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의 요소(마 24장 29-31절) 대전- 97강 이근호 목사
2017년 2월 13일
본문말씀: 마태복음 24:29-31
(마 24:29)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마24:30)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마24:31) 저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예수님이, 인자가 다시 오신다고 했는데, 재림이라는 이 말을 사람들이 이해하기가 힘들어요. 다시 오실 경우는 어떤 경우냐 하면 이 땅에서 좋게 헤어질 경우에는 다시 올 수가 있어요. 좋게 헤어지면. “빠이빠이~ 갑시다. 내년에 다시 봅시다.” 이럴 경우에는 재림이 되는데, 여기서 그냥 죽어버리면? 이 땅에서 그냥 가는 것이 아니고 죽어버리면? 오실 분이 죽었잖아요. 이순신 장군이 재림합니까? 죽어버린 사람이 올 게 뭐가 있어요? 죽어버렸는데. 돌아가신 증조할아버지 다시 재림하시던가요? 안 오죠. 제사 때마다 방문하고 뭐 그런 거 없죠.
근데 예수님은 다시 오신다고 했고, 다시 오신다고 하시면서 예수님은 이 땅에서 죽는다고 이야기했거든요. “나는 십자가에 죽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다.” 사람들 앞에서는 뭐가 정리가 되어야 하느냐 하면 죽은 분이 다시 살아서 다시 온다. 이 죽음과 다시 옴이 어떻게 연결되어야 하느냐 그것부터 정리가 되어야 합니다. 근데 그 정리되기가 굉장히 어려워요. 이게 힘들어요. 왜 힘드냐 하면 그렇게 정리하려고 하는 본인이 아무 문제가 없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래요. 나는 문제가 없고, 문제가 없는 나에게 이해가 안 되는 이야기를 한 예수님 쪽에서 문제가 있다가 되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님이 이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이런 이야기를 할 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아, 우리가 몰랐어. 저렇게 훌륭한 분을!” 이래가지고 깜짝 놀랐습니까? “아휴, 우리가 이렇게 다시 오실 분을 홀대하고 천대하고..우리가 큰일 날 뻔했지. 그 분을 고이 살려서 보내드려야 해. 그래야 다시 오시는 거야, 라고 이럴 줄 알았지? 이럴 줄? 저런 무슨 미친 게 다 있어!” 이런단 말이죠. 알고 있는데요. 뭐. 예수님 아버지가 목수라는 것을요. 출신이 갈릴리 출신이라는 것을 뻔히 알거든요.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을 판단하는 그 본인이 전혀 하자가 없고, 문제가 없다고 하는 사람을 보고 예수님은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방금 이야기한 것은 무시하고, 우리는 아니까 우리는 여기에 해당사항이 없다고 할 수가 있죠. 근데 그게 그렇지가 않아요. 역시 안다고 하는 우리도 문제가 되는 겁니다. 왜 문제가 되느냐 하면, 29절에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라고 되어 있죠.
우리가 지상에서 어떤 일을 할 때 하늘에서 별들이 떨어집니까? 제가 예를 한 번 들게요. 하늘에서 별이 떨어지는 경우, 객관식이니까 골라잡으세요. 1. 쇼트트랙 1500m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하늘에서 별이 떨어지던가요?) 2. 우리 딸이 시집 갈 때(하늘에서 별이 떨어지던가요?) 3. 대통령이 죽을 때(뭐, 박정히 대통령이 죽을 때 하늘에서 별이 떨어지고 그러던가요?) 4. 내 눈이 침침할 때(이게 가장 정확하네요. 노안이 되어서 분명히 있었는데.. 그때에 별이 떨어지던가요?) 5. 없다.
왜? 별이 떨어지는 그런 일은 없다고 보는 이유는 평소에 별과 나는 연관성이 없어서 그래요. 연관성을 지을 수 있는 어떠한 근거가 내 안에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말은 나는 가짜다, 라는 말입니다. “나는 가짜다.” 조금 순하게 이야기하면, “나는 부분이다.” 나는 부분이다, 라는 말은 나는 전체가 아니다. 나는 전부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무식하다. 나는 무식한 거예요.
무식한 자가 구원을 받겠다고 할 때, 그 구원이라는 개념 자체가 무식해서 나온 개념이기 때문에 이것은 구원이 아니에요. 가짜구원이고. 나는 천국을 좋아해, 라고 했을 때 그 천국은 무식하고 죄 많은 인간들이 천국을 원하기 때문에 이 천국은 천국이 아닌 거예요. 무식한 인간들이 교회라고 할 때는 그건 교회가 아닌 겁니다.
반드시 성경에 나오는 교회, 천국, 모든 별, 들풀, 참새는 전부 다 뭐냐 하면 나라는 존재와 연결이 된, 전부를 포괄한 것을 전제로 해서, 그래서 참새를 언급하고 들풀을 언급한 거예요. 마태복음 10장 29절에 보면 참새가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면 하늘에서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한다.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라고 해서 참새가 떨어지는 것하고 우리가 죽는 것하고 연관을 시키잖아요. 연관을. 연결망이 되어 있어요. 거미줄 망처럼. 보이지 않는 레이저망, 레이저빔 같은 것이 전부 다 연결되어 있단 말이죠.
