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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갈과 사라(갈4;21-23) 180610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6. 11. 15:34
2018-06-10 12:44:52조회 : 62         
   하갈과 사라 180610이름 : 이근호 (IP:119.18.83.168)   

하갈과 사라(갈라디아서 4:21-23)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KSv6XtM7DR4, Hit:8

 이근호18-06-10 13:29 
하갈과 사라 

2018년 6월 10일                  본문 말씀: 갈라디아서 4:21-23 

(4:21)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4:22)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4:23)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사도는 자기에게도 왔다가 떠나가는 사람들에게 불만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맞는 스승을 찾아간다는 겁니다. 사도는, 자신을 떠나는 그들의 의식에 대해서 성경적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거론 된 것이 바로 아브라함에게 두 아내가 있었다는 구약 성경의 내용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복의 근원이라는 사명을 받은 분입니다. 하늘의 복이 아브라함은 통해서 대대로 이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 복의 근거가 되는 하나님의 약속을 설명하고 드러내는데 있어 한 명의 아내가 아니라 두 명의 아내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언약에 의해서 펼쳐지는 세상을 전부 설명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여자 가운데 하갈은, 나중에 하나님에 의해서 아브라함 곁에서, 곧 하나님의 축복에서 내침을 당해야 될 여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내침을 당할 여인을 왜 자식까지 낳게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갈은 ‘보조적 기능인’으로 언약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 위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 위주입니다. 약속의 성취를 위하여 ‘이것은 아니다’라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하갈이 필요합니다. 즉 ‘내침’을 당하는 절차가 언약 성취에 필수적이라는 겁니다. 

사도 바울에게 왔다가 가는 사람들은, 자신을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권한이 있는 ‘인간’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즉 사도가 하는 말을 듣고 좋다고 여겨 질 때 그때 계속 사도와 사귈 용의가 있다는 겁니다. 만약에 사도가 하는 말은 무슨 말인지를 모를 때는 스스로 판단해서 사도 곁을 떠나겠다는 겁니다. 

그러나 사도는 ‘이런 자율성을 지닌 존재’를 인간으로 보지 않습니다. 아예 인간은 없다는 겁니다. 언약에 근거해서 봤을 때, 인간은 ‘하갈’ 아니라 ‘사라’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규정한 ‘종’의 요건은 바로 ‘육체’로 존재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육신이 있는 모든 인간들은 다 하갈, 곧 종이라는 자유자만이 들어가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겁니다. 

사라측에 있는 인물은 육체가 아니라 오직 약속으로 난 자들 뿐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합당한 특징들이 아브라함과 관련해서 어떻게 나타나 있는 겁니까? 숨겨진 하늘 나라는 남자로서가 아니라 여성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남자로서는 약속의 나라의 특징을 제대로 말해질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남자는 임신 능력자의 역할에 해당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란 곧 ‘내가 있기 전에 먼저 계신 분’이라는 이미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는 각 개인의 운명은 각 개인의 능력이나 행함 여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즉 어머니의 성질이 그대로 반영되는 것이 자식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기존에 있는 모든 인간의 육체는 이미 언약에 의해서 결국에는 내침을 당하고 추방되어야 될 입장에 있다는 겁니다. 그 근거를 지닌 것이 하갈입니다. 사라에 비해서 하갈은 임신할 능력을 지녔습니다. 곧 ‘내가 여기 있음’은 곧 ‘내게 능력 있음’과 같은 말이 되는 겁니다. 아기 놓을 수 없는 자리에 하갈은 ‘능력자’로서 들어서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 하갈과 그 자식인 이스마엘을 아브라함 곁에서 걷어냅니다. 언약의 완성의 나라에 못 들어가게 됩니다. 이처럼 ‘있음’이란 결코 ‘사라의 나라’ 곧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인간들은 어디까지 최종적으로 혼자로서 살게 됩니다. 곧 ‘짝’이 없다는 말입니다. ‘짝’이 없으니 평가를 내려도 본인인 본인에게 평가내립니다. 

짝이 있다면 본인들이 하갈인 것을, 죄의 종인 것을 알고, 평가도 본인이 평가내릴 자격이 없음을 알지만, ‘사라’라는 짝이 없기에 졸지에 하갈도 아니라 그냥 그 자체로서 ‘인간’으로 여깁니다. 자기 책임을 스스로 지려고 합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내쳤던 그 사고방식입니다. 

곧 선과 악 사이에 인간이 ‘원인’으로 개입하려는 사상이 이 사상입니다. 즉 ‘나로 인하여 내 집안이 엉망이 되었다’ 라든지, ‘나로 인하여 내가 성공했다’고 우기는 등등 자기 미래를 지금의 자기 결정과 판단으로 꾸미고자 하는 겁니다. 그러나 천국에는 선악과 나무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선악과 나무는 폐기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상을 가진 자도 같이 멸망되어야 합니다. ‘내 것은 내가 지킨다’는 원칙은 전형적인 하갈의 원칙입니다. ‘육체에서 발휘되는 원칙’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 땅에 사라는 없습니다. 하갈 뿐입니다. 하갈은 어디에도 있습니다. 

하갈 밖에 없습니다. 하갈의 사회, 하갈의 공동체 뿐입니다. 품위와 학식과 교양과 상식과 전통에 대한 존중과 사회성 있는 배려심이나 양보 정신, 잠잖은 태도, 정의감, 희생정신 모두 하갈의 것들입니다. 하갈 세상은 나름대로 정의와 진리에 대해서 기준을 갖추고 있습니다. 

곧 스스로가 스스로를 평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겁니다. 그들의 자기 위치를 모릅니다. 짝이 없으니 제대로 자신을 평할 자도 없습니다. 사라는 이 땅에 없습니다. 단지 약속을 통해서 등장될 뿐입니다. 그 속에는 다음과 같에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한 일서 5:18) 즉 인간은 육신이 있기에 사라측으로 진입하는 것이 아니라 하갈측으로 진입됩니다. 그리고 하갈이라는 이유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아야 합니다. 

