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

다른공간 180525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5. 27. 21:25
2018-05-26 00:13:46조회 : 128         
다른 공간 180525이름 : 이근호 (IP:119.18.83.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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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 (IP:122.♡.178.64)18-05-27 18:57 

광주강의20180525a 마가복음12장 13-17절(다른 공간)-이 근호 목사 

  

마가복음 12장 13-17절입니다. 

  

13절, 저희가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매 

14절,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15절,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한대 예수께서 그 외식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하시니 

16절,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화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17절,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저희가 예수께 대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더라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게 누가 이야기한 것이냐,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이렇게 이야기를 한 거예요. 그 사람들이 이야기한 내용이 거짓이죠. 왜 거짓이냐 하면, “참되십니다.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그야말로 순수하십니다.”라고 한 것은, 그들이 이미 참과 거짓을 구분하고 있고, 순수와 비순수를 나름대로 분간하고 있잖아요. 그렇게 분간하는 그런 자세로서 예수님을 판정한 그 자체가 잘못된 기준을 적용시킨 겁니다. 

  

그래서 이런 평가를 예수님한테 한다는 것은, 결국은 뭐냐 하면 자기 자신의 그 한계를 감추고 있는 수작이 되는 겁니다. 남한테 칭찬함으로서, “우리 같은 편이잖아요. 우리가 같은 레벨이지 않습니까?”라고, 같이 붙어서 그냥 어물쩍 넘어가려고 하는 수법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는 말이 뭐냐 하면, 이렇게 해요. 14절 끝에 보면,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15절,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한대 예수께서 그 외식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하시니” 이래 되어 있죠. 

  

지금 바리새인이 묻는 것이 무엇을 이야기하느냐 하면,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이래 물었거든요. 바친다는 것은 낸다는 말입니다. 내가 어떤 누구한테 돈을 지불한다는 그런 뜻이죠.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라는 것을 예수님한테 질문을 한 거예요. 자기가 내면 되는데, 구태여 예수님을 끌어 들이는 거예요. 예수님을 한껏 높여놓고 끌고 가는 겁니다. 

  

그럼 낸다는 것은 본인이 내는 거죠. 본인이. 본인이 내는 겁니다. 본인이 어떤 행위를 하는 겁니다. 행위를 할 때, 가이사에게 내는 것이 참된 일입니까? 아니면 거짓된 일, 해서는 안 되는 일, 안 해야 되는 일입니까? 라고 물은 거예요. 사실은 가이사는 그냥 가만히 있는 사람인데, 바리새인이 자기 잘남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끌어들여 온 거예요. 

  

그 당시의 가이사는 티베리우스라고 하는 이 황제가 있던 시절입니다. 티베리우스 그 다음 황제가 폭군으로 유명한 칼리굴라, 그 다음 밑에 사람이 네로입니다. 네로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그 배경입니다. 티베리우스 선조 되는 황제가 옥타비아누스인데, 이 사람은 아우구스투스라고 불려요. 아우구스투스라는 뜻은 ‘지극히 존귀한 자’라고 로마 원로원에서 칭해준 것입니다. 

  

로마는 공화정이에요. 공화정이라는 것은 원로가 있어요. 원로, 또는 장로들이에요. 원로원들이 있고, 1년 계약직으로 집정관이 있어요. 라틴어로 콘술이라고 합니다. 집정관과 원로원만이 하는 것이 아니고, 일반 민회의 대표, 요새 국회의원들인데, 그 사람들이 대표해서 같이 정치를 하는 겁니다. 1년 계약직인데, 이걸 종신직으로 했던 사람이 최초로 가이사라에요. 영어로 시저라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14절의 이 가이사는 여기 있는 가이사라(카이사르)를 본 따서 그렇게 지은 거예요. 가이사. 시저. 따라서 붙인 겁니다. 최고 집정관, 이 사람 대에 와서 1년 집정관이 아니라 영구적인 집정관이 처음으로 되는 겁니다. 이 사람 다음에 안토니우스인데,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의 유명한 여왕 클레오파트라하고 연애한 사람이에요. 그 당시의 이집트는 세력이 굉장히 약했어요. 약해가지고 로마한테 잘 보이기 위해서 곡물과 세금을 바치면서 겨우겨우 목숨을 유지하는 나라가 이집트였습니다. 

  

이태리 있고, 그리스, 터키, 유대나라, 지중해있고. 이집트가 이태리의 통치를 받았어요. 클레오파트라의 남동생이 있었는데 쫓아내버리고 여왕인 자기가 통치하겠다고, 힘 좀 빌려달라고 가이사한테 선물을 준다고 했는데, 그 선물이 뭐냐 하면 자기 몸을 선물로 준 거예요. “나 여기 있습니다. 선물 가져왔습니다. 내가 선물이죠.” 마치 요즘 세대처럼 “생일선물 여기!” 하면서 자기 얼굴을 들이미는 것처럼. 가이사라는 보기보다 별로 얼굴이 안 좋다고 생각을 했는데, 안토니우스는 그 반대로 “세상에! 저런 절세미인이 있다니!”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가이사라(카이사르, 시저)가 B.C.44년 부루투스에 의해서 암살되고 난 뒤에는 그 휘하에 있었던 안토니우스가 됐는데, 그 후에 완전히 연애에 빠지고 말았어요. 클레오파트라한테 로마영토 자체를 넘겨주고 말았어요. 그러니까 이 원로원들이 가만두지 않고 들고 일어난 거예요. “이게 여자한테 빠져가지고 나라까지 다 팔아먹을 참이냐?”이래가지고, 그때 등장한 사람이 옥타비아누스라는 양자입니다. 가이사라 시저의 조카인데, 양자된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하고 클레오파트라하고 해전을 벌였는데, 그 해전이 유명한 악티움해전입니다. 거기서 대승리를 하고, 유대나라까지 옥타비아누스가 다 지배를 하죠. 그 옥타비아누스를 너무 훌륭하다 해서 황제라는 이름, 아우구스투스라고 칭해준 것입니다. 

  

그 다음에 나온 황제가 티베리우스인데, 이 티베리우스는 뭐로 유명 하느냐 하면 갈릴리 바다를 ‘디베랴’라고 하잖아요. 이 황제의 이름을 따서 ‘디베랴바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칼리굴라인데 정신병자죠. 네로도 마찬가지고. DNA가 어떻게 된 건지, 전부 다 이상한 사람들이 왕이 됐는데. 그 티베리우스 시대에 동전을 보면, 앞면에 ‘지극히 거룩한 가이사의 아들 티베리우스’라고 적혀있고, 뒤에는 대제사장의 이름이 적혀있어요. 

  

그러니까 앞면에는 ‘존엄한 아우구스투스의 아들인 티베리우스 케사르, 즉 아우구스투스(TI CAESAR DIVI AUG F AUGSTUS)’라는 글이 있었고, 그리고 뒷면에는 종려가지를 쥐고 앉아 있는 평화의 여신이자 황제의 어머니인 ‘리비아(Livia)’의 형상과 ‘최고의 제사장(PONTIFEX MAXIMUS)’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그렇게 동전이 통용되면서 자기 이름을 드러내고, 그 이름을 드러낸다는 것은 이 유대나라가 지배받는다는 그런 뜻입니다. 

  

자, 그런데 그때 동전을 낸 이유가 뭐냐 하면, 로마에 인두세라는 것이 있어서 유대나라의 20세 이상의 남자는 전부 다 세금을 로마에 바치게 되어 있습니다. 전에는 그런 제도가 없었는데 티베리우스가 황제가 되고 난 뒤에 그런 제도가 생겨가지고 바리새인이나 이런 사람들이 굉장히 자존심 상하고 있었던 거예요. 어떤 분노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분노하는데, 예수 당신은 우리처럼 분노를 느끼지 않습니까?” 라고 시험을 한 거예요. “당신이 정말 우리 유대나라를 생각한다면, 로마의 압제에 있다는 이 서러움을 다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데, 우리의 서러움에 당신도 같은 생각으로 있지 않습니까?” 라고 시험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부추기기 위해서 온 거예요. “예수님 당신은 참되시고, 훌륭하시고, 모든 것에 실수가 없이, 모든 것에 완벽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는데,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는데, 그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는 당신에게 묻노니,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바치지 않는 것이 옳습니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이 뭐냐 하면 바치는데 강조점을 둔 거예요. 바치는데. 뭔가 바친다는 것. 그러면 세금의 주도권이, 실은 세금을 내라고 강요하는 쪽이 세금의 주도권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렇죠? 자기에게 세금을 내라고 명령이 왔으니까 세금을 내잖아요. 그러면 누가 갑이에요? 로마가 갑인 거예요. 로마가 갑이고, 세금을 내는 것은 즐겨내는 것이 아니고, 내라고 하니까, 안 내면 안 되니까, 갖다 바친 거라 이 말이죠. 

  

그럼 갖다 바쳤으면, 어떤 식으로 갖다 바쳤든 간에, 이미 갖다 바친 것 자체에 기분은 뭐 좋지 않지만, 이미 종속되고 지배받는다는 것을 그대로 다 보여준 거예요. 사업하는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하잖아요. 나라에서 세금을 많이 내라고 해서 공장 못 하겠다고, 사업 못 하겠다고, 그런 이야기들 하잖아요. 모든 관점이 내가 낸다는 것, 자기가 세금을 냄으로써 나는 정당하다는,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서 세금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세금을, 대통령한테 맛있는 밥 사먹으라고 세금을 냅니까? 세금을 잘 쓰면 되잖아요. 잘 쓰면 되죠. “물세를 낼까요? 말까요?” 자기가 지금 물 쓰고 있잖아요. 물 쓰면 세금 내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자, 나라에서 세금을 거둔다고 할 때, 세금을 어디에다 쓰는 겁니까? 공공사업하기 위해서 많이 쓰죠. 공공사업하기 위해서. 요즘 같으면 아스팔트 다 깔고 국가기관사업도 그렇게 해야 되고. 현대에 와서 세금은 국가의 간접산업, 도로라든지, 여러 가지 항만시설 그런 것도 필요하고. 그리고 대외적으로 군대를 양성하는 데에도 필요하고. 

