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된 왕 (삼상 10장7절 -10장 27절) 대전- 34강
이근호
2018년 1월 30일 본문말씀: 사무엘 상 10:7-27
(삼상 10:7) 이 징조가 네게 임하거든 너는 기회를 따라 행하라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 (삼상 10:8) 너는 나보다 앞서 길갈로 내려가라 내가 네게로 내려가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리니 내가 네게 가서 네가 행할 것을 가르칠 때까지 칠 일 동안 기다리라 (삼상 10:9) 그가 사무엘에게서 떠나려고 몸을 돌이킬 때에 하나님이 새 마음을 주셨고 그 날 그 징조도 다 응하니라 (삼상 10:10) 그들이 산에 이를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그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 크게 임하므로 그가 그들 중에서 예언을 하니 (삼상 10:11) 전에 사울을 알던 모든 사람들이 사울이 선지자들과 함께 예언함을 보고 서로 이르되 기스의 아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 하고 (삼상 10:12) 그 곳의 어떤 사람은 말하여 이르되 그들의 아버지가 누구냐 한지라 그러므로 속담이 되어 이르되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 하더라 (삼상 10:13) 사울이 예언하기를 마치고 산당으로 가니라 (삼상 10:14) 사울의 숙부가 사울과 그의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디로 갔더냐 사울이 이르되 암나귀들을 찾다가 찾지 못하므로 사무엘에게 갔었나이다 하니 (삼상 10:15) 사울의 숙부가 이르되 청하노니 사무엘이 너희에게 이른 말을 내게 말하라 하니라 (삼상 10:16) 사울이 그의 숙부에게 말하되 그가 암나귀들을 찾았다고 우리에게 분명히 말하더이다 하고 사무엘이 말하던 나라의 일은 말하지 아니하니라 (삼상 10:17) 사무엘이 백성을 미스바로 불러 여호와 앞에 모으고 (삼상 10:18)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고 너희를 애굽인의 손과 너희를 압제하는 모든 나라의 손에서 건져내었느니라 하셨거늘 (삼상 10:19) 너희는 너희를 모든 재난과 고통 중에서 친히 구원하여 내신 너희의 하나님을 오늘 버리고 이르기를 우리 위에 왕을 세우라 하는 도다 그런즉 이제 너희의 지파대로 천 명씩 여호와 앞에 나아오라 하고 (삼상 10:20) 사무엘이 이에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가까이 오게 하였더니 베냐민 지파가 뽑혔고 (삼상 10:21) 베냐민 지파를 그들의 가족별로 가까이 오게 하였더니 마드리의 가족이 뽑혔고 그 중에서 기스의 아들 사울이 뽑혔으나 그를 찾아도 찾지 못한지라 (삼상 10:22) 그러므로 그들이 또 여호와께 묻되 그 사람이 여기 왔나이까 여호와께서 대답하시되 그가 짐 보따리들 사이에 숨었느니라 하셨더라 (삼상 10:23) 그들이 달려가서 거기서 그를 데려오매 그가 백성 중에 서니 다른 사람보다 어깨 위만큼 컸더라 (삼상 10:24) 사무엘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를 보느냐 모든 백성 중에 짝할 이가 없느니라 하니 모든 백성이 왕의 만세를 외쳐 부르니라 (삼상 10:25) 사무엘이 나라의 제도를 백성에게 말하고 책에 기록하여 여호와 앞에 두고 모든 백성을 각기 집으로 보내매 (삼상 10:26) 사울도 기브아 자기 집으로 갈 때에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된 유력한 자들과 함께 갔느니라 (삼상 10:27) 어떤 불량배는 이르되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겠느냐 하고 멸시하며 예물을 바치지 아니하였으나 그는 잠잠하였더라
사무엘 상 10장 7절부터 할 차례입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과 만나는데 이 두 사람의 일은 이미 결정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해서 선지자가 위에 있고 왕은 그 아래에 있습니다. 이것이 다른 나라와는 다른 특이한 일인데 다른 나라에서는 왕이 위에 있고 선지자가 그 밑에서 보조하고 있지요. 나라의 책임자가 왕이라는 겁니다. 그 차이점을 보겠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나라(민족)이 먼저 있고 왕을 책임자로 세우는데 책임자는 두 가지만 하면 되요. 첫째는 외부의 외세를 막고 둘째는 내부의 질서를 잡는 거에요. 질서에는 뭐가 포함되어 있냐하면 세금으로 필요한 비용을 대는 것이고 외세는 외부의 적들로부터 방어할 수 있는 총 책임자의 역할이 바로 왕입니다.
일반 백성들이 왕에게 요구하는 것은 그 두 가지를 해달라는 것이지요. 잘 살게 해주고 적들에게서 보호해달라는 겁니다. 만약 적들에게 패하면 노예가 되요. 노예라는 것은 자기의 존재성이 바뀌는 겁니다. 노예의 반대가 주인이거든요. 주인으로 살다가 노예가 되어 보세요. 주인은 명령하는 자이고 노예는 명령 받는 자인데 자율성이 사라지지요. 박탈당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자율성을 쥐려면 힘이 필요하고 그 힘을 계속 유지하려면 책임자(왕)에 의해서 협력 체제가 되어 되겠지요. 오늘 날 생물학에서는 이러한 인간들의 사회적인 왕 체제를 어디에 비유하냐 하면 보통 두 가지로 비유하는데,
하나는 개미이고 또 하나는 벌에게 비유를 합니다. 벌과 개미의 특징이 다른데 벌들에게 여왕 벌이 있지요. 개미는 지도자가 없어요. 이것을 집단 주체라고 합니다. 집단에 의해 주체처럼 움직이는 것. 인간은 사회가 있음을 뭐로 보냐하면 정상적인 것으로 보는데 이것은 잘못이에요. 인간들은 자기들이 사회에서 현재 살다보면 자기들을 정당화하려는 것이 있어요. 내가 지금 살아가는 것은 옳다는 겁니다. 이유도 없이 옳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 북한 같은 경우에 북한의 모든 제도가 주민들에게는 뭐를 자꾸 각인시킵니까? 현재 북한의 사회를 민족적 사회주의라고 해요. 같은 민족끼리, 민족적 사회주의를 정당화한다고 자꾸 북한에서는 그러는데 세상에서는 용납이 안 되는데 아주 특이한 나라입니다.
민족적 사회주의를 구성화하고 정당화하려면 필히 하나의 살아있는 종교 또는 살아있는 교주가 있을 수 밖에 없어요. 북한은 종교 단체이기 때문에 대화가 안 됩니다. 교류가 안 되는데 무슨 대화가 되요? 이용할 뿐이지요. 아까 책임자(왕)를 내세운다고 했는데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그것을 정상적으로 본다고 했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방문합니다. 방문하기 전에 이미 긴 그림자를 구약에 드리우고 방문해요. 이것이 먼저 말씀이 주어지고 말씀을 성취하는 입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는 겁니다. 4복음서에 보면 내가 온 것은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고 되어 있어요.
어느 인간도 수 년 천의 말씀이 자기에게 적용된다고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바르게 살자, 착하게 살자이지 바르고 착하게 살자는 것은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해보자는 것이고 예수님은 바르게 살자는 게 아니에요. 말씀을 응하게 하려함이다에요. 성도라는 것이 요엘서에 의하면 마지막에 메시야가 오고 난 뒤에 성령을 받은 자를 성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도라는 존재가 등장하는 것이 본인의 결심이나 교회에서 앞에 손들고 나온다고 성도가 아니에요. 천국에 가는 것은 이미 정해져 있고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자만 가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도 아무나 데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분류 작업을 계속해서, 보자~해서 아버지가 보내신 자만 되고 거기에 목자가 등장하고 그 양은 목자를 알아 보고 또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구원이 냉정한 작업이에요. 거기에 뭐를 빼느냐 하면 자기감정에 즉, 스스로 매료되거나 빠져들면 안 된다는 겁니다. 이게 울고 불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지요. 마태복음 25장에 울고 불고 했는데 못 들어간 사람이 있지요. 어리석은 다섯 처녀, 얼마나 울었겠어요. 문 열어 달라고, 그런데 문이라는 것이 왜 있느냐 하면 못 들어가게 하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있는 거에요. 아주 역설적인데, 왜냐하면 문이 없으면 산이나 들이나 아무데서나 신을 부르짖으면 천국가면 되잖아요.
심지어 바다에서도 부르짖고 산에서도 부르짖으면 되는데 하나님께서 벧엘, 벧엘이 무슨 뜻이냐 하면 하늘의 문이지요. 문을 지정했다는 것은 산이나 들에서 백날 부르짖고 철야하고 안 받는다는 겁니다. 문을 통과하는 사람에게만 천국이 허락된 거지요. 벧엘을 통과하는 사람. 이번 수련회에서도 엘리사와 엘리야 대목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길갈에서 벧엘, 벧엘에서 여리고, 여리고에서 요단까지 갔을 때 왜 그렇게 길갈까지 가서거꾸로 요단으로 다시 당기냐 하면 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 코스대로 하신다 하셨거든요. 약속의 땅이라 하는 것은 들어간다고 끝이 아니에요.
