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해산의 수고(갈4;16-20) 180603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6. 4. 16:29
2018-06-03 12:38:57조회 : 77         
   해산의 수고 180603이름 : 이근호 (IP:119.18.83.168)   

해산의 수고(갈라디아서 4:16-20)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W6GaUqqB2cA, Hit:10
 이근호18-06-03 13:36 
해산하는 수고 

2018년 6월 3일                     본문 말씀: 갈라디아서 4:16-20 

(4:16)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4:17) 저희가 너희를 대하여 열심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내게 하려 함이라 

(4:18)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4: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4:20)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너희를 대하여 의심이 있음이라 

‘갈테면 가라’ 이런 심정으로 사도는 복음을 전합니다. 즉 “그토록 내가 전한 복음이 싫더냐?”라는 겁니다. 당연히 인간들의 심성을 그대로 산다면 복음을 토하고 싶을 정도로 역겨운 것 맞습니다. 왜냐하면 일체 인간들의 모든 행함을 죄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도는 도박하듯이 복음을 전하는 이유는, 복음을 들을 수 있는 바탕마저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2:9-10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여기서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에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즉 성도는 일반인하고 다르다는 겁니다. 어떻게 다른가? 그들만큼은 하나님의 자비, 즉 긍휼을 입었다는 겁니다. ‘긍휼’이란 불쌍히 여김을 받은 것을 뜻입니다. 너희들을 불쌍한 지경에 놓여 있는 자였다는 겁니다. 그런데 ‘과연 너희들이 이 사실을 아느냐’ 하는 겁니다. 

누가 알겠어요? 인간들 속에 ‘악마’라는 괴물이 자리 잡고 있기에 인간은 절대적으로 자신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들은 긍휼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지시와 명령이 필요하다고 자부하는 겁니다. “시키기만 해주세요. 뭐든 할 용의가 되어 있습니다”는 식입니다. 인간들은 구원의 근거를 자기 행함에 최종 두려고 합니다. 

하지만 로마서 3:19에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이 네 주제를 알아야”는 겁니다. 인간에게는 애초부터 구원을 요구할 권리가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야 하는 걸까요? 창세기2장과 3장에 걸쳐, 하나님께서는 잠시 인간이 낙원에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줄곧 ‘낙원에서의 추방의 신세’를 알려주십니다. 이는 인간이 궁극적으로 만나야 될 권세자가 인간 세계를 장악하는 식으로 개입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 자가 악마입니다. 뱀의 후손입니다. 여기서 여자는 아기를 낳으면서 수고하고 고통해야 합니다. 이 産痛(산통)은 저주통(詛呪痛)입니다. 곧 죄로 인해 찾아드는 고통이라는 겁니다. 저주가 고통과 더불어 인생에 삽입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여자의 후손이 만나야 될 ‘뱀의 후손’이 있다는 겁니다. 

즉 인간 구원에 있어 사도 바울이 로마서 3장에서 제시하는 것은 ‘율법 외의 한 의’입니다.(롬 3:21) 이 ‘율법 외의 한 의’를 인간의 결심이나 선택하나 행함으로 취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외부에서 이 ‘의’가 인간의 행함을 비켜나서 도달되어야 하는 겁니다. 인간의 거센 저항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인간 마음 내부까지 침투되어야 하는 겁니다. 

그 방식은 바로 ‘성령의 오심’입니다. 이 성령이 어디에 오시는가? 그 장소는 악마가 자기 정체를 숨기고 마치 없는 것처럼 인간을 배후에서 조종했던 그 장소에 옵니다. 여기서 성령과 악령은 극렬한 전투가 벌어집니다. 그 근거가 마태복음 12:31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즉 예수님께서 성령과 더불어 활동하는 사항은 악마의 현존을 노출시키는 활동입니다. 마치 도둑이 집을 털 때에 바로 세간에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먼저 집 주인을 꽁꽁 묶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마 12:29) 즉 인간들은 이미 인간이 저항할 수 없는 세력자에게 붙잡힌 채 살고 있었던 겁니다. 

이 세력자는 호락호락 인간을 주님에게 내어주지 않습니다. 22:31에 보면, 사단이 베드로를 얻기 위해 이미 수작에 나섰다는 사실을 주님이 아시고 주님의 기도로, 예수님을 배반한 베드로를 다시 살려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임산부로 간주하면서 주님의 백성을 생산하는데 있어 엄청난 수고를 하게 된다고 말입니다. 

이는 기존의 악마로부터의 방해와 저항이 대단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지는 성도는 여기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인류의 역사는 과거를 기본으로 해서 미래에 기대를 거는 식입니다. 아쉽고 손해나는 것에 대하여 미래에 만회하려고 합니다. 

곧 보상을 얻겠다는 겁니다. 이런 대단위의 인류사는 개인사에 그대로 녹아들어가 있습니다. 즉 과거에 기초로 삼아서 미래를 설계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 주는 그 순간, 인간들의 자기 인생이란 끝난 겁니다. 즉 모든 과거는 십자가로 확정났습니다. 인간이 예상하는 모든 미래란 실은 사라져야 될 과거, 없어질 과거, 소실될 과거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성령을 받은 성도는 주님께서 마귀와 벌린 내기판에 들어가 있는 자가 됩니다. 내가란 아직 오직 않은 장래의 상황에 미리 판돈을 거는 형식입니다. 성도의 인식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해서 다음과 같이 바뀌어져야 합니다. “그래, 나는 죄에 져서 십자가에 달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저주와 심판을 받아 마땅해”라고 말입니다. 

