 인도한다.” “감사합니다.” “주의 일을 하러 가자” “주께서 주시겠지.” 뭐 이런 것. 오늘은 골프 치러 갔다가. 맨날 하는 일이 크루즈여행 갔다가 골프치고 가고 놀러가고... 주여! 이게 환난입니까? 그거 환난이에요. 비행기 탈 때 보세요. 기내식도 안 주면 얼마나 환란이겠어요?
남들 보기에 그 뻔뻔스러움, 그러나 그 사람이 증거 하는 것은 “니가 그렇게 살아도 되나? 그게 무슨 하나님의 형상이야? 그게 무슨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야? 아니야!” 내가 그런 가운데서 주께서 이걸 주셨다는 거예요. 어떻게? 거저 주셨다는 것. 이게 사도바울의 설교입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