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여름수련회 사도행전강해 제 5강(방언의 해석) - 이 근호 목사
이 시간의 제목은 ‘방언의 해석’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외부인입니다. 외부인이기 때문에 외부인이 하는 모든 것이 방언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외부인의 모든 것이 방언이 된다면 이 세대, 쉽게 해서 인간세상,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알아듣지를 못하지요.
알아듣지 못한다는 그 결정적인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죽음입니다.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알아듣지 못한다면 성령이 오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남태평양에 가면 이스터라는 섬이 있어요. 그 섬에 ‘모아이’라는 거석이 있는데 그 모아이거석을 그려보면 이렇습니다.
눈은 작고, 코는 길고, 턱은 이렇게 길게 내려와 있고 이렇게 모자가 있어요. 원래 모아이라는 거석은 땅에 파묻혀 있어요. 실체는 이렇게 땅 속에 있겠지요. 이스터 섬의 종족은 이 거석이 한 6천개가 되는데 이거 만든다고 나라가 망했어요. 나무를 다 잘라내서 망해버렸는데, 이 거석이 머리는 외부에 나타나 있지만 몸체는 흙내부에 연결되어서 이렇게 있습니다.
그러면 방언이라는 것은 뭐냐? 주님은 안보이지만 주님과 연결된 이쪽에 속한 사람들이 방언을 성령을 통해서 하게 되지요. 방언이라는 것은 내용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못 알아듣는 이야기다. 살고자 하는 세상에 죽음을 앞장세운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말이 안 되지요.
어떻게 하면 우리가 살 수 있습니까, 가 통용되는 언어에 담긴 의미거든요. 어떻게 살 수 있습니까? 항상 언어라는 것은 단어에 의미를 담을 때 그 의미라 하는 것은 나라는 것을 주어로 해서 단어를 펼치거든요. 나를 중심으로 해서 단어를 펼치게 되어 있어요.
이거 이야기하려면 복잡해서 몇 시간 가야 되는데. 의미를 압축시켜서 그 다음에 결합시키는 것, 압축시키는 것을 은유라 하고 결합시키는 것을 환유라 하는데 이것은 문학에서 그렇게 이야기들을 해요.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오기 위해서 단어를 사용하는데 인간의 단어사용은 자기의 존재증명이에요.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내가 이런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방언은 자기중심이 아니고 죽으셨다는 그분, 사람에게 밀침을 당해서 죽었다는 그 분을 증거 하는 내용이기에, 어떻게 하면 내가 살고자 하는 쪽으로 귀를 기울여 듣고자 하는 그 대화가 우리 인간들 말고 엉뚱하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죽었는데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런 이야기를 하니까 이것은 대화가 되지를 않는 거예요.
그래도 사람들이, 하나님이 죽었다, 하면 관심이 있을 것이 아니냐, 그렇게 생각하는데 인간의 모든 의미는 심지어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내가 살기에 유리한 개념으로 하나님개념을 굳혀놨기 때문에 죽는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에 삽입될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심지어 성령받기 전의 모든 제자들도 예수님을 놔두고 내뺐던 이유가 예수님을 자기에게 유리한 예수님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예수님이 체포된 순간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친 거예요. 누가복음의 마지막 대목에 보면, 제자 중에 두 사람이 있었는데 그 중에 글로바라는 한 제자가, 예루살렘은 이제 별 볼 일없으니 가자, 해서 엠마오로 가는 길에 예수님께서 길을 막고 나서가지고, 내가 약속대로 죽었던 그 예수다, 하고 등장하니까 깜짝 놀라버려요.
그러고 난 뒤에, 난 예수님을 봤다, 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잖아요. 그러니 이것은 자기들끼리 통용되는 것이지 이 세상에서는 전달이 안 되는 겁니다. 항상 모아이라는 이 거대한 석상을 생각하세요. 머리는 나와 있고 몸, 지체는 여기 흙속에 있습니다.
이 몸을 가지고 교회라고 이야기하거든요. 교회 머리는 예수님인데 안보입니다. 그리고 그 성령 받은 지체는 이 세상에 이렇게 있어요. 그러면 여기에서 이 사람들을 공격하는 것은 곧 무엇을 공격하느냐 하면, 예수님을 공격했던 그 세력이 존재한다는 자기노출을 의미하는 겁니다.
명절, 설이나 추석 때 예수님 이야기 안하고, 종교 이야기 안하고 그냥저냥 지내면 집안 조용해요. 정치 이야기 안하고, 종교 이야기 안하고 그냥 정종만 사서 고스톱이나 치다가 집에 가면 돼요. 그러면 아무 일도 없는데 고스톱 치다가 심심해서, 너 요새 어느 교회 나가나, 이렇게 나오면 갑자기 좋은 분위기 다 깨지면서 집안 사단 나는 거예요.
엄마는, 이러려고 내 자식 안 낳았다고 울고, 나는 너희가 다 화목한 것이 좋다고 울고, 복음 아는 사람은, 그러니까 처자식도 다 버리라고 했지, 이렇게 자기정당화 시킨다고 성경말씀 내놓고, 집안 꼴이 엉망 되었어요.
