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180323a 마가복음11장 27절-30절(필요 없는 권세)-이 근호 목사
마가복음 11장 27-30절입니다.
27절, 저희가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 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서 걸어 다니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아와 28절, 가로되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누가 이런 일 할 이 권세를 주었느뇨 29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대답하라 그리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30절,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내게 대답하라
여기 세 가지의 권세의 종류가 나옵니다. 하나는 뭐냐 하면 그 당시 민중들, 백성들이 알고 있는 그 권세, 한번 적어보겠습니다. 권세가 세 가지가 나오는데, 첫째는 그 당시 민중들에게서 나오는 권세. 민중들이라고 하니까 또 뭐 사상이 좌파라서 그러는 것이 아니고, 옛날 용어를 쓴 겁니다. 민중들이 생각하는 권세. 그 다음 두 번째는 그 당시 바리새인들, 지도자 또는 정치인들의 권세. 세 번째는 예수님+세례요한이 알고 있던 권세. 이 세 가지로 나누어져요.
우리의 보통 생각으로는 예수님의 권세와 그 외에 권세로 나눌 수 있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을 하는데, 우리가 열왕기상에서 알다시피 백성들과 지도자급이 항상 충돌됩니다. 왜 충돌이 되느냐 하면, 권세의 충돌이 지배한 자와 지배받는 자의 사이에만 성립이 되기 때문에, 권세라는 것은 지배하는 자, 지배받는 자가 없으면 권세라는 것이 현실적으로 성립이 안 되잖아요. 누가 지시를 해야 해요. 그냥 친구끼리 지시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만약에 그걸 위반하게 되면 뒤에 신체적이고 재정적인 폭력을 당하게 됩니다.
권세라는 말이 어렵습니까? 그럼 쉬운 말로 할게요. 힘. 힘은 구체적입니다. 힘이 없으면 못사니까 어쩔 수 없이 눌리게 되는 거죠. 이 예수님의 권세가 뭐냐 하면 힘의 원천을 이야기합니다. 힘의 원천. 여러분 생각을 집중해줘야 돼요. 자꾸 개념이 늘어나니까. 예수님의 권세는 힘의 원천을 이야기하고, 민중들과 지도자들, 이 바리새인들은 이미 원천에서 나온 그 힘. 힘을 갈라먹기 하겠다는 거예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지배받는 쪽은 약간이라도 더 느슨한 통치를 원하고, 지배하는 쪽은 군소리 없게 바짝 쪼이는 것을 원하는 거예요. 느슨한 것을 원하고 바짝 쪼이는 것. 학생들은 선생님에게 시험 줄이자고 하고, 선생님은 시험으로 바짝 쪼이려고 하고. 그럼 학생들은 또 협상을 합니다. 그렇다면 감독 없는 시험을 치자고 하고, 선생님은 감독 두 명으로 늘리겠다고 하고. 여기서 뭐가 생깁니까? 힘이 생기죠. 여기서 힘이 생기는 겁니다.
힘이 생기면서, 여기서 어려운 것은 뭐냐 하면 주체가 규정받게 됩니다. 서울의 유명한 사립학교에 엄마가 애써서 들어가게 했다. 그런데 그 사립학교에서는 일체 담배를 못 피운다. 그래서 선생님들이나 학교 쪽에서는 바짝 쪼입니다. 담배피우면 퇴학이다. 그런데 애는 그 점만 좀 느슨하게 해달라. 못 해준다. 피우다가 걸렸습니다. 그러면 거기서 뭐냐, 힘으로 추방시켜버리죠.
추방, 현재 있는 힘에서부터, 이걸 가지고 어려운 말로 하면 뭐냐, 소외라고 해요. 소외. 소외라는 말을 공산주의 이론에서 자꾸 하는 이유가, 소외라는 말이 뭐냐 하면 일은 노동자가 했는데 그 이익은 자본가가 다 챙겨버리니까, 소외되었다고 하는 거예요. 소외라는 말이 너무 어려운 말이기 때문에, 이걸 쉬운 말로 하면 뭐냐, 배제가 되는데 그냥 배제가 되는 것이 아니고 혜택에서 배제가 되는 거예요. 혜택에서.
그러면 여기에 문제가 있죠. 혜택을 얻겠다고 하는 그 심보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겁니다. 혜택 안 얻으면 되잖아요? 혜택을 안 얻으면 된다고요. 담배 피웠다. 그 유명한 사립학교에서 쫓겨났다. 안 다니면 될 거 아닙니까? 근데 왜 거기에서 실패감을 느끼고 좌절감을 느낍니까? 뭐냐 하면 이미 주체가 그 전에 있던 힘에 의해서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그 학교에 안 다니는 것을 상상하기가 싫은 거예요. 그 학교 배지 달고 교복 입는 것을 상상했는데, 거기서 담배 피웠다고 퇴학을 당하니까, 퇴학을 당하면서 거기에 대한 어떤 아쉬움이라든지 결핍을 느끼죠.
그 느끼는 결핍이 뭐냐 하면, 권세에요. 그러니까 권세라는 것은, 순수한 데는 권세가 없어요. 뭔가 노림이 있어요. ‘나 저거 가져야지. 저거 내 것 만들어야지.’하는 가운데에서 권세가 작동을 해가지고, 그 권세를 얻기 위해서 온갖 아부를 다합니다. 돌이 떡덩이가 되게 하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기도 하고, 마귀한테 절하기도 하고.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는 거예요.
