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1강-사도행전 강해:무슨 일? (강의:이근호 목사)
어디 있든지 주의 은혜로 살아가는 저희들, 복음이 뭔가를 접했던 저희들에게 이것이 과연 어떤 방식으로 주께서 수고하셔서 있을 수 없는 천국행을 허락해주셨는지 사도행전을 통해서 그 내막을 알려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 번째 제목을 적어보겠습니다. <무슨 일?> 무슨 일 있어, 라는 뜻이죠. 고요하게 정상적으로 흘러가는 세상에 사도행전에 보게 되면 천사 둘이 나타납니다. 사람이 아니고 천사가 나타났어요. 이 천사를 어떻게 감당할 거예요? 교회란 것이 인간들의 법적인 처리에 의해서 유지가 됐다면, 어디까지나 인간 손에 놀아나기 때문에 지금 못하다 싶으면 다음에 잘하면 될 텐데 천사가 개입해버립니다. 천사는 사람 말을 듣지 않잖아요.
천사 둘이 나타났다는 게 사도행전 1장 10절에 나옵니다. 두 명의 천사가 나타나서 뭔가 일을 시작하면 사람들 입장에서는 따라가야 할지, 안 그러면 인간들이 사는 이 세상에 천사들이 개입했을 때 이걸 부정해야 하는지. 이걸 만약에 인간들이 구성하고 있는 현실에 천사 둘을 받아들이게 되면, 인간 쪽에서 어떤 식으로 변화가 유발돼야 되는지 전혀 감 잡을 수 없습니다. 천사를 다른 말로 하면, 바깥에 존재하는 성질, 외재성이거든요. 인간세계 바깥에 존재하는 겁니다.
동그라미 안을 지구는 인간들 사는 세상이고 바깥에 천사가 있는 세계가 따로 있다면, 천사는 천사대로 살면 되고 인간들은 인간대로 그냥 자기 살림살이하면서 살면 돼요. 우리는 이게 상당히 자연스러워요. 우리는 이것에 푹 젖어있습니다. 이것에 적응이 잘 돼있는 입장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장 10절에 천사 둘이 흰옷을 입고 등장했습니다. 잘못 건드리면 인간 재산 다 날아갈 수가 있어요. 그렇다고 천사를 영접하고 받아들이면 지금까지 인간들이 구축해온 인간의 모든 역사는 하루아침에 거짓된 것으로 판정이 나게 돼있어요.
그래서 천사가 하는 일과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서 인간들은 주목을 해왔습니다. 첫째는 뜻이 같은가? 두 번째는 다른가? 만약에 같다면 살던 대로 살면 돼요. 만약에 천사의 뜻이 인간의 뜻과 다르다면, 첫 번째는 없애자. 두 번째는 회개하자. 다른 말로 하면 항복하자. 이런 경우 외에 다른 경우는 없습니다. 천사가 등장했는데 천사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저만 성경책 있는 건 아니잖아요. 같이 보시기 바랍니다.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것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그럼 여기서 제일 먼저 나올 이슈가 올라간다는 거예요. 올라가게 되면 어떤 현상이 있느냐 하면, 올라가지 않아서 알 수 없는 다른 환경을 제시한다. 어떤 사람이 올라가게 되면 옆에 있을 때 보이지 않던 다른 환경이 다 보이게 되겠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승천, 올라가신다는 것은 인간들이 알고 있는 세상이 잘못돼있다는 겁니다. 올라가신 분이 소개하는 다른 환경에 준해서 이 인간세계를 다시 파악해야 된다.
그럼 여기서 제가 질문을 하겠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역사를 뽑아낼 수 있을까요? 사도행전 1장부터 28장까지 있는데 이런 일이 있었고, 저런 일이 있었고 쭉 뽑아내게 되면 그걸 역사라 하는데 역사를 뽑아낼 수 있지요. 이런 저런 일들을 연결하면 되니까. 그런데 그렇게 사도행전에서 뽑아내서 연결시키겠다는 방식이 사도 바울이 쓴 편지의 내용이 그걸 용납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사람은 글자를 알면 누구나 사도행전을 읽어내요.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 쭉 나온다 말이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보자. 옳지. 예수님께서 40일 계셨구나. 그 다음에 오순절까지 기다리라 해서 예수님 승천하시길 기다렸다. 열두 제자 채우기 위해서 한 명을 보충했다. 그 다음 2장에서 오순절에 성령이 불 같이 내려와서 방언을 했다. 베드로가 설교했네. 3장에 앉은뱅이 낫게 했네. 이렇게 쭉 이어져가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사도행전을 보는 것을 사도 바울의 편지에서 그걸 용인했느냐는 거예요. 그걸 용납했을까요? 묻는 제가 나쁘지요. 사도행전을 그런 식으로 보는 걸 용납하지 않아요. 우리는 쓰인 대로 봤는데 뭐가 잘못이냐고 하겠지요.