성도의 삶이란 본인이 승리하는 삶이 아니라 성도 안에서 꾸준히 새로운 피조물 생산을 성사시키는 주님의 승리를 반영하는 삶입니다. 그렇다면 내기에 져서 내어야 하는 벌칙을 마리 남은 인생을 통해서 지불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3:31에 입각해서 생을 사신 예수님처럼, 성도도 하늘에 속한 존재성을 보여야 합니다. 

그저 평면에서 평면으로 이동하는 삶이 아니라 수직으로 걸쳐있는 별난 삶임을 나타내야 합니다.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요 3:31) 성도의 썩은 몸 안에는 예수님의 형상이 자라나고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지는 자가 이미 승리한 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과거와 더불어 염려와 걱정과 세상 삶의 무게도 같이 사라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8-06-04 16:24 
291강-갈 4장 16-20절(해산의 수고)18060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4장 16-20절입니다. 신약성경 306페이지입니다. 

갈라디아서 4:16-20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저희가 너희를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 내게 하려 함이라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너희를 대하여 의심이 있음이라.” 

사도가 자꾸 의심하고 있습니다. 사람에 대해서 신임을 해야 될 텐데 나오는 모습을 보니 도저히 신앙인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이것은, 사도가 사람들을 끌어 모으겠다는 것이 아니고 가짜가 들어오는 것에 대해서 본인이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겁니다. 가짜냐 진짜냐 하는 것을 사도는 어떻게 구분하느냐 하면, 사도가 목적하고 있고 사도가 지향하고 있는 그것과 마음을 함께 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사도가 주님의 사도로서 하는 일이 있는데 거기에 대해서 전혀 무관심 한다든지 쓸데없는 짓 하고 있네 하는 식으로 나와 버리면 사도 따로 그 인간들 따로가 되는 거지요. 그러면 사도가 열심을 내는 것은 사도본인이 구원받기 위함인가? 그것은 사도가 할 일이 아니지요. 사도는 지금 자기 구원하기 위해서 이러는 게 아니에요.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나의 자녀들아, 이렇게 되어 있어요. 자녀라는 것은 부모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하는 거지요. 나의 자녀들아, 하니까 자녀는 성도가 되겠고 나라는 것은 사도 본인이 되겠습니다. 나의 자녀들아. 나의 성도들아, 그런 뜻이지요.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는 겁니다. 

사도가 하는 일이 사도 본인이 구원받기 위해서, 천당 가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에요. 주님께서 사도에게 어떤 일을 줬는데, 더 정확하게 말해서 사도 안에서 주님께서 일을 하시는데, 그런 뜻이지요. 사도 안에서 주님께서 일을 하는데 어떤 일을 하느냐 하면, 산통을 갖고 있는, 임산부가 아기를 낳을 때 산통을 하면서도 아기 하나 빨리 출산시키려고 애쓰는 식으로 자녀 만들기에 사도가 동원된 겁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너희들이 알아서 네가 구원받지 못한다는 거예요. 사람들은 본인의 본인이 구원받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모든 말씀과 성경책에 대해서 본인이 지킬 의사가 있다는 겁니다. 시켜만 주이소, 이렇게 되는 거예요. 시켜만 주면 그것 지켜서 천국 따낼 테니까 지시와 명령만 해주시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도가 로마서 3장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하나님의 지시에 따르는 것, 율법을 지키는 것,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 지키면 나오는 결과가 뭐냐 하면, 저주받는 자로 들통 나는 것뿐인 겁니다. 구원은 안돼요. 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가면 갈수록 내 행함으로서 구원받을 길이 없음이 더 분명해지도록 주께서는 법을 준 거예요. 

의인은 없나니. 그걸 분명히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법을 주신 거예요. 이것은 인간이 자기주제를 모르는 겁니다. 자기 분수를 모르기 때문에 계속 법을 준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이 사도에게 이렇게 이야기하겠지요. 

우리가 주의 주신 법을 경건하게 지켜서 바르게 살겠다고 하는 것도 실패로 끝난다면 구원은 무슨 근거로 받겠느냐, 하는 것으로 되묻겠지요. 거기에 대해서 사도는 로마서 3장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율법 외에 한 의가 너를 구원한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의로움인데 그 의로움은 인간들이 총력을 다하여 법을 지킨다 할지라도 거기서 나오는 의는 주님께 탈락될 수밖에 없는 의가 된다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서, 모든 율법을 항상 지키지 아니하면 너는 저주 아래 있다는 말과 같은 뜻이에요. 사람들이 교회 나와서 하고자 하는 짓이 뭐냐 하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렇게 저렇게 명령만 하시면 지켜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그 영광 돌렸다는 그 의로움이 비축이 되어서 그것으로 천국에 들어가겠다는 겁니다. 

소위 불교식으로 하면 업보를 쌓는 거지요. 업보를 쌓아서, 선을 쌓아서 누적된, 비축된 마일리지를 가지고 천국에서 합격도 하고 상급도 받고 보너스도 타고, 그렇게 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나 사도는 로마서 3장에서 율법 외에 한 의라고 하는 거예요. 

율법을 줘놓고, 이거 아니거든, 라고 이야기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줘놓고, 그거 지킨다고 구원받는 것 아니거든, 라고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러면 율법 말고 다른 것 주시면 제가 지키겠습니다, 라고 나올 것이 분명하다는 말이지요. 