아내는 또 엉망 되었다고 집에 가자고 하고, 잘 안되면 애 시켜가지고 빨리 집에 가자고 하고, 아빠보고 고만하라케라, 하고, 아빠는 복음 전하는 여기서 승리를 해야 되니까 앞뒤도 안 맞는 복음이야기를 해가지고 기어이 자기가 옳다고 차를 타고 가면서 끝까지, 백밀러 보면서까지, 내가 바르거든, 이러고 있어요.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굉장히 창대하게, 나중에 개판되어 버렸어요. 방언을 터트릴 자릴 보고 터트려야지 아무데서나, 개한테 진주를 던진 것과 똑같은 거예요. 그게 사실은 주의 증거가 아니고 자기자존심, 나 이만큼 많이 안다고, 십자가마을에서 배워가지고 써먹겠다고 나서다가 집안 꼴이 엉망된 겁니다.
성령께서 방언을 하게 하는데 그 방언해석을 어떻게 하느냐? 우리가 하면 안 되겠지요. 방언해석을 하는 사람이 바로 성령 받은 베드로, 빌립집사, 그리고 순교한 스데반, 사도바울, 이런 분들이 나서서 방언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그 방언해석이 사도행전의 설교대목에 죽 나오니까 그걸 지금 말씀 드리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강의는 방언해석입니다. 방언을 해석하는데 어떤 식으로 해석하느냐 하면, 인간의 이름과 하나님의 이름을 중첩시킵니다. 중첩이라는 것은 하나가 있어야 될 자리에 둘이 있는 것. 얽힘이라고 하면 좀 어려우니 그냥 중첩이라고 합시다.
사도행전 4장 25절이요. 베드로와 요한이 설교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23절에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류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고하니” 그래서 25절에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이렇게 했어요.
방언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면, 구약에 나오는 다윗이라는 이름, 다윗이라는 사람이지요, 다윗이라는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와 중첩된 사람으로 보는 겁니다. 인간의 이름 + 주의 이름, 이 구약부터 함께 있었다는 거예요. 같이 공유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의 이름은 뭐가 되냐면, 가면이 돼요. 방언해석은 인간의 이름을 제켜버립니다. 그걸 벗겨버릴 때 방언이 해석되는 겁니다. 다윗의 시편 2편을 거론했어요. 그게 26절에 나와 있지요. 시편 2편을 사도바울도 거론했는데 사도행전 13장 33절에 보면 역시 시편 2편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먼저 사도행전 4장 25절,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이렇게 해서 먼 거리에 있는, 시대적으로 뚝 떨어져 있고, 물론 공간적으로도 떨어져 있고, 시대적으로 떨어져 있는 그 다윗시대(약 bc 900년경)와 900년 이후의 예수님 시대가 같이 중첩, 또는 얽혀있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물리학에서 양자 얽힘, 중첩이라는 용어가 있거든요. 그것은 뭐냐 하면, 여기서 일어나는 것과 저기서 일어나는 것이 멀리 떨어져서 두 입자가 독자적으로 행동해도 사실은 전부 다 원인결과로 엮여져 있다는 겁니다.
내가 여기서 매직을 던지는 동시에 뉴욕에 있는 어떤 강아지가 짖는다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전혀 관계가 없는데 양자세계에서는 두 입자가 얽혀 있는 것을 그것을 가지고 ‘얽힘’ ‘양자중첩’이라고 합니다. 양자중첩을 가지고 컴퓨터를 만들거든요.
서로 동떨어진 시대인데 동일한 시대로 보는 거지요. 성령이 다윗과 함께 있었다는 겁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영이거든요. 다윗이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함께 있을 때 다윗의 가면을 벗기면, 확 제켜버리면 그 안에서 누가 등장하겠어요? 성령님이 일하는 것, 예수님의 일함이 거기에 들어 있다는 겁니다.
이 엄청난 해석이에요. 그러면 인간은 뭐냐? 삐에로. 삐에로는 웃지 않아요? 가면은 웃지만 속에서는 웃지 않아요. 인간은 삐에로처럼 다뤄졌다는 겁니다. 그 옛날에. 다윗 때는 몰랐는데 성령이 오고 난 뒤에는 소급해서 구약해석이 그렇게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시편 2편에 보게 되면……, 과연 그러한가 하여 시편 2편을 잠시 보겠습니다.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언제? 다윗시대에? 아니. 언제, 이게 언제 완료되는가? 예수님 십자가에 죽을 그 시대에 이게 완성이 된다는 겁니다.
시간의 거리는 무시하자는 겁니다. 모든 것이 현재라는 거지요. 천년이 하루같이, 하루가 천년같이. 주님의 성령안의 시간은 무슨 말씀이 던져졌는가가 중요하지 얼마나 시간이 흘러갔느냐는 의미 없어요. 다윗이 죽든 말든 어차피 다윗은 가면, 삐에로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냥 마스크에요. 그러한 마스크 역할을 또 누가 설교 했느냐 하면,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 스데반집사가 합니다. 여기서는 다윗이 아니고 모세를 두고 이야기합니다. 사도행전 7장 37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을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라고 해서 모세라는 마스크를 확 제켜버리면 그 안에 예수님 들어있어요.