  

요즘은 뭐냐 하면 취약계층에 대한 돌봄의 차원에서 돈이 또 쓰여 져요. 취약계층. 취업을 할 때는 또 재교육을 해야 되잖아요. 노동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여건을 발굴하는데 또 써야 됩니다. 이걸 평생교육이라고 하는데, 소위 복지정책 가운데 평생교육이 포함이 돼요.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노동형편, 여건의 경향에 안 맞고 뒤떨어지는 기술자 같으면, 이 사람으로 하여금 새로운 노동생산성을 위해서 필요한 기술을, 나랏돈을 집어넣어 차비 줘가면서 교육을 시켜가지고 경쟁력이 있는 노동생산성을 얻기 위해서 여기에도 필요하고. 또 취약계층이라고 하는 것은 부모가 없어서 밥 못 먹을 때 애들 도시락도 주고. 

  

그리고 또 뭐가 필요 하느냐, 건강보험이죠. 어려운 사람이 자기 돈으로 치료가 안 될 때는 치료비를 보조해준다든지. 그리고 개인이 나이 들어 치매나 병든 부모를 집에서 돌보지 못할 때는 요양시설에 가는 모든 비용을 나라에서 다 대주고 하는 그런 것도 있고. 여러 가지 많이 쓰잖아요. 그러면 세금을 이렇게 잘 쓰니까, “내가 이렇게 한 국민으로서 세금을 내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이래 나와야 되는데. 질문 자체가 뭐냐 하면, “낼까요? 말까요?” 이렇게 해서 마치 세금을 안 내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한 도리인 것처럼, 그런 뉘앙스를 주는 거예요. 그렇죠. 

  

세금내가지고 로마황제가 맛있는 거 사먹는 것이 아니고, 모든 건설, 나라에서 벌이는 공공건설은요, 이게 직장에서 쫓겨난 실업자들을 투입하는 겁니다. 심지어 20세기 중반 1차, 2차 전쟁이 일어나고 난 뒤에는 공공사업에 투자되는 인부들이 많아가지고 개인기업체에서 일꾼 한명 구하기가 힘들 정도에요. 

  

그리고 미국에서 경제공황 일어나고 난 뒤에 ‘케인즈이론’이라고 해가지고 댐 지을 때 나랏돈 풀어서 노동자에게 임금을 줬고, 그들은 그 돈 가지고 소비를 했겠죠. 그러면 전체적으로 경제적인 소비활성화가 일어나는 겁니다. 그러면 기업도 소비자가 물건들을 사니까 계속해서 생산설비를 늘리게 되면 거기서 또 고용창출이 일어나게 되고. 그런 거예요. 그래서 세금이라는 것은 누가 착복을 하는 것이 아니고, 나라를 위해서 좋은 데 쓰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바리새인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우리가 로마 나라에 세금을 바쳐서 기여하면 기여할수록 그들은 힘이 더 강대해져서 누구를 압제하느냐 하면, 지금 하나님을 믿는 우리 유대나라를 더욱더 압제할 수 있는 힘을 키우는 셈이 되는 거니까, 우리를 더욱 확실하게 밟아달라고 하는 차원에서 그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돈을 지불하게 되면 우리 유대나라의 해방은 언제 오느냐? 이 말이죠. 점점 이거 불가능해지잖아? 이러는 겁니다. 

  

그러면 왜 로마의 압제를 받으면 안 되는 거죠? 그것은 유대나라는 하나님의 나라기 때문에 하나님이 직접 우리를 통치해야 되지, 로마가 통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내리이까? 말리이까? 할 때에, 그들이 놓친 것이 있죠. 그들의 놓친 것을 예수님께서 끄집어서 이야기를 합니다. 

  

그들이 질문하면서 놓친 것이 있어요. 뭐냐 하면, 하나님께 바칠 때는 이렇게 구시렁구시렁 할 리가 없다 이 말이죠. 이 바리새인들이 하나님께 바칠 때는.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다스림을 받기 때문에, 하나님께 성전세를 낸다든지, 이거 할 때는 내리이까? 말리이까? 그런 소리를 안 한다 이 말이죠. 

  

질문의 요지가 그거에요. 우리 유대나라는 로마를 완전히 적대나라로 분리를 시키는데, 예수 당신은 여기에 동의하십니까? 라고 묻는 겁니다. 분리를 시키는 거예요. 분리를 시켜서 로마가 우리 유대나라를 지배하는 것은, 이것은 정상적이지 않다는 겁니다. 비정상적이고, 우리 유대나라는 하나님이 직접 다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직접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제사장에 의해서 다스림 받아야 한다는 거예요. 아까 동전이야기 할 때에 뒷면에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대제사장 가야바의 이름이 있고요. 앞면에는 그 당시의 통치자 티베리우스로 한 거예요. 

  

그러니까 로마가 그 당시 유대나라의 전통적인 종교에 대해서는 인정을 한 겁니다. 정신적인 면에서 너희가 하나 되어 사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터치하지 않겠다. 하지만 실효적인 지배는 우리가 지배하기 때문에 세금은 내라. 세금을 내야 통치하고 있다는 그 실효성이 실제적이잖아요. 독도는 누구 땅? 독도는 지금 우리나라 경찰이 지키고 있잖아요. 실효적인 지배를 하고 있잖아요. 이런 상황을 유대인들은 이것이 정상적이지 않고 옳지 않다는 거예요. 우리 유대나라는 이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예수 당신의 생각은 우리와 같습니까? 라고 질문을 한 겁니다. 

  

자, 그렇다면 그들은 나름대로 로마한테 세금을 내지 않는 세금을 자체적으로 거뒀는데, 그게 뭐냐 하면 성전세입니다. 성전세를 거두어서 자기들의 정체성, 자기들의 본질에 대해서는 꾸준히,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성전에서 제사 드리고 섬기자는 그 취지는 계속 지금 유지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뭐냐 하면 그들의 문제성이 있는 질문 자체에 도로 그들에게 해답을 주신 것이 아니고, 너희들의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식으로 되받아서 질문을 해버려요. 되받아 질문을 한다고요. 

  

그 답변이 뭐였습니까? 동전을 가지고 오라고 했죠. 돈을 가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낸다는 것은 돈을 가지고 오는 것이니까, 돈 가져오라고 한 것입니다. 이 돈에 누구의 형상이 있느냐? 이렇게 물어요. 16절,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화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17절,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저희가 예수께 대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더라” 이래 되어 있어요. 

  

예수님께서 도로 답변을 했다는 것은, 너희들이 하는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립이 안 된다는 것을 알려 줄 때에 그들이 도로 가져가는 거예요. 보통 면사무소에 서류를 냈을 때 다시 반송시키는 이유가 뭡니까? 서류가 문제가 있을 때는 다시 작성해서 오라고 돌려보내잖아요. 질문을 다시 돌려보내는 겁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지금 해야 될 것이 여기서 나타났습니다. 이들의 질문이 뭐가 문제냐 하는 겁니다. 질문이 뭐가 문제냐? 그걸 찾아내지 못하면 오늘 본문 해석은 완전히 성립이 안 돼요. 그들의 질문 자체가 뭐가 문제냐 하면은, 여러 번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본인은 문제가 없다.”라고 하는 것이 그들의 출발점이 돼요. “우리는 문제가 없다. 우리는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다.” 그렇게 하는 겁니다. 

  

본인이 문제가 없다는 말은, 지금 이 상황이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라면 문제가 어디에 있다는 말입니까? 문제가 지배자 가이사에게 있죠. 티베리우스 황제. 문제가 거기에 있다는 거예요. 자기한테는 문제가 없고 가이사에게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세금 달라고 하는 가이사한테 따져야지, 예수님이 세금 달라고 했습니까? 아니, 예수님이 세금 달라고 했냐고요? “그거 가이사한테 줘야지.” 이랬습니까? 그러니까 누구한테 얻어맞고 와서는 화풀이는 지금 예수님한테 화풀이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그렇게 만만하니?” 

  

세금 내라고 하는 사람이 공격대상일 것 같으면 그쪽에서 따져야지, 그걸 왜 예수님한테 따지냐 이 말이죠. “당신이 우리한테 세금 내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렇게 세금 내라고 한 사람한테 따져야지, 예수님께서 세금 내라고 했습니까? 왜 예수님한테 따집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따지려면 그쪽에 가서 따지라고, 문제를 다시 돌려보내는 겁니다. 왜 나한테 따지느냐 이 말이죠. 

  

그리고 그들이 이렇게 질문을 하는 의도가 뭐냐 하면은, “우리는 하나님 믿는 사람이지, 세상 로마를 섬기는 사람들이 아니다.”라고, 그런 식으로 생각했잖아요. 그러면 그 불만과 그 답답함은 누구한테 따져야 합니까? 이거는 누구한테 따져야 합니까? 하나님한테 따져야 되죠. 전혀 예수님한테 따져야 할 사항이 아니라니까요. 너희들이 그렇게 좋아하고 그렇게 잘 섬긴다는,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을 그렇게 잘 섬긴다면, 하나님이 이뻐서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줄 거라 이 말이죠. 

  

그렇게 평소에 하나님한테 잘했다면,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 잘 아시죠? 우리가 난처한 지경에 왔는데 하나님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하나님한테 따져야지, 왜 나한테 따지려 왔느냐 이 말이죠. 그들이 뭐 예수님 섬기고 싶어서 환장했습니까? “오! 우리의 하나님이여, 이 문제 어떻습니까?” 이런 자세로 온 거예요? 아니잖아요. 

  

예수님을 이 땅에 오신 하나님으로 인정을 안 했잖아요. 문제의 갈등과 모든 것은 전혀 예수님과 무관한 거예요. 하나님한테 따지고 싶은 것은 하나님한테 따지고, 로마한테 따지고 싶은 것은 로마한테 따져라. 왜 나한테 따지느냐고 하시면서 질문을 다시 돌려보내는 겁니다. 지금 문제해결이 너무 간단하죠. 

  

자, 그 다음에 봅시다. 그러면 그들은 하나님 섬기는 것과 로마를 섬기는 것을 병행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왜 했느냐? 그것도 문제에요. 왜, 예수님처럼 가이사에게 바칠 것은 바치고 하나님께 바칠 것은 바치는, 왜 이렇게 따로 되는 것이 자기들에게는 비정상적이라고 여기는 이유가 뭐냐는 겁니다. 그들은 세상을 볼 때에 정치적으로 본다고 이래 하는데, 정치적이라고 본다는 말은 뭐냐 하면 눈에 들어오는 식으로 보는 거예요. 그들은 이것을 가지고 현실이라고 보는 겁니다. 현실. 

