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를 읽는다
2013년 4월 7일 본문 말씀: 로마서 5:12-14
(롬 5:12, 개역)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롬 5:13, 개역)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롬 5:14, 개역)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성경을 볼 때, 우리가 마치 주인공인양 여기면서 보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이 성경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의 아담은 죄가 죄로 드러내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선악과 따먹지 못하게 막는 그 어떤 대비책도 마련해두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까지 합니다.
물론 한 두 번 안 때먹으려고 시도하지만 그 시도를 했다고 해서 그만큼 유혹도 줄어 들었다고 생각하신다면 오산입니다. 오히려 더 커지게 되어 있습니다. 죄짓지 않기 위해 많이 참았지만 그 참았다는 것이 결코 죄를 안 짓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죄를 결국 지으면서도 그 지은 것에 대해서 변명거리로 등장하게 됩니다.
“나도 나름대로 애섰습니다. 그러니 봐 주세요”라는 식입니다. 그러나 참을 만큼 나중에 죄책감도 감소되는 효과를 나타냅니다. 실제로 죄 안 짓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라는 말이 참으로 기이한 말로 느껴질 것입니다. 보통 ‘들어오고’ 혹은 ‘나가고’ 하는 것은 움직이는 물체나 사물에게 해당되는 겁니다.
창세기 3장에 보게 되면 에덴동산에는 뭔가 새롭게 들락달락 하는 게 없습니다. 뱀은 처음부터 에덴동산에서 인간들과 함께 살고 있는 동물일 뿐입니다. 여섯째 날에 만들어진 짐승입니다. 따라서 에덴동산에서 새삼스럽게 들어온 것은 없이 나간 자가 있을 뿐입니다. 그 자는 바로 인간입니다. 그들은 낙원에서 추방당했습니다.
이들이 낙원에서 나감으로서 죄를 본격적으로 그 자체적으로 죄악된 세상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 추방된 나라의 특징은 바로 ‘생명나무’가 없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란 자신이 속해있는 그 자리에 동그라미를 치는 경향을 보입니다. 그리고 그 나름대로 ‘안’과 ‘밖’을 규정해버립니다.
하지만 인간들의 이러한 동그라미는 하나님으로부터 전혀 인정받지를 못합니다. 그들이 이미 낙원에서 추방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들 세계에서는 ‘죄가 들어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들이 ‘죄를 지었다’가 말합니다. 들어오고 나가고 라는 의식을 하지를 않습니다.
단지 본인에게 불리한 것은 죄요 본인에게 유리한 것을 죄 아닌 것으로 판정을 내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 중심의 사정을 ‘인식의 한계’라고 보십니다. 죄와 사망은 이미 인간세계에 있습니다. 하지만 단지 인간들은 주변에 누가 죽었을 때만 그 때에 ‘죽음’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세상을 보시지 않습니다. ‘생명나무 없음’이 곧 죽음으로 보십니다. 인간들 끼리 나가서 아무리 그럴사한 생명과 천국을 운운해도 그것마저 여전히 죄요 사망의 원인이 됩니다. 사람들은 이미 죽어있었습니다. 산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 세계에서는 사망이 비밀이 아니라 도리어 ‘살아 있다’가 비밀이 됩니다.
“나는 왜 죽어야 되는거야?”라고 의아해할 것이 아니라 “나는 왜 아직도 살아있는 거야 무엇 때문에 살아있어야 돼?”라는 것이 비밀입니다. 인간이 살아있는 이유는 죄를 짓기 위해서 살아있습니다. 안 죽기 위해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사람에게는 눈이 달려 있습니다.
눈이 있기에 인간들은 ‘보인다’고 말합니다. 그 보이는 것들의 집합을 사람들은 ‘현실’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이러한 한계성을 하나님께서는 죄라고 규정해놓았습니다. “본다고 하니 죄가 그저 있느니라”의 원칙을 고수하십니다.(요 9:41) 이것은 곧 인간의 인식론의 한계를 두고 말합니다.
죄가 이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죄를 위하여 본인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 못합니다. 하지만 죽음이 찾아왔을 때 그들은 자신이 그동안 살아온 이유가 뭔지도 모르고 살아왔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나중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그들은 또 무슨 변명들을 늘어놓을 겁니까?
저주받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인간은 자기 존재를 의식을 하면서 결코 주장할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인식과 존재의 한계를 예를 설명하면 이러합니다. 사랑하던 자와 헤어지면 참으로 슬퍼질 것이라고 헤어지는 전에 미리 생각합니다. 하지만 막상 헤어지면 그 슬픔은 자신이 예상 이상입니다.
“내가 아는 이별은 슬픔이라 생각했지. 하지만 너무나 슬퍼” 신승훈이라는 가수가 불렀던 ‘미소 속에 비친 그대’라는 노래의 한 대목입니다. 참된 슬픔을 아무리 경험하고 싶어도 참된 슬픔은 그 이상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누구를 사랑하는 것은 참으로 자신이 진정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본인도 몰라서 끊임없이 시도하는 중의 한 사례일 뿐입니다.
