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강의

구원의 손잡이,시간의 중첩 180327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4. 23. 10:18
2018-03-27 22:09:04조회 : 327         
사무엘상 36강( 구원의 손잡이), 마태복음 98강( 시간의 중첩) 180327이름 : 이근호 (IP:119.18.83.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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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향 (IP:211.♡.44.74)18-04-23 08:25 
구원의 손잡이 (삼상 11장14절 -12장 25절) 
대전- 36강 

 이근호 


2018년 3월 27일 
 본문말씀: 사무엘 상 11:14-12:25 




 (삼상 11:14)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라 우리가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 
(삼상 11:15) 모든 백성이 길갈로 가서 거기서 여호와 앞에서 사울을 왕으로 삼고 길갈에서 여호와 앞에 화목제를 드리고 사울과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거기서 크게 기뻐하니라 
(삼상 12:1) 사무엘이 온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가 내게 한 말을 내가 다 듣고 너희 위에 왕을 세웠더니 
(삼상 12:2) 이제 왕이 너희 앞에 출입하느니라 보라 나는 늙어 머리가 희어졌고 내 아들들도 너희와 함께 있느니라 내가 어려서부터 오늘까지 너희 앞에 출입하였거니와 
(삼상 12:3) 내가 여기 있나니 여호와 앞과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내게 대하여 증언하라 내가 누구의 소를 빼앗았느냐 누구의 나귀를 빼앗았느냐 누구를 속였느냐 누구를 압제하였느냐 내 눈을 흐리게 하는 뇌물을 누구의 손에서 받았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그것을 너희에게 갚으리라 하니 
(삼상 12:4) 그들이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속이지 아니하였고 압제하지 아니하였고 누구의 손에서든지 아무것도 빼앗은 것이 없나이다 하니라 
(삼상 12:5)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 손에서 아무것도 찾아낸 것이 없음을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증언하시며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도 오늘 증언하느니라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가 증언하시나이다 하니라 
(삼상 12:6)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모세와 아론을 세우시며 너희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이는 여호와이시니 
(삼상 12:7) 그런즉 가만히 서 있으라 여호와께서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행하신 모든 공의로운 일에 대하여 내가 여호와 앞에서 너희와 담론하리라 
(삼상 12:8) 야곱이 애굽에 들어간 후 너희 조상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을 보내사 그 두 사람으로 너희 조상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곳에 살게 하셨으나 
(삼상 12:9) 그들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은지라 여호와께서 그들을 하솔 군사령관 시스라의 손과 블레셋 사람들의 손과 모압 왕의 손에 넘기셨더니 그들이 저희를 치매 
(삼상 12:10) 백성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섬김으로 범죄하였나이다 그러하오나 이제 우리를 원수들의 손에서 건져 내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를 섬기겠나이다 하매 
(삼상 12:11) 여호와께서 여룹바알과 베단과 입다와 나 사무엘을 보내사 너희를 너희 사방 원수의 손에서 건져내사 너희에게 안전하게 살게 하셨거늘 


 사무엘 상 11장 14절 부터입니다. 왕이 없던 시절의 이스라엘과 왕이 있는 이스라엘이 어떻게 확연히 달라지는지 그 내용이 이제부터 전개됩니다. 왕이 없을 때의 진리라는 것은 누구와 직접 마주하느냐 하면 자신과 마주해요. 오늘 날 현대에도 왕이 없잖아요. 왕이 없으니까 진리이다 아니다의 평가를 누가 내립니까? 그 자신이 내리지요. 자신들이 내리다 보니까 근대나 현대의 민주주의에 와서 사람들의 찾는 안정 중 첫째는 정신적 안정(사상적 안정, 종교적 안정)이었어요. 예를 들면 옛날 우리나라의 조선시대에는 계급 사회여서 양반과 상놈이 구분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사회적으로 안정을 가져다 줬어요. 우리는 단군의 자손이다 이런 것. 


정신적 안정 같은 경우는 인도네시아에서는 국가가 이슬람 국가이지요. 터키나 파키스탄도 이슬람 국가이지만 서울이나 대구 같은 경우를 보면 주로 볼 수 있는 것 중에 머리에 두건(히잡, 차도로) 쓴 여자들을 볼 수 있잖아요. 제가 볼 때 저 사람들이 자기들 성전에 들어갈 때 하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평상시 다닐 때도 머리에 두르고 왜 그렇게 할 까? 생각해 볼 때 그것도 정신적 안정입니다. 예전엔 사상적 안정, 지금은 종교적 안정. 그런데 현대에는 정신적 안정이 없어요. 왜냐하면 지금은 경제적 안정이 우선이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이웃끼리 친하게 지내던 시절이 


 우리나라 같은 경우 1960년 이전의 시절에는 가족끼리 마을 공동체이던 형태가 새마을 운동의 잘~ 살아 보자가 되면서 촌구석에 있으면 안 되서 젊은 사람들이 다 어디로 갔습니까? 전부 서울로 다 간 거에요. 서울로 왜 가느냐? 경제적 안정 때문에 그렇습니다. 서울에 가면 서울 역에 마중 나온 사람들이 있는데 가발 공장으로 갈 차하고 버스 안내 할 사람 구하는 차, 구두 공장과 섬유 공장에서 사람들을 모집하고 있어요. 그렇게 돈 벌어서 촌에 있는 부모님이나 동생들에게 보내 학비 대고 공부시켰습니다. 우리나라에 근대 똑순이들. 그중에 유명했던 영자의 전성시대 영화 있잖아요. 갑작스럽게 산업화가 활성하면서. 


경제적 안정이 우선이었습니다. 힘들었지요. 힘드니까 어떻게 합니까? 힘드니까 도움 받을 데가 교회에 가야지요. 갑자기 서울에 교회가 부흥되기 시작 했습니다. 돈 벌게 해달라고, 하나님 아십니까? 하면서. 지금 왕이 있다는 것, 왕이 없을 때 사람들은 정신적 안정이나 경제적 안정을 통해서 무엇을 도모 하느냐 하면 자기 정당성을 도모해요. 돈이 있으니까 나는 정당하다, 나는 안정할 만큼 돈이 여유가 있으니까 나는 참다운 인간이다 또는 참다운 사람이다. 그런데 드디어 이스라엘에 왕이 등장하게 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게 되냐 하면 자기 정당성을 포기해야 되요. 인간 내부에 뭐가 들어 왔냐하면 왕이 왜 꼭 있어야 했느냐? 라는 


 사건의 취지와 전모가 각자 개인의 마음 속 까지 침투 됩니다. 이스라엘과 왕이 있던 것과 왕이 없는 것의 큰 차이가 되요. 그러면 이스라엘에게 왕을 주었다라는 것은 이스라엘 입장에선 기분 좋은 일일까요? 아니면 서글픈 일일까요? 오늘 본문에선 사람들이 기뻐했지만 사무엘은 달리봐요. 너희는 보이지 않는 왕인 하나님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방 나라와 같이 눈에 보이는 왕을 달라고 했다는 것은 그 만큼 너희의 범죄가 중차대하다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을 재간이 없는 거에요. 보이지 않으니까 진짜 믿는지 안 믿는지 분간이 안되는 거에요. 


차라리 눈에 보이는 왕에게 충성 다하고 왕이 우리나라를 이끌어 가는 그런 멋들어진 영웅적인 성과가 더 믿음직하다는 거에요. 그래서 지난 시간에 했듯이 하나님께 왕을 달라고 하는 것은“하나님! 당신은 제대로 왕 노릇 못 한거야!”라고 외침과 같은 거에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해준 것이 변변치 않으니까 우리보다 잘 사는 이방 민족처럼 우리도 그런 정치적 구조를 가지면 그들처럼 잘 살 수 있지 않겠는가 해서 왕을 주옵소서! 한 거에요. 그것을 하나님은 아시고 사무엘도 안 거에요. 너희가 왕을 달라는 것은 (하나님이) 왕 됨을 거부하는 사고방식이고 거부하는 시위이다 이렇게 봐서“그래! 너희 소원대로 왕 줄께!”라고 된 거에요. 


그렇다면 왕이 있다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바람직하지 못 하지요. 잘못된 것이지요. 잘못된 사건의 취지가 그냥 왕이 하나 등장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것과 연결된 그들의 잘못된 신앙심이 그들 내부에 심어지게 됩니다. 장착되는 거지요. 왕을 달라했던 그 실수와 오류가 그들 내부에 딱 들어 있지요.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잖아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였는데 성령이 오셔서 용서해 줬다. 일을 이렇게 쉽게 생각하면 안되요. 십자가에 죽였다는 말은 앞으로 성령을 보냈다는 말은 너희가 하는 짓이 하나님을 죽이는 짓 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을 성령을 통해 책망하시면서 그들 속에 심어 줍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은 사람은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고백을 하게 되지요. 신난다! 하나님이 나를 죽여도 아무 탈이 없네! 스스로 좋아한 문제가 아니고 우리 내부에 심화시켜 나가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 하면 사람들이 왕을 달라는 것은 진리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고 나의 안정을 위해 자기 위주로 진리이냐? 안정이냐?의 싸움에서 자기 행복을 선택한 거지요. 그러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을 죽였다는 말은 마찬가지로 진리에는 관심이 없고 그냥 조용하게 사는 것이 제일 좋고 편안한 게 제일 좋고 남이 나에게 터치 안하고 나도 남 터치 안하고 평안하게 사는 게 최고이다라는 안일한 마음이 예수님을 죽이게 만들었어요. 