그게 사도의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겁니다. 율법 외에 다른 것을 줘봐야 그것마저 율법적으로 내가 지켰다, 가 되어버려요. 율법 외에 다른 것을 줬다는 말을 사람들이 뭘로 알고 있느냐 하면, 율법으로는 안 되고 예수 피 믿으면 구원받는다,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그러면 예수 피를 믿으면 내가 구원받는다는 그것도 율법이거든요. 

그것도 율법이라는 말이지요. 우리 안에는 예수님에 대해서 제대로 모르고요, 믿는다는 것도 모르고, 구원도 몰라요. 아는 것이 없으면서 어떤 문장을 외움으로서, '남묘호렌계쿄'라는 어떤 일본의 종교처럼 어떤 문장을 반복해서 외우면 효과가 있다는 겁니다. 예수 피를 내가 믿으면 믿는 나 당사자가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안 믿은 사람은 지옥가고. 

안 믿는 옆 사람은 지옥가고 믿는 나는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주님께서 이야기합니다. 그런 사고방식 가지고는 너도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예수 믿는 것을 하나의 율법의 일부로 간주하는 한 너도 마찬가지예요. 

구원파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도를 아십니까, 구원 받았습니까, 구원 못 받았지요, 예수 피 믿으면 구원 받습니다. 박옥수가 그런 소리 하거든요. 그게 침례교신학이에요. 내가 예수 피 믿으면, 다시 말해서 전에는 율법이 왔지만 지금은 피가 와서 내가 앞에 있는 십자가 피를 믿으면 그 피를 믿었다는 공로로 나는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이것은 히브리서 10장의 말과 완전히 배치가 돼요. 하나님의 활동은, 언약은 우리가 뭔가 앞에 있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고 믿기 전에 내 안에 침투한다는 사실 그것이 새언약입니다. 믿기 전에 이미 침투한 거예요. 들어오는 거예요. 사도가 율법 외에 한 의를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보고 뭘 하라는 것이 아니고요, 성도를 사도 안에서 주님이 만들어낼게, 라는 뜻이에요. 

율법 외에 한 의라는 것은 네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봤는데 끝났다는 겁니다. 이것은 끝난 거예요. 끝난 인간에게 이제는 더 이상 기대할 것은 없잖아요. 그러면 천국 가는 사람, 구원받는 사람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여자가 아기를 임신해서 출산하듯이 주님이 직접 우리 썩은 몸 안에 주님의 몸을 임신시켜서 그것을 기어이 바깥으로 빼내고 배출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피조물을 만들어내겠다, 이것이 주님의 방식이에요. 그렇게 뽑아냈을 때 뽑아내진 당사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율법 외에 한 의입니다, 라는 고백을 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아빠 엄마의 육에서 육이라는 자식이 나오지요. 창세기 3장에서 그것을 허용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허용했다는 그 근거가 창세기 3장 16절에 나옵니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자식을 낳는다고 했거든요. 여자가 자식을 낳아야 돼요. 

왜 자식을 낳아야 되느냐 하면,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그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과 만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뱀의 후손은 악마에요. 악마와 마주쳐서 과연 그 여자가 생산한 자식이 과연 악마마저 이길 수 있는 자식이냐 하는 것을 비교하기 위해서 역사는 진전이 되고 계속해서 역사는 끝날까지 이어져 가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에요. 학교에서 역사만 배웠던 사람에게는 이것은 무슨 생뚱맞은 이야기가 되어버립니다. 역사에 의미가 있다는 겁니다. 역사에 뿌리가 있다는 겁니다. 역사는 그냥 우연이 아니라는 거예요. 

역사에는 계획이 있는데 그 계획은 인간의, 아담의 자식들이 계속해서 나오면서 그 나온 자식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나온 자식들과 그리고 뱀의 후손인 악마와 어떤 연관성이 있느냐를 역사를 통해서 보여줌으로서 창세기 2장과 3장,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것을 따먹었고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던 그 사건을 계속 질질 끌고 가는 거예요. 마지막 때까지. 

과거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지금의 사건으로 보는 겁니다. 창세기 2장, 3장을. 우리는 창세기 2장과 3장이 있으니까 옛날옛날 이야기로 끝나버리지요. 그게 아니고 지금 이야기로 보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의 프로그램이에요. 

인간은 그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태어나야 했고, 우리 속에 작용하는 것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워서 여자의 후손이 이길 때, 비로소 이긴 그 공로로, 그 업적으로, 그 효과로 거기서 만들어진 새로운 신세계 안으로 예수님의 공로를 높이는 성도가 들어가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늘나라는 이미 있는 것이 아니고 만들어져야 되는 거예요. 계속해서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져야 되는 겁니다. 우리가 여기서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주의 일이고 마귀와 관련된, 약속성취와 관련된 존재로서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그냥 아무것도 몰라요. 그저 아프면 아프고 배고프면 배고프다. 그 정도밖에 모릅니다. 그런데 그 정도밖에 모르는 우리에게 우리의 실상, 우리의 존재의 근거, 뿌리, 거기에 대해서 사도가 갈라디아서 4장을 통해서 이렇게 우리한테 편지로 소식을 전해옵니다. 

전해오면서 저희와 너희를 구분해버려요. 오늘 읽었던 16절부터 죽 보면 저희와 너희를 구분합니다. 다 같은 인간인데 저희는 무슨 인간이고 너희는 무슨 인간이냐 하는 겁니다. 사도의 말을 알아듣는 사람은 너희가 되고 사도의 말을 못 알아듣는 사람은 저희가 된다는 겁니다. 이간질을 붙여서 열심 내게 하겠다는 겁니다. 

