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증거 (삼상 9장 15-10장 7절) 대전- 33강
이근호
2017년 12월 26일 본문말씀: 사무엘 상 9:15-10:7
(삼상 9:15) 사울이 오기 전날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알게 하여 이르시되 (삼상 9:16) 내일 이맘 때 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네게로 보내리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라 그가 내 백성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내 백성의 부르짖음이 내게 상달되었으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았노라 하셨더니 (삼상 9:17) 사무엘이 사울을 볼 때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이는 내가 네게 말한 사람이니 이가 내 백성을 다스리리라 하시니라 (삼상 9:18) 사울이 성문 안 사무엘에게 나아가 이르되 선견자의 집이 어디인지 청하건대 내게 가르치소서 하니 (삼상 9:19) 사무엘이 사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선견자이니라 너는 내 앞서 산당으로 올라가라 너희가 오늘 나와 함께 먹을 것이요 아침에는 내가 너를 보내되 네 마음에 있는 것을 다 네게 말하리라 (삼상 9:20) 사흘 전에 잃은 네 암나귀들을 염려하지 말라 찾았느니라 온 이스라엘이 사모하는 자가 누구냐 너와 네 아버지의 온 집이 아니냐 하는지라 (삼상 9:21) 사울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니이까 또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나이까 하니 (삼상 9:22) 사무엘이 사울과 그의 사환을 인도하여 객실로 들어가서 청한 자 중 상석에 앉게 하였는데 객은 삼십 명 가량이었더라 (삼상 9:23) 사무엘이 요리인에게 이르되 내가 네게 주며 네게 두라고 말한 그 부분을 가져오라 (삼상 9:24) 요리인이 넓적다리와 그것에 붙은 것을 가져다가 사울 앞에 놓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보라 이는 두었던 것이니 네 앞에 놓고 먹으라 내가 백성을 청할 때부터 너를 위하여 이것을 두고 이 때를 기다리게 하였느니라 그 날에 사울이 사무엘과 함께 먹으니라 (삼상 9:25) 그들이 산당에서 내려 성읍에 들어가서는 사무엘이 사울과 함께 지붕에서 담화하고 (삼상 9:26) 그들이 일찍이 일어 날 새 동틀 때쯤이라 사무엘이 지붕에서 사울을 불러 이르되 일어나라 내가 너를 보내리라 하매 사울이 일어나고 그 두 사람 사울과 사무엘이 함께 밖으로 나가서 (삼상 9:27) 성읍 끝에 이르매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사환에게 우리를 앞서게 하라 하니라 사환이 앞서가므로 또 이르되 너는 이제 잠깐 서 있으라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네게 들려주리라 하더라
(삼상 10:1) 이에 사무엘이 기름병을 가져다가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 맞추며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그의 기업의 지도자로 삼지 아니하셨느냐 (삼상 10:2) 네가 오늘 나를 떠나가다가 베냐민 경계 셀사에 있는 라헬의 묘실 곁에서 두 사람을 만나리니 그들이 네게 이르기를 네가 찾으러 갔던 암나귀들을 찾은지라 네 아버지가 암나귀들의 염려는 놓았으나 너희로 말미암아 걱정하여 이르되 내 아들을 위하여 어찌하리요 하더라 할 것이요 (삼상 10:3) 네가 거기서 더 나아가서 다볼 상수리나무에 이르면 거기서 하나님을 뵈오려고 벧엘로 올라가는 세 사람을 만나리니 한 사람은 염소 새끼 셋을 이끌었고 한 사람은 떡 세 덩이를 가졌고 한 사람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진 자라 (삼상 10:4) 그들이 네게 문안하고 떡 두 덩이를 주겠고 너는 그의 손에서 받으리라 (삼상 10:5) 그 후에 네가 하나님의 산에 이르리니 그 곳에는 블레셋 사람들의 영문이 있느니라 네가 그리로 가서 그 성읍으로 들어갈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산당에서부터 비파와 소고와 저와 수금을 앞세우고 예언하며 내려오는 것을 만날 것이요 (삼상 10:6) 네게는 여호와의 영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 (삼상 10:7) 이 징조가 네게 임하거든 너는 기회를 따라 행하라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
