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로마서27강-화목(5;9-11)이근호130331

아빠와 함께 2013. 3. 31. 19:24

화목(롬 5: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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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3-03-31 13:38 
화목

2013년 3월 31일                           본문 말씀: 로마서 5:9-11

(롬 5:9, 개역)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롬 5:10, 개역)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롬 5:11, 개역)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인간들에게는 누구나 구원에 대한 열망이 있습니다. 세상 사는 것은 만만치 않고 몸은 늘 피곤에 찌들어 있습니다. 고통은 인간으로 하여금 다른 세계를 상상하게 만듭니다. 이 몸을 편히 눕히고 쉴수 있는 공간을 연상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이런 형편에서 ‘구원’이라는 것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누구라도 내가 나를 사랑하는 만큼이라도 사랑해주면 그 사람 밑에 들어갈 용의가 있다고 마음 먹습니다. 이러한 삶의 힘든 여건으로 인하여 생각하게 구원에는 화목이라는 것이 들어가지를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물이 빠져있고 또 어떤 사람이 우연히 강둑을 걷고 있다고 칩시다.

물에 빠진 사람은 소리칠 것이고 강둑에 있는 사람은 그 소리치는 사람의 오른손을 잡고 건져낼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구원’을 생각하게 됩니다. 건짐받은 사람은 건져준 사람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서로 각자의 길로 떠날 겁니다. 과연 이게 하나님에 생각하시는 구원일까요?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같이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화목이란 실은 자기 절대성인 상태를 두고 말합니다. 즉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는 만큼이나 사랑해주지 아니하면 모조리 주변에서 정리해나가는 상태를 나름대로 화목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의 화해한 필히 ‘하나님의 원수’라는 자리에서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원수’에 자리에 들어서지 아니하면 하나님과의 화목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화목이 아니라 하나님의 화목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죽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성공적인 인물로 만들기 위해서 자기를 인정해주는 사람만 자꾸만 주변에 모으나 그렇지 않는 자들을 추방합니다.

그 예가 성경에서도 나옵니다. 마태복음 1:18-20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난데없이 마리아의 배가 불러온 것입니다. 임신한 겁니다. 마리아에 대해서 실망한 요셉은 마리아의 관계를 정리하려고 합니다. 물론 그 전에 마리아의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이 뱃속의 아이가 누구냐”라고 말입니다.

마리아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말했을 것입니다. 모든 게 말씀대로 이루어지기 위해 성령에 의해서 아기를 임신했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의로운 요셉에 있어 그것으로 설득이 될 리가 없습니다. 요셉의 입장에서 최선을 다하여 배려하는 방법은 ‘조용한 일처리’였습니다. ‘가만히 관계를 끊고자 했습니다.

바로 이런 행동이 인간이 보일 수 있는 최선의 화목입니다. 즉 사람들의 화목이란 타인과의 화목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를 진정시키고 다스리는 식으로 진행됩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조금이나마 자신의 가치성을 잃고 싶지는 않는 겁니다.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날 천사가 찾아왔습니다.

이때부터 요셉의 가정에게는 ‘하나님의 화목 작업’ 곧 ‘구원 작업’이 시작이 됩니다. 모든 게 요셉 중심이 아니라 아기 예수님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요셉의 팔자와 운명에서 자기 자신의 뜻은 철저하게 배제됩니다. 아기 예수님 때문에 요셉은 남의 나라인 애굽으로 지명자 신분으로 도망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예수님이 소년 시절이었습니다. 대규모 종교 축제가 벌어져서 각처에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모여들 때, 그 속에 요셉의 가정도 끼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혼잡한 틈을 타서 소년 예수님은 사라졌습니다. 다른 가족들이 사흘 동안이나 소년 예수님을 찾아나섰고 결국에는 성전에서 성경 박사들과 논쟁을 벌린다고 소식을 접하고 찾아가서 만났습니다.

“어디 갔는냐? 우리가 얼마나 너를 찾아다닌 줄 아느냐?”라는 아버지의 질책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대꾸합니다.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왜 진작 몰랐습니까” 즉 예수님께서는 두 종류의 아버지를 언급합니다. 오늘 본문 10절의 말씀을 여기에다 거기에 대입하겠습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즉 ‘하나님의 원수된 아버지여 내가 내 아버지를 위하여 죽어야 비로소 화목된 줄을 왜 몰랐습니까?“라는 식입니다.

육신의 아버지는 여전히 자기 절대성을 고수하면서 예수님과 더불어 살았던 것입니다. 즉 ‘나를 위한 아기 예수님’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짓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하나님의 원수’의 자리로 데려오기 위해 법을 주십니다. 사람들은 이 법을 준수하면 할수록 화목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절대성’으로 만끽하는 식으로 버티게 됩니다.

인간은 자신의 시원, 즉 근원에 어둡습니다. 법이란 하나님께서 ‘금지의 테두리’를 치는 일입니다. 금지 안에서 화목입니다. 하지만 인간에게 있어 금지란 도리어 소망의 대상이 됩니다. ‘금지했기에 소망’하고 싶어합니다. 인간이 인간의 오기입니다. 담배갑에 “이 담배를 피우시면 몸에 해롭습니다”라는 문구가 되레 인간들로 하여금 담배를 더 피우기 위해 자극한 셈이 됩니다.

