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

필요없는 권세 180323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3. 25. 19:51
2018-03-24 00:11:50조회 : 141         
필요없는 권세 180323이름 : 이근호 (IP:119.18.83.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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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 (IP:122.♡.178.64)18-03-25 19:33 

광주강의20180323a 마가복음11장 27절-30절(필요 없는 권세)-이 근호 목사 

마가복음 11장 27-30절입니다. 

27절, 저희가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 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서 걸어 다니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아와 
28절, 가로되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누가 이런 일 할 이 권세를 주었느뇨 
29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대답하라 그리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30절,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내게 대답하라 

여기 세 가지의 권세의 종류가 나옵니다. 하나는 뭐냐 하면 그 당시 민중들, 백성들이 알고 있는 그 권세, 한번 적어보겠습니다. 권세가 세 가지가 나오는데, 첫째는 그 당시 민중들에게서 나오는 권세. 민중들이라고 하니까 또 뭐 사상이 좌파라서 그러는 것이 아니고, 옛날 용어를 쓴 겁니다. 민중들이 생각하는 권세. 그 다음 두 번째는 그 당시 바리새인들, 지도자 또는 정치인들의 권세. 세 번째는 예수님+세례요한이 알고 있던 권세. 이 세 가지로 나누어져요. 

우리의 보통 생각으로는 예수님의 권세와 그 외에 권세로 나눌 수 있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을 하는데, 우리가 열왕기상에서 알다시피 백성들과 지도자급이 항상 충돌됩니다. 왜 충돌이 되느냐 하면, 권세의 충돌이 지배한 자와 지배받는 자의 사이에만 성립이 되기 때문에, 권세라는 것은 지배하는 자, 지배받는 자가 없으면 권세라는 것이 현실적으로 성립이 안 되잖아요. 누가 지시를 해야 해요. 그냥 친구끼리 지시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만약에 그걸 위반하게 되면 뒤에 신체적이고 재정적인 폭력을 당하게 됩니다. 

권세라는 말이 어렵습니까? 그럼 쉬운 말로 할게요. 힘. 힘은 구체적입니다. 힘이 없으면 못사니까 어쩔 수 없이 눌리게 되는 거죠. 이 예수님의 권세가 뭐냐 하면 힘의 원천을 이야기합니다. 힘의 원천. 여러분 생각을 집중해줘야 돼요. 자꾸 개념이 늘어나니까. 예수님의 권세는 힘의 원천을 이야기하고, 민중들과 지도자들, 이 바리새인들은 이미 원천에서 나온 그 힘. 힘을 갈라먹기 하겠다는 거예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지배받는 쪽은 약간이라도 더 느슨한 통치를 원하고, 지배하는 쪽은 군소리 없게 바짝 쪼이는 것을 원하는 거예요. 느슨한 것을 원하고 바짝 쪼이는 것. 학생들은 선생님에게 시험 줄이자고 하고, 선생님은 시험으로 바짝 쪼이려고 하고. 그럼 학생들은 또 협상을 합니다. 그렇다면 감독 없는 시험을 치자고 하고, 선생님은 감독 두 명으로 늘리겠다고 하고. 여기서 뭐가 생깁니까? 힘이 생기죠. 여기서 힘이 생기는 겁니다. 

힘이 생기면서, 여기서 어려운 것은 뭐냐 하면 주체가 규정받게 됩니다. 서울의 유명한 사립학교에 엄마가 애써서 들어가게 했다. 그런데 그 사립학교에서는 일체 담배를 못 피운다. 그래서 선생님들이나 학교 쪽에서는 바짝 쪼입니다. 담배피우면 퇴학이다. 그런데 애는 그 점만 좀 느슨하게 해달라. 못 해준다. 피우다가 걸렸습니다. 그러면 거기서 뭐냐, 힘으로 추방시켜버리죠. 

추방, 현재 있는 힘에서부터, 이걸 가지고 어려운 말로 하면 뭐냐, 소외라고 해요. 소외. 소외라는 말을 공산주의 이론에서 자꾸 하는 이유가, 소외라는 말이 뭐냐 하면 일은 노동자가 했는데 그 이익은 자본가가 다 챙겨버리니까, 소외되었다고 하는 거예요. 소외라는 말이 너무 어려운 말이기 때문에, 이걸 쉬운 말로 하면 뭐냐, 배제가 되는데 그냥 배제가 되는 것이 아니고 혜택에서 배제가 되는 거예요. 혜택에서. 

그러면 여기에 문제가 있죠. 혜택을 얻겠다고 하는 그 심보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겁니다. 혜택 안 얻으면 되잖아요? 혜택을 안 얻으면 된다고요. 담배 피웠다. 그 유명한 사립학교에서 쫓겨났다. 안 다니면 될 거 아닙니까? 근데 왜 거기에서 실패감을 느끼고 좌절감을 느낍니까? 뭐냐 하면 이미 주체가 그 전에 있던 힘에 의해서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그 학교에 안 다니는 것을 상상하기가 싫은 거예요. 그 학교 배지 달고 교복 입는 것을 상상했는데, 거기서 담배 피웠다고 퇴학을 당하니까, 퇴학을 당하면서 거기에 대한 어떤 아쉬움이라든지 결핍을 느끼죠. 

그 느끼는 결핍이 뭐냐 하면, 권세에요. 그러니까 권세라는 것은, 순수한 데는 권세가 없어요. 뭔가 노림이 있어요. ‘나 저거 가져야지. 저거 내 것 만들어야지.’하는 가운데에서 권세가 작동을 해가지고, 그 권세를 얻기 위해서 온갖 아부를 다합니다. 돌이 떡덩이가 되게 하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기도 하고, 마귀한테 절하기도 하고.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는 거예요. 

그러면 세 번째 예수님의 권세는 어떻게 되는가, 이게 좀 어려워요. 원래 인간이 하나님을 차버렸잖아요. 선악과 따먹지 말라고 했는데 따먹었잖아요. 거부했죠. 거부해놓고 인간은 신을 찾아요. 아, 이게 이상하죠. 거부했으면 빠이빠이를 해야 되는데, 거부해놓고 신을 찾아요. 이게 뭐냐 하면 신도 내 손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창세기 4장에 가인이 나옵니다. 가인이 하나님께 대들은 것은, 소위 어른한테 젊은 애들이 머리로 받아버리는 것 있죠. 신에게 들이박아 버리는 거예요. 

그런 품성을 이미 아담으로부터 부여받았습니다. 인간이 신을 믿는 것은 신에게 헤딩을 해가지고 혹을 내기 위해서, 받아버리기 위해서 신을 믿어요. 나도 힘이 있다 이 말이죠. 권세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내가 권세 있다는 것을 어디서 규정한다? 방금 이론에 의하면 주체가 형성한 곳에 힘이 있는 겁니다. 내가 이 자리를 탐하고 내가 이 자리에서 떠나기가 싫어요. 나는 이미 그 힘에 의해서 만들어진 나이기 때문에. 만들어진 나이기 때문에 그 나 말고 다른 나를 나는 생각도 할 수가 없습니다. 

자 그렇다면 첫 번째 민중들의 권세가 뭐냐 하면, 향수가 있습니다. 이동원이 불렀던 향수가 있죠. 돌아갈 곳, 자꾸 향수를 그리워해요. 그 향수는 어떤 향수냐 하면 이 주체라는 나, 그 나가 좋았던 그때 그 시절에 뭔가 있을 것이라는 겁니다. 향수가. 그러면 그 향수를 미래에 투사, 던지게 되면 뭐가 생기느냐 하면 유토피아가 돼요. 이 유토피아를 우리말로 하면 이상향이라고 해요. 이상향. 

민중들이 생각하는 것은 항상 현재가 아니에요. 미래지향적입니다. 민중들은 미래지향적이에요. 앞으로 잘 될 것이니까 지금의 어떤 어려움도 인내하자. 일반사람들은 매일같이 인내해요. 매일같이. 앞으로 잘 될 날이 있을 것이니까. 쨍하고 해 뜰 날이 있을 것이다. 그러다가 사기당하고 하지만. 언젠가는 쨍하고 해 뜰 날이 있을 거라는 거예요. 해 뜰 날. 해야 매일 뜨는데. 그래서 계속해서 미루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유예’라고 해요. 유예. 자꾸 미루는 거예요. 계속 미루는 겁니다. 

그런데 민중들의 권세는 처음에 내가 원한 권세가 아니고, 유토피아를 이룰 수 있는 그러한 힘이 유토피아와 연결된 힘이기를 원해요. 자, 쉽게 이야기합니다. 유토피아라는 이상향이 있다면, 흔히 교회에서 말하는 천국이죠. 천국에 내가 들어갈 수 있고, 그 천국에서 나오는 힘이 나를 붙들고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요. 그러면 이거는 뭐냐 하면 미완이죠. 미완(아직 끝을 다 맺지 못함). 미완결된, 민중들은 미완이에요. 

그런데 지도자들은 사진을 찍어버려요. 스냅사진. 찰칵! 하고 찍어버리면, 민중들이 원할 때, 뭐, 이런저런 것을 원하면서 성전에서 기도하잖아요. 기도하는 순간을 찰칵 찍어버리면 순간적으로 스톱이 되잖아요. 그걸 정태적이라고 하는데, 사태를 정지시키는 겁니다. 사태를 정지시키는 힘을 지도자들이 소유하려고 하는 거예요. 소유하려고. 딱 소유하는 것. 여러분, 이러면 예수님 권세 빼놓고 감 다 잡았죠. 

이 세상은 뭐냐 하면, 이 세상의 대통령이 할 일은, 여러분들이 원하는 남북통일 해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현재의 권세는 누구한테? 누구 말 들으세요? 이 지도자의 말을 들어주세요. 깔끔하게 정리가 됐죠. 원래 교인수가 300명인데, 내년에는 350명 보장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누구 말을 들으세요? 현재 장로들과 모든 교인들은 이 당회장 목사의 말을 들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오케이? 오케이! 협상이 되는 겁니다. 협상이 되죠. 

그런데 300명이 되는 이 교회에 수년 동안 있던 어떤 권사가 뒤늦게 황혼이혼을 했다. 황혼이혼 했으니까 부끄러워서 그 교회에 못가잖아요. 그러면 그 교회에서 “내년에는 350명을 보장합니다.”라고 할 때, 그 지도자의 권세의 말을 듣습니까? 안 듣습니까? 안 듣고 교회 안 나가버리죠. 개인적 사유로 인하여. 그러면 그 사람은 왜 안 나가냐 하면은, 이혼하기 전에 괜찮은 권사라고 인정받았던 이 영역, 나를 주체라고 규정했던 이 권세가 이혼하고 난 뒤에는 쓸모 짝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민중들이나 대중들이나 교인들이 무조건 지도자의 말을 듣는다? 안 듣는다? 안 듣죠. 뭐냐 하면 현재 유토피아는 옆에 사람이 좋은 나라가 아니에요. 현재 나라고 규정되어 있는 이 주체가 멋있게 되는 나라가 유토피아에요. 그래서 그동안 지도자한테 온갖 수모를 다 당하는 거예요. 그러나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견디고 견디고 또 견디고 또 견뎌요. 왜? 지도자가 좋아서가 아니라, 나의 주체에 걸맞은 내 향수, 내가 잘 되는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이 민중들, 지도자들의 권세를 딱 결합시켜보면, 현실 돌아가는 모습은 철저하게 힘으로부터 나와서 힘으로 말미암아 힘으로 돌아가는 거죠. 문제는 그 힘이 어디서 나오는가 하는 겁니다. 어디서 나오는가? 여기서 이제 이스라엘 갔다가 온 티를 한번 내야죠.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곳이 있어요. 갈릴리 바다 위쪽에. 

