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180427b 마가복음12장 1-10절(심각한 것)-이 근호 목사
첫째 시간 끝에 있는 것을 다시 해볼게요. 예수님에게 우리가 사랑해달라고 요청하면 안 되는 이유가 이미 내 것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것이 있어버리면 이 우주가 돌아가는 것이 내 구원을 위해서 돌아가는 거예요. 그러면 이거는 구원론 중심이 됩니다. 이제 제가 구원론 중심이 아니고 예수님 중심이라는 말을, 여러분들이 이제는 좀 정리를 해야 돼요.
왜 구원론 중심으로 하면 안 되느냐 하면 평소에 우리의 행동이 내 것 지키는 것이 최고의 환원적인 사고방식이에요. 마지막 돌고, 돌고 끝까지 가게 되면 ‘역시 나만 구원받아야 돼. 나만 살아남아 돼.’ 이런 생각이 마지막에 있어요. 마지막에. 그 생각이 과연 하나님의 뜻이냐에 대해서, 아무도 거기에 대해서 물어보지도 않고 거기에 회의를 느끼지도 않아요. “당연하잖아.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이시니까 나를 구원해야 돼.” 이래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호와 증인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사랑이실 것 같으면 니만 구원받으면 돼? 인간은 다 구원받아야지.”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여호와 증인은 뭐가 없느냐 하면 지옥이 없어요. 교황하고 똑같아요. 지옥이 없어요. 왜? 하나님은 사랑이시니까. 근데 기존교회는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해놓고는 지옥이 있다는 거예요. 이게 모순된다 이 말이죠. 모순되잖아요. 모순돼서 하는 말이 뭐냐 하면, ‘그래, 남들은 지옥가도 괜찮아. 지옥이 있어도 괜찮아.’ 그러니까 누구만 안 가면 된다? 나만 지옥 안 가면 된다는 겁니다.
평소의 자기의 속내, 자기의 심보를 그대로 교회 와서 다 드러내고, 신학을 하면서 다 드러내고, 신학박사가 되어서 다 드러내는 거예요. 지금껏 교회가 그래왔습니다. 구원론이 아니에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어주면서 구원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뭐냐 하면 그렇게 요청하는 나 자신이, 내 것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그 내 것이 무슨 요건이 되느냐 하면, 최후의 요건이, 요소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내 것을 포기하겠습니다.”라고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끝까지 우리는 뭘 주장해야 되겠습니까? 내 것, 그리고 내 구원, 내 천국을 고집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이야기가 아주 이상하게 흘러가죠. 이야기가.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면, 내가 가지고 있는 뜻과 하나님의 뜻을 바꿔야 되는데, 그때 바꿔버리면 시편 118편 22-23절에 나오는 이야기가 안 돼요. 거기에 보면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누구의 행하신 것이다? 여호와가 행하신 일이라니까요.
여호와가 행하실 일인데, 본인은 본인이 구원받기 위해서 나쁜 나를 버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것을 내가 채워 넣겠다고 하는 이것은, 여호와의 행하심이 아니고 나의 행하심이죠. 나의 행하심. 이거는 지금 꼼수를 쓰고 있는 거예요. 트릭 쓰고 있는 겁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에 대한 정보를 빼내요. 빼내가지고 내가 어떻게 하면 천국에 갈 수 있는, 필요한 정보를 모아놓고 그것을 어디에다 집결시켜놓느냐 하면 내 마음에다가 집결시켜놓습니다.
그렇게 집결시켜놓으니까 내 마음은, 내 마음 이건 어떤 경우냐 하면, 내 마음은 정상이다. 내 마음은 정상적이라는 조건하에 그걸 끌어 모을 수 있는데, 성경에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까 이야기했듯이 예수님의 언약이 오게 되면 우리의 마음이 정상이 아니고, 아들을 필히 죽이고, 아들을 싫어하고, 아들을 때려죽이는 그런 마음으로 통치 받고 있다는, 불순종으로 통치 받고 있다는 사실을 노출시키는 방식으로 예수님께서 오신다 이 말이죠. 이게 지금 성경이야기잖아요.
아니, 지금 포도원을 지었는데, 주인이 타국에 가면서 세를 줬다. 세를 받으려고 종들을 보냈는데 때려 죽였다. 아들 보냈는데 죽였다. 그래서 임금님이 와서 진멸했다. 지금 이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냐 하면, 그러니까 알아서 기어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니가 알아서 어떻게 하든 간에 이거는 필연적이라는 겁니다. 필연적. 필연적이라니까요. 이 모든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운명을 알아냈다. 요새 그런 이야기가 유행을 해요. 옛날부터. 방탄소년단이 불렀던 DNA에 그런 가사가 나와요. 가사 한번 보세요. “우리 만남은 수학의 공식, 종교의 율법, 우주의 섭리, 내게 주어진 운명의 증거, 이 모든 건 우연이 아니니까, 운명을 찾아낸 둘이니까.”
이 세상은 내가 하는 데에 있어서, 내 구원에 내가 스스로 협조가 안 됩니다. 이거는 어쩔 수가 없어요. 그냥 X-ray찍는 것처럼, 그 CT촬영하는 것에 들어갔을 때처럼 우리는 무저항적이에요. 내가 갖고 있는 것은, 내가 감춘 것조차도 예수 십자가 앞에서 그대로 완전히 노출되어야 합니다. 잘났다는 우리가 엑스레이 사진에 나온 갈비뼈를 앞에 보여줘야 돼요. 그리고 그것은 그냥 찍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결국 우리의 운명은 흙에서 와서 그냥 바스러지는, 바짝 마른 흙이 손가락 사이로 빠지듯이 다 없어집니다.
