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강의

대전강의-예수님증거, 다른세상 만들기 171226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1. 16.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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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향 (IP:211.♡.24.139)18-01-15 20:23 
예수님 증거 (삼상 9장 15-10장 7절) 
대전- 33강 

 이근호 


2017년 12월 26일 
 본문말씀: 사무엘 상 9:15-10:7 


 (삼상 9:15) 사울이 오기 전날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알게 하여 이르시되 
(삼상 9:16) 내일 이맘 때 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네게로 보내리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라 그가 내 백성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내 백성의 부르짖음이 내게 상달되었으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았노라 하셨더니 
(삼상 9:17) 사무엘이 사울을 볼 때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이는 내가 네게 말한 사람이니 이가 내 백성을 다스리리라 하시니라 
(삼상 9:18) 사울이 성문 안 사무엘에게 나아가 이르되 선견자의 집이 어디인지 청하건대 내게 가르치소서 하니 
(삼상 9:19) 사무엘이 사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선견자이니라 너는 내 앞서 산당으로 올라가라 너희가 오늘 나와 함께 먹을 것이요 아침에는 내가 너를 보내되 네 마음에 있는 것을 다 네게 말하리라 
(삼상 9:20) 사흘 전에 잃은 네 암나귀들을 염려하지 말라 찾았느니라 온 이스라엘이 사모하는 자가 누구냐 너와 네 아버지의 온 집이 아니냐 하는지라 
(삼상 9:21) 사울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니이까 또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나이까 하니 
(삼상 9:22) 사무엘이 사울과 그의 사환을 인도하여 객실로 들어가서 청한 자 중 상석에 앉게 하였는데 객은 삼십 명 가량이었더라 
(삼상 9:23) 사무엘이 요리인에게 이르되 내가 네게 주며 네게 두라고 말한 그 부분을 가져오라 
(삼상 9:24) 요리인이 넓적다리와 그것에 붙은 것을 가져다가 사울 앞에 놓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보라 이는 두었던 것이니 네 앞에 놓고 먹으라 내가 백성을 청할 때부터 너를 위하여 이것을 두고 이 때를 기다리게 하였느니라 그 날에 사울이 사무엘과 함께 먹으니라 
(삼상 9:25) 그들이 산당에서 내려 성읍에 들어가서는 사무엘이 사울과 함께 지붕에서 담화하고 
(삼상 9:26) 그들이 일찍이 일어 날 새 동틀 때쯤이라 사무엘이 지붕에서 사울을 불러 이르되 일어나라 내가 너를 보내리라 하매 사울이 일어나고 그 두 사람 사울과 사무엘이 함께 밖으로 나가서 
(삼상 9:27) 성읍 끝에 이르매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사환에게 우리를 앞서게 하라 하니라 사환이 앞서가므로 또 이르되 너는 이제 잠깐 서 있으라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네게 들려주리라 하더라 

(삼상 10:1) 이에 사무엘이 기름병을 가져다가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 맞추며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그의 기업의 지도자로 삼지 아니하셨느냐 
(삼상 10:2) 네가 오늘 나를 떠나가다가 베냐민 경계 셀사에 있는 라헬의 묘실 곁에서 두 사람을 만나리니 그들이 네게 이르기를 네가 찾으러 갔던 암나귀들을 찾은지라 네 아버지가 암나귀들의 염려는 놓았으나 너희로 말미암아 걱정하여 이르되 내 아들을 위하여 어찌하리요 하더라 할 것이요 
(삼상 10:3) 네가 거기서 더 나아가서 다볼 상수리나무에 이르면 거기서 하나님을 뵈오려고 벧엘로 올라가는 세 사람을 만나리니 한 사람은 염소 새끼 셋을 이끌었고 한 사람은 떡 세 덩이를 가졌고 한 사람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진 자라 
(삼상 10:4) 그들이 네게 문안하고 떡 두 덩이를 주겠고 너는 그의 손에서 받으리라 
(삼상 10:5) 그 후에 네가 하나님의 산에 이르리니 그 곳에는 블레셋 사람들의 영문이 있느니라 네가 그리로 가서 그 성읍으로 들어갈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산당에서부터 비파와 소고와 저와 수금을 앞세우고 예언하며 내려오는 것을 만날 것이요 
(삼상 10:6) 네게는 여호와의 영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 
(삼상 10:7) 이 징조가 네게 임하거든 너는 기회를 따라 행하라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 



 본문에서 사무엘과 사울이 만났는데 우리 보기에는 두 사람이죠. 그런데 사무엘의 행동이 멈짓 멈짓 합니다. 왜냐하면 사무엘이 사울과 함께 있지만 사무엘이 누구의 지시를 계속 받나 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지시를 받습니다. 사무엘이 무슨 지시를 받냐 하면 9장 15절에 보면 “사울이 오기 전날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알게 하여 이르시되 내일 이맘 때 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네게로 보내리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라 그가 내 백성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리라”이렇게 되어 있는데 분명히 남들 보기엔 사무엘은 혼자 있습니다. 거기에 사울까지 보태면 달랑 두 사람이에요. 사울은 사환하고 붙어있고 


 그러나 사무엘 본인은 남들이 보는 것처럼 자기를 보지 않고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가는데 그 이유가 이스라엘의 왕을 만드는 작업을 하는데 왕을 만드는 작업 중의 특징은 관계자 외에 출입금지에요. 관계 되는 사람들의 특징들이 사무엘 상 10장 10절에 보면 “그들이 산에 이를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그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 크게 임하므로 그가 그들 중에서 예언을 하니”관계자는 성신이 임해서 예언을 하는 사람들의 집합이에요. 왕을 만드는 작업은 여기서는 사울인데 사울은 어느 집단의 일부에요. 성신이 임한 집단중의 일부로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사람들이 요구를 하더라도 만드는 작업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누가 관여 하십니까? 성신이죠. 성신, 하나님의 신이 임하시죠. 여기서 백성들이 왕을 원할 때는 단절의 경로는 없어요. 그냥 자기들이 생각하는 왕이지요. 그러나 실제적으로 하나님이 왕을 만들 때는 성신이 임해야하는 조건 때문에 백성들이 기대하는 왕이면서도 중간에 차단이 있어요.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삼았지만 사무엘 상 10장 마지막 27절에 보면 “어떤 불량배는 이르되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겠느냐 하고 멸시하며 예물을 바치지 아니하였으나”이렇게 되어 있어요. 제가 오늘 강의 중에 예물에 대해 설명 할 건데요 

 인간들이 보는 관점이 있잖아요. 왕 다운 조건들이 있단 말입니다. 이 정도면 왕이다. 요새 같으면 투표하면 되는데 전혀 신임도가 없고 믿음도 가지 않는 자를 왕으로 뽑는다고 했을 때 백성들은 삐지는 겁니다. 우리가 원하는 타입은 아니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울을 일방적으로 왕으로 만들어 버렸어요. 그래서 왕과 백성 사이는 차단되어 있지요. 절연 또는 단절. 아까 산타크로스 이야기가 잠깐 나왔는데 사람들이 산타크로스가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사람인줄 알지요. 울지 않는 아이들에게 선물도 주고 동네방네에 두툼한 붉은 외투입고 모자 쓰고 한다 말이죠. 사람들이 이해되고 납득이 된다는 말이죠. 

이해되기 때문에 진짜 산타크로스 할아버지가 그 조건에 맞지 않으면 진짜 산타크로스는 사람들에게 배척 받을 거에요. 그렇지요? 인간들이 차단되니 않은 산타크로스를 원하기 때문에 그러나 하나님은 차단시켜 버렸어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눈에 보이는 왕을 얻는다는 사고방식 자체가 이미 하나님과 단절됨을 보여주는 사례가 되는 겁니다. 사람들의 출발은 자기들에게 왕이 필요해서 찾는데 그것은 나에게 필요한 신, 나에게 필요한 예수, 나에게 필요한 중보자, 나에게 필요한 산타크로스 할아버지, 나에게 필요한 위대한 지도자. 이 모두는 다 가짜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원하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천국은 가짜입니다. 내가 원하는 구원도 가짜가 되지요. 사무엘 상 9장과 10장을 통해서 이 점을 철저하게 보여주는 겁니다. 사무엘 상 8장을 보면 사람들이 왕을 원했고 하나님께서 왕을 허락한다는 언지가 있었습니다. 이젠 백성들이 기다리기만 하면 되요. “하나님이 왕을 허락하신데, 저 사람이 괜찮데, 그러니까 왕을 달라고 했으니 주시겠지!”그런데 왕을 주시는 작업에서 사람들의 생각엔 사람들을 모아 놓고 그 중에 인물이 제일 출중하고 잘 나가고 유명하고 특히 언론을 잘 탔던 요즘 말하면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그런 사람을 해야 할 텐데. 

