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잉태(갈4;27-29) 1806224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7. 4. 12:06
2018-06-24 12:43:07조회 : 512         
   잉태 180624이름 : 이근호 (IP:119.18.83.168)   

잉태(갈라디아서 4:27-29)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4Wikfz-kjBs, Hit:45
 이근호18-06-24 13:31 
잉태 

2018년 6월 24일                      본문 말씀: 갈라디아서 4:27-29 

(4:27)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4: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4: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사람의 시작은 출산부터입니다. 그때부터 ‘없음’에서 벗어나 ‘있음’으로 나아갑니다. 그런데 이 인간들은 자기와 같이 ‘출산으로부터 시작된 자’들과 관계맺게 됩니다. 그들로부터 배우고 그들에게 자신이 가진 삶의 지혜를 가르치려고 합니다. 이로는 사람들에게 있어 ‘현실’이란 '있는 것들의 총합‘이 됩니다. 

즉 ‘없는 것’은 현실 속에 들어올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일반적인 삶이란 사람을 상대하는 세월입니다. 하지만 사도는 다릅니다. 사도는 사람을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위하여 산다고 합니다. 복음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추상적 이념 같은 것입니다. 

일반인들은, ‘할 수 있는 것들’로 시작해서 ‘될 수 있는 것’을 얻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사도는, ‘불가능한 것’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던지고 있습니다. 즉 ‘할 수 없는 것’, 혹은 ‘이 세상에 안 보이는 것’을 위하여만 본인이 살아 있어야 할 이유라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사도와 일반인들 사이에 공통점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도가 보이에 ‘복음’이란 바로 이런 환경에서만 출현한다는 겁니다. 즉 ‘불가능한 복음’은 ‘가능성으로 시작하는’ 그 인간들 행함의 배경으로 해서만 나타난 겁니다. 이것은 ‘짝’입니다. 사도는 본인 스스로 ‘짝이 되는 기능’에 말려들어가 있는 식으로 복음과 연관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 짝이 오늘 본문에서는 ‘육체로 난 자’와 ‘성령으로 난 자’의 짝입니다. 즉 ‘태어났기는 났지만 육체로 태어나지 않는 자’가 있다는 겁니다. 일반적으로 모든 인간은 ‘육체에서 육체로 ’ 태어납니다. 부모가 자식을 낳게 되면 부모의 품고 있는 속성이 자식에게 그대로 전수됩니다. 

그런데 만약에 부모가 품고 있는 성질이 하나님과 끊어진 있는 상태이라면 그 후손들은 어떤 생을 살게 됩니까? 단순히 허무한 인생 정도가 아닙니다. 성령으로 태어난 자를 핍박하는 방식으로 산다는 것이 사도가 전하는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 있어 인간이란 2차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우선입니다. 이를 위해 피조물인 인간이 만들어졌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인간과 더불어 있었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입니다. 영원한 것, 즉 생명나무가 품고 있는 의미를 알게 하기 위해 ‘짝’이 되는 선악를 알게 하는 나무가 있어야 했습니다. 

즉 어쨌든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하나의 ‘구조’를 이룹니다. 마치 밀가루와 물과 팥앙꼬가 준비되어 있는 것은 붕어빵틀을 통해서 붕어빵을 구워내기 위함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설계하신 구조를 통해서 영광받으시는 겁니다. 이 구조의 등장은 그 안에서 ‘구원이 이미 마감된 채’ 실려 있습니다. 

구조 자체가 ‘구원’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이 구원구조에서 인간은 배격됩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이미 악마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육체가 육체를 통해서 생산되도록 허락하시는 이유는, ‘짝을 통한 구조 완성’의 취지 때문입니다. 즉 ‘육체에 의해서 핍박받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되어야 합니다. 

그 예가 바로 처녀가 임신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육체의 세계에서 통용되는 원칙에 의해서 처녀는 임신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 ‘못함’과 짝을 이루면서 ‘하늘의 징조’는 구체화됩니다. 

그러나 육체에서 끝까지 고집합니다. ‘처녀는 임신하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처녀의 몸을 통해서 사람이 되셨기에 모든 인간들을 가짜 인간으로 몰아세울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짝’이 되는 관계입니다. 인간의 ‘폐기의 아이콘’입니다. ‘쇠퇴의 이미지’입니다. 그것은 반복적으로 그러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생은 이런 폐기와 쇠퇴의 존재와 짝을 이루는 구조를 통해서 밝혀집니다. 인간들이 반복적으로 같은 성질을 보이는 이유는, 인간은 아무리 해도 인간에게서 새로운 가치가 나오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육체는 구조와 상관없이 ‘따로 노는 면’을 보입니다. 

인간의 육체로는 인간의 일, 즉 구원을 달성할 수 없습니다. 단지 모든 일이 마감되고 난 뒤에 어설프게 흉내낼 뿐입니다. 마치 저녁에 동네에서 연예인들 불러 한 바탕 쇼를 벌리고 난 뒤, 공연단을 떠나고 난 그 빈 무대에 동네 꼬마들이 올라가서 조금 전에 있었던 공연을 흉내 내면서 제멋대로 노는 것과 같습니다. 

신체에서 허리뼈가 협착되면 신경이 눌려서, 그 사람이 무슨 행동을 해도 아픈 것처럼, 인간의 행함에 있어 특별하게 덜 죄고 더 죄가 되는 게 없습니다. 그것은 죄만 나오는 식으로 하나님의 구조에 가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인간의 가능성을 비켜서 진행됩니다. 이사야 9장에서, 처녀를 몸을 통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아기’로서 출산됩니다. 

