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여름수련회 사도행전강해 제 8강(교회) - 이 근호 목사
자, 시작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렇게 설교를 하는 사도바울을 누가 그렇게 괴롭힙니까? 이방인들이요? 처음에는 이방인들이 그렇게 괴롭혔어요. 근데 누가 괴롭히느냐 하면 바로 교인들이 사도바울을 괴롭힙니다. 교인들이. 같은 교인들이 그렇게 괴롭히게 되면 하나님의 그 원수가 이제는 점점 더 위험한 지경까지, 다시 말해서 적과 적이 있는 지경과 아군의 지경이 뚜렷이 구분이 되는 것이, 이제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구분이 되지 않고, 거룩한 공간, 우리끼리는 다 거듭난 집합체, 지방교회처럼, 우리는 다 깨끗한 사람이라고 동그라미 친 이곳 내부까지 마귀가 침투를 하는 겁니다.
침투하게 되면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부동산 이게 생겨요. 부동산이 생기게 되면 이것은 무엇을 사람들에게 기대케 하느냐 하면, 소유주가 누구? 이렇게 돼버려요. 복음에 감사해서 헌금해서, 헌금이 모아져서 부동산을 만들었는데, 부동산은 있음이거든요. 눈에 보이잖아요. 있음이니까, 저 있음의 최종 소유주가 누구냐? 여기 소유주라는 인물은 어디에 종속되느냐 하면 이 존재, 소유에 종속돼버려요. 이 사람은 부동산 지키는 사명을 가지고 살아야 돼요. 부동산을 지키는 사명감으로.
자, 다시 볼게요. 복음을 아는 사람들은 이게 교회다. 교회가 너무 주께 감사해서 예루살렘 교회에 헌금하고 매주 모이라고 해서 모였고 필요한 것을 썼다. 사실은 고린도교회에 있을 때 사도바울이 천막장사를 했는데 모자랐어요. 모자라서 빌립보교회에서 계속 도움 받았습니다. 사도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할 때도 두 번씩이나 빌립보교회로부터 도움을 받았어요. 그게 데살로니가전후서, 고린도전서에 나와 있어요. 사도행전에는 안 나와 있지만 그런 게 나와 있어요.
사도바울이 천막장사를 해가지고 떼부자가 된 게 아닙니다. 아가야 지방의 천막장사 위원장 그런 거 안 했어요. 천막장사하면서 천막장사의 노동권을 보장하라고 촛불집회 같은 거 안 했어요. 사회운동 안 했습니다.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지 않았어요. 사실 노동자라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어요. 이것은 마르크스 때문에 생긴 거예요. 노동자라는 단어를 이 세상에서도 쓰면 안 돼요.
노동으로 인간은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거는 마르크스가 억지를 부린 것이고요.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요. 돈이 좀 적어도 사람이 좋으면, “사장님 좋아요!” 이러면 돈 좀 적어도 붙어있고, 돈이 좀 많아도 “사장님 나빠요!” 이러면 나가는 거예요. 인간관계가 우선이지, 노동관계가 우선이 아닙니다. 왜 그런 빤한, 그런 실제적인 것들은 반영이 안 되고 그런 것들은 다 무시하잖아요. 똑똑한 게 문제라. 다 똑똑이.
교회에서 사랑의 대가로 그 귀한 돈을 하나님이 쓰라고 내놓았어요. 헌금이 모였죠. 부동산 구입하고 여러 가지 비용들, 부속적인 것들을 샀죠. 그래서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교회라고 해버린 거예요. 교회라고. 교회라고 해놓고, 이 부동산에다 의미를 줘버려요. 어떤 의미? 연속적인 의미. 연속적인 의미라고 하는 것은 지난날의 의미가 지금도 줄곧 이어져 가고 있다는 그러한 논리에서 연속적인 의미입니다. 연속적인 의미를 줘버리면, 의미를 지키기 위한 사명이 그 소유주에게 부여됩니다. 그런데 이게 교회입니까? 갑자기 교회로 시작해서 교회 아닌 것처럼 보이죠.
그러면 교회가 뭐냐, 사도행전 20장 28절에 나옵니다. 제가 지금 하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 왜 교회까지 악마가 따라왔는가,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교회는 왜 무너져야 하는가,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에 일곱 교회 다 무너졌으니까.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존재가 아니고 지속적인 기능이 작용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피의 가치가 계속해서 살아있는 곳이 있다면, 피의 가치를 계속해서 인정하는 그 시간만큼, 그 사람들만큼은, 그때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교회라고 하시는 겁니다. 기능에서 교회가 될 때는 교회 있음이 있더라도 존재가 되지 않고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 사건이 되는 겁니다. 사건. 이게 지금 누구보고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에베소교회를 보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에베소교회에 3년 있었어요. 그래서 31절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이 훈계한 이유가 뭐냐 하면, 여기에 뭐가 들어왔느냐 하면 29절에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30절,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자기 쪽으로 좇게 하려고 한다는 거예요. 자기 쪽으로. 자기 쪽이라는 인물. 자기라는 소위 거짓 사도. 이 사람은 만인을 위해서 십자가 피를 흘렸습니까? 이 사람이 흘렸어요? 사도바울은 왜 사울파를 좋아하지 않을까요? 본인이 사울파인데.
