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여름수련회 사도행전강해 제 6강(세속) - 이 근호 목사
사도행전의 중요한 테마는 거의 다 했는데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것, 가장 중요한 것이 남아 있어요. 이방인들에게 성령을 그냥 주심으로 구원된다면 왜 이스라엘에게 처음부터 창세기에서 범죄하고 난 뒤에 바로 이방인들이 구원받는 방식을 왜 동원 안 시켰느냐 하는 겁니다.
처음부터 이스라엘에게도 율법 주지 마시고 그냥 성령으로 와 가지고 구원하게 되면 구원받는 방법이 애초부터 깔끔할 것인데 왜 율법은 줘서 이스라엘이 오해케 해서 이스라엘 손에 의해서 메시아를 죽게 만들고 뒤늦게 나중에 와서야, 그 방법 아니야, 그 방법 아니야, 까치발 드는 그런 식 아니야, 그냥 있으면 내가 택한 백성은 건진다고, 마지막 순간에 그런 이야기를 하셔야 되는 이유가 뭐냐 하는 그 점입니다.
사실은 처음부터 그런 내용의 이야기를 사도바울은, 유대인들의 구원방법과 부딪히면서, 충돌하면서, 베드로와 충돌하면서 더 감추어진 내용이 갈라디아서, 로마서, 고린도전서, 여기에 여과 없이 다 담아놓았어요. 왜 하나님께서 그런 계획을 하셨는지를.
사도바울이 아라비아에 가서 계시 받은 것도 좋지만 실제로 세상에 나가서 유대인들의 구원방식과 날카롭게 대결함으로서 점점 더 그게 확실하게 정립이 되어서 사도바울의 편지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되는 겁니다.
초반의 시작을 이렇게 다시 한 번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방인의 구원방법과 유대인의 구원방법이 왜 다른가? 어느 쪽이 더 정답인가, 하는 그 점에 대해서 사도행전 10장부터 시작이 됩니다. 고넬료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오후 3시쯤 되어서 하나님의 천사를 만났어요.
베드로 만난 것은 그 다음날 만났어요. 그 다음날 12시쯤 되어서 베드로가 배고파 있을 때에 욥바로 가서 베드로를 윗동네에 보냅니다. 윗동네라는 것, 욥바가 지금의 텔아비브, 이스라엘의 상업적인 제일 큰 도시죠. 비행장도 여기 있고요. 텔아비브의 공항에서 내려서 예루살렘으로 갈 수 있어요.
욥바에서 가이사랴, 가이사랴에는 로마군인들의 군영, 주둔지가 있었어요. 예루살렘이 여기 있는데 예루살렘에서 뭐든지 가이사랴에 가서 재판받곤 해요. 로마의 허가를 받아야 되니까. 여기 있는 고넬료라는 사람에게 천사가 찾아왔고 베드로에게도 천사가 찾아왔습니다. 천사가 찾아왔을 때 하나님께서 두 사람을 만나게 해 준 이유가 뭐냐 하면, 유대인들이 구원받고자 하는 그 방식과 이방인의 구원방식과 차이가 나야 될 이유가 뭐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율법이라는 그 자체가……, 이미 인간이 비눗방울이라는 이야기를 했지요. 인간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여기에 선과 악이라는 법적인 정신에 완전히 통제를 받고 지배를 받고 있어요.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 인간은 선악과가 주는 프레스, 정신적인 억압, 윤리도덕적인 억압에서 질식하듯이 갇혀있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으로서 구원받는다, 구원은 탈출, 다른 말로 하면 해방인데, 해방이라 할 때 학생들 방학은 해방 아니잖아요. 놀겠다는 것이죠. 구원이 되려면 ‘어디서’가 성립되어야 되고 ‘어디로’가 성립되어야 돼요. ‘어디서’ ‘어디로’ 거기에다 ‘어떻게’가 나와요.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어디로 나오느냐?
그러면 ‘어떻게’라는 방식은 순서상 먼저 등장해서 그 ‘어떻게’(1)를 통해서 ‘어디서’부터(2) ‘어디까지’(3) 그 1번을 통해서 2번, 3번이 다 결정이 되어버려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는데 이 십자가에 죽으심이 율법에 의하면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갈 3:13)하는 거예요.
왜? 사는 게 힘드니까. 더운데 땀이 나니까. 자기의 욕심 때문에 자기가 밤잠을 못자니까. 해결책을 구하는 것이 불교 또는 여타종교, 여기에 기독교도 집어넣고, 천주교는 물론 옛날부터 여기죠, 이 모든 것이 다 여기에 해당됩니다. 천주교에 이야기인데요.
2013년도에 나왔던가, 나주에 가면, 몸이 아팠는데 어느 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나타나서 자기에게 안수를 하니까 몸이 나았어요. 그 때부터 자기가 모시던 그 마리아상에서 눈물이 줄줄 흐르고, 또 핏물이 흐르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천주교의 수천의 신자들이 그 마리아상 앞에 가서 그 상을 한 번 만져보려고 몰려들었어요. 그랬을 때 대구나 다른 천주 교구에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그 나주의 그 성모동산에 가는 사람을 우리 교구에서는 좌시하지 않겠습니다,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그런 이단들에게 현혹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라고 했어요.