이 버림받는 가운데서 이 땅에 없는 약속이 적용됩니다. 그 원칙은 요한복음 18:9에 나와 있습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요 18:9) 즉 진정한 존재자는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나머지 모든 인간들은 예수님의 뜻을 위한 기능자로 가담됩니다.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따라서 성도는 죄인으로 들어갔다가 나중에 의인으로 나옵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의 사업과 취미로 인하여 복음을 가리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018-06-11 14:40:45조회 : 2         
292강-갈 4장 21-23절(하갈과 사라)180610-이 근호 목사이름 : 오용익 (IP:121.149.39.243)

292강-갈 4장 21-23절(하갈과 사라)18061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4장 21-23절입니다. 신약성경 306페이지입니다. 

갈라디아서 4:21-23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기록된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 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사도바울이 갑자기 아브라함의 두 아내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이유는, 그 전에 사도바울에 대해서 사도라고 처음에 그렇게 환영하다가 사도가 전하는 복음이 감당이 되지를 못해서 웅성거리기 시작한 거예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내 말이 듣기 싫고, 내가 스승으로 생각되지 않거든 가라. 너희 좋은 습성대로 가라. 내가 안 말린다. 너희가 배우고 싶은 거짓 선생에게 가버려라. 내가 말릴 수는 없다. 그러나 너희들이 그렇게 결정하는 것은 결국 너희들이 이미 복음의 원수가 되었다는 사실을 내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너희들이 이 복음 버리고 다른 데로 가는 것을 봐서 십자가의 원수인 것이 점점 더 짙어졌다.”라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리고 왜 그들이 사도바울을 사도라고 여기면서도 그 말 듣기 싫어서 다른 곳으로 갔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사도는 예수님의 계시에 따라서 성경전체를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21절에 “율법 아래 있고자” 율법이라는 것은 구약성경을 이야기하지요. ‘구약성경대로 이야기할게, 아브라함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아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거지요.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이 어떻게 착한지, 바르게 사는지, 훌륭한지, 공부 잘하는 지,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그 아들의 어머니가 중요하다는 거예요. 26절에 보면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어머니를 거론하고 있습니다. 

어머니란 말은 뭐냐? 내가 있기 전에 계신 분. 내가 여기 있기 전에, 다시 말해 내가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죄를 짓고 무엇을 하든지 관계없이 그것으로 내 운명이 결정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사도는 구약성경을 통해서 죽 설명하고자 하는 겁니다.

너희들이 십자가 복음을 떠나서 가버리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너희가 어쩔 수가 없다는 거예요. 이것은 너희들이 결정하거나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너희들 보기에는 너희들이 스스로 결정권을 갖고 있는 인간으로 보이는 거예요.

사도는 말하기를, 인간은 없다는 겁니다. 네가 하갈 자식이냐 사라 자식이냐, 둘 중 하나지 인간은 없다는 거예요. 내가 십자가복음 전하기 전까지는 나도 인간이다, 내 앞가림은 내가 한다, 내 결정은 내가 한다,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진다, 철석같이 다들 그렇게 살아왔어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것은 너희들이 그렇게 생각한 것이 율법, 구약성경을 다시 보자는 말입니다. 보게 되면 인간은 딱 두 종류밖에 없다는 겁니다. 하갈의 자식이냐 그리고 사라의 자식이냐. 그러니까 너희들이 내게 올 때 나 두 종류 중 어느 종류냐, 라는 인식을 가지고 온 게 아니고 ‘나한테 가르쳐주시면 내가 착실하게 배워서 천국 가겠습니다. 왜? 나는 인간이니까.’ 그런 관점으로 사도에게 찾아온 거예요.

자기 미래는 자기하기 나름이라는 겁니다. 자기가 좋은 결정을 하게 되면 천국 가고 나쁜 결정 하면 지옥 간다, 그런 자율성을 가진 인간존재로서 다가왔다는 겁니다. 사도는 그들에게 이렇게 하지요. “너희들은 짝이 없지, 그지?” 짝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 내가 짝이 있어야 돼? 결정은 내가 하고 선택도 내가 하고 내 미래의 모든 계획은 내가 세우는데, 내 인생의 잘잘못은 나에게 책임이 있는데 왜 나에게 짝이 있어야 됩니까?”라고 아마 반문할 겁니다.

사도는 말하기를, 인간은 짝 없이 태어난 적이 없다는 겁니다. 인간에게 짝이 있고 그 짝을 갖춘 채, 청군이나 백군, 짝이지요, 장갑도 양말도 짝이잖아요, 야곱도 에서도 짝인데 짝 없이 인간이 처음부터 출발한 적이 없다. 숫자로 하면 2가 돼요. 영어로 two죠. 2가 없는 1이 없다는 겁니다. 

생명나무와 선악과가 에덴동산 가운데 꽂혀 있어요. 숫자가 2입니다. 2체계를 유지하지 않으면 인간 1이라는 그 체계는 제로가 되어버려요. 흙이 되어 없어지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이 복음 이야기를 듣는 그 당사자들이 어느 출신이냐? 헬라사상 출신들, 이방인들이에요. 성경에 대해서 모르고 또 유대인들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에요.

여기서 사도바울이 하갈이라고 뭐라고 규정했느냐? 23절에 보면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성경전체 중에서 어려운 대목 많지만, 사실은 전부 다지만 그 중에 뚜렷하게 어려운 대목이 이 대목이에요. 왜냐하면 23절에 계집종, 그 기능이 인간이냐 아니냐, 가 아니라 너는 어떤 기능을 해야 된다는 쪽으로 인간을 하나님께서 주시합니다.

어떤 기능이냐? 종이냐 본처냐의 기능인데 종은 어떤 사람이 종이냐?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났다. 종이 되는 요건이 육체를 따라 난 자는 모조리 종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갈이에요. 육체가 있기 때문에. 있음, 있다는 것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종으로 있는 거예요. 