지금 사도가 이런 투로 자꾸 이야기할 때에 오늘 21세기 한국 땅에 사는 사람들, 우리가 이방인들이거든요, 이방인들 보기에 갈라디아서 4장의 오늘 본문 같은 내용은 진짜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에요. 이게 무슨 이야기인지 몰라요. 우리가 이걸 왜 봐야 되고 우리가 이 소리를 왜 들어야 되는지. 

지금 미국과 북조선이 평화 회담하는 그것이 뉴스거리인데 나의 자녀를 생산하기 위해서 주님이 사도 안에서 해산하는 고통을 유발한다는 이 이야기를 왜 우리가 꼭 이 시간에 알아야 됩니까? 지금 지방선거도 바쁜데. 오늘도 또 시끄러울 거예요. 

평소에 우리의 관심사하고 다르잖아요. 사도가 이런 이야기 하는데 그만한 근거가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보면,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불러낸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불러낼 때 10절에 보면,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자비)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지금 사도베드로도 마찬가지고 사도바울도 마찬가지고 지금 너희와 저희를 구분할 때 사도 편에 선 사람은 어떤 인식을 갖고 있느냐 하면, 이 세상에 하늘에서 오는 하나님이 주신 그 긍휼, 불쌍히 여기심입니다, 불쌍히 여기심과 자비, 이것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너희들에게 이 갈라디아서 4장을 이야기한다는 겁니다. 

네가 받은 자비와 사랑이 어떤 경로를 밟아서, 어떤 누구의 고통과 고생을 통해서 너희에게 무상으로 제공되었는지를 같이 아는 사이 아니냐, 하는 식으로 묻는 거예요. 아는 사이 아니라고? 그러면 남남이지요. 

요한복음 3장 31절에 보면,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김정은이 같은 사람 이런 사람이지요. 땅에 속한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성도는 이 땅에 살면서 땅에 속한 것을 많이 듣습니다. 많이 듣되 땅에 속한 것이라고 그것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사도와 함께 있는 저희가 돼요. 

'아, 저런 것들은 땅에 속한 거야.' 이런 발상,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는 말은 그 사람은 하늘에 속한 사람이에요. 아까 베드로전서 같으면, 어두운데서 불러냄을 당한 사람입니다. 위에서부터 오신다는 말 자체가 이 세상의 땅에 있는 사람들은 격분할 말이에요. 

그래서 임신을 할 때 산통이라는 것이 있는데요. 난 남자라서 모르겠습니다만. 여자가 임신해서 해산할 때 산통이 있는데 그 산통에 대해서 창세기 3장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저주통 이라고 보는 겁니다. 아이 낳을 때 고통이 임한다는 말은 그 고통이 우연이 아니라는 겁니다.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이 지상에 뿌려놓은 거예요. 하나님이 약속의 징후와 징조를 뿌려놓은 겁니다. 여자는 아기 낳아야 되는데 아기 낳을 때 산통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산통은 단순히 생물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위의 것이 따로 있음을 알리는 징후, 징조 같은 겁니다. 

디모데전서 2장 15절에 더 난해한 말을 하고 있어요.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여자는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 나와요. 여자가 아기 낳는 그것마저 하나님의 율법 외에 한 의, 율법 외에 한 사랑으로서 구원한다는 이 법칙에 의해서 여자가 해산하는 고통이 결과물로 주어졌다는 겁니다. 

땅에서 일어나는 일은 하늘에서 하시고자 하는 그 중심 되는 그 일에 파생되어 나온 거예요. 위에서의 하늘의 뜻이 뭐냐고 물을 때 사람들은, 이 땅에 살면서 종교라는 것이 만들어졌지요,, 위엣 것을 자꾸 상상하기 마련이에요. 

그래서 불교에서는 죽음과 삶, 그리고 고통이 있는 이 세상을 차안이라고 하고 그것에서 벗어나서 상상의 세계, 극락의 세계를 피안이라 합니다. 피안에서 피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성경에서는 그것은 하나의 질문에 불과하고 답은 차안에서 답이 얻어져요. 이 땅에서. 그게 바로 십자가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림으로서 내 인생은 끝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나의 인생이라는 것은 끝난 거예요. 이제는 없는 거예요. 십자가에 달림으로서. 그 중심에서 십자가라는 그 안에 모든 피안의 피안이 다 들어 있어요. 하늘의 하늘이 다 들어 있어요. 그 하늘의 사건이 지상에, 위에서부터 오신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신 사건이 십자가사건이거든요. 

그 십자가 안에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하나님의 의가 거기서 생산되고 그리고 그 의를 받아 챙길 하나님의 백성도 그 십자가사건에 의해서 바깥으로 퍼져서 사건으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 해산에 고통이 따릅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인데 내가 해산하는 고통이 있다고 했거든요. 

해산하는데 고통이 있다는 말은 제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게 저주통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 땅에 죄가 있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고통이라는 것을 수반시키는 겁니다. "아프지? 거 봐. 너 죄인이잖아." 

요 근래 내 주변 사람들 아픈 사람이 왜 그리 많은지 모르겠어요. 본인이 죄인이라는 뜻이에요. 결국 인간은 죽을 때 그냥 죽지 않고 아파서 죽어요. 인간이 왜 죽는가? 애당초 죽을 인간이기 때문에 죽는 거예요. 아까워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지요. 십자가사건을 생각해 보세요. 살아 있어도 인간은 진즉에 죽은 존재에요. 

