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자유하는 여자(갈4;30-31) 180701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7. 4. 16:32
2018-07-01 12:36:17조회 : 528         
   자유하는 여자 180701 이름 : 이근호 (IP:119.18.83.168)   

자유하는 여자(갈라디아서 4:30-31)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N1CM-8R-bFQ, Hit:35

 이근호 18-07-01 13:29 
자유하는 여자

2018년 7월 1일                       본문 말씀: 갈라디아서 4:30-31

(4: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4: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분리’라는 것은 ‘같이 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겁니다. 같은 인간들끼리지만 갈 길이 다르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각자 동일한 부모에서 태어났습니다. 모든 인간들은 다들 육체의 부모들이 있다고 여깁니다. 육체가 아닌 부모는 없다고 믿습니다. 이게 일반적인 상식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런 상식에 새로운 의미를 붓습니다. 인간들을 둘로 나누겠다는 겁니다. ‘육체로 난 자녀’를 한 부류로 하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반대말은 무엇이 될까요? 귀신? 유령? 아닙니다. ‘성령으로 따라 난 자녀’가 맞은편에 따로 분류됩니다. 이렇게 사도가 분류하면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따질 겁니다.

‘성령으로 따라 난 자’는 육체가 없는가? 그들도 육체를 갖고 있지 않는가? 어째서 그들은 ‘육체로 따라 난 자’로 속하지 않는가? 라고 의아해 할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을 ‘육체’로 표현으로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초래하게 하신 주도권이 육체 내부에서는 찾거나 밝혀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육체’ 그 자체를 위해서 육체로 태어나지 않는 자가 따로 있다는 겁니다. 비록 육체로 오셨지만 육체를 옹호하거나 살려내기가 아닌 다른 취지가 안고 사람이 되신 분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으로 따라난 자’입니다. 즉 인간의 보편적 존재 양식인 ‘육체’에 대해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실 쪽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이는 곧 육체 스스로가 자신을 손봐서 괜찮은 존재가 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갈라디아서 4:23에 나와 있습니다.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즉 ‘육체’에서 나오는 모든 것은 ‘약속’에 포함될 수 없는 내용들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약속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겁니까? 약속은 철저하게 육체의 뜻을 배제합니다. 우리 인간의 의견을 묻지를 않습니다. 예레미야 1:5에 보면,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라고 되어 있습니다.

창세 전에 이미 하나님의 약속의 내용은 확립되어 있습니다. 그 취지가 생명나무와 선악과 나무를 통해서 나타난 바 있습니다. 생명나무는 따먹되, 선악과 나무 과실은 먹어서는 아니된다는 겁니다. 먹는 날에 ‘죽음’이 온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죽음’이라는 약속 내용에 필수 내용으로 가담되어야 함을 말하는 겁니다.

이 ‘정녕 죽으리라’를 위하여, 곧 ‘진정한 죽음’을 성립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사람이 되셨습니다. 인간에게 있어 진정한 ‘죽음’은 없습니다. 단지 삶의 연장일 뿐입니다. 인간 세계의 죽음이란 ‘살다가 그만 살게 된 것’을 뜻합니다. ‘죄로 대한 심판으로서의 죽음’이라는 약속의 내용에 대해서 인간은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창세기 3장 이후, 범죄한 인간은 뭐든지 자기 중심으로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나는 구원받아야겠다”고 하지만 왜 내가 구원되어야 하는 그 정당한 근거는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자유’란 인간은 이런 모든 바람에서 벗어난 상태를 두고 말합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성경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끄집어냅니다. 즉 “자유란, 죄로부터의 자유와 사단으로부터 자유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다”라고 말입니다. 문제는 내가 왜 이런 사실을 두고 기대하는 이유가 뭔지가 명확하지 않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왜 나는 구원이 되어야 마땅하다고 여기는가?”입니다. 그럴 만한 근거가 있는 겁니까?

없습니다. 지옥에 피어놓은 지옥불은 나를 위하여 피워놓은 저주의 불입니다. 따라서 그 불집혀 놓은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마땅히 지옥에 가야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위신이 사는 겁니다. 다시금 말씀 드립니다만, 이미 인간은 범죄한 자라서, 약속의 내용이 아닌 내용으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약속이란, 철저히 인간들은 배제된 채 오직 예수님과 아버지만이 의논해서 확립한 내용입니다. 인간들은 이 약속에 위배한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따라서 인간에게서 내놓은 그 무엇도 약속에 끼어들지 말아야 할 내용들입니다. 하나님의 인간 처벌은 당연하고 마땅합니다. 약속도 모르는 자가 약속을 넘본다는 것 자체가 처벌감입니다.

약속을 제대로 알고 약속대로 움직이시는 분은 성령받은 예수님 뿐입니다. 애초부터 왕자만이 왕자로 등장할 뿐입니다. 거지가 왕자되는 것이 아닙니다. 출신 자체로 인하여 성도는 포지션이 결정된 것입니다. 그 어떤 인간적인 요구사항이나 의견들이 반영되지 않는 세계가 곧 천국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변호사이지만 우리가 의뢰하신 변호사는 아닙니다. 예수님은 오로지 아버지 뜻만을 실행에 옮기시는 변호사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 예수님을 고용했다면 예수님과 우리 사이는 수시로 의견 조율이 있게 됩니다. 마치 고객이 원하는 대로  변호사가 움직이어야 하는 것과 같이 이치가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내놓은 그 어떤 의견도 창세 전에 결정된 그 약속의 내용에 들어있지 않는 것이라고 철저하게 뭉개버립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가 진정한 죽음이기에 그 죽음을 부활의 생명으로 아버지께서 건져내시기 되면 모든 시간들은 ‘약속 성취’라는 차원에 따라 그 중심점으로 끌어당겨져야 합니다.