본문에서 사무엘과 사울이 만났는데 우리 보기에는 두 사람이죠. 그런데 사무엘의 행동이 멈짓 멈짓 합니다. 왜냐하면 사무엘이 사울과 함께 있지만 사무엘이 누구의 지시를 계속 받나 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지시를 받습니다. 사무엘이 무슨 지시를 받냐 하면 9장 15절에 보면 “사울이 오기 전날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알게 하여 이르시되 내일 이맘 때 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네게로 보내리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라 그가 내 백성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리라”이렇게 되어 있는데 분명히 남들 보기엔 사무엘은 혼자 있습니다. 거기에 사울까지 보태면 달랑 두 사람이에요. 사울은 사환하고 붙어있고
그러나 사무엘 본인은 남들이 보는 것처럼 자기를 보지 않고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가는데 그 이유가 이스라엘의 왕을 만드는 작업을 하는데 왕을 만드는 작업 중의 특징은 관계자 외에 출입금지에요. 관계 되는 사람들의 특징들이 사무엘 상 10장 10절에 보면 “그들이 산에 이를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그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 크게 임하므로 그가 그들 중에서 예언을 하니”관계자는 성신이 임해서 예언을 하는 사람들의 집합이에요. 왕을 만드는 작업은 여기서는 사울인데 사울은 어느 집단의 일부에요. 성신이 임한 집단중의 일부로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사람들이 요구를 하더라도 만드는 작업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누가 관여 하십니까? 성신이죠. 성신, 하나님의 신이 임하시죠. 여기서 백성들이 왕을 원할 때는 단절의 경로는 없어요. 그냥 자기들이 생각하는 왕이지요. 그러나 실제적으로 하나님이 왕을 만들 때는 성신이 임해야하는 조건 때문에 백성들이 기대하는 왕이면서도 중간에 차단이 있어요.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삼았지만 사무엘 상 10장 마지막 27절에 보면 “어떤 불량배는 이르되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겠느냐 하고 멸시하며 예물을 바치지 아니하였으나”이렇게 되어 있어요. 제가 오늘 강의 중에 예물에 대해 설명 할 건데요
인간들이 보는 관점이 있잖아요. 왕 다운 조건들이 있단 말입니다. 이 정도면 왕이다. 요새 같으면 투표하면 되는데 전혀 신임도가 없고 믿음도 가지 않는 자를 왕으로 뽑는다고 했을 때 백성들은 삐지는 겁니다. 우리가 원하는 타입은 아니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울을 일방적으로 왕으로 만들어 버렸어요. 그래서 왕과 백성 사이는 차단되어 있지요. 절연 또는 단절. 아까 산타크로스 이야기가 잠깐 나왔는데 사람들이 산타크로스가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사람인줄 알지요. 울지 않는 아이들에게 선물도 주고 동네방네에 두툼한 붉은 외투입고 모자 쓰고 한다 말이죠. 사람들이 이해되고 납득이 된다는 말이죠.
이해되기 때문에 진짜 산타크로스 할아버지가 그 조건에 맞지 않으면 진짜 산타크로스는 사람들에게 배척 받을 거에요. 그렇지요? 인간들이 차단되니 않은 산타크로스를 원하기 때문에 그러나 하나님은 차단시켜 버렸어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눈에 보이는 왕을 얻는다는 사고방식 자체가 이미 하나님과 단절됨을 보여주는 사례가 되는 겁니다. 사람들의 출발은 자기들에게 왕이 필요해서 찾는데 그것은 나에게 필요한 신, 나에게 필요한 예수, 나에게 필요한 중보자, 나에게 필요한 산타크로스 할아버지, 나에게 필요한 위대한 지도자. 이 모두는 다 가짜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원하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천국은 가짜입니다. 내가 원하는 구원도 가짜가 되지요. 사무엘 상 9장과 10장을 통해서 이 점을 철저하게 보여주는 겁니다. 사무엘 상 8장을 보면 사람들이 왕을 원했고 하나님께서 왕을 허락한다는 언지가 있었습니다. 이젠 백성들이 기다리기만 하면 되요. “하나님이 왕을 허락하신데, 저 사람이 괜찮데, 그러니까 왕을 달라고 했으니 주시겠지!”그런데 왕을 주시는 작업에서 사람들의 생각엔 사람들을 모아 놓고 그 중에 인물이 제일 출중하고 잘 나가고 유명하고 특히 언론을 잘 탔던 요즘 말하면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그런 사람을 해야 할 텐데.
