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자료

2강 이중결정

아빠와 함께 2018. 8. 4. 14:41
2018-08-04 07:27:03조회 : 16         
2018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2강-사도행전 강해:이중결정이름 : 한윤범 (IP:14.39.134.34)

2018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2강-사도행전 강해:이중결정
(강의:이근호 목사)


첫 번째 시간 제목이 <무슨 일?> 물음표. 두 번째 제목도 물음표 들어갑니다. <들리니?> 사울이 예수님과 주고받은 이야기를 너도 들었니? 우레만 들었다 말고 그 내용에 대해서 들었니? 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사도행전을 통해서 성경 전체는 한국말로 써놨고 모든 한국사람들이 사도행전 1장부터 다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슨 내용인지는 전혀 몰라요. 왜 그러냐 하면, 사도행전 4장의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 라는 입장에 서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이해되지 못하느냐 하면, 감당되지 않는 의미는 삭제를 해요. 이 삭제는 바로 살해의지의 되풀이입니다. 반복입니다. 유대인들은 눈에 보이는 예수님을 살해했지만 오늘날 현대인들은 들리는 복음을 살해해버려요. 왜냐하면 감당이 안 되기 때문에. 감당이 않는 것은 삭제하고 제거해버려요. 

그렇다면 하나님 쪽에서 가만있지 않고 계속 성령 받은 사람을 통해서 토해내도록 실시합니다. 아까 이야기한 외재성이 내재성으로 파고 들어와서 계속 이야기해요. 그럼 저쪽에서 감당 되지 못한 어둠에 속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압박했던 사람들이 예수님에 의해서 주님의 말씀이 들리는, 복음을 아는 사람들을 예수님과 같은 처우를 해주죠. 이 사람들에게 폭력을 행사합니다. 폭력을 행사한 쪽에서 뭘 갖고 있느냐 하면, 권력이 있다는 점을 티를 냅니다. 

예수님을 죽인 자가 누구였지요? 바리새인과 사두새인, 그 다음에 서기관들이고 제사장들이죠. 우리가 보기에 이들의 업무가 뭐냐 하면, 율법을 연구하고 전하는 사람들이죠. 율법이란 바로 하나님의 뜻을 말하죠. 자, 보세요. 하나님의 뜻을 연구하고 전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 사람이 누굴 죽였습니까? 예수님을 죽이면서 그들은 폭력을 사용했지요. 그렇다면 폭력을 사용하기 전에 한 군데를 들려야 돼요. 뭐냐 하면, 바로 정치세력.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것이 어느새 정치세력화 되었다. 이것은 이미 다니엘에 예언돼있어요. 하나님의 법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정치적 인사들이 된 거예요. 정치꾼이 된 겁니다. 정치란 계속 힘을 집중하기 위한 제도에요.

국가의 법은 두 가지로 나눠집니다. 하나는 사법체계로 나가요. 또 하나는 행정체계로 나눠져요. 사법체계에서 폭력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말했던 교회에서는 폭력이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안 나오지요. 폭력 대신 갈라서자, 헤어짐이 나와요. 그런데 세상에 있는 오늘날 교회를 보세요. 폭력이 나옵니다. 왜냐하면 서양의 정치학에서, 참 이 교회가 국가를 다스릴 때 그걸 국가종교라 합니다. 국가가 교회를 이용할 때는 국가종교였어요. 국가종교에서 종교국가로 바뀝니다. 

모든 국민은 자동적으로 세례 받아야 돼. 이게 종교국가에요. 종교국가는 우리나라는 아니지만 전 세계에 많이 있습니다. 이슬람 쪽은 대부분이고. 특히 북한도 마찬가지고. 중국도 그렇고. 이념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거예요. 말은 민주주의라 해도 민주주의 아니에요. 종교국가입니다. 종교국가가 나중에 과학이 발달하면서 나중에 이야기할 거지만 사도 바울이 두 번째 전도 여행할 때 마케도니아의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레아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는데 여기에 종교가 국가화 된 유대교죠. 이 사람들이 따라오면서 괴롭혔습니다. 그래서 피해서 아테네로 갔는데 아테네에서 누굴 만났느냐? 

