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손잡이 (삼상 11장14절 -12장 25절) 대전- 36강
이근호
2018년 3월 27일 본문말씀: 사무엘 상 11:14-12:25
(삼상 11:14)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라 우리가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 (삼상 11:15) 모든 백성이 길갈로 가서 거기서 여호와 앞에서 사울을 왕으로 삼고 길갈에서 여호와 앞에 화목제를 드리고 사울과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거기서 크게 기뻐하니라 (삼상 12:1) 사무엘이 온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가 내게 한 말을 내가 다 듣고 너희 위에 왕을 세웠더니 (삼상 12:2) 이제 왕이 너희 앞에 출입하느니라 보라 나는 늙어 머리가 희어졌고 내 아들들도 너희와 함께 있느니라 내가 어려서부터 오늘까지 너희 앞에 출입하였거니와 (삼상 12:3) 내가 여기 있나니 여호와 앞과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내게 대하여 증언하라 내가 누구의 소를 빼앗았느냐 누구의 나귀를 빼앗았느냐 누구를 속였느냐 누구를 압제하였느냐 내 눈을 흐리게 하는 뇌물을 누구의 손에서 받았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그것을 너희에게 갚으리라 하니 (삼상 12:4) 그들이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속이지 아니하였고 압제하지 아니하였고 누구의 손에서든지 아무것도 빼앗은 것이 없나이다 하니라 (삼상 12:5)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 손에서 아무것도 찾아낸 것이 없음을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증언하시며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도 오늘 증언하느니라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가 증언하시나이다 하니라 (삼상 12:6)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모세와 아론을 세우시며 너희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이는 여호와이시니 (삼상 12:7) 그런즉 가만히 서 있으라 여호와께서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행하신 모든 공의로운 일에 대하여 내가 여호와 앞에서 너희와 담론하리라 (삼상 12:8) 야곱이 애굽에 들어간 후 너희 조상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을 보내사 그 두 사람으로 너희 조상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곳에 살게 하셨으나 (삼상 12:9) 그들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은지라 여호와께서 그들을 하솔 군사령관 시스라의 손과 블레셋 사람들의 손과 모압 왕의 손에 넘기셨더니 그들이 저희를 치매 (삼상 12:10) 백성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섬김으로 범죄하였나이다 그러하오나 이제 우리를 원수들의 손에서 건져 내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를 섬기겠나이다 하매 (삼상 12:11) 여호와께서 여룹바알과 베단과 입다와 나 사무엘을 보내사 너희를 너희 사방 원수의 손에서 건져내사 너희에게 안전하게 살게 하셨거늘
사무엘 상 11장 14절 부터입니다. 왕이 없던 시절의 이스라엘과 왕이 있는 이스라엘이 어떻게 확연히 달라지는지 그 내용이 이제부터 전개됩니다. 왕이 없을 때의 진리라는 것은 누구와 직접 마주하느냐 하면 자신과 마주해요. 오늘 날 현대에도 왕이 없잖아요. 왕이 없으니까 진리이다 아니다의 평가를 누가 내립니까? 그 자신이 내리지요. 자신들이 내리다 보니까 근대나 현대의 민주주의에 와서 사람들의 찾는 안정 중 첫째는 정신적 안정(사상적 안정, 종교적 안정)이었어요. 예를 들면 옛날 우리나라의 조선시대에는 계급 사회여서 양반과 상놈이 구분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사회적으로 안정을 가져다 줬어요. 우리는 단군의 자손이다 이런 것.
정신적 안정 같은 경우는 인도네시아에서는 국가가 이슬람 국가이지요. 터키나 파키스탄도 이슬람 국가이지만 서울이나 대구 같은 경우를 보면 주로 볼 수 있는 것 중에 머리에 두건(히잡, 차도로) 쓴 여자들을 볼 수 있잖아요. 제가 볼 때 저 사람들이 자기들 성전에 들어갈 때 하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평상시 다닐 때도 머리에 두르고 왜 그렇게 할 까? 생각해 볼 때 그것도 정신적 안정입니다. 예전엔 사상적 안정, 지금은 종교적 안정. 그런데 현대에는 정신적 안정이 없어요. 왜냐하면 지금은 경제적 안정이 우선이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이웃끼리 친하게 지내던 시절이
우리나라 같은 경우 1960년 이전의 시절에는 가족끼리 마을 공동체이던 형태가 새마을 운동의 잘~ 살아 보자가 되면서 촌구석에 있으면 안 되서 젊은 사람들이 다 어디로 갔습니까? 전부 서울로 다 간 거에요. 서울로 왜 가느냐? 경제적 안정 때문에 그렇습니다. 서울에 가면 서울 역에 마중 나온 사람들이 있는데 가발 공장으로 갈 차하고 버스 안내 할 사람 구하는 차, 구두 공장과 섬유 공장에서 사람들을 모집하고 있어요. 그렇게 돈 벌어서 촌에 있는 부모님이나 동생들에게 보내 학비 대고 공부시켰습니다. 우리나라에 근대 똑순이들. 그중에 유명했던 영자의 전성시대 영화 있잖아요. 갑작스럽게 산업화가 활성하면서.
