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강-갈 4장 24-26절(두언약)18061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4장 24-26절입니다. 신약성경 306페이지입니다.
갈라디아서 4:24-26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교회 생활 좀 오래 하고 신앙생활 깊다고 자부하는 사람들도 사도바울의 편지, 갈라디아서 4장 24절에서 26절에 나오는 이 내용에 대해서 설명해 보라고 하면 선뜻 나서서 설명하는 사람이 거의 없을 거예요. 오랫동안 교회 다녀도 이 대목을 그동안 빠트리고 그동안 신앙생활 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걸 빼고 교회생활 했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오늘 읽었던, 우리가 같이 보았던 이 성경말씀의 내용은 이 세상 어떤 철학을 동원해도 풀지 못합니다. 인간의 어떤 과학적인식을 동원해도 이 내용을 설명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사도바울은 이 대목을 가지고 현재 살아 있는 모든 인간의 삶에 대해서 조롱하기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이 갈라디아서의 편지가 소위 하나님을 믿는 그들, 여호와를 믿는 그들에 대해서 다 엉터리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 믿는다는 것이 거짓이라는 거지요. 그 근거가 어디 있느냐 하면,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24절에 단어 하나하나를 끊어서 나열하게 되면 한 단어와 그 다음 단어가 수월하게 연결이 안돼요.
인간들이 살고 있는 오늘날 세계나 그 당시 세계나,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는 그 자체가 연결이 안 됩니다.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이것도 연결이 안 되고,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이것도 무슨 말인지 모르고요.
26절에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이것은 더더욱 모르고요. 결정적으로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이것은 무슨 말인지 처음부터 끝까지 무슨 말로 서로 연쇄고리처럼 연결시켜 놓았는지 알 길이 없어요. 뭔가 단어와 단어가 연결되려면 수긍이 되고 난 뒤에 연결이 되어야 돼요.
지금 이 이야기 다음에 그 다음 단어를 연결시킬 테니까 연결시키는 것에 네가 동의하지, 그지, 라고 묻고 그 다음 넘어가고 해야 되는데 서로 떨어져 있는, 상관도 없는 단어들이 서로 엮어서 이렇다고 사도바울은 일방적으로 제시하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들이 그동안 하나님을 통해서 자기의 삶의 자리를 장만해 오고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인간세계가, 사는 이유가 뭐냐 하면, 영원히 내 자리마련하려고 살잖아요.
교회 오는 이유는 죽어서도 영원히 내가 기거할 내 자리 마련하려고 하기 위해서, 내 처소 마련하기 위해서, 변하지 않는, 영원히 계속해서 한 자리에 들어가면 줄곧 그 자리에서 복을 누릴 수 있고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그 자리, 그 자리를 죽어서도 확보하고 살아서도 확보하고, 살아서 영원한 자리까지 확보하고, 그것 때문에 종교라는 것이 있고, 이 땅에 살면서 20대는 20대로, 30대는 30대대로 전부 다 흔들림이 없는 편안한 안정된 내 자리, 불안하지 않는 확고한 내 자리를 장만하려고 오늘도 그렇게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의 오늘 본문 내용에 의하면 그 자리가 없다는 겁니다. 너희들이 이 세상에서 헛짓했다는 겁니다. 거기다가 하나님까지 동원시켜서 “하나님, 내 자리 마련해주세요.”라고 했는데 그것도 다 헛짓이라는 겁니다. 그 하나님 자리 빼버리고 거기에 뭘 집어넣느냐? 하나님의 언약을 집어넣어야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 믿었다. 그거 통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나님 믿는 것 통하지 않고 지옥 가는 사람도, 마귀도 하나님의 존재를 아니까 하나님 자꾸 거론하지 말고 실제로 살아계신 하나님이 제시한 것을 거기에 집어넣어야 돼요. 그게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그런데 언약이라는 말을 평생 신앙생활 하면서 몇 번 들었습니까? 언약이라는 말을 교회에서 하지를 않지요. 나 인간이고 하나님은 저 위에 있고, 내가 인간으로서 하나님을 믿으면 되지 언약이라는 낯선 단어가 왜 필요하냐고 나오지요.
언약이라는 것은 참 낯선 단어에요. 언약을 알더라도 내가 하나님을 믿고 믿는 거기에다 언약을 집어넣으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언약은 기존에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간주해주지 않습니다. 내가 아는 하나님 그 자리를 전부 다 도려내야 돼요. 그걸 빼고 내가 믿는 하나님 자리에다 언약을 심어버립니다.
일종의 상감청자 기법인데 도자기 만들 때 기존의 것을 덧입히는 것이 아니고 흙을 파내고 파낸 그 빈자리에 자개나 조개껍질이나 뭘 집어넣어서 솜씨를 내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는 그 하나님 자리, 그 하나님이 보고 있는 나의 자리를 전부 다 긁어내요.