제가 사진 찍어 온 것을 보게 되면 여로보암이 북쪽 벧엘과 단에, 예루살렘에 있는 제단에 못 가게 하기 위해서, 세겜에서 단까지 통치하면서, 한쪽은 벧엘에 제단을 세웠고, 북쪽 최전방 아람에, 지금은 시리아죠. 아람과 접견지역인 단에 제단을 세웠는데, 그 단을 제가 사진 찍어 왔습니다. 

그게 신약에는 가이사랴 빌립보지역이에요. 그 지역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샘물이 나와요. 그 샘이 터져서 요단강이 되고 요단강이 사해로 흘러갑니다. 사해는 어디로 흘러가는가, 사해는 지하400미터기 때문에 더 흘러갈 곳이 없어요. 매년 50미터씩 줄어듭니다. 이스라엘민족이 그 옆에서 야자수 농장을 하기 때문에, 물을 다 빼앗아가서 없어요. 

그러면 여기서 원천이 뭐냐, 원천이 분명히 있어요. 헐몬산이라고 해서, 약간 눈 덮인 산을 찍었는데, 헐몬산이 원천이 되는데, 지금 원천이 없이 요단강, 갈릴리, 사해, 여기에 뭔가 힘이 흐르고 있어요. 백성들은 힘이 과거를 거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힘이 흐른다고 본 거예요. 그 힘이 집결한 곳이 어디다? 유토피아. 우리 교회말로 하면 천국이 되는 겁니다. 

근데 그걸 또 어떻게 한다? 변화되는 것을 스톱을 시켜놓는 거예요. 그러면 동결되죠. “그 동결된 힘을 저한테 맡겨주시면 여러분들의 소망을 이루어드리겠습니다.”라고 나오는 겁니다. 모든 지도자급의 특징이. 그런데 여러분, 첫 번째, 두 번째를 보면, 이걸 하기 전에 먼저 말씀드려야 하는데, 예수님의 힘이 원천이잖아요. 예수님의 힘이 원천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와서 처음 이야기한 거예요. 예수님이 와서. 요한복음 1장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모든 생명은 어디서 나왔다? 말씀에서 나왔죠. 

그러면 죄는 뭐에요? 죄라는 것은 원천이 있을 때만 죄가 성립이 돼요. 인간은 예수님의 말씀 앞에 서지 않는 한, 예수님과 만남이 없는 한, 인간들은 죄라는 것을 몰라요. 죄는 어디서 확정되는가 하면은 예수님과 만남에서 확정되는 겁니다. 내가 오기 전까지는 죄가 없었으나 내가 왔으니까 죄가 있다고 했죠. 요한복음 15장 22절에서. 

그러면 인간세계에서 권세자의 죄라는 것은 뭐냐 하면, 인간 대 인간으로 성립되는 겁니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 예수님께서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한 이유가 그거예요. 그 취지예요. 인간 대 인간으로서 죄를 형성하는데, 그 죄라는 것은, 이걸 좀 어렵게 이야기하는데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그 죄라는 것은 그 당시 바리새인이나, 27절에 누굽니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오죠. 이 사람들을 지도자급으로 분류했잖아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죄를 어디서 가져오느냐 하면 하나님의 율법에서 가져오죠. 하나님의 율법에서. 

그런데 말입니다. 율법으로 죄를 규정할 때, 그 죄를 규정하는 바리새인들이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하루하루의 세끼 밥을 먹으면서 지금 누구 덕분에 살아가고 있습니까? 양식이 어디에서 나와요? 월급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백성들에게서 나오죠. 백성들에게서 나오는 그 양식을 먹고, 에너지를 가지고 율법으로 지금 죄 있다, 없다, 라는 것을 재판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볼 때 여기서 뭔가 이상한 점이 발견되지 않습니까? 백성들이 노동하지 아니하면 그들이 살 수 있어요? 없어요? 못 살죠. 그러면 누구 덕이에요? 백성들의 노동한 덕으로, 그들은 노동 없이 살아가고 있다 이 말이죠. 노동한 덕분으로 살아가면서, 노동한 그들을 향하여 뭐를 규정한다? “너희들은 나보다 못한 죄인들이다.”라고, 규정하는 이것이 옳은가 하는 문제가 생겨버려요. 문제가. 옳으냐? 이 말입니다. 

마르크스가 이야기한 것은 그겁니다. 모든 개념이나 이념은, 그거는 상부에 붕 떠 있는 것이고. 하부구조는 뭐냐, 경제적으로 착취당하고 학대당하고 노동했던, 그들의 남아있던 생산물, 잉여 생산물에 의해서 그들은 예술과 정치와 통치의 작용을 하고 있다고 본 거예요. 이게 역사적 유물론인데. 

그럼 그동안 정치가들은 뭐냐 하면 사진을 찍었다니까요. 뭐냐 하면, “이 나라는 우리가 정치한 나라입니다. 여러분들은 뭔가 잠깐 얼음땡처럼 스톱을 해줘야 합니다.” 그래야 나는 지배자고 너희들은 지배받을 복종자라는, 이 관계가 성립이 되거든요. 한쪽에서 변화가 일어나게 되면, 이거 참기름 발라가지고 빠져나간다니까요. 

여러분, 이거 생각 많이 해야 돼요. 재벌 집에서 25년 동안 어떤 아줌마가 그 집안의 총무로서 살은 거예요. 자기 아버지가 병들어서 월급 받아 가지고 병원비로 쓰려고 1년에 한 번도 못 쉬는 식으로, 그 집안의 모든 가사를 했다 이 말이죠. 하다보니까 그 집안의 돌아가는 비밀을 다 아는 거예요. 입 다문 순간, 자기 주체가 깨져가지고 일이 잘 되는 거예요. 그 노선에서, 그 힘에서 배제가 되기 때문에, 입을 다무는 한 그쪽 사람에게 월급을 받을 수 있는 거예요. 

근데 마지막에 재벌 여자하고 그 아줌마하고 어떤 일이 있는 순간, 그때는 머리 쥐어뜯고 싸우는 거예요. “이게 나보다 나이도 한 살 적은 게!”라고 하면서 싸우는 거예요. 이게 <황금빛 내 인생> 52회째 나오는 대목이에요. 참을 대로 참은 거예요. 그동안 이 재벌 집이 영원한 재벌이라고 규정되었을 때는, 그거는 복종이 되는 겁니다. 근데 이 재벌집이 해체가 돼요. 깨져버리는 겁니다. 해체가 되니까, 그동안 나라는 주체는 거기서 만들어진 건데, 해체되면 더 이상 수입이 없잖아요. 이익이 없다 이 말이죠. 이익이 없으니까 챙길 것 챙기고 빨리 빠져야 되죠. 

마르크스가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인류의 역사는, 그동안 노동자 덕분으로 살았던 인간들이, 소위 배운 지식인들이 “역사는 이렇게 됩니다.”라는 그 구라,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지 말라는 거예요. “역사는 여러분들의 지도자라고, 여러분들에게 뭔가 받아 챙기는 그 인간들이 결정한 것이 아니고, 밑바닥에서 신음하고 있는 여러분들이 결정합니다.” 오늘 완전히 딴~딴 따라라라~♬ 데모 한 번 해야 돼요. 

기아, 삼성, 현대, 이 모든 재벌들의 주주의 주식은 몇 퍼센트 되지도 않고, 개미군단의 주식들과 그리고 이 노동자들의 피땀 흘린, 무려 주 52시간 이상의, 잔업까지 안 하면 월급이 얼마 되지도 않아요. 잔업까지 해서, 무려 하루 10시간, 12시간 노동한 덕분으로, 단가가 낮아서 경쟁력이 있어가지고, 해외수출을 많이 해서 그렇게 재벌이 됐다 이 말입니다. 근데 재벌은 우리의 남은 돈 가지고 계속해서 기업을 또 합병하고 또 합병하고, 이거 뭐 백화점에다가, 온갖 미술관까지 다 하고, 에버랜드까지 접수하고. 

이게 다 누구의 것이냐, 삼성이라는 역사, 현대라는 역사, 기아라는 재벌의 역사는, 민중들의 역사, 착취당하는 역사라는 이 말이죠. 여러분들은 도중에 스톱이 될 문제가 아니고, 계속해서 역사는 여러분들의 힘에 의해서 흘러가고, 흘러가고 흘러가는 것이라는 말이죠. 그걸 중간에 딱 잡아가지고, “나는 당신의 영원한 종이야.” 딸랑딸랑! 그럴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영원한 종이 아니에요. 그거는 여러분들이 그러한 인식을 갖고 있고 그러한 정신을 갖고 있는 것은, 그동안 여러분들의 정태적인, 상황이 스톱이 되는, 정태적 상황을 영구히 고정화시키는 그런 사상에, 이데올로기에 철저하게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그러면 노동자의 세계, 농민들의 세계, 억눌린 자의 세계, 여기서 뭐 출애굽기의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하는, 기독교 사상이 다 접목이 되어서 해방신학이 막 나오는 거예요. 제주도 강정마을, 저는 깨강정 만드는 거기인줄 알았어요. 근데 강정마을에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한다고 천주교 정의수호단체에서 신부들 수녀들이 와서 데모하고 하는 그러한 사상. 그래서 민중의 권세라고 하는데, 원래 민중의 권세는 없는 거예요. 권세는 그냥 위에서 아래로 시혜(은혜를 베풂), 시혜라는 말을 알죠. 불쌍히 여기사 쪼끔씩, 쪼끔씩 나누어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양아치 위에 조폭이 있죠. 양아치가 제일 말단구조고 그 위에 조폭이 있잖아요. 양아치가 서민들 등쳐서 빼앗아온 돈 가지고, 그걸 조폭이 누리고 있다가, 조폭이 정태적인 상태로 뭔가 오래 가려면, 한나라당 박근혜 이런 것을 잡으려고 한다면, 계속 잡아야 하기 때문에, 선거할 때마다 쬐끔씩, 쬐끔씩 돈을 내놓으면, 세상에! 우리 박근혜 같은 대통령이 어디에 있노? 최고다! 죽어도 박근혜! 살아도 박근혜! 이래가지고 계속 그 주체적인 것을 하게 되면, 미래의 번영하는, 번영하는 대한민국이 아닙니다. 자기의 삶이에요. 우리 자식들에게 옛날 박정희 대통령의 번영의 시절이 다시 한 번 올 것이라는 향수. 반복적인 향수가 유토피아를, 우리나라가 잘 되는 유토피아를 이루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길들여져 있는 그것을, 결국 이거는 지도자들이 알아요. 지도자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복종하고 있다는 것. 그러면 중요한 것은 그 권세, 힘, 그 원천이 어디에 있느냐, 요단강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샘이 터져서 나왔지만, 그럼 지금의 이런 권세는 어디서 나왔느냐, 제가 이렇게 설명을 하니까 인간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죠. 