사무엘 상 9장에 보면 어느 지파에, 베냐민 지파에 기스라 이름하는 유력한 사람이 있으니, 기스에게 아들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했는데 그 사람이 아들이 있었는데 이름은 사울이고 그의 아버지가 암나귀를 잃어버려서 찾아오라는 것이 신호탄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냐민 지파가 어떤 지파이냐 하면 사사기 마지막에 보면 까불다가 몰살당하는 지파입니다. 사사기에 보면 베냐민 지파 동네가 상당히 우범 지역이었던 모양이지요. 어느 레위 인이 첩과 그곳에서 투숙하다가 첩이 강간당하고 죽고 난 뒤에 그가 화가 나서 죽은 첩의 시체를 12토막 내서 12지파에 보내서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이스라엘에서 이렇게 막가는 범죄가 있을 수 있느냐 해서 각 지파들이 총 궐기해서 그 지역을 몰살해서 그 건달들을 죽이자 했는데 그 지역이 베냐민 지파의 지역이에요. 


베냐민 지파와 그 외의 지파가 싸움을 했어요. 그 후 베냐민 지파가 굉장히 위축되었고 숫자도 제일 작았고 심지어 다윗 왕 지나 솔로몬 왕 끝날 때도 베냐민 지파는 아주 희미한 이름도 없던 지파에요. 그래서 남북으로 나뉠 때 열 지파는 여로보암을 따라 빠지고 나머지 두 지파, 유다지파에 빌어 붙어서 있던 지파에요. 그 정도로 미약한 지파입니다. 미약한 지파에서 나왔다는 말은 12지파에게서 왕으로 인정받기 힘들다는 말이 되지요. 왕이라는 것은 권세를 적용 할 수 있어야 되요. 권세로 사람들을 휘어잡을 수 있는데 제일 미약한 지파에서 왕이 나왔다는 말은 모든 사람들에게 배척받을 요인이 되는 겁니다. 

암 나귀가 도망해서 온 동네를 돌아다닌 거에요. 사울이라는 사람의 특징은 암 나귀에 마음이 빼앗겨서 나라의 정치라는 것은 전혀 안중에 없던 사람이 사울이에요. 이 나라의 대통령 한 번 되어 볼까? 이런 거 전혀 없어요. 그저 자기 집에서 탈출했던 나귀는 어디 있니? 하고 찾아다니는 겁니다. 찾아다니며 기껏 생각하는 것이 국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집안의 암나귀, 가축은 재산이니까 그것 잃어버려서 찾다가 누구를 만나게 되냐 하면 사무엘과 만나게 되는데 사무엘이 현장엔 하나님이 계십니다. 오늘 날 우리에게 주는 이야기는 내가 어떻게 구원 되느냐? 할 때 나름대로의 자기가 구원되는 경로와 코스를 상당히 구체적으로 정립하고 있어요. 


사람들은 자기가 이렇게 구원 될 것이라고 정립하고 교회에 다닙니다. 심지어 절에 다니며 교회에 한번도 안 다닌 사람도 교회에 가면 나름대로의 내가 구원될 수 있는 경로와 코스를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 인간이 구원을 생각 할 때는 깨끗함을 생각하는데 나의 깨끗함, 나의 의라고 하지요. 반대로 추한 경우는 죄를 많이 지어 추하겠지요. 죄의식이 있어서 그래서 인간 나름대로의 생각은 추한 나, 내가 보기에도 저질인 나가 그나마 깨끗한 것을 양성화 시켜서 내 속의 작게 남아있는 깨끗한 요소, 양심적 요소를 부풀려서 장려하고 확장시켜서 점점 깨끗한 사람이 되어서 죽음의 순간이 왔을 때 나의 깨끗함을 들이 밀면서 나도 덩달아 구원 받기를 원하는 겁니다. 


이 방식으로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이 이것을 가만하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네 오른 손이 범죄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찍어 버리라는 것은 다음을 기약해라 뭐 이런 거 없어요. 좋은 게 좋은 거다 이런 게 없습니다. 나머지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낫다. 이 말은 인간들이 이런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나라는 몸에서 한 부분이 문제가 있으면 100%완벽하게 깨끗해야 되는데 요것이 하나의 오점이 된다면 오점을 도려내면 나머지라도 퍼펙트하게 완전하게 될 것이니까 만약에 아깝다고 나둬 버리면 나머지가 지옥 불에 들어간다고 했어요. 


 (마 5: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주님은 극단적이에요. 중간 지점이라는 게 없어요. 작은 암 세포 때문에 나머지가 지옥 간다는 겁니다. 도려내야 된다. 산상설교에 있어요. 산상설교대로 사는 사람을 보고 싶어요. 손 하나 잘리고 눈 하나 빠진 사람을 시험해 보고 싶어요. 남아 있는 눈으로는 죄 안 짓는지, 본인은 남이 있는 눈으로는 죄 안 짓는다고 우기기 때문에 갈 수 있다고 하는 것 아닙니까? 과연 그런지.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믿을 수 없는 말씀. 이것을 산상설교 찍어 버리라고 하는 것이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극단적으로 우리 앞에 가깝게 코 앞으로 밀어 냅니다. 이 정도 지키려면 지켜봐라! 이건 좀 심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내가 믿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거야! 


믿을 수 없는 말씀을 주셨다라는 것은 예수님은 천국에서 왔는데 인간들은 나름대로 자기들의 깨끗함을 장려하면 얼추 봐주지 않겠느냐는 건데 막상 천국에서 사셨던 분이 들이 밀면서 믿을 수 없는 말씀을 주시는 거에요. 믿을 수 없는 말씀을 주셨다라는 것은 네가 믿는다는 것 자체가 100% 거짓말이라는 거에요. 예수를 믿는다고요? 예수를 알기나 하면서 믿는다고 해야지. 가짜 산타클로스 250만 명 때문에 진짜 산타클로스는 반 산타클로스 취급받아 교도소에 가는데 교도소가면 다행이지 아예 사형 당하는데요. 그게 바로 십자가 사건 아닙니까?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우리보다 먼저 천국 가신 분이 참 부러웠다. 가신 분을 아시는 분이 소개해주면 나도 그처럼 살아서 천국에 합류하고 싶은데 라고 할 수 있어요. 자기 구원에 대해서 그러면 소개해 드릴께요. 스데반 집사. 이 분의 특징은 성령이 충만했어요. 죽었어요. 또 다른 사람 소개해 드릴까요? 사도 바울,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육체의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가겼다는 분, 마귀 나라에게도 유명한 분 , 마귀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고 한 분, 거꾸로 죽었던 베드로. 또 소개해 드릴까요? 

 (고후 11:21)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고후 12: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행 19:15)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이 분들의 특징은 본인조차 자신을 믿을 수 없다는 거에요. 내가 이럴려고 사도됐나? 난 왜 이러고 살지! 지금까지 강의 한 것을 응축하면 이렇습니다. 예상 못함이에요. 예상 못한 일입니다. 사울이 왕이 된다는 것은 본인도 예상 못한 일이에요. 왜냐하면 사람들은 나름대로 예상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사도 바울 입장에서 사무엘 상 이야기를 하기 전에 사울과 바울의 보게 되면 사도 바울은 인간의 몸을 둘로 나눴습니다. 육의 몸과 영의 몸으로 나눴어요. 육의 몸의 특징은 뭐냐하면 특징이 자기를 증거하는 겁니다. 신앙 생활을 자기 딴엔 열심히 한다고 하지요. 


갑자기 바쁜 일들이 생기고 여러 가지 말씀 듣는 시간이 없어진다고 할 수 있어요. 취직한다고 해서 그럴 경우의 특징이 뭐냐? 자기를 증거하는 모양새로 돌아서 있어요. 자기를 증거한다는 것은 나름대로의 깨끗한 것을 챙겨서 이것을 들이밀지요. 저는 아직도 깨끗한 편입니다. 다시 말해서 깨끗하냐? 안 깨끗하냐를 검사해 주세요라고 들이 미는데 주님께선‘저는’이라는 말이 왜 들어가냐? 하시는 거에요. 깨끗하냐? 안 깨끗하냐를 물어 볼 것도 없지만 그보다 먼저 저는 어때요?라고 자기 자신을 주님 앞에 들이 밀겠다는 자체가 하나님의 자기 백성 만들기와 노선이 전혀 달라요. 


육의 몸은 자기를 증거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를 증거하는 것이 많아요. 나는 교회를 몇 년 다녔다. 개척 교회에 다닌다. 성경 공부 많이 하러 다닌다. 다 자기 증거거든요. 영의 몸은 뭐겠어요. 반대로 예수를 증거하는 겁니다. 혼자여도 혼자가 아니고 1+ 0 = 2 남들 보기엔 1+0 = 1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2가 되는 나는 왜 오스트리아에 갔나?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나는 왜 콩쿨에서 또 떨어졌나?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그러면 어떻해서 육의 몸은 자기를 증거하고 영의 몸은 주님을 증거하는가를 보게 되면 육의 몸의 특징은 이렇습니다. 시간에서 못 벗어나요. 묵시로 갈 수 없고 시강의 인물로 태어나기 때문에 그 마음속에는 항상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져 있어요. 


