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180525a 마가복음12장 13-17절(다른 공간)-이 근호 목사
마가복음 12장 13-17절입니다.
13절, 저희가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매
14절,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15절,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한대 예수께서 그 외식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하시니
16절,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화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17절,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저희가 예수께 대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더라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게 누가 이야기한 것이냐,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이렇게 이야기를 한 거예요. 그 사람들이 이야기한 내용이 거짓이죠. 왜 거짓이냐 하면, “참되십니다.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그야말로 순수하십니다.”라고 한 것은, 그들이 이미 참과 거짓을 구분하고 있고, 순수와 비순수를 나름대로 분간하고 있잖아요. 그렇게 분간하는 그런 자세로서 예수님을 판정한 그 자체가 잘못된 기준을 적용시킨 겁니다.
그래서 이런 평가를 예수님한테 한다는 것은, 결국은 뭐냐 하면 자기 자신의 그 한계를 감추고 있는 수작이 되는 겁니다. 남한테 칭찬함으로서, “우리 같은 편이잖아요. 우리가 같은 레벨이지 않습니까?”라고, 같이 붙어서 그냥 어물쩍 넘어가려고 하는 수법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는 말이 뭐냐 하면, 이렇게 해요. 14절 끝에 보면,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15절,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한대 예수께서 그 외식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하시니” 이래 되어 있죠.
지금 바리새인이 묻는 것이 무엇을 이야기하느냐 하면,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이래 물었거든요. 바친다는 것은 낸다는 말입니다. 내가 어떤 누구한테 돈을 지불한다는 그런 뜻이죠.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라는 것을 예수님한테 질문을 한 거예요. 자기가 내면 되는데, 구태여 예수님을 끌어 들이는 거예요. 예수님을 한껏 높여놓고 끌고 가는 겁니다.
그럼 낸다는 것은 본인이 내는 거죠. 본인이. 본인이 내는 겁니다. 본인이 어떤 행위를 하는 겁니다. 행위를 할 때, 가이사에게 내는 것이 참된 일입니까? 아니면 거짓된 일, 해서는 안 되는 일, 안 해야 되는 일입니까? 라고 물은 거예요. 사실은 가이사는 그냥 가만히 있는 사람인데, 바리새인이 자기 잘남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끌어들여 온 거예요.
그 당시의 가이사는 티베리우스라고 하는 이 황제가 있던 시절입니다. 티베리우스 그 다음 황제가 폭군으로 유명한 칼리굴라, 그 다음 밑에 사람이 네로입니다. 네로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그 배경입니다. 티베리우스 선조 되는 황제가 옥타비아누스인데, 이 사람은 아우구스투스라고 불려요. 아우구스투스라는 뜻은 ‘지극히 존귀한 자’라고 로마 원로원에서 칭해준 것입니다.
로마는 공화정이에요. 공화정이라는 것은 원로가 있어요. 원로, 또는 장로들이에요. 원로원들이 있고, 1년 계약직으로 집정관이 있어요. 라틴어로 콘술이라고 합니다. 집정관과 원로원만이 하는 것이 아니고, 일반 민회의 대표, 요새 국회의원들인데, 그 사람들이 대표해서 같이 정치를 하는 겁니다. 1년 계약직인데, 이걸 종신직으로 했던 사람이 최초로 가이사라에요. 영어로 시저라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14절의 이 가이사는 여기 있는 가이사라(카이사르)를 본 따서 그렇게 지은 거예요. 가이사. 시저. 따라서 붙인 겁니다. 최고 집정관, 이 사람 대에 와서 1년 집정관이 아니라 영구적인 집정관이 처음으로 되는 겁니다. 이 사람 다음에 안토니우스인데, 안토니우스는 이집트의 유명한 여왕 클레오파트라하고 연애한 사람이에요. 그 당시의 이집트는 세력이 굉장히 약했어요. 약해가지고 로마한테 잘 보이기 위해서 곡물과 세금을 바치면서 겨우겨우 목숨을 유지하는 나라가 이집트였습니다.
이태리 있고, 그리스, 터키, 유대나라, 지중해있고. 이집트가 이태리의 통치를 받았어요. 클레오파트라의 남동생이 있었는데 쫓아내버리고 여왕인 자기가 통치하겠다고, 힘 좀 빌려달라고 가이사한테 선물을 준다고 했는데, 그 선물이 뭐냐 하면 자기 몸을 선물로 준 거예요. “나 여기 있습니다. 선물 가져왔습니다. 내가 선물이죠.” 마치 요즘 세대처럼 “생일선물 여기!” 하면서 자기 얼굴을 들이미는 것처럼. 가이사라는 보기보다 별로 얼굴이 안 좋다고 생각을 했는데, 안토니우스는 그 반대로 “세상에! 저런 절세미인이 있다니!”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가이사라(카이사르, 시저)가 B.C.44년 부루투스에 의해서 암살되고 난 뒤에는 그 휘하에 있었던 안토니우스가 됐는데, 그 후에 완전히 연애에 빠지고 말았어요. 클레오파트라한테 로마영토 자체를 넘겨주고 말았어요. 그러니까 이 원로원들이 가만두지 않고 들고 일어난 거예요. “이게 여자한테 빠져가지고 나라까지 다 팔아먹을 참이냐?”이래가지고, 그때 등장한 사람이 옥타비아누스라는 양자입니다. 가이사라 시저의 조카인데, 양자된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하고 클레오파트라하고 해전을 벌였는데, 그 해전이 유명한 악티움해전입니다. 거기서 대승리를 하고, 유대나라까지 옥타비아누스가 다 지배를 하죠. 그 옥타비아누스를 너무 훌륭하다 해서 황제라는 이름, 아우구스투스라고 칭해준 것입니다.