아까 강의대로 하면 혼자 사는 것을 가지고 혼자 산다고 하지 않아요. 소외됐다고 이야기했죠. 사회로부터 배제된 겁니다. 그거는 곧 죽음을 의미하죠. “아이고, 이제 나는 남자도 싫고 이래 혼자되어 혼자 사는 것이 이렇게 좋은 걸.” 남들이 뭐라고 합니까? “배제되었습니다. 소외당했습니다. 그거 자랑거리 아닙니다. 혹시 좋은 남자 있거든 만나시죠.”라고, 이렇게 권하죠. “지금 나를 놀립니까?”하면서도 속으로는 좋아해요. ‘아직도 내가 여잔가?’하면서. 

그러니까 이게 소외되고 배제되는 것이, 인간이 한번 맛본 주체에 대해서 어울리지 않는 거예요. 다시 세상이 나의 가치를 알아주기를, 언젠가는 거기로 되돌아가기를 기다리고 있다고요. 그럼 그건 나름대로 유토피아가 되는 거죠. 자신의 희망이 되는 겁니다. 자, 이래 보니까 세상은 사람들과 사람들의 숫자로 하는 것이 아니죠.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에, 그 사이에 뭐가 지금 듬뿍 소스처럼, 크림처럼 부어져있습니까? 권력, 힘, 권세가 주어져있습니다. 

여기서 말한 힘은, 물리적인 힘은 아무 의미 없습니다. 물리학 힘, 생물학 힘, 생명의 힘, 그거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인간을 사회로 보지 않고, 개인으로 봤을 때는 생물학적인 힘, 물리학적인 힘, 이런 게 좀 의미가 있을 수가 있어요. 예를 들면 갑자기 배가 간지럽다. 남자도 뭐 갱년기인가? 대상포진인가? 그때는 뭐 몸의 바이러스나 면역체계에 관계가 있잖아요. 그런데 대상포진도 없고, 간지럽지도 않으면 그게 사는 것이냐 이 말입니다. 그걸 뭐라고 했습니까? 소외된 거예요.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잖아요. 인간은 혼자 못 살고, 인간은 죽으나 사나 사회적동물이라고. 정치적동물이라고. 인간은 사회적 동물은 동물인데 다른 동물하고 차이점이 난다. 그래서 인간은 정치적동물이 되는 거예요. 그걸 쉬운 말로 사회적 동물이라고 했는데, 그 당시에는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이 없어요. 정치적이에요. 그래서 인간은 정치적동물이에요. 정치적 동물이라고 하는 것이 정답인데, 정치적 동물한테는 뭐가 있다? 지배하는 자가 있고 지배받는 자가 있는데. 

르호보암 시대 때(왕상12장) 그 백성들에게 물었잖아요. “내가 이 나라를 어떻게 통치하면 됩니까?”라고 할 때, 뭐라고 답변했습니까? “옛날 솔로몬의 시대 때처럼 백성들의 종이 된다면 당신은 존경받을 것이고 훌륭한 임금이 될 것입니다.”라고 이렇게 하니까, 반대로 나가버렸죠. 자기 동기들하고 상의하니까, “솔로몬보다 더 잡아야 한다. 더 바짝 쪼여야 한다.”라고 했어요. 그래야만 뭐가 나온다? 그래야 내 나름대로의 위주의 것이 된다. 뭐가 필요 없다? 그러니까 아버지 솔로몬의 권세는 필요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솔로몬의 권세를 르호보암이 받아버리면, 이거는 변화가 되지, 이거는 정태적인(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상태)것이 아니니까. 내 것이 아니니까. 내가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내 권세의 바구니 안에, 내 권세의 그 영역 안에 옴팍 그들이 사로잡히지 않으니까. 그러면 왕이 왕답지 못하잖아요. 르호보암이 좀 하려고 하면 “우리 솔로몬은 안 그랬는데..” 또 좀 하려고 하면 “우리 다윗은 안 그랬는데..” 이러면 “죽은 사람한테 맡기지 나한테 왜 맡겼는데?”라고 하게 되죠. 

지도자가 된다는 말은 어느 순간에, 어느 지도자도 마찬가지에요. 낚시동호회, 십자가마을, 우리교회, 뭐 세상의 모든 모임, 계모임, 모든 것. 이스라엘유적답사모집요강 뭐 이런 것. 하여튼 임시적으로 뭘 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거기서 권력이 형성됩니다. 그냥 지배한다, 지배받는다, 라고 알면 안 되고, 지배받는 쪽은 “지도자여 내 유토피아를 이루어주게 되면 당신의 의견에 따라줄게.” 지배하는 쪽은 “당신 소원을 들어줄 테니까 무조건 내 지시에 순종하세요.” 여기서 갈등이 생깁니다. 

이거 뭐 멀리 갈 것도 없죠. 가정입니다. 가정. 아버지가 자식들 불러놓고, 아내 불러놓고, “이 가정의 미래는 내가 책임질 테니까 무조건 아버지의 말에 순종해라. 그러면 이 가정은 평화롭고 우리의 원대로 더 넓은 아파트로 이사 갈 수 있다.” 이러면 아들은 “엄마, 어떻습니까?”라고 묻죠. 그럼 엄마는 “놀고 있네~ 당신이 옛날에 했던 꼬라지를 봐라. 내가 믿을만한 짓을 해야 믿지. 당신 친구한테 돈 빌려줬다가 떼였잖아? 지금 와서 믿으라고?”이렇게 나오죠. 그래놓고 아들보고 “아들아! 아버지 말 믿지 마라. 엄마 믿으라.” 거기서 생긴 것이 뭐냐, 이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양육권분쟁이 일어나는 거예요. 양육권분쟁이 벌여지는 겁니다. 특히 가장이 퇴직했다. 그러면 아내는 퇴직한 돈이 얼마냐를 노리죠. 남편하고 지금 갈라서면 반은 먹을 수 있는지. 그런 게 있죠. 퇴직하는 순간부터 이거는 권세자로서의 보좌를 내놓아야 돼요. 

제가 지금 세 번째 권세는 어렵기 때문에 계속 미루고 있습니다. 먼저 첫 번째 권세, 두 번째 권세를 알아야 돼요. 주님이 여기에 뛰어들으셨기 때문에. 여러분들도 알아야 돼요. 주님이 이 세상에 왔다고 하는데, 그 세상이 뭔지 알아야 돼요.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알아야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지를 알게 아니겠습니까? 

한 번 물어봅시다. 이 지도자는 이 민중들, 대중들 속에 끼어들까요? 안 끼어들까요? 절대로 안 끼어듭니다. 끼어들면 그건 지도자로서 작살나는 거예요. 그 역사가 뭐냐, 북이스라엘의 반란역사였습니다. 쿠데타역사였습니다. 힘만 있으면 언제든지 극복할 수 있어요. 힘만 있으면. 조금만 기다렸다가 내가 대통령이 되면 이제 박근혜고 이명박이고 다 구속시켜버리는 거예요.  힘만 갖추면 돼요. 힘만. 이거는 민주주의 승리고 국민들의 승리다. 뭐 이러면서 힘만 갖추면 돼요. 그래서 호시탐탐노리는 거예요. 오늘 제목을 호시탐탐이라고 할까? 호시탐탐 노려요. 호시탐탐 노리는 겁니다. 

그러면 지도자들이 이걸 알까요? 모를까요? 알아야 되겠죠. 그러면 정태성+신화가 동원돼요. 신화. 신적인 요소를 자기한테 집어넣는 겁니다. 이거의 좋은 예가 뭐냐 하면 일요일에 mbc에서 오후 5시부터 하는 프로그램이 있어요. 복면가왕이라고 하는 것. 이 복면가왕의 위치가 어디냐 하면 무대가 아니에요. 무대를 지긋이 내려다볼 수 있는 그 상단에, 홀로 의자에 앉아서, 완전히 교황의자에 앉아있어요. 그것도 앞에 뭘 쓰고? 복면을 쓰고. 나는 너희를 볼 수 있으나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한다. 복면을 딱 쓰고서 아랫것들이 노는 것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죠. 

이 자리가 뭐냐 하면 지도자의 자리에요. 지도자의 자리. 그러면 이 지도자의 자리를 일반대중들이 출세나 과거시험이나 사법고시를 봐서 밀어내겠죠. 밀어내기 위해서 노력하겠죠. 노력할 때, 이미 정태된, 또는 정체된 권력에 들어올 때는 이 주체가 달라야 돼요. 정의롭다, 라는 것만으로는 안 돼요. 안되고, 누구를 위한 정의냐 하면 현 지도체제를 옹호하는 것만이 정의롭다는, 새로운 주체의식을 갖지 아니하면 여기에 넣어주지를 않습니다. 

이게 바로 마르크스의 계급이론이에요. 한 번 부르주아(자본가 계급)는 영원한 부르주아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프롤레타리아(임금 노동자 계급), 직접 노동한 노동자들은 그 나라에서 도전해봐야 실패해요. 바로 1848년 프랑스 민중운동이 실패로 끝났습니다. 나폴레옹 1세의 조카(루이 나폴레옹)고 뭐고 확 다 죽여 버렸습니다. 파리시를 피바다 만들었습니다. 이게 어디 배우지도 못한 무식한 노동자들이 유구한 프랑스 역사를 모독하느냐 해가지고 다 죽여 버렸거든요. 

사정없이 다 죽여 버렸어요. 그리고 유명한 뮤지컬, 장발장이라고 있죠. 레미제라블. 거기에 보세요. 마지막 장면에 전쟁장면이 나오죠. 시가전. 싹쓸이 다 하죠. “이게 어디 권력의 맛을 못 봤나?” 그러니까 일반인, 빵 팔고 채소 팔았던 아줌마들이 너무 세금을 뜯어가니까, 조폭에 대해서 반항을 했는데, 양아치를 뚫고 조폭을 공격한다? 양아치들이 싹 다 해버리면, 한번 민중은 영원한 민중이에요. 계급은 고정화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 계급의 고정화를 뒤엎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느냐, “전 세계의 노동자들이여! 궐기하라!” 이게 바로 엥겔스의 ‘노동자 혁명’아닙니까? 노동자 혁명이에요. 

