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의 가증한 것 (마 24장 15-21 절) 대전- 94강
이근호
2017년 11월 28일 본문말씀: 마태복음 24:15-21
(마 24:15)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마 24:16)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마 24:17)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며 (마 24:18)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마 24:19)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마 24:20) 너희가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마 24:21)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마태복음 24장 15절부터 보겠습니다. (2절)제자들이 물었습니다. 끝에 무슨 징조가 있겠습니까? 제자들이 물었는데 질문을 잘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끝이라는 것은 인간이 바라보면서 물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석양이 질 때 저것이 석양이다라고 할 수 있지만 산이 있고 석양이 지면서 노을이 붉어지겠지요. 그런데 이 순간 우리가 무엇을 느끼냐 하면 석양 쪽에서 우리가 있는 곳을 볼 때 그 있는 곳도 붉다는 것을 느끼지 못해요. 저쪽은 벌거니까 이쪽은 아직 대낮인 줄 알고 있어요. 이렇게 인간이 자기중심적이 되어 버리면 자기는 거기에 포함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끝이 되면 저 끝은 통곡 소리 들리겠다 생각하겠지만 그것이 자기는 아직 통곡 안 하고 있다는 말은 아직 끝이 덜 된 거에요. 끝의 특징은 끝이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은 강력한 저항이 나오면서 끝이 되는 겁니다. 저항이 안 나오면 끝이 아니에요. 인간은 마지막을 싫어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대기업에 원서를 10군데 내었는데 다 떨어졌다. 이 사람이 절망하겠습니까? 안 하겠습니까? 절망 안 합니다. 왜냐하면 원서 내려고 100장 정도 만들어 놨기 때문에 그런데 100번 째 지원했는데도 안 됐다 하면 그 땐 절망 하겠지요. 끝을 느낀다 말이에요. 10번째가 왜 안되냐 하면 아직도 90장이 남아 있으니까.
인간은 스스로 자기가 끝을 만들어 내요. 저항을 근거로 만들어 내요. 그렇게 흔히 만들어진 것이 바로 종이학이에요. 자기는 종이학 1000장을 접겠다는 거에요. 종이학을 만드는 데 큰 종이로 만들었다고 퇴짜 맞아서 작은 종이로 1000장을 만든다는 드라마가 있어요. 종이학을 1000장을 만들면 학이 진짜 날라간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끝과 끝이 아닌 마지막 천 번째 종이와 학이 되는 그 순간을 끝이라고 누가 조장했어요? 본인이 그렇게 만든 거에요. 절에도 있어요. 107번째 절과 108번 째 절을 달리 생각하는 겁니다. 108번째 하게 되면 일어서는 겁니다. 천주교에서도 마찬가지로 묵주를 돌릴 때 10바퀴 돌릴 것인가? 몇 마퀴를 돌릴 것인지 본인이 계산하고 있어요.
이런 말들의 다 특징이 있어요. 끝을 기다리되 아직 끝은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주님 보시기에 그게 끝이에요. 저항이 반발했기 때문에, 저항이 있다라는 것은 본인은 단독적인 실체라고 간주해달라는 겁니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끝이 나를 점령하는 것을 내가 용납하지 않겠다는 거에요. 왜? 본인이 아직도 희망이 있고 자기 나름대로의 포부가 있는데 끝이라고 하면 곤란하지요. 12월 초에 딸의 결혼식이 있는데 11월 말에 재림하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이 재림하면 결혼식장이 불바다가 되는데 불구덩이 속에서 딴따다단 할 수 있습니까? 안되잖아요.
재림은 하시되 결혼식 후로 미뤄 달라는 은근히 간절한 기대가 있어요. 이것이 바로 저항입니다. 주의 일에 강력하게 반발한다는 것은 자기 나름대로 지키려는 힘이 아직 펄펄 살아있다라는 거에요. 그러면 오믈 본문 15절이 이해가 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사람이 어떤 산에 신상이라든가를 세울 때 그것을 사람들이 왜 세우겠어요? 보라고 세우는 거지요. 보라고 세운 이유가 볼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서 세우는 겁니다. 파군재 삼거리 우리교회를 오게 되면 파계사와 동화사 가는 길에 신숭겸 동상이 서 있어요.