약속이 유지돼야 되지 본인들이 유지되면 안 됩니다. 세상에선 민족이 혈통만 유지되면 되지만 하나님 나라는 약속이 유지 될 때만 나라라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달라 할 때는 세상 나라처럼 되고 싶다는 의사 표시를 한 겁니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하나님이 왕 됨을 거부한 셈이 되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망해야 되지요. 망해야 되는데 하나님의 자기 약속은 인간들이 거부한다고 해서 실패로 끝날 약속이 아닙니다. 인간의 거부는 거부대로 가고 그 거부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손에 맡기지 않고 하나님이 친히 자기 약속을 자기가 성취한다는 것을 전해줄 사람이 필요한데 그런 사람이 바로 천국 백성인 거죠.
내가 내 힘으로 행함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언 해줄 사람, 그 증언할 사람이 예수님 이전에 구약에서 긴 그림자로 나타났습니다. 선지자인 거죠. 보통의 나라에는 왕이 있고 왕 밑에 월급 받는 선지자가 있지만 이스라엘은 선지자가 먼저이고 왕은 없습니다. 나라도 없어요. 선지자가 잠복되어 숨겨 놓은 나라가 등장하면서 덩달아 왕도 같이 생산해 내는 작업, 이것이 바로 사무엘상의 긴긴 이야기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보통은 사람들이 돈을 내어 교회를 짓습니다. 부동산의 교회를 짓고 등록도 하고 이렇게 교회가 있고 교회가 운영 되려면 목사가 필요하다.
그래서 교회가 있고 목사 불러다가 인건비 주고 한 1년 해보고 교인이 좀 늘어나고 헌금도 늘어나면 계속 붙들고 안 늘어나면 갈아 치우기하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을 어디에서도 사용하냐 하면 절에서 많이 해요. 절에선 돈 많은 아줌마가 중 한 명 불러서 반반 갈라 먹기 해요. 중에겐 얼마 안 돌아 갑니다. 절만 지어 놓으면 돈이 되거든요. 중은 뭐하느냐 사주 팔자만 보면 되요. 염불은 테잎 틀어 놓으면 되고 그냥 사주 팔자만 봐도 장사가 되게 되어 있어요. 얼마 전에 세종 병원에서 사람들이 죽었잖아요. 그때 위령제 할 때 보세요. 대부분 중들이 해요. 세상은 이렇거든요.
그런데 선지자는 없고 성령 받은 사람이 교회를 만들 필요도 없어요. 왜냐하면 교회를 만드는 소관은 누구에게 있냐 하면 하나님에게 있고 새 언약에 의해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은 반드시 오게 되어있기 때문에 하나님 쪽에서 성령을 보낸 자는 누굴 만나게 되냐 하면 결국 형제를 만나게 되어 있어요. 형제를 만날 때는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 복음입니다. 왜 그러한가? 십자가 복음은 형제가 아니면,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은 못 알아들어요. 기본적인 생각은 우리는 천국에 갈 자격이 없습니다에요. 지옥 가야 된다는 것이에요.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우리는 날 때부터 죄인입니다가 기본이 되기 때문에,
그 기본을 자기 위주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그냥 튕겨 나가는 것이 정상입니다. 듣기는 들ㅇ도 깨닫지 못하는 게 정상이에요. 오히려 깨닫는 다면 의심스러워요. 계속해서 테스트 해봐야 되고 추궁해 봐야 되요. 저 사람이 자기 의를 지키고 자존심과 체면을 위해 교회를 다니는 사람인지 아니면 정말 성령께서 저 사람을 인도하는 지를 계속해서 의심을 해봐야 되지요. 의심해 본다는 것은 복음 아닌 것은 헤어져도 괜찮아요라는 기본 베이스를 깔고 해야 되요. 성령을 받아 복음을 알았잖아요. 다음엔 누구를 테스트 하냐 하면 가장 가까운 부부끼리 해보죠. 아내나 남편을.
내가 아는 기쁜 소식을 전해보자 하고 백날 전해봐야 씨도 안 먹히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요? 그 다음 구절이 있어요. 개 한테 진주를 주지 말아라! 완전히 개 되어 버렸어요. 지옥에나 가버려라! 그렇게 통하지 않는 것을 사람들이 자꾸 섭섭해 하는 데 기뻐하고 감사해야 되요. 왜냐하면 똑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같은 아담의 자손인데 왜 나는 거부감 없이 술술 넘어 오는 데 그게 이상한 거에요. 그러면 자기 자신을 점검해야 되요 내가 뭘 노리고 믿는 건가? 억지로 믿는 건 아닌가? 안 믿어지는 믿으라 하니까 억지로 믿는 건 아닌가 자기 자신을 자꾸 살펴봐야 되요. 물론 스스로 살펴보는 것도 있지만 주께서 친절하게 못 믿는 환경을 조성해 줍니다.
친정 집안의 오빠라든가 사람들의 핍박이 화살처럼 날라 오지요. 환란과 곤고, 핍박이나 기근 이런 게 막 날라 옵니다. 그럴 때 생각하지요. 내가 뭐 잘난 것도 없는데 유난 떨 필요 있나 그냥 양보하고 대충 믿으면 되지 않나 하고 다른 사람들과 틀어지면 내가 힘드니까 애들에게도 이상한 교회 간다고 욕하니까 그냥 편한대로 살자? 싶어도 성령이 용납하지 않아요. 쉽게 사는 것을 용납하지 않아요. 넓은 길로 가는 것을 주께서 용납하지 않아요. 모든 것은 넓은 길로 가라고 우리에게 시키시는 게 아니라 너는 어차피 좁은 길로 가게 되어 있어 라고 확인시키는 일들이 자꾸 벌어지는 겁니다.
이렇게 두 가지의 안 믿는 나라와 언약으로 만든 나라의 차이를 아시겠지요. 친히 성도를 만드는 나라를 생각해 보면 실패를 유발하는 역사를 각오하셔야 되요. 우리의 인생은 실패해야 되지 성공하면 안 됩니다. 실패를 유발하는 역사는 역사 자체가 실패의 바닥위에 역사가 진행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일단 약속의 땅에 들어오고 거기서 안정이 되니까 거기서 뭘 끄집어 내냐 하면 성공이라는 것을 끄집어내요. 성공이나 희망과 기대를 계속 요구하는 겁니다. 이런 것을 요구한다는 전제는 우리는 이제 하나님께 그런 것을 받을 자격이 돼! 그럴 권리가 있어라는 것이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거든요.
그런데 그런 권리나 자격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없잖아요.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이 종 되었던 애굽에서 나와 들어간 것이 아닙니까? 그 과거의 은혜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 은혜를 주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인데 사람들은 한 번 은혜를 받아 안정되면 모든 것이 이만 하면 됐다는 식으로 안심을 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것이 교회에 다니는 사람도 마찬가지 인데 이 정도만 되면 내가 천당까지 가는 데 아무 지장 없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을 갖습니다. 신명기 8장 11절을 보게 되면 12-13절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거주하며 번성하여 소유가 풍성해 지면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 버린다
(신 8:11) 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신 8:12)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신 8:13)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신 8:14)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잊어버리는 거에요. 왜 이젠 도착점에 다 도달했기 때문에 원하는 바를 다 가졌기 때문에 이젠 하나님을 멀리해도 되 않겠냐는 겁니다. 안개가 지척을 분간 못하게 끼었을 때 산의 최고 지점을 어떻게 판단합니까? 안개 때문에 직접 걸어 가봐야 되지요. 안개가 없을 땐 멀리서도 산이 다 보이겠지만 안개가 끼면 바로 앞 3-4m 밖에 안 보이잖아요. 산의 최고 지점을 잴 때는 직접 걸어 가봐야 되겠지요. 그러면 경사를 조금 씩 올라가게 되면 어느 지점에서 평평해 지는 순간이 될 거에요. 그 때 동서남북에서 다 내리 막 경사가 보이면 그 곳이 정상이잖아요.
사람들이 신앙을 하며 복음을 알고 난 뒤에 그것을 이용할 요량으로 목표를 정하는 데 이 정도 될 때 까지 하나님 도와 주세요라고 빡세게 기도해 보고 점점 해 볼 수 있는 건 다 해보죠. 헌금도 더 해보고 열심히 봉사도 더 해보고 어느 정도 되면 아이들도 시집 장가 다 보내고는 더 이상 기대 할 것이 없어져요. 그저 몸이나 좀 안 아프면 되고 갱년기나 수월하게 지나가고 하면 모든 것이 멈춰진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정상이 세상에 하나 밖에 없습니까? 갈수록 더 큰 언덕이 나오잖아요. 본인은 내리막 길이라 안도 하지만 사실 도착하지도 않았어요. 배부르고 좋은 집 짓고 장사 잘 되고 농사 잘 되면 그게 전부입니까? 더 큰 언덕이 기다리는 거에요. 더 큰 언덕은 십자가에요. 신약까지 이어져야 하는 거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편안해 지니 여호와를 찾지도 않아요. 배부르니까 그 때는 바알을 섬기고 제사도 참석 안 하고 절기나 말씀도 안 듣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십자가)정상까지 보내기 위해 어떤 작전을 세우시냐 하면 압박을 가해 갑자기 하는 일이 꼬이지요. 가졌던 것 다 아까울 정도로 내리막길로 가겠죠. 그러면 또 뭘 오해하냐 하면 전 으로 돌아갈 수 있게 회복해 달라고 기도해요. 오년 전에 십 년 전에는 참 좋았는데 십 년전이 뭐 그리 좋아요? 주님 안 바라보던 시절이 그렇게 좋던가요?