우리는 없는 거예요. 잠시 있어 보이지만 곧 없어질 거예요. 그 잠시 있는 이유는 주님의 언약, 주님의 완성됨을 드러내기 위해서 잠시 이 땅에 와서 이 소리를 듣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또 걱정을 해요. 그럼 우리가 죽어서 흙이 돼버리면, 우리가 천국 가려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가 다시 살 수 있습니까? 이런 걱정을 하시는데, 요한복음 1장에 보면 그 분이 바로 생명이죠. 그분이 생명이라면 우리는 죽음이고, 그분이 빛이라면 우리는 어두움이고, 짝을 이루어야 돼요.
예수님이 안 오시면 내가 최종적인 가치가 있어요. 그러나 누구의 짝은 아니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빛으로 오실 때 갑자기 우리는 그 앞에서 어두움이 되고, 그분이 생명이니까 졸지에 우리는 죽음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게 되면 죽었던 우리 속에서 뭐가 피어납니까? 예수님의 생명이 나오잖아요.
미사일 비밀기지가 수풀로 덮였는데, 미사일이 발사가 되면, 수풀로 덮인 호수처럼 생긴 그 비밀기지가 양쪽으로 열리면서 발사가 되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비밀기지가 되겠죠. 바로 성도라고 하는 것은, 쏘세요! 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생명을 쏘기 위한 활 같은 역할. 예수님이 화살이라면 화살을 쏘기 위한 배경역할을 하는 거예요. 배경역할.
그 이야기가 지난 수요일에 한 설교입니다. 원천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죠. 원천. 오목사님이 녹취하셔서 알죠. 근원에 대해서 이야기한 겁니다. 라헬이 애기를 낳으면서 뭐라고 했습니까? 베노니 라고 했죠. 베노니. 라헬 가정에 언약이 오면서 남편에게 종속되었던 여자가 남편에게 분리되어서 남자 따로 여자 따로가 됩니다. 왜냐하면 의견이 다르니까. 이 갈라진 틈을 통해서 언약이 자유롭게 튀어나와버리죠.
언약이 튀어나오면서, 언약이 있던 우리의 옛날 모습은 슬픔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자는 죽죠. 남편이 하는 말이 그 슬픔이 아니고, 언약이 나옴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을 품고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오른손의 아들, 베냐민으로 바꿉니다. 그동안 슬펐던 이유는, 세상적인 것이 이 근원과 원천을 숨 막히게 꽉 눌러놓고 계속 닫아놓은 거예요. 닫아놓으면 누가 원천이 되겠습니까? 내가 원천이 되죠.
그러면 시편 118편 22-23절에 나오는, 그리고 오늘 본문 마가복음 12장 10절에 나오는, 건축자들의 무슨 돌이죠? 버린 돌이죠. 버림이라는, 버림받았다는 이 절차는 우리가 시작한다면 이 절차가 안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버림받기 싫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께 버림받는 것을 내가 싫어요. “지옥 가!” “싫어요.” 우리는 버려진다는 것, 저주받는다는 것, 이 자체가 다른 사람에게는 일어나도 나에게는 일어나지 마세요. 이래 되는 겁니다. 다른 사람은 실패해도 나는 실패하면 안 돼. 다른 사람은 지옥가도 나는 천국 가야 돼. 우리의 고집은 버림받기 싫어하는 고집이에요.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에 의하면 반드시 시편 118편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버림받은 돌만이 새로운 돌이 돼요. 그 절차를 이루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이 언약 속에 들어와서 먼저 사람들에게 버림받는 겁니다. 자, 이제부터 여러분들이 좀 힘들더라도 참아주시기 바랍니다. 이제부터 어려워요. 마가복음 12장 10절에 나오는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기 위해서는, 이게 먼저 있어요. 돼요.
뭐냐 하면, 없는 것이 나와야 됩니다. 없는 것. 아마 철학에서 따진다면 난이도 어려운 대목이 이 대목이에요. 왜냐, 없는 데서는 아무것도 안 나오게 되어 있어요. 왜? 없는 것은 없기 때문에. 없다는 말은 없는 거예요. 없으면 있는 것과 연관이 안 됩니다. 모든 세상은 반드시 뭔가 있기 때문에 있는 거예요. 현대 물리학, 양자물리학도 없는 데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있는데 안 보여서 그렇지, 있긴 있다는 거예요.
파동에너지가 뭉쳐지면 물질에너지가 된다. 이게 바로 빅뱅의 이론이거든요. 반드시 뭐가 있어요. 파동이 있든지, 에너지가 있든지. 에너지가 파동이 되고, 파동이 뭉쳐져서 물질이 되고. 그런 거예요. 그러면 뭔가 있잖아요. 있기 때문에 있는 거예요. 그래서 물리학이나 천문학을 계속해서 파헤치는 것은 뭐냐, 이 있음을 있게 한 그 근원적인 그 있음은 뭐냐, 있음, 있음, 있음..., 계속 가는 겁니다.