그렇게 되면 기존의 인간들은 이 육체를 핍박하게 됩니다. 왜 핍박할 수밖에 없느냐 하면 ‘처녀’를 통해 아기를 낳게 되면 기존의 정상적인 부모로 통해서 난 육체가 온전치 못한, 문제성 있는 육체로 낙인 찍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출산을 부정하는 것이 자기네들의 육체를 긍정하는 방식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기존의 ‘육체에 속한 여자’로부터 스스로 태어나시므로서 그 ‘여자’를 기존의 ‘여자’를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조 완성을 위하여 오신 그 하나님(예수님)에 의해서 새로운 마련되는 ‘여자’가 됩니다. 즉 하나님은 스스로 ‘여자의 후손’이 되시고, 그것을 근거로 하여 자기를 출신시킨 새로운 ‘여인’을 만들어 내시는 겁니다. 

즉 아들이 여자를 규정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성도는 두 개의 주체를 부여받게 됩니다. 하나는 육체에 속하여 끊임없이 행함을 발생시키는 기능의 주체와 그리고 예수님에 의해서 이미 구원이 완료된 상태에서 ‘주님의 여자’로서 생겨난 주체가 그것입니다. 성령님은 행함을 지속적으로, 반복해서 제거하십니다. 그러면 남는 것은 믿음 뿐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된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의 가능성으로 자기를 낳고, 구원코자 하는 이 모든 시도가 악마에 낚여서 나온 시도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8-06-25 20:12 
294강-갈 4장 27-29절(잉태)18062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4장 27절-29절입니다. 신약성경 302페이지입니다. 

갈라디아서 4:27-29 

“기록된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사도가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때 눈에 보이는 것 안에서만 이야기를 하게 되면 우리가 그 말이 맞는지 안 맞는지 증명을 할 수가 있거든요. 사도가 이야기할 때 세상의 사람들이 찾아낼 수 있는 것, 그것을 가능성이라 하는데, 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재료를 삼아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이 주가 되어서 이야기를 할 때에, 지금 사도가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는 의도인지, 아니면 사람을 내치는 의도로 말씀을 하는지, 사도의 의도를 파악하기가 굉장히 난처합니다. 

대학 입시 치를 때 세 가지 중요한 과목이 있어요. 국영수. 국영수 위주로 공부하고 나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국영수 위주로 공부를 하는데 만약에 사도가 이야기하기를, 기술, 가정, 사람들이 잘 공부 안하는 것, 도덕, 그런 과목가지고 “너 점수 몇 점 맞았나?” 이렇게 되어버리면 인간이 주로 하는 것과 어긋나게 되기에, 저 사람은 도대체 우리가 살아가는 것과 다른 것을 내다보고 살아가는 것으로 구분이 되어버립니다. 

이야기할 때 처음부터 설득을 하는 것이 아니고 네가 놓여 있는 자리가 내가 있는 삶의 자리가 틀리다는 것부터 시작을 하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목회 하겠어요? 그래서 교회 하겠습니까? 틀리다는 것부터 시작하니까, 공통점을 찾아내야 되는데 공통점을 비켜가니까 너는 네 인생 살고 나는 내 인생 살자는 식이에요. 

사도가 그렇게 이야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에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원하고 있어요.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원하고 있다고요. 세상눈에 보이는 것이 뭐냐? 산이나 강도 있지만 움직이는 것은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누구와 상대하느냐 하면, 어린애서부터 어른 될 때까지 늘 사람하고 상대해요. 

외로울 때 전화하고, 배고플 때는 엄마 찾고, 사람들 속에서 득세하고 사람들 속에 파묻혀서 그들이 원하는 사람 되고자 애쓰면서 맞춰가려고 힘쓰는 그것을 가지고 사람들은 ‘세상 살기’ 또는 인생이라 이렇게 보는 거예요. 

그런데 사도는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는 것을 뻔히 알아요. 본인도 그렇게 살아왔고. 그런데 사도는 말하기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복음을 위해서 산다는 거예요. 복음을 위해서? 복음이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에요. 판다고 해서 돈되는 것도 아니거든요. 무엇을 위해서 산다는 것은 나는 거기에 목숨 걸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보이지도 않는 것에 목숨을 걸어요? 그거 인생 잘못 산거 아니에요? 뭔가 실수하고 있는 게 아닙니까, 사도가 지금? 도박이라는 것도 뭔가 예상되는 것이 있을 때 도박을 거는 거예요. 사람들이 헌금할 때 회수할 가능성보고 헌금하는 겁니다. 회수할 가능성도 없는데 헌금하는 것은 돈 내다 버리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돈 놓고 돈 먹기잖아요. 인생 평소에 살아왔던 그 습관이라는 것은 평소에 행태로, 행동으로 그대로 나오게 되어 있어요. 사도가 복음을 위해서 산다고 천명하고 나서면서 오늘 본문을 이야기했다 이 말이지요. 이 본문은 무슨 이야기냐 하면, 나처럼 복음에 목숨 거는 사람은 나와, 그런 뜻이에요. 

나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세상눈에 띄지 않는 것에 목숨 거는 사람은 내 말이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보이는 것과 대조적으로 그 맞은편에 보이지 않는 것을 두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둘 사이에 차등을 두겠다는 겁니다. 보이는 것들은 세상 인간과 인간들의 “으샤, 으샤!” 하면서 살아가는 그 문명, 국가, 사회, 가정, 전부 다, 사람과 사람들의 집합체 아닙니까? 