그러나 골로새서. 에베소서, 어느 성경을 보건 절대로 그런 식으로 사도행전을 봐선 안 된다. 아니 사도행전뿐만 아니고 모든 세상 역사를 그런 식으로 봐선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보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과거에서 순서대로 현재를 거쳐서 미래까지 나가는 인간들의 몸을 중심으로 형성된 시간의식이 긍정돼버리죠. 과거, 현재, 미래로 시간을 흘러간다. 마지막 때 예수님을 재림하겠지, 라는 시간의식을 긍정해요. 그걸 옹호하게 돼버려요.
그러나 이런 시간의식은 기존에 인간들끼리는 용납이 되는데 주님께서 승천해버리면 위에 올라가서 보면 뭐가 나옵니까? 다른 환경에서는 이런 시간적 순서에 의해서 진실을 찾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고 용서할 수 없는 잘못된 것이에요. 만약에 사도행전이 역사로 돼버리면 성령 받지 않은 역사가들에게 사도행전을 써보라 하면 그들도 사도행전과 똑같이 써요. 구원받지 못한, 성령 받지 못한 사람이 사도행전을 이해하라면 사도행전 그대로 이해한다고요. 그게 맞느냐는 말입니다.
성도와 성도 아닌 사람, 지옥 가는 사람과 천국 가는 사람 차이가 없잖아요. 성도가 되려면 성령이 와있어야 되고 성령이 와있다면, 안목이 일반인이 생각하는 안목 말고 올라가서 봤던 다른 환경의 입장에서 사도행전을 볼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러면 사도행전이 어떻게 되느냐? 1장부터 28장까지 전부가 하나의 사건이 돼버려요. 단 하나의 사건.
이렇게 보게 되면(과거→ 현재→ 미래), 역사는 하나의 존재가 되고 말죠. 역사가 흐르고 있다. 흐른다는 것은 사건에선 없어요. 흘러간다가 아닙니다. 일어났다가 되는 겁니다. 이런 일이 일어났다, 이런 일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걸 +, +, 보태기 할 수는 없는 거예요. 예를 들면 나는 29살에 이런 일 있었고, 42살에 이런 일 있었고, 54살에 이런 일 있었다. 그래서? 그런 것, 이런 것들이 이어지게 되면 그게 나다. 그런 나가 아니에요. 일어난 사건에 말려든 거지 나라고 할 수 없는 겁니다.
에스겔 3장 12절에 보면, “때에 주의 신이 나를 들어 올리시는데 내 뒤에 크게 울리는 소리가 들려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처소에서 나는 영광을 찬송할지어다” 여기 에스겔 선지자가 들어 올렸다 했어요. 고린도후서에 유명한 말씀 있지요. 사도 바울이 셋째 하늘까지 이끌려 올라갔어요. 몸 안에 있는지 몸 밖에 있는지 나는 모르겠다. 낙원에 끌려갔다. 거기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 가히 사람이 이르지 못할 말이라고 돼있어요. 요한계시록 4장 1절에서 사도 요한이, 주님께서 이리 올라오라 했어요. 올라가는 거예요. 다른 환경이 보입니다. “이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누가복음 4장 5절을 보면, 마귀가 예수님을 이끌고 천하만국을 다 볼 수 있는 위치로 올라가요. 인간세계가 아니고 다른 환경에 올라가는 겁니다.
