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의 십자가 (마 24장 1-20 절) 대전- 93강
이근호
2017년 10월 31일 본문말씀: 마태복음 24:1-20
(마 24: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마 24:2)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마 24:3)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이르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마 24:17)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며 (마 24:18)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마 24:19)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마 24:20) 너희가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마태복음 24장을 1절부터 보면 잘 지은 성전이 전부 다 돌 하나에 돌이 중첩되지 않고 다 파괴될 것이다. 주님께서 이렇게 이야기 하시는 것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기적이라는 개념과 주님의 기적이라는 개념이 달라요. 인간들은 있음에서 더 크게 있는 것을 기적이라고 하거든요. 잘 되는 것, 주님께서는 있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다 허망한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거에요. 그게 기적이에요. 왜냐하면 있는 것을 없애버려야 진짜 있는 것이 방해받지 않고 나타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이 세운 것이 무너질 때 하나님이 세운 것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15: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심은 것마다 내 하늘 아버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마태복음 15장에 보면 하나님이 심지 않은 것은 뽑힌다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어려운 것이 뭐냐하면 뽑히는 것을 겁낼 게 아니고 하나님이 심은 것은 무엇이냐? 이것부터 먼저 관심을 둬야 되요. 하나님이 심지 않은 것은 뽑힌다고 하니까 아이고! 내 것 뽑히면 안되는 대 얼마나 공들였는데 이것을 뽑아버리면 자기 걱정 자기 단도리 할 생각 하지 말고 하나님이 심은 것 외에는 다 뽑혀 버리면 심은 것을 알아야 되지요. 이것만 알게 되면 심은 것 외에 자진해서 다 뽑아내세요 하고 자기를 맡기면 되잖아요. 그렇지요?
그렇게 살면 되잖아요. 다 뽑아내세요 이렇게 하면 된다는 말이죠. 하나님이 심은 것을 사도 바울의 편지에선 하나님의 의라고 했어요.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심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의롭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가기 때문에 그런데 하나님은 죄가 드러나는 곳에 의를 심어 놓고 두 가지의 의미가 동반해서 나타나게 하시는 거에요. 의만 나타나는 법이 없어요. 의가 있는 곳에 그러면 죄가 뭐지? 하고 죄도 같이 드러나도록 하는 겁니다. 천국 간다. 천국에만 관심 두는 천국은 없어요. 뭐지? 지옥이, 이렇게 나타나게 되어있어요. 반드시 이것을 짝패라고 하는데 순 우리말로 짝이라고 하는데 양말의 짝이든지 장갑의 짝처럼.
죄를 제대로 모르게 되면 하나님의 의도 모른다가 되요. 지옥에 대해서 모르면 천국도 모른다고 보시면 됩니다. 난 지옥 같은 건 몰라! 난 천국만 알면 돼! 이런 말은 잘못 된 말이에요. 그래서 죄가 있는 곳을 살펴야 되요. 죄가 있는 곳에 의가 있는데 그러면 죄를 어떻게 살피느냐 하면 죄를 살피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인간적으로 선악 체제, 선악지식을 가지고 파악하는 방법이 있는데 물론 엉터리이지요. 이건 잘못된 겁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말씀, 언약을 가지고 살필 때 진짜 죄가 드러나는 겁니다. 먼저 선악 체제를 가지고 죄를 살피게 되면 그 죄는 제대로 된 죄가 될 수 없어요.
왜냐하면 거기에 반칙이 들어가는데 어떤 반칙이냐하면 나는 필히 죄인이 아닐 것이다. 이 조건이 죄가 무엇이냐는 작업에 포함이 되어 버립니다. 요건 반칙입니다. 예를 들어 학급에서 선생님이 오늘 숙제 안해 온 사람 손들어 라고 이야기 했는데 어떤 학생이 반에서 좀 그 반에서 노는 학생이“봐! 선생님이 숙제 검사 한다고 했잖아! 숙제 안한 사람 손들어! 손들어!”선생님이 너부터 너! 너! 그렇게 말한 너! 너부터 한번 보자 이거에요. 유대인들이 그렇게 했거든요. “하나님 말씀에 거짓말 하지 말라 했어요! 간음 하지 말라 했어요! 도둑질 하지마라 했습니다. 여러분 그렇게 삽시다!” 주님은 너 말이야! 너! 너! 너! 너!
네가 거짓말하고 있는 거야! 로마서 2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네가 거짓말 하지 말라고 가르치면서 하면서 선생이 어떻게 거짓말 하느냐 말이냐? 간음하지 말라 해놓고 네가 어떻게 간음질 하느냐? 도둑질 하지마라 네가 어떻게 도둑질 하느냐? 라고 이야기 하는 겁니다. 제가 설교 시간에 그렇게 하고 굉장히 시원했는데요 마태복음 19장에 부자 청년이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지켰다는 겁니다. 자기는 도둑질 하지 마라해서 어릴 때부터 도둑질 안했다는 거에요. 참 철이 없지요! 주님이 말씀하시는 도둑질 안 하는 레벨이 어떤 레벨이냐 하면 가진 것 다 주는 것이 도둑질 안 하는 레벨이에요.