그런데 연결망을 우리는 보지를 못하고, 알지를 못하고, 그저 코앞에 있고 눈에 보이는 것만 추슬러서 놓고 이게 나의 현실의 전부다. 그래놓고 그것 때문에 울고 그것 때문에 웃고, 거기다가 그게 맘이 안 들면 자살하고, 우울증 걸리고. Why does the sun go on shining? 태양은 왜 빛나는 걸까요? 나는 애인하고 헤어졌는데 왜 태양은 빛나는가? 이게 연관이 안 되는 거예요.
연관이 안 되는 사람 중에 그 대표자가 욥이었습니다. 욥이 왜 내가 고난 받습니까? 라고 하는 거예요. 일부밖에 몰랐지만 자기는 안다고 생각한 거예요. 일부밖에 몰랐기에 자기가 무지한 것은 알아요. 왜 고난이 오는지를 무지하지만, 고난 받는 당사자인 나에게는 알려줘야 도리가 아닙니까? 이래 나오는 거예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가지고, 하늘에 별을 만들 때 니가 거기에 있었느냐? 비가 황무지에 왜 내리는지 비 오는 이유를 아느냐? 황무지에 비 오는 것을 왜 내가 신경 써야 하는데요? 신경 쓸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내가 왜 신경 써야 합니까? 아라비아 사막에 가끔 비가 오는 것을 내가 왜 신경 써야 해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너한테 고난이 올 때, 나한테 고난이 온다고 생각하지 말고 고난이 너를 만든다고 생각해보면 되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은. 내가 먼저 있고 이 괜찮고 중요한 나에게 고난이 온다고 하지 말고, 전체의 그물망과 엮어져 있는 고난이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고난 받을 사람을 새롭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라 이 말이죠. 그 연결고리를 쥐고 있는 하나님께서. 그러면 거기에 걸려 든 것을 감사해야죠. 주님께서 하시는 일에 말려 든 것을 감사해야 해요.
드라마를 찍는데 연출자가 주연배우로 엮어준 것을 감사해야죠. 고현정이가 피디한테. 저한테 대사가 안 온다고 삐지지 말고. 프롬프터, 대사 보는 스크린 설치하지 말고. 그래, 돈을 10억이나 받아먹었으면 챙기고 하면 되잖아요. 근데 삐져가지고 나가버렸다 이 말이죠. 드라마의 책임자는 고현정이가 아니에요. 연출자가 책임자에요. 책임자도 아닌데 그렇게 나오면 안 되죠. 아무리 서로 부당하다고 하더라도. 드라마 리턴이야기에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연출을 누가 합니까? 연출하시는 분이 따로 계시잖아요. 먼저 주님이 있다고 하지 말고, 일단은 나는 아니잖아요. 근데 주어진 현실을 왜 탓하느냐 이 말이죠. 내 인생이라는 말을 왜 하느냐 이 말이죠. 내 인생이 없는데. 걸려든 인생이고 말려든 인생인데.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을 비유하면서 발톱에 낀 때만도 못하다고 이렇게 하는데, 그거는 너무 식상해요. 이빨에 낀 치석이라고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요. 치석이라도 필요할 때 주께서 이렇게 해주신 겁니다.
그래서 신앙생활 할 때 제일 큰 적폐가, 제일 낭패스러운 것이 뭐냐 하면 자기를 가치 있다고 보는 거예요. 가치 있음. 나는 가치가 있다고 이러면 안 됩니다. 가치 있는 나는 괜찮아요. 가치 있는 나는 괜찮다고 하면 또 안 돼요. 나를 뒤에 보내고 앞에다가 주님을 집어넣고, “주님 보시기에 가치 있는 나” 이래 되어야 돼요. 주님보시기에 가치가 있기 때문에 누가 가치가 있어요? 주님이 가치가 있는 거예요.
주님이 가치가 있기 때문에 내가 어떤 형편에 있더라도, 망하는 일이 있더라도 그 자체가 주님 보시기에 가치가 있어서 유발된 상황인 겁니다. 가치 있어서. 제가 강남강의 할 때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가락강의에서 강남강의로 바뀌었거든요. 두 번째 시간 마지막에,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그냥 눈사람이다. 크고 작은 눈사람. 눈사람 멋있어 보이죠? 나중에 온도 올라가고 여름이 되면 녹는 정도가 아니라 없어져요. 아예 없다니까요. 있다가도 없어지는 안개도 있지만, 이것은 스노우맨snowman, 눈사람이에요. 눈사람.
이게 뭡니까? 첫째 시간에 배웠던 자아 아닙니까? 자아고. 천국가면 뭐냐, 자아가 없어요. 눈사람이니까. 천국가면 주체가 있다니까요. 주체. 주체가 있어요. 주체는 뭐냐 하면 영원히 고정되어 있어요. 겨울왕국 만화영화에 보면 주인공 엘사가 있죠. 엘사가 아주 화가 나서 렛잇고Let it go! 노래 부르면서, 렛잇고 라는 뜻은 내버려두란 뜻이에요. 내버려둬 이제 내 마음대로 살 거야. 렛잇고~♬노래하면서 만지기만 하면 전부 다 동결이 돼요. 얼음이 된다고요.