제가 이것은 웃으면서 이야기해야 돼요. 이것은 뻔히 다 아는 이야기를 가지고 새삼스레 하려니 미안해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죽을 몸을 갖고 있다는 말은 걱정과 근심과 삶의 무게도 같이 무의미하다는 거예요. 의미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해산하는 고통이 있다는 것은, 사도에게 고통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이 세상이 주는 반발이 세다는 뜻입니다. 강한 반발이 주어지지요.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뤄놓고 자기백성을 건질 때 어떤 식으로 접근하느냐, 접근방법이에요. 두 번째는 어느 장소에 접근하느냐. 어떻게 접근하느냐? 성령으로 접근하지요. 왜? 이미 육이 하는 모든 것은 율법적인 저주를 유발할 뿐이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행함은 의미가 없습니다. 

인간 쪽에서 하나님께 나가는 것은 의미가 없어요. 제가 아침에 kbs 인간극장을 잠간 보니까 칠갑산에 있는 99세 된 할머니가 절에 가서 빌어요. 제사 올릴 때 한 사람들 단가가 5만원이에요. 여섯 명 제사하면 30만원 줍니다. 아, 절이 저렇게 운영되는구나. 

제사를 집에서 하지 않고 절에 맡기면 두 당 5만원 칩니다. 많이 하면 한 사람 빼주데. 그것을 보고 생각했어요. 교회가 꼭 있을 필요가 뭐가 있느냐 말이지요. 절이나 교회나 똑같은데. 절을 보면서 꼭 교회를 보는 것 같았어요. 구원받겠다는 거예요. 무슨 권리로 구원받습니까? 뭐 했다고? 뭐 했다고 구원을 받아요. 

인간이, 구원해주세요, 할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까? 없어요. 추방할 때 단호하게 추방했어요. 그런데 절에 등을 다는데 부처한테 값이 가까울수록 값이 비싸고요, 저 멀리 아 다니는데 달면 헐해요. 아, 부자들의 등이 부처한테 가깝구나.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들 보기에 부처에 가까운, 그러니까 장소가 중요하다고 보는 거예요. 내 쪽에서 피안, 극락에 갈 때 내가 인식하는 그 공식을 그대로 적용시키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이 성령으로 우리에게 찾아올 때는 예수님의 그 예루살렘에 가까이 할 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있는 데로 가까이 오는 것이 아니에요. 

성령께서 어느 곳이든 관계없이, 바다 속이든, 물속이든, 하늘 위든, 땅 끝이든 관계없이 성령이 찾아오게 되면 그 누구도 주님의 백성으로서 임신이 드디어 시작되는 겁니다. 새아기 만들기가 시작되는 겁니다. 어떻게 오느냐? 성령으로 찾아옵니다. 어디에 오는가? 

내 안에 내가 몰랐던 장소가 있습니다. 악령이 나를 먼저 선점했던 그 자리에 성령이 오기 때문에 인간이 알지 못하는 치열한 전투와 싸움이 내 안에서 벌어지게 됩니다. 주님은 내 아기 만들겠다는 것이고 악마는, 제발 인간 좀 그만 괴롭히라고 이야기하는 것이고. 좀 우리 애 좀 살리자고 이야기하고. 좀 그만 괴롭히라는 거예요. 

악마가 발목을 잡는 거예요. 악마가 발목을 잡을 때는 평소에 인간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그 습성, 버릇과 사고방식 가지고 붙드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기어이 임신시켜서 출산시키겠다는 것이고 악마는 기어이 도중에 출산 못시키겠다고 버티는 것이고. 

제가 지금 지어낸 이야기 같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떠난다니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제가 목숨 바치고 주와 함께 가겠습니다, 하니까 "내가 떠나기 전에 네가 날 세 번 부인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널 위해서 기도했기 때문에 악마가 베드로 네 목숨을 요청, 청구했지만 내가 널 위해서 기도함으로 말미암아 악마에게 널 빼앗기지 않고 너는 무사히 내 사도가 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도대체 인간의 기도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인간의 중보기도가 무슨 소용이 있어요? 소용없어요. 괜히 지가 열불 내는 거고요, 한풀이 하는 것이지 그게 무슨 효과가 있어요. 주님의 기도로 구원받는 거예요. 나의 기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요. 그래서 기도 뒤에 주의 이름을 붙이는 겁니다. 

절에서도 기도 열심히 하잖아요. 정화수 떠놓고. 교회도 기도하지요. 절간인지 교회인지 분간도 안돼요. 갓바위인지. 인간이 할 수 있는 그 모든 기도의 내용이나 시도, 문제는 그 악마가 내 속에 있다는 것을 인간들은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인간들은 자기만 보이니까. 인간이 자기를 보는 그 지점에 대해서 성령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악마와 함께 있다는 것이 비로소 들통 나는 겁니다. 

마태복음 12장 26절부터 31절의 내용이 그 내용이에요.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성령이 하는 그 일이 어떤 일이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앞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도둑이 담 타넘고 들어와서 주인 묶어놓고 세간 거둬간다는 이 말은, 이미 세간인 입장의 인간은 자기 주인에 종속되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도둑이 넘어오면서 비로소 발견되는 거예요. 

위에 계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지 아니하면 인간은 혼자 태어나서 혼자 사는 거예요. 나는 나 혼자 뿐이고 내 곁에 아무도 없고 내안에도 아무도 없고 나는 내 인생 내가 알아서 살아간다. 그게 전부에요. 

그러나 예수님이 오셔서 율법을 줘서, 우리는 율법을 지킨다고 아양 떠는데 네가 율법 지켜봐야 너는 오히려 저주뿐이라는 선고를 내림으로 말미암아, 나는 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하는 모든 일을 망칠 수밖에 없는 괴물이 함께 살고 있었다는 것을 성령을 통해서 그 내막이 밝혀지는 겁니다. 