아테네가 에피쿠로스와 스토아학파의 발생지입니다. 스토아학파란 건물이 있고 복도에 기둥이 있어요. 텅 빈 공간을 회랑이라 해서 여기에 제논이 돌아다니면서 철학을 설파한 것이 에피쿠로스학파였어요. 이 사람들이 논쟁을 하면서 세상에 있는 국가에 정신을 심어준 정치사상과 복음이 정면으로 부딪치는 겁니다. 복음이 뭐냐, 어떠한 본질과 내용을 갖고 있느냐는 반대되는 것과 부딪칠 때 실상이 드러나요. 그 실상은 사도 바울의 편지에 다 나와 있습니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학파와 사도 바울이 논쟁을 했는데 그 자세한 것은 사도행전 17장에서 이야기하겠지만 미리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입자가 되지 아니하면 분석이 안 된다. 이 주의입니다. 힘이든 에너지든 국가든 가정이든 뭔가 단단하게 입자로 돼야 돼요. 단단하게 응축이 돼야 그게 제대로 질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시발점이 된다는 겁니다. 흐리멍덩하게 아무것도 없으면 발전의 여지도 없지 않느냐는 사상이 바로 에피쿠로스와 스토아학파에요.

국가가 힘이 단결해줘야 앞으로 5년 계획, 10년 계획이 성립되는, 교회도 마찬가지고 가정도 마찬가지고. 이러다가 우리 가정 말아먹는다. 너는 어떻게 하고 너는 어떻게 하고 그 다음에 계획이 나오는 거예요. 사업체도 마찬가지고, 공장, 장사하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입자화 된 단단하게 최종적인 알갱이로 돼있을 때만 비로소 다룰 수 있다는 것이 인간들에게서 나오는 사고방식이에요. 그러니까 이건 존재지요. 뭔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거기에 대해서 말하기를 그런데 그 입자가 죽었단 말이야. 너는 입자의 끝을 알아? 입자의 그 마지막을 알아? 그건 죽음이야.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스토아와 에피쿠로스학파에서 죽음? 아직 오지 않은 경험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우리가 무서워할 필요 없다. 우리가 죽음을 미리 당겨서 겁낼 필요 없고 일단 죽으면 죽었기 때문에 겁낼 필요 없다. 이게 에피쿠로스학파에서 나온 죽음에 관한 이론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그래 네가 아직 경험 안 했겠지. 당겨서 경험하면 어떻겠어, 라는 게 복음이에요. A라는 사람, B라는 사람, 너의 죽음, 너의 죽음, 모두 다 동일한 죽음을 맞이하는데 그 죽음이 십자가 죽음이다. 그것 믿을래, 안 믿을래? 이렇게 나온 겁니다. 그들은 어떤 희망을 갖는데 사도 바울은 희망을 없애버려요. 

예를 들어 교회를 보면 교회가 앞으로 5년 계획 세우고 지금 20명인데 50명 되고 백 명 된다. 사도 바울이 그 교회 당회장으로 왔다고 칩시다. 뭐라고 설교하겠습니까? 백 명, 이백 명 된들 그 자체가 죽음이라는 거예요. 그게 바로 죄가 된다는 겁니다. 왜? 그 안에서 권력이 작용하기때문에. 권력은 계급을 낳습니다. 목사계급, 장로계급, 계급을 낳아요. 이왕 이뤄진 계급을 계속해서 이끌어가려는 시간 입장에서 미래로 키우려고 하는 그걸 지탱하려고 또 힘을 거기에다 쏟아 붓습니다. 그게 결국 국가종교가 돼요. 

나중에 국가종교가 종교가 희박해지니까 종교국가로 바뀌는데 이게 바로 16세기에 개신교의출발입니다. 개신교는 종교 하나에 나라 하나 다 붙어요. 초대교회 복음이 로마에 갈 때는 철학이 되고, 개신교에 와서는 이게 문화가 되고, 그게 미국으로 건너가면 기업이 되고, 그게 한국에 와서 초기업 돼버렸어요. 전부 다 입자입니다. 단단한 거예요. 내 가정, 내 교회에요. 사도 바울 복음에는 그런 내용이 없어요. 

교회 세우자는 게 없습니다. 인간이 세워서 있는 교회라면 그 교회는 필히 이중결과에 의해서 반드시 하나님의 교회를 부수게 돼있고 가로막게 돼있고 부정하게 돼있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교회는 권력이 없기 때문에 권력이 있는 것이 권력이 없는 것을 내치게 돼있어요. 이 세상의 원리가. 그래서 오늘 오후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교회 다니지 마시고 교회 되면 되는 거예요. 교회 갈래? 교회 될래? 어느 것 하렵니까? 주께서 교회 되게 했는데 이건 교회인지 모르고 교회 간다고 난리에요. 교회가 막 이동해.