즉 “누구든지 자신의 몸에 해로운 줄 알면서도 계속 피울 대단한 용기를 가진 자만이 이 담배 피우기에 도전하세요”가 되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성도로 하여금 더 이상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아무 것도 기대하지 못하는 식으로 인생을 살게 합니다. 기본 양심이나 양식이나 인간으로의 마지막 남은 품위마저 치사스럽게 돈에 갈려서 똥이 되게 하십니다. 

아이에게 분유먹일 돈마저 없을 때, 사람은 무슨 짓고 하게 마련입니다. 이런 탕자가 비로서 더 이상 자기 자신에게 기대걸지 않는 상태에서 오직 하나님의 화목에만 감사하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애초부터 우리는 비참하고 처참한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7강-롬5장 9-11(화목)13033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5장 9절에서 11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245페이지입니다.

로마서 5:9-11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사람은 혼자 있고 싶지요. 혼자 살고 싶고요. 내가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나를 사랑하는 만큼이나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곁에 있을 경우에만 그것이 유효합니다. 평소에 내가 나를 사랑하는데 내가 나를 사랑해주는 그 이상으로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 같으면 사랑할 용의가 되어 있고 내가 나를 사랑하는 만큼 나를 사랑해주지 않을 때는 내가 나를 사랑하는데 있어서 방해자가 되기에 헤어지고 싶은 거지요. 그래서 궁극적으로 인간은 홀로 있고 싶어요. 그런데 오늘 설교 제목이 뭐냐, ‘화목’이고 오늘 본문도 ‘화목해야 한다.’ 다른 말로 ‘화해한다.’

우리는 화목도 귀찮고 화해도 귀찮고 ‘제발 나 좀 내버려 둬. 난 누구하고 사귀기도 싫고 사이좋게 지내기도 싫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화목이라고 하니 이게 우리가 알고 있는 구원하고 어울리지가 않아요. 우리가 생각하는 구원의 예를 들어보면 금방 이해가 될 거예요. 제가 물에 빠졌습니다. 혼자서는 물에서 못 빠져 나옵니다. 그 때 길 가던 사람이 손을 내 밉니다. “아저씨, 건져줄까요?” “고맙습니다.” 드디어 건짐 받았습니다. 그래서 건짐 받은 뒤에는 “아저씨, 고맙습니다.” 그리고 각자 자기 갈 길을 갈 뿐이에요.

우리는 그런 생각에서 구원을 생각하는 겁니다. ‘내가 세상 살기 너무 힘들다. 누가 나를 안 도와줄까? 아, 메시아가 도와준다고 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아프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보니 아픈 것도 없고 괴로운 것도 없고 나쁜 것도 없고 영원히 산다. 그래, 저게 내 살길이다. 난 저것에 가고 싶다. 이 세상에 날 건질 자가 없을까? 구세주가 오른손을 내밀었구나. 이것이 구원이구나.’ “주여, 주의 오른손을 붙잡습니다.” “내 피를 믿어라.” “믿습니다. 이렇게 믿어서 구원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이게 우리가 알고 있는, 지금까지 이것이 우리의 신앙의 연조라고 알 고 있으면서 버텼던 우리의 구원관이잖아요.

그런데 그 구원관에 ‘화목’이라는 것이 어울리지가 않습니다. 내가 혼자 괴로워서, 불교식으로 하면 생로병사지요, 사는 것 자체가 힘들어서, 나는 나를 사랑하고 싶은데 내 여건이 조성되지 않으니까 나보다 더 세신 누군가 오셔서 나로 하여금 행복하게 해 준다면 고맙습니다, 라고 해 줄 용의가 되어 있다는 관점에서 우리가 구원을 생각하는 겁니다.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종노릇을 했다. 그래서 괴로워서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여호와여, 살려주소서.” 그런데 여호와께서 모세를 보냈습니다. 모세를 보내서 그들을 애굽에서 건져냈습니다. ‘그래, 맞아! 이것이 구원이야. 난 하나님을 믿어야지.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라고 나오더라는 말이지요.

어렵고 힘든 자기형편에서 벗어나게 해준다면 바로 그것이 구원이 아니고 뭐냐고 생각하고 싶은 것이 우리의 구원의 선입감이지요. 그런데 여기에 화목이 왜 들어갑니까? 난데없는 화목, 누군가 사귀어서 뭐할 건데요? 우리는 사귀고 싶지 않아요. 힘든 것만 해결해주면 우리는 나 혼자서 사는 것이 편하도록 몸이 가동되게 되어 있어요. 건져주기만 하면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이고 예수고 다 귀찮아요. 이제 다시 혼자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 5:10)