머리가 아픈데 병원에서 병명을 모른다. 그러면 병명을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검사를 하죠. 무슨 검사냐 하면, 세균검사를 해요. 왜 세균검사를 합니까? 세균이라는 것은 눈에 안 보이지만 새로운 박테리아나 새로운 병균이 우리가 모르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가 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병균을 배양시켜가지고, 핏줄 속에 어떤 세균이 작용을 했기에 기존의 약 가지고는 왜 낫지 않는가를, 계속 병원에서 임상실험 하듯이 계속 해나가는 겁니다. 혹시라도 새로운 박테리아나 병균이 생겨났는가를 조사하는 거예요. 그 의식이 뭐예요? 반드시 병균이 있는데서, 병을 옮기는 그 있는데서 그 있음으로 인해 병이 생긴다. 이래 보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게 아니에요. 아무리 봐도 없는데서만 있는 것이 나와요. 이 말이 뭐냐 하면 있는데서 천국가려고 하는 모든 시도는 실패로 끝난다는 겁니다. 있음이 있음을 포기를 못하기 때문에. 결국 불교의 중들이 실패한 이유가 뭡니까? “나는 없다. 나는 없다.”라고, 백날해도 없다고 하는 난 있잖아요. “무다. 무는 뭐냐, 그냥 흩어진다. 흩어지면 다시 모은다.” 불교에서는 뭐냐 하면 나는 없어져도 내가 해체된 조각조각은 이 우주를 장식한다는 겁니다. 그게 다 하나의 인연처럼 느껴져 가지고, 다음에 태어날 때는 개로 태어나든지, 닭으로 태어나든지.
이런 경우가 있어요. 부부가 있는데, 한 사람은 남자로 태어나고, 한 사람은 여자로 태어나서, 아내와 남편으로 태어났는데, 너무 서로 성질이 안 맞아서 다음에 태어날 때는 여자가 남자로 태어나고 남자가 여자로 태어나고. 그래가지고 전반전에 구박받은 거 후반전에 가서 조져놔 버리고. 그런 발상을 한다는 게, 어쨌든 간에 있음의 비밀,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의 비밀은 분명히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 있음을 계속해서 추적해가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합시다. 있음, 흔한 말로 해서 존재죠. 존재는 계속 더 작은 존재, 더 근원적인 존재를 찾아갈 때에 화살표가 어떻게 됩니까? 현재 있음에서 이렇게 찾아가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없음에서 찾아오죠. 없음에서 이 땅에 말씀이, 말씀이 뭐가 됐죠? 말씀이 육신이 됐죠. 눈에 보이죠. 육신으로 오니까, 이 인간의 육신과 예수님의 육신 사이에 소통이 안 되잖아요. 주님이 말씀하시면 “어이가 없네.”라고 하죠. 터무니없는 이야기에요. 어이가 없고 터무니없는 이야기로 밖에는 안 들려요. 터무니없는 이야기. 없음에서 나오니까.
자, 그런데 지금 우리가 해야 될 것은 기존의 신학에서도 도저히 풀어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없는 것에서 나온다고 할 때에, 그걸 어떻게 파악을 하고 어떻게 아느냐 하는 그 문제입니다. 그 문제를 해보겠습니다. 없는데서 나온다는 이걸 다시 이야기해보면, 건축자의 버린 돌이죠. 버린 돌. 없음이 이 지상에 올 때는 어떤 기능인데, 어떤 기능이냐 하면 버림받는 기능.
그것도 소수에게가 아니라 모든 이에게, 인간이냐? 그럼 인간 총집합! 모든 인간의 총수, 모든 인간의 총집합에 의해서도 소속되지 못하고 버림받는 기능으로. 이 기능이 버림받음이거든요. 기능으로 나올 때, 그것은 바로 없는 것이 된다는 겁니다. 이거는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버림받음으로 시편 118편 22-23절이 이루어지니까. 그리고 여기 마가복음 12장 10절도 이루어지니까.
제가 낸 가설이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이 그래요. 예수님 자신을 소개할 때, “나는 너희들에게 속하지 않은 없는 세상에 왔다.”라고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버림받는 것을 통해서 너희들이 속한 세계와 내가 속한 세계와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마치 사람들이 다니는 길하고, 차가 다니는 길하고 다르니까, 보통 공사할 때 턱을 만들잖아요. 턱. 아스팔트 도로는 약간 낮고, 사람 다니는 보도블록은 약간 높게 되어 있잖아요. 큰 트럭이 아니고 보통 승용차는 아무리 쌔게 달려도 그 턱을 못 넘게 되어 있어요.
그 턱을 못 넘지만 보통 볼 때는 턱이 잘 안 보니까. 나란히 가는 것으로 보이죠. 그런데 거기에는 소위 이쪽에서는 건널 수 없는 이 턱이 있는 거예요. 턱이. 턱이 뭐로 구분된다? 사람들에게 버림받는 거예요. “너희들은 나를 버려라!” 이 말이죠. “세상아! 나를 좀 버려 도!” 이 말이죠. 너희가 나를 죽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내가 스스로 죽는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0장에서. 스스로 죽기 위해서 왔어요. “너희들은 죽음이 무섭지? 나는 마땅히 죽어야 돼.” 그렇게 되는 겁니다. 상당히 특이하죠.
그런데 지금 이래서 어려운 게 아니에요. 이 없는 기능은 버림받는 것으로,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 기능은 쉬운 건데, 문제는 이 버림받는 기능을 하셨다고 할지라도, 그러니까 그분이 메시야라고 하는 것을 어떤 식으로 알아채느냐 하는 문제죠. 이게 문제가 되죠. 어떤 버림받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니까. 개나 소나 외치다가 교도소에 가놓고, “나는 정의를 위해서 온 메시야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많이 있잖아요.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자기가 고생을 자처해놓고, 마치 자기가 고생하니까 주의 종인 것처럼 그렇게 행세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자기가 자기 스스로 자기 인생을 조작해내는 겁니다.