과거는 2017년 12월 24, 25, 이라고 하면 24은 25일이 되면 그 밑으로 들어가고 그 다음도 25, 24, 23, 22.... 모든 과거는 누적이 되면서 현재가 되는 것이 아니고 기억을 할 때 자아가 되고 육이 몸이 되는 겁니다. 나는 바쁘다고 할 때 언제 ? 어제 바빴다. 어제 바빴다는 것을 기억하는 순간 나는 이미 내 안에 과거에 있던 일이 기억 창고에 일부 편집돼서 들어오면 지금의 나가 되면서 멈추는 게 아니고 여기를 기준해서 새로운 자아를 추구하게 됩니다. 이것이 미래에요. 내일은 오늘보다 깔끔하게 해야지! 내일은 누구를 만나야지! 이렇게 되면 여기에 형성되는 것이 뭐냐하면 ‘나’가 형성 되는데 

 여기서 ‘나’는 시간에 따라서 시간이 형성해 주는 나이기 때문에 육의 몸이 되요. 그래서 시간이 몸으로 형체가 될 때 시간이 어떤 형태를 만드는 것, 시간 덩어리로의 자아, 나 이것이 육의 몸입니다. 일반적으로 이렇게 살아가지 않는 사람이 없을까요? 있을까요? 다 이렇게 살아가잖아요. 예외가 없어요. 그냥 육 또는 몸 해도 말이 되요. 사울은 왕이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암나귀를 쫓아가는 거에요. 머릿속 엔 온통 무슨 생각뿐이겠어요? 나귀를 잃어 버렸다, 앞으로 할 일은 나귀를 찾는 것이다. 이게 바로 육이에요. 평소에 인간들이 하는 겁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자기 기억에 유리하고 보탬이 된 것은 기억에 추가 되겠지요. 그러면 남들 앞에서 누굴 증거 하겠어요? 자기의 기억에 들어 있는 활동 사항을 증거 하겠지요! 이것을 개인사 또는 개인의 역사라고 하는 데 팝송으로 치자면 My Way 그동안 나는 내 방식대로 살았다라는, 대중가요로 치면 시월의 마지막 밤. 결국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자기를 증거하면서 그냥 살아가는 겁니다. 이런 육에게 하나님은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앞으로 잘해주세요! 죽거든 천국 보내 주세요! 예수는 무슨 의미겠습니까? 앞으로 죽거든 천국 보내달라는 겁니다. 


천국과 자기는 단절이 있어요? 없어요? 단절이 없어요. 차단되지 않았습니다. 연속되어 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교회에 오는 거에요. 현재 지금 무슨 일을 하게 되면 과거의 죄는 없어지고 현재의 나를 미래의 천국에 있는 나를 천국 백성으로 집어넣을 수 있습니까? 가르쳐 주세요. 목사님! 하고 교회에 온다는 말이죠. 교회서 하는 말이 예수를 믿으세요라고 하거든요. 과거에 하던 행세를 가지고 지금 보다 더 깨끗해야 된다는 욕망, 희망추진성을 가지고 예수를 믿게 되니까 행함이 되는 겁니다. 옆 사람이 믿는 게 아니에요. 옆 사람이 믿어서 내가 구원 받으면 믿을 수 없는 사태가 되지요. 

내가 안 믿었는데 다른 분이 믿어서 내가 구원받는 그런 수가 있어요? 없어요? 육의 몸으로 없지요. 그런데 실제로 구원되는 사람은 누구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를 믿음으로서 우리도 구원받는다 말이죠. 도대체 믿을 수 있나요? 내 믿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내 열심과 소망, 사람을 인정하지 않아요. 우리는 육의 몸이니까 자기 과거에 미흡한 것을 미래엔 보상 받기를 원합니다. 오늘이 12월 26일이지요? 몇일만 지나면 송구영신하잖아요. 옛것은 보내고 새것은 받아들인다는 2017년은 끝납니다. 이때 나오는 노래 (auld lang syne) 석별의 정 부르면서 눈물 흘리면서 올 한해는 최순실 때문에 망친 대한민국 어떻게 해결하나 이렇게 할 텐데, 


미록 올해는 어두웠지만 밝아오는 새해처럼 2018년은 밝게 될 것이다라는 이것이 점점 더 자신을 가짜 천국, 지옥불로 미혹하고 유도하는 거에요. 그럴수록 훤해져요. 왜 지옥 불에 가깝기 때문에 1월 1일 새해에 뜬 태양처럼 얼마나 밝은지 몰라요. 그런데 사울은 점점 더 어둡습니다. 나귀는 어디로 갔는지 도대체 찾을 수가 없습니다. 순전히 육의 몸 개인적인 요구입니다. 사울은 개인적인 그리움에 잡히고 여러분! 그리움이 깊이 박히면 차라리 정신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인간의 그리움이란 게 처음에는 내가 그립잖아요. 나중엔 그리움 속에 내가 녹아져 버려요. 이것을 두 자로 오기라고 하는 거에요. 자기를 추스릴 것도 없어요. 


사울은 못 찾으면 그냥 집에 가면 되는데 오기가 어디까지 뻗쳤냐 하면 선지자를 찾아가잖아요. 16절을 보면 사울이 사무엘을 찾아오기 전에 하나님이 미리 사무엘에게 알려 주지요. 내일 이맘 때 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이 올 것이다라고 했지요. 그러면 이 이야기는 정말 믿기 힘든 것이 누가 누구를 만나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몰라요? 알아요? 다 아시지요. 사람으로 하여금 황당하게 주님께서 누구는 누굴 만나야 되고 어떻게 되고 마지막은 지옥가야 되고 누구는 천국가야 되는 것이 결정된 것 같으면 내가 열심히 하고자 했던 모든 것은 졸지에 의미가 없어져요. 그럴 것 같으면 내가 뭐하러 고생했나! 집에서 그냥 놀지! 괜히 걱정 했잖아! 


그런데 아까 제가 그리움이란 말을 했지요? 이미 하나님이 계획 잡았지만 그 계획 속에서 인간들은 나귀를 기어히 찾겠다는 그리움을 가지고 온 베냐민 땅을 헤메고 다니는 거에요. 결국 마지막에 사무엘에게 까지 갔는데 10장 3절에 보면 하나님이 사무엘을 통해 미리 알려 주시는 거에요. 이제 사울이 사무엘을 만났으니 세상 사람들이 보기엔 1+1=2가 아니고 1+1+0=3이고 주도권은 1+1이 아니고 0이신 분, 눈에 안 보이니까 없는 분이 되시는 하나님이 주도권을 갖고 계신 거에요. 

 (삼상 10:3) 네가 거기서 더 나아가서 다볼 상수리나무에 이르면 거기서 하나님을 뵈오려고 벧엘로 올라가는 세 사람을 만나리니 한 사람은 염소 새끼 셋을 이끌었고 한 사람은 떡 세 덩이를 가졌고 한 사람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진 자라 

 그러면 사울 개인적 입장에서 나는 왕이 되었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사울이 왕이 되기 이전의 모든 경로가 누구의 솜씨에요? 하나님의 솜씨이고 이미 정해진 거지요. 그래서 사울이 왕이 된 후에는 누구를 증거해야 됩니까? 아까 육의 몸은 누구를 증거해요? 자기를 증거 하지요. 왜 시간 속에 있기 때문에 영의 몸은 누구를 증거 합니까? 나를 나되게 하신 예수님을 증거해야 되지요. 예수님을 증거할 때 우리의 어떤 위치를 고정시켜 증거 하느냐가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 나옵니다.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우리가 다른 사람의 등 위에 올라가면 “너 지금 어디에 올라가 있어?”하지요. 

 (갈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현대인들은 분주하게 움직이곤 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확정된 경로에 의하면 어떤 경로를 밟던 간에 성도는 십자가 위에서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다시 말해서 정욕과 탐심은 현재에서 미래로 발생되는 거에요. 내일은 이랬으면 좋겠다, 내년은 이랬으면 좋겠다를 십자가에 못 박았으니 예수님 앞에서 죽은 자가 되는 겁니다. 죽은 자가 될 경우만 성령의 사람이고 성령의 열매가 맺힌다는 거에요. 따라서 영의 사람은 이미 십자가 안에서 죽은 자로 취급 받기 때문에 본인이 증거 할 것이 없어요. 예수님만 증거합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 박으려면 우리 속에서 정욕과 탐심이 계속 일어나야 되요.

이 말이 어려워요. 우리 생각엔 그런 것들이 정지되면 좋겠는데 정욕과 탐심은 계속 움직여야 되요. 이것이 계속 움직인다는 말은 무엇을 증거하게 된다? 나 잘났어요 또는 나는 그나마 깨끗하게 살고 있습니다. 살려고 애를 씁니다. 누구 앞에서든 욕 얻어먹지 않고 반듯하게 살려고 나름대로 열심히 최선을 다합니다라는 것이 자기 증거용 멘트가 계속 일어나게 되어 있다는 말이죠. 일어나면 인간은 자기 증거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없어요? 못 벗어나지요. 못 벗어나기 때문에 본인의 노력과 헌신과 믿음, 소망으로 본인이 구원받지 못하는 겁니다. 