사무엘 상 9장에 보면 어느 지파에, 베냐민 지파에 기스라 이름하는 유력한 사람이 있으니, 기스에게 아들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했는데 그 사람이 아들이 있었는데 이름은 사울이고 그의 아버지가 암나귀를 잃어버려서 찾아오라는 것이 신호탄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냐민 지파가 어떤 지파이냐 하면 사사기 마지막에 보면 까불다가 몰살당하는 지파입니다. 사사기에 보면 베냐민 지파 동네가 상당히 우범 지역이었던 모양이지요. 어느 레위 인이 첩과 그곳에서 투숙하다가 첩이 강간당하고 죽고 난 뒤에 그가 화가 나서 죽은 첩의 시체를 12토막 내서 12지파에 보내서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이스라엘에서 이렇게 막가는 범죄가 있을 수 있느냐 해서 각 지파들이 총 궐기해서 그 지역을 몰살해서 그 건달들을 죽이자 했는데 그 지역이 베냐민 지파의 지역이에요.
베냐민 지파와 그 외의 지파가 싸움을 했어요. 그 후 베냐민 지파가 굉장히 위축되었고 숫자도 제일 작았고 심지어 다윗 왕 지나 솔로몬 왕 끝날 때도 베냐민 지파는 아주 희미한 이름도 없던 지파에요. 그래서 남북으로 나뉠 때 열 지파는 여로보암을 따라 빠지고 나머지 두 지파, 유다지파에 빌어 붙어서 있던 지파에요. 그 정도로 미약한 지파입니다. 미약한 지파에서 나왔다는 말은 12지파에게서 왕으로 인정받기 힘들다는 말이 되지요. 왕이라는 것은 권세를 적용 할 수 있어야 되요. 권세로 사람들을 휘어잡을 수 있는데 제일 미약한 지파에서 왕이 나왔다는 말은 모든 사람들에게 배척받을 요인이 되는 겁니다.
암 나귀가 도망해서 온 동네를 돌아다닌 거에요. 사울이라는 사람의 특징은 암 나귀에 마음이 빼앗겨서 나라의 정치라는 것은 전혀 안중에 없던 사람이 사울이에요. 이 나라의 대통령 한 번 되어 볼까? 이런 거 전혀 없어요. 그저 자기 집에서 탈출했던 나귀는 어디 있니? 하고 찾아다니는 겁니다. 찾아다니며 기껏 생각하는 것이 국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집안의 암나귀, 가축은 재산이니까 그것 잃어버려서 찾다가 누구를 만나게 되냐 하면 사무엘과 만나게 되는데 사무엘이 현장엔 하나님이 계십니다. 오늘 날 우리에게 주는 이야기는 내가 어떻게 구원 되느냐? 할 때 나름대로의 자기가 구원되는 경로와 코스를 상당히 구체적으로 정립하고 있어요.
사람들은 자기가 이렇게 구원 될 것이라고 정립하고 교회에 다닙니다. 심지어 절에 다니며 교회에 한번도 안 다닌 사람도 교회에 가면 나름대로의 내가 구원될 수 있는 경로와 코스를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 인간이 구원을 생각 할 때는 깨끗함을 생각하는데 나의 깨끗함, 나의 의라고 하지요. 반대로 추한 경우는 죄를 많이 지어 추하겠지요. 죄의식이 있어서 그래서 인간 나름대로의 생각은 추한 나, 내가 보기에도 저질인 나가 그나마 깨끗한 것을 양성화 시켜서 내 속의 작게 남아있는 깨끗한 요소, 양심적 요소를 부풀려서 장려하고 확장시켜서 점점 깨끗한 사람이 되어서 죽음의 순간이 왔을 때 나의 깨끗함을 들이 밀면서 나도 덩달아 구원 받기를 원하는 겁니다.
이 방식으로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이 이것을 가만하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네 오른 손이 범죄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찍어 버리라는 것은 다음을 기약해라 뭐 이런 거 없어요. 좋은 게 좋은 거다 이런 게 없습니다. 나머지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낫다. 이 말은 인간들이 이런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나라는 몸에서 한 부분이 문제가 있으면 100%완벽하게 깨끗해야 되는데 요것이 하나의 오점이 된다면 오점을 도려내면 나머지라도 퍼펙트하게 완전하게 될 것이니까 만약에 아깝다고 나둬 버리면 나머지가 지옥 불에 들어간다고 했어요.
(마 5: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주님은 극단적이에요. 중간 지점이라는 게 없어요. 작은 암 세포 때문에 나머지가 지옥 간다는 겁니다. 도려내야 된다. 산상설교에 있어요. 산상설교대로 사는 사람을 보고 싶어요. 손 하나 잘리고 눈 하나 빠진 사람을 시험해 보고 싶어요. 남아 있는 눈으로는 죄 안 짓는지, 본인은 남이 있는 눈으로는 죄 안 짓는다고 우기기 때문에 갈 수 있다고 하는 것 아닙니까? 과연 그런지.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믿을 수 없는 말씀. 이것을 산상설교 찍어 버리라고 하는 것이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극단적으로 우리 앞에 가깝게 코 앞으로 밀어 냅니다. 이 정도 지키려면 지켜봐라! 이건 좀 심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내가 믿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거야!