그러면 세 번째 예수님의 권세는 어떻게 되는가, 이게 좀 어려워요. 원래 인간이 하나님을 차버렸잖아요. 선악과 따먹지 말라고 했는데 따먹었잖아요. 거부했죠. 거부해놓고 인간은 신을 찾아요. 아, 이게 이상하죠. 거부했으면 빠이빠이를 해야 되는데, 거부해놓고 신을 찾아요. 이게 뭐냐 하면 신도 내 손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창세기 4장에 가인이 나옵니다. 가인이 하나님께 대들은 것은, 소위 어른한테 젊은 애들이 머리로 받아버리는 것 있죠. 신에게 들이박아 버리는 거예요.
그런 품성을 이미 아담으로부터 부여받았습니다. 인간이 신을 믿는 것은 신에게 헤딩을 해가지고 혹을 내기 위해서, 받아버리기 위해서 신을 믿어요. 나도 힘이 있다 이 말이죠. 권세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내가 권세 있다는 것을 어디서 규정한다? 방금 이론에 의하면 주체가 형성한 곳에 힘이 있는 겁니다. 내가 이 자리를 탐하고 내가 이 자리에서 떠나기가 싫어요. 나는 이미 그 힘에 의해서 만들어진 나이기 때문에. 만들어진 나이기 때문에 그 나 말고 다른 나를 나는 생각도 할 수가 없습니다.
자 그렇다면 첫 번째 민중들의 권세가 뭐냐 하면, 향수가 있습니다. 이동원이 불렀던 향수가 있죠. 돌아갈 곳, 자꾸 향수를 그리워해요. 그 향수는 어떤 향수냐 하면 이 주체라는 나, 그 나가 좋았던 그때 그 시절에 뭔가 있을 것이라는 겁니다. 향수가. 그러면 그 향수를 미래에 투사, 던지게 되면 뭐가 생기느냐 하면 유토피아가 돼요. 이 유토피아를 우리말로 하면 이상향이라고 해요. 이상향.
민중들이 생각하는 것은 항상 현재가 아니에요. 미래지향적입니다. 민중들은 미래지향적이에요. 앞으로 잘 될 것이니까 지금의 어떤 어려움도 인내하자. 일반사람들은 매일같이 인내해요. 매일같이. 앞으로 잘 될 날이 있을 것이니까. 쨍하고 해 뜰 날이 있을 것이다. 그러다가 사기당하고 하지만. 언젠가는 쨍하고 해 뜰 날이 있을 거라는 거예요. 해 뜰 날. 해야 매일 뜨는데. 그래서 계속해서 미루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유예’라고 해요. 유예. 자꾸 미루는 거예요. 계속 미루는 겁니다.
그런데 민중들의 권세는 처음에 내가 원한 권세가 아니고, 유토피아를 이룰 수 있는 그러한 힘이 유토피아와 연결된 힘이기를 원해요. 자, 쉽게 이야기합니다. 유토피아라는 이상향이 있다면, 흔히 교회에서 말하는 천국이죠. 천국에 내가 들어갈 수 있고, 그 천국에서 나오는 힘이 나를 붙들고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요. 그러면 이거는 뭐냐 하면 미완이죠. 미완(아직 끝을 다 맺지 못함). 미완결된, 민중들은 미완이에요.
그런데 지도자들은 사진을 찍어버려요. 스냅사진. 찰칵! 하고 찍어버리면, 민중들이 원할 때, 뭐, 이런저런 것을 원하면서 성전에서 기도하잖아요. 기도하는 순간을 찰칵 찍어버리면 순간적으로 스톱이 되잖아요. 그걸 정태적이라고 하는데, 사태를 정지시키는 겁니다. 사태를 정지시키는 힘을 지도자들이 소유하려고 하는 거예요. 소유하려고. 딱 소유하는 것. 여러분, 이러면 예수님 권세 빼놓고 감 다 잡았죠.
이 세상은 뭐냐 하면, 이 세상의 대통령이 할 일은, 여러분들이 원하는 남북통일 해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현재의 권세는 누구한테? 누구 말 들으세요? 이 지도자의 말을 들어주세요. 깔끔하게 정리가 됐죠. 원래 교인수가 300명인데, 내년에는 350명 보장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누구 말을 들으세요? 현재 장로들과 모든 교인들은 이 당회장 목사의 말을 들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오케이? 오케이! 협상이 되는 겁니다. 협상이 되죠.
그런데 300명이 되는 이 교회에 수년 동안 있던 어떤 권사가 뒤늦게 황혼이혼을 했다. 황혼이혼 했으니까 부끄러워서 그 교회에 못가잖아요. 그러면 그 교회에서 “내년에는 350명을 보장합니다.”라고 할 때, 그 지도자의 권세의 말을 듣습니까? 안 듣습니까? 안 듣고 교회 안 나가버리죠. 개인적 사유로 인하여. 그러면 그 사람은 왜 안 나가냐 하면은, 이혼하기 전에 괜찮은 권사라고 인정받았던 이 영역, 나를 주체라고 규정했던 이 권세가 이혼하고 난 뒤에는 쓸모 짝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민중들이나 대중들이나 교인들이 무조건 지도자의 말을 듣는다? 안 듣는다? 안 듣죠. 뭐냐 하면 현재 유토피아는 옆에 사람이 좋은 나라가 아니에요. 현재 나라고 규정되어 있는 이 주체가 멋있게 되는 나라가 유토피아에요. 그래서 그동안 지도자한테 온갖 수모를 다 당하는 거예요. 그러나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견디고 견디고 또 견디고 또 견뎌요. 왜? 지도자가 좋아서가 아니라, 나의 주체에 걸맞은 내 향수, 내가 잘 되는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이 민중들, 지도자들의 권세를 딱 결합시켜보면, 현실 돌아가는 모습은 철저하게 힘으로부터 나와서 힘으로 말미암아 힘으로 돌아가는 거죠. 문제는 그 힘이 어디서 나오는가 하는 겁니다. 어디서 나오는가? 여기서 이제 이스라엘 갔다가 온 티를 한번 내야죠.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곳이 있어요. 갈릴리 바다 위쪽에.