성도는 성령과 함께 있기 때문에 자기 증거가 반복되는 육을 십자가에서 날마다 죽게 하시지요. 날마다 죽게 하는 것이 나름대로 깨끗하게 삽니다를 더불어 뭔가 예상하게 되고 뭔가 기대에 부풀게 되어 있어요. 예를 들면 애가 수능을 앞두고 있는데 엄마가 모임에서 모여서 나이트 가겠어요? 보통 배짱으로는 안 갑니다. 수능을 앞두고 지숙하는 모습을 보여야지요. 아들이 취직 시험 전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한 수 떠 놓지요. 왜 떠 놓습니까? 빌지요. 왜 빕니까? 나의 깨끗함으로 내 아들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도움이 될까 싶어서. 


그런데 십자가는 뭐냐 하면 우리의 깨끗함을 요구하는 게 아니에요. 네가 깨끗이 안 하면 네 애 성적 떨어져가 아니라 네가 또 네 자식부터 생각하게 되면 나 자식 잘 키웠다! 자기 증거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인간은 예수님을 믿던 하나님을 믿던 자기 증거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이건 바로 죽여 버려야 되요. (맞습니다. 맞고요~.) 예상에서 벗어나게 해야 되요. 내 뜻대로 안되게 해야 되요. 그래서 자기 증거하는 이것이 바로 주께서 십자가에서 죽게 만든 원인 제공자였던 사실을 증거 해야 되요. 나 때문에 예수님이 죽었다는 것을 증거 해야 되요. 


내가 자식 잘 되라고 철야 기도한 것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었다는 것을, 내 죄 때문에 죽었다는 사실. 세상 어떤 일이 일어나도 다 나는 이렇게 깨끗해, 역시 나는 깨끗하니까 이런 특권과 혜택을 누려도 마땅해! 역시 나는 고요하게 살만한 자격자가 되는 거야! 라는 것을 현재에서 미래로 추구하고 있고 원하고 있어요. 시켜만 주이소! 뭐든지 다하겠습니다. 나의 잘남과 깨끗함과 우수함을 증거할 수 있다면 뭔들 못하겠습니까? 뭐든지 하겠다는 거에요. 그런데 하나님의 방법은 사무엘 상 10장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10장에서 주 사람을 만나게 해요. 앞서 두 사람을 먼저 만나게 하고 총 다섯 사람을 만나게 하는데 


10장 2절에 “네가 오늘 나를 떠나가다가 베냐민 경계 셀사에 있는 라헬의 묘실 곁에서 두 사람을 만나리니”에서 라헬의 묘실이라는 말이 왜 들어갔는지 얼른 보면 뜻이 잘 안 나타나요. 두 사람을 만나서 암나귀를 찾았다는 소식을 전하고 그 다음에 세 삶을 만나는데 하나님이 준비하신 사람들이에요. 하나님이 준비하셨다는 말은 예상치 못한 일을 차단과 단절을 지속시키시는 겁니다. 네가 구원되는데 있어 내가 설정한 모든 경로는 너의 예상을 빗나가게 하면서 건지는 거에요. 저 같은 경우엔 이것을 알잖아요. 일부러 이야기 할 때 예상한 이야기를 다 해버려요. 요렇게 되겠지! 요렇게 되겠지! 요렇게 되겠지!를 안 들어 주시기 때문에. 


다음 3절은 구체적으로 나와요. 이렇게 구체적일 때는 잘 봐야 되요. 지금 이 세사람은 어디로 가냐 하면 벧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만나려는 겁니다. 방향이 하나님 쪽이에요. 사울은 어느 쪽입니까? 잃어버린 암나귀 찾으러 온 거에요. 암 나귀를 찾는 과정에서 먼저 두 사람을 마나고 나중에 세 사람을 만나는 겁니다. 4절에 보면 그들이 네게 문안하고 떡 두 덩이를 주겠고 너는 그의 손에서 받으리라고 하나님이 미리 알고 있어요. 하나님은 인공 지능 같아요. 앞에 일어날 모든 변수가 하나님의 손에서 나온 변수들이거든요. 우리가 걷는 발걸음도 그냥 걷는 게 아니에요. 


 (삼상 10:3) 네가 거기서 더 나아가서 다볼 상수리나무에 이르면 거기서 하나님을 뵈오려고 벧엘로 올라가는 세 사람을 만나리니 한 사람은 셋을 이끌었고 한 사람은 떡 세 덩이를 가졌고 한 사람은 한 가죽부대를 가진 자라 
(삼상 10:4) 그들이 네게 문안하고 떡 두 덩이를 주겠고 너는 그의 손에서 받으리라 


 전부 다 필요한 세팅된 절차에 의해서 발걸음 걷는 거에요. 예전에 만화 영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톰과 제리에서 고양이가 쫒아가고 쥐는 도망가는데 도망치는 쥐가 빌딩 위로 올라갔는데 빌딩에서 허공 쪽으로 내 달려요. 옆 건물이 공사 중이어서 철근 구조물이 떨어지려는 쥐를 받아주니 무사히 도망가는데 그 뒤에 고양이가 따라 오잖아요. 그것을 쳐다보는 어린이들은 아슬아슬 해 하지요. 고린도 전서에 보면 위태로울 때 피할 길을 주신다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도 그 나라를 찾을 수 없어요. 제가 지난 낮 설교에서 했지요. 구해봐도 없어요. 두드려 봐도 뭐가 없어요. 문이 한 두 개라야지.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마 7:7) 우리에겐 관계없어요. 너는 네 오른 손이나 잘라라! 주님의 십자가와 같이 죽은 자에게 이미 주님이 기도해서 얻어 놓은 거에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 주셔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하시는데 우리는 협력된 선이 나와 연결 된 나의기대에 연속해서 선을 찾다보니까 항상 예상과 어긋나요. 자꾸 빗나가는 겁니다. 그래서 막 살아야 되요. 막 살고 주님의 솜씨를 한 번 보세요. 막 살아도 될 건 되더라 주의 은혜를 알건 알게 하시게 하는 겁니다. 


떡 세 덩이에서 두 덩이를 줍니다. 염소 새끼와 포도주는 축복의 땅의 소산물이에요. 사울이 왕이 되는데 필요한 조건들은 지금은 율법대로 시행 안 하고 있지만 시행했다고 치고 얻을 수 있는 축복을 주고 사울로 왕이 되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사울은 하나의 역할자이고 배우에 지나지 않아요. 사울이 갖게 되는 왕이 되는 지위가 축복의 완료된 상태로 되겠지요. 사울은 단절되어 있지요. 암 나귀 찾다가 뭐가 됐어요? 자기가 찾지도 않은 왕 자리를 찾았지요. 그러면 사울 자체는 단절된 표본이 되지요. 단절의 표상이 되지요. 그렇다면 자기가 왕이 되고 난 뒤에 나는 될 수도 없는 인간인데 왕이 되었다는 단절을 계속 증거해야 되요. 

쉽게 말해서 자기 잘남을 증거하면 안되고 하나님이 축복을 주셔서 왕이 되니까 누구의 지시를 따라야 됩니까? 하나님의 지시를 계속 따라야 계속 왕을 유지하는 겁니다.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도 주님의 은혜로 됐잖아요. 왜 우리가 하는 일이 잘 안 맞느냐? 뭔가 우리는 나와 주님 사이에 갑자기 내 행함, 자기 의, 자기 깨끗함, 자기의 순수함, 자기의 열심냄이 십자가 안에 섞여들어 갔기 때문에 주님께서 어긋나게 하시는 거에요. 그런데 우리는 무슨 일을 해놓고 마음에 들 때 자랑 질 안할 수 있어요? 없어요? 안 할 수 없는 거에요. 그러니까 죽을 때까지 누구와 동행해야 되요? 성령과 함께 동행해야지요. 그게 아까 본문 10장 11절에 나오지요. 


 (삼상 10:11) 전에 사울을 알던 모든 사람들이 사울이 선지자들과 함께 예언함을 보고 서로 이르되 기스의 아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 하고 
(삼상 10:12) 그 곳의 어떤 사람은 말하여 이르되 그들의 아버지가 누구냐 한지라 그러므로 속담이 되어 이르되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 하더라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 ”오늘날 성도가 바로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성령과 함께 있어서 죽을 때 죽어야 되요. 스데반 집사처럼 죽어야 되요. 더 살려고 하면 안되요. 스데반 집사처럼 죽을 때 죽어야 되고 바울처럼 폭풍 속에서 죽어야 하는데 또 살 땐 살아서 로마까지 가줘야 되요. 그러니까 어떤 경우라도 육의 몸이 되어서 미래를 걱정하거나 두려워 할 필요 없이 미래는 누가 셑팅해 놨다? 주님이 알아서 해 놓았으니까 우리는 누구만 증거하면 되요? 예수님의 은혜로 지금 이 자리까지 왔고 천국가고 있습니다라고 십자가 덕분이라고 하면 되고 영광 돌리고, 


“너는 왜 네 자랑 안 하냐?”나는 나 밖에 모르는 이기주의 입니다라는 이야기를 하면 되요. 나는 못돼 처먹어서 욕 얻어먹어도 당연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10분 쉽시다.