기껏 사랑한다고 해놓고서는 그 대상자를 절단되어버립니다.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은 참으로 내가 원했던 그 사랑이 아니었어. 이 사실을 알게된 것은 당신을 사랑할 그 때부터야”라고 변명을 늘어놓게 되어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지상에서 아무리 경험해도 전부를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어떤 것이 자신의 본심인가요? 이미 인간에게는 사망의 지배가 주어졌습니다. 이 벗어날 수 없는 사망은, 사망에서도 벗어난 분을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따라서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전부 죄가 되어야 마땅합니다.
하나님이 갖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님의 완수하신 십자가에서만 나옵니다. 그 이유는, 세상 모든 것은 주를 위하여 생겨나고 창조되어여 하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 1:15-17에 보면,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평생은 죄만을 드러내는데 이 현상은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순종과 비교하십니다.
히브리서 5:7-9에 보면,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순종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인간들은 자기 의에만 순정하지만 예수님은 말씀에만 순종합니다. 따라서 오늘날 성도에게는 이 십자가의 사망의 능력을 매일같이 출몰하여 성도로 하여금 자기 의로 순종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예상 밖의 기쁨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새롭게 조성되는 우리 자신의 의를 십자가로 늘 부정하게 하옵소서. 그래서 한 시라도 우리가 주인공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28강-롬5장 12-14(죄를 읽는다)13040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5장 12절에서 14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245페이지입니다.
로마서 5:12-14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세상의 모든 글들은 사람을 위해서 다른 것들이 어떻게 있느냐, 그렇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인간을 위해서 세상은 무엇을 제공할 것인가, 그렇게 되어 있는데 성경말씀을 보게 되면 여기서는 사람이 주인공이 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을 위해서 뭐가 있는가가 아니라 사람은 무엇을 위해서 있느냐, 해서 사람보다 더 귀한 것이 따로 있고 사람은 그것을 보여주는 목적으로 이 땅에 만들어졌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내가 내 중심으로 평소에 살아가는 식으로 성경을 보게 되면 백독 천 독을 해도 성경 속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이 되는 겁니다.
자기가 목적이 된 이상 성경을 아무리 읽는다 해도 그것은 다 엉터리입니다. 성경 자체가 위치가 뒤바꿔져야 돼요. 나를 위해서 세상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하지만 우리의 몸은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몸으로 살아가고 있잖아요. 이걸 바꾸어놓는 작업을 성령께서 성경을 통해서 하는 겁니다. 세상이 사람 중심이 아니라면 뭐 중심인가? 12절에 보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사람은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게 사람이라는 거예요.
사람이 죄보다 더 무시당해요. 사람은 안 중요해요. 죄가 무엇이냐가 더 중요한 겁니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요. 내가 죄를 지었으니까 죄만 털어내면 나는 정상적인 사람이 된다, 이렇게 항상 모든 것을 내 위주로 이해를 하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죄 위주로 이야기합니다. 죄가 이 세상에 어떻게 생겨났지? 아, 사람을 통해서 생겼구나. 그러면 사람은 왜 있지?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오기 위해서 사람이 있는 겁니다. 저는 2천년 동안 나온 신학 책 어떤 것을 봐도 방금 이야기한 것 같이 이야기하는 책을 한 권도 본적이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말은 전부 다 성경을 그동안 거꾸로 보고 있었던 거예요. 죄라는 것은 사람이 있어야 죄를 짓는다고 생각하는데 죄가 먼저 있고 사람은 그 죄를 보여주기 위해서 죄와 결합하게 되어 있어요. 무엇 때문에? 12절에 보면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와 인간의 만남, 죄 + 인간 = 사망, 사망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죄도 필요하고 사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죄와 사람이 만나라, 그래서 사망이 무엇인가를 한 번 보자, 그렇게 된 거예요.
사망이라 하는 것은 인간의 숨이 끊어지는 것도 포함하지만 저주, 심판, 지옥을 이야기하는 거지요. 이런 이야기가 어려운데요.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뭐가 들어오고 나오고 하는 이야기냐, 내가 있는 곳에 동그라미를 쳐보게 되면 들어오고 나오는 것은 뭐냐, 내가 쳐놓은 동그라미를 가지고 기준 하는 거예요. 동그라미 밖에 나가면 이것은 나간 것이고 동그라미 안에 들어오면 안에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이 말은 전혀 어렵지가 않지요? 그런데 죄가 들어왔다는 말, 죄가 들어오고 나오고 하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는 그 자체는 내가 있는 곳에 내가 동그라미를 칠 수 없다는 뜻이에요.
말이 어려워서 죄송합니다. 우리가 어느 곳에서 쫓겨 나갔다면 쫓겨난 주제에 자기 있는 자리에서 동그라미를 쳐봐야 하나님이 그것을 인정을 안 해준다니까요. 우리가 영원부터 이 자리에 있으면 들어오고 나가고 이것이 내 중심으로 하는 것이 맞는데 우리 자체가 덜렁 들려서 다른 곳에 옮겨놓았는데 다른 곳에 옮겨놓고 난 뒤에 ‘이것은 내 땅’ 하고 안에 들어앉아서 동그라미 밖으로 나갔다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한다는 그 이야기는 일방적인 우리 생각이지 하나님은 그 일방적인 생각에 동의를 안 해줍니다.