즉 성도의 미래는 예수님에게 과거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성도의 과거는 예수님의 현재가 되는 겁니다. 마치 움직일 줄 모르는 아이에게 엄마 쪽으로 오라고 해도 소용없을 때, 엄마는 아이가 깔고 있는 양탄자 채로 엄마 쪽으로 끌어당기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도의 시간이란 예수님의 현재쪽으로 매일같이 끌어당기게 됩니다.

계속 살면 살수록 ‘이런 것까지 죄였어?’라고 하게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갈수록 십자가에서 뿌려지는 약속의 기준에 가깝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앞으로 어떻게 살까요? ‘법 따라 구원을 시도하는 자들이 계집종의 자녀'들을 바라보면서 차이남을 느끼면서 사시면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사도의 추가되는 인생 의미들에 반항하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8-07-02 16:56 
295강-갈 4장 30-31절(자유하는 여자)18070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4장 30절-31절입니다. 신약성경 307페이지입니다.

갈라디아서 4:30-31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 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 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고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라면 우리의 부모가 두 종류가 되어야 됩니다. 태어난 대로 한 부모에서 한 자식이 나온다는 것은 상식인데 사도는 인간들이 보통 세상에서 통하는 상식에다가 자꾸 가중치를 집어넣어요. 의미를 자꾸 집어넣습니다. 의미를 집어넣으면 기존에 알고 있던 상식에서 나 자신을 바라봤던 것이 수정이 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우리는 기존에 하던 대로 잘 살아왔어요. 갈라디아서 4장을 보기 전까지는 아무 문제없이 살아왔습니다. 정상인이에요. 갈라디아서 4장을 펼치니까 문제가 된 거예요. 왜냐하면 사도바울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니까 여기서 우리가 빈 마음에서 그냥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 아니고 기존에 우리 것이 있거든요.

우리는 이런 식으로 살아간다, 나는 이런 식으로 인생 살 거야, 라는 것이 이미 갖추어져 있는 입장에서 외부에서 사도바울이 새로운 것, “인생은 그게 아니야. 계집종의 자녀 아니면 약속의 자녀야.” 이렇게 생뚱맞은 이야기를 하니까 이 두 의견 사이에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어요. 밀어내는 겁니다. 저항이 유발되지요.

사도바울의 복음이라 하는 것은 우리를 설득시키는 것이 아니고 점잖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에 대해서는 반항하게 되어 있다는 원리를 계속 적용시키는 겁니다. 인품 좋고, 성격 좋고, 평생 남과 다툰 적도 없는 사람, 남 배려할 줄 알고, 그냥 천심, 하늘의 마음으로 살아도 막상 복음 앞에서는 반발하게 되어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인생은 자기가 짊어질 자신이 짐이 된다는 것이 사도바울의 의견입니다. 오늘 아침에 누가 그런 상담을 했는데 산다는 것이 굉장히 힘들다는 거지요. 힘들다는 것은 자기의 무게가 그만큼 나간다는 뜻입니다. 물리학에 그런 것이 있어요. 특히 양자물리학에 그런 것이 있습니다.

모든 입자의 무게는 어디서 생기는가? 그것은 힘의 장, 힘이 필드에서 반항하니까, 저항하니까 그것이 질량이 된다는 거예요. 양자물리학에서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냥 주어진 힉스장, 이 힘의 세계에서 나름 어떻게 살아보겠다는 것, 내 것은 어떻게 챙겨보겠다는 것, 이것이 쌓이고 쌓여서 점점 무거운 쇳덩이 같은 우리 인생의 짐이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마태복음 11장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벗으라는 그 말이거든요. 반항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저항하지 말라는 이야기에요. 그 저항 없는 상태를 오늘 본문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자유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우리의 부모에서 내가 나왔다. 이것이 우리의 상식인데 29절에 보면,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사도가 사람을 두 종류로 일방적으로 나눕니다. 복음이라는 이름을 대면서 두 종류로 나눠요.

한쪽은 육체로 따라난 자가 있어요. 그래서 잠시 시험을 쳐보는 거예요. 육체로 따라 난 자가 있습니다, 라고 제가 이야기하고 “육체로 따라 난 사람의 반대말은?” 이렇게 주관식 문제를 내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들은 따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육체로 따라난 사람의 반대말? 육체로 태어나지 않은 사람. 육체로 태어나지 않았는데 육체를 갖고 있는 사람은 누가 있을까? 육체로 태어나지 않았는데 현재 육체를 갖고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분명히 육체를 가졌는데 육체로 태어나지 않은 사람, 그런 사람이 있을까를 찾아봐요.

정답을 댈 수가 없습니다. 정답은 그 뒤에 딱 가려져 있는데 사도바울이 정답을 공개합니다. 육체로 태어난 사람의 반대말은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반발하지요.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육체를 안 가졌느냐? 몸이 없느냐? 이렇게 따지게 되는 겁니다.