그 다음에 나온 황제가 티베리우스인데, 이 티베리우스는 뭐로 유명 하느냐 하면 갈릴리 바다를 ‘디베랴’라고 하잖아요. 이 황제의 이름을 따서 ‘디베랴바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칼리굴라인데 정신병자죠. 네로도 마찬가지고. DNA가 어떻게 된 건지, 전부 다 이상한 사람들이 왕이 됐는데. 그 티베리우스 시대에 동전을 보면, 앞면에 ‘지극히 거룩한 가이사의 아들 티베리우스’라고 적혀있고, 뒤에는 대제사장의 이름이 적혀있어요.
그러니까 앞면에는 ‘존엄한 아우구스투스의 아들인 티베리우스 케사르, 즉 아우구스투스(TI CAESAR DIVI AUG F AUGSTUS)’라는 글이 있었고, 그리고 뒷면에는 종려가지를 쥐고 앉아 있는 평화의 여신이자 황제의 어머니인 ‘리비아(Livia)’의 형상과 ‘최고의 제사장(PONTIFEX MAXIMUS)’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그렇게 동전이 통용되면서 자기 이름을 드러내고, 그 이름을 드러낸다는 것은 이 유대나라가 지배받는다는 그런 뜻입니다.
자, 그런데 그때 동전을 낸 이유가 뭐냐 하면, 로마에 인두세라는 것이 있어서 유대나라의 20세 이상의 남자는 전부 다 세금을 로마에 바치게 되어 있습니다. 전에는 그런 제도가 없었는데 티베리우스가 황제가 되고 난 뒤에 그런 제도가 생겨가지고 바리새인이나 이런 사람들이 굉장히 자존심 상하고 있었던 거예요. 어떤 분노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분노하는데, 예수 당신은 우리처럼 분노를 느끼지 않습니까?” 라고 시험을 한 거예요. “당신이 정말 우리 유대나라를 생각한다면, 로마의 압제에 있다는 이 서러움을 다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데, 우리의 서러움에 당신도 같은 생각으로 있지 않습니까?” 라고 시험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부추기기 위해서 온 거예요. “예수님 당신은 참되시고, 훌륭하시고, 모든 것에 실수가 없이, 모든 것에 완벽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는데,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는데, 그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는 당신에게 묻노니,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바치지 않는 것이 옳습니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이 뭐냐 하면 바치는데 강조점을 둔 거예요. 바치는데. 뭔가 바친다는 것. 그러면 세금의 주도권이, 실은 세금을 내라고 강요하는 쪽이 세금의 주도권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렇죠? 자기에게 세금을 내라고 명령이 왔으니까 세금을 내잖아요. 그러면 누가 갑이에요? 로마가 갑인 거예요. 로마가 갑이고, 세금을 내는 것은 즐겨내는 것이 아니고, 내라고 하니까, 안 내면 안 되니까, 갖다 바친 거라 이 말이죠.
그럼 갖다 바쳤으면, 어떤 식으로 갖다 바쳤든 간에, 이미 갖다 바친 것 자체에 기분은 뭐 좋지 않지만, 이미 종속되고 지배받는다는 것을 그대로 다 보여준 거예요. 사업하는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하잖아요. 나라에서 세금을 많이 내라고 해서 공장 못 하겠다고, 사업 못 하겠다고, 그런 이야기들 하잖아요. 모든 관점이 내가 낸다는 것, 자기가 세금을 냄으로써 나는 정당하다는,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서 세금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세금을, 대통령한테 맛있는 밥 사먹으라고 세금을 냅니까? 세금을 잘 쓰면 되잖아요. 잘 쓰면 되죠. “물세를 낼까요? 말까요?” 자기가 지금 물 쓰고 있잖아요. 물 쓰면 세금 내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자, 나라에서 세금을 거둔다고 할 때, 세금을 어디에다 쓰는 겁니까? 공공사업하기 위해서 많이 쓰죠. 공공사업하기 위해서. 요즘 같으면 아스팔트 다 깔고 국가기관사업도 그렇게 해야 되고. 현대에 와서 세금은 국가의 간접산업, 도로라든지, 여러 가지 항만시설 그런 것도 필요하고. 그리고 대외적으로 군대를 양성하는 데에도 필요하고.