악마는 자기정체를 드러내지 않아요. 인간의 역사를 주관하는 겁니다. 거대하게 말해서는 인류의 역사고, 사적으로 말하면 나의 역사에요. 역사라는 말은 나의 과거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인간이란 뭐냐? 자기 과거 붙들고 살아가는 겁니다. 과거는 이렇게 했지만 내일은 잘 될 거야.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뜰 거야. 쨍 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 

맨 날 생각하는 것이 내일은 잘될 거라는 겁니다. 과거의 미흡한 것을 미래에서 채우고 보상받고 회복되기를 기대하는 거예요. 어디 와서? 교회 와서. 여러분, 과거 붙들고 살아가는 것은 악령이 그렇게 시켰고요, 거기에 대비해서 십자가사건 속에서 내 인생은 이미 끝장났어요. 우리는 이미 죽은 자에요. 

죽은 자라는 것은 아무리 내 인생의 미래가 남아 있고, 80, 90이 남아 있지만 주님은 그걸 전부 다 십자가 사건 안에 있는 과거로 환원시켜 버립니다. 앞으로 몇 날이 남아 있든 전부 다 과거에요. 다 과거, 과거, 과거, 과거, 없어질 것, 없어질 것, 없어질 거예요. 인간은 없어질 것의 귀신에 말려들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없어지는 것 때문에 지금 자기가 괴로워하고 있는 거예요. 없어지는 것을 참조로 해서, 그것을 참고로 해서, 내 일은 잘 될 거야. 바탕 자체가 과거에요. 주님께서는 과거를 늘 생산하고 그 과거를 늘 없애버립니다. 늘 만들어내고 늘 없애버려요. 

사람이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 전부 다 그 바탕은 뭐냐 하면, 이미 없어졌고 이미 있지도 않은 과거 붙들고 행동하고 말합니다. 걱정 근심 염려가 다 거기서 나와요. 교인 5십명 왔다가 다 떠나고 열 명 남았다. 열 명, 애걔, 이게 뭐냐. 이게 바로 50명이 있었다는 과거를 아직도 붙들고 있는 거예요. 

젊을 때 괜찮았는데 왜 요새 어깨가 아프지? 젊을 때가 아니라 앞으로 더 살아도 없어질 몸이에요. 허깨비에요.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이미 십자가사건을 통해서 없애버린 그것을 마치 실제하는 것처럼 붙들고 살아가는 거예요. 

드라마 거의 안 보는데 얼른 보니 이런 대사가 나와요. "그 여자를 사랑한 내 두 눈을 뽑고 싶습니다." 아주 험악한 말을 했어요. 드라마 제목이 <전생에 웬수들> 끝날 때 거의 다 되었어요. 124회인가 그래요. 

왜 그런 험악한 말을 하느냐 하면, 과거에 시달려서 그런 거예요. 종교가 뭡니까? 과거에 이렇게 고생했으니 천국 가서 보상 얻겠다, 이제 행복하겠다는 거 아닙니까? 무슨 그런 천국이 다 있어요. 그런 천국은 없습니다. 주님은, 나는 너를 뽑아내고 싶다. 

주님께서,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 과거에 집착하도록 배후에서 조종하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주의 성령이 오는 그 위치는, 몰래 자기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인간을 부역자로 다루듯이, 자기의 인형 다루듯이 배후조종했던 그 자리에 성령이 임해버려요.

마귀가 반발해야 되는데 누가 반발하느냐? 인간이 거기에서 나서서 반발해 버립니다. 그 과거집약적인 사고방식이 요한복음 4장에 나옵니다. 거기에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이 나와요.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면서, 네 속에서 영생의 물이 나올 것이라고 하면서 무엇을 건드리느냐 하면, 과거에 네가 남자 다섯 명이 있었다고 건드려요. 그리고 지금 사귀는 남자는 여섯 번째라고 건드려버려요. 

그렇게 건드리니 여자 쪽에서 자기의 본색을 드러냅니다. 평소에 자기가 자기의 서글픈 과거를 보상받을 미래를 어떤 식으로 희망을 가졌는지 그 방정식, 자기공식이 나와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데 어느 장소에 가서 예배드리면 됩니까, 부처 가까이 드리면 됩니까, 멀찍이 드리면 됩니까, 하는 식으로 어떤 자리에서 예배하면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괜찮게 인도하겠습니까, 라고 물어요. 

자기의 본색을 들춰낸 겁니다. 주님께서 갈라디아서 4장을 주신 것은 우리의 본색을, 그 사마리아 여인 들추듯이 우리의 본색을 들춰내는 거예요. 내가 임신시켜서 그 새로운 피조물을 산통이 있더라도 기어이 끄집어내서 율법 외에 의롭게 된 생산물을, 하나의 백성을 성공적으로 만들어내겠다는 그 이야기를 할 때 반대하는 쪽에서 어떤 식으로 반대하느냐를 들통 내기 위해서 이 말씀 주신 겁니다. 

예수님께서 사도 안에서 해산하는 고통을 주시는 이 방식은 요한복음 16장 21절에도 미리 예언하신 게 나와요. 20절부터 보면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리니 세상이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자 이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근심하고 걱정하는 그 절차와 경로를 필이 겪어야 된다는 그 말입니다. 좀 어려운 말을 할 수밖에 없네요. 누구하고 내기를 할 때 보통 뭘 걸고 하잖아요. 벌칙 같은 것을 걸고 한다고요. 