사울은 왜 사울파를 극구 거부했을까요?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그 이유가 나옵니다. 나는⯄ ⯄⯄지지 않았다. 아, 벌써 오래됐잖아요. 오래 되니까, 아는 경력이 있어가지고. 사도바울은 십자가지지 않았다. 이 말은 우리 십자가 지신 분을 한 분으로 결정짓기. 거기에 동의하면 교회, 동의하지 않으면 교회 아니다. 이런 거예요. 목사가 몇 명이 오든, 뭐 신학박사가 오든 관계없어요.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목사도 아니고 장로, 집사도 아니에요. 그것은 십자가 지신 분, 그 분, 피 흘린 가치를 그대로 나타내는 그 분, 그 분만을 쳐다보는 그 단체, 일시적이고 한시적인, 항상 기능적으로 발휘되는 그 단체, 그걸 우리는 교회라고 부른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교회는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고, 어디에 있으면 존재가 되는데, 몇 번지입니까? 이래 되면 그거는 부동산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대구시 지묘동 389번지 팔공로 91길, 이거는 대구 지묘동 주소에요. 지금 가봤자 화장실이 엉망이에요. 누가 청소하고 싶다고 했는데, 락스를 가지고 청소를 하고 있는지. 지금 지켜보고 있는 겁니다. 더러워서 못 보겠다. 나라도 해야겠다는 거예요. 하세요. 왜? 기능이니까. 사명이니까. 그런데 청소하면서 다른 사람은 놀고 왜 나만 하느냐? 라고 할 때는, 이거는 뭡니까? 십자가를 보다가 이이잉~ 하고 있어요. 갑자기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고, ‘나는 하는데 저들은 나를 이용해먹고 있구나. 나는 등신인가?’ 또 이래돼버려요.
그럴 때는 락스를 뿌리다가 스톱을 해야 돼요. 락스 냄새 풍기고 그냥 올라오면 돼요. 그런 생각이 들거든 안 하면 돼요. 안 한다고 뭐 지옥가고 그런 거 없어요. 만약에 그 분이 매일같이 락스로 화장실 청소를 한다면 그 교회는 그 분의 교회가 됩니다. 주님의 교회가 아니고, 피 발린 교회가 아니고 락스 발린 교회에요. 교회의 마귀는 그 교회에 예배당 짓는다고 땅 바친 선조를 가진 그 교회 장로가 마귀에요. 지는 안 바치고 자기만 바쳤다고 대를 이어서 자기 지분을 주장하는 거예요. 그게 무슨 교회입니까?
바로 은근히 십자가지지 않은 자가 교회소유권을 주장하는 것, 그게 바로 가짜 교회, 악마가 침투한 교회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이 세상의 교회가 그런 교회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은 교회가 하나도 없다는 그 사실에 또 한 번 감사합시다. 만약에 완벽한 교회가 있다면, 그 교회에 우르르 또 가요. 가서 감사해서 헌금하게 되면 갑자기 그 교회가 또 마귀의 점령지가 되는 겁니다. 또 부동산 되고, 그 부동산을 누구로 할 것이냐? 내 말 안 들으려면 다 나가라고 이런 소리하고요. 니 돈 얼마 냈다고 붙어있나? 우리 아버지 돈 많이 냈다. 자기가 돈 낸 것이 아니고 자기 아버지가 낸 거예요. 자기 아버지 부동산이 50개 된다고요. 자기 아버지가 냈다고 자기 교회라고 우기는 거예요. 목사도 자기가 사오고.
사도바울은 어떻게 했는가? 사도행전 20장 33절에,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위임목사 할 때 하이라이트가 뭡니까? 위임예배하고 그런 것 할 때는 잠이 와요. 제일 중요한 것은 거기에 참석한 사람들이 전부 다 집중을 해가지고 듣고 싶은 것은, 그 순서가 어떤 순서냐 하면 교인들 다 세워놓고 대행한 목사가 묻습니다. “아무개 교인들은 이 위임목사에게 월 삼백과 그리고 사모님한테 한복 해주는 것을 맹세하십니까?” 이 대목입니다. 옛날에는 한복인데, 요새는 양장으로 바뀌겠죠. 그러면 나중에 손님으로 왔던 사람들이 다 나가면서 하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 “그 교회 삼백 받는단다.” 그것만 기억하고 나머지기는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우리 교회는 얼만데 삼백이면 이 교회 아주 세네. 개척교회 처음하면서”
사도바울을 보세요. 나는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고. 여러분 주의하세요. 탐하지 ‘아니하고’와 ‘안 가졌다’를 아주 냉철하게 구분합시다. 구분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죽습니다. 탐하지 아니했지 받아 챙긴 것은 제대로 받아 챙기는 거예요. 탐은 안 했어요. 줄 때 후딱 받아 챙겼어요. 다시 도로 뺏어 갈까봐. 돈 주지 않았는데 이쪽부터 벌써, 오 만 원 짜리부터 잡아 땡기는 거예요. 탐은 안 했어요. 34절에, “너희 아는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35절,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여기에서는 기능에 대해서 그들이 도와준 거예요. 이게 은사라고 하는데, 은사가 끊어지면 안 주겠다는 겁니다. 은사가 끊어지면. 그러면 사도바울에게 주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사도바울과 어떤 기능을 행사하는데, 주께서 하신 기능인 것을 성령 받은 사람이 하게 되면, 주의 지시에 의해서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주라는 은사를 받아서 내놓는 겁니다. 주는 사람도 받을 생각 안 하고, 받는 사람도 뭐 되도 않는 윤리를 한다고, “이거 뭐 안 주셔도 되는데.”라고 이렇게 되지도 않는, 속으로는 탐을 내면서도 한번 버텨보는 거예요. 진짜 후딱 다시 가져가면 우에 할라고? 그런 식의 예의범절은 주님을 욕되게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퍼주시는 하나님이거든요. 퍼주시는 하나님. 사도들에게 어떻게 퍼주셨는가? 하루 세끼 먹는 동네에서 두끼나 퍼주시는 하나님.
