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자료

9강 폭풍속에서

아빠와 함께 2018. 8. 4. 14:51
2018-08-04 13:14:06조회 : 13         
2018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9강-사도행전 강해:폭풍 속에서이름 : 이미아 (IP:122.43.170.138)

2018 여름수련회 사도행전강해 제 9강(폭풍 속에서) - 이 근호 목사

 

마지막 강의의 주제는 사도행전 27장 14절을 보게 되면, “얼마 못되어 섬 가운데로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대작하니” 15절,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쫓겨 가다가” 이 대목을 봅시다. 사도행전이 불의 혀로 시작했다가 풍랑으로 끝나는데, 제목은 ‘폭풍 속에서’입니다. 어느 문학 작품의 제목입니다. 자연현상은 인간이 관찰할 수 있는 한계에요. 자연현상은. 날씨라는 것이 기온과 대기의 만남에서 날씨의 변동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리고 하늘에 있는 별과 달, 해, 인간이 관찰할 수 있는 것이 그게 전부인데, 거기서 어떤 반복적인 원칙을 뽑아내는 것을 질서라고 이야기를 했고, 그 질서에 적응해서 인간은 생존을 영위했습니다.

 

근데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오순절 성령께서 오실 때는 인간이 한계라고 여겼던 그 자연세계를 뚫고, 불의 혀같이 갈라진다는 내용으로 성령이 임합니다. 이 자연세계를 뚫고 들어오는 것을 제가 강의 중에서 외재성이라고, 바깥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라는 것을 언급을 했죠. 그와 같은 맥락인데, 요단강에서 예수님이 세례 받을 때에 비둘기같이 성령이 내려오는 거예요(마3:16). 그걸 마태복음 말고 마가복음에서는 보면 하늘이 열렸다는 겁니다(막1:10). 선루프sunroof라고, 차에 보면 뚜껑이 열리는 것을 볼 수 있잖아요. 바람이 들어오잖아요.

 

인간이라는 것은 결국 자연이라는 것에 갇혀있는 것이라 이 말이죠.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 때에, 에덴동산을 만들 때에도 인간은 에덴동산에 갇혀있었고, 현재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어도 자연이라는 그 곳에 갇혀있어요. 자연이라는 것에 갇혀있습니다. 인간이 별의 숫자를 헤아려서 관찰해봤자, 별은 어제 관찰했는데 오늘 가보면 계속 도망치고 있어요. 이게 우주확장성이라고 하는데, 계속해서 별이 도망치고 있습니다. 확장을 어떻게 하느냐, 별과 별 사이의 관찰했던 거리가 점점 더 멀어짐으로써, 풍선에 점 찍어놓은 점들의 거리가 풍선을 불면 점점 더 벌어지듯이, 마치 대자연은 인간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따라오려면 따라와 봐!” 이런 식으로. “니가 알고자 해서 따라오려고 아무리 고단위의 반격을 해서 따라오려면 따라와 봐! 니는 몰라.” 그런 식이에요.

 

우주 옆에 다른 비슷한 우주가 있는지 그건 아무도 몰라요. 그러니까 인간은 뭔가 마지막을 넘어서야 전부를 알거든요. 마지막을 넘어서야 전부를 아는데. 마치 뭐와 같은가 하면 부부사이 같아요. 남자와 여자가 부부로 결혼할 때는 서로 안다고, 얼추 상대를 다룰 수 있다고 자부하면서 결혼을 했는데, 살면 살수록 우주팽창성 같아요. 우주팽창성. 살면 살수록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어요. 살면 살수록. 점점 더. 애 낳기 전의 아내 다르고 애 낳고 난 뒤에 아내 다르고. “누구야? 너? 도대체 누구야 너?”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알 수가 없어요. 바닥없는 우물 같아서 도대체 당신의 정체성이 어디까지인지를 모르겠어요.

 

이처럼 인간은 갇혀있는데, 그 갇혀있는 인간에게 성령이 옴으로 말미암아 “이게 다야.” “이게 다야.”라고 더 이상 내가 준 것 그 배후에는 일체 없다는 겁니다. 성령이 불의 혀같이 임함으로 말미암아, 불의 혀같이 임한다는 것은 바로 불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약속대로입니다. 요엘 예언서에 의하면 마지막 때에 불이 임하죠. 이렇게 불이 임한다가 너희들이 알고 있는 마지막 장면이라는 겁니다.

 

이 세상의 마지막 장면을 성령을 통해서 미리 보여준 겁니다. 불이다. 그리고 이 불은 미리 앞당겨서 언어의 형식으로, 혀니까, 언어의 형식으로 너희에게 전달되었다. 하나님의 할 일은 끝났다. 다 했다. 니 쪽에서 관찰하던 것과 관찰되지 않고 우주 바깥에서 쏘아대는, 집어넣어준, 주입해준 하나님의 정답과 한번 비교해보라는 겁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했지만, 사도바울이 다메섹에서 있었던 것을 세 가지 언급하면서 마지막에는 뭐라고 했느냐 하면 죄 사함이라는 이야기를 했죠. 자연적인, 과학적인 연구방법이나 어떤 경우라도 죄 사함은 없는 거예요. 생물학, 물리학, 어떤 경우라도 거기에는 죄 사함이 없습니다. 그냥 스토아학파처럼 질서를 파헤치면 뭔가 유리하지 않겠느냐 하는데, 죄 사함은 공부 많이 했다고 죄 사함이 되는 것이 아니에요. 세리도 창기도 죄 사함 받습니다. 강도도 죄 사함 받아요. 이거는 박사학위 받는다고 유리한 거 없습니다. 신학박사 한다고 유리하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죄 사함은 외부에서 침투된 거예요. 침투된 그 내용이 바로 방언이고, 그 방언이 사도를 통해서 들려오니까,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남의 그 여파, 또는 그 효과. 효과가 눈에 보일 때는 현상으로 드러나고, 이 현상을 통해서 인간의 존재는, 사도의 존재는 소멸하는 겁니다. 소멸, 서서히 사라지는 거예요. 사라진다. 서서히 사라지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전에는 교회, 교회하다가, 교회가 뭐예요? 라고 하죠. 교회도 알 필요가 없어요. 인생? 나? ‘나’가 뭐예요? 인생이 뭐예요? 그거 알 필요 없어요.