심지어 열 두 제자도 마찬가지고요. 제자들도 예수님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본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본래의 자리란 의지가 뭉쳐진 곳이 예수님은 쓸모없다! 쫓아 버려라! 죽여 버려라! 이것이 우리 본래의 마음이에요. 본래의 마음으로 갈 건데 예수님은 왜 오셨냐? 예수님이 안 오시면 본래의 마음을 모르게 되요. 왔다가 가셔야 본래 자기의 모습이 유감없이 다 들통나요. 나는 진리, 진리하며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했지만 그것 다 핑계에 불과하고 진짜 근원적인 것은 나 건들지 마라! 내 버려 둬! 이런 식으로 자기 자체가 신처럼 행세하는 거에요. 지난 설교에도 했지만 인간이 제일 싫어하는 것은 자기를 무시하는 거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인간을 개 무시하시잖아요. 인간을 무시하니까 죽여 버리지요. 죽여버리고 교회는 자기를 인정해주는 가짜 예수를 우상으로 만들어 내고 조작해서 섬겨버립니다. 우리를 무시하지 않는 심판이 없는 하나님.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처럼 뭐가를 주려고 환장한 하나님을 찾는, 못 줘서 환장하신 하나님, 뭘해도 허허허 웃어넘기는 금복주 할아버지 같은 하나님, 그런 하나님을 전부 신봉하며 일종의 부처지요. 부처의 변형체입니다. 오늘 날의 예수이지요. 특히 더 심한 곳이 천주교입니다. 거기에 마리아나 예수도 제 2, 제3의 석가모니라고 보면 되지요. 우리의 생각들과 일치되는 겁니다. 

절대로 우리의 속내를 끄집어내고 터치하지 않아요. 그러니 설교에 은혜 받았다 최고의 설교이다하면 그것이 어떤 설교가 되겠어요? 긍정적 마인드를 제공하는 것, 내일은 뜬다! 쨍하고 해 뜰 날 송대관 노래에서처럼 그러한 교회가 부흥이 됩니다. 교회가 부흥 된다는 것은 이 세상이 지옥이라는 것을 교회가 커짐으로 증명해 내고 있는 거에요. 복음 전해서 커진 것은 아니잖아요? 그렇다면 교회가 지옥의 한 파트를 맡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 지옥이라는 것을 감추는 역할을 해주고 있지요. 교회에 다니면 지옥 가는 것이 면제될 것 같은 생각들을 제공하지요. 사실은 그 사태를 악화시키는 겁니다. 

차라리 교회에 안 다니면 양심의 가책이나 있지! 교회 다녀서 전부 천국 간다고 우기고 있으니까! 양심의 가책을 느낄 기회조차 놓치는 거에요. 거기에 세례 받았지! 성만찬도 했지! 구색은 다 갖춰 버렸어요. 구원 받을 수 있는 구색, 다른 말로 행함의 행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다 챙겨 놓으라고 노하우를 제공하는 단체, 그래서 주일 낮에 교회를 연극 단체라고 했지요. 대표는 이윤택이고 (웃음) 교회는 사기 단체에요. 사기 치는 곳이에요. 사람들에겐 경제적 안정이 최고에요. 하나님이고 뭐고 뒷전이고 경제적 안정을 위해선 하나님도 섬기고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 예수도 믿고 그런 겁니다. 경제적 안정을 포기 못해요. 


그러면 오늘 날 성도는 경제적 안정을 포기한 사람입니↗까? (톤 올림) 아니지요~! 단 사태를 파악한 사람이에요. 나로서는 어떤 식으로는 내 힘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 능력으론 불가능 는 자기 주제 파악을 하고 있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왕이라고 하는 거에요. 왕에게 일어난 사건이 나의 죄를 노출시키는 사건으로 이해할 때 그것이 십자가의 영이 우리 안에 들어 온 증거입니다. 그래서 왕이 없으면 우리가 얼마나 허접스러운가를 알 수 없어요. 날마다 주님을 모시기 바랍니다. 그렇다고 인간은 절대로 안되요. 인간은 안 되지만 주께선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리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거니까요. 


우리가 행운이라고 여기는 것들이 절대로 구원에 기여하지 못해요. 그렇다면 인간들은 인간 안 된다. 공식처럼 인간은 인간 안 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왕을 보내 준 것은 (왕+백성=망해라) 왕과 그 당시 백성들은 같이 망해라! 이런 취지로 왕을 준 겁니다. 왕을 주는데 왕 하나가 잘못하면 같이 너희가 망할 때는 너희가 자기 잘못은 모르고 왕을 잘못 뽑았다든지 왕이 처신을 잘못 했다든지 이런 되지 않는 핑계는 대지 마라! 그 왕을 달라고 누가 했냐는 말이죠. 자신들(백성)이 했잖아요. 하나님은 왕과 백성을 결합 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같이 망하지요. 


그러면 이렇게 망했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 안에는 물론 심판도 있고 저주도 있지만 축복도 있고 구원도 있잖아요. 그러면 이렇게 같이 망한다면 저주와 심판 밖에 없는데 언약을 통해서 생기는 구원과 축복은 어떻게 되느냐입니다. 언약의 최종 결과는 천국과 지옥이에요. 지옥이 있어요.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천국에 가는 사람이 있어야 될 게 아닙니까? 그렇지요. 결과대로 한다면 지옥 가겠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은 오늘 죽어도 천국 갈 수 있는 겁니다. 이것을 어떻게 끄집어 낼 수 있느냐 하면 오늘 본문의 사무엘 상 11장에서, 여기서 끄집어내는 사람이 바로 선지자입니다. 

왕과 선지자는 대척 관계에 있어요. 왕은 백성과 함께 망해도 망하는 현장에서 이탈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성 유지하는 사람을 선지자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선지자가 왕을 뽑지요. 사무엘이 사울을 뽑은 거에요. 사울은 어디에 종속 되었는가? 사울은 비록 왕일지라도 한시적이에요. 선지자 계열의 지시를 따라야 합니다. 계속 12장을 봅시다. 12장 전체 내용은 나 선지자 사무엘은 너희들 앞에서 흠 잡힐 일 안 했지? 그지? 이렇게 이야기가 시작 되요. 이야기가 시작 되면서 너희들 소원대로 왕을 줬다. 그런데 왕을 구한 것은 너희가 너희 자신도 모르는 하나님을 싫어하는 마음의 연장선에서 왕을 구했다. 


 (삼상 12:1) 사무엘이 온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가 내게 한 말을 내가 다 듣고 너희 위에 왕을 세웠더니 
(삼상 12:2) 이제 왕이 너희 앞에 출입하느니라 보라 나는 늙어 머리가 희어졌고 내 아들들도 너희와 함께 있느니라 내가 어려서부터 오늘까지 너희 앞에 출입하였거니와 
(삼상 12:3) 내가 여기 있나니 여호와 앞과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내게 대하여 증언하라 내가 누구의 소를 빼앗았느냐 누구의 나귀를 빼앗았느냐 누구를 속였느냐 누구를 압제하였느냐 내 눈을 흐리게 하는 뇌물을 누구의 손에서 받았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그것을 너희에게 갚으리라 하니 
(삼상 12:4) 그들이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속이지 아니하였고 압제하지 아니하였고 누구의 손에서든지 아무것도 빼앗은 것이 없나이다 하니라 

 하지만 너희 소원대로 왕을 주었으니 이제 왕이 있다고 해서 너희가 제대로 되었다고 생각지 마라 너희가 왕을 구할 때 썩어 빠진 사고방식이 문제 였다고 인정한다면 하나님께서 왕을 줘도 왕을 준 상태에서도 잘 이끌어 가실 것이다라는 내용이 죽 나와요. 그러면서도 12장 마지막을 보면 24-25절에 ~만일 너희가 여전히 악을 행하면 너희와 너희 왕이 다 멸망하리라, 왕과 백성이 결속되어 있어요. 그러면 선지자는 뭘 하냐? 23절을 보면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지 않겠다. 이 말은 선지자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유효하게 선지자와 연락을 취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삼상 12:23)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 
(삼상 12:24) 너희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 일을 생각하여 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 
(삼상 12:25) 만일 너희가 여전히 악을 행하면 너희와 너희 왕이 다 멸망하리라 

 기도에 대해서 이렇게 자신 있게 이야기 한다는 것은 사무엘과 하나님이 연락을 취할 만한 근거가 있다는 겁니다. 만약에 사무엘 상 12장 23절의 본문을 가지고 어떤 교회 주일 예배에 목사가 강단에 섰다. 또는 외부 강사가 이 본문을 가지고 강단에 섰다. 그 설교 들어 보나 마나에요. 다시 한번 본문을 볼까요? 23절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를 가지고 오래된 교인들은 이미 눈치로 다 알아요. 1.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2. 그래서 여러분 교회에 훌륭하신 목사님을 보내 줬습니다. 