어느 날 운동하다가 보니까 70넘어 보이는 사람이 차를 그 곳에 세워 놓고 정중히 절을 하고 있어요. 아마 신숭겸과 관련이 있는 사람인지 아니면 동상을 세울 때 돈 낸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절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신숭겸 동상이 왜 있겠습니까? 이게 저항이라니까요. 이 세상에 대한 저항이라니까요. 저항은 무엇을 기초로 하느냐 하면 자기 것의 고수입니다. 자기 것이 고수가 되어 버리면 조건부 감사가 됩니다. 감사 할 때 내 것을 지켜주시는 조건하에 감사하겠다는 거래가 형성되는 겁니다. 범사에 감사가 없어요. 내 것을 사수하는 경우에만 감사가 나오고 이것을 침범하게 되면 더 이상 못 참습니다가 되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실 때 (내 것)여기까지 왔다가 돌아가면 어떻게 됩니까? 구원이 안되지요. 그러면 주님의 십자가는 그 앞까지 오겠습니까? 속에 까지 오겠습니까? (내 것)내부에 까지 들어와야 되겠지요.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피 흘린 이유가 이(내 것) 때문에 죽으셨기 때문에 십자가 피가 오게 되면 그 앞에서 사람들이 감사하겠어요? 분노하겠습니까? 분노하지요. 십자가가 막상 내 안에 들어오면 우리는 분노합니다. 분통을 터뜨립니다. 왜 내 인생을 짓밟느냐는 거에요. 슈퍼에 있던 버려진 캔을 수집할 대 고물상에서 어떻게 처리 합니까? 발로 밟아 찌그러트리잖아요. 그래야 캔이 고물상의 소유로 전환되는 거에요.
병은 수거하면 안에 있는 것을 부어버리잖아요. 아까 말했듯이 껍데기라고 껍데기는 껍데기 나름대로의 자기 인생사를 예쁘게 해서 집어넣으면 주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버림이 없으면 구원도 없다고 했지요. 그것을 버릴 때 얼마나 우리가 아까워하겠습니까? 저것을 모으기 위해 얼마나 아끼고 절약하면서 살아 볼라고~ 살아 볼라고~ 애 한번 공부 시켜보겠다고~ 얼마나 애써 미국 유학 보내 놨더니 잘못되거나 죽어버리고 그런 경우가 참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와 만나는 순간 왜 분노하게 되냐 하면 그 요소가 내가 끝까지 책임질 것을 파괴시키기 때문에 그렀습니다.
다른 건 다 건드려도 대는데 내 자식 만큼은 건드리지 말라는 그런데 그 자식 마저 건드릴 때 제대로 주님 만난 것으로 아시기 바랍니다. 왜 내가 분노하기 때문에 “내 자식은 건들이지 말라고 했잖아요! 이것 만큼은 건드리지 말라고 했잖아요. 왜 이것을 건드립니까? 이건 끝까지 내가 책임진다고 했잖아요!”이 끝, 종말이 되면 주님이 주시는 끝과 내가 사수하는 끝과의 마지막 대 전쟁이 벌어집니다. 사적으로 개인적으로 전쟁이 벌어집니다. 그러면 교회에 간다는 것도 결국 뭐냐 하면 내가 마지막 까지 내 자존심을 걸고 지키고 싶은 것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목사가 시키는대로 해서 이 끝은 내가 쥐고 있고 그것에 상처가 되지 않도록 덮개를 끌어 모으는 것을 기대하면서 교회에 가는 거에요.
십일조 할테니 이것은 지켜주옵소서! 봉사 할테니 지켜 주옵시고 선교비 낼 테니 요것 지켜달라고 하늘나라 확장하는데 헌신할테니 제발 요것만큼은 지켜달라! 이런 것 때문에 교회 다닌다고 볼 수 있어요. 그리고 교회에선 성경 말씀은 전하지도 않고 듣지도 않지요. 그러면 교회 다니는 이유가 집에서 교회하는 것 보다 역시 교회에서 기도하는 것이 효과가 있다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기도의 응답이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개인을 만나면 선한데 개인 개인이 모여 교회가 되면 이게 악이 되는 겁니다. 희안하지요. 그 이유가 제가 설교할 때 미꾸라지 통으로 비유했어요. 미꾸라지가 혼자 있을 때 끝까지 자기가 지키고 싶은 것이 필요할 때는 받아들이고 필요 없는 것은 뱉어 내지요.
이것은 내 자식을 지키는데 필요 없다 혹은 이것은 내 자식을 지키는데 꼭 필요 하다 그렇게 반복하는 겁니다. 만약에 교회에 피아노 전공자가 있다. 그런데 내 딸이 피아노 과에 진학을 한다면 교회에 갈 때 말씀도 듣긴 하겠지만 끝나면 빨리 그 전공자에게 궁금한 것을 묻게 되겠지요. 그렇게 교회란 곳에서 자기가 필요한 것은 받아들이고 필요치 않은 것은 빼내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미꾸라지 통을 이야기 하면서 뭐라고 했습니까? 남이 뱉은 욕망을 자기가 삼키고 자기 것은 뱉고 그러니까 미꾸라지 통을 보면 표면에 뭐가 올라와 있습니까? 거품이죠. 이 전체가 육이거든요.