 

복음은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난 그 원칙대로 진행될 뿐이지, 내가 구태여 그걸 알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이 뭐예요? 그런 것 알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나 자신이 점점 더 사라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치 옛날에 제가 먹었던 것인데, 입에 넣으면 살포시 녹는 습자지 같은 것, 먹을 수 있는 얇은 먹는 종이 있죠? 종이인데 입에 넣으면 없어져요. 우리의 존재라는 것을 구태여 내가 가질 필요가 없어요.

 

사도행전의 마지막 대목이 사라짐입니다. 사도는 이런 일을 하고, 사도의 마지막도 없어요. 그냥 점, 점, 점... 미미한 점, 점, 점으로 소실해갑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존재의 부각으로 나타난 효과에요. 결국 사라짐으로서 존재가 아니었고 그냥 나타난 현상이었다는 것을 사도가 보여줍니다. 사도는 뭐와 같은 존재냐 하면 유령 같은 존재에요. 분명히 있는데, 사라짐을 붙들 수 있는 지식은 우리가 확보할 필요가 없어요.

 

교회 그렇게 충성하다가 복음 알고 난 뒤에는, “교회?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은데?” 자기 자신에 대해서 연구하고 도 닦고 하다가, 나 자신이 소멸하고 있는데 나 자신에 대해서 구태여 알아서 뭔가 계산을 해보려고 할 필요가 뭐가 있어요? 없어요. 성화론? 거룩하기? 그것도 내가 사라지면 같이 사라지는 거예요. 차라리 이게 정답이에요. 나에게 주어진 거룩함이 나를 소멸시킨다. 그렇게 보는 겁니다.

 

물론 자칫하면 머리에 꽃 꽂고 눈 오지 않는 해남인가를 가서 돌아다니는 그 미친 여자처럼. 또 드라마이야기를 해서 미안합니다. “와! 눈이 오네!”라고 했어요. 드라마 제목은 다 잊어버렸어요. 65세 이상이 되면 노인층에 속해서 다 잊어버려요. 전에 강의에서 미션 임파서블 주인공이 톰 크루즈인데 그게 생각이 안 나서. 사도는 지금 사라지고 있는데, 사도가 사라지는 이 모형은 마치 뭘 닮았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모습과 너무나 유사하게 되풀이 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복음의 효과죠.

 

그러면 사라지게 되면 곱게 사라져야 하는데, 왜 풍랑은 일어나느냐 하는 겁니다. 여기 사도행전 27장에 보면 ‘유라굴로’라는 풍랑을 하나님께서 준비했습니다. 풍랑이 어느 정도의 풍랑이냐 하면 20절에 보면,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 이래 되어 있어요.

 

구원이라는 것을 생각하려면 먼저 존재라는 것이 있어야 되는데, 살고자 하기 때문에 구원이 의미 있게 그리고 심각하게 큰 위협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아이고, 살아야 되는데, 살 희망이 없네.” 이게 바로 구원에 대한 아주 강력한 집념이거든요. 그런데 24절에 보면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셨으니”라고 되어 있어요.

 

여기 해도 달도 보이지 않는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대적해가지고, 이 사람들이 276명입니다. 사도와 함께 동행한 사람이 276명인데, 그 사람들에게 어떤 구원의 여망도 다 끊어지게 만들어요. 그 큰 대풍 앞에. 자연의 변화 앞에. 그런데 거기에서 뭐가 나타나느냐 하면은,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셨으니” 이거는 뭐냐, 약속입니다. 약속이세냐? 풍랑이세냐? 이 말입니다. 대조시키는 거예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은, 너희들이 한계로 여기는 이 대자연이, 가뭄 들고, 온도 높고, 풍랑이 인다고 할지라도 오히려 꿋꿋하게 또렷하게, 별빛보다 더 또렷하게, 별빛도 보이지 않고, 해도 달도 보이지 않는 그 십사일. 이주일이죠. 저는 그냥 아무렇게나 했는데, 세상에! 그게 아재개그가 될 줄 몰랐어요. 해도 달도 깜깜한 그 판국이에요. “너희들은 끝났어. 우리는 풍랑 속에서 굶어 죽었어. 완전히 물에 빠져죽는 거야.”라는 그것이 존재의 한계라는 것입니다.

 

한평생 너희들이 살아온, 자기 존재가 여기에 도착한 거예요. 이 자연에. 자연이 요양병원이라. 모든 것을 여기다가 맡겼어요. 자연이 살면 우리가 살고 자연이 죽으면 우리도 죽는다. 비 오면 살고 가뭄 되면 죽는다. 그 속에서 구성된 자아상, 그게 나의 존재의 전부였던 겁니다. 그런데 외재성, 이런 자연을 한계를 뚫고 예수님의 약속이 사도바울 곁에 속삭일 때, 비록 대자연은 너를 협박할지라도, 너의 존재를 위태롭게 할지라도 약속은 끄덕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풍랑을 준비하신 거예요. 풍랑을.

