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자료

3강 선교는 없다

아빠와 함께 2018. 8. 4. 14:43
2018-08-04 07:27:52조회 : 20         
2018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3강-사도행전 강해:선교는 없다이름 : 한윤범 (IP:14.39.134.34)
2018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3강-사도행전 강해:선교는 없다
(강의:이근호 목사)


세 번째 시간 제목은, <선교는 없다>입니다. 선교가 왜 없느냐 하면, 선교가 ‘있다/없다’를 누가 결정하느냐 하면, 성령 받은 사도들의 설교가 기준이 돼야 돼요. 베드로, 스데반, 빌립, 그리고 사도 바울, 이분들이 하는 설교 내용 속에서 선교가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두 말 못하도록 확고하게 이야기한 거예요. 성령 받은 사도들의 설교 내용이 뭐냐 하면,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나셨다, 이 내용입니다. 따라서 이 내용을 통해서 볼 때 선교는 없는 거예요.

만약에 어떤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내용을 전하기 위해서, 다른 말로 선교라 할 수 있지요. 전하기 위해서 활동을 한다면 이 사람은 지금 어디에 해당되느냐 하면, ‘죽었다’에서 홀로 빠져나온 사람이 돼버려요. 사도들의 설교 내용은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살아났다, 이게 핵심이에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 내용을 전하기 위해서 본인이 선교에 나서버리면 이 사람은 어디에 해당이 안 되느냐 하면,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나셨다는 관심사가 자기가 선교하는 것으로 이동해버리면 본인은 예수님의 ‘죽었다’에 포함이 안 된 독특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지금 이것을 전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살아나셨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나신 그 의미가 뭐냐 하면,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 모든 인간은 죽은 거예요. 선교할 필요도 없어요. 교회 세울 이유도 필요도 없습니다. 왜? 모든 인간은 죽은 거니까. 죽은 자가 무슨 교회를 세우고, 죽은 자가 무슨 선교를 합니까?

그러니까 사도들이 성령을 받고, 그냥 성령이 시키는 대로 사도들이 외친 게 뭐냐 하면, 인간에 대해서 관심 뚝 끊으라는 말입니다. 만약에 인간이 하는 일이 예수님의 모습, 현존에 대해서 끼어들게 되면 복음적인 사실이 훼손돼요. 죽어버린다고요.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났다. 그럼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나는?’ 이런다고. 갑자기.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말은 여기에 나라는 그런 질문이 나올 수가 없는 문장이에요. 이 문장이. 나는 구원받았어요, 지옥 가요, 천당 가요? 하는 질문이 사도 바울이 전하는 이 대목에서는 도저히 여기서 파생되어 나올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사도는 예수님에 관해서 이야기하는데 사람들은 예수님의 일로 얼마나 자기에게 이득을 볼까, 자기 미래가 어떻게 잘 풀려볼까? 그것을 살짝 이용하려는 순간 그 사람은 선교 자체를 여기서 따로 구성하게 되는 겁니다. 이건 반칙이에요. 선교가 애초부터 없는데 갑자기 선교가 나와 버린 겁니다.

베드로가 구원받았지요. 그럼 구원받은 베드로를 찔러서 물어봅시다. 질문 자체가 잘못됐지만, “당신은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당신은 구원받고 난 뒤에 얼마나 행복하십니까?” 이렇게 이야기하면 베드로가 하는 말이,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여기에 관심 있는 채로 구원받았습니다. 내가 구원받은 것에 관심 없고 주님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에 관심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죽었을 때 모든 인간은 이런 짓거리한다는 자체가 죽음이기 때문에. 이것 때문에 예수님이 돌아가셨거든요.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나셨다는 이것이 예수님의 현존입니다. 살아계시는 방식이에요. 그러면 사도는 예수님이 지금 살아있음을 전하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 생각하기를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하면 너무 기니까 예수님이 살아계시니까 죽었다는 것은 삭제해버리고 살았다는 것만 증거하면 되지 않느냐고 하지만, 죽었다고 살아났다고 이야기해줘야 인간들이 하는 선교라는 것이 날아가 버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차 선교, 2차 선교, 3차 선교 다 날아가 버린 거예요.