교회라는 이름이 그냥 육이에요. 같은 미꾸라지 통에 같이 있어요. 육의 거품, 지옥의 거품 속에 있으면서 끄집어내는 것들이 욕망들만 끄집어내고 끄집어 낸 그 욕망을 먹고 그러는 거에요. 그러니까 아무리 교회에 가도 육에서 난 것은 육이라 육에서 벗어 날 수 없어요. 육에서 갇혀 있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3장 말씀처럼 갇혀 있는 거에요. 그러면 영은 뭐냐 영이라는 것은 오직 십자가의 형식으로만, 작용으로만 오는 겁니다.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 받을 이름이 없어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알지 많기를 원하노라 (고전 2장) 예수님의 죽으심을 집어넣는다 말이죠.
나는 이 땅에서 끝까지 지키는 것을 포기 했다 이 말이죠. 지난 낮 설교에서 했잖아요. 주께서 가진 것을 주는 게 아니고 자기 자신을 준다고 했지요. “나는 네가 사는 동네에서 죽었어!”너희가 도대체 무엇을 기대하며 따라오고 무엇을 기대하고 예수이름으로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 하며 기도하냐는 말이죠. “줄께! 내 살과 내 피를 죽음에 동참하라고 줄께!”어데에, 그건 안 된다는 거에요. 내가 죽으면 내 자식은 누가 키우냐 이렇게 나오는 거에요. 그러니 모든 인간들은 끝까지 지키려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자꾸 밀어내게 되어 있어요. 밀어 내기 때문에 분노를 안해요. 왜 알아서 밀어 냈기 때문에.
십일조 내면서 주님을 돌려보내고 선교 헌금 내면서 주님을 돌려보냈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들어와 버리면 아이들이 떼 쓸데처럼 정 안 될 때는 발버둥치지요. 여자 분들은 나 이러고는 못 산다, 마지막엔 말로도 안되고 그럴 때,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내 힘으론 도저히 안 깨지는 철야를 해도 안되고 금식을 해도 안 깨지고 모든 재산을 교회 갖다 바쳐도 안 깨지는 것. 깨어질 리가 있습니까! 다 미꾸라지 통에 들어 있어서 뭐가 깨져요. 행함이 아니고 은혜입니다. 성령이 오심으로서 주님이 이 곤란한 인생을 완전히 딱지 붙여서 내 이름이 아닌 주님의 이름으로서 전환된 인생을 예수님의 복음이 담긴 인생으로 끌고 가십니다.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니엘에 예언 된 바 가증한 것 앞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멸망이지요. 뭐냐하면 주님 보시기에 이미 멸망 받을 세상에서 멸망할 것을 하나님이 허락 했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모든 인간들 각자 속에 멸망 받을 것이 다 들어 있다는 것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다니엘에 나오는 내용에 안티오크스 에피파네스 왕이 있는데 (헬라화 정책) 메대, 파사 망하고 헬라 마케도니아 다음에 로마의 순인데 세 번 째 헬라 나라가 알렉산드리아가 지중해와 터키, 이라크, 이란이 망하고 난 뒤에는 네 부분으로 나눠졌는데 이집트와 이스라엘에 관여 하면서 북쪽에 있는 왕과 싸웠는데 남쪽에 있는 안티오크스 에피파네스 왕이 싸우는데 휴전 중간 지점에 성전이 있었어요.
하나님께서 역사를 통해서 거기에 예언을 깔아 놓으시는 거에요. 그것을 지난 수요일에는 무늬라고 헸습니다. 자연에 무늬가 있다. 자연의 질서가 있다라고 하면 과학적 이야기로 되는데 질서 대신 무늬가 있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이 무늬 형식으로 있는 겁니다. 여기에 종속되어서 모든 세상의 왕들도 전부 하나의 예언대로 장기 판위의 알처럼 주님이 밀고 당기고 싸우게 하는 거에요. 세상의 모든 왕들도 그 무늬를 드러내기 위해서이고 그 취지가 뭐냐하면 성전은 망한다. 망하는 이유가 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성전의 한 복판에 서 버리요.
