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강의

한 사람,재림의 요소 180213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2. 18. 10:36
2018-02-13 21:43:16조회 : 172         
사무엘상 35강( 한 사람), 마태복음 97강( 재림의 요소) 180213이름 : 이근호 (IP:119.18.83.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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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 (IP:122.♡.178.64)18-02-15 18:22 
한 사람(삼상 11장 1-15절) 대전- 35강 이근호 목사 

2017년 2월 13일 

  

본문말씀: 사무엘상 11:1-15 

  

(삼상11:1) 암몬 사람 나하스가 올라와서 길르앗 야베스를 대하여 진치매 야베스 모든 사람이 나하스에게 이르되 우리와 언약하자 그리하면 우리가 너를 섬기리라 

(삼상11:2) 암몬 사람 나하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 오른 눈을 다 빼야 너희와 언약하리라 내가 온 이스라엘을 이같이 모욕하리라 

(삼상11:3) 야베스 장로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에게 이레 동안 말미를 주어 우리가 이스라엘 온 지역에 전령들을 보내게 하라 만일 우리를 구원할 자가 없으면 네게 나아가리라 하니라 

(삼상11:4) 이에 전령들이 사울이 사는 기브아에 이르러 이 말을 백성에게 전하매 모든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울더니 

(삼상11:5) 마침 사울이 밭에서 소를 몰고 오다가 이르되 백성이 무슨 일로 우느냐 하니 그들이 야베스 사람의 말을 전하니라 

(삼상11:6) 사울이 이 말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매 그의 노가 크게 일어나 

(삼상11:7) 한 겨리의 소를 잡아 각을 뜨고 전령들의 손으로 그것을 이스라엘 모든 지역에 두루 보내어 이르되 누구든지 나와서 사울과 사무엘을 따르지 아니하면 그의 소들도 이와 같이 하리라 하였더니 여호와의 두려움이 백성에게 임하매 그들이 한 사람 같이 나온지라 

(삼상11:8) 사울이 베섹에서 그들의 수를 세어 보니 이스라엘 자손이 삼십만 명이요 유다 사람이 삼만 명이더라 

(삼상11:9) 무리가 와 있는 전령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길르앗 야베스 사람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내일 해가 더울 때에 너희가 구원을 받으리라 하라 전령들이 돌아가서 야베스 사람들에게 전하매 그들이 기뻐하니라 

(삼상11:10) 야베스 사람들이 이에 이르되 우리가 내일 너희에게 나아가리니 너희 생각에 좋을 대로 우리에게 다 행하라 하니라 

(삼상11:11) 이튿날 사울이 백성을 삼 대로 나누고 새벽에 적진 한가운데로 들어가서 날이 더울 때까지 암몬 사람들을 치매 남은 자가 다 흩어져서 둘도 함께 한 자가 없었더라 

(삼상11:12) 백성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사울이 어찌 우리를 다스리겠느냐 한 자가 누구니이까 그들을 끌어내소서 우리가 죽이겠나이다 

(삼상11:13) 사울이 이르되 이 날에는 사람을 죽이지 못하리니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중에 구원을 베푸셨음이니라 

(삼상11:14)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라 우리가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 

(삼상11:15) 모든 백성이 길갈로 가서 거기서 여호와 앞에서 사울을 왕으로 삼고 길갈에서 여호와 앞에 화목제를 드리고 사울과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거기서 크게 기뻐하니라 

  

암몬 족속의 조상이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죠. 롯에게 딸이 둘이 있었는데, 소돔과 고모라성의 멸망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은 세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서쪽으로 지중해가 있고 북쪽으로 시리아가 있고 그 밑으로 레바논, 요르단이 있고, 그 옆으로 갈릴리 바다, 그 밑으로 요단강, 사해바다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죠. 야베스라는 동네는 요단강 동쪽으로 있고, 그 밑에가 암몬이라는 나라가 있고, 그 밑에가 모압이라는 나라가 있고, 그 밑으로 에돔이라는 나라가 있어요. 

  

에돔은 야곱의 형 에서의 후손들이고 모압과 암몬은, 창세기 19장에서 소돔과 고모라 멸망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 세 사람이 있는데, 아브라함 조카 롯과 롯의 두 딸입니다. 자식을 놓을 수가 없어서 아버지하고 두 딸과 관계를 해서 낳은 자식이 모압과 암몬입니다. 근데 그 모압과 암몬의 뿌리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바로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을 당한 거기서 나왔거든요. 멸망을 당했다는 것은, 멸망의 요소를 경험한 후손들은 그 속에 멸망의 요소가 내재되어 있다고 그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어떤 징후를 갖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세상을 멸망시켰다. 심판하셨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심판하셨다가 소돔과 고모라잖아요.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옛날에는 물로 심판했지만 앞으로는 불로 심판하겠다. 하나님은 인간을 심판하셨다는 것을 바꾸게 되면 같은 뜻인데,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되죠. 하나님은 뭘 하신다?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에요. 그러면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은 심판을 극복해야 나갈 수가 있겠죠. 

  

왜냐하면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냥 가만히 있는 하나님이 아니시고 심판을 하려고 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조건은 어떤 조건이냐 하면 하나님이 내세우는 심판의 조건을 극복할 수 있는 사람만 하나님의 심판을 이겨서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있겠죠. 그럼 심판하는 하나님에서 제일 중요하게 알아야 할 것은 뭐냐 하면 심판의 기준이 뭐냐는 겁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이 뭐냐? 

  

보통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신다고 하는데, 자비라고 하는 것은 심판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자비를 베푸는 거예요. 심판 할 수 있는 분이 자비를 베풀기 때문에, 일단은 심판을 받아라 이 말입니다. 일단 심판을 받고, 심판을 처음부터 안 받겠다고 하지 말란 말이죠. 모든 인간은 죽어야 된다. 이게 심판의 하나님의 천명입니다. “선악과 따먹었으니까 죽어야 돼.” 죽어야 되는 인간이 살라고 하지 말고, 자꾸 살라고 교회 나오지 말고, 일단 죽자. 매 맞자. 일단 매 맞고 그 다음 이야기는 그 다음이야기고 일찍 좀 맞자. 이런 식입니다. 

  

모든 인간은 다 죽이십니다. 그 죽음 앞에서 인간들 입에서는 뭐, 이제 두 돌 되고 갓난아기 죽인다고, 참 걔들이 무슨 죄가 있어 죽이냐고 상당히 측은해하잖아요. 하나님은 그게 아니에요. 일단 맞자. 일단 죽자. 누구 자식이고 누구자식이고 간에, 뭐 그런 것은 아예 고려대상도 안 된다. 일단 죽고 난 뒤에, 모든 인간이 해골이 되고 난 뒤에 그 다음의 조치가 자비의 조건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자비의 조건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일단 맞자가, 이게 포함이 되어 있어요. “때려주옵소서. 죽여주옵소서. 내가 저 강아지 사랑하는데 죽여주옵소서. 일단 강아지 죽여주시고, 나 죽여주시고, 그 다음의 처분은 하나님의 자비에 맡깁니다.” 이게 바로 자비를 믿는 사람, 구원되는 사람의 특징이죠. 우리가 자비를 요구할 자격은 없어요. 자격 없음, 구원받을 자격 없음을 인정해야 됩니다. 

  

근데 인간들은 교회 나오면서 반대로 생각해요. 일단 살자. 일단 바쁘게 살고 나중에 짬나면 교회 갈게. 일단 살고, 나이가 들어서 퇴직하고 별 할 일이 없을 때 그때 교회 갈게요. 지금은 나라 일하고 자식 키운다고 바빠 가지고 지금은 주님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습니다. 시어머니 모셔야 되지, 순서가 하나님은 0순위에서 밀리죠. 일단 살고, 딸은 시집보내야 되니까 시집은 보내고 그 다음에 이야기합시다. 

  

이렇게 하는데,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안 그래요. 그때는 모든 인간이 잠을 자다가도 다 작살나죠. 노아 홍수가 날 때 잠자고 있었던 사람도 있었고 일하고 있었던 사람이 있었더라도, 시집가고 장가가는 사람이 있더라도 홍수해일이 넘치니까 다 싹 쓸어가죠. 완전히 포항 흥해에요. 지진이 일어나서 흥해 사람들 살던 집들이 다 무너졌잖아요. 화장실에 있었더라도 지진이 일어났을 건데요. 

  

그래서 이 암몬, 모압이 있다는 것은 무엇의 징후냐,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이시다. 소돔과 고모라는 끝나지 않았다. 그 원칙은 지속된다. 이걸 증거로 모압과 암몬을 이야기한 겁니다. 에돔도 마찬가지에요. 에돔은 조상이 에서라고 했죠. 그 에서하고 라이벌 관계가 누구였냐 하면 바로 야곱이었습니다. 야곱. 야곱은 복의 근원이라고,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복을 받았습니다. 근데 심판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한쪽이 복을 받고 한쪽은 복을 안 받고, 이게 아니라 한쪽이 복이 오게 되면 한쪽은 심판, 저주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왜 그러냐 하면 미술에서 스크래치 기법으로 위에 있는 색깔을 벗겨내면 아래에 깔려있는 시커먼 색깔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처럼. 자비라고 하는 것은, 일단은 심판 위에 자비이기 때문에, 자비를 한쪽에 줬다는 말은, 너가 자비를 받을 수 있어서 준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속성은 심판도 있지만 자비도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한쪽을 편애해서 자비를 줬기 때문에 다른 쪽은 남아있는 자비, 남아있는 구원, 남아있는 복은 없고 필히 자비와 축복과 구원의 반대속성이 드러나야 돼요. 저주와 심판이 드러나야 돼요. 

  

그러니까 세상이라는 것은 인간들이 요구한대로 세상이 되는 것이 아니고, 그냥 하나님의 자기 속성 축복과 저주, 양과 염소, 가라지와 알곡, 그 구분된 사실을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그림판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림판. 도화지. 주께서 친히 그림 그려나가는, 또는 연출하는 무대라고 이래 보시면 우리가 마음이 편합니다. 에돔이 같이 있다는 말은 야곱이 약속에 땅에 들어가서 야곱답지 못할 때는 누구와 한통속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죠? 에돔과 한통속이 될 가능성이 있죠. 

  

복의 조건을 갖출 때에 복이 있는데, 그 조건에서 탈락이 되면, 조건이 사라지고 없어지면 이스라엘은 언약의 조건이 없는 이상, 사랑의 조건을 거부하는 이상은 그만 에돔과 마찬가지가 돼버리는 거예요. 원래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 그냥 말로 추상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이스라엘한테 올 때는 반드시 덮개로 와요. 덮어주는 것. 덮어주는 거예요. 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죄는 그대로 있되 덮어지는 거예요. 

  

외손녀가 오줌 누고 똥 누고 할 때 그냥 기저귀가 덮어주는 거죠. 냄새 좀 난다 싶으면 쌌어요. 덮어주는 거예요. 근데 파스 새로 붙이듯이 더러운 기저귀는 벗어버리고 샤워기로 깨끗이 씻겨주고 다시 새로운 기저귀로 덮어주고 이렇게 하죠. 애는 아니지만 누가 옆에서 그렇게 해줬으면 좋겠어요. 화장실 가기 싫은데. 조금만 기다리세요. 한 20년만 기다리면 요양병원에서 그렇게 해주겠죠. 