왜 그 목사가 훌륭하냐 하면 여러분이 개판으로 살아도 여러분의 당회장 목사님은 기도하기를 쉬지 않기 때문입니다. 3. 여러분의 가족이 복 받고 여러분이 직장에서 승진 잘 되고 자녀가 공부 잘하고 건강하려면 여러분이 섬기는 성전의 목사님은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하지 않으시기에 목사님을 위해서 여러분이 간절히 기도하시면 이 세상에서 복이 다 여러분에게 갑니다. 자! 헌금 시간 (웃음) 참~ 얼마나 속아들 왔습니까? 강의 초반에 뭐라 했어요. 인간들이 원하는 것은 경제적 안정성이라 했어요. 경제적 안정성은 마귀가 도사거든요. 설교가 얼마나 쉬운지 은혜가 팍팍 될 수밖에 없어요. 

경제적 안정성을 취한 사고방식이 굉장히 긍정정적 사고이지요. 아 나도 저렇게 당회장 목사님을 위해 기도 하면 30배, 60배 수입이 내게 온다, 내 행함으로 기도하는 분을 위해 기도 해 주면 그 이득은 내가 챙길 수 있다. 이렇게 되는 거에요. 그러면 우리 목사님, 강사님은 성경대로 한다고 말해요. 모든 사기꾼들이 다 그런 식으로 하니까, 대조 할 수 있는 설교를 들어 본 적이 없으니까, 이 본문을 딱 펴면 그런 설교가 튀어 나오는 거에요. 기도가 (하나님과)연락을 통하는 근거가 뭐냐 하면 선지자를 빼놓고 선지자를 핍박해야 되는 죄인들의 발생입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이 세상에 미련이 없을 때 기도가 되요. 자식을 위해서, 남편을 위해서 기도 한다는 말은 이제는 너무 실망에 실망이 넘쳐 두 번 다시 기대 안 할 때 다시 말해 어렵게 표현 하자면 내가 어떤 행함을 남편이나 자식에게 할 때 전에는 잔소리 하면 먹혀들었는데 이제는 내가 잔소리 한다는 행함이 더 이상 없이 좌절해서 끊어 졌을 때, 상대하기도 싫을 때 주여! 어찌 합니까? 어떻게 좀 해 주세요. 기도는 목사를 보고 하는 것이 아니고 방향을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주님을 보고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기 때문에, 제가 지난 번에 이야기 했지요. 예수 이름이라는 것은 예수 이름으로 할 때는 모르고, 


예수 이름으로 해 놓고 주어진 사태나 상황이 내 기도 내용과 상관없이 주의 이름으로 한 내용이 주어 졌을 때 소급해서 우리는 내가 기도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위해 기도 한 결과를 차후적으로 떠 안게 되는 것이라는 상황의 사실을 믿음으로 인정해야 되요. 쉽게 말해서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이 뭐냐하면 왕 대신 예수님의 희생 덕분에 살아요. 충남 도지사 이름이 뭐였지요? 안희정. 안희정씨가 미투로 당한 것은 예수님의 희생 덕분이에요. 십자가 은혜 덕분에 살아갑니다. 사람들이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에요. 세상의 모든 일은 예수님의 십자가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모든 사태가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니 힘으로 사는 게 아니다는 말이죠. 


그래서 성도는 경제적 안정보다도 경제적 안정이나 정치적 안정을 취하든 주께선 보지도 않고 성도로 하여금 자신이 얼마나 정당하고 옳은가가 아니라 예수님이 정당하고 예수님의 희생이 옳았음을 증언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몰아세웁니다. 그러면 성도는 세상 사람과 똑같아서 자기 정당성을 옹호하겠지요. 주님의 복음을 열심히 공부 하는데도 왜 일이 안 풀립니까? 이런 식으로 나오다가도 성령이 와서 책망을 받고 난 뒤부터는 나의 혼란스러움, 실수투성이, 특히 연세 많은 분들은 돌아서면 실수하고 항상 실수에 실수 연발이잖아요. 이렇게 자기 자신이 실수와 오류가 많으니까 본인이 본인한테 짜증이 나요. 본인이 싫어져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왜 자신이 싫어지도록 주께서 몰아세우시는가? 순전히 내 생각만하고 꾸준히 하면 나의 정당성의 증인이 되요. 나는 내 잘남의 정당성을 포기 못하고 쥐고 있었던 겁니다. “하는 일마다 왜 안 됩니까? 이번 일도 또 실패로 끝나고 큰 건이 들어 와서 잘되나 싶었더니 끝판에 휙 뒤집어져서 안 되고 왜 이러십니까? 주님이 ”네 정당성을 바탕으로 해서 주님의 증인되는 게 아니고 주님의 증인은 너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너 자신의 고질적인 네 힘으론 못 고치는 죄 때문에 주께서 십자가 지시고 그 십자가를 증거 하라고 네 뜻대로 안 되게 했다. 왜? 불만이냐? 그래서 성도는 오늘날 선지자입니다. 

평생 내가 했던 모든 것이 실망으로 다가올 때, 사람이 실망할 때가 언제냐 하면 옛날엔 내가 잘 나갔는데를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옛날엔 내가 그 정도 되는 인물이었는데 요즘은 자꾸 잊어버리고 치매가 왔는지 돌아서면 실수하고 가만히 생각해보면 누구한테 잘못한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고 했다하면 잊어버리고 지갑 잊어버리고 헨드폰 잊어버리고 뭘 하려고 하다가도 돌아서면 다 잊어버리고 이런 것은 치매라 그런 것이 아니고 주님을 좀 더 많이 증거 하라고 주께서 유발시킨 증거입니다. 이제 더 이상 너를 의존 하지마! 네가 더 많이 잊어버리고 실수해도 나는 너를 천국 보낼거야! 

그런데 너는 괜찮게 살았기 때문에 천국 가는 데 너의 행함이 보탬이 된다는 자기 정당성, 이것 갔다 버려라는 말이지요. 던져버리라는 말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누구의 증인이 되라? 주님의 증인, 그래서 성령받고 난 뒤의 자아라는 것은 폭이 없어요. 오후 설교에선가도 했는데 폭이 없다는 것은 확장시킬 여지가 없다는 말입니다. 자아라는 것은 폭이 커져 버리면 미련이 남아서 그것을 밑천으로 자꾸 그 폭을 넓히려고 해요. 나 잘남, 내일은 더 잘남, 이렇게 잘남을 키우려는 인간의 심리가 


 성령이 오게 되면 그 폭이 압축이 되요. 압축이 돼서 내 것은 납작하게 되요. 언젠가도 예를 들었는데 가정주부가 이불을 정리 할 때 부피가 크잖아요. 압축 비닐을 사서 그 안에 넣고 청소기를 키면 쓸데없는 공간이 빠지지요. 그게 자아에요. 납작하게 되어 버리는 불필요한 공간 빼고 차곡차곡 쌓아 놓으면 이불도 장롱에 많이 들어간다는 말이죠. 쓸데없는 것을 쫙 빼어 버리는 거에요. 주께서 성령을 청소기처럼 집어넣어서 쫙쫙 다 뽑아내시는 거에요. 내가 너를 다루고 있고 인도하고 있는 것이지 니가 알아서 부푼 솜사탕처럼 나름대로의 현실 상, 미래상, 미래의 꿈을 자꾸 부풀리지 마라는 것이죠. 그러면 폭이 너무 넓어져요. 


폭이 넓으면 바람이 많이 불어요. 바람 잘 날 없어요. 이거 해결되면 저거 터지고 저거 해결되면 이거 터지고 내 안에 내가 너무도 많아! 생각이 너무 많아요. 솜사탕 놓고 한번 밟아 보세요. 요만큼 밖에 안 되지요. 그게 안되니까 사람들은 누굴 찾냐 하면 아내들은 남편을 찾아요. 왜냐하면 자기의 고민을, 자기가 못하는 것을 남편에게 미루고 시키면 다 해줄 때 남편을 왕으로 봐요. 왕 같은 남편, 왜 자기의 모든 할 일을 다 해줬으니까 남편을 의지한다, 사랑한다 이건 이용해 먹겠다는 거지요. 실제로는 자기 안정화 시도입니다. 남편이 돈 다 벌어다 줘, 못나도 이뻐해줘, 최고의 남편이다. 

이게 바로 왕을 뽑는 백성들의 심보이다로 보시면 되겠지요. 그렇게 든든한 왕이 있으면 자기 잘못이나 죄는 들어 날까요? 안 들어 날 까요? 안 들어나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를 찾는 겁니다. 주님은 나의 왕이시라고 하면 서 드럼치고 기타 쳐 가면서 이건 무슨 심보에요? 백성들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이 뭐냐하면 선지자입니다. 선지자가 어떻게 하는지 12장을 봅시다. 사무엘이 백성들 앞에 섭니다. 2절에 왕이 너희 앞에 출입하느니라 보라 나는 늙어 머리가 희어졌고 내 아들들도 너희와 함께 있느니라 내가 어려서부터 오늘까지 너희 앞에 출입하였거니와 


3절 “내가 여기 있나니 여호와 앞과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내게 대하여 증언하라 내가 누구의 소를 빼앗았느냐 누구의 나귀를 빼앗았느냐 누구를 속였느냐”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그 이유가 9-10절에 나와요. 9절 부터 보면 11절까지 무슨 이야기냐 하면 지금 사무엘이 뭐와 비교하냐 하면 사무엘 상 이전이 사사기이지요. 사사기 때와 지금 사무엘 상 때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사사기의 특징은 왕이 없어요. 왕이 없을 때는 어떠했는가? 왕이 없을 때는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지도자가 없기 때문에 자기 소견대로 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뭐가 빠졌지요? 