그러면 이걸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걸 예를 들어서 쉽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돌이켜 어린아이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고 했는데. 제가 보기에는 아기와 아이의 차이점은 아이는 스스로 걸을 줄 알 때부터를 아이라고 하고. 이거는 제가 정한 겁니다. 아기는 네 발로 기어 다니는 것을 아기라고, 이렇게 임시로 봅시다. 아기가 알아듣고 행동하던가요? 그냥 행동부터 먼저 보여주던가요? 그냥 행동부터 먼저 보여주죠.
인간들이 예수님을 미워한다. 이게 예수님을 알고 버리는 겁니까? 이유 없이 그냥 예수님이 미운 거예요? 그냥 예수님이 미운 거예요. 그 이유라고 하는 것은 추후에 주어지는 거예요. 추후에. 추후에 성령이 와서 주어지는 겁니다. 제가 이 말을 하는 이유는 뭐냐 하면 사람이 착해질 수가 없다는 거예요. 성령이 온다고 해서 착해질 수가 없어요.
성령이 오게 되면 뭘 아느냐 하면 우리가 하는 행동 모든 것이, 그냥 본능대로 움직이는 아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거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우리가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는 내 생각보다, 내 이성보다, 내 오성보다 내 본성이나 욕구가 먼저 나를 지배하고 있어요.
칸트 라는 철학자는 오성과 이성을 나누었습니다. 오성이라고 하는 것은 경험된 것을, 세상을 측정하는 체계를 가지고 정리해나가는 것이 오성이고. 경험된 것, 감각된 것, 이것을 가지고 정리한 것이 오성이고. “해가 뜨면 낮이구나. 해가 지면 밤이구나.” 이게 오성이고. 이성은 뭐냐 하면 그것을 추상적으로 정리한 게 이성이라고 하는 겁니다. 추상적으로. 그러니까 이성보다 오성이 사실은 더 동물성에 가까운 거예요.
칸트는 이 두 가지밖에 이야기를 안 했는데, 프로이드는 이거보다 더 내려갔어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무의식의 세계입니다. 이성과 오성은 의식세계잖아요. 이건 무의식세계에요. 본인이 하는 모든 행동이 무의식에 기반을 두고 하는 행동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을 뒤늦게 수습하는 것은 이성적이고, 오성적인 행동이지, 그것을 수습한다고 해서 결코 그 행동을 두 번 다시 안 한다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본인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가를, 그 이유를 찾아낼 수가 없어요. 뒤늦게 수습한다는 식으로 그 이유를 언급할 뿐이지, 사실은 그것은 구차한, 비겁한 변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근데 그 구차한 변명과 같이 따라오는 것이 뭐냐 하면 자꾸 책임을 지려고 해요. 책임을. 이것은 뭐와 관련되어 있는가 하면, 이건 자기 의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나쁜 짓을 했으니까 내가 책임져야죠.” 본인이 결심하고 본인이 선택해서 그 일을 했다면 책임져야 되죠.
그러나 인간은 “내가 이걸 선택했습니다. 내가 결심했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한참 후에, 이미 행동이 벌어지고 난 뒤에, “나는 동물이 아니고 인간입니다.”라는 식으로, 자기가 점잖은 인간이라는 것을 수습하려고, “그때 내가 술 한 잔 먹고 그렇게 했습니다.”라고, 뭐 이렇게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듯이 하는 이것이 이성인 거예요.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잖아요. 율법을 준 것은, 저주 속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율법을 줬지, 그 율법을 가지고 새삼스럽게 정신 똑바로 차리고 회개해가지고, 이제는 두 번 다시 그런 나쁜 짓을 하지 말라고 율법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주신 것을 인간이 알아요. 그래서 율법을 주신 분이, 그 율법을 누가 회수하느냐, 율법을 만드신 분이 율법을 회수합니다. 그분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잖아요.
시편 118편 22절에 나오는 건축자들이 버린 돌, 이건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에요. 누가 하느냐, 예수님 본인이 그것을 수행합니다. 왜? 여호와의 행하심(시편118:23). 이쪽에서는 주로 말미암아 된 것(막12:10). 그러니까 결국에 본인이 해야 될 것을, 본인이 이 말씀을 던지고 하는 거예요. 그럼 인간의 역할은? 인간의 역할은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에 대해서 버려야 될 일을 인간이 해야 되겠죠. 예수님을 버린 자가 되기 위해서.
그런데 그거는 하기는 해요. 하기는 하는데,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그걸 어떻게 압니까? 라고 했잖아요. 그걸 어떻게 압니까? 내가 이 세상에서 하는 내 행동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짓이라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하는 거예요. 안다는 문제에 있어서 악인은 행동부터 먼저 해놓고, 다른 말로 하면 아기가 그 행동을 해놓고, 아기가 한 그 행동에 대해서 뒤늦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부모가 부여하는 거예요. “에구! 에구! 이거 기는 것 좀 봐라. 젖 먹으려고 기는 것 좀 봐라.” 젖 먹으려고 기는 것이 아니고, 젖이라는 단어를 몰라요.