세상에 이런 어려운 문장이 어디 있습니까? 무슨 말입니까? 저는 이 문장이 참 어렵다고 느끼는데 여러분은 어려운 것이 아예 안보이니 어려운 것도 모르겠지요. 이 문장이 어렵다는 것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것이 한글로 쓰였어도 봐도 또 봐도 무슨 뜻인지를 모릅니다. 낯선 용어들이 집약되어서 막 투입된 것 같고 막 억지로 밀어 넣은 것 같아요. 앞 단어가 이해되면 그 다음 단어가 이해되는 것인데 앞 단어가 이해가 안 되니 그 다음단어도 이해가 안 되고 그러다 보니 다시 앞 단어도 이해가 안 되고 그래서 전체가 다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성경이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 따로, 고통스러운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도움 받을까, 이것 따로 되는 거예요. 그러니 이 본문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 구원과 화목이 어울리지 않는데 왜 구원에 화목이 들어가느냐는 말입니다. 여러분, 구원에 화목이 들어가는 게 아닙니다. 화목을 위해서 구원하는 겁니다. 구원은 하나의 시동에 불과한 겁니다. 구원의 이유가 뭐냐, 화목케 하기 위해서 구원한 거예요. 같이 살자는 거지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는 혼자 살고 싶은데. 같이 살기 위해서 너 혼자 사는 너, 너 밖에 모르는 너, 너 빼놓고는 다 귀찮아 하는 너의 심성을 이제는 같이 살고 싶은 마음으로 바꾸면서 구원을 주께서는 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내가 구원받고자 원래 의도했던 것과는 관계없이 일방적으로 주님의 의도로만 끌려가는 식이 되는 겁니다. 제가 방금 이야기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같이 살자’ 또는 ‘화목하자. 사이좋게 살자.’라는 말을 한다는 것은 무엇을 암시하는가 하면 ‘지금 너와 나의 사이가 안 좋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그 안 좋다는 것을 가지고 10절에 보면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라는 말을 하는 거예요. 경상도 말로 하면 ‘웬수’가 되는 겁니다. 남편이 술 먹고 들어오면 여자들이 뭐라 합니까? “아이고, 이 웬수야!” 하잖아요. 원수 되었을 때에 화목케 하는 거예요.

지난 낯 설교, 한 주 지나서 다 잊었지요? 지난 시간에 한 법칙 다시 해 봅시다. 죄 지었기에 구원해주는 것이 아니고 죄인이기에 구원해준다고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지금 저는 기억하거든요. 죄지었다고 용서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과 관계없이 죄인이라는 것 때문에 용서를 하기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알려면 죄를 짓는 자리에 있지 말고 죄인자리에 가야 비로소 누구를 만나는가, 근원적인 죄인마저 용서가 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제대로 발견한다고 이야기했어요. 그것과 똑같은 원칙입니다. 하나님과 사이좋게 지내자, 할 때 사이좋게 지내야죠, 라고 하면 그것은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죠.

옆구리로 들어가면 안 되고 어디로 들어가야 되느냐, 하나님의 원수됨이 그 자리에 들어가야 화목이 비로소 보이는 겁니다. 하나님의 원수의 자리, 하나님으로부터 “이 웬수덩어리”라는 소리를 듣는 그 자리에 우리가 나아가야 거기에서 비로소 예수님의 죽으심과 살으심의 의의가 우리로 하여금 같이 살자는 화목, 영원히 같이 살자는 화목의 본래취지가 비로소 나타나는 겁니다. 그러면 문제가 정리정돈 되었지요. 우리의 목표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겁니다. 제가 생각해도 너무 쉽네요.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원수 되는 방법은 뭐냐, 죄 지으시면 되는 겁니다. 이것은 더욱더 쉽네요. 죄 지으시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은 죄짓는 것을 제일 싫어하시거든요. 그러니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일을 하시면 되는 거예요. 갈수록 점점 쉬워지는 듯도 하지만 어쩌면 점점 미궁에 빠지는 느낌? 수습을 어떻게 하려고 저렇게 막 나갈까, 그런 생각이 들지요? 이렇게 하면 쉽습니다. 사람이라 하는 것은 자기 행동한 만큼 자기 자리가 확보된다고 생각합니다. 과장이 사장 질 하면 안 되고 과장은 과장 질 할 때만 과장되고 대리가 대리 질 할 때만 대리가 되는 거예요.

주제넘게 선행학습 하면 안 됩니다. 그 자리만 해야 되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이 느끼는 것은 뭐냐, 만약에 과장에서 부장된다면 나중에 부장될 때 부장 일을 잘 해야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인간의 자리라 하는 것은 자기가 행한 분량만큼 자기 자리가 확보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말씀의 자리, 원수의 자리, 화목, 구원, 이 자리는 우리가 행한 만큼 만들어지는 자리가 아니에요.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지옥이 있다’ 하니까 지옥에 한 번 가보고 살기 안 좋으면 되돌아 나오면 된다고 하거든요.