 (삼상 12:9) 그들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은지라 여호와께서 그들을 하솔 군사령관 시스라의 손과 블레셋 사람들의 손과 모압 왕의 손에 넘기셨더니 그들이 저희를 치매 
(삼상 12:10) 백성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섬김으로 범죄하였나이다 그러하오나 이제 우리를 원수들의 손에서 건져 내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를 섬기겠나이다 하매 
(삼상 12:11) 여호와께서 여룹바알과 베단과 입다와 나 사무엘을 보내사 너희를 너희 사방 원수의 손에서 건져내사 너희에게 안전하게 살게 하셨거늘 

 눈에 보이는 지도자가 없기 때문에 자기 소견대로 했다고 할 때 하나님은 없이 안중에도 없는 거에요. 교회에선 목사 눈치는 보지만 집에선 주님 눈치는 안 보잖아요. 그렇지요? 눈에 보이지도 않으니, 교회에 가서는 다른 집사나 목사를 굉장히 의식하고 한 교양합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나와 운전 할 때부터 성질 다 나오잖아요. 만약에 조수석에 잔소리하는 자기 부인이 아니고 자기가 존경하는 장로나 목사가 탔다면 찬송가 부르면서 주님과 함께 탔다고 생각하면서 하는데 자기 부인이 탈 때는 그렇게 안하는지 (웃음) 사사기에 왕이 없을 때나 사무엘에 왕을 줬을 때나 그 인간 변해요? 안 변해요? 변하지 않습니다. 

챙겨주지 않으면 구원도 못 받아요. 이게 복음 아닙니까? 왜 기뻐요? 자기 잘나서 기쁜 겁니까? 못 나서 기쁜 거에요. 이보다 더 못나도 괜찮다는 게 기쁜 소식 아닙니까? 지금보다 더 망가지고 못나도 아무 상관없습니다. 운명은 내 손에 달린 게 아닙니다. 이게 믿어집니까? 성령 받아야 가능한 거에요. 그리스도의 영이 아니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에요. 주님께선 왜 이 보다 더 망가져도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자신의 영을 보기 때문에, 십자가의 피를 보고 구원하기 때문에 상관하지 않습니다. 지난 강의에서 병원의 꽃바구니 나 과일 바구니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값이 비싸잖아요. 

바구니의 손잡이를 들어 올리면 그 안에 담긴 과일도 함께 저절로 들려오듯이 주께서 던져준 사랑을 그대로 가져와요. 그 나머지는 순산순간 달라지고 치매 걸리면 변할 거에요. 그런데 주께서 원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사랑의 만남, 이것이 바로 구원의 손잡이에요. 그러면 우리 속에는 변하지 있는 게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지요. 다 변해요. 그래서 구약의 아가서를 보면 변하는 내 마음을 가지고 사랑한 게 아닙니다. 그건 서로 이용하는 것이고 감정에 불과한 거에요. 진짜 사랑은 변하지 않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과의 만남. 십자가 복음과 복음과의 만남. 그것이 성도의 사랑이라는 겁니다. 


성도의 실제는 어떠냐? 나는 못났습니다. 아휴! 나도 못났습니다. 나는 더 못났는데 서로 머리 조아리며 나도 못났습니다. 부부가 다 성령 받으면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지요? 나는 못났습니다.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 덕분에 살고 있습니다. 난 인간 말종입니다. 그럽니까? (웃음) 사랑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 것, 다른 사람에게도 내 성질은 달라지지 않을 정도로 못돼 쳐먹었습니다를 내세우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에요. 성도와 성도가 만남에서도 나는 인간이 안 됩니다를 나타내야 되요. 왜 나는 내 소견대로 하는 못돼먹은 것을 선지자대시고 왕 되시는 주께서 대신 피 흘려서 구원하기 때문에, 이 피를 앞장세워 성령이 오셨습니다. 


그것은 내 죄와 피의 만남을 새 언약, 새 언약을 두자로 하면 신약이라 하지요. 신약은 이런 관점에서 읽어줘야 되요. 왜 종말이기 때문에, 유대인들도 해 봤는데 다 실패로 끝났습니다. 이방인들도 말할 것도 없고 그래서 마지막 때엔 실패다! 실패다! 다 실패다! 모든 인간은 다 죽었고 다 실패다. 그런데 죽음 가운데서 살렸고 이게 바로 신약에서의 복음입니다. 사사기에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왕으로서 사람들은 자기 소견대로 하지요. 왕이 없으니까 계급도 없는 거에요.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왕으로 자기백성을 책임지시기 위해서 옆에 있는 이웃 나라로 하여금 공격하게 한 겁니다. 

공격케 한 것을 9절에 보면 시스라의 손과 블레셋 사람들의 손과 모압 왕의 손에 넘기셨더니 그들이 저희를 치매에서 시스라 부분은 사사기 4장 이야기이고 블레셋은 사사기 3장과 10장이고 모압은 암몬인데 11장에 깡패 입다 이야기에요. 본문 11절에 “여호와께서 여룹바알과 베단과 입다와 나 사무엘을 보내사 너희를 너희 사방 원수의 손에서 건져내사 너희에게 안전하게 살게 하셨거늘”여기서 여룹바알은 기드온을 말하고 베단은 바락을 말하고 이렇게 본문에서 사사기를 줄 잇기 하듯 연결해서 한 거에요. 사사는 왕이 아닙니다. 임시직이에요. 계약직이죠. 임시직이지만 하나님의 신이 임해요. 임시직으로 왔다는 말은 자기 소견대로 하는 너희들은 죄를 몰랐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왕이 되신다는 말은 우리 힘으론 이스라엘을 꾸려 나갈 수 없고 구원이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에 됩니다를 자랑하기 위해서 주께서 주변에 안 믿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겁니다. 우리가 사는 게 얼마나 괴롭습니까? 괴로운 이유가 진리나 복음에 관심이 없어서 그래요. 심지어 성령 받은 성도도 진리에 관심이 없어요. 그저 자기의 안정감만 취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는 꼭 안 믿는 사람이나 믿는 사람들이 와서 인생을 힘들게 하고 괴롭게 해요. 우울증 직전까지 갑니다. 난 왜 이렇게 살지! 내가 미워! 


자기 자신이 실망스럽고 그럴 때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의 관심사가 복음이나 진리 또는 예수님을 증거 할 것이냐 아니면 자신이 훌륭하다는 것을 증거 할 것이냐를 헷갈려하고 잊어 버려서 그래요. 나는 괜찮고 내 가정을 이만큼 잘 지켰고 우리 교회도 훌륭하다 계속 그런데만 신경쓰다 보니까 주님은 가만 두시지 않고 흔들어요. “정신 차려라! 이 인간아!”흔드니까 그 과정에서 왜 나는 복음대로 못 살고 믿음도 없고 예수님이 싫어하는 짓을 또 했을까? 라고 자신을 책망해요. 그러면 “책망하지마! 이 인간아! 그래도 소용없어! 원래 그래!”그렇게 책망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 기쁨으로 오는 겁니다. 

책망도 사탄의 시험일 수 있어요. 완벽을 기해야지! 다음에는 실수를 줄이도록 해야지! 그렇게 되면 누구의 증인이 되는 되요? 나는 이 만큼 반성하는 인간 됐어! 또 자기 잘난체하기 때문에 그러니까 사무엘상을 보면서 일부러 주님의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되어가는 모든 일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요근래 우리나라에서 미투 운동이 일어나고 있잖아요. 나도 당했다고 할 때 남자들은 속으로 뜨끔뜨끔 한 거에에요. 전수 조사 (全數調査)하면 난리 나겠지요. 그런데 전수조사 할 것도 없어요. 왜냐하면 주님께서 이미 다 했어요. 하셨기 때문에 십자가의 피 흘림으로 다가오시는 거에요. 

※ 전수조사 (全數調査)또는 전체조사(全體調査) 
우리가 알고 싶은 대상의 전체를, 통계집단에 속하는 모든 요소에 대해 빠짐없이 관찰을 행하고 특성을 조사하는 것을 말한다. 모집단이 작은 경우 모집단을 구성하고 있는 개체를 전부 조사·분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너는 내 말 듣고 훌륭하게 살아!” 이렇게 하시는 게 아니에요. C. T 촬영하듯 위부터 아래까지 스캔 이미 다 했어요. “너는 피 없이는 지옥이다.” 결정 난 거에요. 그래서 무슨 자랑을 해야 됩니까? 그러면 지금 껏 미투 당한 일도 없고 완벽에 완벽을 기했기 때문에 어떤 누구에게도 나는 하늘을 향해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부는 바람에도 괴로워 하였다고 백날 해도 소용없어요. 예수의 피 밖에 없어요. 이 피를 자랑하라고 미투 운동도 벌어 진거에요. 10절을 봅시다. (삼상 12:10) 백성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섬김으로 범죄하였나이다 하지요. 희안하지요. 