나와 같은 선지자, 그 자체를 빼버리면 진짜 선지자, 모세에게 예언했던 진짜 그 원형의 선지자는 모세 안에 함께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현상이 일어났느냐? 모세가 가는 곳마다 소위 이스라엘의 본 자손들이 모세를 잡아먹듯이, 쥐어뜯듯이 반항과 반발을 연발, 연발로 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그 당시 사람들에게 방언을 해석하고, 이게 설교지요, 아까 말한 모아이거석, 그 석상의 이미지를 머릿속에 심어놓기 바랍니다. 보이지 않는 주님이 자기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 지상의 자기백성들을 깔아놓고 시간과 공간을 능가하는 다른 해석을 내버리는 거예요.
이 점에 대해서 지난주일 낮에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인간의 몸과 예수님의 몸 사이에 그걸 두르고 있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달라요. 인간의 몸을 두르고 있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은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로 계속 가는 것이 시간이고, 공간이라는 것은 어떤 지점에 있다가, 또 다른 지점에 있다가, 또 다른 지점에 있는 것이 차이가 난다는 것이 인간의 문명입니다.
나중에 이것이 19세기 말에 근대무선이 발달되고 기차시간표가 결정이 되어버리면 인간의 시간도 사적인 시간과 공적인 시간으로 중첩이 되어버립니다. 오늘날처럼. 여러분이 기차시간 늦출 수 있겠어요? 안되지요. 옛날 촌의 할아버지 같으면 기차 지나갈 때 손들면서, 스톱, 스톱, 세워달라고 하겠지만 그것은 안 되지요.
공적시간과 사적시간으로 해서 우리는 은연중에 공적시간에 지배받는 존재가 되고 말았어요. 사적인 시간보다 공적인 시간이 더 중요해요. 알박기 요즘 안 통합니다. 그냥 집 헐어내고 시작해요. 사적인 그것은 나중문제에요. 궁중족발? 안돼요. 5년 있으면 계약 끝나는 거예요. 괜히 흉기 휘두르지 마세요.
궁중족발사건 모르지요? 5년 계약기간 끝나면 집주인 바뀌면 나가야 돼요. 그것이 유지돼야, 공적인 시간과 공간이 유지돼야 질서, 국가권력이 유지되거든요. 사적인 것은 인정 안돼요. 인정과 동정이라는 사적인 것은 인간의 몸을 두르는 공적인 것에는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몸은 비눗방울이 이중으로 되어 있어요. 하나는 사적인 비눗방울과 또 하나는 공적인 비눗방울. 어쨌든 인간의 존재라 하는 것은 주변의 비눗방울 같은 것을 계속해서 형성시킨다는 사실. 혼자 가는 것이 아니에요. 동그란 것이 나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쉬운 예를 들게 되면, 자기 몸이 있는데 자기 차가 저기 있어요. 어떤 사람이 가면서 자기 차를 툭 건드렸어요. 그러면, 왜 나를 건드리는데, 이렇게 나오지요. “차 건드렸는데?” “그 차 내차거든.” 차라는 것은 나의 신체가 확장된 것이 차에요.
처음 운전할 때는 벌벌 떨었지요. 뒤에도 보고 앞에도 보고 다 봐야 되고 브레이크 밟기 바쁘지만 나중에 운전 10년만 해도, 이 팔이 누구 팔이냐, 핸들이 내 팔 같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가는 거예요. 만약에 십년 운전했는데 아직도 초짜처럼 하면 사고 납니다. 그저 내 몸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저 가는 거예요. 자식도 마찬가지고.
인간은 자기육체가 점점 더 확장되는 겁니다. 그래서 데이트폭력이 생겨나는 거예요. 가방 사줘, 여행비용 다 대줘, 음식 값 다 내줘, 카페의 커피 값, 스테이크 써는 값 다 내줬는데 어느 날,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하면서 난 다른 남자 만났다, 하면 패버리지요.
해줄 것 다 해줬는데, 이젠 지루해, 너무 질척대지 마, 하면 남자가 성질을 내면서 패버리는 거지요. 그동안 밑천 댄 것이 다 날라 갔으니까. 자기 몸의 소유물로 생각하거든요. 인간은 행동하게 되면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행동이 자기소유의 확장, 비눗방울의 확장으로 계속 연결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가정이라는 것이 그만큼 주님한테 위험해요.
주님의 몸에도 마찬가지로 시간과 공간이 있습니다. 여기는 시간의 중첩, 공간의 중첩이 되어가지고 천년이 지나든 어떠하든 간에 어디에도 주님이 함께 계심이 되는 겁니다. 어디에도 함께 계심이 되어서, 인간의 몸은 자기의 존재증명, 나 잘났다는 것, 자기 의,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예수님의 자기존재증명 하는 겁니다.