김중배의 다이아몬드가 그리 좋던가요? 주님 없이도 내 혼자 살아왔다는 그런 시절이 그리워 지던가요? 아니잖아요. 다른 길로 가게 해요. 전에 가던 길이 아니에요. 전에 직은 언덕을 오를 때는 기도하고 헌금하고 십일조는 기본이고 십 이조하고 선교 헌금도 하고 온갖 것 다 하다가 정상에 올라 얼마 안가서 다 일어 버릴 때는 그 시점에선 뭘 해야 됩니까? 다 해 봤는데 다 해봤는데도 미끄러졌다면 뭐해야 되요? 아무것도 하지 마라지요. 우리가 시도하는 모든 오르기는 결코 천국에 도달할 수 없는 타고난 종교적 놀이에 불가한 겁니다. 종교적 승부걸기, 내 경건과 윤리, 도덕을 가지고 까부는 그것을 자기 의라고 해요.
주님은 십자가 정상에서부터 마중 나오십니다. 얼마나 감사한지요. 어디에서 만납니까? 최저 바닥에서 만나지요. 그야말로 초 죽음 상태, 정말 하나님 이야기만 나와도 예수님 이야기만 나와도 죽이고 싶은 극한 자기 교만, 자기 의, 이제는 내 안에 악 이외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 그 지점에서 주님은 피해자로 등장합니다. 피를 흘리는 모습으로 동행해서 주께서 아무도 갈 수 없었던, 길이 있긴 있었어요라고 물을 정도로 하고 가지요. 가는데 안개가 자욱해요. 어디로 갈지 우리는 못 정해요. 우리의 결심과 선택을 포기하게 만들어요. 이것을 네 자로 줄이면 막 살아라!
나의 결심과 선택이 나의 구원에 하나도 영향을 끼치지 못 한다는 것을 더 확고히 깨닫는 겁니다. (안 좋은)어떤 일이 벌어 졌으면 내가 행실을 잘못해서가 아니고 주님께선
원인과 결과를 나에게 두는 그러한 썩어빠진 옛 사고방식을 놓아버리도록 내가 잘못해서 이런 나쁜 결과가 왔다는 자기 행위와 결과를 결부 시키는 것을 아예 잘라 버리기 위해 우리로 하여금 훈련시키시는 겁니다. 모든 원인은 이미 확정 되어 그 일이 일어나야 되는 겁니다. 원인은 다른 곳에 있어요. 따라서 우리는 결과를 가지고 원인을 찾아가는 식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어떻게 제가 구원 받았습니까? 묻지요. 전에 같으면 이렇게 해서 구원 받았지요 할 텐데 이제는 원인을 주께선 계속 숨겨 놓고 인도하시니까 어떻게 구원 받았습니까? 하면 이젠 알지요. 아버지와 아들의 단독 회의에 의해서 창세 전부터 결정된 대로 너는 그런 인생을 살라고 지정해 주셨다는 거에요. 지정받은 사람, 즉 선택된 겁니다. 우리는 자기를 위한 선택들을 해요? 안 해요? 계속 하고 있지요. 그 선택을 무산시키는 선택, 우리 보고 선택 하지 말라가 아니고 선택은 하되 우리는 선택을 안 할 수가 없어요. 막 살아도 선택하게 되요. 결정하고 결정 할 때 뭔가 기대하는 것이 있고 상상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무산 시키는,
그 선택과 결과가 현실과 전혀 매치가 안 된다는 것을 날마다 확인시키시는 겁니다. 자유 아닙니까? 이게 자유거든요. 만약에 내 선택이 나의 구원을 이룬다면 그런 결과를 낳게 되면 우리는 수 없이 작은 산들을 오르려다 지옥 갑니다. 우리가 아는 거잖아요. 선택을 한다는 것은 미리 확률 상 아는 것을 선택해요. 확률이 50% 와 25%가 있으면 둘 중에 50%를 선택 하거든요. 주님의 선택은 주님만 아는 선택이기 때문에 주 안에서의 선택이기 때문에 그것을 에베소서 1장 4-5절에처럼 우리가 그 선택의 결과에 대해서는 몰라야 되고 알 필요도 없는 거에요. 우리의 미래에 대해서 알 필요가 없다니까요.
(엡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엡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왜냐하면 내가 알아서 천국 갈 것 같으면 그렇게 하겠는데 이미 요나가 큰 물고기 안에 있을 때 뱃속에서 물고기를 발로 차며 “그 방향이 아니야! 이쪽이야!”이렇게 했습니까? 그냥 물고기가 요나를 데려 갔고 원래 요나가 가야 할 곳은 니느웨에요. 그래서 니느웨 앞 바다에 내려놓은 거에요.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기만 했지 도착 지점이라든지 날짜를 알았겠습니까? 안에 시계가 있었겠습니까? 노아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뭐냐하면 네가 그 안에서 몸부림을 치든 발악을 하던 기도와 헌금을 하던 선교를 하든 그런 것은 나의 구원과 아무 상관없다. 노아가 이야기 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언약이라는 겁니다.
노아 언약을 통해서도 이런 점이 나와야 되요. 노아 언약의 특징은 그들이 가둬져 있다는 겁니다. 갇혀 있다는 것을 슬프게 여기지 말고 감사히 여겨야 되요. 가둬져 있기 때문에 자유가 있는 겁니다. 나의 선택이나 결심 같은 것은 갇혀 있기 때문에 이제는 인도하는 데로 맡기면 되는 겁니다. 제가 지난 낮 설교에서 사랑이라는 것을 뭐라고 했어요? 사랑은 미리 죽는 죽음이라고 했지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다 줘 버리는 거에요. 그것을 기쁘게 받아 들여야 되요. 사람이 살면서 나는 사랑 없이는 못살아라는 노래 가사처럼 어떻게 사랑 없이 삽니까? 혼자서 얼마나 힘듭니까? 다 줘도 즐거운 사람을 만나야 되지 않겠습니까?
사람이 돈 많고 인기 많으면 뭐 합니까? 사람은 기대는 데서 자유를 얻어요. 사람을 지배하는 데서 자유를 얻는 게 아니고 나에게 지적 질 안 하고 어떤 것도 용납하면서 보듬어 줄 수 있는 사람. 신약에서의 마지막 계명은 사랑이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너희가 나를 사랑할 생각 하지 말라는 겁니다. 전에 미국 강의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 할 때 요한 일서 3장 16절에서 목숨을 바치려고 하지 마세요. 헌금도 하려고 하지 마세요. 이웃 사랑도 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방법은 빼앗기는 것이지 뭘 하게 하지 않아요.
(요일 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뭘 하게 되면 그 사람은 헌금을 해놓고 자유를 빼앗겨 버려요. 다음에 또 해야 되네 하고 본인이 본인에 대해서 결심을 해야 되고 선택을 하게 되면 마귀의 꾀임에 빠진 것이 되요. 끝까지 돈 쓰지 말고 버티세요. 미쳤나! 너에게 돈 주게! 그런데 울컥하듯 저 인간에게 돈을 안 주면 안 되겠다 하면 그것은 빼앗기는 거에요. 빼앗기는 것은 특징은 줘도 내가 줬다는 권리를 행사하지 않게 됩니다.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되요. 강도에게 빼앗기듯 되는 데 그럴 때 주께 돌리지 자신에게 돌리는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언약 안에서는 모든 것을 손 놓아 버리는 겁니다. 손 놓는 것이 자유라 했지요.
내가 선택하지 않고 내가 결심하지 않고 손을 놓아 버리는 겁니다. 그런 모습이 바로 사무엘 상 10장에 나옵니다. 다시 정리해 보면 이방 나라에서는 민족의 구성원들이 있는데 그들이 왕을 뽑는데 왕을 책임자로 보지요. 뭘 책임져 달라? 우리 자손들의 족보를 지켜 달라는 거에요. 시키는 대로 할테니까 .외세로부터 지켜주고 내부의 안정된 질서로 내 것 지켜 달라는 거에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나라가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 언약이 먼저 있고 그 다음 선지자를 보내고 그 밑에 백성과 왕을 생산 하지요. 그러므로 말미암아 백성을 위한 왕이라든지 왕을 위한 백성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언약을 통해 생산되었기 때문에 세상 나라와 달라요.
그래서 세상 나라와 자꾸 싸움을 붙여요. 저쪽에서는 힘으로 하려는 싸움이고 이 쪽에서는 언약만 믿으면 승리하는 거에요. 승리 할 때는 자연 현상과 결부되어 있어요. 놀랍지 않습니까? 세상의 자연이라는 것은 그대로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이 아니라 세상 자연도 하나님의 언약 작업과 연동하는 겁니다. 여호수아가 전쟁 할 때 갑자기 뭐가 멈췄어요? 해가 멈췄지요. 그리고 뭐가 떨어졌어요? 우박이 떨어졌지요. 해와 우박으로 이겼어요. 다시 말해 약속의 땅은 약속된 사람들만 살아야지 너희는 살 곳이 못돼! 자연 현상도 도와주고 있다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에 많이 나오지요.