범죄란 살인죄, 도둑질, 간음죄등 현대인이 생각하는 것은 인간대 인간의 범죄에요. 나에게 피해를 입힐 때 범죄라고 하는 겁니다. 폭행했다든지 그런데 여기서의 범죄는 그게 아니고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섬겼다고 범죄했다고 되어 있어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우상이란 본인이 선택하는 겁니다. 중요한 거 지금 하고 있습니다. 모든 신은 기독교든 불교든 본인이 선택해요. 본인이 선택하는 것은 무조건 우상이에요. 우리 집안은 대대로 기독교 집안이니까 나는 교회에 간다. 이것도 우상이라니까요. 본인이 선택하는 것은 무조건 우상이에요. 


그런데 이스라엘의 특징은 뭐냐 없는데서 나라가 만들어 졌어요. 주님의 선택이 내 존재보다 앞서요. 주께서 선택하셨는데 저는 다른 곳에 한눈팔았습니다. 이미 아버지가 계신데 나는 다른 아버지를 찾았고 다른 신을 찾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회개해야 되요. 쉽게 말해서 내 인생은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인생인데 자꾸 인생을 내가 가꾸고 관리하고 남에게 자랑거리를 많이 남길 멋있는 것으로 하는 그것이 바로 우상 숭배가 되는 겁니다. 그것도 이 세상에서 남보란 듯이 광장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갈채를 보내는 일을 유도하는 식으로 정신 자세가 그곳에 빠진 거에요. 


자신만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식들에게도 가르치면서 네가 어딜 가도 1등하라고 하고 어딜 가서도 상 받아야 되고 신문에 날 정도로 훌륭한 인물 되라고 하지요. 열심히 하면 된다고, 열심히 한다고 다 되는 게 아니거든요. 환경이 되야 되고 열심히 한다고 돈 다 버는 것도 아니고 타이밍이 맞아야 되요. 세상에서 빛난다? 그거 우상숭배입니다. 골로새서 3장에 나오지요. 탐심이 우상숭배라고 그러니까 욕심내면 안되요. 욕심낸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을 선택한 것 밖에 안되고 주께서 선택하셨다고 한다면 모든 것에 마음을 낮추고 감사하는 것이 바로 회개이지요. 

10분 쉽시다.

 주향 (IP:211.♡.44.74)18-04-23 08:28 
시간의 중첩 (마 24장 32절-39절) 
대전- 98강 

 이근호 


2018년 3월 27일 
 본문말씀: 마태복음 24:32-39 



 (마 24:32)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마 24:33)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마 24:3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 
(마 24:35)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마 24:36)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마 24:37)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마 24:38)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마 24:39)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마태복음 24장 32절 부터입니다. 요번에 제가 이스라엘을 갔다 왔잖아요. 거기에 실린 동영상에 보면 성전 건설 현장에 관한 만화 영화를 올려놓았어요. 네모로 다듬은 석재를 A지점에서 건설 현장인 B지점까지 어떻게 옮겼나 하면 원형의 나무틀을 만들고 가운데를 네모로 파서 안에 석재를 집어넣고 고정한 뒤 원형의 틀을 옮겨 가지요. 이것을 보고 제가 느낀 점은 석재가 우리라면 우리는 스스로 천국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원형의 틀이 우리를 감싸 버리면 이것이 예수 안 또한 십자가 안, 성령 안 같이 주님은 아버지를 아시잖아요. 그래서 강도와 세리를 자기 품 안에 품어버리십니다. 

강도와 세리와 창기를 담아서 주님이 불러 천국가면 저절로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저절로 가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성도와 세상 사람의 차이점은 나를 주목하는 것은 세상 사람이고 끝까지 나를 주목해요. 나 외에 다른 대상을 주목할 수 없어요. 처음도 중간도 마지막도 나에요. 그러나 성도는 날 출발해서 주님이 하신 일어 꽂혀 버립니다. 주님이 하신 일에 꽂혀 버리면 주님 안에 놓여 있음을 다시 확인하게 되요. 군대에 가면 나는 악랄한 자가 됩니다. 악랄한 자부터 시작해야 되요. 그 악랄한 자를 주께서 군대에 보내서 거기서도 구원하시는 구나!를 느끼는 겁니다. 


나로부터 출발해서 나로 끝나면 곤란하고 나로부터 출발하되 그러면 주님 안에 있는 나는 착해졌다? 악랄하다? 여전히 악랄하다. 나는 여전히 못돼 먹었는데 주님이 하셨다고 이것이 아까 말한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하신 모든 일은 자신에 대해서 본인의 이야기를 본인이 하고 있는 거에요. 이것이 하나님은 스스로 창조하셨다. 어디서? 하늘이 아니라 땅에서, 이게 굉장히 함축된 말인데 어려워요. 하나님은 스스로 창조하는데 하늘이 아니고 땅에 와서 스스로 창조해요. 땅에 와서 자기 이야기를 본인이 하니까 인간은 이미 관계가 끊어진 상태이기 때문에 성령을 받아야 성도인데 그렇지 않으니까 자기 생각만 하겠지요. 


자기 생각만 하니까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 가지이고 예수님이 이야기 하시면 나에게 어떤 이득이 있는 가를 자꾸 생각하는 거에요. 그렇게 되면 이건 뭐냐하면 사단의 마음이 있어서 나는 나를 스스로 창조한다고 하나님을 흉내 내는 모습으로 등장하게 되지요.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한다는 등. 나이가 초등학교 6학년이나 중1 쯤 되면 “엄마! 내일은 내가 알아서 할께요!”하면 너는 커서 뭐가 될래? 래퍼 될래요. 하지요. 자기 할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한대요. 또 너는 뭐할래? 베이스 기타리스트 된다고 하지요. 희망 사항이 다 그런 거에요. 베이스 기타하는 게 희망 사항이 됩니까? 연극배우 할래! 

이런 즉흥적인 것, 또 너는 뭐할래? 게임해서 게임 왕이 돼서 프로 게이머 할래! 우리도 마찬가지지만 아이들의 세계관이라는 것은 자기에게 입력된 것 중 납득이 되는 것들의 조합이에요. 자기가 납득된 것이 뭐냐하면 만약 아이가 12살이라면 1살부터 11살까지 경험했던 것이 평가 기준이 되요. 새로운 경험이 왔을 때 이것이 좋다 나쁘다를 11살 까지 살아온 구축된 모든 것들이 기준이 되서 다음 경험을 좋다! 나는 받아들인다 안 받아 들인다를 자체적인 방어체제가 형성되어 있어요. 인간은. 만약 아이가 17살이라면 1살부터 16살까지이고 20살이라면 1살부터 19살까지겠지요. 


그런데 12살 때 그 부모가 이혼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 아이의 마음속에는 그 때의 상처가 트라우마로 계속 남아 있는 거에요. 지금 61세라면 59세까지, 그래서 인간이 보는 세계관은 믿을 게 못되요. 그냥 독선적이에요. 자기가 살던 동네에 자기가 생각했던 그 인식에 맞춰서 전부 결정하는 겁니다. 만약에 아버지를 굉장히 좋아했다하면 그 딸이 남편을 고를 때는 누구 같은 남자? 내가 좋아했던 아빠 같은 남편이면 OK! 이렇게 되는 겁니다. 선택 기준, 결정 기준, 판단 기준이 일방적이다. 오직 자기 자신 밖에 모르는 일방적이에요. 너무나 개인적 사견이에요. 이것은 절대로 일반화 시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아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누구 이야기를 합니까? 인간들에게 납득되고 설득시키는 이야기를 하시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의 본인 이야기를 해 버려요. 그래서 아무도 못 알아듣지요. 그러라고 하신 이야기에요. 아무도 못 알아들도록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그런 거에요. 왜그러냐 하면 너희가 말하는 믿음이라는 것은 예를 들어 나이가 40세라면 1살부터 39살까지의 일방적으로 구축된 독선적인 자기주장이거든요. 그래서 이런 믿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믿음이란 뭐냐 요한복음 6장에 아버지께서 내게 보내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가 믿음이어야 되요. 