마태복음 10장에 나옵니다. 9절에, “너희 전대나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10절,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 무슨 뜻입니까? 죽으라 이 말입니다. 니 죽는 자 찾아가라 이 말입니다. 어디가 나의 죽는 자의 끝인가를 찾아가라 이 말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이 말을 들었겠어요? 안 들었겠어요? 안 듣죠. 안 듣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제자들은 그 당시에 예수님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게 일시적인 기능으로 나타나지만, 그 외에는 성령받기 전에는 고정적인 믿음은 없습니다. 지금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은 사도바울이 에베소를 떠나면서 빠이빠이를 하고 있는 겁니다. 사도행전을 보게 되면 사도바울이 어떤 동네를 떠날 때 빠이빠이를 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그 동네 주민들, 유대인들이 자기들을 반대할 때 미련 없이 떠났습니다. 자기를 반대할 때 억지로 붙어있지 않아요. 뭐 퇴직금 얼마냐? 그런 거 없어요. 반대하면 그냥 떠났어요. 왜냐하면 반대하는 것이 그들의 뜻이 아니고, 주께서 “됐어! 고만! 오케이! 이제 딴 데 가야지!”라는, 주님의 시그널, 신호로 본 겁니다.
그래서 반대하면 떠나버렸어요. 데살로니가도 그렇고, 빌립보도 그렇고, 그리고 에베소도 그렇고, 예루살렘도 그렇고, 반대하면 떠났습니다. 근데 보통사람이 떠날 때는, “아이고, 더러워라. 여기 아니면 내가 복음 전할 데가 없나?” 이러는데, 사도바울은 이러고 떠난 것이 아닙니다. “너희들이 나의 가치를 무시하고?” 그러고 떠난 것이 아니에요. “떠나라고 하면 갈 곳은 주께서 인도해주시겠지.” 그렇게 가는 거예요. 누굴 원망하는 그런 것 없어요. 그냥 가는 거예요. 그게 24절에 나옵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존재가 아니고 사명, 사명이 존재보다 우선된다 이 말입니다.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묻거나 따지지 않고, 행실보지 않고, 니 과거현재보지 않고, 전과기록 보지 않고 그냥 퍼주시는 은혜, 그것은 너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묶여있는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예수그리스도의 공로를 너 같은 인간을 통해서 더욱더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 주신 은혜. 그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겠다는 겁니다.
자, 우리가 여기 이 말씀을 봤습니다. 다양한 반응들이 나올 수가 있습니다. 제일 흔한 반응이 이겁니다. 한글자로 “캬!”입니다. “야, 사도바울 믿음 좋다.” 이거거든요.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믿음 좋은 사람이나 이렇게 사세요.” 이런 뜻이에요. “나한테 이것 강요하지 마시고, 캬! 대단하다. 자기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다니!” 복음과 생명 중에서, 복음과 자기 목숨 가운데서 복음이 중요하고, 복음이 원한다면, 복음이 필요로 한다면, 주님이여! 이 생명 마음껏 사용하옵소서! 라고 할 때에, 아, 역시 사도될만하니까 사도가 된다. 이렇게 해서 모든 영광을 주님한테 뺏어가지고 사도바울한테 영광을 돌립니다. “고생하세요. 대가로 당신한테 영광 돌리겠습니다.” 아까 누가 찬양이라는 말을 했는데, 식당에서 제가 들었어요. 앞뒤 내용은 모르지만.
그래서 사람들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뭐냐 하면, “마음껏 당신의 공로에 대해서 찬양을 해줄 테니까, 나까지 당신에게 자꾸 엮이게 하려는 시도는 하지 마세요. 내가 나중에 믿음이 좋거든 그냥 흉내만 내겠습니다.”라는 식으로 빠지죠. 비겁한 처사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면 뭘 빠트렸느냐 하면 사명이라는 것을 빠트렸어요. 사명. 사명은 꼭 이런 내용을, 사도바울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사명이 있는 사람은 이런 내용으로 그대로 주어집니다.
