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자료

4강 방언

아빠와 함께 2018. 8. 4. 14:44
2018-08-04 08:42:28조회 : 15         
2018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4강-사도행전 강해:방언이름 : 오용익 (IP:61.84.208.92)
2018 여름수련회 사도행전강해 제 4강(방언) - 이 근호 목사

지난 시간 끝에 현상에 대해서 이야기했지요. 현상이란 부분을 가지고 전체를 나타내는 것, 현상이란 부분을 가지고 전체를 나타내는 것. 주님께서 전체를 이야기할 때에 그 전체를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마태복음이나 다른데서 전체를 표현하는 방법이 있어요. 현상적으로 그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세대’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세대를 둘로 나눴습니다. 이 세대와 저 세대로 나눴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것을 나누는 단절의 펜스, 장벽을 설정해요. 이것이 경계선인데 이 경계선이 만들어지는 곳에 뭐 두 개가 딸려오느냐 하면, 이 세대와 저 세대가 같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경계선은 하나지만 그 둘을 둘러싼 세대는 두 개가 되는 거지요. 맥도날드 햄버거 있잖아요. 빵은 두 개지요. 안에 있는 시금치와 토마토, 치즈, 이런 것이 있다는 말이지요. 그걸 갖고 오다가 알맹이가 쏙 빠졌어요. 쏙 빠졌을 때는 먼저 빵 두 개 쥐고 그걸 합쳐야 되지요. 돈이 아깝고 빨리 먹어야 되니까.

진짜 알맹이는 요 경계선이에요. 이 경계선을 사도행전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성령이라고 보면 됩니다. 성령이 임함으로서 이미 천국, 지옥 기준은 종결된 거예요. 끝났음. 성령이 없으면 누구라도 그리스도를 주시라 할 수 없음. 고린도전서 12장에. 성령을 받지 아니하고서는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할 수가 없음. 성령을 받지 않으면 율법의 종이 됨.

이렇게 로마서, 또는 갈라디아서에 써 있다는 말이지요. 사도행전에는 그게 안 나타나잖아요. 사도행전에는 사도가 왔다갔다 돌아다니는 그것만 나타났지 ‘선교 많이 하는구나. 우리도 성령 받아서 사도바울처럼 안수해서 선교사 보내서 우리교회 계속 키워내게 되면 바깥으로 빠지는 비용만큼은 유입되어 채워질 것이다.’ 그저 돈 계산, 또 돈 계산.

차변과 대변, 돈 계산. 선교한다고 이벤트 벌리면 저쪽에서 돈 얼마 낼까, 그것만 계속 생각하는 거예요. 사도행전이 그래서 교회에 유용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안디옥교회에 소위 지도자급들이 있어요. 시므온, 헤롯의 젖동생이라는 마나엔, 당장 기억나지 않지만 또 하나 있고 바나바와 바울, 이렇게 있거든요. 

그냥 넘어가지 말고 얼른 찾아보고 갑시다. 사도행전 13장 1절에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이 다섯명이 집단체제를 이룬 겁니다. 꼭 우리교회 같아요. 장로 없어요. 연합체를 이룬 겁니다.

여기서 두 사람을 하나님의 성령으로 시켜서 보낸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안디옥이 이방인교회의 새로운 선교의 전진기지가 되었다고, 베이스캠프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1차, 2차전도 전부 다 다시 안디옥으로 돌아오니까. 안디옥 대 예루살렘, 누가 더 세냐, 배틀 붙는 셈이 되거든요.

사도행전에서 자꾸 이런 식으로 가는 이유가 교회가 하나의 기업체니까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상품, 새로운 프로젝트를 제공해줘야 돈이 계속 들어오거든요. 그래서 목사가 새로 왔다. 새로 오게 되면 목사의 역량은 두 가지입니다. 교인 수 늘어나는 것, 헌금이 나오는 것. 

이게 잘 돼야 계약기간이 연장될 수가 있어요. 훌륭한 주의 종이라고 해가지고. 그래서 무리한 프로젝트를 하는 겁니다. 최저임금을 올려준다든지 그런 것 있잖아요. 정치적발언하면 안되는데. 그래서 촛불집회의 유지를 받들어서 계속 가겠다는 거예요. 그렇게 할 때 장기집권의 수순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렇게 되려면 당회장이 전당회장과 차별화되는 정책을 내놔야 돼요. 차별화되는 정책은 뭐냐 하면 가시적인 양적팽창을 제시하면 되는 겁니다. 거기에 적합한 것이 사도행전. 사도행전이 멋진 거예요.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이 구호 괜찮지 않습니까?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것은 속내가 뭐냐 하면, 내 것 네 것 없이 다 모으자는 그 말이에요. 돈 문제에요. 또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말은 뭐냐 하면, 안수해서 선교사 파송하는데 비용을 대자. 선교사 씨를 키우자. 어떻게? 젊은 애들 공짜로 필리핀에 보내자. 필리핀에서 총 맞을 일 있습니까? 

반은 본인이 내게 하고 나머지 반은 당회에서 댄다. 목사는 자기 돈 아니니까 맘 놓고 쓰는 거예요. 청년들에게 비전을 준다고. 비전이라고 해서 무슨 세제 이름인줄 알았어요. 비존(피존)하세요, 그런 것 있잖아요. 애들이 대학은 나왔지요. 청년실업률 9.5퍼센트, 체감실업률 25.4퍼센트. 대기업의 평균경쟁률 39대 1. 애들이 갈 데가 없어요.