진짜 믿음은 성령이 오게 되면 나는 주님을 믿을 수 없었는데 예수님의 아버지가 예수님을 믿으라고 예수님 안에 밀어 넣었습니다라는 예수님의 행함이 내용으로 되는 것만이 믿음이라는 겁니다. 당신은 교회에 어떻게 오게 됐습니까? 주님께서 가게 하셨습니다. 항상 자기는 수동적이고 피동적인 것을 믿음의 내용으로 삼는 거에요. 자식이 몇 명입니까? 두 명입니다. 어떻게 낳았습니까? 주께서 주셨습니다. 항상 믿음의 내용이 수동적으로 되는 겁니다. 이번에 또 잘하셨는데 어떻게 공부를 잘 하십니까? 주께서 아는 문제만 나오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내 위주가 되면 이렇게 되기까지 내가 공부를 얼마나 많이 했는지~ 설교 준비한다고 책 많이 읽었습니다~ 기도도 빡세게 하고~이렇게 되면 한참 뒤엔 얼마나 오류인가를 알겠지요. 지난 설교 때도 그런 이야기 했다고 한소리 들었는데 뭐냐하면 남자가 수염을 기른다. 그게 싫다. 그런데 미국의 이상현 목사님은 빼고 피부가 약하다 하니까 빼고 남자가 수염을 기르는 것이 왜 그리 싫을까 하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요즘 드라마에 나오는 탈랜트 중에 수염을 기른 것이 얼마나 꼴보기 싫던지 거기까지만 해야 되는데 열이 받아서 오십도 안 된 사람이 인생 뭘 안다고 수염 길러서 도인처럼 길게 해가지고 하느냐라고 했는데 그러고 나서 놀라 개인 적인 제 사견이라고 붙였습니다만은 


60세가 돼서 보니까 50때가 시근(철)이 없는 거에요.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한 내가 나중에 70세가 되어 보면 50때 시근 없다던 그 60때도 시근 없는 것이 된다니까요. 그래서 이런 것은 일방적인 사견에 지나지 않는 거에요. 일반화 시키면 안 된다는 말이지요. 예수님은 자기 이야기를 한 거에요. 예수님의 이야기는 50이 됐든 60이 됐든 70이 됐든 예수님의 이야기는 영원해요. 영원한 것은 영원한 것 끼리 만나야 돼요. 일시적인 것은 영원을 담을 수도 없고 영원은 일시적인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건 뭐냐하면 우리가 평생 살아도 시근 없는 인간이다. 나 밖에 모릅니다. 

32절을 봅시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이렇게 해 놓고 본문에 예수님께서 지금 누구 이야기한다고 했어요? 자기 이야길 한다고 했지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고 할 때 제자들은 또 오해한 거에요. 자기들이 무화과나무인 줄 알았어요. 자기들이 무화과나무도 아니고 이스라엘이 무화과나무도 아니에요. 이 대목을 모든 주석과 설교와 목사들은 무화과나무를 이스라엘로 봐요.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하니 마지막 때가 온다고 뭘 생각하냐 하면 제 3 성전을 건축하고 핵폭탄 떨어지면 이스라엘이 무화과나무이니까 이스라엘이 드디어 이스라엘답게 되려고 전쟁이 벌어지면 그 때가 마지막 때라고 7년 환란이니 해가며 돈 보고 사기 치는 사람들이 생겨나지요. 

이 본문을 무화과나무를 이스라엘이다 하는데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이 아니고 예수님의 자기 이야기 속에 무화과나무가 하나의 소재로 들어있는 거에요. 소재로 들어갔다는 말은 여기서 이건 누굽니까? 저건 누굽니까? 라고 물으면 안 된다는 뜻이에요. 어떤 농부가 땅을 팠는데 보물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덮어 놓고 자기만 알고 그 땅을 사서 기뻐했다. 이 농부는 누굽니까? 보물은 누굽니까? 라고 묻는데 그렇게 풀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그 전체가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은 숨겨져 있는 것이다. 그런 뜻으로 한 것이지 농부는 여러분입니다라고 하면 일관성이 없어요. 그 때는 그런데 다른데 가면 딴 소리를 해야 되요. 거지말로. 


666은 악마의 숫자이다. 그렇다면 솔로몬이 성전 지으려고 모은 금의 무게가 666달란트입니다. 그러면 성전이 마귀의 전당인가? 멋있게 숫자풀이를 해야 사람들이 교회와서 진리가 여기 신천지에 있구나!하고 돈내지요. 신천지가 이 짓해서 크게 세워진 겁니다. 신천지나 기존 교회나 똑같아요. 평소에 이런 아이디어를 갖고 있기 때문에, 신천지도 기존 교회에서 나온 거라 야! 저기에 아이디어를 조금만 보태면 멋진 교단 하나 만들어 지겠다해서 나온 게 신천지이고 이만희가 만든 것이고 어떤 대비책을 우리에게 준 게 아닙니다. 대비책은 없어요. 없어야 되요. 대비책 세우지 마세요. 


그냥 가라하면 가는 거에요. 못 되먹었은 것을 알고 무슨 대비책이 있어요. 대비책이란 지금 말고 더 나아진 나를 자꾸 상정하기 때문이고 어떤 희망이나 목적을 갖는다는 것은 지금 상태가 싫다는 뜻이고 그것은 주님에 대한 감사가 없다는 뜻이고 주님의 희생 때문에 살아간다는 것을 끊어버렸다는 뜻이고 결국 미래에 괜찮은 내가 있다는 말은 지금은 감사를 못하겠고 내 뜻대로 해주면 그때는 감사할 용의가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거래하는 셈이 되버려요. 이렇게 어떤 목적이 있고 기대가 있고 소망이 있다는 것은 스스로 시험에 빠지는 지름길이에요. 목적이 안 생길 수가 없지요. 사람은 목적 때문에 사는 데, 


그렇더라도 목적이 생기거든 또 실망하자라는 마음가짐으로 하고 항상 성경은 완벽해라가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라 하지요. 본문의 무화과나무는 뭐냐 예수님 자신의 이야기이지요. 무화과나무는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깝지요. 이건 뭐냐하면 성전이 붕괴되는 거에요. 무너지죠. 본문 35절을 보면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되어 있고 33절에는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이렇게 되어 있는데 지금 이 세상의 모든 것은 2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마 24: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마 24:2)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마 24:1)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이르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성전이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요. 예수님은 성전 속에 들어가요. 성전이 무너지면 누구도 무너지는 거에요? 예수님이 무너지는 거에요. 이 말은 예수님이 성전 무너지라고 예수님을 포함해서 잡아당기는 겁니다. 제가 삼손 이야기 했지요. 삼손의 마지막 모습이 어떻습니까? 자기는 살고 블레셋을 죽이는 게 아니에요. 너 죽고 나 죽자 해서 기둥에 자기를 묶고 자폭했지요. 자폭하신 분이 예수님이에요. 무화과나무가 연하여지고 여름 되는 것도 예수님을 위한 소품입니다. 예수님 자신의 일을 하기 위해 필요한 무대에 세팅된 것들이에요. 그 중에 제자들도 있는 거에요. 


모든 하늘의 해와 달과 별 나팔 소리 전부 예수님 자신의 일을 드러내기 위해서 필요한 소품들로 있고 그때그때 마다 등장해야 되고 씬1, 씬2 할 때 마다 등장 인물 바뀌고 배경도 달라지잖아요.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보면 아이들이 인형극을 하지요. 요들레이요~인형극을 하는데 제일 막내인 꼬마가 배경을 딱딱 바꿉니다. 목소리가 큰 양치는 소년의 소리가 왕자에게도 들리고 소녀에게도 들리고 하면서 배경이 바뀐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은 예수님이 하신 일의 코스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때마다 착착 등장하는 겁니다. 회전 초밥집의 접시들처럼 그때그때 마다 맞춰서 자신의 코스를 밟아서 세상을 무너뜨리신다. 


그것을 증명하는 겁니다. 자폭이니까 예수님도 죽고 세상도 죽고 너 죽고 나 죽고 다 죽는 거에요. 그것이 다 이루리라 35절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다 죽고 난 뒤에도 주의 말씀은 살아남는다는 말이죠. 36절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시간 자체는 없습니다. 1. 시간은 없다 2. 현재는 없다 같은 말인데 현대 물리학에도 이것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현대 물리학에는 현재의 우주가 다가 아니고 현제의 우주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다른 우주가 있어야 설명 되요. 다중 우주론이라고 하는데 왜 다른 우주가 있어야 하냐하면 그래야 중력에 대한 문제가 풀립니다. 

그러면 현제의 우주가 시간이 현제에서 미래로 시간이 흘러간다고 하잖아요. 이것을 시간의 비 대칭성이라하고 물리학자들이 말하길 모든 것엔 대칭이 있는데 딱 하나 시간만은 대칭이 없어요. 흘러가면 그만이다 말이죠. 모든 것은 반 쪼개면 다 대칭이 되는데 시간은 대칭이 없어요. 시간의 비 대칭성이라는 것은 현재 우리가 현제 우리 눈에 보이는 우주가 유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지금 사건, 지우개를 떨어뜨렸다. 이건 과거잖아요. 과거지만 다른 우주에선 5일 후에 일어날 사건이에요. 다른 우주에선 여기서의 과거가 미래가 되고 동일한 사건이지만 어느 우주냐에 따라서 그 사건의 시간은 따로 따로 정립이 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시간보다 우선되는 것이 물리학에선 빛의 속도이기 때문에 빛의 속도가 변함이 없어요. 빛의 속도 때문에 뭐가 달라지냐 하면 시간과 공간이 달라요. 이것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라는 겁니다. 빛의 속도가 일정하면 시간과 공간은 달라진다. 달라진다는 말은 인간의 자의식, 인간의 자기 시간관념도 없어진다. 시간은 어디서 나왔는가? 인간의 기억 속에서, 두뇌 정보에서만 시간은 흐른다. 쉽게 이야기해서 살아 있을 때는 시간을 느껴요. 그런데 치매에 걸린다든지 점점 나이가 많아지면 장기 기억만 남아요. 그 말은 현재가 사라지고 있다는 거에요. 