요즘은 뭐냐 하면 취약계층에 대한 돌봄의 차원에서 돈이 또 쓰여 져요. 취약계층. 취업을 할 때는 또 재교육을 해야 되잖아요. 노동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여건을 발굴하는데 또 써야 됩니다. 이걸 평생교육이라고 하는데, 소위 복지정책 가운데 평생교육이 포함이 돼요.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노동형편, 여건의 경향에 안 맞고 뒤떨어지는 기술자 같으면, 이 사람으로 하여금 새로운 노동생산성을 위해서 필요한 기술을, 나랏돈을 집어넣어 차비 줘가면서 교육을 시켜가지고 경쟁력이 있는 노동생산성을 얻기 위해서 여기에도 필요하고. 또 취약계층이라고 하는 것은 부모가 없어서 밥 못 먹을 때 애들 도시락도 주고.
그리고 또 뭐가 필요 하느냐, 건강보험이죠. 어려운 사람이 자기 돈으로 치료가 안 될 때는 치료비를 보조해준다든지. 그리고 개인이 나이 들어 치매나 병든 부모를 집에서 돌보지 못할 때는 요양시설에 가는 모든 비용을 나라에서 다 대주고 하는 그런 것도 있고. 여러 가지 많이 쓰잖아요. 그러면 세금을 이렇게 잘 쓰니까, “내가 이렇게 한 국민으로서 세금을 내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이래 나와야 되는데. 질문 자체가 뭐냐 하면, “낼까요? 말까요?” 이렇게 해서 마치 세금을 안 내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한 도리인 것처럼, 그런 뉘앙스를 주는 거예요. 그렇죠.
세금내가지고 로마황제가 맛있는 거 사먹는 것이 아니고, 모든 건설, 나라에서 벌이는 공공건설은요, 이게 직장에서 쫓겨난 실업자들을 투입하는 겁니다. 심지어 20세기 중반 1차, 2차 전쟁이 일어나고 난 뒤에는 공공사업에 투자되는 인부들이 많아가지고 개인기업체에서 일꾼 한명 구하기가 힘들 정도에요.
그리고 미국에서 경제공황 일어나고 난 뒤에 ‘케인즈이론’이라고 해가지고 댐 지을 때 나랏돈 풀어서 노동자에게 임금을 줬고, 그들은 그 돈 가지고 소비를 했겠죠. 그러면 전체적으로 경제적인 소비활성화가 일어나는 겁니다. 그러면 기업도 소비자가 물건들을 사니까 계속해서 생산설비를 늘리게 되면 거기서 또 고용창출이 일어나게 되고. 그런 거예요. 그래서 세금이라는 것은 누가 착복을 하는 것이 아니고, 나라를 위해서 좋은 데 쓰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바리새인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우리가 로마 나라에 세금을 바쳐서 기여하면 기여할수록 그들은 힘이 더 강대해져서 누구를 압제하느냐 하면, 지금 하나님을 믿는 우리 유대나라를 더욱더 압제할 수 있는 힘을 키우는 셈이 되는 거니까, 우리를 더욱 확실하게 밟아달라고 하는 차원에서 그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돈을 지불하게 되면 우리 유대나라의 해방은 언제 오느냐? 이 말이죠. 점점 이거 불가능해지잖아? 이러는 겁니다.
그러면 왜 로마의 압제를 받으면 안 되는 거죠? 그것은 유대나라는 하나님의 나라기 때문에 하나님이 직접 우리를 통치해야 되지, 로마가 통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내리이까? 말리이까? 할 때에, 그들이 놓친 것이 있죠. 그들의 놓친 것을 예수님께서 끄집어서 이야기를 합니다.
그들이 질문하면서 놓친 것이 있어요. 뭐냐 하면, 하나님께 바칠 때는 이렇게 구시렁구시렁 할 리가 없다 이 말이죠. 이 바리새인들이 하나님께 바칠 때는.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다스림을 받기 때문에, 하나님께 성전세를 낸다든지, 이거 할 때는 내리이까? 말리이까? 그런 소리를 안 한다 이 말이죠.
질문의 요지가 그거에요. 우리 유대나라는 로마를 완전히 적대나라로 분리를 시키는데, 예수 당신은 여기에 동의하십니까? 라고 묻는 겁니다. 분리를 시키는 거예요. 분리를 시켜서 로마가 우리 유대나라를 지배하는 것은, 이것은 정상적이지 않다는 겁니다. 비정상적이고, 우리 유대나라는 하나님이 직접 다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직접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제사장에 의해서 다스림 받아야 한다는 거예요. 아까 동전이야기 할 때에 뒷면에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대제사장 가야바의 이름이 있고요. 앞면에는 그 당시의 통치자 티베리우스로 한 거예요.
그러니까 로마가 그 당시 유대나라의 전통적인 종교에 대해서는 인정을 한 겁니다. 정신적인 면에서 너희가 하나 되어 사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터치하지 않겠다. 하지만 실효적인 지배는 우리가 지배하기 때문에 세금은 내라. 세금을 내야 통치하고 있다는 그 실효성이 실제적이잖아요. 독도는 누구 땅? 독도는 지금 우리나라 경찰이 지키고 있잖아요. 실효적인 지배를 하고 있잖아요. 이런 상황을 유대인들은 이것이 정상적이지 않고 옳지 않다는 거예요. 우리 유대나라는 이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예수 당신의 생각은 우리와 같습니까? 라고 질문을 한 겁니다.