제가 사진 찍어 온 것을 보게 되면 여로보암이 북쪽 벧엘과 단에, 예루살렘에 있는 제단에 못 가게 하기 위해서, 세겜에서 단까지 통치하면서, 한쪽은 벧엘에 제단을 세웠고, 북쪽 최전방 아람에, 지금은 시리아죠. 아람과 접견지역인 단에 제단을 세웠는데, 그 단을 제가 사진 찍어 왔습니다.
그게 신약에는 가이사랴 빌립보지역이에요. 그 지역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샘물이 나와요. 그 샘이 터져서 요단강이 되고 요단강이 사해로 흘러갑니다. 사해는 어디로 흘러가는가, 사해는 지하400미터기 때문에 더 흘러갈 곳이 없어요. 매년 50미터씩 줄어듭니다. 이스라엘민족이 그 옆에서 야자수 농장을 하기 때문에, 물을 다 빼앗아가서 없어요.
그러면 여기서 원천이 뭐냐, 원천이 분명히 있어요. 헐몬산이라고 해서, 약간 눈 덮인 산을 찍었는데, 헐몬산이 원천이 되는데, 지금 원천이 없이 요단강, 갈릴리, 사해, 여기에 뭔가 힘이 흐르고 있어요. 백성들은 힘이 과거를 거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힘이 흐른다고 본 거예요. 그 힘이 집결한 곳이 어디다? 유토피아. 우리 교회말로 하면 천국이 되는 겁니다.
근데 그걸 또 어떻게 한다? 변화되는 것을 스톱을 시켜놓는 거예요. 그러면 동결되죠. “그 동결된 힘을 저한테 맡겨주시면 여러분들의 소망을 이루어드리겠습니다.”라고 나오는 겁니다. 모든 지도자급의 특징이. 그런데 여러분, 첫 번째, 두 번째를 보면, 이걸 하기 전에 먼저 말씀드려야 하는데, 예수님의 힘이 원천이잖아요. 예수님의 힘이 원천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와서 처음 이야기한 거예요. 예수님이 와서. 요한복음 1장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모든 생명은 어디서 나왔다? 말씀에서 나왔죠.
그러면 죄는 뭐에요? 죄라는 것은 원천이 있을 때만 죄가 성립이 돼요. 인간은 예수님의 말씀 앞에 서지 않는 한, 예수님과 만남이 없는 한, 인간들은 죄라는 것을 몰라요. 죄는 어디서 확정되는가 하면은 예수님과 만남에서 확정되는 겁니다. 내가 오기 전까지는 죄가 없었으나 내가 왔으니까 죄가 있다고 했죠. 요한복음 15장 22절에서.
그러면 인간세계에서 권세자의 죄라는 것은 뭐냐 하면, 인간 대 인간으로 성립되는 겁니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 예수님께서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한 이유가 그거예요. 그 취지예요. 인간 대 인간으로서 죄를 형성하는데, 그 죄라는 것은, 이걸 좀 어렵게 이야기하는데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그 죄라는 것은 그 당시 바리새인이나, 27절에 누굽니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오죠. 이 사람들을 지도자급으로 분류했잖아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죄를 어디서 가져오느냐 하면 하나님의 율법에서 가져오죠. 하나님의 율법에서.
그런데 말입니다. 율법으로 죄를 규정할 때, 그 죄를 규정하는 바리새인들이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하루하루의 세끼 밥을 먹으면서 지금 누구 덕분에 살아가고 있습니까? 양식이 어디에서 나와요? 월급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백성들에게서 나오죠. 백성들에게서 나오는 그 양식을 먹고, 에너지를 가지고 율법으로 지금 죄 있다, 없다, 라는 것을 재판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볼 때 여기서 뭔가 이상한 점이 발견되지 않습니까? 백성들이 노동하지 아니하면 그들이 살 수 있어요? 없어요? 못 살죠. 그러면 누구 덕이에요? 백성들의 노동한 덕으로, 그들은 노동 없이 살아가고 있다 이 말이죠. 노동한 덕분으로 살아가면서, 노동한 그들을 향하여 뭐를 규정한다? “너희들은 나보다 못한 죄인들이다.”라고, 규정하는 이것이 옳은가 하는 문제가 생겨버려요. 문제가. 옳으냐? 이 말입니다.
마르크스가 이야기한 것은 그겁니다. 모든 개념이나 이념은, 그거는 상부에 붕 떠 있는 것이고. 하부구조는 뭐냐, 경제적으로 착취당하고 학대당하고 노동했던, 그들의 남아있던 생산물, 잉여 생산물에 의해서 그들은 예술과 정치와 통치의 작용을 하고 있다고 본 거예요. 이게 역사적 유물론인데.
그럼 그동안 정치가들은 뭐냐 하면 사진을 찍었다니까요. 뭐냐 하면, “이 나라는 우리가 정치한 나라입니다. 여러분들은 뭔가 잠깐 얼음땡처럼 스톱을 해줘야 합니다.” 그래야 나는 지배자고 너희들은 지배받을 복종자라는, 이 관계가 성립이 되거든요. 한쪽에서 변화가 일어나게 되면, 이거 참기름 발라가지고 빠져나간다니까요.