그냥 배고픔을 품고서, 그냥 기계에요. 기계. 배고픔! 배고픔! 그러면서 그냥 다가오는 거예요. 왜, 배고프면 라면 끓여먹지? 라면 안 돼. 젖이 좋아! 라면 싫어! 왜 싫은데? 몰라. 아기기 때문에. 배고픈데 피자나 시켜먹을까? 하면서 띠띠띠띠띠띠~ 전화하는 이런 아기 없어요. 나는 뭘 좋아하고, 뭘 해야 하는가, 그건 본인이 결정하는 게 아닙니다. 라캉은 자아가 없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는데, 자아가 없는 것이 아니고, 그냥 아기들은 기계에서 막 나온 지가 얼마 안 됐어요. 세포덩어리들이라니까요.
기계라는 말은 누가 외부에서 조종을 해주고 있다는 뜻입니다. 본인이 본인 스스로 그걸 결정하고 결심하는 게 없어요. 이성적인 입장에서는, 사람이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서로의 건전한 결심과 결단과 그리고 시민의식과 예의 지키기, 법질서 지키기, 이런 것을 통해서 건전한 공동체를 이루자고 보통 이야기들을 하잖아요. 법을 어기면 책임지기 위해서 교도소에 가고, 유치장에도 가잖아요.
그건 뭐냐 하면, 인간들이 이 공동체라고 하는 것을, 이번 여름수련회에서 이걸 할 거예요. 공동체라고 하는 것을 인간들이 추상적으로 만들어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공동체. 근데 공동체라고 하는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없어요. 공동체가 없어요. 왜 없느냐 하면, 공동체가 사실 있다가 없는 이유는 뭐냐 하면 본인이 살아있을 때만 공동체에요. 본인이 늙어죽으면 공동체가 어디에 있습니까? 공동묘지에서 귀신들 공동체가 따로 있어요? 그런 것 없죠. 귀신들이 어디 계모임 할 일 있습니까?
공동체라고 하는 것은 공동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내가 여기 살아있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공동체 운동을 하는 겁니다. 내가 여기 살아있음 때문에 공동체, 국가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은 거예요. 왜 대한민국을 선호하고 왜 좋아합니까? 그 안에 누가 살아있기 때문에? 내가 살아있는 거예요. 내가 살아있다. 이건 이미 아기가 아니고 수상한 아기에요. 자기는 기계가 아니고 인간이라는 거예요. 내가 살아있다. 내가 살아 있다가 돼버리면 이거는 독자적인 행함이 나옵니다.
이 독자적인 행함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본인을 위한 맹세, 언약이 나와요. 이 언약이 주님의 언약과 싸움을 벌입니다. 왜? 주님의 언약은 누가 이루기 때문에? 주께서 이루고, 주로 말미암아, 또는 구약 같으면 여호와로 말미암아서 이루는 것이 언약인데. 인간들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 내가 있음에 나에게로 다시 환원되는, 돌아오는, 나를 위한 언약과 맹세와 행함으로 그것을 시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두 언약이 맞닥뜨리니까 어떻게 돼요? 한쪽, 인간이 우세하니까 누가 버림받습니까? 예수님이 버림받은 거예요. 그럼 인간들은 뭡니까? “예수라는 작자가 와서 우리보고 죄인이래. 그래서 싫어했지. 근데 봐라! 예수는 죽었고 나는 살아 있잖아.”라는, 그 모습. 그 모습이 바로 최후에 벌 받아도 마땅한, 진면목이 그대로 노출된 거예요. 주님의 작전은 성공한 겁니다. 완전히 반전이에요. 반전.
이걸 제가 복잡한 논리로 이야기를 했지만, 인간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하루하루의 일과를 보내잖아요. 보내는데, 이걸 한번 생각해보세요. 한 오후 1시라든지, 오후 4시쯤 돼서 이걸 한번 생각해보세요. 아침 10시 30분도 괜찮고. “무엇이 내게 심각한 문제이지?”라고, 스스로 한번 질문을 해보세요. 내게 가장 심각한 문제가 뭔지를 생각해보세요. 내게 가장 심각한 문제가 뭔지를.
자, 병원에 가있는 사람에게 심각한 문제는 병들었다는 것이죠. 병들어서 하루하루 입원비가 나간다는 것. 의료보험 되지만, 보험 들어놨지만, 그래도 내가 또 일을 안 하면, 장사를 안 하면 단골이 떠날 수가 있고, 손해가 되는 것을 생각해보죠. 돈이 손해가 오죠. 돈이 손해가 오게 되면 그게 왜 심각하죠? 딸 이름이? 예진이요. 예진아! 돈이 없으면 왜 심각한 문제가 되지? 돈이 없는데? 못 살아요. 누가 못 사는데? 니가 돈이 없으면 문재인이 못 살아? 김정은못 살아? 누가 못 살아? 니가 못 살지? 예. 그럼 니가 못 사는데 니가 왜 심각한 문제가 되지? 제가 못 사니까요. 안 살면 되잖아? 고만 살면 되잖아?
왜 고만 살면 안 되고, 왜 죽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내가 왜 갖고 있다는 말입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에게는 분명히 뭔가 심각한 문제가 있어요.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요. 이 심각한 문제가 생기는 순간, 주님은 버림받았어요. 왜냐하면 하늘나라의 심각한 문제는 예수님이 버림받았다는 것. 그것만 중요한 문제지, 다른 문제는 전부 다 심각하지 않고 시시한 문제에요. 시시한 문제라고요.