여기서 육체로 태어난 사람의 반대말이 귀신이다, 좀비다, 이것이 아니고 ‘성령을 따라 난 사람’이라고 언급을 한 것은 성령을 따라 나더라도 육체를 가질 수는 있는데 그 육체는 성령을 따라 났다는 그 취지에 어떤 방해요소로도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사도는 염두에 두는 겁니다. 누구냐 하면 예수님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 마리아에서 육체로 태어났지만 요단강에서 성령을 받았거든요. 예수님만이 육체와 성령이 같이 있었던 분입니다. 이 분을 모델로 삼는 거예요. 어떤 모델로 삼느냐 하면, 이분은, 예수님은 육체와 성령이 함께 있는데 예수님이 이 땅에 그렇게 등장한 그 원래의 취지를 따라가 보면 거기에 약속이 있었다는 겁니다.

약속이라는 것은 인간을 배제하고 난 뒤에, 인간의 뜻을 배제하고 난 뒤에 약속이에요. 약속은 아버지와 아들만의 창세전에 맺은 약속을 따라서 예수님이 오셨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이렇게 정리해야 돼요. 예수님은 내 대신 돌아가셨다. 아닙니다.

내 대신 돌아가신 것이 아니에요.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변호사를 구할 때 변호사는 의뢰인을 위해서 변호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변호사가 활동할 때 누구와 수시로 연락을 취해야 되느냐? 자기에게 사건을 맡긴 의뢰인과 수시로 통해야 됩니다.

이렇게 하면 재판 승리 합니다, 이러면 당신이 원하는 대로 됩니다, 라고 수시로 연락을 취해야 되는데 주님은 우리를 대신했다 해놓고는 우리한테 연락을 안취해요. 우리의 어려운 점과 우리의 난처한 점과 우리의 불가능한 점, 우리 필요에 의해서 예수님을 변호사로 우리가 의뢰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 구원받고 싶은데 너무 육체로 태어나서 구원이 안 되니까 괜찮은 변호사 하나 써가지고 나를 천국에 올려 보낼 수 없을까? 옳지 예수님이 있구나. 예수님에게 부탁해야겠다.’ 이런 식으로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시작이 육체로 태어났기 때문에 약속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약속과 육체를 사도바울은 대척관계로 보고 있다는 말이지요. 이 말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 안에는 우리의 소원이 하나도 포함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새벽제단에서 기도하는 내용들을 보세요. 그것은 약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는 거예요.

열심히 중보기도하면서 아무리 하나님 앞에 도와달라고 해봤자 그것은 어디까지나 육체에서 나온 거예요. 그 육체는 어떤 육체냐 하면, 약속에서 떨어져 있는 육체에요. 약속에서 분리된 육체라는 말이지요.

오늘 본문에 자유가 나오는데 자유에 대해서 참 할 말이 많아요. 왜냐하면 기존에 자유라는 것이 전부 다 오해에서 나왔고 교만에서 나온 겁니다. 흔히 교회에서 이야기하기를, 자유라 하는 것은 뭐냐고 할 때 네 가지를 이야기해요. 죄로부터의 자유, 사탄으로부터의 자유,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죽음으로부터의 자유, 이 네 가지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너무 빨리 지나가서 다시 이야기해볼까요? 죄로부터의 자유,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죽음으로부터의 자유, 사탄에서의 자유, 이 네 가지의 자유를 주님이 우리에게 주셨다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시작이 잘못되었어요. 어떤 점에서 시작이 잘못되었느냐 하면 제일 중요한 점을 빠트린 겁니다. 왜 당신은 신자 되려고 합니까? 그 점을 본인이 본인한테 물어보지를 않았어요. 어떤 사람이, 당신은 이단이라고 한다면 거기서 화낼 이유가 없어요. 왜냐하면 거기서 이단이라고 했을 때 내가 왜 이단이냐고 화를 낸다는 것은 내 안에 뭐가 있느냐?

나는 이단 아니어야 마땅한 존재라는 것이 먼저 깔려 있거든요. 내가 이단 아니어야 할 근거를 제시해보세요. 그럴 근거가 있습니까? 근거가 없어요. 이단이라 하면, 잘 봤네, 이러면 끝나는 문제에요. “사람 볼 줄 아네. 그래 나 이단이야.” 그러면 끝나는 문제에요.

“너 지옥 간다.” “그래 잘 봤네 사람. 나 지옥 가.” 이러면 아무 문제없는 거예요. 들은풍월이 있거든요. 죄로부터의 자유, 악마로부터의 자유,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죽음으로부터의 자유. 자기보기에 네 가지 다 괜찮아 보인다는 말이지요.

괜찮아 보이니까 이걸 얻고자 하는 거예요. 이걸 어디 가서 얻는가? 교회가면 얻는다는 거예요. 성경보고, 복음 보고, 말씀 알면 이걸 얻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걸 얻어야 될 당신의 당당한 근거가 무엇입니까, 라고 물어봅시다. 이유 있습니까? 내가 구원받을, 천당 갈 어떤 정당성이 나에게 있습니까?

사도는 없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럴 권한이 우리한테 없는 거예요. 지옥 가는 것이 주의 뜻이라면 우리는 그 운명을 받아들여야지요. 왜 발악합니까? 왜 발악하느냐 하면, 제가 아까 이야기했어요. 그게 내가 갖고 있던 무게감, 저항이거든요.

하나님이 정하신 운명을 내가 발악하고 반발하고 저항할 때마다 내 삶은 점점 더 무거워지는 겁니다. 이래서 천당 가겠나, 이래서 지옥가면 안되는데, 이렇게 죽어서 지옥 간다면, 지옥불은 무섭다는데……. 지옥은 불붙여 놓은 거예요. 지옥에는 불이 있잖아요. 그 불은 누굴 위한 불이냐 하면 육체를 위한 불이에요.