경제적 안정이 우선이었습니다. 힘들었지요. 힘드니까 어떻게 합니까? 힘드니까 도움 받을 데가 교회에 가야지요. 갑자기 서울에 교회가 부흥되기 시작 했습니다. 돈 벌게 해달라고, 하나님 아십니까? 하면서. 지금 왕이 있다는 것, 왕이 없을 때 사람들은 정신적 안정이나 경제적 안정을 통해서 무엇을 도모 하느냐 하면 자기 정당성을 도모해요. 돈이 있으니까 나는 정당하다, 나는 안정할 만큼 돈이 여유가 있으니까 나는 참다운 인간이다 또는 참다운 사람이다. 그런데 드디어 이스라엘에 왕이 등장하게 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게 되냐 하면 자기 정당성을 포기해야 되요. 인간 내부에 뭐가 들어 왔냐하면 왕이 왜 꼭 있어야 했느냐? 라는
사건의 취지와 전모가 각자 개인의 마음 속 까지 침투 됩니다. 이스라엘과 왕이 있던 것과 왕이 없는 것의 큰 차이가 되요. 그러면 이스라엘에게 왕을 주었다라는 것은 이스라엘 입장에선 기분 좋은 일일까요? 아니면 서글픈 일일까요? 오늘 본문에선 사람들이 기뻐했지만 사무엘은 달리봐요. 너희는 보이지 않는 왕인 하나님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방 나라와 같이 눈에 보이는 왕을 달라고 했다는 것은 그 만큼 너희의 범죄가 중차대하다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을 재간이 없는 거에요. 보이지 않으니까 진짜 믿는지 안 믿는지 분간이 안되는 거에요.
차라리 눈에 보이는 왕에게 충성 다하고 왕이 우리나라를 이끌어 가는 그런 멋들어진 영웅적인 성과가 더 믿음직하다는 거에요. 그래서 지난 시간에 했듯이 하나님께 왕을 달라고 하는 것은“하나님! 당신은 제대로 왕 노릇 못 한거야!”라고 외침과 같은 거에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해준 것이 변변치 않으니까 우리보다 잘 사는 이방 민족처럼 우리도 그런 정치적 구조를 가지면 그들처럼 잘 살 수 있지 않겠는가 해서 왕을 주옵소서! 한 거에요. 그것을 하나님은 아시고 사무엘도 안 거에요. 너희가 왕을 달라는 것은 (하나님이) 왕 됨을 거부하는 사고방식이고 거부하는 시위이다 이렇게 봐서“그래! 너희 소원대로 왕 줄께!”라고 된 거에요.
그렇다면 왕이 있다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바람직하지 못 하지요. 잘못된 것이지요. 잘못된 사건의 취지가 그냥 왕이 하나 등장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것과 연결된 그들의 잘못된 신앙심이 그들 내부에 심어지게 됩니다. 장착되는 거지요. 왕을 달라했던 그 실수와 오류가 그들 내부에 딱 들어 있지요.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잖아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였는데 성령이 오셔서 용서해 줬다. 일을 이렇게 쉽게 생각하면 안되요. 십자가에 죽였다는 말은 앞으로 성령을 보냈다는 말은 너희가 하는 짓이 하나님을 죽이는 짓 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을 성령을 통해 책망하시면서 그들 속에 심어 줍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은 사람은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고백을 하게 되지요. 신난다! 하나님이 나를 죽여도 아무 탈이 없네! 스스로 좋아한 문제가 아니고 우리 내부에 심화시켜 나가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 하면 사람들이 왕을 달라는 것은 진리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고 나의 안정을 위해 자기 위주로 진리이냐? 안정이냐?의 싸움에서 자기 행복을 선택한 거지요. 그러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을 죽였다는 말은 마찬가지로 진리에는 관심이 없고 그냥 조용하게 사는 것이 제일 좋고 편안한 게 제일 좋고 남이 나에게 터치 안하고 나도 남 터치 안하고 평안하게 사는 게 최고이다라는 안일한 마음이 예수님을 죽이게 만들었어요.