되돌아 나올 수 있는 곳은 아무리 죄를 나쁘게 지어도 지옥이 될 수가 없습니다. 왜냐, 지옥은 한 번 들어가면 되돌아 나오는 것이 허용이 안 되는 것이 지옥입니다. 천국도 마찬가지죠. 그런데 인간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가다가 아니다 싶으면 얼른 발을 뺀다.’고 생각하거든요. 인간은 자기가 항상 발을 뗄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고 어떤 실험에 나서는 겁니다. ‘교회를 한 번 가 볼까?’ 그래놓고는 안 맞으면 빼버리겠는 거지요. 그 사람은 교회는 다녀왔지만 전혀 지옥과 천국을 맛보지를 못한 거예요. 이유가 하나밖에 없어요. 뭐냐, 발을 뺄 수 있다는 거예요. 그 말은 제대로 그곳에 간 적이 없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처음 만들어질 때 인간이 먼저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인간의 자리부터 먼저 만들어졌습니다. 그 자리를 어려운 말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형상의 자리는 확정된 자리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그 하나님의 형상 때문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인간의 자리도 확정된 자리에요. 그 확정된 자리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주변에 금지의 취지로서 선악과를 심어놓은 거예요. 따먹으면 죽는다, 다시 말해서 그것을 따먹는 날에는 하나님의 형상과 떨어져서 더 이상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고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금지했다고 하니 그 금지팻말을 빼버린 거예요. ‘금지? 나에게? 내가 그것을 따먹지 말라는 말이야?’ 나는 나에게 금지된 것만 소망하게 되어 있어요.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그 다음부터는 하고 싶다는 충동을 유발시키는 일이 된다는 거예요. 담배 갑에 보면 “지나친 흡연은 몸에 해롭습니다.” 하는 것이 담배 값에 쓰여 있어요. 참 못됐지요. 그러면 그 담배 회사에서 담배를 피우라는 말인가요, 피우지 말란 말인가요? 참 못됐어요. 이 담배가 몸에 해로울 수 있다고 써놓았다는 말은 담배회사가 어떤 의미에서 흡연을 더 장려하는 것이 돼요.

몸에 해롭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인간의 오기를 유발시키는 겁니다. ‘몸에 해롭다? 나는 내 몸에 해로운 것을 알면서도 나는 담배를 피울 수 있는 배포가 있음을 담배회사 앞에서 보여주마.’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해가 되고 있습니까? 몸에 해로운줄 알면서도 피운다면 그 사람은 얼마나 대단한 존재가 됩니까? 그러니 담배회사에서는 담배 피우는 것이 몸에 해롭다는 이야기를 함으로써, 쉽게 말해서 싸나이 대 싸나이, 대단한 사람들만 담배피울 수 있습니다, 라고 담배피우는 것을 특권의식처럼 부추기는 식의 광고를 한 셈이 된다는 말입니다.

너무 쉬운 이야기를 어렵게 해서 죄송합니다. 인간은 금지한 것을 소망하게 되어 있고 그것은 타고난 거예요. ‘19세 이하는 이 영화 못 봅니다.’라는 말을 해서 고등학교 때 침이나 뱉으면서 좀 논다 하는 애들로 하여금 그걸 더욱 보고 싶게 만드는 거예요. 하지 말라고 함으로써 ‘대체 뭔데? 뭔데 나보고 하지 말라고 하는 거야?’라는 것을 더 하게 만드는 겁니다. 더 하고 싶게 만드는 거예요.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어 놓았다고 하니 ‘하나님, 너는 누가 만들었는데?’ 이렇고 싶은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금지를 하게 되면 인간에게는 화목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나는 누구 앞에 죄인인데, 누구 앞에 원수가 되었는데 내 신세도 참 처량하지. 그 분 쪽에서 먼저 용서한다는 말이 없으면 나는 희망 없어.’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법을 주시면 그 법을 우리가 얼마나 오기 있게 지키는가를 보여주겠습니다.’라고 밀어붙이면 결국 그 사람에게 누구와 사귄다는 것은 점점 없고 법을 지키는 자기만 계속해서 절대적인 존대로 남는 거예요.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본성에 부합됩니다. 이것이 굉장히 우리를 편하게 만들어요. 그리고 우리를 짜릿하게 만듭니다. 교회 나오는 이유와 사는 재미를, 목표를 계속 달성해 나간다는 점에서 굉장히 좋은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계속 사귀려고 하거든요. 사귀는 것이 귀찮아요. 내가 얼마나 잘난 존재인가를 오히려 드러내고 싶은 것이 우리로 하여금 삶의 용기를 북돋고 희망을 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원수의 자리로 구원하는 방법 하나밖에 없어요. 우리에게 법을 주십니다. 법을 주면 우리는 이미 금지선을 넘어버린 브레이크 없는 차처럼 갈 때까지 가 보는 거예요. 그 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우리는 이만큼 내가 대단한 존재임을 확인하는 재미로 살아가게 됩니다. 여기에 화목이라는 것이 전혀 있을 수가 없지요.