믿을 수 없는 말씀을 주셨다라는 것은 예수님은 천국에서 왔는데 인간들은 나름대로 자기들의 깨끗함을 장려하면 얼추 봐주지 않겠느냐는 건데 막상 천국에서 사셨던 분이 들이 밀면서 믿을 수 없는 말씀을 주시는 거에요. 믿을 수 없는 말씀을 주셨다라는 것은 네가 믿는다는 것 자체가 100% 거짓말이라는 거에요. 예수를 믿는다고요? 예수를 알기나 하면서 믿는다고 해야지. 가짜 산타클로스 250만 명 때문에 진짜 산타클로스는 반 산타클로스 취급받아 교도소에 가는데 교도소가면 다행이지 아예 사형 당하는데요. 그게 바로 십자가 사건 아닙니까?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우리보다 먼저 천국 가신 분이 참 부러웠다. 가신 분을 아시는 분이 소개해주면 나도 그처럼 살아서 천국에 합류하고 싶은데 라고 할 수 있어요. 자기 구원에 대해서 그러면 소개해 드릴께요. 스데반 집사. 이 분의 특징은 성령이 충만했어요. 죽었어요. 또 다른 사람 소개해 드릴까요? 사도 바울,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육체의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가겼다는 분, 마귀 나라에게도 유명한 분 , 마귀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고 한 분, 거꾸로 죽었던 베드로. 또 소개해 드릴까요?
(고후 11:21)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고후 12: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행 19:15)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이 분들의 특징은 본인조차 자신을 믿을 수 없다는 거에요. 내가 이럴려고 사도됐나? 난 왜 이러고 살지! 지금까지 강의 한 것을 응축하면 이렇습니다. 예상 못함이에요. 예상 못한 일입니다. 사울이 왕이 된다는 것은 본인도 예상 못한 일이에요. 왜냐하면 사람들은 나름대로 예상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사도 바울 입장에서 사무엘 상 이야기를 하기 전에 사울과 바울의 보게 되면 사도 바울은 인간의 몸을 둘로 나눴습니다. 육의 몸과 영의 몸으로 나눴어요. 육의 몸의 특징은 뭐냐하면 특징이 자기를 증거하는 겁니다. 신앙 생활을 자기 딴엔 열심히 한다고 하지요.
갑자기 바쁜 일들이 생기고 여러 가지 말씀 듣는 시간이 없어진다고 할 수 있어요. 취직한다고 해서 그럴 경우의 특징이 뭐냐? 자기를 증거하는 모양새로 돌아서 있어요. 자기를 증거한다는 것은 나름대로의 깨끗한 것을 챙겨서 이것을 들이밀지요. 저는 아직도 깨끗한 편입니다. 다시 말해서 깨끗하냐? 안 깨끗하냐를 검사해 주세요라고 들이 미는데 주님께선‘저는’이라는 말이 왜 들어가냐? 하시는 거에요. 깨끗하냐? 안 깨끗하냐를 물어 볼 것도 없지만 그보다 먼저 저는 어때요?라고 자기 자신을 주님 앞에 들이 밀겠다는 자체가 하나님의 자기 백성 만들기와 노선이 전혀 달라요.
육의 몸은 자기를 증거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를 증거하는 것이 많아요. 나는 교회를 몇 년 다녔다. 개척 교회에 다닌다. 성경 공부 많이 하러 다닌다. 다 자기 증거거든요. 영의 몸은 뭐겠어요. 반대로 예수를 증거하는 겁니다. 혼자여도 혼자가 아니고 1+ 0 = 2 남들 보기엔 1+0 = 1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2가 되는 나는 왜 오스트리아에 갔나?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나는 왜 콩쿨에서 또 떨어졌나?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그러면 어떻해서 육의 몸은 자기를 증거하고 영의 몸은 주님을 증거하는가를 보게 되면 육의 몸의 특징은 이렇습니다. 시간에서 못 벗어나요. 묵시로 갈 수 없고 시강의 인물로 태어나기 때문에 그 마음속에는 항상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져 있어요.