그것이 너희는 전부라고 알고 있는데 그것은 오늘 본문에 “육체를 따라 난 자들”이라는 말이지요. 육체라 하는 것은 눈에 보이거든요. 그러면 육체가 육체 된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출산에 있다는 겁니다. 애를 낳은 것이 있기에 눈에 보이는 것이 있고 어른이 되어서 이렇게 돌아다니고 있지 않느냐, 하는 겁니다. 

출산 자체부터 문제를 삼겠다는 겁니다. 사람이 사람을 출산했다. 그러니까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거예요. 육체가 아기 낳는 자고 그래서 낳아진 자도 육체가 된다는 겁니다. 육체가 육체를 낳고 사람이 사람을 낳는다. 그러니까 그것은 너희들이 망해도 싸다는 겁니다. 

그 말은 뭐냐? 너희들이 만들었던 그 육체, 자식, 그 자식을 잘 지켜보라는 거예요. 잘 지켜보게 되면 그것은 쇠퇴해요. 인간은 멈추지 않고 결국 허물어지고 있다는 말이지요. 인간은 쇠퇴의 아이콘입니다. 쇠퇴의 이미지입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인간은 왜 쇠퇴하는가? 다른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쪽을 치워버리는 양식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자식을 낳게 허락했다는 겁니다. 

폐기되는 과정을 통해서 영원함이 노출되는 방식을 사용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디서부터 문제를 삼아야 되느냐? 인간의 출산부터 문제 삼아야 되는데 출산하게 되면 그 쇠퇴해야 될 속성이 그대로 전이되지요. 이전됩니다. 전수되는 겁니다. 부모의 쇠퇴의 본성이 자식까지 이전되고 이어지고. 

그 노선의 시작과 끝을 너희는 아느냐, 라고 묻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의 입장에서는 이미 태어난 것을 어떻게 해요? 이미 태어났으니까 태어났을 때의 그 속성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밖에 없어요. 그것 외에는, 태어날 때 성질을 전개하는 그 외는 다른 사는 수는 없어요. 그게 전부에요. 

태어난 성질 그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자기의 원천, 기원, 뿌리를 전혀 모르는 채로 그냥 서로 견주면서, 서로 흉내 내고 모방하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그중에 하나의 예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기 위해서 십자가 지고 힘들게 골고다 언덕길을 올라가고 있으니까 그걸 본 예루살렘 아주머니들이 예수님이 불쌍하다고 우는 거예요. 

동정이지요. ‘좀 더 사셔도 되는 분인데 일찍 돌아가게 돼서 참 안됐다. 저게 실패가 아니고 뭐냐?’ 그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나는 아직은 죽지는 않았으니 아직 살만하고 여유 있다는 뜻이거든요. 예수님보고 불쌍하다고 울 때 그 우는 기준, 불쌍하다는 기준이 나름대로 있어요. 인간에게는 다 자기 기준이 있거든요. 

예수님이 휙 돌아보면서 하시는 말씀이 “지금 너희가 나를 보고 울고 있느냐?” 네가 그럴 처지냐 이 말이지요. 나를 위해서 울지 말고 너를 위해서 울어라, 그 말입니다. 네 주제파악도 못하고, 네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도 모르고 누가 누구를 동정하고 있어요. 

그 아주머니들이 분명히 이 땅에서 출생한 것일 거예요. 인간들은 있음과 없음을 출산을 통해서 기준점을 정합니다. 일단 없는데 아기 낳았으니 있다고 보는 거예요. 그러나 사도바울이 예수님의 계시를 통해서, 성령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은 뭐냐? 출산 이전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겁니다. 인간의 출산 이전에 다른 원리가 따로 있었다는 겁니다. 

그 원리가 뭐냐? 에덴동산의 생명나무와 선악과입니다. 생명나무와 선악과가 있는데 생명나무는 이름 그대로 생명이에요. 그런데 선악과는 죽음의 나무가 아니고 그냥 선악을 아는 나무에요. 그러면 선악을 아는 나무가 언제 죽음을 발췌, 발산해내느냐 하면, 그것을 인간이 따먹게 되면 인간은 죽음의 아이콘으로 새롭게 등장하는 겁니다. 

선악과가 있는데 선악과나무 자체는 죽음이 내재되어 있어요. 죽음을 품고 있는데 그걸 수류탄 핀을 뽑듯이 뽑아버리면 선악과 안에 담겨있는 그 내용물이 인간에게 덮치면서 그것이 죽음으로 나타나는 식으로 주님은 언급을 했어요. 

그러니까 인간의 역할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게 오늘 설교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인데, 인간의 역할이라 하는 것은 생명나무를 생명나무답게 선악과를 선악과답게 확인하는 입장에 있어요. 그게 피조물역할인데, 인간보다 선악과와 생명나무가 우선된다는 그 말입니다. 

그리고 선악과보다 더 우선되는 것이 뭐냐 하면, 생명나무에요. 선악과 따먹고 나면 생명나무는 못 따먹도록 보호를 하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을 내칠 정도로 지키고 싶은 것이 있어요. 그게 사도바울에게는 복음인데요. 복음 때문에 인간이 있어요. 이것을 사도바울이 아니까 사도바울은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죽음이라는 것도 하나의 기능이라는 거예요. 죽음이 끝장나는 것이 아니고, 죽었다고 울 필요도 없고, 죽음은 하나의 거쳐야 될 필연적인 과정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죽음을 경유함으로 말미암아 생명이 생명답게 튀어나온다면 하나님의 피조물 만든 본래의 취지가 확연하게 드러나니까요. 

살기 위해서 이거 달라 저거 달라 하지 마세요. 마태복음 6장에서 기도할 때 이방인들이 구하는 기도, 이것 주세요, 저것 주세요, 이것 필요합니다, 저것 필요합니다, 주님께서는 네가 자꾸 뭐가 필요하다고 하는데 네가 너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입장에서는 그런 이야기를, 그런 기도를 함부로 하지 말라는 이야기지요. 