  

자비가 덮개라는 말은 덮개의 요소가 외부에서 왔다는 말입니다. 내부에서 올라올 것은 죄밖에 없고 자비를 주시는 분은 그 죄를 덮어주는 거예요. 죄를 덮어주는 것이니까 죄가 없는 곳에는 덮개가 의미가 없죠. 덮개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는 계속 죄를 살리고 살리고, 계속 죄를 살려내야 되는 겁니다. 

  

교회에서 말씀을 줄 때, 그 말씀 하나하나가 내 맘에 들어올 때마다 내가 미처 생각지도 못한 그 죄가 계속해서 나오게 하시는 이 절차가 자비의 절차 안에 전제로 이미 세팅이 되어 있어요. 포함이 되어 있어요. 죄를 지적할 때 고맙다고 해야 돼요. 그 죄를 지적했다고 해서 그 죄로 인하여 저주받거나 징계 받거나 심판받지 않습니다. 그 죄로 인하여. 히브리서 12장에 나오는 말씀에서 아버지를 모르기 때문에 징계 받지 나쁜 짓을 모르기 때문에 징계 받는 것이 아니에요. 

  

나쁜 짓 했다고 깜짝 놀라는 것은 본인이에요. 나쁜 짓해서 깜짝 놀란다는 것은,
그 사람이 관심을 덮개에 두어야 하는데,
자기의 반듯한 행동에 둬버리니까 깜짝깜짝 놀라는 거예요.
내가 이런 나쁜 짓을! 이렇게 하면 하나님은 같잖아서 웃죠.
“원래 그래. 니 왜 그래? 여기 와서 왜 딴소리를 해? 얘가 이상하네. 니 원래 그렇다니까. 원래.
딴사람 이야기하듯이 이야기하면 곤란하지.”
 

  

만약에 어떤 남자가 군에 입대를 했다. 군에 입대하고 난 뒤에 첫날, 둘째날에는요, 여기가 군대인지 집인지 분간을 못해요. 막 꿈을 꾸는데 여전히 집이라. 깨보면 낯선 곳에 와있다 이 말이죠. 낯선 곳에 와있죠. 훈련받으면서 이상해요. ‘왜 내가 훈련을 받지? 내가 이런 것 할 사람이 아닌데.’ “뒷동산에 올라가면 우리 동네 보일까”<김광석 이등병의 편지> 거기에 가고 싶어서. 여러분, 돌아갈 곳이 없어요. 죽은 인간은 돌아갈 곳이 없어요. 

  

우리가 가는 본향은 우리의 본향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고향이에요.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가본적도 없는 곳에 가요. 가본적도 없는 곳에. 그 집으로 가자고 하는데, 그 집은 우리 집이 아니고 주님이 가신 집이고 나와 상관이 없는 집이에요. 나하고 상관없는 집이기 때문에 인간성이 달라져야 해요. 익히 아는 곳에 가는 것이 아니고. 엄마가 보고플 때 해도, 백날 보고파도 그 엄마 지금 지옥에 가 있는데, 그럼 같이 지옥갈래요? 

  

엄마가 보고픈 게 아니고,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새롭게 관계를 엮어주신 주님의 고향에 가는 거예요. “가자! 우리 집으로!”이래된다 말이죠. 애굽으로 돌아가면 안 돼요. 광야의 실패는 바로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어요. 그들이 아는 고향의 전부는 애굽이었습니다. 그들의 몸을 둘러싼 현실감각은 모두 애굽에서 나온 수입한 감각이었어요. 출생이 그 출생이었습니다. 행동하는 것, 밥 먹는 것, 모든 풍습이라는 것, 그래서 광야에서 율법이라는 것은 애굽의 풍습과는 달라야 된다. 뭔가 달라야 된다. 다른 인간으로 생각을 달리해야 된다는 거예요. 

  

“바르게 삽시다.” “아니야. 아니야. 그건 육이야.” 바르게 사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 믿어서 바르게 살아야지.” “아니야. 그거 아니라니까.” 주님의 덮개에 관심이 있다가 갑자기 나는 바르게 사는 인간으로 되돌아오면 안 돼요. 그건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하고 똑같은 겁니다. “예수 믿었으면 이정도로는 바르게 살아야지.” “아니야. 아니야. NO. NO.” 그건 아니에요. 예수 믿고 바르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이야기를 몇 십 년을 해야 되는지 모릅니다. 아무리해도 못 알아들어요. 아무리해도. 육이라는 평면을 뚫고 나와야 된다고요. 육이라는 평면을. 뭐, 좀 성경알고 복음 좀 아는 사람이라고 해서 들이대보면 전부다 다시 육의 평면을 사수하고 있어요. “이러시면 아니 되옵니다.” 뭘 이러시면 아니 되는데? 상감마마! 뭐 이런 것. 관심사가 본인한테 있습니까? 덮개한테 있습니까? 이걸 묻는 거거든요. 

  

예수님을 이용해서 못난 내가 훌륭한 나로 달라진다? 그런 것은 법당해서 하라고 해요. 법당에서. 절에 가서 하라고요. 절에 가서. 도 닦는 그런 거. 공자 맹자연구해서 하면 돼요. 공자 맹자, 노자 이런 거요. 그건 도올 김용옥한테 가서 다 배우면 돼요. 김도올한테. 도올선생한테 가서 배우면 돼요. 법륜스님 있죠? 법륜한테 가서 배우면 돼요. 혜민스님 있잖아요. 머리 깎는 사람 많습니다. 그런 사람한테 하면 돼요. 인간은 어떻게 해야 인간답게 사느냐? 그런 것 다 배워요.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범죄자였습니다. 왜 이걸 기본으로 몰라요? 제가 지난 주일에 이야기를 했거든요. 주님께서는 신이 되셔서 이 땅에 범죄사건을 일으킨 거예요. 전부 다 범죄자 안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그 마당에 자진해서 범죄자가 된 겁니다. 사람들의 판, 이러면 되고 이러면 안 된다는 그 지평선에서 완전히 충돌되는 분이 예수그리스도에요. 

  

자, 사무엘상 11장에서 여기 야베스라는 이 동네 사람들이, 야베스가 사실은 요단강 동쪽에 있으면 안 돼요. 요단강 안쪽으로 와야죠. 뭐 여기가 좋사오니, 라고 해서 바깥으로 나간 거예요. 목축지가 되니까. 이게 베냐민지파거든요. 베냐민 지파가 사사기(20장)에서 아주 작살이 났습니다. 그래서 밀려가지고 이곳까지 온 모양인데, 베냐민지파가 나쁜 짓을 했거든요. 레위인의 첩을 강간해서 죽여 버렸어요. 그러니까 그 시체를 열두 토막을 내서 열두지파한테 보냈을 때, 우리 이스라엘이 범죄한 지파를 싸고돌아야 하느냐, 우리 이스라엘이 어떤 이스라엘인데, 이거는 율법에 어긋나니까 다함께 모여서 베냐민 지파에게 징벌을 주자고 했을 때, 이 야베스는 우리는 빠진다고 한 거예요. 

  

빠졌다고 화나가지고, 니는 우리 편 아니라 해서 베냐민 지파 조지고 야베스 조지고. 그래서 인구수가 얼마 되지도 않아요. 야베스가 이스라엘 사람인데 동네가 요단강 바깥에 사는 사람들이에요. 여기에 사니까 옆에 누가 있어요. 암몬족속이 쳐들어온 거예요. 그러니까 다급해서 이스라엘에게 통보를 한 거예요. “같은 형제들이여 살려주세요.”라고 한 겁니다. 이 점에서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사람은 적이 없으면 나를 몰라요. 인간은 항상 자기 자신을 점잖은 사람으로 포장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항상 자기 속에서 나쁜 것은 버려버리고 좋은 것만 추려서, 나에게 좋은 기억만 있는, 좋은 기억의 덩어리에서 자기 자신을 조립하는 거예요. 좋은 거만 모아서 조립하니까, 자기가 좋은 사람일 수밖에 없죠. 좋은 사람으로 있으니까 남들에게 비난이 오게 되면 거기서 뭐가 됩니까? 자기장점을 총동원해서 극구 자기를 사수하고 방어하죠. 수비에 나가죠. 그러면 적에 대해서 수비가 강화될수록 누가 더 우수한 존재가 됩니까? 내가 더 우수한 존재가 되죠. 

  

만약에 그 적이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이고 하나님이고 무조건 공격당하면 인간은 반발하게 되어 있어요. 그 사람이 바로 얍복 강가의 야곱이었어요. 얍복강의 지명이 새로 생겨요. 브니엘이라고. 브니엘. 하나님과 대면했는데 내 생명이 보존되었다. 하나님과 대면했는데 내 생명이 보존되었다는 말이 뭐냐 하면 내가 살았다는 개념을 옛날에 살았다는 개념하고, 하나님 만나고 난 뒤에 살았다는 개념이 완전히 확연히 달라졌다는 것을 증언하는 겁니다. 완전히 다르다는 거예요. 

  

옛날에 살았다고 하는 것은 거울보고 신체가 왔다 갔다 하는 그걸 보고 살아있다고 했죠. 그런데 거울만 봤지 하나님 앞에 나를 비춰 본적이 없죠. 왜냐하면 하나님을 만나본적이 없으니까. 그런데 다가오신 하나님이 뭐 화친의 손으로 좋게 오시는 것이 아니고, 내 것을 빼앗아가겠다고, 완전히 내 것을 털어내겠다고 오실 때 강력하게 저지하게 되어 있죠. 

  

만약에 내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딸에게 교통사고를 일으켰다. 그러면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겠습니까? 원망스런 하나님이겠습니까? 원망스럽죠. “이렇게 불안해서 저는 더 이상 못삽니다.” 뭐 다른 신을 믿든지 다른 종교로 가야죠. 내가 이 종교를 믿어서는 교통사고 일어났으니까 앞으로는 더 큰 사고가 일어나겠다. 이래가지고서는 불안 불안해서 못 살겠다는 겁니다. 복음 전하면 다 튀어버리는 이유가 뭡니까? 불안한 거예요. 

  

내가 알고 있는 예수,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이 아니에요. 내가 알고 있는 성령도 아니고. 내가 아는 복음은 내가 잘 되는 것이 복음인데. 이렇게 불안스러워서 못 믿겠다는 거예요. “십일조 안 해도 됩니다.” 이게 복음이 아니에요. 나의 불안을 유발시킵니다. 십일조 했기 때문에 3대가 복을 받았는데, 이걸 안 하게 되면 3대가 작살이 나는데? 이거 미친 짓이지. “하지 말라고 해도 나는 하겠습니다.”라고 한다면 감사히 받고. 