현재가 사라지게 되면 모든 현재는 장기 기억 속에서 과거가 되어 버려요. 그때의 내가, 내가 되는 겁니다. 혹시 꿈속에서 자기 자신을 본 적이 있습니까? 있다면 몇 살 때의 모습이던가요? 거의 현재의 모습은 안 나타나지요. 자기가 가장 예뻤을 때, 어렸을 때, 꿈속에선 피곤 한 줄도 몰라요. 젊을 때의 모습이에요. 왜냐하면 내가 그때 그 모습을 안 잊어버리려고 평소에 애를 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쁘고 하고 싶은 것 다했던 것, 아프지도 않고 산으로 강으로 뛰어 다녔던 그 모습을, 꿈속에선 피곤 한 줄도 몰라요. 원하는 대로 하고 싶은 것은 다해요. 왜냐하면 꿈은 하나의 이상이기 때문에, 이상적인 요소만 모아서 세팅해 놓은거에요. 


이 말은 내 의식 안에 장기 기억 속에 지금은 볼 품 없지만 내가 나에게 인정받는 그 모습을 안 놓치려고 꾸준하게 있는 겁니다. 그것을 향수라고 하는 겁니다. 나이가 들면 향수에 뒤 돌아보며 살아요. 내가 옛날에, 옛날에 이런 것을 계속 이야기 하면서 세월을 보냅니다. 왕년에 내가 이렇게 했다는 것, 왕년에 못 한건 이야기 안하고 잘한 것만 이야기 하고 그때 이웃집 아가씨가 예뻤고 지금은 늙어 죽었는데(웃음) 그때 세팅된 관계들 있잖아요. 용돈 주던 친척들, 꿈속에 나타나요. 나타나서 옛날에 내게 이득이 되었던, 편안하고 모든 근심 걱정이 해소된 상태. 그 행복한 상태가 유지되고 있었던 겁니다. 

향수가 삶에 생기를 줍니다. 힘을 불어 넣어 줘요. 힘들어도 그 때를 생각하면 다시 이겨내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언젠간 멋진 날이 오겠지! 그러나 인간에겐 과거 밖에 없다. 왜 기억에서 나오는 거니까, 시간은 우리 안에 들어오면 기억이 되요. 그러면 기억 되지 않는 시간은 존재하지 않아요. 시간은 기억됨으로 시간으로 의식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서 미래를 주어 알게 하십니다. 그러면 지금 2018년도가 예를 들어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연도가 2135년이라고 한다면 그 중간의 사이는 완전히 무시해요. 왜냐하면 미래를 미리 알았으니까. 현재 다음에 미래가 오는 것이 아니라 현재 위에 미래가 있어요. 함께 공유한다니까요. 


제가 2135년을 이야기한 이유는 그 때 어떤 혜성이 나타나서 지구와 부딪치고 피할 길이 없다고 얼마 전에 나사에서 발표했어요. 우리에겐 해당 사항 없어요. 죽고 없을 테니까. 막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현재에 미래를 얹어 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과거이기에 사실은 없는 건데 미래가 우리를 누르니까 주의 나라가 되요. 그래서 성도는 주의 일을 하고 있는 거에요. 지금 우리가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일을 하는 것은 우리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이에요. 다시 말해서 미래의 일을 현재 우리가 보여주게 되는 겁니다. 이 이야기는 굉장히 어렵기 때문에 쉽게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 이야기를 했어요. 예수님 자신의 이야기이지요. 그래서 인간은 배제해버리고 무화과나무 이야기를 하시면서 그 때가 되면 내가 다시 와서 멸망시킨다. 그 이야기는 현재와 미래가 중첩되어 있다는 거에요. 왜냐하면 현재를 만드신 분이 예수님 자신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을 못 알아듣는 이유가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일을 따로 챙기기 때문에 예수님이 미래적인 일을 이야기 하시니까 예수님의 이야기와 포기 되지 않는 내 의식과는 연결 고리가 없는 거에요. 그런데 성령이 오시면 주님께서 나를 소품으로 사용해서 자신의 일을 벌이시는 거에요. 이게 로마서 14장7-8절에 나옵니다. 

 (롬 14:6)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롬 14: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롬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예수님이 하는 고백을 성령 받은 우리도 동일한 고백을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무화과나무 이야기를 할 때 너희가 관여하고 변경시킬 수 있는 일이 아니고 내가 해야 될 나의 일이다라고 일방적인 선포를 해버리지요. 그것을 성령을 받으면 예수님의 입장과 똑같이 이야기 하게 되는 겁니다. 지금 내가 살고자 하는 것은 내 뜻이 아니고 주의 뜻이야! 내가 설사 죽는 한이 있더라도 죽어도 주께서 죽을 타이밍이 돼서 죽으라고 한 주님의 일의 일환으로 과정으로서 나를 죽게 하는 거야! 로마서 14장에서와 같이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다 

 주의 일을 발산하고 있다. 주의 증인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우리 가운데 그런 사람이 있지요. 성령 받은 전제로 하겠지요. 로마서 14장 6절 끝에 보면 감사하느니라라고 되어 있지요? 감사하느니라 해놓고 감사한 이유를 죽 이야기 하는 거에요. 내가 필요한 게 있는데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건 감사가 아니에요. 필요한 것을 줬든 필요한 것을 안 줬든 필요하다, 필요하지 않다의 기준은 이미 우리 손을 떠난 겁니다. 주께서 주신 것은 다 감사한 것이고 주께 필요해서 이런 일이 일어난 사건이 나에게 일어난 사건. 내가 지갑을 잃어버렸다. 주께서 필요해서 일으킨 사건이에요. 잃어버린 것도, 

아까워라, 아까운데 누가 다시 찾아 줬다. 아이고! 기쁘다. 여기서 뭐가 생각나냐 하면 잃어버린 양이 생각나지요. 어떤 피아니스트가 순회공연을 많이 다녔는데 걸핏하면 가방을 잃어버려요. 하도 복잡해서 팬들이 와서 싸인 해달라고 해서 하고 나면 가방이 없어져 버렸어요. 그런데 아주 잃어버린 적은 없어요. 5일 만에 찾는 거에요. 뭐든지 잃어버렸다가 한번 찾아보세요. 갑자기 없던 감사도 확 나온다니까요. 정말 사소한 것. 정말 사소한 단추 하나라도 정들었던 단추 잃어버리면 그 정 때문에 꼭 찾아야 되요. 못 찾으면 일이 안 되요. 잃어버리기 전에 도저히 느낄 수 없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회수하도록 늘 이렇게 주안에서 잃어버렸다가 다시 얻고 잃어버렸다가 다시 얻는 방식을 우리에게 사용하십니다. 본문36절에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여기에 예수님 자신도 모른다고 되어 있어요. 그것은 지금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기 이전이에요. 예수님이 지금 누구의 지시를 받냐하면 성령의 지시를 받습니다. 성령은 누구의 지시를 받냐하면 아버지의 지시를 받아요. 예수님이 모르신다고 한 것은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성령께서 예수님이 그런 고백을 하도록 조치하신 거에요. 


왜냐하면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하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땅에서 이루어져야 되요. 땅에서 이루어지려면 철저하게 무엇이 이루어져야 하냐하면 철저하게 순종이 이루어져야 됩니다. 미리 다 알면 안되요. 철저하게 순종해야 되요. 땅은 인간의 세상이거든요. 인간의 세상에서 모르는 것이 있는 예수님이지만 아버지의 성령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에 따라 꾸준히 땅에 자신의 주 되신 일을 할 수 있는 겁니다. 미리 알 것 같으면 예수님이 십자가 질 이유도 없고 필요도 없게 되지요. 왜냐하면 십자가 지기 전에 미리 다 안다고 하면 “나는 죽어도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날 껄! 

본인이 미리 알아도 그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면 히브리서에서의 통곡이란 게 필요치 않아요.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말이 연기한 것 밖에 안되요. 철저하게 순종 모드로 가야 되요. 예수님은. 아버지만 아시고 나는 모른다는 모드로 가야 되요. 왜냐하면 땅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땅에서 이루어진다는 말이 우리에게 왜 기쁘냐 하면 천국이 하늘에 있어 우리가 가는 게 아니에요. 천국은 몸소 땅에 내려와야 천국입니다. 그것은 에덴동산 동쪽으로 가는 곳을 막아 놓으셨잖아요. 그러면 인간 쪽에서 에덴동산 동쪽으로 가는 곳은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되야 하나? 생명나무가 친히 땅으로 방문을 해줘야 됩니다. 죽음 밖에 없는 곳에 생명나무가 터야 되요. 생명나무가 트려면 죽음마저 하나님의 뜻인 언약대로 죽어줘야 되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죽음으로 자기 몸을 바쳐서 하나님의 뜻대로 죽는 죽음 안에서만 뜻대로 되었기 때문에 그 보상으로 영생과 구원이 주어지는 겁니다. 예수님이 있는 자리에서만 영생이 주어져요. 예수님이 죽는 자리에서만 영생이 주어져요. 그래서 영생을 줄 때 하늘을 쳐다보라가 아니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내 죽음에 동참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죽음에 동참하는 사람이 있어요? 없어요? 아무도 없지요. 