여러분, 이거 생각 많이 해야 돼요. 재벌 집에서 25년 동안 어떤 아줌마가 그 집안의 총무로서 살은 거예요. 자기 아버지가 병들어서 월급 받아 가지고 병원비로 쓰려고 1년에 한 번도 못 쉬는 식으로, 그 집안의 모든 가사를 했다 이 말이죠. 하다보니까 그 집안의 돌아가는 비밀을 다 아는 거예요. 입 다문 순간, 자기 주체가 깨져가지고 일이 잘 되는 거예요. 그 노선에서, 그 힘에서 배제가 되기 때문에, 입을 다무는 한 그쪽 사람에게 월급을 받을 수 있는 거예요.
근데 마지막에 재벌 여자하고 그 아줌마하고 어떤 일이 있는 순간, 그때는 머리 쥐어뜯고 싸우는 거예요. “이게 나보다 나이도 한 살 적은 게!”라고 하면서 싸우는 거예요. 이게 <황금빛 내 인생> 52회째 나오는 대목이에요. 참을 대로 참은 거예요. 그동안 이 재벌 집이 영원한 재벌이라고 규정되었을 때는, 그거는 복종이 되는 겁니다. 근데 이 재벌집이 해체가 돼요. 깨져버리는 겁니다. 해체가 되니까, 그동안 나라는 주체는 거기서 만들어진 건데, 해체되면 더 이상 수입이 없잖아요. 이익이 없다 이 말이죠. 이익이 없으니까 챙길 것 챙기고 빨리 빠져야 되죠.
마르크스가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인류의 역사는, 그동안 노동자 덕분으로 살았던 인간들이, 소위 배운 지식인들이 “역사는 이렇게 됩니다.”라는 그 구라,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지 말라는 거예요. “역사는 여러분들의 지도자라고, 여러분들에게 뭔가 받아 챙기는 그 인간들이 결정한 것이 아니고, 밑바닥에서 신음하고 있는 여러분들이 결정합니다.” 오늘 완전히 딴~딴 따라라라~♬ 데모 한 번 해야 돼요.
기아, 삼성, 현대, 이 모든 재벌들의 주주의 주식은 몇 퍼센트 되지도 않고, 개미군단의 주식들과 그리고 이 노동자들의 피땀 흘린, 무려 주 52시간 이상의, 잔업까지 안 하면 월급이 얼마 되지도 않아요. 잔업까지 해서, 무려 하루 10시간, 12시간 노동한 덕분으로, 단가가 낮아서 경쟁력이 있어가지고, 해외수출을 많이 해서 그렇게 재벌이 됐다 이 말입니다. 근데 재벌은 우리의 남은 돈 가지고 계속해서 기업을 또 합병하고 또 합병하고, 이거 뭐 백화점에다가, 온갖 미술관까지 다 하고, 에버랜드까지 접수하고.
이게 다 누구의 것이냐, 삼성이라는 역사, 현대라는 역사, 기아라는 재벌의 역사는, 민중들의 역사, 착취당하는 역사라는 이 말이죠. 여러분들은 도중에 스톱이 될 문제가 아니고, 계속해서 역사는 여러분들의 힘에 의해서 흘러가고, 흘러가고 흘러가는 것이라는 말이죠. 그걸 중간에 딱 잡아가지고, “나는 당신의 영원한 종이야.” 딸랑딸랑! 그럴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영원한 종이 아니에요. 그거는 여러분들이 그러한 인식을 갖고 있고 그러한 정신을 갖고 있는 것은, 그동안 여러분들의 정태적인, 상황이 스톱이 되는, 정태적 상황을 영구히 고정화시키는 그런 사상에, 이데올로기에 철저하게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그러면 노동자의 세계, 농민들의 세계, 억눌린 자의 세계, 여기서 뭐 출애굽기의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하는, 기독교 사상이 다 접목이 되어서 해방신학이 막 나오는 거예요. 제주도 강정마을, 저는 깨강정 만드는 거기인줄 알았어요. 근데 강정마을에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한다고 천주교 정의수호단체에서 신부들 수녀들이 와서 데모하고 하는 그러한 사상. 그래서 민중의 권세라고 하는데, 원래 민중의 권세는 없는 거예요. 권세는 그냥 위에서 아래로 시혜(은혜를 베풂), 시혜라는 말을 알죠. 불쌍히 여기사 쪼끔씩, 쪼끔씩 나누어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양아치 위에 조폭이 있죠. 양아치가 제일 말단구조고 그 위에 조폭이 있잖아요. 양아치가 서민들 등쳐서 빼앗아온 돈 가지고, 그걸 조폭이 누리고 있다가, 조폭이 정태적인 상태로 뭔가 오래 가려면, 한나라당 박근혜 이런 것을 잡으려고 한다면, 계속 잡아야 하기 때문에, 선거할 때마다 쬐끔씩, 쬐끔씩 돈을 내놓으면, 세상에! 우리 박근혜 같은 대통령이 어디에 있노? 최고다! 죽어도 박근혜! 살아도 박근혜! 이래가지고 계속 그 주체적인 것을 하게 되면, 미래의 번영하는, 번영하는 대한민국이 아닙니다. 자기의 삶이에요. 우리 자식들에게 옛날 박정희 대통령의 번영의 시절이 다시 한 번 올 것이라는 향수. 반복적인 향수가 유토피아를, 우리나라가 잘 되는 유토피아를 이루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길들여져 있는 그것을, 결국 이거는 지도자들이 알아요. 지도자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복종하고 있다는 것. 그러면 중요한 것은 그 권세, 힘, 그 원천이 어디에 있느냐, 요단강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샘이 터져서 나왔지만, 그럼 지금의 이런 권세는 어디서 나왔느냐, 제가 이렇게 설명을 하니까 인간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죠.