그러면 사도행전 1장 10절에서 천사가 두 명 나타났다는 것은, 심판 받아야 마땅함을 언급하기 위해서 사도행전이 시작되는 겁니다. 심판 받아 마땅함은 심판이란 테두리 안에 모두 갇혀있다는 말이죠. 아무리 역사가 흘러도 갇혀있는 테두리 밖으론 못 나갑니다. 이천 년이든 삼천 년이든 갇혀있는 겁니다. 그걸 제가 어느 설교에서 가두리양식이라 했는데 가둬져 있는 거예요. 물론 가두리양식장에 산소공급하고 하면 되겠지요.
사도 바울이 설교할 때는 몇 년 가도 상관없어요. 어차피 인간세계는 갇혀있다고 보는 겁니다. 갇혀있는 꼴을 고린도전서 3장에서는 죽었다고 이야기해요. 죽었는데 굉장히 바빠. 죽었는데 피서 다니고, 죽었는데 영화 보고, 죽었는데 정치하고, 죽었는데 월드컵 벌이고, 죽었는데 프로야구하고 있어요. 죽은 자들이. 이게 다른 환경의 안목으로 봐서, 다른 환경에 속해야 보여요.
죽은 가정에서 죽은 아빠가 죽은 아이를 얼마나 잘 키우는지. 과외 보내고, 수영 보내고, 유학 보내고. 죽은 아빠, 엄마가 죽은 자식을 그렇게 잘 키워요. 어떤 관점에서? 다른 환경에서 봤을 때. 무슨 이야기냐 하면, 무슨 소용 있느냐는 거예요. 그렇게 자식 잘 키우고 사업 잘 되는 게 무슨 소용 있느냐는 겁니다. 이미 들려올라간 입장에서는 그게 무슨 소용 있느냐.
예수님이 들려올라갔다. 그러면 선지자가 들려올라가서 세상을 보는 것과 예수님이 승천해서 보는 것과 차이가 있어요. 어떤 차이가 있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들려올라가서 세상을 볼 때에, 세상을 본다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이게 성령주심이에요. 성령을 주신다는 것은 안목을 주시는 거예요. 안목을 주시는 게 무슨 말이냐 하면, 새로운 언어를 제공하는 겁니다.
참고적으로 말해서 창세기 11장 바벨탑에서 하나님께서 마법을 걸어놨어요. 모든 민족들 간에 대화가 안 통하는 마법을 걸어놨어요. 주님께서 걸어놓는 마법을 풀어주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는데 마법을 풀어주는 대신에 이제는 공통적인 언어를 주되 그게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 새로운 장벽의 마법을 제공해요. 바벨탑에서 자기 이름을 높이겠다고 서로 주고받고 건축자재 왔다 갔다 하니까 주님께서 마법을 걸어왔다는 거죠. 말은 하는데 서로가 못 알아듣는 마법을 걸어왔어요.
그렇다면 그 마법이 사도행전 2장에 드디어 오순절에 와서 성령을 주게 되면 사도들로 하여금 각 사람의 외국어(방언)을 이야기했다. 그러면 마법이 풀렸느냐, 하는 겁니다. 풀리지 않았어요. 마법을 더 철저화 했습니다. 이제는 무슨 말을 들어도 이제는 언어가 문제가 아니라 그 내용이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다른 환경에서 바라보는 내용이기 때문에. 사람이 사는 지구상에서 올라가서 천사들이나 아는 내용을 지금 사도를 통해서 현재화시킨 겁니다.
사람 사는 세상이라면 외재성이란 말을 했지요. 바깥에 존재한다, 외재성. 천사가 예언한대로 성령이 오셔서 방언을 해버리면, 이 세상은 끝났어. 뭘 해도 갇혀있어. 심판 받아야 돼. 저주받아 마땅해, 라는 그 외재성이 뭐로 바뀌느냐 하면, 이제는 내재성으로 삽입되는 겁니다. 이게 사도행전 28장 마지막에 나옵니다.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거예요. 어떤 일이 벌어지니까 사람들이 사도행전 보면서 역사와 역사로 구축해놔요.