즉, 이 말은 인간은 자기가 존재 했다는 말은 남을 속였고 남을 것을 뺏았다는 의미에서 사람은 존재에 필요한 돈을 번거에요. 남에게 눈물을 흘리는 결과를 야기 시키면서 자기가 웃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반드시 그렇게 되어 있어요. 자기 자신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거에요. 인간은. 이것을 경제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돌아가는 정보에 대해 모르게 되면 반드시 그 사람은 가난이라는 계층으로 전락하게 되어 있어요. 이 세상은 돈의 흐름을 누군가 캐치하는데 그 캐치 할 때 정보를 누가 먼저 선점하느냐에 따라서 잡아버려요. 먼저 안 사람이 가져가면 나중엔 껍데기만 남아요.
노래방이 잘 된다고 해서 하면 이미 그 뒤에 하는 사람은 막차 타듯 되는 거에요. 예를 들어서 주식에 투자를 해놓고 십자가 복음 이야기를 해버리면 별로 관심 없어요. 그런데 목사가 설교 시간에 주식 투자에 대해 이야기하면 그 소리가 그냥 은혜로와요. 왜냐하면 목사는 주의 사자인데 주의 사자가 주식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주식에 투자한 사람에게 뭔가 행운을 가져다주고 더 생존케 하는 힘을 주도록 하나님이 복을 내렸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목사가 주식 투자를 설교 시간에 하는 것은 목사 본인이 주식 투자를 했기 때문에 그래요. 목사가 펀드 이야기를 했다는 것은 목사가 펀드를 했다는 뜻이에요.
사람은 자기가 발을 어디에 발을 담궜냐가 그 사람의 관심사로 이미 선점되어 있고 선점이라는 말은 다른 것들도 있지만 우선적으로 관심 두는 것을 선점이라고 하지요. 목사님! 바빠서 이번에 교회에 참석 못 하겠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에요? 다른 말로하면 돈 벌어야 되요겠죠. 지금 내가 발을 담군 그곳이 급합니다. 또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 중에 참석 못한다고 신경 쓰지 마세요. 왜냐하면 아까 첫 째 시간에 뭐라고 했던가요? 반드시 육에서 영으로 가는 것도 주님의 은혜이고 기적입니다. 믹서기를 돌려 버리면 아하! 내가 믿는 게 아니구나! 티 나게 해 주실 때 믿는 자가 아니라고 자랑 질 하는 건 안 되지만 주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라는 사람의 중심에는 주님이 계신 거에요.
항상 인간은 육의 자리에서 영의 자리로 갔을 때 내가 구원 받았다가 중요하지 않고 나같이 육 밖에 모르는 인간이 어떻게 이런 엄청난 천국 백성이 되었는가? 십자가 능력이지요. 그것을 뽑아내기 위해서 주께서 그렇게 (믹서기 돌리듯) 돌리시는 겁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성전이 망하는 것을 이야기 하십니다. 이 대목이 좀 어려운데요. 일단 여기에선 성전이 망했습니까? 안 망했습니까? 전혀 아니에요. 성전이 안 무너졌다는 말은 돌 사이사이에 누구의 공로가 들어갔다? 인간의 염원이나 기대와 희망이 들어가 있어요. 특히 성전은 구약을 보게 되면 하나님과 통하는 채널 같은 겁니다.
다른 데서 제사를 드리면 소용없어요. 지정된 장소에서 했어요. 아까 강의에서 했었는데 다시 해 봅시다. 장소를 뭐라고 했지요? 독자적 규범체제, 규범 체제에서 법이 나오지요. 법을 가지고 이 체제를 계속 가동 시키는 겁니다. (독자적 규범체제)란 말이 너무 길면 교회라고 합시다. 교회는 주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 자체가 가동되기 위해서 계속 유지하고 번창하기 위해서 사업하기 위해 이 땅에 교회가 있는 것을 허락하신 거에요. 그래서 교회에 가서 교회를 믿으면 안돼요. 지금 낮 설교를 보게 되면 고린도 교회와 누가 계속 싸웁니까? 사도 바울과 싸우지요.
사도 바울은 그냥 사도 바울이 아니고 바울에 대해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나오지요. 마귀가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고, 이 한마디에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에게 큰 죄를 짓고 있는 거에요. 그런데 그런 사도 바울에게 대들고 있고 가짜 사도라고 우기는 것과 사기꾼이라고 우기는 것은 그들 자체가 뭐를 반영하냐 하면 우리는 마귀가 당회장입니다라고 큰 소리 치고 있는 거에요. 그래서 교회에 복음 전하는 사람이 끼여 들게 되면 그 교회의 지향하고 추구하는 목표가 천국인지 지옥인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는 사람을 어떻게 대우하냐에 따라서 결정 나는 겁니다.