 주향 (IP:211.♡.24.139)18-01-15 20:27 
다른 세상 만들기 (마 24장 21-25 절) 
대전- 95강 

 이근호 


2017년 12월 26일 
 본문말씀: 마태복음 24: 21-25 


 (마 24:21)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마 24:22)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마 24:23)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마 24: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마 24:25)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그리스도라 하는 것은 구원자를 이야기합니다. (구원자를 찾는다. = 종말의 현상) 징후, 징조가 된다는 밀입니다. 내가(여기 있다)에서 다른 나라(천국)에 가겠다는 이야기이죠. 왜 (여기)에 살면 안 되느냐? (여기)가 갑자기 살기 힘들어 졌어요. (여기)에선 고통스러우니까 (저기=천국)로 가겠다는 겁니다. 방금 제가 구원자를 찾는 것이 종말의 징조라 했지요. 이 공식이 굉장히 중요한데 몇 년부터 몇 년까지가 종말이 아니고 구원자를 원하면 다 종말의 징조가 되는 거에요. 

나이가 80정도 되면 검버섯이 피부에 점점 생기고 새치도 하나 둘씩 생기잖아요. 구원자를 찾는 일이 벌어지면 벌어질수록 종말의 징조가 되는 거에요. 이미 종말로 들어 선 겁니다. 몇 년부터 몇 년까지 2020년? 이러지 마세요. 어려워서 살려 주세요하면 그것이 종말의 징조가 되는 겁니다. 종말이 언제 부터인가? 이것이 조심해야 되고 어려운 겁니다. 이것이 왜 어려우냐 하면 사람들의 생각에는 세상에서의 삶이 고통스럽다든지 힘드니까 힘듦에서 벗어나면 힘 안들고 편하다가 되잖아요. 이 발상 자체가 잘못되었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힘든 이곳에 천국을 만드시기 때문에 현재 사람들이 아는 세계, 이것을 다른 말로 현실 이라고 합시다. 현실 속에 다른 세계를 만드십니다


이 세상에서 돌아가는 방식과 전혀 안 통하고, 전혀 공통점이 없는 방식으로 다른 세계를 만들어요. 그러면 그 세계가 어떻게 만들어 지는가? 하는 것은 이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 지느냐를 알게 되면 그것과 정 반대로 생각하면 되겠지요. 왜 정 반대이냐하면 십자가 사건 때문에 그렇습니다. 십자가 사건의 특징이 뭐냐하면 첫 째는 아무도 몰랐다에요. 몇몇은 알았다하면 안돼요. 아무도 몰랐다! 모든 인간은 그 새로운 세계에 대해서 보탬이 된 적도 없고 협조한 적이 없다가 돼야 되요. 인간은 서로 공통적인 요소가 있잖아요. 한 사람, 한 사람 네 명이 있다면 네 명 중에 공통적인 요소가 이 세상을 형성하는 거에요. 

이 공통적인 요소를 언어라 합니다. 언어 속에는 글자도 있지만 숫자도 있어요.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숫자부터 배우잖아요. 숫자를 배워야 나중에 장사라도 하지요. 적어도 구구셈은 할 줄 알아야 손님들에게 안 당하잖아요. 숫자라는 것은 공통적인 약속입니다. 약속은 교환이에요. 줄 것 주고 받을 것 받으면 잘 사는 겁니다. 영덕에는 대게가 잡히지요. 안동에는 삼베인데 서로 교환해서 나눠야 되지 아니면 맨 날 삼베 옷만 입으면 굶을 수 도 있고 대게만 먹고 벌거벗고 다니면 안 되잖아요. 인간 사회는 장터를 통해서 교환이 되요. 교환을 통해서 서로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B.C 3300년경 전에 만든 것이 언어입니다. 서로 장사하고 무역하기 위해 만든 것이 숫자입니다. 


우리가 인간 세상에 대해 잘 알지요. 인간 세상이란 나를 살리는 것, 끝. 내가 살아 온 방식으로 나를 살리는 것. 줄 것 주고 받을 것 받겠다는 겁니다. 피아니스트 선우 예본 콩쿨에서 우승해서 너는 왜 피아노를 하냐고 하니까 생계형으로 한다는 거에요. 콩쿨에서 돈이 안 나오면 집이 가난해서 피아노를 계속 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피아노치고 돈 받고 철저히 자본주의지요. 어떤 인간도 창기가 아닌 자가 없어요. 몸 바쳐서 돈 버는 겁니다. 몸 바친다하니까 논개가 생각나는데 논개는 몸 바쳐서 나라 구하겠다고 했는데 왜 나라를 구해야 하나? 그 나라가 자기의 장터이니까. 


이것을 주일 낮 설교에는 소속감이라 했어요. 낮 설교가 정말 어려운 설교였어요. 인간은 소속감이 있으면 거기서 자아가 형성돼요. 세상을 보는 비판의 눈도 자기 소속에서 나와요. 자기 소속을 대변해서 세상에 대해 비판하는 것도 소속을 지키는 것이 자기를 지키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같은 교회 집사라고 잘 지내다가 권 씨는 양반이 아니다하면 십자가에서 피로 같이 은혜 받고 좋아하다가 안동 권씨 나오면 다 깨져요. 소속이 자기는 안동 권 씨라는 거지요. 예수 피 소속이 아니고 안동 권 씨 소속이라는 거에요. 서로 친하게 지내다가 연대, 고대 나왔다고 서로 싸우고 이런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인간이라는 것은 철저하게 세상이 생산한 거에요. 환경에서 생산되지 본인이 세상을 이용할 입장이 못 됩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어떤 병원이 미국에서 고가의 장비를 들여왔다면 돈을 주고 사왔으니까 이제 미국의 회사를 볼일 없다고 생각하는데 오래 사용하다보면 고장이 나잖아요. 그러면 부속은 어디서 구해요. 판매한 곳에서 기사가 와야되고 부속도 가지고 와야 되잖아요. 결국 뭡니까? 물건을 파는 게 아니고 그 쪽 세계가 이 쪽 세계를 종속시키는 거지요. 그 쪽의 힘을 파는 거에요. 권력을 판 거에요. 그렇게 엮이는 겁니다. 이 장터 의식 때문에 총각, 처녀들이 결혼을 안 해요. 

자기 소속을 더 키울 수 있는 여자를 얻고 남자를 얻어야 돼서 그렇게 되요. 그래서 세상은 언어로 되어 있는데 언어에는 권력, 힘이 실린다. 왜냐하면 아까 교환하다고 했는데 교환하다고 하니까 왠지 동등해 보이고 균형 있어 보이지요. 아닙니다. 언어에는 명령자가 있고 명령 받는 자로 구성되어 있어요. 그 사이에 있는 것을 법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줬잖아요. 왜 주었냐?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살던 사람들이라 그렇습니다. 육의 
 몸, 명령에 이미 길들여져 있어요. 법이 없으면 뭘 할지도 모르는 자들이에요. 율법이 오기 전에 그들은 맹탕이 아니였습니다. 

애굽에서 신을 섬기던 방식 그대로 그것이 법인줄 알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출애굽기 32장 8절에 우상 만들어 놓고 금 송아지 만들고 섬기는데 하나님께서 그 법을 적용시키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섬기는 그 권력 배후에 출애굽기 32장 8절에 자기를 위하여라고 되어 있어요. 출애굽기 20장 4절도 봅시다. 십계명이 나오는데요. 사람들이 십계명을 그렇게 많이 설명 하면서도 이것을 놓쳐 버려요. 너를 위하여. 무슨 뜻이냐 하면 십계명을 주실 때 먼저 정신을 이야기 하신 것이 있지요. 출애굽기 20장 2절에 어떤 하나님이라고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하나님. 