  

뭔가 복음에 불안하다는 말은 지금 다른 예수를 믿고 있었다는 거예요. 다른 예수 믿고 있었던 거예요. 복음을 듣는데 불안하지 않는 이유는 뭐냐, 처음부터 다 털린 채로 복음을 들어버리면, 다 털렸잖아요? 없잖아요? 없는데 마구 들어오잖아요. 용서가. 사랑이. 주께 감사를 안 할 수가 없죠. 근데 지킬 게 있다면 주께서 주시지를 못해요. 섞여버리니까. 내가 지키고 싶은 나의 의도 따로 있고, 그 다음에 모자란 부분은 예수님한테 의를 달라고 하고. 

  

이래가지고 예수님의 의와 나의 의가 같이, 함께 서로 사맛디 아니할세. 이게 섞이지가 않거든요. 안 된다 이 말이죠. 한쪽을 치워야 된다 이 말입니다. 오른쪽의 흙을 놔야 사탕을 줄 게 아닙니까? 꽉 쥐고 있으면 안 되잖아요. 때찌! 때찌! 하고 털어내려고 하는데, 이 때찌때찌가 불안해서 도망가 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그런 사람들한테는 잘못된, 지옥 가는 복음을 전할 수밖에 없죠. 그래야 교회가 되니까. 털려야 됩니다. 아까 한 이야기 다시 해볼까요? 심판하는 하나님이에요. 심판하는 하나님. “맞자.” 오늘 제목은 “맞자!” 

  

자, 이스라엘 보기에 적은, 암몬, 모압, 이방민족이 적이라고 그들은 알고 있습니다. 암몬, 모압을 적이라고 알고 있는 이유는 어떤 전제에서만 가능하냐면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있다는 그런 조건하에, 그런 조건이 되면 이들에게 암몬, 모압이 적이에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적은 없어요. 하나님의 적이지. 이걸 분명히 알아야 돼요. 

  

하나님이 인정하는 적은 예수님의 적이지 이근호 나의 적은 적이 아닙니다. 주님과 함께 있을 때 적이 보이지, 주님 떠나고 나서 독자적으로 있을 때 적이 보인다는 것은, 그게 적인지 한통속인지 우리가 판단할 권한도 없고 판단도 흐릿하게 되어 있어요. 판단 못하게 되어 있어요. 나를 해코지한다고 해서 적이 아니에요. 

  

나부터 해야 해요. 나는 도대체 누굴 위해서 존재하느냐, 나를 위해서 존재한다면 오히려 나를 치는 쪽은 주님이 보내신 사자, 천사일 수가 있어요. ‘나를 위해서’를 뭐로 바꾼다? ‘주님을 위해서’로 바꾸라고 쳐들어온다 이 말이죠. 그러면 고마운 줄 알아야죠. ‘아, 내가 정신 엉뚱한 데에 팔았구나.’라고 그렇게 생각해야 돼요. 

  

군에서 “앞으로 갓! 뒤로 갓!” 이걸 제식훈련이라고 해요. 전혀 군대에 적응 못하는 사람을 군에서 고문관이라고 하는데, 바보에요. 바보. 앞에서 교관이 “앞으로 갓!” 하면 손들어요. “왜 손드냐?” “질문이 있습니다.” “당신이 언제 봤다고 나보고 앞으로 가라고 합니까?” 이런 것. 자, 여기서의 답변은 그거에요. 뭐냐 하면 각자 개성이 다른 것은 맞아요. 각자 다른 동네에서 살다가 왔는데, 모인 목적이 하나가 돼버렸어요. 

  

이스라엘은 사람들이 다 다르지만, 이스라엘의 목적은 이스라엘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업적을, 아까 이야기한 덮개죠. 사랑. 주님의 업적을, 사랑해줬던 이스라엘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를 위해서, 사랑이라는 그 욕구가 유지될 때만 이스라엘이 돼요. 이스라엘을 지키기 위해서 사랑해준 게 아니고, 주님의 사랑 자체를 위해서 이스라엘이 거기에 동원이 된 겁니다. 사랑의 증언자로서. 

  

그래서 이스라엘이 주님의 사랑을 놓쳐버리면, 이거는 그들이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할 자격도 권리도 없어요. 근데 이 이스라엘이 인간인지라 늘 하나님 생각 안 하고 자기 자신을 생각하잖아요. 그래서 여기에 이스라엘 밖에 대기되어 있던 셰퍼드들, 하이에나들. 썩은 고기를 먹기 위한 이방나라들이 있는 이유가 하나님의 지시가 떨어지게 되면, 여차하면 이스라엘을 물어줘야 돼요. 물어줘야 내가 도대체 누굴 위한 존재인지를, 그걸 다시 한 번 깨우치게 되는 계기가 되기 때문에. 

  

그러니까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것은 평온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러한 조치까지라도 사랑에 포함을 시켜줘야 해요. 정신 딴 데 팔았을 때 때려주는 것까지도 사랑이라고 봐야 되고 이걸 복으로 봐야 돼요. 정신머리가 엉뚱한 데에 가 있을 때에. 그래서 신명기 8장에서 보면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소유가 풍부할 때에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릴까봐 두렵다고 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잘 해줄 때에 인간들은 자기 잘난 것만 생각하고 하나님의 생각은 뒷전이죠. 

  

자, 이스라엘의 적이, 야베스는 암몬이라는 이방민족이 우리의 적이라고 간주하는데, 이스라엘의 적은 이스라엘 본인이에요. 항상 이스라엘의 적은 이스라엘입니다. 본인이 본인의 적이에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소유기 때문에. 하나님의 소유인데 소유에서 자꾸 도망치려고 해요. 독립해서 독자적으로 살라고 합니다. 

  

그 증거가, 우리가 사무엘상 초반부터 쭉 해온 것이 뭐냐 하면 그들이 왕을 구했다는 겁니다. 왕이 없으면 구해도 돼요. 근데 왕이 있잖아요. 왕이 있는데 그들은 왕이 안 보인다는 겁니다. 과연 왕이 안 보일까요? 참, 이런 게 어려운데요. 보이지 않는 왕이죠. 보이지 않는 왕이 어떻게 느껴지느냐 하면 적이 보일 때 비로소 왕이 보입니다. 왕의 망이 느껴져요. 보이지 않는 왕, 하나님은 왕인데 안 보이는 것은 맞아요. 

  

그런데 보이는 인간 가운데 자기를 공격하는 악몽 같은 적군이 왔을 때, 적들은 보이잖아요. “우와~ 쳐들어가자!” 소리가 들리잖아요. 소리가 들릴 때, 그들은 보이는 자기들끼리 단결해서 물리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보이는 것에 대해서 보이는 것으로 대결할 수 있는 게 이스라엘의 위상이냐 이 말입니다. 그게 아니에요. 

  

보이는 적에서는 보이는 자기들을 동원하지 말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비로소 보이는 분으로, 보이는 것보다 더 확실한 보이는 분으로 개입해서, 보이는 적들을 기적적으로 처리를 해줄 때, 보이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의 목적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보이지 않는 식으로 계시는 그 분이 보이는 이스라엘의 존재목적이 되는 거예요. 존재이유가 되는 겁니다. 

  

이게 오늘날 우리하고 똑같아요. 똑같습니다. 앞으로 어디를 가더라도, 군에 보이지 않는 분과 함께, 보이지 않는 분, 보이지 않는 분과 함께 할 때 보이는 것에 대해서 너무 주눅 들지 않게 해야 돼요.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분의 방식이 뭐냐, 저쪽에서 공격할 때는 반드시 힘의 우열로 공격해요. 힘의 우열로. 힘이 더 세다 이 말이죠. 큰 센 힘을 가지고 오거든요. 

  

그러면 보통 인간들의 대응은 뭐냐, 힘이 세니까 여기서 뭘 대비해야 됩니까? 힘은 힘으로 또 나서는데, 적이 쳐들어왔을 때는 소수 야베스보다도 암몬이 숫자가 많으니까 충분히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쳐들어온 것이 아닙니까? 이거는 뭐냐 하면 전쟁할 수 있겠다는 힘의 우열, 힘이 더 우세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전쟁을 벌였잖아요. 그러면 거기에 대응할 때는 이것보다 더 큰 힘을 동원해야 됩니까? 그렇게 되면 똑같은 사고방식이잖아요.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도 숫자를 가지고 덤벼들어야 되는데, 만약에 숫자가 이거보다 더 모자라면 애당초 항복하고 말아야 되잖아요. 그렇잖아요? 자, 그렇다면 하나님이 함께 있음의 취지가 살아나야 됩니다. 하나님이 없을 때는 힘엔 힘으로 대결하겠는데, 하나님이 살아있다면 뭐로 대결해야 되겠느냐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살아 있다면. 야베스에게 다수가 쳐들어오죠. 근데 여기에서 뭐냐 하면 다수가 아니고 한 사람을 뽑아내버리죠.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2절에 보면 암몬 사람이 아주 자신만만해요. 야베스가 먼저 항복을 해요. “좋게 지내자”라고 하니까, 암몬 사람이 “좋게 지내는 것 좋아하네. 너희 군사 오른 눈을 다 빼버린다.”라고 이렇게 나왔어요. 오른 눈을 다 빼겠다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오른 눈이 빠진 자신을 상상하겠죠. 끔찍하겠죠. 그래서 야베스 장로들이 “우리에게 일주일 동안 기간을 주어서 우리 가운데 구원할 자가 없으면 우리가 항복할게. 잡아먹힐게.” 그래서 구원할 자를 쭉 찾아봤어요. 

  

이 이야기가 누구한테 들어가느냐 하면 한 사람, 사울에게 소식이 들렸어요. 사울이 이 소식을 딱 들으니까, 6절에 보세요. “사울이 이 말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매 그 노가 크게 일어나서” 하나님의 신에게 감동된다는 말은 이번 전쟁은 인간 대 하나님의 전쟁으로 규정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하나님의 선언이에요. 

  

사울이 하나님의 신에 크게 감동이 되어서 노가 크게 일어나 한 겨리 소, 두 마리의 소를 취해서 각을 뜨고 전부 다 이스라엘 모든 지경에 보냈습니다. 사울과 사무엘을 좆지 아니하면 이 소들과 같이 되리라고 했어요. 자, 지금 전쟁을 누구하고 해야 해요? 암몬족속하고 해야 되는데, 사울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하니까 이거는 본선 치르기 전에 예선부터 하는 겁니다. 예선은 누구하고 하느냐, 사울 말을 듣지 아니하면 암몬이 치기 전에 내가 너희들을 쳐버린다 이 말이죠. 내가 너희를 쳐버린다. 

  

그러면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들이 있잖아요. 인간들 개개의 자아가 있습니다. 자아라는 말은 우리말로 쉽게 하면 나죠. 나. 나가 있는데, 나+나+나+...해봐야, 한 30만 명 그냥 뭉쳐봐야 각자 개성이 다 살아있어요. 나는 나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전쟁하려면 나를 어떻게 해야 해요? 이 나를 제거해야 되겠죠. 나를 제거하고 누구의 특정 나한테 종속이 되어야 해요. 