그럼 사도가 선교한 게 아닌가? 그건 선교한 게 아니에요. 어제도 이야기했지만 성령이 뒤에서 발길 차버린 거예요. 만약에 선교가 있다면 왜 이 선교가 선교 아닌지 증명해드릴게요. 만약에 선교가 있다면 선교하는 사람이 살아있어야 돼요. 사도 바울 살아있어야 되고 베드로도 살아있어야 되고. 살아있는 자가 뭘 증거하게 되면 주님이 현존하는 공식에 어긋난다고요. 예수님이 죽었을 때 모든 인간은 죽었거든요. 죽었다는 공식을 위반해서 어떤 인간이 살아서 꿈틀거리는 거예요.

그럼 선교가 뭘 방해하느냐 하면, 주님이 존재하는 방식을 선교라는 명목으로 방해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방해했다는 말이 아니고 사도 바울이 하는 것을 선교라고 규정시킨 안목, 그 사고방식이 주님의 현존을, 주님의 복음을 지금 훼방하고 있는 거예요. 인간들이 선교 안 하면 주의 일 실패했습니까? 사람들이 교회 안 섬기면 주께서 막 답답해하시는 거예요? 그런 것 아니잖아요. 저만 그런가. 그런 것 아니죠. 교회 없다고 주님 안 계십니까? 선교 없다고 주님 일 안 하시는 거예요? 도대체 정신머리가 사고방식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

사도행전 1장을 혹시 보신 분이 있다면 거기서 여러분들이 그냥 지나가는 대목이 있어요. 7절을 크게 읽어보겠습니다.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이 대목에서 지극히 당황해야 됩니다. 지금 동업자 아닙니까. 동업자끼리는 정보를 주고받아야 일이 돼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는 말이, 너희는 알 바 아니요. 그걸 왜 알려하는데? 그리고 묻는 제자들의 사고방식도 수상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으로부터 정보를 빼내서 주의 일에 협조하는데 주님한테 칭찬받을 가능성을 높이는 겁니다.

이케요, 저케요 하면서 주님 이렇게 하면 주께서 잘한다고 하시겠지요? 주님이 알려준 정보대로 잘 움직이고 있으니까 주님과 우리 사이는 정상적으로 흘러가고 있지요? 그러니까 보다 많은 정보를 흘려주셔서 우리 힘으로 주님을 증거하는데 우리가 쓸모 있는 인간이라고 좀 봐주세요, 하는 취지로 이런 질문을 한 거예요. 그런데 일언지하에 잘라버립니다. “네가 그걸 왜 알아야 되는데?” “우린 같은 편이잖아요.” “같은 편 같은 소리하고 있네.”

주님은 자기편이 필요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이미 아버지와 의논하시기 때문에 아버지 보시기에 나는 죽었다가 살아났다. 완료됐습니다. 시간적으로 완료됐고 모든 게 완료됐어요. 완료됐기 때문에 남아있는 것은, 예수님을 죽게 만든, 어제 이중결정, 이중결과 이야기했지요. 이미 예수님을 죽임으로써 이 세상은 죽어 마땅한 세상인 것을 까발리는 일만 남아있어요. 그런데 선교 좀 한다고 죽어 마땅함에서 면제해 달라? 그런 것은 용납이 안 됩니다. 

지금 사도 바울을 죽어가는 게 신나요. 고린도후서 5장, 빌립보서 1장. 자기한테 유일한 소망이 있다면 후딱 죽는 거예요. 그리고 이런 소망에 대해서 고맙게도 주님께선 온 터키나 마케도니아, 아가야(지금 그리스), 시리아, 예루살렘에 가면서 후딱 죽는 코스를 주께서 친절하게도 자기를 이끌어서 여기서 죽을래? 여기서 죽어야지? 예루살렘에서 죽어야지. 예루살렘에 갔을 때 아가보란 예언자가, “당신 그러다가 끈에 묶여 죽습니다.” 하고 가지 말라고 두 번씩 말려요. 빌립의 네 딸도 선지자고 다른 선지자도 있었는데 이중으로 막습니다. 가시면 죽습니다, 할 때 사도 바울이 하는 말이, 내가 죽는 걸 알고 간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어디서 생을 마감하는지 그게 정해지지 않아서 지금 헤매고 있는 중입니다. 여기서 죽을 뻔했는데 여기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았거든요. 제자들이 깨우니까 또 깨났어. 찬스를 놓쳤네. 그래서 전도하고 한 바퀴 돌고 돌아왔습니다. 사도 바울의 의식은 보통 인간들이 가늠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판단할 수도 없고 해석도 되지 않아요. 왜냐하면 사도 바울 움직임 자체가 이미 해석이 끝난 말씀이기 때문에 그래요. 성경해석이 끝났을 때 사도 바울의 고백 같은 것이 나옵니다. 나의 소원은 빨리 죽는 것이다. 쓸데없이 여기 더 있을 이유가 없다. 이곳을 자기 동네가 아니니까. 