자, 제가 지금 마르크스의 이야기를 계속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권력은 이미 정태된 상태로 계속 간다고 주장하고. 정말 그 무거운 덮개, 그 무거운 진리의 성채, 캐슬, 그걸 유지하기 위해서, 한번 굳어진 진리의 성채를 이어가기 위해서, 백성들은 그들이 요구한대로 계속해서 지시를 받으면서 신음하면서, 소박하게 나름대로는 ‘내가 고생한 것이 밑거름이 되어서 그래도 언젠가는 잘 살 수 있는 그런 이상적인 천국이 오겠지. 오겠지, 오겠지, 오겠지...내 대는 안 오지만 자식의 대에는 오겠지.’라고 하면서 계속해서 상납할 것은 상납하고, 바치고, 바치고, 바치고 하는, 이렇게 살아가는 그 구조를 이룬 겁니다. 이 둘 사이, 민중과 지도자 사이에서. 

그런데 여기에 누가 끼어들었느냐, 세례요한이 끼어들었죠. 지금 예수님이야기에요. 세례요한이 끼어들었습니다. 주의해서 들어야 합니다. 세례요한이 끼어들었을 때 대중들은 세례요한의 나라를 생각했습니까? 아니면 자기의 유토피아를 생각했습니까? 자기 유토피아를 생각했습니다. 세례요한을 이용하려고 한 거예요. 노선을 바꾸려고 한 겁니다. 일반대중들이 노선을 바꾸려고 한 겁니다. 노선을. 

세례요한이 하는 말을 뭐라고 이해했느냐 하면, 기존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과 다른 논조로 천국을 이야기했고, 그 세례요한이 내뱉은 그 천국의 원리가 기존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이 이야기했던, 이게 다른 정도가 아니고, 대척관계, 완전히 대조가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실제로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외칠 때에, 그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왔잖아요. 근데 세례요한이 먼저 선수를 치죠. “니들이 천국을 가? 니들이 천국을 가면 이 돌멩이도 천국 가겠다.” 제가 또 유적답사 해봤잖아요. 돌멩이 많아요. 돌멩이 굉장히 많습니다. 광야니까. 니들이 천국에 간다면 이 돌멩이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고 했습니다(마3:9). 

그리고 뭐라고 했습니까? 이 무슨 새끼? 이것은 공식적으로 욕할 수 있는 타이밍이에요. 이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했습니다(마3:7). 독사의 새끼들아! 더 완화해서 하면 독사의 자식들아! 근데 자식들이라고 하는 것이 더 심한 욕이에요. 새끼는 일반적인 용어지만 자식은 확정적인 용어잖아요. 자기 아버지가 뱀이니까. 이 새끼들아! 보다 이 자식들아! 이게 더 무섭다니까요. “너의 본질은 변하지 않아. 이걸로 끝.” 이런 뜻이에요. “뱀의 자식들아! 내가 온 것은 너희들로 하여금 뱀의 자식으로 들추어내기 위해서다.” 민중들은 우와!!하고 일어섭니다. 

일어서니까, 바리새인들이 여기서 정태적인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합니다. 찾아갑니다. 아까 했죠. 한 계급으로 들어가려면 심사를 받아야 된다고. 묻습니다. “니가 메시야냐? 니가 선지자냐? 니가 제사장이냐?” 그럴 때 세례요한이 하는 말이 있어요. “너희들이 이야기한 메시야, 너희들이 이야기한 제사장, 너희들이 이야기한 선지자, 그건 아니다.” 너희들이 이야기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너희들이 이야기했기 때문에. 

아까 이야기했는데, 인간이 먼저 하나님을 버렸잖아요. 버린 인간들이 권세를, 백성들의 유토피아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자기들의 신화를, 옛날의 여호와를 누구한테 뒤집어씌운 거예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자기유지의 정당성을 위하여 여호와를 뒤집어씌운 겁니다. 성전재산 누가 다루고? 사두개인들이 다루고. 율법은 누가 다루고? 바리새인들이 쥐고 있고. 그들이 쥐고 있으면서 재판하는 그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고? 대중들의 노동력에서 나오고. 이게 모순이잖아요. 

그러면서 규정은 뭐라고 합니까? 율법에 의해서 이 개 같은 것들이라고 욕하고, 자기들은 율법을 제일 잘 지키는 윗선에 있는 겁니다. 이건 한 일곱 단계의 권력구조가 형성되어 있죠. 권력구조가 형성되어 있는데, 세례요한이 예루살렘에 가지 않아요. 이런 게 하나하나 의미가 있어요. 세례요한은 어디서 활동합니까? 광야에서 활동해요. 광야는 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가기 전에 대기된 장소가 광야입니다. 

광야에서 뭘 건너야 돼요? 요단강을 건넘으로써 드디어 약속의 땅에 진입할 수가 있거든요. 그러면 요단강을 다시 건너자 이 말이죠. 옛날 요단강을 건넜던 그 취지는, 지금 세례요한 자신이 지도자가 아니에요. 다만 자신은 요단강을 건널만한 자격자냐, 아니냐, 라는 심사를 하면서 물로써 세례를 주는 역할을 하는 겁니다. 

제가 지금 여러분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그 당시, 예수님 당시에 유대사회의 구조를 권력적 측면에서 보면 정리정돈이 좀 되죠. 권력적 측면. 개인이 어떻게 기도합니까? 이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나는 헌금을 얼마 해야 됩니까? 지금 개인구원의 문제가 아니고 집단구원 문제라니까요. 집단의 성격을 규정하는 거예요. 집단의 성격을 규정해야, 그 조직 속에 있어야 거기서 주체를 할당받는다니까요. 주체를. 

“여러분 어느 소속이에요?” 이래 물어야 된다니까요. 사도바울이 묻는 것은 그런 거예요. “당신은 예수 안에 있어요? 예수 밖에 있어요?” 사도의 모든 질문이 그런 거예요. 사도의 모든 발언이. “너 지금 누구와 함께 있어?” 이런 것이지. “너 훌륭해? 인격적으로 인간 됐어?” 지금 그걸 묻는 것이 아니라니까요. 이게 참 어렵죠. 이게 왜 어려우냐 하면은요, 항상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내가 선을 행함으로 구원받는다, 내가 원하는 것은 내가 하기 나름이다, 지금 거기에 현대인들이, 현대인들이 개인주의거든요. 

이걸 ‘고독한 주관성’이라고 합니다. 그냥 주관성이 아니고 고독한 주관성이에요. 고독한 주관성이기 때문에, 그 사람들 앞에 뭐가 있느냐 하면 객관들만 있어요. 객관들. 객관들이 있다고요. 남이죠. 남. 고독한 주관은 나고. 그러니까 이거는 권력이라는 현실을 완전히 무시한 거예요. 내가 무슨 흉내를 내느냐 하면 내가 대통령 흉내를 내고 이건희 흉내를 내는 거예요. “나는 월급 200만원 받지만 그래도 나는 내 월급 갖고 내 가정에서는 내가 주인공이다. 나는 절대적으로 내가 주인공이다. 어느 누구도 나를 간섭할 사람은 없다.” 

그랬는데 회사 상무가 “어이, 김부장! 회사에 빨리 와.”라고 부르면 “예.”하고 가죠. 집에 있어도 권력구조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어요. 교장선생님이 찾으면 우에 할 건데요? 이렇게 성경공부하다가도 전화 받아야죠. 왜 전화했느냐고 이렇게 하면 곤란하다니까요. 마음으로는 고독한 주관성, 절대적 주관성을 하고 싶어요. 마음으로는. ‘니들이 뭘 알아?’ 이런 생각이 있으니까, 회사에서는 고분고분하다가는 바깥에 나가면 부장 욕하고, 윗사람들 막 욕하잖아요. 그 다음 아침 되면 또 고분고분하다가. 

이게 뭘 의식하는 거예요? 나는 이거 되고 싶은데, 고독한 주관성이 되고 싶은데, 나는 내가 신이 되고 싶은데, 세상이 용납하지 않아서 내 모습이 내가 보기에 한탄스럽다 이 말이죠. 한탄스러운 거예요. 그러면 퇴직하면 되지? 퇴직을 하게 되고 연금 받고 혼자 살게 되면, 천하에 그 누구도 나보고 뭐라고 할 사람이 없죠. 근데 퇴직하기 전에 직장에서 뭐 250만원 받았습니다. 퇴직한지 한 2년이 됐는데, 어느 단체에서 300만원 줄 테니까 오시겠습니까? 라고 하면, ‘아이고 내 가치가 올랐는가?’하면서 가죠. ‘뭐, 나 6개월 놀만큼 놀았다.’ 

이게 뭐냐 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환이에요. 교환. 자본주의는 교환과 교체에요. 집사님 딴 데서 돈 준다고 하면 가죠? 여지없죠. 가죠. 대답하는데 방금 1.5초 걸렸어요.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어느 누구도 못 빠져나와요. 왜? 인간 자체가 상품화되었기 때문에. 상품화되었죠. “이 목사님! 교인 한 700명 되고, 차주고, 아파트주고, 연봉 한 1억이 넘는데, 뭐 작은 교회에서 복음전하지 마시고 오실래요?”라고 하면 대답하는데 1.5초보다 조금 더 걸립니다. 약간 생각해요. 근데 조건이 있습니다. “한 달 만에 교인들 다 내보낼 테니까, 그냥 건물만 남고 교인들 다 가도 괜찮습니까?”라고, 이렇게 해야 되겠죠. 

자본주의는 ‘나’라는 것이 본의 아니게 이미 상품화되었어요. 결혼도 마찬가지에요. 이쁜 게 팔리거든요. 계속해서 내가 누구의 사람으로 장부에 기입되듯이 계속 기입되기를 내가 원하고 있고, 내가 들어갈 때는 반드시 유예된 유토피아, 나만 삽니까? 내 가족, 내 자식들도 살려야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유예된 유토피아를 위해서, 적절한 상황을 찾아서 계속 바꿔치기를 해나간다니까요. 누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벗어나요? 누가 이 권력에서 벗어납니까? 못 벗어나는데, 누굽니까? 벗어난 사람이? 세례요한이죠. 

세례요한은 과거의 흐르는, 이 역사의 흐름에서 이탈했습니다. 앞으로 오실 천국에서 파견된 사람이에요. 천국에서 파견된 사람인데, 그리고 그 천국이 내가 여기 있음으로서, 내가 여기 있다는 조건 때문에 천국이 점점 더 가까이 오게 되는 거예요.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그 가까이 온 하늘나라는 뭐냐 하면 심판의 나라에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구원자가 아닙니다. 세례요한의 말에 의하면 예수님은 구원주가 아니고 심판주입니다. 알곡은 창고에 가라지는 불에 태우시는, 불로 싸질러버리는 심판주예요. 도끼이야기는 왜 끄집어냈습니까? 그러니까 세례요한과 예수님은 “어데~! 내 선악과 따먹고 토끼려고? 토낄 데가 있는 줄 알았지?” 내 선악과 따먹었다는 이유 때문에 심판을 해버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 자체가 지옥이에요. 지옥불이에요. 지옥 불을 받을 곳이에요. 