그러니까 주님이 만지면 우리는 천국 가서 주체가 되어가지고, 우리는 영원히 주님에 의해서 주님의 멤버십membership, 멤버가 돼요. 그렇게 되려면 그 작업의 전제 작업이 뭐냐, 녹아야 돼요. 눈처럼 녹는 인간들이 예수님의 재림을 안다? 이거는 도저히 용납이 안 되는 겁니다. 용납이 안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들은 자아기 때문에, 자아가 자아 밖을 못 나와요. 모든 것이 자아가 내뿜은 의미를 해소하는 식으로, 자기 자신이 더욱더 늘어나는 자아, 또는 확장된 자아, 멋있는 자아, 맨날 생각하는 것이 잘난 자아, 나는 가치 있다는 여기에 몰두하고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서 점점 더 녹아가고 있는 거예요. 점점 녹아가고 있어요.
젊을 때는 키가 좀 컸는데 중력에 의해서 척추가 늘어앉아가지고 키도 줄어들고, 다 줄어들어요. 그래서 제가 방송국 세우면 나이 65세 이상은 TV에 안 나오도록 만들 거예요. 나이 많은 것들 더러워서 못 봐요. 젊은 것들이 예쁘지. 문재인이고 뭐고 65세 이상은 아예 안 나왔으면 좋겠어요. 늙은 것들은 TV에 안 보이면 좋겠어요. 늙은 것들은. 놀아도 젊은 애들 노는 거.
50대 60대 아줌마들 전부 다 방탄소년단 좋아해요. 방탄, 군수업체 아닙니다. 방탄소년단 얼마나 좋아한다고요. 랩 좋아하고. 도끼 좋아하고. 시장에서 파는 도끼 아닙니다. 그 도끼가 그 도끼가 아닌데. 랩 하는 래퍼 도끼에요. 그게 뭐냐, 젊어지는 방법이에요. 생각을 젊은 애들하고 같이 하는 거예요. 늙은 사람들이 나와서 에~에헤~에~♬하면 채널 다 돌아가요. 그러면 우리보고 죽으라는 말인가 늙는 것도 서러운데.
항상 젊어야 파릇파릇한 생명의 그 가치가 있는데, 그 가치 있는 내가 자기한테 모든 관심을 집중하다보니까, 해와 달, 별 이 전체를 포용할 수가 없어요. 전체를. 전체가 엮어지지를 않는 거예요. 이거는 무지한 거고 이거는 부분이에요. 부분. 이거는 하나의 부분이 되는 겁니다. 부분이 전체를 포섭을 할 수가 없죠.
자, 그러면 이 재림한다는 이 말씀을 다 못 알아듣는 거 맞아요. 근데 나중에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성령 받은 우리는 알아들어야 하지 않습니까? 성령 받은 우리한테는 어떻게 부분이 전체가 되느냐,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설명이 되어야 됩니다. 그걸 설명하기 위해서는 둘로 나누어야 됩니다.
뭐냐 하면 차 안에서 보는 바깥 풍경과 차 밖에서 보는 바깥 풍경이 달라요. 차 안에서는 유리창 면적이 제한이 되어가지고 별을 보고 뭘 봐도 그게 별 맛이 안 나는데. 차를 딱 놓고 바깥에 가서 보게 되면, 차 보다 더 아름다운 그런 것들이 보이죠. 그럼 차는 뭐가 되느냐 하면 부분이 되죠. 차를 부분으로 본다는 말은, 이 사람은 어디에 속했느냐 하면 이미 전체의 일원이 되어 있어요. 일원이. 한 소속이 된, 전체를 이루는 구성원이 되는 겁니다.
자, 이제부터 어려워요. 예수님이 이 땅에 왔을 때, 예수님이 오고 그 다음에 돌아가시고 그 다음에 부활되고 그 다음에 재림하시는 것이 아니에요. 이 땅에 오실 때부터 이미 재림의 요소를 예수님은 품고 있었던 겁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일하셨던 그 모든 것들이 재림을 이루는 그러한 재료들. 재료. 준비과정. 다 그게 엮어져있어요.
재림은 전체죠. 전체라고 하니까, 마치 지진이 날 때 이층 지붕이 무너져 한꺼번에 다 덮어씌우는 거예요. 장충체육관 같은 데서 지붕이 폭설로 무너졌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다치고 어떤 사람은 안 다치고 하는 게 아니고 다 파묻혀버리죠. 예수님의 몸은 분명히 키가 얼마고 몸무게는 얼마고 해서 우리보기에는 한 인간으로서 되어 있죠. 예수님이 있으면 그 뒤에 나무도 보이고 하면서 결국 예수님 몸만 보이지만. 이 예수님 몸 안에 우주 전체를 덮는 모든 게 다 포함이 되어 있다면, 우리는 이 전체를 우리가 무시하기 때문에, 이 전체에서 나오는 말씀을 전체의 의미로 풀이해서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은 우리한테 없었던 겁니다.
처음부터 예수님에게 이 재림의 요소가 들어가 있었어요. 재림의 요소가. 오실 때부터, 출생부터 모든 일들과 사건 속에 재림이 다 압축되어서 들어있어요. 커닝페이퍼 만들 때 처음에는 노골적으로 내놓고 하지않아요. 고이 공들여서 열심히 해가지고 주름처럼 접잖아요. 그 시간 있으면 공부나 더하지. 한참을 연구해가지고 만약을 위해서 한다고 하잖아요. 하여튼 펼치면 된다 이 말이죠. 주름처럼 접혔던 커닝페이퍼를 펼치면 되잖아요.