 (출 32:8)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예배하며 그것에게 제물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출 20: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출 20: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하나님은 사건이잖아요. 법이 아니고 사건이다는 말이죠. 애굽에서 종 되었던 곳에서 건졌다라는 것은 사건 속에 나타나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십계명을 줄 때 동일한 사건을 내용으로 담아서 십계명을 지키라는 말입니다. 종이면 애굽의 종이지요. 애굽은 힘이잖아요. 종으로 생활할 때 무엇으로 전달 받았습니까? 언어로 전달 받았어요. 법으로 전달 받았어요. 이제는 기존의 세상 법에 지시 받던 식으로 인생을 살았던 너희들을 건진 동시에 너희는 그 세상에서 종이었다고 규정해 버리시는 겁니다. 세상 법에 종이었다. 법의 종이었어요. 종이었다는 말은 법이 더 세고 종은 법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리 학대를 당해도 반항하지 못했어요. 사회학자 중에서도 깨인 사람이 있는데 힘들다고 반항하는 것이 아니다, 소속에 이미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힘들다고 반항하지 않아요. 먹을 것을 더 달라, 세금을 삭감해 달라 그 정도이지 정권 교체는 상상도 못하는 겁니다. 히브리인들이 애굽의 바로에게 온 것은 힘들지 않음을 요구했지 정권을 달라고 요청한 적은 없어요. 왜냐하면 이미 종 되었기 때문에 이 세상의 종이 되어 버렸거든요. 십계명을 지킨다는 것도 그 사건을 사건답게 증거 하는 것 또는 사건의 능력을 방출하는 의미로 십계명을 지켜야 겠지요. 


그러면 십계명 사건의 전과 후가 있는데 전에는 내가 ~한 종이었는데 지금은 거기에서 자유하다는 거잖아요. 십계명의 열 번째는 탐내지 말라고 했지요. 탐내지 말라를 지키려면 우리가 탐을 내는 게 아니고 탐심의 종이 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되겠지요. 사건이 오기 전에 우리가 법을 지킨다는 애굽적 사고방식이고 생활 방식이었는데 십계명 사건 앞에서 중립에서 벗어나서 사건되기 이전의 상태의 위치로 가야 되겠지요. 나를 위해서 나는 이 법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부모를 공경하되 나를 위해서 공경했다. 부모를 위해서가 아니고 나를 위해서, 간음을 하지 않거나 살인하지 하지 않는 것도 나를 위해서였다. 

이것이 바로 십계명을 위반하는 겁니다. 모든 바탕이 나를 위해서였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애굽의 법이 아닌 새로운 법이 아니고 법을 지키는 사람을 어디를 경유하게 하냐하면 죽음으로 통과시키시는 겁니다. 죽음으로 통과시키게 되면 그들은 십자가 사건 이전에 먼저 통과해야 되는 것이 애굽에서 나올 때 죽음의 사건이 있었잖아요. 죽음의 사건을 반복하는 것이 십계명을 지키는 거에요. 그 죽음의 사건에 참여하기 위해서 제사법이 주어지는 겁니다. 제사법이 동행한다는 것은 그때의 하나님이 동행한다는 것이에요. 십자가 지신 분과 늘 함께 하는 것. 


지난 주일 설교 때는 몇 십 년 만에 너무 고요했어요. 자고 있다는 것이 아니고 제가 너무 심하게 몰아부쳤나? 끝 시간에 는 이왕 시작한 거 갈 때까지 가보자고 했는데 인간은 저주 받을 수밖에 없어요. 왜 저주 받아야 되느냐면 이미 율법을 통해 인간은 그것을 못 지킨다는 것이 마지막 때를 통해서 다 들어 났어요. 드러난 상태를 악한 세대라고 합니다. 악한 세대에서 우리의 몸은 이미 저주 받아야 되는 몸이라고 규정 되면서 우리 하나하나가 아담의 일부로, 개별자로 확연히 폭로가 된 거에요.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아담이기에 아담의 후손이기에 법을 위반할 수밖에 없고 저주도 와야 된다는 겁니다. 

이 사실이 누가 왔을 때 확인 됐냐하면 아담의 몸에 누가 관여를 했냐하면 하나님 되시는 예수님이 아담의 몸으로 오셨잖아요. 그러면 이 악한 세대에서 기쁜 소식이 뭐냐하면 예수님께 자기 몸을 드렸다 말이죠. 그리고 부활하셨잖아요. 빠져나갈 구멍을 주셨잖아요. 예수님의 죽이시는 죽음에 동반하면 되요. 이미 법 앞에서의 저주가 되었으니 우리는 죽은 몸이 되는 거에요. 연말에 크리스마스 날 대전 중심가에 돌아다니면 자기가 살아있는 몸 인줄 아는데 배추 속 넣고 김장하는 것도 주님 보시기에 저주의 법 앞에서 죽은 몸이다는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이 오셔서 죽었잖아요.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의 본 모습을 보여 준 거에요. 몸을 가진 인간은 저렇게 아버지에게 저주 받는구나라고 알려 줬으면 이미 우리는 운명하신 거에요. 제가 예를 들었었잖아요. 이불이 있는데 왜 작나 하면 아이가 있어서 다 빼기고 발이 나와 시원한데 다 덮어 주듯이 예수님의 피 묻은 담요가 덮어주는 거에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덮어주는 거에요. 장례식 치루면서 입관 예배 할 때 하얀 천으로 다 덮어 주잖아요. 이게 바로 복음이란 말이죠. 이것만 자랑해야 된다는 말이에요. 복음이 뭐냐하면 기존의 이 땅에 법에 저촉을 안 받아요. 이게 중요한데, 

기존에 땅에서 어떤 짓거리를 해도 복음을 위반한 짓거리가 아니라고 이미 분리되어 있다는 말이죠. 복음을 위반한 것이 아니라고 분리되어 있어요. 대표적인 것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 있잖아요. 주님께서 지난 낮 설교를 그대로 적용시켜요. 이 중에서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해서 모든 인간을 율법 안으로 다 집어 쳐 넣어요. 하고 땅에 글씨를 쓰셨어요. 자신들은 깨끗하다고 여기고 자신들보다 더러운 짓 한 사람을 돌로 치려고 하다가 보니까 주님이 쓰시는 말씀을 보니 자신들이 쳤다가는 그 다음 차례는 누구이다? 자신들이 친 돌로 당할 차례이기 때문에. 


비겁한 인간들! 치고 자신들은 빠지면 되는데 안 치고 안 당하겠다는 거에요. 늙은이로부터 젊은이까지, 여기서 늙었다라는 말은 누적된 죄가 많다는 거에요. 죽을 때까지 계속 누적되는 거에요. 아무도 없다는 말은 예수님 앞에서 남을 이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정죄 할 수 있는 사람은 예수님 밖에 없어요. 예수님이 여인을 정죄 할 때는 다른 법을 적용시키시는 겁니다. 예수님을 아는 법. 그 사람을 용서하는 법이 아니에요. 이게 어려워요. 너를 용서해 줄께가 아니라 예수님께 종속되는 법을 준 겁니다. 왜냐하면 살아있으면 또 죄를 져요. 따라서 예수님께 종속되야 되요.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다른 말로 하면 진리 안에 들어온다. 너는 내 안에 들어 온다 내 안까지 들어와! 내 품에 안겨! 이것을 사도 바울은 예수 안이라고 이야기 하는 거에요. 그렇다면 사단이 어디까지 쫓아오겠습니까? 사단은 뭐를 쥐고 있어요? 이미 선악과 구조를 심어 줄 때부터 인간이 사단에게서 못 벗어나는 이유는 선과 악 두 개의 주체로 되어 있거든요. 다시 말해서 온전한 주체가 아니다라는 말이죠. 아무리 선을 행해도 선을 행하고 나면 과제가 또 주어져요. 보다 더 철저하게 선해야 되는데, 

만약에 고아를 돌본다. 몇 명? 다섯 명인데 일곱 명이었으면 어땠을까? 일곱 번 용서해 줬습니다. 일곱 번 용서 할 사람도 없겠지만 일곱 번 용서했다고 합시다. 일곱 전 용서 할 때 일곱 사람을 용서하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한 사람을 계속 일곱 번 용서해주는 거에요. 일곱 번 용서해 준 다음 여덟 번 용서해 줬으면 어떨까? 더 선하지 않을까요? 예수님께선 몇 번 용서하라 했지요? 일흔 번씩 일곱 번에까지라도 하라 했으니까 490번 용서했다고 칩시다. 그런데 이게 족할까요? 491번째가 남아 있는데? 이것이 바로 인간의 양심에 호소하고 사단에게서 못 벗어나는 요소이지요. 


선과 악 사이에 분리되어 있는 두 개를 바라보면서 그 사이에 끼여 있고 법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되어 있기 때문에 사단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겁니다. 이런 것을 자랑하는 것이 바리새인인데 그래서 그들에게 산상설교를 이야기 한 겁니다. 마음속으로 간음 한 것도 간음이다라는 법을 더 강화? 숙제를 더 줘 버렸어요. 아까 말했듯이 오른 손이 잘 못 했으면 잘라 버리고 오른 눈이 잘 못 했으면 빼어 내버리라 했으니까 오른 손 자르고 오른 눈 빼고 잘랐습니다하고 오면 뭐라 합니까? 그 다음에 “오른 발가락 잘라라!” 완전히 다 잘라도 안돼요. 