그렇게 하고 난 뒤에 pd수첩, 그 pd수첩이 우리나라 최고의 오지랖 아닙니까, 그 프로에서 조사를 했어요. 과학적 조사를 합니다. 그게 과연 눈물이냐 아니냐? 핏물이냐 아니냐? 그걸 봤다는 신부 다 불러내 가지고 인터뷰 하는데 “본 사람이 있다 카더라.”부터 시작해서 거기에 대한 반박이 들어오면서 아니다, 그렇다, 구설수들이 많았어요.
천주교가 교세를 확장하는 것도 좋지만 자기가 가르치는 것 말고 다른 것이 왔을 때는 정치적 행위를 발휘하게 되어 있어요. 단호하게. 나주성모동산 그쪽은 오직 마리아만 섬기는 거예요. 예수님도 물론 섬기지만 보이지 않는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통해서 우리에게 마지막 때 우리에게 계시를 내린다는 겁니다.
기독교에만 있는 줄 알았지요? 천주교도 골치 아파요. 그런 것이 많습니다. 불교의 경우에 출발점이 뭐냐 하면, 힘들어 못살겠다는 거예요. 너무 사는 것이 괴롭다. 사는 것이 괴롭고 힘드니까 주로 돈 없는 쪽, 서민들 쪽에서 많이 불교를 찾지요. 배운 것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고 알려줘도 잠만 오고.
그냥 어떻게 빌면 복 받습니까, 그것만 이야기해 달라는 거예요.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바치라는 대로 다 바칠 테니까. 그게 뭐냐? 사람이 고생스럽다. 고통스럽다. 빨리 해결해 달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구원은 뭡니까? 불행에서 어디로 구원? 행복으로의 구원이죠. 자 그렇다면 이 불교에서 말하기를, 지금 기독교도 같이 언급하는 거예요, 불교에서 말하기를, 당신은 극락에 갑니다, 당신은 정말 불자입니다, 당신은 구원받았어요, 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 행복이 뭐로 증명됩니까? 돈 잘 벌고, 가정 화평하고, 남편들 다 담배 끊고, 술 끊고, 가사 돌보고, 애 공부 잘하고, 주로 그런 것들이 나 구원되었다는 증명으로 등장하는 거예요. 이게 왜 그러냐 하면, 불교경전에 그런 것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도 경전이 문제가 아니에요. 대중들이 그걸 원하고 있는 거예요.
절을 찾고 있는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이걸 원하고 있어요. 고통에서의 해방, 고통에서의 면제. 자 그렇다면 이러한 분위기에서 이 사람들이 무엇을 빠트리고 있어요? 그 고통이 어디서 오느냐를 지금 빠트리고 있지요. 그 고통이라는 것이 어디서 오느냐?
사람들은 말하기를, 고통이 어디서 오느냐 하면, 죄를 지어서 온다는 거예요. 이게 문제에요, 이게. 죄를 지어서 고통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뭐라고 했습니까? 잘 아는가, 복습해 봅시다. 복음은, 복음이란,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 복음이지요.
왜 이 세상이 고통 해야 되는가? 예수님의 죽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다녀간 곳이기 때문에 덩달아 죽어야 하기에 고통스러운 거예요. 이렇게 정답을 내려야 돼요. 죄를 지어서 고통스럽다, 이렇게 정답을 내리면 안 되고 주님의 죽으심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이 땅에서는 이런 말도 안 되는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이 이 땅에 그리스도와 함께 같이 있어줘야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죄입니다. 고통스러운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안 들고 왜 하필이면, why me, 왜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고통을……, 이래서 해답을 어디서 찾느냐 하면, 내가 어떻게 행동을 바꿔서 하게 되면, 내가 어떻게 마음을 바꾸게 되면 이 고통이 나에게서 떠날 수 있겠습니까, 하는 쪽으로 자기가 해결책을 스스로 만들어서 제시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사도바울의 복음은, 당신이 원인이 되어서 고통이 오는 것이 아니고, 이 세대 자체가 예수님이 들어오면 예수님도 고통 받게 되어 있고 그 예수님의 고난을 이해하라고 여러분들에게 고통이 주어집니다, 라고 이렇게 설명하는 거예요.
왜 그런가 하면, 아까 설명했듯이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러니까 내가 잘되었다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주님의 하신 일은 옳았습니다, 하는 쪽으로 모든 것이 정리가 되어야 돼요. 그래야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게 성령 받은 사람의 모습이에요. 길게 이야기했지만 짧게 하면, 인간이 이 땅에서 고생하고 고통 하는 것은 자기의 죄 탓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엄청나게 나옵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 어떻습니까? 네 죄도 아니고 조상의 죄도 아니에요.
사도바울이 1차 여행했던 그 루시디아라는 지역에서 날 때부터 앉은뱅이였던 청년을 사도바울이 걷게 했습니다. 그것도 마찬가지에요. 그 사람이 어떤 죄를 지었다는 이야기가 없어요. 그래서 모아이거석 이미지를 생각한다면 구원받고 난 뒤에, 성령 받고 난 뒤에 이런 것들을 알아요.