사도행전의 내용에서 사실 가장 어려운 대목중 하나가 뭐냐 하면, 왜 풍랑이 이느냐 하는 겁니다. 사도행전 마지막에. 사도바울을 잡아놓았으면 곱게 로마에 보내지 왜 풍랑이 일어나느냐 하는 그 문제입니다. 풍랑 없이는 왜 이야기가 안 되었을까? 스데반집사가 돌에 맞아 죽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스데반집사가 설교해도 그냥 감옥소에 갇혀서 죽어도 되는데 현장에서 돌 맞아 죽어요. 왜 풍랑이 일어나는가?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죽음으로서 모아이석상, 스데반집사가 죽음을 통해서 자기 마스크가 벗겨지는, 진짜로 남의 인생을 나는 그만 살래, 라고 외치면서 “그동안 갑갑했어. 이제는 이 몸을 그만 벗기고 싶어.”
<미션임파서블 폴아웃> 어른들이 가면 놀이하는 것이 미션임파서블 영화 아닙니까? 이제는 가면을 벗기고 싶어요. 미션임파서블, 그 영화요 <제 5전선>이라고 드라마로 해서 1960년대 그 때 재미가 죽였습니다. 세상에 그것같이 재미있는 드라마가 없었어요.
처음 나오는 장면이 그거거든요. 딩딩띵띵~, 나오면서 5초 후에 테이프는 파괴됩니다. 완벽합니다. 거기는 실패도 없어요. 뛰는 것도 없어요. 나중에 그게 영화가 되어서 미션임파서블로 나오는데요. 이상하게 이야기가 영화스토리로 빠져버렸는데요.
스데반집사님은 답답했던 거예요. 자기 몸, 주인은 따로 있는데 몸은 자기가 되니까 후딱 이 마스크를 확……, 미션임파서블 주인공 이름이 뭡니까? 잊어버렸어요. 그 마스크를 그만 쓸래. 이 안의 내용물은 주님 것이고 껍데기는 나고, 이것이 인간의 이름과 주의 이름의 중첩이잖아요. 다윗도 마찬가지고 스데반집사도 마찬가지고.
스데반집사 죽을 때는 ‘스데반 어디 있지?’ 하고 주님께서 일어서서 그냥 영접했지만 사도바울 같은 경우에는 죽지를 않습니다. 죽음보다 더 센 것이 환란이에요. 환란의 가운데 주님이 자기의 죽음으로서 거기에 자기 자리를 마련하는 겁니다. 풍랑가운데. 죽일 것이 덤벼드는데 그 죽음마저 이겨내지 못한 그 고유의 자리, 그 자리에 사도바울과 주님이 함께 있었던 겁니다.
마스크를 벗을 때 다윗과 모세 같은 경우가 달라요. 신약에 와서 드디어 성령이 오게 되면 마스크를 벗길 때 중첩된 인간이 드디어 자기역할을 다 했을 때 주께서 제시하는 그 가시적인 현상은 바로 죽음입니다.
누가복음 9장에 보면 변화산이 나오는데 변화산에서 엘리야와 모세와 예수님이 함께 있었지요. 그럴 때 모세와 엘리야가 대화하는 그 내용이 뭐냐 하면, 예수님이 언제 죽습니까, 하는 이야기입니다. 자, 예수님이 죽으면 그들이 사느냐? 그들은 이미 예수님 이전에 예수님이 대리이미지로 역할을 해서 죽을 고생을 했어요.
모세도 그렇게 엘리야도 그렇고. 그런데 누가 그렇게 괴롭혔더냐 하는 겁니다. 사도행전 4장을 다시 봅시다. 사도행전 4장 25절, 26절에 보면,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이렇게 되어 있는데 다윗을 누가 괴롭혔느냐 하는 겁니다.
지금 ‘방언해석’에 대해서 하는 거예요. 다윗을 괴롭힌 것이 시편에서는 이방민족이라고 되어 있잖아요. 그런데 신약에 오면 이방민족의 정체가 바뀌어져요.
옛날에 시편에서는 다윗이 속해있는 나라 이스라엘 대 이스라엘 외의 이방민족, 이렇게 해서 대치상태에 있었고 이스라엘을 통해서 메시아가 온다고 되어 있는데 지금은 어떻게 되느냐? 이스라엘이름이라는 이방민족,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이방민족이고 여기는 뭐가 있느냐 하면, 이스라엘민족에서 밉상 받고 추방된 사도들, 이렇게 돼요. 결국은 이방민족은 어디에 속하는가? 이방민족은 누구하고 결탁이 되느냐 하면, 이스라엘과 같이 결탁이 됩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사도신경에 그렇게 되어 있지요. 본디오 빌라도에게 권한을 누가 넘겨줬는가? 유대인들이 예수님 죽이라고, 사형시키라고 넘겨줬어요. 권력을 권력에게 넘겨준다는 이것은 종속을 의미하는 겁니다. 그래서
주의 이름과 인간의 이름의 중첩이 이쪽 이방민족한테는 없어요. 없는데 반해서 사도들의 경우는 지금 마스크, 예수님이 마스크를 쓴 거예요. 예수님의 아바타가 된 거라는 말이지요. 사도들에게는 이게 중첩이 되었으니까 보기에는 멀쩡하게 같은 인간이지만 안에 예수님이 들어 있으니까 사도들에게 이 이방민족이 고난을 제공하도록 사도들을 몰아세움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죽였던 그 세력, 그 권력이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아까 말한 그 이스터섬의 모아이거석을 다시 한 번 그려볼까요? 거석에 얼굴이 삐딱하게 있고 턱이 왜 그리 긴지 모르겠어요. 턱이 이렇게 길게 있고 이걸 흙에다 묻었을 때에 여기 위쪽은 시원한 바람 솔솔 부는 말짱한 곳이라면 여기는 묻힌 부분은 뭐냐? 모기한테 뜯기는 거예요.