자, 그렇다면 그들은 나름대로 로마한테 세금을 내지 않는 세금을 자체적으로 거뒀는데, 그게 뭐냐 하면 성전세입니다. 성전세를 거두어서 자기들의 정체성, 자기들의 본질에 대해서는 꾸준히,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성전에서 제사 드리고 섬기자는 그 취지는 계속 지금 유지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뭐냐 하면 그들의 문제성이 있는 질문 자체에 도로 그들에게 해답을 주신 것이 아니고, 너희들의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식으로 되받아서 질문을 해버려요. 되받아 질문을 한다고요.
그 답변이 뭐였습니까? 동전을 가지고 오라고 했죠. 돈을 가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낸다는 것은 돈을 가지고 오는 것이니까, 돈 가져오라고 한 것입니다. 이 돈에 누구의 형상이 있느냐? 이렇게 물어요. 16절,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화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17절,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저희가 예수께 대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더라” 이래 되어 있어요.
예수님께서 도로 답변을 했다는 것은, 너희들이 하는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립이 안 된다는 것을 알려 줄 때에 그들이 도로 가져가는 거예요. 보통 면사무소에 서류를 냈을 때 다시 반송시키는 이유가 뭡니까? 서류가 문제가 있을 때는 다시 작성해서 오라고 돌려보내잖아요. 질문을 다시 돌려보내는 겁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지금 해야 될 것이 여기서 나타났습니다. 이들의 질문이 뭐가 문제냐 하는 겁니다. 질문이 뭐가 문제냐? 그걸 찾아내지 못하면 오늘 본문 해석은 완전히 성립이 안 돼요. 그들의 질문 자체가 뭐가 문제냐 하면은, 여러 번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본인은 문제가 없다.”라고 하는 것이 그들의 출발점이 돼요. “우리는 문제가 없다. 우리는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다.” 그렇게 하는 겁니다.
본인이 문제가 없다는 말은, 지금 이 상황이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라면 문제가 어디에 있다는 말입니까? 문제가 지배자 가이사에게 있죠. 티베리우스 황제. 문제가 거기에 있다는 거예요. 자기한테는 문제가 없고 가이사에게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세금 달라고 하는 가이사한테 따져야지, 예수님이 세금 달라고 했습니까? 아니, 예수님이 세금 달라고 했냐고요? “그거 가이사한테 줘야지.” 이랬습니까? 그러니까 누구한테 얻어맞고 와서는 화풀이는 지금 예수님한테 화풀이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그렇게 만만하니?”
세금 내라고 하는 사람이 공격대상일 것 같으면 그쪽에서 따져야지, 그걸 왜 예수님한테 따지냐 이 말이죠. “당신이 우리한테 세금 내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렇게 세금 내라고 한 사람한테 따져야지, 예수님께서 세금 내라고 했습니까? 왜 예수님한테 따집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따지려면 그쪽에 가서 따지라고, 문제를 다시 돌려보내는 겁니다. 왜 나한테 따지느냐 이 말이죠.
그리고 그들이 이렇게 질문을 하는 의도가 뭐냐 하면은, “우리는 하나님 믿는 사람이지, 세상 로마를 섬기는 사람들이 아니다.”라고, 그런 식으로 생각했잖아요. 그러면 그 불만과 그 답답함은 누구한테 따져야 합니까? 이거는 누구한테 따져야 합니까? 하나님한테 따져야 되죠. 전혀 예수님한테 따져야 할 사항이 아니라니까요. 너희들이 그렇게 좋아하고 그렇게 잘 섬긴다는,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을 그렇게 잘 섬긴다면, 하나님이 이뻐서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줄 거라 이 말이죠.
그렇게 평소에 하나님한테 잘했다면,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 잘 아시죠? 우리가 난처한 지경에 왔는데 하나님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하나님한테 따져야지, 왜 나한테 따지려 왔느냐 이 말이죠. 그들이 뭐 예수님 섬기고 싶어서 환장했습니까? “오! 우리의 하나님이여, 이 문제 어떻습니까?” 이런 자세로 온 거예요? 아니잖아요.
예수님을 이 땅에 오신 하나님으로 인정을 안 했잖아요. 문제의 갈등과 모든 것은 전혀 예수님과 무관한 거예요. 하나님한테 따지고 싶은 것은 하나님한테 따지고, 로마한테 따지고 싶은 것은 로마한테 따져라. 왜 나한테 따지느냐고 하시면서 질문을 다시 돌려보내는 겁니다. 지금 문제해결이 너무 간단하죠.