그러면 사라는? 없음이에요. 사라의 태는 아기를 못 낳는 태입니다. 자식 없는 쪽이에요. 그런데 하갈은 자식을 가질 능력을 갖고 있는 여자입니다. 능력이 있어요. 저쪽에는 능력 없어요. 자식 못 낳습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을 볼 때 능력 있는 자로 봐요. 할 수 있는 것은 할 수 있는 자로 봐요. 그래서 모든 인간은 하갈이고 자기 육체의 종이 되는 겁니다.

사도가 하갈과 사라를 짝으로 이루었으니까 ‘아, 우리가 하갈 쪽에 속하네.’ 이렇게 되지만 사도가 아브라함언약, 아브라함 이야기를 빼놓고 이야기해버리면 사람들은 본인을 하갈로 보지 않고 사람으로 봅니다. 굉장히 익숙한 개념이지요. 당신이 누구입니까? 사람입니다. 너는? 사람. 나도 사람. 사람밖에 없어요.

사람 뒤에 달린 것은 뭐냐? 저기 사람이 있네. 세 사람이 가면, 사람이 있네. 항상 뒤에, ‘있음’을 기정사실화 시킵니다. 무엇이 있다. 누가 있다고 보는 거예요. 있다는 것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있을만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겁니다. 그 능력 가지고 뭐할 건데요? 그 능력가지고 천국 가겠다는 겁니다.

사도가 하갈과 사라 이야기를 끄집어내기 전에, 아브라함 언약 끄집어내기 전에 인간들끼리의 동호회, 계모임, 그 장소에서는 전부 다 너 가진 것 내놓고 내가 가진 것 내놓자는 겁니다. 하갈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은 품위, 학식, 교양, 상식, 전통에 대한 존중, 사회성 있는 배려, 양보, 점잖 떠는 것, 정의와 희생, 이런 것 나옵니다. 

이 말은 뭐냐? 하갈은 자체적으로 정의와 진리에 대해서 규정을 지니고 있어요. 진리와 정의롭게, 바르게 살아야 된다. 어떻게? 다들 능력 있잖아. 한 교양 하고, 한 상식 하고, 한 품위 하고, 한 인간성 하고, 점잖고 예의바르고, 남 배려할 줄 알고, 동정할 줄 알고, 이해할 줄 알고, 사랑할 줄 알고. 

짐승이 아니고 인간으로 있다는 것은 그런 정의로운 것, 착한 것, 바른 것, 선한 것, 이런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잖아. 그 능력을 하나님 앞에 발휘하자. 이것이 바로 지옥 가는 종들이에요. 이게 지옥 가는 종들이라니까요. 사도바울이 하갈과 사라 이야기를 끄집어내기 전까지는 교회가 다들 그런 줄 알았어요. 그게 하나님 뜻인 줄 알았어요.

그러나 사도바울입장에서는 그것은 선악이라는 올무에 빠졌다는 겁니다. 선악이 올무가 뭐냐? 선악과, 선악과 아무리 설명해도 도대체 먹혀 들어가지를 않아요. 다시 설명합니다. 선악이라는 것은, 선과 악 사이에 인간이 어떤 원인으로 개입해서 선에서 악으로 변했다는 인식, 이게 선악과지식입니다. 그것 때문에 지옥 가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선이나 악이나 내가 어떤 원인을 제공하게 되면 아무리 선한 것도 악으로 변하고, 악한 것에 내가 원인이 되어서 착하게 바르게 살면 그것이 선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그 인식의 바탕, 그게 바로 선악과구조에요. 

집안이 망했다. 분명히 이것은 뭔가 나쁜 짓 한 것이 있을 것이다. 병이 낫다. 내가 주님에게 충성 안 해서 병이 낫다. 내 아들이 취직이 안 되었다. 분명히 엄마의 업보가 모자라서 그렇다. 사업이 잘 안 된다. 교회 충성 안하고 복음 안 믿어서 그렇다. 

이게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이미 하나님께서 내치고 버리기로 작정한,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 그 안에 푹 잠겨 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면 교회 왜 오느냐? 빌려고 오는 거예요. 순례의 길이라는 것, 지난 목요일에 kbs에서 9시 40분까지 방송된 것이 있어요. 전 세계 종교인들이 스스로 자기를 낮추고 자기를 학대하면서까지 순례의 길, 굶어가면서 자기가 믿는 종교의 신에게 비는 자기 학대의 모습을 죽 보여줘요. 그 결론이 뭐냐 하면, 모든 인간의 종교는 똑같다는 거예요.

그런데 티벳불교의 순례는 뭐냐? 오체투지. 다섯 가지 신체부위를 投(투), 던진다. 어디에? 땅 위에. 이마에 흙이 다 묻어요. 10킬로미터를 가는데 시속 1킬로로 가요. 사흘 만에 갑니다. 안 먹고 가느냐? 먹는 것은 봉사자들이 있어서 간단한 주스 종류를 줍니다. 내 대신 업보 쌓으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프로에서 여섯 살 먹은 애가 엄마를 따라서 오체투지를 해요. 그래서 기자가 물었어요. “어떻게 여섯 살 먹은 애가 이렇게 합니까?” “내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합니다.” 여섯 살 먹은 애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평생에 지은 죄를 용서해 달라고 옷에 흙 다 묻혀 가면서. 물론 옷 아낀다고 어부들이 두르는 앞치마 둘렀어요.

종교라는 것이 그런 거거든요. 집안 꼴이 말이 아닌 것은 내가 죄지어서 그렇다는 거예요. 그게 하갈이에요. 그게 하갈이라고요. 요한 1서 5장 1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 지금 우리는 싸우는데, 내 인생 내가 책임질 수 있느냐 하는 그 문제입니다. 