갈 데 없으니까 맨 날 기도하는 거예요. 학원 다니면서 새벽기도 나오고, 학원가고 새벽기도 나오고. “취직시켜주세요. 취직해야 결혼할 수 있습니다.” 맨 날 이런 기도하는 겁니다. 중언부언기도 있잖아요. 이방인기도. 

그 애들에게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출구를 마련해주기 위해서 교회에서는 선교란 이름으로 보내는 겁니다. 안 그래도 외국 나간다고 그렇게 해서 되지도 않을 영어, 6개월 동안 영어 학원 다녀서 ‘헬로우’ 그거만 배워서 비행기타고 가요. 시시한데 가면 또 의미가 없잖아요. 아프가니스탄, 거기서 포로 잡혀 가지고 50만 불인가 나랏돈 나갔지요. 

그리고 파키스탄, 거기 가서 남자 만나가지고 이슬람 다 돼요. 선교 나간다고 나갔다가 남편 이슬람사람 만나서 들어오지요. 결국 인간은 뭐냐 하면, 살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살기 위해서. “살려줄게. 너 소원이 사는 거잖아. 그러면 교회가 살려줄게. 이게 복이다. 그러니 돈 좀 있는 사람 돈 내라.” 교회 경영이 뭐 있어요, 그게 전부 다인데. 뻔한 거잖아요.

이득 없이 젊은 애들이 무슨 교회를 나옵니까? 노인들은 에어컨 틀어주고 공짜로 커피 주니까 거기 우~, 가는 거지요. 또 예배참석하면 오백 원씩 준다고 하고. 서울에 그런 교회 많아요. 이쪽에서 한 타임 뛰고 저쪽 가서 또 뛰고. 예배참석하면 봉투에 돈 주니까요. 그렇게 해서 목사가 교인 수 늘리는 거니까. 돈 놓고 돈 먹기잖아요. 작은 교회에서는 그거 못한다는 말이지요.

참 이런 것이 어려운데요. 사도바울이 전도하면서, 이것은 아니다. 기존의 예루살렘에서 했던 방식을 그대로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전통은 아까 이야기했지요. 해석 작업이 무슨 작업 된다 했습니까? 해석 작업은 뭘 낳는다? 해석 작업은 권력을 낳는다 했지요. 이 권력이 정치행위에요. 제도라고요.

예루살렘이 구약 유대교의 전통을 고수하기 위해서는 그 백성들을 법적인 체계에다 옭아맸고 그 법적인 체계에 의해서 바라바를 살릴래, 예수를 살릴래, 해서 엄지손가락 업다운 해서 예수를 죽이게 만들었잖아요. 이게 한 개인이 한 것 아니에요. 

유대교란 권력체제가 집단적인 범죄를 한 겁니다. 이것을 계속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이름으로 유포를 하고 그게 옳다고 생각하고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다가 죽이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가다가 주님한테 걸린 거예요. 

그러니까 사울이라는 사람이 갔을 때 바울 되기 전의 사울의 머릿속에, 하나님의 일은 율법에 대한 해석체계가 정치행위로 등장해서 하나의 가시적인 권력의 집단화된 정치적 모양새를 가지고 까치발 드는 식으로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이 공식에 철저했던 사람이에요.

이렇게 될 때 율법이 이렇게 실제 한다고 본 겁니다. 그런데 사울이 아는 것은, 이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서 필요했던 악한 현상, 악행이죠, 이게 현상이라는 겁니다. 이것을 안디옥도 그대로 답습하기 시작한 겁니다. 

교회는 계급이 있어야 된다. 장로감독이 우선이고 그 밑에 집사 있어야 되고, 그 다음에 평신도가 있어야 된다는 이것은 어느 정도 유대교에서 봤던 계급제도를 그대로 도입한 거예요. 이것을 사도바울이 알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거기다 뭘 넣느냐 하면, 법체계를 깨는 방법을 고린도전서에서 이야기합니다. 고린도전서가 언제 쓰였냐 하면, 세 번째 전도, 마케도니아 밑에 아가야지역에 고린도가 있거든요. 여기에 겐그레아가 있지요. 

브리스길라가 에베소에 있다가 로마에 갔다고 했잖아요. 갔는데 여기 고린도에서 편지를 보내는 겁니다. 이것은 일방적인 제 주관입니다. 제가 보기에 세상에서 여자 이름이 가장 아름다운 사람의 이름이 뵈뵈에요. 얼마나 이름이 예쁜지. 얼굴은 안 봤지만 아마 예쁠 거예요. 뵈뵈. 유아용과자 이름 같지 않습니까? 뵈뵈 또는 베이베. 코미디에서 나왔던.

뵈뵈편에 편지를 로마로 보낸 겁니다. 3차 전도여행은 고린도가 주가 되고 2차에서는 데살로니가가 주가 된다고 보시면 돼요. 고린도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제 3차 여행 때 아볼로라는 사람이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사람인데 이 사람이 2차 여행 때 에베소에 왔다가 사도바울을 만나서 자기가 은혜 받고 난 뒤에 터키 쪽에서 그리스지역인 아가야에 건너가고자 했습니다.

가서 2년 동안 고린도교회에서 전도를 했어요. 전도를 했는데 감당이 안 됩니다. 그래서 눈물로 쓴 편지가 있어요. 고린도전전서가 또 있어요. 이것은 안 나와 있는데 그 눈물로 쓴 편지를 디모데 편에 보냈고 고린도전서는 아가야에서 제일 먼저 신자 된 사람이 스데바나인데 그 사람 편에 편지를 보내고. 그래도 해결이 안돼요. 