다시 정리합시다. 인간의 고통스러운 것은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주님의 고통에 동참하라고 고통스럽다, 라고 이렇게 정답을 내야 됩니다. 주님이 이미 고통스럽게 사셨다면 우리는 당연히 고통스러워야지요. 그러면 고통스러움을 이겨내야 됩니까? 아니에요.
고통스러움을 이겨내는 이것은 이를 악물고 악악거리면서 ‘이겨야 돼’ 그렇게 돼요. 성경에서는 고통스러운 것을 억지로 이겨내라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주님에 동참하게 된 것을 감사하라, 이렇게 나옵니다. 약을 올리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고통스러울 때에 이것은 내 죄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지만 주님과 함께 끈으로 묶여 있다는 것, 주님의 아바타기 때문에, ‘아, 이런 고통을 통해서 함께 있음을 알라는 계기로서 고통이 왔구나.’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렇게 생각하게 되면 고통이 지나갑니까? 아니면 더 센 게 오게 될까요? 어떻게 됩니까?
더 센 것이 옵니다. ‘어, 이것 봐라? 이걸 감사로 전환시켜? 그러면 이거 한 번 해보지?’ 새로운 심화문제가 등장합니다. 응용문제가 등장하고. 이것도 한 번 풀어보시지요, 하고 새로운 문제가 나옵니다. 처음에는 뭔가 고통 할 때, 내가 뭔가 믿음이 있어서라고 했다가 나중에 점점 더 고통이 오게 되면 내 믿음도 아무짝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내 믿음으로 이겨버리면 이것은 나의 존재증명으로 전환되어 버려요. 주님이 하신 것이 아니고 내가 한 것이 되기 때문에, 주님이 하시더라도 내가 믿어줘야 나한테 효과가 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주님과 관계없거든요. 그게 자기존재증명, 자기 잘남을 증명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더 센 것을 줘버려요. 더 센 것을 주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나는 주님을 믿은 적도 없고, 믿을 능력도 없고, 믿더라도 그것도 실패로 끝나고, 그 모든 것을 이제는 내가 가질 필요가 없어요. 믿음, 소망, 사랑을 내가 가질 필요가 없다는데서 오는 감사가 나옵니다.
그게 바로 욥기에요. 주신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신 자도 하나님이라. 사도바울도 그런 거예요.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은, 제가 한 것이 아니잖아요, 하는 뜻이에요. 어떤 일을 했더라도 “이것은 제가 한 것이 아닙니다. 제 믿음으로 한 것도 아니고 제 소망도 아니고 제 사랑도 아닙니다. 주께서 일방적으로 제 안에 와서 일을 벌였잖아요.”라는 고백이에요.
믿음이라 하는 것은 내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도로 주는 거예요. 주신 분에게 도로 드리는 거예요. 면류관 받았잖아요. 도로 바치는 것이 요한계시록 4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제가 쓸 면류관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남자목욕탕에 가서 어떤 노인이 힘이 없어서, 등이 근지러운데, 할 때는 젊은 사람이 등을 밀어줄 수 있어요. 그러나 그걸 밀어줬다고 해서 자기의 젊은 등판을 노인에게 들이밀게 되면 괴물 같은 90노인이 세 시간 동안 밀어도 때 다 못 밀어요. 그렇게 못되게 하지는 말자, 그 말이지요.
사태가 일어난 거예요. 주고받고 하라고 일어난 사태가 아니고 주신 그것도 그냥 잊어버리세요. 잊어버리게 된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안 잊어버리면 자꾸 내가 떠올라서 잠 못 드는 밤이 됩니다. 잊어버리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노인은 너무 잘 잊어서 문제가 되지만.
지금 제가 마지막 주제로 손대는 것은, 어떻게 이방민족에게 구원의 방식을 유대인과 관계없이 주시는가 하는 겁니다. 사도행전 10장 10절에 보면, 제 6시, 낮 12시에 배가고파서 뭔가 먹으려고 하니까 보자기가 내려오는데 11절에서, 그 안에 먹을 것이 있었어요.
딱 보니까 율법에 의하면 못 먹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한 수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고넬료가 베드로에게 빠져나갈 수 없는, 자기자존심 때문에, 자기율법적인 성향 때문에 빠져나갈 수 없는 것을 도와주는 겁니다.
세리와 창기가 착하기 그지없는 천사 같은 천심을 가지고 까치발을 해서 조금만 더 하면 천사가 될 것도 같은 그 사람을, 아이고 이 쪼다야, 하고 가르치는 거예요. 너 강도 돼 봤어, 이런 식으로. 무슨 짓 하는 거야, 너.
그래서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는 거예요.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사도바울이 베드로를 가르치듯이. 구원받은 이방인이 구원받겠다고 그렇게 닦달을 내는 유대인들을 가르치는 겁니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된 자를 가르치는 거예요.
교회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 나중 된 자에요. 온지 얼마 안 되어가지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식탁 막 닦고 있고 그러면 먼저 된 사람이, ‘우리가 너무 더럽혔나? 그러면 우리에게 무슨 문제가 있어?’ 10년째도 식탁 제대로 닦는 사람이 없었다는 말이지요. 집에서 하던 대로 대충 치워버렸다는 말이지요. 쓰레기 치우는 사람도 없었고.