자, 그 다음에 봅시다. 그러면 그들은 하나님 섬기는 것과 로마를 섬기는 것을 병행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왜 했느냐? 그것도 문제에요. 왜, 예수님처럼 가이사에게 바칠 것은 바치고 하나님께 바칠 것은 바치는, 왜 이렇게 따로 되는 것이 자기들에게는 비정상적이라고 여기는 이유가 뭐냐는 겁니다. 그들은 세상을 볼 때에 정치적으로 본다고 이래 하는데, 정치적이라고 본다는 말은 뭐냐 하면 눈에 들어오는 식으로 보는 거예요. 그들은 이것을 가지고 현실이라고 보는 겁니다. 현실.
현실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요, 눈에 보이는 것을 중심으로 해서 그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신+인간=현실, 신 플러스 인간으로 이게 현실이 구성된다고 보는 겁니다. 신과 인간이 결합되는 것으로. 이 신은 여호와하나님이고, 인간은 본인들이죠. 본인들이 결합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직접 구현된다고 보는 거예요. 신과 인간이 같이 결합되는 이걸 현실로 보는 거예요. 왜? 인간은 여기 있고 신은 여기에 있으니까.
이렇게 결합된 것이 현실이라는 사실에 그들 본인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봤어요? 문제가 없다고 봤어요? 이렇게 하는 것이 문제없다고 생각한 거예요. 당연하다고 생각한 거예요. 인간은 본인들이고 신은 하나님이고. 하나님 나라에 이렇게 결합된 것이 문제없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리고 그걸 현실로 본 거예요. 그들은 뭘 놓쳐버렸어요. 이게 뭐냐 하면 현실이 겹쳐져있다는 것을 놓쳐버린 겁니다.
뭘 모르느냐, 그들이 언약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어요. 언약. 언약 자리에 누가 가있느냐? 본인들이 언약 자리를 깔고 앉아있는 겁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모세언약의 구현이고 완성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언약을 이루려고 왔죠. 그러면 문제는 그거에요. 예수님께서 언약을 이루러 왔고, 그리고 언약을 이루는 그 동네가 어떤 동네냐 하면, 인간이, 우리의 이름으로 언약을 이룰 수 있다고 우기는 그 동네입니다.
결국 문제는 뭐냐 하면 언약을 놓고, 모세언약이든, 아브라함언약이든, 하나님의 언약을 놓고, 이게 인간이 이룰 수 있는 것이냐 하는 것과 아니면 예수님만이 이룰 수 있는 것과의 그 사실을 이 사람들은 모르고 있는 거예요. 이 유대인들은. 본인들이 지금 언약을 구현하고 있다고 본 거예요. 지금 본인들이 언약을 구현하고 있는데, 누가 걸림돌이 되느냐 하면 로마의 통치가 걸림돌이 되는 겁니다. 자존심이 싹 상해버리는 겁니다. 자존심이.
그래서 본인들이 해결을 할 수 있어요? 없어요? 본인들이 해결을 할 수가 없죠. 해결이 안 되니까, 우리도 해결이 안 되니까, 아마 저 예수라는 저 양반도 안 될 것이라 하고, 그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한테 찾아온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인데, 왜 이 로마가 우리의 자존심을 긁으면서 세금을 내라고 강요를 하느냐, 당신 같으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을 할 것인가? 라고 할 때에, 너희들은 지금 해결 할 수 없는, 그 정도로 해결 안 되는 문제를 나한테 가져왔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하는 그 문제를, 그 문제지 그대로 돌려보내는 겁니다. 가이사 것은 가이사에게 내고 하나님 것은 하나님에게 내라. 그러면 그들이 예수님께서 시키는 대로 한다면 문제가 해결이 될까요? 안 될까요? 해결이 될 수가 없죠. 왜? 내기야 내겠지만 마음이 편치를 못하죠. 로마제국에게 인두세내고 세금을 내면서, “티베리우스황제님! 이것도 우리 하나님께서 시켜서 내는 것이니까 흔쾌히 받아주옵소서.” 이런 마음이 안 드는 거예요.
뭐냐 하면은, ‘내가 진짜 하나님께서 봐줘서 내는 것이지, 안 그러면 너는 죽었어. 내가 너희들이 억지로 내라고 하니까 내는 것이지, 우리가 즐겨내는 것이 아니야.’라고 껄끄러워하면서 세금은 세금대로 바치고 있는 거예요. 껄끄러워하면서. ‘두고 봐! 메시야가 감람산에 올 테니까.’
감람산이 어디냐 하면은, 예루살렘 옆에, 가봤으니까, 예루살렘 동쪽에 감람산이 있습니다. 감람산 제일 꼭대기에 예수님의 승천, 승천교회가 있고, 여기서 보게 되면 저 뒤에 여리고성이 보인다는 거예요. 제가 봤는지 안 봤는지 기억이 잘 안 나지만 보기는 본 것 같아요. 하여튼 여기는 겟세마네 기도하는 곳이 있고.