예루살렘 교회의 문제점은 자기가 높은 곳에 있다고 여겼던 겁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야고보가 주장하기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모여라. 왜 모이냐? 이게 본부다, 아지트다. 그래서 성령께서 예루살렘부터 그 다음에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주의 뜻이라고 본 거예요. 그 사람들이. 그래서 유다는 갈릴리에 포함돼있고 사마리아부터 아시아, 터키 그런 사람들이 오거든 누구한테 보고하게 돼있냐 하면, 이게 지부기 때문에 본부의 말을 들어야 되는 거예요. 비비큐, 파리바케트, 다 프랜차이즈 아닙니까. 지금 예루살렘은 프랜차이즈 사업을 벌인 거예요. 예수님의 지시가 그렇다는 거예요. 주님께서 어떻게 한 줄 알아요? 망해버렸어요. 본부가 망했습니다. 본부에 핵폭탄 터졌는지 본부 날아갔습니다. 본부 없어요.

주님의 뜻은 뭐냐 하면,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을 도로 돌아가는 게 아니고 허락받는 게 아닙니다. 예루살렘에서 어디로 가느냐 하면, 다른 예루살렘, 지상의 예루살렘 말고 천상의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이방인 교회가 더 가까워요. 이것 부정하고 가는 겁니다. 지상에 있는 예루살렘이 망하고 바로 예루살렘으로 가는 게 아니에요. 본부가 아니에요.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겁니다. 따라서 선교는 없습니다.

자, 선교가 있으려면 46~49, 49~52, 52~56년까지 1차, 2차, 3차 한다는데 그렇게 돼버리면 세월이 흐르게 돼요. 그런데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전체에 하나의 사건밖에 없다고 했지요. 하나의 사건에서 작은 사건들이 발생되지요. 그 이유가 어떤 이야길 해도 하나의 사건, 십자가 사건의 연발성은 바로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과 직결되게 돼있어요. 지상의 예루살렘과 관계없습니다. 선교란 게 없어요.

여기서 일어나는 모든 파생된 사건의 공통점이 뭐냐 하면, 신나게 죽자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날 선교사의 특징은 죽으러 가는 게 아닙니다. 살기 위해서 선교해요. 가슴 찢는 회개도 소용없어요. 일상 밥 먹고 사는 것과 똑같아요. 애 낳고 선교비 챙겨서 밥 먹고 살고 고생했다고 해서 돈 더 받아내고. 선교비란 돈 뜯어내기 위한 명목입니다.

선교가 없는 이유가, 살고자하는 인간과 선교가 결부될 수 없어요. 선교는 죽은 자만이 할 수 있어야 되는 거예요. 살아있는 선교사가 해버리면 숫자 대상이 돼버려요. 살아있는 나로 인하여 몇 명 구원받았다고. 몇 명 구원받은 것 하늘나라에서 인정해줍니까? 인정 안 해줍니다. 메시아도 아닌 게 지 마음대로 숫자 헤아리고 있어. 네가 구원받았다는 그 인간 하늘나라 가는지 볼까? 그래도 이 사람 와서 복음을 외치고 한다고. 그거는 니 생각이고.

정말 어떤 선교사가 선교를 했는데 그 사람이 성령 받았다면 주님이 직접 구원시켰다는 고백만 내놓을 뿐이에요. 그럼 선교사는 뭐냐? 선교사란 쓸데없는 인간을 붙여서 주님이 나를 구원하신 거예요. 모든 목사는 쓸모없는 인간이거든요. 쓸모없는 인간을 붙여서 주님께서 구원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아볼로가 뭐며 게바가 뭐냐 바울이 뭐며 그게 뭡니까? 물주는 자 있다고 그 사람이 구원하겠어요? 심는 자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구원합니까? 자라게 하신 분은 누굽니까? 성경을 안 보셨구나. 고린도전서 3장에 자라게 하신 분은 예수님밖에 없다. 누굴 통해서? 전혀 능력 없는 선교사를 통해서. 선교사는 하나같이 능력 없다는 점에서 평화의 악수를 하시기 바랍니다. 로마의 평화, 팍스 로마나라고 하지 않습니까. 로마의 평화는 황폐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좋게 지내는 게 평화가 아니에요. 너나 나나 나주 작살나는 황폐에요. 로마는 전쟁하는 나라에요. 가는 곳마다 황폐하게 만들어서 그들은 이걸 평화라고 이야기합니다.