천국이라는 곳은 새 언약에 의해서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만이 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천국이 되는 순간 나머지는 자동적으로 지옥이 되는 거에요. 그래서 구원은 나만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누구냐를 병행돼서 보여주는 것이 하나님의 추수 작업입니다. 추수 작업은 알곡만 건지는 것이 아니에요. 반드시 가라지도 가라지 답게 드러내는 겁니다. 그래서 나만 구원 받는 다면 이기적 구원관이 되는데 하나님의 약속이 구원하면 실상이 드러나요. 내가 구원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소속의 밝혀짐이 드러남으로서 구원과 동시에 아무것도 안 했음에도 불구하고 전도가 되게 되어 있어요. 사고방식이 완전히 다르니까.
전도는 그렇게 하는 거에요. 주님이 하시는 것이지 우리가 전도하는 것이 아니에요. 멀리 간다고 전도가 아니라 그냥 살면서 전도 되게 주께서 하시는 겁니다. 이게 추수 작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메시야를 만나고 난 뒤에 자기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한 순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추수란 이런 것이다라고 요한복음 4장에서 그렇게 말씀 하시는 겁니다. 다시 말해 백성과 왕 사이의 직접적인 고리를 끊어버립니다. 끊어 버리고 왕이 되려면 반드시 언약의 말씀을 듣고 백성들에게 다가가야 되요. 그 언약의 말을 당시는 모세 이후이기 때문에 모세 언약 또는 율법이라고 합니다.
왕은 율법 책을 항상 옆에 두고 신명기에 나오는 말입니다. 왕은 곁에 여자나 말을 많이 두지 말고 율법에 의해 백성들에게 다가가야 되요. 백성도 왕에게 올 때는 자가들의 소원을 들어달라고 다가오면 안 되고 왕이시여! 주님의 뜻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어야 되요. 신약은 언약 앞에 새 언약을 붙이면 되요. 새 언약은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사지 아니하면 생명이 없고 영생이 없다는 것입니다. 새 언약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 만나요.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 만나는 겁니다. 그래서 피로 세운 언약을 새 언약이라고 하는 겁니다. 교회 세워서 되는 게 아니고 교회 세운다고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헌금 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피를 내세워야 되고 그냥 피가 아니라 Rh⁺ Rh-헌혈 한다고 되는 게 아니고 누구 때문에 흘린 피라는 것을 같이 갖추어서 내세워야 되요. 이 피는 나의 모든 행함이 죄라는 것을 규정하기 위해서 내는 피고 그 죄를 내 힘으로는 죄 씻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그 죄를 대신 씻기 위해서 흘린 피 입니다라는 것으로 내놔야 되요. 그래서 성도와 성도의 만남에서 서로 갖고 있는 피를 내 놓으며 만나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죄인입니다라를 내놓게 되어 있지요.
예를 들어 우리 아이가 이번에 사법고시 3차를 통과 했는데 그것을 내가 참지 못하고 자랑 질 할 정도로 죄입니다. 이 놈의 자식이 자랑 안 해야 될 과제를 하게 힘을 쓰게 하네! 하면 옆에서는 우리 딸이 이번에 유학 갔다 와서 천재로 소문나서 남보다 5년 당겨서 박사 학위를 받아서 천천히 받아도 되는데 애가 성질이 급해서 시카고 대학에서 벌써 스카웃 돼서 교수로 가는데 또 남편이 좋다고 해서 치과 의사로 뉴욕에서 살고 있는데 이런 이야기. 강남에 있는 아줌마와 품위 없는 아줌마가 똑같이 되지만 어쨌든 마음은 주님이 알아서 다 하시지만 주여! 내가 자랑하는 죄를 짓고 있습니다라고 하면 돼요. 모든 행위 뒤에 자아를 붙이지 말고 죄만 붙이면 돼요. 공식 아주 간단해요.
처음부터 선지자는 이런 왕을 줬다는 자체가 기존에 있는 왕을 달라고 한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의 행위입니다. 언약은 반드시 마지막에 예수님의 피로 마감되기 때문에 아까 선지자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긴 그림자를 끌고 왔다고 했지요. 그 그림자 중의 하나가 사무엘상의 이야기입니다. 반드시 예수님이 피 흘릴 수 밖에 없는 이 세상의 성질, 죄에 대한 속성을 드러내기 때문에 왕을 줬다는 자체가 기존에 있는 사고방식을 고발하고 죄의 지적으로 이어지는 겁니다. 지적을 어떻게 하는가? 22절을 읽어 보세요. 왕을 찾는데 부끄러워서 나는 못해요 하고 도망치고 있어요. 그 현장에서.
(삼상 10:22) 그러므로 그들이 또 여호와께 묻되 그 사람이 여기 왔나이까 여호와께서 대답하시되 그가 짐 보따리들 사이에 숨었느니라 하셨더라
이것이 뭐냐 하면 기존 세상에선 왕이라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잖아요. 그런데 가문의 영광은 커녕 나는 안 할 래요라고 피하고 있는 모습. 이런 모습이 기존의 사고방식하고는 다른 것으로 왕을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적 모습입니다. 장차 올 만 왕의 왕이 어떻게 왔습니까? 사람들에게 멸시와 모멸 받는 그런 모습으로 오셨잖아요. 27절 읽어 봅시다. 사울이 도살당하는 양 같아요. 사람들은 이러한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겠느냐 다시 말해 우리의 선택을 신이시여! 우리의 결제 판에 싸인해 달라는 겁니다.
(삼상 10:27) 어떤 불량배는 이르되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겠느냐 하고 멸시하며 예물을 바치지 아니하였으나 그는 잠잠하였더라
하나님이 주신 구원자는 내가 은근히 생각했던 구원의 코스, 구원의 길과는 전혀 예상 못한 다른 길로 갑니다. 안개 낀 장충당 공원처럼 길이 없어요. 그냥 살 수 밖에 없지요. 맡겨야 되지 우리 식으로 계산해서 이렇게 하면 복이 올거야! 이렇게 하면 내 일이 잘 풀릴거야! 그것은 사단의 세계에서만 통하는 것이지 주님의 세계에서 통하지 않습니다. 그냥 있는 성질 드러내나 안 드러내나 모두 죄에요. 주께서 이미 죄를 해결 했으면 그냥 내놓으세요. 남들이 어떻게 보느냐는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구원 하시지 인간이 구원하는 게 아니잖아요. 구원자의 말을 들어야지 세상 말 들어서 뭐 할거에요.
예수 믿고 잘 됐다는 그러한 것은 지옥에서 보내는 하나의 유혹 거리입니다. 상당히 유의해야 돼요. 사울은 어디 사람이냐 하면 베냐민 사람입니다. 여기가 어려운대요. 사울이 베냐민 사람이라는 말은 애곱에게 열 두 아들이 생기고 난 뒤에 그 중에서 요셉이 그들을 구원을 해요. 요셉의 엄마는 라헬입니다. 야곱이 정말 사랑했던 사람이 라헬이에요. 라헬과 야곱의 관계는 수요 설교에서 하고 있고 라헬에 의해서 두 아들이 생깁니다. 요셉과 베냐민이에요.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이스라엘을 애굽 나라에서 번창하게 만들어요. 눌러도 눌러도 번창하게 번창이라는 말은 복이거든요. 창세기 1장에서 비어있는 공간을 채우는 것을 복이라고 해요.
복이라는 것은 증폭인데 이미 창세 때 완전한 성질을 증폭 시킬 때 복이라고 하는 겁니다. 얼마나 많으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얼마나 그 성질이 유지 되냐에 초점을 맞춰야 되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구원이라면 이것이 증폭되면 복이 되는 겁니다. 내 것이 많은 게 복이 아니라 죄가 많아 졌기 때문에 복이 아니고 나를 용서하신 사랑이 증폭된 것을 복이라고 하는 겁니다. 복이 증폭되기 위해 우리는 점점 낮아질 수 밖에 없고 내 선택과 결심이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것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많이 용서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 사랑받는다는 원리에 의해서 복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에 마음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빈 공간이 많다는 거지요. 심령이 가난한 자는 쓸데없이 자기 결심과 노동의 결과들을 안보니까 비어 있는 자는 복이 있는 거에요. 천국이 그들의 것입니다. 천국이란 죽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미리 당겨서 가는 거에요. 살아 있을 때 천국 가야 되요. 살아서 천국 못가면 죽어서도 천국 못갑니다. 살아 있을 때 성령이 와서 나의 마음이 허접하고 아무것도 보탬이 안 된다는 것을 깨닫는 것, 그 때는 하나님이 주신 것은 뭐라도 다 담겨 유지되게 되어 있어요. 나는 못난이라는 노래가 있었어요. 나는 못난이기 때문에 뭐든지 고스란히 남아 있어요. 사울은 베냐민 지파인데 20절에 보면 나와요.