그 근거를 대시오. 그 근거가 바로 사도 바울 설교로 나옵니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예수님은 죽었다. 그런데 만약에 철없는 사람이, 저는요? 그 질문이 나오면 여기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주가 되는데 거기에 왜 자가기 주어가 되어 저는요, 할 필요 없어요. 예수님을 죽을 때 모든 인간은 죽은 겁니다. 남은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살아있음이 이 세상에 어떤 변화를 초래하느냐? 그것만 설교에 담아서 전하면 되는 겁니다. 이런 상태가 구원받은 상태에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관심사가 예수님한테 있습니까, 나한테 있습니까? 뭘 보고 구원받았다고 자부들 하세요? 뭘 근거로 자부하세요? 교회 세웠다고요, 선교한다고요? 그건 훼방질하는 겁니다, 지금. 왜 그런 것들이 이 문장에 끼어듭니까? 주제파악도 못하고. 끼어들 자리를 보고 끼어들어야지 끼어들지 않아야 될 데에 끼어들어요. 예수님께서 우릴 위해서 죽었다가 살아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교회 세웁시다. 이건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죽었다가 살았음을 증거하는 그 자체가 이미 움직이는 교회입니다. 

교회가 있는데 따로 교회를 만들겠다는 말은 기존의 교회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냥 살아도 교횐데 왜 교회를 만들려고 해요. 자꾸 한국교회가 교회를 만드니까 그걸 본받아서 돈 들어오니까 신천지, 구천지 계속 만드는 거예요. 왜냐하면 사업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십자가마을도 그런 덴 줄 알고 아내가 또 이단에 빠졌구나하고 기존교회 다니는 남편이나 안 믿는 남편이 제일 먼저 챙기는 것이, 돈 얼만 내라고 하는데? 한 달에 돈 얼마 갖다 주는데? 그것만 생각한다고요.

사도행전에 자기 재물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고 통용했다는 소릴 듣고 큰일 났어. 교회 입장에서는 횡재고 일반가정은 큰일 날 문제에요. 왜냐하면 서로 떡을 떼매 자기 소유를 날마다 같이 하고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심지어 바나바란 사람은 자기 땅을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고 돼있어요. 사도행전 4장 끝에. 바나바는 구브로(지금 키프로스) 사람인데 사도 바울을 굉장히 챙겨줬습니다. 보호해주고. 챙겨주면 뭐합니까? 두 번째 전도할 때 삐져서 싸웠는데 둘이 갈라서서 하나는 지 고향으로 가버리고 사도 바울은 터키로 가버리고. 

그걸 보고 둘 다 성령 받아놓고 싸운다면 성령 대 성령의 배틀인가? 어떻게 성령 받았는데 싸우느냐, 하는데 그건 성령이 싸우라는 게 아니고요. 사도 바울도 갈수록 의식의 수정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 초기 편지내용과 나중에 옥중서신이라 하거든요. 빌레몬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에베소서 편지내용이 달라요. 서로 틀린다는 말이 아니고 그만큼 심화된 겁니다.

어쨌든 계속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선교라는 것이 없는 이유는, 만약에 선교가 있다면 뭐가 죽느냐, 뭐가 파기되느냐 하면, 나는 죽었다가 살았다 이 자체가 파기됩니다. 따라서 사도들의 복음 핵심,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함으로써 이것이 세상에 대한 모든 심판의 기준이 돼요. 저주의 기준이 됩니다. 

그러면 선교가 있다고 우기는 사람들은 지금 제가 하는 이야기에 강력하게 반대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버리면 구원받는 소식이 기쁜 소식인데 복음 전할 타이밍, 복음 들어갈 구석은 없지 않습니까? 빙빙 돌려서 할 게 아니고 고객확보가 안 되잖아요. 상품화 될 수 있는 뭔가 없잖아요. 그런 뜻이겠지요. 그런데 그 사람들은 요나를 몰라서 그래요. 여기게 제가 문제를 내겠습니다.