그러니까 내가 돈이 없어 죽는다는 이것이 심각한 문제로 등장하는 순간, 상대적으로 예수님은 고만 시시한 존재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이것은 우리가 평생토록 절대로 못 고칩니다. 이것은 평생 고칠 수가 없어요. 고칠 수가 없으니까, 우리의 구원은 누구의 행함이다? 구약은 여호와의 행함이고, 신약은 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정리하게 되면, 주님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는 그 안에는, 주님에 대해서 생각도 안 하고 줄곧 나만 붙들고 살아가는 그 모습이 평생 쭉 이어져야 한다는, 그 당위성이, 그 요건이 동반해서 갖추어져야 된다는 거예요. 막사는 거죠. 막사는 것. 김밥 먹고 싶으면 김밥 먹고, 잡채 먹고 싶으면 잡채 먹고, 막 사는 거예요.
잡채 만들 때, 뭐 맛없다고 하면 안 되는데? 김밥 만들 때, 뭐 한 가지 안 넣었나? 지금 이게 되게 심각한 문제에요. 애들 둘이 서로 싸워서 패가지고 삐져가지고, 패든 말든 상관없는데, 그렇게 되면 나는 능력 없는 교사가 되고..., 그 다음부터는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무가치하게 되고, 결국은 나는 쓸쓸하게 죽을 수 있다는 그 심각함이, 이게 파생되어가지고 바깥에서 공손하게 절하고, 뭔가 남한테 예의바르고, 이게 전부 다 나름 심각한 것을 사수하면서 따로 갖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주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아주 고요하게 일을 해요. 고요하게. 고요할 수밖에 없죠. 우리가 맨홀 뚜껑을 만들어서 아주 주님을 눌러버렸으니까. 나는 내 문제만 심각하지, 주님의 문제는 심각하지 않는, 거기에 완전히 프레스press(압축)되어서, 억눌려서 있는 상태기 때문에. 근데 그게 우리를 뚫고 나오는 경우가 있어요. 다시 말해서, 나는 심각하다. 갑자기 제목을 이걸로 하고 싶어요.
나는 심각한데, 갑자기 심각하지 않는 경우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강도하다가 걸려서, 사형선고 받아서 십자가에 달릴 때. 이거는 드디어 심각하다고 여겼던 내가, 알아서 내가 나를 포기할 때. 내 마음을 완전히 찢어버리고, 뻥하고 뚫어버리고, 총 맞은 것처럼, 대포 맞은 것처럼 마음이 허해가지고, “나는 이제 끝나버렸어!” 끝난 인생이에요. 그걸 통해서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팍하고 미사일 쏘듯이 분출되는 겁니다.
나는 죽고 내 안에 누가 산다? 그리스도가 산다. 사도바울은 그게 매일같이 되기를 바란 거예요. 나의 심각함은 죽고, 주님의 성취하심은 나를 찢어버리고 날마다 드러내는, 그것을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그렇게 되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독하게 마음을 먹고 오직 나만 챙겨야 되죠. 왜냐하면 내가 알아서 제켜서 열 것 같으면 이거는 내가 지금 장난치고 있는 겁니다. 오직 나는 나밖에 모르는데, 강제조치를 취해서 이게 찢어져야 돼요.
내가 알아서 열면 안 돼요. 그러면 우리는 너무 착해요. 너무 착하면 안 돼요. 우리는 오직 나밖에 모르는, 내 몸은 내가 지킨다는 강력한 그것을, 강제로 제키고 찢어버리는 그 십자가의 아픔, 고통이죠. 그걸 통해서, “니 안에 나 있었다.”하고 튀어나와버리는 겁니다. 그럴 때, 구원이라는 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정말 주로 말미암아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주님하고 나하고 협동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정말 주로 말미암아!
나는 세상에서 지옥 갈 사람들하고 똑같아요. 나는 반대만 했을 뿐이고. 주님을 싫어했을 뿐인데, 주께서는 싫어하는 인간을 자기의 긍휼의 그릇으로 사용했다는 겁니다. 그래야 버림받은 돌이 영원히 버림받은 돌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목사가 되었으면 목회를 해야 돼요. 교인하나 꼬실라고 온갖 수단방법을 아끼지 않아야 되죠. 그렇다고 노골적으로 그러면 안 되잖아요? 이렇게 비난하는 사람이 있겠지마는, 여러분 노골적으로 하나, 깊숙이 은밀하게 하나, 주님은 우리 맴을 아셔요. 마음도 아니고 맴이에요. 우리 맴을 다 알아버려요.
니가 은밀하게 한다고 해서 기복생활이 아닌 게 아니라는 겁니다. 다 아시는 거예요. 다 들통 내는 거예요. 우리는 걸레 돼요. 완전히 걸레 되죠. 그러니까 우리는 죽어도 나쁜 짓만 하다가 죽었기 때문에, 죽는 것도 이 나이에 죽는 것도 좀 미안해. 진작 죽어야 될 걸. 너무 오래 끌었다는 생각..., 장로님 여기 계시는데, 장로님은 그래도 마무리 다 하셨으니까. 너무 오래 끌고 있다는 생각이 안 듭니까? 별 할 일이 없을 때는 그냥 가져가셔도 괜찮아요.
이게 죽어본 적이 없는 마리아 마르다는 죽는다는 것이 그렇게 서럽지만, 일단 죽어본 오빠 나사로의 입장에서는 동생들이 원망스러워요. 제대하고 좀 쉬려고 하는데, 다시 신병입대하래. 세상에! 너무 잔인하지 않습니까? 산다는 것, 너무 잔인한 형벌이죠. 이게 잔인한 형벌이에요. 진즉에 스데반집사처럼 죽었으면 이런 형벌을, 형기를 그만 채워도 되는데, 우리는 오직 산다는 것밖에 모르기 때문에, 이게 잔인한지도 몰라요. 이게 형벌인지도 몰라요.