 

심지어 지금 그런 풍랑이 와도 마찬가지고, 심지어 외부적인 풍랑은 없더라도 링거 꽂고 마지막에 한 80, 90세 되어가지고 헉헉거리면 숨도 못 쉬면서, “애들 불러라!”해서, 불러가지고 “큰 애는 집 갖고, 둘째 애는 밭하고, 셋째 애는 내 빚이나 다 갚아라!” 이 마지막 순간에 그렇게 할지라도, 그것이 진즉에 우리가 그래야 됐어요. 진즉에. 그런데 그 셋째 딸이 “아버지 약속이 있습니다.” 80평생 이상한 소리를 하지 말라고 했던 그게 마지막 내 목숨보다 더 소중하다는 사실을, 예수님의 약속이, 예수님의 피의 생명이 죽어가고 소멸해가는 내 목숨을 대신한다는 사실을 그 순간 받아들이면 구원받습니다.

 

한평생 실컷 술 먹고 온갖 짓 다해놓고 마지막 순간에 로또를 탄 거예요. 나보다 더 센 분이 바로 예수님인데, 그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는 근거는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니는 진즉에 죽어야 되는데, 나는 진즉에 살아났다. 죽었다가 살아나는 과정을 우리 속에 삽입시켜서, 너도 나의 살아있음을 증거 하는 증인으로 이제부터 살게 할게. 그 사는 게 링거 꽂았으니까 한 6분갑니다. 동산병원에서 6분, 그거 증거 하고 죽었어요. 자식들한테는 “너희들은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라고 했어요. 꼭 이게 드라마 같지만.

 

마지막에 나는 애초부터 소멸되어야 될 긴긴 세월의 한 사건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살아온 것이 아니고, 존재한 것이 아니고, 그냥 사건을 통과하고 온 거죠. 주께서 허락한 사건을 통과한 거예요. 이게 인생입니다. 그걸 사도바울은 바로 풍랑 속에서 배운 거예요. 그러면 사도는 결국 없다가 돼요. 사도는 애초부터 없다가 되는 거예요. 사울이라는 사람은 애초부터 없었어요. 사건은 바람 같아서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거니까. 사도는 없다가 정답인데.

 

그러면 없는데 왜 이렇게 풍랑을 만나고 이렇게 하느냐, 사도가 없는데 복음의 효과 때문에 사도는 어떤 역할을 맡아요. 그 역할이 뭐냐, 사도는 죄인이 되어야 합니다. 죄인으로서 사람들 앞에 서야 돼요. 이것은 바로 죄인인 자가 죄인 아니기를 원했던 자를 구원하는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의 존재가 그 십자가 사건을 사도를 통해서 되풀이하게 하십니다. 그게 바로 성령께서 오신 사람의 특징이에요.

 

여러분 성령 받았습니까? 이제부터 죄 속에서 사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여러분과 여러분 주변을 살리는 하나님의 임무에요. 미션 임파서블. 멀쩡한데 죄 속에서 사는 거예요. 멀쩡한데. 베드로도 멀쩡한데 감옥에 두 번 갇혔고, 사도바울도 멀쩡한데 죄수 취급받아서 갇혔고, 그리고 또 죄수 취급받아서 갑니다. 그 당시의 시대적, 법적인 안목에 의해 죄수가 되어서 다른 죄수 276명 함께 로마로 지금 호송중입니다. 그래서 죄수한테는 어떤 권리가 없어요. 사람들은 죄수기 때문에 어떤 지도자급의 권력을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죄수, 특별한 죄수인 사도바울이 간수부터 해서 모든 사람, 276명을 다 살립니다. 없어야 될 인물이 이 땅에 죄수로 등장해서 그 죄수들이 시시하게 여기고 무시했던 죄수가, 잘났으니까 살아야 된다고 우기고 그것을 평소에 기조로 여겼던 이 모든 인간들. “나는 왜 살아야 돼?” “나는 잘났으니까.” “나는 왜 감옥에 가면 안 돼?” “잘났으니까.”

 

46년이라는 긴긴 세월 동안에 공익을 위해서, 또는 공적사람으로 자기 관리를 철저하게 했던 사람, 윤형주가 오늘 아침에 걸렸어요. 조개껍질 묶어~~♬ 이 노래 불렀던 이 사람이 46년 동안 횡령해가지고 지금 고소당했습니다. 결국 그 분은 장로로 유명하고, 기독교 방송 단골사회자고, 많은 연예계 사람들이 그 장로님이 하시는 똑바른 그 자세를 보면서, “예수 믿는 사람은 저렇게 착하구나. 나도 예수 믿어서 착하게 돼야지.” 그게 실수였어요. 예수 믿으면 착하게 되는 것이 아니고, 별로 착한 것도 없지만.

 

주께서는 죄수 아닌 죄수, 죄수로 살게 하셔서 무시당함을 통해서 무시하는 자를 이 땅에서 구원해내는, 이 땅에서 천국으로 구원해내는 역할을 우리한테 맡겼습니다. 그동안 부부싸움 왜 하셨습니까? 잘난 것 그것 뽄때(시범)보인다고 부부싸움 했잖아요. “남편이 땀 흘려서 일하고 왔는데, 여편네라는 것이 밥도 안 차려주고, 지금 몇 시인데 밥도 안 차려주고 이게 당신 할 일이가?” 그럼 여자가 말하기를 “40년 세끼 차려줬다. 이제 니가 해라! 나도 지겹다. 돈 버는 게 어디 가정을 위해서 했다고? 나는 진짜인줄 알고 속았지. 지 설쳐대고 싶어서 돈 벌어놓고. 이제 와서 가정을 위해서라고?”