심지어 열 두 제자도 마찬가지고요. 제자들도 예수님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본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본래의 자리란 의지가 뭉쳐진 곳이 예수님은 쓸모없다! 쫓아 버려라! 죽여 버려라! 이것이 우리 본래의 마음이에요. 본래의 마음으로 갈 건데 예수님은 왜 오셨냐? 예수님이 안 오시면 본래의 마음을 모르게 되요. 왔다가 가셔야 본래 자기의 모습이 유감없이 다 들통나요. 나는 진리, 진리하며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했지만 그것 다 핑계에 불과하고 진짜 근원적인 것은 나 건들지 마라! 내 버려 둬! 이런 식으로 자기 자체가 신처럼 행세하는 거에요. 지난 설교에도 했지만 인간이 제일 싫어하는 것은 자기를 무시하는 거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인간을 개 무시하시잖아요. 인간을 무시하니까 죽여 버리지요. 죽여버리고 교회는 자기를 인정해주는 가짜 예수를 우상으로 만들어 내고 조작해서 섬겨버립니다. 우리를 무시하지 않는 심판이 없는 하나님.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처럼 뭐가를 주려고 환장한 하나님을 찾는, 못 줘서 환장하신 하나님, 뭘해도 허허허 웃어넘기는 금복주 할아버지 같은 하나님, 그런 하나님을 전부 신봉하며 일종의 부처지요. 부처의 변형체입니다. 오늘 날의 예수이지요. 특히 더 심한 곳이 천주교입니다. 거기에 마리아나 예수도 제 2, 제3의 석가모니라고 보면 되지요. 우리의 생각들과 일치되는 겁니다.
절대로 우리의 속내를 끄집어내고 터치하지 않아요. 그러니 설교에 은혜 받았다 최고의 설교이다하면 그것이 어떤 설교가 되겠어요? 긍정적 마인드를 제공하는 것, 내일은 뜬다! 쨍하고 해 뜰 날 송대관 노래에서처럼 그러한 교회가 부흥이 됩니다. 교회가 부흥 된다는 것은 이 세상이 지옥이라는 것을 교회가 커짐으로 증명해 내고 있는 거에요. 복음 전해서 커진 것은 아니잖아요? 그렇다면 교회가 지옥의 한 파트를 맡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 지옥이라는 것을 감추는 역할을 해주고 있지요. 교회에 다니면 지옥 가는 것이 면제될 것 같은 생각들을 제공하지요. 사실은 그 사태를 악화시키는 겁니다.
차라리 교회에 안 다니면 양심의 가책이나 있지! 교회 다녀서 전부 천국 간다고 우기고 있으니까! 양심의 가책을 느낄 기회조차 놓치는 거에요. 거기에 세례 받았지! 성만찬도 했지! 구색은 다 갖춰 버렸어요. 구원 받을 수 있는 구색, 다른 말로 행함의 행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다 챙겨 놓으라고 노하우를 제공하는 단체, 그래서 주일 낮에 교회를 연극 단체라고 했지요. 대표는 이윤택이고 (웃음) 교회는 사기 단체에요. 사기 치는 곳이에요. 사람들에겐 경제적 안정이 최고에요. 하나님이고 뭐고 뒷전이고 경제적 안정을 위해선 하나님도 섬기고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 예수도 믿고 그런 겁니다. 경제적 안정을 포기 못해요.
그러면 오늘 날 성도는 경제적 안정을 포기한 사람입니↗까? (톤 올림) 아니지요~! 단 사태를 파악한 사람이에요. 나로서는 어떤 식으로는 내 힘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 능력으론 불가능 는 자기 주제 파악을 하고 있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왕이라고 하는 거에요. 왕에게 일어난 사건이 나의 죄를 노출시키는 사건으로 이해할 때 그것이 십자가의 영이 우리 안에 들어 온 증거입니다. 그래서 왕이 없으면 우리가 얼마나 허접스러운가를 알 수 없어요. 날마다 주님을 모시기 바랍니다. 그렇다고 인간은 절대로 안되요. 인간은 안 되지만 주께선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리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거니까요.
우리가 행운이라고 여기는 것들이 절대로 구원에 기여하지 못해요. 그렇다면 인간들은 인간 안 된다. 공식처럼 인간은 인간 안 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왕을 보내 준 것은 (왕+백성=망해라) 왕과 그 당시 백성들은 같이 망해라! 이런 취지로 왕을 준 겁니다. 왕을 주는데 왕 하나가 잘못하면 같이 너희가 망할 때는 너희가 자기 잘못은 모르고 왕을 잘못 뽑았다든지 왕이 처신을 잘못 했다든지 이런 되지 않는 핑계는 대지 마라! 그 왕을 달라고 누가 했냐는 말이죠. 자신들(백성)이 했잖아요. 하나님은 왕과 백성을 결합 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같이 망하지요.
그러면 이렇게 망했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 안에는 물론 심판도 있고 저주도 있지만 축복도 있고 구원도 있잖아요. 그러면 이렇게 같이 망한다면 저주와 심판 밖에 없는데 언약을 통해서 생기는 구원과 축복은 어떻게 되느냐입니다. 언약의 최종 결과는 천국과 지옥이에요. 지옥이 있어요.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천국에 가는 사람이 있어야 될 게 아닙니까? 그렇지요. 결과대로 한다면 지옥 가겠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은 오늘 죽어도 천국 갈 수 있는 겁니다. 이것을 어떻게 끄집어 낼 수 있느냐 하면 오늘 본문의 사무엘 상 11장에서, 여기서 끄집어내는 사람이 바로 선지자입니다.