밑에서 모기와 잡 벌레로 쑤셔대는 겁니다. 그러면 누가 아프냐 하면, 주님이 아파요. “네가 아프냐? 나도 아프다.” 드라마 대사에 그런 것이 있어요. “네가 아픈 것이 곧 내가 아픈 것이다. 그러나 참아라. 왜냐하면 너는 뜯길 만하니까. 죄인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칩을 심어놓으니까 내 몸이 내 몸이 아니고 예수님을 공격했던 그 잡 벌레한테 이상하게 뜯기는 운명이 되어버렸어요. 누가? 사도들이. 사도들이 뜯기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렇게 된 것은 예수님 때문, 너희들에 의해서 죽음을 당했다가 살아나신 그분 때문이라고 하니까 다른 사람들이 못 알아먹는 거예요.
그게 방언이에요. 알아듣지를 못해요. 방언을 통역한 것도 방언이에요. 방언이라 하는 것은 외국말. 외국말의 개념이 이제는 저 초월적인 하늘나라의 말이 되는 거지요.
자, 계속해 보겠습니다. 이방민족이 그리스도를 대적했다, 라고 설명을 하는 겁니다. 성령을 통해서 그렇게 이야기하거든요.
그러면 방금 모아이 이미지를 비슷한 이미지로 바꿔보겠습니다. 여기에 물고기가 있는데 물고기는 자기세계에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물고기가 가끔은 물 위에 올라가요. 물 위에 올라가서 세상을 바라보면, 나는 더 넓은 바다 가운데서 살았구나, 합니다.
물고기가 위에 올라가서 보니까 저기도 물고기가 올라오고, ‘어, 나 같은 것이 또 있네.’ 여기도 물고기가 올라오고, 그러니까, 아, 세상권력의 잡혀 있는데 나만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데 여기서 펄떡 뛰고 저기도 펄떡 뛰는 것이 있지요.
이러한 현상은 이것을 다시 연합하거나, 규합하거나, 조합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물고기, 즉 인간은 개인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어디에 잠식되어 있고, 잠겨 있다는 것이 수면위로 고개를 내민 물고기에게만 그것이 인식이 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고난 받아서 펄쩍 위로 올라가니까 이 세상 전체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악마의 세력이라는 바다에 잠겨있다는 것이 가끔 뛰어오르는 물고기에 의해서 증거 되는 거예요. 오늘 이 시간의 제목을 ‘물고기’로도 하고 싶어요.
펄쩍펄쩍 뛰는 겁니다. 그냥 가만히 살면 되는데 자꾸만 어떤 사태가 유발되고 일어나는 겁니다. 그중에 하나 사도행전 5장을 보겠습니다. 5장을 하기 전에 풍랑이야기를 다시 하겠습니다. 로마로 가는 길에서 일어난 풍랑에 사도바울은 곧 죽을 것 같아요.
배는 다 부서졌지요. 살 여망이 없어요. 없는데 사도바울은 살아있어요. 사도바울을 살리기 위함이 아니라 사도바울의 복음을 살리기 위해서 주께서는 사도바울을 보호해줍니다. 그런데 우리 생각에는 보호할 생각을 하지 말고 아예 바다가 잔잔했으면 더 좋을 게 아니겠어요?
사도행전 3장의 성전미문의 그 앉은뱅이를 예수 이름으로 낫게 했잖아요. 그런데 앉은뱅이가 걷게 된 것은 굉장히 기쁘지만 돌이켜서 생각해 보세요. 아예 처음부터 멀쩡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 아니냐는 거지요. 그런 생각 안 해봅니까?
결국 이것은 한 사람을 기분 좋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앉은뱅이와 병이 낫는 그 사이에 뭘 아느냐 하면, 나는 이제 걷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나는 죽음의 세계, 악마의 세계, 예수님을 공격하는 세계에 내가 잠겨 있구나, 라는 것을 예수 이름으로 믿는 순간, 펄쩍 뛰어오르는 순간 이 세상 전체를 볼 수 있는 계기를, 그런 기회를 앉은뱅이가 얻은 거예요.
몸이 나은 것이 문제가 아니고 예수님이 함께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그것이 최고다, 그 말이지요. 그 다음부터 내 몸이 나았다는 것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닙니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주님은 살아계시다. 주님은 살아계시는데 그 앞에서 나는 살아 있다고 하는 것은 역겨운 것이다, 그걸 증거 한다 그 말이지요.