 

둘 다 잘났어요. 둘 다. 둘 다 손해 봤다는 생각을 하는 거예요. 약간 심한 경우를 제가 알고 있어요. 남편 나이가 74인데, 부인이 70인데 남편을 쫓아냈어요. 왜냐하면 돈도 못 버니까 먹지도 말라고 해가지고. 요거 약간 심했어요. 74세가 어디서 돈 벌어옵니까? 폐지 모아야 하루에 8천원인데, 어디서 벌어 와요? 그전에 뭔가 저지른 일이 많이 있겠죠. 도박에 손대거나 해서 애를 많이 먹였겠지요.

 

문제는 주님이 위에서, 바깥에서 보기에 인간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창세기 3장입니다. 선악을 알았다고 하는 자체가, 선악을 알았으니까 나를 의인이라고 쳐달라는 거예요. 그러나 그것은 원래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 때의 본래의 모습은 아니에요. 본래의 모습은 몰라도 되는 거예요. 바로 몰라도 되는 그 상태로 돌아가라는 겁니다. 천국가기 전에 미리 우리에게 살면서 그렇게 만들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워낙 인간들이 지 잘난 체 하니까 죄수로 만들어 버리는 거예요.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우기기 때문에, 그걸 딱 지목해서 율법을 줘가지고 그러니까 니는 죄인 중에 죄인이다.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니가 죄 지은 것 없어서 나는 잘난 체 하고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그게 바로 창세기 2장을 모르는 죄인이라는 뜻이에요.

 

창세기 3장에서 2장으로 못 넘어옵니다. 이미 맛을 들여 가지고. 지 잘난 맛에 맛을 들여 가지고. 우리는 마귀의 앞잡이기 때문에 우리는 지 잘난 맛에 살아요. 그래서 창세기 3장에서 2장으로 넘어올 수 없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복음을 전해가지고 우리라는 존재를 창세기 3장에서 2장으로 넘어오도록 합니다. 그래도 안 넘어와요. 만만치 않습니다. 한 번 잘난 체 한 인간이 어떻게 포기를 합니까? 거기에 누구를 세우느냐, 예수님의 십자가를 세우고, 그 십자가라는 복음의 연속성으로서 시시한 사도바울을 그 앞에 세웁니다.

 

그 사도바울을 시시하다고 여기는데, 막상 풍랑이 이는 그 현장에 왔을 때 우리가 믿었던 지식의 정보의 축적, 다시 말해서 “이런 날씨에는 풍랑이 일지 않을 걸요? 제가 선장 경력만 50년입니다. 괜찮습니다.” 하여튼 그 모든 것에 갑자기 사태를 일으켜서 인간의 모든 예측과 위배되는 풍랑을 일으켜가지고, 갖고 있던 지식과 노하우를 아무짝에도 쓸모없게 만든 환경에서 살리는 것은 뭐냐, “사도야! 니가 지금 두려워 말라. 니가 로마 가이사 앞에 서야 되고, 하나님이 항상 함께해서 다른 사람과 동행해서 살 것이라는 이 하나님의 언질, 이 약속, 이 약속 때문에 사도바울은 살아야 되고, 사도바울이 살아야 하기 때문에 살 필요도 없는 276명이 덩달아 살았던 거예요.

 

여러분도 지금 예수님 덕분에 살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본인에 대해서 깊이 있게 알 필요도 없고, 알지도 마세요. 침에 녹는 습자지인데요. 뭐. 점점 더 엷어져가요. 어떤 사람은 30대 이후에 점점 그런 현상이 일어났는가 봅니다. 김광석이. 점점 더 멀어져가네~♬ 딱 붙잡아야 되는데. 30대가 좋았는데. 그래가지고 예수님처럼 33살에 자살해서 죽었어요. 인기가 높을 때 그만 허망해지는 겁니다. 허망하다는 것은, 자살한다는 것은 아직도 자기한테 미련이 있다는 거예요. 이거 복음을 모르는 거예요. 복음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미련을 둘 만한 가치도 없는데, 아쉽다는 겁니다. 아쉬운 것을 못 잊어, 아쉬운 추억을 간직한 채 던져가는 거예요. ‘나 이 정도는 아니었었는데...’ 지가 일방적으로 지 개념을 잡은 거예요.

 

뭔가 잡았다, 소유했다, 이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유령이 되어야 하는데, 뭔가 잡히는 것이 있으면 그것이 우리에게 걱정을 유발합니다. 아무것도 아닌데, 낫씽nothing인데, 아엠 낫씽 I am nothing, 나는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아무것도 아닌데, 자꾸 이 세상 주변에서 계속해서 뭔가 채우고 지시하고 그렇게 하는 거예요. 방금 한 것은 외재성이죠. 바깥에서 침투해 들어와서 일방적으로 복음으로, 예수님은 죽었다 살아났다는 그걸로 침투해서 우리 자신은 그냥 현상에 불과한 것을 깨닫는 이것이 복음이라면, 그걸 흔들어놓기 위해서 창세기 3장에서 기어이 창세기 2장으로 못 가겠다고 하는 인간들은, 인간 쪽에서 대자연의 질서에서 진리를 찾고자 하는 겁니다.

 

그 진리를 찾고자 하는데, 그 진리를 찾는 방법이 수학에서 섀넌Shannon의 법칙이라고 나와요. 그거는 뭐냐 하면 정보의 양을 측정해서, 그 정보의 양으로 확률을 만들어서 그 확률을 다 집합해버립니다. 시그마∑라고 하는 것이 수학에서 집합인데, 집합을 해버리면 확률과 확률이 누적된 것이 현재 내가 알고 있는 진리를 찾는 방법이라는 겁니다. 말로 해서는 잘 모르죠.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ABCDEFGHIJKLMNOP알파벳 열여섯 개를 쭉 해놓고, 니가 여기서 아무 알파벳이나 하나 생각해봐라. 만약에 생각한 것이 O라면, “니가 생각한 것은 M이전에 있어 이후에 있어?” “M이후에 있어.” 그러면 정보 하나를 찾아냈어요. 뭐 이런 식으로 해서 16개에서 4개의 정보만 찾는다면, “니가 생각한 것이 O맞지?”라고 딱 집어낼 수가 있어요.