  

현실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요, 눈에 보이는 것을 중심으로 해서 그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신+인간=현실, 신 플러스 인간으로 이게 현실이 구성된다고 보는 겁니다. 신과 인간이 결합되는 것으로. 이 신은 여호와하나님이고, 인간은 본인들이죠. 본인들이 결합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직접 구현된다고 보는 거예요. 신과 인간이 같이 결합되는 이걸 현실로 보는 거예요. 왜? 인간은 여기 있고 신은 여기에 있으니까. 

  

이렇게 결합된 것이 현실이라는 사실에 그들 본인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봤어요? 문제가 없다고 봤어요? 이렇게 하는 것이 문제없다고 생각한 거예요. 당연하다고 생각한 거예요. 인간은 본인들이고 신은 하나님이고. 하나님 나라에 이렇게 결합된 것이 문제없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리고 그걸 현실로 본 거예요. 그들은 뭘 놓쳐버렸어요. 이게 뭐냐 하면 현실이 겹쳐져있다는 것을 놓쳐버린 겁니다. 

  

뭘 모르느냐, 그들이 언약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어요. 언약. 언약 자리에 누가 가있느냐? 본인들이 언약 자리를 깔고 앉아있는 겁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모세언약의 구현이고 완성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언약을 이루려고 왔죠. 그러면 문제는 그거에요. 예수님께서 언약을 이루러 왔고, 그리고 언약을 이루는 그 동네가 어떤 동네냐 하면, 인간이, 우리의 이름으로 언약을 이룰 수 있다고 우기는 그 동네입니다. 

  

결국 문제는 뭐냐 하면 언약을 놓고, 모세언약이든, 아브라함언약이든, 하나님의 언약을 놓고, 이게 인간이 이룰 수 있는 것이냐 하는 것과 아니면 예수님만이 이룰 수 있는 것과의 그 사실을 이 사람들은 모르고 있는 거예요. 이 유대인들은. 본인들이 지금 언약을 구현하고 있다고 본 거예요. 지금 본인들이 언약을 구현하고 있는데, 누가 걸림돌이 되느냐 하면 로마의 통치가 걸림돌이 되는 겁니다. 자존심이 싹 상해버리는 겁니다. 자존심이. 

  

그래서 본인들이 해결을 할 수 있어요? 없어요? 본인들이 해결을 할 수가 없죠. 해결이 안 되니까, 우리도 해결이 안 되니까, 아마 저 예수라는 저 양반도 안 될 것이라 하고, 그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한테 찾아온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인데, 왜 이 로마가 우리의 자존심을 긁으면서 세금을 내라고 강요를 하느냐, 당신 같으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을 할 것인가? 라고 할 때에, 너희들은 지금 해결 할 수 없는, 그 정도로 해결 안 되는 문제를 나한테 가져왔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하는 그 문제를, 그 문제지 그대로 돌려보내는 겁니다. 가이사 것은 가이사에게 내고 하나님 것은 하나님에게 내라. 그러면 그들이 예수님께서 시키는 대로 한다면 문제가 해결이 될까요? 안 될까요? 해결이 될 수가 없죠. 왜? 내기야 내겠지만 마음이 편치를 못하죠. 로마제국에게 인두세내고 세금을 내면서, “티베리우스황제님! 이것도 우리 하나님께서 시켜서 내는 것이니까 흔쾌히 받아주옵소서.” 이런 마음이 안 드는 거예요. 

  

뭐냐 하면은, ‘내가 진짜 하나님께서 봐줘서 내는 것이지, 안 그러면 너는 죽었어. 내가 너희들이 억지로 내라고 하니까 내는 것이지, 우리가 즐겨내는 것이 아니야.’라고 껄끄러워하면서 세금은 세금대로 바치고 있는 거예요. 껄끄러워하면서. ‘두고 봐! 메시야가 감람산에 올 테니까.’ 

  

감람산이 어디냐 하면은, 예루살렘 옆에, 가봤으니까, 예루살렘 동쪽에 감람산이 있습니다. 감람산 제일 꼭대기에 예수님의 승천, 승천교회가 있고, 여기서 보게 되면 저 뒤에 여리고성이 보인다는 거예요. 제가 봤는지 안 봤는지 기억이 잘 안 나지만 보기는 본 것 같아요. 하여튼 여기는 겟세마네 기도하는 곳이 있고. 

  

여기 감람산에 예수님께서 오셔가지고, 예루살렘 황금돔이 있고, 동쪽 성문을 통해서 입성하게 되어 있어요. 메시야가 오시게 되면. 스가랴서에 보면 감람산에 와서 예루살렘 동쪽 성문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 말이죠. 유대인들은 그때를 기다려요. 지금도 유대인들은 이것을 기다리고 있어요. 감람산에 와서 오게 되면, 그때 부활하니까, 다니엘서 12장에 보면 부활되거든요. 

  

부활되기 위해서 유대인들은 여기 성전 문 앞에 촘촘히 공동묘지를 만들어놨어요. 그 공동묘지 동영상을 제가 올려놨나요? 안 올렸으면 올릴게요. 공동묘지가 쫙 있어요. 이거 기독교인 공동묘지가 아니에요. 유대인들 공동묘지에요.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메시야가 와서 일어나라! 하면 일어나서 같이 들어가기 위해서. 꼭 만화 같아요. 만화. 

  

이걸 기다리고 있는데, 로마의 압제를 받으니까, 그들은 지금 압제받는 것을 이사야 53장과 연결시킵니다. 이사야 53장에 보면 우리의 고난은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한 고난이다. 자기들이 여호와의 종이라는 겁니다. 집단적으로. 여호와의 종으로 집단화시켜서, 의인화시켜서 우리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음을 입었다는 것이 바로 고난 받는 이스라엘 집단, 공동체에 해당되는 말씀이라고, 그들은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어요. 

  

지금 로마가 와서 이렇게 고생하지만 언젠가는 이 고난이 끝나면 하나님께서 복수할 것이라는 그게 유대묵시문학에 보면 나와요. 유대묵시문학에 대해서 이번 수련회 교재, 교재 한 번씩들 읽어보셨죠? 쭉 읽어보니까 쭉쭉 내려가죠. 거기에 나와 있습니다. 이렇게 된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그들이 하고 있는 언약을, 언약의 주인공으로서 그들은 지금 아무 탈 없이, 아무 문제없이 잘 살고 있다고 우기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현실 속에 로마의 개입은 그들에게는 상당히 곤욕스럽고 당황스럽기 짝이 없는 거예요. 그냥 인내하고 참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 입장으로 봐서는 이러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 선지서나 모든 말씀에 대해서 왜곡되고 잘못 해석하고 있다고 본 거예요. 예수님께서는. 

  

어디서 잘못되었느냐 하면, 인간이 있고 신과 결합되어서 하나님의 언약을 이룬다는 이 자체, 이런 경우는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발로 내치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과 인간은 결합이 안 되게 돼있습니다. 왜? 인간은 죄인이고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이 같이 협상하거나 타협하거나, 인간의 말씀 지킴을 하나님이 받으시고 하는 이런 것이 없어요. 성경 말씀은 인간에게 지키라고 준 게 아니에요. 

  

왜 그러냐 하면은, 성경말씀은 만드신 분이 지키게 되어 있어요. 성경말씀은. 에어컨 고장 났을 때 일반사람들이나 아마추어들이 못 고칩니다. TV고장 났을 때도. 이거는 서비스센터에서 일하는 사람이 와서 고쳐야 되죠. TV나 에어컨을. 만드신 분이 어디에서 문제가 있고 하자가 있다는 것을, 만드신 분이 오셔가지고 “니한테 이런 하자가 있고 이런 잘못이 있기 때문에 말씀을 못 지키는 거야.”라고 알려 줄 때 비로소 우리는 자기 분수를 알고 자기 주제파악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묻기를 왜 성경에 쉐마, 쉐마, 이스라엘이여 들으라, 들으라, 이 말씀을 지키라, 지키라고 하는 그 이유가 뭐냐, 그럴 것 같으면 지키지 마라 내가 알아서 할게, 라고 이러면 됐지. 왜 지키라, 지키라, 하는 이유가 뭐냐, 하나님께서 지키라고 하는 그것은 일종의 드라이버 역할을 하는 거예요. 지키라고 함으로써 말미암아 우리 자신을 해부시키는 엑스레이 같은 겁니다. 말씀 자체가. 

  

지켜라! 지키라고 요구할 때 우리는 거기에 자극을 받아서, 저는 이 정도로 지켰다고 거기에 뭔가 반응을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자극을 주게 되어 있다고요. 그리고 인간은 거기에 반응을 하면서, 이방인들은 못 지켰지만 우리는 이만큼 지켰다고 하는 자부심도 아울러, 부산물로 우리가 얻어 챙기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자기 의입니다. 자기의가 생기게 되어 있다고요. 

  

어떤 사람이 만약에 모태신앙이라서 60년 교회에 다녔다. “나는 뭐 교회 다니고 뭘 해도 주님 말씀 지킨 것은 없고 맨날 죄지은 것밖에 없어.”라고, 그런 고백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못났지만 그래도 교회는 다녔고, 못났지만 뭐 이렇게 헌금은 했고, 꼭 자기가 할 수 있다고 자부하는 것 있잖아요. 자기가 남보다 더 뛰어나다는 그런 것을 챙기면서 간직하고, 훈장처럼 달고 다닌다 이 말이죠. 그걸 유대인들이 그렇게 한 거예요. 

  

하나님이 언약을 이루는데 있어서 언약의 현실은, 현재 유대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면서 자기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우기는 이것 전체가 오류고, 잘못된 것이고, 가짜라는 것을 지적하시는 그분으로 인하여 언약이 제대로 펼쳐지는 겁니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오늘 본문의 해석으로 들어가 봅시다. 지금까지 그냥 서론이었습니다. 본론은 이래요. 언약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고, 언약 사건을 일으킵니다. 언약은 언약사건을 일으켜요. 그런데 인간들은 언약을 보면서, 모세율법을 보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인정하기 위해서 언약을, 율법의 법을 지켜요. 법으로 이해해서 자기 존재를 확고히 합니다. 