긁어내고 하나님의 언약을 딱 심어버립니다. 언약을 심어버리는데 언약이 하나같으면, 언약을 심어놓았으니까 나는 괜찮겠지, 이렇게 되겠는데 오늘 본문에는 언약이 하나가 아니고 ‘두 언약’이라고 되어 있어요. 언약이 두 개입니다.
언약이 두 개라는 말은 우리가 추상적으로 생각하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두 종류의 언약을, 두 종류의 계약을, 두 종류의 약속을 이 지상에 펼쳤다는 거지요. 두 종류의 계약을 펼쳤는데 하나의 계약은 뭐냐 하면, 저주받는, 지옥 가는 계약, 지옥 가는 것도 그냥은 못가고 하나님의 계약에 의해서 지옥 간다는 겁니다.
지옥가고 싶어도 못가요. 하나님의 계약된 사람만 지옥 갑니다. 저주받아요. 그 하나님의 저주받은 사람의 계약이 있는 반면에 또 하나는 영생 얻기로 하는 계약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 두 개의 언약, 두 개의 계약을 우리 몸에 새기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관리해 왔다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기 때문에 지난 시간에 한 것을 잠간 언급할게요. 여기 23절에 보면,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라고 했지요. 제가 지난 낯 설교에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떤 인간치고 육체가 없는 인간은 없다고 했습니다.
육체로 인간이 만들어졌다는 그 자체가 어떤 요건에 합당하냐 하면, 저주받는 요건에 합당한 모습으로 태어났다는 뜻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육체가 어디서 나온 육체냐 하면 아담의 줄기에서 나온 육체거든요. 아담의 줄기에서 나왔다는 것은, 이미 아담은 하나님 앞에 범죄한 인간이고 그 아담은 속성이 있는데 어떤 속성이냐 하면, 죽기 위해서 태어난 속성을 지니고 있어요.
그래서 그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간은 죽음을 기다리는 대기자들입니다. 죽음을 말하기 위해서,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표현해주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난 겁니다. 어떻게 태어났는가? 육체의 모습으로 태어났다는 거예요. 23절 말씀에 의하면.
다시 이야기합니다. 지금 사도바울은, 살고자 하는 인간, 하여튼 모든 인간을 향하여 조롱하고 있는 거예요. 네가 지금 육체덩어리로 태어나서 살고자살고자 애를 쓰는데 그게 뭔가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우리 외손녀가 하루 네 끼를 먹는답니다. 크려고 하는 모양이지요.
내가 생각했어요. 뭘 했다고 네 끼를 먹느냐는 말이지요. 네 끼 먹을 만한 어떤 짓을 했는가? 돈 버는데 보탬이 되지도 않았는데 무슨 네 끼나 챙기느냐. 그런데 네 끼를 챙긴다는 거예요. 왜? 살려고. 그게 잘못된 생각이라는 겁니다. 아민아! 사람은 죽기 위해서 살아가는데 왜 자꾸 네 끼나 먹고 살려고 하느냐는 그 말이지요.
살려는 이유가 뭐냐? 그래서 내 자리 장만하겠다는 겁니다. 20대 보세요. 내 자리. 아가씨들이 결혼하려는 이유는 뭐냐? 남자 이용해서 남자 세계 속에 자기 자리 삼으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유명한 노래 남진이가 부른 ‘둥지’가 나오잖아요. 내 안에 둥지를 품으라 하잖아요.
인간은 둥지 마련하기 위해서. 새들 새끼들 키우는 것 보세요. 둥지에서 새끼들이 입 벌리고 있잖아요. 그 둥지 마련, 보금자리 마련하기 위해서 사는 거예요 인간이라는 것은. 노후대책이 뭡니까? 60넘어, 70넘어 보금자리 마련하는 거예요. 20대, 30대, 전부 다 보금자리 마련하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는 데까지고 죽고 난 뒤의 보금자리 그것은 어디서 책임지는가? 그것은 교회에서 알아서 하겠지요 뭐. 그래서 교회 다니는 겁니다. 누가 책임지는데?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 믿는 겁니다. 하나님 믿어서 영원한 천국에 내 처소 마련하겠다는 겁니다.
그 하나님을 긁어내야 돼요. 그 하나님이 가짜에요. 살고자 하는 심보가 그대로 거기에 다 녹아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을 허락한 적이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을 가지고 믿으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내 언약을 믿으라고 나와요.
옛날 구약 때 이방민족에게 주지 않았던 것이 있어요. 이방민족이 저주받는 이유는 그들이 언약을 모르기 때문에 저주받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시편, 예레미야, 계속해서 성경에 나와 있어요. 성경책에는 나와 있는데 그거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방인 주제에 하나님 믿으니까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성경에 나와 있지도 않은 이야기를 합니다.
사도바울이라는 사람은 이전에 여호와 믿었어요. 사울이라는 사람은 사도되기 전에 여호와를 열심히 믿었습니다. 하나님께 열심내기 위해서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울이라는 사람에게 예수님이 찾아왔어요. 그때 자기가 믿던 그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게 그게 가짜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언약대로 움직이는데 자기는 자기 살 보금자리 챙기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한 거예요. 살아 있을 때도 자기보금자리, 자기아파트, 자기빌라, 죽어서도 천국에 맨션아파트. 어디가도 아파트 없이는 못사는 식으로 훈련되어 있어요. 사고방식이 날 보호할 수 있는 것, 날 지킬 수 있는 것.