바로 나를 위해 붙여놓은 불이라는 말이지요. 반갑다 친구야, 할 문제에요. 지옥이 반가워야 돼요. 사는 꼬라지는 지옥으로 살면서 가기는 천국 간다? 무슨 횡포가 이런 횡포가 다 있습니까? 앞뒤 안 맞는 논리거든요. 자기주제가 뭔지를 몰라요.

진짜 신학박사들에게 묻고 싶은 거예요. 당신은 왜 신자 되려고 합니까? 당신이 신학을 공부했다니 물어봅니다. 신학에, 성경에, 나만은 지옥 안가야 해, 라는 어떤 근거라도 있으면 제시해보라는 말이지요. 그게 어디에도 없습니다. 왜? 육체로 태어났기 때문에, 아담이 자손이기 때문에 구원해 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근거는 없어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제키고 아버지의 뜻을 대신하는 겁니다. 두 분만의 이야기에요. 우리는 빠져있는 겁니다. 우리와 관계없는 것, 우리가 그 자리에 없는 것, 텅 빈 상태, 그것을 자유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자유인 거예요.

내가 의견을 제시 안 해도 되는 새로운 공간, 내가 이 땅에서 어떤 행동을 하고, 개차반 같은 행동을 하고, 어떤 짓을 해도 상관없는 그런 공간, 영역, 그게 자유입니다. 서양 동화에 이런 것이 있어요. 왕자가 잠시 거지가 되었다가 다시 왕자로 복귀하는 동화가 있을 거예요.

사도바울이 말하는 성령을 따라 난 사람은 뭐냐? 거지로 있다가 왕자가 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에요. 거지 되었다가 왕자가 되면 그 사람은 횡재한 겁니다.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처음부터 왕자였었는데 세상에 왔더니 안 먹어주는 거예요. 무시하는 거예요.

그런데 왕자에게 묻는 먼지를 털어내니까 처음부터 왕자였으니까 나중에도 왕자가 되는 거예요. 성도라 하는 것은 애초부터 왕자였어요. 거지 된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견을 참조 안했기 때문에 생긴 천만다행이지요.

그래서 저항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예레미야 1장 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창세전이지요.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했어요.

이걸 예레미야가 천상회의에 참석하고서 확인해요. 아, 내 호적이 동사무소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늘나라에 있는 거예요. 예수님과 함께 했던 열 두 제자가 마귀가 물러가고 권세가 나타나니까 신바람이 난 겁니다. 그걸 자랑질 하니까 예수님 하신 말씀이 “마귀가 물러가는 것을 가지고 그렇게 기살 것 아니다. 그걸 좋아할 것이 아니라 네 이름이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 마지막에 보면 생명책에 기록된 대로만 확인절차에 들어가요. 성도는 심판이 없기 때문에. 그동안 사람들이 자유에 대해서 어떤 개념을 갖고 있었느냐 하면, 속박이라는 개념에서부터 출발을 하고 있었던 것이 문제가 되는 겁니다. 거지되었다가 왕자가 되었으니 감사하다는 거예요.

거지 되었다가 왕자가 되게 되면 왕자노릇을 계속 안하게 되면 도로 거지가 될 확률이 높아져요. 가능성이 굉장히 세집니다. 이게 포지션, 신분자체가 거지이기 때문에 왕자가 된다는 것은 횡재한 것이지만 그 횡재가 계속 될 수 있는 횡재인지를 자기가 확인하려 드니까 이게 얼마나 사는 게 힘듭니까? 신앙생활 하기가 참 힘들어요.

맨 날 돌아서면 ‘내가 거지인가 왕자인가? 천당 가 지옥 가?’ 매날 그거 해야 되니까. 자유라는 말이 영어에 두 가지가 있는데 ‘release’라는 것이 있어요. 풀려나왔다는 개념의 release가 있는 반면에 freedom, 아까 제가 이야기한 빈 공간처럼 어떤 저항도 없는, 어떤 방해요소도 없는 상태를 말하지요.

그러면 freedom은 하나의 결과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release는 하나의 과정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은 결과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너는 어떻게 해도 천국백성이야. 너는 자유인이야.”라는 결과, 주님께서 그렇게 간주하시고 일을 해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올 때 잘 하면 구원해줄게, 가 아니고 네가 있는 포지션, 네 위치 따라서 걸 맞는 조치를 주님께서 해주시는 거예요. 거지를 왕자 만드는 노력을 하는 것이 아니고 왕자를 왕자답게 대우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육체를 지녔기 때문에, 성령이 오기 전의 그 죄를 지녔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은 약속에 포함되지 않는 내용들이 나와 있어요. 약속에 포함되지 않는 내용들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내가 신이 되는 거지요.

약속에 포함되지 않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창세기 2장과 3장의 내용을 보면 알아요.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이것은 약속에 해당되거든요. 죄짓기 전이기 때문에. 선악에 대해서 네가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그 말이라는 말이지요.