(삼상 10:20) 사무엘이 이에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가까이 오게 하였더니 베냐민 지파가 뽑혔고
베냐민 지파란 뭐를 상기시키냐 하면 처음에 애굽에서 나올 때 라헬 계통의 두 지파 요셉과 베냐민 때문에 살아났다는 것을 다시 상기시키는 거에요. 왕이란 지도자급인데 옛날 하나님이 주신 언약의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조건하에 왕이 된 겁니다. 베냐민 지파가 그런데 나중엔 결국 실패해요. 실패해서 유다 지파에 소속되고 왜냐하면 역사란 실패의 반복이에요. 이스라엘의 역사는 분명 하나님이 있게 하셨지만 인간의 기본 바닥 자체가 죄이기 때문에 주께서 주신 언약을 수용 할 수 없는 처지에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그 벽을 넘어서 또 다른 언약을 준비 하시고 그런 식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림자를 따라서 이스라엘이 전진하는 겁니다.
영속성의 문제 (마 24장 24절-28절) 대전- 96강
이근호
2018년 1월 30일 본문말씀: 마태복음 24:24-28
(마 24: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마 24:25)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마 24:26)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마 24:27)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마 24:28)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 것이니라
마태복음 24장 24절부터 봅시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예수님 노선이에요. 인간들 노선이 아니고, 노선이라는 말은 과거에 과거를 해석했던 그 해석이 지속되는 것을 노선이라고 하지요. 과거에 세상을 보던 안목이 그냥 지속되는 것. 그런데 예수님은 예수님의 노선을 갖고 있다는 말이죠. 아까도 얘기 했지만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기 위함이잖아요. 예수님의 말씀을 어디에서 찾아야 되냐하면 하나님의 언약, 구약에서 찾아야 되요. 요한계시록의 해석도 그렇게 되야 합니다. 인간의 노선에는 결함이 있어요. 어떤 결함이냐 하면 어떤 단계가 되게 되면 그 단계를 자꾸 완성으로 보려는 경향들이 있어요.
아까 작은 산들을 이야기 했지요. 그 정상에 올라가면 이거면 됐다는 자족하고 만족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렇게 그 만족에 대한 판정도 본인이 내리잖아요. 이것은 뭐냐하면 본인이 은근히 기대했던 것이 됐어!~하고 그것을 일단 자기 뜻대로 되니까 자기 노선이 확인된 거에요. 예를들어 군악대에 지원해서 시험을 봤다고 한다면 시험 치는 의도가 있었고 불합격 되려고 하지는 안잖아요. 군악대에 시험에서 합격할 때 뭐도 같이 따라가냐 하면 결함도 같이 따라가요. 집에서 새는 바가지는 군악대에 가서도 새거든요. 항상 결함이 계속 따라 다닌다는 말이죠.
외면상 외형적으로 볼 때 뭔가 성취하려는 느낌이 들잖아요. 성취하게 되면 뭔가 결함이 해소된 것처럼 사라진 것처럼 착각하는 겁니다. 인간이 자기 현실에 대한 이해나 해석이라는 것은 반드시 자기 몸에서 나와요. 자기 몸이 원하는 것. 욕망에 의해서 이거든요. 인간이 자기의 미래상을 상상한다면 그 사이에 뭐로 연결 되냐 하면 주문, 주문이라는 것은 스스로 언어를 동원해서 계속 최면 거는 것을 주문이라고 하지요. 그런 최면에 능력이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겁니다. 교회에서의 제일 유명한 주문은 뭐냐하면 주여!~이지요. 주여!~주여!~자꾸 하게 되면 자기 최면에 걸려버려요. 그렇게 하고 뒤에 붙이는 게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 손녀도 아멘을 하는데, 그렇게 해놓고 믿습니다!~믿습니다!~하는데 이렇게 주문하게 되면 그렇게 했기 때문에 내가 기대하는 것이 실현 가능한 하나의 현실로 구체화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오기지요. 이것을 신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이것을 믿음이라고 하니까 문제가 큰 겁니다. 그런 신념이 거짓으로 드러날 때 환상임이 드러날 때가 바로 믿음이 있는 겁니다. 신념은 어디에 해당되냐 하면 행위에 해당되거든요. 그런데 만약 이 신념을 믿음이라고 하게 되면 믿음이라고는 하지만 행함에서 도출된 거에요. 자기 행함에 정신일도 하사불성(情神一到 何事不成)이라 정신만 하나로 모으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거에요.
왜 이렇게 되야 됩니까? 질문 자체가 성림이 안 되는 거에요. 무조건 하면 된다. 조폭들이 말하는 것처럼 무조건 하면 된다는 거에요. 군대에 가면 많이 듣게 되는데 안되는 게 어디 있어! 무조건 하면 된다에요. 전부 결함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그런 거에요. 예수 그리스도의 노선은 인간이 기대하는 것이 아니고 묵시이기 때문에 이미 확정된 거에요. 주루룩 쏟아 놓는 겁니다. 역사라는 판에다가 하나님의 확정된 언약을 쏟아 놓는 겁니다. 마치 고추 농사 짖고 가을 철에 햇빛 따스할 때 길가에 펴 놓고 고추를 주욱 붓잖아요. 저녁 되면 거두고 주욱 부어버리는 겁니다.
부을 때 붓는 모든 내용을 역사 판에 붓기 때문에 역사 판에서는 뭐가 기다리냐 하면 언어가 기다리고 있잖아요. 언어가 기다리기 때문에 오류가 역사에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언약이 주욱 쏟아지니까 언어는 언어인데 결함 있는 인간들이 접근하려면 단절이 일어나야 되요. 해석 불가에요. 해석 불가가 일어나는 겁니다. 해석 자체가 성립이 안되요. 해석이 성립 안 되는데 왜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로 미래를 예상 하느냐? 사실은 미래가 아니고 현재인데 인간들은 미래라고 해요. 바로 우리의 해석 안 됨을 통해서 왜 해석이 안 될 수 밖에 없었는지 너 자신에게 물으라 다시 질문을 던지는 거에요.
우리가 뭐가 문제인지 어떤 선입견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무슨 뜻인지를 도통 모르겠다는 거에요. 한번 말씀대로 네가 조립을 해봐라! 왜 조립이 안 맞는지를 픽셀(이미지를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인 이 네모 모양의 작은 점들을 '픽셀(Pixel)'이라고 한다)이 안 맞아 떨어지는 거에요. 예수님의 말씀을 가지고 그러면 그 중심에는 누가 있습니까? 인간의 이해가 중심에 있고 인간의 이해는 인간의 몸에서 나왔지요? 인간의 몸에서 나왔다라는 것은 예수님의 노선을 이해하겠다는 노림이 뭐냐 하면 나의 몸의 유지와 연속성이에요. 연속성이란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져 나가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천국 이야기를 할 때 예수님의 몸에서 나온 언약의 성취에서 나와요. 그런데 이 말은 우리 몸에서 천국이 나오겠어요? 안 나오겠어요? 예수님의 몸은 인간에게 살해당한 몸이거든요. 인간에게 죽임당한 몸이에요. 누가 믿었으리요가 되거든요. 예수님의 몸은 인간도 이해 못할 저게 메시야의 몸이야? 할 정로로 이해 안되는 몸의 연속성 때문에 천국은 아들의 나라입니다. 인간은 이미 인간의 나라에 소속되어 있어요. 그 이데올로기와 분위기 속에 있으면서 자기의 몸을 천국까지 계속 이어지게 하려고 하는 거에요. 안 끊어 지고 마치 100m 달리기를 하면서 골인 지점까지 그대로 몸이 골인 테이프 걸고 그냥 천국에 골인하고 싶은 종교적 욕구에 의해서 인간의 몸은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몸은 인간과 노선이 다른데 그 몸 가지고 백날 가봐야 지옥에 풍덩 빠져요. 몸 자체가 다른 몸이 되야 된다고요. 그 몸을 가지고 천국에 어떻게 갑니까? 라고 물었던 사람이 있어요.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입니다. 니고데모 그 몸을 가지고 천국에 어떻게든 가보겠다고 엄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오면 됩니까? 라고 할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육은 육의 노선에서 그냥 머물러요. 똑같이 비행기로 만들어졌는데 하나는 안에 엔진이 고장 났다 그러면 이 비행기가 활주로에 있다면 온종일 활주로만 다니는 거에요. 그런데 정상 비행기는 활주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잠시 이용해서 공중으로 뜨잖아요.
고장난 비행기는 떠보지도 못하고 육에서 육으로 끝나는 거에요. 활주로에서, 이건 비행기가 아니고 자동차이지요. 다른 예를 들면 엘리야의 시체가 없지요. 엘리야가 양성한 제자들은 자기 스승의 시체를 찾겠다고 사흘 동안 찾아 헤맸습니다. (왕하 2:15-18)엘리사가 이야기했어요. 찾지 마라 시체 없다. 그럼 어디 있냐? 불 병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거에요. 그런데 이런 예가 인간들의 몸에선 없어요. 분명히 죽으면 시체 있는 것이 상식이다는 거죠. 이 말은 엘리야의 몸이 너희와 똑같은 몸 인줄 아느냐? 다시 말하면 천국에 가는 몸은 (몸+언약)이라는 조건이 붙어요.