그래서 성령을 보내셔서 십자가를 알려줘서 십자가에서 이미 우리는 죽고 그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그 현실을 우리에게 확인 시켜 주는 식으로 십자가 안에 있음을, 죽음 안에 들어 있음을 예수님 안에 들어 있음을 확인케 하는 사태가 계속 일어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되느냐? 우리는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살아서 천국의 삶을 매일 같이 경험하게 되요. 천국의 삶이 뭐냐? 첫 째 시간에 이야기 했어요. 1. 자기 생각 안하기, 자기를 납작하게 만드는 겁니다. 치매 걸려도 안되요. 자기 기억이 있어서 안되요. 자기 생각을 안 하게 되면 그동안 가리웠던 주님이 나타납니다. 

제가 대구 강의에서 커튼을 두 개를 예를 들었는데 예수님이 배후에 계시는데 앞에 우리 생각이 있어 맨날 우리 생각만 하거든요. 거기엔 나의 일대기, 나의, 기억이거든요. 기억속에 내가 15살 때, 20살 때, 30살 때, 맨 날 이걸 우려먹고 이러고 있습니다. 고마운 것은 이게 뭉개져요. 커텐이 주저 안습니다. 커텐이 찢어지는 거에요. 장막이 찢어지는 거지요. 창세전부터 우리를 예정하신 주님께서 우리 뒤에 턱하니 서 있는 겁니다. 이것을 야고보서 에서는 문 밖에 서 있다고 해요. 괜히 우리는 혼자 안달나서 초조해 했고 희비가 교차하는 온갖 곡절들이 일어나는데 이것을 하나의 무늬라고 했지요. 

얼룩만 남기고 평생 동안 발광을 해도 죽을 타이밍에 죽고 살 타이밍에 사는 건데 쓸데없이 앞에서, 왜냐하면 남들이 이걸 주시하니까 남을 의식해서 남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남에게 자랑질하려고 자기 증인되려고 같이 열불내고 협상하고 아부하고 하는 거에요. 우리는 천사로부터 미투 당해야 되요. 전수조사 받아야 되요. 이런 것이 전부 무너지게 되면 창세전에 우리를 사랑하사 사랑 때문에 나에게 일어난 사건들이 일평생이 연쇄 고리처럼 쫙 꿰어져 졌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한순간 한순간이 사랑, 사랑, 사랑으로 꿰어져 있어요. 우리는 감사하지 못하고 남부끄럽다고 하잖아요. 

로마서 1장에 제가 좋아하는 귀절이 있어요. 복음은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복음을 아는 사람은 어느 누구 앞에서도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어요. 창세기 3장에서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가 부끄러워해서 무화과 잎으로 가린 것을 가죽옷으로 입히셨잖아요. 이제는 아담처럼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다는 거에요. 복음이 있는데 세리와 창기가 강도라도 구원시켜 주시는데 복음을 생각 안하고 자체적으로 부끄럽게 여겨 버리면 누구의 가치가 모독 받는 겁니까? 복음의 가치가 모독 받는 거에요. 나 때문에 예수님의 가치가 박살나는 겁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해 준 것이 있는데 그 소중함은 생각 안하고 내 것 자랑할 것 없다고 그것 때문에 좌절하고 절망하고 자기가 밉다고 한다면 그는 누굴 위해 사는 것이 되냐? 백날 해도 인간 안 되거든요. 그런데 고맙게도 날마다 우리를 죽음으로 (인도하시고) 커텐처럼 나중엔 퇴색되요. 본문에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라고 한 것은 제발 아무도 몰라라에요. 아무것도 알 필요 없어요. 내일 일은 내일 알아서 하실 거니까. 내일일은 몰라야 되요. 알면 마귀에게 시험 들어요. 내일 중요한 일을 앞두고 갑자기 성경보고 기도하고 나쁜 짓 안하고 이런 것이 뭐냐하면 내일엔 잘 될 나를 자꾸 상상 하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은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고 했는데 내가 알고 싶어 해요. 그것은 하나의 탐욕이고 욕심입니다. 본문37-38절을 봅시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라고 되어 있습니다. 누가 복음엔 사고 팔고라고 되어 있어요. 그렇다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사고팔고가 성경을 덮어 버리면 이것이 현실의 전부입니다. 인간들이 활동하는 그 무대가 현실이에요. 더도 덜도 말고 그게 전부에요. 그런데 거기에 주님은 인자의 때를 보태버립니다. 


그런데 성도는 인자의 때를 염두에 두고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는 것이 성도이고 불신자는 그런 것 없이 인자의 때를 염두에 두지 않고 그냥 남들 사는 것처럼 살아가는 거에요. 주일 낮에도 이야기 했지만 불신자의 특징은 폼재기하는 거에요. 이것을 두자로 하면 허세, 특히 남자들의 허세를 보면 폼에 죽고 폼에 살아요. 노아의 방주가 왜 있냐 하면 두고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는 것이 심판의 이유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노아의 방주와 언약이 주어지는 겁니다. 오늘 날은 새 언약. 성도는 왜 있느냐? 


바로 예수님의 새 언약을 고려하지 않는 이 세상 전체가 불바다 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보잘 것 없는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는 거에요. 너나 나나 똑같은데 우린 한 가지는 더 안다! 인자가 타이밍 맞춰 오신다는 것. 안일하고 이것이 전부인줄 알고 살아가는 자. 현재의 과학자들은 지구의 인구가 75억이에요. 자원이 부족합니다. 자원은 제한되어 있는데 쓰는 인구는 너무 많아요. 다른 방법은 뭐니까? 다른 행성을 찾는 화성도 마음에 안차서 프록시마 b 라는 행성이 있는데 거리가 빛의 속도로는 2년 반이 걸리는데 로켓 개발하면 20년 만에 갈 수 있다고 합니다. 


 <참고> 프록시마 b는 태양계에서 제일 가까운 행성이자 적색왜성인 센타우루스자리 프록시마에서 발견된 외계 행성이다.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외계 행성이다. 생명체 거주가능 영역을 돌고 있다. 크기는 지구의 1.3배 정도로 지구와 유사하고 지표면은 단단한 암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태양으로부터 4.24광년(약 40조 1104km) 떨어져 있다. 태양의 12% 정도 크기인 프록시마 켄타우리의 에너지가 약하기 때문에 액체 상태의 물이 존재할 수 있는 적절한 온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예측된다. 

그곳에 가 본 들 똑같은 인간들 같이 가는데 자원이 부족해서 불행한 게 아닙니다. 상대방 때문에 불행하고 상대방은 나 때문에 불행하고 상대방도 불쾌하게 여기는 이유는 진정 내 모습을 못 찾아서 세상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야 된다는 고집이 있잖아요. 고집덩어리 이게 문제에요. 본래의 내 자리를 못 찾았기 때문에 가짜인 나를 나라고 우기면서 나만 남고 나머지는 다 죽어라는 고집을 부리면서 살아가고 있는 거에요. 이렇게 문제가 있기 때문에 화성에 가서 산들 어디에 가서 산들 어디가도 마찬가지에요. 이번 이스라엘을 제 아내하고 이상윤 목사님하고 같이 갔거든요. 


가면서 제 아내가 걱정한 게 있어요. 멀리 있을 때는 복음으로 형제이고 친구라 했잖아요. 그런데 멀리 있을 때는 반갑습니다. 복음 안에서 감사합니다라고 이렇게 했는데 10일 동안 같이 동거동락을 하면 과연 계속 좋을까? 우려했는데 감사하게도 처음 만날 때 보다 더 좋아졌어요. 서로 살아 온 환경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다른 구석이 있어요. 그렇게 맞추는데 신혼부부는 3-4년 걸립니다. 그렇게 맞춰지면 다행이고 20년해도 안되면 졸혼 해야 되는가 참다 참다 자식 결혼시켜 다 보내고 갈라서는 겁니다. 도저히 안돼요. 안되는 이유가 상대방에게 있는 건 맞아요. 하지만 나는 문제없어요? 

내가 상대방에게 불편한 존재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 그것 안다고 내가 고쳐집니까? 절대 안 고쳐져요. 그러면 왜 삽니까? 아까 말했듯이 주께서 붙여 주셨기에, 둘 다 못난 것 붙여줘서 나중에 천국에서는 그 인간하고 살지 말고 주님과 살라고 한 평생 신물 나도록 경험해서 천국의 기쁨이 배가 되게 주여! 천국 어서 보내 주시옵소서! 이 땅을 떠나게 하옵소서! 이왕 태어난 것, 못 믿는 건 할 수 없고 죽을 다음 생에서는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하옵소서! 실컷 온갖 서러운 경험 다해요. 그러면 주님은 네가 문제야! 그 문제 있는 것 까지 용서해 주시는 주님을 후딱 만나고 싶습니다. 미움을 키우기 위해 우리는 아직도 무너져가는 커텐의 일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하신 자기 이야기를 우리는 못 알아들었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고 보니 주님의 말씀만이 우리를 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실행에 옮겨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다 이루심으로 이미 주와 함께 있음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