고린도전서 내용이 죽 있는데 아버지의 첩과 동거하는 사람이 있고 그 다음에 교인들이 서로 고소하는 일, 우상숭배 하는 일, 부부의 이혼문제, 그런 문제들 중에 이 계급문제도 있는 거예요. 거기서 사도바울이 언급한 것이 뭐냐 하면, 법체제를 뭐로 깨느냐 하면, 은사로 깨버립니다. 

은사의 특징은 우발성이에요. 잡을 수가 없어요. 오래 머물 수가 없어요. 설교를, 복음을 한 20년 전했다. 그 다음부터 복음 안 나온다. 그만둬야 돼요. 그만둬야 됩니다. 자리 고수하면 안돼요. 자리 고수하면 유대교적 기독교가 되어버려요. 예루살렘식이 돼요. 

예전에 담배 너무 피워서 죽은 유명한 사람이 있어요. 십사일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인데 이주일. 그 이주일이 수지큐라는 음악에 맞춰서 춤을 추면서 “오 수지큐!” 하고 무대에 나오는데 그 사람의 멘트가 늘 뭐였냐? 뭔가를 보여주겠다는 거예요.

자기는 뭔가를 보여줄 것이 있으면 쇼를 하고 이제 뭔가를 못 보여주면 코미디 그만 접겠다는 겁니다. 설교자가, 복음전도자가 뭔가가 안 나오면 접어야 돼요. 접는다고 지옥 가는 것 아닙니다. 할 만큼 했어요. 너 아니라도 주님께서 아버지께서 보낸 자는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6장 39절에 의해서.

그런데 유대교적 교회가 되어버리면 ‘사람이 뭐 그럴 수 있지. 중요한 것은 자리가 중요해.’ 이렇게 나와요. 그 대표적인 사람이 교황입니다. 교황은 인격을 논하지 않습니다. 교황의 신체는 두 개의 신체가 있어요. 하나는 법적인 신체가 있고 생물학적인 신체가 있어요. 

생물학적으로 교황이 나쁜 짓도 하고 엉뚱한 짓을 할 수가 있어요. 하지만 교황의 그 직, 교황의 그 권위는 교황의 윤리도덕과 상관없이 유지되어야 된다는 그 법칙이 20세기에 들어와서 천주교 라테란회의에서 결정지었습니다. 사람보지 말라. 자리가 중요하다. 그런 겁니다. 정치적발언하는 것이 아니에요. 최 순실이 나쁘지 박 근혜는 안 나쁘다는 그런 이야기 하는 것 아닙니다. 

이게 뭐냐? 정치적 행위라는 겁니다. 정치적 행위는 권력행위고 그 권력행위를 관통해서 이 세대와 저 세대를 구분시킨 분이 누구냐?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이 세대와 저 세대, 저 세대가 천국이거든요, 예수님이 이 세대를 뚫어가면서 그동안 천국과 지옥을 가로막았던 인간의, 악마의 그 권력체제를 예수님이 온 몸에 다 받아요. 그 권력체제가 쏘아대는 화살을 온 몸에 다 받고 그 받아서 형성된 정보를 성령을 통해서 성령 받은 사람에게 그대로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가도록 안겨버립니다.

성도가 움직이는 것은 이 세대와 저 세대를 가름하는, 햄버거 안의 속, 햄버거의 알맹이처럼 경계선으로 움직입니다. 경계선이 움직이면 거기서 뭐가 생길까요? 이 세대와 저 세대가비로소 정체가 부각되는 거지요. 이 세대와 저 세대.

제가 말로 하는 것보다 구체적인 성경내용으로 보면 좋겠지요. 고린도후서를 봅시다. 고린도후서 2장 15절에서 16절까지 누가 읽어보세요.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좆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좆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햄버거 빵이 두 조각이 있잖아요. 이 사람은 천국 갈사람, 이쪽은 지옥 갈사람. 그런데 여기 사도바울이 경계선으로 들어갑니다. 단절된 장벽이지요. 사도바울은 주님이 함께 있는 현상이기 때문에. 주님은 어떤 분이라고 했어요? 뭐가 복음이라 했습니까? 내가 구원받는 게 복음이 아니지요. 뭐가 복음입니까? 예수님은 죽었다가 살았다. 두 개를 다 집어넣어야 돼요.

죽었다가 살았다, 를 집어넣을 때에

지옥 간 사람
은,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 사람이 그렇게 죽었어.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 이렇게 되고

여기 구원받은 사람은 “어찌할꼬?” 아까 니느웨 사람처럼 ‘아, 이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 이미 나는 산자가 아니고 진즉에 죄로 말미암아 죽어있었구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져있었구나. 예수님처럼 아버지와 아들관계가 아니구나. 내가 성령 받은 사람 아니구나. 성령 받아서 그동안 법의 해석체, 나의 나를 위한 해석체제, 나의 의를 생산하기 위한 해석체제에 내가 종으로 팔렸구나.’를

이 사람들은 고백하게 되는 겁니다.
 

고백하게 되면 이 고백이 사도바울의 편지에 좍 깔려나오는 거예요. 동의하냐를 보는 겁니다. 체크하는 거예요. 로마서 8장 체크, 로마서 9장 체크, 로마서 10장 체크, 또 체크. 1장 체크 된 사람은 나머지 자동적으로 체크되는 거예요. 메일 삭제할 때 맨 위 칸에서 삭제키 누르게 되면 나머지 삭제키가 다 체크되면서 주르륵 삭제가 되잖아요. 