 (마 5: 29)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마 5: 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왜냐하면 이미 아담의 몸은 사단에게 종속되었기 때문이에요. 지금 주님은 우리에게 낯선 몸을 제공하시는 겁니다. 친숙한 것이 아닌 낯선 이에요. 우리는 무엇에 익숙합니까? 몸이 살아가는 모습이 친숙해요. 그게 뭐였다? 지금까지 이야기 한 것이 법이죠. 법은 교환이고 약속이고 서로 간의 교류이지요. 간장 있으면 빌려 주세요해서 빌려 줬는데 다음에 필요한 것을 아쉬울 때 서로 주고받는 사이에 알게 모르게 서로 교류가 되는 거에요. 언어라는 게 그래요. 그런데 사회는 불균형하기 때문에 같은 명령을 해도 먼저 명령한 사람의 명령이 먹혀들어간다니까요. 


자! 불이 났습니다. 내가 만약에 현장 검증 책임자입니다. 그러면 현장 검증을 할 때 관계자 외에는 출입금지라고 되어 있다는 말이죠. 여기서 관계자가 누구냐 하면 현장검증 할 수 있는 자질을 가진 특수 장비를 사용할 수 있는 자이고 나머지는 대통령이라도 오면 안 되잖아요. 그런데 국회의원이 거기에 왜 옵니까? 자기가 전문가도 아닌데 왜 왔냐 하면 충북 경찰청장에게 전화가 와서 왔다는 말이죠. 이게 바로 세상이잖아요. 법대로 만 됩니까? 힘 있는 자가 법을 위반하면서 법이 하나 더 추가 됐지요. 어떤 법이 추가 됐습니까? 현장 검증을 할 때 관계자 외에는 출입하지 마라 단, 그 지역의 국회의원은 빼놓고. 

그렇게 법이 추가 됐지요. 그러니까 법은 정의를 외치지만 법은 가진 자들의 권력을 계속 지속하기 위해 생성되는 거에요. 교회의 법은 뭡니까? 복음의 법 밖에는 없지요. 십자가 은혜 밖에는 없지요. 그런데 교회에 목사가 들어섰다 그 다음에는 (예수님의 법 + 목사 법)이 등장해요. 그런데 애굽에 살던 교인들은 이게 더 친숙해요. 목사도 우리와 같은 교인이라는 것이 오히려 낯설게 여겨지고 목사님은 기름 부음 받았기 때문에 주님이 알아서 할 문제이지 우리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다. 이렇게 나오는 거에요. 그것 때문에 죽으신 분이 예수님인데,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반한 이야기가 성경에 나오지요. 

교인들이 성경책도 안 보는 모양이라 베드로가 예수님을 왜 배반했어요? 예수님보다 누가 더 힘이 세다? 그 당시에 예수님을 처단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쪽이 예수님보다 더 힘이 세다고 본 겁니다. 본디오 빌라도하고 생각이 별로 틀린 게 아니에요. 그런데 성령이 오시게 되면 이상한 세계를 만들더라 이상한 세계를 이 땅에서 만들어요. 그러면 위에서 보면 세상에선 종말의 징후처럼 구원자를 원하지요. 그리스도를 원하지요. 23절을 봅시다.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고 했지요. 자! 그리스도가 한명입니까? 혹은 두 명입니까? 세 명입니까? 난리도 아니에요. 계속 나오지요. 


그런데 그 그리스도는 본인들이 살기 힘들기 때문에 찾지요. 본인들에게 익숙한 세상을 붙잡기를 원하는데 지금 주어진 형편이 익숙한 세상에서 어렵게 만드니까 익숙한 세상을 계속 지속하기 위해서 저를 구원해 주세요라고 구원자를 부르는 겁니다. 요즘 이런 시대 대표적으로 유행하는 것이 지하 벙커 주택 구입하기. 지하 벙커로 들어간다고 그 삶이 현재와 같을까요? 다를까요? 생활하는 방식이 똑 같겠지요. 생수 마시고 라면 끓여 먹는다고 하던 게 달라지지 않고 똑 같이 하는 거에요. 그런데 예수님의 삶을 봅시다. 예수님의 삶이 낯선 입니까? 아니면 친숙입니까? 낯설지요? 


같은 언어를 사용해도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말을 사용해 버려요. 설명을 해 주는데 설명을 해줘도 몰라요.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숱한 메시야, 그리스도가 등장 했다 치고 모든 것과는 차별되는 그리스도를 말해요. 모든 그리스도를 다 모아 놓고 고르기를 하는 겁니다. 그 중에서 유독 하나만 다르고 다른 것은 동일한 것이 어디 있을까? 찾는데 구약의 열왕기 상에 나오는 미가야 선지자 대 400명의 거짓 선지자였고 엘리야는 450대 1로 붙었습니다. 숫자가 1이잖아요. 엘리야 때 는 남은 자의 개념인데 본문 22절에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이제부터의 설명이 중요합니다. 남은 자라고 할 때 제가 남은 자가 되겠습니다라고 하면 아무도 남은 자가 될 수 없어요. 외부에서 깎아줘야 되요. 대리석을 (네모 반듯하게) 깎듯이 처음엔 다윗의 형상이 없어요. 그런데 석공이 자릅니다. 조각 들이 떨어져 나가지요. 나중에 완성품을 보면 다윗이 활 쏘는 모습으로 되어 있듯이 다듬어진 건장한 다윗의 모습이 나오잖아요. 우리에겐 소속감이 있어요. 기도 할 때 차마 하지 못하지만 은근히 원하고 바라는 게 있는 것이 뭐냐하면 이 세상 살 때 좀 편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나에게 누가 손 벌리지 않고 내가 자랑하고 싶은 일들이 많아지고 이왕 사는 거 편안하고 자랑하며 살 수 있는 것. 


이 두 가지 외에 다른 거 더 필요한 게 있습니까? 편안함 속에는 건강도 포함됩니다. 편안하고 당당하게 자랑거리가 있다면 이 두 가지가 충족되는 것을 행복이라고 하지요. 신해철이라는 가수가 얼마 전에 수술 받고 죽었잖아요. 그 가수가 철학관에 갔는데 그곳에 간 목적이 인생은 왜 사느냐? 인생이 무슨 의미 때문에 존재하느냐? 그것이 알고 싶어 철학관에 갔었답니다. 결론은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산다는 겁니다. 여기에 반대되는 것이 지난 낮 설교입니다. 저주를 증거하기 위해 인간이 태어났다는 것. 저주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저주를 증거하기 위해서 이게 저주이다 저주 받는 것을 보고 싶으면 내 상황을 봐라! 

아담의 몸은 이미 흙이기 때문에 근거가 아담의 몸에 있어요. 우리는 제 2의, 제 3의 아담의 분신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태어난 목적이 처음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 몸을 통해서 전달 전달하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나는 거에요. 어렵지 않지요? 분명히 정답인데 기분은 좋지 않아요. 죽기 위해 태어나는 겁니다. 죽음이 이미 셑팅되어 있어요. 어떻게 죽느냐를 보여주는 겁니다. 니가 죽어야 될 이유를 하루하루 살면서 보여줘라가 우리 존재의 의미에요. 아하! 이래서 진작에 죽어야 되는 구나! 사도 바울의 소원이 뭐였습니까? 진작에 죽는 거에요. 죽으려 하는데 자꾸 교인들이 발목을 잡으니까 “느그들 때문에 내 소원대로 못 죽잖아!”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 등에서 강도 맞으면 죽어야 되는데 바다에서 풍랑 일때는 빠져 죽었어야 되는데 복음 전한다고 풍랑이 일어나도 살아났어요. 희안해요. 모든 것이 죽어야 되는 사람에게는 세상의 모든 것이 낯 섬이에요. 반대에요. 전부 인간은 살아야지! 살려주세요! 교회에 가도 절에 가도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이왕 사는 거 자랑스럽게 살려주세요! 뭘 잘했다고 자랑해요? 다시 정리하면 선악과라는 마귀는 어떤 지접에 왔을 때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겁니다. 조성진(피아니스트)을 봅시다. 그런데 콩쿨 1등이라고 치고 이게 다 일까? 허무가 찾아오지요. 

자살하는 사람이 밥 못 먹어서 자살합니까? 아니지요. 허무해서 죽잖아요. 그런데 본인이 허무를 따질 자격이나 됩니까? 주신 은혜도, 주님을 증거하기에 바빠야지 왜 나는 ○○ 이다를 왜 하냐? 말입니다. 이것 자체가 잘못이다. 어떤 누구도 사단에게서 못 벗어납니다.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연을 끊는 것도 조절하시는 분이 숨어 계시는 그리스도입니다. 반면 사단은 이러면 니가 잘된다. 지하 벙커 만들고 이렇게 기도하면 된다. 자꾸 내가 사는 방식에 대해서 탓하지 않고 지금 내가 이 땅에서 살겠다는 그 의지를 격려하며 사느냐고 고생 많이 했지? 이제는 아픈 것도 없고 눈물 나는 일도 없게 살 수 있는 곳이 있다고 소개하는 것은 전부 적 그리스도에요. 