문제는 그것이 몇 초냐가 문제에요. 몇 초냐? 가장 짧은 것으로 저는 3초를 봅니다. 3초. “주여, 주를 위해서 제가 죽겠나이다.” 째깍 째깍 째깍 3초. “주여, 조금만 참으십시오. 제가 잠시 괜찮은 생각을 했습니다. 나중에 다음 3초 때 봅시다.” 이거 괜찮은 겁니다. 다만 3초를 늘여볼 생각을 가져보세요. 3초에서 6초로. 문제는 3초에서 6초로 늘였는데, 그때에 동생이 형님 돈 좀 빌려달라고 오면 그때는 큰일 나니까 6초로 가기 전에 빨리 4초에서 끊어버려야 됩니다. 자칫하면 당할 수가 있어요.
어쨌든 간에 사도바울은 이게 길었다는 거예요. 이게 굉장히 길었다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평생에 그냥 사명이 앞장섰어요. 늘 그렇지는 않았어요. 하나님께 불평하고 근심하고 원망하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의 편지를 보면 계속 나와요. 하지만 주(主)를 이루는 것은 뭐냐 하면 사명이 우선입니다. 사명인 우선이 사도바울의 인생이 다른 사람에게는 어떤 특이점을 남겼는가? 결혼을 하지 않았어요. 결혼을. 결혼을 안 했습니다. “좋아하는 여자가 없어서 결혼 안 했겠지.”라고 그렇게 생각을 하잖아요. 아니에요. 결혼은 미친 짓이라고 여긴 거예요. 결혼은 미친 짓이에요.
왜냐하면 온전히 주님께 바칠 사랑을, 이걸 방향을 틀어서 배우자에게 온전히 바친다는 이것은 생명의 폭을 아주 좁게 간다고 본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자기 아내에 대한 사랑이 주님에 대한 이 사랑을 가로막고 있는 그런 요소가 된다는 겁니다. 따라서 할 수만 있거든 결혼하지 마라. 그리고 결혼하게 되면 주님이 아니기 때문에 한 몸, 한 마음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달래줘야 하고 그때그때마다 아껴줘야 하고, 눈치 봐야 되고, 화내면 화를 삭여야 되고, 생일 챙겨야 되고, 결혼기념일 다 챙겨야 되고, 국경일보다 더 많은 국경일에 태극기 달고 다 해야 돼요. 생일 되면 “생일축하합니다~♬” 이래가지고 또 파티를 열어줘야 해요.
사도바울은 이게 뭐냐 이 말입니다. 이게 뭐냐? 주를 위해서 살 사람이 아내한테 푹 빠지고 이게 뭐냐 이 말입니다. 그런데 요즘 세대를 사도바울이 봤으면 이런 걱정은 안 해도 돼요. 각자 통장을 따로 챙기기 때문에. 너는 니 인생, 나는 내 인생이기 때문에. 아내한테 빠진 남편, 그거는 상 받아야 됩니다. 거의 없습니다. 어쨌든 간에 사도바울은 결혼은 미친 짓이고, 위험한 짓이고, 할 수 있거든 결혼 안 하는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 결혼 안 하는 것이 좋다.
그러면 결혼이 나쁜 것이냐, 나쁜 것이 아니고, 만약에 상대방이 너무 사랑스럽거든, 도저히 못 참겠거든, 진짜 보이지 않을 때도 그립고, 보고 있어도 그리울 정도가 되거든, 차라리 결혼해서 그 다음에 뭐냐 실컷 고생해라. 이게 고린도전서 7장에 나오는 결론입니다. 내가 말리고 싶은데, “정말 하지 마라! 하지마라!” “그녀를 너무 사랑해요.” “그래, 안 되겠나? 정말 안 되겠나?” “정말 안 되겠습니다.” “그래, 해라. 하되, 나는 니 책임 못 진다. 그래, 니가 원 없이 고생해라.” 이거는 뭐 협박공갈도 이런 게 없어요. 결혼하는 사람들에게 축하는 못할망정 협박공갈로 나섭니다.
사명이 사도바울을 이렇게 만들었어요. 사명이. 그러면 사도바울은 안 했습니다. 두 번째 특징은 뭐냐, 뻔한 겁니다. 자식이 없습니다. 자식이 없어요. 자식이 없으니까 은이나 금을 모을 건덕지가 없죠. 홀딱 먹고 쓰면 되죠. 만약에 자식이 있는데 부모가 홀딱 먹고 써보세요. 자식들 아파도 안 옵니다. 배신자여! 배신자여! 집 있는 거 은행 담보 잡아가지고 나중에 죽으면 주택은 은행으로 넘어가고. 그러면 “우리한테는요?” 부모가 하는 말이 “니 맡겨놨나?” “알아서 줘야죠. 알아서. 부모도 아니야. 부모도.” 원수지간이 됩니다. 이렇게 하면 갑자기 기쁜 소식이 아니고 불행한 소식이 되죠.