그런데 역사로 구축해놓으면 그게 무슨 이야기에요? 그건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어. 그것으로 끝나잖아요. 그건 아무 소용없어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시대에 돌입했다는 겁니다. 그걸 어떻게 압니까? 알지 못하도록 마법을 걸어놓은 거예요. 그러면 그 마법이 어떻게 풀립니까? 그건 니가 신경 쓸 바가 아니죠. 마법을 거신 분이 하나님이라면, 그건 몰라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걸 알아채면 인간이 아니죠. 천사지요. 그리고 그렇게 전했던 사도들도 주님한테 마법 걸렸습니다. 자신이 어디로 튈지 뭘 해야 될지 본인이 결정하지 않아요.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제거 터키 북쪽으로 전도할까요? 주님께서 가지 마. 주의 영이 못 가게 했어요. 그건 베드로한테 맡기고 너는 가지 마. 그러면 어디로 갈까요, 하는데 꿈에 마케도니아에서 건너온 사람이 우리 쪽으로 건너오라고 했을 때 사도는 어떤 마음이냐 하면, 자기도 마법에 걸린 거예요. 뭘 해야 될지 어디로 가야 할지 본인이 결정을 안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어디에 갇혀 있느냐 하면, 아랫동네 인간세계에 갇혀있는 게 아니고 윗동네 천사가 왔던 외재성, 여기에 또 갇혀있거든요. 사람들은 아랫동네에 갇혀있고 사도 바울은 성령 받았기 때문에 윗동네에 갇혀있고.
왜 갇혀있음을 강조해야 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다녀가셨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께서 오셔서 가실 때 좋게 나가신게 아니잖아요. 처참하게 나갔습니다. 아주 밉상 덩어리로 나갔지요. 죽음을 당하면서 빠져나갔단 말이죠. 인간세계와 윗동네, 일부러 윗동네라 했는데 골로새서 3장에 나오는 윗동네거든요. 빌립보서 3장에서 우리의 시민권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늘에 있잖아요. 윗동네로 죽음을 통해서 빠져나갔어요. 항상 윗동네가 우리에게 다가올 때 주님이 가셨던 죽음의 세계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은 죽음의 세계에 대비해서 자기는 살았다고 여기는 겁니다. 내가 살아있다는 이유 때문에 주님이 걸어놓은 마법을 해석할 길이 풀어낼 수가 없습니다. 내가 살았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러면 풀 수 있는 방법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다녀가면서 새롭게 생긴 십자가 죽음이 힘이 되어서 이 사람들에게 찾아오게 되면, 살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벌써 죽었다고 하는 사람에 한해서만 윗동네의 내용이 마법이 풀렸어요. 윗동네의 말을 알아듣게 되는 겁니다. 그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이에요.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나는 이미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다른 환경의 안목을 갖추지 아니하면 이건 사도 바울의 편지뿐만 아니고 사도행전의 해석이나 설명이 안 돼요. 설명이 안 되면 어떻게 됩니까? 제가 묻고 싶어요. 꼭 사도행전이 설명돼야 될 이유가 뭐예요? 설명돼야 된다는 것이 욕심 아닌가요? 돈만 벌면 되지 사도행전 왜 봐야 됩니까?
제가 첫째 시간에 묻는 것은 사도행전을 보는 게 여러분 돈벌이 도움 되고 이런 게 있어요? 없지요. 돈벌이 안 되는 일을 왜 해요? 뭔가 노동한다는 것은 돈으로 대가를 받아야 되는데 아무 쓸데없는 일을 왜 하느냐 말이죠. 여러분 답변이, 글쎄요. 우리가 미쳤나봅니다. 그 미쳤다는 사람들이 사도행전의 주역들이에요. 이제 사도행전이 풀리는 겁니다. 쓸데없이 돈도 안 되고 아무것도 안 돼요.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오순절 이후에 44절에,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이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했지요. 이게 뒤에 보면 4장에 비슷한 내용이 또 나와요. 여기 보면 날마다 모이고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하는데 이게 쉽게 말하면, 부자를 능가한 가난입니다. 부자를 능가한 가난이기 때문에 도로 부자가 될 이유가 없어요. 희한하지요. 미친 사람들이에요.
제가 아까 천사 두 명 나타난 것이 감당 안 된다했지요. 사람 사는 동네가 천사가 왜 등장합니까? 천사를 포함해서 해석할 것이냐, 빼고 해석할 것이냐? 천사 빼고 해석하면 사도행전은 역사 되지요. 그러면 천사 포함해서 해석하면 역사가 꼬이지요. 천사를 끼어넣을 자리가 마련되지 않아요. 이순신 장군은 있어요. 들어갈 자리 있어요. 안중근 의사 들어갈 자리 있는데.