있을 수가 없으니 그것이 뭐냐, 화목이 빠진 구원이 바로 하나님의 원수의 그 자리라는 말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우리를 유도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원수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법을 주었고 우리는 그 법을 준수하고 완벽하게 지킴으로서 하나님께 완벽하게 가까이 간다는 착각 속에 하나님 보시기에 원수의 자리까지 온 거예요. 왜, 사귀고 싶지를 않으니까. 제가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제가 옛날에 서문교회에 있을 때 주일학교 교사를 했어요. 저는 그 당시 학생이었고 다른 교사들은 다 직업이 있었어요. 청년들이 다 바빴지요. 그러니 성탄절 행사 준비한다고 주일학교로 다 모이자 했는데 나 빼놓고 아무도 안온 거예요. 애들 율동준비도 해야 되고 할 일이 많은데.

아무도 안 오고 애들만 온 거죠. 다른 사람 같으면 ‘에이 씨, 나도 안한다.’ 하고 그만 두겠는데 저는 그러한 어려움을 성공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혼자서 그것을 다 감당했어요. 그러니까 주위에서 박수소리가 요란했어요. 그게 화목입니까? 돛대지요. 그것은 내가 아무도 하지 않은 일을 나 혼자 했다는 그 우월감, 그 우월감은 마약 같은 겁니다. 나 혼자 출세했다, 나 혼자 성공했다, 주변 사람 다 떨어졌다, 주일학교 연극도 혼자 시나리오 쓰고 연출도 하도 다 했다, 여기서 오는 것은 피로도 모르고 힘든 줄도 모르고 거기에 몰입해서 했을 때 나중에 목사님이 와서 “이 선생, 참 수고했어요.” 하고 목사님의 사랑을 받을 때 ‘아, 이게 바로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구나.’ 생각을 했지요. 그게 화목입니까? 그게 화목이에요?

그게 참석도 안한 교사하고 친하게 지낸 겁니까? 김 선생 하고 나는 안 놀아, 이렇게 한 것인데 이게 화목이에요? 그게 바로 하나님의 원수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남보다 앞선다는 그것이 나의 인생의 기쁨이 되고 그것이 성공이라는 단어로 각인될 때 비록 원수의 자리라도 그것이 즐겁고 기쁜데 어쩝니까? 내가 나를 사랑하는데 내가 가장 기쁠 때가 언제인지 주님은 아시지요. ‘네가 극단으로 하나님의 원수의 자리에 갈 때 너는 비로소 너 자신에게 최고의 희열을 느낄 것이다.’라는 것을.

우리 교인들은 그것을 미리 알아버렸는지 그 최고의 자리를 다 양보해서 아무도 안 앞서려고 하는 거예요. 자동차 경기하는데 시속 15킬로 가는데 시속 8로 가는 사람도 있고 아예 뒤로 거꾸로 가는 사람까지 있어요. 이 하나님의 원수의 자리는 화목이 빠져 있는 구원입니다. 그것을 천로역정식이라 하는데 계단식으로 점점 더 성화되고 우수하게 되면 우수한 사람은 합격하고 나머지는 탈락한다는 이 사다리 식 구원관, 이 구원관 자체가 마귀가 심어준, 동시에 우리에게 희열과 기쁨을 주는, 성취감에 도취되게 만드는 마약 같은 거짓된 구원관입니다. 점점 더 화목은 없어지는 거지요.

방금 제 예를 들었는데요, 성경에 나와 있는 예를 들어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1장에 예쁜 처녀가 있어요. 마리아라는 처녀입니다. 그 처녀와 요셉이라는 청년이 사랑을 했더래요. 만난 지 백일이 되어서 기념으로 사탕도 준비해서 왔는데 여자의 배가 불렀다는 말이지요. “똥배인가?” “아니” 똥배가 아니고 임신을 했다는 겁니다. 아무리 요셉이 사랑하는 사이여도 같이 잔 일이 없는데. 자연적으로 요셉이 요새말로 멘붕이 되었죠. 요셉은 괴로운 거예요. 그때부터 잠 못 자는 거지요. 그동안 들어간 돈 계산도 할 것이고.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것이 기분 나쁜 것이 아니고 자기가 어떤 선택을 할 때 그 선택이 실패했다는 그 자기에 대한 실망감이 사람을 더 괴롭게 하는 법이에요.

누구한테 사기를 당할 때 돈 몇 푼이 아까운 것이 아니고 내가 누군지 제대로 파악을 못했던 자기 자신, 어떤 불확실한 선택을 했던 나 자신이 짜증나는 이유가 그 다음에 내가 다른 선택을 할 때 또 실패한다면 그래서 내가 나를 믿을 수 없다면 도대체 누굴 믿고 삽니까? 맨 날 하는 족족 실패한다면 난 누굴 믿고 살지요? 한강에 빠지는 수밖에 없지. 요셉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 따르면 요셉이 ‘가만히 끊고자 했다.’고 나옵니다. 성경에 간단히 나오지만 요셉의 고뇌가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설명해 봐라. 나에게 납득이 되도록. 그 뱃속의 애가 누구냐?” 하니까 마리아가 그렇게 이야기했겠지요. “나도 누구와 잔적이 없는데 말씀이 임해서 메시아를 임신했다.”고 하면서 천사이야기도 하고 누가복음 1장의 그 이야기를 마리아가 했겠지요. 그러면 남자가 뭐라 합니까? “됐고, 됐고! 그 말을 내가 지금 믿으라고 하는 이야기야? 됐어!” 그 말은 사랑하는 남자로서는 여자가 자꾸 거짓말을 하는 조로 보였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성경대로 하면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하여.” 라고 되어 있지요.