우리 인생에 우리는 책임질 수가 없어요. 책임 져서도 안 돼요 내가 잘못 행동해서 집안 꼴 이렇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종의 사고방식인 것을 알고 우리는 나에 대한 마지막 전쟁을 벌여야 됩니다. 나는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다. 그것을 받아들어야 됩니다.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아요. 

어떤 사람이 사람을 죽였다. 살인죄지요. 살인하지 말라고 했으니 살인죄입니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 예수님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죽인 것이 살인죄냐 인간이 인간을 죽인 것이 살인죄냐, 이렇게 묻습니다.

너희들이 하나님을 죽여 놓고 너희들이 살인을 거론해? 너희들이 바로 살인자야. 모든 인간의 법률적인 죄의 형성을 무효화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이 직접 죄인의 모습으로서 인간으로부터 그들의 죄를 온몸으로 받아들입니다. 

이를 통해서 인간들이 생각했던 모든 죄는 하늘나라에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죄의 형성마저도 우리가 판단해서 우리가 결정해서 하지를 못해요. 이 말은, 죄사함에 관한 것도 우리가 판단해서 우리가 형성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몫이지 우리가 나서서 이것이 죄사함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하갈을 언급하면서 동시에 하갈을 육체라고 (=) 시켰어요. 종 = 육체. 그러면 육체를 안 가진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다 육체를 가졌는데. 

여기서 사도바울은 없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사라는 약속, 약속. 있는 세상에서의 없음은 없는 겁니다. 따라서 이 세상은 하갈의 세계입니다. 하갈의 공동체에요. 하갈의 사회입니다. 사라는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 인생에 대해서 자기가 책임지고 자기가 잘못했기에 벌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고 다 마찬가지에요. 사라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자기에게 있는 것으로, 자기의 가치관을 있음을 근거로 해서 형성시켜 놓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정의로운 것, 바르게 사는 것,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 예수 믿는다는 것, 전부 다 이것은 내가 여기 주인공으로 있고 내가 예수 믿기 나름이다. 믿는 것도 내가 믿음으로 믿어진다. 내가 원인이 되어서 믿는 나로 인하여 내가 구원받는다. 

그 사상과 사고방식 외에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내가 있으니까 있는 것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 아닙니까? 있는데 없다고 억지를 부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사라의 등장의 취지는 이렇습니다. 약속의 위치와 인간의 위치가 끊어져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사라의 위치에요. 

인간들이 내 힘으로 구원 받겠다, 하는 그것이 이미 그 자체가 끊어진 상태라는 겁니다. 연결되지 않는 상태에요. 있음에서 있음으로 나가니까. 늦게 오신 분 위해 설교 다시 하겠습니다. 설교 다시 하는 경우는 두 경우입니다. 늦게 오신 분이 있을 때와 동영상이 끊어졌을 때. 

처음에 인간들이 사도바울에게 복음을 들었어요. 사람에게 난 것이 아니다. 배운 것이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에게서 난 것이다. 이렇게 하니까 사람들이 배울 것이 있는가 싶어 왔다는 말이죠. 자기들이 누군지는 몰라요. 다 같은 사람으로 본 거예요. 

사람으로 왔는데, 사도바울이 이야기를 하는데 그 이야기가 당최 무슨 이야기인지 못 알아듣는 거예요. 우리가 실행에 옮길만한 이야기를 해 달라. 내가 이렇게 결정해서 이렇게 행했더니만 하나님이 천국에 넣어주더라. 그런 것 제시해 달라는 거예요. 왜? 우리는 그런 마음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그래서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질 테니까.

그런데 다 떠나고 말았어요. 사도바울이, 가라 가. 너희들이 그렇게 원하면 다 가거라. 하지만 너희들은 슬슬 나에게 뭔가 복음의 원수처럼 느껴진다, 라고 하면서 하갈 이야기하고 사라 이야기를 한 거예요. 그들이 모를 리가 있습니까? 유대인들이니 다 알지요. 그것을 십자가 복음에서 달리 해석하는 겁니다.

너희들은 구약을 볼 때 문자로 봤지만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다 행하심을 가지고 구약성경으로 되돌아와서 다시 해석한다는 겁니다. 해석을 하는 순간 제일 먼저 걸려든 것이 뭐냐? 과연 우리가 인간인가? 과연 우리가 인간인가? 인간이라는 것은 인간들이 만들어낸 개념이었습니다. 인간은 없었습니다.

인간보다 언약 관점으로 봐야 돼요. 하나님의 아브라함언약 관점으로 봐야 돼요. 그것은 뭐냐 하면, 인간은 없어요. 하갈이냐 아니면 사라냐? 하갈 쪽이냐 아니면 사라 쪽이냐? 하갈은 임신할 능력이 있어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이름을 바꿨습니다. 이름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만인의 아버지로 만들었어요. 그런데 영광스러운 아버지라, 해도 자식이 있어야지요. 많은 민족의 아버지로 바꿨는데, 문제는 자기 본처 사라가 아기를 못 낳아요. 낳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자기가 수행하려고 했어요. 왜? 아브라함은 있으니까. 자기 아브라함의 정자가 죽지는 않았으니까. 그 다음 남자 쪽에 문제가 없는데 여자 쪽에 문제가 있으니 여자를 임신할 수 있는 여자로 자기 아내 자리에 집어넣은 거예요. 그래서 무사히 자식을 낳은 겁니다. 이게 사단이 난 거예요

창세기 3장 15절에서 하나님께서 약속을 할 때에 남자의 자손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남자의 자손으로 뱀의 자손을 이긴다는 말씀을 안 하시고 왜 남자의 자손이 아니고 여자의 자손이라고 하느냐 그 말이지요. 그것은 남자로서는 숨겨진 진리가 나올 수가 없어요. 남자로서는 남자 스스로 부정할 수 있는 요건을 갖추지를 못했어요.