역사수업이라 합시다. “학생 여러분, 삼국유사에 보니까 천사 둘이 왔어요.” 이게 강의가 됩니까? 그러면 학생들이, “천사는 신장이 얼마에요, 몸무게는요? 남자에요, 여자에요?” “쓸데없이 질문하는 게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끝난다 말이죠. 왜냐하면 인간세계에 전혀 보탬이 안 되니까. 감당이 안 되니까. 그렇다면 천사는 빼돌리자. 인간 아니니까. 그 빼돌린 외재성이 인간 속에 내재성으로 침투돼있어요. 그 내재성이 부자를 능가한 가난한 자들의 집합이에요. 미쳤어요.
그래서 우리가 사도행전을 볼 때 이런 관점이 중요합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3장에서 앉은뱅이 낫게 하고 난 뒤에 예루살렘에 문제가 많았어요. 인간의 행정적 처리에서 감당이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행정질서 잡는 사람들이 체포를 했어요. 당신이 하는 이야기는 우리 역사적으로 민족적으로 감당 안 되니까 조용히 해달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설치고 복음 전했다고 하는데 복음의 내용이 뭐였습니까? 도대체 그들이 뭘 이야기한 거예요?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의 설교가 나오는데 공통점이 있어요. 뭐냐 하면, 이중결론에 대해서 이야기했거든요.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가 설교하는 대목인데 이중결론 또는 이중결과라고 할 수 있는데 어떤 이야기냐 하면, 사도행전 2장 23절을 읽어보고 여러분에게 질문해볼게요.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여기서 뭐가 이중이냐 하면,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신 그것이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라는 겁니다. 이게 첫째 하나고요, 똑같은 사건인데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다. 하나님이 정했다고 해놓고 인간 너희들이 죽였잖아, 라고 한 거예요. 동일한 결과를 놓고 두 개의 원인을 집어넣습니다. 하나님이 죽이신 거예요, 아니면 사람이 그분을 죽인 거예요?
지금 베드로가 성령 받은 설교하면서 사람들을 설득시키는 게 아니고 추궁하고 있는 겁니다. 형사가 범인 잡아놓고, “네가 죽였지?” 이게 다른 환경의 안목에서 세상을 볼 때에 가두리양식, 전부 다 갇혀있는 대상을 향하여 예수님의 죽음 사건을 주님이 추궁하고 있는 겁니다. 인간세계에 희망 없어요. 갇혀있다니까. 인간세계는 삼천 년, 오천 년 관계없어요. 대통령 바뀌어도 관계없어요. 갇혀있는 거예요.
갇혀있음은 이중결론으로 해결 안 돼요. 그걸 계속 전하더란 말이죠. 사도 베드로, 사도 바울, 그리고 빌립 집사의 설교, 스데반 집사의 설교가 전부 다 이 내용입니다. 왜 이 내용이냐 하면, 성령이 옴으로써 하나님께서 새로운 마법을 걸어놨는데 마법 걸린 사도들은 똑같은 이야기를 해요.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했다. 인간 보고 어쩌란 게 아니라 이미 그렇게 되었다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기존에 아랫동네 사람들 반응을 보세요. 그것이 사도행전 4장 15절에,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그 다음에 중요하니까 칠판에 적어보겠어요.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라고 그 당시 사회지도자 층이 베드로, 요한, 야고보, 열두 사도들이 아직까지 있었어요. 50년 되면 열두 사도가 전 세계로 다 퍼져버립니다. 마가는 이집트로 가고 바돌로매는 이란으로 가고 마태는 이라크로 가고 요한은 터키로 가고 베드로는 로마로 가고 알패오의 야고보는 스페인으로 가고 또 하나의 야고보는 우크라이나 쪽으로 가고.
아직 그때는 아니고 지금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가 성령 받고 복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 반대 측에서 뭐라고 합니까?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 그러면 이 사람들이 따로 규정해야 됩니다. 이 사람들이 따로 있고, 그걸 이 사람들이라고 지칭하는 그룹(대다수죠)이 또 따로 있지요. 벌써 여기서 뭐가 갈라지느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세상을 세상안에서 내재적으로 두 파트로 구분하는 효과를 발휘한다는 것이 등장하는 겁니다.