1장만 체크되면 전부 다 체크 되는 겁니다. 인간은 존재가 아니고 현상이라니까요. 그런데 이쪽에 지옥 가는 사람은 뭐냐? 인간은 존재라는 겁니다. 나를 위해서 예수 믿어야 되고, 나를 위해서 천당 넣어줘야 되고, 나를 위해서 심지어 삼위일체까지 공부하고 있어야 돼요. 

존재의 두드러진 딱 하나의 궁극적인 특징은 보호받아야 된다, 보호받는 거예요. 내 곁에 누가 있어서 나를 지켜줬으면 좋겠다는 이 보호, 이 보호본능이에요. 이걸 생물학에서는 유기체의 자기조직화라 합니다. 모든 유기체는 스스로 자기를 구성하는 본능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외부에서 병균이 침투할 때 면역체계가 작동하는 것처럼.

이것은 옳다, 그르다, 할 것 없이 본능이에요. 스스로 자기를 보호하는 거예요. 인간도 마찬가지에요. 인간존재도 보호막, 또는 보호체계를 갖고 있습니다. 카멜레온 같은 것 보세요. 다 자기보호색을 갖고 있잖아요. 인간도 마찬가지고. 스컹크란 동물도 자기보호하려고 방구를 뀌잖아요. 고슴도치는 가시를 잔뜩 세우고. 

고슴도치가 자식하고 성질부리고 싸울 때는 둘 중 가시가 누가 긴가에 따라 승패가 날 거예요. 아주 무서울 거예요. 존재는 보호입니다. 그러나 현상은 이미 보호가 찢어진 거예요. 보호가 없고 이미 찢어진 거예요. 그 찢어진 속에서 보호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나를 보호하세요, 가 아니라 주님이 시키는 대로 살 뿐이에요. 그냥 그대로, 그냥 이대로 살 뿐이에요.

목사님,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하는데 있어요. 존재가 아니고 존재를 스스로 찢고 삭제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 사람의 관계를 무슨 관계라고 하냐면 연인관계라 합니다. 특히 남자가 어떤 여자한테 반했을 때, 특히 김 비서한테 반했을 때 스케치 북 들여다보면서 “미소야. 나는 유치한 사람이다. 옛날 고전적인 방식으로 프러포즈 할 게.” 어디서 본 것은 있어가지고 피아노 치면서 노래 부르는 것 있지요.

사랑이란 뭐냐? 그대만 있다면 나는 없어져 줄게. 이게 사랑이잖아요. 자기존재를 알아서 삭제하는 것이 사랑이에요. 사랑이 너무 강렬해서 나를 던졌기 때문에 나 같은 것은 없어져도 괜찮아요. 너만 잘되면 더는 소용없어. 너만 행복하다면 내가 없어져줄게. 

이걸 가지고 이 승철이는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 하는 거예요. 심장이 찢어져도 좋다는 거예요. 그런 사람 없다는 거예요. 이거 따라하지 마세요. 너무 고음이라서 못 따라합니다. 인간은 자기조직인데 자기가 반해버린 사람이 나타날 때는 자기존재가 의식되지 않을 때 그 사람은 자기 사랑하는 사람의 그림자요 현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는 이걸 집어넣어요.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대표적인 사람이 전두환입니다. 노태우. 문재인도 넣어주자. 박 근혜도 넣어주고. 전부 다 존재입니다. 존재는 자기 권력으로 자기를 보호하려고 하는 반면에 사랑은 자진해서 자기를 찢어버리지요. 

그래서 그 사랑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희생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랑은 어디서 나왔는가?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 보면 아버지와 아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 있던 그 사랑을 성령이라는 택배로 그대로 우리에게 부어주게 되면 그 때부터 우리는, 내가 왜 사랑받아서는 안 될 나쁜 사람인가를 살아가면서 깨닫게 되는 겁니다.

로마서 5장입니다. 지금 사도행전에 그게 안 나타나요 이게 편지인데 이 편지 내용을 구성하기 위해서 주께서 사도들을 보냈는데 정작 사도행전에는 그게 나오지를 않아요. 그러나 로마서 5장에 보면, 죄가 더한 곳에 뭐가 넘친다? 은혜가 넘친다. 어느 정도 넘치는가? 은혜는 왕이요 나는 그 은혜의 졸개입니다, 하는 거예요.

졸개가 되는 재미, 그게 성도의 사는 즐거움이에요, 행복이고. 누구의 졸따구 되는 즐거움이에요. 그래서 진짜 믿음은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것처럼 백부장이 고백한 겁니다.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예수님께서 놀래서, 세상에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만한 믿음 못 봤다고 하시면서 소위 천국에 있다는 사람은 다 나가, 다 나가, 나가, 나가!

“좌석표 b에 4번인데요?” “다 필요 없어. 다 나가.” 다 지우고 이방인들 거기에 집어넣지요. 현상을 집어넣는 거예요. 혼자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함께, 예수님이 가는 곳에 현상도 같이 따라가는 그림자니까, 본체가 있고 본체에 붙어서 같이 그림자도 따라가는 거예요. 그걸 이방인들을 통해서 구원의 원형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현상에 불과하기 때문에 순서가 현상이 먼저가 아니고 주께서 지시하는 것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나타나는 것이 현상이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보기에는 뭐부터 보이는가? 주님은 숨겨져 있고 뭐부터 보인다? 현상부터 보이니까 이 현상을 통해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밖에 없거든요.