그러니까 자기 사랑이 아까워서라도 조용하게 “그래. 그러면 네 애를 가지게 한 사람하고 살도록 해 줄 테니까.” 해서 가만히 끊고자 했습니다. 이게 바로 인간들이 하는 화목이고 화해입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요? 인간들은 날마다 화해를 해요. 인간들이 화해를 하는데 누구하고 하느냐 하면 남하고 화해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맘을 진정하기 위해서 자기하고 화해해요. ‘참아라. 세상 살다보면 그럴 때 있다. 길가다 꽃 뱀 에게 물렸다 쳐라.’ 이런 식으로 자기와 화목함으로 말미암아 점점 더 자기 의, ‘내가 저 여자를 때려죽일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워낙 내가 인간이 좋아서 참는다.’ 하는 식으로 그나마 자기의 잘남을 약간이나마 챙기면서 ‘조용히 헤어지자. 좋은 친구로 남자.’ 하고 헤어져 주는 이것이 기껏 생각한 인간의 화해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성경에서 ‘조용히 끊고자’ 했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시도하는 화해하고 똑 같지요, 뭐. 다를 것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시도하는 화해라는 것은 결국에는 자기 잘난 맛은 마지막까지 절대로 빼앗기지 않고 챙기면서, 제가 처음에 얘기한 것처럼 내가 나를 사랑하는 만큼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내게 두고 나머지는 다 정리하겠다는 식의 화해, 절대적자기 위주의 화해, 우리는 그것을 화해라고 합니다. 친구요? 그것은 서로 서로 협상한 거예요. 결국 우리가 생각하는 화해라는 것은 화해가 아니고 나 잘났다는 화해밖에 안 되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하나님에게도 하나님 쪽으로 화해의 제스쳐를 취하는 거예요. ‘하나님이여, 이 정도 드렸으니 이제 복을 주세요.’ 하는 식으로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지요. 천사가 요셉에게 찾아옵니다. 이것이 실제로 있는 이야기입니다. 천사가 찾아오니 갑자기 그 앞에서 뭐가 사라지느냐하면, ‘내가 그 마리아와 종용히 끊어서 너는 네 갈 길로 가고 나는 내 잘난 것 챙겨서 조용히 갈라선다.’는 그 모든 것이 천사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합궁해서 내가 배놓은 것도 아닌 남의 애를 키우는 아버지로서 같이 살아가는 화목에 들어갑니다.

이것은 미치고 환장하는 겁니다. 왜냐, 마리아가 임신을 해서 아기 예수를 밸 때 마태복음 2장에 보면 분명히 거기에 요셉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팔자가 이렇게 더러운 팔자가 되어서 자기의 DNA가 묻지도 않은 그 아기 때문에 졸지에 요셉은 수배자로 몰려서 자기 고향을 떠나서 애굽이라는 엉뚱한 나라로 도망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화해입니다. 이것이 화목이거든요. 이게 무슨 이런 일이 있습니까? 아기 예수가 등장하고 나나 뒤에 모든 가정의 중심은 그 아기예수 중심으로 돌아가고 그 휘말린 소용돌이 속에서 어릴 때부터의 요셉의 꿈은 산산조각 나버렸어요. 이것, 화목입니다. 이게 화해에요. 이것이 납득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나, 내 계획은, 내 인생 시나리오는, 내 배에서 나온 내 새끼하고 내 자식은, 그 아기예수 앞에서 그것은 다 아무 의미 없는 것이 되고 말아요. “하나님, 남의 자식 아기 예수 키우고 내 아기는요?” 이렇게 나온다면? 모든 것이 아기 예수 앞에서 원수가 되는 겁니다. 이야기를 좀 더 해 보면 나중에 아기 예수가 커서 소년이 되었어요. 유월절 축제 때 예루살렘에 올라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예수님을 잃어서 사흘 동안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부모가 얼마나 애가 탔겠습니까? 이것은 어버이날 설교해야 될 것인데.

찾다가 보니 소년 예수가 성전에서 제사장과 서기관들과 성경토론을 벌리고 있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뒤늦게 소식을 듣고 “아이고, 내 예수야.” 하고 오니까 그 소년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아버지여, 내가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아버지는 왜 모르십니까?” 이렇게 되는 거예요. 같은 말씀에서 두 종류의 아버지를 언급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자식 키워도 소용 없는 거예요. ‘내가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 몰랐습니까?’라는 것은 다시 말해서 ‘요셉이라는 육신이 아버지여, 당신의 모든 팔자와 운명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에 의해서 이미 나로 말미암아 확정되어 있다는 사실, 화목이라는 확정된 관계를 당신은 왜 모르십니까?’라고 되어 있는 거예요.