구약의 요나에서 어느 것이 구원의 방식에 근접하고 모델에 적합한지 제가 물어보겠습니다. 첫째, 북이스라엘의 구원방식이 옳다. 두 번째, 니느웨 사람들 구원방식이 옳다. 어느 쪽이 정답이에요. 요나에서. 하나님께서 요나 선지자를 니느웨에 보내신 것은 처음에 본국에 있을 때는 심판하라고 보낸 거예요. 그래서 요나 선지자가 심판할 것 꼭 내가 갈 필요가 뭐 있느냐. 화재현장에 불구경할 필요가 뭐 있느냐는 말이죠. 나는 불구경하는 악취미 없기 때문에 다시스로 간다고 빼돌린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갑자기 풍랑을 일게 해서 빼돌리는 요나를 배에서 니느웨까지 직행하는데 여기 피노키오 이야기가 나오지요. 물에 들어갔더니 물고기가 삼켜서 그게 ktx였어요. 니느웨 앞 바다에 도착시켰습니다. 불구경하는 악취미 없습니다. 니가 잔소리하지 말고 심판을 전해! 심판 전하는 것이 복음 전하는 것인 줄 꿈에도 생각 못한 거예요. 요나는 1번 편, 이스라엘 선지자거든요. 이스라엘 선지자가 왜 남의 나라에 전합니까?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니느웨에 40일 지나면 멸망한다고 하니까 갑자기 니느웨 사람들이 심지어 반려 견까지 고양이까지 가축까지 금식시켜서 온 국민이 회개했어요. 회개하니까 심판이 없어요. 요나는 산 위에 올라서 심판 받은 모습 찍어보겠다고 했는데 심판이 일어나지 않는 거예요. 하나님 뜻과 선지자 뜻이 일치되지 않습니다. 요나가 삐졌습니다. 죽겠다는 겁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좀 서늘하게 하고 싶다는 거예요. 지 챙길 것 다 챙기고 폼 나게 죽겠다는 거죠. 고집부리는 거죠.

요나에서 진짜 구원의 원형은 근접된 심판 속에서 무조건 잘못됐습니다. 나 자체가 죄인 중의 괴수라는 인간을 그동안 이스라엘이 놓쳤고 진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방식을 이들이 놓친 거예요. 이걸 빼뜨린 거예요. 그 빼뜨린 것을 니느웨를 통해서 우회해서 보충해주는 겁니다. 이게 요나서에요. 이걸 알았으니까 제대로 질문해보겠습니다. 아무리 머리 나쁜 사람도 알겠지요.

예루살렘에 있는 열두 제자들의 구원방식이 옳습니까? 이방인들의 구원방식이 옳습니까? 1번, 2번. 아까 질문 참고하면 다 아는데.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의 구원방식이 옳습니까? 이방인들의 구원방식이 옳습니까? 몇 번이에요? 우리 몇 번으로 갈까요? 거수 한 번 할까요? 또 고집스럽게 다 ‘예’ 하는데 혼자 ‘아니요’ 하고 튀려고 생각하지 마시고.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율법이 뭐와 같으냐? 아이들이 엄마 숨겨놓은 선반 위의 빵을 먹기 위해서 밑에 책을 괴고 발뒤꿈치를 들고 할 때 율법을 받침으로 해서 메시아를 기다리는 방식, 율법에 의하면 메시아가 오신다는 거죠. 율법을 지킨 사람에게 메시아가 결합된다는 겁니다. 율법은 언약이고 언약을 완성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 메시아가 온다면, 언약에 참여된 사람에게 주어진 혜택이라고 본 겁니다. 이게 바로 1번이에요. 예루살렘에.

2번을 모른다고 칩시다. 여러분이 교회 다니면서 뭘 배웠습니까? 사두개인, 바리새인들 이것 훈련받은 거예요. 교회에서 제자훈련 1단계~12단계 거치면서. 까치발 해서 다 왔는데 조금만 하면 되거든요. 십일조하고 주일성수하고 목사 섬기는 것 다 했어. 이제 남아있는 것이 성령 세례만 받으면 돼. 성령 세례 받는 방법은 고함질러서 주여, 쭈여 하면서 간절히 간구, 중보기도 용어 자체가 화려하지 않습니까. 

조금만 하면 이제 성령 세례 받고 그 다음에 중보기도 해서 애먹이는 남편, 자식들 다 하면 이건 자기 자존심이 사는 거예요. 자존심 챙기고 천국도 가고. 무슨 그런 두 마리 토끼 다 잡는 게 어디 있어요. 남편 전도? 아내의 자존심입니다. 놔두세요. 그냥. 혼자 가세요. 혼자 천당 가면 돼요. 남편까지 끌고 가지 말고. 괜히 영문도 모르는 남편 괴롭습니다. 아내 눈치 본다고. 무슨 온 집안 다 해야 전도 상 받아서 메달 하나 타는 겁니까? 억지는 항상 문제 일으켜요.