선악에 대해서 네가 잘했나 못했나, 신경 쓰지 말라. 그것은 약속에 해당되는 것이고 그 다음에 창세기 3장에서 우리의 삶은 뭐냐 하면, ‘나쁜 짓 하면 벌 받는대. 착해야 구원받고 천당 가고 착해야 복 받는대. 착하면 어딜 가나 다 복을 받게 되어 있어. 업보니까.’ 이게 불교식 아닙니까?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데 조심조심하는 것, 그게 바로 업보에요. 그게 바로 비약속이에요. 약속이 안 된 것이고. 그러니까 주님께서 보면 왕자가 왕자답지를 않은 거예요. 선악에 대해서 따질 필요가 없는데. 신경 뚝! 신경 쓸 필요가 없거든요.

“밥 먹을 때 엄마가 밥 흘리지 말라고 했어요. 그런데 오늘 밥 한 알 흘렸어요. 나 엄마 자식 아니지?” 이렇게 울고 있을 때 “그래, 넌 내 자식이 아니다. 내 쫒는다.” 이러면 엄마 아니지요. “얘야! 밥 흘리는 것 신경 쓰지 말라고 했잖아. 너는 영원한 내 자식이야.” 엄마와 자식 사이의 포지션문제에요, 포지션 문제.

하나님은 예수님과 의논할 때 성령의 자녀만 천국 갈 것이라고 이미 창세전에 언약이, 약조가 되어 있었어요. 그 약조에 따라, 그 약속대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만드시고 자기 백성을 건지는 작업을 하는 거예요. 그래놓고 네가 한 것이 아니고 내가 너 대신 했다는 겁니다.

결과를 가지고 성령께서 우리에게 통보해 주신 거예요. 성령 받을 때 자녀된 것이 아닙니다. 성령 받으니까 비로소 우리는 되어진 사태가 확연하게 다 드러나는 거예요. 사람들이 오해하고 곡해하고 오류를 갖고 있는 것이 뭐냐 하면, 인간은 태어나서 죄를 짓고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서 인간이 죄 지은 것이 너무 가슴 아파서 그 중에서 몇 명 건져서 천국 데려간다고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그렇게 되어버리면 처음부터 하나님이 실수하신 것이 돼요.

인간이 죄 지은 것도 처음부터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로서 포함이 되려면 우리가 죄지은 것이 안타까워서 예수님을 보낸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이 예수님을 위해서 피조물로서의 본연의 기능과 역할을 했다는 쪽으로 연결지어줘야 되는 겁니다. 이런 안목이 있어줘야 돼요.

선악과와 생명나무 이야기를 다시 해드리겠습니다. 선악과가 훼손되었을 때에 생명나무를 보호하기 위해서 인간이 생명나무근처에서 추방되었다는 사실을 꼭 항상 생각해야 돼요. 하나님의 관심은 생명이 주가 되지 인간이 주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지금 엉뚱한 소리 하는 것이 아니에요.

창세기 3장을 그대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생명나무와 인간가운데 생명나무가 더 중요해요. 왜냐하면 생명나무가 바로 자유이기 때문에 그래요. 자유라 하는 것은 어떤 것도 개입될 수 없는 공간이라 했지요. 인간이든 악마든 어떤 피조물도 개입되지 않는 그 하나님만의 원래 공간, 원래상태, 그게 바로 자유상태입니다.

그 자유를 지켜내기 위해서 인간을 제거했어요. 그런데 그 자유라는 것이 예수님의 생명으로서 다시 인간 죄 속에 들어오신 것은 선악과의 취지가 포함된 생명나무로 완성하기 위해서는 이 땅, 죽음이 없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죽음의 세계를 일부러 만들어내십니다.

이 땅에는 죽음이라는 것이 없어요. 인간에게 죽음이라는 것은 살았던 자가 죽기 때문에 죽음이라 하는 것은 사는 사람들이 바라보는, 내가 숨이 끊어진 그 상태를 죽음으로 봐요. 그러니까 사는 것과 죽음이 연장되어 있어요. 살았던 사람이 죽었다는 겁니다.

백날 죽어도 이 땅에 살았던 사람이 죽은 거예요. 그것은 죽음이 아니에요. 죽음이라는 것은,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할 때의 그 죽음이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의 차원에서 선악과 내용을 포함해서, 선악과에 잠겨있는 내용인 그 ‘죽으리라’를 직접 몸으로 실습을 할 때 그 죽음만이 죽음이에요.

선악과와 생명나무 모든 피조물도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그 본래의 의미가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죽음이 없는 세계에 진짜 죽음을 보여줘요. 아버지한테 저주받는 겁니다. 진짜 죽음을 보여주시고 죽음의 세계를 다시 되살려버려요. 부활이 되어버려요.

이것이 예수님 본인의 능력이 아니고 성령이 임해서 그렇거든요. 그러면 성령의 능력이 임한 그 예수님께서 우리 성도에게 찾아와 버리면 성도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일상 속에 초월의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겁니다. 일상속의 초월의 모습을.

저는 초월의 거품이라고 표현하고 싶은데요. 일상을 똑같이 살아요. 밥 먹고 사는데 부글부글 거품이 일어나요. 초월의 거품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 초월의 거품을 분석해 보면 거기에 성령이 계속 관여하고 있어요.

성령이 관여하는 이유는 모든 피조물은 피조물 자체로서의 의미가 없어요. 의미가 없기 때문에 피조물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어디로 가야 되느냐 하면, 성령이 일하는 그 분, 영생이죠, 그분에게로 모든 것이 소급되어야 된다는 말이지요.