 

그래서 계속해서 이거야? 저거야? 물어서, 꼭 스무고개 하는 것처럼 좁혀가는 겁니다. 과학은 그런 식으로 진리를 뽑아냅니다. 이걸 칵테일 요법이라고 하는데요. 약품들을 만들 때 이거해서 안 되면 이거랑 하고, 또 이거해서 안 되면 또 이거랑 하고, 정보 2개, 그러면 그게 논문에 누적이 돼요. 논문을 본다는 것은 실패할 것을 많이 챙겨서 실패와 실패의 틈 사이의 새로운 가능성을 끄집어내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도리의 전부에요. 그냥, 그걸 일본말로 후루꾸ふるく인데(플루크fluke, 요행수), 처음에는 후루꾸였는데, 이게 시행착오를 거쳐서 후루꾸가 점점 맞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누적이 돼버리면, 이게 인간의 지식의 빅데이터가 늘어나는 거예요. 그러면 어떤 진단을 하게 되면 확률의 정확도가 증가한다는 것이 섀넌의 법칙입니다(2를 밑으로 하는 정보량의 단위. 확률이 p인 사물과 현상의 발생을 알았을 때 얻는 정보량은 -log2p).

 

인간이 찾아가는 방법이 모두 그런 거예요. 그래서 그것을 우리가 실제로 어떻게 느낄 수 있느냐 하면, 어느 취미분야나 어디에 가도 거기에 노하우, 빅데이터 정보를 많이 갖고 있는 터줏대감들이 있습니다. 어디에 가도. 낚시터에 가서 낚시하고 있으면, “아니, 보니까 초짜네. 아저씨! 이러면 안 되고 이래해야 돼요.” 당구를 쳐도, “그렇게 하면 후루꾸지. 큐대를 옆으로 찍지 말고 위로 찍어야 돼요.” 그리고 새로운 취미를 배운다고 스크린 골프를 하러 가면, “내가 스크린 골프만 15년인데, 이렇게 하면 안 돼요.” 인형 모으기도 마찬가지고. 모든 것에 왜 그렇게 터줏대감들이 그렇게 많은지. 남자들은 결혼하고 난 뒤에 할 일이 취미생활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여자들이 돈을 다 뺏어버려야 해요. 취미생활 못하도록. 친구 끊어야 되고 취미생활 다 끊어야 가정에 충실한 남자가 돼요. 최수종이처럼 그렇게 되어야 하거든요. 오토바이도 반환해야 되고. “오토바이인지 바이크인지 도장 찍어라!” “예.”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결혼생활은 이렇게 행복하다는 빅데이터가 바로 친정엄마고 친정아빠에요. 아주 그게 어설픈 사람이 있는데 광산김씨고. 어떤 정보를 해야만 살만한 가치가 있는 내가 더 살아질까? 나는 죽어도 기어코 살아야 돼! 자기 잘난 존재로 이어지게 할까? 이게 이 세상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너무나도 길이 잘 들여져있어요. 그리고 그렇게 사는 미래가 있다는 보람으로 살아갑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으면 자살하잖아요. 미래가 있다는 것. 제가 강의시간에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정신병 환자들이 치료받기 싫어한다는 그런 이야기를 했죠. 정신병 환자들이 치료받기를 싫어하는 그것 자체가 병이에요.

 

왜냐하면 인간은 응축되어 있다고 했죠. 모든 인간이 자기존재로 응축되어 있어요. 근데 그게 좀 더 심할 때는 오직 자기밖에 못 믿어요. 그래서 의사도 안 믿어요. “지난주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말 안 해줘.” “이 약 먹으셔야 합니다.” “치워버려!” 그럼 어떻게 하겠다고요? 그래서 이런 사람의 특징은 남의 얼굴을 안 봐요. 남의 얼굴을 보지를 않아요. 우리 십자가마르 사람들은 너무 얼굴을 봐서 그렇지만. 그만큼 정신이 건강하다는 뜻이죠. 정신이 건강하지 않으면 자꾸 땅을 봐요. 그래서 마주치지 않으려고. 왜냐하면 자기 생각에 몰두하기 때문에.

 

그러면 남을 보는 게 왜 부담스럽냐 하면, 남을 보게 되면 뭘 끄집어내느냐 하면 언어를 끄집어내요. 언어를 끄집어내는 순간 치료가 됩니다. 정신과전문가들 앞에서 이런 말을 한다는 자체가 미안합니다만, 그냥 사이비로 들으시고요. 말을 하는 순간 이제는 터진 거예요. 응축된 것이 터진 거예요. 응축된 것을 남한테 나눠주는 거예요. “우리 친구하자.” 그러면 그게 정상이 되는 거예요. 사귀고, 잘 있었나? 하고 전화하고. 폐쇄적으로 있다가, 자폐적으로 있다가 이제는 벗어나고. 이거 사이비라고 생각하고 들으세요. 그런 설이 있습니다. 썰story. 그래서 어떤 학자는 말하기를 전 세계 인구는 정신병자라고 했습니다. 전 세계 모든 사람이 정신병자에요.

 

그런데 언어를 한다고 해서 정신병이 치료되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정신병을 통해서 두 개의 정신적인 현상이 나오기 때문에. 하나는 뭐냐, 남을 패면서 즐거워하는 사디즘, 또 하나는 자기가 얻어맞으면서 즐거워하는 마조히즘. 인간에게는 피학적이고 자학적인 이 두 가지 밖에 없는데, 이 두 가지가 확실하다는 증명은 뭐냐, 바로 자본주의라는 겁니다. 개인의 자질이 자본이라는 사회로 번지는 거예요.