피조물이 지켜야 될 것은 우리 목숨이 아닙니다. 그게 뭐냐? 바로 구조라는 겁니다. 밀가루와 앙꼬와 물을 어떤 상인이 들고 있을 때 그 장사꾼에게 손님이 원하는 것은 밀가루반죽하고 물과 팥 앙꼬를 원하는 것이 아니에요. 붕어빵을 원하거든요. 

그러면 물과 팥 앙꼬와 밀가루라는 이 재료를 어디에 찍어야 되느냐 하면, 그 구조에 찍어야 돼요. 붕어빵을 찍어내는 그 구조가 중요한 거예요. 밀가루를 들이마시려고 돈 내는 것이 아니잖아요. 붕어빵을 찍어내려고 하는 거예요. 

그 이야기가 창세기 22장 7절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모리아산으로 데리고 가라고 했을 때 가는 도중에 이삭이 뭐라고 했느냐? 7절에 보면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라고 한 거예요. 

지금 어린 이삭이 묻는 것은 뭐냐?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서 뭘 해줄 것인가를 생각한 거예요. 구조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라면 마땅히 나를 생각할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통해서 어떤 구조 속에 집어넣습니다.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습니까?” “네가 죽어야 돼 네가. 네가 죽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애초에 생각했던 그 구조가, 태초에 생각했던 그 구조가 나타나지를 않”아요. 나 위주가 아닙니다. 구조위주입니다. 그 구조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삭을 잡게 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사람 잡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람 잡는 하나님이에요. 죽이시는 하나님이에요. 네가 죽어야 내 일이 된다는 겁니다. 너를 부인하고 죽어야 이 하나님이 하나님답게 산다는 거예요. 그런데 안 죽고 버티고 있으니 안 되는 거지요. 그래서 구원이라는 말이 구조문제에요. 구원은 시작과 동시에 끝나버렸어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옛날 초등학교에서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연예인들 불러놓고 마을 잔치를 벌인다고요. 국회의원 나온 사람들이 그것도 밤중에 학교에 연예인들 불러놓고 그렇게 해요. 가설무대 설치하고 밴드 부르고 가수가 나와서 노래하면 마을 사람들 다 춤추고 논다 이 말이지요. 

이제 공연이 다 끝났어요. 사람들 다 가고 무대 조명도 다 꺼졌습니다. 그 때부터 방금까지 동네 어른들이 놀던 그 무대에 누가 올라가느냐? 동네 애들이 다 올라가요. 그리고 방금까지 했던 공연을 흉내 내면서 까불고들 있어요. 

이게 오늘날 교회구원입니다. 그런데 구원은 이미 끝났어요. 구원은 끝났는데, 구원 될 사람, 안 될 사람 다 마감되었는데, 합격자발표 다 끝났는데 뒤늦게 구원을 시도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교회 나오면 구원받는다고. 

쓸데없는 짓을, 씰데 없는 짓을 하고 있어요. 그 점에 대해 잘 이야기한 유명한 시가 있어요. 제가 ‘시’라고 하면 여러분은 뻔히 알거예요. ‘아, 또 유행가 가사구나.’ 이렇게 생각할 거예요. 비 내리는 궂은 날에 그야말로 옛날 식 다방에서 도라지 위스키 한잔 하면서 색소폰 소리를 들어보라 하지요. 

거기서 뭐라고 나오느냐 하면, 실없는 농담을 날린다는 거예요. 실없는 농담이라는 것은 더 이상 사랑할 수 있는 사이는 끝났다는 겁니다. 사랑 없는 사이에서는 농담만 오고갈 뿐 진담은 오고갈 리가 없습니다. 촌스럽게 립스틱 짙게 바른 그 마담하고 사랑할 이유가 없어요. 농담이나 그저 주고받는 사이에 불과한 겁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농담밖에 할 것이 없어요. 성경말씀 가지고. 사도바울은 지금 농담하고 있는 거예요. 구원되지도 않는 인간에게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는 식이라니까요. “사도님, 왜 그렇게 화가 나 있습니까?” 네가 육체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래요. 

육체로 태어난 인간들은 구조 중심이 아니고 나 중심이거든요. 마귀를 닮아서 자기중심입니다. 자기중심이 되는 것을 가지고 ‘즉자존재’라 해요. 즉자존재라는 것은 돌멩이처럼 어떤 대상이 없고 존재 그 자체로 존재의 완결됨을 즉자존재라 해요. 그 반대말이 뭐냐면 ‘대자존재’라 해요. 

대자존재라 하는 것은 서로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자기실존을 구성하는 것을 대자존재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헤어진 사람이 있는데 꼭 그날만 되면 헤어진 사람이 생각이 나요. 비가 주르륵 온다든지. ‘벌써 나는 잊었어. 나는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아. 나는 오직 천국, 복음을 향하여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사는 거야.’ 

백날 아는 이론 다 동원시켜봤자 막상 눈에 딱 들어오게 되면 반복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인간에게 반복현상이 일어났다는 말은, 인간은 세월이 지나도 절대로 새로운 것이 나올 것이 없다는 겁니다. 새롭게 될 위인은 없다는 거지요. 새사람 안 된다는 겁니다. 죽음이 너무 강렬하기 때문에 죽음을 이기고 새사람이 등장할 수가 없어요. 