헬라의 신이 성전 중앙에 서는 것이 다니엘의 역사적 사실이고 무늬라고 했지요. 하나의 예언을 가지고 마지막 세상을 멸망시킬 때 빌미로 세상 역사 속에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거룩한 것은 성전이고 멸망의 가증한 것이 다니엘의 예언대로 역사적으로 봐선 A.D 70년 경에 로마가 이스라엘을 덮쳐요. A.D 70년으로 모든 이스라엘 역사가 끝납니다. 그 이후로 혼혈된 나라이기 때문에 지금의 이스라엘은 아무 의미 없어요. A.D 70년으로 끝나 버립니다. 로마가 헬라를 다시 정복한 것은 B.C 160년 경이에요.
바벨론 ⟶ 메대파사 ⟶ 헬라 마케도니아 ⟶로마 이런 나라들을 다니엘에서는 네 마리의 짐승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일반 역사가들은 짐승이라고 안하지요. 짐승이라는 말은 부정적이잖아요. 멸망의 대상 또는 흉측한 것들, 없어야 되는 데 어떤 일 때문에 급조해서 생긴 나쁜 것들 이러는데 성경에서 짐승이라고 할 때는 반드시 짐승 아닌 하나님 보시기에 받아들일 만한 어떤 것과 대조하기 위해 짐승이라는 표현을 했단 말이에요. 그게 뭐냐는 말입니다. 짐승과 대결 상태에 있는 것. 짐승이 늘 반항하고 저항하고 노리면서 삼키고자 하는 대상이 뭐냐?
다니엘에서는 인자의 나라, 인자란 사람의 아들 예수님의 이름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나라를 누가 공격한다? 짐승이 공격하는 거에요. 그런데 예수님의 나라는 역사를 초월해요. 묵시적이에요. 짐승의 나라는 역사에 초래했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의 완성은 역사와 묵시가 만나는 곳에서 모든 세상은 끝이 되는 겁니다. 인간이 사용하는 것과 인간이 사용하지 못한 것의 접점지점, 접점 경계선 그게 끝이에요. 그래서 성도는 뭐냐? 경계에 서 있는 사람. 지난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성도가 십자가를 보면서 저 피를 믿으면 나는 산다가 아니라 나는 이미 죽었다를 확인해야 되요.
이미 죽은 자로서 세상을 유령처럼 살아가는 자가 성도가 되는 거에요. 이런 인식을 실제로 느낀다는 것은 큰 은혜를 받지 않으면 도저히 생길 수 없어요. 요새 제가 외손녀와 하는 놀이가 있는데 동동 동대문을 열어라 남 남 남대문을 열어라 12시가 되면은 문이 열린다고 할 때 마주 잡은 손으로 잠아 주면 좋아 하지요. 놀이를 계속 개발해요. 한 것 주번 하면 재미없어 해요. 계속 해달라고 하면 팔 아프잖아요. 안 잡으면 동동 동대문을 열어라 남 남 남대문을 열어라 하면 잡을 줄 알고 통과하잖아요. 통과할 때 세상이 잡아도 잡히지 않는 것. 남들이 약을 올리는 데 전혀 약 오르지 않는 것. 겁 하나도 않 나는 것.
문재인은 위험하다고 오래된 원자력 발전 가동 정지시키는데 사고 나면 우리나라 사람 반 이상이 죽는 다는데 죽어도 괜찮은 것. 원자력 발전소 10개가 잘못 되도 아무 상관없는 것. 이게 유령이잖아요. 마치 이 세상에서 없는 사람처럼 사는 것. 이게 고린도 전서 7장에 나오는 대 한번 봅시다. 이게 기쁜 소식인데 29절에 보면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마치 ~아닌 것처럼 남편은 아내 없는 것처럼 아내는 남편이 없는 것처럼 니 마음대로 사세요.
그 다음 절엔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울 일도 아닌데 내가 왜 울지? 미쳤어! 유령이 우는 것 봤습니까? 전설의 고향에선 봤지만 이 땅에 맺힌 한이 없어야 된다 이 말이에요. 우는 자는 한 이 맺힐 필요가 없다는 말이에요. 아직 뭐가 그렇게 미련이 남았냐는 말입니다.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이미 죽은 자가 실패를 염려한다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에요. 죽은 자에게 무슨 실패가 있으며 죽은 자에게 무슨 성공이 있습니까?