본문 10절을 다시 봅시다.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하는 이 말씀을 왜 아버지 요셉은 모르십니까?”라고 소년 예수님 입으로 질책을 하는 거예요. ‘내가 말씀대로 십자가에 죽어서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원수인 당신이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영원히 같이 살게 된 입장’이라는 것을 소년 예수를 통해서 왜 미리 짐작하지 못합니까, 라는 질책을 하는 거예요. 사람이 문제점이 뭐냐, 마지막에는 내가 알고 있는 쪽으로 다시 되돌아온다는 것이 문제에요.

아무리 고상한 일을 해도 항상 돌아오는 곳이 내 자리만큼 적당한 자리가 없어요. 항상 내 공로와 자랑 질로 자꾸 되돌아오게 되어 있어요. 무슨 고무줄이 달려 있는지 내 자랑 질로 오더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왜 그런가, 하나님의 구원, 화목이라는 것은 인간의 기원(최초)을 염두에 두고 화목과 구원을 이야기하는데 인간은 뭘 배제하는가하면 내가 어디서 왔는지를 다 빼놓고 자기 행한 것부터 출발해서 ‘나는 얼마나 획득할 수 있는가’라고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말씀하고 우리하고 맞지를 않는 거예요.

아기 예수님이 삽입되어야 하나님과 우리는 영원히 같이 살 수 있다, 이렇게 되는데 아기 예수님을 생각지 않고 자기부터 먼저 생각한다면 이것은 내 위주의 화목인데 사실은 화목도 아예 없고 나만 절대로 잘되면 예수도 필요로 할 용의가 되어 있다는 식으로 자꾸 자기 쪽으로 돌아오는 거예요. 그것을 무슨 수로 깨뜨립니까? 그러니 인간은 구원되지 못하고 하나님의 원수가 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어느 원주민이 있었어요. 요새 원주민 시리즈가 왜 그렇게 많은지는 나도 모르겠어요. 그 원주민에게 탐험가가 물었어요. “식인축제를 언제 합니까?” 사람 고기를 먹는 축제를 원주민들이 했거든요.

“식인축제가 있다는데 그걸 언제 시작합니까?”라고 하니 원주민이 하는 말이 “벌써 끝났습니다. 어제 포로 잡혀온 사람들 우리가 다 먹었어요. 내 속에 먹은 사람 고기가 들어 있으니 날 보면 그게 식인축제가 되는 겁니다.”라고 했다 이 말이죠. “내가 사람고기 먹는 그 장면만 보려고 하지 마시고 이미 사람고기를 맛있게 먹은 내가 있는데 왜 자꾸 사람 먹는 그 장면만 보려고 합니까? 날 만나면 되었지요.”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천국, 지옥, 메시아가 어디 있느냐 할 때 ‘내가 예수 믿으니 날 보세요. 날 보시면 이게 바로 구원받은 사람입니다.’라고 자꾸 내보이고 싶은 거예요. 이것은 말이 안되지요.

마태복음 10장 34절부터 보면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내가 온 것은 평화하게 함이 아니고 전쟁하게 함이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원래 자리로 돌아가게 하려면 우리는 뭐가 되어야 하느냐하면 우리가 시도하는 모든 것을 믹서기에 갈아야 됩니다. 믹서기에 갈아서 우리의 마지막 남은 양심이라는 것, 그리고 최종적으로 남은 인격이나 품위 같은 것, 이런 것을 다 믹서기로 갈아버려요.

갈아버리면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 아침부터 이런 소리해서 죄송합니다만, 나오는 것은 똥입니다. 빌립보서 3장 8절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내가 예수님을 알고부터 나에게서 나오는 것은 다 똥으로 여겼다.’ 사람이 아무리 잘난 체해도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 주께서 더러워하는 인간밖에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그 작업, 지금도 하나님의 화목이 포함된 구원 작업은 그렇게 시도를 하는 겁니다. 어떤 남자가 도둑질을 했어요. 그래서 경찰서에 걸렸습니다. “당신은 멀쩡한데 왜 도둑질을 하느냐?” 하니까 “사실은 몸이 아프고요.” “그래요?” “병원에 다녀오는데, 마침 분유가게가 있는데 애가 분유를 못 먹어서 며칠째 굶고 있다는 것이 생각이 나는데…….”

그러니까 그걸 듣고 있던 수사관이 그 범인이 점점 더 가련해 지는 겁니다. 그 수사관 옆에 또 다른 형사가 나쁜 남자라고 하면서 때리고 있고 계속해서 범인은 자기 신세타령을 하고 있고, 그런 걸 보면 사람이 아무리 남자라도 자기새끼 분유 값도 없을 때는 순식간에 장발장 되는 거예요. 뭐라도 훔치고 싶은 거예요. 사람이 자기는 굶어도 자기자식이 굶어 죽어갈 때는 인품이니 양심이니 그런 따위는 믹서기에 다 갈아버립니다. 더 이상 내 품위, 내 인격을 내 힘으로 지탱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그 자리, 더 이상 내 것을 내 의미로 담을 수 없는 그 자리, 모든 것이, 바로 나 자체가 더럽다고 생각하는 그 자리, 원래 금지의 법을 어겨버린 그게 인간의 자리에요.