반복이라는 것은 그 반복을 유발하는 요인이 나, 즉자존재에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상대로 인하여 구조적으로 말려드는 거예요. 밀가루를 반죽해서 붕어빵을 굽기 위해서 틀에 부었는데 붕어빵이 나온다는 사실을 모를 경우에는 그 밀가루 반죽은 조금 지나면 자기 등짝이 뜨거워요. 물론 주인이 알아서 반대쪽으로 뒤집어줍니다. 

등짝이 뜨겁다가 배가 뜨겁다가 나중에 튀어나와요. 주인은 계속 그것만 반복하고 있는 거예요. 인생은 뭐냐? 반복입니다. 재방송에 또 재방송을 해요. 저는 그것을 스티커 인생이라 하는데 스티커는 붙여놓으면 떨어지고 붙여놓으면 또 떨어져요. 

이 세상에는 주님이 하시고자 하는 뜻이 있는데 인간은 이 세상을 자기 뜻대로 사는 것인 줄 알고 자기위주로 해요. 집을 짓고, 토지를 새로 구입하고, 자식을 위해서 뭘 어떻게 해도, 세상에서 이만하면 즐겁고, 이만하면 행복하다고 붙여보지만 다 떨어진다고요. 

남들 시집가니까 나도 시집 가보고, 남들 애 낳으니 나도 애 낳아봤는데 이게 스티커에요. 잠시 좋았다가 다 떨어져요. 이게 붙어 있는 매개체가 없어요. 풀 발라봐야 얼마 안가 떨어집니다. 남편한테 좀 문제가 있어서 아내가 화를 내니까 남편이 아내 달랜다고 기념으로 반지 사주면서 때웁니다. 아내는 그 때 날 사랑하는 구나, 반짝이는 반지보고 좋아하지만 며칠 안가서 맨 같은 짓을 한다니까요. 

믿을 것을 믿어야지요. 인간자체가, 인생자체가 뭔가 반만 알고 살아가요. 그 반을 모르고 있어요. 남아있는 그 반을 사도는 지금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짝을 이루어서 대비를 해주는 겁니다. 생명나무에 담긴 하나님의 뜻은, 선악과라는 짝이 되는 나무가 없이는 그 생명나무의 취지는 절대로 나타나지를 않는다는 것이 사도바울의 뜻입니다. 

그러면 이 하나님의 취지가 일관되게 양보 없이 필연적이 되려면 여기서 출산이 이루어져야 되는데 출산이 되면 구체화되거든요. 여기서 어려운 말을 하겠습니다. 뭐가 어려우냐 하면, 하나님의 이 세상의 일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인간이 먼저 일을 저질러놓고, 그 인간의 일을 모방하면서 그게 아니라는 식으로 뒤늦게 투입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에요. 

인간이 죄지었고, 썩어질 육신의 몸을 제공하는 것을 허용해놓고, 그 다음에 하나님은 육신의 모양을 사용하신다는 겁니다. 인간은 일을 저질러놓고, 퍼질러놓고, 그 일속에 주님께서 ‘그게 아니야’ 하는 방식으로 들어오시는 거예요. 

그러한 방식이 이사야 7장 14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징조, 여기서 좀 난해합니다. 참아내야 돼요. 하나님의 징조가 결혼하지 않은 처녀다. 처녀 자체가 하나님의 징조냐? 실은 그게 징조거든요. 

인간을 폐기처분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징조입니다. 새로 나온 제 책의 제목이 <하늘의 징조>입니다. 오늘 누가 책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처녀가 징조인데 인간들, 내가 처녀로 있다, 혹은 내가 총각이다, 혹은 내가 결혼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도구에요. 

구조 속에 있으니까, 큰 구조 속에 전부 다 아우라처럼 다 거기에 박혀있는 거니까. 그런데 인간은 그것을 하늘의 징조로 볼 줄 아는 눈이 없어요. 누가 뭐 처녀 아닌 적 있었나, 누가 뭐 총각 아닌 적 있었나, 이렇게 나와요. 

그 처녀에 대해서 임신을 시켜버립니다. 임신을 시켜 버리면 그 때는 사람들이 ‘무슨 이런 일이 다 있어?’라고 나오겠지요. 처녀가 임신하는 것이 징조가 아니고 원래 처녀 자체가 임신하기 전에 이미 징조에요. 

그런데 그 징조가 임신을 하니까 사람들은 이것을 하늘의 징조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고, 물론 놀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것은 나중에 성령 받고 난 뒤의 일이고, 뭐로 보느냐 하면, 처녀는 잉태할 수 없음을 굳혀버려요. 왜냐하면 그래야 평소에 내가 나 위주로, 내가 아는 그 위주로 살아가는 것이 계속 증가되기에 그렇습니다. 

하늘에서 오는 질책을 자기는 안들은 것으로 쳐버려요. 왜냐하면 인간은 출산해서부터, 태어나서부터 뭐도 같이 가느냐 하면, 자신에 대한 평가서도 같이 동반해서 운행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행동해놓고 평가서보고, 행동해놓고 평가서보고. 이것을 가지고 ‘자기의’라고 하는 거예요. 

율법 지켜놓고 평가하고, 율법 지켜놓고 평가하고, 성경 읽어놓고 평가서보고, 성경 지켰다고 자부하면서 평가서 꺼내서 내가 얼마나 훌륭한가를 대조하면서 살아갑니다. 이런 식으로 어디에? 천국에 들어가겠다고요? 

그것은요, 무대공연 다 끝나고 난 뒤에 무대 위에서 자기 혼자 노는 겁니다. 여러분, 그 비슷한 이야기가 축구나 야구시합 끝나고 난 뒤에 운동장에 애들 우르르 몰려 들어와서 메시 흉내 내고 호날두 흉내 내면서 노는 것 있지요. 다 갔는데, 일 끝났는데. 육체를 가지고 구원의 흉내를 내는 겁니다. 나올 것이 뭐냐? 행함밖에 나올 것이 없어요, 행함. 