까치발 들고 조금만 하면 된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유대인들이 이방인에게 전도했어요. 전도하되 조건이 있어요. 할례를 반드시 행해야 되고 그 다음에 안식일은 반드시 지켜야 돼요. 그래도 자기보다 낮은 단계에요. 이방인, 굴러온 것이 개 같은 인간들이 우리가 봐주니까 같이 천당 가는 거야. 이렇게 한 겁니다. 갈라디아서 편지를 보세요. 여러분 피곤해서 어제 강의 제대로 못 들었지요. 

제가 강의 처음에 한 것이 뭐냐 하면, 사도행전에서 역사를 뽑아낸다고 사도행전 해석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편지가 그렇게 역사중심으로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고 제가 이야기했지요. 왜냐하면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갈라디아서는 1차 여행을 통해서 사도회의하고 나서 안디옥 갔을 때 쓴 거예요. 이년 동안 있으면서 갈라디아서를 썼거든요. 

그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우리의 어머니는 하늘에 있다 했어요. 그리고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이 우리의 어머니라고 돼있단 말이죠. 이건 뭘 의식한 거예요? 이미 얼마 전에 사도회의에서 형님들, 야고보, 베드로, 아까 했잖아요. 본사를 무시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러나 사도가 알았던 구원은 지금 까치발 들고 말씀 지키는 게 아니에요. 

말씀 지키려면 교회 와서 양육 받아서 무엇이 필요한지 알아서 그 다음에 성령으로 마감질하게 되면 당신은 온전하게 구원됩니다. 구원되고 난 뒤에는 구원은 기본이고 보너스를 받으려면 천국의 상급을 받으려면 시키는 대로 추가적인 봉사를 하시면 여러분은 하늘나라 확장에 훌륭한 역군이 됩니다. 만약에 교회에서 하는 추가적인 것에 나태하게 되면 여러분은 구원받을지는 모르겠지만 부끄러운 구원, 상급 없이 구원받는 거고, 그리고 하늘나라가 확장되지 않으면 마귀 나라가 커지기 때문에 여러분 자식들이 걱정이 됩니다. 자식 걸면 다 넘어가거든요. 

여러분, 자식들에게 음흉한 무서운 악마의 세계를 물려주시렵니까? 자식 학원비 다 내렵니까, 아니면 교회 건축하는데 내시렵니까? 여러분, 자식을 생각해보세요. 어린아이 같은 믿음이 되시고. 자식 거론하는데 돈 안 낸다? 그건 자식의 영혼을 지옥에다 빠뜨리는 못된 부모의 태도입니다. 웅성웅성. 지갑 여는 소리, 작정하는 소리. 그놈의 혈통중심은 언제 청산할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유대교는 로마에 욕을 안 얻어먹었나? 그들은 혈통중심이에요. 

두 번째 이방인들의 구원방식은 뭐냐? 생뚱맞아요. 이것 형님들 본점에 갈 필요 없어요. 프랜차이즈 받았지만 그것 무시하고 그냥 성령이 오시면 그걸로 끝난 거예요. 더 보탤 것도 없고 뺄 것도 없어요. 왜? 성령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영이 오게 되면 죽을 너희 몸도 살리시리라. 성령이 오게 되면 구원받는다는 게 아닙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예수님은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이라는 그 내용이 담겨버린 그러한 상태가 되는 겁니다. 

제가 어제 오후 설교하면서 그걸 아이언맨이라고 했지요. 영화를 봐야 알지. 철로 만든 옷을 입고 조종해서 하늘을 날기도 하고 밤 깊은 LA를 돌아다니고 하잖아요. 아이언맨, 어벤져스 같은 영화가 뜨는 이유가 어른들이 하도 사는 게 힘드니까 어릴 때 꿈을 대리만족하는 겁니다. 치고 부수고, 악당 놈아 나와라. 지가 악당인데 악당 놈이라 해서 때려 부수고 스트레스 해소하고. 예술, 작품 그런 것 소용없어요. 그냥 때려 부수고 조지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난 뒤에 회사에 가선 ‘예’ 하고 굽실거리고.

이방인들은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이걸 이방인들이 알아요. 니느웨 사람들은 구원은 예상도 안 했어요. 니느웨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주께서 얼마나 친절하게 고래까지 동원해서 선지자를 보내서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전면적인 심판이에요. 이건 남녀노소, 종이나 자유자나 관계없이 다 죽어요. 마치 출애굽 때 같아. 출애굽 때 애굽의 왕궁에 있는 사람이나 심지어 경찰서 유치장에 있는 사람의 맏이까지 다 죽어요. 그냥 다 죽인다니까요. 이유가 어디 있어요. 