  

바로 하나님의 신이 임하매 여기서 낯선 힘이 나왔고, 그 힘이 인간들의 마음을 감동해서 모든 개인적인 나는 다 사라지고 사울 주체, 사울의 집단종속체로 바뀌는 겁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권력이 주어졌기 때문에 여기서는 자아가 아니라 주체가 되는 거예요. 주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권력 때문에 새롭게 발생된 게 주체에요. 권력 때문에 새롭게 발생된 것. 

  

이거 말이 좀 어렵죠. 집에서 어리광부리는 두 살배기 애가, 집에서는 엄마한테 찡찡거리고 만만하게 엄마한테만 하다가 어린이집에 보낸다. 엄마가 “선생님 말씀 잘 들어. 엄마가 오후에 데리고 올게.”라고 하면서 가버렸어요. 그러면 믿을 구석은 아무도 없는 거예요. 그럴 때 선생님이 “자, 여기 똑바로 앉아서 식사를 합니다. 알겠습니까?”라고 힘을 팍 줘버리면 갑자기 “예!”하죠. 집에서 했던 자아는 날아가 버리고, 그 권력에 종속된 새로운 나, 새로운 주체가 권력에 예속되어 등장하는 거예요. 

  

그것이 뭐냐, 이 암몬에 대한 전쟁은 하나님이 나서서, 하나님의 싸움으로 전환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전쟁이 되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냥 멀쩡하게 앉아서 팔짱끼고 구경하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구경하고, 받아들이고, 예수님의 존재가 뭐 어떻게 하셨는지 쳐다보고, 관람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예수님의 성령이 와서, 철저하게 예수님의 힘 앞에 자기 자아가 날아가 버려야 돼요.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이게 바로 마태복음 8장에 나온 백부장이 예수님의 힘에 의해서 새롭게 된 주체가 아닙니까? 권력이 없는 곳에는 주체가 없다는 거예요. 집에서 과장이지만, 과장이라는 말은 사장 밑이지만, 집에 가게 되면 자기가 아버지가 되죠. 벌써 거기에 있는 위치에 따라서 주체가 달라져요. 

  

심지어 이런 게 있어요. 어떤 회사에 부장이 있고, 부장이 되게 깐깐한 부장이 되어가지고 밑에 과장을 되게 괴롭히는 거예요. 나이도 자기보다 더 적은데. 뭐 낙하산을 탔는지, 하여튼 젊은 게 깐깐해가지고 “이렇게 할 거면 나가!” 뭐, 이런 식으로 협박을 주고. “예~ 예.”하면서 모든 굴욕적인 행동을 다 했는데, 나중에 집안끼리 모일 일이 있어서 집안끼리 모이고 보니, 이거는 자기보다 항렬이 낮아. 조카뻘이라. 과장이 집안 어른이고 부장이 항렬이 낮아요. 어른들 쫙 있는데, “앉으라 해라.” 어른들이 두루마기 한복입고 앉으라고 하니까, “아재요!” “똑바로 해야지!” “아재한테 먼저 음식을 드리고.” 자, 이렇게 된 걸 처음 알았죠. 그 다음에 다시 회사에 갔다. 얼마나 서먹서먹하겠습니까? 그땐 이제 협상 봐야죠. 아재뻘이니까 전에 당한 거 이제 퉁치고, 그 다음부터는 “아재요, 제가 잘해줄게요.”라고 해서 좋은 관계로 나가겠지요. 

  

자, 주체라고 하는 것은요, 개인 개인이 목욕탕에서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회 권력에서 나를 사용할 때, 얽히고설켜있는 힘이 있잖아요. 힘의 권력 망. 그 망에 내가 어떤 입장으로 걸려드는가, 그게 주체가 되는 겁니다. 목욕탕에서 집에 오면 자아가 되고. 그래서 구원은 자아에서 구원받지 못하고 주체로 구원받는 겁니다. 나는 자아에서 죽고 주체로 다시 태어나고. 근데 주체로 태어날 때는, 자아(나)를 위한 천국은 없어요. 주체 만들어주신 주님을 위한 천국이고 주님을 위한 구원이지, 자아(나)를 위한 천국은 없습니다. 

  

이게 구분이 안 되니까 교회가 법당이 되는 겁니다. 엉망진창이 되는 거예요. 주님이 뭐 시다발이인줄 알고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아니에요. 이 단계를 지금 사울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적이 문제가 아니에요. 저 적이 이스라엘 너의 적이 되면 이스라엘은 백날해도 못 이깁니다. 주님이 나서서 해야 되는데, 주님이 나선다는 말은, 주님이 나서고 나는 그냥 구경하는 것이 아니에요. 주님이 나서면서 일단 그들의 자아를 전부 다 몰살시키고 다 없애버리고 하나님의 신에 종속되도록 해야 돼요. 

  

이 전쟁에 암몬이라는 장기알을 움직여서 야베스를 치게 한 그 목적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사무엘상 11장 12절인데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백성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사울이 어찌 우리를 다스리겠느냐 한 자가 누구니이까 그들을 끌어내소서 우리가 죽이겠나이다” 됐습니다. “그들을 끌어내소서” 이게 목적이에요. 자, 지금 사울을 시시하게 보는 거예요. 사울은 하나님의 신이 임했고, 인간이 왕을 달라고 했지만 주께서 간택한 거예요. 그렇다면 이 사울 뒤에 누가 있다? 하나님이 있음을 알아야 돼요. 

  

사울이 왕이더라도 여전히 누가 왕입니까? 실질적으로 왕은 하나님이 왕이고 사울은 하나님의 수렴청정 하는 거기에 그냥 아바타에 불과한 거예요. 하나님은 자기 왕 됨을, 왕이 있다는 것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꾸준히 이렇게 가줘야 이방민족과의 전쟁에서 이길 게 아닙니까? 그런데 사울이라는 사람이 눈에 보이니까 사람들은 우습게 본 거예요. 

  

특히 사울이 어느 지파에요? 베냐민 지파죠. 베냐민 지파는 과거사가 어두워요. 작살났던 제일 안 좋은 지파란 말이죠. 제일 안 좋은 지파에서 왕이 태어났으니까, 왕은 세습제거든요. 한 번 왕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가 후손이 계속 왕이 된다 이 말이죠. 근데 그 지파를 우대한다는 것이 속에서 구역질이 나는 거예요. 다른 지파에서는. 죄 지은 지파를 왜 섬겨야 하느냐, 못마땅한 거죠. 

  

전에도 했죠? 작은 지파, 이 작은 지파를 하나님께서 건지시는 이유는 바로 주께서 이 땅에 메시야로 오실 때 겸손하게 오셨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모든 인간이 자기 자신을 대단하게 만들기 위해서 아주 분투노력하기 때문에, 역발상이에요. 그와 반대로 오시는 겁니다. 

  

그래서 사울에게 그렇게 임할 때 여기 7절에 보면 “여호와의 두려움이 백성에게 임하매 그들이 한 사람같이 나온지라” 여기 한 사람 나오죠. 한 사람. 오늘 제목이 바뀌었어요. 한 사람. “한 사람 여기” ‘한 사람’ 양희은 노래죠. 한 사람같이 나오더라. 근데 그 한 사람의 숫자가 뭐냐 8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삼십 만이요 유다 사람이 삼만이더라” 삼십삼만. 숫자가 전에 있는 숫자 반밖에 안 돼요. 그만큼 숫자가 작살이 난 겁니다. 

  

어쨌든 간에 그렇게 해서 야베스가 힘을 얻어서 내일 이야기해줄게, 라고 이야기했어요. 9절에 보면, “무리가 온 사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길르앗 야베스 사람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내일 해가 더울 때에 너희가 구원을 얻으리라 하라 사자들이 돌아가서 야베스 사람들에게 고하매 그들이 기뻐하니라” 10절, “야베스 사람들이 이에 가로되 우리가 내일 너희에게 나아가리니 너희 소견에 좋을 대로 우리에게 다 행하라 하니라” 

  

이렇게 도와주어 야베스가 연합군을 얻었고, 야베스는 암몬에게 내일 너희에게 나아가겠다고 하는 것은 자기들에게 이런 후원군이 있다는 것을 감추는 거예요. 감추어 놓고 11절에, “이튿날에 사울이 백성을 삼대에 나누고 새벽에 적진 중에 들어가서 날이 더울 때까지 암몬 사람을 치매 남은 자가 다 흩어져서 둘도 함께 한 자가 없었더라” 

  

이 전쟁이 뭐냐 하면 그냥 마주치기만 해도 승리한 전쟁, 붙여주는 전쟁이고, 이 전쟁을 소리로 표현한다면 나팔소리입니다. 나팔소리는 이미 전쟁이 끝난 상태를 시작 전에 이미 경험케 하는 것이 나팔소리에요. 나팔소리는 두 번째 시간에 하겠습니다. 주님이 재림할 때 나팔소리가 나오죠. 이거는 그때에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고, 처음부터 이미 누가 구원이 될 줄, 누가 사전에, 성령을 통해서 벌써 주님하고 성도끼리는 사전에 다 알고 있었어요. 누가 구원 받는지. 

  

어떻게 구원받느냐 하면, 주님의 구원의 원리를 알고 있으니까. 이 원리는 인간의 지혜와는 정반대거든요. 인간의 판은 육의 판입니다. 육의 판에서는 내가 바르게 살아야 구원을 받잖아요. 그게 뚫린 거예요. 그 저지선이. 바르게 산다는 것 자체가 아니라 내가 죄인 중에 괴수가 되어야 구원된다는, 완전히 정반대의 기준이라는 사실을, 사전에 정보가 입수되었거든요. 사전에. 

  

보통 신랑이 신부를 고를 때는 신부의 얼굴을 보고 골라요. 품평회 하듯이 줄 세워놓고 예쁜 여자를 고르는데, 근데 신랑이 마지막에 올 때는 얼굴 예쁜 것, 뭐 자격증, 스펙이 어떻고, 집안이 어떻다는 그걸 보지 않고 기름준비 한 것만 봐요. 기름준비 한 것. 아주 특이해요. 그리고 기름은 늘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말이죠. 신랑을 의식한 자만 준비하는 게 기름이에요. 신랑만 늘 생각할 때만. 

  

인생 자체가 신랑이 우선이지, 나 우선이 아닌 사람. 그게 지혜로운 다섯 처녀거든요. 만약에 내가 우선 같으면 그때, 신랑이 올 때 줄서가지고 기름 사러가고 하겠죠. 그때는 이미 안 돼요. “저라는 여자 괜찮은데.” 그런 것 소용없어요. 뭐, 기준이 다른데요. 우리는 내가 만든 기준은 안 돼요. 덮개기 때문에. 내가 만든 것은 뭘 만들어도 육이 되는 겁니다. 육이라는 이유 때문에 이유도 없이 무조건 죄에요. 

  

나에게서 나오는 것, 헌금을 하든, 기도를 하든, 선교를 하든, 헌신을 하든, 뭘 하든 죄가 되는 겁니다. 구원은 예수님의 피지 내 피가 아니에요. 기도한다고 내 무릎이 까져서 피나오는 그 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문둥병이 나은 물 마셨다고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에디오피아, 수단에 가서 흑인 애들 돌본다고 자기도 병 걸리고, 그렇게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신부가 에디오피아 가는 그것도 죄에요. 그 죄를 본받으면 안 돼요. 