모르면 모르는 대로 그냥 진도 나갑니다. 소급되어야 돼요. 소급되려면 우리의 시간이라는 것, 우리의 미래가 주님의 과거가 되어야 돼요. 우리의 과거는 주님의 현재가 되어야 되고요. 일종의 시간의 통조림. 시간이 응축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주님께서 어떤 과거를 이미 예상했는가를 성령이 매일같이 관여해서 그것을 체험하게 하는 겁니다. ‘아, 이것 때문에 돌아가셨구나. 이것 때문에 주께서 죽으셨구나. 아, 이걸 가지고 죄라고 하는구나.’

소급한다는 말은, 어떤 애를 양탄자에 놓고 애보고 오라고 하니 안와요. 그러면 엄마가 어떻게 하느냐 하면, 그 애 밑에 깔려있는 양탄자를 좍 자기 쪽으로 잡아당기면 애는 저절로 자기에게 오잖아요. 모든 피조물은 예수님 앞에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

주님께서 시간에 실려 있는 인간을, 시간자체를 잡아당겨버려요. 잡아당기게 되면 예수님 자신의 죽음이 이 세상에 온전한 죽음이고 그 죽음에서 부활한 그것이 예수님의 온전한 영생의 나라, 부활의 나라, 천국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부활의 나라 천국이 되는 겁니다.

그걸 알려면 예수님의 부활의 나라와 예수님의 죽음의 나라와의 접점의 순간까지 성령께서 전부 다 소환하는 거예요. 잡아당기는 겁니다. “이 바보야, 네 일이 아니야.” “제가 며칠 전에 부도났습니다.” “부도난 그것이 너의 일이 아니라니까.” 환원하고 회수하기 위한 일이에요. 주님의 일이라니까요 그게.

어떤 아내가 죽고 난 뒤에 남편이 막 말리는 거예요. 화장하지 말라고. 왜냐하면 아내 입 속에 금니가 여섯 개 박혀 있는데 그걸 빼달라는 거예요. 그러고 난 뒤에 화장하라는 겁니다. 그러면 남편이 아내 시신에 있는 금니 여섯 개 빼서 자기 이빨에 해 넣었다 하자. 해봤자 늙어 죽으면 화장할 때 그 금니 다른 사람이 가져갈 거예요. 요새 금니 한 대에 얼마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실제로 있었던 일이에요.

인간은 금니를 실어 나르는 수레 같은 존재. 불신자든 신자든 간에 초월을 실어 나르는 하나의 수레에 불과한 거예요. 우리가 좋든 싫든 간에 이 시간은 우리를 후패시킵니다. 제가 지난번에 이야기했잖아요. 인간은 쇠퇴의 아이콘이라고요.

우리가 점점 소멸해가는 이유가 소멸해가면 갈수록 내 양탄자가 주님 발 앞에까지 가까이 왔다는 것으로 보고 오히려 감사해야 돼요. ‘다 됐네, 이제.’ 이렇게 감사해야 됩니다. 이게 피조물이 해야 될 기능이에요. 책무고 역할입니다.

육체로 따라 난 인간들은 창세기 3장 이후기 때문에 자기가 신인 줄 알고 있어요. 자기가 절대자기 때문에 어떤 경우라도 자기를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는 겁니다. 예수를 믿든 하나님을 믿든 자기를 위해서 믿어요. 그런데 이 육체로 태어난 인간들이 모르는 것은 뭐냐 하면, 상대적이라는 것을 몰라서 그래요.

여러분들이 여름에 앉아 있으면 모기가 왱, 하고 오지요. 그러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모기가 날아온다.’고 해요. 그런데 모기입장에서 생각해 보세요. 사람이 자기에게 가까이 오는 거예요. 모기가 가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가까이 오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기입장에서 생각하지 않고 ‘웬 모기가 이렇게 달려들지?’ 모기는 ‘인간들이 왜 자꾸 나 있는 곳에 달려들지?’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못하는 겁니다. 세례요한이 말하기를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했거든요. 사람들은 자기가 구원되는 줄로 알고 있어요.

자기가 구원되는 것으로 안다는 자체가 뭐냐? 창세기 3장 이후에 모든 것이 자기가 신이 되어야 화가 풀리니까, 욕망이 만족되니까 내가 구원되는 것은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당신이 왜 구원되어야 되는지의 근거가 없다고요.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데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하니까 되게 좋아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했을 때에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아군, 자기와 같은 편인 줄로 알고 있어요.

그런데 결과는 십자가였습니다. 아군이 아니었고 적군이었어요. 하나님은 적군에서 나오는 어떤 이야기도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포함된 내용이 아닙니다. 육체에서 나온 내용이에요. 오늘 설교 어려운 것이 아니에요. 약속에는 내 뜻이 포함되지 않았다. 그 한 가지만 알면 돼요.

나를 제켜놓고 일방적으로 창세전에 이미 확정되었다. 이 한 가지만 아시면 된다니까요. 인간들은 자기위주로 항상 자기는 구원받아야 된다고 우기기 때문에, 자기가 신이기 때문에 자기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자꾸 세상이 움직인다고 생각해요. 모기가 나에게 날아온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세상이 자꾸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내가 하루하루 뭔가 끌려간다는 생각을 못하고 있는 거예요. 중심은 내가 아니고 다른데 중심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지금 사도바울은 그 중심을 제시하는 거예요.

사람들은 자기가 신이기 때문에, 육체로 태어난 사람은 자기가 신이기 때문에 내가 하는 것은 옳다는 것을 근거로 모든 일을 시작해요. 내가 하는 일은 옳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하는 것은 옳다는 말과 같은 말이 뭐냐? 나에게는 오류가 있고, 나에게도 한계가 있고, 내가 모르는 것이 있다, 라는 생각은 옳다는 겁니다.