전에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유명한 사람이라고 기독교 방송에서 데려다 방송을 하는데 방송 내용을 제가 봤거든요. 십자가 복음은 날라가 버려 없어요. 없고 나는 여태 바르게 살았습니다가 튀어 나와 버려요. 그게 뭐에요? 그 좋은 기회를 왜 그런 이단 같은 방송국을 왜 하게 했습니까? 모든 기독교 방송을 허락 하셨을 때는 방송국 확장하라고 준 게 아니고 그 방송국이 누구를 가로 막는다? 십자가 복음을 가로 막는 단체이니까 행여나 주께서 그렇게 연결 시켜서 방송케 하거든 거침없이 하이킥처럼 방송국 망하라고 강의를 해야 됩니다.
그러면 어떤 복음 아는 사람이 우리 교회에 와서 간증한다고 하면 마찬가지로 그 사람을 주께서 보내신다면 우리 교회 망하라고 보낸 사람이에요. 그러면 망하는 설교를 해줘야지요. 우리는 매일 같이 망하지만요.이 차이를 좀 보세요. 믿어지는 것과 믿기지 않는 것. 둘 중에 어떤 게 맞는 지를 믿기지 않는 것이 믿음이잖아요. 제가 전에 구자억 목사가 부른 가사 언급한 적이 있지요? 아따 참말이여? 믿을 수 없었는디~ 하잖아요.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소식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 말이에요.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소식 는 게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 손에 죽었다는 것이 아따 참말이여? 믿을 수 없었는디~ 이렇게 나와야 되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진짜 하나님을 죽여 버린 거에요. 가짜로 완전히 들통나버린 겁니다. 다 가짜에요. 가짜를 가짜로 들통나게 하게 위해서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거에요.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겁니다. 전에 수요 설교에서 그런 이여기를 했잖아요. 하나님 앞에 속지 않으면 구원을 못 받는다고 했지요. 자꾸 안 속을 라고 믿을 만한 것, 꼬깃꼬깃 다지고 생각하고 측정해서 믿을 만한 것 하지 말고 주님의 십자가에 속아 넘어 가세요. 아! 도저히 못 믿겠다. 그러면 내가 하나님 앞에 한 것이 말짱 도루묵이고 거짓이란 말인가? 아! 도저히 못 믿겠다. 십자가뿐인가? 그래, 속자! 이래야 되요.
내가 그동안 했던 헌금과 수많은 예배 출석과 봉사와 전도나 선교. 몽땅 다 헛것이라는 말에 에따~ 모르겠다하고 속아 넘어가는 거에요. 속아 넘는 게 사랑입니다. 그대 앞에 만 서면 한 없이 축소되고 작아져야 되요. 내가 있으나 마나한 존재가 될 때 수많은 수고하고 무거운 인생의 짊이 얼마나 깃털처럼 가볍겠습니까? 그것이 삼층천이에요. 내가 어디 있는지 몰랐다는 거에요. 얼마나 가벼워요. 그것을 없음보다 더 작게 無보다 더 가볍게 저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어요. 없음을 강조하는 강조 법. 바늘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정숙하다는 말은 정숙을 강조하기 위해서 없음보다 더 가벼운 것.
이것은 인간이 믿기지 못할 정도로 가벼워지는 거에요. 그게 영입니다. 영인데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육신의 가시를 줘버리면 귀신도 아는 사도 바울도 빼달라고 몇 번 기도해요? 세 번, 삼 세 판이에요. 세 번 기도합니다. 못살겠다고 이래고서는 사도 일을 못하겠다고 거기에 주님이 응답을 줬어요. 쉽게 이야기 하면 이렇습니다. 네 은혜가 족하다는 말을 쉽게 하면 “지금 네 일을 하고 있어? 내 일을 하고 있어? 이건 내 일이야!”왜 자꾸 내 일을 네가 하는 것처럼 착각하느냐는 이야기입니다. 내 신세가 왜 이러냐고 할 때 그 사고방식 근본적인 문제가 내 인생이라는 게 아예 없고 주님의 공생애를 보여주는 인생인데 내 인생이라고 우기기 때문에 앞에 항상‘나’가 붙어요.