예수님의 말씀 속에 이미 재림이 다 압축되어 있어요. 그러면 나중에 오순절에 성령이 오셔서 사도가 성령을 받았다. 그러면 사도가 새삼스럽게 자, 십자가 알고, 부활 알고, 재림을 알자. 나는 십자가만 알았는데 이제는 재림까지 안다. 이게 아니라 성도가, 자기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부터가, 처음부터 재림과 엮어진 상태에서 엮어진 관계를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것을 회고적으로, 회고라는 말을 알죠. 뒤돌아보면서 이미 소급해서 받아들이게 된 겁니다.
새로운 인식이 생기는 거예요. 마치 예수님하고 똑같아요. 성령 받게 되면. 예수님도 성령 받았고 우리도 성령 받았으니까. 우리 하나하나가 재림이 있음을 나타내는 증인으로서, ‘우리가 이 땅 대전에서 한평생 살았구나!’ 그런 것을 회고적으로 소급해서 우리의 고백이 되는 겁니다. 고백이 되는 거예요. 그 고백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요한계시록에서 보면 막 심판하고, 일곱 나팔, 일곱 대접 할 때 하늘의 별이 삼분의 일이 막 떨어지죠.
요한계시록을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은 성령 받은 사람만 할 수가 있어요. 왜? 성령은 예수님의 마음이니까. 예수님의 마음으로 요한계시록을 바라볼 때에 이 세상 자체가 계속해서 이어지는 세상일까요? 언젠가는 무너져 내릴 세상일까요? 어느 쪽입니까? 무너져 내릴 세상이죠. 그럼 별이 박혀 있다면 별이 박힌 곳만 볼 수 있는 것이 인간 과학의 한계입니다. 인간이 여기에 있고 제일 멀리 있는 별을 보잖아요.
그런데 별이 무너졌다는 것은 뒤에서 누가 눌러버린 거예요. 눌러버리죠. 그럼 별이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고 어디에 있느냐, 인간과 함께 땅에 있는 거예요. 근데 과학자들은 별하고 자기하고 수천광년이 떨어져있다고 보잖아요. 성경은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별도 자연세계의 일부로서, 너의 몸이나 별이나 다 같은 공동으로 뒤에서 미는, 힘의 지배를 받는 같은 공동 운명체라는 것입니다. 공동운명체. 심지어 구름까지.
전부 다 어디에 봉사하느냐 하면, 예수그리스도의 하신 일에 그걸 증거하고 봉사하기 위해서 하늘에 있는 해나 달이나 별이나 모든 것이 같은 한통속으로 있는 이웃사촌간이라고 이래 보시면 됩니다. 이웃사촌간이라고. 그럼 제가 기도하면 하늘의 별이 떨어질 수 있습니까? 라고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 않습니까? 당장 우리보고 묻기 전에 예수님한테 물어요. 예수님이 십자가 지실 때 하늘의 해가 어떻게 됐습니까? 어두워졌죠. 무덤이 열리고.
바로 이 말은 예수님의 몸과 이 천지의 자연 질서와 관련성이 있다는 겁니다. 이걸 새삼스럽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여호수아가 기도할 때에 해가 멈췄죠. 히스기야가 15년 기도할 때 해가 뒤로 갔죠. 갔잖아요. 그리고 천지창조 한 그 천지창조와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이 저주받을 때 자연세계가 저주의 버전으로, 트랜스포머라고 하는데, 형태가 저주를 위한 형태로 전부 다 바뀌게 되는 겁니다.
근데 저주의 형태로 바뀌는 것은 바로 여자의 후손과 관련지어 세상이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거예요. 이 말은 뭐냐, 골로새서 1장 16절에 세상의 모든 만물은,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세상의 모든 만물은 누굴 위해서? 예수그리스도를 위해서 이게 돌아가고 있는 겁니다. 일종의 소용돌이를 치고 있는 거예요. 소용돌이. 소용돌이 중간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하나의 블랙홀이 있겠죠.
주변이 뻑뻑해서 젓가락으로 휘저어버리면, 그 휘젓는 힘에 의해서 하나의 동그라미가 형성이 되잖아요. 젤리처럼 약간 뻑뻑하니까. 세상 모든 것은 예수그리스도 있으면 돌아가는 겁니다. 이 이야기를 제가 아주 간단하게 한 게 되는데, 문제는 이걸 평소에 어떻게 인식을 하느냐가 문제가 돼요. 우리가 평소에 어떻게 인식하느냐. 우리가 기도한다고 해서, 우리도 성령 받았으니까 우리가 기도한 대로 하늘의 별이 움직이고. 아, 오늘 날씨가 좀 추운데 기도하게 되면 갑자기 영상 20도가 되어가지고 평창올림픽에서 스케이트 타다가 맨땅에 타고. 어? 눈이 어디에 갔어? 다 녹았네. 이래가지고 취소하는 이런 현상이 좀 생겼으면 좋겠다. 그럴 수도 있죠.
그 이야기가 지난 낮 설교이야기였어요. 뭐냐 하면 “너희가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마17:20). 자,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는 것은 주일날에 설교한 것처럼, 가장 작은 믿음을 이야기한 겁니다. 작은 믿음이 겨자씨라면 겨자씨보다 못한 것은 아예 불신이죠. 불신. 안 믿는 것이 되고. 겨자씨부터 올라오면 이쪽 영역은 믿는 영역이 돼요. 믿음 중에서도 제일 작은 믿음 정도가 산을 옮기는 정도에요. 산을 옮기는 정도. 산을 옮길 만한 자신이 없거든 아예 믿음이라고 하지 마라 이 말입니다. 그건 불신인 거예요.