그래서 성도들한테는 이게 뭐냐 하면, ‘지옥실습’이 되는 겁니다. 나는 착하고 내 바깥은 나쁘다가 아니고, 내 육적인 속성이 지옥을 나에게 가속화시킨다는 사실을, 죽을 때까지 온 몸으로 느껴야 됩니다. 지옥이니까 우리가 사는 방법은 뭡니까? 지옥인답게 살죠. 막살기. 꼴리는 대로(제 마음 내키는 대로) 살기. 막사는 거예요. 막 살 수밖에 없어요.
근데 막살면 지옥 가잖아요? 라고 하는데, 원래 성령이 임한 사람은, 막 살수록 성령의 흔적과 주님의 살아계심이 더욱 크게 느껴지죠. 대비적으로. 어두움이 있는 곳에 빛이 더 빛나고,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치듯이, 나는 막살고 있다고 느끼면 느낄수록, 이런 인간을 버리지 않고 주님의 일에 참여시켰다는 그 구원받은 관련성, 사랑의 연관성은 더 크게 느껴지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들었던 이 제자들이 결국은 예수님이 십자가 질 때 다 어디 갔습니까? 다들 어디 갔어요? 진짜 막살았어요. 도망갔다는 말은, 예수님과 함께 3년 동안 붙어있을 때에도 항상 무슨 준비를 하고 있었느냐 하면,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뜻이에요. 그 순간만 도망친 게 아니고, 주님 마음하고 제자들 마음하고, 지금 딴 마음으로, 서로 엮이지 않는, 융화되지 않는 마음으로 그냥 같이 옆에 붙어있었던 거예요. 믿은 게 아니고.
그래서 오직 성령이 와야 돼요. 오순절 성령이 와야, 비로소 내가 이 땅에 산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서다. 모든 구원은 주님의 소관이지, 구원받은 사도베드로의 소관, 사도바울의 소관이 아님을, 내가 품고 있었던 그 모든 주도권을, 그 모든 구원의 책임을 기꺼이 내려놓는 거예요. 기꺼이.
사도행전 3장에서 성전 미문에 앉은뱅이가 있었는데, 앉은뱅이가 걸었습니다. 그러면 우리 같으면 그 공로를 누구한테 돌릴 거예요? 6절,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이런 이야기 했잖아요. 이걸 내세워서 우리가 걷게 했다고 하겠는데,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사도가 백 명이 달라 들어도, 사도가 백 명이 안 되지만. 백 명이 다 달라 들어도 한 사람을 구원 못한다는 것을, 사도들이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도들이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그럼 사도들의 역할은 뭐냐 하면, 제가 지난 낮 설교에서 했죠. 사람 낚는 어부라고 했죠. 그 사람 낚는 어부라고 할 때에, 공유이야기 했잖아요. 영화배우 공유 말고. 보편적으로 같이 누리는 것. 개별과 공유를 했잖아요.
자, 고기가 있다. 고기를 낚을 때는 바깥에 있는 공동체의 인간이 바다 안에 들어와서 고기를 낚잖아요. 그러면 사람을 낚을 때는 어떻게 낚느냐 하는 겁니다. 안에서 바깥에 나가있는 사람만이 낚을 수가 있겠죠. 이 말은 뭐냐 하면 성도가 하는 일은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지정된 사람이 있어요. 창세전에 이미 택한 사람이 있잖아요. 그 사람에게 찾아가는 일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거 뭐 눈높이 하는 것처럼 회원들 모집하는 것이 아니고, 뭐 보험회사에서 보험 건수 올리는 것이 아니고, “혹시 성도이십니까?”라고 묻는 거예요. 그러면 그 낚시 바늘에 뭐가 달려있겠습니까? 십자가 복음만 달아야 돼요. 딴 것을 달면 안 돼요. 십자가 복음 앞에서 우리가 저주받아 마땅함을, 혹시 여기 계십니까? 똑! 똑! 똑! 여기 계십니까? 하고 다가가서, 아니면 그냥 문 닫고 나오면 돼요.
목회라는 것, 인간에게는 목회가 없어요. 목회는 주님이 하시지, 목회 할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복음 아는 사람은 그냥 확인하는 거예요. 화투 48장 펴놓고, 어느 것이 시월단풍인가 보자~ 아니구나! 이거. 성도인가? 아니구나! 덮자. 이런 식으로. 그렇게 확인을 해가는 거예요. 그 중에서 자식도 있을 수 있고, 남편, 아내도 다 있을 수 있어요. 왜냐하면 구원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주님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지, 우리로 말미암아 구원이 안 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세상에 빚진 자로다.”(롬8:12)라고 했어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전에 자기가 얼마나 엉터리로 이야기했다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구원되지도 못할 율법의 행함을 댓다(덮어놓고 막)이야기해놓았다 이 말이죠. 율법의 행함으로 구원받는다고 해놓았기 때문에, 이게 미안하잖아요. 그게 아닌데. “새로 다시! 다시! 내가 전에 이야기한 것 다시! 아이고, 미안합니다. 내가 전에 한 것에 대해서 미안함이 있네요. 그게 아니고요, 오직 십자가 화목제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라고 다가서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하는데, 그렇게 힘들어요? 그렇게 힘들까요?