다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예루살렘을 야고보나 이런 사람들은 본부라고 여겼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땅에 관한 문제에요. 땅의 의식이 여전한 겁니다. 땅의 의식을 누가 지적하느냐 하면, 예루살렘의 열두 사도와 전혀 상관없는 사울이란 사람을 통해서 이걸 공박하는데 이 사울이란 사람이 뭐 하는 사람이냐 하면, 교회를 학대했던 사람이에요. 이게 하나님의 복음의 비밀입니다. 복음을 반대한 그 사람이 바로 사도에요. 

사울이란 사람이 안디옥에 1차 합류해서 바울로 바뀌는데 어쨌든 핍박했던 사람을 교회에다 집어넣습니다. 이 교회는 누구 말 듣느냐 하면, 예수를 핍박했던 그 사람 말을 따라가야 돼요. 베드로, 야고보, 요한, 그 사람들은 여전히 어디에 집착하고 있느냐 하면 땅의 예루살렘 가시적인 성과에 매료된 사람이에요. 하나님이 살아계시다. 성령이 왔다. 삼천 명, 오천 명 있으니까 교회 커지겠네. 이렇게 되거든요. 

그 삼천 명, 오천 명이 뭐하는 사람이냐 하면, 이제는 죽어도 좋아요. 죽기 위해서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이에요. 죽을 사람이기 때문에 숫자로 치게 되면 0이에요. 오천 명이라면 교인들 많아서 좋겠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 뭐라고 하는지 압니까? 나를 숫자에 집어넣지 마세요. 나는 귀신입니다. 사람을 숫자로 치면 권력이 됩니다. 그 권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권력은 반드시 감당이 안 되기 때문에 저쪽 윗동네를 감당을 못하기 때문에 추방하게 돼있어요. 권력은 권력 자체를 확장시키려는 본능 때문에 확장시키는 본능에 보탬이 안 된다면 추방하게 돼있고 내쫓게 돼있어요. 그래야 권력의 있음에다 모든 기대를 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로 예루살렘이 그런 오류를 범한 거예요. 그걸 누가 이야기하느냐? 교회를 핍박했던 사울이 여기에 삽입돼버리죠. 그러면 교회는 어떻게 세워지느냐 하면, 교회를 부수면서 교회가 나오게 돼있지요. 이게 교회 세우는 숨겨놓은 주님의 멋진 반전입니다. 교회를 부수면서 교회가 세워지는 겁니다. 있는 교회, 교회 아니라고 하면서 그들이 바로 교회가 되는 비법을 사도 바울의 등장으로 모델화시킨 겁니다. 

열두 번째 제자 맛디아 뽑을 때 베드로나 요한, 초창기 주도 인물 아닙니까. 그들이 열두 교회를 어떻게 해볼까 생각한 거예요. 열두 교회를 아예 작살내기 위해서 열두 제자를 뽑았다고 그들은 감히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 열두 교회를 우습게보고 핍박했던 그쪽에서 열두 교회가 미처 예상 못한 진짜배기 교회가 사도 바울을 통해서 등장하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를 핍박 안 하거든 목사라 생각하지 마세요. 

“목사님, 막 가는 것 아닙니까?” 막 가봤자 어디까지 가겠어요? 아무리 막 가봤자 교회가 있는데 어떻게 합니까? 주께서 만든 교회는 어떤 핍박을 해도 무너지지 않아요. 무너지지 않기 때문에 무너뜨립시다. 어차피 무너지지 않을 거니까. 제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까? 여러분 어젯밤 꿈이 지워집니까? 안 지워지지요. 안 지워질 거라면 욕해도 상관없어요. 어차피 교회는 안 무너질 거니까 마구 신나게 핍박하잔 말이죠. 그것도 편하게 하잔 말이죠. 

교회를 편하게 핍박 못하는 이유가 뭐냐? 이건 바로 망할 교회를 아직까지 붙들겠다는 심보가 있기 때문에 그렇고, 그 교회에 누가 있느냐? 바로 본인의 자존심이 걸려 있고 본인의 목돈 걸려있기 때문에 그래요. 특히 목돈. 진짜 여러분이 성령을 받았으면 여러분 다니는 교회를 심하다할 정도로 막 하세요. 그래서 교인들이 나가거든 교회가 분란이 있거든 애초부터 교회 아니었습니다. 그건 교회가 아니지요. 