시켜만 주이소! 봉사하라면 봉사하고, 주일성수, 십일조, 성경공부, 하라는 대로 다 할 테니 시켜만 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뭐할 건데? 내가 나를 낳겠다는 겁니다. 육체가 육체를 낳겠다는 거예요. 더러운 것에서 더러운 것밖에 안 나오지요. 

그런데 그렇게 더러운 것도 어떤데 징조가 되느냐 하면, 그 더러운 것에 의해서 진짜 하늘에서 오신 진짜 사람이 핍박을 받을 때 그 핍박하는 자도 징조 안에 포함이 됩니다. 오늘 본문 다시 봅시다. 4장 28절에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사람들은 이 말을 이렇게 잘못 이해합니다. 육체로 따라 난 자가 육체로 따라 난 자를 내가 미워하고 핍박했다. 절에 가는 시어머니가 교회 가는 며느리 머리채를 쥐고 흔들면서, 네가 교회 가면 제사는 누가 모시느냐고 핍박을 할 때 이것은 육체를 따라 난 자가 교회 가는 육체를 따라 난 자를 핍박하는 것으로 그 시어머니는 생각하는 거예요. 

그리고 머리를 쥐어뜯기는 그 교회 나가는 새댁도 시어머니가 나를 핍박했다고 하면 안돼요. 시어머니가 성령을 핍박한 것으로 봐야 돼요. 만약에 시어머니가 나를 핍박한 것으로 되면 자기가 갑자기 천사가 되어버려요. 자기를 위해서 울게 돼요. 손 흥민 처럼. 

그거 왜 울어요? 우리가 자기를 위해서 울 권한도 없고 권리도 없습니다. 주님을 핍박해놓고 뭐 잘났다고 웁니까? 운다는 것은 자기한테 동정이 있다는 말이고 자기한테 동정이 있으니까 그 동정심으로 남에게 동정을 하는 거예요. 그것을 사람들은 이웃사랑이라 하는 겁니다. 이웃사랑 많이 하고 둘 다 지옥가세요. 

모든 행동은 행위를 하게 되면 대자존재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고 즉자존재로 되돌아오게 되어 있다니까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알게 되어 있어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신 이유가, 너는 어떻게 해도 전수받은 육체를 발휘할 뿐이지 이미 게임 끝났다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이 이미 구원은 끝났다는 겁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이미 끝나고 게임오버 했어요. 파장이에요, 파장. 

마태복음 1장 18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나심이라고 되어 있는데 마태복음 1장의 족보에 보면 모든 것이 났다고 되어 있지만 예수님은 그냥 스스로 나신 거예요.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되었거든요. 하나님이 새치기 한 거예요. 

하나님이 새치기해서 잉태되었을 때에 “그 남편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했다는 겁니다. 요셉의 태도가 왜 가만히 끊고자 하는 것을 나갔는가? 그게 인간의 육체로서 할 수 있는 전부에요. 의롭다 하는 것은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니에요. 나름 상식 있는, 교양 있는, 품격 있는 인간으로서 조용히 처리하고자 한 거예요. 

우리나라 같으면 데이트폭력이 일어났을 겁니다. 그러나 데이트폭력을 하지 않고 조용히 관계를 끊고자 하는 것이 육체로 할 수 있는 전부에요. 왜 당신이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느냐 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요셉을 불러놓고 “요셉아, 네가 왜 네 약혼자가 다른 남자하고 동침해서 임신했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으면 요셉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게 맞잖아요.” 그게 맞다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은 “너는 틀린 것을 가지고 맞다고 했으니 네 본성 자체가 틀려먹은 인간이고 가짜 인간”이라는 거예요. 

마리가 성령으로 임신을 해놓고 임신하기 전에는 자기를 인간으로 본 거예요. 임신하고 난 뒤에, 내가 인간이 될 수 없다, 나는 가짜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구원이라 하는 거예요. 구원이라 하는 것은 생명나무와 선악과의 짝이 계속 유지되는 것을 가지고 구원이라 하는 겁니다. 

그 선악과의 훼손의 자리에 마리아가 있고 훼손된 그 마리아를 생명나무의 취지를 위해서 거두어들이는 그 작업이 하나님의 마감된 구원의 작업이에요. 그래야 원래 있는 구조, 붕어틀이 유지가 되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육체로 태어나야 됩니다. 그리고 죽어야 돼요. 죽어야 됨을 알게 하신 것이 구원의 관계입니다. 

육체로 태어났다는 그 이유 때문에 죽어야 돼요. 이것을 내재성, 외재성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허리가 아프다 합시다. 허리가 아파서 앉아도 아프고, 운동해도 아프고, 밥을 먹어도 아프고, 뭘 해도 늘 아플 때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네가 밥 먹는 것이 죄이기에 허리가 아픈 것이 아니냐? 네가 의자에 앉아서 공부하는 것이 죄기에 허리가 아픈 것이 아니냐? 네가 운동하지 말아야 되는데 운동하는 것이 죄라서 허리가 아픈 것이 아니냐?’ 