그러면 그 현상이 어떻게 주어지느냐? 이제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하느냐하면, 이 사도행전에서 첫 번째로 원리를 제공할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방언입니다. 방언은 내용으로 결정됩니다. 룰루랄라라라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룰루랄라라라, 이것은 다른 종교에도 다 있어요. 

영주에서 풍기 쪽 고개 넘으면 뭐가 나오지요? 단양에 가면 구인사가 있어요. 구인사에서 절 하다가 방언 터져요. 방언 터지고 기적 터지고. 기적과 방언으로 천태종단의 신도수를 수만 명 모았어요. kbs나 mbc에서 초파일에 단골로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 김장 담그기라든지, 봉사하는 장면들이 나와요. 부처의 사랑을 보여준다고.

그 봉사의 기초가 뭐냐 하면, 나를 초월할 수 있는 주특기들, 장기들이 하나씩 있어줘야 당신은 분명한 부처님 소속입니다, 라고 증명이 가능하다는 거예요. 자기존재증명이죠. 가시적으로, 그것도 반복적으로 할 수 있는 주특기가 방언이고 병고침 같은 것이 있어야 돼요. 그것 가지고 하는 거예요.

순복음이 이걸 베낀 거지요. 천태종이 그것보다 먼저 있었으니까. 천태종이 있기 전에는 정감록에서 그런 것이 나오고요. 성령을 안 받은 이상은 인간의 자기보호본능은 숨길 수 없습니다. 부처를 믿든지 예수를 믿든지 뭐든지 나 좋으라고 믿는 거예요. 나를 보호하려고, 나에 대한 보호막. 

그것 걸치기 위해서. 그래서 나는 미래에 대해 보험 드는 식으로, 좀 안심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현대 자본주의 이전에는 계급사회인데 계급사회는 권력이 개인보다 우위에 있었어요. 그런데 1789년 프랑스혁명, 그리고 그 전에 있었던 미국 독립전쟁에 의해서 모든 개인의 권력은 하늘에서 주어진다고 했어요.

이것은 거짓말이에요. 개인의 권력은 하늘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자기내부에 있는 괴물의 목소리에요. 나는 나 되고 싶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본주의에서는 권력이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고 본인이 본인의 권력이 되는 겁니다. 본인이 본인의 권력이 되기 때문에 이제는 외부의 대통령이나 그런 것이 무서운 것이 아니고 무서운 것이 따로 있어요.

그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여론, 다른 말로 하면 언론. 이게 권력이에요. 오늘날 현대에서. 진짜 무서워요, 여론권력. 국가권력, 외부적인 권력이 내부적으로 자체장착이 되니까 그 자체 장착된 권력이 무서워하는 것이 바로 여론이고 언론이에요. 김 부선, 이 재명이. 재미있잖아요. 특히 나이 70넘어서 할 일 없는 사람들은 만 날 하루 종일 이거 붙들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하는 것이 뭐냐 하면, 리스크제거하기. 위험부담제거하기. 이게 무슨 사업이냐 하면, 보험입니다. 모든 권력은 보험체제에 다 쏠려져 있어요. 옛날에는 노동을 하게 되면 부자가 되는데 지금 이 시대는 노동을 하게 되면 노동을 하는 그것이 자기를 스스로 가난하게 만들어요. 따라서 보험 몇 가지는 들어놔야 돼요.

보험 싫어하는 분 오늘 참석 못했는데. 보험반대전도사도 있어요. 보험은 미래에 올 수 있는 자기보호에 대한 위험을 대비하는 권력을 돈을 주고 미리 가지는 겁니다. 그래서 현대에 빈곤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어요. 하나는 금전적 빈곤이 있고 또 하나는 사회적빈곤이 있어요. 금전적 빈곤은 최저생계비로 충당할 수 있는데 사회적 빈곤은 도박이라든지 마약, 술, 담배, 그리고 해외 놀러가는 것 등을 하는데, 그런데 이것은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상대적으로 타인과 비교해서 빈곤을 느끼기 때문에 이것은 돈으로도 해결이 안돼요. 이 시대가 뭐냐 하면, 개인을 보호할 때 얼마나 많은 권력을 도입하느냐의 그 시대가 된 거예요. 이러한 시대가 된 것은 자기가 누군가를 지적해 줄 법적정당성을 갖고 있는 해석체제가 없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평소에는 보험에 의지하다가 주일에는 교회 가서 하나님이 자기를 보호한다니까 존재를 보호한다는 이 체계, 그 고리를 강제로 끊어야 된다는 이야기를 누가 해 본적이 없어요. 주위에서 누가 해준 적도 없고 하지를 못했어요. 아무도 안 해줘요. 나는 진즉에 죽은 자구나, 하는 이야기를 왜 안 해요? 아무도 이야기를 안 해요. 

여론자체가 그것을 언급을 안 하니까. 제가 주일 낮 설교에서 여론에 대해서 약간 언급을 했거든요. 연극이 끝난 뒤에, 그런 노래가사를 언급했어요. 배우들이 옷을 입고 무대에서 연기할 때는 조명이 거기에 쏠립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거예요. 그러나 연극이 끝나고 배우고 옷을 벗는다. 죽는다는 말이지요. 죽고 난 뒤에 뭐만 흐른다 했습니까? 정적만이 흐른다.