쫓겨난 주제가 동그라미 친다고 그것을 안과 밖으로서 인정해 주겠습니까? 안 해주지요. 죄가 들어오고 난 뒤에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거예요. 쫓겨난 주제에 동그라미 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어디를 동그라미로 봐야 되느냐 하면 에덴동산, 낙원에 동그라미를 쳐야 되는데 우리를 쫓겨난 주제에 그것도 모르고 자기가 동그라미 쳐서 “하나님이 이 안에 들어오세요. 나가시면 안 됩니다.” 혹은 “나가세요.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누구 맘대로요? 지난주일 오후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4월 26일에 신천지에서 날 불러서 토론을 하는데 사전에 ‘네 생물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한다고 알려주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그 기자한테 이야기했거든요. ‘네 생물이 무엇이냐’를 질문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질문이 잘못되었다고 했어요. 그거 알아서 뭐하는데요? 성경 요한계시록에 네 생물이 있더라. 있잖아요. 이것이 무엇이냐? 그것을 왜 묻는데요? 그걸 물어서 뭐할 것이며 그것을 알아서 뭐할 건데요? 그러면 그 쪽에서 “그것을 알아서 나 구원받게요.” 이렇게 나올 거예요, 분명히. “그걸 알아야 구원받지요.”하는 거예요. 본인이 구원받을 사람인지를 스스로 점검해 본적이 있어요? 내가 과연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점검해 본적이 있습니까? 없잖아요.
이미 우리는 쫓겨난 것이면 질문을 이렇게 해야 돼요. 우리가 이렇게 궁금해 하는 것 때문에 쫓겨난 것 맞지요, 이렇게 나와야 된다니까요. 우리가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라는 질문을 해대는 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마땅히 쫓겨나서 저주받아야 합당합니다, 이런 고백이 되어야 돼요. 주님께서 쫓겨나게 했는데 쫓겨난 주제에 어딜 감히 구원이란 말을 언급합니까? 여러분이 다 아는 이야기지만 다시 한 번 제가 걱정이 되어서 결론을 내립니다. 여러분, 구원은 예수님이 원하는 자를 본인이 건지십시다.
원하는 주체가 예수님이지 거기에 우리가 끼어들면 안돼요. 쫓겨났는데 쫓겨난 그 자리에서 다시 에덴동산에 들이밀겠다는 것은 쫓아낸 주님의 취지에 대한 도전입니다. 마귀적이에요. 쉽게 말해서 우리가 구원받겠다는 그 마음 자체가 악마적이라는 말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이야기해요. “세상 모든 일에 네가 주인공이 될 수 없느니라.” 그런데 교회를 보면 사람들을 구원 못해서 환장을 했어요. 심지어 봉투에 돈까지 넣어서 노인들 구원하려고 해요. 구원 못해서 환장을 했어요.
봉투에 돈 넣어서 노는 노인들 구원할 것 같으면 예수님께서 왜 그 방법을 사용 안했겠습니까? “우리 교회야, 봉투에 십만 원씩 넣어서 사람들 구원해라.” 사도행전 29장 36절, 그런 것이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사도행전 29장 자체가 없어요. 사람을 구원 못해서 환장을 했어요. 사람을 구원 못해서 환장했다는 이 말은 뭐냐, 하나님 생각은 전혀 모르고 인간들 자기생각 밖에 못해요. 자기생각에 억지를 부리고 무리수를 둬서 하나님의 뜻을 인간 뜻에 강제로 집어넣는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을 추방했다는 그 취지를 완전히 짓밟고 모독하는 거예요. “흥! 하나님이 우리를 쫓아내도 우리는 들어가고 말리라.” 이것은 기어이 먹고 말겠다는 치토스 사고방식밖에 더 됩니까? 여러분, 성경을 잘 보세요.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심어놓고 따먹지 말라고 했지요. 따먹지 말라고 해놓고 거기에 대한 대비책이 전혀 없습니다. 여러분이 그 점에 대해서 감안한 적이 있습니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했다 그 말이지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고 진짜 선악과를 안 따먹게 할 것 같았으면 행여 인간이 따먹을까 싶었 사전에 철조망을 쳐놓든지 해야 되지요. 철조망 쳐놓고 접근하면 발포한다는 미군부대도 있잖아요. 안 그러면 지뢰를 깔아놓든지 해야 되는데 따먹지 말라고 해놓고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탐스럽게 해서 사람을 환장을 시키네.
첫날은 그런대로 참았다고 해도 둘째 날 되면 더 따먹고 싶지요. 셋째 날 되면 더 따먹고 싶지요. 사람이 뭔가 내가 말씀대로 지키자 하는 것을 마음에 새기게 되면 그만큼 내가 수고하고 애썼잖아, 이것이 점점 누적이 되면 ‘열 번 참았으니 이정도면 따먹어도 되겠지. 열 번이나 참았는데.’라는 생각이 든다니까요. 우리가 주의 말씀을 지키면 지킬수록 점점 더 범죄 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돼요. 따먹지 말라고 해놓고 전혀 대비책이 없어요. 지금 인간들은 에덴동산에 무엇이 들락날락 했는지 몰라요.