살아있다고 이야기 하지 마. 죽어있는데 만약에 정 살아있다고 하려거든 이렇게 해라. 나는 죽어있는데 예수님이 내 안에 살아있기 때문에 그런 조건하에서만 나는 살아있다, 라고 이야기해야 돼요.
문장이 조금 길어요. 그냥 내가 살았다, 혹은 죽었다, 하면 될 텐데, 나는 죄인이다, 그러면 되는데, 나는 죄인 맞는데 내가 의인되는 조건은 내 안에 죄인 말고 죄인과 함께 계시는 주님이 계심으로 나는 의인으로 인정받는다,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하면 되는데 문장이 좀 긴 게 단점이에요.
그래서 뒤의 것 떼 내 버리고, 그래 나 죄인이야, 이렇게 하면 아주 간편할 수가 있습니다. 어쨌든 신약의 성령 받은 성도의 특징은 목적이 뭐냐 하면, 나 이렇게 구원받았다는 자기존재증명 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고, 나는 구원 안 받아도 되는데 주님이 자기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 나를 임의로 택했다는 사실, 주님이 살아있다는 사실, 그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가 이 땅 신약의 성도가 성령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에서는 다윗이 주님과 함께 매일같이 고생은 하지만 신약에서는 고생이 문제가 아니고 우선 이미 죽었다는 것이 구약과의 차이점입니다. 구약에서는 다윗이나 모세가 죽을 뻔 했지만 신약에서는 이미 죽었어요. 이미 죽은 자기 때문에 풍랑이 일어서 죽어도 그게 죽은 자이기에 당연한 것이고 산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계속해서 사도바울을 몰아세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기가 죽는 것이 소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날씨 더운데, 40도까지 치솟은 이 더위에 답답한 가면을 확 벗기고 싶지요. 내 것도 아닌데 남의 것을 왜 쓰느냐 하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에게 타인이 되는 겁니다.
그 다음 5장을 봅시다.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라고 되어 있어요. 여기서 사도행전 4장 마지막에 보면, 전에도 이야기했지요, 구브로 사람 바나바가 그 밭을 판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는 그것과 대조를 시키는 겁니다.
바나바는 밭을 팔아서 값을 가져왔다. 5장에 들어가면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땅을 팔아서 그 값을 사도 앞에 내놓았다. 그 차이가 없지요. 둘 다 값을 내놓았으니까. 그러면 값을 왜 내놓았느냐? 바나바는 자기가 주님의 아바타기 때문에 그냥 주님이 시키는 대로 값을 내놓았을 뿐이에요. 주님의 것을 주님이 내놓으라고 해서 내놓았을 뿐입니다.
그 과정에서 따로 주의 이름과 내 이름에서 내 이름이 삭제되면서 삭제되는 그 순간 주의 이름이 등장하거든요. 바나바는 그 순간 아낌없이 내 이름을 제거했어요. 주의 이름을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내 이름을 지워야 되는데 반만 지웠어요.
내 이름을 지워야 되는데 중간에 끊었어요. 반은 지우고 반은 주의 이름이라고 내놓은 겁니다. 그런데 주의 이름을 드러낼 때는 마스크를 다 벗어야 되는데 반만 이렇게 하니까 얼굴은 주님인데 아래 턱 쪽은 자기 수염이 나왔다는 말이지요. 괴물이지요. 이상하지요.
그래서 여러분 알다시피 이 부부가 작당을 해서 땅을 판 값을 반으로 잘라서 냈더니 베드로가 그걸 알고, 네가 사람을 속이는 것이 아니고, 그게 바로 사람 이름이에요, 네가 사람을 속이는 것이 아니고 4절에, 하나님을 속인 것이다. 이게 주의 이름입니다.
주의 이름을 네가 사람의 이름으로 훼방질을 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둘 다 다 죽었다는 이야기잖아요. 그러면 처음부터 안내면 어떠하겠는가? 처음부터 아예 아무것도 안내면 안 죽었지요. 그러면 처음부터 내지 말 것을. 안 낼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자기 이름이, 인간의 이름이 가만있지를 않는 이름이거든요.
인간은 자기 이름을 자기존재증명하기 위해서 자기 행동에 나서게 되어 있어요. 등신처럼 가만있는 것이 인간이 아니거든요. 꼭 자랑질을 하고 표를 내기 위해서, 나 여기 있어요, 나 봐주세요, 하는 그 본능이 있는 겁니다. 그 본능이 있는데 하필 절에 가서 안하고 교회 가서 한 거예요.
사도 앞에서, 저 헌금 내는 모습이 참 아름답지요, 참 예쁘지요, 참 자랑스럽지요, 하고 낄낄대면서 낸 겁니다. 여기 5장에서 사도베드로가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3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이렇게 했어요.
갑자기 사단, 악마가 나옵니다. 두 번째 시간에 했지요. 악마의 특징은 뭐라고 합니까? 악마의 특징은, 주님을 알면서도 치료받기를 거부하는 것. 정신병 환자 중에 굉장히 많습니다. 그리고 잠재적정신병환자들도 마찬가지고.