참, 예수님께서 그런 이야기를 할 때, 아까 첫째 시간에도 이야기를 했지만, 예수그리스도에게 그대로 갈 수가 없어요. 세상은, 우주만물은 누구 중심이다? 예수님 중심으로 가요. 우리도 그렇게 되고 싶다고 할 때, 그냥 이 자아가지고는 안 된다니까요. 안 되고, 반드시 뭔가 이걸 겪어야 돼요. 자아가 주체로 바뀌어야 되잖아요. 바뀌려면 나에게서 나오는 믿음, 소망, 사랑, 이거는 다 밟혀야 됩니다. 이거는 믿음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고 소망도 아니에요. 왜? 내가 가짜니까.
아까 첫째 시간에 죄는 그대로 있고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덮개가 있어가지고 덮개를 보고, 덮개는 하나님의 의죠. 피가 묻어있으니까. 이 피를 보고, 지남철(자석)에 달려있는 쇳조각이 우리들 아닙니까? 지남철에 쇳조각이 딸려오는 거예요. 지남철이 예수님이고 우리는 지체가 되고. 예수님에게서 융기된, 또는 튀어나온 혹 같은 거예요. 그리스도의 몸에서 뻗어 나온 혹 같은 것, 돋아난 것, 이래 보시면 좋죠. 우리는 지체니까. 손가락처럼 하나씩 뻗어 나오니까 이 손가락이 성도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는 독자적인 몸을 형성할 수가 없어요. 주체기 때문에.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교류해서 성도가 주어진 환경 속에 살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 안에 뭐가 들어있다고 했습니까? 재림이 있죠. 재림을 위해서, 십자가를 위해서, 부활을 위해서 다 같은 말이에요. 이 땅에 뭐 만든다? 주님을 위해서 남겨진 사람들이 있어요. 그게 마태복음 24장 아까 읽었던 가운데 30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그다음에 31절요, “저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여기에 택하신 자가 나오죠. 참,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하늘의 별이 떨어지는 것이 신기합니까? 택하신 자가 존재한다는 것이 신기합니까? 택하신 자가 존재한다는 것이 신기한 거예요. 제가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수십 년 동안 복음을 전하지만, 제가 가장 놀랍고 충격을 먹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 성령 받은 사람 그 자체가, 이게 정말 내가 이러려고 살았구나! 해요. 이런 복이 다 있냐 이 말이죠. 왜? 없어야 되거든요. 없어야 돼요.
인간은 자기중심인 거예요. 인간은 자기중심이고 예수 믿는 것도 자기가 구원받으려고 하는 건데, 주님의 성령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성령 줘서 성도가 생겨버리면 이거는 그 사람이 있다가 중요한 게 아니고, 주님이 계시다는 증거로서 다가오니까, 어찌 그 분을 함부로 할 수가 있겠어요? 소중하고, 소중하고 또 소중하고. 고맙고, 고맙고 나타나주니 고맙고. 같이 이 세상을 살아가주니 고맙고. 귀하고 귀한 거예요.
영을 통해서 그 사람을 보는 거예요. 육이 아니라. 저 사람은 돈이 얼마 있고, 헌금을 얼마 했고, 기도를 몇 시간 했고, 이게 아니고 영을 통해서. 예수님이 제시한 그 기준만 이야기를 할 때. 인간의 어떤 행동은 받지 않고 십자가 피로만 구원한다는 그 이야기를 억지가 아니고, 짜증내서 하는 것이 아니고, 기쁘게 하는 거예요.
어떤 경우에 그걸 느끼느냐 하면 분명히 집이 가난한데, 변변치 못해요. 지하에 살고 물이 들어오고 이렇게 사는데, 내 인생에 전혀 돈이 없다는 것이 얼굴에 그림자가 안 되고, 이거하고 관계없이 기쁘게 살아가는, 복음 때문에 살아가는 그 모습을 볼 때에, 뭐 저런 인간이 다 있나? 저거 분명히 수치스러워 해야 돼요. 돈 다 좋아하는데, 남들이 갖고 있는 돈이 없어도, 자기는 무슨 통뼈라고 돈을 안 좋아하고 그럽니까? 분명히 이거는 정상이 아니에요. 미쳤어요. 뭔가 이상해요. 그 이상한 그것이 예수님이 오실 때의 그 이상함과 같은 맥락의 이상함이에요.
사람들이 예수님을 볼 때 얼마나 이상하게 봤습니까? 저거 미친 거 아니야? 자기 인생을 왜 내팽겨 치느냐 이 말이죠. 열심히 내 인생 오래 살도록 노력해야지. 성령 받은 사람이 이야기를 해요. 목사님, 저 죽는 것이 소원이에요. 아주 그것도 가볍게. 그래서 나는 믿지를 못하겠어요. 저 분이 복음 흉내 내고 들은 것이 많이 있어가지고 앵무새처럼 복음, 복음 하는가? 그런 사람이 하도 많아가지고, 그런 사람이 너무 많아요.