  

아프리카에 가서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고 해서 꽃으로 안 때린다고 해서 죄가 아니고 꽃으로 때린다고 해서 죄고, 그게 아니라 꽃으로 때려도 죄고 안 때려도 그거 죄에요. 김혜자가 선교하면서 했잖아요. 이건 취미생활이거든요. 자기를 좀 더 스스로의 힘으로 변화시킨다는 것은 자기관리인데, 자기관리는 주님의 기준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겁니다. 한사람이라니까요. 너 말고 예수님 한사람. 니 이름 말고 예수님 이름. 

  

그래서 작살냈습니다. 이거는 주님보시기에 전쟁을 하나마나에요. 주께서 치시게 되어있기 때문에. 쳐들어온 것도 주의 뜻이고 그들이 지는 것도 주의 뜻이고. 그리고 주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증거는 사울에게 있고. 그래서 사울이 왕이 될 수 없다고 했던 사람이 누구냐? 죽이자. 그럴 때 사울이 죽이지 말자. 왜냐하면 심판 뒤에 구원의 승리, 전쟁의 승리의 혜택을 그들에게도 주는 것이 심판 후에 자비의 조치다. 그렇게 해서 15절에 보면, 사울은 화목제를 드리고 크게 기뻐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10분 쉽시다.

 이미아 (IP:122.♡.178.64)18-02-16 09:10 

재림의 요소(마 24장 29-31절) 대전- 97강 이근호 목사 

2017년 2월 13일 



본문말씀: 마태복음 24:29-31 

  

(마 24:29)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마24:30)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마24:31) 저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예수님이, 인자가 다시 오신다고 했는데, 재림이라는 이 말을 사람들이 이해하기가 힘들어요. 다시 오실 경우는 어떤 경우냐 하면 이 땅에서 좋게 헤어질 경우에는 다시 올 수가 있어요. 좋게 헤어지면. “빠이빠이~ 갑시다. 내년에 다시 봅시다.” 이럴 경우에는 재림이 되는데, 여기서 그냥 죽어버리면? 이 땅에서 그냥 가는 것이 아니고 죽어버리면? 오실 분이 죽었잖아요. 이순신 장군이 재림합니까? 죽어버린 사람이 올 게 뭐가 있어요? 죽어버렸는데. 돌아가신 증조할아버지 다시 재림하시던가요? 안 오죠. 제사 때마다 방문하고 뭐 그런 거 없죠. 

  

근데 예수님은 다시 오신다고 했고, 다시 오신다고 하시면서 예수님은 이 땅에서 죽는다고 이야기했거든요. “나는 십자가에 죽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다.” 사람들 앞에서는 뭐가 정리가 되어야 하느냐 하면 죽은 분이 다시 살아서 다시 온다. 이 죽음과 다시 옴이 어떻게 연결되어야 하느냐 그것부터 정리가 되어야 합니다. 근데 그 정리되기가 굉장히 어려워요. 이게 힘들어요. 왜 힘드냐 하면 그렇게 정리하려고 하는 본인이 아무 문제가 없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래요. 나는 문제가 없고, 문제가 없는 나에게 이해가 안 되는 이야기를 한 예수님 쪽에서 문제가 있다가 되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님이 이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이런 이야기를 할 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아, 우리가 몰랐어. 저렇게 훌륭한 분을!” 이래가지고 깜짝 놀랐습니까? “아휴, 우리가 이렇게 다시 오실 분을 홀대하고 천대하고..우리가 큰일 날 뻔했지. 그 분을 고이 살려서 보내드려야 해. 그래야 다시 오시는 거야, 라고 이럴 줄 알았지? 이럴 줄? 저런 무슨 미친 게 다 있어!” 이런단 말이죠. 알고 있는데요. 뭐. 예수님 아버지가 목수라는 것을요. 출신이 갈릴리 출신이라는 것을 뻔히 알거든요.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을 판단하는 그 본인이 전혀 하자가 없고, 문제가 없다고 하는 사람을 보고 예수님은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방금 이야기한 것은 무시하고, 우리는 아니까 우리는 여기에 해당사항이 없다고 할 수가 있죠. 근데 그게 그렇지가 않아요. 역시 안다고 하는 우리도 문제가 되는 겁니다. 왜 문제가 되느냐 하면, 29절에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라고 되어 있죠. 

  

우리가 지상에서 어떤 일을 할 때 하늘에서 별들이 떨어집니까? 제가 예를 한 번 들게요. 하늘에서 별이 떨어지는 경우, 객관식이니까 골라잡으세요. 1. 쇼트트랙 1500m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하늘에서 별이 떨어지던가요?) 2. 우리 딸이 시집 갈 때(하늘에서 별이 떨어지던가요?) 3. 대통령이 죽을 때(뭐, 박정히 대통령이 죽을 때 하늘에서 별이 떨어지고 그러던가요?) 4. 내 눈이 침침할 때(이게 가장 정확하네요. 노안이 되어서 분명히 있었는데.. 그때에 별이 떨어지던가요?) 5. 없다. 

  

왜? 별이 떨어지는 그런 일은 없다고 보는 이유는 평소에 별과 나는 연관성이 없어서 그래요. 연관성을 지을 수 있는 어떠한 근거가 내 안에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말은 나는 가짜다, 라는 말입니다. “나는 가짜다.” 조금 순하게 이야기하면, “나는 부분이다.” 나는 부분이다, 라는 말은 나는 전체가 아니다. 나는 전부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무식하다. 나는 무식한 거예요. 

  

무식한 자가 구원을 받겠다고 할 때, 그 구원이라는 개념 자체가 무식해서 나온 개념이기 때문에 이것은 구원이 아니에요. 가짜구원이고. 나는 천국을 좋아해, 라고 했을 때 그 천국은 무식하고 죄 많은 인간들이 천국을 원하기 때문에 이 천국은 천국이 아닌 거예요. 무식한 인간들이 교회라고 할 때는 그건 교회가 아닌 겁니다. 

  

반드시 성경에 나오는 교회, 천국, 모든 별, 들풀, 참새는 전부 다 뭐냐 하면 나라는 존재와 연결이 된, 전부를 포괄한 것을 전제로 해서, 그래서 참새를 언급하고 들풀을 언급한 거예요. 마태복음 10장 29절에 보면 참새가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면 하늘에서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한다.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라고 해서 참새가 떨어지는 것하고 우리가 죽는 것하고 연관을 시키잖아요. 연관을. 연결망이 되어 있어요. 거미줄 망처럼. 보이지 않는 레이저망, 레이저빔 같은 것이 전부 다 연결되어 있단 말이죠. 

  

그런데 연결망을 우리는 보지를 못하고, 알지를 못하고, 그저 코앞에 있고 눈에 보이는 것만 추슬러서 놓고 이게 나의 현실의 전부다. 그래놓고 그것 때문에 울고 그것 때문에 웃고, 거기다가 그게 맘이 안 들면 자살하고, 우울증 걸리고. Why does the sun go on shining? 태양은 왜 빛나는 걸까요? 나는 애인하고 헤어졌는데 왜 태양은 빛나는가? 이게 연관이 안 되는 거예요. 

  

연관이 안 되는 사람 중에 그 대표자가 욥이었습니다. 욥이 왜 내가 고난 받습니까? 라고 하는 거예요. 일부밖에 몰랐지만 자기는 안다고 생각한 거예요. 일부밖에 몰랐기에 자기가 무지한 것은 알아요. 왜 고난이 오는지를 무지하지만, 고난 받는 당사자인 나에게는 알려줘야 도리가 아닙니까? 이래 나오는 거예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가지고, 하늘에 별을 만들 때 니가 거기에 있었느냐? 비가 황무지에 왜 내리는지 비 오는 이유를 아느냐? 황무지에 비 오는 것을 왜 내가 신경 써야 하는데요? 신경 쓸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내가 왜 신경 써야 합니까? 아라비아 사막에 가끔 비가 오는 것을 내가 왜 신경 써야 해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너한테 고난이 올 때, 나한테 고난이 온다고 생각하지 말고 고난이 너를 만든다고 생각해보면 되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은. 내가 먼저 있고 이 괜찮고 중요한 나에게 고난이 온다고 하지 말고, 전체의 그물망과 엮어져 있는 고난이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고난 받을 사람을 새롭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라 이 말이죠. 그 연결고리를 쥐고 있는 하나님께서. 그러면 거기에 걸려 든 것을 감사해야죠. 주님께서 하시는 일에 말려 든 것을 감사해야 해요. 

  

드라마를 찍는데 연출자가 주연배우로 엮어준 것을 감사해야죠. 고현정이가 피디한테. 저한테 대사가 안 온다고 삐지지 말고. 프롬프터, 대사 보는 스크린 설치하지 말고. 그래, 돈을 10억이나 받아먹었으면 챙기고 하면 되잖아요. 근데 삐져가지고 나가버렸다 이 말이죠. 드라마의 책임자는 고현정이가 아니에요. 연출자가 책임자에요. 책임자도 아닌데 그렇게 나오면 안 되죠. 아무리 서로 부당하다고 하더라도. 드라마 리턴이야기에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연출을 누가 합니까? 연출하시는 분이 따로 계시잖아요. 먼저 주님이 있다고 하지 말고, 일단은 나는 아니잖아요. 근데 주어진 현실을 왜 탓하느냐 이 말이죠. 내 인생이라는 말을 왜 하느냐 이 말이죠. 내 인생이 없는데. 걸려든 인생이고 말려든 인생인데.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을 비유하면서 발톱에 낀 때만도 못하다고 이렇게 하는데, 그거는 너무 식상해요. 이빨에 낀 치석이라고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요. 치석이라도 필요할 때 주께서 이렇게 해주신 겁니다. 

  

그래서 신앙생활 할 때 제일 큰 적폐가, 제일 낭패스러운 것이 뭐냐 하면 자기를 가치 있다고 보는 거예요. 가치 있음. 나는 가치가 있다고 이러면 안 됩니다. 가치 있는 나는 괜찮아요. 가치 있는 나는 괜찮다고 하면 또 안 돼요. 나를 뒤에 보내고 앞에다가 주님을 집어넣고, “주님 보시기에 가치 있는 나” 이래 되어야 돼요. 주님보시기에 가치가 있기 때문에 누가 가치가 있어요? 주님이 가치가 있는 거예요. 

  

주님이 가치가 있기 때문에 내가 어떤 형편에 있더라도, 망하는 일이 있더라도 그 자체가 주님 보시기에 가치가 있어서 유발된 상황인 겁니다. 가치 있어서. 제가 강남강의 할 때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가락강의에서 강남강의로 바뀌었거든요. 두 번째 시간 마지막에,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그냥 눈사람이다. 크고 작은 눈사람. 눈사람 멋있어 보이죠? 나중에 온도 올라가고 여름이 되면 녹는 정도가 아니라 없어져요. 아예 없다니까요. 있다가도 없어지는 안개도 있지만, 이것은 스노우맨snowman, 눈사람이에요. 눈사람. 