죄가 들어왔다는 이것은 로마서 5장의 이야기고 그 전에 뭐가 나가고 들어왔는지 인간들은 몰라요. 에덴동산에서 나간 것이 있는데 그게 뭐냐, 인간이 나갔어요.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잖아요. 그렇다면 에덴동산에서 뭐가 나갔는가, 인간이 나갔고 인간 속에는 선악과가 인간에게 심겨져 있습니다. 동산 중앙에 선악과와 생명나무가 함께 있었던 나무인데 이것이 영원히 벌어졌어요. 요한계시록 22장에 하늘나라가 나오는데 거기에는 생명나무만 있지 선악과는 없습니다. 이미 벌어졌다 그 말이지요. 이미 벌어져 있으니까 이미 생명나무 갈라진, 이쪽 에덴동산 그 낙원에 살지 못하고 추방된 그쪽을 죄의 세상으로 규정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 거예요. 죄라 그 말이지요. 거기에는 사망이 있고.
인간세상에서 사망이 있어야 될 이유는 이쪽에는 사망만 있고 생명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두기 위함입니다. 그럼 영생은, 생명은 어디 있는데? 어디 있기는요, 자기가 나온 그 쪽에 있지요. 13절에 보면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이 말이 나오거든요. 전에 제가 그런 예를 들었습니다. 처음부터 병균이 있었는데 병균이 있었다는 것이 언제 감지가 되느냐하면 누군가 감염이 되었을 때에 ‘아, 우리 방에 바이러스가 있었구나.’ 하는 것을 알 듯이 먼저 있던 죄의 존재는 우리가 몰랐어요. 그러나 율법이 오고 나서부터 우리가 죄라고 감지되는 겁니다.
이것을 가지고 인식론, 인식한다, 깨닫는다 그런 뜻인데 우리는 그저 깨닫는 순간에만 존재를 느낄 수밖에 없는데 사실 존재는 우리가 깨닫기 이전에 먼저 존재하는 것이 있었어요. 우리가 깨닫는 것은 깨달을 때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요 이미 그전에 뭔가 일이 있었다는 것을 소급해서 우리가 아는 겁니다. 구원파라는 것이 있어요. 박옥수라는 사람의 침례교라고 해서 구원파라는 것이 있는데 구원파가 사람들한테 묻는 것이 뭐냐 하면, “구원받았습니까? 받았으면 언제 구원받았습니까?” “너나 잘하세요, 너나! 왜 이러십니까, 지금!”
구원 못 받아서 환장한 것 같아요. 구원 받기 전에는 구원받았습니까, 언제 구원받았습니까, 가 문제가 되지만 구원을 받게 되면, 진짜 성령 받게 되면 내가 구원을 입에 담았다는 그것도 죄라는 것을 깨닫게 돼요. 이미 주께서 창세전에 구원한 것이고 우리가 인식하는 것은 성령이 올 때, 믿음이 선물로 올 때 그때 인식하는 것이지 새삼스럽게 “구원받았습니까, 나는 언제 구원받았습니까?”라는 소리를 한다는 것은 아직까지 구원을 못 받았다는 뜻이에요. 구원을 못 받았으니까 인식론 가지고 존재론을 재조립하는 거예요.
사망도 마찬가지에요. 인간은 항상 인식론적으로 사망을 알기 때문에 자기는 멀쩡히 살아있는 채로 누가 죽었다 하면 ‘죽었구나.’라고 아는데 그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우리가 쫓겨나고 난 뒤에 내가 동그라미를 쳤기 때문에 동그라미 친 안에서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엉터리 주장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이 죽으면 아깝다, 슬프다, 나쁜 사람이 죽으면 좋다고 하잖아요. 너도 마찬가지라니까요. 어떤 사람이 이런 노래를 불렀어요. “내가 아는 이별은 슬픔이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너무나 슬퍼.” 미소 속에 바친 그대, 신승훈.
여기 보면 누가 헤어졌거든요. 그래서 슬프다고 생각하거든요. 헤어지기 전에 슬픔을 생각했는데 막상 헤어지고 보니까 슬퍼도 너무 슬퍼요. 말이 안 나올 정도로 슬퍼요.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슬프다, 기쁘다, 기쁘다, 슬프다, 이것은 그 순간에만 자기가 일방적으로 체득한 감각에 불과한 겁니다. 진짜 슬프거나 진짜 기쁘면 우리 언어로 표현이 안 될 정도입니다. 상상을 못해요. 그래서 인간은 도대체 나의 본심이 뭔지를 몰라요. 왜, 날마다 기쁨과 슬픔이 뒤바뀌니까 어느 것을 잡아서 나라고 할 수가 없어요.