과거는 2017년 12월 24, 25, 이라고 하면 24은 25일이 되면 그 밑으로 들어가고 그 다음도 25, 24, 23, 22.... 모든 과거는 누적이 되면서 현재가 되는 것이 아니고 기억을 할 때 자아가 되고 육이 몸이 되는 겁니다. 나는 바쁘다고 할 때 언제 ? 어제 바빴다. 어제 바빴다는 것을 기억하는 순간 나는 이미 내 안에 과거에 있던 일이 기억 창고에 일부 편집돼서 들어오면 지금의 나가 되면서 멈추는 게 아니고 여기를 기준해서 새로운 자아를 추구하게 됩니다. 이것이 미래에요. 내일은 오늘보다 깔끔하게 해야지! 내일은 누구를 만나야지! 이렇게 되면 여기에 형성되는 것이 뭐냐하면 ‘나’가 형성 되는데
여기서 ‘나’는 시간에 따라서 시간이 형성해 주는 나이기 때문에 육의 몸이 되요. 그래서 시간이 몸으로 형체가 될 때 시간이 어떤 형태를 만드는 것, 시간 덩어리로의 자아, 나 이것이 육의 몸입니다. 일반적으로 이렇게 살아가지 않는 사람이 없을까요? 있을까요? 다 이렇게 살아가잖아요. 예외가 없어요. 그냥 육 또는 몸 해도 말이 되요. 사울은 왕이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암나귀를 쫓아가는 거에요. 머릿속 엔 온통 무슨 생각뿐이겠어요? 나귀를 잃어 버렸다, 앞으로 할 일은 나귀를 찾는 것이다. 이게 바로 육이에요. 평소에 인간들이 하는 겁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자기 기억에 유리하고 보탬이 된 것은 기억에 추가 되겠지요. 그러면 남들 앞에서 누굴 증거 하겠어요? 자기의 기억에 들어 있는 활동 사항을 증거 하겠지요! 이것을 개인사 또는 개인의 역사라고 하는 데 팝송으로 치자면 My Way 그동안 나는 내 방식대로 살았다라는, 대중가요로 치면 시월의 마지막 밤. 결국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자기를 증거하면서 그냥 살아가는 겁니다. 이런 육에게 하나님은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앞으로 잘해주세요! 죽거든 천국 보내 주세요! 예수는 무슨 의미겠습니까? 앞으로 죽거든 천국 보내달라는 겁니다.
천국과 자기는 단절이 있어요? 없어요? 단절이 없어요. 차단되지 않았습니다. 연속되어 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교회에 오는 거에요. 현재 지금 무슨 일을 하게 되면 과거의 죄는 없어지고 현재의 나를 미래의 천국에 있는 나를 천국 백성으로 집어넣을 수 있습니까? 가르쳐 주세요. 목사님! 하고 교회에 온다는 말이죠. 교회서 하는 말이 예수를 믿으세요라고 하거든요. 과거에 하던 행세를 가지고 지금 보다 더 깨끗해야 된다는 욕망, 희망추진성을 가지고 예수를 믿게 되니까 행함이 되는 겁니다. 옆 사람이 믿는 게 아니에요. 옆 사람이 믿어서 내가 구원 받으면 믿을 수 없는 사태가 되지요.
내가 안 믿었는데 다른 분이 믿어서 내가 구원받는 그런 수가 있어요? 없어요? 육의 몸으로 없지요. 그런데 실제로 구원되는 사람은 누구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를 믿음으로서 우리도 구원받는다 말이죠. 도대체 믿을 수 있나요? 내 믿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내 열심과 소망, 사람을 인정하지 않아요. 우리는 육의 몸이니까 자기 과거에 미흡한 것을 미래엔 보상 받기를 원합니다. 오늘이 12월 26일이지요? 몇일만 지나면 송구영신하잖아요. 옛것은 보내고 새것은 받아들인다는 2017년은 끝납니다. 이때 나오는 노래 (auld lang syne) 석별의 정 부르면서 눈물 흘리면서 올 한해는 최순실 때문에 망친 대한민국 어떻게 해결하나 이렇게 할 텐데,
미록 올해는 어두웠지만 밝아오는 새해처럼 2018년은 밝게 될 것이다라는 이것이 점점 더 자신을 가짜 천국, 지옥불로 미혹하고 유도하는 거에요. 그럴수록 훤해져요. 왜 지옥 불에 가깝기 때문에 1월 1일 새해에 뜬 태양처럼 얼마나 밝은지 몰라요. 그런데 사울은 점점 더 어둡습니다. 나귀는 어디로 갔는지 도대체 찾을 수가 없습니다. 순전히 육의 몸 개인적인 요구입니다. 사울은 개인적인 그리움에 잡히고 여러분! 그리움이 깊이 박히면 차라리 정신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인간의 그리움이란 게 처음에는 내가 그립잖아요. 나중엔 그리움 속에 내가 녹아져 버려요. 이것을 두 자로 오기라고 하는 거에요. 자기를 추스릴 것도 없어요.