그 하나님을 빼라는 말이지요. 그 하나님을 믿지 말라는 말이지요. 언약을 믿어야 돼요. 하나님은 이 땅에 와서 부지런 떠는데 인간들은 그 부지런떠는 하나님의 작업은 전혀 느껴지지 않고 그냥 하늘만 쳐다보고 있어요. 하나님은 저기 계시겠지, 라고 하면서. 실제적으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일할 때는 언약에 따라서 일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그 모든 일은 무엇과 관련되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완성과 관련되어 있어요. 그 언약완성은 뭐로 되느냐? 예수님의 열심과 예수님의 기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의 기적으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은 오직 하나밖에 없어요. 아들 예수님의 피로만, 찢어진 살과 그 피로만 하나님의 새언약을 이룹니다.
“마시라. 이것은 새언약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다. 먹어라. 너희를 위해서 찢긴 내 살이다.” 새언약은 이렇게 이루는 겁니다. 예수님의 관심사는 자기백성 구원하는 것이 아니에요. 어떻게 아버지의 언약을 지상에 이루느냐, 그것뿐이었습니다. 언약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이루신 새언약을 쉬운 말로 하게 되면 이런 겁니다. 어떤 사람이 너를 위해서 죽었다면 그 때부터 너의 정체, 너의 실체, 너라는 인간이 어떤 인간인가의 그 시작점은 바로 그겁니다. 너 때문에 누가 자살했대. 너라는 인간 때문에 누가 죽었다. 그게 시발점이에요. 예수님의 죽음, 진실의 시발점이 거기에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의 시발점은 뭐냐? 나 여기 있다. 내가 살아 있을 때 아파트, 내 자리 마련했으니까 이제는 죽어서의 내 자리 장만해야지. 이것이 우리의 시발점이에요. 이것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믿고 보험 들듯이 오는 거예요. 누가 내 대신 죽었다는 이야기, 그게 우리의 출발지점이에요.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날 때 어떤 권리 없이 태어났습니다. 우리 인간입장에서는 권리 없어요. 언약 때문에 태어난 거예요. 언약 때문에 태어났고 어떤 권리주장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태어났으면 살아 있을 때도 권리주장하면 안되지요. 새벽제단에 엎드려서 권리주장하면 안 된다 그 말이지요.
몇 번 이야기합니다만 요 근래 제 주위에 아픈 사람들 그렇게 많아요. 우리 정 권사님도 아파서 계단 못 올라온다고 교회 못 오시거든요. 그 분 뿐만 아니고 아픈 사람이 왜 그리 많은지. 어디가 아픈가? 우리가 물을 때 어디가 아프십니까, 라고 물을 수가 없어요. 이렇게 물어야 돼요. 어디서 화나십니까? 어느 대목에서 화가 나십니까?
인간은 평생 화만 내며 살다 가요. 인간은 평생 분노하며 살다 갑니다. 화분 던지고, 가위 던지고, 서류봉투 던지고. 그게 재벌가의 모습이 아니에요. 우리의 모습입니다. 틈만 나면 화냅니다. 이것은 갱년기 아줌마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에요. 남자들도 갱년기 있습니다. 모든 점에 화내요. 지방선거 투표해도 화나고 특히 대구는 더욱 더 화나고.
되어지는 모든 일에, 비가 와도 화나고. 비오면 꿀벌 못 키워서 화나고 비 안 오면 농사 모내기 못한다고 저쪽에서 또 화내고, 미장원에 가도 화나고. 들어갈 때 화내고 나와서 뜻대로 안 되었다고 화내고. 벌써 들어갈 때부터 화낼 준비하고 들어가요.
왜 이렇게 화를 내느냐 하면 출발점이 잘못돼서 그래요. 나 때문에 누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백날 해도 귀에 들어오지도 않아요. 누가 나 때문에 죽으라고 했나, 하면서. 오늘 본문에서 이 두 언약에서 우리 자리는 없습니다. 일단 우리 자리는 없는 존재에요. 우리는 빼요. 우리가 있던 자리를 삭제해버리고, 나라는 것을 삭제하고 거기에 두 언약을 집어넣습니다.
언약과 언약의 관계 그 결과물이 인간입니다. 언약이 인간보다 우선이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인간이 구원받고자 하는데 구원될 수 있는 인간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아무도 구원할 필요 없어요. 구원 될 수도 없고 구원되라고 주장할 권리도 없어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은 살아가면서 어떤 권리를 주장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살 권리도 없고 심지어 죽을 권리도 없습니다. 이것은 언약을 위해서 일종의 시다바리로 이 땅에 태어난 거예요. 두 언약의 관계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인간은 존재하는 겁니다. 그게 피조물의 역할이고 존재이유에요. 다시 이야기하지만 시작점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자기 위해서 자꾸 예수 거론하고 하나님 거론하는데 백날 해봐야 그것은 다 부질없는 짓이에요. 헛수고입니다.