제가 아까 이야기 했듯이 인간은 마지막 때 뭔가 지키고 책임지고 싶어 하는 것이 있으면 여기에 마귀가 달려들어요. 가증한 것이 계속 킁킁 냄새 맡고 달려든다고요. 너 이러다 십일조 안하면 못 킨다고 헌금 안 해서 네가 망했어! 자꾸 공격해대는 거에요. 십자가는 주문 한적 없다고 돌려보내고 택배 기사 시켜서 내 것은 내가 지킨다. 내 가정은 믿음으로 내가 지킨다. 그것이 맥아더의 기도가 아닙니까?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 그게 뭐가 기쁘냐 말이죠. 그 다음에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사려면 사고 말려면 말고 배짱 부려요.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이 말을 한 마디로 하면 유령처럼 살아라! 다른 말로 하면 이름 없는 자가 되라! 자꾸 네 이름을 기억하지 마라! 네 존재를 기억하지 마라! 이름이란 실체라는 존재로 붙인 것이잖아요. 이름 없이 살아라! 목사가 이렇게 설교하면 교인 하나도 안 나오겠죠. 자기 것 사수하며 주께서 도와주기를 바라는 것. 그래서 기도 하는 보람이 있었는데 이렇게 하면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어요.
“목사님 그러면 기도 할 필요 없네요?”하지 마세요. 기도 할 필요가 뭐가 있어요?
“무시로 기도하라 했잖아요?”기도를 하게 하시지요. 본인들 기도 말고 주께서 기도 하시게 하는 게 따로 있어요. 주의 일을 거부하지 않도록. 주의 일을 방해하지 않도록, 복음에 방해하지 않도록 하시지요.
다시 본문 24장 봅시다. 그러니까 이혼 문제도 나는 우애 사노? 그런 걱정 하지 마세요. 할 때 되면 하면 되고 또 다시 만날 때 되면 만나면 되고 (결혼도) 다섯 번 째 하려면 다섯 번째 하면 되고 여섯 번 째 하려면 너무 많이는 하지 마세요. (웃음)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데 어떻해요? 내 힘으로 어찌 말립니까? 좋아하면 좋아하면 되고 식상 하면 헤어지면 되고 이 세상에 대해 구애 받을 필요 없어요.
18절에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19절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요 만큼도 내 것이 있는 사람은 그 날이 처참한 날이 될 것이다. 이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라고 묻을 께 아니고 그 날은 어느 정도이냐? 그 날이 기쁠 정도가 되려면 젖먹이 자식이 있더라도 혹은 재산이 있더라도 마지막을 감사할 정도가 되야 돼요. 내 애라는 생각이 아니고 주님이 주신 애라고 생각하면 되니까.
본문에 멸망의 가증한 것이 아까 이야기 했듯이 로마 군인들이 와서 성전에 로마 깃발을 꽂는 것을 이야기 하는 거에요.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역사적이에요. 역사는 하나의 무늬에 불과한데 역사라는 것은 다른 역사, 이 역사 말고 다른 역사와 공통성을 갖고 있어요. 보편적인 속성을 같이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것이 가증한 것이라 해석할 필요가 없어요 사람들은 멸망당할 인간들은 그런 것에 대하여 이상하게 여기지 않아요.
사람들이 이상히 여기지 않는 것은 이 세상이 아직도 멸망할 때가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냥 살면 되지 이상히 여기지 안잖아요. 그런데 성도가 볼 때는 아하! 저 석굴암은 인간들의 본성을 물체화 시킨 것이라고 마태복음 24장에서 해석을 그렇게 여긴다는 말이죠.
그러면 석굴암뿐만 아니고 큰 예배당도 마찬가지지요. 예배당 지어놓고 거기서 예배드리는 것을 보고 아하! 저게 가증한 것이구나! 교인들이 저것을 원했구나! 예수님을 원한 것이 아니고 내가 지키고 책임 질 내 교회를 원했구나!
그래서 일반 성도들은 말씀이 안 맞으면 그냥 나오면 되는데 못 나온 사람들을 보면 그 교회 돈 많이 들인 장로급들 목돈 낸 사람들, 푼 돈 내면 금방 나올 수 있어요. 목돈 내고는 못 나와요. 자기가 그 교회를 지켜야 되요. 제가 아시는 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장로가 되려는데 목사가 불러요. 돈 이렇게 내서는 안 된다고 더 내야 장로 임직 내준다고, 누구라고 말할 순 없지만.
21절 봅시다. “너희가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환란이라는 말은 어떤 경우이냐 아직 묵시가 안 되었어요. 역사 속에 있을 때 환란입니다. 유령이 덜 되었어요. 빼내는데 아까 분노라고 했지요. 우리는 내 것이 체질화되었기 때문에 넓은 길로,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이 체질화되었기 때문에 이 세상에 찐득이처럼 안 떨어지려고 하듯이 붙어서 하나 떼어내면 하나 다시 붙고 다시 떼어내면 다시 붙고 기여이 이 세상에서 자기 의미, 자기 이름의 의미를 꼭 부여 하려고 해요. 떼어 내도 안돼.