그 남자와 결혼한 여자를 통해서 있음의 세계가 아니고 없음의 세계에서 약속이 성취된다는 사실은, 없는 자식이 있다고 해놓고 실제로 이 지상 어떤 인간도 그 자식을 낳을만한 능력자가 없을 때 비로소 약속은 이 세상에서 약속답게 도드라지게 드러나기 마련이에요. 

그런데 하갈은 자식을 못 낳는 여자가 아니라 이미 자식을 낳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여자로서 아브라함과 동침해서 자식을 낳았기 때문에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모든 인간은 있다는 이유 때문에, 능력 있다는 이유 때문에, 스스로 인생을 책임져야 된다는 선악적인 사고방식에 입각해서 아직도 선과 악, 원인과 결과를 중간에 끊어지지 않고 내 미래를 내가 알아서 개척한다는 그 사고방식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약속을 가리고 있는 세상인 것을 티내고 폭로시킨 겁니다. 하갈을 통해서.

하갈은 들어오고 난 뒤에 추방되어야 됩니다. 내침을 당해야 돼요. 하갈로 하여금 아브라함과 동침해서 이스마엘이라는 자식을 낳았다는 그 점을 아브라함언약의 성취과정에서 나타낸 것을 우리는 감사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들이 지금 약속을 가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갈은 애굽여자입니다. 그리고 하갈이 자기며느리 볼 때도 애굽 며느리를 봤어요. 애굽나라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 함의 족속입니다. 아브라함이 애굽에 갔을 때 후딱 챙길 것 챙기고 거기서 다시 본토 땅으로 되돌렸습니다. 아브라함이 애굽에 내려갔다가 본토로 되돌리는 이유는 아브라함 후대 4대만에 아브라함의 많은 자손이 일종의 애굽을 적셔야 그 다음부터 약속의 땅답게……, 땅이 있다고 그냥 가는 것이 아니에요. 공간이 있다고 해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약속의 땅에 합치되는 들어갈 만한 백성이기 위해서는 애굽을 거쳐야 돼요. 이 말은 하갈에서 사라 쪽으로 옮기려면 우리가 하갈의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해서 그것이 내침을 당해야 돼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버림받아야 됩니다. 그걸 예수님이 먼저 했잖아요. 십자가 지시면서.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그 코스를 우리에게 먼저 알려줬잖아요. 우리는 왜 그 코스를 거부합니까? 그래놓고 십자가의 길을 간다고 할 수 있어요? 내침을 당한 이유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나의 아름다운 미래는 나 하기 나름이다. 내가 어떤 원인을 제공하느냐에 따라서 결과는 그 때 그 때 달라진다. 내가 바르게 살면 바른 사람 되고 나쁘게 살면 나쁜 사람이 된다. 

하나님 살아계셔서 내 나쁜 짓에 벌주심으로서 내 집안 망한다는 그런 것. 선악적 사고방식이에요. 선악적 사고방식. 선악구조를 갖고 있어요. 여러분, 요한계시록 22장에 보면 선악과는 없습니다. 거기는 생명나무밖에 없어요. 그래서 이 땅은 선악과 파괴하는 땅, 선악과 박멸하는 곳. 선악적 사고방식을 가진 인간은 전부 다 박살내는 그러한 인큐베이터에요. 모든 것은 다 깨어져야 돼요. 그런 동네입니다. 

물로서 작살난 이 땅에 우리는 불로서 작살나게 대기되어 있습니다. 불이라니까 생각나는데 열왕기하 1장에 보면 북쪽 아하시야 왕이 난간에서 넘어져서 다쳤어요. 병고치는데 용하다는 신과 그 민족이 그 근처에 있었습니다. 바알세붑이라는 신에게 가서 내 병이 낫겠습니까, 안 낫겠습니까, 라고 물었어요. 

엘리야가 왕에게 이런 소리를 했어요. 어떻게 이스라엘에는 신이 없어서 그런 멸망할 우상신에게 비느냐, 했거든요. 몸도 아픈 마당에 왕이 화가 났어요. 감히 네가 나에게, 감히 왕을 무시해도 보통 무시하는 것이 아니구나. 엘리야를 그 참에 죽이기 위해서 중대장과 함께 무려 오십명의 군대를 보냅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서 아하시야 왕이 보낸 그 50명이 중대장과 함께 다 죽었어요. 지난 대전강의에서 했거든요. 또 중대장과 함께 50명을 보냈습니다. 다 죽었습니다. 합쳐서 102명이 죽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왕이 뭐라고 했느냐 하면, 네가 왕의 위신도 모르고 감히 나에게, 라고 했지요. 엘리야가 같은 이야기를 해요. "감히 너 같은 왕이, 이 선지자인 나에게 감히! 뭐? 죽이겠다고? 이게 혼쭐이 나야지.' 해서 하나님의 불이 떨어진 거예요. 

엘리사는 대머리였던 모양이에요. 대머리야, 대머리야, 하고 놀리니까 엘리사가, "감히 어떻게 선지자의 용모를 평가하느냐?" 해서 암곰이 나와서 철없이 놀리던 젊은 애들 42명이나 죽었어요. 지금 누가 누구보고 '감히'라는 말을 해야 돼요? 어딜 감히 하갈이 사라보고 그런 소리 합니까?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하갈은 자기 나름대로의 책임, 자기 미래, 평소에 살아왔던 습관, 사고방식이 다 있어요. 내 인생 내가 지키고, 내 가정 내가 지키고, 내 미래 내가 지킨다는 그것이 다 있어요. 그게 하갈이에요. 내거니까, 있음이니까. 어딜 있음을 감히 건드리느냐 그 말 아닙니까? 