왕과 선지자는 대척 관계에 있어요. 왕은 백성과 함께 망해도 망하는 현장에서 이탈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성 유지하는 사람을 선지자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선지자가 왕을 뽑지요. 사무엘이 사울을 뽑은 거에요. 사울은 어디에 종속 되었는가? 사울은 비록 왕일지라도 한시적이에요. 선지자 계열의 지시를 따라야 합니다. 계속 12장을 봅시다. 12장 전체 내용은 나 선지자 사무엘은 너희들 앞에서 흠 잡힐 일 안 했지? 그지? 이렇게 이야기가 시작 되요. 이야기가 시작 되면서 너희들 소원대로 왕을 줬다. 그런데 왕을 구한 것은 너희가 너희 자신도 모르는 하나님을 싫어하는 마음의 연장선에서 왕을 구했다.
(삼상 12:1) 사무엘이 온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가 내게 한 말을 내가 다 듣고 너희 위에 왕을 세웠더니 (삼상 12:2) 이제 왕이 너희 앞에 출입하느니라 보라 나는 늙어 머리가 희어졌고 내 아들들도 너희와 함께 있느니라 내가 어려서부터 오늘까지 너희 앞에 출입하였거니와 (삼상 12:3) 내가 여기 있나니 여호와 앞과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내게 대하여 증언하라 내가 누구의 소를 빼앗았느냐 누구의 나귀를 빼앗았느냐 누구를 속였느냐 누구를 압제하였느냐 내 눈을 흐리게 하는 뇌물을 누구의 손에서 받았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그것을 너희에게 갚으리라 하니 (삼상 12:4) 그들이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속이지 아니하였고 압제하지 아니하였고 누구의 손에서든지 아무것도 빼앗은 것이 없나이다 하니라
하지만 너희 소원대로 왕을 주었으니 이제 왕이 있다고 해서 너희가 제대로 되었다고 생각지 마라 너희가 왕을 구할 때 썩어 빠진 사고방식이 문제 였다고 인정한다면 하나님께서 왕을 줘도 왕을 준 상태에서도 잘 이끌어 가실 것이다라는 내용이 죽 나와요. 그러면서도 12장 마지막을 보면 24-25절에 ~만일 너희가 여전히 악을 행하면 너희와 너희 왕이 다 멸망하리라, 왕과 백성이 결속되어 있어요. 그러면 선지자는 뭘 하냐? 23절을 보면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지 않겠다. 이 말은 선지자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유효하게 선지자와 연락을 취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삼상 12:23)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 (삼상 12:24) 너희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 일을 생각하여 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 (삼상 12:25) 만일 너희가 여전히 악을 행하면 너희와 너희 왕이 다 멸망하리라
기도에 대해서 이렇게 자신 있게 이야기 한다는 것은 사무엘과 하나님이 연락을 취할 만한 근거가 있다는 겁니다. 만약에 사무엘 상 12장 23절의 본문을 가지고 어떤 교회 주일 예배에 목사가 강단에 섰다. 또는 외부 강사가 이 본문을 가지고 강단에 섰다. 그 설교 들어 보나 마나에요. 다시 한번 본문을 볼까요? 23절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를 가지고 오래된 교인들은 이미 눈치로 다 알아요. 1.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2. 그래서 여러분 교회에 훌륭하신 목사님을 보내 줬습니다.
왜 그 목사가 훌륭하냐 하면 여러분이 개판으로 살아도 여러분의 당회장 목사님은 기도하기를 쉬지 않기 때문입니다. 3. 여러분의 가족이 복 받고 여러분이 직장에서 승진 잘 되고 자녀가 공부 잘하고 건강하려면 여러분이 섬기는 성전의 목사님은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하지 않으시기에 목사님을 위해서 여러분이 간절히 기도하시면 이 세상에서 복이 다 여러분에게 갑니다. 자! 헌금 시간 (웃음) 참~ 얼마나 속아들 왔습니까? 강의 초반에 뭐라 했어요. 인간들이 원하는 것은 경제적 안정성이라 했어요. 경제적 안정성은 마귀가 도사거든요. 설교가 얼마나 쉬운지 은혜가 팍팍 될 수밖에 없어요.