내가 하는 것은 옳다. ‘그것은 너무 심했지. 인간이 뭐 몇 년이나 산다고. 내가 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 많아.’라는 생각은 옳다고 여기는 겁니다. 둘 다 똑같은 이야기에요. 그러면 이 둘을 벗어나는 방법은 뭐냐? 나는 옳다. 나는 옳지 않다. 둘 다 같다. 이게 불교에서 하는 이야기인데요.

인간은 어떻게 살아도 마찬가지라고 하는데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옳다, 아니다, 그걸 내 쪽에서 측정하는 그 자체가 처음부터 죄였다는 겁니다. 인간이 죄를 지은 것이 아니에요. 주께서 죄를 짓게 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 안에 편입되어 있는 겁니다.

인간은 죄인이어야 해요. 왜? 약속이 그러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문제가 별로 어려운 것이 없어요.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죄를 지었기 때문에 내가 죄인인 것을 알기 때문에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는 그것도 죄에요. 이 죄는 주님이 처리한다고 생각하는 그것도 죄가 되는 겁니다.

주님 하는 일에 내 의견을 개진하지 마세요. 우리는 결과물이니까. 결과물인데 자꾸 결과물을 가지고 내 쪽에서 자꾸 원인을 제공하려고 합니다. 결과 보고 좋은 결과라면 내가 얻겠다는 이것은 누가 못해요. 문제는 그것은 같은 아군일 경우에나 성립되지 적군일 경우에는 오해가 되는 거예요.

주님의 아군은 하나님 아버지밖에 없어요. 우리는 적군이에요. 적군이 아무리 예수님 편든다고 예수님이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냥 사시는 대로 사시면 돼요. 감사하면서. 자유라 하는 것은 빈공간이라니까요. 내가 어떤 몸짓을 해도 그 공간은 변하지 않아요. 그게 자유입니다. 제가 차를 타고 검단동 네거리를 지나다 보니까 타이어점이 있는데 거기 붙은 광고가 오늘 설교와 관련이 있었어요. 육체적인 자녀가 하는 광고를 봤습니다.

그 광고내용이 뭐냐? 태극기를 떡 붙여놓고,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질 좋은 타이어를 항상 고객에게 최선을 다해서 서비스하며 충성하기를 맹세합니다.” 그리고 그 밑에 “좋은 타이어를 싸게 팔라는 어머니의 유언을 따르겠습니다.” 이렇게 해놓고 그 다음에 “장사는 이윤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것이다.”

상당히 복음적이에요. 검단동 사거리에 있습니다. 확인해 보세요. 성의가 대단하지요. 만약 이 사람이 교회 나온다면 이렇게 성의 있게 하나님 섬길 거예요. 이게 손님을 위하는 것이 아닙니다. 손님을 위하는 것을 우회해서, 예수님을 위하는 것을 우회해서, 하나님 영광만을 위한다는 것을 우회해서 결국 누구의 가치냐, 나의 가치를 못 버리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다음 질문이 뭐냐 하면, 네가 뭔데 네 가치를 네가 지켜야 될 이유가 뭐냐, 그 근거를 제시해보라고 하면? 이왕 태어났는데 어떻게, 그런 식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 인간은 결국 자기를 못 버리는 거예요. 버릴 수가 없어요.

돌부처처럼 꿈적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꿈적거리지도 않는 인간을 시간가지고 잡아당기는 거지요. 양탄자 잡아당기는 겁니다. 당기면서 우리는 갈수록 십자가에서 나오는 십자가의 저주를 가면 갈수록 많이 맞아야 돼요. 다시 말해서 고생스럽게 산다는 뜻이 아니고 내가 이것까지도 죄라는 사실을 십자가에서 쏴대는 그 저주를 많이 온 몸에 받아야 돼요.

‘아, 이것까지도 죄구나. 효도하는 것도 죄구나.’ 그러면 효도하지 말까요? 효도하지 말까요, 그것도 죄에요. 갈수록 많이 맞아봐야 돼요. 조 현우라는 사람이 대구 축구팀의 골키퍼인데 세계적인 골키퍼가 된 이유는 딱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대구 팀이 꼴찌에요. 상대방이 공이 얼마나 날라 오는지 몰라요. 꼴찌 팀이 골키퍼를 하니까 수비수 있으나마나 온 몸으로 다 받아내야 돼요. 많이, 죄라는 것을 많이 받아봐야 돼요. 그래야 훌륭한 골키퍼가 되는 겁니다.

마가복음 9장 9절, 성경에서 아주 난해한 구절이 나옵니다.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계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이 대목이 변화산 이야기거든요.

제자들(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이 함께 있는 것을 변화산에서 목격하고 난 뒤에 예수님이 그들에게 당부하기를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 예수님이 경계하기를(당부하기를)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이르지 말라 하는 이유가 뭐냐 하는 겁니다.

본 것을 광고하면 많은 사람이 예수 믿을 텐데 입 다물고 네가 본 것을 이야기하지 말라는 거예요. 왜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느냐 하면, 엘리야하고 모세하고 8백년의 시간간격을 뛰어넘어서 함께 있었던 거예요.

어떤 시간이든 양탄자 잡아당기면 성도의 모든 과거는 현재가 되어버립니다.
예수님 안에서 현재가 되어버려요. 현재가 될 때, 그것이 초월이거든요,
일상가운데 초월이 부풀어 오르려면 주께서 고난 받고 성령이 우리에게 임해야 돼요.