성경에 창세기 2장 3장의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선악과를 심어놓고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되어 있거든요. 벌써 에덴동산부터 죽음이 들어와요. 이 죽음, 선악과 따먹으면 왜 죽어야 되는지 그 이유 설명하려고 인간을 만들어놓은 거예요.
왜 다른 과실은 먹어도 되는데 선악과는 먹으면 죽느냐? 선악과 안에 무슨 비밀이 들어 있기에 그걸 따먹으면 왜 죽는가? 질문자체가, 인간이 선악과 안 따먹도록 조치하면 될 것이 아닙니까, 라고 인간의 자기 유리한 조건으로, 어떤 권리가 있는 것처럼 해서는 질문자체가 안 되는 거예요.
인간을 배제하고, 나를 배제하고 질문을 해야 돼요 하나님 앞에서는. 선악과 안에 무엇이 담겨 있기에, 어떤 내용이기에 따먹으면 죽습니까, 이렇게 해야 돼요. 죽음이 무엇입니까, 를 설명해야 돼요. 죽음이 무엇인가가 궁금해야 돼요.
결론적으로 말해서 선악과의 죽음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모든 우주의 주가 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선악과에 죽음이라는 속성을 심어놓은 거예요. 선악과의 죽음과 생명나무의 생명 그 둘이 합쳐져서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주의 자리에 앉게 되면 이 모든 세상은 예수님의 긴 치마폭이 돼요.
예수님이 갖고 있던 속성인 죽음과 생명, 다른 말로 하면 저주와 축복, 이것을 일방적으로 제공할 수 있는 권한자가 예수님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세상의 모든 천지창조는 이루어진 겁니다. 그래서 그 죽음에서 생명으로 넘어온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거예요. 죽음에서 생명으로 넘어오려면 처음에 천지창조 때 선악과와 생명나무를 심어놓았던 아버지와 아들의 그 협의하심에 의해서만 죽음에서 생명으로 넘어올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어떤 기적이냐 하면, 천지창조를 한 능력, 기적이 아니고서는 예수를 믿을 수 없다는 그 말입니다. 나 좋으라고 예수님 십자가 진 것이 아니거든요. 나 좋으라고, 내가 천국가기 위해서 예수 믿는, 그 예수를 믿겠다고 나서는 그것이 바로 저주받을 짓이라고 단정 짓고 그것을 제거하는 능력이 두 언약에서 나와요.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천지창조 할 때 7일 만에 천지를 창조했잖아요. 이 창조가 아버지와 아들의 협의 하에서 창조한 거예요. 따라서 어떤 사람이 사망에서, 아담의 자손, 그러니까 사망에서 예수님의 자손, 생명으로 옮기려면 이것은 우리가 애쓰고 믿는다고 될 문제가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이 협의를 해줘야 돼요. 의논이 된 사람만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겁니다.
우리가 할 게 없어요. 믿고 자시고 할 것이 없다니까요. 자꾸 믿고 사랑하려고 하면 내가 나오기 때문에 영생이 성립이 안돼요.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이야기합니다. 늦게 오신 분이 있어야 여러분이 좋아요. 긁어내야 된다고요. 내가 있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 믿잖아요. 나도 긁어내고 내가 믿는 하나님, 예수님, 삼위일체 다 긁어내야 돼요.
그거 다 헛짓이니까 긁어내고 긁어낸 자리에 두 언약을 심어버리는 겁니다. 지금 사도바울이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구원될 권리도 없으면서 구원되겠다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죽음의 현상이거든요.
제가 방금 이야기한 것을 아주 단도직입적으로 설명한다면 마태복음 11장 27절에 나옵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예수를 안다는 것, 예수를 믿고 안다는 이것은 인간이 할 몫이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 하나님과 예수님, 아버지를 아는 분은 예수님 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예수님만 나서는 거예요. 예수님과 그 아버지가 협의 하에 “쟤 건져. 쟤 천국 보내.” “예. 알겠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의 협의 하에 구원되기로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절대로 예수님을 안 믿게 되어있다는 그 원칙을 설명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네가 네 미래와 장래의 운명을 결정짓기 위해서 애쓰는 그런 시도는 하지 말라. 그런 시도가 너에게는 무거운 짐이다. 따라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은 다 내게로 와서 내가 너희를 위해서 무엇을 했느냐를 배워라. 그러면 나처럼 인생사는 것이 쉽다.” 그 말이거든요.
지금 그 이야기하고 계신 거예요. 내가 구원받는 것은 내가 악착같이 믿어서, 악바리처럼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기도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정성이나 교회 봉사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언약 때문에 그래요.