쉽게 말해서 사도 바울을 통해서 교회를 만들고, 사도행전 20장에 나옵니다. 십자가 피로 세운 교회라고 했거든요. 사도행전 20장 28절. 그 교회가 시간적으로 예루살렘보다 뒤에 나타났다는 사실, 대단히 중요한 사실이에요. 그 뒤에 나타난 교회를 누가 핍박하느냐? 앞에 예루살렘 교회가 시간상 역사상 먼저 냈기 때문에 갖은 모욕과 공격을 해댑니다. 특히 예루살렘에서 바나바, 바나바 고생 많이 했습니다. 세 번이나 왔다 갔다 했어요. 바나바를 보내서 안디옥 사람들이 예수 믿는다 하는데 그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가 봐라. 이렇게 된 거예요.

유대인들의 메시아가 뭐냐? 율법 위에 메시아가 우뚝 서는 이래서 교회가 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율법의 완성으로써 예수님이라 본 거예요. 율법 위에 교회. 그런데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사도 바울 본인은 율법에 철저했던 사람이거든요. 율법 위에 세워진 교회는 메시아가 아니고 가짜 교회가 되어서 가짜 교회가 진짜 예수님을 핍박했다는 것을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알게 된 겁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게 뭐냐? 율법을 내세우는 게 율법 외에 메시아가 와서 율법 위에 메시아를 전부 다 까는 식으로 일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 근거는 바로 율법으로 예수님이 죽었으니까. 이제는 너희들이 죽을 차례라는 말입니다. 너희들이 메시아를 죽였으니까 이제는 메시아가 너희를 죽일 차례다. 따라서 이 모든 것은 심판의 대상이다. 이게 바로 복음이에요. 사도 바울은 사람 꼬시려고 전도한 적 없어요. 너희는 심판 가운데 있다. 끝.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예수님 말씀처럼.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 마법 걸린 게 내 말 알아들을 수 있겠어? 이런 식으로 일하는 거예요.

그런데 놀랍게도 성령이 임하니까 같은 패가 등장하기 시작한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베드로나 야고보는 깜짝 놀라요. 믿어야 되는데 못 믿겠다. 그러니까 불러내서 사도행전 15장에서 사도회의를 하는 겁니다. 쭉 들어보니까 진짜네. 어떻게 율법이 없는데 메시아와 연결, 바탕이 없는데 메시아와 한 몸이 될 수 있느냐고 깜짝 놀라요. 율법이 없다는 말은 뭐냐 하면, 뭘 하든 따지지 않고 천국 간다는 거예요. 네가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고 어떻게 했는지 묻거나 따지지 않는 식으로 그냥 성령이 오는 겁니다. 

이걸 누가 역겨워하고 싫어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법으로 이미 세력화 돼있는 이 법에 동조해서 우리는 교회고 우리는 참된 성도라고 우겼던 권력화 된 교회라는 종교단체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용납하지 않아요. 이건 예수님 당시도 마찬가지지만 사도 바울 당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흐름이 뭐냐 하면, 안 믿는 사람이 공격하는 것이 아니고 처음에는 예루살렘에 있는 자들이 공격해요.

예루살렘 교회가 이미 권력과 일치됐지요. 폭력을 행사하니까. 아까도 이야기했지요. 폭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이 있다는 말이에요. 그 권력이 어디까지 파급되느냐 하면, 폭력 행사에 확장된 것이 그 다음에 로마제국으로 확장됐거든요. 그 권력이 이제는 사도 바울을 핍박합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로마제국이 점령한 지역을 다니면서

여러분들 이런 것 생각해보세요. 유대인은 핍박 안 했는데 왜 기독교인은 핍박하느냐? 로마가 유대인들은 핍박 안 해요. 유일신이고 그들은 황제를 숭배하지 않았고 오직 여호와만 믿는다고 했으면 핍박해야 되는데 유대인들 핍박 안 해요. 유대인들이 반항했을 때만 공격하지 가만있을 때는 공격하지 않아요. 그런데 왜 기독교인들은 공격합니까? 큰 차이가 있어요.