죽어서 천당 가는 것이 아니고 살아있을 때 이 세상에 같은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두 파트로 나눠지게 하는 그러한 조치가 이미 사도행전에서 일어났어요. 그러면 사도 바울이 썼던 편지의 취지에 맞추어서 사도행전을 해석하려면 사도행전은 딱 하나만 이야기하면 돼요. 같은 사람인데 둘로 나눠지더라. 그것만 이야기하면 사도행전 끝나는 겁니다. 같이 음식 먹고, 같이 잠을 자고 같이 쇼핑하고 그냥 차이가 없는데 이상하게 둘로 나눠지더라. 저쪽에서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이 사람들, 이 사람들, 그 다음에 어떻게 할꼬? 다른 말로 하면, 감당할 수 있겠느냐? 감당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럼 저와 여러분은 뭐예요? 오늘날 2018년 한국에 사는 저와 여러분은 뭡니까? 대충 교회 다니고 천당 간다고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놓고 세상에 나가 좋다고 같이 어울리고 희희덕거리며 놀고. 우리가 보기에 주위에 안 믿는 사람이 우리를 바라보면서 사도행전 4장 16절에 나오는 이 같은 고백을 여러분들이 들어본 적이 있느냐 이 말입니다. 이걸 제가 묻는 겁니다. 몇몇 보이네요^^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 열 자잖아요. 세 자로 줄여봅시다. 미쳤냐. 이걸 약간 늘리면, 니가 미쳤구나. 사도 바울에게 네가 미쳤구나, 하는 것처럼. 그래, 그리스도의 사랑에 미쳤다고 하잖아요. 종교란 취미활동으로 대충 가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그건 인간들의 요령이에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요령은 주님 앞에 통하지 않습니다. 요령을 피워도 소용없어요.
그러면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드로와 이 사람들에 속하려면 어떻게 하느냐? 방법이 없다니까요. 가두리양식인데. 그냥 살면 돼요. 그냥 살다 어느 날 성령이 오게 되면 그 다음부터 나는 그들과 친하고 싶은데, 동창회비 다 냈어. 놀 것 다 놀아줬는데 이상하게 저쪽 사람들이 자꾸 미쳤다고 이야기해요. 왜? 다른 환경의 안목으로 자기들을 만나고 자기들은 바라본다는 것을 그쪽 사람들이 눈치 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게 바로 천사와 같이 있으면서 세상에 섞여있는 성도의 위상입니다.
베드로가 옥에 두 번 갇혔거든요. 두 번 다 천사가 풀어줬어요. 베드로를 가둬놓은 옥의 간수는 죽었게요, 살았게요? 죽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갇힌 빌립보의 간수는 죽었게요, 살았게요? 산 정도가 아니고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이런 혜택 받았어요. 사도행전 16장인데 버스정류장에 보면 그런 것 붙여있지 않던가요? 못 봤습니까? 정류장 가까운 큰 교회에서 붙여놨을 건데요. 사도행전 16장 31절.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그때 간수는 살았어요. 똑같은 간수인데 하나는 베드로 때문에 처형당했고 하나는 살았어요.
그런데 말은 똑바로 해야 돼요. 베드로 때문에 그 간수가 처형당한 게 아니고 천사 때문에 처형당한 거고. 천사 때문에 처형당한 것은 외재성 입장에서 이야기한 것이고, 베드로 때문에 처형당한 것은 바로 내재성으로 이야기한 거예요. 외재성이나 내재성이나 전부 다 하나님이 마법 걸어놓은 사람들이에요. 다른 사람들은 그 말을 못 알아들어요. 어쨌든 간에 베드로 때문에 그 사람은 처형당했어요. 그런데 정확히 말해서 베드로 때문에 처형당할 때 비로소 그 간수는, 내가 진즉에 죽어야 될 인간인 것을 하나님의 윗동네 입장에서 파악한 거예요. 처형당할 때 고마운 줄 알아라.