경제적 안정성을 취한 사고방식이 굉장히 긍정정적 사고이지요. 아 나도 저렇게 당회장 목사님을 위해 기도 하면 30배, 60배 수입이 내게 온다, 내 행함으로 기도하는 분을 위해 기도 해 주면 그 이득은 내가 챙길 수 있다. 이렇게 되는 거에요. 그러면 우리 목사님, 강사님은 성경대로 한다고 말해요. 모든 사기꾼들이 다 그런 식으로 하니까, 대조 할 수 있는 설교를 들어 본 적이 없으니까, 이 본문을 딱 펴면 그런 설교가 튀어 나오는 거에요. 기도가 (하나님과)연락을 통하는 근거가 뭐냐 하면 선지자를 빼놓고 선지자를 핍박해야 되는 죄인들의 발생입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이 세상에 미련이 없을 때 기도가 되요. 자식을 위해서, 남편을 위해서 기도 한다는 말은 이제는 너무 실망에 실망이 넘쳐 두 번 다시 기대 안 할 때 다시 말해 어렵게 표현 하자면 내가 어떤 행함을 남편이나 자식에게 할 때 전에는 잔소리 하면 먹혀들었는데 이제는 내가 잔소리 한다는 행함이 더 이상 없이 좌절해서 끊어 졌을 때, 상대하기도 싫을 때 주여! 어찌 합니까? 어떻게 좀 해 주세요. 기도는 목사를 보고 하는 것이 아니고 방향을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주님을 보고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기 때문에, 제가 지난 번에 이야기 했지요. 예수 이름이라는 것은 예수 이름으로 할 때는 모르고,
예수 이름으로 해 놓고 주어진 사태나 상황이 내 기도 내용과 상관없이 주의 이름으로 한 내용이 주어 졌을 때 소급해서 우리는 내가 기도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위해 기도 한 결과를 차후적으로 떠 안게 되는 것이라는 상황의 사실을 믿음으로 인정해야 되요. 쉽게 말해서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이 뭐냐하면 왕 대신 예수님의 희생 덕분에 살아요. 충남 도지사 이름이 뭐였지요? 안희정. 안희정씨가 미투로 당한 것은 예수님의 희생 덕분이에요. 십자가 은혜 덕분에 살아갑니다. 사람들이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에요. 세상의 모든 일은 예수님의 십자가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모든 사태가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니 힘으로 사는 게 아니다는 말이죠.
그래서 성도는 경제적 안정보다도 경제적 안정이나 정치적 안정을 취하든 주께선 보지도 않고 성도로 하여금 자신이 얼마나 정당하고 옳은가가 아니라 예수님이 정당하고 예수님의 희생이 옳았음을 증언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몰아세웁니다. 그러면 성도는 세상 사람과 똑같아서 자기 정당성을 옹호하겠지요. 주님의 복음을 열심히 공부 하는데도 왜 일이 안 풀립니까? 이런 식으로 나오다가도 성령이 와서 책망을 받고 난 뒤부터는 나의 혼란스러움, 실수투성이, 특히 연세 많은 분들은 돌아서면 실수하고 항상 실수에 실수 연발이잖아요. 이렇게 자기 자신이 실수와 오류가 많으니까 본인이 본인한테 짜증이 나요. 본인이 싫어져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왜 자신이 싫어지도록 주께서 몰아세우시는가? 순전히 내 생각만하고 꾸준히 하면 나의 정당성의 증인이 되요. 나는 내 잘남의 정당성을 포기 못하고 쥐고 있었던 겁니다. “하는 일마다 왜 안 됩니까? 이번 일도 또 실패로 끝나고 큰 건이 들어 와서 잘되나 싶었더니 끝판에 휙 뒤집어져서 안 되고 왜 이러십니까? 주님이 ”네 정당성을 바탕으로 해서 주님의 증인되는 게 아니고 주님의 증인은 너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너 자신의 고질적인 네 힘으론 못 고치는 죄 때문에 주께서 십자가 지시고 그 십자가를 증거 하라고 네 뜻대로 안 되게 했다. 왜? 불만이냐? 그래서 성도는 오늘날 선지자입니다.
평생 내가 했던 모든 것이 실망으로 다가올 때, 사람이 실망할 때가 언제냐 하면 옛날엔 내가 잘 나갔는데를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옛날엔 내가 그 정도 되는 인물이었는데 요즘은 자꾸 잊어버리고 치매가 왔는지 돌아서면 실수하고 가만히 생각해보면 누구한테 잘못한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고 했다하면 잊어버리고 지갑 잊어버리고 헨드폰 잊어버리고 뭘 하려고 하다가도 돌아서면 다 잊어버리고 이런 것은 치매라 그런 것이 아니고 주님을 좀 더 많이 증거 하라고 주께서 유발시킨 증거입니다. 이제 더 이상 너를 의존 하지마! 네가 더 많이 잊어버리고 실수해도 나는 너를 천국 보낼거야!