“정적만이 남아 있네~” 정적만이 쏴 흘러요. 존재는 사건이에요. 주님께서 너는 사건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너는 사건이고 그냥 현상이에요. 존재가 아니에요. 존재도 아닌데 왜 존재라고 하느냐? 법적해석을 잘못해서 그래요. 제대로 나를 누구라고 이야기해줄 어떤 복음적 해석을 교회도 이야기 안하지요. 불교도 이야기 안하지요. 

전부다 돈이나 떼먹으려고 하지 정작 네가 누구냐, 아무도 이야기해준 적 없어요. 그렇다면 그들의 처세는 뭐냐? 인간이 부활할 때 여기서 개인이 부활이 안 되니까 여기서 무슨 운동이 일어나느냐, 바로 공동체운동입니다. 공동체운동이 되는 겁니다. 김 진홍목사. 무슨 마을이죠? 두레마을이지요. 두레마을, 약속의 땅 개간한다는 이야기가 영화나 드라마에 나와요. <약속의 땅>이라는 드라마가 있었어요. 그런 공동체 운동을 시작한 거예요.

공동체운동하면서 좋다고 사도행전 2장을 들고 나오는 겁니다. 서로 내 것을 내 것이라고 하지 않고. 아예 도둑놈한테 맡겨라. 세상이 상대적빈곤이라는 것을 몰라요. 사회적 빈곤을. 주식지분이 50퍼센트와 5퍼센트인 사람이 같이 먹을 수가 없잖아요. 지분이 50퍼센트 이상인 사람은 화분 던져도 괜찮고 가위 던져도 괜찮아요. 밀수도 해도 괜찮아요. 그런데 5퍼센트 낸 사람이 조금만 이상한 행동해도 잘립니다.

이게 다 어디서 나왔다 했습니까? 보호. 보호는 자기사랑이지요. 지독한 자기사랑. 그걸 유대인은 뭘 로 감았다? 율법으로 감았어요. 오늘날 교회는 이걸 성경말씀, 성경공부로 감은 거예요. 나를 내가 지키기 위해서 성경공부 하자는 겁니다. 

이게 보통문제 아니지요. 그렇다면 성령이 왔다는 말은 뭐냐? 보호받을 이유도 없고 그럴 필요 없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니느웨사람들이 구원받은 그 방식을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시킵니다. 자 그러면 이제부터 방언이라는 것이 뭔지를 하겠습니다. 

방언은 예수님의 말씀이에요. 예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이 세대에 속한 사람은 예수님 세대에 속한 말을 못 알아듣습니다.
못 알아들어야 돼요. 왜냐하면 그래야
우리의 소속이 저주받을 이 세대에 속했다는 것이 갈수록 분명해지기에 그렇습니다.


어느 정도로 예수를 못 알아보는가? 그게 마태복음 12장에 나와요. 마태복음 12장을 잠시 봅시다. 이쯤 되면 여러분이 견디기 힘들 것인데 조금만 참아주세요. 얼마 안 남았습니다. 32절에 보면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이렇게 되어 있지요. 

누구든지 말로 예수님을 비난한다든지, 예수님을 못 알아본다든지, 예수님을 무시하게 되면 저주받는다? 아니에요. 뭘 받는다? 사하심을 얻는 거예요. 왜냐하면 지금 예수님은 인간의 몸으로서, 이 세대의 사람으로서 같이 살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뒤의 말씀을 봅시다. 잘 안하는데 다 같이 해 봅시다.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무엇을 받지 못한다? 사하심을 받지 못한다. 아직까지 최종적으로 천국과 지옥을 가름하는 그 절단장벽, 펜스……, 펜스 하니까 생각나는데요. 베들레헴에 가면 펜스가 있어요. 

그 장벽이라는 것, 성령자체가 장벽이 오기 전이에요. 그 장벽이 오기 전에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무시할 수가 있어요. “너나 나나. 너는 목수의 아들이잖아.”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성령이 오는데 언제 오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야 돼요. 하나님 우편의 자리는 새로 마련된 자리에요.

시편 110편에 보면 우편의 자리는 어떤 자리냐 하면, 우편의 자리는 예외 없이 심판하는 자리에요. 하나님께서 심판할 때 그냥 심판하지 않고 우편의 자리로 심판해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모든 능력이 우편을 통해서 이뤄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은 출애굽기 15장에 나와요. 하나님의 이름, 오른손에 있는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를 구원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구원이라는 것은 하나의 경계선을 이야기하는 거지요. 이스라엘존재가, 이스라엘집단이 홍해를 건너올 때 그 뒤에서 누구도 건너고자 했습니까? 애굽에 있는 군사들도 홍해를 건너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홍해바다가 이스라엘 사람들은 빼돌리고 그 뒤에 오는 애굽군대는 전부다 몰살당했지요.

그러면 애굽군대 입장에서 억울합니까, 억울하지 않습니까? 억울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사람은 물에서 사는 것이 아니에요.” 이렇게 되는 거예요. 물에는 오징어나 해파리나 그런 것이 사는 거예요. 그런데 밑도 끝도 없이 그냥 막 들어온 거예요. 그러면 그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쟤는요?” 쟤들은 왜 건너가는가? “그들은 내 백성이거든.” 내 백성이라는 말이지요.

하나님 우편에서 성령을 줬다는 말은,
성도는 이 땅에서 심판자노릇을 하도록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모든 일이,
나는 죄인이다, 그 자체가 외부에 있는 사람에게 심판기능이에요. 이게 고린도전서(6:6)에 나옵니다. “왜 너희들까지 고소하느냐? 너희가 천사마저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것을 너희가 몰랐더냐.”