 

돈에 미쳐있는 것. 돈은 물물교환 수단인데, 무조건 돈을 보면 환장하는 거예요. 어디에다 돈을 쓰고 싶어 하지도 않아요. 무조건 돈이 상품화 된 거예요. 이게 집착증, 편집증이 아닙니까? 그걸 다 따라가요. 그게 인생 성공이라고 보고.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 마지막 가치는, “얼마 버는데?” “목사 했어요.” “목사는 얼마 버는데?” 전부 다 얼마 버는데? 전부 다 집착증, 편집증 환자에요.

 

방법은 뭐냐, 마음을 낮추면 돼요. 어떻게? 나 정신병자다. 정신병자를 더 낮춰보세요. 나는 없다가 되죠. 나는 소멸하는 중이다. 아예 없어지지 않지만. 소멸하는 중에 주님의 역할과 사명이 부여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부여됩니다. “주여! 내 인생 왜 이렇게 삽니까?” “니 좋아라고 한 것이 아니라 너를 찾아온, 외부에 계신 예수님의 뜻에 의해서 너는 그렇게 살도록 되어 있으니까, 너는 니가 누구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니 역할이 뭐냐가 중요하다.” 이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이 세상에 하나의 탤런트에요. 드라마 연극이 끝나면 우리는 역할이 끝납니다. 지난주에 광주강의에서 제가 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존재가 아니라면 남자역할 하는 사람과 여자역할 하는 사람이 있어요. 아담이 흙인데, 흙에다가 남자역할을 하라고 남자를 주셨고, 여자역할 하라고 여자를 준 거예요. 그러면 역할이 끝나면 죽으면 흙으로 가요. 흙이 되면 역할도 끝나고, 하늘나라에 가면 시집도 아니 가고 장가도 아니 갑니다. 그러니까 살아있을 때 많이 하든지 하세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마치 뭐와 같으냐, 천사와 같다고 했어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에요.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하신 방언이에요. 이 땅의 인간들이 모르는 방언이 그렇게 터져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사도행전 28장을 봅시다. 풍랑이 일었는데 진짜 바울 때문에 다 살았어요. 바울의 역할은 죄인의 입장에서 남을 살리는 그러한 역할이죠. 바울이 독사에 물렸는데, 독이 퍼지지 않았다. 이거는 인간 세계에서 나온 정보의 양이에요. 빅데이터에 있는. 독사에 물리면 몇 시간 내에 죽는다. 이걸 알고 있는 겁니다. 그게 약속이 있는 사도바울을 만났을 때는 자기에게 있는, 인간에게 있는 노하우가 필요 없고 쓸모없는 것이 되었죠.

 

이거는 단순히 사람이 병에 걸려서 치료하는 것이 주의 뜻이 아니고, 병에서 치료하는 것이 주의 뜻이 아니고, 이 세상에서 인간이 모아놓은 그 정보에서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것, 그게 뭐냐 하면 죄인인데 의인으로 변화시켜주는 그 일입니다. 진짜 중요한 그것을 사도바울은 전파하는 겁니다. 독사에 물렸는데도 독이 퍼지지 않았다는 그것은 하나의 미끼상품이고, 정작 중요한 것은 건강해도 건강이 아니고 아파도 아픔 그것이 절망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 몸이 아프냐 건강하냐를 가지고 너의 가치를 결정하는 기준의 잣대로 삼지 말고, 니가 예수님의 피로 죄 없게 되었느냐, 니가 죄를 갖고 있는가, 그게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지금 사도바울은 멜리데 섬에서 이 보블리오 추장을 만나게 하신 겁니다.

 

그리고 그 추장이 그걸 보고 상당히 놀랐는데, 하나 더 혜택이 주어집니다. 8절에 보면,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웠거늘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매” 9절, “이러므로 섬 가운데 다른 병든 사람들이 와서 고침을 받고” 10절, “후한 예로 우리를 대접하고 떠날 때에 우리 쓸 것을 배에 올리더라” 여기서 후한 예로 대접을 받았다는 것은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사람과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그들에게 인식시키게 된 계기가 된 겁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여기에서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이 전파되겠죠. 그러면 그들은 자기존재, 자기가치, 자기 의를 생각지 않고, 쏙 받아들이겠죠. 쑤욱하고. 왜 사람이 건강한데서 예수 믿는 것보다도 아팠다가 다시 건강해서 예수 믿는 그런 경우들이 왜 성경에 많이 나오느냐 하면, 내가 아플 때는 나는 건강만 했으면! 어떻게든지 건강만 했으면 하다가, 아팠다가 내가 예상한 방식의 치료가 아니고 다른 것으로 치료가 돼버리면, “그게 뭐지? 이게 뭐야?” 그건 내가 예상 못했던 치료방법이죠.

 

그럼 내가 예상 못한 치료방법이라는 것은, 내가 이런 식으로 치료받아야지, 라고 했던 내 존재에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평생에 남들처럼 살았는데, 남들처럼 살았던 이 가정과 이 세상에 근원적이고 치명적인 문제가 있는데 그 문제를 몰랐던 거예요. 아프기 전에는. 아프고 난 뒤에 보니까, 건강한 것이 이게 행복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 겁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그 사람이 아프겠어요? 안 아프겠어요? 또 아프겠죠. 또 아프면 이 세상에서 건강한 것은 그다지 심각한 문제로 여기지 않고, 정작 심각한 문제는 이미 챙겼다는 가벼운 마음이 듭니다. 아파도 구원받는다는. 그런 존재의 가벼움이 그대로 새록새록 등장하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상당히 좋은 인상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28장 마지막을 봅시다. 이제 남은 시간에 진짜 중요한 것을 해야 되는데, 그게 바로 뭐냐 하면 23절입니다. “저희가 일자를 정하고 그의 우거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를 증거 하고” 자, 이 ⯄안에 뭐가 들어갈까요? 하나님 나라죠. 하나님 나라. 여러분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새롭게 이해를 해야 돼요. 하나님의 나라는 죽어서 골라잡는 것이 아니고, 살아있을 때 하늘나라에 소속되지 아니하면, 들어가지 아니하면 오는 세계에 못 들어간다는 거예요. 미리 예약이 되어 있어요. 미리 예약이 되어야 됩니다. 이미 온 하늘나라의 소식을, 말씀을 귀찮게 여기고 외면해버리면 나중에 그 사람의 운명도 끝장나는 거죠.