그런데 너는 괜찮게 살았기 때문에 천국 가는 데 너의 행함이 보탬이 된다는 자기 정당성, 이것 갔다 버려라는 말이지요. 던져버리라는 말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누구의 증인이 되라? 주님의 증인, 그래서 성령받고 난 뒤의 자아라는 것은 폭이 없어요. 오후 설교에선가도 했는데 폭이 없다는 것은 확장시킬 여지가 없다는 말입니다. 자아라는 것은 폭이 커져 버리면 미련이 남아서 그것을 밑천으로 자꾸 그 폭을 넓히려고 해요. 나 잘남, 내일은 더 잘남, 이렇게 잘남을 키우려는 인간의 심리가
성령이 오게 되면 그 폭이 압축이 되요. 압축이 돼서 내 것은 납작하게 되요. 언젠가도 예를 들었는데 가정주부가 이불을 정리 할 때 부피가 크잖아요. 압축 비닐을 사서 그 안에 넣고 청소기를 키면 쓸데없는 공간이 빠지지요. 그게 자아에요. 납작하게 되어 버리는 불필요한 공간 빼고 차곡차곡 쌓아 놓으면 이불도 장롱에 많이 들어간다는 말이죠. 쓸데없는 것을 쫙 빼어 버리는 거에요. 주께서 성령을 청소기처럼 집어넣어서 쫙쫙 다 뽑아내시는 거에요. 내가 너를 다루고 있고 인도하고 있는 것이지 니가 알아서 부푼 솜사탕처럼 나름대로의 현실 상, 미래상, 미래의 꿈을 자꾸 부풀리지 마라는 것이죠. 그러면 폭이 너무 넓어져요.
폭이 넓으면 바람이 많이 불어요. 바람 잘 날 없어요. 이거 해결되면 저거 터지고 저거 해결되면 이거 터지고 내 안에 내가 너무도 많아! 생각이 너무 많아요. 솜사탕 놓고 한번 밟아 보세요. 요만큼 밖에 안 되지요. 그게 안되니까 사람들은 누굴 찾냐 하면 아내들은 남편을 찾아요. 왜냐하면 자기의 고민을, 자기가 못하는 것을 남편에게 미루고 시키면 다 해줄 때 남편을 왕으로 봐요. 왕 같은 남편, 왜 자기의 모든 할 일을 다 해줬으니까 남편을 의지한다, 사랑한다 이건 이용해 먹겠다는 거지요. 실제로는 자기 안정화 시도입니다. 남편이 돈 다 벌어다 줘, 못나도 이뻐해줘, 최고의 남편이다.
이게 바로 왕을 뽑는 백성들의 심보이다로 보시면 되겠지요. 그렇게 든든한 왕이 있으면 자기 잘못이나 죄는 들어 날까요? 안 들어 날 까요? 안 들어나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를 찾는 겁니다. 주님은 나의 왕이시라고 하면 서 드럼치고 기타 쳐 가면서 이건 무슨 심보에요? 백성들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이 뭐냐하면 선지자입니다. 선지자가 어떻게 하는지 12장을 봅시다. 사무엘이 백성들 앞에 섭니다. 2절에 왕이 너희 앞에 출입하느니라 보라 나는 늙어 머리가 희어졌고 내 아들들도 너희와 함께 있느니라 내가 어려서부터 오늘까지 너희 앞에 출입하였거니와
3절 “내가 여기 있나니 여호와 앞과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내게 대하여 증언하라 내가 누구의 소를 빼앗았느냐 누구의 나귀를 빼앗았느냐 누구를 속였느냐”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그 이유가 9-10절에 나와요. 9절 부터 보면 11절까지 무슨 이야기냐 하면 지금 사무엘이 뭐와 비교하냐 하면 사무엘 상 이전이 사사기이지요. 사사기 때와 지금 사무엘 상 때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사사기의 특징은 왕이 없어요. 왕이 없을 때는 어떠했는가? 왕이 없을 때는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지도자가 없기 때문에 자기 소견대로 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뭐가 빠졌지요?
(삼상 12:9) 그들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은지라 여호와께서 그들을 하솔 군사령관 시스라의 손과 블레셋 사람들의 손과 모압 왕의 손에 넘기셨더니 그들이 저희를 치매 (삼상 12:10) 백성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섬김으로 범죄하였나이다 그러하오나 이제 우리를 원수들의 손에서 건져 내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를 섬기겠나이다 하매 (삼상 12:11) 여호와께서 여룹바알과 베단과 입다와 나 사무엘을 보내사 너희를 너희 사방 원수의 손에서 건져내사 너희에게 안전하게 살게 하셨거늘
눈에 보이는 지도자가 없기 때문에 자기 소견대로 했다고 할 때 하나님은 없이 안중에도 없는 거에요. 교회에선 목사 눈치는 보지만 집에선 주님 눈치는 안 보잖아요. 그렇지요? 눈에 보이지도 않으니, 교회에 가서는 다른 집사나 목사를 굉장히 의식하고 한 교양합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나와 운전 할 때부터 성질 다 나오잖아요. 만약에 조수석에 잔소리하는 자기 부인이 아니고 자기가 존경하는 장로나 목사가 탔다면 찬송가 부르면서 주님과 함께 탔다고 생각하면서 하는데 자기 부인이 탈 때는 그렇게 안하는지 (웃음) 사사기에 왕이 없을 때나 사무엘에 왕을 줬을 때나 그 인간 변해요? 안 변해요? 변하지 않습니다.