그 주님의 언약에 나는 관여한 적도 없고, 할 수도 없고, 해도 내치고. “나가 있어!” 내친다니까요. 주님께서 내 구원의 작업을 하면서 나를 내치는 거예요. 이것이 관계자에 의한 무관계자의 퇴출이에요. 관계자에 의한. 보통 어떤 사무실에 가면 ‘관계자 외 출입금지’잖아요. 관계자, 예수님과 하나님, 그 분만이 관계자에요. 관계자 외에는 출입금지에요.
관계자에 의해서 무관계자로 퇴출당하는 겁니다. 왜? 우리는 육체를 지녔기 때문에. 육체는 꼬물락거리면서 자꾸 뭘 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래요. 23에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라고 했거든요.
약속으로 말미암았다고 할 때 창세기 3장 15절에는 여자의 후손이 약속의 주인공으로 등장해요. 여자라 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대리표상이 아닙니다. 대리표상이라는 말은 대표자가 아니라는 말이에요. 여자는 대표자가 아니에요. 모든 인간의 대표자는 남자입니다.
그래서 남자에 의해서 태어난 모든 인간은 저주받아서 죽어야 돼요. 모든 인간은 남자에 속하니까. 그래서 구원받고자 한다면 남자의 자손에서 여자의 자손으로 옮겨져야 돼요. 우리 엄마가 우릴 만들었잖아요,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거예요.
마태복음 1장, 교회 나와서 제일 먼저 보는 대목이 마태복음 1장이거든요. 1장 보자마자 지겹다고 성경 안봅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1장에 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해놓고 그 다음에 무슨 도움이 되는 염불 같은 것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불경에서 나오는 것처럼 뭘 하라는 것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벌써 지루하게 시작합니다.
성경 안봅니다. 초반부터 재미가 하나도 없어요. 족보 이야기가 나온다고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다는 말이지요. 남자가 남자를 낳은 거예요. 여자는 없는 거예요. 그래서 모든 인간세계에서의 대리표상, 대표자는 누구냐? 여자가 아니고 남자에요.
여자든 남자든 전부 다 아빠의 호적에 올라가는 겁니다. 이게 육체를 따라난 이 세상 모든 체계고 조직이에요. 그런데 약속은 뭐냐 하면, 남자를 따라난 것이 아니고 여자를 따라 났어요. 남자의 자손에서 여자의 자손으로 다시 태어나야 되는데 그 태어나는 능력이나 방법에 있어서 남자의 자손으로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깡그리 모든 인간이 하는 일은 전부 다 남자의 자손, 육체로서 내뿜는 일뿐이에요. 여자의 자손에서 나오는 일들은 없어요. 남자의 자손에서 여자의 자손으로 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면 구원받는 자는 어떻게 구원받는가? 남자의 자손에서 여자의 자손으로 옮겨졌기 때문에 구원받는 거예요. 그러면 옮겨질 때 남자의 자손과 여자의 후손의 특징이 뭐냐?
남자의 자손이 되게 되면 아내가 있어요. 그런데 여자의 자손은 남편이 없어요. 남편이 없는 것을 갈라디아서 4장 27절에 “홀로 사는 자”라고 합니다.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고 되어있어요.
방금 제가 한 이야기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고 갈라디아서 4장 27절에 나오는 이야기잖아요. 이게 성경에 들어있는 이야기입니다. 사도바울의 편지에 들어있는 내용이에요.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인지 그걸 설명해 드리는 거예요. 이것 모르고 평생 동안 교회 다닌 거예요.
기도 하세요 복 받습니다, 십일조하세요 복 받습니다, 이러고 지옥 간 거예요. 교회 다니면서 지옥 간 거예요. 오래 다니면 집사 되고 돈 많이 내면 장로 되고, 장로 되면 그 아내는 덩달아 권사 되고. 처음 되면 햇권사 되고. 성경내용을 도대체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다니까요. 나 혼자 이야기했다는 뜻은 아니에요.
초대교회부터 그래요. 초대교회가 로마가 권세를 잡고 난 뒤부터는 성경내용이 다 철학이 되었어요. 오늘날 신학이 다 철학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이 전부 철학이에요. 사도의 편지가 로마에 가니까 철학이 되고 그게 미국에 가니까 기업이 되고 말았어요. 그게 한국에 들어오니까 초기업이 되었어요. 장사하는 거예요.
서울 성수동에서 젊은 초짜들이 음식 장사를 하는데 백 셰프라는 사람이 심사를 하면서 아주 요한계시록 3장에 나오는 모션을 취했어요. 음식 한 것을 먹어보더니만 휴지를 뜯어서 뱉어버려요. “이것은 요리가 아니고 죄악입니다. 이런 식으로 장사하지 마세요.”
뭘 묘사했느냐 하면, 뱉어버렸다는 거예요. 삼키지를 않아요. 이것은 음식이 아니라 더러워서 못먹겠다는 거예요. 요한계시록 3장에서, 교회를 보고 토해 내치리라, 했어요. 갈라디아서 4장 27절의 내용이 안 들어있으면 이것은 토해내치는 거예요. 더러워서 주님이 삼킬 수가 없어요. 이것은 하나님이 만든 교회가 아닙니다.