자기가 뭐가 모자라고 뭐가 병인지를 알면서도 절대로 병원에 안가요. 나 이렇게 살다가 죽을래. 특히 연세 많은, 적어도 70이상 된 사람들, 70에서 80이나 90세 되면 여기에 무슨 지수가 상승되느냐 하면, 고집지수가 급상승합니다. y=x가 아닙니다. y=x²+bx+c, 급상승해요. 70대 고집 다르고, 80대 고집 다르고, 90대 고집 달라요.
그게 뭐냐 하면, 속에 있는 괴물이 점점 더 위세를 발휘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 때 아버지는 아버지가 아니에요. 70까지는 대화가 됩니다. 70대가 있으니까 말조심해야 돼요. 70대까지는 얼추 대화가 돼요. 80 넘으면 대화가 안 됩니다. 90넘으면 괴물입니다.
90된 노인들에게 뭔가 인격이라든지 품위를 얻고자 하시면 안 됩니다. 반송장이고 반인간이고 그렇게 보시면 돼요. 반인반수? 하이브리드? 반인반수. 혼합체. 그런데 이게 인간의 본색입니다. 인간은 괴물이 우세해요. 사탄이 우세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은 자기존재증명인데 자기존재증명이라는 것은 내가 존재할만한 가치가 있다는 자기정당성, 자기의거든요.
이것이 그동안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꾹꾹 눌려져 있다가 이젠 점점 더 두뇌에 산소가 공급이 안 되어서 여기에 혼란이 일어나게 되면 그야말로 개구리나 곤충, 그리고 벌레가 갖고 있는 레벨의 본능만 남아 있어요. 충동이라 하는데 충동만 발휘해요.
빛 쬐이면 어두운 쪽으로 비키고, 배고프면 먹고, 다시 어린애로 돌아가는데 어린애는 예쁘기나 하고 귀엽기나 하지 그냥 동물인지 뭔지 그저 감각에만 의존해서 하루하루 버티는 것. 그 때는 막 욕도 나오고요. 평생 욕 한마디 안 해서 천심인데 막 욕도 하고 그래요.
악마가 교회의 모습을 드러낸다는 이것은 교회라는 것의 그 목표가 예수님의 지금 살아있다는 그것이 목표지 네가 살아있다는 것이 목표가 아닌 동네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기 위해서 이런 사건을 유발한 겁니다. 반을 냈다는 것은 부부가 둘 다 자기존재증명, 우리는 뭐든지 선택할 자유가 있고 뭔가 결정할 자유가 있다는 그 자체로서 그 정도 권한은 적어도 나에게 있을 거야, 라고 헌금을 하면서도 헌금에 뭘 실었느냐?
나는 정당하다. 나는 존재할 만한 가치가 있다, 를 헌금에다 실어서 교회에 낸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사탄의 등장을 의미하고 사도행전에서는, 그것은 네 안의 죽을 이유를 그냥 외부로 노출한 것이라고 분명히 지적해 주는 겁니다.
그것이 있고 난 뒤에 8절에 보면, 남편이 먼저 죽고 아내가 와서 또 거짓말 하니까 9절에 보니까,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이렇게 되어 있지요. 또 죽었어요. 부부가 한 날에 사이좋게, 아주 다정도 하여라, 다 죽었어요. 부부가 죽을 때 같이 죽는 것이 가장 다정한 부부거든요.
잘 살았다. 님아, 요단강 혼자 건너지 마라. 님아, 강을 혼자 건너지 말고 같이 건너자. 이렇게 부부가 같이 죽을 때에 이 대목을 보면서 11절에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한 거예요.
이게 아주 즐거운 일인데 두려워하지 말고 기뻐해야 돼요. 왜냐하면 주님이 살아있다는 것이 빈말이 아니라는 것. 우리가 살아있는 것보다 더 확실하게 살아있다는 것을 죽는 사람을 통해서 알 수가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대목을 가지고 오늘날 교회에서 설교를 한다고 할 때에 설교를 그냥 외형적으로 하게 되면, 여러분이 헌금하실 때 처음에 헌금하겠다고 결정한대로 줄곧 밀어붙여야지 이틀 뒤에나 일주일 뒤에, 교회 나와서 헌금 바치기 두 시간 전쯤에 ‘주여, 좀 깎읍시다. 갑자기 애가 아파서 수술비가 필요합니다.’ 이런 식으로 하시면 하나님이 살아 있기 때문에 여러분은 죽습니다, 라고 목사가 설교한다면 그 설교는 어떤 설교에요?
상당히 은혜로운 설교일까요, 언어폭력이 될까요?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반박을 어떻게 해야 됩니까? 처음부터 아나니아 삽비라는 주님의 가면으로서 주와 함께 있지를 않았어요. 그래서 이 대목에서, 안받아줄 사람들은 철저하게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주께서는 받아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기준을 봤을 때 아직 안 죽고 사흘 뒤에 헌금을 내려고 준비했던 사람은 벌벌 떨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 다음 차례가 내 차례인가, 이렇게 할 때 뭘 주의해야 하느냐 하면, 성령이 찾아오기 전에 이미 성령이 임한 사람과 성령이 없는 사람을 성령이 알아서 구분한다는 이 점에 우리가 눈을 떠야 돼요. 헌금 내건 안내건, 헌금 한 푼 안내고 자기가 갖다가 써도 안 죽습니다. 왜? 성령이 그걸 지시했기 때문에. ‘너는 갖다가 써라. 헌금 낼 필요 없어.’