굳이 이유를 대라면 예수님은 이 땅에서 죽어야 했고 살아야 한다. 주님이 죽어야 될 뿐이라는 프로젝트 때문에 그 여파로 이 세상은 작살나야 돼요. 뭐가 잘못 돼서 멸망합니까? 잘못 된 것 없어요. 우리가 무슨 죄로 지옥 갑니까? 지은 죄가 없다니까. 지은 죄가 없는데 지옥 가야 돼. 뭘 죄를 찾아요. 살아온 것도 애써서 살아왔는데 그것까지 죄 짓지 말라는 것은 인간 망하라는 소리와 똑같거든요. 

여러분, 아무 이유도 없어요. 특히 이방인한테는 하나님의 언약의 대상이 안 됩니다. 그러면 왜 이방인에게 본인도 깜짝 놀랄 구원을 주시느냐? 바로 언약에 속한 인간들, 진짜 이스라엘이라는 것이 너희들이 생각한 이스라엘이 아니고 참된 이스라엘은 따로 구성된다는 것, 그리고 그 구성되기 위해서 필요한 절차는 이방인들을 통해서 똑똑하게 보여주는 거예요. 너희들이 아니고 오히려 개무시했던 이방인들이 구원받음으로 말미암아 진짜 하나님의 이스라엘은 약속대로 완성되는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이 이야기가 로마서 11장에 감람나무 이야기로 나온 거예요. 돌 감람나무, 참 감람나무 이야기. 그래서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로마서 11장 25절. 그게 사도 바울의 편지잖아요.

사도 바울의 편지는 세 번째 고린도에 갔을 때 3개월 동안 있었습니다. 그 고린도에서 브루스길라와 아굴라, 아굴라가 남편이고 브루스길라가 여자입니다. 그러다 이름이 바뀌는데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부부에요. 이 부부와 2차와 3차 때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함께 봉사하다가 그 사람들이 원래 로마에 살던 사람인데 고린도에서 만났어요. 만나서 복음을 듣고, 3차 때는 다시 로마로 갔거든요. 3차 때 고린도에서 브루스길라와 아굴라에게 쓴 편지가 로마서입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이 편지 쓸 때에 “안녕하세요. 잘 계셨어요? 건강합니다. 앞으로 다시 봅시다.” 이렇게 쓴 줄 알아요?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나 빌립보서나 편지내용이 바로 이 원리를 겨냥합니다. 큰 형님들, 마스터들, 인간적인 열두 제자라는 그들의 전했던 구원이 한계가 있음을 성령께서 나에게 알렸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몇 대 몇으로 붙느냐 하면, 12:1로 붙어요. 

베드로는 그것도 모르고 와서 큰 형님 노릇한다고 안디옥에서, “너희들 예수 믿는 것 잘했어. 성령 받았다면서. 그러니 예수 믿지.” 그런데 거기서 할례 받지 못한 율법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이 오니까 베드로 깜짝 놀라서 내가 할례를 행하지 않은 사람과 식사하게 되면 이건 율법에 위반되니까, 거룩한 것과 거룩하지 않은 것이 함께 하면 거룩한 것이 손상 나거든요. 거룩이 유지되려면 부정한 것을 멀리해야 된다는 레위기나 신명기의 율법에 의해서 절대로 더러운 것을 접촉하면 안 되는데 지금 더러운 개 같은 이방인과 식사를 같이 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거룩이 훼손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베드로는 후딱 도망치듯이 빠져나갔어요.

그걸 보고 사도 바울이, “형님! 아이고 그게 구원이가? 이게 복음이에요?” 무슨 복음이 할례한테 먹히는 율법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에 먹히는 복음이 있느냐. 복음이 뭔데? 본인이 보셨잖아요. 개 같은 인간에게도 성령 주면 끝이라고. 이것은 어떤 인간이 훌륭해서가 아닙니다. 착실해서도 아니에요. 값어치 있어서도 아닙니다. 성령 자체가 값어치 있어. 저울에 성령 얹고 그 다음에 성령 받은 사람 얹고 이쪽에 무게 달고, 그 무게나 인간 빼고 성령만 얹어도 그 무게 똑같아요. 