그런데 준비된 것이 있죠. 뻔뻔스러워져라! 사명입니다. 사명. 자식 놓는 것도 사명이고, 자식한테 재산 물려주는 것도 사명이고. 그게 전부 다 주님이 주신 사명인데, 그 사명이 뭐냐 하면, “나 이토록 죄인입니다.”를 들추어내는 사명. “이만큼 잘났습니다.”가 아니라, “이렇게 못난 놈을 건져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그 사명. 그러니까 결국 뭐냐 하면 그냥 사세요. 그냥 사시면 돼요. 내가 나를 안 만들었잖아요. 내가 나를 안 만들었죠. 그러면 그냥 사세요. 컨베이어 시스템에 뭔가 움직여 갈 거예요. 그냥 살아가시면 돼요.
제가 아까 헌금이야기를 했잖아요. “아이고, 헌금해서 죽을 것 같으면 헌금 안 하면 되지.”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고 싶어 해요. 반은 덜어내고. 그게 육신이에요. 하고 싶을 때 하고 싶어 해요. 너무 정 없이 그렇게 뻔뻔스러운 것을 우리도 원치 않아요. 하지만 그것은 아무 의도 아니고 뭐 하나님께 영광도 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저 내가 하고 싶을 뿐인데. 우리는 우리 뜻대로 살고, 주님은 주님대로 우리를 구원하고. 그러면 죽이 맞잖아요. 그러면 됐잖아요. 뭘 더 원합니까? 사명인데.
꼭 사도바울처럼 이렇게 해야 됩니까? 우리도 골프 칠 때 목숨 걸었어요. 자식한테 유산 남겨주는데 목숨 걸었잖아요. 거기에 목숨 거나 여기에 목숨 거나 주님의 뜻이라면 같은 사명이에요. 제가 위로를 너무 하는 거 아닌가? 어쨌든 간에 28절에 보면, 교회란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 논리는 간단해요. 피가 중지되지 않습니다. 피가 중지되지 않는다는 것은 교회는 반드시 있게 마련이에요. 듬성듬성 있든, 촘촘하게 있든 관계없이 반드시 있게 마련입니다.
그렇게 해서 36절에 보면, “이 말을 한 후에 무릎을 꿇고 저희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하니” 37절에,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38절에,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을 인하여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라고 했잖아요. 이 대목을 보면 사람들이 굉장히 좋은 사람들로 보이죠.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1차 전도여행을 할 때, 이고니온 루스드라 안디옥에 있을 때 사람들이 어느 정도로 사도바울을 좋아했느냐 하면 사람들이 눈이라도 빼주려고 했어요. 눈이라도. 진짜 눈 수술은 안 해서 빼주지는 않았는데, 눈이라도 빼준다고 하는 것을 봐서, 소위 신학 한다는 학자들이 사도바울에게 사탄이 집어넣은 치명적인 가시는 아마 안질일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주류(主流)들이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그렇게 빼달라고 기도했던 그 가시는 딴 게 아니고 눈이 안 좋아서 그렇다는 거예요. 첫 번째 근거는 눈이라도 빼주려고 했기 때문에. 아쉬운 게 눈이니까 눈이라도 바꿔주려고 한 거예요. 두 번째 근거는 사도바울이 힘들어할 때, 사람들이 사도바울이 어느 쪽에서 힘들어하는지, 또 이런 게 있어요. 사도바울이 글을 쓸 때는 힘이 있는데, 고린도교회 3차전도 때입니다. 막상 만나보니 인물이 영 아니다. 이래 된 거예요. 차라리 안 볼란다 할 때가 좋았다는 겁니다. 차라리 안 봤으면 상상이나 하지. 막상 그를 보니까 글과 얼굴이 매치가 안 되는 사람이에요. 이게 아마 눈이 안 좋아서, 눈에 병이 있어서 그런가 하고 억측들을 합니다. 쓸데없는 연구들을 해놓고 박사학위를 받은 거예요.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이렇게 잘 해주는 것을 하나의 기능으로 봤어요. 3초, 또는 3시간, 그때 잘 해준 거예요. 은근히 기대하고 또 기대고 믿었느니 하지 마세요. 기대고 의지하고, 전에 잘해준다고 한 것을 잊지 않았다고 이러지 마세요. 주께서 인도해야 되지, 갑자기 주님의 인도는 날아가 버리고 사람 의지하다가는 그거는 안 되는 겁니다. 그거는 주님의 십자가를 가리는 것이죠.