  

이게 뭡니까? 첫째 시간에 배웠던 자아 아닙니까? 자아고. 천국가면 뭐냐, 자아가 없어요. 눈사람이니까. 천국가면 주체가 있다니까요. 주체. 주체가 있어요. 주체는 뭐냐 하면 영원히 고정되어 있어요. 겨울왕국 만화영화에 보면 주인공 엘사가 있죠. 엘사가 아주 화가 나서 렛잇고Let it go! 노래 부르면서, 렛잇고 라는 뜻은 내버려두란 뜻이에요. 내버려둬 이제 내 마음대로 살 거야. 렛잇고~♬노래하면서 만지기만 하면 전부 다 동결이 돼요. 얼음이 된다고요. 

  

그러니까 주님이 만지면 우리는 천국 가서 주체가 되어가지고, 우리는 영원히 주님에 의해서 주님의 멤버십membership, 멤버가 돼요. 그렇게 되려면 그 작업의 전제 작업이 뭐냐, 녹아야 돼요. 눈처럼 녹는 인간들이 예수님의 재림을 안다? 이거는 도저히 용납이 안 되는 겁니다. 용납이 안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들은 자아기 때문에, 자아가 자아 밖을 못 나와요. 모든 것이 자아가 내뿜은 의미를 해소하는 식으로, 자기 자신이 더욱더 늘어나는 자아, 또는 확장된 자아, 멋있는 자아, 맨날 생각하는 것이 잘난 자아, 나는 가치 있다는 여기에 몰두하고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서 점점 더 녹아가고 있는 거예요. 점점 녹아가고 있어요. 

  

젊을 때는 키가 좀 컸는데 중력에 의해서 척추가 늘어앉아가지고 키도 줄어들고, 다 줄어들어요. 그래서 제가 방송국 세우면 나이 65세 이상은 TV에 안 나오도록 만들 거예요. 나이 많은 것들 더러워서 못 봐요. 젊은 것들이 예쁘지. 문재인이고 뭐고 65세 이상은 아예 안 나왔으면 좋겠어요. 늙은 것들은 TV에 안 보이면 좋겠어요. 늙은 것들은. 놀아도 젊은 애들 노는 거. 

  

50대 60대 아줌마들 전부 다 방탄소년단 좋아해요. 방탄, 군수업체 아닙니다. 방탄소년단 얼마나 좋아한다고요. 랩 좋아하고. 도끼 좋아하고. 시장에서 파는 도끼 아닙니다. 그 도끼가 그 도끼가 아닌데. 랩 하는 래퍼 도끼에요. 그게 뭐냐, 젊어지는 방법이에요. 생각을 젊은 애들하고 같이 하는 거예요. 늙은 사람들이 나와서 에~에헤~에~♬하면 채널 다 돌아가요. 그러면 우리보고 죽으라는 말인가 늙는 것도 서러운데. 

  

항상 젊어야 파릇파릇한 생명의 그 가치가 있는데, 그 가치 있는 내가 자기한테 모든 관심을 집중하다보니까, 해와 달, 별 이 전체를 포용할 수가 없어요. 전체를. 전체가 엮어지지를 않는 거예요. 이거는 무지한 거고 이거는 부분이에요. 부분. 이거는 하나의 부분이 되는 겁니다. 부분이 전체를 포섭을 할 수가 없죠. 

  

자, 그러면 이 재림한다는 이 말씀을 다 못 알아듣는 거 맞아요. 근데 나중에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성령 받은 우리는 알아들어야 하지 않습니까? 성령 받은 우리한테는 어떻게 부분이 전체가 되느냐,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설명이 되어야 됩니다. 그걸 설명하기 위해서는 둘로 나누어야 됩니다. 

  

뭐냐 하면 차 안에서 보는 바깥 풍경과 차 밖에서 보는 바깥 풍경이 달라요. 차 안에서는 유리창 면적이 제한이 되어가지고 별을 보고 뭘 봐도 그게 별 맛이 안 나는데. 차를 딱 놓고 바깥에 가서 보게 되면, 차 보다 더 아름다운 그런 것들이 보이죠. 그럼 차는 뭐가 되느냐 하면 부분이 되죠. 차를 부분으로 본다는 말은, 이 사람은 어디에 속했느냐 하면 이미 전체의 일원이 되어 있어요. 일원이. 한 소속이 된, 전체를 이루는 구성원이 되는 겁니다. 

  

자, 이제부터 어려워요. 예수님이 이 땅에 왔을 때, 예수님이 오고 그 다음에 돌아가시고 그 다음에 부활되고 그 다음에 재림하시는 것이 아니에요. 이 땅에 오실 때부터 이미 재림의 요소를 예수님은 품고 있었던 겁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일하셨던 그 모든 것들이 재림을 이루는 그러한 재료들. 재료. 준비과정. 다 그게 엮어져있어요. 

  

재림은 전체죠. 전체라고 하니까, 마치 지진이 날 때 이층 지붕이 무너져 한꺼번에 다 덮어씌우는 거예요. 장충체육관 같은 데서 지붕이 폭설로 무너졌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다치고 어떤 사람은 안 다치고 하는 게 아니고 다 파묻혀버리죠. 예수님의 몸은 분명히 키가 얼마고 몸무게는 얼마고 해서 우리보기에는 한 인간으로서 되어 있죠. 예수님이 있으면 그 뒤에 나무도 보이고 하면서 결국 예수님 몸만 보이지만. 이 예수님 몸 안에 우주 전체를 덮는 모든 게 다 포함이 되어 있다면, 우리는 이 전체를 우리가 무시하기 때문에, 이 전체에서 나오는 말씀을 전체의 의미로 풀이해서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은 우리한테 없었던 겁니다. 

  

처음부터 예수님에게 이 재림의 요소가 들어가 있었어요. 재림의 요소가. 오실 때부터, 출생부터 모든 일들과 사건 속에 재림이 다 압축되어서 들어있어요. 커닝페이퍼 만들 때 처음에는 노골적으로 내놓고 하지않아요. 고이 공들여서 열심히 해가지고 주름처럼 접잖아요. 그 시간 있으면 공부나 더하지. 한참을 연구해가지고 만약을 위해서 한다고 하잖아요. 하여튼 펼치면 된다 이 말이죠. 주름처럼 접혔던 커닝페이퍼를 펼치면 되잖아요. 

  

예수님의 말씀 속에 이미 재림이 다 압축되어 있어요. 그러면 나중에 오순절에 성령이 오셔서 사도가 성령을 받았다. 그러면 사도가 새삼스럽게 자, 십자가 알고, 부활 알고, 재림을 알자. 나는 십자가만 알았는데 이제는 재림까지 안다. 이게 아니라 성도가, 자기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부터가, 처음부터 재림과 엮어진 상태에서 엮어진 관계를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것을 회고적으로, 회고라는 말을 알죠. 뒤돌아보면서 이미 소급해서 받아들이게 된 겁니다. 

  

새로운 인식이 생기는 거예요. 마치 예수님하고 똑같아요. 성령 받게 되면. 예수님도 성령 받았고 우리도 성령 받았으니까. 우리 하나하나가 재림이 있음을 나타내는 증인으로서, ‘우리가 이 땅 대전에서 한평생 살았구나!’ 그런 것을 회고적으로 소급해서 우리의 고백이 되는 겁니다. 고백이 되는 거예요. 그 고백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요한계시록에서 보면 막 심판하고, 일곱 나팔, 일곱 대접 할 때 하늘의 별이 삼분의 일이 막 떨어지죠. 

  

요한계시록을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은 성령 받은 사람만 할 수가 있어요. 왜? 성령은 예수님의 마음이니까. 예수님의 마음으로 요한계시록을 바라볼 때에 이 세상 자체가 계속해서 이어지는 세상일까요? 언젠가는 무너져 내릴 세상일까요? 어느 쪽입니까? 무너져 내릴 세상이죠. 그럼 별이 박혀 있다면 별이 박힌 곳만 볼 수 있는 것이 인간 과학의 한계입니다. 인간이 여기에 있고 제일 멀리 있는 별을 보잖아요. 

  

그런데 별이 무너졌다는 것은 뒤에서 누가 눌러버린 거예요. 눌러버리죠. 그럼 별이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고 어디에 있느냐, 인간과 함께 땅에 있는 거예요. 근데 과학자들은 별하고 자기하고 수천광년이 떨어져있다고 보잖아요. 성경은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별도 자연세계의 일부로서, 너의 몸이나 별이나 다 같은 공동으로 뒤에서 미는, 힘의 지배를 받는 같은 공동 운명체라는 것입니다. 공동운명체. 심지어 구름까지. 

  

전부 다 어디에 봉사하느냐 하면, 예수그리스도의 하신 일에 그걸 증거하고 봉사하기 위해서 하늘에 있는 해나 달이나 별이나 모든 것이 같은 한통속으로 있는 이웃사촌간이라고 이래 보시면 됩니다. 이웃사촌간이라고. 그럼 제가 기도하면 하늘의 별이 떨어질 수 있습니까? 라고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 않습니까? 당장 우리보고 묻기 전에 예수님한테 물어요. 예수님이 십자가 지실 때 하늘의 해가 어떻게 됐습니까? 어두워졌죠. 무덤이 열리고. 

  

바로 이 말은 예수님의 몸과 이 천지의 자연 질서와 관련성이 있다는 겁니다. 이걸 새삼스럽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여호수아가 기도할 때에 해가 멈췄죠. 히스기야가 15년 기도할 때 해가 뒤로 갔죠. 갔잖아요. 그리고 천지창조 한 그 천지창조와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이 저주받을 때 자연세계가 저주의 버전으로, 트랜스포머라고 하는데, 형태가 저주를 위한 형태로 전부 다 바뀌게 되는 겁니다. 

  

근데 저주의 형태로 바뀌는 것은 바로 여자의 후손과 관련지어 세상이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거예요. 이 말은 뭐냐, 골로새서 1장 16절에 세상의 모든 만물은,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세상의 모든 만물은 누굴 위해서? 예수그리스도를 위해서 이게 돌아가고 있는 겁니다. 일종의 소용돌이를 치고 있는 거예요. 소용돌이. 소용돌이 중간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하나의 블랙홀이 있겠죠. 

  

주변이 뻑뻑해서 젓가락으로 휘저어버리면, 그 휘젓는 힘에 의해서 하나의 동그라미가 형성이 되잖아요. 젤리처럼 약간 뻑뻑하니까. 세상 모든 것은 예수그리스도 있으면 돌아가는 겁니다. 이 이야기를 제가 아주 간단하게 한 게 되는데, 문제는 이걸 평소에 어떻게 인식을 하느냐가 문제가 돼요. 우리가 평소에 어떻게 인식하느냐. 우리가 기도한다고 해서, 우리도 성령 받았으니까 우리가 기도한 대로 하늘의 별이 움직이고. 아, 오늘 날씨가 좀 추운데 기도하게 되면 갑자기 영상 20도가 되어가지고 평창올림픽에서 스케이트 타다가 맨땅에 타고. 어? 눈이 어디에 갔어? 다 녹았네. 이래가지고 취소하는 이런 현상이 좀 생겼으면 좋겠다. 그럴 수도 있죠. 