아까 강의대로 하면 혼자 사는 것을 가지고 혼자 산다고 하지 않아요. 소외됐다고 이야기했죠. 사회로부터 배제된 겁니다. 그거는 곧 죽음을 의미하죠. “아이고, 이제 나는 남자도 싫고 이래 혼자되어 혼자 사는 것이 이렇게 좋은 걸.” 남들이 뭐라고 합니까? “배제되었습니다. 소외당했습니다. 그거 자랑거리 아닙니다. 혹시 좋은 남자 있거든 만나시죠.”라고, 이렇게 권하죠. “지금 나를 놀립니까?”하면서도 속으로는 좋아해요. ‘아직도 내가 여잔가?’하면서.
그러니까 이게 소외되고 배제되는 것이, 인간이 한번 맛본 주체에 대해서 어울리지 않는 거예요. 다시 세상이 나의 가치를 알아주기를, 언젠가는 거기로 되돌아가기를 기다리고 있다고요. 그럼 그건 나름대로 유토피아가 되는 거죠. 자신의 희망이 되는 겁니다. 자, 이래 보니까 세상은 사람들과 사람들의 숫자로 하는 것이 아니죠.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에, 그 사이에 뭐가 지금 듬뿍 소스처럼, 크림처럼 부어져있습니까? 권력, 힘, 권세가 주어져있습니다.
여기서 말한 힘은, 물리적인 힘은 아무 의미 없습니다. 물리학 힘, 생물학 힘, 생명의 힘, 그거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인간을 사회로 보지 않고, 개인으로 봤을 때는 생물학적인 힘, 물리학적인 힘, 이런 게 좀 의미가 있을 수가 있어요. 예를 들면 갑자기 배가 간지럽다. 남자도 뭐 갱년기인가? 대상포진인가? 그때는 뭐 몸의 바이러스나 면역체계에 관계가 있잖아요. 그런데 대상포진도 없고, 간지럽지도 않으면 그게 사는 것이냐 이 말입니다. 그걸 뭐라고 했습니까? 소외된 거예요.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잖아요. 인간은 혼자 못 살고, 인간은 죽으나 사나 사회적동물이라고. 정치적동물이라고. 인간은 사회적 동물은 동물인데 다른 동물하고 차이점이 난다. 그래서 인간은 정치적동물이 되는 거예요. 그걸 쉬운 말로 사회적 동물이라고 했는데, 그 당시에는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이 없어요. 정치적이에요. 그래서 인간은 정치적동물이에요. 정치적 동물이라고 하는 것이 정답인데, 정치적 동물한테는 뭐가 있다? 지배하는 자가 있고 지배받는 자가 있는데.
르호보암 시대 때(왕상12장) 그 백성들에게 물었잖아요. “내가 이 나라를 어떻게 통치하면 됩니까?”라고 할 때, 뭐라고 답변했습니까? “옛날 솔로몬의 시대 때처럼 백성들의 종이 된다면 당신은 존경받을 것이고 훌륭한 임금이 될 것입니다.”라고 이렇게 하니까, 반대로 나가버렸죠. 자기 동기들하고 상의하니까, “솔로몬보다 더 잡아야 한다. 더 바짝 쪼여야 한다.”라고 했어요. 그래야만 뭐가 나온다? 그래야 내 나름대로의 위주의 것이 된다. 뭐가 필요 없다? 그러니까 아버지 솔로몬의 권세는 필요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솔로몬의 권세를 르호보암이 받아버리면, 이거는 변화가 되지, 이거는 정태적인(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상태)것이 아니니까. 내 것이 아니니까. 내가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내 권세의 바구니 안에, 내 권세의 그 영역 안에 옴팍 그들이 사로잡히지 않으니까. 그러면 왕이 왕답지 못하잖아요. 르호보암이 좀 하려고 하면 “우리 솔로몬은 안 그랬는데..” 또 좀 하려고 하면 “우리 다윗은 안 그랬는데..” 이러면 “죽은 사람한테 맡기지 나한테 왜 맡겼는데?”라고 하게 되죠.
지도자가 된다는 말은 어느 순간에, 어느 지도자도 마찬가지에요. 낚시동호회, 십자가마을, 우리교회, 뭐 세상의 모든 모임, 계모임, 모든 것. 이스라엘유적답사모집요강 뭐 이런 것. 하여튼 임시적으로 뭘 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거기서 권력이 형성됩니다. 그냥 지배한다, 지배받는다, 라고 알면 안 되고, 지배받는 쪽은 “지도자여 내 유토피아를 이루어주게 되면 당신의 의견에 따라줄게.” 지배하는 쪽은 “당신 소원을 들어줄 테니까 무조건 내 지시에 순종하세요.” 여기서 갈등이 생깁니다.
이거 뭐 멀리 갈 것도 없죠. 가정입니다. 가정. 아버지가 자식들 불러놓고, 아내 불러놓고, “이 가정의 미래는 내가 책임질 테니까 무조건 아버지의 말에 순종해라. 그러면 이 가정은 평화롭고 우리의 원대로 더 넓은 아파트로 이사 갈 수 있다.” 이러면 아들은 “엄마, 어떻습니까?”라고 묻죠. 그럼 엄마는 “놀고 있네~ 당신이 옛날에 했던 꼬라지를 봐라. 내가 믿을만한 짓을 해야 믿지. 당신 친구한테 돈 빌려줬다가 떼였잖아? 지금 와서 믿으라고?”이렇게 나오죠. 그래놓고 아들보고 “아들아! 아버지 말 믿지 마라. 엄마 믿으라.” 거기서 생긴 것이 뭐냐, 이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양육권분쟁이 일어나는 거예요. 양육권분쟁이 벌여지는 겁니다. 특히 가장이 퇴직했다. 그러면 아내는 퇴직한 돈이 얼마냐를 노리죠. 남편하고 지금 갈라서면 반은 먹을 수 있는지. 그런 게 있죠. 퇴직하는 순간부터 이거는 권세자로서의 보좌를 내놓아야 돼요.