이게 인식론에 빠져있는, 자기 주위에 동그라미를 쳐놓고 거기에 빠져있는 인간의 한계입니다. 성령 받고 성경을 알기 전에는. 천국이 어쩌고저쩌고 다 자기 위주로 생각하는 거예요. 전부 다 거짓말이고 다 오류고 다 엉터리입니다. 자기한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될 텐데. 인간은 자기한테 문제가 없다고 하고 성경을 보는 거예요. 그러니 맞지를 않지요. 제가 울산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사람이 눈이 있다는 것은 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눈이 달린 거예요. 눈 뜨니 보인다고 하잖아요. 그 보인다 하는 것이 진짜 볼 것을 못 보게 만들기 위해서, 기껏 엉터리로 보면서도 그것을 본다는 것의 최종마감으로 하기 위해서 눈을 달아둔 거예요.
그래놓고 예수님이 이야기합니다. ‘네가 본다고 하니 소경이고 보지 못하면 네가 본다.’고 하잖아요. 이런 이야기들이 이미 인간이 선악과 따먹고 전부 다 자기중심이기에 어느 것 하나 맞는 것이 하나도 없어요. 우리가 산다는 것이, 모든 것이 사망을 위해서 있기에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정상이에요. 그러면 죽는다는 것은 비밀이 아니고 뭐가 비밀이냐 하면 산다는 것이 비밀이에요. ‘죽어야 되는데 왜 살지? 우리가 사는 이유가 뭐지?’ 이렇게 되어야 된다니까요. ‘우리가 왜 죽지?’ 질문을 그렇게 하면 안돼요.
우리가 구원을 받으면, “주님이여” “왜?” “저를 왜 천국으로 보냅니까?” 우리는 이렇게 나와야 돼요. “역시 천국은 내가 노력한 대로 가는구나.” 이렇게 나오면 안 된다니까요. “왜 천국 보내지요?” 어이없음, 멘 붕, 이것은 말이 안 돼. 우리가 왜 천국에 가지요? 우리는 눈만 뜨면 죄를 짓는데. 왜 죄 없는 사람만 가는 그 천국에 우리가 왜 가야 되지요? 죄라는 것은 이미 추방된 그 상황, 쫓겨났던 그 쪽을 잊도록 만드는 겁니다. “잊어라. 이제는 우리가 노력하면 돼.”라는 식으로 저쪽과의 관계성을 끊는 것이 죄입니다.
“생명나무를 그만 잊어라. 그것은 옛날 전설에 나오는 나무야. 그것은 동화책에나 나오는 거야. 그냥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야. 잊어라.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 이것이 중요한 거야.”라고 나오는 그것이 바로 죄지요. 네 자리에 동그라미를 치고 모든 것을 네 좋을 대로 하면 된다는 거예요. 사랑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들이 누구를 사랑한다 할 때에 세상에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진짜 내가 사랑하는 것이 뭔지를 모르기 때문에 한 번 사랑해 보는 거예요. 그래서 진정 누군가를 사랑할 때 까지 그동안 내가 사랑했던 것을 다 절단내버립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사랑하는 것이 그 사람 속에 있을까 싶어서 그 사람을 사랑해 보는 거예요. 사랑해 보지요. 처음엔 사랑하는 것 같지요. 그런데 몇 개월, 몇 년 사귀다 보면 “이게 내 마지막 사랑은 아니야.” 그렇게 나온다니까요. 그러니까 “비켜, 비켜, 비켜! 꼴도 보기 싫어. 내가 원하는 사랑을 가로막지 마.” 하고 사랑을 절단내버리는 거예요. 100일 되어서 사탕 받고 나서 헤어지고, 그런 것 있잖아요. 진정 사랑이 아니다. 그러면 내가 사랑하는 진정한 사랑은 뭡니까? 몰라요. 모르니까 그냥 사랑해 보는 거예요.
사람은 돈으로 못살고 사랑으로 사는데. 돈보다 사랑이 더 중요해요. 그것을 어머니와 같이 있으면서 느끼는데 집 좋다고 하면서도 외로워서 못살겠다고 하거든요. 이사 오자마자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경산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그 다음날 경산에 가서는 이쪽에 자기 집이 있다는 기억이 끊어졌습니다. 경산 집은 사랑의 대상이었는데 이쪽 집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었어요. 밤이 어두운데 돌아올 줄을 모르는 거예요. 아내는 밖에서 추운데서 네 시간동안 벌벌 떨면서 혹시 오는가, 했는데 소식이 없어요.
그 집 헐고 견적 내려고 인부들이 있는데 어떤 할머니가 와서 “이게 내 집인데 왜 이카노?” 한 거예요. 보니 가구가 하나도 없거든요. 합리적인 해석을 내립니다. “도둑놈이 다 가져갔다.”고 한 거예요. 도둑놈이 다 가져갔다는 합리적인 해석. 그때 저는 서울에 있었고 강의 중이었는데 이 추운 날, 어머니를 생각하니 강의가 힘들었어요. 강의 중에 “여러분, 걱정하지 마세요.” 하면서 속으로는 걱정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범사에 감사하기 바랍니다.” 그런 소리 하면서도 감사가 안 나올 수 있다는 말이지요.