그렇게 해서 헤어지고 어디로 가느냐, 이제 사로잡힐, 붙잡힌바 된 예루살렘으로 건너갑니다. 사도행전 21장 13절에 보면 또 웁니다.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10절에 보면 재수 없는 아가보가 나오죠. “여러 날 있더니 한 선지자 아가보라 하는 이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11절,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자, 여기서 제가 질문을 드립니다. 성령이 이야기를 했어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이 이야기를 했는데, 이 말은 가지 말라는 이야기에요? 가라는 이야기에요? ①번 가지 말라는 이야기다. ②번 그러니까 가라는 이야기다. 몇 번 입니까? 사도바울도 성령 받았잖아요. 그러면 성령 받은 사람들끼리 성령 받은 사람의 것을 해석하는 거죠. “그렇게 하는 것은 나도 안다. 그러니까 나는 더욱더 당당하게 붙잡히기 위해서 나는 가야 돼.”라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니까 사람들이 울어요. 13절,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왜냐하면 사도바울은 아바타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아픔을 그대로 운반하는 사람인데, 그게 바로 사도바울이 받은 사명입니다. 이 사명에 대해서 고린도교회에 문제성이 있다고 했죠. 그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사도바울은 진짜 사도가 아니다. 왜?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에. 저렇게 하나님이 지켜주는, 인도하는 사도 같으면 하나님께서 저렇게 망가지도록 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도인데 친히 보호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고생하는 것 보니까, 이거는 지금 하나님께 저주받아 버림받은 존재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사도로 인정할 수 없다.” 이렇게 나온 겁니다.
고생해도 문제에요. 그러면 하나님의 진짜 종들은 뭡니까? 차 한 두 대씩 있고, 100평짜리 넓은 데서 살고, 날마다 놀러 다니고 그렇게 돼야 주의 종입니까? 사도바울은 이렇게 합니다.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네 번 보내고, 현재 나와 있는 것은 편지를 두 번 보냅니다. 사도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나를 사도라고 하지 않는 자들을, 고린도교회가 그런 자들을 색출해서 내쫓지 아니하면 내가 가서 가만두지 않겠다고 하고, 자기는 저 윗동네 마게도냐로 가요.
그리고 거기에 있는 디도를 보고 니가 나중에 사정을 이야기해달라고 드로아에서 만나자고 했는데 못 만났어요. 못 만나서 섭섭해서 마게도냐 위로 올라갔는데, 거기서 드디어 디도를 만났어요. 만나고 난 뒤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도님! 아이고, 해결 잘 됐습니다.” 그러니까 사도가 하는 말이 “내가 너희들 가운데 위로를 받는구나.” 그래서 디도 편에 보낸 편지가 고린도후서입니다. 고린도후서를 3차 여행 때 보내고, 그 다음에 기분이 좋아서 일루리곤까지, 일루리곤이 어디냐 하면 바로 이번 월드컵에서 준우승한 크로아티아, 그쪽까지 복음을 전하고 와서 그 다음에 배를 타고 갑니다.
그 전에 디도하고 만나려고 하는 그 시기에, 사도행전 20장 8절을 봅시다. 드로아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만날 때에 어떤 일이 있었느냐 하면, 안식일 첫날 떡을 떼려고 모이고 바울은 이튿날 떠나기 위해서 밤새워 강론을 했어요. 지금 우리처럼은 아니지만 밤새면서 까지 했습니다. 할 때에, 거기에 유두고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유두고라는 청년은 이렇게 성경에 이름이 기록될 정도로 상당히 본인의 의사도 없이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유명 하느냐 하면 졸아서 떨어져서 죽었던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그것도 1,2층이 아니라 3층에서 떨어졌어요. 떨어지니까 중력의 법칙에 의해서, 중력의 법칙이라고 하는 것은 거리에 반비례하고 질량의 곱에 비례합니다. 중력, 만유인력의 법칙에 의해서 떨어졌어요.
그래서 죽었습니다. 졸다가. 사도행전 20장 9절,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앉았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 층 누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 보니 죽었는지라” 자, 여기에 경찰에서 와서 현장검증을 하면서 왜 죽었는지 사도바울에게 책임을 묻겠습니까? 안 묻겠습니까? 안 묻죠. 그러면 사도바울은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될 텐데, 10절,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 하고” 11절,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래 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12절, “사람들이 살아난 아이를 데리고 와서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더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자, 이게 뭐냐 하면 아까 우리가 한 것을 다시 한 번 해봅시다. 모아이, 몇 번 나왔는지 모르는데, 이상하게 생긴 거성. 몸은 주님이고 지체는 같은 몸의 지체인데, 지체는 어디에 있습니까? 저 세상은 주님이 계시고 이 세상에는 사도바울이 활동을 하고 있죠. 사도바울의 활동은 사도바울의 활동이 아니고 누구의 활동입니까? 주님의 활동입니다. 주님의 활동이라고 했을 때 제일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아까 이야기한 매개체죠. 매개체가 뭡니까? 예수님을 죽이고 부활시킴으로서 여기서 무엇을 발생시키느냐 하면 죄를 의로 바꾸는 교환 장치, 기능을 여기서 발휘한다고 했죠.
이것을 증거 하는 거예요. 이것을 증거 하는데, 이게 중요한 거예요. 근데 사람들은 “아! 중요하다. 내가 예수 믿고 의인이 됐구나!”라고 하는데, 이걸 실습에 들어가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졸음이 왔고, 주의 뜻을 이기지 못해서 떨어졌고, 그것도 단층 같으면 3주 골절상이나 입을 텐데, 그것도 아니고 아예 죽어버렸어요. 죽어버리니까, 지금 강의 내용이 뭐냐 하면, 강의내용은 예수님은 생명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근데 강의 내용대로 실제로 죽음이 일어났습니다. 모든 사람에 의해서 죽었다고 판정 난 상황이기 때문에 이건 죽은 자가 맞아요. 죽은 자 맞는데, 다른 사람은 여기에 손을 댈 수가 없어요. 유일하게 사도바울이 손을 댐으로써, 생명을 줌으로서, 사도바울의 기적뿐만 아니고 그동안 밤새도록 강의한 강의내용은 옳았다. 이게 옳았다가 증명이 되는 겁니다. 단순히 병 고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아프고 낫게 하는 상황은 주님이 조절할 문제에요.