그러니까 그 전체가 뭐냐하면 환란이 되는 겁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환란이고 부자라고 해서 환란 없는 게 아니에요. 부자는 부자대로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대로 이 세상 살아가는 것이 육적인 체질 때문에 환란을 자처해요. 그것을 기도 한다고 하는데 거기에 신경을 더 쓰기 때문에 점점 환란을 부채질 하지요. 기도까지 했는데 설마 지켜 주겠지! 차라리 기도 안하는 게 낫지 자기가 기도 했다고 주장 하는 셈이 되어 버려요. 그 중에 한 예가 있는데 환란이 있다는 말은 결국 오늘 본문을 통해서 거기서 아무도 빠져 나올 수 있다? 없다? 못 빠져 나온다. 이 세상에 살면서 우리는 못 빠져 나와요.
왜 성도는 환란이 와야 끝임을 이론이 아닌 실습과 체험을 하고 살아가면서 늘 느끼는 거에요. 하나 해결하면 다른 게 터지고 거기서 벗어나려고 하지 말고 말씀대로 이미 우리에게 푹 잠겨 있음을 체험하는 거에요. 그래야 아하! 말씀대로 대는구나! 하는 자가 성도에요. 고생 안하는 게 성도가 아니고 고생을 하더라도 이것은 필히 그럴 수밖에 없어! 왜 주님의 말씀이니까 그런데 환란 속에 있는 사람이 더욱 더 환란을 가중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서로가 서로를 흉내 내고 모방하고 속이기 때문에 그래요. 예를 들면 김영철이라는 개그맨이 있는데 무구를 자꾸 흉내내냐 하면 하춘화를 흉내 내요.
그래서 김영철이 흉내 낼 때 똑같다고들 하니까 어느 날 진짜 하춘화가 나와서 하춘화가 김영철이 흉내 낸 하춘화를 본인이 본인에 대해서 연기를 하는 거에요. 왜 남들이 인정하는 하춘화가 될 때 자기가 계속 출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기 때문에 내가 없어요. 남들이 꾸며주는 데로 그것이 나라고 입혀줘야 숨 좀 더 쉬고 오래 살 수 있어요. 밥을 먹고 살 수 있어요. 여자가 처음 시집와서 집안에서는 본인은 없어요. 이 집안에선 이래야 된다 저래야 된다는 잔소리로 덧입혀 줘야 시집살이에서 한 숨 쉴 수 있습니다. 사랑 받고 그래서 오랫만에 친정 엄마가 오게 되면 기가 차는 거에요.
친정 엄마가 딸이 변한 것을 보고 눈물 흘리며 돌아가잖아요. “엄마 이젠 안 와도 돼요” 완전히 세뇌 당해버렸어요. 시집 사람으로 왜냐하면 본인이 시집에서 살아가기 위해선 적응 할 수밖에 없거든요. 그래서 이 환란은 서로가 서로를 도와주는 게 아니고 환란에 더 깊숙이 얼싸안고 망하는 쪽으로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결속하고 단결하고 소통하고 있는 겁니다. 페이스 북에 올라온 어떤 사람을 봤는데 오늘 본문처럼 멸망의 가증한 것에 딱 맞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김정명 목사라고 했는데 이 사람은 여수 은현 교회 은퇴한 목사에요. 거기에 보면 자기는 엉터리 목사라는 거에요.
나는 설교하는 기술만 발휘했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보여주지 못했다라고 이제는 은퇴해서 이렇게 회개하고 내가 교회를 보다 사랑 했어야 되고 자기 딴엔 목회를 잘 했다고 생각해서 은퇴하고 나면 하나님이 복을 줄 시줄 알았다는 거에요. 그런데 오히려 둘째 딸이 교통사고로 실명하고 큰 딸은 뇌종양에 걸렸다는 거에요. 이 교회가 흔히 말하는 시골 교회 한번 오게 되면 절대 떠나지 않는 한 오백 명이 모이는 십일조는 기본이고 교회가 조용하게 은혜롭게 잘 되는 그 교회는 마음씨 좋은 목사가 있고 이렇게 착한 목사가 오면 한 30년은 그냥 먹습니다. 복음도 필요 없어요.