  

그 이야기가 지난 낮 설교이야기였어요. 뭐냐 하면 “너희가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마17:20). 자,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는 것은 주일날에 설교한 것처럼, 가장 작은 믿음을 이야기한 겁니다. 작은 믿음이 겨자씨라면 겨자씨보다 못한 것은 아예 불신이죠. 불신. 안 믿는 것이 되고. 겨자씨부터 올라오면 이쪽 영역은 믿는 영역이 돼요. 믿음 중에서도 제일 작은 믿음 정도가 산을 옮기는 정도에요. 산을 옮기는 정도. 산을 옮길 만한 자신이 없거든 아예 믿음이라고 하지 마라 이 말입니다. 그건 불신인 거예요. 

  

참, 예수님께서 그런 이야기를 할 때, 아까 첫째 시간에도 이야기를 했지만, 예수그리스도에게 그대로 갈 수가 없어요. 세상은, 우주만물은 누구 중심이다? 예수님 중심으로 가요. 우리도 그렇게 되고 싶다고 할 때, 그냥 이 자아가지고는 안 된다니까요. 안 되고, 반드시 뭔가 이걸 겪어야 돼요. 자아가 주체로 바뀌어야 되잖아요. 바뀌려면 나에게서 나오는 믿음, 소망, 사랑, 이거는 다 밟혀야 됩니다. 이거는 믿음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고 소망도 아니에요. 왜? 내가 가짜니까. 

  

아까 첫째 시간에 죄는 그대로 있고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덮개가 있어가지고 덮개를 보고, 덮개는 하나님의 의죠. 피가 묻어있으니까. 이 피를 보고, 지남철(자석)에 달려있는 쇳조각이 우리들 아닙니까? 지남철에 쇳조각이 딸려오는 거예요. 지남철이 예수님이고 우리는 지체가 되고. 예수님에게서 융기된, 또는 튀어나온 혹 같은 거예요. 그리스도의 몸에서 뻗어 나온 혹 같은 것, 돋아난 것, 이래 보시면 좋죠. 우리는 지체니까. 손가락처럼 하나씩 뻗어 나오니까 이 손가락이 성도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는 독자적인 몸을 형성할 수가 없어요. 주체기 때문에.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교류해서 성도가 주어진 환경 속에 살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 안에 뭐가 들어있다고 했습니까? 재림이 있죠. 재림을 위해서, 십자가를 위해서, 부활을 위해서 다 같은 말이에요. 이 땅에 뭐 만든다? 주님을 위해서 남겨진 사람들이 있어요. 그게 마태복음 24장 아까 읽었던 가운데 30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그다음에 31절요, “저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여기에 택하신 자가 나오죠. 참,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하늘의 별이 떨어지는 것이 신기합니까? 택하신 자가 존재한다는 것이 신기합니까? 택하신 자가 존재한다는 것이 신기한 거예요. 제가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수십 년 동안 복음을 전하지만, 제가 가장 놀랍고 충격을 먹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 성령 받은 사람 그 자체가, 이게 정말 내가 이러려고 살았구나! 해요. 이런 복이 다 있냐 이 말이죠. 왜? 없어야 되거든요. 없어야 돼요. 

  

인간은 자기중심인 거예요. 인간은 자기중심이고 예수 믿는 것도 자기가 구원받으려고 하는 건데, 주님의 성령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성령 줘서 성도가 생겨버리면 이거는 그 사람이 있다가 중요한 게 아니고, 주님이 계시다는 증거로서 다가오니까, 어찌 그 분을 함부로 할 수가 있겠어요? 소중하고, 소중하고 또 소중하고. 고맙고, 고맙고 나타나주니 고맙고. 같이 이 세상을 살아가주니 고맙고. 귀하고 귀한 거예요. 

  

영을 통해서 그 사람을 보는 거예요. 육이 아니라. 저 사람은 돈이 얼마 있고, 헌금을 얼마 했고, 기도를 몇 시간 했고, 이게 아니고 영을 통해서. 예수님이 제시한 그 기준만 이야기를 할 때. 인간의 어떤 행동은 받지 않고 십자가 피로만 구원한다는 그 이야기를 억지가 아니고, 짜증내서 하는 것이 아니고, 기쁘게 하는 거예요. 

  

어떤 경우에 그걸 느끼느냐 하면 분명히 집이 가난한데, 변변치 못해요. 지하에 살고 물이 들어오고 이렇게 사는데, 내 인생에 전혀 돈이 없다는 것이 얼굴에 그림자가 안 되고, 이거하고 관계없이 기쁘게 살아가는, 복음 때문에 살아가는 그 모습을 볼 때에, 뭐 저런 인간이 다 있나? 저거 분명히 수치스러워 해야 돼요. 돈 다 좋아하는데, 남들이 갖고 있는 돈이 없어도, 자기는 무슨 통뼈라고 돈을 안 좋아하고 그럽니까? 분명히 이거는 정상이 아니에요. 미쳤어요. 뭔가 이상해요. 그 이상한 그것이 예수님이 오실 때의 그 이상함과 같은 맥락의 이상함이에요. 

  

사람들이 예수님을 볼 때 얼마나 이상하게 봤습니까? 저거 미친 거 아니야? 자기 인생을 왜 내팽겨 치느냐 이 말이죠. 열심히 내 인생 오래 살도록 노력해야지. 성령 받은 사람이 이야기를 해요. 목사님, 저 죽는 것이 소원이에요. 아주 그것도 가볍게. 그래서 나는 믿지를 못하겠어요. 저 분이 복음 흉내 내고 들은 것이 많이 있어가지고 앵무새처럼 복음, 복음 하는가? 그런 사람이 하도 많아가지고, 그런 사람이 너무 많아요. 

  

복음 아니까 알아달라고 하는 사람들 다 가짜가 아닙니까? “나 복음 아는 목사니까 어떻게 좀 대우해달라.” 그런 것. 전부 다 가짜거든요. “나 복음 아니까 욕해도 괜찮고, 밟아도 괜찮고, 짓이겨도 괜찮습니다.” 이런 사람이 있다는 그게 얼마나 놀라 자빠질 일입니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한 대로 일단 맞자. 일단 우리는 안 믿습니다. 안 믿는다고 하고 아무리 생각해도, ‘나 안 믿을 거야. 육 개월 복음 듣고 안 나올 거야. 교회 안 나갈 거야.’ 근데 이렇게 욕하는데도 계속 나와. 이거 미친 거 아냐? 

  

항상 복음 아는 사람의 특징이 있어요. 뭐냐 하면 방글방글 웃어요. 개뿔도 없어요. 지갑에 돈 만원밖에 없어요. 방글방글 웃어요. 목사님한테 식사대접 할 돈도 없어요. 목사가 뜯어먹을 생각을 못하도록 아무것도 없어요. 늘 방글방글 웃어요. 이게 뭐냐 하면 고맙고 감사하기 때문에 방글방글 웃는 거예요. 물론 아프면 방글방글은 아니고 찡그리면서 웃겠지만. 방글방글 웃고, 두 번째는 진짜 등신 같아요. 내일 일을 생각 안 해요. 내일 일을. 내일 일을 생각을 안 하게 성령께서 그렇게 하신 것 같아요. 

  

이 두 개를 합친 게 뭐냐 하면 “오늘 밤에 제발 좀 낙원에 보내주세요. 오늘 밤에.” 애가 시집가고 장가간다고 뭐 내세우는 것도 아니고. 지들은 지들 인생 살겠고. 또 보탠다면 남 탓 안 해요. 자기 과거 탓 안하고. ‘내가 그때 행동 똑바로 했으면 이렇게 안 될 걸.’ 자꾸 과거 탓 하지 않아요. ‘내가 그때 이렇게 했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질 않았을 텐데..’ 물론 과거 탓 안 할 사람은 없지만, 대략적으로 보게 되면 그 과거 때문에 방글방글 웃는 것이 사라지고 이러지는 않는다 이 말이죠. “과거에 나 이렇게 살았습니다.”라고 다시 방글방글로 돌아와요. 물론 늘 사람이 이럴 수는 없지만 3초만이라도 이랬으면 좋겠어요. 3초만이라도. 

  

어떤 분이 저한테 장문의 편지를 보냈어요. 목사님은 늘 마음이 편해 보이는데 나는 괴롭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늙으신 부모님을 내가 모시지 못해서 늘 가슴이 아프다는 거예요. 이 죄책감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첫 번째는 그 사람은 나를 모르고 있고. 두 번째는 자기 인생을 책임지려고 하는 그것이 놓아야 될 인생인데, 왜냐하면 우리 인생은 재림과 관련되어 있거든요. 나의 구원과 관련되기 이전에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되어 있어요. 

  

재림에는 무슨 자가 있다? 택하신 자가 있어요. 택하신 자. 나팔소리. 나팔소리는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이미 완료된 상태에요. 나팔소리와 함께 잠자다가 깨어날 택하신 자. 이 공식이 주어지는데, 이 공식을 내가 따로 뽑아서 자아한테 주면 안 돼요. 주체한테 가야 되기 때문에. 주체는 자아가 죽고 난 뒤에 생기는 것이 주체잖아요. 자아가 죽고 난 뒤에. 자아가 알고 있는 재림, 십자가, 부활, 다 잊읍시다. 그거는 내 종교적 욕구에 불과해요. 남한테 자랑하려고, “나 구원받았다!” 이 짓 하려고 갖고 있는 소유죠. 소유. 부산강의에서 제목이 사랑과 소유잖아요. 

  

주를 사랑한다는 말은 사랑이 아니고, 주님마저 내 것을 만들기 위해서, 내 거라는 게 자아인데, 자아 것을 만들어서는 같이 죽어요. 주님께서 재림을 이야기하고 십자가 부활을 동시에 담아서 평소에 기적을 일으키고 말씀을 준 거예요. 아까 이야기한 믿음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어도 산을 옮긴다는 말은, 진짜 나중에 성령 받아서 믿음이 생기게 되면 산을 옮기든 말든 누구 소관이다? 자아의 소관이 아니고 주체의 소관이기 때문에, 주체에 종속이 된 거예요. 주께서 하라고 하면 그게 산을 옮긴 거예요. 이미. 