이번에 대한민국이 월드컵 16강에 올라간다는 것 걸고 10만원내기. 올라가면 십만 원 내가 따고 못 올라가면 그쪽이 따고. 보통 내기를 그렇게 하거든요. 성도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주님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내기를 해야 돼요. 그 내기가 뭐냐? 내가 구원받으면 나한테 돈 십만 원 줄래, 이런 내기가 아니고……, 이게 어려운 거예요. 

내기에 졌다고 생각할 때 그 벌칙을 내가 미리 지불해 버리는 겁니다. 내기를 하는데 한국이 월드컵 16강에 올라간다, 못 올라간다, 내기를 할 때 나는 졌다는 편에 먼저 가버려요. 그래서 돈 십만 원을 저쪽에 줘버리는 겁니다. 초조하게 월드컵 기다릴 필요도 없어요. 이미 졌다고 치고 벌칙을 치러버렸으니까. 아무것도 아쉬운 것이 없는 겁니다. 

아직 끝이 되지 않았더라도 이 내기의 끝을 이미 알고 있다는 승자의 마음가짐이에요. 예수님께서 위에서부터 오신 분이잖아요. 이 땅에서 사람들이 내기를 하는 거예요. 저 사람이 메시아 맞다. 아니다. 맞다. 아니다.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내가 메시아가 아닐 때,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을 때, 저주받을 때, 죄인은 저주 받습니다, 저주 받을 때 나무위에 올라가서 저주를 받아버리는 거예요. 

예수님이 나무 위에 올라가서 저주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이미 주님은 내기에 진 사람이 돼요. 참 성경해석이 어렵지요. 욥에 있어서 욥이 잘못한 것은 내기에 안 지려고 한 것이 잘못이에요. 주님에 의해서 욥에게 고난이 왔을 때 친구하고 내기를 합니다. 너는 잘못이 있어서 고난이 왔다. 욥이 하는 말이, 나는 아무 잘못이 없는데 고난이 왔다. 

주님께서 욥에게, 욥 네가 이겼다, 하고 고난을 없애주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고난을 주는 이유는, 욥아, 네 사고방식을 반대로 뜯어고쳐야 된다는 말이지요. 세상을 향하여 이길 필요가 없는 내기를 네가 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욥기 1장에 보면 내기는 욥이 하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마귀와 함께 하늘나라에서 이미 내기를 한 겁니다.
그 내기의 내용을 전개하는 것이 이세상의 모든 인간의 삶이에요. 인간은 그 하늘의 내기의 내막을 모르고 있어요. 사도바울은 알아요. 여러분들이 이 땅을 살면서 얼마나 아프고, 얼마나 실패하고, 얼마나 고통스럽고, 얼마나 인생이 꼴아 박았다 할지라도 여러분은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됩니다, 그런 뜻이에요. 

왜냐하면 이 세상은 주님의 내기판이기 때문에. 누가 승자냐? 자기 몸을, 가져가, 가져가, 줘버려, 줘버려, 마귀 너에게 줄게, 네 마음대로 갖고 놀아, 이게 바로 구원 받은 자고 이게 바로 위에 속한 사람이에요. 

그 표현들을 함축한 것이 임신이라는 거예요. 어느 누구도 인간은 임신하지 않습니다. 임신해봐야 자기 자식만 낳지 자기의 새로운 피조물을 인간은 임신하지 못해요. 썩었기 때문에. 썩은 몸 안에서 임신을 해낸다는 것은 주님의 작품이고 주님의 솜씨입니다. 

시고니 위버라는 여 주인공이 머리 박박 깎고 나온 영화가 있어요. <에일리언> 그 영화 보게 되면 멸균되고 청정해야 될 우주선에 외계인 씨앗이 들어와서 오염이 됩니다. 그래서 외계 씨앗이 여자 주인공 뱃속에 들어가서 임신이 됩니다. 아주 무서운 영화지요. 

그 시리즈가 5까지 나왔어요. 임신을 해서 사람을 잉태한 것이 아니고 출산해서 보니까 꼬마외계인이 기어 나오는 거예요. 흉물스럽지요. 그렇게 우리는 흉물스러워야 되고 괴물스러워야 된다는 그 말이지요. 우리는 이 땅에서 별난 인생을 살아야 돼요. 사람의 눈치 않는,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는 별난 인생을 살아야 돼요. 

남들은 트럼프하고 김정은 회담하는 거기에 신경 쓰라고 해요. 우리는 내 안에 지금 누가 임신해서 있어요. 누가 이 말을 알아듣겠습니까? 미친 거 아니야? 그러면 미치지도 않고 교회 나왔어요? 그러면 등이나 다세요. 등이나 달고 교회 가서 꽃꽂이나 하세요. 

평면적인 것은요, 교회 가고 절에 가고 그저 이동이나 하면 돼요. 수직적인 것은요, 성령으로 임신이 안 되면 수직이 안돼요. 기껏 흉내 내는 것이 뭐냐? 이교회 갔다가 저 교회 갔다가. 집에 갔다가 교회 갔다가. 5개월 만에 나왔다가 6개월 만에 나왔다가. 헌금 좀 했다가. 이게 뭐예요. 칠갑산에 살다가 절에 갔다가. 등 달고 제사 드리고, 3십 만원 내고 하나는 덤으로 해주고. 

그것은 옆에서 옆 동네로 옮기는 거예요. 그 자체가 악마가 시킨 거예요. 인생은 너 하기 나름이다. 천당 가는 것은 너 하기 나름이다. 끝. 네가 무엇을 행함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보상해준다. 악마에게 익히 습득된 것이 그것이고 그걸 교회에서 이야기해주니까, 앞자리에 앉으면 은혜 받는다, 귀한 목사님이다, 귀한 목사님은 무슨……. 