그런데 오자마자, ‘내가 뭘 하지? 내가 초짜인데, 햇권사인데 뭘 하지?’ 이렇게 알아서 뭘 죽죽 할 때 먼저 있던 사람들은 되게 미안한 거예요. 이렇게 주님 생각하면서 계속 하면 되는데 죽 하다가 갑자기 고개 들어서, 나는 이렇게 하는데 당신은 뭘 하고 있지, 보는 순간 벌써 나중 되었어요.
못났기에 가르칠 수 있는 권한이 있는데 갑자기 못남을 유지하다가 자기가 마치 쪼다같은, 뭔가 주위의 선배들에게 철저하게 농락당하는 느낌이 확 드는 순간 그것은 저쪽하고 한패입니다. 그래서 봉사란 희생당한다고 여길 때, 남에게 농락당한다고 여길 그 때 그만둬야 돼요. 그만 안 두게 되면 그걸 빙자해서 남을 손가락질 하게 돼요.
‘나는 이렇게 하는데 너는 뭐했냐? 이 얍삽한 인간들아! 하여튼 얍삽하기는!’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 다음에 다른 교인을 보냅니다. 그것도 초짜에요. 초짜가 와가지고 둘이 싸우고 있는데 빙신처럼, 내가 여기서 뭘 하지, 이러고 있다는 말이지요.
사람이 싸움이 일어난다는 것은 이미 자기가 싸울만한 위치에 있다고 붕 떠서 그래요. 이걸 낮춰야 되는데 너무 붕 떠서 그래요. 내가 너에게는 안 진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너한테 지니 내가 차라리 죽겠다, 이런 식으로 나가는 거예요. 그래서 결론 내리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구원하시는 방법은, 지난 시간에 니느웨 성 이야기를 했지요, 구원의 방식은 아무것도 아닌 자를 구원하시는 그것을 통해서 오직 십자가의 피의 희생, 주님의 희생만, 예수님 단독자에게만 모든 영광이 쏠리게 하는 방식이에요.
좀 어렵지요? ‘나는 이렇게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이렇게 구원받아버리면 이것은 안돼요. 나는 이렇게 구원받았다, 가 아니라 “예수님은 죽었다가 살아났다.” 이걸로 멈추는 겁니다. 이거 믿어서 구원받았다, 가 아닙니다. 이거 믿어서 구원받았다고 한다면 나중에 치매 걸리면 그 때는 믿음도 날라 가요. 치매 걸리면, 예수님이 누구냐, 이렇게 돼요.
멈춰야 된다고요. 내가 치매 걸리든 뭐가 어떻게 되든지 간에 변함이 없는 것은,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이 사실은 변함이 없다는 것. 그러면 이것을 온전히 보이려면 자기는 정말 nothing, 아무것도 아니어야 돼요. 만약에 이 사실을 가리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거기서 얼쩡거리는 것이 돼요.
얼쩡거리게 되면, 나는 이 사실을 믿는다, 나는 선교했다, 이렇게 얼쩡거리게 되면 주님의 복음이 계속 가려지고 죽어버린다는 말이지요. 왜? 자기가 잘난체를 하면서 살아있으니까. 그러면 주께서는 더 이방인, 더 낮은 사람, 더 구원받을 가능성이 없는 사람을 계속 들이대서 우리 자신의 위상이 어디까지 낮아져야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계속 보여주는 겁니다.
이제 사도행전의 전체 주제에 대해서 우리가 빼먹은 것이 없어요. 빼먹은 것이 없는데 나머지는 뭐냐? 이렇게 이미 이야기함으로서 유대인의 구원방식과 이방인의 구원방식에 대해서는 정리가 된 거예요. 정리가 되었는데 이방인 구원방식의 어떤 난제나 재난, 재앙이 없느냐? 있어요. 그게 이방민족의 권세입니다.
이것을 사도바울은 1차, 2차, 3차 여행을 하면서 죽 느끼게 되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와서 핍박하는 것은 그런 식으로 정리하면 되는 거예요. 율법 없이 어떻게 구원받느냐, 하는 사람에게는 이방인들을 통해서 오히려 너희들의 허점을, 구원방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라고 정리하면 되는 겁니다.
사도행전 17장을 봅시다. 16절에 “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저자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유대인들만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 바울이 로마제국의 통치를 받고 있는 그리스사람과 만난 거예요.
거기에 아데미우상, 여신입니다, 여신을 섬기는 사람과 같이 만났어요. 18절에 보면,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쌔”라고 되어 있지요. 도대체 바울이 가진 이 복음이 어떤 내용이기에 이게 쟁론할 수 있는 여지가 발생했느냐 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나는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 이런 식으로 나올 경우에 스토아와 에피쿠로스학파와의 대결이 정확하게 규정이 안돼요. 나는 이런 식으로 구원받았다고 하면 개인적인 구원론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에피쿠로스나 스토아학파도 거기에 대해서 할 말이 있는 겁니다.
그러나 제가 여러 번 이야기했듯이 사도바울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거예요. 예수님을 어떻게 해서 구원받는다, 가 아니라 예수님에 관한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에피쿠로스나 스토아 이쪽에서는 멍~한 거예요.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시작을 뭐부터 하느냐? 자기 잘났다, 에서부터 시작하잖아요.