언약이 (천국)갈 수 없는 몸인데 갈 수 있는 몸으로 바꾸는 내용이 들어 있는 거에요. 나중에 신약에서 언약의 내용이 뭐냐하면 예수님의 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몸이 엘리야의 몸과 붙어서 혼자서는 갈수 없는 엘리야의 몸이 하늘 나라에 들어가서 마태복음 7장에 변화산에서 모세와 같이 이야기 하고 있잖아요. 팩트입니다. 사실이에요. KBS뉴스엔 안 나오지만 사실이에요. 뉴스에선 세종 병원 불 난 것만 나오지만 사실이에요. 너무나 기쁜 소식입니다. 이 몸 가지곤 안 된다는데 이 몸에선 내 욕망이 있고 내 식대로 내 중심대로 세상을 이해하고 분석하고 나 좋은 쪽으로 모든 것이 잘 돌아가는 몸 가지고는 못 들어간다는 거에요.
모든 것이 내 원하는 대로 돼야 됩니다라고 고집부리는 몸 가지고는 이런 육적 욕망을 가지고는 못 들어가는 곳. 노선 갈아타기를 해야 되겠지요. 내 몸에서 예수님의 몸으로 갈아타야 되요. 왜? 그곳은 아들의 나라이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에요. 멀리 볼 때는 하나님의 나라였지만 가까이 오니까 아들의 나라에요. 이번 수련회에서 이야기 했습니다. 멀리 있는 하나님이 하나님이 아니고 실제 삶 가운데 가까이 있는 하나님만이 하나님이에요. 그런데 교회에선 전부 멀리 있는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전능하시고 자비하시고 이게 부처인지 하나님인지 분간이 안돼요.
가까이 있는 하나님이 뭘 했느냐가 중요하지 멀리 있는 하나님이니까 교회 예배당이 제단인줄 알고 거기다가 뭐 바치고~뭐 바치고~마치 유교에서 제사 지내는 것처럼 떡 바치고 뭐 바치듯이 목사는 제사장인줄 알고 자기가 앞에서 가운 입고 설쳐 대고 그런데 가운은 왜 입어요? 복장을 왜 그렇게? 마치 선 무당 있지요. 박수 무당 옷 입듯이 모습이 딱 무당이에요. 춥다고 개량 한복 입는 것은 좋은데 뭐가 특별한 행사 할 때 저는 이상히 보여요. 무슨 환경 운동하나? 사회단체인가? 이상한 생각이 들거든요. 감리교 이런 쪽에서 뭐 한복 입는 것이 나쁜 건 아니지만 튀어 보려고 계룡산에서 도 닦고 내려왔나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제가 신부와 수녀들을 싫어하는 이유가 복장부터 고쳐야 되요. 중도 아니면서 수녀는 머리에 뭘 씁니까? 자기가 마리아도 아닌 것이 신부도 마찬가지이고 뭐가 사회 집단에서 독특하게 튄다는 것은 그 만큼 남을 의식 한다는 거에요. 주님만 아시면 되지 왜 남에게 티를 내야 됩니까? 전부 장사 속이거든요. 신부들 보세요. 바닥에 팔 벌리고 엎드린 다고요. 밟고 싶어요. 무슨 짓이에요. 엎드려서 헌신의 표시인가? 전부 눈에 보이려는 거에요.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이거든요. 믿음은 너무 가까워서 못 알아보는 것이에요. 믿음인지 죄인지 자랑인지 분간이 안 가는 것처럼 너무 같아서 못 알아 봐야 되요.
그런데 믿음이 자랑 거리가 되면 결국 자기 자랑이잖아요. 인위적 거룩, 인위적 경건 이것은 이렇게 한 이들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왜? 예수님은 경건하지 않고 거룩하지 않다는 거에요. 이 이야기를 가지고 저쪽에선 뭐라고 하냐 하면 목사 됐으니까 술 먹고 담배 피우자? 왜? 주님은 안 경건 했으니까 이건 무슨 연출입니까? 왜 연출을 해요? 사람들을 꼬시려고 하지요.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성도는 주님이 정하신 거에요. 꼬신다고 오는 것은 전부 가짜에요. 100% 가짜입니다. 안 오면 말지 자기 양도 아닌데 자기가 애 달아서 그럽니까? 안 오면 말지, 자기도 못 들어가지요. 방금 이야기가 24절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예수님이 본인 이야기를 하는 거에요. 나의 나됨은 이미 빈 백지에 설명서 붙여 오는 것이 아니고 이미 (거짓)메시야로 가득해요. 인간들이 상상하고 원했던 기대했던 메시야가 한 두 마리가 아니라니까요. 그 짐승들이, 그들 사이는 연속성을 항상 유지하고 있습니다. 딱 보면 알아보는 메시야가 한 두 마리가 아니에요. 짐승이니까, 인간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의 기준점이 있잖아요. 그것에 인간들이 혹하게 마드는 요소를 모아 모아서 자기 몸에 걸치고 등장하는 겁니다. 적 그리스도의 전형적인 인물이 있지요. 누구냐 하면 내 눈을 바라봐!라고 하는 사람이 있지요. 허경영.
허경영이라는 인물을 제가 주의 깊게 봅니다. 뭐냐하면 정치도 얼마든지 종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정치가 종교화 될 때 밑천도 별로 안 들이고 자기 팬들을 꽉 잡을 수 있는 요소를 허경영이 보여 줍니다. 두 종류의 팬이 있는데 하나는 청년들과 하나는 아줌마들이 있는데 이들이 혹하는데 보여 지는 게 연속성으로 이어지면서 특이한 도약을 보여주는 거에요. 주욱 가다가 점프해서 가는 것, 이것은 어지간한 사람은 가능한 거에요. 그것을 허경영이, 적 그리스도가 보여 준다는 것이지요. 답답하고 컬컬한 마음을 교회 부흥회 하면서 해소해 보자! 거기에 부흥사가 누가 오겠습니까? 허경영이 같은 인물이 오는 거에요.
그런 인물들은 대중들이 뭐를 갈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요. 컬컬하고 답답한 심령이니까 뭐가 미흡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제가 아까 결함이 있다고 했지요. 결함과 미흡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다르지요. 결함이라는 것은 잘못된 것인데 미흡이라는 것은 부족한 것이지요. 미흡이라는 것은 채우기만 하면 온전함이 되고 잘못된 것은 채운다고 하면 잘못을 유도하게 되는데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말씀의 완성이 어디로 가야 됩니까? 메시야이기 때문에 십자가 즉, 버림받음으로 가야 되요. 버림받으려면 버리는 자가 있어야 되잖아요. 그 버린 자들이 바로 거짓된 메시야를 갈구했던 사람들이 몰려서 벌을 받아야 되요.
세상의 연속성이에요, 이어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십자가 지고 부활 승천한 뒤에 이 세상의 속성은 예수님의 안목으로 다시 평가 받아야겠지요. 연속성이 평가 받아야 하는데 그 평가의 기준이 뭐겠습니까?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거짓 선지자로 몰려서 어떤 사람에게서도 호감 받지 못하고 제자들은 다 도망가 버리고 모든 사람들의 부정에 의해서 홀로 죽었다라는 평가에 연속성을 인간의 미래상으로 말씀으로 때리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이 말씀대로 살려고 해도 주님의 말씀과 합치될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이 전혀 보이지 않게 만드는 미래상을 예수님께서 본문에서 이야기 한 거에요.
네가 이 말을 분석하려면 해 봐라! 되는 가? 사람들이 분석 할 때는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어지간히 간격을 좁혀 보려고 분석해요. 안 되는 것을 왜 하겠어요. 하리수라는 사람이 남자인데 여자가 됐다. 염색체는 남자인데 보통은 재수 없어 하는데 하리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있다구요. 무슨 의도겠습니까? 자기도 여자 되 보려 하는데 선임자들, 여자 되려 하는 아까 말할 미흡함이 있는데 바뀐다고 여자가 아니에요. 그런데 세상이 하번 확 바뀌면 하는 사람들이 한번 여자로 살아 봤으면 내 인 생이 확 달라지지 않겠는가? 그런 사람들에겐 (하리수가)메시야 같은 존재 이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십자가를 지고 난 뒤에 일이 헛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삽자가로 말미암아 본격화 된 거에요. 정말 주의 말씀대로 남은 역사가 앞으로 꽉꽉 채워 질 거에요. 주님의 예언대로, 하지만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이 알아 봤다? 못 알아 봤다? 못 알아보지요? 예수님이 십자가 지신 후에도 역시 못 알아 봐요. 말씀을 못 알아 봐요. 그러면 누가 알아보느냐? 예수님이 왜 죽으셨나를 성령 받은 사람은 뒤 돌아 서서 말씀을 알아보는 겁니다. 24-25절 말씀을 어떤 취지에서 하는지 사람들은 못 알아봐요. 알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알아보는 사람은 누구냐? 사도들이에요.
(마 24:25)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마 24:26)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성령 받은 사도들, 성령 받은 성도들만 이 말씀을 알아봅니다. 어떻게 알아보느냐 하면 현상을 알아보는 게 아니고 주어진 현상과 예수님의 말씀과 십자가를 통해서만 관련성을 갖는 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해보면 지금 이 해석이 요한계시록의 해석과 통합니다.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 사람들이 성경을 이해할 때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인간에게 주신 말씀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 자체가 잘못이죠. 인간의 이익을 위해서 주신 말씀이 아니고 너희는 그럴 자격도 안돼!를 분명히 하라고 주신 말씀이에요. 너희가 죄악 된 세상에서 살아놓고, 메시야를 죽일 수밖에 없는 성질을 갖은 세상 속에서 살아놓고 네가 뭘 더 기대해?