지금 우리 어머니 길 잃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중요한 것이 남아 있어요. 경산시 경찰 총동원해서 어머니를 찾는 거지요. 어머니는 자기 집에 가야 하는데 자기 집은 남이 점령하고 있으니까 갈 집은 없고 네 시간동안 뱅뱅 도는 거예요. 경찰서에서 연락이 와서 떨다가 차를 타고 거기에 갔어요. 누가 물었는지 물었어요. “어머니, 왜 여기에 와 계십니까?” 그 때 답변이 제가 정말 예상도 못한 기발한 답변이 나왔어요. 어머니가 왜 여기에 왔습니까, 라고 묻는 것이 뭐냐면 집은 대구에 있는데 왜 경산에 왔느냐, 하는 질문인데 어머니가 뭐라고 하느냐?
왜 내가 이 파출소에 와 있느냐, 라고 묻는 것으로 해석해서 경찰관이 나를 여기에 데리고 왔다는 거예요. 사람이 생각하는 것이요 다 치매 걸렸어요. “왜 당신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까?” 하고 묻는데 “내가 이곳에 태어났기에 이곳에 산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할 일은 이 아파트에서 살면서 여기서 애를 키우고 살면 그만이라는 겁니다. 누구 ㅇ이야기만이 아니라 우리는 전부다 길 잃어버린 노인네에요. 성령님이 아니면 누구도 찾아낼 수가 없어요. “여기서 이사를 갔으니 여기에는 집이 없고 우리의 본향은 따로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말씀,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히 11:13-16)
그런데 길은 모르지요, 날은 어둡지요, 아니 그쪽에 내 집이 있는 줄도 모른다니까요. 눈, 눈이 달린 것이 문제라, 이 눈을 뽑든지 해야지. 눈이 달려 있으니 자기 보는 것이 전부이고 그것이 현실이고 세상 전부입니다. 남들 돈 버니까 그것 보고 따라가면 되는 거예요. 삼성, 현대, 젊은 사람들은 그것이 전부에요. 나이 많은 사람도 마찬가지고, 애들도 마찬가지고 어른도 마찬가지고. 그러면서도 인간에게는 뭔가 미련이나 허점이 남아 있어요. 분명히 세상이 좋은데 좋으면서도 뭐냐, ‘글쎄? 이것이 내가 최종적으로 사랑한 것은 아니야.’
아무나 하나 붙드는 거예요. “여보게,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이 뭐지?” 그 사람이 “왜 그걸 나보고 물어봅니까?” “물어봐야 혹시 아이디어라도 얻을까 싶어서.” 인간은 태어나서 평생 계속 친구를 찾고 어릴 때는 부모한테 묻고 청소년이 되면 친구한테 묻고 크면 애인한테 묻고 남편한테 묻고 아내에게 묻고 멘토한데 묻고, 이렇게 물어가면서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이 뭐고 내가 사랑하는 것이 뭡니까, 대체 그것이 뭔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쪽에서 “내가 당신이 아닌데, 나도 나를 모르는데 당신 것을 어떻게 내가 알아?” 이렇게 나온다 이 말이지요.
그게 뭐냐, 알려드릴게요. 사망입니다. 인간은 사망을 원합니다. 왜냐, 인간은 사망을 위해서 존재하기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죽음이라는 출입구를 통과하지 아니하면 영생은 없게 되어 있습니다. 왜, 생명나무 때문에. 생명나무가 없는 곳에서 우리는 치매노인처럼 방황하고 있어요. 생명나무쪽으로 가는 길은 죽음으로 막혀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주님의 심판을 통과하지 아니하면 생명나무는 어림도 없습니다. 영생은 어림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자기 쪽을 기준점으로 해서 지금은 살아가면서 이렇게 고생했지만 눈 야무지게 감고 죽으면 좋은 나라가 오겠지, 하는데 그것이 사망입니까?
그게 저주고 심판이에요? 아니에요. 사람에게 죄짓는 값이 그저 목숨 끊어지는 것이라면 사람이 죽을 때는 죄지은 값을 다 치른 셈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피 흘릴 이유도 없어요. “너희들이 죽으면 죽는 동시에 죄도 다 해결되기에 죽거들랑 천국 보내주마.” 이야기가 그렇게 되어야 되는 거예요. 어느 인간도 자기 목숨 바친다고 자기 죄가 속죄되는 그런 인간은 없습니다. 왜냐, 인간은 인간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죄 때문에 있는 것이고 죄도 인간 때문이 아니라 다른 목적이 있어요.
하나님의 의를 보여주기 위한 용도로서 죄가 있는 겁니다. 죄가 최종 지점이 아니에요. 이 사실을 여러분에게만 알려드릴게요. 죄가 최종지점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죄가 있는 겁니다. 로마서 1장에서 보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는데 하나님의 의는 뭐냐, 예수님께서 다 이루신 일이에요. 그 일은 십자가 죽으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 되게 하기 위해서 죄가 이 땅에서 활용되어야 되는 거예요. 모든 것은 예수님을 위해서, 악한 천사, 악마죠, 악한 천사마저도 피조물인데 그 피조물은 예수님을 위하여 있는 겁니다.