사울은 못 찾으면 그냥 집에 가면 되는데 오기가 어디까지 뻗쳤냐 하면 선지자를 찾아가잖아요. 16절을 보면 사울이 사무엘을 찾아오기 전에 하나님이 미리 사무엘에게 알려 주지요. 내일 이맘 때 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이 올 것이다라고 했지요. 그러면 이 이야기는 정말 믿기 힘든 것이 누가 누구를 만나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몰라요? 알아요? 다 아시지요. 사람으로 하여금 황당하게 주님께서 누구는 누굴 만나야 되고 어떻게 되고 마지막은 지옥가야 되고 누구는 천국가야 되는 것이 결정된 것 같으면 내가 열심히 하고자 했던 모든 것은 졸지에 의미가 없어져요. 그럴 것 같으면 내가 뭐하러 고생했나! 집에서 그냥 놀지! 괜히 걱정 했잖아!
그런데 아까 제가 그리움이란 말을 했지요? 이미 하나님이 계획 잡았지만 그 계획 속에서 인간들은 나귀를 기어히 찾겠다는 그리움을 가지고 온 베냐민 땅을 헤메고 다니는 거에요. 결국 마지막에 사무엘에게 까지 갔는데 10장 3절에 보면 하나님이 사무엘을 통해 미리 알려 주시는 거에요. 이제 사울이 사무엘을 만났으니 세상 사람들이 보기엔 1+1=2가 아니고 1+1+0=3이고 주도권은 1+1이 아니고 0이신 분, 눈에 안 보이니까 없는 분이 되시는 하나님이 주도권을 갖고 계신 거에요.
(삼상 10:3) 네가 거기서 더 나아가서 다볼 상수리나무에 이르면 거기서 하나님을 뵈오려고 벧엘로 올라가는 세 사람을 만나리니 한 사람은 염소 새끼 셋을 이끌었고 한 사람은 떡 세 덩이를 가졌고 한 사람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진 자라
그러면 사울 개인적 입장에서 나는 왕이 되었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사울이 왕이 되기 이전의 모든 경로가 누구의 솜씨에요? 하나님의 솜씨이고 이미 정해진 거지요. 그래서 사울이 왕이 된 후에는 누구를 증거해야 됩니까? 아까 육의 몸은 누구를 증거해요? 자기를 증거 하지요. 왜 시간 속에 있기 때문에 영의 몸은 누구를 증거 합니까? 나를 나되게 하신 예수님을 증거해야 되지요. 예수님을 증거할 때 우리의 어떤 위치를 고정시켜 증거 하느냐가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 나옵니다.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우리가 다른 사람의 등 위에 올라가면 “너 지금 어디에 올라가 있어?”하지요.
(갈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현대인들은 분주하게 움직이곤 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확정된 경로에 의하면 어떤 경로를 밟던 간에 성도는 십자가 위에서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다시 말해서 정욕과 탐심은 현재에서 미래로 발생되는 거에요. 내일은 이랬으면 좋겠다, 내년은 이랬으면 좋겠다를 십자가에 못 박았으니 예수님 앞에서 죽은 자가 되는 겁니다. 죽은 자가 될 경우만 성령의 사람이고 성령의 열매가 맺힌다는 거에요. 따라서 영의 사람은 이미 십자가 안에서 죽은 자로 취급 받기 때문에 본인이 증거 할 것이 없어요. 예수님만 증거합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 박으려면 우리 속에서 정욕과 탐심이 계속 일어나야 되요.
이 말이 어려워요. 우리 생각엔 그런 것들이 정지되면 좋겠는데 정욕과 탐심은 계속 움직여야 되요. 이것이 계속 움직인다는 말은 무엇을 증거하게 된다? 나 잘났어요 또는 나는 그나마 깨끗하게 살고 있습니다. 살려고 애를 씁니다. 누구 앞에서든 욕 얻어먹지 않고 반듯하게 살려고 나름대로 열심히 최선을 다합니다라는 것이 자기 증거용 멘트가 계속 일어나게 되어 있다는 말이죠. 일어나면 인간은 자기 증거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없어요? 못 벗어나지요. 못 벗어나기 때문에 본인의 노력과 헌신과 믿음, 소망으로 본인이 구원받지 못하는 겁니다.