모든 판단과 그 모든 것이 딱 하나입니다.
이런 행동을 함으로서 내 잘남을 이런 식으로 보일거냐, 아니면 나는 어차피 개판입니다, 하는 쪽으로 나갈거냐, 하는 거예요.
나는 어차피 죽은 사람입니다, 하는 쪽으로 나갈 것이냐? 그러면 그 사람은 성도고 내가 괜찮게 살아 있는데 천국에서도 괜찮게 살아야지, 라고 계속 자기존재증명을 갖고 우긴다면 주님께서는 어떤 경우라도 그것을 구분시켜서 내치게 될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게 되면 이미 우리는 죽은 자기 때문에 죽은 자는 두 번 죽을 필요 없잖아요. 그 다음부터는 주님의 아바타로 주님이 맡긴 대로 하면 돼요. 어제 이야기했듯이 기관차 달릴 때 앞으로 달리는 중에 맨 뒤에 앉아서 앞을 보면서 뒤를 같이 보는 거예요. 앞을 보면 내가 결정했지만 뒤돌아보면 주께서 하게 하셨다는 것이 보이는 겁니다.
그런데 아나니아 삽비라는 계속 앞만 보는 거예요. 그냥 앞만 계속 보는 거예요. 뒤를 볼 수 있는 다른 동기가 그 사람 속에 없는 겁니다. 이처럼 방언의 해석이라는 것은 중첩되어 있고 방언해석은 그 마스크를 벗을 때 반드시 죽음과 관련되어서 나타난다는 겁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네가 죽게 되거든 네가 복 있는 자로다, 하는 그 말씀을 사도행전을 통해서 충분히 계속 보여줍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서 베드로 다음에 나오는 빌립을 봅시다. 사도행전 8장에 빌립이 사마리아로 내려갑니다.
사마리아로 가서 전도를 하는데 18절에 보게 되면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찌어다.”라고 이렇게 선언해 버려요.
그러니 성령은 인간의 유인책에 말려들지 않습니다. 어떻게 겸손하고 아무리 온화하게 살아도 네가 온화하구나, 하고 성령이 오지는 않아요. 이미 모아이거석 입장에서 세상에 자기 몸체를 드러낼 때는 머리에서 이미 결정된 사항입니다.
이렇게 보면 제일 쉬워요. 머리에서부터 출발해야 돼요. 머리인 두상에서부터 출발해서 방향이 아래로, 이렇게 되어야 되는데 밑에서부터 비슷하게 흉내 내 가지고 머리에 접합하려고 하는 시도는 라인에서 다 잘립니다. 끊어져요.
세상에서 모방범죄라 해서 자꾸 모방하는데 모방하는 것은 한계가 있어요. 교회라 하는 것은 복음을 전해야 될 이유가 모방하는 그 모방범죄 하는 사람을 다 추려내야 됩니다. 사도행전 20장 28절에 보면, 교회가 뭐냐 할 때 이겁니다.
‘하나님의 피로 값 주고 산 교회’에요.
피가 흐르기 때문에 그 피만 감사하는 사람이 진짜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 피를 유발한 세상권력과 권세에 시달리게 합니다.
세상권력과 권세에 시달린다고 해서 좌절하는 사람은 피를 모른다고 해서 전부 다 잘라내고 구분해서 다 내쫓는 겁니다.
26절을 봅시다. 이거 하고 쉬겠습니다. “주의 사자가 빌립더러 일러 가로되 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 가는데 병거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제가 했지요. 사도바울이나 빌립이나 주의 아바타인 이들은 성령께서 그냥 밀어붙이는 거예요. 자기가 누굴 전도하려고 목표를 잡고 기도하고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냥 그 있는 자리가 주와 함께 있는 자리기 때문에 그런 식의 기도를 할 필요가 없지요. 31절에 “대답하되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 하고.”
무슨 대목을 읽었느냐 하면, 이사야 53장 7절, 8절입니다. 양이 있고 그 양이 도살할 양인데 말도 안하고 조용히 있더라. 32절에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여기서 ‘저’가 누구냐고 지적한 거예요.
그러니 이 성경 펼치는 것도 우연이고 그걸 해석해서 35절에 보면 뭐라고 하느냐? 빌립이 방언을 해석할 때 마지막은 예수님의 자기존재증명이거든요. 성경구절, 성경이라는 방언을 통해서 마지막에 내놓는 것은, 예수님은 죽었다가 살았습니다, 그걸 증명하게 되면 그것이 성령이 하고자 하는 그 뜻이에요.
무엇이 성령이냐? 내 존재증명 접어버리고 예수님이 이런 분이라고 내놓으면 그것이 바로 성령의 해석입니다. 영적인 해석이에요. 십분 쉽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