아이고! 내 신세야!, 아이고! 내 팔자야! 이게 누구의 이야기냐 하면 요새 재벌들의 이야기입니다. 재벌들이 자기의 원대로 안돼서 이러고 있어요. 재산이 2조원이나 되면서 내 신세야 이러고들 있어요. 재산 680억에 나이 99세 노인네가 아이고! 내 신세야! 어떻게 후손들에게 청부 살인이 일어나느냐! 재일 교포 노인이 680억 재산을 가지고 있어서 후손끼리 죽였다는 이야기를 주일 낮에 예로 들었잖아요. 68만원이 있었으면 죽었겠느냐는 거지요. 문제는 내가 있음이 문제에요. 내가 있음이 나를 콕콕 바늘같이 찌르는 거에요. 계속 찔러주는 겁니다. 아니고! 내 신세야! 내가 좋아하는 남자가 죽다니!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위로하는 말이 십자가를 믿으세요. 당신의 인생이 아니라 주님의 인생입니다. 그런 남자를 알게 하신 것도 주의 뜻입니다. 그러면 뭐라고 합니까? “그만! 그만 하겠지요! 노래에도 있는지 제발 그 음악은 틀지 마세요~ 제발 내 앞에서 위로한다고 그런 소리 하지 말라는 거에요. 진리인데요. 주님의 의는 실패 속에서 나와요. 주님은 지금 진지해요. 장난치는 게 아닙니다. 지금은 멀쩡하지? 내 일은 저것(성전 건물)을 무너뜨리는 것이 내 일이라는 겁니다. 사람들의 관심이 뭐냐하면 자기가 하는 거을 징검다리로 여겨서 신과 교류를 하려하고 신과 연결을 시도하거든요.
그런데 그런 식의 연결을 주께서 무너뜨려 부순다는 것은 애초부터 예수님 없이는 연결 자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전을 무너뜨린다는 말은 인간의 모든 문화와 문명의 업적과 실적이 집대성 되어 있는 거에요. 바벨탑 같은 거란 말이죠. 그것을 무너뜨릴 때 무엇도 무너뜨리냐 하면 인간을 무너뜨리는 거에요. 주님께서 오신 것은 네가 네 구원을 방해하고 주님을 방해하는 마귀의 앞잡이가 되는 겁니다. 겨울 수련회 교재를 쓰고 있는데 이런 내용을 포함시켜 놨어요. 뭐냐하면 결정은 인간의 본심이 하고 실행은 인간에게 맡긴다고 했어요. 인간의 본심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개입 못해요.
불교에서는 이것을 견물생심이라고 했는데 물건을 봄으로 마음이 새롭게 생산되는 거에요. 선을 볼 때 두군데를 보고 둘 중에 하나를 해라하면 아가씨들이 싫어해요. 왜? 제 3의 가능성을 놓치기 싫어서 그래요. 그런데 세 번째 선을 봤는데 정말 자기 조건보다 초월한 너무 반한 사람이 나타났을 때 처음에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한 엄마를 얼마나 원망하겠습니까? 왜 두 군데 봤을 때 없던 마음이 생기는 거에요. 바로 저 사람이라고, 보는 동시에 무엇도 동반해서 생긴다? 그것을 좋아하는 마음도 같이 생기는 거에요. 이것을 현대 정신 분석에서는 요구에 부응하는 욕망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말을 설명하면 어려워지는데 요구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주체나 자아가 개입할 수 없어요. 그냥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요구인데 그 요구에 대해 어떻게든 충족시키려고 하는 것이 욕망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항상 여기엔 미흡함이 있어요. 즉, 미흡함이 슬픔이고 절망이고 우울이고 걱정이고 근심이라고 하는 겁니다. 200억을 벌어야 하는데 이번엔 150억 밖에 못 벌었다면 50억이 빠지지요. 그것이 걱정 근심이 되는 겁니다. 밥 못 먹어 하는 근심이 아닙니다. 미흡함 때문에 생기는 겁니다. 분명히 애가 공부를 잘 하는데 전교에서 1등은 하는데 전국1등은 안돼서 걱정 근심이 되는 겁니다. 저더다 서울 대는 가겠는가? 배부른 걱정이지만.
새로움이 등장하면 요구가 내 자아의 의지와 상관없이 (요구)가 툭 나오거든요. 사단이 그렇게 하는 거에요. 사단이 날마다 우리로 하여금 미흡함을 양산시켜요. “기도 더 해야지! 헌금 더 해야 미흡함을 매울 수 있어! 충성히 요번 주에 교회 갔잖아! 봐! 이런 사단이 생겼잖아!”더 충성하고 더 엎드려 기도하고 기도 할 때는 건성으로 하지 말고 간~절이 해야 되요. 무조건 간절히 해야 돼요. 더 헌신해야 되고 목사 섬겨야 되고 교회 봉사 다 해야 되고 더! 더! 해야 네 요구와 욕망이 근접하게 된다고 계속 마귀가 그러는 거에요. 마귀는 실적 위주에요. 기도 해놓고 얼마나 응답 받았나 돌아보고 기도 해놓고 또 돌아보고 점치는 거하고 똑같아요.