  

왜? 주의 말씀대로 되기 때문에. 산을 옮긴 정도가 아닙니다. 산을 옮기는 것은 겨우 겨자씨만한 거고. 예수님의 믿음이 겨자씨만하겠어요? 더 크죠. 그리고 우리는 뭐냐, 내가 신자라는 것을 믿게 된 그 놀라움! 산을 열 개 옮겨보세요. 그렇게 해서 구원받는가? 중요한 것은 내가 산을 백 개 옮기는 것보다 내가 구원받는다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십자가가 믿어진다는 거예요. 아무것도 필요 없다. 아무것도 필요 없어~♬ 

  

아무것도 필요 없다. 오직 십자가 피로만, 피 묻은 덮개로만 구원한다는 이게 믿어지는 그 순간, 이제 자아는 거추장스러운 겁니다. 거추장스러운 거예요. 후딱 자아라는 것은 무덤에 집어넣고 싶고, 나팔소리가 그리워지고. 다시 말해서 우리의 자아가 없어지고 우리가 주의 재림의 요소가 된다면, 세상에서 더 바랄 게 없고, 세상에서 더 찾을 게 없고, 세상에서 더 귀한 것은 일체 없는 겁니다. 세상은 부분이고 나는 전체를 알기 때문에. 세상은 차 안에서 바깥을 보는 그런 수준밖에 안 됩니다. 

  

평창올림픽이 그렇고, 이 세상의 모든 정권과 국가의 이념이 그런 거예요. 대한민국 국민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국민에게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런 것들은 전부 다 창 안에서 바깥을 관찰하는 과학적인 수준밖에 안 돼요. 과학적인 수준. 합리적인 수준밖에 안 돼요. 적어도 차 밖에 나가서 다시 보려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의 안목으로 다시 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돼요. 

  

그럼 차 밖으로 나간다면 대전 말고 세종시로 이사 가야 되나? 하는데, 이사하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의 존재방식이 세상과 함께 있으면서도 세상 밖에서 안을 바라보는 방식으로 세상과 함께 있었어요. 분명히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이 말구유잖아요. 구유인데, 그 구유가 베들레헴의 한 일부를 차지해요. 지리적으로, 지역적으로. 

  

맞지만, 그 구유는 천군천사의 찬송과 관련되어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하늘에 있던 별이 구유를 찾아왔잖아요. 하늘의 요소가 담겨있는 특별한 장소. 그게 구유라면 오늘날 걸어 다니는 성도는 하늘에 있는 성령이 함께 있어, 하늘의 요소와 땅의 요소가 융합된 채 연결되어 있는, 결합된 채 성도는 살아갑니다. 

  

그래서 성도는 예수님처럼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사람이라고 요한복음 17장 16절에 나와 있죠.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어요. 다만 세상에 포함되었을 뿐이지, 세상에 속하지는 아니했어요. 포함보다도 세상에 그냥 섞여 있다고 보면 돼요. 함께 있는데, 같은 류(類)는 아니죠. 같은 종류는 아니죠. 왜? 크리스천Christian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것이지 아담의 것은 아니다 이 말입니다. 

  

그것을 제가 안양강의에서 했는데, 그걸 가지고 세마포 귀신이라고 했어요. 일종의 귀신이에요. 귀신. 귀신의 특징은 일단 죽어본 적이 있다는 겁니다. 이미 죽고 난 뒤에, 옛날에 자기가 살았던 동네에 다시 파견근무 하는 거예요. 제대하고 난 뒤에, 벌써 제대라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좋죠. 제대하고 난 뒤에 자기가 옛날에 근무했던 부대에 민간인 자격으로 거기서 편의점하는 거예요. PX(군대매점)운영하는 것. 외부 인으로 PX를 운영할 때, 거기서 뭐 점호를 받습니까? 남들은 점호 받는데 자기는 점호 안 받잖아요. 지시와 명령도 안 받죠. 훈련도, 사격도 안 하죠. 자기 물건만 팔면 되니까. 자기 일이니까. 

  

그래서 성도는 누구한테 꿇리지 말고, 어디에 취직하더라도 자기 일만 하면 돼요. 이 세상 말 듣지 말고. 자기 일만 하면 돼요. 주어진 환경은 누가 준 것이 아니고 주님이 주신 환경이기 때문에 자기 일만 하면 되는데, 그 자기 일이 뭐냐 하면 굉장히 쉬워요. 바로 덮개 밑에 일을 하면 됩니다. 덮개 밑에 뭐가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죄지으면 됩니다. 같이 한통속 되어 빼먹을 거 다 빼먹고. 

  

만약에 네 식구가 다 성령 받았다. 그런 경우가 별로 없죠. 성령 받은 네 식구 만나서 뭐 합니까? 네 식구가 완전히 죄 짓는 집단하면 돼요. 죄 지으면 되는 거예요. 엄마 죄짓고 방글방글! 아빠 죄 이야기 하고 방글방글! “아빠! 오늘 퇴근하면서 무슨 죄 지었어?” “나 이런 죄 지었어.” 하하하 웃고. “우리 딸내미 학교에 가서 무슨 죄 지었어요?” 또 하하하 웃고. 이거 정말 미친 거 아니야? 그래놓고 나중에 식사할 때 아빠가 식사기도 합니다. “주여! 이거 먹고 죽게 하옵소서.” 뭐 독약 섞었어요? 

  

그래서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했어요. “나는 개한테 배운다.”라고. 개를 무시하잖아요. 근데 과연 개를 무시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개는 오늘밤에 낙원에 갑니다. 정말 주인이 안락사한다고 약을 먹여도, 사료에 독약을 섞어도 그 개는 먹어요. 주인이 오늘로 너하고 헤어지자고 한다면, “멍멍! 먹겠나이다.”라고 한다 이 말이죠. 주인에게 철저하게 종속이 되니까. 

  

근데 왜 우리는 종속을 못합니까? 이게 바로 죄를 더 지으라고. 오직 나만을 위해서. 나의 영광과 나의 가치. 건드리기만 해봐라. 하나님이고 뭐고 다 물어버린다. 이런 못된 개 있잖아요. 개도 성질이 아주 더러운 개. 개보다 더 못한 개. 개만도 못한 개. 개가 들었으면 화낼, 개만도 못한 개로서 우리는 역할을 다 해야 해요. 나중에 잘리든, 주연배우가 갈리든 관계없어요. 

  

우리는 끝까지 우리의 배역이 뭐냐 하면 개만도 못한 개. 그걸 성경에서 죄인 중에 괴수. 그 역할. 그 역할은요, 이건 아주 자연스러워요. 뭐 이거는 “목사님! 죄 지으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라고 안 물어도 돼요. 안 물어도. 무조건 나만 잘되면 되고, 내가 성공해야 되고, 내가 앞질러야 되고, 내가 대우받아야 되고, 하여튼 나만 살아야 되고 남은 다 죽어야 되고. 

  

그러니까 대구에 지금 비가 안 와요. 비가 안 오니까 눈이 많이 오는 대전이 미운 거예요. 실컷 미워하고. 물이 하나도 없어서 낙동강 그거가지고 수돗물 나오고 그래요. 경주 그쪽에는 거의 비가 안 왔어요. 이게 무슨 난리인가? 이렇게 되거든요. 평창올림픽 했는데 금메달 하나 따고 끝나고. 뭐 이런 거 있잖아요. 또 화내고, 내가 원했는데 8대 0으로 지고. 뭐 이런 거 있잖아요. 

  

하여튼 세상 돌아가는 것이 성도로 하여금 죄 짓게 하도록 한 이유가 재림의 무게가 크기 때문에. 니가 이 세상에 조금이라도, 조금이라도 이 세상에 미련이나 집착이나 기대하거나, 니 미래를 위해서 여기다가 벙커 만들고 숨어들어가지 말아라. 피할 곳이 없어요. 이 땅에서 어디도 피할 곳이 없습니다. 어떤 곳도 너를 숨겨줄만한 곳이 없다. 이게 요한계시록에 나옵니다. 이 세상 어떤 것도. 

  

재림할 때 그렇다가 아니라, 이미 성도 안에 재림이 들어있기 때문에, 성도는 바깥에서 안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은 우리가 살 곳이 아니다. 찬송가에 나오잖아요. 이 세상은 우리가 살 곳이 아니에요. 어떤 곳도 살 곳이 안 됩니다. 실패하더라도 서러워하지 마세요. 마땅히 실패해야 돼요. 인생이 너를 속이더라도 노여워하지 마세요. 노여워하거나 슬퍼하지 마세요. 우리가 슬퍼한다는 말은 마치 자기가 누구의 일원이면서도, 마치 내가 전부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정리합시다. 우리로 하여금 죄 짓게 하기 위해서, 죄 짓는 요소가 재림의 요소고, 그 재림의 요소가운데 우리는 이 세상에서 실망과 어떤 불평과 불만과 “에이, 더러워서 못살겠네.”라는 상황을, 주께서 계속해서 우리 주변에 찾아오도록 조치하는 겁니다. 믿었던 친구한테 사기당하고, 보증 섰다가 다 날아가고. 그래서 이 세상은 빨리 죽는 게 낫다는 그것이 스스럼없이 나오는데, 처음에는 짜증내면서 나오지만 나중에는 싱글벙글 나올 거예요. 

  

한두 번 당하는 것도 아니고 맨날 당하게 하니까. 자식한테 당하고, 남편한테 당하고, 아내한테 당하고. 세상 모든 것이 가만히 있는 나를 왜 자꾸 괴롭히느냐 이 말이죠. 하나님이여! 나 점잖게, 바르게 살라고 했었는데, 왜 세상은 내가 하는 것을 다 뭉개버리고, 좀 편하다 싶으면 편한 게 뭐가 그렇게 불만인지 또 교통사고 나고. 하여튼 뭐 가만히 두지를 않고 소시지 튀기듯이 조금 있으면 뒤집어 튀기고, 조금 있으면 또 뒤집어 튀기고, 세상에서 튀길 대로 다 튀겨가지고. “너 이래도 이 세상에서 손 안 놓을 거야?”라고 하는 식으로 그렇게 만들어요. 

  

구원은 주님의 공로입니다. 가만히 있게 두면 세상에 나가서 자기 자랑질 해요. 나 구원받았다고. 나 이정도로 믿음 좋다고. 그것을 전부 다 아주 엉망진창 만들어버립니다. 우리 인생을 아예 정떨어지게 만드는 하나님의 그 일하심. 그런데 싱글벙글이 누구냐 하면 스데반집사잖아요. 죽을 때 그냥 곱게 안 죽었어요. 돌에 맞아 죽었어요. 징역 20년이 아닙니다. 추징금 70억이 아니에요. 그냥 돌에 맞아 즉결심판으로 죽었어요. 징역 20년은 최순실한테 선고한 거고. 이쪽은 그냥 돌에 맞아 죽었다니까요. 

  

죽는 당사자야 뭐 예수님 바라보면서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라고 하지만, 그 가족들은요? 그 가족들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성도 하나가 많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따라서 불편하게 만드는 것을 내 행동을 똑바르게 해가지고 같이 끌릴 생각하지마세요. 어차피 우리는, 어차피 성도 자체가 명절날 다 불편한 요건이 됩니다. 어차피 복음 안다는 그 죄로, 그 죄가 아름다운 죄에요. 아름다운 죄~ 사랑 때문에~♬(그 겨울의 찻집, 조용필) 우린 창밖에 사는 존재에요(창밖의 여자, 조용필). 창밖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죄 사랑 때문에, 우리는 기쁘게 쫓겨납시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미 재림의 요소가 있기에, 택하신 자이기에 주님하고 똑같은 대우를 받는 것을 너무 억울해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