복음 아니까 알아달라고 하는 사람들 다 가짜가 아닙니까? “나 복음 아는 목사니까 어떻게 좀 대우해달라.” 그런 것. 전부 다 가짜거든요. “나 복음 아니까 욕해도 괜찮고, 밟아도 괜찮고, 짓이겨도 괜찮습니다.” 이런 사람이 있다는 그게 얼마나 놀라 자빠질 일입니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한 대로 일단 맞자. 일단 우리는 안 믿습니다. 안 믿는다고 하고 아무리 생각해도, ‘나 안 믿을 거야. 육 개월 복음 듣고 안 나올 거야. 교회 안 나갈 거야.’ 근데 이렇게 욕하는데도 계속 나와. 이거 미친 거 아냐?
항상 복음 아는 사람의 특징이 있어요. 뭐냐 하면 방글방글 웃어요. 개뿔도 없어요. 지갑에 돈 만원밖에 없어요. 방글방글 웃어요. 목사님한테 식사대접 할 돈도 없어요. 목사가 뜯어먹을 생각을 못하도록 아무것도 없어요. 늘 방글방글 웃어요. 이게 뭐냐 하면 고맙고 감사하기 때문에 방글방글 웃는 거예요. 물론 아프면 방글방글은 아니고 찡그리면서 웃겠지만. 방글방글 웃고, 두 번째는 진짜 등신 같아요. 내일 일을 생각 안 해요. 내일 일을. 내일 일을 생각을 안 하게 성령께서 그렇게 하신 것 같아요.
이 두 개를 합친 게 뭐냐 하면 “오늘 밤에 제발 좀 낙원에 보내주세요. 오늘 밤에.” 애가 시집가고 장가간다고 뭐 내세우는 것도 아니고. 지들은 지들 인생 살겠고. 또 보탠다면 남 탓 안 해요. 자기 과거 탓 안하고. ‘내가 그때 행동 똑바로 했으면 이렇게 안 될 걸.’ 자꾸 과거 탓 하지 않아요. ‘내가 그때 이렇게 했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질 않았을 텐데..’ 물론 과거 탓 안 할 사람은 없지만, 대략적으로 보게 되면 그 과거 때문에 방글방글 웃는 것이 사라지고 이러지는 않는다 이 말이죠. “과거에 나 이렇게 살았습니다.”라고 다시 방글방글로 돌아와요. 물론 늘 사람이 이럴 수는 없지만 3초만이라도 이랬으면 좋겠어요. 3초만이라도.
어떤 분이 저한테 장문의 편지를 보냈어요. 목사님은 늘 마음이 편해 보이는데 나는 괴롭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늙으신 부모님을 내가 모시지 못해서 늘 가슴이 아프다는 거예요. 이 죄책감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첫 번째는 그 사람은 나를 모르고 있고. 두 번째는 자기 인생을 책임지려고 하는 그것이 놓아야 될 인생인데, 왜냐하면 우리 인생은 재림과 관련되어 있거든요. 나의 구원과 관련되기 이전에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되어 있어요.
재림에는 무슨 자가 있다? 택하신 자가 있어요. 택하신 자. 나팔소리. 나팔소리는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이미 완료된 상태에요. 나팔소리와 함께 잠자다가 깨어날 택하신 자. 이 공식이 주어지는데, 이 공식을 내가 따로 뽑아서 자아한테 주면 안 돼요. 주체한테 가야 되기 때문에. 주체는 자아가 죽고 난 뒤에 생기는 것이 주체잖아요. 자아가 죽고 난 뒤에. 자아가 알고 있는 재림, 십자가, 부활, 다 잊읍시다. 그거는 내 종교적 욕구에 불과해요. 남한테 자랑하려고, “나 구원받았다!” 이 짓 하려고 갖고 있는 소유죠. 소유. 부산강의에서 제목이 사랑과 소유잖아요.
주를 사랑한다는 말은 사랑이 아니고, 주님마저 내 것을 만들기 위해서, 내 거라는 게 자아인데, 자아 것을 만들어서는 같이 죽어요. 주님께서 재림을 이야기하고 십자가 부활을 동시에 담아서 평소에 기적을 일으키고 말씀을 준 거예요. 아까 이야기한 믿음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어도 산을 옮긴다는 말은, 진짜 나중에 성령 받아서 믿음이 생기게 되면 산을 옮기든 말든 누구 소관이다? 자아의 소관이 아니고 주체의 소관이기 때문에, 주체에 종속이 된 거예요. 주께서 하라고 하면 그게 산을 옮긴 거예요. 이미.
왜? 주의 말씀대로 되기 때문에. 산을 옮긴 정도가 아닙니다. 산을 옮기는 것은 겨우 겨자씨만한 거고. 예수님의 믿음이 겨자씨만하겠어요? 더 크죠. 그리고 우리는 뭐냐, 내가 신자라는 것을 믿게 된 그 놀라움! 산을 열 개 옮겨보세요. 그렇게 해서 구원받는가? 중요한 것은 내가 산을 백 개 옮기는 것보다 내가 구원받는다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십자가가 믿어진다는 거예요. 아무것도 필요 없다. 아무것도 필요 없어~♬
아무것도 필요 없다. 오직 십자가 피로만, 피 묻은 덮개로만 구원한다는 이게 믿어지는 그 순간, 이제 자아는 거추장스러운 겁니다. 거추장스러운 거예요. 후딱 자아라는 것은 무덤에 집어넣고 싶고, 나팔소리가 그리워지고. 다시 말해서 우리의 자아가 없어지고 우리가 주의 재림의 요소가 된다면, 세상에서 더 바랄 게 없고, 세상에서 더 찾을 게 없고, 세상에서 더 귀한 것은 일체 없는 겁니다. 세상은 부분이고 나는 전체를 알기 때문에. 세상은 차 안에서 바깥을 보는 그런 수준밖에 안 됩니다.