성도는 성령과 함께 있기 때문에 자기 증거가 반복되는 육을 십자가에서 날마다 죽게 하시지요. 날마다 죽게 하는 것이 나름대로 깨끗하게 삽니다를 더불어 뭔가 예상하게 되고 뭔가 기대에 부풀게 되어 있어요. 예를 들면 애가 수능을 앞두고 있는데 엄마가 모임에서 모여서 나이트 가겠어요? 보통 배짱으로는 안 갑니다. 수능을 앞두고 지숙하는 모습을 보여야지요. 아들이 취직 시험 전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한 수 떠 놓지요. 왜 떠 놓습니까? 빌지요. 왜 빕니까? 나의 깨끗함으로 내 아들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도움이 될까 싶어서.
그런데 십자가는 뭐냐 하면 우리의 깨끗함을 요구하는 게 아니에요. 네가 깨끗이 안 하면 네 애 성적 떨어져가 아니라 네가 또 네 자식부터 생각하게 되면 나 자식 잘 키웠다! 자기 증거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인간은 예수님을 믿던 하나님을 믿던 자기 증거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이건 바로 죽여 버려야 되요. (맞습니다. 맞고요~.) 예상에서 벗어나게 해야 되요. 내 뜻대로 안되게 해야 되요. 그래서 자기 증거하는 이것이 바로 주께서 십자가에서 죽게 만든 원인 제공자였던 사실을 증거 해야 되요. 나 때문에 예수님이 죽었다는 것을 증거 해야 되요.
내가 자식 잘 되라고 철야 기도한 것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었다는 것을, 내 죄 때문에 죽었다는 사실. 세상 어떤 일이 일어나도 다 나는 이렇게 깨끗해, 역시 나는 깨끗하니까 이런 특권과 혜택을 누려도 마땅해! 역시 나는 고요하게 살만한 자격자가 되는 거야! 라는 것을 현재에서 미래로 추구하고 있고 원하고 있어요. 시켜만 주이소! 뭐든지 다하겠습니다. 나의 잘남과 깨끗함과 우수함을 증거할 수 있다면 뭔들 못하겠습니까? 뭐든지 하겠다는 거에요. 그런데 하나님의 방법은 사무엘 상 10장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10장에서 주 사람을 만나게 해요. 앞서 두 사람을 먼저 만나게 하고 총 다섯 사람을 만나게 하는데
10장 2절에 “네가 오늘 나를 떠나가다가 베냐민 경계 셀사에 있는 라헬의 묘실 곁에서 두 사람을 만나리니”에서 라헬의 묘실이라는 말이 왜 들어갔는지 얼른 보면 뜻이 잘 안 나타나요. 두 사람을 만나서 암나귀를 찾았다는 소식을 전하고 그 다음에 세 삶을 만나는데 하나님이 준비하신 사람들이에요. 하나님이 준비하셨다는 말은 예상치 못한 일을 차단과 단절을 지속시키시는 겁니다. 네가 구원되는데 있어 내가 설정한 모든 경로는 너의 예상을 빗나가게 하면서 건지는 거에요. 저 같은 경우엔 이것을 알잖아요. 일부러 이야기 할 때 예상한 이야기를 다 해버려요. 요렇게 되겠지! 요렇게 되겠지! 요렇게 되겠지!를 안 들어 주시기 때문에.
다음 3절은 구체적으로 나와요. 이렇게 구체적일 때는 잘 봐야 되요. 지금 이 세사람은 어디로 가냐 하면 벧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만나려는 겁니다. 방향이 하나님 쪽이에요. 사울은 어느 쪽입니까? 잃어버린 암나귀 찾으러 온 거에요. 암 나귀를 찾는 과정에서 먼저 두 사람을 마나고 나중에 세 사람을 만나는 겁니다. 4절에 보면 그들이 네게 문안하고 떡 두 덩이를 주겠고 너는 그의 손에서 받으리라고 하나님이 미리 알고 있어요. 하나님은 인공 지능 같아요. 앞에 일어날 모든 변수가 하나님의 손에서 나온 변수들이거든요. 우리가 걷는 발걸음도 그냥 걷는 게 아니에요.