자, 그러면 필요한 게 뭐냐, 우리가 사영리 했던 것처럼, 또는 기존교회 전도대회 하는 것처럼, 멘트 외워서, 성경구절 외워서 그렇게 해야 하느냐? 아닙니다. 그렇게 시작하는 것도 우리 힘으로 안 돼요. 기능입니다. 어떤 기능이냐 하면, 두 가지의 기능이 있어요. 첫 번째, 하나는 막사는 기능. 이거는 누구나 다 하는 거고요. 앞에 누구를 위한 거냐면, 자기를 위하여 막사는 기능. 자기를 위해서 그냥 사는. 무조건 뭘 해도 나를 위해서, 남을 위해서가 아니고 오직 나를 위해서 사는 기능.
두 번째는 그것이 죄가 된다는 기능. 이 기능은 성령이 와야 비로소 가능합니다. 성령이 안 오면 두 번째, 죄가 되는 기능은 없어요. 예수님 십자가 질 때 강도도 같이 예수님하고 죽었잖아요. 만약에 구원받은 강도가 안 죽고 살아났다면 그 사람은 뭐하겠습니까? 한쪽 강도는 제켜놓고, 그건 지옥 갈 거고. 구원받은 강도에게 뭔가 찔렀는데 옷만 찔러서 아침에 보니까 깨어났어요. 피는 약간 났어요. 그건 아까징끼를 바르면 되고요.
근데 뭐 하겠습니까? “나는 이제 새장가 가야지!” 뭐, 이런 것 하겠어요? 뭐 하겠어요? 강도는 전에 배운 가락대로 그대로 사는데, 나를 위해서 사는데, 그게 뭐였다? 그게 바로 하나님 앞에서 저주받을, 그것도 그냥 로마의 횡포에 죽는 것 말고요. 하나님 앞에서 저주받는 짓거리를, 내가 흙으로 인간된 이상 줄곧 해왔음을 증거 하는 겁니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이야기하고,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가 구원받는 것은, 이 죄가 구원받는 것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구원받는다고 이야기하죠. 그런 사람들이 바로 바울이고, 그 다음에 열 두 제자 아닙니까? 도망간 자나 죽인 자나 마찬가지겠죠.
그래서 다시 한 번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성도는 항상 없는 것을 내놓아야 된다.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은 모든 인간이 다 갖고 있습니다. 없는 것이 뭐냐 하면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라고 하는 이 고백은, 성령 받은 성도에게만 나와요. 왜냐하면 성령은 십자가 영이기 때문에. 십자가 증거 하라고 나는 지금 자기를 위하여 산다는 겁니다.
죄+십자가 피=의. 이게 언약이거든요. 언약은 죄가 있어줘야 언약이 되거든요. 죄와 예수님의 희생이 있어줘야 이게 언약이 되거든요. 움직이는 언약맨이 바로 성도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항상 없는 것을 내놓아야 돼요. 없는 것. 그게 뭐냐 하면 내가 죄인 된다는 것은 성령이, 언약이 있을 때나 그때그때 나오는 거죠.
그러면 “나는 죄인이다.” 이거 언약입니까? 언약이 아닙니까? 언약이 아니죠. 앞에 “나는” 이게 붙으니까. “죄인인데 그게 나다.”이래 되어야죠. “나는 죄인”이 되면 또 자기 잘난 체를 하는 거예요. “나는 구원받았어. 나는 죄인인 것을 아니까.”그렇게 까불지 말고. 그게 바로, 나는 죄인이라고 하는 그것조차도 죄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는데, 그 순간에 성령이 역사를 하니까, 내게 없는 것이 나를 비집고, 나를 구멍을 내고, 주님이 거기서 새롭게 나를 사용하시려고 등장한 거예요. 주께서 새롭게 사용하시려고.
그러니까 결국 오늘 말씀은 성령 안 받은 사람한테는 이게 허황된 말씀이 될 수밖에 없어요. “그냥 나를 위해서 살아라.” 그럼 구원받습니까? 뭘 구원받아요? 지옥가야죠. 그럼 구원은요? 성령이 와서 죄인에게 은혜를 주셔서 살게 하셨다는 것, 그걸 드러내는 게 있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게 없다면, 없는 것이 없다면 그건 성도가 아니죠. 없는 것이 있어야 되는데, 없는 것이 없어버리면 그건 성도가 아니고, 있는 것 밖에 없는 거죠.
뭔가 본인도 놀래요. 내가 이렇게 살아가는 이것이 의가 아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버림받는데 일조한, 이게 바로 나밖에 모르는 이기주의가 주님을 버림받게 한, 내가 거기서 가표를 던질 수 있는 속성, 나한테 심각한 그것이 오히려 주님을 시시하게 보는 요인이라는 것을, 어떤 순간순간에 그게 떠올라서, 내가 사는 이게 심각한 것이 아니구나! 주님이 살아있다는 것이 심각하지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 심각한 게 아니에요.
그래서 끝나기 전에 우리가 약속하면 안 되는데, 우리가 다짐합시다. 둘 중의 양자택일하세요. 내가 살아있는 게 안 중요하고, 현재 주님이 살아있는 게 더 중요하다는 사실. 나는 이래 살아도 개뿔 아무것도 아니고, 이래 좀 잘 되도 아무것도 아니고, 못 되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쨌거나 저쨌거나 주님이, 주께서 우리를 살리고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걸 증거 하면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 덕분에 살았고, 주님 의해서 살고 있고, 주님을 위하여 살도록 부추김을 받는 저희들. 돌아서면 나밖에 모르는 이 죄인을 주께서, 성령께서 다루어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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