  

그러면 이건 존재가 되지, 이건 사건이 아니에요. 존재는 백날 해봐야 자기 존재를 잊을 수가 없고, 자기 존재를 계속 유지하게 되어 있어요. 사건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예상되는 것이 아니고 우발적이에요. 존재에서 예상되는 것은 사건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존재에서 예상되는 것은 사건이 아니에요. 사건이 터져버리면 자기 존재에 대해서 내가 어떤 인간인지 되묻게 되어 있지, ‘아, 나 그거 알았어.’ 이래버리면 뭐가 부각이 되느냐면, ‘역시 내가 예상한대로 맞았어.’ 이렇게 자기 존재가 더욱더 공고히 된다니까요. 

  

애가 평소에 공부 되게 못한다. 맨날 꼴찌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전교 1등 했다. 그러면 그때 뭐라고 합니까? 사건이라고 하죠. 그리고 뒤에 하는 말이 뭐냐, “누굴 닮아서 저런 천재가 나왔지?” 이러거든요. 자기 존재에서는 저런 천재가 안 나오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 전교1등이라는 사건이. 정말 사건이죠. 정말 기적이고 사건이라는 말이죠. “누굴 닮아서 저런 게 나왔지?” 너무 좋아가지고. 또 반대로도 할 수가 있죠. “누굴 닮아서 저렇게 칠칠맞나?” 하는 것도 있지만. 

  

사건은, 인간의 존재에 존재가 되기 위한 근원에서 사건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 사건이 옴으로 말미암아 존재가 이 사건을 유발하는 원인이 안 돼요. 그러면 이 존재는 무, 있으나마나한 존재가 돼버립니다. 예수님께서 언약을 들고 왔다는 말은, 우리는 예수님 앞에서 있으나마나한 존재에요. 죽어도 괜찮아요. 죽어도 북한말로 “일 없습네다.”에요. 죽어도 상관없어요. 죽어도 그만이고 살아도 별 볼 일 없는. 그게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우리의 초상화에요. 

  

주님 앞에서 울지 마세요. 뭐 잘났다고 우냐 이 말입니다. 뭐 잘났다고 우냐 이 말이죠. 울기는 왜 울어요. 운다는 것은 자기 존재에 대한 집착을 못 버렸다는 뜻이거든요. 집착을. 뭐 전립선이 어떻고 무슨 약을 먹어야 되고. 전립선은 처음 사건에서 나온 거예요. 죄를 지었으매 저주로, 저주의 증상이에요. 전립선으로 죽지 않아요. 죄로 말미암아 죽지. 그것도 진작 죽어야 돼요.동안 살아온 것도 오버한 거고, 밥 먹여주고, 공기주고, 심장 뛰게 해준 것도, 이거는 갚을 수 없는 은혜입니다. 

  

우리의 존재가 십자가 앞에서는 뭐로 바뀌어야 하느냐 하면, 내가 이렇게 살아온 것이 희한한 일이고 기적으로 여겨야 하는, 사건의 다발로 여겨야 됩니다. 우리 자체를.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사건이 나로 하여금 여기에 있게 하신 거예요. 그러면 나의 존재의 원천을 내 존재로 마감되면 안 되고, 이 존재가 없는 데서 있게 한 그 원천까지 나가야 하는데, 나가는 방법은 없어요. 

  

존재에서 백날 후벼 파야 중(스님)밖에 안 돼요. 백날 “나는 무엇이냐?” 그래가지고 밖에서 자물통으로 문 잠그게 하고 벽보고 도닦아봐야 20년 전에 헤어졌던 자기 애인만 생각날 뿐이에요. 나의 아저씨 드라마이야기입니다. 17번 tvn에서 하는 그런 드라마가 있어요. 지금은 끝났어요. 백날 도닦아봐야 존재가 자기 존재를 후비니까 이게 말이 돼요? 물에 빠졌는데? 자기 신발 끈을 잡아당기면 발부터 들리지, 자기 머리는 밖으로 나올 수가 없잖아요. 

  

존재의 원천은 인간이 아무리 도를 닦고 말씀 지켜도 이 존재를 존재케 한 그 원천적 사건으로 갈 수가 없어요. 인간은 언약에 의해서 이 땅에 존재로 있었기 때문에, 언약사건을 경유해야 우리 존재의 원천에 도달될 수가 있습니다. 언약사건. 근데 사람들은 언약이 율법으로 주어지니까, 법으로 주어지니까 눈에 보이죠. 모세율법이. 눈에 보여 지니까, 눈에 보이는 자기 존재하고 율법하고 직접 연결시킨 거예요. 

  

저 말씀을 내가 지키리라! 그러니까 지키면 지킬수록 누가 강화됩니까? 누가 아까운 거예요? 내가 더욱더 아까워진 거예요. 개떡같이 할 때는, 세리와 강도와 창기가 될 때에는 그냥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했는데, 점점 말씀을 지키고 교회에 충성했다는 그 의식이 존재 안에 가득 들어오니까, 아까워서 못 죽어요. 아까워서. 

  

자식은 교도소에 가있고, 아내는 애 셋 두고 편지도 안 남기고 수 년 전에 저기 어디로 가서 누구하고 살림 차려 살고, 자기 노모는 치매 걸려 병들어 있고, 자기는 관절이고 뭐고 온 몸이 다 아파있을 때에, 이때에 죽는다고 해서 누가 욕 할 사람 없어요. 왜? 주위에서 얼마나 말을 했겠어요? “아이고, 나 같으면 벌써 죽었다. 그래가지고 왜 사나.” 주위에서 죽어라! 죽어라! 죽으라고 부추겼는데, 그 사람 죽을 때는 별 아쉬운 게 없죠. 그런데 애 키웠는데 서울대 법대가고, 이거는 그야말로 천재가 되어가지고 대학교 3학년 때 사법고시 123차 다 되어버리고, 딸은 또 외모로 합격해버리고, 아내는 너무 잘돼가지고 외무부 장관하고 있고, 머리 하얘가지고. 이거 뭐 주식을 했는데 주식도 잘되고. 그래서 자살해야 합니까? 그래서? 아까워서 자살 못하죠. 아까워서. 눈들 보니까 뭐 아까울 것 없다는 눈들인데. 그럼 뭐 배짱인가? 

  

세리와 창기와 강도가 너희들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간다는 그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이해하시겠습니까? 바리새인들은 왜 그렇게 아까워하는 거예요? 착실하고 고귀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영혼은 순전하고, 순결하고, 찬란하고, 영롱하고, 매끈하고, 따뜻하고, 흠 없고, 순수하고. 거기에 비해서 세리들은 지저분하고, 더럽고, 저런 인간 빨리 죽어라! 이래 되고. 그래서 바리새인이 한 유명한 말이 있죠. “나는 저들과 같지 아니하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하나하나 다 놀라운 것이지만, 정말 놀라운 것은 뭐냐 하면 저 세리와 창기가 바리새인보다 먼저 하늘나라에 간다는 이 말이(마21:31), 정말 충격적이에요. 참으로 충격적입니다. 전복을 했죠. 바다에서 나오는 그 전복 말고, 뒤엎어버리는 것. 완전히 바닥 자체를, 양탄자를 깔아놓은 그 바닥을 완전히 뒤엎어버리는 겁니다. 존재의 층을 완전히 뒤엎어버려요. 

  

현실에 그런 식으로 사건이 와버린 겁니다. 그러면 이건 뭐냐 하면, 겹쳐진 현실이에요. 겹쳐진. 겹쳐진 현실이라고 하지 말고 오늘 강의에서는 겹쳐진 공간이라고 하겠습니다. 겹쳐진 공간이에요. 공간이 겹쳐진 겁니다. 그걸 페트로토포스Petrotópos라고 하는데, 다른 공간이에요. 다른 공간. 다른 공간이, 이 세상에서도 다른 공간이 있어요. 다른 공간을 제가 두 종류로 나누겠습니다. 

  

세상에서의 다른 공간은 일탈의 공간입니다. 일탈의 공간. 점잖은 체하는 남자들이 가는 곳. 사창가나 노래방. 그 장소가 어떤 장소겠습니까? 일탈할 수 있는 곳이죠. 여기가면 숨이 통하는 곳. 빡빡하게 참아야 돼! 참아야 돼! 하다가, 여기서는 참습니까? 안 참습니까? 뭐 폭탄주, 쭈르륵 도레미파솔라시도~ 폭탄주 제조해서 폭탄주도 먹고, 마음껏 터트리는 겁니다. 젊은 20대 같으면 나이트클럽 같은데. 바로 다른 공간이에요. 

  

애들 같으면 집안에 있는 인디언텐트. 인디언텐트 알죠? 방에 안 들어가고 인디언텐트에 들어가요. 거기는 자기만의 은밀한 공간이에요. 그리고 아빠의 침대 위, 그 침대 위에 이불 놓여 있잖아요. 이불이 볼록 튀어나온 데는 산이고 움푹 들어간 곳은 골짜기고. 애들 세계에서는 그게 자기만의 영역이 돼요. 

  

페트로토포스에요. 다른 공간을 만드는 거예요. 그런데 어른들이 보게 되면 그냥 이불이에요. 이불. 이불이 우발적으로 형태가 이렇게 짜여진 거예요. 보면 그냥 평범해요. 근데 애들 보기에는 그 하나의 공간이 자기가 봤던 그 동화의 세계를 거기다가 다 담을 수가 있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이미아 (IP:122.♡.178.64)18-05-27 19:00 
광주강의20180525b 마가복음12장 13-17절(다른 공간)-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 마지막에 다른 공간을 이야기했습니다. 겹쳐진 공간. 상당히 이질적인 공간. 이질적인 공간을 형성하는 겁니다. 그런데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그들에게 눈에 띄는 공간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자기들이 살고 있는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과 하나님을 섬긴다는 그게 전부였습니다. 그게 하나님과 자기들과의 언약관계라 생각했습니다. 언약관계.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이 저 하늘에 계시다고 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다고 생각하지 않는 이유가 그들에게는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과 자기들하고 떨어져있으면 모세를 불러다가 돌판을 자기들에게 줄 리가 없다는 거예요. 줄 필요가 없었을 거라는 거예요. 근데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시면서 시내산으로 모세를 불러다가 모세를 통해서 돌판을 줬죠. 돌판이 깨지고 난 뒤에 또 하나님께서 돌판을 다시 새겼습니다. 새겨가지고 언약궤 안에 담아서, 언약궤를 가지고 레위인을 통해서 계속 동행케 했잖아요. 