“내가 미래에도 좋은 나라 가기위해서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사도바울 당신은 어떻습니까?” 이렇게 나와요. “당신이나 나나 우리는 똑같은 것을 원하잖아요. 내가 잘되는 것. 당신하고 별 다른 것이 있겠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런 식으로 해서 행복을 추구하는데 당신은 어떤 식으로 행복을 추구합니까?” 라고 사회자가 물을 때 “나는 예수 믿음으로 행복합니다.” 이래버리면 그것은 같은 한통속이 된다니까요.
뭐라고 해야 되느냐? 그렇게 생각하는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럴리 없겠지만 제가 만약에, cbs나 그런 기독교방송국이 많이 있잖아요, 그런데 가서 <새롭게 하소서> 그런 프로그램에 출현했다 할 때 “목사님은 어떻게 그런 목회를 하셨습니까?” 한다면……, 물론 그럴 리는 없으니 이것은 가상입니다.
절대로 그 질문 자체를 그 뿌리부터 다 뽑아내야 돼요. 그래서 pd를 좌천시켜 버려야 됩니다. 너 때문에 후원금 다 끊어졌다고 해서. 그러나 바깥에서 복음을 외친다고 그렇게 해도 막상 tv에 나와서 대화할 때 보면 복음 다 없어졌어요. 이참에 내가 뜨는구나. 언론을 통해서 내 팬들 많이 확보했다고 나온다니까요.
그러면 그 자리에 주님이 안계셨습니까? 주님이 안계셨지요. 방송국 사회자만 있었지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내 몸을 둘러싼 시공간이라는 말이지요. 주님과 함께 있는 시공간이 아니고 내 잘남을 보이기 위한 시공간을 못 버리고 여전히 내가 그것을 차고 있었던 겁니다. 기저귀처럼.
그러나 성도가 되면, 사도바울 같으면 어디를 가든지 간에, 너는 나하고 말 섞을 잽이 안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들은 물고기로 말하면 저주의 바다 속에 빠져 있잖아요. 개한테 진주 던지는 식으로 그들에게 무슨 말을 섞겠어요. 일방적으로 선포할 뿐이지요. 그런 차원에서 봐야 돼요.
그렇다면 우리 복음입장에서는, 우리라는 말을 써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 복음입장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그들을 분석할 때는 그 스토아와 에피쿠로스라는 철학이 나왔으니까 그 철학자들이 도대체 무슨 논리를 전개했기에 대부분의 아테네 사람들은 사도바울 말을 듣지 않고 왜 이들 편에 서서 이들과 함께 사도바울을 공격했던가?
도대체 어떤 논리를 펼치는가? 그걸 지금부터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제가 이거 설명하면, “목사님, 옛날 철학 이야기를 왜 합니까? 시간도 아까운데.” 하는데 이게 옛날 철학 같으면 제가 말을 안 합니다. 오늘날 과학이에요. 과학인식.
에피쿠로스학파는 그 전에 선배 격이 있어요. 데모크리토스라고 하는데 데모크리토스의 선배 격이 또 있어요. 플라톤, 소크라테스, 이렇게 나옵니다. 여기서 뭘 말하느냐 하면, 세상이란 뭘 로 규정되어 있느냐? 세상은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 원자 또는 입자로 구성되어 있어요.
입자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을 쪼개고, 쪼개고, 쪼개고, 쪼개고…… 하면 결국에는 쪼개지 못할 입자들의 다발이 있다. 입자들이 있다면 이렇게 위에서 똑바로 떨어지겠는데 그 입자들이 가끔은 비스듬하게 떨어지기 때문에 여기서 변화가 생겨서 우주는 변화한다. 이것이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학파입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무신론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무신론, 신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그 말이죠. 그것은, 이 시대에 신을 지워버리고 그 자리에 누가 들어가느냐 하면, 인간존재를 그 자리에 집어넣은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그 시대 이전에 그리스 시대에 전쟁이 있었거든요.
전쟁이 있다 보니까 전쟁이 있는 그 국가 지도자한테 노동력과 그리고 징집을 당해서 자기 인생을 못살고 국가가 시키는 대로 모든 것을 빼앗기니까 전쟁이 지긋지긋한 거예요. 누가 옳고 그르고, 다 싫어요. 내 몸 하나 편했으면 좋겠다, 해서 나온 겁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최초의 윤리철학, 또는 실천철학이 스토아와 에피쿠로스입니다. 그들의 목적은 뭐냐 하면, 인간은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느냐?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는가는 두 가지로 달라요. 스토아학파의 행복은 뭐냐 하면, 세상의 원리를 알면 행복할 수 있다.
로고스라 하는데 이것은 이성입니다. 인간의 이성이 만물의 원리인데 감정보다 이성이 우위에 있다는 겁니다. 감정은 우발적이지만 이성은 한결같기 때문에 한결같은 로고스, 이성에 의해서 살아간다.
복음이 오기 전에 이미 이런 로고스 중심의 사고방식이 있었어요. 그래서 요한복음 1장에 로고스가 육신이 되니 그분이 예수님이라는 구절이 나오지요. 요한복음에서 로고스가 말씀이에요. 말씀이, 이성이 육신이 되면 예수님이라, 하는 구절이 있어요.