챙겨주지 않으면 구원도 못 받아요. 이게 복음 아닙니까? 왜 기뻐요? 자기 잘나서 기쁜 겁니까? 못 나서 기쁜 거에요. 이보다 더 못나도 괜찮다는 게 기쁜 소식 아닙니까? 지금보다 더 망가지고 못나도 아무 상관없습니다. 운명은 내 손에 달린 게 아닙니다. 이게 믿어집니까? 성령 받아야 가능한 거에요. 그리스도의 영이 아니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에요. 주님께선 왜 이 보다 더 망가져도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자신의 영을 보기 때문에, 십자가의 피를 보고 구원하기 때문에 상관하지 않습니다. 지난 강의에서 병원의 꽃바구니 나 과일 바구니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값이 비싸잖아요.
바구니의 손잡이를 들어 올리면 그 안에 담긴 과일도 함께 저절로 들려오듯이 주께서 던져준 사랑을 그대로 가져와요. 그 나머지는 순산순간 달라지고 치매 걸리면 변할 거에요. 그런데 주께서 원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사랑의 만남, 이것이 바로 구원의 손잡이에요. 그러면 우리 속에는 변하지 있는 게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지요. 다 변해요. 그래서 구약의 아가서를 보면 변하는 내 마음을 가지고 사랑한 게 아닙니다. 그건 서로 이용하는 것이고 감정에 불과한 거에요. 진짜 사랑은 변하지 않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과의 만남. 십자가 복음과 복음과의 만남. 그것이 성도의 사랑이라는 겁니다.
성도의 실제는 어떠냐? 나는 못났습니다. 아휴! 나도 못났습니다. 나는 더 못났는데 서로 머리 조아리며 나도 못났습니다. 부부가 다 성령 받으면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지요? 나는 못났습니다.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 덕분에 살고 있습니다. 난 인간 말종입니다. 그럽니까? (웃음) 사랑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 것, 다른 사람에게도 내 성질은 달라지지 않을 정도로 못돼 쳐먹었습니다를 내세우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에요. 성도와 성도가 만남에서도 나는 인간이 안 됩니다를 나타내야 되요. 왜 나는 내 소견대로 하는 못돼먹은 것을 선지자대시고 왕 되시는 주께서 대신 피 흘려서 구원하기 때문에, 이 피를 앞장세워 성령이 오셨습니다.
그것은 내 죄와 피의 만남을 새 언약, 새 언약을 두자로 하면 신약이라 하지요. 신약은 이런 관점에서 읽어줘야 되요. 왜 종말이기 때문에, 유대인들도 해 봤는데 다 실패로 끝났습니다. 이방인들도 말할 것도 없고 그래서 마지막 때엔 실패다! 실패다! 다 실패다! 모든 인간은 다 죽었고 다 실패다. 그런데 죽음 가운데서 살렸고 이게 바로 신약에서의 복음입니다. 사사기에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왕으로서 사람들은 자기 소견대로 하지요. 왕이 없으니까 계급도 없는 거에요.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왕으로 자기백성을 책임지시기 위해서 옆에 있는 이웃 나라로 하여금 공격하게 한 겁니다.
공격케 한 것을 9절에 보면 시스라의 손과 블레셋 사람들의 손과 모압 왕의 손에 넘기셨더니 그들이 저희를 치매에서 시스라 부분은 사사기 4장 이야기이고 블레셋은 사사기 3장과 10장이고 모압은 암몬인데 11장에 깡패 입다 이야기에요. 본문 11절에 “여호와께서 여룹바알과 베단과 입다와 나 사무엘을 보내사 너희를 너희 사방 원수의 손에서 건져내사 너희에게 안전하게 살게 하셨거늘”여기서 여룹바알은 기드온을 말하고 베단은 바락을 말하고 이렇게 본문에서 사사기를 줄 잇기 하듯 연결해서 한 거에요. 사사는 왕이 아닙니다. 임시직이에요. 계약직이죠. 임시직이지만 하나님의 신이 임해요. 임시직으로 왔다는 말은 자기 소견대로 하는 너희들은 죄를 몰랐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왕이 되신다는 말은 우리 힘으론 이스라엘을 꾸려 나갈 수 없고 구원이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에 됩니다를 자랑하기 위해서 주께서 주변에 안 믿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겁니다. 우리가 사는 게 얼마나 괴롭습니까? 괴로운 이유가 진리나 복음에 관심이 없어서 그래요. 심지어 성령 받은 성도도 진리에 관심이 없어요. 그저 자기의 안정감만 취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는 꼭 안 믿는 사람이나 믿는 사람들이 와서 인생을 힘들게 하고 괴롭게 해요. 우울증 직전까지 갑니다. 난 왜 이렇게 살지! 내가 미워!