동행해서 어디에 멈췄는가 하면, 세겜에서 멈췄고, 세겜에 있던 그 언약궤는 블레셋에 돌아다니다가 어디에 도착했는가 하면 바로 다윗에게, 기럇여아림에 왔다가, 다윗이 여부스를 정복하고 난 뒤에는,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그  성전 속에 언약궤가 있는 거라 이 말이죠. 그러면 이건 누가 봐도 뭡니까? 하나님이 그냥 하늘에만 계시지 않고, 하늘과 땅이 유일하게 연락하는 연락처, 연락사무소를 지상에다가 하나님의 손으로 직접 만들어주신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성전이거든요. 

그러니까 성전이 깨졌다는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그런데 학개, 예레미야, 느헤미야, 스가랴에 보면 하나님께서 다시 성전을 지으라고 했죠. 그럼 성전을 지으라고 할 때는 성전 건물만 지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성전을 지으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연락체제를 다시 한 번 허락하시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까지 46년 동안 지었다가 다 못 지은 헤롯성전이 있잖아요. 예수님 그 당시에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이 헤롯성전에서 제사 드리면서, 이거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을 철석같이 믿은 겁니다. 

그 헤롯성전 같은 경우에는 뭐냐 하면, 지평적으로, 이렇게 2차원적으로, 평면적으로 거룩한 공간과 속된 공간이 수평적으로 분리돼요. 그래서 로마한테 압제를 받으면서도 자기들은 지역된 공간의 가치, 이 가치라는 것은 하나님과 연락처이죠. 연락체계, 연락구조를 자기들은 붙들고 있고 유지되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우리가 어떻게 로마한테 세금을 바칠 수가 있느냐 이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인데. 

그래서 그들은 예수 당신에게는 어떤 해결책이 있을까 해서 왔고, 시험하려고 온 거예요. 예수님의 답변은 뭐냐 하면 너희들에게 곤란한 문제는 너희들이 만들어놓고, 왜 거기에 나를 끼어 넣으려고 하느냐 이 말이죠. 너희들의 자체에 문제가 있어서, 난제로 받아주는 그 문제를 너희들 선에서 해결해야지 왜 나한테 끌고 오느냐 이 말입니다. “너희들이 지금 누구한테 뭘 내느냐?” “돈을 냅니다.” “자, 그럼 보자. 돈에 누구의 형상이 있지?” “황제의 형상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 돈의 주인이 황제니까, 황제한테 줄 것은 주고 하나님한테 주면 되잖아.”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그렇게 하면 잘했다가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정상이다가 아닙니다. 너희들이 수평적인 인식을 가지고서는 절대로 하나님과 인간의 결합이라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런 수평적인 사고방식가지고서는. 그렇다면 그들의 문제가 뭐였는가 하면 바로 존재라고 했죠. 그들은 자기가 여기 있다는 거예요. 있어서, 법을 가지고 마중 나와서 자기 존재로 이 법을 지키게 되면 이것이 하나님이 십계명 주면서 지키라고, 하라고 하신 그 명령에 부합되는, 그러한 실천을 옮기고 있는 중이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근데 제가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언약을 지킨다는 것은 인간이 지키는 것이 아니고, 언약을 만들어내신 그분만이 지킬 수 있다고 했습니다. 출제위원이 해답을 갖고 있어요. 근데 그 해답을 가지고 왔잖아요. 주님이 해답이잖아요. 주님이. 주님이 해답이라고요. 그러면 그들이 정말 언약이 무엇이고 어떻게 지킨다는 것을 알았다면, 사실은 그들이 제대로 정상인이라면 누구를 영접하고 누구를 환영해야 됩니까? 예수님을 영접하고, 시험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되죠. 

그러나 예수님을 받아들이기가 곤란한 것은 뭐냐 하면 지금 자기 존재가 자기가 보기에 정당하다고 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지금 한국기독교도 그렇지만, 모든 교회사나 기독교 역사의 제일 큰 문제가 뭐냐 하면은, 예수 믿고 하는 자기가 정상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본인 자신이 예수 믿는 나에게 뭐가 문제가 있느냐 하는 이걸 생각을 안 해요. 예수 믿으라고 해서 예수 믿었고, 뭐 성령 받으라고 해서 성령 받았고, 그럼 나에게 탓할 게 뭐가 있느냐?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시키는 대로 다 했으니까. 누가? 나라는 존재가.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던 것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고 오셨잖아요. 아버지의 뜻. 아버지의 뜻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오시기전에 이 땅의 이스라엘에게 주신 모든 말씀이 다 아버지의 뜻이 되는 겁니다. 일점일획이라도 빠트리지 않고 다 이루려고 오신 거예요.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왜 그들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태복음 27장 51절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에 일어난 자연현상이죠. 현상이, 질서가 갑자기 꼬이기 시작합니다. 이게 뭐냐 하면 기존의 공간, “이게 공간이야. 이게 현실이야.”라고 하는, 그 현실과 공간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완성을 다 담을 수가 없어요. 감당을 할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성전도 예수님의 십자가 의의를 담아둘 수가 없어요. 

찢어진다는 것은 성전이 파괴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감당이 안 되니까. 감당이 안 돼요. 그럼 성전은 존재하죠. 기존의 모든 자연물도 존재하잖아요. 이 존재는 주님이 일으킨 이 언약사건을 다 포용할 수가 없습니다. 담아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몸을 통해서 언약이 진행되면, 거기서 파생되어 나온 것이 뭐냐 하면 언약사건으로 주어져요. 존재가 아니고 사건이 됩니다. 이 사건의 원천자가 누구냐 하면 바로 예수님, 또는 예수님의 몸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46년 동안 성전을 지었을 때, 그걸 보고 제자들이 우와! 우와! 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너희 눈에 뭐가 보이느냐? 이게 보입니다. 그걸 헐어버리라. 그걸 며칠 만에? 3일 만에 다시 지을 것이다. 그래놓고 나중에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보니까 그게 건물을 짓는 것이 아니고, 어떤 자연도 예수님의 사건을 다 표현해 낼 수가 없어요. 감당이 안 돼요. 그러니까 꿈에 계시 받았느니, 꿈에 예수님을 봤다느니, 천국을 봤다느니 하는 그런 기적이 있잖아요. 그거는 다 엉터리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사건은 인간이 표현하는, 자연적인 눈에 보이는 것으로는 그 모든 것을 다 담아낼 수가 없어요. 자기가 봤다는 그 본인이 죽어야 돼요. 내가 계시 받았다는 그 계시가 깨져야 돼요. 아들 바치고, 돈을 바치고, 십일조 했잖아요. 그 내가 죽어야 돼요. 십일조 내고서 주의 은혜를 받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십일조를 냈다고 하는 그 나, 그 내가 자각되고 인식되는 순간, 순간 우리는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는 티를 내고 있는 겁니다. 

왜? 안다는 것이 죄가 돼버려요. 내가 헌금 냈다는 것, 그것도 의미 있는 행위를 했다는 그 자체가, 이게 내가 죄인이라는 소리하고 똑같은 소리에요. 사건이 나에게 존재 있게 다가오는 의미는, 나를 죄인으로 만들어놓고, 너는 진작 죽어야 돼! 라는 그 의미 말고는 다른 의미를 우리한테 제공한 적이 없습니다. 어떻게 주님하고 함부로 같이 막 먹으려고 해요? 그럴 수가 없습니다. 뭐, 친구라고 한다고 막 먹을 수 있는 친구인줄 알아요? 

그럼 사도들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사도들은 날마다 죽이고, 날마다 새롭게 사도들에게 일을 시킨 거예요. 사도의 존재보다 사도에게 주신 기능적 사명, 사명적기능이 사도의 존재보다 더 우선되는 겁니다. 죽을 때에도 그냥 못 죽어요. 사명을 감당하라는 차원에서 죽어줘야 해요. 자살하면 안 돼요. 누구처럼. 자살해서는 안 돼요. 죽는 것도 사명의 일부로서 죽어야 해요. 자기 맘대로 못 죽어요. 자기가 죽을 수도 있고 살 수도 있다는 그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그거는 주제 넘는 일이에요.

“제가 죽을까요? 말까요?” 주님 앞에서는 니가 그런 질문을 할 그런 자격조차, 권리조차도 없다는 겁니다. “내가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는 이런 구시렁구시렁 댈 권리가 없다는 거예요. “니가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구나. 욥처럼 한번 당해봐! 욥처럼 한번 당해봐야, 아! 하고 재를 뒤집어쓰지. 재를 뒤집어쓰고 제가 할 말이 없다고 하겠지.”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지금 선풍기 돌아가는 것도 전부 다 사건이에요. 주께서 선풍기 돌아가게 하셔서 돌아가는 겁니다. 주님의 손길입니다. 주님의 손길. 

시편의 시인이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하늘에 떠있는 별만 보지 말고, 별을 만드신 손가락도 같이 보라고요. 손가락이 있다는 것은, 별 자체, 별의 존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일을 벌이시는 사건의 증거로서, 하늘에 무수한 별들이 깔려있는 겁니다. 일종의 천장타일이죠. 천장의 도배지. 도배지에 있는 무늬에요. 무늬. 

인간들이 생각하는 공간은 뭐냐 하면, 본인이 주인공이 된 공간입니다. 아까 제가 넓은 아빠 침대에서 두세 살 먹은 아이가, 그 나름대로 아빠의 이불속에서 자기만의 세계를 형성하잖아요. 다들 그렇게 놀면서 커왔잖아요. 그렇게 놀면서.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 사춘기에 접어들면, 초등학교나 중학교에 가게 되면 자기가 놀던 구역이 있잖아요. 놀던 구역. 친구들하고 담배 피우던 구역. 동네 한 가운데에 벤치가 있는 공원. 그게 자기의 나와바리에요. 자기의 구역이라고요. 