무당 단체가 교회입니다. 목사는 계속 약 올리지요. 여러분이 믿음이 있다고 하지만 어린 애 같은 믿음이 되지 않아서 순전한 어린 애와 같은 믿음이 없기 때문에 응답이 없고 따지지 말고 바치세요! 이런 식으로 계속 유도하고 있지요. 욕망을 채우지 못했을 땐 우울증이 오고 모든 정신병 환자는 요구와 욕망 사이에 틈이 벌어져 해결이 안돼서 그래요. 그래서 우울병 걸리고 정신병에 걸리는데 따지고 보면 모든 사람이 정신병자입니다. 대통령부터 해서 위아래 상관없이 목사, 장로, 교인 모든 사람이 정신병자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왜 사단이 그렇게 만들었어요. 정신병자는 천국에 못갑니다. 이런 것을 아는 사람이 천국 갑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천국에 못 간다는 것을 강조하셨기 때문이고 유일하게 죄에서 의로 갈 수 있는 분이고 중심에서 원심 분리가 되어 버리게 하시면 주님의 영향이기 때문에 구원을 받게 되지요. 내가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활동하시는 영역, 활동장이 돼 버리는 겁니다. 우리는 주님의 죽으심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주께서 사용하시는 거에요. 그래서 개인 구원은 없습니다. 통 구원이에요. 아시죠? 통감자, 고속 도로 휴게소에서 파는 것,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이지 개인 구원은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의를 만들기 위해서 모든 것을 폐허 시키는 겁니다.
주님께서 내 인생이 내 뜻대로 안되게 하실 때 우리는 감사해야 돼요. 이것을 누가 하셨냐 하면 예수님이 하셨어요. “ 주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게 하옵소서”예수님만이 할 수 있는 기도인데 왜냐하면 우리는 흉내 낼 수도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누구를 모르기 때문에? 아버지를 모르기 때문이에요. 이런 기도를 한다고 응답받을 생각 마시고요 이런 기도 조차 못하더라도 예수님을 믿으면 되는 거에요. 그래서 성경은 네가 해라가 아니고 내가 해냈다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아까 제목을 뭐라 한다고 했습니까? 현장성, 실패성, 하나 더‘이미’예수님이 역사의 시작이고 끝이니까
예수님이 일한다는 말은 시간에 초조할 필요 없다. 이미 합격시켜 놓았으니까 내가 도대체 못났는냐만 따지면 되요. 인생을 살면서 내가 얼마나 못난 인간인가를 성경을 보면서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이다라고 하면 “그래, 내가 이것을 못 지키지! 못났구나!” 이러면 되는 거에요. 뭐든지 참 쉽죠? 굉장히 쉬운 거에요. 자기 주제 파악하면 되는 겁니다.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다하고 살면 되요. 그런데 주님이 보낸 마귀가 있어서 그러니까 나는 구원받았잖아! 갑자기 통 감자에서 개인 감자로 돌아서는 게 있거든요. 주께서 그렇게 하세요.
이미라는 말을 나에게 적용시키지 마시고 예수님에게 적용시키고 관계성 속에서 이미 참여된 자에요. 인간의 말에는 어패가 있지만 이미 우리는 아직 구원에 이르렀습니다. 이미라는 것과 아직이 붙어버려야 되요. 이미 우리는 구원 받을 게 남아 있어요. 고린도 후서 보면 나와 있어요. 그래서 주님은 지금 신납니다. 이제 2절 이후부터는 진도가 굉장히 빨라져요. 그 뒤에 이야기는 박살내는 이야기인데 예수님이 왜 세상을 박살내려고 하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본인의 할 일이 끝났기 때문에 그래요. 이 세상은 무엇의 무대이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한 무대잖아요. 그 무대가 이미 이르렀어요.
이미가 아직과 비교되는데 아직에 대해 대표적인 사람이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 요한의 시제는 아직이에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을 접수함으로 말미암아 이미가 되어버린 겁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의 세계관과 예수님의 세계관이 달라요. 세례 요한의 세계관은 아직도 인간에게 가능성이 남아 있어요. 이미라는 것은 모든 것이 예수님께 일임되어 버렸습니다. 이것을 ‘대신’이라고 해요. 모든 것을 대신 가져가 버렸어요. 전혀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미 이루었기 때문에 남는 것은 철수 작전에 나섭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파장이지요. 5일장에서 파장. 파장하는 날은 바람은 왜 그리 부는지 파장 분위기 썰렁합니다.