유대인들이 말하는 유대교는 로마 사람들, 안 믿는 사람들이 보기에 민족연합체에요. 혈통연합체에요. 이방인들, 로마제국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권력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바로 혈통에서 나와요. 대대로 역사에서 나오고 혈통에서 나오잖아요. 자기들도 혈통에서 나오고 유대인들도 혈통에서 나왔으니까 자기 민족의 신을 믿는다는데 그거는 로마의 행정적 에너지 효율을 위해서 조용하게 있으면 쓸데없이 아무 소리 안 하기로 봐주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혈통중심이 아니지요.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나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전부 다 예수 그리스도의 옷 입으면 뭐가 된다? 천국백성 되는 거예요. 신분, 계급 관계없이 종이든 자유자든 관계없이. 이게 바로 로마를 뿔따구 나게 한 거예요. 이런 게 로마에 감염되고 설친다는 것을 도저히 용납 못하는 겁니다. 혈통이란 가족이거든요. 제일 기본단위가 가족이잖아요. 가족의 결집을 깨버리면 행복은 어디서 나오는 거예요? 그동안 모든 행복이란 내 가정, 내 식구 잘 되는 거예요. 동의 없는 것 보니 평소에도 복음 알아도 자기 가족중심으로 살았던 것 같아요. 이러다 내가 미움 받아 쫓겨날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랫동네에선 혈통중심이에요. 그런데 여러분 가정에 식구 몇입니까? 엄마, 아빠, 아이 둘, 그리고 천사 둘 그래서 여섯 명입니까? 아니지요. 천사는 빼야지요. 천사 빼고 네 명이라고 한다고요. 그러나 사도 바울이 옥에 갇혔을 때 지진이 일어났지요. 아까 베드로 옥에 갇혔을 때 옥문을 천사가 열어줬지요. 사도행전 1장 10절에 천사 둘이 등장했지요. 사도 바울이 올 때마다 옆에 누가 서있습니까? 천사가 옆에 있지요. 사도 바울은 찬사와 패밀리인데? 천사의 가족인데. 고린도전서에 보면, 너희들은 천사보다 더 위대하기 때문에 천사보다 더 높은 지위에 있기 때문에 같은 인간들끼리 고소고발하지 말라고 돼있어요.

사도행전이 역사이야기 아닙니다. 이건 아주 괴상한 이야기에요. 그야말로 사도행전 보면서 아까 사도행전 4장 16절, 이 사람들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어, 하고 걱정스러워할 정도로 성령 받은 사람들은 아주 특이한 분들입니다.베드로 요한... 어떻게 특이하냐? 키가 크냐? 힘이 세냐? 아니에요. 자기의 내일 일도 모르는 사람들이에요. 어디로 튈지 본인도 모르는 사람들이에요. 다만 뒤돌아보면 어디까지 왔는지는 알아요. 어떻게 해서 어떤 일을 했는지는 압니다. 열차에서 제일 뒷자리에 앉는 거예요. 뒷자리에 앉은 사람은 기관차가 어떻게 달리는지 몰라요. 다만 자기가 지나온 자국만 보일 뿐입니다. 서부영화에서 무법자들이 설쳐대려고 꼭 뒷자리에 가있잖아요.

세상을 뒤돌아보면서 예수님한테 가했던 행사를 이 세상에 빈틈없이 왜 똑같이 하느냐? 우리가 예수님과 한 가족이란 이유 때문에, 그걸 성령세례라고 하는 거예요. 참 희한한 사람들이죠. 사도행전이. 사도행전을 제가 개괄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어도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사도행전 16장 17절 누가 크게 읽어보세요. “바울과 우리를 좇아와서 소리 질러 가로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빌립보에 갔는데 거기에 점치는 여자가 점을 잘 쳐서 주인한테 돈을 많이 벌게 해줬는데 그 여종이 사도 바울과, 그때는 2차니까 디모데와 같이 갔어요. 이 사람들에게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라고 귀신들린 점치는 여자가 하루 이틀도 아니고 여러 날을 그렇게 했습니다. 자, 묻습니다. 이 말이 맞습니까, 틀렸습니까? 만약에 이 말이 맞는 이야기이라면 사도 바울이 잘한다고 격려했을 것이고, 이것이 틀린 이야기라면 사도 바울이 하는 일이 뭡니까? 