그래서 인간은 어떤 원리를 알고 있으면 감정 같은 것을 초연하게 버텨낼 수 있으니까 이성을 아는 것이 바로 행복이다. 그렇게 이야기했고, 에피쿠로스학파는, 그게 아니다. 쾌락을 조절하면 그게 행복이라는 겁니다.
너무 즐겁지도 말고 너무 재미있지도 말고, 너무 퍼지지도 말고, 적당하게 행복하고, 적당하게 즐기게 되면 그게 바로 행복이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보게 되면 이 이론이 낯설지 않지요. 오늘날 시중에 베스트셀러 1등부터 100등까지 나오는 책들이 다 이런 책들이잖아요. 인간은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는가?
어떤 경우에? 이 생존경쟁에서. 이 힘든 생존경쟁에서, 지옥 같은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되니까. 모든 것이 경쟁, 경쟁이에요. 궁중족발 앞에 족발집, 신당동 떡볶이집 앞에 떡볶이 집, 커피점 앞에 또 커피점, 편의점 앞에 또 다른 편의점, 모든 곳이 경쟁, 경쟁 없는 곳이 없어요. 경쟁 때문에 지쳐요.
진짜 단골장사해서 먹고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단골손님도 다른 곳에 다 빼앗기면 못 먹고 살잖아요. 심지어 개척교회도 마찬가지에요. 통계에 보면 하루에 합동 측 개척교회가 열두 군데가 생긴다는데 열두 군데 중에서 열 군데는 망해요.
신학교마다 등록금 거두려고 학생들 유치해서 졸업은 시키는데 개척교회해도 그게 안돼요. 나이 5십 넘어서 자영업하게 되면 1년 내에 80퍼센트가 망한다는 통계가 나와 있습니다. 누구나 시작할 때는, 남은 망해도 나는 안 망한다고 시작하지요.
그런데 동네사람이 먼저 알아요. ‘안되겠네.’ 동네사람이 예언자라. ‘저거 안 돼.’ 자리가 그 자리가 아니라고. ‘어떻게 이 자리에 애완견센터를 하는지. 여기서 저거 안 돼. 여기 노인들밖에 없는 동네인데? 개 키우는 사람도 없는데 왜 저걸 여기서 해?’ 이게 우리 동네 이야기입니다. 우리교회 밑의 이야기에요.
아무리 봐도 손님하나 없어요. 시장조사를 안 해서 문제고, 해도 문제고. 죄를 안 짓는다고요? 나 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경쟁자를 밟아야 자기가 살 수 있는데요. 나중에 이성주의가 칸트로 나갑니다. 인간은 도덕적으로 살아야 행복하다.
쾌락주의는 공리주의로 나갑니다. 존듀이라고 해서 우리나라에 교육의 기초를 두게 된 존듀이의 공리주의. 편리한 것이 진리다. 나중에 이게 나오거든요. 존듀이는 19세기 말 미국사람이잖아요. 칸트는 18세기, 19세기.
철학이 이런 식으로 한 것은 여기에 과학의 발전이 나왔어요. 과학이라는 것은 간단히 말해서 ……, 크게 쓸게요. 과학이라는 것은 뭐냐? 응축이에요. 모든 것을 하나로 응축시키는 겁니다. 응축이 되게 되면 이것만 응축이 되는 이유가 이것을 소유하면 되기 때문에 그래요. 내 것으로 가지면 돼요.
그 응축을 과학에서는 질량이라고 하는 겁니다. 과학에서 질량이라는 것은 힘을 가했을 때 가속도가 나오는 것을 질량이라 했어요. 뉴턴 때부터 그게 나왔어요. 이런 설명하면 과학에 관심 없는 사람들은 짜증을 내는데.
질량이라 하는 것은 응축된 거예요. 응축된 것은 소유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이것은 뭐냐? 내가 누구를 응축할 때 행복하다? 과학에서는, 내가 나를 붙들 때 이게 행복한 거예요. 비록 돈이 없고 남에게 욕을 얻어먹더라도 나는 나를 버리지 않으면 그 나름 행복한 겁니다.
자기가 하나의 입자가 되는 거예요. 자기가 자기를 끝까지 붙드는 겁니다. 못 놓으면 마지막에 자살하면 되니까. 자살까지 가기 전까지라도 꼭 나를 붙들고 사는 것. 누가 욕을 해도 나는 나를 배신하지 않고 꼭 붙드는 거예요. 이게 과학정신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기술이 발달하고 아무리 상품이 좋은 것이 나와도 내가 나로 확고하게 응축되는데 보탬이 되지 않으면 이 상품을 사지를 않습니다. 인공지능 같은 것이 있으면 남에게 물을 필요 없지요. 남에게 물으면 내 에너지가 빼앗기니까. 인공지능한테 물어보면 응축된 나를 손상시킬 이유가 없기 때문에 인공지능을 사는 거예요.
혼 밥, 이런 것. 무조건 나에게 응축되는 것은 계속 팔리는 겁니다. 음악의 가사를 쓸 때 남의 이야기를 하지 말고 내가 터트리고 싶은 가사를 담는 것이 뭐냐 하면, 그게 랩이에요. 랩의 원리가 뭐냐 하면, 본인 이야기만 하라는 거예요. 절대로 남 이야기 하지 말고 본인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남 이야기를 거기에 써버리면 그것은 랩계에서 퇴출입니다. ‘도끼’한테 맞는 수가 있어요. 꼭 자기이야기를 해야 돼요. 고생도 나의 이야기. 그러니까 이것이 젊은 사람한테는 먹혀 들어가는 거예요. 이제는 꼰대잔소리는 싫어. 나는 내 인생 살 거야. 점점 더 응축해가요.