그 자리에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이여, 나 같은 것도 주님의 나라에 갈 수 있습니까?”라는 화목을 그리워하게 되는 겁니다. 그 전까지는 내 힘으로 천국을 따내고 내 힘으로 구원을 따내겠다는, 아직도 자기가 자기를 신뢰할 만하고 자기가 자기에게 아직도 믿을만한 구석이 남아 있어요. 그런데 그런 식으로 하면 구원이 안 됩니다. 사람이 나는 치사하지 않다고 아무리 그래도 내가 치사하지 않고 싶어서 치사 안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치사하게 만들어요. 나름대로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저 인간은 인간도 아니야, 쓰레기고 똥이야.’라는 경황이 항상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미안합니다, 가 아니고 남이 나를 질책하기 전에 내가 알아서 자살하고 싶어요. 나라는 인간이 이정도로 망가졌으면 더 이상 내가 나에게 기대할 것이 전혀 없는데 내가 살아야 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왜 삽니까? 내가 생각해도 내가 나쁜 놈인데. 내가 살아 있는 자체가 남에게 피해를 주는데. 내가 살아 있는 이상 계속 가족들에게 어려움을 주는데 내가 왜 살아야 돼요? 살 이유가 없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강도야! 세리야! 창녀야! 탕자야! 이미 나는 너와 예수 그리스도 피로 화목했다.”라고 증언하면서 찾아오시는 겁니다. 그 탕자 된 순간을 아버지는 얼마나 학수고대했는지 몰라요. 아버지께서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겁니다. “네가 뭐지요?” “제가 똥입니다.” “너 뭐지?” “제가 배설물입니다.” “너 뭐지?” “저 깡패입니다.” “너 뭐지?” “저는 죄인중에 괴수입니다.”

그게 남들 보기에는 독백이지만 본인에게는 자백이 되는 겁니다. “마리아야, 너 지금 뭐 했지?” “제가 임신했습니다.” “네가 결혼했나?” “안했습니다.” “처녀지.” “처녀입니다. 그런데 임신했습니다.” 완전히 마리아는 주님 때문에 망가져버렸어요. 내 인생이 날라 가버리고 주님의 화목, 주님이 준비한 그 화목이 들어 있는 구원이 그 마리아 속에 침투해서 배를 불룩하게 만들었어요. 처녀 마리아 딱지를 달고 배 불룩하게 해서 돌아다닙니다. 무슨 이런 우세가 다 있습니까? 그래놓고 이야기합니다. 결론적으로 요한 1서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화목이 여기 있으니, 라고 하면서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말라. 요한일서 4장 10절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그래놓고 마지막에 어떤 것에도 형벌이 없으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8-19)

‘어떤 경우, 너의 모든 것이 망가지는 경우라도 오히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가 오늘 본 로마서 본문에서는 ‘즐거워해라. 예수님의 죽으심을 보고 네가 즐거워해라. 그것이 하나님께서 너를 받아주는 화목제물이니라.’ 우리가 이 짧은 문장을 외우기도 쉬워요. 하지만 이 짧은 문장이 내 안에 임신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인생은 아예 처참하게 믹서기에 완전히 갈릴 정도로, 내 것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박살나는 현상이 말씀 때문에 우리 안에서 벌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이 안에 들어 있는 사람들, 성도들은 이 말씀이 말씀되게 드러내기 위해서 내 것을 전혀 남기지 않는, 믹서기로 갈아버리는 사태가 평생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놓고 이야기합니다. “즐겁지?” 또는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가 내 것이 있는 이상 우리는 두렵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두려워요. 하지만 내 것이 없고 주님께서 완전히 호작질하고 주님께서 완전히 장난질 치시는 인생이 내 인생이라면,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산다는 것을 보여주는 인생 같으면 더 이상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대해서 탓하지 마세요. 이 세상은 우리가 머물 곳이 아니기에, 우리가 그곳에 머물 것 같으면 탓을 하겠는데 이곳이 우리 곳이 아니잖아요. 우리가 잘했느니 못했느니 탓할 이유가 없어요. 우리는 다른 곳에 살아야 될 사람들이기에.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런 뜻입니다. 10절 다시 읽고 마치겠습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나밖에 몰랐을 때, 그런 뜻입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화목이라는 이름의 구원이 요소가 우리의 배를 불룩하게 임신하게 만들어버립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몸에 담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잘난 체 해도 막상 상황 터지면 세상이 그렇게 치사스러울 수가 없는, 정말 얼굴도 못들 정도로 돈에 굴복하고 입에 굴복하고 어쨌거나 밥 한 술 뜨기 위해서 갖은 아양과 아부와 온갖 모략을 서슴지 않는 거지같은 우리 모습과 면면을 주께서 끄집어내 주시니 오히려 감사합니다. 믿을 것은 더 이상 우리에게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날마다 깨우쳐 주셔서 믿을 것은 예수님이 화목제물, 주님의 죽으심으로 이미 구원을 얻은 상태인 것만 믿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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