자기 자신이 실망스럽고 그럴 때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의 관심사가 복음이나 진리 또는 예수님을 증거 할 것이냐 아니면 자신이 훌륭하다는 것을 증거 할 것이냐를 헷갈려하고 잊어 버려서 그래요. 나는 괜찮고 내 가정을 이만큼 잘 지켰고 우리 교회도 훌륭하다 계속 그런데만 신경쓰다 보니까 주님은 가만 두시지 않고 흔들어요. “정신 차려라! 이 인간아!”흔드니까 그 과정에서 왜 나는 복음대로 못 살고 믿음도 없고 예수님이 싫어하는 짓을 또 했을까? 라고 자신을 책망해요. 그러면 “책망하지마! 이 인간아! 그래도 소용없어! 원래 그래!”그렇게 책망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 기쁨으로 오는 겁니다.
책망도 사탄의 시험일 수 있어요. 완벽을 기해야지! 다음에는 실수를 줄이도록 해야지! 그렇게 되면 누구의 증인이 되는 되요? 나는 이 만큼 반성하는 인간 됐어! 또 자기 잘난체하기 때문에 그러니까 사무엘상을 보면서 일부러 주님의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되어가는 모든 일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요근래 우리나라에서 미투 운동이 일어나고 있잖아요. 나도 당했다고 할 때 남자들은 속으로 뜨끔뜨끔 한 거에에요. 전수 조사 (全數調査)하면 난리 나겠지요. 그런데 전수조사 할 것도 없어요. 왜냐하면 주님께서 이미 다 했어요. 하셨기 때문에 십자가의 피 흘림으로 다가오시는 거에요.
※ 전수조사 (全數調査)또는 전체조사(全體調査) 우리가 알고 싶은 대상의 전체를, 통계집단에 속하는 모든 요소에 대해 빠짐없이 관찰을 행하고 특성을 조사하는 것을 말한다. 모집단이 작은 경우 모집단을 구성하고 있는 개체를 전부 조사·분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너는 내 말 듣고 훌륭하게 살아!” 이렇게 하시는 게 아니에요. C. T 촬영하듯 위부터 아래까지 스캔 이미 다 했어요. “너는 피 없이는 지옥이다.” 결정 난 거에요. 그래서 무슨 자랑을 해야 됩니까? 그러면 지금 껏 미투 당한 일도 없고 완벽에 완벽을 기했기 때문에 어떤 누구에게도 나는 하늘을 향해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부는 바람에도 괴로워 하였다고 백날 해도 소용없어요. 예수의 피 밖에 없어요. 이 피를 자랑하라고 미투 운동도 벌어 진거에요. 10절을 봅시다. (삼상 12:10) 백성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섬김으로 범죄하였나이다 하지요. 희안하지요.
범죄란 살인죄, 도둑질, 간음죄등 현대인이 생각하는 것은 인간대 인간의 범죄에요. 나에게 피해를 입힐 때 범죄라고 하는 겁니다. 폭행했다든지 그런데 여기서의 범죄는 그게 아니고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섬겼다고 범죄했다고 되어 있어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우상이란 본인이 선택하는 겁니다. 중요한 거 지금 하고 있습니다. 모든 신은 기독교든 불교든 본인이 선택해요. 본인이 선택하는 것은 무조건 우상이에요. 우리 집안은 대대로 기독교 집안이니까 나는 교회에 간다. 이것도 우상이라니까요. 본인이 선택하는 것은 무조건 우상이에요.
그런데 이스라엘의 특징은 뭐냐 없는데서 나라가 만들어 졌어요. 주님의 선택이 내 존재보다 앞서요. 주께서 선택하셨는데 저는 다른 곳에 한눈팔았습니다. 이미 아버지가 계신데 나는 다른 아버지를 찾았고 다른 신을 찾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회개해야 되요. 쉽게 말해서 내 인생은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인생인데 자꾸 인생을 내가 가꾸고 관리하고 남에게 자랑거리를 많이 남길 멋있는 것으로 하는 그것이 바로 우상 숭배가 되는 겁니다. 그것도 이 세상에서 남보란 듯이 광장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갈채를 보내는 일을 유도하는 식으로 정신 자세가 그곳에 빠진 거에요.
자신만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식들에게도 가르치면서 네가 어딜 가도 1등하라고 하고 어딜 가서도 상 받아야 되고 신문에 날 정도로 훌륭한 인물 되라고 하지요. 열심히 하면 된다고, 열심히 한다고 다 되는 게 아니거든요. 환경이 되야 되고 열심히 한다고 돈 다 버는 것도 아니고 타이밍이 맞아야 되요. 세상에서 빛난다? 그거 우상숭배입니다. 골로새서 3장에 나오지요. 탐심이 우상숭배라고 그러니까 욕심내면 안되요. 욕심낸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을 선택한 것 밖에 안되고 주께서 선택하셨다고 한다면 모든 것에 마음을 낮추고 감사하는 것이 바로 회개이지요.
10분 쉽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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