여기 감람산에 예수님께서 오셔가지고, 예루살렘 황금돔이 있고, 동쪽 성문을 통해서 입성하게 되어 있어요. 메시야가 오시게 되면. 스가랴서에 보면 감람산에 와서 예루살렘 동쪽 성문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 말이죠. 유대인들은 그때를 기다려요. 지금도 유대인들은 이것을 기다리고 있어요. 감람산에 와서 오게 되면, 그때 부활하니까, 다니엘서 12장에 보면 부활되거든요.
부활되기 위해서 유대인들은 여기 성전 문 앞에 촘촘히 공동묘지를 만들어놨어요. 그 공동묘지 동영상을 제가 올려놨나요? 안 올렸으면 올릴게요. 공동묘지가 쫙 있어요. 이거 기독교인 공동묘지가 아니에요. 유대인들 공동묘지에요.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메시야가 와서 일어나라! 하면 일어나서 같이 들어가기 위해서. 꼭 만화 같아요. 만화.
이걸 기다리고 있는데, 로마의 압제를 받으니까, 그들은 지금 압제받는 것을 이사야 53장과 연결시킵니다. 이사야 53장에 보면 우리의 고난은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한 고난이다. 자기들이 여호와의 종이라는 겁니다. 집단적으로. 여호와의 종으로 집단화시켜서, 의인화시켜서 우리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음을 입었다는 것이 바로 고난 받는 이스라엘 집단, 공동체에 해당되는 말씀이라고, 그들은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어요.
지금 로마가 와서 이렇게 고생하지만 언젠가는 이 고난이 끝나면 하나님께서 복수할 것이라는 그게 유대묵시문학에 보면 나와요. 유대묵시문학에 대해서 이번 수련회 교재, 교재 한 번씩들 읽어보셨죠? 쭉 읽어보니까 쭉쭉 내려가죠. 거기에 나와 있습니다. 이렇게 된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그들이 하고 있는 언약을, 언약의 주인공으로서 그들은 지금 아무 탈 없이, 아무 문제없이 잘 살고 있다고 우기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현실 속에 로마의 개입은 그들에게는 상당히 곤욕스럽고 당황스럽기 짝이 없는 거예요. 그냥 인내하고 참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 입장으로 봐서는 이러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 선지서나 모든 말씀에 대해서 왜곡되고 잘못 해석하고 있다고 본 거예요. 예수님께서는.
어디서 잘못되었느냐 하면, 인간이 있고 신과 결합되어서 하나님의 언약을 이룬다는 이 자체, 이런 경우는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발로 내치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과 인간은 결합이 안 되게 돼있습니다. 왜? 인간은 죄인이고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이 같이 협상하거나 타협하거나, 인간의 말씀 지킴을 하나님이 받으시고 하는 이런 것이 없어요. 성경 말씀은 인간에게 지키라고 준 게 아니에요.
왜 그러냐 하면은, 성경말씀은 만드신 분이 지키게 되어 있어요. 성경말씀은. 에어컨 고장 났을 때 일반사람들이나 아마추어들이 못 고칩니다. TV고장 났을 때도. 이거는 서비스센터에서 일하는 사람이 와서 고쳐야 되죠. TV나 에어컨을. 만드신 분이 어디에서 문제가 있고 하자가 있다는 것을, 만드신 분이 오셔가지고 “니한테 이런 하자가 있고 이런 잘못이 있기 때문에 말씀을 못 지키는 거야.”라고 알려 줄 때 비로소 우리는 자기 분수를 알고 자기 주제파악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묻기를 왜 성경에 쉐마, 쉐마, 이스라엘이여 들으라, 들으라, 이 말씀을 지키라, 지키라고 하는 그 이유가 뭐냐, 그럴 것 같으면 지키지 마라 내가 알아서 할게, 라고 이러면 됐지. 왜 지키라, 지키라, 하는 이유가 뭐냐, 하나님께서 지키라고 하는 그것은 일종의 드라이버 역할을 하는 거예요. 지키라고 함으로써 말미암아 우리 자신을 해부시키는 엑스레이 같은 겁니다. 말씀 자체가.
지켜라! 지키라고 요구할 때 우리는 거기에 자극을 받아서, 저는 이 정도로 지켰다고 거기에 뭔가 반응을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자극을 주게 되어 있다고요. 그리고 인간은 거기에 반응을 하면서, 이방인들은 못 지켰지만 우리는 이만큼 지켰다고 하는 자부심도 아울러, 부산물로 우리가 얻어 챙기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자기 의입니다. 자기의가 생기게 되어 있다고요.
어떤 사람이 만약에 모태신앙이라서 60년 교회에 다녔다. “나는 뭐 교회 다니고 뭘 해도 주님 말씀 지킨 것은 없고 맨날 죄지은 것밖에 없어.”라고, 그런 고백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못났지만 그래도 교회는 다녔고, 못났지만 뭐 이렇게 헌금은 했고, 꼭 자기가 할 수 있다고 자부하는 것 있잖아요. 자기가 남보다 더 뛰어나다는 그런 것을 챙기면서 간직하고, 훈장처럼 달고 다닌다 이 말이죠. 그걸 유대인들이 그렇게 한 거예요.