홀로 산다는 그 의미가 뭐냐 하면, 약속을 지닌 여자 하나가 등장해서 모든 남자의 정체성을 완전히 새롭게 재정립한다는 이야기에요. 여자의 자손으로 태어난 그 여자의 아들이 기존의 아담에 속한 모든 인간의 정체성을 두 언약단위로 분류시켜서 완전히 재편하는 거예요. 모든 세상을 재편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 23절에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종이라는 거예요, 종. 누구의 지배를 받는다, 통치를 받는다는 겁니다. 물론 악마지요. 육체를 따라 났기에 뱀의 지배를 받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 땅의 모든 인간은 남자의 자손이기 때문에 약속의 자녀는 이 땅에 없다는 겁니다. 없음부터 가는 거예요. 죽음이 한쪽은 저주스런 죽음이지만 구원받은 사람은 이미 없는 존재로 간주해주는 거예요. 있어도 없는 존재, 내가 뭘 해도 없는 존재.
하나님의 언약은 있는 것들을……, 우리 힘으로 있는 나를 없애지 못하잖아요. 불교처럼 마음의 도를 닦아도 없어지지 않아요. 그러니까 자기 택한 백성 같으면 언약이 찾아와서 있는 것을 없애주시는 겁니다. 없애주지 자꾸 우리 육체의 행함 그것 가지고 자기 구원에 보탬이 되려고 시도하기 때문에 이걸 언약을 통해서 없애주는 거예요.
없애주는 방법이 여호수아 8장 30절에 보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해서 요단강을 건너오게 했는데 뭘 앞장세웠느냐? 언약궤를 앞장세워요. 이 언약궤를 앞장세워서 그들로 하여금 여리고성을 정복하게 했거든요.
언약궤가 정복해요. 그 언약궤가 어디에 도착하느냐 하면, 그리심산과 에발산사이에 도착해요. 그리심산이라 하는 것은 축복산이고 에발산이라 하는 것은 저주산입니다. 제가 거기 가봤잖아요. 눈에 선해요. 에발산과 그리심산. 그 사이에 가는데 여호수아 8장 30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때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산에 한 단을 쌓았으니.”
그 두 개의 산 중에서 어느 쪽에 단을 쌓았느냐? 저주산, 에발산 밑에다 제단을 쌓았습니다. 언약궤를 거기다 둬요. 제단을 쌓아놓고 사람들을 둘로 쪼개서 세웁니다. 야곱의 아내가 두 명이지만 실상은 자식 낳는 아내 포함해서 총 네 명입니다. 네 명 아내 중에서 종 출신의 아내는 에발산에 세우고 본처인 레아와 라헬의 자식들은 그리심산에 세워요.
지금 제단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 저주산에 있어요. 저주산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들어간다 이 말이지요. 이 말은, 하나님의 언약은 이 땅에서 영생을 주려면 먼저 이 사망, 이 저주세계에서 새로운 대리표상, 대리로 새로운 족보를 만드는 그 작업에 하나님의 언약에 입각한 어떤 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지요, 예수님, 그 어떤 분이 자진해서 저주쪽으로 가야 돼요.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자기가 저주받아야 될 인간인 것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태어나서 2년 밖에 안 살았는데 하루에 네 끼를 먹는다니까요. 네 끼요. 왜 먹으려고 합니까? 왜 네 끼나 먹으려고 합니까? 살려고. 왜? 자기는 살 권리가 있다는 거예요. 살아서 뭐하는데? 나중에 커서 나만의 어떤 보금자리를 만들겠다는 거예요.
크면 그렇게 될 거예요. 독립해서 나만의 보금자리를 만들려고 할 거예요. 그게 바로 점점 저주가 더 구체화되는 거예요. 나만의 교회 나만의 기업, 나만의 사업터, 나만의 직장, 나만의 가정, 나만의 인생.
나만의 인생이라는 것이 결국 뭐냐 하면, 시편 78편 39절에 보면, “저희는 육체뿐이라 가고 다시 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로다.” 시편 90편에 보면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우리네 인생이라 하는 것, 내 인생이라는 것이 그 자체가 반칙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 앞에서. 왜냐하면 언약은 자꾸 어디로 들어가느냐 하면, 저주 쪽으로, 준비된 저주 쪽으로 자꾸 기어들어가는 거예요. 주님은 어디로 가느냐? 저주받는 그 때를 향하여 계속 가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 빼놓고 모든 인간은 살 길을 찾아갑니다. 예수님만 아버지의 저주가 기다리는 쪽으로 기어들어가는 거예요. 대리표상입니다. 아무도 하지 못한 일을 하시는 거예요.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진리의 시작은 누가 내 대신 죽었다는 사실에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주님과 나와 관련 없으면 우리는 영생과 관련 없는 사람이에요.
시작점을, 나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부터 시작하면 안 되고 어떤 분이 내가 그런 소리를 하기도 전에 아버지,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은 분이 이 땅에 이미 일을 벌려놓은 거예요. 십자가라는 것이 이미 있다는 말이지요.