간수면 교도소직원 아닙니까. 교정직 9급 초봉 얼마입니까? 알 필욘 없지만 하여튼 삼백 받는다 하고 교도소 공무원으로서 살아갈 때 온 집이 그로 말미암아 살아있다고 여겼습니다. 누가 오기 전까지는. 천사가 와도 되지만 여기서는 베드로가 온 거죠. 베드로가 왔을 때 나는 월급 삼백만 받고 살고 있는 것이 아니고 죽어 있는 인간이 월급 삼백만 원 받았어요. 그리고 때가 되매 천사가 감옥을 흔들었고 졸지에 아무 잘못도 없이 죽었던 그 간수가 모르긴 몰라도 표창장 작년에 받았어요. 그리고 노모가 계신데 아주 효자입니다. 효자 되면 뭐하고 간수질 잘하면 뭐합니까? 가두리양식인데, 전부 다 죽은 자들인데.
사도행전 전체가 이 세상은 죽었다고 보는 단 하나의 사건이에요. 여러 가지 사건 아니에요. 단 하나의 사건이라면 왜 그리 사건들이 많으냐? 백 개 이상으로 사건이 많은데 그 사건은 어떤 사건이냐 하면, 사도행전 전체 1장부터 28장까지 평면으로 봅시다. 여기서 간혈천에 뜨거운 물방울 올라오듯이 하나의 사건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작은 일들이 일어나는데 이걸 사건이라 하지 않는 이유는 큰 사건의 일관된 취지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서 예를 들어서 사도행전 9장에서 다메섹에 가던 사람이 누굴 만나지요? 예수를 만날 때 사울은 장님이 되었지요. 사울이 장님으로 뭘 봤습니까? 빛을 봤지요. 그러면 사울은 빛의 세계, 윗동네에서 볼 때에 사울은 장님들만 모여 있는 세계 중의 일부였던 거예요. 눈이 어두운 거예요. 사도 바울이 장님이 되고 아나니아를 통해서 다시 눈을 뜬 것은 바로 구원이란 어두움에서 감겼던 눈이 빛에 의해서 눈이 번쩍 뜨는 거예요. 심 봉사도 그런 심 봉사가 없어요.
눈을 떴을 때 내가 기존에 악마가 만든 가두리양식장에 살고 있었고 선지자들이 위에서 봤다, 천상회의에 참석했다는 말이 비로소 머리가 들어오는 거예요. 그게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거예요. 선지자들이 천상회의에서 봤을 때 아래에서 보는 하늘나라와 위에서 내려다보는 하늘나라가 천지 차이구나. 지상에서 일어난 모든 이야기가 거짓 영들이 매개가 되어서 서로 거짓말을 주고받으면서 이 인간세계가 구성되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신약 때 성령 받은 사람은 구약 해석을 그런 관점에서 파악이 되는 겁니다. 굉장히 신기하지 않습니까.
그럴 때 예수님 만났을 때 다른 일행이 있었는데 우레 소리, 천둥소리 들었다 하고 사도 바울은 예수님과 대화가 되었지요. “주여 누구십니까?”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니라”라고 주고받았지요. 옆의 사람들은 천둥소리만 들었지 실내용이 뭔지 못 들었지요. 사도 바울과 예수님이 주고받은 대화가 뭐냐 하면, 사도 바울 식의 방언이 되는 겁니다. 나중에 받았지요. 오순절 지나고 받았지요. 오순절은 서기 30년이고 사도 바울이 받은 것은 32년이라고요. 하나님의 마법이에요. 다른 사람은 이걸 이해 못해요. 같이 갔던 일행들이 예수님이 하는 말을 못 알아들었다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주고받았는데. 같은 사람이 아니에요. 껍데기는 사람이에요. 그러나 그 안의 내용물이 달라요.
십자가 사건이라는 이 세상에서 죽었다가 부활했던 한 사건에서 유발한 파생 사건 중에 하나가 사울이란 사람이 예수님 만난 사건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무슨 이야기 들었어요? 여러분은 이야기도 안 듣고 지금 살고 있습니까? 사는 게 아니고 죽어있지만. 사도행전은 이런 책이에요. 천사 만나봤나? 천사가 수갑 풀어준 걸 너는 경험했나? 쉬는 시간에 그런 놀이해볼까요? 고무줄로 묶어놓고 천사가 와서 풀어주는지. 사도 바울이 들었던 이야기를 우리가 듣고 있습니까? 삼층천 올라간 경험을 했습니까?