주님께서 슬슬 장 거두고 있는 거에요. 파장 분위기에요. 성경에서는 이것을 추수라고 하지요. 추수 할 때 특징이 뭐냐하면 하나님이 심어 놓은 자기 백성을 데려가는데 그것을 알곡이라 합니다. 알곡 안에는 예수님의 피가 들어 있어요. 피가 하나님의 의이기 때문에 그래요. 피 묻히고 데려가고, 피 묻히고 데려가는 겁니다. 이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추수할 때 그 추수 당하는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뭘 한 것이 없는데요. 구원 받는데 제가 뭐 한 게 없습니다.”이게 요한복음 4장에서의 사마리아 여인이죠. 남편 다섯 있다가 헤어지고 여섯 번째 남자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제가 요한복음을 설교한 뒤 올려놓았더니 어떤 분이 늘 목사님 설교 듣고 은혜 받는데 이 대목이 틀렸다는 거에요. 여자가 문란한 여자가 아닌데 그 당시 유대 풍습에 의하면 여자는 제대로 하고 버림받은 것인데 왜 문란한 것처럼 설교를 하십니까? 라고 이야기해서 제 설교의 취지는 이 여자가 어떤 여자이던 간에 문란하다는 겁니다. 대표적으로 문란한 사람이 신사임당이에요. 왜 놀라는 얼굴을 하십니까? 평생에 오직 지아비 하나만 바라보면서 자식을 키운 여자라는 데 주님 보시기엔 어떤 여자이다? 문란한 여자에요. 왜 그 여자나 저 여자나 다 아담의 몸에서 나왔기 때문에 분명히 그런 설교를 했었는데도 이해 못하는 거에요.
이 사람이 문란하다 안 문란하다가 예수 그리스도 중심에선 전혀 보탬이 안돼요. 그 내용이. 문란하지 않아도 문란하다고 해 줘야 그 설교의 의미가 살아요. (현숙하다고)믿음 좋아서 구원받는데 아니거든요. 신앙이 좋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고 제사 잘 지내서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제가 보기엔 어느 쪽에서 예배를 드려야 맞습니까? 하는데 그 자체 질문이 문란해요. 자기의 행함이잖아요. 사단의 생각이에요. 주님은 그냥 성령을 줘서 네가 생명의 물인 생수가 나오는 움직이는 우물이 되게 하시는 거에요. 그러면 움직이는 우물인데 나는 남편이 다섯 명 있었고 여섯 번째 남자도 남편이 아닌 내용이 전혀 수치스럽거나 부끄러운 일이 아니고 고 역할까지 포함해 줘야 하나님의 의가 된다는 말이죠.
왜 의는 죄 속에서 나오기 때문인 것이 이해가 되시겠죠. 아이고! 그냥 의를 주시되 남이 모르게 쉿! 쉿! 내 과거에 대해선 쉿 해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여전히 개별 구원에 잔뜩 신경쓰고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좋은 게 아니고 내가 좋은 사람. 자기 자신을 미워하지 않고 여전히 자기 사랑에 몰두라고 있는 사람이 그런 현상을 보이겠지요. 그렇다고 구원받았다고 남이 듣고 싶지도 않는 옛날 자기가 조폭 했던 것을 자랑도 아니고 왜 이야기 합니까. 쓸데없이 자기 나쁜 짓 한 것 자랑하고 그런 오지랖은 하지 마세요. 부셔져 노출시키는 것도 주님 앞에 노출 시켜야지 자기가 알아서 하는 것은 자기 믿음 좋다고 하는 것 밖에 안되거든요.
주님께선 파장하십니다. 철거 작업을 하십니다. 그러면 철거 작업은 왜 하느냐? 철거 작업을 통해서 인간이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지 본색이 드러납니다. 철거 작업 중 제일 중요한 것이 우리의 자아, 주체를 주께서 철거 하십니다. 우리 자신을 없애버리시죠. 우리 자신의 무슨 문제냐 하면 살고자 하는 겁니다. 24장 17절부터 나옵니다. 이것이 주님이 일하시는 철거 작업 현장입니다. 우리는 현장으로서 자기 역할만 보여주면 되요. 주님께서 이렇게 말하시면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하죠. 아기는 누가 배도록 합니까? 주님이 시키셨잖아요. 주님이 시켜놓고 뭐라고 합니까? 아이 낳게 해 놓고 심판하시든지 아이 밴 채로 화가 있을지어다.
(마 24:17)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며 (마 24:18)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마 24:19)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마 24:20) 너희가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이렇게 해 버리면 맡은 배우 역할이 너무 심한 역할 아닙니까? 배에 베개를 집어넣고 아이 밴 역할 하라고 하면 다하고 빼내면 되지만 주님이 주신 역할은 실제로 임신을 시켜버려요. 그리고 해산하기 이전에 실제로 예루살렘 성이 멸망해서 자기 걱정이 문제가 아닙니다. 안에 있는 애가 걱정돼서 허겁지겁 걸음아 날 살려라! 살고자 하는 본색을 들춰내시면서 철거 작업을 하시는 겁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가 하면 인간의 몸 자체가 배후에 사단이 있거든요. 몸과 몸으로 대응하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 몸이냐 아니면 네 몸이냐? 이렇게 되는 거에요.