하나님이 언약을 이루는데 있어서 언약의 현실은, 현재 유대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면서 자기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우기는 이것 전체가 오류고, 잘못된 것이고, 가짜라는 것을 지적하시는 그분으로 인하여 언약이 제대로 펼쳐지는 겁니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오늘 본문의 해석으로 들어가 봅시다. 지금까지 그냥 서론이었습니다. 본론은 이래요. 언약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고, 언약 사건을 일으킵니다. 언약은 언약사건을 일으켜요. 그런데 인간들은 언약을 보면서, 모세율법을 보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인정하기 위해서 언약을, 율법의 법을 지켜요. 법으로 이해해서 자기 존재를 확고히 합니다.
그러면 이건 존재가 되지, 이건 사건이 아니에요. 존재는 백날 해봐야 자기 존재를 잊을 수가 없고, 자기 존재를 계속 유지하게 되어 있어요. 사건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예상되는 것이 아니고 우발적이에요. 존재에서 예상되는 것은 사건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존재에서 예상되는 것은 사건이 아니에요. 사건이 터져버리면 자기 존재에 대해서 내가 어떤 인간인지 되묻게 되어 있지, ‘아, 나 그거 알았어.’ 이래버리면 뭐가 부각이 되느냐면, ‘역시 내가 예상한대로 맞았어.’ 이렇게 자기 존재가 더욱더 공고히 된다니까요.
애가 평소에 공부 되게 못한다. 맨날 꼴찌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전교 1등 했다. 그러면 그때 뭐라고 합니까? 사건이라고 하죠. 그리고 뒤에 하는 말이 뭐냐, “누굴 닮아서 저런 천재가 나왔지?” 이러거든요. 자기 존재에서는 저런 천재가 안 나오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 전교1등이라는 사건이. 정말 사건이죠. 정말 기적이고 사건이라는 말이죠. “누굴 닮아서 저런 게 나왔지?” 너무 좋아가지고. 또 반대로도 할 수가 있죠. “누굴 닮아서 저렇게 칠칠맞나?” 하는 것도 있지만.
사건은, 인간의 존재에 존재가 되기 위한 근원에서 사건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 사건이 옴으로 말미암아 존재가 이 사건을 유발하는 원인이 안 돼요. 그러면 이 존재는 무, 있으나마나한 존재가 돼버립니다. 예수님께서 언약을 들고 왔다는 말은, 우리는 예수님 앞에서 있으나마나한 존재에요. 죽어도 괜찮아요. 죽어도 북한말로 “일 없습네다.”에요. 죽어도 상관없어요. 죽어도 그만이고 살아도 별 볼 일 없는. 그게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우리의 초상화에요.
주님 앞에서 울지 마세요. 뭐 잘났다고 우냐 이 말입니다. 뭐 잘났다고 우냐 이 말이죠. 울기는 왜 울어요. 운다는 것은 자기 존재에 대한 집착을 못 버렸다는 뜻이거든요. 집착을. 뭐 전립선이 어떻고 무슨 약을 먹어야 되고. 전립선은 처음 사건에서 나온 거예요. 죄를 지었으매 저주로, 저주의 증상이에요. 전립선으로 죽지 않아요. 죄로 말미암아 죽지. 그것도 진작 죽어야 돼요. 그동안 살아온 것도 오버한 거고, 밥 먹여주고, 공기주고, 심장 뛰게 해준 것도, 이거는 갚을 수 없는 은혜입니다.
우리의 존재가 십자가 앞에서는 뭐로 바뀌어야 하느냐 하면, 내가 이렇게 살아온 것이 희한한 일이고 기적으로 여겨야 하는, 사건의 다발로 여겨야 됩니다. 우리 자체를.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사건이 나로 하여금 여기에 있게 하신 거예요. 그러면 나의 존재의 원천을 내 존재로 마감되면 안 되고, 이 존재가 없는 데서 있게 한 그 원천까지 나가야 하는데, 나가는 방법은 없어요.
존재에서 백날 후벼 파야 중(스님)밖에 안 돼요. 백날 “나는 무엇이냐?” 그래가지고 밖에서 자물통으로 문 잠그게 하고 벽보고 도닦아봐야 20년 전에 헤어졌던 자기 애인만 생각날 뿐이에요. 나의 아저씨 드라마이야기입니다. 17번 tvn에서 하는 그런 드라마가 있어요. 지금은 끝났어요. 백날 도닦아봐야 존재가 자기 존재를 후비니까 이게 말이 돼요? 물에 빠졌는데? 자기 신발 끈을 잡아당기면 발부터 들리지, 자기 머리는 밖으로 나올 수가 없잖아요.
존재의 원천은 인간이 아무리 도를 닦고 말씀 지켜도 이 존재를 존재케 한 그 원천적 사건으로 갈 수가 없어요. 인간은 언약에 의해서 이 땅에 존재로 있었기 때문에, 언약사건을 경유해야 우리 존재의 원천에 도달될 수가 있습니다. 언약사건. 근데 사람들은 언약이 율법으로 주어지니까, 법으로 주어지니까 눈에 보이죠. 모세율법이. 눈에 보여 지니까, 눈에 보이는 자기 존재하고 율법하고 직접 연결시킨 거예요.