애들이 뭘 안다고 애들 상대로 고소고발을 하느냐 그 말입니다. 애들이 뭘 안다고? 이 세대에 속한 사람들이 뭘 안다고 저 세대에 속한 사람들이 그걸 가지고 갈구냐 그 말입니다. 갈굴 필요도 없는데. 너는 왜 그 절단된 면, 단절된 면을 잊어버렸느냐 하는 겁니다. 

이미 권력을 뚫고 들어온 주의 영이 너희와 함께 있으면 너희는 그 소속이 이 지상의 소속이 아니고 하늘의 소속이거든요. 그러면 여기서 뭐하면 되느냐? 현재, 현재를 살면 돼요. 현재에 더하기 또 현재, 매일같이 현재를 살다가 마지막에 재림이 되는데 재림은 데살로니가 전서에 나옵니다. 

그 재림이 뭐냐? 현재의 넘쳐흐름, 이게 재림이에요. 현재하고 재림, 이 둘 다 특징이 있어요. 저 세상에 속하면서 이 세상에 속한 현상을 보여준다는 점이 현재 성도의 모습과 재림이 같아요. 주께서 자기 자신의 심판을 드러내는 그것이 재림이잖아요. 

이 세상이 이미 둘로 구분되어 있어요. 그 장벽이 뭐냐 하면, 예수님은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 이걸 집어넣고 성도로 하여금 이 내용을 실리게 해서 성도가 가는 곳마다 햄버거 빵이 두 조각으로 나뉘듯이 두 개로 확확 나눠지듯이 성령께서 그렇게 일하는 겁니다. 

그러면 방언은 뭐냐? 방언은, 이쪽 사람들은 향수로 알아듣고 반대편 사람들은 악취로 알아듣는다. 아까 고린도후서 2장의 내용이 그거예요.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고후 2:16)

같은 이야기를 했는데 한쪽은, 반갑다 친구야. 저쪽은, 무슨 개소리냐. 사도행전 28장 마지막에 봅시다. 사도행전 28장에서 그 뒷이야기가 없어요. 사도행전 2, 사도행전 3,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어느 교회에서 그런 주장을 했던가? 하 용조 목사가 그런 주장을 했던가? 하여튼 엉터리 소리를 했어요.

사도행전 28장 26절에 보면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자체가, 알지 못한다, 이게 성과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성과에요. 몇 명 더 구원시켜야 되는데. 그게 성과가 아니에요. 교인수가 왜 불지 않을까, 하는 이것이 성과가 아니고 “니들이 뭘 알아?” 이게 성과라니까요.

예수님이 죽었다. 그리고 예수님이 살았다. 나머지는 전부 다 제거대상. 이게 모든 사도들의 설교의 내용입니다. 이거 남기고 전부 다 제거해버려요. 성도 살리는 것은 참 쉬워요. 참 쉽습니다. 돈? 그거 뭐. 건강? 그게 뭔데요? 출세, 승진? 그게 뭔데요? 취직? 그게 뭔데요? 그게 뭐예요? 취직을 위해서 내가 살아가는 게 아니잖아요. 

이 중간지점, 취직과 상관없이, 죄지은 것과 상관없이, 교도소에 몇 번 들락거렸느냐에 상관없이 우리는 뭐다? 우리는 예수님의 복음의 내용을 담고 있는 이미 저 세상에 속한 사람이다. 이것이 그대로 현상으로 보여지게 되는 겁니다.

나는 더워서 전도 못하겠어요, 하는 이것은……, 또 아프리카 선교 보내주면 언제 또 꼼수를 써서 영국, 뉴질랜드, 호주, 캐나다, 미국, 이런 데로 다 가 있어요. 애들 공부시킨다고 다 거기 가 있어요. 그렇게 이야기하면, 너는 그렇지 않겠는가? 나도 그렇게 하지요. 그래서 뭐? 그렇다는 거지 뭐. 

뭐 훌륭한 선교사 없어요. 선교사 자체가 말이 안 되는데 무슨 훌륭함이 있어요. 훌륭한 것 같으면 니느웨 사람이 아니지요. 니느웨 사람이 되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잘못되었습니다, 에요. 

내 잘못이 아니에요. 조상이 잘못되었어요. 자식이 이상한 짓을 한다. 그것은 그 자식을 낳은 조상이 문제가 있어요. 나한테 문제가 있어요. 가족공동체가 그게 가족공동체에요. 서로 잘못하고 있어도 용납이 된다는 겁니다. 광산김씨, <살림남>에 나오지요. 그게 용납이 돼요. 광산김씨 아무도 모르는 것 같은데 그냥 넘어갑시다. 

결점투성이인 아버지가 허세와 허풍을 떨어도 그냥 가족끼리기 때문에 다 용서가 돼요. 자기 가족이라는 것이 하나의 보호막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가족 없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이다, 그러거든요. 고린도전서 7장에 보면 거기에 대해서 이야기해 놨어요. 복음 모르거든 이혼해도 괜찮다고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짝지은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느니라, 하고 결혼식장에서 목사가 그렇게 해도 막상 고린도전서 7장에 가면, “복음 몰라? 그러면 갈라서. 거기에 구애받을 필요 없어.” 아내? 아내 있는 자들은 뭐하라? 남자들은 그런 소리 들으면 좋~겠다. 조석으로 잔소리 안 들을 테니까.