왜? 불로 세례를 주니까. 물로 세례주고 불로 세례 주니까. 지옥불로 터지는 세상이니까. 마음껏 웃어대라는 거예요. 마음껏 웃고 마음껏 승리를 외쳐라! 니 눈앞에 지옥불이 보이지 않느냐? 이게 세례요한입니다. 회개하라. 니 소속이 어디냐를 다시 보자. 이 소속에서 죽어라. 그리고 이 세례요한의 소속으로 옮겨라. 그게 물로 세례를 주는 거예요. 세례라는 것은 소속이 바뀔 때 일어나는 그런 의식이죠. 하나만 이야기하고 10분 쉽시다. 

기존의 권세 형식, 형태는, 아까 지도자에게 뭐가 왔다고 했습니까? 신화가 오죠. 그래서 제의적 구조에요. 제의라고 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 종교의식 하는 것. 제의적 구조에요. 신화적입니다. “미래의 유토피아가 현재 우리의 권세자들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우리를 믿고 따르시면 여러분들이 원하는 유토피아는 우리를 통해서 주어집니다.” 이게 바로 유대사회입니다.

 이미아 (IP:122.♡.178.64)18-03-25 19:33 
광주강의20180323b 마가복음11장 27절-30절(필요 없는 권세)-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결국 버린 데서 구성된 그 마음가지고 그대로 하나님께 또 나아가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여, 나를 변화시킬 생각하지 말고, 내가 하나님을 버린 이 마음을 그대로 받아주소서.” 하나님이 나의 마음을 탈취할 생각 말고, 나는 이 땅에서 너무 고생스러우니까 죽어서 좋은 천국가게 해달라는 거예요. “해주시면 아낌없이 달라는 대로 다 해줄 테니까. 시키는 대로 할 테니까, 내가 다시 천국 쪽으로 가겠다는 이 희망을 하나님께서 거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하나님 앞에 이야기할 때, “나는 터치하지 마시고 하나님 우리 만납시다.”라고 할 때, 그 인간에게 뭐가 빠졌는가 하면은, 죄라는 게 뭔지를 모르고 있는 상태죠. 죄라는 게. 나 문제 있다가 아니라, 내가 문제 있다는 것을 인간은 몰라요. 왜냐하면 한 번도 하나님과 만난 적이 없기 때문에 문제 있는 것을 몰라요. 인간이 문제 있다고 여기는 것은 뭐냐, 내가 다른 사람하고 만날 때, 내가 그냥 만나는 것이 아니고 내가 가지고 있는 힘과 저쪽이 가지고 있는 힘과 힘의 만남이에요. 

그러면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그 힘과 힘 속에서 만나기 때문에, 만약에 상대방이 나보다 힘이 약하면 그거는 죄가 되고 나는 의인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저쪽은 힘이 센데 나는 힘이 없다. 그러면 내가 죄인이 되는 겁니다.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가 되는 겁니다. 19년 전에 애 하나 물에 빠져가지고, 변호사 되어서 복수해나가는 <리턴>이라는 드라마가 있다 아닙니까? 소위 사회에서 잘난 인간들이 다 빠져나가는 거예요. 그건 정의롭지 못한 거예요. 그러면 정의는 내가 직접 복수하면서, 여자변호사가 직접 복수하면서 자기가 정의를 세우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건 모든 드라마가 다 그렇죠. 모든 드라마는 인간 대 인간과 비교하는 거예요. 인간과 인간을 비교할 때, 나한테 누락된 권세와 가진 권세, 가진 권세에 대한 누락된 권세, 약한 권세의 몸부림이고 반항이고 반발입니다. 일종의 혁명이죠. 그것은 뭘 발휘하느냐 하면, 바로 아까 이야기한 고독한 주관성을 발휘하는 겁니다. 나 빼놓고는 전부 다 남이니까. 중요한 것은 남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있기에 비로소 성립되는 것이 남이잖아요. 

그러니까 누구 위주로? 나 위주에요. 죄냐, 의냐, 선이냐, 이거 누가 결정합니까? 내가 결정하는 거예요. 근데 나는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현재 갖고 있던 힘과 더불어서 함께 있는 거죠. 그럼 제가 첫째 시간에 이야기한 대로 이 힘의 원천을 알아요? 몰라요? 몰라요. 힘의 원천을 모르고, 남하고 비교해서, 나는 힘이 쪼끔밖에 없네. 너는 많이 가졌네. 그 힘 나눠줘. 안 나눠주면 이 세상은 정의롭지 못하다고 합니다. 

그럼 니가 힘이 왜 필요 하냐? 거기에 대해서는 어떤 사람도 해답과 정답을 내놓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자기 힘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지도자 못지않게 서민이라 할지라도, 그 서민이 내 힘을 갖는 순간, 순간적으로 굳어지면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 절대적이 돼요. 절대적이 됩니다. 절대적. 그런 사람 많잖아요. 옛날에 아버지가 방앗간을 하든지, 술도가, 아니면 파출소장, 옛날에 잘나갔던 사람들의 리스트에요. 옛날에 이쯤 돼야 좀 산다고 할 수 있어요. 

파출소장, 완전히 이거는 그 마을의 교주가 아닙니까? 유지정도가 아니고 완전히 그 마을을 장악하죠. 얼마나 비리가 많았으면, 얼마나 법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법을 알고 있는 파출소장이 그 지역을 완전히 휘잡아요. 휘잡고 있습니다. 술도가, 얼마나 술을 처먹었으면 술도가를 냈겠습니까? 그 다음 방앗간. 그래서 방앗간, 술도가, 파출소장 하면 그 집은 완전히 그거는 제왕적위치에요. 술도가해서 잘 사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옛날에 mbc드라마가 있었어요. “아, 글씨!”하는 백일섭이가 나온, 옛날에는 잘 살았거든요. 여기서 종말이가 나와요. 종말이. <아들과 딸>이라고. 정말로 종말이가 나와요. 종말론적인. 지금 김치공장하고 있다던데. 

이게 뭐죠? 아까 첫째 시간에 했던 향수죠. “옛날 우리 집안이 이렇게 잘나갔어.” 그러면 결혼을 잘 하던지, 뭘 잘해서 옛날만큼이나 다시 유토피아가 회복이 될 때 내 주체가 되는 거죠. 그러니까 나는 아무 문제가 없어요. 나는 절대적 존재에요. 아무 문제없는 거예요. 한 순간이 고정된 순간, 주체는 절대적 존재가 됩니다. 첫째 시간에 첫 번째, 두 번째 이야기했죠. 그럼 이제 세 번째 이야기해야 될 차례입니다. 

세 번째 이야기가 뭐냐 하면 예수님에 의한 권세는 둘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인간들이 필요로 하는 권세. 이 권세는 뭐냐, 인간들이 하나님을 배반한 것조차도, 그걸 정당한 것으로 안 들키게 해주는 그러한 권세. 인간들이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 쪽에서는 죄인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살아야 되겠다 하는 것을 정당화해달라고 요청하는 권세. 또 하나는 인간에게는 필요 없고 하나님에게만 필요한 권세. 이것이 바로 세례요한과 예수님이 가지고 있는 권세입니다. 인간에게는 필요 없는 권세. 

오직 모든 권세는 한 점, 예수 그리스도에게 흡수되고 빨려 들어가야 될 그 권세.
세상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한 점으로 빨려 들어가야 돼요. 블랙홀 같아요.
예수님은 블랙홀 같아요. 모든 것이 소용돌이 중앙, 태풍의 눈이에요. 그 권세.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셔가지고
인간이 가지고 있다는, 자기를 위해 필요한 권세를 어떻게 합니까? 그 권세는 회수하겠죠.
회수하면서 벌어진 사건이 십자가사건이에요. 회수하면서.
회수를 당하면 이 사람은 구원받고,
회수당하지 못하면 이 사람은 지옥 가는 거예요. 회수 당하는데 거부하거나 반발할 때는.
 


자, 예를 들겠습니다. 마태복음 9장에 중풍병자가 나오죠. 중풍병자가 예수님한테 나온 이유가 있습니다. 뭣 때문에 나왔습니까? 자신의 병을 고쳐주기 위해서 친구들하고 합세해가지고 지붕 뚫고 내려왔잖아요. 그런데 한번 생각해봅시다. 자기가 뭔데 병에 안 걸려야 돼요? 니가 뭔데? 내가 건강해야 된다고 우기는 것은 지금 원천적으로 뭘 무시하느냐 하면은, 인간은 하나님께 범죄 한 인간이라는 것을 완전히 깡그리 무시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심판주로 왔잖아요. 아까 첫째시간 마지막에 했잖아요. 세례요한은 이 세상에 도끼 들고 왔죠.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잖아요.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오실 하나님은 구원자가 아니고 무슨 자다? 심판주가 되시는 거예요. 심판주. 그 심판주에 대해서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되는가를 세례요한이 보여준 겁니다. 그 당시 바리새인들이 하늘나라를 뭐로 봤느냐 하면 구원의 날로 본 거예요. 

그런데 세례요한은 구원의 날로 보는 그 사상, 그 사상에 갇혀있는 모든 인간에 대해서, 지도자급부터 시작해서, 모든 사상에 대해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까 너희들은 나하고 노선이 다르다는 거예요. 노선이. 너희들이 갖고 있는 권세 말고, 다른 노선이 개입된 거예요. 삽입된 거예요. 

그래서 아까 바리새인들이 와서 물었죠. 니가 메시야냐? 니가 제사장이냐? 니가 선지자냐? 아니라고 했죠. 나는 오실 분의 노선이지, 너희들 노선이 아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나오죠. 누구 허락을 받고 하느냐? 라고 하니까, 내가 너희들의 노선이 아닌데 너희들의 허락을 왜 맡아야 하느냐? 내가 하는 것은 너희들 노선 말고, 무슨 노선이다? 하늘에서 주시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받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요한복음 3장에서 하고 있습니다. 

잠깐 한 번 찾아볼까요? 권세이야기하면서 그걸 빠트리면 안 되겠죠. 언급해야 되겠죠. 3장 27절,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너는 지금 누구 허락을 받고 하느냐?” “나는 너희들 허락을 받을 수 없다.” 그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세례요한을 싫어할 수밖에 없죠. 

왜냐하면 아까 마지막에 했잖아요. 권세가 제의적 권세기 때문에. 제의적 구조기 때문에. 이걸 여러분들이 단순히 유대사회만 생각하면 안 돼요. 모든 국가는 반드시 종교적입니다. 종교적이에요. 그리고 인간의 모든 모임은 정치적이고요. 지금 밥 털어 먹고 죽을 사람 같으면 정치이야기 필요 없어요. 그러나 반드시 우리 가정은 내년까지 이어진다 싶으면 여기서 유토피아가 형성되고, 소망이 유예가 되잖아요. 

유예가 되면, 여기서 누가 지도자가 되어가지고 내년 목표한 데까지 끌고 갈 때에, 여기서 뭐가 발생돼요? 정치가 발생돼요.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 명령하는 자와 명령받는 자가 성립되는 겁니다. 문제는 우리 가정을 포기한다면, “니 같은 것은 호적에서 뺀다.” 이러면 소외된 거죠. 배제된 거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구원방법이 뭐냐 하면 기존의 권력에서 너를 뽑아내겠다 이 말이죠. 기존의 권력 노선 말고 다른 노선에서 너희들을 이 땅에서 내가 뽑아내겠다는 거예요. 뽑아내는데, 뽑아내는 과정이 뭐냐, 예수님이 빠져나온 그 경로를 그대로 답습하면서 빠져나오는 거예요. 