망할 수밖에 없는 일원 중에 하나인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에요. 그래서 메시야가 왔을 때 메시야가 하시는 말씀하고 우리의 이야기하고 매치가 될까요? 안 될까요? 안돼는 거에요. 노선이 다르기 때문에 그래요. 노선이 다르다는 것을 굳히기에 들어가는 겁니다. 세상 끝 날까지 계속 굳히기에 들어가요. 예를 들어 봅시다. 26절에“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여기서 사람들이 누구에게 말한다고 했습니까? 너희지요. 여기서 너희는 그 당시 제자들이 아닙니다. 지금 제자들도 정신없어요. 예수님을 긴가민가 하는데 성령을 받아야 되지요.
성령 받고 난 뒤에 사도가 되게 되면 이미 이 세상이 어떤 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알잖아요.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와서 그리스도인가 보다 메시야가 광야에 있다고 한다면 “이게 어디서 사기 치려고? 어디서 허경영이 같은 인간 데려다 놓고 사기 치려고?”뻔히 아는 거에요. 왜냐하면 이미 확정되었기 때문에 메시야가 어떤 식으로 다녀 간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입장에서 다른 메시야에게 현혹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현혹 안 되지요. 그 메시야를 목사라고 해봅시다. 그 목사가 여러분 기도 하면 복 받습니다라고 할 때 현혹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현혹 될 리가 없지요.
26절을 계속 보면 광야에 있다 하여도~ 유인한다는 말이죠. 다음에 나가지 말고~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광야의 반대말이 골방이에요. 골방은 기도하고 광야에서는 떠벌이고 유명 인사되고 골방에 있다는 것은 스스로 유명 인사를 포기 한다고 해서 메시야입니까? 수련회 때 이야기 했지요. 나는 부족합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습니다. 문둥병 환자의 발을 씻었습니다라고 떠벌이는 이유가 뭐라고 했던가요? 돈 내놔라! 이지요. 이것을 제가 요번에 책을 내는데 거기에 관람료라고 표현 했거든요. 괜찮은 영적 이야기를 들었으니까 관람료나 시청료를 내라는 말이에요. 아니면 그런 소리 할 이유가 없어요.
내 사람이 되라는 말이거든요. 내가 당신들 대신 혼자 고생하니까 내라는 말이에요. 초대 교회를 보면 A.D 200년경에 60m짜리 기둥 위에 올라가서 기도 하는 사람이 있어요. 왜 기어 올라갑니까? 옛날 메시야 흉내를 내고 있는 거에요. 아까 말했듯이 모든 말씀은 어디서 나왔다? 구약에서 했던 메시야 들을 모방 질을 하는 거에요. 티내며 모방 질을 하는 거에요. 왜 그러는 거에요? 사람들이 결핍을 느끼고 있으니까 우리와 달리 사는 어떤 경건과 거룩의 고수들이 없나? 찾는다는 자체가 이미 십자가 지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믿는다? 안 믿는다? 성령을 안 받아서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안 믿기 때문에 마귀가 그 영혼을 마음껏 유인 할 수 있고 갖고 놀 수 있어요. 허경영처럼.
위대한 대통령 없나? 대통령이 왜 필요 합니까? 사는 만큼 살다 가면 되는데 괜찮은 대통령이 어디 있어요? 골방의 반대말은 광야입니다. 인간의 내면적으로나 위대한 사람이나 외형적으로 위대한 사람? 둘 다 가짜라는 말이죠. 둘 다 가짜라는 말은 그렇게 메시야를 기다리는 니가 가짜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 지고 난 뒤에는 남아 있는 모든 것이 가짜가 되는 겁니다. 누구만 아는 겁니까?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 인 것을 아는 성령 받은 성도만 주여! 저도 가짜입니다 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만 가짜 메시야에게 안 넘어 가겠지요. 자기가 가짜인 것을 알면 저 (대통령, 자칭메시야)목사도 분명 가짜이거든요.
그래서 십자가를 지지 않은 저를 포함해서 어느 목사도 믿을 리가 있겠습니까? 가짜 이거든요. 내가 가짜인 것처럼 너도 가짜이다 이 말이죠.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 이잖아요. 그리스도의 영이 오게 되면 아무도 믿지 마라라는 음성으로 찾아오는 겁니다. 믿을 게 못 된다. 그러면 같은 형제들은? 형제들은 믿는 게 아니에요. 형제들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지 믿는 게 아닙니다. 사랑하면 다 준다했으니 그 사람에게 다 주면 안되고 반드시 경유를 해야 되지요. 형제에게 빼앗겨야 되지요. 주께서 시키는 대로 할 뿐이지요. 현제라고 해서 다 주면 안되요. 둘 다 못 믿을 사람인데 주께서 붙여 줬다는 것은 똑같은 인간들 끼리 만나서 뭐를 생산해라? 죄를 드러내라고 하는 거지요.
그런 경유가 드문 대요. 성도 끼리 결혼 할 수 있어요. 둘 다 성령 받아 결혼 하는 예가 거의 없어요. 둘 다 가짜이든지 둘 다 성령 받아 결혼 했다면 이혼이라는 것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왜? 둘 다 이혼 한 상태에서 결혼했기 때문에 둘 다 안 믿고 결혼했기 때문에, 이혼은 왜 생기나? 믿고 결혼했기 때문에 생기는 거잖아요. 처음부터 “내가 미쳤나! 내가 너를 믿게! 그저 이용하려 했어!”이러면 이용하려 했던 죄가 이용할 수 있을 때까지 빼먹고 빼먹을 것이 없으면 갈라서면 되요. 뭐 있어요? 이게 결혼이에요. 뭘 기대해요? 메시야를 죽인 인간들끼리 서로가 서로에게 뭘 기대합니까?
주께서 그런 사람을 붙여 줬다는 말은 은혜로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은퇴하면 별로 빼먹을 게 없어요. 신문에 투고를 하나 했는데 나이 많은 사람들이 보는 신문인데 제목이 신과 싸우기인데 내용이 친구를 배신한다고 나중에 후회하지 마라 너도 나를 이용하려고 했잖아! 그런 내용인데 친구를 배신 한다고 너무 양심에 가책 받지 말고 상대방도 나를 이용하려고 친구 아니가! 한 거에요. 이런 것을 허심탄회하게 나눌 수 있는 것이 바로 친구입니다. 성령 안에서
왜냐하면 주님이 죄도 없으면서 죄인의 모습으로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전부 끄집어내기 위해 우리의 친구 위치로 찾아 오셨잖아요.
내가 너희의 친구이다라는 말은 나에게는 못 할 소리해도 돼! 친구 아니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마땅하다. 유일한 친구가 예수님 밖에 없어요. 다른 사람들은 이용하기 때문에 친구도 아니에요. 진짜 친구는 다 받아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내려오신 거에요. 예수님만한 친구는 없어요. 그러니까 친구 없다고 너무 외로워 하지마세요. 속을 다 드러내고 내가 어떤 짓을 한다는 것을 다 아시고 피를 흘렸기 때문에 그 피만 있으면 할 소리, 못할 소리 다 해도 괜찮아요. 다하면 등을 토닥입니다. 제가 이렇게 사기를 쳤습니다. “걱정 하지마! 친구야! 내가 그렇게 되도록 했어!”
모든 책임을 예수님 자신에게로 다 돌려요. 제가 바람을 피웠습니다. 하면“내가 바람피우게 만들었어! 걱정 하지마!”제가 음주 운전을 해서 고속도로에서 사람을 죽게 만들었습니다 하면 “걱정 하지마! 그때 차가 서로 우연히 만나도록 한 것, 내가 타이밍 맞춰서 졸음 운전하게 만들었어!”이런 말을 세상 사람들에겐 말하지 마세요. 죽이려 할 겁니다. 영화 밀양에서처럼 예수를 믿는 것도 자기의 가치와 자존심을 위해서 예수를 믿었으니까 그런 경험마저 우리에겐 없겠습니까? 있잖아요. 있을 때 주님은 뭐라 하십니까? “친구야! 걱정 하지마! 네가 얼마나 죄인인가를 알려 주기 위해서 잘못 된 예수 상을 내가 집어넣었다.”이렇게 되는 겁니다.
성령이 그렇게 하신 거에요.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를 바닥으로 내려놓습니다. 바닥으로 내려지면 우리는 구원 될 자격도 없는데 성령이 와서 그 깊은 바닥까지 탄식하며 모든 만물은 주를 위하여 만들어 진 것을 네가 왜 모르냐를 타박하시며 우리를 일깨워 줄 때,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는 노선이 서로 연결이 안 됩니다. 동의가 안 되는 얼굴들인데 자기가 자기 인생을 책임지지 말고 자기 인생에 대해서도 기대하지 마세요. 제가 지난 설교에서 수족관에 물은 누가 채워 줬습니까?라고 했는데 우리가 수족관에 있는 고기라면 수족관에 물은 누가 채워 줬습니까? 주님이 채우셨잖아요.