여러분, 무당 되어야 됩니다. 신들려야 돼요. 지금 사도바울은 신들려 있어요. 임신했다는 거예요. 미친 거 아니에요? 차라리 그 소리 하지 말고, 내 임신했는데 해산한다고 고통스럽다, 이러지 말고 차라리 우리보고 뭘 시키세요. 우리는 시키는 대로 잘 하잖아요. 십일조 하라면 십일조 하고. 물론 우리교회는 관계없습니다만. 뭐 하라고 하면 잘하거든요. 

잘 해서 다 같이 지옥가면 돼요. 잘 해서, 시키는 대로 다 해서, 목사가 시키는 대로 다 해서 지옥가면 돼요. 피안의 세계로 가세요. 지옥이 기다리는데 거기가 피안의 세계입니다. 피안의 피안의 세계는 저 하늘나라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지상의 십자가사건으로 주어졌어요. 모든 프로그램은 십자가에서 나옵니다. 

그 십자가 앞에서 이미 우리 인생은 끝장났어요. 우리의 모든 과거, 우리의 앞으로 남은 미래, 현재마저 내일 되면 과거로 다 사라질 거예요. 우리는 허깨비 붙들고 살았다는 뜻입니다. 내 놓을 것도 없는 사라질 것은 가지고 두 손에 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도 다 지나간 과거인데, 우리의 전도, 헌금, 열심 다 과거지사, 모래알 같은 거예요. 

백날 해 봐야 손가락 사이로 내일 되면 다 빠져요. 10년 뒤에 살아봤자 그것도 과거에요. 그리고 마지막 죽을 때 살아온 인생이 전부 다 과거입니다. 그 과거는 십자가 사건 안에서 과거로 확정 난 내 인생이었습니다. 우리는 없어질 거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이 땅에 잠시 내 이름을 걸고 이 땅에 태어난 거예요. 

이런 썩을 몸에 그리스도의 형상, 그리스도의 몸이 우리 안에서 자라나고 이것을 위해서 바깥에서 말씀과 십자가 복음을 계속 이야기하는 거예요. "손 떼라. 너에게서 손 떼라. 미래는 네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십자가 안에 있는 과거 현재 미래, 그 주님의 미래가 너의 미래가 된다."는 겁니다. 

사명을 받아요? 사명 아닙니다. 운명입니다. 사명 감당하지 마세요. 우리 자체가 운명이에요. 어쩔 수 없어요. 매일같이 경험하는 것은, 과거는 손가락 사이로 빠져버리고 우리를 제로로 만드는 그 작업, 그것과 동시에 미래에 대한 쌓였던 염려와 걱정과 그 모든 것은 다 부질없는 거예요. 

그리고 감당해야 됩니다. 이러한 주님의 작용에 우리 속에 있는 괴물이, 악마가 가만 있겠습니까? 마구 쥐어뜯고 괴롭혀요. "아무것도 안하고 무슨 천당을 가느냐, 이놈아!" 계속해서 우리보고 뭘 행하기를 요구하는 겁니다. "네가 행하면 너 때만 잘되는 것이 아니라 네가 잘한 것이 업보가 되고 네 자식들에게 흘러넘쳐서 3대 4대째 복을 받는 거야. 너는 모태신앙이 되어서 애들까지 복을 받는 거야." 

이걸 누가 가르쳐서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그러고 싶어요. 내가 그러고 싶어요. 나의 고통과 고난은 보험처럼 있다가 내 자식이 교회 안 나오고 게으름을 부릴 때 내가 충성한 그 헌금의 복, 마일리지가 자식들에게 옵션으로 주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내가 더 열심히 해야 자식들이 복을 받지.' 이게 절인지, 갓바위인지, 교회인지, 구분도 안돼요. 

제가 울산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늘 고맙고 감사 안하거든 죽어버리라고. 늘 고맙고 감사 안하는 것은 살아도 소용없는 거예요. 죽어버려라. 여러분의 뱃속을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똥배밖에 안 보이겠지만. 

여러분 뱃속에 주님의 형상이 자라고 있습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뒤늦게 결혼하는 사람도 있어요. 우리 장로님 오늘 결혼식에 가시는데 그 신랑이 나이가 60이랍니다. 그 소리 듣고 기가차서. 뭐가 자랑거리라고 조용하게 살지. 60인데 결혼식한다고 온 친지 다 모았대요. 옛날에 좀 놀던 사람이라던데 놀던 동생들 다 모은 모양이라. 

세상은 관심이 그런데 있습니다. 60대 결혼했다. 결혼 못한 과거를 이제는 새신랑 되어서 보상받으려고. 내 힘으로 어두운 과거에서 새로운 미래를 개척하겠다고. 평면적인, 1차원적인 삶에 불과해요. 

베드로전서 말씀처럼 우리는 이미 어두움에서 부름을 받은 자에요. 빨리 출산해. 부름을 받은 자고 요한복음 3장에서 위에 있는 이야기를 알아듣는 사람이에요. 위에서 하신 이야기를. 땅의 사람들은 못 들어요. 

남 눈치 보지 말고 그야말로 신들렸다 하는 소리를 듣더라도 다른 인생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참 종교도 많고, 교회도 많고, 다 소비층을 만족시키기 위한 하나의 업소라는 것을 갈수록 느낍니다. 주여, 우리 자신이 이미 죽은 자며 살아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고 주께서 새피조물 되도록 그냥 맡기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