'감히'라는 말은 요한복음 18장에도 나옵니다. 요한복음 18장에 예수님께서 잡혔는데 빌라도가 거들먹거립니다. 뭐라고 제안하느냐 하면, "나는 너를 풀어줄 권한도 있고 붙잡아 둘 권한도 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나는 유대인의 왕의 왕이다. 이 땅의 총독이다. 권세는 내가 더 세다." 하니까 36절에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없다는 겁니다. 없어요. 이 약속의 사라의 나라는 이 땅에 없습니다. 예수님 말씀이 맞습니다. 여기 없어요. 하갈적인 사고방식의 사람에게는 없는 거예요. 자기 지키는 것 외에는 아무 관심이 없어요. 복음이요? 감히 내 사업과 내 취미를 복음이 방해한다? 용납이 안 됩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어떻게 내 앞길을 무엇이 막느냐고 대듭니다.

질문이 잘못되었어요. 내 앞길을 누가 막느냐고 질문하면 안돼요. 질문을 이렇게 바꿔야 됩니다. 복음을 누가 막느냐고 질문해야 됩니다. 사업 때문에 교회 안 나오고, 취미생활 한다고 교회 안 나오고. 그 사람들은 지금, 감히 그 딴 복음이 왜 내 앞길을 막아, 이런 조로 나가요. 하갈입니다. 하갈의 티를 내는 거예요. 

그리고 그 동네는, 그 사회는 그게 전부에요. 그들은 그것을 하갈로 보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인간으로 봐요. 그것을 사람으로 봅니다. 너무나 익숙해 졌어요. 내 나라는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다.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설교 처음부터 다시 하겠습니다. 인간은 짝이 없으면 하갈 돼요. 하갈은 혼자 살아가요. 그리고 혼자 평가합니다. 나라는 인간이 어떤 인간인가 혼자서 평가해요. 그 평가 무효입니다. 자기가 문제내고 자기가 풀고, 그런 시험은 하늘나라에서 인정하지 않습니다. 평가가 되려면 내게 속하지 않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다른 짝이 있어야 돼요.

그 짝이 약속이고 그것이 사라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사라 떼 내고 살아요. 사라 없이 살아갑니다. 복음 없이 살아갑니다. 왜? 사람으로 사람구실 해보려고. 남들 앞에 주눅 들지 않는 인생 살아보려고. 안 망해보려고. 교회 오면 뭔가 들을 것이 있는가 싶어서. 자기 주제파악은 안되고, 자기가 하갈인 것은 모르고.

하갈은 추방될 여자입니다. 쫓겨날 여자에요. 내침을 당해야 돼요. 하늘나라에서 안 받아 줍니다. 주님이, 나는 진리를 위해서 왔다고 하니까 빌라도가 무슨 들은 구석은 있어가지고, 진리가 뭐꼬, 라고 묻습니다. 진리가 뭔데? 주님께서 답변을 안했습니다. 

답변 안한 이유가 하나밖에 없어요. "감히 하갈이 사라에게 뭘 물어. 감히, 네 인생 네가 책임진다면서. 네 잘난 맛에 산다면서? 어딜 감히 네가 나에게 진리를 논해?" 왜? 하갈은 나름대로의 자기를 위한 진리체계가 구축되어 있습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이 땅에 사라는 없습니다. 하갈밖에 없어요. 너도 하갈, 나도 하갈. 따라서 여러분이 사람을 만날 때 상대방을 이제는 사람으로 보지 마시고 하갈로 보세요.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 사람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하갈은 사랑할 줄 몰라요. 집착입니다. 내 것에 대한 집착밖에 없어요. 사랑은 전혀 없어요. 

자기에 대한 모든 평가도 다 거짓입니다. 위선이에요. 그러면, 아무도 없으면, 이 땅에 사라가 없으면 구원받는 사람은 없지 아니한가? 없지 아니한가, 라는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어요. 없으면 없는 것이지 왜 그걸 걱정해요? 없으면 천국 안가면 되지 왜 걱정합니까? 지옥 갈 만해서 보내거든요. 그러면 주님의 조치가 적절하잖아요. 그러면 지옥 가시면 되는 거예요.

설교 여기서 끝낼까요? 하갈, 자기 잘난 맛에 살다가 그냥 지옥 가면 돼요. 왜 자꾸 천국을 찾습니까? 찾을 권리도 권한도 없으면서. 그 없음의 세상에 오직 한 분의 있음이 있습니다. 그게 요한복음 18장 9절에 나옵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서 있음은 예수님만 있어요. 예수님만이 사라입니다. 예수님만이 하늘에 속한 사라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전혀 능력이 없어요. 세상에서 능력 없다고 능력 있는 자들로부터 내침을 당한 거예요. 아버지여 어찌하여 버리시나이까. 내침을 당한 겁니다. 이번에는 누가 내칠 차례냐 하면, 하갈들이 사라의 세계에서 내침을 당할 차례입니다.

사도한테 뭐 들을 것이 있다가 가니까, 가라, 가라, 그 자체가 내침이에요. 하갈은 아브라함과 동침해서 자식을 낳았습니다. 그 때부터 하갈이 자기가 본처인척 하고 있어요. 있다, 그거거든요. 뭔가 있다. 난 재주 있다 그 말이지요. 나는 이 모임에 기여한 바가 있다는 그 말이잖아요. 나 아니면 이 모임이 안돌아간다, 이 단체가 안돌아간다 그 말이거든요.

하여튼 교회 봉사하는 사람들 주의해야 돼요. 교회 아무도 봉사 안하니까 마음 놓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봉사해놓고는, 너는 왜 안하나, 이런 거요. 나는 할 능력이 있는데 왜 너는 능력이 없느냐는 거예요. 봉사 집어넣어서 천당 갈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봉사가 원인이 되어서 구원받을 사람 없습니다. 

어차피 하갈인데요. 결국 나 뭐 했다는 것밖에는 안 나와요.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 하갈과 그 자식을 내어 쫓으라고 했어요. 창세기 21장의 그 대목을 보면서 사람들은 의아해 합니다. 내어 쫓아야 되는 여자 같으면 얼마나 불쌍하냐. 처음부터 동침하는 것을 막아야지 동침해서 자식까지 생긴 마당에 왜 내쫓느냐?