그런데 우리는 본성 상 사단이 우리 몸을 다룬다는 생각은 안하고 주여! 모든 것을 시키는데로 다하고 믿을 테니까 이 몸만큼은 건들지 말아주옵소서! 이렇게 나온다는 말이죠. 이 몸을 바꾸기 때문에 피가 흐르거든요. 피가 흐른다는 것은 피는 생명입니다. 즉 이 말은 네 몸에 흐르는 생명은 생명도 아니고 목숨도 아니고 버리고 저주받아야 될 목숨이다는 것을 통보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의 피를 이야기 한다고요. 겉으로 보기에 피가 나오니까 몸과 몸을 이야기 하는데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의 몸을 두고 이야기 한 거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몸의 껍데기를 벗겨 버리면 안에 피가 있겠지요.
그 불신의 피가 예수님께 우리 오빠 왜 죽게 놔두었냐고 달려들게 한 요인이 그 피 속에 흐르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그 피를 없애기 위해서 예수님이 피를 그 쪽으로 바꿔치기 하는 거에요. 예수님의 목숨을, 우리를 지배하고 있던 사단을 대신해 예수님의 성령이, 예수님의 몸에서 나온 피의 생명이 우리 속에 들어가는 겁니다. 대신 한다는 것은 없앤다는 것이 아니고 사단이 지배하는 목숨에 예수님의 목숨이 들어오면 사단은 사단대로 자기의 본색을 들춰내면서 죄가 있는 곳에 의가 피어나도록 주께서 이런 공식으로 일하십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주님을 믿고 난 뒤부터 참 불편해요. 불편함을 덜 하기 위해선 성경을 안 보면 되는데 또 성경을 안 보면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해서 성경을 보게 되면 성경 자체가 굉장히 비현실적이고 현대적이지 않아요. 현재의 삶에 도움이 안돼요. 보탬이 안되는 겁니다. 차라리 토정비결이 맞아요. 왜 이사는 언제가고 저 사람의 사주팔자가 맞으면 행복하고 되는데 성경은 전혀 그런 것이 없거든요. 자기를 미워하라, 네 원수는 집안 식구니라 이렇게 나오니까 성경 보는 게 불편하고 설교를 들어도 성경 이야기 안하는 교회를 찾게 되요.
성경은 그냥 폼이고 누가 교회 봉사해서 복 받은 이야기, 희망적이고 낙관적이고 꿈은 이루어진다는 사례들, 간증이죠. 그런 것들로 한 30분 설교하는 너무 길게 하면 듣기 싫어하니 그런 교회에 가고 싶어! 그리고 나머지는 찬양 집회로 온 몸에 전해오는 가락이 내 세포와 같이 춤출 때 갑자기 은혜 받은 느낌들고 그런 교회에 가고 싶지 복음을 듣게 말씀 전하는 교회도 싫고 거기다 복음을 전하면 아이고! 무서워라 도망쳐 버리지요. 사람이 이익이 없는데 노동할 이유 없잖아요. 교회 오면 이익도 없는데 오겠어요. 본색을 드러내는 예수님 앞에서 모든 몸들이 자기의 본색을 드러내면서 호들갑 떨면서 도망치게 만들어요.
심지어 12제자들도 도망치는 겁니다. 누구만 남았어요? 달랑 예수님만 남았어요. 그것이 언약입니다. 아무도 하나님과 계약자로 남을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습니다. 쫓아내고 쫓아내고 달랑 예수님만 남았지요. 결국 이 세상은 예수님과 모든 세계와의 정면 승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과의 정면 승부. 모든 세상은 한 소리로 예수님을 공격합니다. 그들이 보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뭐냐? 실패지요. 실패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실패담입니다. 누가 봐도 십자가는 실패한 거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내가 실패한 것이 아니고 너희가 실패했다는 겁니다. 왜 실패했다고 여겼던 자들,
예수님을 실패로 몰아넣었던 자들, 그럼 누가 성공했어요. 예수님을 죽였던 자들이 성공했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선 실패한 이 분을 사흘 만에 부활을 시켜 놓으니까 자기는 성공하고 예수는 실패했다고 간주하는 것은 본인은 성공했다는 안목의 전제하에서 예수님은 실패자인데 이 실패를 주님께서 성공으로 바꿔버리니까 그 안목 전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곧 실패로 드러나게 된 거에요. 따라서 내가 실패이다를 아는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고 어쨌든 나는 실패 안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지옥가는 사람이에요. 종말을 경유하지 않으면 주님의 십자가(말씀)를 경유하지 않으면 이런 발상의 전환이 일어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종말을 통해서 나도 주님을 버리고 아이 밴 여인처럼 내빼는, 살고자 내빼는 그 본성을 유감없이 대전과 대구 바닥에서 마음껏 발휘해주시기 바랍니다. 강력한 사랑의 모터를 통해서 바로 주님이 이야기하는 불신자가 도망친 제자가 남이 아니고 바로 나라는 사실을 이미 구원받은 상태에서 도대체 내가 어떤 존재이기에 주님 홀로 구원의 근거를 다 100% 제시 했는가 도대체 내가 얼마나 잘못된 인간이라는 것을 되새겨 가며 평생 주님께 영광 돌리고 감사해야 됩니다. 이제 본문의 종말론을 보면 신이 나지요. “주여! 부숴주시옵소서! 부숴 부숴 주시옵소서!”하겠지요.