모든 상품도 나 하나 지키기 위한 상품이에요. 거기에 계속 쏟아지고 있습니다. 가족의 정, 정하나 줄까요, 초코파이. 다 쓸데없고 필요 없어요. 무조건 나만 잘되면 조국도 필요 없고, ‘조~국’도 필요 없고. 청와대에 있는 사람.
조국도 필요 없고, 민족도 필요 없고, 나라도 필요 없고, 이제는 외국인이냐 자국민이냐 관계없이 나만 위한다면 그게 이태리사람이든 프랑스사람이든 누구든지 간에, 배를 몇 채 만들고, 여행을 하고, 그게 누구든 아무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어요. 나만 사랑해준다면. 물론 못사는 나라 사람하고는 결혼 안하겠지만. 꼭 살아도 외국남자하고 결혼해요.
그래서 배낭매고 유럽여행가는 이유 중 하나가 뭐냐? 하나 걸려들어라, 하는 겁니다. 노리고 가는 거예요. 전부 다 이것이 응축입니다. 지금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입자, 질량으로 모든 것을 응축할 때 이것을 수식으로 표현할 수 있어요.
그래서 수식화 된, 수학적으로 표현된, 이게 수학언어인데 이 수학언어로 함축(응축)될 수 있는 이 우주관, 이걸 내가 알 때, 소유할 때 그게 바로 행복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자, 거기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뭐라고 이야기 했을까요?
여기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어떻게 합니까? 18절, 19절에 나와 있지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무엇을 전한다? “몸의 부활”을 전합니다. 서로 대결하는 방법이 다르지요? 철저하게 그저 내 몸 내가 지키는 거예요. 내 몸 내가 지키기 위해서 필요한 수식은 뭐가 되느냐?
이런 것까지 다 알 필요는 없는데 현재 이론물리학자들이 만든 복잡한 수식이 있습니다. 긴 수식이 죽 나오지요. 죽 나올 때 이게 우주에요. 이게 우리가 사는 이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 복음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지금 학생들이 다 이거 배우고 있는데. 물리학대학원에서 그런 복잡하고 긴 수식들을 배우거든요.
중력과 입자들의 네 가지의 힘과 그 다음에 힉스 장에 나타나는 입자와 반입자, 그 다음에 힉스 장에 있어서 처음에 질량이 생기는 수식을 결합해서 우주는 이걸로 끝나버려요. 지금 이런 시대를 사는 사람에게 교회가 무엇을 이야기합니까?
“이거 알았어요? 주의 축복입니다. 유학 다녀와서 이거 알아서 박사학위 받고 교수 된 것이 주의 축복입니다.” 이렇게 되겠지요. 그게 바로 스토아학파, 에피쿠로스학파에요. 내가 행복하면 그게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그 행복은 상대적인 싸움에서 내가 승리하는 거예요. ‘나 교수 되었지. 너는 취직도 못했잖아.’ 이럴 때 사람들은 행복해지는 거예요. 누군가를 밟으면서 행복한 거예요. 혼자 행복하지 않고. 짓밟으면서.
성형외과에서 어떤 여자는 제대로 고쳤어요. 한 여자는 못 고쳤어요.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낍니다. 미장원에 갔는데 어떤 여자는 머리가 어울려요. 자기는 어떤 스타일로 해도, 송혜교 머리를 해도 어울리지를 않아요. 그럴 때 불행을 느끼는 거예요. 이런 시대에요.
모든 것이 나에만 집중하는 나에게 응축하는 시대에 사도바울은 뭐라고 복음을 전하느냐 하면, 예수의 몸을 주목하라. 예수의 몸은 죽었다가 사흘 만에 뭐 되었다? 부활했다. 그게 복음이에요. “목사님, 그래 가지고 먹혀 들어가겠습니까?” 먹혀들으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세상은 죽은 상태로, 죽음의 바다에 빠져 있다는 것을 그냥 알려주는 거예요.
살고 죽는 그것은 전하는 자의 몫이 아닙니다. 더 생각할 것은, 그러면 예수님이 죽었다 살아났다. 그것이 설교의 핵심이라면, 그러면 설교하기 쉽네요. 절에 가서 중이 염불하기 싫어서 녹음기 틀어대는 것처럼 교회도 목사가,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났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났습니다. 설교 끝.” 이렇게 손 떼면 되겠네요.