거기서부터 솔솔, 진실이 거기서부터 풀려나와야 되지요. 내가 진실을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은 이미 우리를 휘감고 있는 거예요. 십자가의 그 은혜가 우리를 휘감지 아니하면 뱀에 휘감기듯이 묶이지 아니하면 우리는 엉뚱한 여생을 보내고 있는 중이에요.
저주로 들어가는 겁니다. 저주로 들어가게 되면 그리심산에 있는 쪽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축복을 이야기해요. 산이 그리심산과 에발산 두 종류로 나뉘어진 것은 본인보고 축복받았다는 이야기를 하라는 것이 아니고 상대를 향하여 축복을 날리는 겁니다. 맞은편을 향하여 축복을 날리는 거예요.
저쪽을 향하여 저주를 날리는 겁니다. 언약으로 군불 때는 거예요. 언약으로 제단을 집어넣으면 그 두 종류의 서로 대립되는 산에서 뭐가 나오는가? 두 종류의 노선이 나와요. 하나는 영원히 저주받을 영원한 보금자리, 저주받은 것이 보금자리는 아니지만 하여튼 영원한 자리, 심판의 자리, 저주의 자리가 나오고 또 한 쪽에서는 뭐가 나오느냐 하면, 영원히 복 받을 보금자리가 나오는 거예요.
이게 언약을 집어넣어야 프리즘처럼 두 개의 영상이 뜨는 거예요. 우리는 이것도 모르고 그저 나 하나 교회에 들이밀면 나는 천당 가는 줄로 알고 있지요. 그 나를 다시 끄집어 당겨야 돼요. 다시 교회 밖으로 나와. 네가 설치게 되면 우리는 내 자리보전한다고 늘 불안하고 근심 걱정되고 염려되고 초조하기 짝이 없습니다. 우리는 한시도 맘 편한 날이 없어요.
이러다가 지옥 안가나, 하고요. 우리는 주님의 언약 앞에서, 십자가 앞에서 주님과 관계없는 인간이에요. 대기상태에 있는 겁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소원대로 번호를 불러주게 되면, “아, 합격했어요.” 그렇게 부름 받으면 가고 이름 안 불러주면 그냥 지옥 가는 거지요 뭐.
시작점이 언약이 시작점이지 얼마나 내가 구원받도록 닦달 내느냐, 얼마나 간절한 마음이 있느냐는 아무 소용없는 거예요. 홀로 있는 분이 결정할 문제지 아담의, 남자의 자손들은 소용없습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남자의 자손에서 여자의 자손으로 옮기는 것은 여자의 자손이 하나 등장해서 기존의 모든 남자의 정체, 본질을 새롭게 규정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사라에 의해서 남편 아브라함의 그 의미가 없는 남자, 없는 자의 대리표상이 되는 겁니다. 이 땅에서 죽어 없어져도 할 말이 없는 남자 아브라함, 그게 바로 믿음의 조상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내가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에요. 이게 바로 무관계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이렇게들 이야기할 거예요. “그러면 목사님, 언약대로 다 해버리면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성도로서 어떻게 살아야 성도답습니까?” 이렇게 이야기할 것인데 제가 거기에 대해서 간단히 이야기하면, 모든 관계를 다 끊어버리고 무관계로 새롭게 관계를 정립해야 됩니다.
상관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상관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내가 남들에게 개망신당하고, 개무시당하는 입장인 것을 내가 인지하고 들어가는 겁니다. 우리나라 월드컵 나갔는데 8대 0으로 졌다고 치고 스웨덴하고 붙으면 돼요. 그게 무관계입니다.
아까 어떤 집사님이 3천만 원짜리 미제 오토바이 타고 싶다고 하는데 그것은 아직도 자기가 가치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아멘이지요. 아직도 그럴 권리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관계있는 겁니다.
아예 나 자신에서 내가 뭘 하고 싶다는 것, 이것은 나한테는 있을 수가 없어요. 우리한테 맞닥트리는 모든 일이 나로 하여금 상관할 필요도 없는데 주께서 주선해서 언약을 증거 하라고, 십자가 증거 하라고 맞닥트리는 사람이라고 보면 돼요. 부부사이도 그렇고, 부모자식 사이도 그렇고. 그겁니다. 우리는 관계없는 거예요.
마태복음 8장 29절에 보면 귀신이 예수님 만나서 하는 말이,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했어요. 예수님 보고, 당신은 당신일 하고 나는 내 일 하자고 나오면 그게 전부 다 귀신들린 자들이에요.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고 귀신이 속에서 사람의 목소리를 빌려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예수 십자가하고 나하고 무슨 관계가 있느냐? 귀신이 안에 들어 있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게 군대귀신의 합창이에요. 우리 힘으로 안에 있는 그 귀신 안 나갑니다. 그런데 택한 백성은 아버지와 아들의 창세전의 소원대로 언약이 작용해서, 십자가로 작용해서 우리로 하여금 그 귀신을 다 긁어내게 하시는 거예요.