노인들 잘 대우하고 착하기만 하면 그냥 가는 그런 목사에요. 이렇게 착하고 주위에서도 그렇게 말하고 은퇴하고 나면 복 줄줄 알았는데 자식들이 아프고 그래서 이제는 회개한다는 거에요. 교회를 조금 더 사랑할 걸 조금 더 교인들 사랑할 걸 제가 왜 이 이야기를 하냐하면 이 목사는 뭘 모르냐 하면 인간은 회개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몰라요. 회개하겠다는 말이 뭐에요? 마귀의 종이라는 뜻이에요. 자기가 마귀에 속했다는 고백이에요. 회개하고 난 뒤에 자신의 모습을 본인이 예상 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예상 하지요. 이데 바로 멸망의 가증한 것이에요. 인간은 자기의 반성을 딛고 나쁜 것을 극복하고 그 뒤의 모습이 진정한 나의 모습일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까 김영철의 하춘화 이야기 했지요? 서로가 서로를 모방해요. 전부 멸망의 가증한 것을 마음속에 꽂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목사가 회개하려면 누구에게 해야 되요? 십자가 앞에서 해야 되요. 교인 오백 명 육백 명도 있어야 되요? 없어야 되요? 없어야 되고 단독으로 십자가 앞에 서야 됩니다. 설 때 내가 하는 목회가 전부 뭐였다? 이건 나쁜 목회를 해서 죄인이 아니에요. 교인들 등쳐먹어서 죄인이 아니고 성실하게 하든 바르게 하던 교인과 교회를 사랑했어도 심지어 교회를 위해 내 간을 떼 줬어도 그게 죄였다고 해야 되요.
그래야 그 사람은 유령 같은 존재가 돼서 지금까지 평생 지내온 것은 내 인생이 아니고 주께서 죄인을 죄인 되게 하기 위해서 그 교회에다 집어넣었다고 생각하고 정말 통곡해야 하는 것은 왜 이 사람이 은퇴하기 전에 왜 복음을 교인들에게 못 전했는가에요. 밥 먹고 살려 하는 것. 뭘 해서? 목회해서 결국 뭐냐하면 마지막 때에 교회도 문제이고 목회도 문제이고 신학교 간 것도 문제에요. 이 모든 것이 누구 때문에? ‘나’가 문제에요. 내가 문제에요. 내가 끝이어야 되요. 끝이 된 내가 누구와 만난다? 십자가 지신 주님과 만나게 될 때 내가 바로 끝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움직이는 끝으로서 움직여야 되요. 여러분 교회도 의미 없습니다. 여러분 예수 십자가 모르면 다 엉터리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왜 못했을까요? 몰랐고 안다하더라도 안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목사가 잘립니다. 그 전통적인 교회에서 노인네들이 알아듣는 이야기를 해줘야지 십일조 내는 사람 알아듣게 해줘야지 못 알아듣게 하면 내가 몸 바치고 돈 바치고 청춘을 바친 이 교회를 못 알아듣게 하면 사단이 왔다고 하게 된다는 말이죠. 예수님이 죽었던 이유가 뭡니까? 아무도 예수님을 안 사람이 없었잖아요. 마태, 마가, 누가 복음에 핵심이 그거에요. 인간치고 예수를 알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나님이 몰래 오신 거에요. 돌아가실 때도 아무도 붙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동정해서 여인 세 명도 왔지만 심지어 엄마까지 왔지만 동정이지 정말 예수를 안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안 사람이 없는데 왔고 아무도 안 사람 없이 갔다 그러면 천국은 누가 갑니까? 아무도 못 아는데 천국은 누가 갑니까? 천국이 덮친 사람만 가는 거지요. 성령을 통해서 천국이 덮친 사람은 본인이 뭘 고백하겠습니까? 나는 죄인이라 전혀 주님을 몰랐습니다. 주께서 하시는 말씀은 “몰라도 괜찮아! 구원은 네가 결정하는 게 아니야!”어차피 모르는 사람에게 경정하라고 윽박지를 수 없어요.
모르는데 뭘 네가 천국갈래 지옥갈래 그런 선택 여부를 물을 이유가 없어요. 모르기 때문에 모르는데 무슨 이름을 쓰고 시험 문제를 냅니까? 모르는데 구원했다면 처음부터 주님의 택한 아이이고 주님의 택한 신부이기 때문에 본인이 본인 결정을 무시해야 되요. 날마다 그래서 책임지지 말라는 거에요. 나는 결심했어! 결심은 하는데 책임은지지 마세요. 마태복음 5장에 보면 도무지 뭐하지 말라 맹세하지 말라 네가 맹세 할 레벨이 안 된다는 거에요. 미래를 책임지지도 못하면서 무슨 맹세를 해요. 끝이 오잖아요. 해가 지잖아요. 지면 그냥 지는 데로 덮쳐오면 그냥 어두운 줄 알고 밤이구나! 밤 속을 유령처럼 살면 되잖아요.