평창올림픽이 그렇고, 이 세상의 모든 정권과 국가의 이념이 그런 거예요. 대한민국 국민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국민에게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런 것들은 전부 다 창 안에서 바깥을 관찰하는 과학적인 수준밖에 안 돼요. 과학적인 수준. 합리적인 수준밖에 안 돼요. 적어도 차 밖에 나가서 다시 보려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의 안목으로 다시 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돼요.
그럼 차 밖으로 나간다면 대전 말고 세종시로 이사 가야 되나? 하는데, 이사하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의 존재방식이 세상과 함께 있으면서도 세상 밖에서 안을 바라보는 방식으로 세상과 함께 있었어요. 분명히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이 말구유잖아요. 구유인데, 그 구유가 베들레헴의 한 일부를 차지해요. 지리적으로, 지역적으로.
맞지만, 그 구유는 천군천사의 찬송과 관련되어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하늘에 있던 별이 구유를 찾아왔잖아요. 하늘의 요소가 담겨있는 특별한 장소. 그게 구유라면 오늘날 걸어 다니는 성도는 하늘에 있는 성령이 함께 있어, 하늘의 요소와 땅의 요소가 융합된 채 연결되어 있는, 결합된 채 성도는 살아갑니다.
그래서 성도는 예수님처럼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사람이라고 요한복음 17장 16절에 나와 있죠.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어요. 다만 세상에 포함되었을 뿐이지, 세상에 속하지는 아니했어요. 포함보다도 세상에 그냥 섞여 있다고 보면 돼요. 함께 있는데, 같은 류(類)는 아니죠. 같은 종류는 아니죠. 왜? 크리스천Christian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것이지 아담의 것은 아니다 이 말입니다.
그것을 제가 안양강의에서 했는데, 그걸 가지고 세마포 귀신이라고 했어요. 일종의 귀신이에요. 귀신. 귀신의 특징은 일단 죽어본 적이 있다는 겁니다. 이미 죽고 난 뒤에, 옛날에 자기가 살았던 동네에 다시 파견근무 하는 거예요. 제대하고 난 뒤에, 벌써 제대라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좋죠. 제대하고 난 뒤에 자기가 옛날에 근무했던 부대에 민간인 자격으로 거기서 편의점하는 거예요. PX(군대매점)운영하는 것. 외부 인으로 PX를 운영할 때, 거기서 뭐 점호를 받습니까? 남들은 점호 받는데 자기는 점호 안 받잖아요. 지시와 명령도 안 받죠. 훈련도, 사격도 안 하죠. 자기 물건만 팔면 되니까. 자기 일이니까.
그래서 성도는 누구한테 꿇리지 말고, 어디에 취직하더라도 자기 일만 하면 돼요. 이 세상 말 듣지 말고. 자기 일만 하면 돼요. 주어진 환경은 누가 준 것이 아니고 주님이 주신 환경이기 때문에 자기 일만 하면 되는데, 그 자기 일이 뭐냐 하면 굉장히 쉬워요. 바로 덮개 밑에 일을 하면 됩니다. 덮개 밑에 뭐가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죄지으면 됩니다. 같이 한통속 되어 빼먹을 거 다 빼먹고.
만약에 네 식구가 다 성령 받았다. 그런 경우가 별로 없죠. 성령 받은 네 식구 만나서 뭐 합니까? 네 식구가 완전히 죄 짓는 집단하면 돼요. 죄 지으면 되는 거예요. 엄마 죄짓고 방글방글! 아빠 죄 이야기 하고 방글방글! “아빠! 오늘 퇴근하면서 무슨 죄 지었어?” “나 이런 죄 지었어.” 하하하 웃고. “우리 딸내미 학교에 가서 무슨 죄 지었어요?” 또 하하하 웃고. 이거 정말 미친 거 아니야? 그래놓고 나중에 식사할 때 아빠가 식사기도 합니다. “주여! 이거 먹고 죽게 하옵소서.” 뭐 독약 섞었어요?
그래서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했어요. “나는 개한테 배운다.”라고. 개를 무시하잖아요. 근데 과연 개를 무시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개는 오늘밤에 낙원에 갑니다. 정말 주인이 안락사한다고 약을 먹여도, 사료에 독약을 섞어도 그 개는 먹어요. 주인이 오늘로 너하고 헤어지자고 한다면, “멍멍! 먹겠나이다.”라고 한다 이 말이죠. 주인에게 철저하게 종속이 되니까.
근데 왜 우리는 종속을 못합니까? 이게 바로 죄를 더 지으라고. 오직 나만을 위해서. 나의 영광과 나의 가치. 건드리기만 해봐라. 하나님이고 뭐고 다 물어버린다. 이런 못된 개 있잖아요. 개도 성질이 아주 더러운 개. 개보다 더 못한 개. 개만도 못한 개. 개가 들었으면 화낼, 개만도 못한 개로서 우리는 역할을 다 해야 해요. 나중에 잘리든, 주연배우가 갈리든 관계없어요.