 

그래서 제가 적어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다 정답을 아는지, 모르는지 쉬운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첫째는 성경을 어떻게 해서 먹을 것인가? 

둘째는 성경 속으로 들어가는 것인가? 

어느 것이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이유입니까? 

첫 번째입니까? 두 번째입니까? 여러분이 다 아시죠? 대답 안 하는 것은 이제 시시해서 안 하시는 거죠. 문제는요, 두 번째가 정답인지 알아요. 아는데, 가정이 우환이 있다, 몸이 아프다, 개척교회 했는데 교인이 점점 빠진다, 부흥이 안 된다, 돈 주고 선교사 보냈는데 선교사가 사진 찍어서 또 돈을 보내달라고 한다, 뭔가 이렇게 될 때에.

 

예를 들어서 하나밖에 없는 자기 아들이 군에 갔다. 전방이냐, 후방이냐, 중요한 기로에 섰다. 그럴 경우에 기도할 때 기도의 내용이 첫 번째겠어요? 두 번째겠어요? “그저 군에 가 있는 우리 아들 해군에 있는데, 제발 좀 성경 속으로 풍덩 뛰어들게 하옵소서.” 이런 기도는 뵈뵈한테나 해당이 되지요. 그야말로 성도한테나 해당이 되지, 일반사람들은 그냥 “배타면 위험한데. 행정병으로 진해사무실에서 근무하면 안 됩니까? 배타면 멀미나는데, 내가 걔를 아는데 얼마나 위장이 안 좋은데.. ”이러면서, 또 치맛자락 펄럭이면서 해군사무총장 찾아갈래요?

 

성경 어느 구절을 써먹으면 되느냐, 그거는 여호수아 1장 7절에 나오죠. “니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면 전방, 후방으로 빼줄게.” 뭐 이런 것.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면 니가 원하는 소원대로 되리라. 이런 비슷한 성경구절 찾아내가지고 자꾸 성경을 써먹으려고 하는 거예요. 나를 위해서. 분명히 우리는, 제가 여러분들의 눈빛을 보니까, 두 번째인 줄 알아요. 아는데, 나라는 존재에 집중하는 순간 두 번째가 날아가 버리고 어디로 가느냐 하면 첫 번째로 가버려요.

 

두 번째가 되려면, 좀 장사가 어렵다, 장사가 어렵다 하더라도 그 장사 어렵게 한 그것도 성경 속에 함께 계신 주님의 풍랑이다. 아, 내가 너무 잘난 체 했구나! 돈 좀 지난번에 벌었다고 의인이 되었구나! 다시 한 번 하늘나라가 더 중요한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낮추기 위해서 장사가 좀 덜 되게 했구나! 작년에는 한 달에 수익 천만 원 벌었는데, 요새 따라 장사가 너무 안 돼서 구백칠십육만 원 벌었거든요.

 

제가 너무 심한 예를 들었나요? 조금 빠졌다고 해가지고, 내가 성경을 열심히 안 보고 기도를 또 안 했구나! 기도라는 것을 써먹어서 빨리 나 자신의 존재 가치를 훌떡 위에 있게 하려고 또 안 나가던 새벽기도에 나가고, 부산떨면서 봉사하고, 주차봉사하고 난리가 나요. 다 노림수가 있다고요. 대통령이 되려면 소망교회 장로쯤 돼야 대통령이 되잖아요. 아닌가요? 너무 함부로 나댔나요? 취소할까요?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것은 바울처럼 되는 거예요. 나를 본받으라는 말을 했거든요. 이게 뭐냐 하면은, 나는 내 존재보다도 나를 빙 둘러싼 주님의 강력한 성령의 이끄심이 더 강력해요. 내게 능력 주신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빌4:13). 부도날 수 있습니다. 부도 감당하겠습니다. 이렇게 돼요. 이것도 취소할까요? 듣기에 살짝 기분 나쁜데?

 

그 하늘나라가 외재성으로 왔을 때 택한 백성을 어떻게 가리는가? 그게 사도행전 28장 24절에 나옵니다.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25절, “서로 맞지 아니하여” 서로 사맛디 아니할세. 그 다음에 무슨 말이 나옵니까? “흩어질 때에” 아! 흩어진다는 거예요. 지금 이 설교를 사도바울이 개인적인 사견으로 그냥 성령이 없이 설교를 했습니까? 아니면 성령에 의해서 설교를 했습니까? 성령으로 설교를 했죠.

 

우리 설교자의 인식 속에는 어떤 것이 들어 있느냐 하면, 내가 지식으로 하면 흩어져도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면, 성령으로 역사하면, 그것도 강권적으로 역사하면 한 명도 빠지지 않고 온 사람은 다 같이 은혜 받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들을 합니다. 그거는 사도행전 28장 24절과 치명적으로 안 맞습니다. 성령으로 했더니만 흩어졌어요. “아이고, 손님! 왜 가십니까?” “둘러보고 올게요.” 하고 가서는 두 번 다시 안 옵니다. 두 시간 반 동안 실컷 옷 골라서 다 입어보고, 피팅fitting,어울리는지 다 해보고 다음에 온다고 하는 거예요. 그와 똑같은 거예요.