골로새서 1장 16절 말씀,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은 예수님을 주 되게 하기 위해서 있는 거예요. 심지어 죄마저, 악마마저 그렇게 있고 그 죄를 위해서 인간이 또 있고,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러면 생명나무가 의냐? 생명나무가 의가 아니에요. 생명나무가 의라면 이미 생명나무 가는 길이 차단되었기에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의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생명나무 가는 길을 차단했다는 이 하나님의 취지는 절대로 변경되면 안돼요. 이미 차단되었으면 차단된 대로 끝까지 가는 거예요. 그 차단이 뚫릴 리가 없어요. 그래서 이 비유를 어떻게 하느냐, 이렇게 합니다. 물렁물렁한 고무판을 가지고,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했으니까 우리 인간 쪽 세상이고 죄가 활개 치는 곳이고 이쪽은 요한계시록 22장의 생명나무가 있는 천국인데 우리는 건너갈 수가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이것이 풍선처럼 부풀릴 수 있는 종류의 고무판이라면 생명나무 쪽에서 부풀려요.
그러면 그 경계선이 유지된 채 이것이 부풀어집니다. 이게 뚫려지는 것이 아니고 이게 늘어나요. 늘어나면서 이쪽을 함몰시키고 포식해 버리면 우리는 생명나무 되신 주님 안에, 예수 안에, 십자가 안에 담기면서 우리는 생명나무를 먹을 수가 있어요. 이게 뭐냐, 우리 주체의 작업으로는 생명나무를 못 따먹고 우리가 뭐로 바뀌어야 되느냐하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어야 돼요. 그런데 인간의 주체, 인간의 자아라 하는 것은 자기 몸이 있는 한 그것을 포기를 못하거든요. 예수 믿는다 하면 예수 믿는 나를 또 믿게 되고.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지금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하면 생명나무가 하나님의 의가 아닙니다. 물론 선악과도 하나님의 의가 아니고요. 그 생명나무와 선악과의 경계선에서 하나님의 의가 그 틈새에서 나타나요. 예수님이 행한 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예수님의 행하신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존재하는 겁니다. 악마고 인간이고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14절에 나옵니다.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인간이라 하는 것을 하나로 만들어버려요. 인간을 하나로 만들어서 예수님이 진짜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인간인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참된 인간은 이 땅에서 죄 속에서 어떤 경로를 밟을 때 참 된 인간으로, 참된 아들로 인정받느냐를 보여주는 발판으로서 아담은 죄를 지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죄가 왕 노릇한다고 할 때 왕이라는 말은 지배권인데 누구도 왕에게 반란을 일으키면 안돼요. 그러면 왕이 아니지요. 어느 누구도 왕의 지배권 속에서 빠져나가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죄가 왕 노릇하는데 이속에서 빠져나온 분이 있다면 그 분이 바로 궁금했던, 그리웠던, 기다렸던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거예요.
생각을 이렇게 해야 돼요. ‘나는 하나님의 의만 있으면 구원받겠다.’ 이렇게 나 중심으로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면 그 하나님의 의의 파생되는 효과나 능력들이 자기 백성들을 건져내는 겁니다. 두 가지 성경 구절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는 요한복음 5장에 나옵니다. 21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해서 이미 살리고 죽이는 권한이 예수님에게 넘어왔어요. 22절에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의가 아니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의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고 예수님 교회가 하나님교회입니다. 예수님 중심이에요, 하나님중심이 아니고.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재벌 2세, 자꾸 2인자라는 인식이 강해요. 하나님조차 그렇게 생각 안하는데 우리가 그렇게 생각해요.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고 이젠 예수님 제켜버리고 하나님한테 바로 가자, 자꾸 하나님을 최후 일인자로 생각핳는 겁니다. 하나님은 갑이고 예수님을 을로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자체가 그렇게 생각을 안 해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요 14:9)다 이 말이지요.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우리가 조작한 겁니다. 우리가 지어낸 거예요. 정작 우리가 예수님 십자가 앞에 서게 되면 내가 구원 받겠다 하는 것도 죄의 일부라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 구원받으라고 주께서 십자가 지신 것이 아니고 십자가 지신 분인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죄 지을 수밖에 없게 하셨구나, 그게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모든 것을 지금 바꿔야 돼요. 2천년 기독교 역사를 다 바꿔야 됩니다. ‘나 구원 받고 싶은데. 죽어서 좋은데 가고 싶은데. 뭐하면 되지? 옳지 예수님이 있구나. 예수 십자가 피 믿고 천당 가야지.’ 그것은 그 자체가 죄라니까요. 그것은 선악과 따먹은 티를 팍팍 내고 있는 거예요. 그리 되면 예수님은 한 번 일회적으로 쓰고 갖다 버리면 그만이에요. “십자가, 마이 묵으따, 그마해라.” 그렇게 나옵니다. 우리가 계속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계속 하나님의 의가 우리의 주체를 바꾸기 위해서 계속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우리는 주체인데 무슨 주체인가, 죄를 짓는 주체고 주님께서는 그 죄 짓는 것을 용서하시는 주체고요. 어제 내가 예수를 믿었다 합시다. 믿었다 할 때 오늘이 되면 우리가 뭘 기억하느냐하면, 어제 내가 예수 믿었다는 것을 기억해요. 하나님의 심판은 어제만 출몰하는 것이 아니고 오늘도 출몰해요. 사망은 모든 구석에서 다 출몰합니다. 다 출몰해서 그런 고백조차도 저주 받고 사망 받아 마땅한 고백인 것을 깨닫게 하시는 능력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거예요. 히브리서 5장 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예수님도 이미 존재론적으로 알아요. 자기가 죽고 난 뒤에 부활한다는 것을 알아요. 하지만 막상 십자가에 갈 때는 뭐라 하느냐하면 ‘주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 달라.’고 했습니다. 이게 뭐냐, 반드시 그대로 되겠지만 인식론적으로 날마다 주님의 그 고난에 참여 돼야 돼요. 예수님마저도 아버지가 주시는 그 아픔과 죄에서 순종을 해야 돼요. 순종 한다는 말은 내가 이미 갖고 있는 것에 순종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만 순종하는 버릇이 있거든요. ‘내가 저 선악과를 따먹고 싶다. 내가 따먹고 싶은데 누가 뭐라고 해? 내가 따먹고 싶은데 따먹으면 그만이지.’ 이렇게 자기한테 늘 순종하고 있어요.