다른 이야기했을 때 틀린 이야기라면 쫓아내면 되는데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그럼 하나님의 종이지 사탄의 종입니까? “구원의 길을” 세상에 귀신이 얼마나 단순한지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라고 했을 때 사도 바울의 조치가 뭐였던가요? 이 여자를 격려했습니까, 아니면 여자의 귀신을 내좇았습니까? 귀신을 내좇으면 그 여자는 두 번 다시 이런 소리를 안 해요. 안 하게 되면 전도하는데 그동안 후원받았는데 후원자가 끊어질 게 아닐까요? 그럼 전도하는데 손해 아닐까요? 이 사태를 어떻게 하면 좋아요.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전이라고 하는데, 치료받기를 거부하는 겁니다. 점치는 여자 종의 특징은 귀신들렸기 때문에 사도 바울의 어떤 분인지 정체를 알아요. 알지만 본인은 절대로 그 사람이 누군지 내용을 알면서도 그 사람에게 치료받기를 원하지 않는 겁니다. 그 말은 아무리 복음을 알고 아무리 예수님이 누군지 알아도 아는 것으로 머리에 담아두길 원하지 예수님 때문에 손해 보기를 본인이 원치 않는 강력한 힘에 매여 있어요. 그 강력한 힘이 바로 악마가 발목 잡는 겁니다. 

신학공부하고 목사하고 장로하고 남에게 복음 전하고 설교 잘하는데 본인은 죽기 싫어. 온 동네 선교하고 어려운데 선교하는데 본인은 그 선교현장에서 죽기 싫어요. 죽기 싫고 혈통으로 나가길 원해요. 내 가족끼리 살고 싶어. 그건 뭡니까? 이 점치는 여자와 똑같은 거예요. 자기가 말하는 것과 자기가 알고 있는 것과 그 알고 있는 것이 너무나 엄청나기 때문에 겁이 나서 알고 있는 내용에 투신하길 싫어하는 거예요. 투신해도 안 돼요. 하길 싫어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그 여자에게 귀신을 나오라고 명함으로 말미암아 결국 귀신이 나갔는데 그 여자의 발언은 무엇의 발언이냐? 귀신이 어느 정도까지 알고 있느냐? 귀신은 사도 바울이 하는 이야기를 다 알고 있으면서도 지옥 간다는 사실을 본인들은 수긍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인간들은 몰라요. 윗동네에서 어떤 식으로 서로 대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랫동네에 있는 인간들은 모르고 있어요. 

모르고 있기 때문에 예수 이름으로, 예수 피로 구원받는다고 하면 그렇게 이야기하는 그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 아마 천국에 갈 것이라고 사람들에게 속아 넘어갈 수가 있어요. 보이스 피싱입니다. 보이스 피싱을 중국말로 합니까, 한국말로 합니까? 한국말로 하잖아요. 그럼 한국 사람입니까? 아니 중국사람. 중국사람 다 그렇다는 건 아니고. 이 말이 더 미운 것 같은데. 

귀신의 협조가 필요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택한 백성은, 이 사건의 유발자가 튄다 했지요. 다른 말로 철판구이라 하는데 요리사가 와서 까불잖아요. 이렇게 튀길 때 이 원리가 뭐냐 하면, 구원이 아니고 심판이라니까요. 심판 속에서 구원이 나와요. 그러나 심판을 행할 때는 구원은 안 보여요. 심판이 끝나고 난 뒤에 다시 말해서 열차가 있으면 뒤에서 누가 살아남는 자인지 그때 보이는 거예요. 열차 방향에서 건지려고 하지 마세요. 그건 사도가 할 일이 아니에요. 사도는 심판만 하고 뒤돌아보면 심판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 나온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바빠요. 

볼 때 여기서 핍박과 위협이 나옵니다. 특히 처음 교회에 갈 때 바나바와 갈 때 마가 요한은 삐져서 밤빌리아에서 집에 가버리고. 하여튼 비겁하기는. 이 사람이 마가복음 지은 사람인데 나중에 로마에 갈 때는 사도 바울과 같이 감옥살이합니다. 하여튼 희한해요. 바나바와 둘이 가는데 이고니온에 가고 루스드라, 더베로 갑니다. 여기서 신나게 복음을 전하고 심판을 전했지요. 심판을 전해야 회개가 되거든요. 그냥 알라고 전하면 회개가 안 되잖아요. 당신들 때문에 메시아가 죽었음을 이야기해줘야 회개가 되니까. 

그런데 유대인들은 달려들고 이방인들은 좋다고 했어요. 많이 핍박을 받았을 때 주님께선 이 핍박 때문에 걱정하지 말라. 영생 주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이게 아까 이야기한 이중결과에요. 고생은 사도가 하지만 결과는 사도의 고생과 전혀 별개의 문제로 주께서 택한 백성 건지는 겁니다. 인간들은 예수님을 미워서 죽이지만 그 예수님을 죽이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알아서 죽이게 하시고 알아서 살리게 하시는 거예요. 