뭐 이것도 재미 붙여가지고 가만히 있는 사람을 떠밀어서 죽게 해놓고 또 안수하고, 이런 위험한 장난을 칠 사람은 없지만 그렇게 하면 안 돼요. “주여, 저와 함께 하심을 이 사람에게 보이소서.” 이거는 자기자랑이지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여기도 3층이잖아요. 누구를 한 번 밀어볼까요? “보세요! 죽은 사람이 살아났어요! 내 말이 진짜잖아요!” 이렇게 해서 증명할 필요가 없다 이 말이죠. 그거는 자기증명이지 주님의 증명이 아니에요.
주의 의해서 죽은 것을 알고 주의 뜻이 있다면 살아날 줄로 알고 사도바울은 이해했고, 그 사람들은 확고하게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거는 그냥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고, 밤새도록 전했던 그 복음 내용이 진실이구나, 이게 현실자체구나를 알게 되는 겁니다. 주님은 살아있다. 죽었던 분이 지금도 살아있다. 그래서 인간이 살아서 활동하는 그것은 보지 말고, 주님이 활동하는 그걸 보는 거예요. 그것이 이미 시작된 천국생활입니다.
그리고 난 뒤에 드디어 사도바울은 어디로 가느냐, 드디어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사도행전 21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유대인들의 소동을 일으키지 않게 하기 위해서, 유대인들의 예법대로, 성전에 들어갈 때에 더러운 것은 못 들어가니까 깨끗하게 예식을 차리고 성전에 들어갈 뻔 했는데, 사람들이 헛된 소문을 퍼트리기를 이방인들이 못 들어오는 성전까지 헬라인을 사도바울이 데리고 들어간 줄로 알고 흠잡아서 그 다음부터는 “뭐야! 그 사도가 우리의 전통적으로 내려온 이 율법을 노골적으로, 공개적으로 망신을 줘?” 이거는 하나님을 믿는 우리로서는 용서할 수 없다고 해가지고, 그냥 그 자리에서 죽이자 하고 달려들었습니다. 천부장, 천명의 군인을 가진 대장이 나와서 말렸습니다.
말릴 때에 사도행전 22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유창한 히브리말로 이야기를 합니다. 다메섹으로 내려가면서 예수님을 만났던 그 내용을 두 번씩이나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유념해야 될 것은 뭐냐 하면 이 이야기를 아그립바 왕 앞에서 또 이야기를 해요. 그리고 그 두 이야기 사이에서 어떤 차이점이 있는데 그 차이점을 발견하면 됩니다. 사도행전 26장 13절부터 보면 “왕이여 때가 정오나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서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이래 나와요. 그러니까 우리가 뭘 찾아봐야 하느냐 하면, 사도행전 22장 9절에 보면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더러 말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이것은 사도행전 9장 7절에는 이것이 안 나와 있어요. 소리만 있고 빛이라는 이야기는 없어요. 그리고 사도행전 22장 9절에 보면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더러 말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그러나 사실은 그들은 소리는 들었어요. 근데 여기에서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사도행전 22장 11절에 보면 “나는 그 빛의 광채를 인하여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렇다면 이 사도행전을 역사로 받아들이기에는, 이런 이야기를 역사 속에 끼어 넣을 수가 없게 되었어요. 그냥 끼어 넣어버리면 개인적인, 사적인 경험으로 끝나버려요. 그러면 그것은 그야말로 역사 속에 묻혀버립니다. 사도바울이 세 번씩이나 이야기한다는 것은 뭐냐, 역사를 찢어버리는 거예요. “나한테 일어나는 그 경험은 역사를 찢어버리는 주의 뜻이다.” 전에 부분을 통해서 뭘 보여줬다고 했습니까? 전체를 보여주죠. 모아이에서 나타나지 않는 부분이 예수님의 진수, 예수님의 복음 됨을 지금 보여주는 겁니다.
예수님이 계시기에 벌어진 사건인데, 그 사건내용이 뭐냐 하면, 이쪽 세상은 전부 다 어두움의 세계고, 어두움에서 태어난 나는 마땅히 장님인 것을, 주님 만나기 전에는 자기가 장님인줄은 몰랐는데, 빛 되신 주님 앞에서 비로소 내가 그동안 눈 뜬 장님으로, 당달봉사(겉으로는 멀쩡하게 눈을 뜨고 있지만 실제로는 앞을 볼 수 없는 눈)로 그렇게 꾸준히 살아온 거예요. 장님으로 살았던 그러한 행세가 뭐냐 하면 예수님을 못 알아보고, 예수님을 잡아 죽이는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그렇게 생각을 했던 겁니다.