이 말씀을 할 때 제자들은 못 알아듣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니까 그들은 유령처럼, 공기처럼, 바람처럼 이 세 가지를 합친 것은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주신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공기인데 공기 없는 곳이 어디 있어요. 다 있지! 바람 불면 부는 거지요. 유령도 마찬가지 그런데 주께서 이렇게 살려주시는 데 평소 우리의 삶은 아직 육이 있기 때문에 저항을 느끼는 겁니다. 그게 어떤 경우냐 하면 외 나무 다리에서 주님과 만날 때 유령같이 또는 바람같이 살면 같이 합세질 수 있는데 아니면 주께서 오시면 저항을 느끼고 실체를 느끼니까 이러시면 아니 되옵나니다 이렇게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갑자기 펜스가 쳐지는 거에요. 이러시면 아니 되옵나니다 주님은 나는 너를 박 공기, 최 공기로 알고 있는데 공기2, 공기3 아니었어? 아니 되옵나니다 이러시면 내 딸은 누가 지키옵니까? 내 아들은 누가 지킵니까? 이러고 있다는 말입니다. 아직 내가 챙겨야 되는데 60까지 다녀야 연금 많이 타는데 아니 되옵나니다 그러면 아니 되옵나니다라고 할 때 주님의 대책이 뭐냐? 잘 먹고 잘 살아라 하고 삐지시면 큰일 납니다. 주께서 상황을 만들어 주시는데 본문에 의하면 끝의 상황, 손을 떼야 될 세상의 상황을 주러 오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의미 부여가 뭐냐 하면 아직은 아니 되옵나니다 이지요.
그러면 주님의 의미는 “끝났어! 야! 손 털고 가자!” 이러시는데 “아닙니다.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아들 장가는 보내고 가겠습니다.” 이렇게 한다 말이죠. 자기가 암 걸렸으면 주여! 조금만 시간을 더 주옵소서! 어떻게 15년만 더 살려 주옵소서! 아직 아니 되옵나니다 할 때 거기서 뭘 끄집어 내냐 하면 그 의미가 어디서 나왔는지를 말씀을 통해서 알려 주십니다. 아니 되옵나니다라는 의미가 어디서 나왔냐 하면 바로 내가 나를 지키려고 하는 거에요. 하나님이라도 내가 나를 지키는 것에 지성소처럼 여기까지는 오시는 것은 곤란합니다.
시 어머니가 김치 해다 주는 것은 좋은데 경비실까지만 와서 맡기면 내가 찾으러 가야지 집까지 들어오시는 건 곤란합니다. 어머니 안녕히 돌라가십시오. 여기까지는 안 된다는 거지요. 그런데 주님은 어떻게 하냐 하면 성도는 여기까지 들어오시지요. 그러면 우리는 분노하지요. 그 분노를 타락이라고 봐요. 그리고 타락이 없으면 예상 못한 새로운 의미와 기쁨과 감사가 절대 안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예상하는 감사는 감사가 아니고 내가 이건 기뻐해야지 하는 것은 내 것이 있다는 전제하에 예상된 기쁨이기 때문에 이건 다 가짜에요. 예상 못한 기쁨은 엔돌핀입니다.
미쳤어! 미쳤어! 내가, 웃으면서 세상에 이런 기쁨도 모르고 내가 돌았어! 돌았어! 자기가 자기보고 철없다고 하고 지금 내가 무슨 생각으로 살고 있는 거야! 이렇게 넓은 길로 가다가 방향을 틀어서 영생이 있는 좁은 길로 인도 하시는 겁니다. 주님 앞에 절로 찬미와 감사가 나옵니다. 3분 내지 5분? 기뻐요. 심지어 암에 걸려서 일주일을 못 넘긴다고 해도 죽는 것이 그리 좋아 아하! 일주일 밖에 안 남았다고 의사 선생님에게 “좀 당겨줄 순 없습니까?”하면 “안 됩니다.”아이! 일주일을 어떻게 기다려! 이 정도 기쁨으로 되면서 온 몸의 세포가 활성화 되면서 일주일이면 죽는다는 인간이 15년을 더 사는 히스기야의 기적이 남의 이야기가 아닌 자기의 이야기가 되어 버렸어요.
그러니까 나는 죽은 자 같으나 살았다라는 그 말씀이 옛날에는 남의 이야기였는데 분노 가운데 그 말씀을 집어넣어서 내 안에 말씀이 글자가 아니라 실제로 잉어처럼 펄펄 뛰고 있다는 것을 짧은 순간 느낄 때 감사가 절로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 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만 살았는 줄 알았는데 주님도 살아 계시고 주님의 말씀도 살아 계시고 십자가의 능력도 살아 있어 철없는 우리에게 늘 주시고 깨닫게 해 주시니 너무나 감사합니다. 늘 기쁨으로 십자가만 자랑하는 저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