베드로와 열한 제자는 자기들이 그렇게 권력적이고 정치적인지 몰랐죠. 마지막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에 자기가 얼마나 평소에 기존의 권력에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겁니다. 그리고 그거는 인간의 힘으로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왜? 주체가 그런 것을 배웠기 때문에. 예수님이 함께 있을 때 제자들이 말합니다. “이 중에서 누가 더 높은 자입니까?”라고 했을 때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세상권세를 더 언급했어요. “세상 권세자는 섬김을 받는 자가 높은 자이지만 나는 너희들에게 이야기한다. 누구든지 어린아이처럼 섬기지 아니하면 안 된다.” “그럼 섬김이 뭡니까?” “이 쓴 잔을 마실 수 있느냐?” 제자들은 못 마시죠. 왜? 잘났으니까. 

그러면 언제 마실 수 있습니까? 잘났으니까 쓴 잔을 마실 수 없다면 언제 마실 수 있어요? 못난 자가 될 때에. 그 못난 자가 뭐냐 하면 비로소 예수님 앞에서 뭘 알 때? 죄인인 것을 알 때에, “주여, 저를 함부로 해주시옵소서.” 여자 같으면, “주여, 저를 성폭행 당하게 해주시옵소서.” 남자 같으면, “주여, 저를 부도나게 해주옵소서.” “주여, 온 몸이 문둥병 되게 해주옵소서.” 이게 인간의 힘으로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윤택은 제왕적위치에서, 복면가왕으로서 우리의 연극패를 미리 키우고, 키우게 되면 너희들은 나처럼 밥 먹고 살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한 것입니다. 제왕적위치에서 16명 성폭행하고 60명 성추행했습니다. 그들은 아낌없이 몸을 맡겼어요. 왜? 그들의 유토피아가 이윤택한테 가 있었기 때문에. 윤택이 윤택이 이 윤택이. 안 그런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요. 

지금요, 교회가 가짜입니다. 왜 가짜냐 하면 이미 범죄 한 상태에서 예수를 찾고 하나님 믿는다는 것을 본인들이 인정하지 않아요. 하나님을 버린 상태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찾고 예수 찾고 천국 가겠다고 나선 이것이, 화근이고 문제가 된다는 생각을 그들은 못하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못 빠져나오면 뭐가 됩니까? 죄인 되겠죠. 죄인 되면 돼요. 문제 굉장히 간단해요. 죄인 되면 돼요. 

죄인의 특징은 뭐냐 하면 아까 이야기했죠. 죄인 되면,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어떻게 조지든, 어떻게 꼴아 박든, 어떻게 유린하든, 저로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우린 하나님을 버린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 구원주가 아니고 심판주기 때문에. 심판주가 심판을 행세하겠다는데, 나에게 심판을 하겠다는데, 우리가 왜? 그것을 거부할 권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다는 거예요. 그런 것을 고백하는 겁니다. “화로다 내가 망하게 되었구나!”(사6:5). 

정말 십자가를 건성으로 아는 것이 아니고, 성령 받은 상태에서 십자가를 받아버리면 뭐가 나오느냐 하면, 나는 참담한 사람이 돼요. 참담한 사람. 제가 이론적으로 이야기하겠습니다. 심판받아야 구원이 있고, 죽어야 생명이 있고, 죄가 있는 곳에 의가 있습니다. 이 이론은 틀린 말이 아니고 맞아요. 그런데 이걸 머릿속에 집어넣어버리면 뭐가 생각나느냐 하면, 그렇게 해서 얻을 천국과 구원의 기쁨이 확 다가옵니다. “그래! 챙겼어! 나 이제 챙기는데 성공한 거야! 복음듣기를 잘했어!” 근데 이거는 성령 받지 않은 상태에서 이론적으로 아는 거예요. 

그러나 막상 성령 받아서 정말 죄 속에, 정말 심판 속에, 정말 주님 앞에 오게 되면 나는 뭐가 되느냐 하면, 참담한 존재로 등장합니다. 참담함. 죄송하고 미안합니다. 그 취지가 담긴 설교가 수요일에 했던 “당신의 이름은?”이라는 그 설교에요. 왜, 야곱이 얍복강에서 싸우고 난 뒤에, 그렇게 싸워서 지기 싫어하는 야곱이, 왜 형한테 자발적으로 먼저 나서서 절을 한 번 한 게 아니에요. 일곱 번 절을 합니다. 일곱 번. 그리고 용어도 달라져요. “나의 주여!” 그리고 그 다음에 뭡니까? “내가 받은 복 형이 다 가져가세요.” 왜 그렇게 하는 겁니까? 다리는 누구한테 얻어맞았는지 절면서, 김대중처럼 절면서, 지금은 죽었지만, 절면서 왜 그렇게 달라졌어요? 

하나님이 야곱을 상대할 때, 야곱이 할 수 있는 것을 다 보여줘요. 그러면 야곱은 상대방을 이기는 것, 그게 야곱이 해야 할 일의 경계선이에요. 거기까지예요. 드디어 해가 뜨기 시작합니다. 해 뜨고, 하나님을 이겼던, 억제했던, 인간의 일이 끝나고, 그 다음부터는 누구 일이냐 하면 천사의 일이에요. 천사가 야곱의 환도뼈를 쳐버립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야곱과 천사의 만남에서 새롭게 발생되는 이름이 무슨 이름? 이스라엘. 

이스라엘 이름은 인간의 일은 어디까지가 한계며, 하나님의 일은 어디서부터 시작해서 어디까지가 완성되는가를, 이스라엘 이름 안에 그 두 요소가 다 들어있어요. 다 들어있게 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할 때, 그냥 구원하지 않고, 싸움이라는 방식으로 창세기 3장 15절, 싸움이라는 방식으로 인간을 구원하면서, 하나님이 인간을 건져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들어오는 자기의 자리를 인간의 육속에 마련해놓고, 그 인간을 죽임으로서, 인간을 죽이고 그리고 승리했다는 것. 

승리했다는 그 이름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가져오고, 왜냐하면 가져올 권리가 있죠. 왜 가져오느냐 하면 이게 전부 다 언약의 구조 때문에 생겨난 거예요. 언약을 하나님이 줬기 때문에 언약의 구조를 지상에서 형성해야 됩니다. 구성해야 됩니다. 구성요소 속에 야곱은 몸을 제공하고, 하나님은 그 새로운 이름을 얻기 위한 재료가 하나님 쪽에서,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제출한 거예요. 제공한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창조를 한 거예요. 자기창조. 

자기가 시작한 일을 자기가 창조해서 마감도 본인이 한 거예요. 거기에 인간의 몸이 쓰인 겁니다. 원재료로써. 죄악 된 몸, 육의 몸, 악의 몸이 필요한 거예요. 그렇게 해서 인간이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올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찾아온 거죠. 밤중에 찾아옴으로써, 언약 안에서 인간은 뭔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소위 구원을 받을 수가 있어요. 언약이 없으면 뭐가 안 되느냐 하면, 하나님이 왜 사람이 되셨는지가 풀리지 않습니다. 

그럼 그 전까지, 2000년 기독교 신학은 어떤 것을 가르쳤는가? 하나님에게는 인성과 신성이 있다. 인성과 신성이 있어가지고, 거기서 인간을 받아들이면 인간은 인성인 반면에 영혼은 신성이다. 그 죄지은 신성을 주님이 와서 바꿔치기 해버리면 인간은 신성의 인간이 된다. 이래 돼버려요. 뭐가 문제입니까? 뭐가 빠졌어요? 싸움이 빠졌죠. 이기고 지고 하는 게 빠졌죠. 그럼 싸움이 빠져버리면 뭐가 소용이 없어요? 창세기 3장 15절이죠.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운다는 그 내용이 없이 구원이 된다는 것이 2000년 동안의 천주교와 개신교 간의 신학입니다. 

왜 싸움이 빠져있을까요? 이성적으로 알기만 하면 구원이 될 수 있도록, 교회가 그렇게 만든 겁니다. 무엇이 빠졌습니까? 이 참담함. 이 참담함이 빠지고 지식으로 받아들이면 구원받고. 받아들이면 그 다음이 뭡니까? 세례식 받아야 되겠죠. 제가 강남강의에서 이야기했잖아요. 실체는 없는데, 실체가 없으면 인간은 못 믿으니까 실체를 만드는 거예요. 예배당 만들고, 신부, 목사, 이렇게 구비하면 실체가 점점 더 형성되죠. 교회법 만들고, 거기다 성만찬 하고, 사찰집사는 못해요. 목사가 해야 돼요. 칼빈에 의하면. 성만찬이나 세례식 주죠. 

그러면 거기에 행함으로 그 실체에 가담하게 되면, 어디 여행사에 등록하면 여행가는 것처럼, 구원되잖아요. 눈에 보이는 예배당 찾아서 가서 등록하고 세례식, 성만찬 받으면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다면서요. 내 살과 내 피로 하기 때문에. 그게 바로 문화 아닙니까? 종교문화. 그런 식으로 2000년 동안 계속 사기를 쳐온 겁니다. 전 세계의 교회가. 실체가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느냐? 사람들이 이렇게 나온 겁니다. 안 믿으면 되잖아요? 왜 믿어야 돼요? 유토피아, 향수 때문에. 나 잘되기 위해서. 내가 잘돼서 천국가야 된다는 거예요. 

그럼 뭐가 빠졌어요? 직접 예수님의 영, 또는 예수님과 만난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의 원수의 생각, 악마의 생각이라는 것을,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기 때문에 그걸 느끼지를 못하는 거예요. 그걸. 내가 구원받고자 하는 이것이 마귀 짓이라는 것을, 바리새인들도 몰랐고, 사두개인들도 몰랐고. 율법을 지키겠다고 하는 것이 악마 짓이라는 것을 그 누구도 몰랐어요. 

자, 한 번 물어봅시다. 세례요한이 천국이 왔다는 것을 제시하기 위한 실체가 뭡니까? 없죠. 없는 거예요. 없어요. 실체가 없죠. 물세례 이거는 아니죠. 심지어 예수님이 실체죠. 그러면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믿어야 될 게 아닙니까? “오실 그이가 당신이니까?”(마11:3). 이랬다고요. 주님의 실체는 놀랍게도 세례요한에게 “내가 메시야라고 전해라.” 이렇게 한 게 아니에요. 뭐라고 합니까?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11:5). 이거 뭐예요? 너희들이 예상 못할 일이 벌어질 것이다. 