우리의 질량은 제로입니다. 중성미자 같아. 힉스입자 같아요. 모든 물질에 질량을 부여하는 입자, 물론 힉스 메커니즘이 부여하지만 그걸 유럽에서 학자들이 밝혀냈지요(1964년에 이론적으로 예언되었고, 2012년에 처음 발견). 고속 회전으로 돌려서 양성자 두 개를 충돌시켜서 거기서 힉스입자, 신의 입자란 것을 뽑아냈어요. 그 이야기는 나중에 스토아, 에피쿠로스학파 이야기할 때 언급하겠어요. 왜냐하면 에피쿠로스학파의 기본은 데모크리토스라는 선배의 입자론, 원자론으로 세상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현대 물리학자들은 하나의 수식으로 전 세계 모든 것을 설명하는 수식을 제시했습니다. 그 수식을 쓰면 칠판에 가득해요.

그러니까 그것과 사도 바울의 복음과 싸우는 겁니다. 세상은 과학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사도 바울은 아니다. 그 대목에 대해서 제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도망가니까 “형님. 미쳤어요? 왜 이래요. 이건 아니잖아요.” 뒷담화한 게 아니에요. 면박을 줬습니다. 그게 갈라디아서 2장에 나옵니다. 그리고 그 뒤의 내용이 험악하기 짝이 없어요. 소위 유명하다는 인간들이 그 정도 수준밖에 안 된다는 거예요. 

인간이 뭔가 장착해줘야 성령이 그것 보고 찾아온다는 거죠. 성령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이 찾아오는 것은 가장 심판 받을만한 인간을 찾아가요. 이방인에게 성령이 와서 누굴 부끄럽게 하느냐 하면,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했던 그 모든 것이 헛짓이라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인간이 깡패냐, 어떤 인간이냐, 그런 것 묻지도 따지지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사도회의에서 그렇게 너무 은혜로 천국을 가게 되면 너무 나대고 주제넘게 건방지지 않겠느냐고 또 걱정을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하는 말이, 걱정을 해도 주님이 걱정할 문제를 되지도 않는 심판의 대상자가 왜 걱정을 하느냐. 자꾸 의식이 뭐냐 하면, 주님과 동업자라는 거예요. 내가 살아있어서 성령 받아서 활동하게 되면 주의 일에 조금이라도 기여하지 않을까 하는 겁니다.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그게 바로 유대인의 자기 의라고. 그러면 자기 의가 생기느냐? 자기 의가 생기는 절차를 제가 과정을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교재 서론부분에 나온 건데요.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말씀을 주셨습니다. 말씀이 법의 형식이에요. 왜 법의 형식이냐? 법 자체는 새로운 두 개의 결과를 예상한 내용이 잠재돼있어요. 하나는 처벌이고, 또 하나는 축복입니다. 두 개가 지금 가능성으로만 있을 거예요. 그래서 인간이 지키게 되면 복을 받고, 못 지키면 처벌받게 돼있어요. 따라서 인간이 법을 지킬 때 처벌받는 지옥 가는 식으로 해석하겠어요, 복 받는 식으로 해석하겠어요? 그건 당연하게 자기존재의 정당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복 받는 식으로 해석하겠지요. 그럼 여기서 공식 하나 나옵니다. 

법의 해석 작업이 나온다. 법은 뭘 유도하느냐 하면, 해석 작업을 유도해요. 해석 작업을 유도하게 되면 주위의 응원을 받아야 되기 때문에 이게 집단해석이 됩니다. 집단해석은 권력이 되고, 권력에서 역사와 전통이 나와요. 관습이 나옵니다. 왜 이렇게 나오느냐 하면, 처벌받지 않기 위해서, 계속 복 받기 위해서. 

그런데 주님께서는 인간이 처음에 해석 작업할 때에 놓친 게 있다는 겁니다. 뭘 놓쳤느냐 하면, 자기주체파악을 못했어요. 나는 처벌받아 마땅하다는 창세기 3장의 생명나무에서 끊어졌기 때문에 단절됐기 때문에 저주받는 것이 오히려 제 입장에서는 정당한 조치라는 그것을 인간들이 그 내용을 포함하지 않고 있어요. 그걸 놓치고 있습니다. 죄인 주제에 무슨 법을 해석합니까? 처벌이 적당하지. 그러한 고백이 나올 수가 없게 돼있어요.