그런 애들에게 해외여행 보내봐야, 해외가 내 세상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돌아오게 되면 놀던 동네가 정겨워요. 여러분들도 초등학교시절의 꿈을 가끔 꾸죠? 꾸게 되면 그 놀았던 면적이 보통 몇 평쯤 되던가요? 뭐, 전 세계, 서울까지도 안 들어가죠. 고향동네 골목하고, 눈에 보이는 산등성이까지 안 가요. 산등성너머에서는 누가 오는가 하면, 오빠가 장날에 신발 사들고 오기 때문에. 내가 오빠 생각할 그 범위 내에요. 오빠생각 알죠? 장날에 신발 사들고 오는. 그래서 산등성이너머는 오빠가 오는 동네고, 그 동네까지 넘어가면 안 돼요.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 몸 중심으로 자기 공간을 형성해나가요. 이것을 제가 수요일에 ‘자기조직화’라고 했습니다. 모든 유기체의 본능입니다. 아메바부터 모든 고정 식물까지, 세포는 전부 다 스스로 자기조직화를 해요. 백혈구가 왜 있습니까? 우리 몸을 지키는 자기조직화의 일부로서, 자기 면역체계로서 자기조직화가 있잖아요. 면역체가 깨지게 되면 드디어 암세포가 활성화된다 이 말이죠. 

교회라고 할 때에, 사람들이 내 교회를 먼저 생각하는 이유는 교회자체가 자기조직화를 위해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리게 되어 있어요. 십자가에서는 뭐가 나와야 합니까? 페트로토포스, 이질적인 공간. 내가 형성한 모든 공간은 그 주인공이 누구다? 내가 주인공이 되기 때문에, 그 자체가 오류고, 그 자체가 악마의 통치를 받은 증거가 되거든요. 

인간이 나에게서부터 내가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그동안 꾸준하게 내 중심으로 살아와야 돼! 라는, 그런 악마의 심부름꾼으로 꾸준히 살아온 거예요. 복음은 다 튕겨버리고, 마귀 말이라고 하면 다 순종하는 이유가, 그 마귀가 사람을 좋게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을. 하나님을 좋게 하는 것이 아니에요. 평소에 나라는 영역, 나와바리, 나의 세계가 나를 중앙에 두고 벌이는 하나의 소꿉놀이거든요. 그러한 성향, 바로 누가 시킨 겁니까? 바로 이 세상 신이 그렇게 시킨 거예요. 

마귀한테는 어떤 속성이 있느냐 하면은, 복음에 대해서 저항하는 본능을 우리 인간에게 심어줬어요. 십자가에 대해서 저항하는 거예요. “내 중심이 아니면 나한테 복음이야기를 하지 마세요.”라는, 그런 성향이 있다 이 말이죠. 그래서 교회가 된다는 것이 뭔가 수상한 교회에요. 수상한 교회. 제가 주일 낮에 그런 설교를 했습니다마는, 사기 치지 않고서는 교회가 운영이 안 돼요. 분명히 이거는 마귀 편에 서서 목회를 했기 때문에 교회가 되는 겁니다. 사람을 좋게 하지 않았는데 교회 올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근데, 그러면 교회가 어디에 있느냐? 교회가 교회를 가리고 있으니까, 기존교회를 치워버리면 그때 비로소 교회가 등장하죠. 근데 그 교회는 내 소유가 아니에요. 나라는 존재는 거기에 없어요. 나는 하나의 진짜 있는 그리스도의 몸의 사건적인 기능으로서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존재는 그날로 마감이 되고, 그 다음 날이 되면 새로 시작하기 때문에 그래요. 

나라는 인생을 난도질하는 겁니다. 계속 끊어나가는 거예요. 하루하루 살아가는 거예요.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 광야 때 그 만나가 며칠 분의 양식이었습니까? 하루분이죠. 무슨 뜻입니까? 하루살이, 니는 하루만 살라는 거예요. 언약의 백성이라면 며칠 산다? 수명이 다 하루만 살아야 돼요. 단 하루만. 내일이라는 것은 생각하지 말아야 돼요. 이게 언약적인 사건에 의해서 주어지는 겁니다. 

계속 진도 나가보겠습니다. 지금까지 한 것을 요약해보면, 공간은 두 종류의 공간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뭐냐 하면, 예수님 존재에서 나온 사건이다. 그리고 이 사건은 예수님의 존재가 모든 존재의 원천이 되기 때문에, 두 번째는, 있는 인간 존재로서는 언약사건이 아니고서는 자기 원천을 찾아갈 수가 없어요. 그럼 출발점부터가 뭐냐 하면, “나 여기 있다.”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제가 지난주일 설교 끝부분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사람들이 복음을 들어도 무슨 취급을 하는가 하면, 마치 먼지취급해서 장난이나 오락이라든지, 유희, 농담, 취미로 여겨요. 그래서 몸에 뭐가 묻으면 툭툭 털면 떨어지듯이, 백날 30년, 40년을 복음을 들어도 내 존재 안에 침투가 안 되면 그냥 지식이 되는 거예요. 침투가 안 되면 그냥 지식이 되는 거죠. 지식이야 딴 데 관심 둬버리면, 지식은 그 순간 다 떨어져나가요. 먼지처럼 다 떨어져나가요. 

근데 성령이 온다는 것은 언약대로 오잖아요. 언약이 오게 되면, 언약의 원천이 누구라고 했습니까? 제가 몇 번을 묻는데, 언약의 원천이 누구죠? 예수님 존재죠. 사건은 뭐냐, 예수님의 존재를 우리 내부, 우리 마음속까지 성령에 의해서 집어넣는 것이 바로 히브리서 10장에 나오는 새 언약의 기능입니다. 옛 언약은 말씀으로만 가까이 있는 거예요. 우리 마음에는 안 들어와요. 

그런데 에스겔의 예언대로 마지막 언약은 우리가 거부할 수도 없이, 우리의 심령에 새 언약이, 심령 속에 새 언약의 돌판이 아예 장착을 해버려요. 하나의 반도체 칩처럼 심겨져버립니다. 그러면 내 존재가 우선이 아니고 주님이 일으키신 사건이 우선이 되면서, 나라는 존재는 사건이 보여주는 언약을 구현하기 위해서, 우리의 허접한 육적인 본성을 마음껏 활용하시고 사용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인이 되는 겁니다. 그것도 즐겁게, 기쁘게, 뭘 해도 막사는 것이 돼요. 막살라고 할 필요도 없어요. 우리는 그냥 막살고 있어요. 제가 매직을 들고 있고 제가 주님이라면, 매직 이것이 일반성도라면, 위에서 매직을 막 흔들면 흔들리잖아요. 근데 주님 생각 안 하고, “요새 내가 왜 이렇게 흔들리지?”라고 하죠. 주님께서 흔들고 있으니까 흔들리는 거예요. 사나죽으나 흔들리든 점잖든 간에, 뭐가 걸리든 관계없이 이것은 주의 영광이 되는 겁니다. 전립선이든 후립선이든, 뭐든 주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겁니다. 

결국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공간문제에요. 공간문제. 다른 공간으로 오는 거예요. 예수님의 이 언약이 새로운 공간으로 왔습니다. 새로운 공간이 있고, 이 공간은 아무리 인간이 찾아도 찾아볼 수가 없는데, 모든 것에 이 다른 공간이 거기에 있습니다. 인간 쪽에서 찾아가려면 찾아갈 수 없어요. 그러나 사건이 오게 되면 나는 이미 그 공간의 소속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소속, 소속이 되면 여기서 소속에 대한 증명이 나오죠. 제가 지난주일 오후에 시편 65편 4절의 말씀을 이야기했죠. 이미 성도는 성전의 뜰에 들어가 있다고 했습니다. 성전의 뜰. 성전의 뜰에 들어간 순간, 내 인생은 어떻고 내 몸은 어떻고, 이게 아니라 “여기가 어디지?”라는 새로운 공간이 느껴지죠. 새로운 공간이. 그 공간은 주님이 계시는 전의 뜰이에요. 

우리 보통 가정집에서도 자기의 뜰을 누구한테 함부로 안 보여주잖아요. 문 닫고 뜰까지 인도받는다는 것은, 내 식구다, 라고 할 때만 가능한 거예요. 그렇게 식구가 돼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거기서 다른 공간, 인간들이 자기중심으로 보는 공간을 보자 이 말이죠. 그러면 그들은 로마서 1장 24절에 의하면 내어버림을 당한 겁니다. 내어버림을 당한 것. 동성애하는 자, 내어버림을 당한 거예요. 우상섬기는 자, 내어버림을 당한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 주의 뜰에 초대를 안 받은 거예요. 이 사람들한테는 초대장이 안 간 거예요. 손잡고, 이곳까지, 주의 뜰에, 확정된 장소거든요. 최종장소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떠날 일이 없는, 완전히 그 집안, 하늘나라의 패밀리에요. 마태복음 12장 47절에서 누가 내 형제며 누가 내 모친이냐 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한 식구가 돼버렸어요. 그것을 하늘에 있다고 봅시다. 골로새서 3장 3절에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으니까. 하늘에 있다고 보고 그 다음에 저 지상세계를 내려다보자 이 말이죠. 

그들 지금 뭐 하고 있습니까? 그들은 두 개의 공간을 생각 못해요. 하나의 공간만 생각하잖아요. 하나의 공간만. 전에 대전강의 할 때 중첩된 공간에 대해서 이야기했죠. 골로새서 강의할 때 중첩된 공간이라고 했죠. 중층현실이라고 그렇게 이야기했죠. 수직적으로 우리는 땅에서 죽었고 우리 생명은 하늘에 있다는 말은, 생명 쪽에서 내려다보자 이 말이죠. 그러면 뭐가 보이느냐 하면 그야말로 불교에서 말하는 아귀다툼이라고 하죠. 아귀다툼(서로 악과 기를 쓰며 헐뜯고 사납게 다툼), 서로 살아보려고. 

왜? 그들의 보는 현실에는 이 하늘의 공간이 안 보여요. 사나죽으나 자기존재 중심의 공간만 눈에 보이잖아요. 거기서 승부를 하고, 싸우고, 경쟁하고, 이렇게 합니다. 그들의 논리에 대해서 제가 여러 번 이야기를 했지만, 여기서 다시 이야기할게요. 그들이 백날 논리를 벌여봐야 딱 한 논리로 정립이 됩니다. 오늘 여기서 다시 적어봅니다. 인간의 모든 심보는 딱 요걸로 깔끔하게 정리가 돼요. 