긁어낼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첫째로 사소한 일 때문에 악마에게 책잡힐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사소한 일로 사람들에게 책잡히지 마세요. 사소한 일이 어떤 일이냐 하면, 내가 사람 죽인 것, 아주 사소한 일입니다. 간음한 것, 살인한 것, 도적질 한 것, 아주 사소한 일이에요.
이 세상에는 사소한 일밖에 없어요. 그것가지고 마귀로부터 책잡힐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살 권리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언약 때문에 살아가기에 우리는 이미 우리 육체로부터 무관계자에요. 관계없는 인간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이미 죽은 자에요. 없는 자입니다. 없는 자가 책잡힐 것이 뭐가 있습니까? 모든 내놓는 것은 언약의 일이지 내 일이 아닌데. 그걸로 왜 마귀에게 책잡힙니까?
두 번째 악마가 나올 때 발악을 하는 것이 뭐냐 하면, 나의 고통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고통을 가로막고 있다는 겁니다. 고관절 아프거든요. 권사님 계단도 못 올라옵니다. 이빨 아파요. 허리 아파요. 아프니까 짜증나고 화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아픈 것 때문에 나로 인하여 내가 태어나기 전에 벌써 나와 관련해서 자살처럼 느껴지는 어떤 죽음, 고통 속에 죽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태어난 내 아픔으로 계속 가리고 있었던 거예요.
이게 바로 내 속에 귀신이 작용하는, 악마가 작용하는 거예요. “너는 너 아픈 것 밖에 모르지? 네 상처밖에 모르지? 네 가정 어려운 것밖에 모르지?” 네 사업 안 되는 것밖에 모르지. 그것 때문에 고민하고 걱정한다는 그게 바로 내 속에 지금 군대귀신이 들끓고 있는 것인데 그걸 십자가로 긁어내는 겁니다.
세 번째, 예수님이 와서 자꾸 계속 긁어내니까 악마도 지지 않으려고 계속해서 1번, 2번을 반복해서 우리에게 들쑤십니다. “네가 이웃집 욕했잖아. 교회 다니면서 그렇게 하면 주의 영광을 가리지 않아?” 이런 식으로 사소한 일로 자꾸 우리를 힘들게 해요. 양심에 호소하라고. “네가 예수 믿는다면서 그렇게 살아도 되나? 바르게 살아야지.”
이놈의 바르게 사는 것 때문에 자기일 못되는 것이 못 바르게 사는 벌칙처럼 여겨지는 겁니다. 이게 바로 군대귀신이에요. 악마한테 시달리는 겁니다. 이걸 회수하기 위해서 헌금 한 푼 더 내고, 교회 일찍 더 나오고, 목사 말 듣고, 교회 봉사 충성하고, 선교회비 내고, 애한테 아주 천사처럼 이야기하고, 백날 그래봐야 과거에 난 여러분의 상처가 보상될까요?
과거는 여러분에게 이미 없는 거예요. 이 땅에는 우리는 없는 존재입니다. 홀로 사는 자의 자녀인데 뭐가 있어요? 없는데. 우리는 사라지기 위해서 이 땅에 살아가는 거예요. 없음이 진짜로 없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살아가는 겁니다. 뭐가 있어요? 아무것도 없는데.
여기 있잖아. 있는 것은 언약이 있기에 있는 거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있기에 있는 겁니다. 얼마나 양심에 시달리고 마귀한테 언제까지 놀림 받고 괴로움 당하고 서러움 받겠습니까? 차라리, 이왕에 내가 졌다. 나는 패배자야. 나는 실패자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내가 시시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남들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내가 아주 시시한 채로 만나기 때문에 상대방을 만날 때 상대방의 그 꼴깝떠는 몰골이 비로소 눈에 들어옵니다. ‘내가 옛날에 저랬어. 저렇게 잘난 체했어. 내가 주님 십자가 모를 때 저렇게 까불락 댔고 좀 안다고 으스대고.’
그런 자신의 옛날 모습을 그대로 보면서 ‘그래. 잘 먹고 잘 살아라. 너 있다. 너 많이 있다. 홀로 사는 자의 자녀로서가 아니라 그냥 많이 있다.’ 그 있음으로서 그게 바로 마귀의 종, 하갈의 자손, 저주받는 언약노선에 있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아브라함은 있는 존재가 아니고 없는 존재로서 있는 것은 여자의 후손, 주님의 있음 안에 종속되었다는 그걸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서 구원받은 겁니다. 날마다 우리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과 갈라디아서 4장의 홀로 사는 자의 말씀과 하나도 빈틈없이 바로 연결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살 권리도 없으면서 남 흉내 내면서 덩달아 그냥 내 보금자리나 챙기면서 내 영원한 자리 마련하고자 부질없는 짓거리로 살아왔습니다. 그래놓고 불평은 다 하고, 원망은 다 하고. 얼마나 철이 없는지, 언제까지 마귀에게 속아 넘어가야 합니까? 이제는 이미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심판받은 자요, 있어도 없는 자고, 그리스도가 나에게 살아있는 자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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