그걸 아까 제가 했던 사도바울의 설교에 의하면, 그게 종교성이 많아서 그래요. 종교 빼고 살면 되는데, 그저 한 것 없이 거저 누렸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게 아니고 하나님께 이만큼 충성봉사, 십일조 했기 때문에 나와 우리 가정이 잘 됐다고 일반적인 교회에서 하는 것을 그대로 지금 세상에서 하고 있습니다. 세상 안 달라졌어요. 전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본성이 어디로 가겠어요? 한통속인데.
그래서 혹시 이제 강의마치고 내려가시거든요. 가면서 최장님! 박장님! 좋게 이야기하면서, 우린 눈떴으니까 하지 말고. 눈 안 뜬 사람들, 대순진리회 이런 사람들 이야기하는 거예요. 아, 안경 썼거든 선글라스 괜찮다고 이렇게 이야기해도 괜찮아요. 그게 실습입니다. 내려가서 실습하면 됩니다. 장님이 버스 운전 되게 잘해요. 170킬로씩 밟아서 속도위반하고, 장님이 운전을 왜 그렇게 잘하는지. 혹시 비행기 타고 해외여행가거든 파일럿이 장님인데 비행기를 그렇게 잘 몰아요. 대통령이 장님인데 그렇게 대통령을 잘해요. 장관이. 유시민이가. 장님인데 그렇게 말을 잘해요. 노회찬 장례식에 가서 막 울고. 장님이 장님끼리 모이니까 장님인줄 모르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알죠. 왜? 자신의 머리는 저 세상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팩트입니까? 이거 팩트입니다. 이게 사실이에요. 이게 아니면 우리는 지금까지 옛날 동화책보고 있었던 거예요. 동화책이야기 하고 있었던 거예요. 모아이에서 주님이 머리가 되시고 사도바울이 지체가 되는 이것, 지금의 이 팩트가 이 팩트에요. 주님이 살아계신다면 이 현상의 반복입니다. 똑같이. 그러면 목사님! 우리는 왜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안 줍니까? 우리의 주변에 있는 민주주의의 사회는 종교문제 때문에 폭력적이지 않아요.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옛날에는 국가종교였어요.
국가종교는 국가가 하나의 종교화시키는 것이 국가종교고,
종교국가라고 하는 것은 종교단체 내에서 국가적인 행정체제를 갖고 오는 것은 종교국가에요.
지금 천주교가 종교국가에요. 그쪽 동네에서는 대통령이 교황이 아닙니까?
그때는 이미 인간을 권력으로 지배하는 관계성이 딱 고정되어 있어요.
하지만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종교의 자유가 있습니다. 군에 안 가겠다고 딱 버티면, 여호와증인들 6개월 언도받고 가요. 교도소에 가면 군에 안 가도 돼요. 앞으로 6개월이 더 되겠지만.
지금은 폭력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할 필요는 없죠. 폭력은 아니지만 지금은 거대한 연대성이죠. 폭력적인 권력이 아니라 내가 알아서 기는 권력 앞에 우리는 복음에 대해서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살라고. 명절에 이런 소리하면 안 돼요. “엄마 나 주님을 만났어.” 이런 소리하면 엄마가 “니가 이러려고 내가 키워줬나? 아이고 이 웬수야!” 이래 된다 이 말이죠.
그래서 여기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죠. 사도행전 22장에 이야기가 나오고 또 26장에 나오는데, 17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그리고 18절에 보면 아그립바 왕 앞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이 이야기는 애초에 첫 번째, 두 번째에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주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거예요. 아주 구체적입니다.
눈을 뜨게 하여, 구원이란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가 나오죠. 이 세상은 뭐다? 어두움에서 일체성을 갖고 있고, 구원은 빛의 세계로, 그 다음에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그리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라고 주께서 시켰습니다. 사도바울이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아그립바 왕이 하는 말이 24절에, “바울아 니가 미쳤도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바울이 제대로 잘 전한 거예요. 양보 없이 전했고, 냉정하게 전했고, 똑바로 전했습니다. 왕이라고 해서 봐주는 것이 없어요. 왕은 이 땅에서나 왕이지 지옥가면 물 한 방울도 없어요. 땅에 뭘 걸치고 있으니까 왕처럼 보이죠.
그리고 24절,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25절,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 차린 말을 하나이다. 다만 이 그리스도를 믿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하니까, 아그립바 왕이 하는 말이 28절에 보면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이것을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왜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그렇게 싫어할까요?
정신분석학에서 전이라는 말이 뭐냐 하면, 뻔히 알면서 치료받기 싫어하는 그 고집. 내가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것. 담배를 끊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절대로 누구 지시받고 안 끊겠다는 그런 똥고집. 문제 있으면 문제가 있으니까 고쳐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끝까지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터치하지 말라는 그 고집. 그 집착. 그게 바로 악마의 권세가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특히 복음에 있어서. 그러니까 사도는 성공한 거예요. “니 악마의 권세에 있어.”라고, 딱 들추어내는 데에 성공한 것입니다. 안녕히 주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