햇빛과 공기는 우리가 착한 일을 해서 받은 겁니까? 수족관에 모든 물은 주님이 채워 줬잖아요. 모든 만물은 주를 위하여 주로 말미암아 악인과 선인에게 햇빛과 공기를 주셨잖아요. 이런 것을 우리가 기도해서 얻었습니까? 기도 안하면 햇빛 안 주고 그렇습니까? 기도해서 얻은 게 아니고 그냥 주신 거에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는 말이죠. 우리에게서 우리가 손 떼기를 원하시는 거에요. 그냥 수족관에 물고기처럼 되기를 원하시는 거에요. 배짱도 그런 배짱이 없어요. 왜 이렇게 못 살아 갑니까? 그야말로 똥 배짱. 정말 이런 자유를 좀 느끼셨으면 좋겠어요. 내가 만에게 해꼬지 한 것, 너무 짊어지게 되면 우울증 걸립니다.
다음 27절 봅시다.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자!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입니다. 이것을 누가 봤습니까? 안 봤습니까? 아무도 못 봐요. 아무도 볼 수 없게 오는 거에요. 또 이걸 모르고 본다고 카메라 두 대 설치하고 하늘 쳐다보고 하는데 인자가 올 때를 계산하고 있다고요. 그것은 내가 눈으로 보고 확인하고 믿겠다는 선입견은 예수님이 오심과는 연결점이 없어요. 성령 받은 사람들은 이렇게 이해합니다. 이미 올 때 아하! 우리 모르게 오셨구나! 어느 정도로? 번개가 번쩍하는 식으로 아무도 모르게,
그런데 아무도 모르게라고 하면 성령 받았으면 지금도 세상 모르게 주께서 은혜를 주셨다고 생각하면 편한데 꼭 내 눈으로 확인해서 메시야를 붙잡으려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이 말씀이 굉장히 섭섭한 거에요. 나에게는 미리 알려 주시지, 그래서 기름을 준비하게 하지 왜 그냥 오십니까? 저를 못 믿습니까? 이런 식으로 섭섭해 하는 거에요. 혼자 그렇게 일을 다해 버리시면 우리도 좀 보탠 것이 있어야 할 텐데 28절에 보면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 것이니라.” 여기서 주검이라는 것은, 시신이 있는 곳에만 뭐가 모인다? 독수리가 먹을 게 있어서, 독수리는 거짓 종교인들. 너희가 시체이기 때문에 독수리가 뜯어 먹을 게 있는 가 싶어서 우글대고 오는 거에요. 목사나 신부들이나 중들 이런 사람들이죠. 왜 이런 사람들을 지목하느냐 하면 바로 그들이 스스로 도약했다고 착각했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는 죄인이 아니라고 ,죄인지이만 그중에서도 죄가 엷게 없어진 많이 남아 있지 않은 죄인. 상대적으로 다른 인간들은 죄 많은 죄인,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누가 복음 18장에서 이야기 했지요. 나는 저들과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점프, 도약했다 이 말이죠. 기도하고 고생 많이 했다는 거에요. 신학 공부해서 점프하고 도약했다는 거에요.
(누 18: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누 18: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그래서 세상에서 도약해서 목사나 할까? 성도나 할까? 는 아무도 이야기 안하는데 목사나 할까? 또는 권사나 할까? 권사가 되면 남편이 장로가 되야 하기 때문에 일단 남편을 장로로 만들어 놓고 장로급이나 목사급으로 남편을 키워볼까? 성도만 되면 돼요. 성도는 일방적으로 성령이 와야 성도가 되요. 요청한다고 오는 게 아니에요. 부른다고 성령이 오는 게 아닙니다. 그건 마치 성령을 돈 주고 사려는 마술사와 같은 겁니다. 아까 말했듯이 미흡함을 채우면 온전한 줄 알고 자꾸 그런 사고방식을 갖는 한 그곳에는 독수리 같은 것이 모일 뿐입니다. “내 눈을 바라봐!”자기가 공중 부양하고 한다는 거에요.
자기가 자기를 이슈화 시키는 것. 화제 중심에 서는 것. 그것을 논객이라고 합니다. 별로 할 일도 없으면 남을 씹어서 돈 버는 재주를 갖은 것. 케이블 TV에 보면 많이 나옵니다. 도올 김영옥 이런 사람들. 인문학 강좌하는 사람들. 격을 띠우겠다는 거에요. 그런데 주님은 둘 다 시체이다 하시죠. 이것을 죽음의 보편성이라 합니다. 저주의 보편성. 이미 인간은 태어 날 때부터 전부 시체입니다. 자기가 시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이미 알지요. 내 육은 절대로 천국에 못 간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미 천국에 있는 사람이에요.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사람입니다.
내 몸은 주님 앞에서 대들고 까불고 교만하고 그럴 수밖에 없음을 아는 사람은 십자가 피만 바라보고 십자가 용서만 하나님께서 내게 하지 못한 언약을 다 이루신 그 분 앞에 아낌없이 모든 것을 드립니다. 사랑이지요. 죽이되던 밥이되던 ,가라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는 하겠나이다하고 모든 것을 다 맡겨 버리는 거에요. 그런 것을 강아지에게 배워냐 해요. 강아지가 주인을 만나면 특징이 있어요. 처음에는 경계하다가 사료를 주고 잘해주면 다 맡겨 버려요. 번지 점프 할 때처럼 번지 점프의 좋은 점은 위로 안 올라간다는 거에요. 반대로 떨어지기만 한다는 겁니다. 떨어지지 뭐! 떨어지나 안 떨어지나 다 시체이니까!
시체가 떨어지는 게 당연하지요. 죽는 것 밖에 할 게 없어요. 검사들이 모이는 데 검사외전에서 여자 검사가 선배 검사에게 성추행을 당할 때 그 옆에 같은 검사들이 한 둘이 있었다는 게 아니에요. 8년 전 이야기에요. 그 때 왜 옆에 검사들이 가만히 있고 이 여잔 왜 그 때 이야기를 안했느냐? 라는 질문은 8년 후에야 나올 질문이에요. 8년 후에 그런 질문을 할 만한 힘을 가졌다는 말 아닙니까? 그렇다면 8년 전으로 돌아가야 되요. 8년 전에 입을 다물고 있었다면 그 인간이나 여자나 같은 인간이에요. 이것은 비겁한 복수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인간 달라졌다는 이야기를 하면 안돼요. 인간은 절대 달라지지 않습니다.
잠재되어 있는 보복일 뿐이에요. 그 때 이야기 안하면 영원히 이야기 하지 말아야 되요. 그리고 이야기 않은 이유가 뭡니까 높은 자리가 탐이 나서 그래요. 탐욕은 우상 숭배이다. 그 여자는 지금 우상 숭배하고 있는 중입니다. 내가 오를 자리까지 말 안 들으면 못 가니까 꾹 참으면 그 자리까지 가겠지 라고 그때 이 여자의 마음은 이런 거였어요. 그러면 지금 그 마음이 아니라면 그 때 상황은 끝난 거에요. 지금 성추행 하면 지금 고발해야 하듯 마치 그 때가 지금인 것처럼 사람들을 현혹 시키면 안돼요. 이것을 성도에게 적용시키면 성도는 지난 것을 복수하지 마세요. 그 때 주와 함께 있으면 내가 무슨 말 할 것인지를 성령을 통해서 하실 것이다 마태복음 10장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밀어버리면 우리는 연속성에 있거든요. 날마다 죄는 끊어져야 되요. 죄가 어떤 성과를 넘어 버리면 죄가 아닌 게 되어 버리니까 죄는 성과를 낼 수도 없어요. 모든 성과는 예수님이 은혜로 주신 거에요. 아까 말했듯이 수족관의 물은 내가 열심히 해서 얻은 것이 아니고 열심히 해서 햇빛 얻는 게 아니고 주께서 그냥 주시는 거잖아요. 주께서 주심의 연속성을 유지 하려면 나는 주시는 은혜에 전혀 기여 하지 못했음을 날마다 인정해야 되요. 스스로 내가 잘나서 오늘 하루도 살아가는 것이 아님을 인정해야 되요.
따라서 만약 어떤 사람이 성추행을 하거든 주께서 성추행 당하게 하셨고 나는 아니요라고 말 할 수 있는 낮아진 자리에 있음을 확인 하라고 하는 것이니까 아니요라고 이야기하고 지난 후에도 아니라고 한 것을 자랑 질 하지도 말고 주께서 모든 것을 하신 거에요. 그래서 인생은 절대 후회해선 안되요. 그 때 그 수준에서는 최선의 길이었습니다. 작은 봉우리 산 하나 정복 했다고 자랑 질 하는 것. 그런 미련 한 짓도 주께서 죄인임을 알게 하시기 위해 순간순간 승리했다고 까부는 짓도 한번 해 봐야 되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온 천지가 주님을 쫓아 낸 세상인데 뭐를 더 기대 하겠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이고 우리가 세상을 겁을 내고 할 말 못하고 그런 비겁한 모습인 것을 날마다 확인 됩니다. 주께서 입을 열어 이야기 하게 하시는 그것이 우리의 자기 의가 되지 않게 하시고 자랑 질이 아닌 주께서 내 자신을 깨닫게 하시는 기회로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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