그럴 수 없지요. 데모크리토스에 따르면 이런 일탈이 변화를 일으킨다고 되어 있어요. 이런 일탈, 엉뚱한 짓이. 예수님이 죽었다 할 때 예수님의 몸은 무엇과 결부되어 있느냐 하면, 이런 세상, 이런 더러운 악마의 세상과 결부되어서 죽음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사건을 이야기할 때 이 세상을 아울러서, 맞물려서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맞물려서 이야기하려면 이 세상은 어떻게 체험하는가? 본인이 본인의 내부에서 이 세계, 내 삶, 내 행복, 나만 잘 살면 그것이 인생성공, 축복이라고 여겼던 자기의 몸이 그걸 충분하게, 낯설지 않게 설명을 해줍니다. 여기에 대해서 예외인 사람은 없어요. 혼자 기도원에서 설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맞닥뜨리고 마주치는 모든 것들이 우리 육신의 본성 있잖아요, 나는 무조건 나만이 행복해야 되고, 나만 성공해야 되고, 우리 집안 잘되어야 되고, 나는 보호받아야 돼, 그런 육신과 복음, 살아계신 주님과 아바타가 되어서 계속 부딪히는 겁니다.
그 부딪힘이 그대로 설교로 나오면 되는 거예요. 나 이렇게 개판입니다. 이처럼 나도 죄인이고 나도 돈이라면 환장하는 인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 같은 인간을 위해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부활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방언입니다.
이것은 이해될 사람만 이해됩니다. 남들이, 너 같은 인간이 구원받고 천당 가면 내가 손에 장을 지지겠다, 하는데 장을 지지세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이 당신 장 지져야 될 차례입니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남들 보기에 다를 바 없고 주님이 목수의 아들이라고 비웃음 받는 것처럼 다를 바 없이 똑같아요. 유별나지 않아요. 달리기 하면 10초 9에 끊고 그런 것 없습니다. 하기만 하면 승리하고, 그런 것이 없어요. 빡세게 야구장에서 기도합니다. “주여, 삼성라이온즈 5등 되게 하옵소서.” 지금 6개월, 7개월째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드디어 어제 5등 되었어요. 꼴찌 하던 삼성라이온즈, 지금 삼성 난리도 아니야. 기도의 응답입니까? 스토아학파의 기도의 응답이죠. 에피쿠로스의 기도의 응답이죠. 내가 원한편이 잘되면 남이 꼴찌가 되든, LG팀이 6등이 되든 관계없어요. 나는 무조건 삼성팬이니까. 제가 그렇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에서 우리가 초연할 수 없고 초월할 수 없어요. 사람이 사는 재미와 보람이라는 것은 뭐냐? 내가 밀어주고 내가 응원하는 쪽이 왠지 일이 잘 풀릴 때 복음 없어도 삽니다. 예수님이 그다지 좋아지지 않아요. 주께서 나의 기도를 응답해주는 것 같아요. 마치 나에게 특별대우를 해주는 것 같은 어떤 우월감 같은 것에 빠집니다.
그거 나중 된 사람입니다. 삼성라이온즈를 내가 응원한다면 삼성라이온즈는 나의 육체의 연장이라고 했지요. 내 몸의 연속이에요. 그런데 그걸 묵사발 만드는 일, 두산의 어떤 타자가 삼성을 작살내는 결정적인 안타나 홈런을 쳤다면, 그리고 그 타자가 어느 날 우리교회 나온다면 어떻게 하렵니까?
“주께서 당신을 사용하셔서 내가 밀어주는 팀을 완전히 좌절시켰습니다. 반갑다, 친구야!” 이렇게 할 수 있겠어요? ‘어떻게 왔지? 괜히 왔어.’ 눈 흘기면서 심술이 나겠지요. 이 본성을 죽을 때까지, 아니 죽음에 가까이 갈수록 이 증세는 점점 더 심해집니다. 그 치매 증세는.
점점 더 나만 챙기는 증세가 심해져요. 그걸 복음 전하는 기회로 활용해야 됩니다. 나같이 이렇게 못돼먹은 인간이 또 있을까, 라는 것과 예수님의 피를 절묘하게 결합을 시키라고 주께서는 나로 하여금 망가지고 또 망가지게 하는 거예요.
제가 어느 설교할 때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요. 왜 십자가의 은혜가, 감사가 없느냐 하면, 높아지고 또 높아지고, 더 높아지고, 더 높아지고, 높아지려고 하니까 감사가 없는 거예요. 십자가지는 것이 왜 그렇게 힘드냐? 높아지려고 하니까 십자가가 힘든데 낮아지고 낮아지게 되면 중력의 법칙에 의해서 그냥 들고 있어도 자꾸 내려가요.
더 못나고, 더 못생기고, 더 아무것도 아니고, 낮아지게 되면 십자가의 가는 그 길이 그다지 힘들지 않습니다. 내가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주님은 높아지니까. 나 같은 인간까지라도 살린다는 그 긴 낚시 줄의 길이가 점점 더 길어 보이는 거예요.
잘난 유대인들은 십자가구원이라고 해봐야 이것이 짧아요. “이만큼 했으니까 참 건지지 쉽지요, 주님?” 이러고 있다고요. 이것은 주제파악 못한 것이고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피의 위력은 이 낮아진 지하 25층까지 그대로 작용한다는 것에 깜짝 놀라지요.
십자가 지는 것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어요. 십자가 져야 더 빠른 속도로 낮아지니까. 굉장히 편하지요.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모습이에요. 그래서 주님은 사도바울은 더 낮아지고, 더 낮아지게 만들어요. 왜? 그거보다 더 낮은 사람을 건져내기 위해서, 사도를 보내서 건져내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저녁을 잡숴도 편안히 잡수실 수가 있습니다. 마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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