임하게 되면 우리는 일상 속에서 부글부글 초월이 막 올라와요.
냄비에 물 끓이면 냄비뚜껑이 들썩들썩 하는 것처럼 성도와 성도 아닌 사람의 차이점은 뭐냐?
성도 아닌 사람은 뭘 해도 자기밖에 생각 안하는데 성도는 생각하지 못할 예상 밖의 생각들이 자꾸 떠올라요.


약속된 것이 떠올라요. 일상은 우리가 육체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삽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사는 그 위에 우리가 예상 못할 약속의 내용이 덮쳐버리면
이게 냄비뚜껑 들썩거리듯이 자꾸 들썩거리는 거예요.


어떻게 들썩거리는가 하면, 이번 것은 내가 착하게 해서 주어진 것이 아닌데,
아무것도 착한 것이 없는데 왜 이렇게 일이 풀려요.
어떤 경우에는, 내가 별로 나쁜 짓 한 것도 없는데 왜 일이 꼬입니까?
그러니까 선악의 내용은 그게 약속에 포함되면 안 되는 내용인데 우리가 갖고 있잖아요.


성령이 와서 우리가 선악으로 살고 행복하게 사는 그 모든 자유를
우리에게서 제거해버리는 일을 성령이 하셔요.
자유를 없애버리는 일을 성령이 하시는 거예요.
그 자유는 우리를 위한 자유기 때문에
이것은 이미 합격통지서와 관련 없고 합격되려고 애를 쓰는 자유거든요.


구원되려고 애를 쓰는 자유는 성령께서 다 막아버립니다.
“그런 쓸데없는 짓 하지 말아라. 이번에 헌금 왜 했니? 헌금하면 좀 복이라도 받을까 싶어서?”
헌금 해놓고 욕 얻어먹게 만들어버려요.
이미 결과가, 나와 의논 없이 변호사가 다 처리해놓은 상황이기 때문에,
그게 약속이기 때문에 약속에 내 행함이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말로만 율법에서의 자유가 아니에요.
우리는 율법에서의 자유는 될 수가 없어요.
하지만 성령께서는 율법과 무관한 인생을 살도록 조치를 해주시는 겁니다.
이게 뭐냐? 우리의 모든 자유를 박탈하는 거예요.
인간의 모든 자유라 하는 것은 나의 결정과 선택에 가치를 두는 것이 인간의 자유거든요.
내가 이렇게 하게 되면 이런 결과가 나올 것이다. 그것을 아예 제거시켜 버려요.


그냥 성령의 양탄자에 끌려가는데 돌부처마냥 가만있는 것이 아니고 쫙쫙 끌려가거든요.
어디로? 주님 십자가 쪽으로 간다고요.
십자가에서 들을 수 있는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다 이루었다. 다 이루었다,
그 뒤에 뭔가 문장을 추가한다면 쓸데없는 걱정하지 마라,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라.


너를 위해서 천국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너는 생각하기를,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 죽어서 좋은 나라 가기위해서
움츠리면서 살고, 조바심 내면서 살고, 조바심내면서 살고, 걱정 근심을 사서 하는데
그것은 주님이 이미 이룬 것에 대한, 절대적인 나만을 위한 어떤 저항, 반발, 반항입니다.


그것은 나의 질량이 돼요. 나의 삶의 무거운 무게가 되는 겁니다.
끝으로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아무것도 안하면 되겠네,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요.
여기서 출생지가 따로 있고 우리의 어머니가 따로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마세요.


엄마가 “너는 밥 흘려도 내 자식이다.” 이렇게 하니까 자식이 하는 말이 “그러면 엄마! 나는 아무것도 안하면 되겠네.”라고 할 때 그 자식은 지금 엄마가 베푸는 은혜와 사랑을 전혀 감을 못 잡고 있는 거예요. 나의 나 된 것은 나다. 아닙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입니다.

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의 참여하게 된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해야 되고 그 참여하는 방법은, 주께서 우리가 죄를 짓게 하셔서 그 죄를 어딘가 해결했던 그 지점으로 날마다 만나게 하는, 죄를 짓고 해결점과 만나게 하는, 그 지점과 마주치게 하는 그 방식으로 주께서는 우리를 복음의 수단으로, 증거물로 사용하시는 겁니다.

너는 죄인이지만 십자가의 피가 그 죄를 사해줬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매일같이 확인시켜 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죄가 뭐냐 하면, 선악적인 사고방식으로,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지킨다는 그 사고방식이 바로 네가 어쩔 수 없었던, 헤어날 수 없는 죄였다는 것을 늘 마주치게 하는 거예요.

오늘 본문의 마지막 대목을 보면서 마치겠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마지막에 “그런즉 형제들이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목사님, 우리가 자유한지 아닌지를 어떻게 압니까? 계집종의 자녀가 누군지를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율법에 속한, 율법 따라 바르게 살려고 하는, 그래서 좋은 결과를 자기 쪽으로 모집하려는 계집종의 자녀들에게 우리가 둘러싸여 있습니다. 지옥 갈 사람들에게 싸여 있습니다. 주여, 우리도 그랬던 사람들이었고 그렇게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오셔서 자유인이라는 사실, 자유가 나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셨사오니 이제는 솥뚜껑처럼 일상 에서 초월을 날마다 드러내면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