그러면 예상 못할 일이 벌어지려면 인간은 무엇까지 알아야 돼요? 내가 어디까지 예상할 수 있는가를 알아야 되겠죠. 인간이 어디까지 예상할 수 있는가를 본인이 압니까? 모릅니까? 모르죠. 상상에 상상을 하고 상상에 상상을 또 하고, 3월 25일에 상상한 것이 뭔지 몰라서 기다리고 있어요. 3월 26일이 되면 내가 뭘 상상했는지 몰라요. 4월 2일에 뭘 상상할지를 여러분 아세요? 모르잖아요. 우리는 계속 유토피아, 상상, 실체 찾기. 눈에 보이는 것 찾기.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십자가에서, 우리는 그렇게 실체를 찾는 그게 죄송하고 미안한 것입니다. 참담하게 느껴져요. 참담하게. 이 소자에게 한 것이, 제가 수요일에 할 때는 소자라고 안 했죠. 지극히 작은 자. 지극히 작은 자의 특징이 뭐냐, 누구라도 다 이 작은 자를 이깁니다. 누구라도. 아까 첫째 시간에 한 이야기에 의하면 지극히 작은 자가 뭐가 엷어요? 가진 권세가 엷죠. 지극히 작은 자의 권세가 얼마 안 되잖아요. 그게 바로 예수님을 볼 수 있는 실체인데, 그 실체는 일시적입니다. 어린애들 고아원하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그때뿐이에요. 또 사라져요. 

인간 쪽에서 뭔가 실체를 잡겠다고 하는 자체는 어디서 벗어나느냐 하면 “나는 참담합니다.”라는 의식에서 벌써 도망친 거예요. 벗어난 거예요. “나는 그다지 뭐 참담할 것까지는 아니고, 나는 죄인인 정도는 알겠는데 참당할 정도는 아닙니다.”라고, 또 다시 자기 자신의 권세를 요청하고 희망하고. ‘나는 천국 갈 자격이 될 걸?’이라고 다른 자아를 또 상상하고. 참담하면 그런 천국 갈 상상도 하지 말아야 되는데, ‘참담하지만 이걸 아니까, 참담해도 괜찮은 자아잖아.’라고, 그런 얄팍한 수작을 부리는, 또 나를 상상한다니까요. 

전부 다 사기입니다. 모든 게. 모든 게 사기에요. 사기를 치실 때 “이게 사기다.”라고 하시고 치셔야 돼요. 단지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이걸 지식으로 외우고 머리에 다 담는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주님의 소관이지 제 소관도 여러분 소관도 아니에요. 성령께서 자기 택한 백성을 직접, 지극히 작은 자로 만들고 참담하게 만들 겁니다. 참담한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범사에 감사한다는 거예요. 범사에 감사한다는 것. 

여러분, 세례요한이 목 잘릴 때 얼마나 창피스럽고, 우사스럽고 얼마나 아플까? 그렇게 생각하는데, 실제로 그랬겠어요? 세례요한이 목이 잘릴 때. 여러분,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을 때 ‘아이고 창피스러워라. 집안가족들이 보면 얼마나 우사스럽노..’ 뭐 잘났다고 성령세례 받아가지고, 남 귀신도 쫓아내주고 병도 고치고 칭찬도 많이 받았는데, 돌에 맞아 죽는 것을,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는 이런 식으로 부끄럽게 여긴다면,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을 참담하게 안 보고 있다는 뜻이에요. 

성령이 임했다는 말은 뭐냐 하면 지적당할 대로 지적당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성령이 임하게 되면, 욥처럼 유구무언이 되는 거죠. 할 말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나온 유명한 노래가 있잖아요. 할 말을 잊었지만은~♬(김수희, 잃어버린 정). 우리교회 집사님들의 특징이 뭐냐, “할 이야기가 없습니다.”에요. 지난 주 기도를 이상규 집사님이 했는데, 내내 신경이 쓰이는 거예요. 마이크를 켰는지 안 켰는지. 마이크를 켜서 이상규 집사님의 기도가 나와 줘야 씹을 게 있다니까요. 근데 마이크를 안 킨 느낌이 있어가지고... 켰어요. 아이고 다행이네요. 그럼 이상규 집사님은 참담하게 되는 겁니다. 참담하게 되어야 돼요. 참담하게. 

아까 했던 이야기를 다시 합시다. 기존의 권세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은, 지적으로 복음을 외워서 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빠져나오신 그 방식 외에는 없어요. 그래서 수요일에 이야기했던 것처럼, 하나님이 찢어주신 그 구멍이 아니면 인간이 빠져나올 수 있는 구멍은 없다고 했죠. 하나님이 먼저 찢어버리신 거예요. 이 권세, 세력을. 찢어버리고 그 찢어버린 그 자리에서만 빠져나와요. 야곱은 죽어야 될 이름이에요. 야곱은 그냥 자살하면 안 되고,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아, 이미 나는 죽은 자로 다루어졌구나!’라는 것을 깨닫는 겁니다. 죽은 자로. 

그냥 죽은 자가 아니고, 육의 대표자, 죄로 죽은 자에요. 그러니까 야곱의 특징이 뭐냐 하면 한 것도 없이 사랑받는 거예요. 한 것도 없이. 그러면 야곱의 죄는 뭡니까? 지은 죄가 있어서 죄인이 아니고, 이것저것 한 것도 없이 무조건, 무조건 죄를 지어야 된다는 사실을 야곱이 언제 알아요? 형을 만나서는 몰라요. 인간 대 인간에서는 몰라요. 하나님을 만났을 때 나는 죽을 몸을 가지고 지금껏 살아왔음을 아는 겁니다. 죽을 몸을 가지고 살아왔음을. 

그래서 제가 지난 수요일 ‘이스라엘’이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복음 개념을 뭐라고 했습니까? 복의 개념은 영과 육을 가름하는 기준점이 되죠. 내가 복 받았다는 말은 아브라함이 맞아요.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받는다. 아브라함은 납작해야 돼요. 벨기에식 과자가 있죠. 안에 계피 들어간 것. 납작하게 체크무늬 된 것. 와플. 야곱은 와플입니다. 자기 면적을 가지면 안 돼요. 납작해요. 

그래서 주님께서 스데반이나 사도바울에게 할 때는, 나는 아무것도 없는 자, 납작한 자가 되게 만들어요. 납작한 자가 되어가지고, 베드로나 요한이 앉은뱅이를 낫게 할 때도, 나의 것이 없어요. 납작하게 응축이 되었어요. 뭐, 그거 끝나고 난 뒤에 부풀던지 말든지 간에. 하여튼 납작하게 된 거예요. 주님을 모르면 무조건 저주고, 주님을 알면 죄를 지었던 뭐하던 관계없이 무조건 죄인이면서, 무조건 그 사람은 예수 안에서 의가 되는 거예요. 

자, 권세라는 것이 뭐냐 하면, 사도바울에게서는 권세를 예수 안을 이야기합니다. 예수 안. 그래서 제가 아까 첫째 시간에서 예수님의 권세는 어떤 권세라고 했습니까? 힘이 나오는 원천이라고 했죠. 원천. 원천의 권세죠. 원천의 권세가 이 세상을 만들었는데, 이 만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만든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뭐가 되느냐 하면, 여기서 모든 것이 통일이 되겠죠. 통일이 된다는 말은 시간의 흐름이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50이 되든, 60이 되든, 70, 80, 90이 되든, 그것은 무의미해요.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현대 물리학에서 우주를 설명할 때, 풍선에다가 점을 찍어놓고 설명을 하죠. 초등학교 때 그렇게 가르쳐주죠. 풍선에다가 별을 세 개를 그려놓고, 별과 별 사이의 거리를 하나는 5cm, 또 하나의 거리를 2cm라고 해놓고, 바람을 한 번 집어넣어보세요. 바람을 더 집어넣어버리면, 이거 2cm는 20cm, 이거5cm는 10cm가 되겠죠. 하지만 그 별이 차지하고 있는 전체저인 위상은 변함이 없어요. 인간이 죄인의 자리에 있으면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인간은 달라진 게 없습니다. 아무리해도 달라지지 않아요. 

근데 이게 예수님 안에서만 그런 게 아니고, 세상 안에서도 마찬가지에요. 세상 안에서도. 세상 안에 권력이 있다면 어떤 자리라도, 심지어 혼자 살겠다고 저쪽 이스라엘에 간다고 할지라도, 이스라엘 시내산, 시온산에 동굴파고 거기에서 산다고 할지라도, 거기에 뭐가 있습니까? 바로 자본주의적 힘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안 먹고는 못 살잖아요. 앞에 여리고성 시장에는 내려와야 되지 않습니까? 여리고 시장에. 못 먹고 살아도 신발은 신어야 되고 옷도 갈아입어야 할 게 아닙니까? 주차비 받아야 되죠. 그래야 운영이 되니까. 

자본주의적 특징은, 이미 모든 존재는 그냥 존재가 아니고 상품화된 존재죠. 상품화된 상품 속에는 뭐가 있다? 이게 가치가 있는데, 이게 사용가치가 아니고 무슨 가치? 교환가치에요. 만약에 전라남도 광주에 있는 목사가 다 죽었어요. 목사라는 목사는 다 죽었다. 교회는 목사가 필요하다. 그러면 오목사의 가치가 교환가치에서 갑자기 막 늘어납니다. 서로 모시려고 하죠. 아마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거나 희박하지만. 예를 들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수요와 공급의 원칙에 의해서 세상 권력은 그렇게 유지가 됩니다. 수요와 공급의 방식에서는. 

제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백날 개인적으로 난다, 뛴다, 뭐 개인의 가치가 어떠니, 나의 존재가 어떠니 백날해도, 이미 마귀는 웃고 있다는 거예요. 돈 좀 주면 있는 직장 때려치우고 대번에 딴 직장으로 옮깁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주체가 교환가치를 의식하면서, 본의 아니게, 본인이 그렇게 요구한 것도 아니에요. 이미 세상이 나를 그렇게 만든다니까요. 

본인은 진짜 동화나 쓰고 시나 쓰고 싶죠. 동화 한편 쓰는데 한 2억 주면 쓸 수 있어요. 또 바꾸어질 수 있어요. 동화집 백날 내봐야 자기가 자기 돈 내고 사거나 한 권이나 팔릴까? 십자가마을에서 강제로 좀 사주니까 한 열 권이나 팔리겠다. 그런 일 없어요. 팔리지가 않는다니까요. 자기 돈만 들어가서 손해 보죠. 하지만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방이 요구한 사람이 되는 것만이, 시장에서 팔릴만한 상품이 될 경우만이, 그 사람은 인간이 되는 겁니다. 

인간극장을 보면 이태리에서 성악전공한 사람이 뭐하는가 하면 커피 파는 카페해요. 주로 아내가 커피 만들고 남편은 시다발이하고 있어요. 내가 아는 사람은 일본에서 안경박사학위를 따고 왔어요. 지금은 뭐하느냐 하면 조립식 시다로 뛰고 있습니다. 조립식 가건물에 판넬 붙이는 것 있잖아요. 거기에서 기술 배운다고. 나이가 40이 넘었는데. 무슨 안경이냐 하면 ‘안경박사’에요. 