제가 지금 세 번째 권세는 어렵기 때문에 계속 미루고 있습니다. 먼저 첫 번째 권세, 두 번째 권세를 알아야 돼요. 주님이 여기에 뛰어들으셨기 때문에. 여러분들도 알아야 돼요. 주님이 이 세상에 왔다고 하는데, 그 세상이 뭔지 알아야 돼요.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알아야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지를 알게 아니겠습니까?
한 번 물어봅시다. 이 지도자는 이 민중들, 대중들 속에 끼어들까요? 안 끼어들까요? 절대로 안 끼어듭니다. 끼어들면 그건 지도자로서 작살나는 거예요. 그 역사가 뭐냐, 북이스라엘의 반란역사였습니다. 쿠데타역사였습니다. 힘만 있으면 언제든지 극복할 수 있어요. 힘만 있으면. 조금만 기다렸다가 내가 대통령이 되면 이제 박근혜고 이명박이고 다 구속시켜버리는 거예요. 힘만 갖추면 돼요. 힘만. 이거는 민주주의 승리고 국민들의 승리다. 뭐 이러면서 힘만 갖추면 돼요. 그래서 호시탐탐노리는 거예요. 오늘 제목을 호시탐탐이라고 할까? 호시탐탐 노려요. 호시탐탐 노리는 겁니다.
그러면 지도자들이 이걸 알까요? 모를까요? 알아야 되겠죠. 그러면 정태성+신화가 동원돼요. 신화. 신적인 요소를 자기한테 집어넣는 겁니다. 이거의 좋은 예가 뭐냐 하면 일요일에 mbc에서 오후 5시부터 하는 프로그램이 있어요. 복면가왕이라고 하는 것. 이 복면가왕의 위치가 어디냐 하면 무대가 아니에요. 무대를 지긋이 내려다볼 수 있는 그 상단에, 홀로 의자에 앉아서, 완전히 교황의자에 앉아있어요. 그것도 앞에 뭘 쓰고? 복면을 쓰고. 나는 너희를 볼 수 있으나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한다. 복면을 딱 쓰고서 아랫것들이 노는 것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죠.
이 자리가 뭐냐 하면 지도자의 자리에요. 지도자의 자리. 그러면 이 지도자의 자리를 일반대중들이 출세나 과거시험이나 사법고시를 봐서 밀어내겠죠. 밀어내기 위해서 노력하겠죠. 노력할 때, 이미 정태된, 또는 정체된 권력에 들어올 때는 이 주체가 달라야 돼요. 정의롭다, 라는 것만으로는 안 돼요. 안되고, 누구를 위한 정의냐 하면 현 지도체제를 옹호하는 것만이 정의롭다는, 새로운 주체의식을 갖지 아니하면 여기에 넣어주지를 않습니다.
이게 바로 마르크스의 계급이론이에요. 한 번 부르주아(자본가 계급)는 영원한 부르주아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프롤레타리아(임금 노동자 계급), 직접 노동한 노동자들은 그 나라에서 도전해봐야 실패해요. 바로 1848년 프랑스 민중운동이 실패로 끝났습니다. 나폴레옹 1세의 조카(루이 나폴레옹)고 뭐고 확 다 죽여 버렸습니다. 파리시를 피바다 만들었습니다. 이게 어디 배우지도 못한 무식한 노동자들이 유구한 프랑스 역사를 모독하느냐 해가지고 다 죽여 버렸거든요.
사정없이 다 죽여 버렸어요. 그리고 유명한 뮤지컬, 장발장이라고 있죠. 레미제라블. 거기에 보세요. 마지막 장면에 전쟁장면이 나오죠. 시가전. 싹쓸이 다 하죠. “이게 어디 권력의 맛을 못 봤나?” 그러니까 일반인, 빵 팔고 채소 팔았던 아줌마들이 너무 세금을 뜯어가니까, 조폭에 대해서 반항을 했는데, 양아치를 뚫고 조폭을 공격한다? 양아치들이 싹 다 해버리면, 한번 민중은 영원한 민중이에요. 계급은 고정화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 계급의 고정화를 뒤엎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느냐, “전 세계의 노동자들이여! 궐기하라!” 이게 바로 엥겔스의 ‘노동자 혁명’아닙니까? 노동자 혁명이에요.
자, 제가 지금 마르크스의 이야기를 계속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권력은 이미 정태된 상태로 계속 간다고 주장하고. 정말 그 무거운 덮개, 그 무거운 진리의 성채, 캐슬, 그걸 유지하기 위해서, 한번 굳어진 진리의 성채를 이어가기 위해서, 백성들은 그들이 요구한대로 계속해서 지시를 받으면서 신음하면서, 소박하게 나름대로는 ‘내가 고생한 것이 밑거름이 되어서 그래도 언젠가는 잘 살 수 있는 그런 이상적인 천국이 오겠지. 오겠지, 오겠지, 오겠지...내 대는 안 오지만 자식의 대에는 오겠지.’라고 하면서 계속해서 상납할 것은 상납하고, 바치고, 바치고, 바치고 하는, 이렇게 살아가는 그 구조를 이룬 겁니다. 이 둘 사이, 민중과 지도자 사이에서.