사람들은 그것을 딱딱 끊어서 이야기를 해요. 허리의 뼈 때문에 신경이 눌려서 늘 아프다는 것은 눈에 안보이거든요. 안보이지만 바깥에 드러나는 현상은 뭐냐 하면, 뭘 해도 아픈 거예요. 뭘 해도 아픈데 그걸 안하면 안 아픈 것이 아니고 뭘 해도 아프다는 이것은, 외부적으로 네가 행동을 똑바로 안 해서 그렇다, 벌을 받아서 그렇다, 하나님을 안 섬겼으니 저주 받은 것이다, 이렇게 따지지 말고 그 내부적으로 돌아가게 되면 내부적인 한 가지 원인 때문에 다양성으로 파생된 모든 것이 전부 다 아픈 것으로 나타나잖아요. 

인간의 모든 행위가 다 죄가 되는 이유는 내부적으로 문제가 있어서 그런 거예요. 태어난 것 자체가 인간이 설명할 수 없는 이유 때문에 태어난 것 자체가 무조건 우리한테는 아파요. 사는 것 자체가 아파요. 그 아픔이 하루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팔십, 구십, 백세까지 죽을 때까지 반복이 된다니까요. 계속, 비올 때마다 반복되고. 

연금 처음 탈 때는 좋았는데 그 다음부터는 이상하게 커피 한 잔이라도 마시면 서글퍼지고. 월드컵 한다고 좋다고 했는데 끝나고 나면 뭐 다른 것 없나, 하면서 서글퍼지고. 모든 인생 사는 것이 전부 다 실없는 농담이나 주고받는 것, 사는 것 자체가 농담이에요. 나름 진지하려고 해봐야 며칠 가지도 않아요. 그저 짙은 색소폰소리나 들으면서. 

그래서 최백호가 부른 그 노래의 마지막 해답으로 내놓는 것은 뭐냐? 잃어버린 것을 위하여, 하잖아요. 뭔가 인간은 잃어버렸어요. 마귀 때문에 잃어버렸어요. 원래 것을 잃어버렸어요. 낭만을 잃어버린 것은 아닙니다. 뭔가 잃어버린 것이 있어요. 그걸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잃어버린 것 때문에 모든 것이 농담, 내가 폐기의 아이콘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쇠퇴하고 있습니다. 뭘 해도, 기도하고, 철야해도, 기도원 올라갈 때 다르고 내려갈 때 다르고 다 달라요. 그러면 이 점을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 방법은 이사야 9장 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하나님도 인간 뒤 따라서 출산해버렸어요. 그래서 인간은 두 종류가 되고 말았습니다. 인간으로 같이 출산했는데 하나는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고 다른 한쪽은 가짜 아들이고. 그리고 가짜 아들이 자기가 가짜인 것을 감추고 싶어서, 들통 내고 싶지 않고 싶어서 인간들이 생각하는 상식에 안 맞는 이야기를 했을 경우에는 본의 아니게 저쪽을 미워하고 질타하고 부정해버리는 속성을 발휘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의 여종 하갈과 동침해서 이스마엘을 낳았거든요. 낳고 난 뒤에 하갈이 본처노릇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나중에 이삭이 나오니까 열네 살 먹은 이스마엘이 막 태어난 이삭을, 아무것도 모르는 이삭을 희롱하고 있고 놀리고 있습니다. 

그 대목을 지금 사도바울이 거론하고 있는 거예요. 어딜 감히 출산할 수 있는 인간이 출산 할 수 없는 인간을 건드리느냐, 라고 지금 공격하고 있는 거예요. 육체가 있어야 임신이 된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생각이고 하나님은 약속이 출산할 수 있다고 본 겁니다. 

인간은 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될 수 있는 것으로 전환시켜요. 내가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가지고 희망을 품고 어떤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될 수 있는 것으로 연결시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이미 되어버렸다고 나옵니다. 구원이 된 거예요. 

구원이 된 입장에서는 우리는 즉자존재가 되면 안 되고 대자존재가 되어야 돼요. “나로 하여금 내가 하는 모든 것을 부정해버리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사울에 다메섹에서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려고 했을 때 주가 나타났습니다. 사울이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물으니까 주님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했어요. 

그냥 예수가 아니고 앞에 핍박이라는 말을 붙여줘야 돼요. 핍박이라는 말을 붙여줘야 우리는 예수님의 짝이 되는 겁니다. 생명나무에 선악과라는 짝으로 구조 속에, 붕어빵을 굽는 그 틀에 구조적으로 하나의 요소로서 배치가 되는 거예요. 장착이 된다니까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되느냐? 허무해야 돼요. 마땅히 허무해야 돼요. 허무하지만 이미 정답을 알고 허무하기 때문에 우리는 신나게 농담같이 인생을 살아야 될 것만 남아 있습니다. 놀기 삼아 사는 거예요. 돈 떨어지면 죽으면 되니까. 

돈 떨어지는 것도 그렇게 심각한 문제가 아니에요. 비트코인 하다가 사기당하면 죽으면 되니까. 경찰서에 고소하지 마세요. 주님의 뜻입니다. 원래 네 것이라는 것은 없다는 거예요. 여기서 출산이라는 말을 거론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대표자를 세웁니다. 

아담과 뱀의 만남에서 뱀이 승리했어요. 따먹으라 했을 때 따먹었으니까 뱀이 승리했어요. 인간의 대표는 악마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인간의 대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없다면 뱀을 상대하는 대표자가 등장해야 돼요. 하나님이 출산함으로서 비로소 새롭게 발생되는 여자, 많이 어렵지요. 

이사야 9장에 보면,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라고 되어 있지요. 그리고 이사야 7장 14절에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 그것과 같은 이야기에요. 크리스마스 때 여러분이 많이 들었잖아요. 하나님이 직접 인간 몸을 통해서 태어난다면 기존의 여자가 아기를, 예수님을 임신한 것이 아니에요. 