왜 그렇게 하느냐? 그래야 천국 갔을 때 제 노력으로 제 행함으로 여기에 왔음을 이야기 안 하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죄인이었는데 구원받았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천국 가서 주님이, 네가 무슨 죄인이야, 하면 저는 내가 행해야 구원된다고 생각한 그것이 죄입니다. 내가 행하지 않으면 나는 구원받지 못한다고 생각한 그것이 바로 주님을 욕되게 만든 주님을 기만한 죄가 됩니다. 

그러면 그렇게 알면 되지 않느냐? 나 때문이 아니고 주님 공로로 구원받았다고 하면 되잖아. 하지만 그건 해당이 안 돼요. 왜? 인간이기 때문에 이중결과에 도입되게 되면 어떤 식으로든 뭔가 해야 마음이 편해. 교회 왔다 갔다 점심만 축내면 미안하잖아요. 천원이라도 내야지. 뭔가 미안해서라도 하고 싶어. 그리고 이왕이면 가족들에게 복음이라도 하고 싶어. 하고 싶다는 것이 이중결과를 낳는 이중원인에 포함됐는데 이게 아니라고 해도 그냥 하고 싶어. 이게 말도 안 되는 걸 알지만 이것으로 구원되지 않는 걸 알지만 너무나 하고 싶어요. 왜? 그것이 죄가 되기 때문에. 내가 무슨 말하고 있는지

그만큼 이중결과가 어려워요. 하고 싶은데 그 하고 싶은 것 때문에 주께서 돌아가신 거예요. 그래서 주님이 돌아가신 걸 알았기 때문에 죄인 걸 알았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하게 됩니다. 왜? 이미 구원받았으니까. 사도가 이런 말했습니다. 나는 모든 자에게 빚진 자로다. 그렇게 안 설쳐도 구원받았는데 왜 자꾸 돌아다니느냐? 하고 싶어. 그리고 말하기를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합니다. 

합격을 받아놓고 왜 내가 행한 것은 합격이 안 되었을까를 합격증을 쥐고 이제는 뭔들 못해. 구애받지 않고 뭐든지 할 수 있는 거예요. 내게 능력 주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겁니다. 뭘 해도 죄가 되기 때문에. 그 죄를 마음 놓고 하는 그 즐거움, 거기에 대해서 감사합시다. 지금 나 혼자 감사하는 것 같아. 짜증내고 있는 것 같아.


빌립 집사가 에티오피아 내시를 만날 때 복음을 전한 내용도 마찬가지에요. 이렇게 철판구이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의 내용은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그 내용입니다. 위에서 봤을 때 다른 환경에서 봤을 때 비로소 보이는 전부에요. 에티오피아 내시가 책을 폈는데 하필 이사야 53장입니다. 이사야 53장에서 말하는 채찍 맞는 이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어요. 그것부터 시작해서 빌립이, 이 사람이 예수님인 것부터 시작해서 온 구약성경 전체를 다 설명해줬어요.

그걸 다 듣고 난 뒤에 뭘 알았기에 에티오피아 내시가 세례 받은 이유가 뭐냐? 이 사람이 뭘 하나 안 게 아니에요. 자기가 뭘 안 게 아니고 철판구이 전체를 알게 된 거예요. 내가 빌립 집사를 만난 것도 주님의 이중결과, 주께서 하게 하셔서 만났다는 걸 알게 된 겁니다. 비록 자기가 마차 몰고 달리더라도 이건 주께서 하게 하신 것이라고 인정한 거예요. 인정하니까 다른 관점에서 세례 받은 관점에서 주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빌립은 어떻게 떠나느냐 하면, 성령이 달랑 들어서 빌립을 다른 곳으로 보내버렸어요. 여러분 이걸 감당하겠습니까? 우리도 갔다가 가만있으면 핑 올라가고 있습니까.

그러니까 


사도행전은 뭐냐 하면, 

십자가 사건으로 본질이 확정된 입장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게 된 사건을 재현하는 겁니다. 

모든 각 처소에서 여러 가지 모습으로 하던 간에 

십자가 사건이 어떻게 발진처럼 증상이 자꾸 올라오는 거예요. 


증상이 올라오는 걸 기다리면 안 돼요. 예상은 안 돼요. 

그냥 살다보면 갑자기 뒤돌아보면 

살아온 모든 것이 주님의 십자가 안에서 살아왔다는 것, 주의 뜻으로 살아왔다는 이중결론에 도달됩니다. 

나는 열심히 살아왔는데 뒤돌아보면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셨어요. 잡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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