뭐를 경유하지 않습니까? 그 사람에게는 십자가가 필요 없어요. 그래서 오늘 날 교회는 십자가가 필요 없어요. 교인들 격려하기 바빠요. 고객들 만족시키기 바쁘다니까요. 어떤 분이 제게 메일을 보내왔어요. 자기가 사회단체의 모임이 있는데 그 모임에서 동성애를 반대하면 안됩니다를 신학자가 와서 강연을 하는데 어떻게 대비하면 됩니까?라는 질문을 했어요. 미국 여자 신학자가 강연을 하는 내용과 논문을 보내 줬어요. 그것을 어떻게 다 읽습니까! 그런데 이미 그런 쪽의 글을 십자가 마을에 올린 게 있어요. 데리다를 읽다, 바울을 안다는 것이 있어요. 그것이 그런 쪽의 내용인데 그들의 주장은 로마서가 이러니까 우리는 동성애를 반대하지 말고 한 형제로 받아줘서 옹호해야 된다라는 쪽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그런 사람들에게 성경에 동성애를 하는 자는 저주 받는다고 이렇게 하게 되면 그 사람들이 뭐라는 줄 알아요? 그것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십니다고 이렇게 나온다니까요. 십자가 지는 마당에 동성애자라고 배타하지 말고 형제로 받아 줘야 된다는 거에요. 그런 논리를 들고 오는 겁니다. 그것이 이 시대에 교회들이 밉상 받지 않고 모든 것을 포용해야 하고 받아줘야 한다는 이 시대에 필요한 종교로서 자기 처신을 유지 할 수 있고 아직 기독교가 필요하구나를 호감을 줄 수 있다는 말이거든요.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일을 하게 되면 자기 일 밖에 몰라요. 주변에 어떤 사단의 일이 있는지 나와 직접 관련 되지 않으면, 내 아이가 동성애에 빠지지 않으면 동성애엔 관심도 없어요. 퀴어 축제를 하던 무지개 축제를 하던 그건 남의 일이고 나만 안 건드리면 된다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그러한 사태를 우리에게 연관지어서 우리가 사는 세상의 폭을 넓혀봐라 너무 이기주의에 자기 자신만 알고 자기만 편하고 돈만 벌고 자랑만 하지 말고 그리스도께서 일을 어떻게 하시는 가? 성경을 통해 눈여겨 볼 필요가 있어요. 그런 (강연을)하는 신학자들이 사단이거든요. 적 그리스도이지요. 


그 사람들에게선 뭐가 빠졌다고 했습니까? 십자가가 빠졌지요. 아까 갈라디아서 1장에 내가 전하는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저주 이야기를 하셨지요. 누가 이야기 했어요? 성령 받은 사도가 예수님의 종인 사도가 저주 이야기를 했잖아요. 저주를 앞장세워 이야기 했지요. 예수님은 심판주이지요. 저주를 주시는 분으로 오셨지요. 그러면 누구 편을 들어야 되요? 예수님 편을 들어야 되요? 인간 편을 들어야 되요? 예수님 편을 들어야 되지요. 그래서 저에게 질문 한 분이 그 사람은 인본주의네요. 그렇습니다. 인본주의입니다. 


 (갈 1: 8)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 1: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어떻게 반박합니까? 해서 제가 두 가지 예를 들었어요. 첫째로 과학적으로 그 사람은 장애자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동성애가 됐다는 과학적인 근거는 없습니다. 없는데 그 쪽에서는 과학을 들이대는 거에요. 그런 사람들은 D. N. A 가 잘못 되어서 그런 것이기 때문에 봐주자는 겁니다. 그런 근거는 없습니다. 사단적이지 과학적이 아니잖아요. 악마가 들어간 거에요. 두 번째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 중심이고 인간 중심이 아니기 때문에 십자가 앞에서 인간은 저주받아 마땅하다 다시 말해서 동성애는 저주 받아 마땅함을 보여주는 흔적이고 징후이다. 담배 피워도 천국갈 순 있어요. 

하지만 담배 연기가 나쁜 것은 여전히 나빠요. 나쁜 건 나쁜 것이지 그 사람이 구원 받냐? 안 받냐의 구원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나쁘다고 이야기한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거에요. 이 세상에서 그 어떤 일을 해도 동성애를 안 해도 지옥 가고 해도 지옥 간다는 것을 전하는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일이지 지금 왜 인간 편에 서서 예수님을 이용하려고 하느냐 그런 식으로 제가 언급 했거든요. 진짜 그리스도인가 싶어서 시사 란을 찾아요.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고 주장하는 이만희나 신천지 등 몇 개파가 안되요. 


나머지는 그리스도라 하면서도 입 다물고 우리는 그리스도가 아닌데 따라했는데 예수님 이 그리스도이지 그냥 따라했는데 하면서 적그리스도 짓을 하고 있는 거에요. 누구 편을 들면서 인본주의 쪽, 그 신학자가 내가 그리스도라 주장하겠어요? 내가 예수를 대신한다고 하겠어요? 아니지요. 천하에 귀한 예수님의 종으로 나타나 강연 할 거란 말이죠. 그럼 뭐가 문제이냐? 바로 기존의 친숙한 세상을 사는 사람을 그대로 옹호해줘서는 안됩니다. 예를 들어 비행접시를 위에서 보다 보면 둥글다고 합시다. 그리고 주변에 빌딩들을 보면 그 형태가 사각형들 사이에 원이 들어 있겠지요. 


그러나 옆 모습을 보면 비행접시는 그 위에 떠 있고 어떤 것들과도 연결되어 있질 않지요. 이처럼 낯선 세계는 공중에 떠 있어요. 아래와 끊어져 있어요. 이렇게 끊어진 것은 인간의 행함으로 연결시킬 수 없어요.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아 될 뿐이고 성령은 악령과 싸워요. 그래서 이 세상은 악령의 지배를 받는다고 기정 사실화 시키는 것이 성령의 일이에요.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힘들다고 해서 벗어나려고 고생하고 가난하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이 땅에서 사기 많이 당했다고 천당 가는 것 아니에요. 똑같은 인간들이에요. 전부다. 성령께서 우리를 꺼내줘야 되고 깎아줘야 되요. 

그것이 아까 말한 남은 자입니다. 남은 자를 깎는데 주님은 인공 지능보다 더 철저해요. 정확하게 오차 없이 깎아 냅니다. 요한복음 6장 39절에“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중요한 것은 내가 구원 받았다가 아니고 주님 제게 무슨 놀라운 일을 하셨습니까? 나는 도저히 비행접시까지 못 올라가는데 비행접시에서 도대체 무슨 작업을 하셨기에 이렇게 됐습니까? 주님은 “네가 아는 법 말고 다른 법을 적용시켰다!”덮어 주는 것, 그냥 덮어 주시는 거에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게 하는 성령의 법이죠. 육의 법이 아니고 문자의 법이 아니고 성령의 법으로 이제는 내가 부르는 아버지를 너희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시는 거에요. 로마서 8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끊어 졌으니까 다른 사람은 우리의 삶이 예수님처럼 낯설어 보이는 거에요. 그것을 성경에선 고난이라고 합니다. 돈 없고 아파서 빌빌 거리는 것이 고난이 아니라 낯설어 보이는 거에요. 지난 낮 설교에서 어느 프로그램 이야기를 했지요. 암 4기에 걸린 부부 이야기, 교회 오빠라고 크리스마스 특집이라고 보여 주었는데 예상 못했어요. 


성경 구절 예레미아 33장과 시편 이야기를 하니까 우리 교인들이 웃었어요. 얼마나 감사한지요. 수준이 그 정도로 넘어 섯구나! 옛날에 얼마나 써 먹었어요. 그 법에 종속되는 거에요. 내가 이 법을 지키면 잃어버린 친숙한 삶을 다시 회복해 주고 보상해 주면 시키는 데로 뭐든지 다 하겠습니다. 이게 적 그리스도에요. 단절이 아니고 행함의 연속입니다. 우리는 이미 몸을 지니고 있는 한 저주 받아 마땅합니다. 진짜 구원자가 오면 구원받은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일이 저주에서 의로 바뀌는, 죄가 의로 바뀌는 놀라운 현상이 벌어져요. 죄 지었는데 의로 바뀌는 것. 


주일 낮에 했던 이야기, 부목이란 것은 뼈가 부러졌을 때 연결시키시는 것으로 그 부분에 집중해야 됩니다. 나는 못하는데 주님이 화해케 하시려고 연결시킨 것입니다. “피로 우리에게 화목 제물로 주셨느니라”그래서 진짜 메시야는 사람들에게 아무 인기 없는 모습으로 먼저 피를 흘리고 그 피를 앞장세워서 성령이 주시면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낯선 세계에서 세상을 내려다 보며 살 수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에서 너무 개인적으로 편안한 것과 잘되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복음과 십자가 안에 들어가서 다시 세상을 보게 하옵소서! 우리가 어떤 세상에서 살아왔는지를 어떤 세상에서 구출되었는지를 지금 익숙해진 몸의 모습들이 마지막 때의 흔적인 것을 여전히 깨닫는 저희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