이 본문을 지금껏 교회에서들은 이렇게 해석합니다. “주님께서 무서운 심판주가 되셔 가지고 보라! 이 세상을 멸망시키려 한다는 것을, 이것은 경고용이다.”그러니 정신 차려서 예수 믿으면 구원받고 마지막 때에 깨어서 도적같이 오신다니까“ 말씀을 받으면 경고로 받으면 정신을 차려야 되요. 문제는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오후 3시부터 4시까지 차리고 4시부터 5시까지는 쉬느냐는 문제가 있어요. 그리고 치매 걸리기 전에 정신 차리느냐 걸린 후에 차리느냐는 문제가 남아 있는데 하여튼 정신 바짝 차려서 깨어서 기도하고 마지막 때에 정결한 뭐가되고?
신부가 되어가지고 화장도 좀 하고 정결한 신부가 되어서 마지막 때에 흠 없다 소리를 들을 때 그렇게 정신 바짝 차려야 하는데 정신 못 차려도 경고성으로 하는 이유는 그 만큼 이 세상이 악하다는 겁니다. 따라서 성도는 악한 것과 정신 차리는 것을 구분해야 되는데 악한 것이 뭐냐? 666 이마에 바코드 받으면 안되고 이번에 이스라엘에서 무슨 핵 폭탄인지 시사 연구해서 살펴야 되고 바티칸이 어떻게 되가는지를 살펴야 되고 소련과 마곡과 곡 이란과 이스라엘이 어떤 전쟁을 일으키는 가 정신 바짝 차려야 되고 성경을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시사로 넘어 갑니다.
현재 사조직이 어떻게 움직이고 단 지파의 한국에서 단군의 자손인 한국에서 북한이 마지막 때 핵 폭탄을 일으키는 사태를 미리 요한계시록에서 찾아봐야 되고 그러니까 신천지 잘 다녀, 신천지뿐이겠어요? 조용기도 마찬가지이고 교회에 다니면서 정결한 신부로서 이 세상에서 영의 분별해서 이 시대가 어떤 지 제발 교회 와서 우리끼리 교회가 방주니까 구원의 방주에 돈을 많이 처들여야 되요. 그래야 방주가 살아 남은 자가 산다. 결국은 돈 내라는 이야기 아닙니까? 마지막 때에 이건 대학 교수이든 박사든 관계없어요. 살고자 하는 사단이 있는 이상은 돈 갖다 바치게 되어 있습니다.
장로도 그렇고 안 넘어 갈 수가 있어요? 사단이 사단에게 이야기 하니 안 넘어 갈 수가 있어요? 영이 같은데 살고자 하는 영과 살려 줄게 하면 같은 영이 아닙니까? 뭐가 빠졌냐 하면 이미가 빠졌어요. 돈 가지고의 이미가 아니라 예수님의 살과 피로의 이미가 됐잖아요. 십자가로 이미 됐잖아요. 협박과 공갈, 얼마나 바보처럼 다 당했습니까? 나의구원? 없어요. 애초부터 개인 구원은 없어요. 그냥 주님이 활동하시는 무대라니까요. 우리가 하나의 역할에 불과해요. 역할을 잘해서 구원해 주시는 게 아니고 이미 구원받고 난 뒤에 나는 내 역할을 너는 네 역할을 하면 되요. 너는 지옥가는 역할하고 나는 천국가는 역할을 하면 되는 겁니다.
여러분 앞으로 말씀을 전했으니까 세상에 나가서 자신이 협박과 공갈 많이 받으세요. 사단이 가만있지 않고 계속 속일 겁니다. 네가 못됐기 때문에 애들도 못 된다는 식으로 계속 우리 속에 깜짝 깜짝 놀라게 할 거에요. 자식 없는 부모가 어디 있어요. 다 자식이 있잖아요. 내가 지금 게으르면 자식에게 저주가 임할 것이라고 내가 그렇게 원하고 싶어 하는 모습이 십자가를 모독하는 모습인 것을 이미 구원받은 상태에서 확인 하는 절차의 즐거움이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에 대한 분석이 들어가게 하옵소서! 얼마나 십자가를 가리는지 사단의 일꾼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늘 깨닫는 가운데 주님의 피로 감사하는 저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