왜 그런가 하면, 그 여자는 어느 범위에 포함된 여자냐 하면, 기존의 육체에 포함된 여자가 되어버려요. 흔히 아는 남자, 여자의 그 범위의 여자가 되기 때문에 그래서는 안 된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예수님을 통해서 여자를 개념이 새롭게 구성되어야 됩니다. 

그러면 그 여자는 어떤 여자냐 하면, 본인의 자녀를 못 낳는 거예요. 본인의 자녀를 못 낳고 본인의 남편도 없어야 돼요. 이걸 사도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홀로 사는 여자라 했어요. 이걸 오늘날 교회, 주의 신부를 의미하는 겁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내 이름으로, 내 힘으로 천국 갈 수 있는 어떤 행함도 내가 생산할 수 없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홀로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라는 인간이 둘로 쪼개져서 짝이 되지요. 내가 스스로 나에게 대자존재가 되는 겁니다. 

전에는 모든 것, 뭘 해도 나에게 돌아왔는데 이제는 나에게 돌아오지 않고 없는 나를 따로 만들어서 나에게 장착시킨, 그래서 나에서는 죄밖에 안 나온다는 것을 받아주는 나, 그 나는 내 속에 계시는 성령에 의해서 새로운 구조가 만들어지는 거예요. 너는 예수 그리스도의 여자야. “나 남자 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 남자는 지금 내 옆에 붙어 있는 남편이 아니고 주님에 의해서 새로운 구조를 위해서 마련해준 새로운 여자, 스스로 여자의 후손이 되면서 후손 입장에서 자기를 낳아준 여자를 새로 만들어내는 하나님. 그것이 바로 언약적구조 아닙니까? 

그게 아브라함언약이거든요.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요, 처음에는 아브라함의 아내였어요. 이제는 그렇게 불리지 않습니다. 사라의 남편이 아브라함이에요. 왜? 사라는 어떤 아기도 못 낳기 때문에. 아기를 못 낳는다는 것은 뱀에게 물릴 여지가 없어졌다는 거예요. 그걸 자유라 해요. 

인간의 육체를, 인간의 욕망을 지배했던 그 악마가 모든 것을 점령하고 접수했는데 그 악마가 접수한 그 바깥에서 예수님 때문에 새롭게 만들어진 그 자아가 있으니까 악마는 그 점에 손을 댈 수가 없어요. 기껏 놀리는 겁니다. 

욥에게 고난을 주고, 자꾸 욥에게 친구를 보내서 욥의 정신 상태를 끓게 만들어요. 욥기의 주제는 뭐냐? 욥의 친구들을 동원시켜서 욥이 정당하지 않다고, 의롭지 않다고 하는 겁니다. 네가 고난 받는 것을 보니 의롭지 않다. 욥의 문제는 뭐냐? “아니야. 나 의로워.” 자기가 의롭다 함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 욥의 문제에요. 

둘 다 꿀밤 팍 주는 거예요. 고난은 네가 납득이 되는 고난을 너에게 허락한 적이 없어요. 왜? 인간은 가능성부터 시작해서 되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에. 내가 쏟아내는 내 행함의 가능성을 가지고 천국에 가려고 시도하거든요. 그런데 요한계시록 20장에 보면, 행함 책에서 지옥 가는 인간들이나 그 짓을 하고 그 주장을 합니다.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지만 그 생산된 행함을 전부 다 제거해 나가십니다. “제가 십억을 헌금했습니다.” 하면 주님이 “네가 방금 또 농담했구나.” 계속 제거해요. 행함을 다 제거하게 되면 그 바닥에 남는 것이 있어요. 그게 믿음이에요. 계속 행함이 제거되어야 내가 나를 믿었는지 주님을 믿었는지 그게 드러난다고요. 

따라서 행함을 제거하니까 옆에 있는 행함주의자들, 육체로 난 자들이 사람끼리 사귀면서 공통점을 찾는데 저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없으니까 핍박을 하는 거예요. 뭐라고 다가오느냐 하면, 성령으로 난 사람에게 다가와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 구원을 봐라. 이렇게 해서 나 구원 얻었다!” 하고 자랑하면 성령 받은 사람이 “인간에게는 구원이 없는데?” 이래버리면 그 다음부터 발끈해서 미워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인간에게는 구원이 없어요. 폐기되어야 할 인간에게 구원은 없습니다. 폐기를 가지고 붕어빵 틀 속에 들어가야지요. 

하나의 앙꼬로 들어가든지, 밀가루반죽으로 들어가든지 그 구조자체가 구원이에요. 그걸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된다고 하는 거예요. 의를 소유하고 구원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의에 편입되었고, 참여했고, 하나님의 구원에 기여한바 되기에 우리는 구원되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짝을 이뤄서 이야기해요. 육체밖에 없는 인간에게 육체로 태어나지 않은, 성령으로 태어난 것과 짝을 이루어서 이게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제시합니다. 사도가 믿는 것, 이렇게 사도에게 알려주신 것, 주께서 택한 백성은 놓치지 않는다는 것, 인간의 행함, 가능성을 다 드러내고 주님의 행함만으로 성사되는 작품하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당당하게 진리를 이야기했고 안 믿는 사람들에게는 농담처럼 이야기하는 거예요. 

우리도 남은 생애를 실없는 농담이나 던지면서 살아갑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는 것이 장난인줄 이제 알았습니다. 아무것도 심각한 일도 없고 아무것도 중요한 일도 없는데 그동안 얼마나 마귀한테 보이스피싱 당했습니까? 주여, 그것조차 주의 뜻인 줄로 알고 거덜 날대로 거덜 나서 폐기의 아이콘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