삼층천은 사도 바울이 다소라는데 갔어요. 32년에 스데반 죽고 다메섹에 가던 사울이 예수님 만났습니다. 만나고 난 뒤에 다메섹에서 가까우니까 갔다가 혼났지요. 광주리 타고 도망쳤으니까. 유대인들이 가만두지 않으니까. 유대인들은 성경만 있으면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사도 바울은 성경이 있어서 예수 죽였다는 겁니다. 이 성경이 너희를 죽였다는 거예요. 차라리 무식한 게 낫지 유식한 것들이 메시아를 죽인 거예요. 몰라도 되는데 왜 아냐 이 말입니다.
그렇게 내빼서 아라비아로 도망갔잖아요. 3년 동안. 갔다가 잠시 다메섹에 왔다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갔지요. 3년 만에 와서 나는 옛날에 핍박했는데 이제 새사람 되었어요. 안 먹어줍니다. 거기에 바나바란 사람이 사울을 두둔해줍니다. 이 사람 괜찮은 사람이라고 보호해줘요. 예수님 만난 사람이라고 보호해주면서 14일 만에 베드로 만나고 그 당시에 유력한 지도자들을 만나요. 이 지도자들이 문제가 있어요. 곧 이야기하겠습니다만.
만나고 난 뒤에 고향인 다소로 8년 동안 보냈습니다. 다소에 있으면서 사도 바울이 삼층천에 올라갔어요. 고린도후서에 보면 14년 전이라 했으니까 계산해보면 다소에 있을 때에요. 다소에 있다가 바나바가 다시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성경에는 내려간다고 돼있는데 사실은 지도상 안디옥은 예루살렘 위에 있거든요. 안디옥이 두 군데에요. 터키에 안디옥이 있고 수리아(시리아)에 안디옥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향 다소에 8년 간 있었고요.
바나바가 안디옥이란 곳으로 데려와요. 데려와서 1년간 같이 있는데 아가보란 선지자가 예루살렘에서 올라와요. 아가보란 사람은 이야기할 때마다 상당히 불길해요. 아가보란 사람이 나중에 사도 바울이 46년에서 56년까지 선교를 마치고 올라왔을 때 이 사람이 제일 먼저 나와서 당신, 체포 돼서 죽는다고 예언한 사람이거든요. 예루살렘에 가뭄이 들었다는 겁니다. 이게 돈 달라는 말입니다. 헌금해주지요. 이 말은 뭐냐? 헌금해주면 너희들 이방인 교회를 우리와 같은 교회라고 인정해줄게. 이렇게 나온 겁니다.
사도 바울이 세 번 갔는데 첫 번째는 터키고, 두 번째는 마케도니아 이 동네고, 세 번째는 같은 동네 한 번 더 도는데 세 번째 선교의 특징이 뭐냐? 헌금 수집입니다. 수금하러 갔어요. 왜 수금을 했는가? 예루살렘이 기근이 들었다하니까 도와줘야하지 않겠느냐하는 거죠. 돈 갖다 바치면 돈에 우리 정성이 있으니까 돈 보고 형님 교회를 이렇게 인정해주니까 같은 구원받은 백성이라고 인정해줄게, 라고 나옵니다.
그 형님 교회, 서기 60년부터 해서 완전히 작살났습니다. 유다전쟁 일어나고 70년에 티투스에 의해서 완전히 멸망됐어요. 마지막 멸망 격전지가, 성 있지요. 맛사다에서 완전히 몰살당합니다. 이럴 때 예루살렘 교인들 다 어디 갔느냐는 겁니다. 그들의 요단 강 저쪽으로 다 피신했습니다. 그럴 때 기존에 유대인들이, “배신자여, 조국을 버린 자여.”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시기는 사도 바울의 편지가 다 써지지 않은 시기에요. 편지가 통용되지 않는 시대에서 여전히 자기가 속해 있는 지역과 땅에 희망과 기대를 갖고 있던 그 시대상을 두고서 거기서 교회라는 것을 가시적으로 만들려고 했던 시대에요. 이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어떻게 문제가 되는지는 10분 쉬고 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