성경의 하나님의 언약은 누굴 구원하고 안 구원하고가 아닙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일이 차질 없음을 보여주는 거예요. 누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느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 하갈은 시다바리, 시다, 보조, 하갈은 하나님 일의 보조로 들어가는 겁니다. 

우리 인간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예수 그리스도를 받쳐주는 시다바리, 보조에요. 시다에요, 시다. 꼭 필요한 시다라니까요. 내침을 당하는 시다. 여러분, 하갈은 어디에나 다 있어요.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것. 하갈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안녕하십니까, 하갈. 김 하갈, 최 하갈, 박 하갈, 모든 인간은 하갈이에요. 

악수 하면서 누가 힘이 더 센가, 트럼프가 더 센가, 전부 다 하갈, 트럼프 하갈. 김 정은 하갈, 이 재명 하갈, 남 경필 하갈, 김 부선 하갈. 이 세상에서 자기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서. 김 장로, 박 장로, 최 장로, 교회 마다 집사, 전부 다 하갈이에요. 그거 다 쫓겨나야 됩니다. 안 쫓겨나갈 인간은 없습니다.

쫓겨나갈 때 누가 쫓아내는가? 내가 몰랐던 내 짝이 쫓아낸다고 할 때 그 사람 천국 갑니다. 그 사람이 바로 베드로였습니다. 베드로가 닭 울 때, 베드로가 태어나서 지금껏 하갈인 내가 사라를 가렸다는 사실이 후회되어서 통곡한 거예요. 

단순히 예수님 부인했다는 그것이 문제가 아니고 평생을 예수님 따라 다니면서 하갈적 사고방식 가지고 예수님을 이해한 겁니다. 한 수 배울까 싶어서. 천국 가는 어떤 정보를 얻을까 싶어서. 있음이 더 있음, 더 잘되기 위해서. 천국가기 위해서. 

다시 이야기합니다. 천국에는 선악과 없습니다. 천국에는 선악나무 없습니다. 선악나무가 파괴되어야 한다면 선악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우리도 이 땅에 있을 때 파괴되어야 돼요. 내 인생, 내 죄짓는 것, 여러분, 성도는 죄 지을 수 없습니다. 

죄는 주님이 구성할 때만 죄인이 되는 거예요. 하갈은 아무 것도 언약적의미를 산출할 수가 없습니다. 죄다 아니다 하는 것은 하갈 관점에서 평하는 것은 무효에요. 언약적관점에서 내침을 당한 인간이냐, 아니면 내쳐져서 다시 약속으로, 육체로 죽고 약속으로 다시 부활될 수 있는 인간이냐 하는 그런 관계, 그런 절차, 그런 시다바리는 주님께서 알아서 성도에게 이 땅에서 죄짓게 하십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죄가 아니지요. 죄로 들어가서, 하갈로 들어가서 결과는 뭐냐? 범죄 하지 않는 자로 튀어나옵니다. 이 싸움, 이 싸움 지면 안 됩니다. 여러분, 이 싸움 지면 안돼요. 죄인 맞습니다. 죄인의 괴수 맞아요. 그것은 하갈의 자리로 진입해 들어가야 돼요. 사라자리로 가면 안 됩니다. 육체가 있는 한 우리는 죄의 종이에요.

따라서 하갈 자리에 가서 하갈이 무슨 짓을 했는지 봐야 돼요. 하갈이 평소에 무슨 짓을 했는지 사무엘상 1장에도 나옵니다. 사무엘상 1장에 흔해빠진 유명한 이름 한나가 나오거든요. 딸 낳으면 한나라고 많이 짓잖아요. 한나가 나오는데 하나가 아기를 못 낳아요. 아기를 못 낳는 이것이 그냥 아기를 못 낳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아기 못 낳는 한나, 아기 못 낳는 하갈, 이것이 언약을 구성하기 위해서 반드시 짝이 있어야 돼요. 아들을 이미 낳은 첩이 있었습니다. 2절에 "브닌나는 자식이 있고 한나는 무자하더라." 사무엘상 1장 6절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므로." 언약적의미에서 시다바리인데 아기 못 낳는 시다바리로 한나를 사용했고 옆에 아기 낳는 시다바리로 브닌나가 있는 거예요. 

브닌나는 아기 낳았으니까 한나를 아기 못 낳는 여자라고, 무능한 여자라고 능력 있다는 이유만으로 무능력자를 깔보고 멸시하게 된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그걸 두고 '대적 브닌나' 적이다, 원수 브닌나라고 해요. 있음 자체가 하나님께 원수가 된다는 겁니다. 할 능력을 갖췄다고 보기 때문에 원수가 되는 거예요.

이게 하갈이에요. 그 능력은 육체에서 나오거든요. 육체가 있는 한 이것을 썩힐 수가 없잖아요. 뭔가 솜씨를 발휘하고 싶어한다는 말이지요. 그게 하갈이고 그게 선악적인 사고방식이라니까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으로 원인을 집어넣어서 이 능력껏 보람 있는 결과를 끄집어내겠다는 이것이 하갈이에요.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나에게 원인이 없습니다. 원인 없는 채 구원받은 거예요. 뭘 해도 죄인데 성경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범죄하지 않는 자로 취급해 버립니다. 죄인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의인 되어버렸어요. 어쩔 거예요, 이거? 죄지은 것밖에 없는데 죄를 모아서 그것을 하나님의 의로 전환시키는데요. 주님이 함께 있어서, 십자가 피가 섞여서.

제가 이렇게 하면 어떤 사람은 말할 거예요. 그게 팩트입니까? 그게 사실이라니까요. 이게 왜 사실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느냐 하면, 이 땅 모든 우리가 모인 동네가 하갈밖에 없기 때문에 하갈도 없고 사라도 없어요. 뭐가 있느냐? 사람만 있어요. 저 집은 어떻게 살고, 우리 집은 이렇게 살고, 사람밖에 없어요.