(삼상 10:3) 네가 거기서 더 나아가서 다볼 상수리나무에 이르면 거기서 하나님을 뵈오려고 벧엘로 올라가는 세 사람을 만나리니 한 사람은 셋을 이끌었고 한 사람은 떡 세 덩이를 가졌고 한 사람은 한 가죽부대를 가진 자라 (삼상 10:4) 그들이 네게 문안하고 떡 두 덩이를 주겠고 너는 그의 손에서 받으리라
전부 다 필요한 세팅된 절차에 의해서 발걸음 걷는 거에요. 예전에 만화 영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톰과 제리에서 고양이가 쫒아가고 쥐는 도망가는데 도망치는 쥐가 빌딩 위로 올라갔는데 빌딩에서 허공 쪽으로 내 달려요. 옆 건물이 공사 중이어서 철근 구조물이 떨어지려는 쥐를 받아주니 무사히 도망가는데 그 뒤에 고양이가 따라 오잖아요. 그것을 쳐다보는 어린이들은 아슬아슬 해 하지요. 고린도 전서에 보면 위태로울 때 피할 길을 주신다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도 그 나라를 찾을 수 없어요. 제가 지난 낮 설교에서 했지요. 구해봐도 없어요. 두드려 봐도 뭐가 없어요. 문이 한 두 개라야지.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마 7:7) 우리에겐 관계없어요. 너는 네 오른 손이나 잘라라! 주님의 십자가와 같이 죽은 자에게 이미 주님이 기도해서 얻어 놓은 거에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 주셔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하시는데 우리는 협력된 선이 나와 연결 된 나의기대에 연속해서 선을 찾다보니까 항상 예상과 어긋나요. 자꾸 빗나가는 겁니다. 그래서 막 살아야 되요. 막 살고 주님의 솜씨를 한 번 보세요. 막 살아도 될 건 되더라 주의 은혜를 알건 알게 하시게 하는 겁니다.
떡 세 덩이에서 두 덩이를 줍니다. 염소 새끼와 포도주는 축복의 땅의 소산물이에요. 사울이 왕이 되는데 필요한 조건들은 지금은 율법대로 시행 안 하고 있지만 시행했다고 치고 얻을 수 있는 축복을 주고 사울로 왕이 되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사울은 하나의 역할자이고 배우에 지나지 않아요. 사울이 갖게 되는 왕이 되는 지위가 축복의 완료된 상태로 되겠지요. 사울은 단절되어 있지요. 암 나귀 찾다가 뭐가 됐어요? 자기가 찾지도 않은 왕 자리를 찾았지요. 그러면 사울 자체는 단절된 표본이 되지요. 단절의 표상이 되지요. 그렇다면 자기가 왕이 되고 난 뒤에 나는 될 수도 없는 인간인데 왕이 되었다는 단절을 계속 증거해야 되요.
쉽게 말해서 자기 잘남을 증거하면 안되고 하나님이 축복을 주셔서 왕이 되니까 누구의 지시를 따라야 됩니까? 하나님의 지시를 계속 따라야 계속 왕을 유지하는 겁니다.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도 주님의 은혜로 됐잖아요. 왜 우리가 하는 일이 잘 안 맞느냐? 뭔가 우리는 나와 주님 사이에 갑자기 내 행함, 자기 의, 자기 깨끗함, 자기의 순수함, 자기의 열심냄이 십자가 안에 섞여들어 갔기 때문에 주님께서 어긋나게 하시는 거에요. 그런데 우리는 무슨 일을 해놓고 마음에 들 때 자랑 질 안할 수 있어요? 없어요? 안 할 수 없는 거에요. 그러니까 죽을 때까지 누구와 동행해야 되요? 성령과 함께 동행해야지요. 그게 아까 본문 10장 11절에 나오지요.
(삼상 10:11) 전에 사울을 알던 모든 사람들이 사울이 선지자들과 함께 예언함을 보고 서로 이르되 기스의 아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 하고 (삼상 10:12) 그 곳의 어떤 사람은 말하여 이르되 그들의 아버지가 누구냐 한지라 그러므로 속담이 되어 이르되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 하더라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 ”오늘날 성도가 바로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성령과 함께 있어서 죽을 때 죽어야 되요. 스데반 집사처럼 죽어야 되요. 더 살려고 하면 안되요. 스데반 집사처럼 죽을 때 죽어야 되고 바울처럼 폭풍 속에서 죽어야 하는데 또 살 땐 살아서 로마까지 가줘야 되요. 그러니까 어떤 경우라도 육의 몸이 되어서 미래를 걱정하거나 두려워 할 필요 없이 미래는 누가 셑팅해 놨다? 주님이 알아서 해 놓았으니까 우리는 누구만 증거하면 되요? 예수님의 은혜로 지금 이 자리까지 왔고 천국가고 있습니다라고 십자가 덕분이라고 하면 되고 영광 돌리고,
“너는 왜 네 자랑 안 하냐?”나는 나 밖에 모르는 이기주의 입니다라는 이야기를 하면 되요. 나는 못돼 처먹어서 욕 얻어먹어도 당연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10분 쉽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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