그런데 여기에 누가 끼어들었느냐, 세례요한이 끼어들었죠. 지금 예수님이야기에요. 세례요한이 끼어들었습니다. 주의해서 들어야 합니다. 세례요한이 끼어들었을 때 대중들은 세례요한의 나라를 생각했습니까? 아니면 자기의 유토피아를 생각했습니까? 자기 유토피아를 생각했습니다. 세례요한을 이용하려고 한 거예요. 노선을 바꾸려고 한 겁니다. 일반대중들이 노선을 바꾸려고 한 겁니다. 노선을.
세례요한이 하는 말을 뭐라고 이해했느냐 하면, 기존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과 다른 논조로 천국을 이야기했고, 그 세례요한이 내뱉은 그 천국의 원리가 기존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이 이야기했던, 이게 다른 정도가 아니고, 대척관계, 완전히 대조가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실제로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외칠 때에, 그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왔잖아요. 근데 세례요한이 먼저 선수를 치죠. “니들이 천국을 가? 니들이 천국을 가면 이 돌멩이도 천국 가겠다.” 제가 또 유적답사 해봤잖아요. 돌멩이 많아요. 돌멩이 굉장히 많습니다. 광야니까. 니들이 천국에 간다면 이 돌멩이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고 했습니다(마3:9).
그리고 뭐라고 했습니까? 이 무슨 새끼? 이것은 공식적으로 욕할 수 있는 타이밍이에요. 이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했습니다(마3:7). 독사의 새끼들아! 더 완화해서 하면 독사의 자식들아! 근데 자식들이라고 하는 것이 더 심한 욕이에요. 새끼는 일반적인 용어지만 자식은 확정적인 용어잖아요. 자기 아버지가 뱀이니까. 이 새끼들아! 보다 이 자식들아! 이게 더 무섭다니까요. “너의 본질은 변하지 않아. 이걸로 끝.” 이런 뜻이에요. “뱀의 자식들아! 내가 온 것은 너희들로 하여금 뱀의 자식으로 들추어내기 위해서다.” 민중들은 우와!!하고 일어섭니다.
일어서니까, 바리새인들이 여기서 정태적인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합니다. 찾아갑니다. 아까 했죠. 한 계급으로 들어가려면 심사를 받아야 된다고. 묻습니다. “니가 메시야냐? 니가 선지자냐? 니가 제사장이냐?” 그럴 때 세례요한이 하는 말이 있어요. “너희들이 이야기한 메시야, 너희들이 이야기한 제사장, 너희들이 이야기한 선지자, 그건 아니다.” 너희들이 이야기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너희들이 이야기했기 때문에.
아까 이야기했는데, 인간이 먼저 하나님을 버렸잖아요. 버린 인간들이 권세를, 백성들의 유토피아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자기들의 신화를, 옛날의 여호와를 누구한테 뒤집어씌운 거예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자기유지의 정당성을 위하여 여호와를 뒤집어씌운 겁니다. 성전재산 누가 다루고? 사두개인들이 다루고. 율법은 누가 다루고? 바리새인들이 쥐고 있고. 그들이 쥐고 있으면서 재판하는 그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고? 대중들의 노동력에서 나오고. 이게 모순이잖아요.
그러면서 규정은 뭐라고 합니까? 율법에 의해서 이 개 같은 것들이라고 욕하고, 자기들은 율법을 제일 잘 지키는 윗선에 있는 겁니다. 이건 한 일곱 단계의 권력구조가 형성되어 있죠. 권력구조가 형성되어 있는데, 세례요한이 예루살렘에 가지 않아요. 이런 게 하나하나 의미가 있어요. 세례요한은 어디서 활동합니까? 광야에서 활동해요. 광야는 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가기 전에 대기된 장소가 광야입니다.
광야에서 뭘 건너야 돼요? 요단강을 건넘으로써 드디어 약속의 땅에 진입할 수가 있거든요. 그러면 요단강을 다시 건너자 이 말이죠. 옛날 요단강을 건넜던 그 취지는, 지금 세례요한 자신이 지도자가 아니에요. 다만 자신은 요단강을 건널만한 자격자냐, 아니냐, 라는 심사를 하면서 물로써 세례를 주는 역할을 하는 겁니다.
제가 지금 여러분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그 당시, 예수님 당시에 유대사회의 구조를 권력적 측면에서 보면 정리정돈이 좀 되죠. 권력적 측면. 개인이 어떻게 기도합니까? 이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나는 헌금을 얼마 해야 됩니까? 지금 개인구원의 문제가 아니고 집단구원 문제라니까요. 집단의 성격을 규정하는 거예요. 집단의 성격을 규정해야, 그 조직 속에 있어야 거기서 주체를 할당받는다니까요. 주체를.
“여러분 어느 소속이에요?” 이래 물어야 된다니까요. 사도바울이 묻는 것은 그런 거예요. “당신은 예수 안에 있어요? 예수 밖에 있어요?” 사도의 모든 질문이 그런 거예요. 사도의 모든 발언이. “너 지금 누구와 함께 있어?” 이런 것이지. “너 훌륭해? 인격적으로 인간 됐어?” 지금 그걸 묻는 것이 아니라니까요. 이게 참 어렵죠. 이게 왜 어려우냐 하면은요, 항상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내가 선을 행함으로 구원받는다, 내가 원하는 것은 내가 하기 나름이다, 지금 거기에 현대인들이, 현대인들이 개인주의거든요.