우리는 끝까지 우리의 배역이 뭐냐 하면 개만도 못한 개. 그걸 성경에서 죄인 중에 괴수. 그 역할. 그 역할은요, 이건 아주 자연스러워요. 뭐 이거는 “목사님! 죄 지으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라고 안 물어도 돼요. 안 물어도. 무조건 나만 잘되면 되고, 내가 성공해야 되고, 내가 앞질러야 되고, 내가 대우받아야 되고, 하여튼 나만 살아야 되고 남은 다 죽어야 되고.
그러니까 대구에 지금 비가 안 와요. 비가 안 오니까 눈이 많이 오는 대전이 미운 거예요. 실컷 미워하고. 물이 하나도 없어서 낙동강 그거가지고 수돗물 나오고 그래요. 경주 그쪽에는 거의 비가 안 왔어요. 이게 무슨 난리인가? 이렇게 되거든요. 평창올림픽 했는데 금메달 하나 따고 끝나고. 뭐 이런 거 있잖아요. 또 화내고, 내가 원했는데 8대 0으로 지고. 뭐 이런 거 있잖아요.
하여튼 세상 돌아가는 것이 성도로 하여금 죄 짓게 하도록 한 이유가 재림의 무게가 크기 때문에. 니가 이 세상에 조금이라도, 조금이라도 이 세상에 미련이나 집착이나 기대하거나, 니 미래를 위해서 여기다가 벙커 만들고 숨어들어가지 말아라. 피할 곳이 없어요. 이 땅에서 어디도 피할 곳이 없습니다. 어떤 곳도 너를 숨겨줄만한 곳이 없다. 이게 요한계시록에 나옵니다. 이 세상 어떤 것도.
재림할 때 그렇다가 아니라, 이미 성도 안에 재림이 들어있기 때문에, 성도는 바깥에서 안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은 우리가 살 곳이 아니다. 찬송가에 나오잖아요. 이 세상은 우리가 살 곳이 아니에요. 어떤 곳도 살 곳이 안 됩니다. 실패하더라도 서러워하지 마세요. 마땅히 실패해야 돼요. 인생이 너를 속이더라도 노여워하지 마세요. 노여워하거나 슬퍼하지 마세요. 우리가 슬퍼한다는 말은 마치 자기가 누구의 일원이면서도, 마치 내가 전부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정리합시다. 우리로 하여금 죄 짓게 하기 위해서, 죄 짓는 요소가 재림의 요소고, 그 재림의 요소가운데 우리는 이 세상에서 실망과 어떤 불평과 불만과 “에이, 더러워서 못살겠네.”라는 상황을, 주께서 계속해서 우리 주변에 찾아오도록 조치하는 겁니다. 믿었던 친구한테 사기당하고, 보증 섰다가 다 날아가고. 그래서 이 세상은 빨리 죽는 게 낫다는 그것이 스스럼없이 나오는데, 처음에는 짜증내면서 나오지만 나중에는 싱글벙글 나올 거예요.
한두 번 당하는 것도 아니고 맨날 당하게 하니까. 자식한테 당하고, 남편한테 당하고, 아내한테 당하고. 세상 모든 것이 가만히 있는 나를 왜 자꾸 괴롭히느냐 이 말이죠. 하나님이여! 나 점잖게, 바르게 살라고 했었는데, 왜 세상은 내가 하는 것을 다 뭉개버리고, 좀 편하다 싶으면 편한 게 뭐가 그렇게 불만인지 또 교통사고 나고. 하여튼 뭐 가만히 두지를 않고 소시지 튀기듯이 조금 있으면 뒤집어 튀기고, 조금 있으면 또 뒤집어 튀기고, 세상에서 튀길 대로 다 튀겨가지고. “너 이래도 이 세상에서 손 안 놓을 거야?”라고 하는 식으로 그렇게 만들어요.
구원은 주님의 공로입니다. 가만히 있게 두면 세상에 나가서 자기 자랑질 해요. 나 구원받았다고. 나 이정도로 믿음 좋다고. 그것을 전부 다 아주 엉망진창 만들어버립니다. 우리 인생을 아예 정떨어지게 만드는 하나님의 그 일하심. 그런데 싱글벙글이 누구냐 하면 스데반집사잖아요. 죽을 때 그냥 곱게 안 죽었어요. 돌에 맞아 죽었어요. 징역 20년이 아닙니다. 추징금 70억이 아니에요. 그냥 돌에 맞아 즉결심판으로 죽었어요. 징역 20년은 최순실한테 선고한 거고. 이쪽은 그냥 돌에 맞아 죽었다니까요.
죽는 당사자야 뭐 예수님 바라보면서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라고 하지만, 그 가족들은요? 그 가족들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성도 하나가 많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따라서 불편하게 만드는 것을 내 행동을 똑바르게 해가지고 같이 끌릴 생각하지마세요. 어차피 우리는, 어차피 성도 자체가 명절날 다 불편한 요건이 됩니다. 어차피 복음 안다는 그 죄로, 그 죄가 아름다운 죄에요. 아름다운 죄~ 사랑 때문에~♬(그 겨울의 찻집, 조용필) 우린 창밖에 사는 존재에요(창밖의 여자, 조용필). 창밖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죄 사랑 때문에, 우리는 기쁘게 쫓겨납시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미 재림의 요소가 있기에, 택하신 자이기에 주님하고 똑같은 대우를 받는 것을 너무 억울해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