사람밖에 없으니까, 사람이 있으니까, 있으니까 그 능력을 써먹어서 그것으로 자기 자랑하고 그것으로 버티는 거예요. 짝이 없어요. 천상천하유아독존, 자기밖에 없어요. 교회 10년 다니고, 20년 다니고, 모태신앙에, 유아세례에, 백날 하니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제가 지은 죄는 제가 생각하기에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제발 사람들이 이 소식 받아들여서 구원받았으면 좋겠다는 그 욕심. 그게 왜 죄가 되느냐 하면, 요한복음 18장 9절에, 아버지께서 주신 자만 건지는데 나는 욕심이 많아서. 굳이 핑계를 대자면 누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냥 던져 보는 거예요. 욕심인줄 알지만 그냥 던져 보는 거예요.

죄 지은 것이 팩트인데, 사실인데도 불구하고 더 큰 사실, 범죄함이 없다는 그 팩트, 그 사실 앞에 우리는 할 말을 잃어버립니다. 우째 이런 일이. 그게 감사와 고마움으로 이어져야지요. 화낼 문제가 아니에요. 화낸다는 것은 스크래치, 내 것 건드려서 화낸 거예요. 내 인생 건드려서 화난 겁니다. 

하갈이 하갈 건드리니 화가 난 거예요. 육체가 육체를 건드리니까 화가 난 겁니다. 내가 몸이 아픈 것은 죄를 지어서 그렇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것은 마귀가 시킨 거예요. 병든 시다바리 하라고 병든 거예요. 

결론적으로 말해서, 십자가 앞에 넋을 잃고 살아야 합니다. 넋을 놔버려야 돼요. 등신이라 하든지 바보라고 하든지 상관없어요. 주님께서는 기어이 팩트이기 때문에, 사실이기 때문에 기어이 하갈과 그리고 사라쪽을 분리시킵니다. 그리고 사라쪽은 말합니다. 약속 때문에 구원 될수도 없는 우리가 이렇게, 그것도 그냥 죄인이 아니고 의인으로서 전환되어서 구원받았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고마움과 감사거리를 세상에서 꼭 찾아야 되겠어요? 내 뜻대로, 내가 노력한대로 성과를 얻었다고 그게 고마움과 감사의 끝입니까? 진정한 끝이라는 것은 마지막에 나와 상관없이 나에게 주어진 그 십자가의 혜택, 그게 진정한 끝이어야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땅에, 하갈밖에 없는 세상에 사라가 등장했습니다. 물론 존재로는 등장하지 않아요. 기능으로 등장합니다. 나는 이미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것은, "나 이렇게 있는 것 보이냐? 이것은 껍데기야. 이것은 쓰레기야. 쓰레기 보지 말고 이 쓰레기 안에서 뭐가 방출되는지를 보라." 그게 바로 십자가 복음의 대단함, 효과입니다.

용서함으로 평생 다가도록 죄 지었는데 갈 때는 범죄 하지 않는 사람으로 판정내리시고 의인으로 받아들여서, "너는 선악과차원이 아니다. 천국 봤지? 선악과 없지 그지? 이 동네는 선악과 없는 거야. 다시는 선악으로 묻지 아니하고, 책임지우지 아니하고, 저주하지 아니하고, 오직 생명나무의 거저주시는 피의 생명으로 너는 이 땅에 입성했느니라."

그게 우리가 세상에 등장할 마지막 증거의 기능입니다. 고맙고 감사할 밖에 없어요. 죄인 입장에서, 뭘 해도 죄밖에 안 지은 입장에서, 속으로는 죄인이고 바깥으로는 예수님 증거 되니까 이러한 시다, 이러한 보조, 기능을 죽을 때까지 하게 되니 이 어찌 고맙고 감사하지 않을 수 있어요.

걱정이 되어서 한 말씀 더 드립니다만, 우리 입에서 감사와 고마움이 안 나온다는 것은 지금 자기가치 붙들고 있는 중입니다. 이것은 홀로 살겠다는 거예요. 나는 복음이고 뭐고 다 귀찮다. 나 혼자 살다 그냥 죽을래. 여러분 그것조차 하나님의 언약을 위한, 오늘도 얼마나 십자가가 짓밟히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시다바리에요.

교회에서 목사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그 복음을 개무시하는 빌라도와 똑같아요. 복음을 군화발로 밟고 죽고 받는 대화는 교회 이야기입니다. "네 교회 몇 명 나오나. 우리교회 헌금 얼마 나오는데. 앞으로 계획이 뭔데? 앞으로 얼마나 성장할건데?" 

복음 밟을 때는 하갈적인 그런 소리가 나오는 거예요. 자기 뜻대로 안되니까 화나는 겁니다. 화난다는 것은 지금 복음을 밟고 있는 거예요. 예수의 피를 밟고 있는 거예요. 주께서 어디서 구원했는가를 생각 안하고 '감히 나를 건드리다니. 네가?'

그런 인간에게 주님께서는 오히려 얻어맞아 죽었어요. '감히 나에게'하는 소리에 맞아 죽었어요. 눈에 띄지 않는 그 예수님의 그 능력이 이제는 '감히' 하면서 까부는 나와 그것마저 용서하시는 것을 합쳐서 이제는 새로운 언약적사람으로 이 땅에 마음껏 발산해 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멋도 모르고 잘난 맛에 더 잘나기 위해서 교회 나왔습니다. 두 번 다시 남이 감히 나를 안 건드리도록 이제는 대단한 존재로 전환되기 위해서 교회 나왔습니다. 빌기 위해서 나왔습니다. 잘 사귀어놓고 이익 보려고 나왔습니다. 주여 이런 인간에게 맞아죽어서 피 흘리시고 그 피가 도리어 원수를 씻어주는 팩트, 그 사실로 인하여 저희가 의인됨만 자랑하는, 이제는 우리 어머니가 하늘에 있는 사라인 것을 주님을 통해서 자랑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