첫 번째는 찼느냐, 두 번째는 차였느냐, 깠느냐, 까였느냐, 이것뿐이에요. 찬사람 트럼프고 차인사람 김정은이에요. 모든 논리가 차이는 순간에도 내가 찼다고 할 때는 견딜만합니다. 내가 찼으니까. 이 정도로 인간은 자기중심적이에요. 자기존재중심. 어떤 검사가 있는데, 검사가 선을 보는데, 검사니까, 강남에서 중매가 오죽 많이 들어옵니까? 바보 같은 남자하고 선을 보는데, 좀 티 나게 생겼어요. 그래서 나중에 맘에 안 들어서 가려고하니까, 남자 쪽 엄마가 와가지고, 검사 며느리 보려고 한 그 여자한테 와가지고, 돈 30억을 내주면서, “이거 받고 결혼해라.” 물론 드라마이야기입니다. 

그렇게 할 때, 자, 여기서 이 원리를 해봅시다. 뭐가 사람을 기쁘게 하느냐 하면은, 30억보다 더 중요한 게 뭐냐 하면, 30억보다 내가 깠다는 것이 더 중요해요. 내가 깠다. 30억보다 자기 목숨이 더 중요해요. 나중에 30억을 받더라도 일단 까야 돼요. 차버려야 하는 겁니다. 한진 그룹을 그렇게 욕하지만, 한진 그룹을 지탱하는 여자 이명희, 조현아, 조현민, 그 집안의 자존심은 뭐냐 하면, 화분 던지고, 과일 던지고, 서류 던지고, 그들 쪽에서 깠다는 차원에서 그들은 어떤 처분을 봤더라도 신나는 거예요. 그리고 아무리 보상을 받아도 땅콩회항은 까인 거예요. 

안 까이면서 까는 재미로 가는 것은 한 가지밖에는 없습니다. 뭐냐 하면, 공무원 되는 거예요. 직장생활하면서 월급이 문제가 아니고, 까는 쪽에 내가 속하는 거예요. 공무원 그것도 권력이라고. 까는 쪽에 속하는 이게 바로 공무원이에요. 공시준비생 무려 44만이에요. 뭐 기분 따라 산다고 하지만 사람은 까는 재미로 살았어요. 월급 줘도 부목사를 왜 싫어하느냐, 부목사보다 선교사를 더 좋아하느냐, 부목사는 까이는 자리고 선교사는 까는 자리에요. 교인수가 몇 명 안 돼도 까는 재미로 살아요. 까는 재미. 아무리 시집에서 잘 해줘도 독립해야 되는 이유는, 독자적인 내 중심이거든요. 

공간이, 예수님의 공간은 다른 공간입니다. 인간은 악마에 의해서 자기절대화 때문에 남을 차는 것입니다. 이 차는 것에 대해서, 모든 인간에 차이신 분이 누굽니까? 우리 예수님 아닙니까? 근데 성경에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까였다고도 이야기하지만, 너희들은 나한테 버림받았다고 하는 거예요. 

알곡과 가라지에서 나온 이야기가 있어요. 가만두어라! 제가 주일 낮 설교에서 판유리 이야기했잖아요. 판유리로 수족관을 쭉 내려 보는 거예요. 원래 횟집에 가면 수족관이 길쭉하잖아요. 이 수족관의 규격에 판유리를 맞춰서 내리꽂아 보자 이 말이죠. 그러면 고기들이 그 판유리 밑에서 뽀글뽀글하면서 발버둥치는 것이 다 보이겠죠. 그들은 뭘 추구하느냐 하면은, 자기존재를 천국에 올려놓기를 원하는 거예요. 그게 아까 이야기한 인간+신, 이라고 했죠. 인간 플러스 신, 이 자체가 오류가 있는 거예요. 

인간은 신을 섬겨야 돼! 말씀을 들어야 돼! 이 자체가 바로 악마적인 발상이라니까요. 악마적인 발상이에요. 왜냐하면 자기도 존재고, 존재에서 발생한 신도 존재한다는 겁니다. 안셀무스의 존재론처럼. 신 존재 증명하는 것처럼. 나라는 존재가 신이라는 존재를 잘 사귀는 이것이 뭐가 문제냐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 이걸 사람들이 현실로 보고, 이게 현실의 전부로 보는 겁니다. 이게 기존의 인간의 공간개념이에요. 자기중심의 공간개념입니다. 내려다보는 것이 없어요. 

정말 주님의 뜰에 있고, 십자가 안에 있다면 이미 초대받은 거예요. 이 초대를 받은 순간, 버림받았다는 것을 비로소 아는 순간입니다. 인간은 어떤 사람이 버림받았는가를 자기가 부름 받을 때, 주님에 의해서 부름 받을 때 아는 거예요. 부름 받는다는 것은 어디서 어디까지냐 하면 기존의 공간에서 내가 몰랐던 다른 공간으로의 이동을 의미하잖아요. 

이게 구약에서는 수평적으로 이루어졌어요. 구약에서는 그들이 어디에 살았느냐 하면, 히브리인들이 애굽에 살았잖아요. 애굽에 살다가 어디로 갔습니까?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죠. 수평적으로 공간이동이죠. 공간이동인데, 중간에 뭐가 있었습니까? 광야가 있었습니다. 광야에 있으면서 끊임없이 그들이 이야기한 것은 뭐냐 하면, 광야에 있다 보니까 무려 열 번이나 주님 앞에 대들고, 새로운 지도자를 뽑아서, 그 지도자가 어디로 가고자 하냐면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겁니다. 애굽으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그 인간이나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자고 하는 그 인간이나, 사실은 따지고 보면 같은 무대에요. 저쪽 남쪽으로 가나 북쪽으로 가나 전부 다 수평적입니다. 그래서 북쪽으로 들어갔던 그 이스라엘나라가 나중에 결국에는 망했잖아요. 망했다 이 말이죠. 그들은 일종의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는 연극에 참여한 거예요. 

모세 같은 경우에는 느보산에서 저 멀리 봤어요.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봤는데, 본인은 못 들어갔습니다. 들어갈 수가 없어요. 하지만 예수님과 변화산에 함께 있죠. 수평적으로 못 들어갔는데, 수직적인 페트로토포스, 낯선 공간에는 모세가 들어가 있는 거예요.그러면 결국 모세의 인생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본인이 구원받느냐 안 받느냐의 문제가 아니고, 이미 구원받은 자가 구원의 과정을 보여주는 기능을 펼쳐보였던 사람입니다. 

모세의 존재라는 것은 진짜 존재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주님이 해야 될 일을 먼저 보여준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게 오늘날 모세의 기능이나 우리의 기능이나 동일한 기능이에요. 우리는 이 땅의 방랑자입니다. 방랑자. 기타 치면서 방랑자여~ 방랑자여~♬ 방랑자입니다. 방랑자는 자기 존재가 머물 자리를 찾을 필요가 없어요. 그리고 살려주는 것도 주께서 살려줘요. 있을 때까지만 있으라고 할 뿐입니다. 기능이니까. 

그럼 방랑자의 모델이 뭐냐, 방랑자의 모델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존재의 원천이고 모든 존재는 예수님에게서 나왔고, 나올 때 예수님 존재와 예수님 사이의 사건이고, 그 사건은 무슨 사건입니까? 두 글자로 언약사건이죠. 예수님께서 언약사건을 일으키게 되면 예수님께서 새로운 공간을 마련합니다. 이 새로운 공간에 인간은 존재로서 들어갈 수가 있습니까? 못 들어갑니까? 못 들어가죠. 

예수님의 언약사건의 혜택을 입어야 들어가지, 언약사건이 아니면 들어갈 수가 없어요. 들어가 봤자 자기 존재를 가지고 그냥 들어간 셈이 되기 때문에, 들어가 봤자 자기 세계의 공간을 그대로 가지고 들어간 셈이 되기 때문에, 이거는 하늘나라 공간에서 안 받아주죠. 제가 대구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베드로가 자기 목숨을 바치려고 했습니다. 받아줬습니까? 안 받아줬습니까? 안 받아주죠. 

베드로의 목숨을 안 받아준다는 것은 아예 안 받아준다는 거예요. 아예 하늘나라에는 베드로의 목숨의 의미를 담는 자리는 베드로의 자리가 아니에요. 내가 목숨 바쳤다는 그 의미를 살리는 그런 자리는, 하늘나라에는 아예 없는 자리에요. 하늘나라는 예수님이 베드로를 위해서 죽었다는 그 의미만 있어야 하는 자리지, 내가 내 구원에 기여했다, 보탬이 되었다는 그것을  살려주는 자리는 아예 하늘나라에는 없습니다. 

그럼 목숨 바쳐도 못 간다는 말은, 아예 내가 들어갈 수 있는 자리다? 아니다? 아닌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 믿고 천당 간다는 이 말은 순전히 거짓말이에요. 천국은 뭐냐 하면 기존의 인간 존재가 연상해서, 상상해서 만들어낸 공간일 뿐이에요. 가짜죠. 허구입니다. 그런 천국 없어요. 천국은 다른 공간이라니까요. 없는 데라니까요. 

애가 아빠의 이불을 가지고 여기는 산골짜기고, 여기는 냇가고, 여긴 집이고 하고 있는데, 아빠가 “야! 뭐하노?”라고 보면, 애가 느껴지는 그 공간이 아빠한테는 느껴집니까? 안 느껴집니까? 안 느껴지죠. 심술궂은 아빠는 어떻게 합니까? 발로 이불을 뭉개버리죠. “빨리 가서 자!” 돋우어놓은 산과 골짜기를 발가지고 뭉개고 발로 툭 차죠. 그런 경우를 어릴 때 많이 당했죠. 오빠나 누나가 와가지고, “공부 안 하고 뭐하노?”라고 하면서 실컷 모래성을 쌓아놓은 것을 발로 차가지고 부숴놓는 것을 봤죠. 

인간들이 볼 때는, 자기존재로 볼 때는 그 공간은 없는 공간이라니까요. 사도바울 말대로라면  그야말로 미친 거예요. 미친 것. 미친 거라니까요. “죽어서 가겠지.”라고 한 것은 마르다 마리아가 이야기한 거예요. “예수님 믿으면 죽어서 가겠지.” 죽어서 가는 것이 아니고, 이미 오빠 나사로는 마르다 마리아가 알지 못하는 다른 공간에 가있는 거예요. 죽어서 간다는 그런 안목으로 백날 보면 무덤에 가있지 다른 공간에 가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기존의 인간 공간에서는 나흘이 되면 썩기 시작해서 냄새가나요. 기존의 공간에서는 무덤에다가 돌문을 해놓고. 그러나 나사로는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기존의 공간에, 죽었는데, 제대했는데, 입대해서 다시 등장한 겁니다. 죽었던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가지고 돌아다니는 거예요.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너희들이 보는 예수님의 존재 모습이 있잖아요. 눈 있고 코 있는 존재모습. 예수님의 몸이 지금 다른 공간의 다른 사건을 유발하면서, 지금 예수님은 새로운 공간을 몰고 사람들과 제자들 앞에 등장한 거예요. 근데 제자들이 알아먹습니까? 아무도 못 알아먹어요. 아무도. 