저 말씀을 내가 지키리라! 그러니까 지키면 지킬수록 누가 강화됩니까? 누가 아까운 거예요? 내가 더욱더 아까워진 거예요. 개떡같이 할 때는, 세리와 강도와 창기가 될 때에는 그냥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했는데, 점점 말씀을 지키고 교회에 충성했다는 그 의식이 존재 안에 가득 들어오니까, 아까워서 못 죽어요. 아까워서.
자식은 교도소에 가있고, 아내는 애 셋 두고 편지도 안 남기고 수 년 전에 저기 어디로 가서 누구하고 살림 차려 살고, 자기 노모는 치매 걸려 병들어 있고, 자기는 관절이고 뭐고 온 몸이 다 아파있을 때에, 이때에 죽는다고 해서 누가 욕 할 사람 없어요. 왜? 주위에서 얼마나 말을 했겠어요? “아이고, 나 같으면 벌써 죽었다. 그래가지고 왜 사나.” 주위에서 죽어라! 죽어라! 죽으라고 부추겼는데, 그 사람 죽을 때는 별 아쉬운 게 없죠. 그런데 애 키웠는데 서울대 법대가고, 이거는 그야말로 천재가 되어가지고 대학교 3학년 때 사법고시 123차 다 되어버리고, 딸은 또 외모로 합격해버리고, 아내는 너무 잘돼가지고 외무부 장관하고 있고, 머리 하얘가지고. 이거 뭐 주식을 했는데 주식도 잘되고. 그래서 자살해야 합니까? 그래서? 아까워서 자살 못하죠. 아까워서. 눈들 보니까 뭐 아까울 것 없다는 눈들인데. 그럼 뭐 배짱인가?
세리와 창기와 강도가 너희들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간다는 그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이해하시겠습니까? 바리새인들은 왜 그렇게 아까워하는 거예요? 착실하고 고귀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영혼은 순전하고, 순결하고, 찬란하고, 영롱하고, 매끈하고, 따뜻하고, 흠 없고, 순수하고. 거기에 비해서 세리들은 지저분하고, 더럽고, 저런 인간 빨리 죽어라! 이래 되고. 그래서 바리새인이 한 유명한 말이 있죠. “나는 저들과 같지 아니하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하나하나 다 놀라운 것이지만, 정말 놀라운 것은 뭐냐 하면 저 세리와 창기가 바리새인보다 먼저 하늘나라에 간다는 이 말이(마21:31), 정말 충격적이에요. 참으로 충격적입니다. 전복을 했죠. 바다에서 나오는 그 전복 말고, 뒤엎어버리는 것. 완전히 바닥 자체를, 양탄자를 깔아놓은 그 바닥을 완전히 뒤엎어버리는 겁니다. 존재의 층을 완전히 뒤엎어버려요.
현실에 그런 식으로 사건이 와버린 겁니다. 그러면 이건 뭐냐 하면, 겹쳐진 현실이에요. 겹쳐진. 겹쳐진 현실이라고 하지 말고 오늘 강의에서는 겹쳐진 공간이라고 하겠습니다. 겹쳐진 공간이에요. 공간이 겹쳐진 겁니다. 그걸 페트로토포스Petrotópos라고 하는데, 다른 공간이에요. 다른 공간. 다른 공간이, 이 세상에서도 다른 공간이 있어요. 다른 공간을 제가 두 종류로 나누겠습니다.
세상에서의 다른 공간은 일탈의 공간입니다. 일탈의 공간. 점잖은 체하는 남자들이 가는 곳. 사창가나 노래방. 그 장소가 어떤 장소겠습니까? 일탈할 수 있는 곳이죠. 여기가면 숨이 통하는 곳. 빡빡하게 참아야 돼! 참아야 돼! 하다가, 여기서는 참습니까? 안 참습니까? 뭐 폭탄주, 쭈르륵 도레미파솔라시도~ 폭탄주 제조해서 폭탄주도 먹고, 마음껏 터트리는 겁니다. 젊은 20대 같으면 나이트클럽 같은데. 바로 다른 공간이에요.
애들 같으면 집안에 있는 인디언텐트. 인디언텐트 알죠? 방에 안 들어가고 인디언텐트에 들어가요. 거기는 자기만의 은밀한 공간이에요. 그리고 아빠의 침대 위, 그 침대 위에 이불 놓여 있잖아요. 이불이 볼록 튀어나온 데는 산이고 움푹 들어간 곳은 골짜기고. 애들 세계에서는 그게 자기만의 영역이 돼요.
페트로토포스에요. 다른 공간을 만드는 거예요. 그런데 어른들이 보게 되면 그냥 이불이에요. 이불. 이불이 우발적으로 형태가 이렇게 짜여진 거예요. 보면 그냥 평범해요. 근데 애들 보기에는 그 하나의 공간이 자기가 봤던 그 동화의 세계를 거기다가 다 담을 수가 있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