여기 아내가 있는 자들은 이걸 실선으로 그리지 말고 점선처리 하라는 거예요. 서류에서 점선으로 찍어놓은 것은 뭡니까? 쪽 째도 괜찮다는 거예요.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라. 성경에서 반대로 해도 괜찮아요. 남편 있는 자들은 없는 것 같이 하라.

남편에 구애될 필요 없다는 말은 가정에 구애될 필요가 없어요. 고린도전서 7장에서. 왜? 그날이 속히 오기 때문에. 돈 있는 자나 없는 자나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저 세대에, 천국에 이미 속한 사람은, 지금 함께 섞여 있거든요. 경계선이 여기에 와 있다는 말은 이 세대와 저 세대가 함께 와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어디에 못 간다? 저 세대에 못가는 거예요. 이미 그 막다른 시대에 도달된 겁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장에서 사도베드로가 성령을 받고 난 뒤에 마지막 때를 거론한 요엘 선지자의 말씀을 거론합니다. 

뭐라고 되어 있는지 봅시다. 사도행전 2장 19절에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이렇게 하게 되면 여러분이, “목사님, 이게 무슨 내용입니까?”라고 하시는데 해석체제라고 할 때는 해석자체가 또 방언에 속해요. 그래서 이것은 무슨 내용이냐 하면, 이게 마지막 때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여러분이, “그게 마지막 때의 현상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그 마지막 때의 현상이 어떻습니까? 3차 대전 그런 겁니까? 아니면 개기일식, 그런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까?”라고 한다면 또 그 질문이 잘못된 거예요. 마지막 때의 현상은 성령은 우발적이라서 나라는 존재가 꼭 파악하라고 줄 의무가 없습니다. 

내가 마지막에 속한다면 골프 쳐도 이게 해가 변하는 거예요. 예를 너무 급조했다는 느낌이 안 듭니까? 내가 놀러가도 이것이 햇빛이 변하는 현상과 동일한 레벨, 같은 서랍에 들어 있는 현상이에요. 해가 변하는 것이나 성도가 골프치고 놀러가는 것이나 똑같이 종말이 왔음을 보여주는 현상이라 그 말입니다. 

그렇게 해석 안 되면 여러분 방언 이해 안 되고 있는 중입니다. 갑자기 조용해져서 내가 더 미안한데. 여기 2장 17절에 보세요.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했을 때 그 안에 들어 있는 내용의 원형은 예수님께서 일하신 그 내용이 들어 있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평범하게 목수로서 대패질을 한다고 합시다. 예수님이 대패질을 하는 이것이 바로 뭐가 되느냐 하면, 이것이 예언이고 이게 환상이고 꿈이 되는 겁니다. 어느 쪽에서 볼 때에,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볼 때에 저 세상을 보여주는 현상의 부분이에요. 

현상은 아까 이야기했지요. 부분을 통해서 뭘 보여준다? 전체를 보여주는 겁니다. 전체를 다 볼 생각하지 마세요. 경상도 말로 지줌지줌. 이거 이해되려나? 지줌지줌. 경상도사람은 알거예요. 이걸 통역해 보세요. 통역도 방언이니까. 제각기제각기.

제각기제각기 하던 일 하는 그것이 세상 사람들 보기에는 평범한 돈벌이지만 성도끼리 보게 되면 그게 종말임을 보여주는 현상이 되고 환상이 되고 꿈이 되는 겁니다. 성도로 살기가 뭐가 그리 어렵습니까? 

땀나면 가야산 계곡에 와가지고 물장구치고 노는 이것이 마지막 때 현상이에요. 주께서 현상으로, 성령으로 우리를 이끄시기 때문에. ‘오늘은 성령께서 가야산 계곡으로 가라고 하는구나.’ 가야산 계곡에서 “예수 믿어라!” 그런 소리 하려고요? 물장구치면서.

“물장구 치고~” 이러고 놀면 돼요. 거기서 삽겹살 구워먹다가 걸려서 5만원 벌금내고. 그것도 또 예언이지요 뭐. 그것도 현상이지요. 화내면서 돌아오면서 과속해서 경찰한테 걸려서 3만원 딱지 끊어서 합해서 8만원 나갔는데 그것도 현상이에요. 종말현상. 주께서 하셨습니다. 주께서 그 지점에 경찰 세워 주셨습니다.

방언이라는 것은 평범해서 못 알아들어요. 그게 방언입니다. 너무나 평범해요. 룰룰루루, 그런 것 아니고 너무나 평범해서 사람들이 못 알아듣는 거예요.

소속이 이 세상에 속하고, 나는 이 땅에 있으면서 경계선,
내가 어떻게 살든, 어찌되든 주께서는 죽으시고 살아나셨다,
그 덕분에 나는 구원되었다는 이야기를,
그런 뜻을 품고 주께서 지정된 장소에, 지정된 날짜에, 천 구백 몇 년도에 태어나게 했으면
그것은 주님의 역량이고 주께서 만드신 경계선입니다.
 

이제 우리가 할 것, 주의 마지막 예언과 지금 해야 하는 것은 밥 먹으러 가는 거지요. 밥 먹으러 갑시다.


'수련회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6강 세속  (0) 2018.08.04
5강 방언의 해석  (0) 2018.08.04
3강 선교는 없다  (0) 2018.08.04
2강 이중결정  (0) 2018.08.04
1강 무슨 일?  (0) 2018.0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