그런 고백한 사람 있잖아요. 12년 동안 혈우병 걸린 여자, 또는 자기 딸이 귀신들린 여자. 그런 사람을 주님께서 일단 무시하죠. 비슷한 이야기인데요, 자기 딸이 병든 여자가 왔을 때 나는 자녀의 떡을 개한테 주지 않는다고 하니까 개라도 먹고 남은 찌꺼기는 있지 않습니까. 그 답변을 할 때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해석했습니까? I am 찌꺼기. 나는 개, 나는 개 같은 인간. 그걸 고백한 거예요. 그게 1번이 아니고 2번이었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구원받을 때 심판에서 면제될 때 진짜 구원의 원형이 나왔어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잘못됐다는 거예요. 어떤 잘못한 게 기억나서 반성한 게 아닙니다. 나라는 존재 자체를 죄의 존재로 보는 거예요. 내가 여기 있음은 저주가 여기 있는 거예요. 내가 움직이는 것은 저주가 냄새피우면서 움직이는 겁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세리와 창기가 먼저 천국 간다 할 때 강도가 네가 오늘밤에 낙원에 있으리라 할 때 주님께서 그런 사람들을 자꾸 부각시키는 이유가, 제발 네 주제 파악하라는 겁니다. 

어디 근거해서? 창세기 2장과 3장을 근거해서. 네가 선악을 아는 자체가 이미 저주받은, 하나님 보시기에 본래 인간 아니라는 거예요. 선악을 알고 난 뒤에 선을 행하면 됩니까? 그런 구질구질하게 질척대지 마세요. 자꾸 끼어들어서 그래도, 뭐. 자꾸 변명들 하지 마세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따라가서 뭘 해석하느냐 하면, 그들의 해석 자체에서 해석의 범주에서 위반되는 사례를 계속 유발시켜버려요. 해석을 했는데 저주받아요. 그럼 해석 자체를 수정해요.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율법을 잘못 해석했구나. 그러면 이렇게 해볼까? 그런데 또 처벌받아요. 

하나님의 전쟁을 할 때는 언약궤를 모시고 하면 반드시 이긴다. 언약궤 모셔서 졌지요. 누굽니까? 홉니와 비느하스. 블레셋한테 언약궤 빼앗겼잖아요. 언약궤 있으면 승리한다는 법 해석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그 다음에 언약궤만 있으면 안 되고 제사장이 선지자가 와서 기도해주면 낫는다. 승리한다. 그래서 사울 왕은 언약궤를 붙들고 제사 드리려고 선지자를 기다렸는데 선지자가 안 와요. 약속을 사무엘이 어겼어요. 사무엘이 어디 있느냐 하면, 칠판 뒤에 있어요. 숨어있어요. 사무엘이 못됐어요. 자기 오기 전에 무슨 짓을 하는지 보겠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오기 전에 무슨 짓을 한다는 것은 그 짓이 사울이 자기 본 의중을 드러내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이 본 의중을 드러낼 때까지 참을성 있게 인내하십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성도를 인내하는 이유가, 아직도 예수 믿고 잘났다고 하기 때문에 네가 어디서 깨어져야 되고 어느 정도로 못났기에 피를 흘렸는지 알 때까지 계속해서 주께서 인내하는 거예요. 인내라고 참으라는 그런 이야기하는 줄 알아요. 니 주제 파악이나 하라고 인내하는 거예요.

그리고 자기 뜻대로 안 되고 인생 망가질 때 무대 뒤에서 까꿍하고 오는 거예요. 걸렸다. 봐. 너 예수 싫어하잖아. 예수 좋아한다고? 사업 안 되니까 대들잖아, 반항하잖아. 그게 바로 이방인이 아니고 모든 인간이 구원받는 원형입니다. 원형은 개 같은 인간에게 찾아야 돼요. 훌륭한 열두 제자들에게서 찾지 마시고. 

둘째 시간에 이야기했잖아요. 열두 제자가 세웠다는 예루살렘 교회를 누가 박살냅니까? 애초부터 박살낸 사람이 누구였어요? 사울이죠. 사울이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예수의 이름으로 박살내요. 교회를 박살내지 않으면 그건 교회 아닙니다. 교회 세우세요. 자기가 세운 교회, 자기가 박살내세요. 교회 없~다.

예루살렘을 지키기 위해서 교회를 핍박했던 사람, 그것이 십자가의 정수, 십자가의 본심으로서 예루살렘 교회에 들어가서 그런 식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구원이 없습니다.

구원은 뭐냐?
어떤 것을 보여주는, 마지막 제일 중요한 단어, 현상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상이에요. 존재가 아니고 현상이에요.
그렇게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살도록
이렇게 죽었다가 살아나신 내용물 때문에
우리는 번뜩번뜩 퍼지는 현상입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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