이걸 ‘고독한 주관성’이라고 합니다. 그냥 주관성이 아니고 고독한 주관성이에요. 고독한 주관성이기 때문에, 그 사람들 앞에 뭐가 있느냐 하면 객관들만 있어요. 객관들. 객관들이 있다고요. 남이죠. 남. 고독한 주관은 나고. 그러니까 이거는 권력이라는 현실을 완전히 무시한 거예요. 내가 무슨 흉내를 내느냐 하면 내가 대통령 흉내를 내고 이건희 흉내를 내는 거예요. “나는 월급 200만원 받지만 그래도 나는 내 월급 갖고 내 가정에서는 내가 주인공이다. 나는 절대적으로 내가 주인공이다. 어느 누구도 나를 간섭할 사람은 없다.”
그랬는데 회사 상무가 “어이, 김부장! 회사에 빨리 와.”라고 부르면 “예.”하고 가죠. 집에 있어도 권력구조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어요. 교장선생님이 찾으면 우에 할 건데요? 이렇게 성경공부하다가도 전화 받아야죠. 왜 전화했느냐고 이렇게 하면 곤란하다니까요. 마음으로는 고독한 주관성, 절대적 주관성을 하고 싶어요. 마음으로는. ‘니들이 뭘 알아?’ 이런 생각이 있으니까, 회사에서는 고분고분하다가는 바깥에 나가면 부장 욕하고, 윗사람들 막 욕하잖아요. 그 다음 아침 되면 또 고분고분하다가.
이게 뭘 의식하는 거예요? 나는 이거 되고 싶은데, 고독한 주관성이 되고 싶은데, 나는 내가 신이 되고 싶은데, 세상이 용납하지 않아서 내 모습이 내가 보기에 한탄스럽다 이 말이죠. 한탄스러운 거예요. 그러면 퇴직하면 되지? 퇴직을 하게 되고 연금 받고 혼자 살게 되면, 천하에 그 누구도 나보고 뭐라고 할 사람이 없죠. 근데 퇴직하기 전에 직장에서 뭐 250만원 받았습니다. 퇴직한지 한 2년이 됐는데, 어느 단체에서 300만원 줄 테니까 오시겠습니까? 라고 하면, ‘아이고 내 가치가 올랐는가?’하면서 가죠. ‘뭐, 나 6개월 놀만큼 놀았다.’
이게 뭐냐 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환이에요. 교환. 자본주의는 교환과 교체에요. 집사님 딴 데서 돈 준다고 하면 가죠? 여지없죠. 가죠. 대답하는데 방금 1.5초 걸렸어요.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어느 누구도 못 빠져나와요. 왜? 인간 자체가 상품화되었기 때문에. 상품화되었죠. “이 목사님! 교인 한 700명 되고, 차주고, 아파트주고, 연봉 한 1억이 넘는데, 뭐 작은 교회에서 복음전하지 마시고 오실래요?”라고 하면 대답하는데 1.5초보다 조금 더 걸립니다. 약간 생각해요. 근데 조건이 있습니다. “한 달 만에 교인들 다 내보낼 테니까, 그냥 건물만 남고 교인들 다 가도 괜찮습니까?”라고, 이렇게 해야 되겠죠.
자본주의는 ‘나’라는 것이 본의 아니게 이미 상품화되었어요. 결혼도 마찬가지에요. 이쁜 게 팔리거든요. 계속해서 내가 누구의 사람으로 장부에 기입되듯이 계속 기입되기를 내가 원하고 있고, 내가 들어갈 때는 반드시 유예된 유토피아, 나만 삽니까? 내 가족, 내 자식들도 살려야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유예된 유토피아를 위해서, 적절한 상황을 찾아서 계속 바꿔치기를 해나간다니까요. 누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벗어나요? 누가 이 권력에서 벗어납니까? 못 벗어나는데, 누굽니까? 벗어난 사람이? 세례요한이죠.
세례요한은 과거의 흐르는, 이 역사의 흐름에서 이탈했습니다. 앞으로 오실 천국에서 파견된 사람이에요. 천국에서 파견된 사람인데, 그리고 그 천국이 내가 여기 있음으로서, 내가 여기 있다는 조건 때문에 천국이 점점 더 가까이 오게 되는 거예요.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그 가까이 온 하늘나라는 뭐냐 하면 심판의 나라에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구원자가 아닙니다. 세례요한의 말에 의하면 예수님은 구원주가 아니고 심판주입니다. 알곡은 창고에 가라지는 불에 태우시는, 불로 싸질러버리는 심판주예요. 도끼이야기는 왜 끄집어냈습니까? 그러니까 세례요한과 예수님은 “어데~! 내 선악과 따먹고 토끼려고? 토낄 데가 있는 줄 알았지?” 내 선악과 따먹었다는 이유 때문에 심판을 해버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 자체가 지옥이에요. 지옥불이에요. 지옥 불을 받을 곳이에요.
왜? 불로 세례를 주니까. 물로 세례주고 불로 세례 주니까. 지옥불로 터지는 세상이니까. 마음껏 웃어대라는 거예요. 마음껏 웃고 마음껏 승리를 외쳐라! 니 눈앞에 지옥불이 보이지 않느냐? 이게 세례요한입니다. 회개하라. 니 소속이 어디냐를 다시 보자. 이 소속에서 죽어라. 그리고 이 세례요한의 소속으로 옮겨라. 그게 물로 세례를 주는 거예요. 세례라는 것은 소속이 바뀔 때 일어나는 그런 의식이죠. 하나만 이야기하고 10분 쉽시다.
기존의 권세 형식, 형태는, 아까 지도자에게 뭐가 왔다고 했습니까? 신화가 오죠. 그래서 제의적 구조에요. 제의라고 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 종교의식 하는 것. 제의적 구조에요. 신화적입니다. “미래의 유토피아가 현재 우리의 권세자들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우리를 믿고 따르시면 여러분들이 원하는 유토피아는 우리를 통해서 주어집니다.” 이게 바로 유대사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