다른 공간이 중첩되었다는 이런 뜻을 가지고 오늘 본문을 다시 봅시다. 바리새인이 와서 하는 말이 세금을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만드신 것은 언약적 공간입니다. 그 공간에서는 이미 완성이에요. 완성한 거예요. 완성하게 되면 세금을 누구한테 내는 것이 아니에요. 세금을 누구한테 바칠 필요도 없는 겁니다. 

지금 바리새인들이 누구한테 낼까요? 했죠. 이거는 로마황제한테 내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 하나님한테 내는 것도 문제가 있어요. 하나님께 내서 그들이 구원받습니까? 헌금내서 구원받습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상한심령이에요. 하나님은 제물을 안 받아요. 니가 제물이 되기 원해요. 니가. 니가 제물 되기를 원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상한심령이 아니기 때문에 받습니까? 안 받겠습니까? 안 받죠. 그래서 짝을 이루어야 돼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흠 없는 제물이 되셔서, 그냥 예수님을 바치는 것이 아니고 상한심령 된 자기 백성을 껴안고 드리게 되면, 우리는 예수님의 참된 제물이라는 것을 증거 하게 되는 증거용이 되는 겁니다. 

성도의 한평생이 예수님만이 흠 없는 제물인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상한심령인 채 우리는 평생을 돌아다녀야 하는 겁니다. 이거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우리가 하는데 있어서. 이거 쉬워요? 어려워요? 쉬워요. 그냥 살던 대로 막살면 되잖아요. 막사는 것도 힘들어요? 어떻게 살아도 우리는 상한심령이니까. 이것보다 더 쉬운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문제는 혼자서 사니까 문제인데, 주님과 함께 있으면 쉬운 정도가 아니죠. 주님께 그냥 맡기면 되죠. 아까 로마서 1장 24절에서 ‘내어버려 두사’라고 했거든요. 그러니까 이미 주의 뜰 안에 있는 구원받은 사람이 보기에는, 주님께서 그냥 방치하는 인간들이 있어요. 하나님께서 그냥 방치해요. 방치한다는 말은, 방치되지 않고 주께서 거둬주시는 사람이 따로 있는 거예요. 내 백성은. 

그러면 여기서 뭐가 떨어져 나갑니까? 주님의 선택이 우리보다 우선이 된다면 뭐가 떨어져 나가느냐 하면, 나의 결심, 나의 선택, 나의 행위는 의미 있어요? 의미 없어요? 전혀 의미가 없는 거예요. 의미가 없는데 바리새인들은 뭐라고 합니까? “참 훌륭하시고 참되신 분이시여, 당신은 외모를 보지 않고 아무라도 꺼리지 않고 참되신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십니다.” 이렇게 해놓고,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자기들이 평소에 했던 대로, “당신은 어떻게 행동하시겠습니까?”라고 예수님한테 물은 겁니다. 

물으니까, 이들이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공간에 속해서, 자기존재입장에서 그렇게 묻는 그 물음에, 예수님 이외에 모든 교인들은 다 말려든 거예요. 모든 신학자들과 교회목사들, 교인들은 다 말려든 거예요. 그리고 말합니다. ‘아, 고민된다. 어떡하면 되지?’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고 가이사에게는 가이사에게 바쳐라. 그래, 세금도 내고 십일조도 하면, 이러면 아버지의 뜻이 된다.” 이렇게 이야기하죠. 다 그렇게 해석하잖아요. 그렇게 해석 안 합니까? 

성도라면 바칠 자에게는 바치고, 또 로마서 13장까지 거론해가면서, 세금 바칠 것은 바치고 또 교회내야 될 것은 교회에 내야 되고. 그러면 이것은 뭐와 같아요?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취지를 전혀 모르는 거예요. 바리새인하고 똑같은 류類가 되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라고요? 내어버림을 당한 사람들이 이런 사고방식을 한다고, 마가복음 12장에 이렇게 분명하게 기록을 해놓은 거예요. 

자, 그러면 더 나가봅시다. 그들이 세상에 바칠 것은 바치고 주님께 바칠 것을 바치면, 그것이 하나로 잘 조화롭게 통일이 됩니까? 안 됩니까? 통일이 안 되죠. 왜냐하면 하나님 백성이니까 내는 것은 껄끄럽지 않지만, 만약에 내가 북한주민을 위해서 내야 된다면, 만약에 내가 싫어하는 대통령이 되었다면, 그러면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세금을 낸다는 것이 마음속에서 꺼림칙하고 내기가 싫죠. 

시장에서 장사하고 있는데, 어디서 양아치들이 와서 자릿세라고 한다면 뭐라고 합니까? ‘그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쳐야 돼.’라고 내면서도 마음이 시원하지를 않죠. 그래도 뭐, 나는 주님이 세금 내라는 대로 나는 세금 바쳤으니까 내 할 도리는 다했다고, 억지로 자기정당성을 챙기려고 하지 않느냐 이 말이죠. 

다시 말해서 자기 마음에서 내분이, 지금 갈라지는 거예요. 뭔가 하나가 안 되고 점점 더 갈라지고 찢어지는 거예요. 마음이 그렇게 분열된다는 것은 결국 무슨 뜻이에요? 왜 그렇게 억지로 세금내고 억지로 하는 것을 구라치는가? 그 목적이 뭡니까? 그 목적이. 주의 뜻대로 지키면 나라는 존재를 어디에 보내준다? 천국 보내주겠지. 참자! 참자! 이런 식이에요. 근데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똑같은 식이라니까요. 이게. 

낸다는 것 자체가, 사람은 내게 되면 자기행동의 결정을 주시하게 되어 있고 기억하게 되어 있어요. 나는 낼 것 냈다. 십일조 냈다. 뭐 냈다. 낸다는 것 자체가, 그 행위가 나오게 되는 내 존재를 점점 더, 더욱더, 깊이 새기게 되고 인식하게 되어 있어요. 자기를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50년 동안 십일조를 냈다든지, 60년 동안 모태신앙이라든지, 차라리 어릴 때 유아세례를 안 받았으면 그런 소리를 안 할 텐데, 뭔가 받은 게 있으니까 그 받은 것을 첨부해서 내 존재는 적어도 모태신앙이다. 이렇게 하고 있거든요. 이거 모태솔로가 돼야 돼. 모태신앙이다. 무슨 훈장처럼 이러고 있는 거예요. 마치 유대인들이 할례 받은 것을 자랑하는 것처럼. 

깡패가 와서 돈 내라고 할 때는, 그것은 주께서 보내신 깡패십니다. 주께서 보낸 깡패에요. 그 깡패한테 돈을 내면서, ‘더러워서 이 세상 안 살란다.’라는 마음을 가지셔야 돼요. 돈을 내든지, 안 내겠다고 더 버티다가 얻어맞아서 치료비가 더 나가든지, 그래도 인간의 마지막은 뭐냐 하면, ‘내가 돈 달라고 해서 돈 준 게 아니고, 십만 원 달라고 했는데 오만 원 줬다. 오만 원은 내가 찼다.’ 그렇게 다 비굴하게 살아놓고서도 끝에 가서는 꼭 하는 말이, ‘그래도 나는 진정한 마음은 아니었어. 억지였지. 내 쪽에서 깠어.’ 그것만은 기어이 쥐려고 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상해도 너무 상한, 상한심령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냉장고에 안 넣어서 바깥에 둔 음식 신 것 있잖아요. 신 냄새나는 아주 시어빠진, 썩어빠진, 갈수록 우리 마음이 점점 시어져가요. 우리는 썩어빠졌어요. 젊을 때는 뭐 국가번영을 생각하다가 취직하고 난 뒤에는, 인턴생활 할 때는 아무소리 안 합니다. “그냥 무슨 일이든 주저하지 않고 다 받겠습니다.”하죠. 

그리고 면접 볼 때도, “그저 이 회사가 나를 뽑아주시면 이 회사가 이익이 있느냐, 손해가 있느냐, 그것만 생각하고 나는 이 회사에 원서를 냈습니다. 나를 기계로 사용하시려면 주저 말고 기계로 사용해주소서.” 이런 마음으로 봅니다. 그리고 회사도 그런 사람을 뽑고. 두말하지 않고요. BBQ인지 어디서 뭘 해도, 떼먹더라도 대리점 이것만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닭 팔아서 다 드리겠습니다. 이런 마음이 아니면 넣어주지를 않아요. 노사협력? 똑같은 괴물끼리 협력해서 뭐합니까? 요새는 뭐 협동조합도 새로운 경쟁으로 등장해서 한다고요. 

끝으로 이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이 돈의 모습이 누구냐? 황제의 모습입니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게 다예요. 주님을 보고 있으면서도 이 세상이 주님의 세상으로 안 보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내 존재처럼 생긴 존재, 그것을 의식하는 것밖에 의식하지 않아요. 그러니 이런 인간이 십자가 앞에서 어떻게 됩니까?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시체가 돼야 해요. 이미 죽은 채로 살아왔다는 것. 

그 버림받은 자를 십자가 피로, 주의 새로운 다른 공간에 넣어줬으니까, 이제는 다른 공간에 있으면서, 우리 육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마음껏 보여주면서 남은 세월을 살 수밖에 없어요. “아, 내 육신이라는 것이 이 정도로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가로막는구나!” 이것을 충분하게 보여주도록, 그래서 니 같은 죄인을 구원한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공로만 높이도록, 지금도 주께서 우리를 기능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핑계도 많고, 어쩔 수 없었습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나름대로 노력했습니다, 우리의 한계는 이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하면서, 자기 잘난 맛을 따로 챙기는 우리의 어설픔을 주께서는 질책해주시고, 죄인 중에 괴수가 된 우리가 주께서 십자가 피로 이미 구원해내신 그 은혜만 증거 하는 저희들 되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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