 

그럴 때 사도는 좌절했겠습니까? 감사했겠습니까? 감사했습니다. 왜 감사했는지 25절에 나옵니다.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성령이 어떤 이론을 제시할 때, 두 번째 성경 속으로 들어간 사람은 그것이 이론이 아니고 본인의 인생이 되고 체험이 되는 겁니다. 어떤 체험을 하느냐, 26절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체험을 해요.

 

자, 그러면 이제부터 중요합니다. 진짜 중요합니다. 간 사람은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해서 갔어요. 그러면 그렇게 이야기한 설교자, 본인은 왜 예수를 믿습니까? 간 사람이나 본인이나 똑같은 뭐 그렇고 그런 존재인데, 그럼 나는 왜 안 가죠? 나는 왜 주님을 버릴 수 없죠? 그것은 나보다 더 세신 분, 이사야 이 말씀이 나를 강권적으로 장악한 거예요.

 

따라서 성령이 강권적으로 장악할 때는, 흩어진 사람에게 미련을 두지 말고, 전하는 나조차도 다 흩어지도록, 개척교회 열 명 왔다가 다 가고 아내까지 가버리는 그런 경우라도, 정말 가족보다도 교회보다도 주님을 더 사랑하는 사람으로, 내가 그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거예요. 또는 말씀이 강권적으로 그렇게 주장했다가 되는 겁니다.

 

그럼 그 사람은, “나 교인 오백 명 되었다. 나는 교회해서 우리 자식이 사법고시 합격했다.” 이런 것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오직 약속, 주님의 약속, 복음만을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내가 한 말이 아니라, 나에게서 나온 말이 아니에요. 슈우욱~~ 이게 내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닙니다. 모르네요. 모르면 그냥 넘어가요.

 

그 다음에 27절에,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 나는 아닙니까? 나는 아니었어요. 나는 안 완악해서 구원받았습니까? “귀로는 둔하고” 나는 안 둔했습니까? “그 눈을 감았으니” 우리는 장님이라고 했죠? 그리고 그 다음에 뭡니까?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돌아와서 고침을 받지 못하도록 이사야가 했다 이 말이죠. “오지 마!” 이 오지마를 뚫고 왔기 때문에 우리는 횡재한 거예요. 성령 받았으면. 안 오셔도 되는데 오신 거예요.

 

그다지 나 같은 인간은 구원 안 해도 돼요. 그런데 구원해 주셨어요. 그래서 내가 사는 것은 내 뜻이 아니고 주님의 뜻, 아버지의 뜻이에요. 이게 팩트 입니까? 이게 팩트에요. 팩트의 증거를 대보세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떻다 하는 것은 증거가 될 수 없어요. 그거는 내 사정이 돼버려요. 정말 보편적인 근거는 바로 십자가 눈앞에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3:1).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고 정보량을 파악해서 진리를 찾아낸다고 서로 공통적으로 해도, 전에 강의에서 했잖아요. 사람들이 사는 방법은 니거 내놓고 내거 내놓고 판돈 다 먹기. 다 이기는 사람이 다 가져가기. 이게 자본주의의 생리잖아요. 자본주의는 모든 게 도박이에요. 모든 게. 뭐, 일한 노동의 대가를 받는다고요? 그것도 도박입니다. 안 주면 어떻게 해요? 안 줘도 할 수 없죠.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내 회사가 아니에요. 돈 받고 요령껏 놀면 돼요. 사용자는 감시를 해야 되고. 누구의 노동이 더 힘들어요? 감시하는 쪽이 더 힘들어요. 커닝하는 사람보다 감독하는 선생님이 더 힘들어요. 신문 보는 척 하면서 구멍 뚫어가지고 요래 봐요. 또 인권유린이라고 고발이 들어올지 싶어요. 요새 선생님들이 그렇게 힘들답니다.

 

인권이 바로 스토아학파에요. 에피쿠로스학파고. 인간의 행복보다 더 귀한 가치는 없다고 여기는 겁니다. 민주주의가 악마의 체제입니다. 아! 대한민국! 그거는 하늘나라가 아니에요. 그거는 완악한 대한민국, 둔해빠진 대한민국, 장님들의 집합체 대한민국이에요. 성도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가끔가다가 이게 내가 미쳤나? 진짠가? 할 때가 있을 거예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것으로만 끝나면 진짜 아니에요? 사흘 만에 살아나셨습니다. 진짜구나!

 

이거는, 약속은 풍랑보다 더 센 게 약속입니다. 그 뒤에 사도행전 28장 30절과 31절 이후에 사도바울은 사라집니다. 어떻게 죽었다는 소식도 없어요. 사도행전 29장도 필요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이렇게 사라져야 해요. 마지막 절 31절에,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미리 하나님 나라를 전파했어요. 하늘나라 이퀄(=) 예수 그리스도의 소식이에요. 왜? 외부에서 뚫고 들어왔으니까. 금하는 사람이 없었다? 얼마 있다가 또 금해져요.

 

그러니까 그 뒤에 이야기는 의미 없는 거예요. 중요한 것은 사도냐, 사도가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고. 오늘날 저와 여러분들이 오늘날의 사도입니다. 죄인이 되세요! 죄인이 될 경우에만, 내가 무가치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 때만 사도의 기능을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잘난 맛에 살아온 것이 가정교육이었고, 학교교육이었고, 사회에서 요구하는 것은 니가 얼마나 잘났나 하는 것을 보이라고 압력 받듯이, 우리는 강요받았습니다. 이제는 죄인 중에 괴수인 것을 통해서 복음만이 영원하다는 것을 전파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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