자기한테 늘 순종하는 그것에 뭐가 오는가, 율법이 오고 말씀이 오고 동시에 죄가 오고 사망이 와 버리면 ‘아, 이것이 바로 우리가 죽어 마땅한 이유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에게 사망과 죄와 율법을 보내신 그 배후의 능력자와 접선이 돼요.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우리로 하여금 죄 짓게 했구나, 하는 그 관계의 노선에 우리가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죽음은 모든 영역에서 출몰합니다. 제가 강의 중에 그런 예를 들었는데 카이스트 교수가 획기적인 기술을 개발했다 합시다. 팔에 차는 컴퓨터든 뭐든 돈 되는 기술을 선점했다 합시다.
그런데 그 사람이 어느 교회 장립집사라 합시다. 그래서 그 사람에 관해서 신문에 기사가 막 실렸어요. 한국의 카이스트 교수가 이 기술을 먼저 개발해서 앞으로 10조원의 경제효과가 있다고 아주 대문짝만하게 기사가 실렸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교수가 그날 예배당 참석해서 무슨 은혜를 받았는지 십자가를 알았다고 합시다. 그러면 뭐가 죄일까요? 바로 자기가 기술을 발견했다는 그 사실이 죄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죄 되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 그 기술을 개발하게 하신 거예요. 그걸 개발할 때 그것이 나의 의라고 여겼던 그것, 자기가 자기에게 순종했던 그 순종이 저주받아 마땅한 나의 본성에서 튀어나온 본성의 산물인 것을 깨닫는 순간이 곧 하나님의 의 곧 십자가로 용서받는 그것을 동시에 볼 수 있는 눈이 열린 거예요.
자기 눈으로는 기술을 개발 했지만 그것이 죄인 줄 아는 순간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거예요. “주여, 이 기술 개발했다고 얼마나 까불고 교만했습니까? 하지만 주께서 나를 죄인되게 하기 위해서 이 발명품을 주셨습니다. 제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내가 이 기술 개발하고 발명하기 전에 이것을 해서 기뻐하겠다는 이 기쁨이 전부인줄 알았는데 그것이 죄로 발각되는 기쁨이 이렇게 놀라울 줄이야!” 다시 한 번 가사 불러볼게요. “내가 아는 이별은 슬픔이라 생각했지 하지만 너무나 슬퍼.”
내가 알고 있는 슬픔이나 기쁨이라 하는 것은 아직 진짜 우리 존재를 몰라서 그래요. 그런데 그 존재를 우리가 한꺼번에 다 가질 수 없습니다. 평생 살아가면서 계속 조금씩 조금씩 알아 갑니다. 딸이 시집가서 애 낳을 때 ‘아, 기쁘다.’ 하잖아요. 손자가 “할아버지! 놀라가!”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하지만 손자가 나갈 때 더 기뻐. 손자가 집에 와서 집안 개판 다 만들어놓았어요. 손자 집에 올 때 기쁘지만 갈 때가 더 기쁘잖아요. 손자가 처음 올 때는 인식론적으로 인식을 잘 못한 거예요.
아직도 그 할아버지는 진정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 내가 사랑하는 것을 아직도 몰라요. 우리는 평생가도 모릅니다. 하지만 주께서 계속 가다 보면 성경 말씀대로 하나님의 의, 십자가, 어린양의 죽음, 이것은 우리가 예상도 못한 큰 기쁨이라는 것을 나중에 천국 가서 알아서 면류관도 반납하면서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고 마음껏 드리는 것, 이것이 인간존재의 이유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에서 우리가 나그네라 하지만 실제생활에서는 나그네가 아니고 죽치고 여기서 성공하려고 아등바등 애쓰고 있는 형편에 있습니다. 인식론적으로 그저 죄속에 뒹굴고 있지만 고맙게도 십자가의 능력이 올 때마다 다른 기쁨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잘했다, 못했다, 구원되었다, 구원 안 되었다, 그 자체가 아무 의미 없는 것을, 이미 창세전부터 십자가 안에서 구원 받은 것을 우리는 증거 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