서남대, 대구에 있는 미래대 교수들 줄줄이 다 나왔어요. 전부 다 박사들이에요. 그 사람들 유학 갔다가 온 사람들입니다. 졸업하는 고등학생들은 얼마 안 되죠, 대학이 전부 다 정리되죠. 그 박사들이 다 소용없어요. 그나마 70세까지 해먹을 수 있는 게 목사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말씀운동 박용기는 70세도 빠르다고 계속하고 있어요. 70세도 넘어가고 있는데. 계속 자기가 개척한 교회에서 수렴청정하고 있어요. 인간이 돈을 놔요? 미쳤어요? 

뭐가 빠졌어요? 참담함. 이게 빠진 거예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 하는 이 참담함이 빠진 거예요. 죄 속에 인간이 있는 것은 맞습니다만, 그 죄를 내가 찾을 죄가 아니고, 내가 바로 그 죄의 역할을 해야 된다는 거예요. 내가. 근데 세상의 죄는 사람과 사람과의 비교에서 되는 거예요. 뭐, 성추행, 성폭행이라고요? 한번 전수조사(대상이 되는 집단을 하나하나 전부 조사하는 방법)해볼까요? 전부 다. 모두 다 전수조사 해봐? 판사부터 해서 검사, 말단까지 다 전수조사 해볼까요? 심지어 2살, 27개월 되는 아이의 전수조사. 제가 사진 다 찍어놨어요. 그의 죄를. 우리 외손녀의 죄를 다 찍어놨어요. 밥 안 먹겠다고 도망치는 것 다 찍어놨어요. 

하나님 보시기에 이 세상은, 다시 이야기할게요. 인간이 이미 하나님을 버린다고 선언하고 나온 그 작자들이에요. 그래서 선언했다는 이 사실을 인간들끼리는 몰라요. 모르고, 버림을 받은 하나님이 이 땅에서 와서 버림받은 모습으로 우리 앞에 등장할 때, “저 양반이 왜 저렇게 하지? 좀 양보하면 될 것을 왜 저렇게 고집부리지?” 우리가 의아해하면서, 그동안 우리는 내 근원적인 죄, 근원적인 권력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그건 당최 모르고, 그러니까 원천을, 샘을 몰라요. 요단강의 발원지를 몰라요. 모르고, 그냥 흘러가는 권력, 에라! 아무거나 자본을 잡고 돈을 잡으면 밥이나 먹고 살지 않겠나?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그것만 한 거예요. 그것뿐이에요.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예외가 없어요. 모든 인간이. 떡 없이도 산다고 하는 그런 인간은 없습니다. 떡이 돈이니까, 왜 돈 없이도 살 수 있다는 그런 망발을 해요. 제가 첫 번째, 두 번째 권세를 먼저 언급했어요. 자, 이쯤하면 다 기억이 안 나니까. 첫 번째 권세는 바로 대중들, 서민들, 백성들의 권세죠. 백성들의 권세는 지금은 괴롭지만, 언젠가는 메시야가 와가지고 유토피아를 이룰 것이다. 그들은 미래지향적이고 변화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은 그 대중들에게서 자기들의 위상을 신에 가까운, 신과 유일하게 결탁이 되었다고 대중들을 현혹해버려요. 오늘날 목사들이 대표적이죠. 결탁하는 거예요.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는 그런 식인 거예요. 하나님께로 갈 자가 없어요. 그러면 대중들은 자기의 미래를 보장해준다고 하니까 보장한다는 증거를 대라고 하겠죠. 그들은 성전 붙들고, 제도 붙들고, 율법 붙드는 거예요. 목사끼리 교회법 만드는 거예요. 교단 만드는 거예요. 교단법이 헌법보다 더 세다고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서민들은 용납을 하죠. 왜?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에. 천국은 가야 되겠고, 천국 비슷한 현상이 일어나길 원하고. 그래서 아까 실체라고 했죠. 예배당 건물 세우고, 교회 만들고, 목사 세우고. 이게 뭐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방식으로 손에 쥐겠다는 거예요. 쥐어야 안심이 된다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투입된 세례요한. 세례요한의 실체는 뭐였습니까? 도끼죠. 그냥 도끼가 아니에요. 기존의 니가 어느 권세에 속했는가를 이실직고하라고 다그치는 도끼에요. 

그래서 세례요한에게 의식적으로 바리새인, 사두개인 그 당시의 지도자들이 왔을 때에 과격한 발언을 해버립니다. 이 독사의 새끼들아! 니들이 구원받아? 돌멩이가 구원받겠다(마3:7-9). 이 돌멩이가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니에요. 너희들은 구원 못 받는다는 뜻이에요. 그러면 자기한테 온 사람들은, 결국 구원받지 못하는 그들의 이데올로기, 그들의 사고방식에서 못 빠져나온 상태에서 지금 누구한테 왔다? 세례요한한테 온 거예요. 세례요한은 구원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누가 언급했기 때문에? 그들이 보장해준다고 언급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무슨 근거로 구원을 보장한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까? 거기에 왜 설득 당했습니까? 그들에게는 뭐가 있기 때문에? 성전이 있기 때문에. A.D33년에 예수님 돌아가시고, 그리고 A.D70년 유대나라가 멸망하고, 40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가? 그 일은 성경에 안 나옵니다. 요세푸스가 지은 유대전쟁사나 20권의 책에 다 나와요. 이 전쟁에 보면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었고, 이 성전에서 아까 이야기한 대중들의 권세가 나오고, 구약에서 감람산에 메시아가 내려온다는 것을 철썩 같이 믿었습니다. 유토피아를 그리워했습니다. 

그 유토피아를 이용해서 생긴 파가 네 개의 파가 있어요. 시카리파, 진짜 조폭이에요. 그 다음에 열심당원, 그 다음에 쿰란공동체, 엣센파, 그 다음에 유대정통파, 제의적, 제사를 드리면서 신적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권세. 이 네 개의 파가 내란을 벌였습니다. 그러면 이 예루살렘의 거민들은 각자의 유토피아를 누가 빠른 시일 안에, 누가 확실하게 해줄까, 그 쪽 편을 들어서 내란에 말려들었습니다. 

여기에 처음에 온 왕이 베스파시아누스 왕인데, 이 사람이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 얼마나 내란이 심해서 서로 잡아 죽였으면, 정복하려고 온 사람을 해방자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포위하게 되면 이 사람들은 살 수 있어요. 그런데 베스파시아누스가 정복한 그날, 포위를 포기하고 본국 로마로 돌아갔어요. 왜냐하면 차기 황제(제 9대 로마황제)가 되었기 때문에. 황제가 되고 난 뒤에 그 다음 몇 년 뒤에 다시 왔거든요. 돌아가고 난 뒤에 아들이 와요. 

티투스Titus장군(로마의 10대 황제)이 옵니다. 와가지고, “완전히 항복하라. 항복하면 너희들에게 적당한 땅에 있게 해줄게.”라고 했는데, 항복 못합니다. 이 네 파가 항복 못해서, 특히 시카리파와 열심당원이 로마에 대적하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신화를 이용합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에서 메시야가 로마를 물리치고 우리를 해방하려고 온다고 했어요.  성전이 있으니까. 그래서 성전 붙들고 그렇게 했는데, 이 성전에다가 로마가 실수해서 성전에 불을 지르니까 이 사람들이 몸을 던져서 성전이 불타는 것을 방어했습니다. 그리고 성전에 있는 금을 모두 로마군이 강탈해갔죠. 

이것을 누가 예언했습니까? 예수님이 예언했죠. 예수님이 왜 예언했습니까? 예수님은 이 땅에 자폭하려고 왔어요. 자폭. 나하고 같이 망하자.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인간들이 유토피아를 그리니까, 뭐 현실을 이렇게 그릴 것이 아닙니까?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유대 현실 속에 예수님이 뛰어들어서 줄을 잡아당겼어요. 

천장의 줄을 잡아당기니까 예수님도 죽고 다 죽는 거죠. 마치 삼손이 기둥 두 개 뽑아가지고 블레셋 성전을 폭파하듯이, 주님께서 나도 망하고 니도 다 망하자는 거예요. 다 망했죠. 다 망하면서, 기존의 세상권력은 다 망하는 거예요. 주님만 구름타고 빠져나온 겁니다. 구름타고 빠져나갔죠. 제자들은 도망갔고. 

그 뒤에 A.D70년경에 시카리파 두목이 소수의 사람들을 데리고, 한 삼천 명 정도 데리고 마사다 꼭대기로 갔어요. 마사다 꼭대기는 동영상으로 보셨죠? 거기에서 비둘기 키워서 단백질 보충하고. 이렇게 비가 오게 되면, 모든 그 근처의 비는 마사다의 정상의 물 저장고로 올 수 있도록, 수로를 만들어놨어요. 수로의 모형이 있는데, 이상현 목사님이 주전자를 가지고 물을 부으니까 그 주변에 있는 모든 물들이 마사다 요새로 다 빨려 들어가는 것을, 그걸 제가 못 찍었어요. 뒤에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어가지고. 우리만 찍고 그러지를 못하잖아요. 지금 다시 갈까요? 

그래가지고 3년을 버텼습니다. 티투스가 유대인 노예를 통해서 경사로를 만들었어요. 마사다 요새 서쪽에. 경사로가 아직도 있어요. 경사로 만들고 공성퇴 만들고, 거기다가 불화살을 쏘았는데, 이 시카리파 두목은 바람이 로마 쪽으로 불기 때문에 불화살 쏴봐야 로마군인들이 죽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만큼은 바람이 반대로 불어서 몰살당했어요. 몰살시켜놓고 바로 치지 않고 군사들을 불러 진영에서 잠자게 했습니다. 그 불길을 보고 시카리파 대장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렸다. 자살하자. 다 자살했습니다. 여자 3명에 애들 2명, 5명 남고 다 죽었습니다. 

유대나라 멸망했습니다. 왜 멸망했는가? 예수님은 기존 권세와 함께 자기를 묻어버린 거예요. 어떤 인간도 이 권세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래서 우리는 권세에서 벗어나지 맙시다. 죽을 때까지. 90될 때까지. 우리는 상품화에요. 자본주의에서 못 벗어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주님이 보실 때 어떻게 봅니까? “주여,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라고 고백하면 돼요. 그게 바로 십자가의 증인입니다. 이제는 와플이니까. 납작하니까. 내 것이 없어요. 우리의 복의 기준이 뭐냐, 납작한 거예요. 이쪽이면 저주고 이쪽이면 복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이미 죽은 자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만 살아나는 겁니다. 오늘 제목을 와플로 할까요? 제목은 ‘필요치 않는 권세’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는 필요치 않는 권세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권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사기 치더라도 나만 살아나면 그만이라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기를 십자가 앞에서 들통 나게 해주시니 얼마나 감사한지. 사기밖에 칠 줄 모르고 거짓말밖에 할 줄 모르는 이 죄인을 피로서 구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는 중풍병자가 낫는 것 말고, 니가 죄사함을 얻었다는 그 권세 앞에, 그 권세만 저희들이 자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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